[비하인드 스토리] 맹자 편-제4회: 은퇴, 그리고 복귀
(사진설명: 어린 맹자를 가르치는 맹자의 모친)
제4회 은퇴, 그리고 복귀
맹자의 모친이 유명을 달리했다. 3년 간 모친의 묘소를 지키고 제(齊)나라로 돌아온 맹자는 그때서야 제왕(齊王)이 연(燕)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기회를 타서 연나라에 쳐들어가 보위를 양보한 연나라 쾌왕(噲王)과 보위를 찬탈한 상국의 아들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제나라가 남의 집에 불 난 틈을 타서 살인을 일삼는 것을 보고 다른 제후국들은 모두 제나라를 최대의 적으로 여겼다.
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연나라는 제나라와 마찬가지로 만승지국(萬乘之國)이지만 과인은 50일만에 연나라를 격파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늘이 과인을 돕고 있음을 말하니 우리가 연나라를 차지하지 않으면 하늘의 벌을 받지 않겠습니까?”
제왕의 말에 맹자가 대답했다.
“연나라를 차지해서 연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면 차지하고, 연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차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나라 군대가 이번에 연나라를 공격했는데 연나라 사람들이 저항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성문을 열고 신이 나서 제나라 군대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어렵고 힘든 삶에서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연나라를 차지한 후 그들의 부모를 죽이고 그들의 형제를 잡아가며 그들의 종묘를 부시고 그들의 국보를 빼앗아 그들의 삶을 더 어렵고 더 힘들게 만들면 그들은 다른 출로를 찾을 것입니다. 각 제후국들은 모두 제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금 제나라의 국토는 많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진 정치를 행하지 않으면 아마 각 제후국들은 연합해서 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속히 명령을 내리시어 연나라의 포로를 연나라로 돌려보내고 연나라의 보물을 제나라로 가져오지 말며 연나라 사람들을 도와 새 연왕을 선택하게 한 후 연나라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각 제후국들의 제나라 토벌을 저지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왕이 웃었다.
“노장은 직하학궁의 탁상공론에 더 어울리겠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인정(仁政) 주장이 전쟁의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에서는 너무 창백하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선왕(齊宣王)이 자신을 예현하사(禮賢下士)의 간판으로만 여기고 자신의 주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자 맹자는 심신의 피곤을 느꼈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생을 가르치고 저서를 쓸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순어곤(淳於髡)은 맹자가 벼슬을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변론하러 찾아와 맹자를 만나자 인사치레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통상 명성과 업적을 중히 여기는 것은 천하의 백성을 위한 것이고 명성과 업적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은 자신의 결백을 위해서입니다. 선생은 제나라의 대부이신데 위로 군주를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구하지 못한데다 벼슬까지 그만 둔다고 하니 어진 군자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까?”
맹자도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천하가 태평할 때 벼슬을 하고 난세에 벼슬을 그만 둔 사람은 백이(伯夷)이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상(商)나라 탕(湯)왕을 다섯 번, 하(夏)나라 걸(桀)왕을 다섯 번 찾아간 사람은 이윤(伊尹)이며, 어리석은 왕을 싫어하지 않고 낮은 직위도 거절하지 않은 사람은 류하혜(柳下惠)입니다. 이 세 사람은 방법은 서로 달라도 방향은 하나였으니 바로 인의(仁義)를 창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자는 인의만 갖추면 되지 모든 면에서 같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노무공(魯繆公) 때 공의휴(公儀休)가 나랏일을 보았고 자류(子柳)와 자사(子思)도 벼슬을 했지만 노나라는 더 많은 국토를 잃었습니다. 현인은 이렇게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까?”
“과거에 우(虞)나라 군주는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지 않음으로 나라를 잃었고 진목공(秦穆公)은 백리해를 중용함으로 천하를 제패했습니다. 이로부터 현인을 등용하지 않으면 망국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나라는 땅을 내주고 나라를 구하려 했지만 망국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노나라가 국토를 잃은 것이 나라를 잃는 것보다는 낳지 않습니까?”
“과거에 노래를 잘 하는 왕표(王豹)가 기수(淇水)강 기슭에 살았기에 그 곳 사람들은 노래를 잘 불렀고, 기예에 능한 면구(綿駒)가 고당(高唐)에 살았기에 그 곳 사람들은 기예에 능했으며, 화주(華周)와 기량(杞梁)의 아내가 세상을 뜬 남편을 위해 통곡했기에 제나라 사람들은 장례 때 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생각은 반드시 밖으로 노출되는 법입니다.”
“공자(孔子)는 노나라 사구(司寇)를 담임할 때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나라 왕을 따라 제사를 지내러 갔는데 제사음식이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예모(禮帽)도 벗지 않은 채 벼슬을 그만 두고 노나라를 떠났습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공자가 그까짓 제사음식 때문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고 여기지만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공자가 예의를 벗어난 노나라 집권자들때문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고 여깁니다. 사실 공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은퇴를 노나라 집권자들의 잘못이라고 여길까봐 의도적으로 실례라는 작은 죄목으로 벼슬을 그만 두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군자의 행위를 알지 못합니다.”
순어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맹자는 언변은 좋지만 지나치게 고결하고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제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구나.”
제선왕은 맹자가 벼슬을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현인 시자(時子)에게 말했다.
“임치의 저택 한 채를 맹자에게 선물하고 만종록(萬鍾祿)으로 그의 제자들을 먹여 살려 우리 도읍의 백성들이 문화를 배우게 해야 하겠습니다.”
시자가 제선왕의 말을 전달하자 맹자가 말했다.
“내가 부를 탐한다면 왜 십만 종록의 벼슬을 그만 두고 만종록의 하사품을 받겠습니까! 계손(季孫)은 자숙의(子叔疑)가 다른 사람을 중용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까지 벼슬을 준 것은 너무 하다고 말했습니다. 벼슬과 출세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숙의는 모든 벼슬을 자신이 독차지하려 하는데 이는 물물교환이 주를 이루던 고대의 장터에 교양이 없는 한 사람이 나타나 높은 곳에 올라서서 시장의 모든 벌이를 독차지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장터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거래 양측은 모두 세금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벼슬을 그만 두는 이유라고 대왕께 전하시오.”
그러면서 맹자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제왕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을 생각에만 빠져 어진 정치를 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여기 임치에 남아서 뭘 하겠는가?”
맹자의 제자 진진(陳臻)이 맹자의 마음을 읽고 시자에게 전했다. 시자가 탄식했다.
“뜻이 다르면(道不同)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不相爲謀). 맹자가 공자의 덕행을 이어받았으니 제왕은 맹자를 남기지 못하겠군요.”
임치를 떠나 집으로 가는 맹자의 기분이 울적했다.
충우(充虞)가 맹자의 얼굴에 낙담하는 기색이 어린 것을 보고 위로했다.
“스승님께서는 사람은 활달하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벼슬을 그만 두신 것은 스승님의 선택이신데 왜 이렇게 낙담하십니까?”
“그때는 그때이고(此一時也) 지금은 지금이다(彼一時也). 사람이 어찌 감정이 없겠느냐? 역사를 보면 오백 년이면 반드시 왕도정치를 펴는 사람이 나타나고 성군이 흥하면 반드시 그를 보좌하는 유능한 사람이 있었다. 주문왕(周文王) 때부터 이미 칠백 년이 지났고 천하의 난세도 몇 백 년 동안 이어지고 있으니 성인이 날 때도 되었는데 아마 하늘이 천하태평을 원하지 않는가 본다. 내가 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또 누가 있겠느냐? 그러니 내가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느냐?”
스승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진진이 나섰다.
“스승님, 제일 처음 제나라에 왔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제왕이 스승님께 황금 100일(鎰, 1일=24냥)을 선물하셨는데 안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송(宋)나라에 갔을 때 송왕이 선물한 황금 70일(鎰)은 받으셨고 또 설(薛)나라를 경유하다가 설왕이 주는 50일의 황금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는 단연코 한 번은 틀리셨습니다.”
“아니다. 송나라에 갔을 때 나는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차라 송왕이 여비를 주니 어찌 안 받을 수 있었겠느냐? 설나라에서는 설왕이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를 지킬 무기를 사라고 돈을 주니 또 어찌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지만 제왕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에게 돈을 주었으니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는 것과 같으니라. 군자가 어찌 이런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
진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 네. 스승님은 품행이 단정한 군자는 불의의 재물을 취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이때 충우가 갑자기 질문했다.
“스승님, 지난 번에 노부인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 관곽이 너무 최상이지 않았습니까? 설마 여기에도 특별한 규정이 있는가요?”
충우의 말에 맹자가 대답했다.
“임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관곽의 품질을 중히 여기는 것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효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일반 백성들은 예제(禮制)의 제한으로 인해 최상등의 목재로 관곽을 만들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고, 돈이 없는 관계로 좋은 목재를 쓰지 못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예제에도 부합하고 재력도 따라간다면 옛 사람들은 모두 최고의 목재를 사용했다. 그러니 내가 무엇 때문에 좋은 목재를 쓸 수 없다는 말이냐? 그렇게 하는 것은 다만 흙이 망자의 시신을 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설마 효자의 마음이 이 정도도 만족하면 안 된다는 말이냐? 군자는 천하의 큰 일을 위한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쓰는 돈을 줄여서는 안 된다.”
충오의 질문으로 세상을 뜬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맹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맹모삼천(孟母三遷), 맹모단기(孟母斷機) 등 모친의 많은 교육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맹자는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손에서 위대한 인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맹자가 집에 돌아오니 소슬한 가을 바람 속에서 수척한 얼굴에 하얀 머리의 아내는 엄연히 또 다른 맹모(孟母)였다. 아내를 보는 순간 맹자는 과거 아내에 대한 불만이 가신 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맹자와 아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맹자가 왜 휴처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 이유가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어느 한 번, 맹자는 아내가 자신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질투심이 불탔고 그로부터 아내가 단정하지 못하고 부덕(婦德)을 지키지 않는다는 편견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맹자는 그 때 자신이 철 모르는 나이라 정말로 황당하고 가증스러웠다고 느꼈으며 평생을 고생한 현숙한 아내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후에 맹자는 고향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 쓰면서 천수를 누리고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맹자와 만장이 함께 쓴 저서 <맹자> 7편은 맹자의 학설을 천고에 전했으며 맹자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 되어 ‘아성(亞聖)’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유가학설은 맹자로 인해 ‘공맹지도(孔孟之道)’라 불리기도 한다.
번역/편집: 이선옥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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