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전石亭之戰
적벽전을 안다면 삼국지 초급이지만, 석정전을 안다면 중급이라 할 수 있겠다. 나아가 그 주인공이 조휴를 패퇴시킨 주방이라면. 더구나 208년의 적벽전이 삼국의 형세를 결정하는데 기초를 놓은데 비해, 딱 20년 후에 일어난 228년의 석정전은 다시 한 번 삼국의 형세와 강역을 확인하는 전투였음을 안다면 고급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 주유가 있었다면 뒤에 주방이 있는 셈이다. 그로부터 다시 딱 20년 후인 248년에 사마의가 고평릉 쿠테타를 일으켰으니 풍운의 변화는 얼마간의 주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주방이 격퇴시킨 사람도 다름 아닌 조씨의 여섯 족장인 “돈, 연, 인, 홍, 휴, 진”에 당당히 들어있는 조휴였다. 조휴는 누구인가? 일찍이 조조가 동작대에서 큰 잔치를 벌일 때, 최고의 말 기술과 활 솜씨로 붉은 전포를 빼앗아내 조조로부터 “우리 집안의 젊은 천리마”(此吾家千里駒也)란 칭호를 들었던 자가 아닌가. 한중전에서는 장비를 격퇴시킨 적도 있었다. 그러한 그가 주방의 속임수에 어이없이 당한 것은 무엇보다도 공을 세우고 싶어한 공명심 때문이었다.
동오의 파양태수 주방이 항복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주방이 손권의 의심을 받고 산월의 무리를 도와 위나라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한두 해 동안의 그러한 태도와 일곱 가지 불만을 담은 항복 편지에 조휴가 혹하여 명제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은 후 지금의 안휘성의 완성으로 10만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였다. 만약 주방과 연합하여 동오를 쳐 성공한다면 동오의 도성까지 타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슴이 부풀었다.
그 이전에 주방이 조휴를 찾아갔을 때, 조휴가 “주위에서 당신의 항복이 거짓이라는 말이 있소.”라고 말하니 주방이 옆에 있는 종자의 검을 빼들어 자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결백을 보이는 표시였다. 주방이 겨우 말리자 주방은 목 대신 상투를 잘랐다. 머리카락을 자른 것으로 치면 앞에 조조가 있고(할발대수) 뒤에 주방이 있는 셈이다.
당연히 오나라 군막 안에는 주방의 항복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규였다. 그는 “요리단비, 자살경기”(要離斷臂, 刺殺慶忌)를 들면서 주방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요리는 춘추시대 오나라 왕자 광(나중의 부차)의 수하로 경쟁자인 다른 왕자 경기를 죽이기 위해 접근하여 자신의 팔뚝을 잘라 결심을 보였다. 고육계의 전형이다. 경기는 요리를 믿었고 결국 요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요리는 경기를 속이기 위해 팔뚝을 잘랐는데 비해, 주방은 기껏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조휴를 속였으니 주방이 뛰어난 것인지 조휴가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다.
결국 완성에서 석정으로 진군한 조휴의 대군은 어이없이 몰살당했고, 죽을 고비에 있던 조휴를 구해낸 것은 가규였다. 가규는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비를 하였던 것이다. 패하여 낙양에 돌아온 조휴는 부끄러움에 바로 병으로 죽었다. 천리마의 죽음치곤 허망하였다. 반대로 주방은 주유, 육손, 황개, 감녕, 감택에 이어 동오의 역사에 불멸의 공적을 새겼다.
동남 전선에서 위나라가 견제되자 서북 전선에서 제갈량이 2차로 기산을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이릉전으로 깨어졌던 촉과 동오의 외교는 다시 봉합되었고, 이는 적벽전 때의 형세로 돌아간 셈이 되었다. 촉과 동오 두 나라가 위나라를 견제하는 형세는 사마의가 부상하여 전체 판을 흔들기 전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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