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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 자은도의 둔장해변. 이렇게 거대한 백사장도 ‘해수욕장’이 아니라, 둔장 어촌체험마을의 ‘해변’일 따름이다. 자은도에는 인적 하나 없는 광활한 백사장을 가진 해변이 곳곳에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여름휴가 제격… 전남 신안 섬 드라이브
송도, 제철 민어 등 해산물 싱싱
최고품질 새우젓 줄지어 경매
비싼 건 드럼통 하나 1300만원
증도, 국내 최대크기 태평염전
선착장 여객선 자은도로 이어져
자은도, 끝모를 고운 모래 해변
서쪽 분계해수욕장엔 ‘아늑함’
축구장 70개 크기 자연휴양림도
암태도,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당시 지주 그후 독립운동자금 대
신안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섬 드라이브 여행의 즐거움
여름휴가 피크 시즌이다. 계곡이든, 바다든 어딜 가든 피서 인파로 북적이는 때다. 시끌벅적한 맛에 가는 게 여름휴가라지만, 호젓한 곳에서 고즈넉한 휴식을 꿈꾸는 이들도 있겠다.
이번 주 CULTURE&LIFE는 조용한 휴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섬 드라이브 여행’을 제안한다. 전남 신안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한두 개가 아니라 열 개가 넘는 섬을 두름으로 엮듯 한 번의 여행으로 둘러보는 코스니 ‘가성비(價性比·가격 대비 성능)’ 최고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코스는 섬으로 가지만 대부분 차를 타고 간다. 육지와 섬을 잇는 연륙교,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를 차로 건너간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구간은 딱 한 번. 뱃길로 20분 남짓인데, 놀라운 건 뱃삯이다. 여객선 요금이 1인당 1000원. 차를 배에 싣고 건너는 도선료는 2000원. 섬과 섬을 징검다리처럼 건너가는 길에 교통체증이란 없다.
고즈넉한 섬에는 여름의 정취만 가득하다. 밭에는 대파가 쑥쑥 자라고, 이랑에서 고추와 옥수수가 익어간다. 섬마을 주택가 처마 아래에는 능소화가 한창이고, 꽃대를 높이 올린 접시꽃과 해바라기가 앞다퉈 꽃을 피우고 있다.
신안의 섬에는 고운 모래가 펼쳐진 드넓은 해변이 도처에 있다. 섬의 한쪽 면 전체가 고운 백사장이 깔린 해수욕장인 섬도 있다. 알려진 곳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더 많다. 광활한 백사장의 바다가 한여름에도 텅 비어 있다시피 한 건 거기가 섬이기 때문이다. 피서 시즌만 되면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육지의 해수욕장과는 사뭇 다르다. 섬에서의 휴가는 더 여유 있고, 더 느긋하고, 더 편안하다.
# 봐야 할 섬과 머물러야 할 섬
여정의 출발은 전남 무안의 해제반도다. 전남 무안읍에서 황토 구릉을 넘어가면 해제반도 끝이 나오는데, 여기서 연륙교를 건너 전남 신안 땅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섬 드라이브의 시작이다. 무안 해제반도 너머 첫 번째 신안의 섬이 ‘지도(智島)’다. 해제반도에서 어물어물하다 보면 금세 지도로 건너간다. 연륙교라지만 작은 천변 다리보다 작고 짧으니 건너와 놓고도 섬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해제반도에서 지도로 건너가면 길은 지도∼송도∼사옥도∼증도로 이어진다. 증도에서 길은 일단 끝나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자은도로 건너가면 길은 자은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로 이어진다. 암태도에 추도가 딸려 있고, 안좌도에서는 반월도, 박지도로 다시 길이 이어지니 이 길을 드라이브하면 10개가 넘는 섬을 다 디딜 수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신안의 섬을 ‘섭렵’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로운 여정이 된다.
한 번의 여행으로 모든 섬을 다 볼 수는 없다. 봐야 할 섬이 있고, 머물러야 하는 섬이 있으며, 건너뛰어야 하는 섬이 있다. 송도와 증도, 자은도와 암태도, 안좌도는 봐야 하는 섬이다. 건너뛰어야 하는 섬은 지도와 사옥도, 그리고 팔금도다.
머무는 섬은 단연 자은도다. 섬 곳곳에 너른 해변이 있고, 뮤지엄파크와 휴양림 등도 있어서다. 무엇보다 자은도에는 고급 리조트인 라마다호텔&씨원리조트가 있다. 백길해수욕장을 마치 ‘프라이빗 비치’처럼 두르고 있는 근사한 리조트인데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서 휴가 피크 시즌에도 객실이 더러 남아 있다. 호텔 객실도 있고 리조트에는 가족 단위 휴가에 딱 맞는 취사가 가능한 콘도형 객실도 있다.
자은읍의 중앙사진실. 주민들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입사 이력서까지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
# 여름의 맛…송도의 민어회
신안 땅인 지도로 들어와서 여정을 따라 순서대로 가자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송도다. 손바닥만 한 섬, 송도를 봐야 할 섬으로 꼽는 이유는 딱 하나, 어판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송도 어판장 좌판에는 끝물 병어와 솥뚜껑만 한 덕자, 그리고 제철 민어가 올라와 있다. 여기서 물 좋은 수산물을 사도 좋고, 인근 식당에서 병어조림이나 민어회, 민어 매운탕 등을 맛봐도 좋겠다.
매주 목요일이면 송도의 경매장에 새우젓과 황석어젓을 담은 드럼통이 줄지어 들어온다. 이즈음이 새우젓 중의 최고 품질이라는 ‘육젓’을 담는 새우가 잡히는 때란다. 경매장에는 수백 개가 넘는 드럼통이 줄 맞춰 늘어서 있다. 새우젓 한 드럼통에 얼마나 할까. 수협 직원에게 슬쩍 물어보니 “보통 1000만 원이 넘고 비싼 건 1300만 원쯤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게 다 얼마란 말인가.’ 입이 딱 벌어졌다.
송도에서 사옥도를 딛고 들어서면 증도다. 증도에서 ‘볼거리’를 찾아 차를 타고 바쁘게 이동한다면, 반나절도 안 돼 다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증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증도의 한적함을 제대로 누리는 방법은 되도록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증도와 자은도 사이를 하루 4번 왕복 운항하는 카페리 ‘슬로시티호’.
# 태평염전이 보여주는 것들
증도에는 태평염전이 있다. 643만㎡(140여만 평)의 단일염전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 섬 안에는 석조소금창고를 개조해 만든 소금박물관도 있고, 염생식물원도 있으며 갯벌에 말뚝을 박아 만든 ‘짱뚱어다리’도 있다. 염전에서는 여행자들을 위해 소금을 만드는 소금밭 체험과 소금 볼 만들기 체험 등도 진행하고 있다.
염전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소금’이 아니다. 가둬둔 바닷물이 한나절 볕에 소금 결정으로 맺히고, 그걸 염부들의 고된 노동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이 더해져 만들어내는 하나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염전 옆에 끝없이 늘어선 소금 창고와 창고를 따라 이어지는 나무 전봇대도 이국적인 정취에 한몫한다.
무안의 해제반도에서 출발해 증도까지 넘어온 길은 섬 남쪽 끝 왕바위선착장에서 바다로 사라지는데, 여기서 여객선 슬로시티호를 타고 자은도로 건너갈 수 있다. 15분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지만, 눈을 의심할 정도로 뱃삯이 저렴하다. 승선료는 1000원이고, 승용차를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는 운임이 2000원이다. 증도에서 자은도로 가는 배는 오전 9시와 11시, 오후 2시와 5시에 있다. 하절기가 끝나는 10월 말 이후에는 배 시간이 달라진다.
여객선 운임이 이렇게 저렴한 건 연간 3억 원에 달하는 신안군의 지원 덕이다. 신안군이 증도∼자은도 구간 뱃삯을 지원하는 건 뱃길 구간이 행정상 국도이기 때문. 국도라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육로가 없어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 행정이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은도 1004 뮤지엄파크 옆에 조성한 바다 숲 해양공원. 축구장 70개 크기의 해안가에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어 거대한 정원을 꾸몄다.
# 광활한 해변과 거대한 정원
슬로시티호가 닿는 자은도 고교선착장 인근 둔장마을에는 ‘둔장마을미술관’이 있다. 1971년에 지어진 마을회관 건물을 50년째 되던 해에 리모델링해 만든 소규모 미술관이다. 한적한 어촌마을 한복판에 난데없는 미술관인데, 제법 볼 만한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전시의 제목은 ‘잊혀지는 섬,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다. 작은 섬 매화도와 폐교된 압해초 매화분교 이야기를 사진과 영상, 탁본 등으로 담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작품마다 섬과 폐교의 기억을 어떻게든 잡아두려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전시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로 인구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는 섬 미술관의 전시이기 때문이리라.
자은도는 섬 동쪽만 빼놓고는 해안이 모두 고운 모래다. 섬의 서쪽과 북쪽, 남쪽 해안은 어디든 다 해수욕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섬사람들이 추천하는 곳은 백길해수욕장. 하지만 아늑하기로는 자은도 서쪽 끝의 분계해수욕장이 한 수 위였다. 백사장 뒤편 아름드리 솔숲의 정취도 훌륭했다. 이 숲에 자은도의 명물 중 하나인 거꾸로 선 여자의 다리를 닮은 소나무 ‘여인송(女人松)’이 있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아내를 묻은 자리에서 자란 나무라는 전설이 깃든 나무다.
자은도 서북쪽에는 양산해변과 내치해변, 외기해변이 죽 이어지는데, 그 규모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광활하다. 어찌나 백사장이 넓은지 해변 저쪽 끝이 가물가물하다.
양산해변 뒤쪽에는 ‘1004 뮤지엄파크’가 있다. 수석미술관과 수석정원, 새우란 전시관, 세계조개박물관, 신안 자생식물전시관 등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입장료가 좀 비싸다는 관광객들의 불만이 있지만, 공들여 조성한 곳이어서 신안군이 ‘입장료 1만 원’을 자존심처럼 고수하고 있는 곳이다.
뮤지엄파크 옆에는 신안자연휴양림이 있다. 축구장 70개 크기의 거대한 부지에 팽나무정원, 자귀나무정원, 달빛정원, 테라스 정원 등 수많은 주제의 정원을 만들어 다양한 나무를 심고 숲을 다듬었다. 지난 2013년 임시 개장했으니 문을 연 지 올해로 11년째. 토양의 소금기로 생육이 저조하고 모래가 날아드는 악조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정원 가꾸기가 뚝심 있게 계속되고 있다.
# 섬, 소외의 공간이자 변방
자은도에서 길은 암태도로 이어진다. 암태도에서는 낭만적인 ‘섬’의 뒷면을 생각하게 된다. 섬은 ‘변방’이다. 소외돼서 섬으로 가기도 했고, 섬에 살아서 소외되기도 했다. 뭐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소외된 이들이 변방, 그러니까 섬에 살았다’는 것이다.
섬과 섬사람은 늘 뒷전이었다. 뒷전의 정점은 섬을 비우는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이었다. 노략질하는 왜구에 골머리를 앓던 조정은 섬을 지키는 대신 그냥 비워두기로 했다. 창궐하는 도적을 때려잡기는커녕, 집을 비워 훔쳐갈 게 없게 만든다는 걸 전략이라고 들고나왔다. 급기야 조선 성종 때는 ‘섬에 사는 게 죄’가 됐다. 섬에는 누구도 살 수 없었고, 섬에 숨어 사는 사람들은 군인을 동원해 체포했다.
도망하거나 저항하면 우두머리를 참수했다. 섬에 숨어 지내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족까지 변두리로 추방했다. 어이없는 건 섬에서 붙잡힌 이들에게 죄를 물어 유배를 보낸 것이었다. 섬이 가장 소외된 곳이었던 시절, 섬에서 붙잡아 온 사람을 과연 어디로 유배 보냈던 것일까.
섬에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된 건 ‘전란’이 계기가 됐다.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자 백성들은 섬으로 숨어들었다. 신안의 섬에 발을 디딘 이른바 ‘입도조(入島祖)’들은 대부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무렵에 들어왔다. 그 뒤에도 난리와 반정, 당쟁 때마다 육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왔다.
조선 후기에 섬 주민이 늘어나자 중앙정부는 섬을 비로소 행정 편제 안에 두었다. 섬 주민을 행정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은, 곧 섬 주민들도 ‘세금 부과 대상’이라는 걸 공증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섬 주민들은 농경지 단위로 토지세를 납부하고, 농토에 보리와 콩을 심으면 태세(太稅), 바다에 어장을 설치하면 어장세(漁場稅), 청어를 낚으면 청어세(靑魚稅), 선박을 운항하면 선세(船稅), 미역을 채취하면 곽세(藿稅), 소금을 생산하면 염세(鹽稅) 등을 거뒀다. 과중한 건 세금만이 아니었다. 수확의 팔 할을 소작료로 거둬갔으니, 섬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고통과 분노의 심지에 불이 붙어 타오른 사건이 암태도에서 있었다. 바로 ‘암태도 소작쟁의’다.
암태도 암태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서용선 미술관 겸 암태도항쟁전시관 내부의 벽화 작품.
# 굶어 죽기를 각오한 소작인 아사동맹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암태도에서 최고의 지주 가문은 ‘문씨 집안’이었다. 문씨 집안을 대표한 건 무안군 참사와 전남도의원 등을 역임한 문재철. 그는 목포에 살면서 목포창고주식회사와 남일운수 사장 등을 지냈고, 물류업으로 돈을 벌어 암태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땅을 샀다. 그렇게 모은 땅이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쯤인 182만4000여 평(608정보)이나 됐다.
문재철은 일제의 저미가(低米價) 정책으로 수입이 줄자, 암태도 땅 소작료를 70∼80%까지 올려받았다. 당시 소작료는 평균 50% 정도였으니, 과중해도 보통 과중한 게 아니었다.
높은 소작료로 고통받던 암태도 주민들은 소작인회를 만들어 맞섰다. 소작인회는 소작료로 논은 40%, 밭은 30%를 요구했다. 문재철은 이런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은 소작인회가 면민들이 세워준 문재철 아버지 문태현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난투극이 벌어지고, 고소 고발이 이어졌다. 경찰의 개입으로 소작인회 간부들이 대거 구속됐지만, 소작인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급기야 소작인 400여 명은 목포형무소에 구금된 소작인회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목포에 나가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목포에서 벌어진 두 번째 원정 농성이 그 유명한 ‘아사동맹(餓死同盟)’이다. ‘굶어 죽기를 더불어 각오한 결의’는 대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사동맹 농성이 연일 속보로 신문에 보도되면서 암태도 소작쟁의는 당시 최대 시국 현안으로 떠올랐다.
여론은 소작인 편이었다.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도 격려금이 답지했다. 그 결과 소작인 500여 명이 혈서를 쓰고 길거리에 드러누우면서 시작한 아사동맹은 6박 7일 농성 끝에 일본인 목포경찰서장의 중재로 애초의 소작인 요구인 ‘소작료 4할’로 타협하는 것으로 끝났다. 소작인들의 완전한 승리였다.
# 악질 지주,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다
의외는 지금부터다. 일제를 등에 업고 고리의 소작료를 뜯으며 농민들의 고혈을 쥐어짜던 문재철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없다. 그가 친일 행각을 벌였던 건 맞지만, 소작쟁의가 끝난 뒤 돌연 변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작쟁의 직후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았고, 민족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소작인 대표를 통해 벼 200가마, 보리 100가마, 밀 50가마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학원을 설립해 문태고교를 만들었다. 문태고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다.
그는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항일에서 친일로 돌아선 경우는 허다하지만, 문재철처럼 친일을 하다 항일로 돌아선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였다.
암태도에는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신안경찰서 앞 삼거리의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이다. 소설 ‘암태도’의 작가 송기숙이 탑 아래 건립취지문에 해당하는 탑명을 썼다. 탑 양옆으로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한쪽에는 기념탑을 세울 때 힘을 보탠 이의 이름과 기부금액이, 다른 한쪽에는 소작쟁의 당시 소작인들에게 성금을 보낸 이와 액수가 씌어 있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소작인에게 성금을 보낸 이들의 이름을 읽다가 ‘고바야시 요오지로’란 이름을 발견했다. 소작인에게 돈을 보태줬던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암태도 소작쟁의의 기억을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장소가 옛 암태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암태도항쟁전시관’이다. 서용선 미술관을 겸한 전시관은 지난해 11월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 기념행사 때 개관했다.
옛 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관에는 작가가 암태도 소작쟁의를 소재로 그린 벽화와 조형 작품으로 가득하다. 벽에는 암태도 농민들의 아사동맹 당시 장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강렬했던 건 소작항쟁을 주도했던 서태석의 마지막 장면을 그린 벽화였다.
소작쟁의 당시 모진 고문을 받으며 감옥살이를 했던 서태석은 훗날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인 조현병을 얻었다. 말년에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는 1943년 6월 압해도 논두렁에서 낟알을 거머쥔 주검으로 발견됐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서태석의 마지막 장면을 그린 그림은 어둡기도 하고, 한편으로 비장하기도 하다.
안좌도에서 반월도로 건너는 부교. 안좌도 남쪽에 나란히 떠 있는 반월도와 박지도는 섬 전체를 보라색으로 꾸며 ‘퍼플섬’으로 불린다.
# 섬, 치유 자원이 되다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뒤쪽에는 ‘남하(南下)부엌’이 있다. 신안군 소유의 대형 미곡 창고를 개조해 만든 피자와 파스타를 주메뉴로 하는 근사한 레스토랑이다. 전남 장흥에서 8년 동안 같은 상호로 영업해 오다가 작년 12월에 신안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남하(南下)란 이름은, 지금은 용산면으로 이름을 바꾼 장흥군 ‘남하면’에서 따왔다.
장흥에서 암태도로 레스토랑을 옮긴 건 창고 임대계약 때문. 계약 갱신이 되지 않자 옮겨 갈 곳을 찾다가 암태도로 이주를 결정했다.
남하부엌의 간판메뉴는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만든 ‘하몽’이다. 하몽은 보통 생햄을 숙성해서 만드는데, 하몽의 본산인 스페인과 달리 한국은 습도가 높아 보존성 문제로 훈연을 한 뒤에 숙성한다.
장흥에 있을 때나, 여기 암태도에 있을 때나 상호는 ‘남하(南下)’로 같다. 인천 출신인 성일경 대표에게는 장흥이나 암태도나 똑같이 ‘남하(南下)한 곳’이니 같은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이란다.
섬은 한편으로 변방의 소외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품은 유토피아가 된다. 하나의 공간이 차별과 배제의 디스토피아가 되기도 하고, 평등과 자유의 유토피아가 되기도 하는 양극화된 지점에 있던 섬은 이제 치유 자원으로 가꿔지고 있다. 이주자가 여행자들을 위해 문을 연 남하부엌도 그런 경우다.
신안의 섬이 꺼내 든 치유의 도구는 다양하다. ‘퍼플섬’으로 불리는 반월·박지도는 ‘색깔’이고, 암태도의 남하부엌은 ‘음식’이며 이제 막 완공한 안좌도 김환기 미술관과 둔장마을 미술관은 ‘예술’이다. 뮤지엄파크는 ‘자연’이고, 신안자연휴양림은 ‘정원’이 도구다. 신안의 섬을 여행한다는 건 변방의 공간을 넘어 이런 것들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 자은도의 중앙사진실
전남 신안 자은도의 자은중 앞에는 문구점 겸 사진관인 ‘중앙사진실’이 있다. 섬 학교에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문구점은 폐업 직전이지만, 그래도 사진실은 증명사진을 찍으러 오는 주민들이 아직도 가끔 찾는단다. 중앙사진실의 역사는 40년을 넘겼다. 섬 주민들은 이곳에서 백일 사진부터 돌 사진, 각급 학교 입학서류 사진을 거쳐 이력서 사진까지 찍었다. 섬사람들의 결혼식과 환갑잔치 사진을 찍었던 건 물론이다. 중앙사진실은 그동안 ‘섬사람들의 생애사’를 기록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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