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잡설雜說>
<잡설雜說>
<배월정>과 <서상기>[1]는 ‘천지(天地)의 자연스런 조화’[化工]의 산물이요, <비파기>는 ‘빼어난 기교’[畵工]의 산물이다. 빼어난 기교의 산물이란 그 기교나 너무 빼어나서 천지 조화의 기교마저 능가할 정도라는 말이다.
그러나 천지는 원래 기교를 부리는 것이 없음을 그 누가 알리오? 지금 저 하늘이 낳고 땅이 길러낸 온갖 꽃이 피어나면, 사람들이 보고 좋아한다. 그런데 그 기교를 찾아보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본래 찾을 수 없다는 말일까? 그보다는 천지의 자연스런 조화는 기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신이 있다 해도 역시 천지의 자연스런 조화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누가 찾을 수 있으리오? 이로써 보자면, 빼어난 기교가 비록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미 두번째로 처지는 것이다. 그러니 문장짓는 일에 천고의 세월 동안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 어찌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또한 나는 들었다. 바람과 번개를 따라잡는다는 준족의 명마가 외견상 암컷인가 수컷인가 혹은 황색 갈기인가 흑색 갈기인가 하는 것으로 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2] 신의를 중시하고 기개를 추구하는 대장부는 결코 규율과 잣대를 추종하는 사람 중에 있지 않고,[3] 바람이 물 위를 스치는 풍격[4]을 지닌 글은 결코 한 글자 한 구절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 글의 구조가 엄밀하고 대우가 적절해야 한다느니, 도리에 의거하고 법도에 합치돼야 한다느니, 수미상응(首尾相應)하고 허실상생(虛實相生)해야 한다느니 등등 여러가지 망념이 모두 문장을 논하는 잣대로 이용되지만, 어떤 것으로도 천하의 지극한 문장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다.
잡극․원본[5] 등은 놀이를 위한 문장의 최고봉이다. <서상기>⋅<배월정>에 무슨 기교가 있는가? 기교로 따지면 <비파기>보다 더 기교가 뛰어난 것은 없다. 작자 고생(高生)은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다 하여, 그의 재능을 다 써버렸다. 작자가 있는 기교와 재능을 모두 다 하니, 이 때문에 말을 다하자 뜻도 또한 다하고, 수사가 다하자 감흥 또한 따라서 싹 가셔버렸다. 내가 <비파기>의 몇 소절을 골라 노래한 적이 있었는데, 한 번 노래하니 탄식이 나오고, 두 번 노래하니 원망이 생기고, 세 번 노래하니 그 이전의 원망도 탄식도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이 진실인 듯 하면서 진실이 아니어서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기교가 극치에 달해도 그 힘이 미치는 한도는 단지 피부와 골육 사이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겨우 이와 같을 뿐이니,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하나도 없다. <서상기>⋅<배월정>은 그렇지 않다. 우주 안에 본래부터 이렇게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다니, 천지의 자연스런 조화가 만물을 낳은 듯하여, 그 기교에는 불사사의한 점이 있다.
또한 세상에서 정말로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할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고, 그의 입에 또한 때때로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려 씻어내고, 마음속의 불평(不平)함을 호소하여, 사나운 운수를 만난 사람을 천년 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 듯하고, 별이 은하에서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마침내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겨서,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니,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다. 차라리 이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글을 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게 할지언정, 차마 끝내 명산(名山)에 감추거나 물이나 불 속에 던져 사장시킬 수는 없다.
내가 이 두 작품을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필시 그 당시에 군신(君臣) 관계나 친구 관계에 매우 뜻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부부가 헤어지고 만나는 인연을 빌어 그 비분(悲憤)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얻기 어려운 가인(佳人)을 얻은 것을 기뻐하고, 장생(張生)[6]의 특별한 만남을 부러워하고, 손바닥을 뒤집을 때마다 구름과 비가 번갈아 바뀌듯하는[7] 비유를 들어 지금 사람들이 초개와 같이 우정을 버리는 냉혹한 세태를 개탄했다.
다만 한 가지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은 풍류와 관련된 소소한 한 가지 일인데, 작자가 주인공의 필체로 장욱⋅왕희지⋅왕헌지[8] 등의 필체와 비교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소요부[9]는 “당우의 선양은 석 잔 술과 같고, 탕왕과 무왕의 정벌은 한 판의 바둑과 같다”[10]고 말하여, 천하를 선양하는 것과 폭군을 징벌하는 것을 한 잔 술이나 한 판의 바둑처럼 극히 사소한 것으로 보았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호걸은 대체로 모두 그러하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볼 수 있어, 터럭 한 가닥을 가지고도 부처의 도량을 세울 수 있고, 미세한 먼지 속에 앉아서도 법륜을 돌릴 수 있다.[11] 이는 정말 지극한 이치로, 결코 농담이 아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안마당에 달빛 내려오고 가을 하늘에 나뭇잎 떨어지고 적막한 서재에 홀로 있어 무료할 때 <금심>(琴心)의 곡조[12]를 한두 번 연주해보라. 무진장한 정감들이 불가사의하게 우러나와, 그 자연스런 기교를 생각할 수 있다. 아아! 그와 같은 작자를 내가 어떻게 만날 수 있으리오!(권3)
[1] 관한경(關漢卿)이 지은 <배월정>(拜月亭)과 왕실보(王實甫)가 지은 <서상기>(西廂記), 그리고 다음에 언급한 고명(高明)이 지은 <비파기>(琵琶記) 등은 모두 원대(元代)의 유명한 희곡 명칭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2] <초의원에게 답하다> 주석 9번 참조.
[3] 《역경》 <건괘> <문언전> 구오(九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같은 소리끼리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짝한다’”[子曰, 同聲相應, 同氣相求]라는 구절에서 원문의 ‘성응기구’(聲應氣求)라는 말로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뒤의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출전은 알지 못하겠다.
[4] 《역경》의 <환괘>(渙卦)는 상괘(上卦)가 손(巽)이므로 바람[風]을 상징하고, 하괘(下卦)는 감(坎)으로 물[水]을 상징한다. 물이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형상이다. 그래서 흩어짐, 해산 등의 의미로 쓰인다. 결국 이제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5] 북송(北宋) 시대에 유행한 연극을 잡극(雜劇)이라고 하며, 이 연극은 북송이 남으로 이동하여 금(金)나라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계속 유행하였는데, 이 때에는 원본(院本)이라고 불렀다.
[6] 《서상기》의 주인공 장공(張珙)이다
[7] 두보(杜甫)의 시 <빈교행>(貧交行)의 ‘손바닥 뒤집으니 구름이 끼고, 손바닥 뒤집으니 비가 내리듯.……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흙덩이처럼 서로의 우정을 버린다네’라는 구에서 인용한 비유이다.
[8] 장욱(張旭)또는 장전(張顚)⋅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등은 초성(草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초서(草書)의 대가들이다. 장욱은 당대(唐代)의 서예가로, 당시 황제 문종(文宗)은 ‘이백(李白)의 시(詩), 배민(裴旻)의 검무(劍舞), 장욱의 초서’ 세 가지를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술에 만취하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붓을 휘두르기도 하고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글을 쓰기도 했는데, 모두 신의 경지에 다다른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기행 때문에 장전이라고 불렀는데, ‘전’(顚)은 ‘전’(癲)과 같은 음의 글자로, ‘미치광이’를 뜻한다. 왕희지⋅왕헌지 부자는 진대(晉代)의 서예 대가이며, 부자가 ‘이왕’(二王)으로 불렸었다. 《서상기》 제오본 제이절에서 장생이 앵앵(鶯鶯)에게서 받은 변문(變文)의 글씨를 안진경(顔眞卿)․유공권(柳公權) 및 장욱․왕희지⋅왕헌지의 필체와 비교하여 노래하는 내용이 나온다.
[9] 요부(堯夫)는 소옹(邵雍, 1011~1077)의 자이다. 소옹은 호를 강절(康節)이라고 했고, 북송대(北宋代)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0] ‘당우(唐虞)의 선양(禪讓)’은 요(堯)가 순(舜)에게 천하를 선양한 것을 말하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정벌’은 탕왕이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걸(桀)을 정벌한 것과 무왕이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紂)를 정벌한 것을 말한다.
[11] 수능엄경(首楞嚴經) 권42에 나오는 구절이다. 법륜성왕(法輪聖王)이 법륜(法輪)을 돌리며 설법을 하여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부처의 설법을 전하는 것을 법륜을 돌린다고 말한다.
[12] 명대(明代) 손유(孫柚)가 지었다는 <금심기>(琴心記)라는 곡이 있는데, 여기서는 꼭 이 곡을 연주해 보라는 뜻은 아닌 듯하다. 한대(漢代)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문군(卓文君)의 고사와 관련하여 그의 사랑의 감정을 금(琴)에 실어 연주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이처럼 일반적으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금(琴)으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卷三 雜述 雜說
《拜月》、《西廂》,化工也;《琵琶》,畫工也。夫所謂畫工者,以其能奪天地之化工,而其孰知天地之無工乎?今夫天之所生,地之所長,百卉具在,人見而愛之矣,至覓其工,了不可得,豈其智固不能得之歟!要知造化無工,雖有神聖,亦不能識知化工之所在,而其誰能得之?由此觀之,畫工雖巧,已落二義矣。文章之事,寸心千古,可悲也夫!
且吾聞之:追風逐電之足,決不在于牝牡驪黃之間;聲應氣求之夫,決不在于尋行數墨之士,風行水上之文,決不在于一字一句之奇。若夫結構之密,偶對之切;依于理道,合乎法度;首尾相應,虛實相生:種種禪病皆所以語文,而皆不可以語于天下之至文也。雜劇院本,游戲之上乘也,《西廂》、《拜月》,何工之有!蓋工莫工于《琵琶》矣。此高生者,固已殫其力之所能工,而極吾才于既竭。惟作者窮巧極工,不遺余力,是故語盡而意亦盡,詞竭而味索然亦隨以竭。吾嘗攬《琵琶》而彈之矣:一彈而歎,再彈而怨,三彈而向之怨歎無複存者。此其故何耶?豈其似真非真,所以入人之心者不深耶!蓋雖工巧之極,其氣力限量只可達于皮膚骨血之間,則其感人僅僅如是,何足怪哉!《西廂》、《拜月》,乃不如是。
意者宇宙之內,本自有如此可喜之人,如化工之于物,其工巧自不可思議爾。
且夫世之真能文者,比其初,皆非有意于為文也。其胸中有如許無狀可怪之事,其喉間有如許欲吐而不敢吐之物,其口頭又時時有許多欲語而莫可所以告語之處,蓄極積久,勢不能遏。一旦見景生情,觸目興歎,奪他人之酒杯,澆自己之壘塊;訴心中之不平,感數奇于千載。既已噴玉唾珠,昭回云漢,為章于天矣,遂亦自負,發狂大叫.流涕慟哭,不能自止。
甯使見者聞者切齒咬牙,欲殺欲割,而終不忍藏于名山,投之水火。余覽斯記,想見其為人,當其時必有大不得意于君臣朋友之間者,故惜夫婦離合因緣以發其端。于是焉喜佳人之難得,羨張生之奇遇,比云雨之翻覆,歎今人之如土。其尤可笑者:小小風流一事耳,至比之張旭、張顛、羲之、獻之而又過之。堯夫云:“唐、虞揖讓三杯酒,湯、武征誅一局棋。”夫征誅揖讓何等也;而以一杯一局覷之,至眇小矣。
嗚呼!今古豪傑,大抵皆然。小中見大,大中見小,舉一毛端建寶王刹,坐微塵里轉大法輪。此自至理,非干戲論。倘爾不信,中庭月下,木落秋空,寂寞書齋,獨自無賴,試取《琴心》一彈再鼓,其無盡藏不可思議,工巧固可思也。嗚呼!若彼作者,吾安能見之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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