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3 지은이 金 庸
피 묻은 바위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호비는 키도 자라고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되었다.
또한 견식이나 무공도 날로 증진하였다.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으니 오히려 여유가 있고 자유스러워 한결 좋았다.
곳곳에서 의로운 일을 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거나 구제했다. 이러한 일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손 씀씀이가 너무 헤
퍼 조반산이 준 황금의 나머지 이백 냥을 벌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리
고 말았다.
빈털털이가 된 호비는 광동(廣東)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고 번성할 뿐만 아
니라 호탕한 인사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 별로 할 일도 없으니 광동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싸구려 말을 준비해 곧장 영남(嶺南)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광동에서
제일 큰 고을이라 할 수 있는 불산진(佛山鎭)에 도달했다.
이 불산(佛山)은 자고로 주산(朱山), 경덕(景德), 한구(漢口)와 함께 천하의
사대진(四大鎭)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만큼 번창하였고 물자도 풍부했으며 저자
거리도 번화했다.
불산에 이르자 이미 사 시 정도였다. 배가 무척 고파 길거리를 두리번거리자
남쪽편에 세 짝 문이 달린 커다란 주루가 있었다. 간판에는 <영웅루(英雄樓)>라
는 금빛 글자가 쓰여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주루 안에서 요란하게 칼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술과 고기의 구수한 냄새가 연신 풍겨왔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주루의 간판은 그런대로 격에 맞춰 단 셈이로구나.)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겨우 백여 개의 문전(文錢)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돈으로는 아무래도 술을 마실 것 같지 못하니, 국수나 한 그릇 먹고 배를 채워
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말을 주루 앞에 매어 놓고 곧장 누상으로 올라갔다.
주루의 사환은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얼굴 가득히 아니꼬운 빛을 띠우고
손으로 저지하며 말했다.
[손님, 누상에는 귀빈석만 있는데 손님에게는 너무 비싸지 않을까요?]
호비는 이 말을 듣자 울화가 치밀어 속으로 생각했다.
(영웅루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도 가난한 친구를 이토록 업수이 여기다니, 내
너희들의 주루를 발칵 뒤집어 놓지 않는다면 영웅호걸이라고 자처하지 않겠다.)
호비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술과 음식이 정갈하고 맛이 좋다면 가격이 좀 비싼 것은 상관 없
지.]
사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곁눈질로 그가 누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모두 옷차림이 호사스러워 십중팔구 부상(富商)이
나 큰 부자들 같았다.
사환들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 별 주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반나절이
지나도록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호비는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 공짜로 한끼 얻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갑자기 거리 한복판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창가에 앉
아 마침 거리를 바라보니 한 부인이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과 옷과 손을 선혈
로 물들인 채 식칼을 한 자루 움켜쥐고 울다가 웃다가 하며 손짓 발짓을 해대
는 것이 미친 여자같았다. 구경꾼들은 두려워 하면서도 연민의 빛을 띠우며 멀
찌감치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영웅루의 간판을 손가락질하더니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봉(鳳)나으리, 백살까지 장수하시고 부귀를 겸비하시도록 이 할멈이 큰 절
을 올립니다. 하늘에 눈이 있다면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며 머리를 찧었다. 이마
에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부르짖었
다.
[봉나으리, 낮에 금 한 말, 밤에는 은 한 말을 모으셔서 대부대귀(大富大貴)
하시며 수많은 자손을 얻으옵소서......]
주루에서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손에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것이 주인인
듯 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부르짖었다.
[종사수(鍾四嫂), 미친 지랄을 하더라도 자기 집에 가서 하라구! 여기는 귀한
손님들이 먹고 마시는 곳이니 흥을 깨지 말라구!]
그러나 종사수라는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면서 주루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주인장인 듯한 그 사람이 손을 휘두르자 주루에서 두 명의 거칠
고 건장한 대한이 나왔다. 한 사내가 냅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식칼을 빼앗았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떠밀었다.
종사수는 대뜸 엉덩방아를 찧고 거리 한복판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다시 바
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셋째야! 내 금쪽 같은 아들아, 너는 남의 거위를 훔쳐먹지 않았지!]
식칼을 뺏은 사내가 호통을 내질렀다.
[이곳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더 지껄이면 당장에 칼맛을 보여 주겠다.]
종사수는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고 울부짖었다.
주인은 거리의 뭇 사람들이 못마땅한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뻑뻑 담배
를 빨더니 허연 연기를 훅! 내불며 손을 흔들어 두 명의 사내와 함께 주루로 다
시 들어갔다.
호비는 두 사내가 남의 아낙네를 업수이 여기는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치밀
었지만 그 여인이 미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뒤에 있는 탁자에서 손님 두 명이 나직이 수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한 사람이 말했다.
[봉나으리가 이번 일은 너무 급하게 서두른 것 같네. 생사람을 핍박해서 죽
게 만들었으니 언젠가는 천벌을 받게 될거야.]
호비는 생사람을 핍박해서 죽게 했다는 말을 듣자 속으로 섬칫했다. 다른 사
람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봉나으리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집안에 물건이 없
어지면 한마디쯤 물어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아닌가? 그런데 저 여자가 미쳐서
자기 아들의 배를 가른 것이지.]
호비는 마지막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몸을 돌렸다. 그 두 사내는
모두 사십세 정도의 나이인데 한 바람은 뚱뚱하고 한 사람은 비쩍 마른 편이었
지만 하나같이 주단(綢緞)으로 만든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옷차림으로 미루
어 볼 때 그들은 점포의 주인이나 부상(富商)인 듯 했다.
두 사내는 호비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호비는 이런 사람들은 담이 적고 소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좋은
말로 물으면 틀림없이 모른다고 딱 잡아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켜 읍을 하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고 입을 열었다.
[두 분 어르신, 광주에서 헤어진 후 수년 동안 뵙지 못했군요. 그 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두 사람은 그와 면식이 없는 사이였고 말투가 외지의 사람인지라 속으로 이상
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온화한 얼굴에 재물이 따른다
고 믿기 때문에 즉시 두 손을 맞잡고 답례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는 은자 일만 냥을 가지고 불산에 물건을 구입하러 왔는데 사람이나 고
장이 낯설어 난처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분을 공교롭게 만나다니
기쁘기 한량 없군요. 두 분의 도움을 받고 싶소이다.]
두 사람은 호비가 만냥의 은자를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자 즉시 안면에 웃음
을 지으며 반겼다.
호비의 옷차림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만 냥이라면 엄청난 액수인데 어
찌 이 기회를 놓치겠느냐 생각하고 일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의견입니다. 자리를 옮겨 함께 술을 들면서 자세하게 천천히 의논하는
것이 어떠하오이까?]
호비는 그와 같은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참이라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금전 두 분께서는 산 사람을 핍박해서 죽도록 만들었다고 했는데, 무슨 말
입니까?]
두 사람은 즉시 안색이 변하며 구실을 붙여 말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호비
는 슬며시 왼손을 탁자밑으로 내밀어 그들의 왼손과 오른손을 단번에 움켜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즉시 악!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누상의 뭇 손님들은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호비는
나직이 협박했다.
[소리지르지 마시오!]
두 사람은 감히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자 손님들은 다시 음식을 먹으며 잡담을 했다.
두 사람은 움켜잡힌 손목이 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테에 감긴 듯한 느낌이 들
어 감히 뽑아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본래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대도적인데 지금은 개과천
선해서 장사를 배우고 있는 중이외다. 나에게 일만 냥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밑
천이 모자라기 때문에 부득이 두 분에게 오천 냥씩 빌려야겠소이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일제히 말했다.
[나는...... 나에게는 그런 돈이 없소.]
호비는 말했다.
[그렇다면 좋소. 당신들은 봉나으리가 사람을 핍박해서 사람을 죽게 만든 일
을 나에게 이야기 해 주시오. 자세하게 들려주는 분에게는 돈을 빌리지 않고 나
머지 다른 한 분에게 일만 냥을 모두 빌리도록 하겠소.]
두 사람은 재빨리 서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말하리다. 내가 말하리다.]
대꾸도 않던 자들이 이때는 혹시라도 일만 냥이라는 거금을 혼자 부담하게
될까봐 서로 다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이와 같은 방법이 효과를 거두
자 빙긋이 웃었다.
뚱뚱보는 북쪽지방의 말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쉬었다.
[먼저 뚱뚱하신 분이 말씀을 하시고 나중에 마른 분이 이야기 하시오. 똑똑히
이야기하지 않는 분에게 나는 일만 냥을 청구하겠소.]
그는 두 사람의 손목을 놓고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에서 시퍼런 강철 칼을 끄
집어냈다. 상아로 만들어진 젓가락을 들고 칼끝에다 가볍게 갖다댔다. 젓가락은
대뜸 네 토막이 났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두 사람은 공포심에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호비
는 칼로 내려칠 부위를 찾는 것처럼 두 손을 뻗쳐 그들의 뒷덜미를 더듬었다.
두 사람은 그만 놀라 얼굴이 흑빛으로 되었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 좋아.]
뚱보 상인이 서둘러 말했다.
[도련님, 제가 말씀드리지요. 틀림없이 제가 저 사람보다.....]
비쩍 마른 상인이 나서며 말했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요. 제가 먼저 말을 하지요.]
호비는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먼저 듣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이오?]
비쩍 마른 상인은 재빨리 말했다.
[네, 네, 그럽죠.]
[당신은 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벌을 받아야 겠소.]
비쩍 마른 상인은 놀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고 뚱뚱한 상인은 득의의 빛을 띠
웠다.
호비는 나직하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술도 없고 음식도 보잘 것 없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손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소? 빨리 한 상의 상등주석(上等酒席)을 시
키도록 하시오!]
비쩍 마른 상인은 처벌이 매우 가벼운 것을 보고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재빨
리 사환을 불러 즉시 다섯 냥의 은자가 나가는 최고급의 술과 음식을 한 상 시
켰다. 사환은 호비와 그들이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은
자 다섯 냥의 음식을 시키자 즉시 싱글벙글거리며 연신 대답을 했다.
호비는 창문으로 다시 고개를 내밀고 거리를 바라보았다. 종사수라는 아낙은
머리를 산발한 채 맞은편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연신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뚱보 상인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말씀은 드리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말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아니되옵니다.]
호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겠다면 이 사람보고 말을 하도록 해야겠군.]
그는 고개를 돌려 비쩍 마른 상인을 바라보았다.
뚱보 상인은 황급히 말했다.
[내 말하리다. 내 말하리다. 도련님, 그 봉 나으리의 이름은 봉천남(鳳天南)
이라 하며 불산진에서는 으뜸가는 부자입니다. 그에겐 별명이 있는데......]
비쩍 마른 상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남패천(南覇天)이라고 하지요.]
호비는 점잖은 어조로 꾸짖었다.
[당신보고 말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불쑥 끼어드는 것이오?]
비쩍 마른 상인은 고개를 떨구고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뚱보 상인은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는 불산진에서 커다란 전당포를 열고 있는데 영웅 전당포라고 하지
요. 그리고 이 주루는 그 봉나으리의 영웅루이지요. 뿐만 아니라 영웅회관이라
는 큰 도박장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는 재물이 많고 세력이 크며 교분도 넓고
무예는 광동에서 으뜸 가지요. 이 고을 사람들 말고도 또 오동(奧東), 오서(奧
西), 오북(奧北) 세 곳에서 매달 은자를 받치러 사람이 온다 하더군요. 그리고
소문을 들으니까 그는 무슨 오호파(五虎派)의 장문인이라고 하는데 오호파의
형제들은 각처에서 돈벌이를 하면서 그에게 일부분을 나누어 준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강호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소인으로서는 잘 모르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려, 그는 큰 부자이면서도 이 고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장물을 다루는
흉악한 큰도적 이구려.]
두 상인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는 너도 그와 동업자 아니냐? 이 날강도 놈아!)
호비는 그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본 듯 입을 열었다.
[흔히들 동업자는 원수라고 하지 않소이까? 나는 이 봉나으리와 친구가 아니
외다. 당신들은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고 솔직히 자기 의견을 말하되 절대
로 감추지는 마시오.]
뚱보 상인은 말했다.
[이 봉나으리의 저택은 으리으리하고. 아주 크지요. 그런데 최근 일곱 번째
첩을 얻어 뒷쪽 옆에 무슨 칠봉루(七鳳樓)를 새로 지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그
가 마음에 두고 있는 땅은 바로 종사수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채소밭이었지요.
이 땅은 겨우 두 마지기남짓 한데 종아사(鍾阿四)는 이 채소밭에 붙어 다섯 식
구가 빌어 먹고 사는 셈이지요. 봉나으리는 종아사를 불러 다섯 냥을 줄테니
그 땅을 팔라고 제의했답니다. 물론 종아사는 응하지 않았지요. 봉나으리는
열 냥까지 주겠다고 했지만 종아사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으며, 일백 냥의 은
자를 준다하더라도 그것은 다 쓰고나면 그만이지만 채소밭은 흙을 뒤집고 물을
주고 조금만 기운을 쓴다면 한 집안 몇 식구가 굶어죽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다
하더군요. 봉나으리는 그에게 성을 버럭내며 대노하셨지요. 그런데 바로 어제
거위를 훔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지요.]
뚱보 상인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봉나으리는 후원에 십여 마리의 오동통한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
제 갑자기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답니다. 가정들은 종씨 집안의 둘째와 셋째 아
들이 훔쳐갔다는 것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채소밭에는 거위털이 많이 널려 있
었지요. 종사수는 억울하다고 부르짖었지요. 두 아들은 착해서 결코 남의 물건
을 훔칠 애들이 아니며 그 거위털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버린 것이라고 했지
요. 봉나으리의 장정들이 둘째와 셋째에게 물어보았지만 둘 다 훔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봉나으리가 직접 물었답니다. '오늘 아침 너희들은 뭘 먹
었느냐?' 셋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먹었어요. 나는 먹었다구
요.' 봉나으리는 탁자를 두드리며 욕을 하며 말을 했지요. '셋째가 스스로 시인
을 하는데도 훔치지 않았단 말인가?' 이윽고 사람을 시켜 순검아문(巡檢衙門)
으로 보내어 고소를 했고 포졸들이 와서 종아사를 잡아갔지요.]
뚱보 상인은 목이 타는지 술잔을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종사수는 비록 집안이 궁하기는 하지만 두 아들이 모두 착하고 평소에 봉
씨 집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코 거위를 훔쳐 먹지 않았다고 봉씨 집에 가서
따졌습니다. 그러나 봉나으리의 장정들에게 걷어차여 쫓겨났지요. 그녀는 다시
순검아문으로 가서 억울하다고 호소를 했으나 포졸들에게 역시 쫓겨나고 말았
지요. 순검나으리는 봉나으리의 부탁을 받고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어 종아사
는 겨우 한가닥 숨만 붙어있는 지경이었지요. 남편이 만신창의가 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땅은 팔지 않겠소. 땅은 팔지 않겠단 말이오.
훔치지는 않았단 말이오.'라고 중얼거리기만 하자 종사수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집으로 가 식칼을 들고 셋째를 끌고서 이웃집 사람을 불러 함께 조묘(祖廟)로
갔지요. 이웃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신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뒤에서 증인이 되려고 했는데, 소인도 그녀와 가까이 사는지라 덩달아 구경을
나서게 되었지요.
종사수는 북제야야(北帝爺爺)의 좌전에 몇 번 절을 하고 이렇게 말을 했지
요. '북제야야, 우리애는 결코 남의 집의 거위를 훔쳐먹지 않는답니다. 그애는
겨우 네 살 밖에 되지 않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저 봉나으리 앞에서
밥먹었다는 뜻으로 내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는 소리를 했던 거예요. 이렇게 억
울한 누명을 쓰고 있지만, 뇌물을 받은 도적같은 관리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
지 않으니 오직 북제야야께서 이 억울한 일을 풀도록 해주십시요.' 그리고는 칼
을 들고 단번에 셋째의 배를 갈랐지요.]
호비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듣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나 꽝!하니 탁자를 내려쳤다. 탁자 위의
그릇과 잔들이 튀어오르며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두 상인은 그의 기세가 매우 험악한 것을 보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 모두 틀림없는 말이지요.]
호비는 오른발을 커다란 걸상 위에 걸치며 보따리에서 칼을 뽑아 탁자 위에
꽂고 부르짖었다.
[빨리 계속해서 말을 하시오!]
뚱보 상인은 말했다.
[그건......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외다.....]
주위의 손님들과 사환은 호비가 흉신악살(凶神惡煞)처럼 분노한 것을 보고 간
담이 서늘해졌다. 담이 작은 손님들은 음식을 다 먹지도 않고 슬금슬금 아래로
뺑소니를 쳤고, 사환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호비는 큰소리로 말했다.
[빨리 말하시오. 셋째 뱃속에는 거위고기가 있었소?]
뚱보 상인은 말했다.
[거위고기는 없었소이다. 그의 뱃속에는 우렁이만 들어 있었지요. 종씨 집안
은 가난해서 달리 배를 채울 수가 없었던지라 두 형제들은 논에 가서 우렁이를
주어먹은 것이지요. 우렁이는 딱딱해 셋째는 이빨로 제대로 깨물지 못하고 그냥
삼켰기 때문에 남아 있었지요. 그가 먹었다고 한 것은 바로 우렁이를 먹었다는
말이지요. 아! 멀쩡한 애가 이렇게 해서 종묘 앞에서 죽게 되었고 종사수도 미
쳐 버리고 말았지요.]
<작자: 우렁이를 먹은 것을 거위를 먹은 것처럼 오해를 받고 종묘에서 배를
갈라 억울함을 호소했던 일은 확실히 있었던 일이다. 불산진의 노인들 모두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오늘날까지 불산의 북제신상(北帝神償) 앞에는 혈인석(血
印石)이 있는데 아직도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고 작자는 직접 본 바가 있
다. 독자들도 만약 불산에 간다면 종묘를 찾아가 구경해보기 바란다. 다만 이
일의 연대 및 인물의 설명을 오래되어 실전되었다. 작자는 당시 불산진의 문화
계 인사들과 자세히 탐문해봤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인
명과 기타 다른 이야기는 허구임을 밝혀둔다.>
호비는 칼을 뽑아들고 부르짖었다.
[그 봉가는 어디에 살고 있소?]
뚱보 상인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길거리에서 자지러지는 소리
가 들렸다. 비쩍 마른 상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업보로군. 업보야!]
호비는 물었다.
[또 무슨 일이오?]
비쩍 마른 상인은 대답했다.
[저것은 봉나으리집 장정들이 사나운 개를 데리고 종씨 집안의 둘째를 쫓고
있는 중이지요.]
호비는 노해 말했다.
[억울한 일은 이미 판명이 되었는데 어째서 또 사람을 잡아 들이는 거요?]
비쩍 마른 상인은 말했다.
[봉나으리깨서 말씀하시기를 셋째가 먹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둘째가 먹었을
것이라고 하였지요.
때문에 둘째를 잡아다 닥달하려는 것이지요. 이웃사람들은 봉나으리께서는
수치가 분노로 변하시어 이번 일을 둘째에게 덮어씌우려고 하기 때문에 몰래 둘
째에게 도망가라고 하였지요. 오늘 봉나리 집안의 장정들이 반나절 동안 수색을
한 모양입니다.]
호비는 갑자기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좋아. 두 분은 잘 설명을 했소. 만 냥의 은자는 봉나으리에게 받겠
소.]
그리고 그는 술주전자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세 주전자의 술을 비우고도
성이 차지 않는 듯, 사환들에게 술을 더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개짖는 소리와 호통소리가 점점 가까와졌으며 바로 앞쪽까지 울려퍼졌다. 호
비는 열 두어살 되는 소년이 모퉁이 쪽에서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맨발에다가 바짓가랭이는 개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등에서는 핏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지는 모르지만 십여장
뒤에는 이리처럼 사나운 개들이 미친듯 으르렁거리며 쫓아와 종씨집 둘째 아들
에게 달려들었다.
종씨집 둘째 아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는데 어머니를 보자 외쳤다.
[엄마!]
그는 맥이 빠져 땅바닥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종사수는 비록 정신
이 오락가락했지만 아들은 알아보는 듯 맹렬히 몸을 일으켜 맹견들의 앞을 막
고 아들을 지키려고 했다. 사나운 개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허연 이빨을 드
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 맹견들은 흉맹하기 이를데 없어 평소 봉나으리를 따라 사냥을 해왔으며,
호랑이나 곰들에게도 감히 달려들어 싸움을 벌였다.
종사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을 감싸자 개들도 가까이 달려들지 못했다.
뭇장정들은 호통을 내지르며 맹견을 재촉했다. 그러자 으르렁거리던 두 마리의
맹견이 몸을 솟구치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둘째를 물려고 들었다. 종사수는
자기 몸으로 아들을 덮었다. 첫번째 개는 예리한 이빨로 그녀의 어깨를 물고 두
번째 개는 그녀의 왼쪽 다리를 물었다. 두 마리의 개가 물어뜯는 것은 마치
사냥할 때 하얀 산토끼나 꽃사슴을 잡는 것 같았다.
봉씨 집안의 장정들은 소리를 질러 위세를 돋구었다. 종사수는 자기 몸을 돌
보지 않고 여전히 아들을 지켰다. 둘째는 어머니의 몸안에서 기어나오며 맹견들
을 때리며 어머니를 구하려 들었다. 삽시간에 열 마리의 맹견들이 사면 팔방에
서 두 모자를 에워쌌다.
거리에 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많았지만 봉나으리의 위세를 두려워해 감히 아
무도 나서지 못했다.
사람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피했으나 뭇장정들은 흥이 나서
커다란 사냥감을 포획한 듯 떠들어댔다. 호비는 주루 위에서 이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었으나 손을 써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상인에게 봉천남
이 얼마나 악독한가를 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혹시나 무고한 사람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었다.
호비는 처음 뚱보 상인이 이야기하였을 때는 지극히 분노했으나 나중에 봉천
남이 무단히 한 사람을 죽도록 만들고 맹견까지 보내 다른 어린애를 뒤쫓고 있
다는 말을 듣고는 이 세상에 아무리 고약한 사람들이라도 어찌 그럴 수 있겠느
냐고 오히려 약간 반신 반의했다. 그러나 맹견들이 물어뜯는 것을 직접 본 지금
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거리에 피와 살이 마구 튀었다.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두 모자가 죽음을 면하
지 못할 것 같아 그는 즉시 탁자에서 세 쌍의 젓가락을 집어 들고 하나씩 내던
졌다.
순간 깽깽깽! 하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나며 여섯 마리의 맹견들이 정수리에
젓가락을 얻어맞고 죽었으며 나머지 맹견들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찌할 바
를 몰랐다.
호비는 다시 술잔을 들어 내던졌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술잔은 맹견의
콧날에 적중되었다.
세 마리의 고약한 맹견들은 찍소리 못하고 몸을 뒤집으며 죽어갔다. 나머지
개들은 꼬리를 감추고 순식간에 내뺐다.
개를 데리고 온 사내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봉천남의 기세를
믿고 불산진에서 제멋대로 놀아나던 사람들인지라 누군가 개를 죽이는 것을 보
고 일제히 노갈을 터뜨렸다.
[어느 놈이 감히 불산진에 와서 버르장머리 없이 봉나리의 개를 죽이느냐? 네
녀석의 목숨으로 물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칼과 쇠사슬을 다투어 꺼내더니 우르르 주루 위로 몰려왔다.
주루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영웅루는 본래 봉천남의 소유였기
때문에 주인과 사환은 말할 것 없고 주방에서 일하는 자들도 각기 식칼, 부지깽
이, 철봉 등을 들고 나와 그들을 도와 손을 쓰려했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저 미미하게 냉소만 흘렸다.
여섯 명의 장정들이 그의 앞에 이르렀다. 앞에선 사내가 쇠사슬을 철거덕거리
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 썩어 문드러질 녀석 같으니라구. 이 나으리를 따라가자!]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개 지방의 유지의 아랫것이 감히 쇠사슬로 사람을 묶으려 드니 불산진의
포도청은 봉씨 저택안에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일어서지도 않고 냅다 그 장정의 왼뺨을 후려쳤고, 손을 움추리며 목에
있는 자궁혈(紫宮穴)과 풍부혈(風府穴)을 짚어 버렸다. 이곳은 대혈이라 그 장
정은 그만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장정은 아직도 똑똑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해왔다.
호비는 두 사람의 도세가 강맹한 것을 보고 그들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종놈들과는 달리 무공을 연마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렇게 빌붙
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봉천남이 더욱더 흉악하게 날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똑같은 수법으로 철썩 철썩! 두 대의 따귀를 갈기자 두 장정들도 멍
하니 서 있게 되었다. 나머지 세 명의 장정들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한
명은 달아나려했고, 한 명은 부르짖었다.
[봉칠야(鳳七爺)게서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지 와서 봐주십시오!]
봉칠(鳳七)은 봉천남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인데 영웅루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무공은 별로였지만 눈치가 빨랐다. 그는 호비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고 즉시 앞으로 다가서며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알고보니 오늘 영웅께서 왕림하셨군요. 이 봉모가 눈이 있어도 태산을 보지
못한.....]
호비는 세 명의 장정이 슬금슬금 뺑소니치려한다는 것을 알고 혈도를 누른
장정의 쇠사슬을 낚아채 쓸듯이 휘두르며 와락 잡아당기자 쇠사슬은 어느새 장
정의 여섯 개의 발을 휘감았다. 아이쿠! 아이쿠! 하면서 세 장정이 바닥에 쓰러
져 호비에게 끌려왔다.
호비는 쇠사슬의 매듭을 쥐고 봉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스로 술을 따라
마셨다.
영웅루의 뭇 사환들은 호비의 손 씀씀이가 무서운 것을 보았지만 '호걸이라도
우르르 달려들면 당해내지 못한다'라는 말을 생각하고, 각기 무기를 들고 둘러
서서 봉칠야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호비는 술을 한잔 들이키고 물었다.
[봉천남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봉칠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는 불초의 족형(足兄)이 되지요. 귀하는 그를 아십니까?]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모르오. 당신이 가서 그를 이리로 불러오시오.]
봉칠은 속으로 화가 나서 생각했다.
(이 새파란 녀석이 봉나으리를 오라가라 하다니, 설사 네놈이 직접 찾아가
머리를 조아린다해도 그 어른은 만나 줄까 말까한데 네가 감히 불러오라고?)
그러나 그는 여전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통보하기 좋도록 말씀을 해주시지
요?]
호비는 말했다.
[나의 성은 발(拔)씨요. 닭을 죽여 털을 뽑는다는 의미의 발씨요.]
봉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이상한 성도 있었던가?)
그러나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원래 발나으리였구려. 물건이라는 것은 적을수록 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발나으리의 성은 이 남쪽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것이군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속담에 드문 물건이 귀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비슷한 말로 봉모
인각(鳳毛麟角)이라고 하지요. 불초의 이름은 바로 그런 봉모(鳳毛)라고 하오.]
봉칠은 웃었다.
[아하! 우아하고도 멋진 이름이군요.]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다, 발봉모라는 세 글자는 일부러 사람에게 시비를 걸자는 뜻이 아니겠
는가?)
그는 안색이 변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불산진에는 무슨 일로 왔소?]
호비는 웃었다.
[진작부터 나는 불산진에 고약한 봉황 몇 마리가 활개친다는 소리를 들었소.
내 이름을 발봉모라고 밝혔듯이 나는 봉황의 털을 뽑으러 온 것이오.]
봉칠은 한걸음 물러서며 한 자루의 연편을 꺼내들었다. 그는 왼손을 흔들어
부하들에게 조심하라는 시늉을 하고 연편을 맹렬히 호비에게 떨쳐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봉천남 혼자서 이토록 많은 죄를 저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휘하에서 흉
악한 일을 일삼는 도배들도 하나같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으니 손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비는 연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손을 뻗쳐 채찍의 끝을 잡고 가볍
게 끌어당겼다. 봉칠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달려나오게 되었다. 순간 호
비는 그의 어깨죽지를 후려쳤다. 봉칠은 순간 거대한 힘이 아래로 내리누르는
것을 느끼고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예의를 차리니 감당할 수 없군.]
그는 여세를 몰아 열세 조각으로 된 연편을 그의 몸에 감아 탁자 다리에 묶어
버렸다. 주루의 사환들은 손을 쓰려하다가 갑자기 이와 같은 변고를 보자 흠칫
놀라며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호비는 그 중 뚱뚱한 숙수를 손가락질하며 불렀다.
[어이, 이것 보시오. 그 식칼을 이리 가져오시오!]
그 뚱뚱한 숙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식칼을 내
밀었다. 호비는 물었다.
[초리척(抄裏脊)에는 어떤 재료를 쓰는거요?]
뚱뚱한 숙수는 대답했다.
[돼지의 등심살을 쓰지요. 당초(糖醋), 초영(椒 ), 유작(油炸)으로 자시겠
습니까? 아니면 청초(淸抄)로 자시겠습니까?]
호비는 봉칠을 와락 잡아당겨 옷을 찢어 비계가 낀 허영 등줄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여기를 쓰는 것이 아니오?]
뚱뚱한 숙수는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감히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봉칠은 연신 큰절을 하며 부르짖었다.
[영웅호걸께서는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너에게 쓴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악한 일을 하고도 보응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더 기고만장할 것 아니겠는
가?)
그는 식칼을 들어 그의 척추골에 기다란 상처를 내고 물었다.
[반 근이면 충분하오?]
숙수는 놀라 엉겹결에 그 말을 받았다.
[한 사람이 잡수는데는 충분하지요.]
봉칠은 등에 통증을 느끼고 정말 등심을 베낸 줄 알고 혼비백산했는데 호비
가 다시 묻는 것이 아닌가?
[간볶음에는 어떤 재료를 쓰는 것이요? 그리고 돼지 머리고기는 어떤 재료를
쓰는 거지요?]
봉칠은 흠칫하며 생각했다.
(간볶음이나 머릿고기를 요리한다니? 그렇다면 이 놈은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마룻바닥이 쿵!하는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쳐박으며
부르짖었다.
[원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분부를 내려 주십시요. 제발 소인의 미천
한 목숨은 살려주십시요!]
호비는 그가 이만하면 혼쭐이 났으리라고 생각하고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그래도 봉천남을 도와 나쁜 짓을 할텐가?]
[소인이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좋아! 빨리 귀빈석에 있는 손님들을 모두 쫓아내고 아랫층의 손님
들은 하나도 가지 못하도록 하게!]
봉칠은 소리쳤다.
[사환, 빨리 이 호걸 나으리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게!]
누상의 손님들은 부자가 아니면 큰 장사치라 하나같이 사건에 말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작부터 뺑소니치려고 했으나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는 손에 무
기를 든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 나가려해도 나가지 못하던 참이었다. 호비의 말
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허둥지둥 떠나갔다. 아랫층에 있는 손님들은 모두
다 궁핍한 사람들이고 열에 일곱 여덟 명은 봉칠에게 당한 적이 있어 소란피우
는 것을 보고 모두 통쾌해하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호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내가 한 잔 사는 것이니 친구들의 음식값은 모두 내 앞으로 달아놓
고 한 푼도 받아서는 안돼! 빨리 제일 좋은 술과 안주로 손님을 대접하고, 거
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마리 맹견을 잡아 개고기를 요리하도록 하게.]
그가 한마디 한마디 분부할 때마다 봉칠은 네, 네, 대답을 했다. 사환들이
조금이라도 행동이 느리거나 우물쭈물하면 호비는 식칼을 쳐들고 그 뚱뚱한 숙
수에게 물었다.
[내장탕에는 어떤 재료를 쓰는거요? 그리고 돼지갈비에는 어떤 재료요?]
숙수는 겁을 먹고 그대로 대답했으며 이렇게 되자 봉칠은 사색이 되어 끊임없
이 재촉을 했다.
사환들은 호비가 자기네들을 해꼬지할까 두려워 전전긍긍했고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초조하게 생각했다.
(봉나으리는 어째서 아직 오시지 않는 걸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저 흉
칙한 놈이 우리를 족칠텐데......)
호비는 사환들이 자기의 분부를 따라 하나하나 어김없이 처리하는 것을 보고
성큼성큼 아래층으로 걸어내려가 커다란 대접에 술을 따르고 입을 열었다.
[오늘 소제가 한턱을 내는 것이니 여러분들은 마음껏 드시고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더 시키도록 하시구려. 만일에 조금이라도 대접을 소홀히 한다면 나는
불을 질러 이 주루를 태워버리고 말겠소.]
뭇 손님들은 속으로는 기뻐했으나 봉씨 집안의 위세에 눌려 소리없이 음식만
먹었다.
불청객(不請客)
호비는 누상으로 올라가 세 장정의 혈도를 풀어주고 쇠사슬을 각자 목에 씌웠
다. 혈도를 짚지 않았던 세 명의 장정들도 쇠사슬을 목에 씌워 아래층으로 데리
고 내려왔다. 호비는 손님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봉천남의 전당포는 어디있소? 나는 이 여섯 마리 맹견을 저당잡혀야겠소.]
[동쪽으로 나가 길을 건너면 높다랗게 쌓은 담장이 있는 곳이지요.]
[고맙소이다.]
그는 여섯 명을 끌고 주루에서 떠났다. 구경꾼들은 산 사람을 어떻게 저당잡
히려는지 보려고 멀리서 뒤따랐다.
호비는 한손으로 여섯 명을 묶은 쇠사슬을 움켜쥐고 영웅 전당포 앞에 이르러
큰소리로 호통쳤다.
[영웅호걸이 개를 저당잡히려고 왔소!]
그리고 여섯 명의 장정들을 끌고 높다란 계산대 앞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주인장, 여섯 마리의 맹견을 끌고왔소. 한마리에 천 냥씩 저당잡히겠소.]
계산대에 앉아있던 관리인은 깜짝놀라고 말았다. 이 영웅전당포는 봉나으리가
운영하는 것이고, 십여 년 동안 소란을 피운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떤 미친
놈이 와서 사람을 저당잡히려는 것일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자세히
보니 끌려온 사람은 바로 봉씨 저택의 장정들이 아닌가? 그는 더욱더 놀라며 말
했다.
[당신..... 당신은 무엇을 저당잡히겠다고 했죠?]
호비는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 귀머거리요? 나는 이 여섯 마리의 맹견을 저당잡히려하는데 한 마리에
일천 냥이니 모두 은자 육천냥 아니오. 이런 조건이면 당신이 훨씬 득을 보는
거지 뭐!]
관리인은 그가 일부러 소란을 피우려고 온 것임을 알고 살그머니 옆에 있는
조수에게 눈짓하여 호원무사(護院武師)를 불러 오도록 했다.
그는 호비에게 깍듯이 말했다.
[전당포의 규칙에 의하면 살아있는 물건을 저당잡힐 수 없으니 귀하께서는 용
서하십시오.]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살아있는 개를 당신네들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죽은 개를 저당잡
히도록 하지.]
여섯 명의 장정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유사야(兪師爺), 빨리 받아주시오.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외다.]
전당포에서 관리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계산에 밝은가? 어찌 함부로
은자 육천 냥을 내놓겠는가? 그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는 일단 앉으시지요. 차 한 잔 하실까요?]
호비는 말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돈이 필요하니 먼저 죽은 개로 만든 다음 차를 마시도
록 하겠소.]
사방을 살펴보다가 대문 옆으로 가서 검은 칠을 한 대문을 떼어내었다. 그 유
씨 성을 가진 관리인은 사태가 자꾸만 꼬이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이것 보십시요. 이것 보십시요. 손님,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
호비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발로 걷어차 여섯 명의 장정들을 모두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문짝을 들어 여섯 사람의 몸 위에 던졌다.
관리인은 부르짖었다.
[당신 미쳤소? 당신은 이곳이 어딘지나 아시오? 이 전당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난 말이외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들이 얌채같고 각박한 것을 보니 불산진의 많은 사람들이 네 놈들에게
쓴 맛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계산대 앞에 이르러 냅다 관리인의 변발을 잡고 계산대에서 끌어내 역시
문짝으로 눌러놓았다. 그는 다시 입구쪽으로 걸어가 문가에 있는 커다란 석고
(石鼓)를 안아 문짝 위로 내던졌다.
이 석고는 오백 근도 더 되었다. 내동댕이치자 문짝에 눌려있던 일곱 명은 일
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아파서 오줌똥을 쌀 지경이었다. 구
경꾼들과 계산대 안에 조수들 역시 경악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호비는 다시 다른 석고를 안아들고 부르짖었다.
[고약한 개새끼들이 아직도 죽지 않은 모양이군. 석고를 하나 더 보태야겠
군!]
호비는 또 하나의 석고를 허공으로 던져올렸다. 그 석고는 금방이라도 문짝
위로 떨어질 것 같았다. 순간 뭇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순간 호비는
벼락같이 떨어지는 석고를 사뿐히 안고 문짝 위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되자 문짝 위에는 이미 천여 근이 넘는 무게가 누르고 있었다. 비록
일곱명이 나누어 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등골이 부러질 지경이었
다.
유씨 성의 관리인은 큰소리로 외쳤다.
[나으리! 목숨만...... 빨리 은자를 가지고 오너라!]
호비는 눈알을 부라렸다.
[뭐라구? 나보고 은자를 가지고 오라구?]
유씨 성의 관리인은 몸이 비쩍 마르고 약한 편이라 이미 내려 누르는 무게에
숨을 헐떡거리며 재빨리 말했다.
[아니죠..... 아니죠..... 나는 전당포 사람들에게 은자를 가져오라고 했지
요......]
전당포 안의 조수들은 상황이 험악한 것을 보고 별수 없이 한 봉지씩 은자를
들고 나왔다. 일백 냥이 한 봉지씩이라 모두 육십 봉지인데 호비는 그것들을 다
시 문짝 위에 쌓고 입을 열었다.
[여섯 마리의 고약한 개를 육천 냥에 저당잡혔지만 이 전당포 영감은 어떻게
계산해야 되는거요? 설마하니 위풍당당한 영웅전당포의 대 관리인 나으리께서
개새끼 한 마리 값도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오? 적어도 삼천 냥은 나갈 것 같소
이다.]
은자 육천 냥이라면 약 삼백 칠십여 근이나 나갔다. 그 무게가 다시 문짝을
내리누르니 일곱 사람은 더욱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어지러운 형국에 갑자기 문밖에서 누가 부르짖었다.
[어느 후레자식이 호랭이 간이라도 삶아먹었나? 왜 봉나으리 가게에 와서 지
랄을 한단 말이냐!]
사람들이 분연히 양쪽으로 물러났으며 두 명의 사내가 달려 들어왔다. 두 사
람은 똑같이 체구가 우람하고 검은 옷에 검은 바지에 하얀 단추가 줄줄이 달린
것이 무사의 옷차림이었다.
호비는 몸을 흔들하더니 어느덧 두 사람의 등뒤로 돌아가 뒷덜미를 하나씩 움
켜잡았다.
이들 두 사람은 바로 영웅전당포의 호원무사였다. 할 일이 없어 도박장에서
놀음을 하다가 전당포에서 누가 소란을 피운다는 전달을 받고야 총총히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심심하던 차에 몸이라도 한번 풀자 하고 달려왔는데 상대방의
모습을 똑똑히 보기도 전에 요해를 잡혀 들어 올려진 것이다.
호비가 그들은 잡아흔들자 한 사람이 몸에서는 일고여덟 장의 천구패(天九牌)
가 떨어졌고, 다른 한 명의 몸에서는 두 개의 주사위가 떨어졌다.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하, 원래 노름쟁이였군.]
쿵! 쿵! 두 사람의 머리를 서로 박치기 시키고는 두 사람을 냅다 문짝 위로
내동댕이쳤다. 이 호원무사들은 무공이 평범했다. 하지만 거들먹거리며 놀고먹
어 몸무게는 대단했다. 문짝에 다시 사백여 근의 무게가 가해지자 일곱 명은 신
음소리를 내려고해도 신음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전당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주인은 사람이 죽을까 두려워 재빨리 사환에게 다
시 삼천 냥의 은자를 내놓게 명령하였다. 그는 호비에게 연신 절을 하며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도 속으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봉나으리께서는 친히 달려와서 이 일을 처리하지 않으실까?)
호비가 주루 위에서 사람돌에게 개고기를 요리하도록 하고 전당포에 와서 사
람을 잡히는 의도는 본래 봉천남을 자극하여 나서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상가보의 무쇠로 만들어진 대청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지극히 조심을 했다. 또한
봉천남이 남패천(南覇天)이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집안의 설치가 상가보보다 더
욱 무서우리라는 생각도 했다.
속담에 하늘을 나는 용은 땅에서 기는 뱀들과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만약에 그가 봉천남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괴롭히려다가는 그의 꾀에 넘어갈 것
을 염려하여 먼저 주루에서 소란을 일으킨 후 다시 전당포를 찾아와 발칵 뒤집
어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봉천남은 시종 얼굴을 내밀지 않아 호비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삼천 냥의 은자가 옮겨지는 것을 보고 뒷짐을 진 채 머리로 문짝을 가리
키며 말했다.
[모두 그 문짝 위로 내려놓으시오.]
사람들은 문짝 위에 내려 놓는다면 다시 백 팔구십 근이 가중된다는 것을 알
았지만 감히 그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한봉지씩 살살 문짝 위에다 얹어 놓았다.
호비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당신네 전당포는 황제가 열고 있는 것이오? 어째서 이토록 제멋대로 노는거
요?]
책임읕 맡고 있는 주인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나리께서는 또 어떤 분부가 계시온지요?]
호비는 나무라듯 말했다.
[물건을 잡히는데 어째서 전당표를 주지 않으시오?]
전당포의 일을 도맡고 있는 주인은 속으로 여섯 명의 장정들이야 가죽이 거칠
고 살이 두둑해서 잠시 눌려도 별탈이 없겠지만, 유씨 성의 관리인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아이고, 아이고.'하며 초상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연신 부르짖었다.
[빨리 전당표를 쓰도록 하게.]
계산대의 조수은 어떻게 전당표를 써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주인
이 재촉을 하자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봉씨 저택의 장정 여섯 명과 관리인 한 사람을 저당함. 이 사람들은 가
죽이 터지고 살이 문드러졌으며 손발이 부족하기에 문은(紋銀) 구천 냥에 저당
잡음. 일 년의 이자는 이푼, 전당표를 가져와서 찾아가도록 함. 벌레나 개미,
쥐들이 깨물거나, 전란으로 인한 손실은 천명이라 다툴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함.
삼 년을 기한으로 하되 찾지 않을 경우에는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겠음.)
원래 전당포의 규칙은 설사 손님이 저당잡힌 것이 완전한 신품이라 하더라도
전당포에서는 무어가 모자라느니 헤지고 깨졌느니 하는 문구를 넣어 물건을 찾
아갈 때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당포에서 산 사람을 저당잡은 적은 일찌기 없었던 일이라 그 조수는
상투적인 문장에 습관이 되어, 가죽이 터지고 살이 문드러졌으며 손발이 부족하
다는 등의 말을 써넣게 된 것이었다.
주인이 전당표를 공손히 내밀자 호비는 웃으며 받아 갈무리하더니 문짝 위에
올려놓은 두 명의 무사를 잡아 일으키며 호통을 내질렀다.
[석고를 내려놓게!]
두 명의 무사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가물가물했지만 힘을 합해 하나 하나
떼매어 내려놓았다.
석고를 내려놓자 호비는 입을 열었다.
[좋소. 이제 우리들은 도박장을 구경하도록 하지. 두 사람은 은전을 메고 나
를 따라 오시게.]
두 명의 무사는 그에게 한번 당하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에서 구천 냥의 문은을 문짝 위에 싣고 호비의 뒤를 쫓아왔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그가 맨손으로 불산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전당포를
이겨내는 것을 보자 모두 신이 나서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봉나으리에게
책을 잡히게 될까봐 감히 호비에게 다가와 말을 걸지는 못했다.
호비가 도박장으로 가서 소란을 피우겠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용기백배해서
뒤를 따랐는데 갈수록 따라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도박장은 불산진에 있는 황폐한 절간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대문에는 <영웅
회관>이라는 커다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호비는 성큼성큼 문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에는 새카맣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사위를 던져 큰숫자에 돈을 건
사람은 큰 숫자가 나왔을 때, 작은 숫자에 돈을 건 사람은 작은 숫자가 나왔을
때 돈을 따먹곤했다.
손님을 통제하고 있던 보관(寶官)은 큰 눈망울을 부리부리했으며 불산진의 명
산품인 교주(膠綢)로 된 저고리와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저고리의 앞섶자
락을 활짝 열어젖혀 가슴팍의 시커먼 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보관은 호비가 들어오며 뒤에 두 명의 무사가 커다란 문짝에 백여 봉지나 되
는 은자를 들고 들어오자 어리둥절하여 두 무사를 불렀다.
[사피장(蛇皮張), 자네 뭐하는 것인가?]
그 장가라는 무사는 호비쪽으로 입을 삐쭉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이 호걸 나으리께서 한번 놀아보시겠답니다.]
보관은 사피장이 공손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봉나으리가 평소에 많은 사람
들과 교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이가 젊기는
하지만 십중팔구 그 어르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좋아, 네가 은자를 통채로 우리에게 받치러 왔구나. 그렇지, 식당을 하는 사
람은 배가 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박장을 벌이는 사람은 부자 나으리를
두려워 하지 않는 법이지 ? 다시 두 궤짝을 더 들고온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을
거야.)
그는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 분의 성씨는 어떻게 되오? 자,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호비는 오만하게 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의 성씨는 발이고, 이름은 봉모라고 하오.]
보관은 어리둥절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응, 니가 일부러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고 왔구나.)
보관은 투배(投盃)를 한번 흔들어 거꾸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수십 명의
도박꾼들이 다투어 돈을 걸었다. 어떤 사람은 큰 숫자에 걸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숫자에 걸었다.
호비는 일부러 시간을 끌어 봉천남이 친히 나서게 되었을 때 그와 한번 겨루
어 볼 생각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앉아 있었을 뿐 돈을 걸지는 않았다.
보관이 투배를 열어젖히자 세 알의 주사위는 모두 다 11점이 되어 있었다.
큰 숫자에 건 도박꾼들은 다투어 환호성을 내질렀고 작은 숫자에 건 도박꾼들
은 모두 맥이 빠져 고개를 숙였다.
보관은 잇따라 세번이나 큰 숫자가 나오도록 하였다.
혹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박이란 열 판 가운데 아홉 판은 속임수다. 봉천남이 그토록 날뛰는 것을
보면 도박장에서도 많은 수작을 벌이고 있을텐데, 그 야료를 알아낸 후 한바탕
소란을 피워야지.)
그는 즉시 투배를 주시하면서 주사위가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사
위 안에다가 납을 넣은 것이 아닌지 알아보려 했다.
잠시 들어 본 결과 주사위에 다른 수작을 부리는 기미는 없었다. 그는 암기
를 연마했고 바람소리에 신속히 반응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각이
지극히 영민하여 설사 어둠 속에서 암기가 날아들어도 그 기척만으로 즉시 암
기가 날아오는 방향과 종류, 암기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
다.
조반산과 같은 대가는 이전에 상가보에서 등뒤에서 암기소리를 듣고 상대방이
숭산 소림사의 불의대사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맞출 정도로 정묘했다.
호비의 청각력은 조반산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한동안 듣게 되자 어
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사위가 떨어질 때 여섯 면은 각기 그 소리가 약
간 차이가 있었다. 비록 그 차이는 미세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내력의 정심하고
최상승의 암기수법을 가진 사람이 들을 때는 자연히 분간할 수 있었다.
호비는 그 보관이 던지는 것을 눈여겨 본 다음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보관, 돈을 거는데 한도가 있소?]
보관은 큰소리로 말했다.
[광동성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다시피 남패천의 도박장에서는 결코 제한을
두지 않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어찌 영웅회관이라 할 수 있겠소.]
호비는 미미하게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제한을 둔다면 영웅회관이 아니라 구웅회관(狗熊會館)이 되겠지.]
그는 주사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자 16점이라는 것은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
리고 말했다.
[사피장, 일천 냥을 큰 숫자에 거시오.]
보관은 수십 년간 도박장에서 굴러 먹었지만 큰 숫자가 나왔는지 작은 숫자가
나왔는지는 투배를 열어보아야만 알았다. 그런데 호비가 대뜸 일천 냥을 걸자
어리둥절하며 투배를 열어보자 두 알은 6점이고 하나는 패점이 아닌가?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조수에게 일천 냥을 물도록 했다. 이어 그는 주사위
를 소리가 엇갈리도록 마구 흔들어댔다. 호비는 똑똑히 들을 수 없어 팔장을
낀 채 돈을 걸지 않았다. 투배를 열어 젖히고 보니 8점이라는 작은 숫자가 나왔
다. 곧이어 호비는 이천 냥을 작은 숫자에 걸었고, 투배가 젖혀지자 아니나 다
를까 4점이라는 작은 숫자가 나왔다.
이와 같이 대여섯 번을 걸자 어느덧 만천 냥이라는 판돈이 수북히 쌓였다. 보
관은 손에 땀을 쥐며 투배를 쳐들어 맹렬히 흔들어 놓았다.
호비는 투배 안의 주사위가 14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
었다.
[사피장, 이만 냥을 모두 다 큰 숫자에 걸게나.]
두 명의 무사가 문짝 위에 올려놓은 은자를 한봉지 한봉지씩 모조리 탁자 위
에 옮겨놓았다.
그러자 보관은 살짝 투배를 들고 훔쳐보았다. 주사위는 14점읕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손이 정말 민첩했다. 새끼손가락으로 투배를 가볍게 밀어
투배의 가장자리가 주사위에 부딪치며 6점짜리 주사위가 뒤집어져 14점이 9점으
로 변하고 말았다. 작은 숫자가 된 것이었다. 이 수법은 수 년간 고된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정말 연성할 수 없는 것으로 무공으로 말한다면 지극히 무서운
절초라 할 수 있었다. 보관은 그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생각하고 이번
에야말로 너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고 의기양양해져서는 입을 열었다.
[모두들 돈을 걸었소?]
호비는 왼손으로 한 무더기의 은자를 탁자 중앙으로 밀며 말했다.
[여기에 이만 냥의 은자를 걸었소. 작은 숫자라면 모두 다 당신이 차지하도록
하시오.]
보관은 부르짖었다.
[좋소, 좋아! 이건 따논 당상이다!]
그는 투배를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주사위는 12점을 나타내고 있었
다.
다른 도박꾼들돌은 이미 손을 멈추고 모두 가슴을 졸이며 구경하고 있었다.
열어젖힌 것이 큰 숫자인 것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 소리는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은 한평생 이토록 커다란 도박판을 본 적이 없었다.
호비는 껄껄 웃으면서 발을 걸상 위에 턱 걸치고 외쳤다.
[이만 냥의 은자요. 빨리 내놓으시오!]
보관의 손이 아무리 빠르다고한들 어찌 호비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호비
는 보관이 어떻게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세 알의 주사위를 틀림없이 큰 숫
자에서 작은 숫자로 바꾸어놓은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왼손으로 은자를 내밀며 오른손을 탁자 밑으로 뻗쳐 투배의 아
랫쪽 탁자 밑을 가볍게 퉁겼다. 세알의 주사위는 본래 3점, 1점, 5점으로 모두
9점이었는데 그가 알맞게 퉁겨 주사위가 일제히 뒤집어지며 4점과 6점 그리고 2
점으로 바뀌어 12점이라는 큰 숫자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보관은 안색이 흑빛이 되어 꽝! 탁자를 두드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사피장,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감히 봉나으리의 도박판에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사피장은 더듬거렸다.
[나는....나도 모른다오.....]
호비는 재촉을 했다.
[빨리 내놓시오. 빨리 내놔! 은자 이만 냥이면 이 나으리는 충분하니 더 도박
을 하지 않겠소.]
보관은 탁자를 내려치며 대뜸 욕을 했다.
[니기미! 이놈, 내 네놈이 수작을 부린 것을 모를 줄 아느냐?]
호비는 그가 광동 사투리로 욕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웃읏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이 탁자 두드리는 것을 좋아한다면 우리 탁자 두드리는 것으로 내
기를 해도 되지!]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탁자를 한번 두드리고 왼손으로 후려치자 한쪽 모서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나갔다. 이 것을 본 보관은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못했다. 호
비는 발을 들어 탁자를 엎어뜨리고 어지러운 틈을 타서 뺑소니치려고 했는데 몇
명의 건달인 도박꾼들이 덩달아 야료를 부렸다.
[돈을 뺏자!]
호비는 오른손을 뻗쳐 보관의 발을 잡고 거꾸로 들어 머리를 탁자에 박치기하
도록 만들었다. 대뜸 탁자에 구멍이 뚫리며 머리통이 탁자에 꽂히게 되었다. 보
관은 탁자 위에서 꺼꾸로 손과 발을 마구 허우적거렸고, 그 모습은 정말 가관이
었다.
뭇도박꾼들은 일제히 놀라 부르짖으며 다투어 물러섰다.
갑자기 대문에 한 젊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살 정도의 나이에 몸에는
남색 비단 장삼을 걸치고 섭선으로 부채질하면서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에서 친구 분이 이렇게 찾아오셨소? 불초가 멀리 마중을 하지 못한 점을
양해해 주시구려.]
호비는 그 사람의 발걸음이 경쾌하여 무공이 강한 것이 분명한지라 만만치 않
게 생각했다.
그 젊은이는 섭선을 접더니 호비에게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씨의 성씨는 어떻게 되는지요?]
호비는 그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고 역시 읍을 하며 말했다.
[아직도 귀하의 존성대명을 가르침받지 못했구려.]
그 젊은이는 대답했다.
[소제의 성은 봉가입니다.]
호비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l 그렇다면 불초의 이름이 실례가 되겠구려. 나의 성은 발씨이고 이름은
봉모이외다. 노형은 봉천남과 어떻게 되는 사이외까?]
[그 분은 저의 가친이외다. 가친께서는 귀하께서 왕림하셨다는 말씀을 들으시
고 본래 친히 영접하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요긴한 일에 묶여 나오실 수 없기에
특별히 불초에게 명을 하여 귀하를 모셔오라고 하셨지요. 저의 집에 가셔서 약
주라도 한잔 드시도록 말입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영웅 전당포의 두 호원무사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틀림없이 너희들이 발나으리께 무례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 어르신께서 성
이 나신 것일게다. 그래도 사죄를 하지 못하겠느냐?]
두 호원무사는 연신 '네, 네,' 하면서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고 인사를 했다.
[소인이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라 뵈었습니다.]
호비는 미미하게 냉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너희들이 어떤 꿍꿍이 속이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하자.)
보관은 여전히 머리통을 도박판의 탁자에 쳐박고 두 발을 춤추듯하며 연신 '
아! 아!' 소리를 내질렀다. 그 젊은이는 그의 등을 잡고 가볍게 위로 쳐들어 그
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탁자는 여전히 그의 목에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탁자 다리가 하늘로 향한 것이 마치 목에 칼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보관은 탁자의 두 다리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우스꽝스러웠으며 매
우 낭패한 몰골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나으리, 이 사람...... 이 사람......]
그는 호비를 바라보더니 감히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호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내가 딴 돈은 어떻게 되었소? 영웅
회관에서 설마 떼거지를 쓰자는 것은 아니겠지 ?]
젊은이는 보관을 꾸짖었다.
[발나으리께서 딴 은자를 빨리 내놓도록 해라! 왜 이리 꾸물꾸물대느냐?]
그러면서 탁자의 양 모서리를 잡고 두 손을 바깥쪽으로 떨쳤다. 뚝! 하는 소
리가 나면서 탁자가 대뜸 두 조각이 났다. 이 재간은 깨끗하기 이를데 없어 도
박판의 뭇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보관은 작은 주인이 옆에 있자 그를 믿고 담이 커져 호비를 매섭게 바라보더
니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술수를 부렸답니다.]
젊은이는 호비에게 들으라는 듯이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 없는 소리! 저 분은 영웅호걸이신데 어찌 그런 술수를 쓴단 말인가?
도박판의 은자가 부족하다면 빨리 사람을 시켜 전당포에서 가져오도록 해라!]
호비는 그 말이 광동 사투리라서 잘 알아듣지 못했으나 십중팔구 속임수를 쓰
거나 요령을 부렸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암암리에 생각했다.
(이 젊은이는 무공이 약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도 대단하구나. 나도 조금
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되겠구나.)
젊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나으리의 은자는 한 문은도 적게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정
의 소인배들은 눈알이 콩알만해 한번도 참된 영웅호걸의 기개를 본 적이 없으니
발나으리는 유념하실 필요없습니다. 이제 발나으리께서는 저희집으로 자리를 옮
기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는 발봉모라는 세 글자는 결코 그의 본명이 아니며 일부러 봉씨 집안에 시
비를 걸려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여전히 '발나으리, 발나으
리' 하면서 말을 했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봉황이 너무 많구려. 그런데 나으리의 존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젊은이는 그의 말투가 비아냥거리는 것임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며 여전히 말
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소제의 이름은 일명(一鳴)이라 합
니다.]
호비는 껄껄 웃었다.
[불초는 한창 신이 나서 도박을 하고 있었지요. 몇 시진 더 이곳에서 놀려고
하는데 차라리 당신의 부친을 이곳으로 모셔와 서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구
려.]
보관은 그가 또 도박판을 벌인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흑빛이 되어 재빨리 말
했다.
[아니, 아니외다......]
봉일명은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자네가 끼어들 개재가 있는가?]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호비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가친께서는 한번도 실례되는 일을 한 적이 없답니다. 발나으리께서 불산에
왕림하셨다는 말을 듣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으며 당장 달려와 만나뵈려고 하셨
지만 마침 오늘 경사에서 두분의 어전시위들이 오셔서 가친은 필히 그들을 모
셔야 하는 처지라 이렇게 소제가 왔습니다. 발나으리께서는 양해를 해주십시
요.]
호비는 냉소를 했다.
[어전시위라? 과연 대단한 벼슬아치들이구려. 일명형, 소제는 강호에서 별호
가 하나 있는데 아마 일명형도 아시리라고 믿소이다.]
봉일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구나. 만약 그의 내력을 어느
정도 안다면 상대하기가 휠씬 쉬워질 것이다.)
봉일명은 그가 별호를 들먹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제는 견문이 좁아 모르오니 발나으리께서 알려주시지요?]
호비는 싸늘히 코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흥! 그래도 일명형은 무림에 몸을 담고있는 사람인데 어찌 대명이 쟁쟁한 살
관고리(殺官 吏) 발봉모를 모른단 말이오?]
봉일명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나으리는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호비는 갑자기 왼손을 뻗쳐 그의 앞섶자락을 잡고 호통을 내질렀다.
[간덩이가 부었군! 당신이 감히 나의 봉황고기를 뱃속으로 삼키다니!]
봉일명은 더 참을 수가 없어 오른손을 휙! 휘두르며 그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
다. 호비는 재빨리 손을 뒤집어 봉일명의 왼쪽 빰을 한대 갈기고 그 여세를 몰
아 오른손을 잡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내 봉황고기를 물어내시오?]
봉일명의 집안은 무학의 조예가 깊은만치 그의 무공 역시 약하지 않았다. 자
기의 오른손이 마치 쇠집게에 찝힌 듯한 느낌을 받자 재빨리 오른발을 들어 호
비의 아랫배를 걷어차려 했다. 호비는 발을 들어 허공에 뜬 그의 발을 팍 밟아
버렸다.
봉일명은 다시 쇠망치에 찍힌 듯한 아픔을 느끼고 아악! 하는 비명을 내질렀
다. 호비는 왼손을 냅다 뻗쳐 봉일명의 오른쪽 뺨을 갈겼다. 이렇게 되자 봉일
명의 뺨은 마치 돼지 간처럼 벌겋게 부풀어 오르게 되었다.
호비는 큰소리고 부르짖었다.
[여러 친구들은 잘 들으시오. 나는 천 리 먼 북쪽땅에서 불산진까지 찾아와
이곳에 살고 있는 종아사에게 봉황고기를 한조각 샀소이다. 그런데 그만 이 녀
석이 덮석 한 입에 집어삼키고 말았구려. 여러분들은 이 자를 혼내주어야 한다
고 생각하지 않소 ?]
도박판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
만 그들은 그가 핍박을 박고 죽은 종씨집 셋째 아들의 원한을 갚고 억울한 누명
을 벗겨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봉일명은 발등이 호비에게 밟혀있는 상태였고 한 손마저 잡혀있어 전신을 꼼
짝할 수 없었다.
이때 사람들 중에서 손에 짧은 담뱃대를 들고 있는 한 노인이 걸어나왔다.
바로 영웅전당포를 관장하고 있는 주인이었다. 그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앉아
구천 냥이라는 은자를 빼앗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편으로 급히 사람을 보
내 봉천남에게 전갈을 하고 한편으로는 살그머니 뒤따라와 영웅회관의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작은 주인이 잡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웃음을 띠우며 입을 열었
다.
[호걸나으리, 이 분은 우리 봉나으리의 외동아들이외다. 봉나으리는 이 외동
아들을 자기의 목숨보다 아끼고 계시오. 호걸나으리께서 은자를 사용하시겠다면
얼마든지 분부를 하십시요. 제발 우리 작은 주인만은 놓아주십시요.]
호비는 입을 열었다.
[누가 이 사람보고 내 봉황고기를 훔쳐먹으라고 했소? 봉나으리의 외동아들이
라면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쳐먹어도 된다는 거요?]
전당포 주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걸 나으리께서는 우스갯소리도 잘 하시는군요. 천하 어디에 봉황고기가 있
다는 말입니까? 설사 있다하더라도 우리 작은 주인은 절대 훔쳐먹지 않는답니
다.]
호비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 봉황고기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의 보약으로 값을 따질수 없는 보물이외
다. 그리고 일단 먹으면 즉시 온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살이 찌게 되는 것인데,
자! 여러분들은 보십시요. 이자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고 살이 찌지 않았소? 그
런데도 나의 봉황고기를 훔쳐먹지 않았단 말이오?]
전당포 주인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호걸나으리께서 손으로 때렸기 때문에 부어오른 것입니다. 봉황고기와
는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호비는 큰소리로 여러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두들 나서서 올바른 평을 해주시구려. 이 녀석이 내 봉황고기를 훔쳐먹지
않았소?]
도박판에서 빌어먹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태반은 봉천남의 부하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이 지방의 건달이나 파락호(破落戶)의 자제들이라 하나같이 봉천남의
위세를 두려워했다. 호비가 그와 같은 질문을 하자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다.
[당신의 그 봉황고기라는 것을 우리는 보지도 못했소.]
[봉나으리는 결코 당신의 물건을 훔쳐먹을 사람이 아니오.]
[봉나으리의 저택에는 음식이라면 얼마든지 있는데 왜 남의 물건을 훔쳐먹겠
소?] [웃기지 마시오! 웃기지 마시오!]
[호걸은 빨리 그를 놔주고 더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시오.]
호비는 고개를 끄덕했다.
[좋소. 당신네들 모두가 훔쳐먹지 않았다면 설마하니 내가 그를 무고했단 말
이오. 그렇다면 우리 북제묘로 가서 따지도록 합시다.]
뭇사람들은 어리둥절했으나 즉시 종사수가 북제묘에서 칼로 아들의 배를 가른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전당포 주인은 놀라 암암리에 생각했다.
[일단 북제묘에 이르게 된다면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는 연신 호비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읍을 하며 말했다.
[호걸나으리께서 옳았소이다. 우리들이 모두 착각했소이다. 작은 주인께서 호
걸의 봉황고기를 훔쳐먹은 모양입니다. 호걸께서 배상하라는 대로 배상을 하지
요.]
호비는 냉소를 했다.
[당신은 정말 쉽게 말하는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하지 않는데
북제묘로 가서 똑똑히 알아보지 않는다면 내 어찌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있겠
소?]
그는 봉일명을 옆구리에 끼고 은자도 챙기지 않은 채 성큼성큼 도박장에서 걸
어나와 길을 물어 북제묘를 향해 걸어갔다.
북제묘는 매우 규모가 크고 웅장한 신사(神祠)였다. 마당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중간에는 커다란 돌로 만든 거북이와 뱀이 떡 버티고 앉아있었다.
호비는 봉일명을 끌고 대전으로 갔다. 신상의 석판(石板) 위에는 아직도 핏자
국이 남아 있었다. 종사수가 핍박을 받고 아들의 배를 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참혹한 광경을 상상하자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는 봉
일명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북제신상을 향해 낭랑히 입을 열었다.
[북제나으리, 북제나으리, 그대의 위엄과 신령하심을 믿사옵니다. 이 못난 백
성이 억울한 일을 풀고 원한을 갚고자 왔소이다. 이 도적이 나의 봉황고기를 훔
쳐먹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먹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등뒤에서 바람이 일면서 좌우양측에서 암습을 해
왔다. 호비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려 두 사람을 피하며 양손으로 두 사람의
등을 밀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바닥에 부딪히며 기절을 했다.
순간 다시 한 사람이 노갈을 터뜨리며 덮쳐들었다.
호비는 그의 발걸음이 웅후한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구나.)
호비는 몸을 기울이며 달려오는 대한을 잡아당겼다. 칼빛이 번득하며 무쇠같
이 건장한 대한이 그의 곁을 스칠듯 지나가며 곧장 봉일명의 머리를 향해 박치
기를 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 대한은 황급히 손과 팔을 옆으로 벌리고 칼
로 바닥을 짚었다. 칼이 바닥의 푸른 벽돌을 찍자 벽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어올
랐다.
호비는 탄성을 내질렀다.
[절표하군!]
호비는 왼발을 내딛어 대한의 팔목을 지그시 밟아버렸다. 그 대한은 자지러지
는 소리를 내지르며 손에 든 칼을 놓았다. 호비는 떨어진 칼날을 오른발로 쳐올
려 칼을 허공으로 솟구치도록 만들어 잡아쥐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배를 가를 칼이 없어 걱정하던 차인데, 황송하게도 당신
이 이렇게 달려와 칼을 주다니. 정말 수고하셨소.]
대한은 노기가 극도에 달해 힘을 주어 바둥거렸다. 호비가 왼발의 힘을 거두
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대한은 뚝심이 아주 센 사람이었다. 그는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하여 호비에게 곧장 덮쳐들었다.
호비는 슬쩍 몸을 비켜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왼손으로 살이 디룩디룩 찐 그의
볼기짝을 거머쥐고 앞으로 밀면서 호통을 내 질렀다.
[하늘로 오르시지!]
달려들던 기세를 빌어 호비가 미는 힘을 보태자 대한은 몸을 주채하지 못하고
위로 쏜살같이 날아오르게 되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는 가운데 날
아오르는 기세가 북제묘의 지붕을 뚫고 나갈 것 같았다.
순간 그는 황망히 두 손을 뻗쳐 대전 지붕 한복판에 있는 대들보를 얼싸안았
다. 가까스로 지붕에 부딪혀 정수리가 박살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허공애
매달리게 되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땅바닥과는 수 장이나 떨어져 머리가 어질
어질했다. 그는 경신법을 연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외공은 약한 편이 아니지
만 몸집이 워낙 거구라 감히 뛰어내리지 못했다.
이 대한은 오호문에서 세번째로 손꼽히는 사람으로 봉천남의 심복이라 할 수
있었고 불산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 했다. 그러던 그가 지금 사람들 앞
에서 대들보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낭패한 꼴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호비는 봉일명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봉일명의 허연 뱃가죽이 드러났다. 호비는 칼날을 비껴들고 대전의 뭇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 자가 봉황고기를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모두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똑똑히
보시오. 나중에 괜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나를 탓하지 마시오.]
옆에 있던 너댓 명이나 되는 향신(鄕神) 차림의 사람들이 일제히 다가와서 권
하듯 말했다.
[호걸 나으리, 그 귀한 손을 거두어 주시구려. 만약 배를 갈라 사람이 죽어버
린다면 큰일이 난다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아까부터 궁싯거리고 있었는데 틀림없이 봉천남과 한 콧구멍에
서 들락거리는 한통속일게다.)
호비는 고개를 돌리고 노기띤 표정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종사수가 자기 아들의 배를 가를 때 당신들은 어째서 말리지 않았소? 돈이
있는 집안의 자세는 가치가 있고 가난한 집 어린애는 가치가 없는 목숨이란 말
이오! 당신네들은 빨리 집에 가서 각자 아들을 이리 보내시오. 만약 보내지 않
는다면 내 스스로 집으로 찾아가겠소! 만약 나의 봉황고기를 이 녀석이 먹지 않
았다면 분명히 당신네 아들이 먹었을테니, 나는 하나 하나 배를 갈라 똑똑히 조
사해 보겠소!]
이 몇 마디의 말에 향신들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다시는 입을 딸싹하지 못했
다.
북제묘의 참극(慘劇)
그때 북제묘의 문밖이 소란해지면서 한 떼의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앞쪽에
있는 사람은 키가 크고 고동색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휘둘
러 대전에 모여있던 칠팔 명의 구경꾼들을 몇 자 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호비는 안하무인 격으로 손을 쓰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끝내 장본인이 나타나셨구나!)
호비는 형형한 눈을 하고 나타난 자를 아래 위로 훑어내렸다. 그 자는 두 가
닥 반백의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나이는 쉰 살 정도였다. 그리고 오른 손목
에는 커다란 옥팔찌를 끼고 있었고 왼손에는 비취로 만들어진 담뱃부리를 들고
있었는데 아주 귀하게 자란 대향신(大鄕臣)의 차림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이곳
에서 틀어앉아 장물을 취급하는 무림의 악패(惡覇)같지 않았다. 두 눈에 위엄이
서려있고 발걸음이 견실한 것이 십중팔구 무공이 고강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바로 오호문의 장문인인 남패천 봉천남이었다. 그는 경사에서 내
려온 두 명의 시위를 맞아 저택에서 주연을 마련하여 대접을 하고 있었다. 하인
들이 잇따라 달려와 누가 주루와 전당포, 도박장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보
고를 받았지만 어전시위 앞에서 자기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줄곧 상관하지 않
았으며 그까짓 일쯤이야 수하의 사람들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
러던 차에 아들이 사로잡혀 북제묘에서 죽을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총총히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지극히 무서운 적이 원한을 갚으려고 찾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 막상 호비를 보니 전혀 면식이 없는 시골 촌놈인지라 더 말을 하지 않고 몸
을 굽혀 아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호비는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늙은이는 정말 건방지구나.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군.)
호비는 그가 아들을 일으키려고 몸을 구부리는 순간 그의 허리를 내리쳤다.
봉천남은 몸을 돌리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호비의 손을 밀어 냈다. 순간 호비는
공력을 돋구어 그의 손을 후려쳤다.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며 봉천남은 하마터면
아들 위로 쓰러질뻔 했다.
그제서야 봉천남은 이 시골뜨기가 강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들을 일으
키려 하지 않고 오른 주먹으로 호비의 허리를 내지르려고 했다. 호비는 그의 초
식의 변화가 매우 신속한 것을 보고 과연 명가의 솜씨라고 판단했다. 호비는 칼
을 휘둘러 그의 주먹을 내려찍으려 들었다. 이 칼은 흉맹하기는 했지만 봉천남
이 손만 움츠리면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봉일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손을 움츠리게 된다면 아들이 칼에 맞게 될 형편이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순간, 그의 임기응변 역시 신속했다. 대뜸 신단(神檀) 위에 펼쳐놓
았던 탁자보를 휘말아 잽싸게 호비의 칼을 밀어냈다.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훌륭하군!]
그리고는 왼손을 뻗쳐 탁자보의 한쪽을 움켜잡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잡아당
기자 짝! 하며 탁자보는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봉천남은 조금도 상대방을 얕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뒤로 반장쯤 물러나자 제자가 그의 병기인 황금
곤(黃金棍)을 넘겨주었다. 이 금으로 된 막대기는 길이가 일곱 자나 되고 지름
은 한 치 반이나 되었으며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림에서 가장
호사스럽고 화려한 병기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황금곤을 한번 떨치더니 호비를
손가락질 하며 물었다.
[귀하는 어느 노사(老師)의 문하이오. 이 봉모가 어떤 점에서 귀하에게 죄를
지었는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호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의 봉황고기를 당신의 아들이 훔쳐먹었기 때문에 그의 배를 갈라 조사하여
분명히 밝혀야겠소.]
원래 봉천남은 숙동곤(熟銅棍)으로 영남쪽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오호문을 창립하고 불산진에 자리를 잡았으며 가업이 크게 일어난
후에는 숙동곤을 황금곤으로 바꾼 것이었다.
무가에서 사용하는 곤봉 중 제미(齊眉)는 가장 흔한 것이며 키에 맞게 제미곤
을 썼다. 키가 작은 사람은 다섯 치가 채 못되었고, 키가 큰 사람은 여섯 자
남짓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봉천남의 황금곤은 길이가 일곱 자나 되었고
황금으로 만들어 보통 철로 만든 곤봉보다 두 배나 무거웠다. 그가 자기 팔힘
이 뛰어난 것을 과시하려고 황금곤을 휘두르자 온통 금빛 광채로 뒤덮였고 그
기세는 강맹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호비의 말투로 보아 오늘일은 좋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황금곤
을 휘둘러 신단 안에 밝혀 놓은 두 개의 촛불을 꺼버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
다.
[불초는 평소 친구와 사귀기를 좋아하지만 귀하와는 일면식도 없소이다. 단지
가난뱅이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강호의 의리를 저버리겠단 말이오? 친구가 되
든 적이 되든 귀하의 한마디에 따를테니 결정을 내리도록 하시오.]
사실 무거운 황금곤을 휘둘러 촛불을 꺼뜨린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더우기
오묘한 점은 초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것이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운 가운데
은근히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물러서고 앞으로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호비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구려. 당신의 말이 틀림없소. 당신이 봉황고기를 한조각 잘라 배상을 해
준다면 나는 즉시 툭툭 털고 길을 떠나겠소? 그러면 되지 않겠소?]
봉천남은 얼굴을 굳히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기로써 고하를 판가름내도록 합시다!]
그는 황금곤을 들고 곧장 마당으로 몸을 날렸다.
호비는 봉일명을 붙잡고 있었는데 봉천남이 나가자 봉일명을 땅바닥에 내동댕
이치고 칼을 그의 옆에 꽂고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이 도망친다면 나는 당신 애비의 목숨을 대신 취하겠소!]
그리고는 맨손으로 걸어나가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 나으리는 걸어갈 때도 성을 바꾸지 않고, 앉을 때도 이름을 바꾸지 않는,
고명하신 살관고리(殺官 吏) 발봉모라 하오. 봉황의 털을 뽑지 못한다면 썩을
놈의 닭이나 오리의 꽁지털이라도 몇 가닥 뽑는 것도 괜찮을 것이오. 그러니 여
러분들은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호비는 갑자기 왼손을 뻗쳐내며 곧장 황금곤의 끝을 잡으려 했다. 봉천남은
그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네가 건방을 떨며 무기를 쓰지 않는다
면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무기를 빼앗으려 들자 '
이 자식이 도리어 나를 멸시하는구나' 하
는 생각이 들어 즉시 황금곤을 떨쳐 일으키며 구운소월(鷗雲掃月)이라는 일초
로 호비의 머리와 목을 향해 비스듬히 쓸어쳐 왔다.
이 일초는 옆으로 휘두르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었지만 후수에는 찍고 때리지
않는다면 감거나 올려치는 수법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소위 단두(單頭), 쌍두
(雙頭), 그리고 전두(纏頭)는 모두 옳은 이치이며 정면(正面),측면(側面), 그리
고 배면(背面)은 모두 영묘하다는 말이 있듯이, 무학에 있어 상승의 곤법(棍法)
이라 할 수 있었다. 호비는 황금곤을 따라 돌며 일장을 반격했다.
뭇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봉천남의
수하들은 많았으나 그가 지시하지 않은 이상 감히 끼어들어 도우려 하지 않았
다. 더군다나 질풍같이 몸을 날리며 솟구치고 있는지라 다른 사람이 도우려 해
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결투가 한창 고비에 이르고 있을 때 북제묘 문 안으로 세 사람이
달려들어 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부인인데 봉두난발을 하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종사수였다. 그녀는 들어오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큰 절을 하고 있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의 남편인 종아사와 둘째 아
들이었다. 종사수는 땅바닥에 엎드려 봉천남에게 끊임없이 큰절을 하며 깔깔거
리며 소리를 쳤다.
[봉나으리 당신은 인정과 의리가 많은 분이니 북제야야(北帝爺爺)께서 보우하
사 다복다수하실 것이며 금옥만당(金玉滿堂)하시고 일년내내 돈벌이도 잘 되실
것입니다. 우리의 셋째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여쭈어보니 당신께서는 대부대귀
하시고 훗날의 복이 무궁하다고 했답니다.]
그녀는 다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으며 울다가 웃다가 소란을 피웠다. 종아
사는 여전히 싯푸르죽죽한 얼굴을 하고 아무말이 없었다.
봉천남은 호비와 십여 초를 겨루자 완전히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황금곤을
휘두르는 테두리가 점점 좁아졌다. 더구나 종사수가 자기에게 엎드려 연신 큰절
을 하자 더욱 심신이 불안해졌다. 더 싸우다가는 틀림없이 대패를 할 것임을
알고 즉시 두팔에 힘을 모아 양미토기(揚眉吐氣)라는 일초를 펼쳐 호비의 아래
턱을 짓이기려고 들었다.
황금곤은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금빛를 번뜩였으나 호비는 피하지 않고 놀랍
게도 그대로 서서 오히려 황금곤을 빼앗으려 들었다.
봉천남은 놀람과 기쁨에 젖어 속으로 생각했다.
(네 녀석의 손이 설사 무쇠로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분질러 놓고야 말겠다.)
그는 즉시 손목의 힘을 주고 힘껏 아래로 내리쳤다. 호비는 옆으로 피하며 황
금곤의 끝부분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봉천남은 이 황금곤에 삼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고된 공력을 쌓아 온 만큼 상활하겁(上滑下劫)이라는 일초를 펼치고 다시
번천철지(飜天徹地)라는 일초를 펼쳐 지극히 강맹한 외경(外勁)으로 뿌리치려
들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제기랄! 재수없게 썩을 놈의 닭털을 뽑게 되는군.]
그는 두 손을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원을 돌리듯 하며 봉천남의 목을 움켜쥐려
들었다. 그가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봉천남이 뿌리치려는 기세를 빌
어 헛점을 노리고 바짝 봉천남 곁에 붙어섰던 것이다. 봉천남의 황금곤은 길이
가 길어 바깥쪽에서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몸 가까이 달려붙자 황금곤으로
때릴 수 없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봉천남은 깜짝 놀라 목을 보호하려고 고개
를 숙였다. 호비는 왼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가볍게 후려치더니 모자를 벗겨 오
른손으로 어느덧 그의 변발을 붙잡고 부르짖었다.
[잠시 당신의 목숨만은 살려두겠다.]
그는 왼손으로 변발의 끝을 잡고 양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툭! 소리와 함께
변발은 두 쪽으로 잘라졌다. 봉천남은 그만 안색이 흑빛이 되어 급히 몸을 날
려 피했다. 호비는 봉남천의 모자를 날려 정확하게 돌로 만들어진 뱀의 머리에
씌우며 앞으로 솟구쳐 나아가 돌로 만든 거북의 머리를 내려쳤다. 쿵! 하는 소
리와 함께 돌거북의 목이 부러져 연못으로 풍덩 빠졌다. 호비는 껄껄 웃으며 봉
천남의 변발을 돌거북의 목에 머리통처럼 올려놓고 두 손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래도 싸울 것이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가 이와 같은 무공을 펼치자 하나같이 안색이 변
하고 말았다. 봉천남은 그가 조금전 일장에 사정을 봐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돌거북을 후려치는 힘으로 자기의 정수리를 후려쳤다면 생각만 해
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잘라진 변발을 돌거북의 목에 올려놓고 모
자를 날려 뱀의 머리에 씌운 것은 커다란 수모를 안겨준 것이라 남패천은 도저
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금곤을 휘두르며 청룡권미(靑龍捲尾)라는 일초를 펼
쳐 맹렬히 쓸어쳐왔다. 이미 목올 내놓고 싸우자는 것이었고 결코 장문인의 신
분으로 무공을 겨루려는 것이 아니었다.
호비는 생각했다.
(이 자의 횡포는 도를 지나쳤다. 오늘 이 자의 채면을 완전히 깔아뭉개지 않
는다면 불산진 사람들의 원한을 풀기가 어려울 것이다.)
황금곤의 위력은 강맹해졌으나 곤법은 이미 조금 전보다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호비는 맨손으로 몇 수 상대하였다. 남패천이 철우경지(鐵牛耕址)라는
일초를 펼쳐 황금곤으로 땅에 스칠듯 공격을 하자 황금곤의 끝을 정확히 보고
있다가 신속하게 발읕 들어 내리밟았다.
봉천남은 놀라며 급히 뒤로 낚아챘다. 그러나 호비가 발을 내미는 것이 너무
빨랐다. 막 밟는 힘이 느슨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덧 왼발로 황금곤의 중간
부분을 밟고 아래로 내려 눌렀다. 봉천남은 더이상 황금곤을 잡지 못하고 두 손
을 놓았다. 순간 황금곤의 꼬리 부분이 정확하게 그의 발등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고통에 얼굴이 시뻘개졌으나 입술을 깨물고 참으며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낭랑히 말했다.
[내 무공이 정묘하지 못하니 더 할 말이 없군. 나를 갈갈이 찢어 놓든 마음대
로 하시오.]
종사수는 그래도 여전히 큰절을 하며 울부짖었다.
[봉나으리께서 우리집의 막내를 어여쁘게 봐주시니 정말 고맙군요. 그는 정
말, 그는 정말 당신네 거위를 훔쳐 먹었나요......]
호비는 봉천남이 그토록 낭패한 꼴로 대패를 하자 더이상 모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종사수가 실성해 있는 참상과 신단 앞의 핏자국을 보자 남패천
이 다른 수많은 악독한 행동을 일삼았을 것 같아 가볍게 놓아주어서는 안된다고
다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봉일명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바닥에 꽃았던 칼을 들고 봉천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 나는 당신과 아무 원한이 없지만 영랑(令郞)이 나의 봉황고기를
훔쳐먹었으니 어쩌겠소. 불산진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편들고, 나는 억울함을
밝힐 길이 없으니, 부득이 영랑의 배를 갈라 보여줘야겠소.]
그러면서 그는 칼날로 봉일명의 배를 가볍게 그었다. 눈처럼 흰살결 위에 대
뜸 한 가닥의 핏줄기가 일었다.
봉천남은 악한 짓을 많이했지만 사내다운 기개가 있었다. 호비의 손에 아들이
잡혔있어도 매우 꿋꿋했으며 장문인의 신분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
는 외아들이 참혹하게 배를 가를 형편이 되자 그만 위풍이고 채신이고 가릴 것
없이 부르짖었다.
[아이쿠, 잠깐!]
그리고는 옆에 있는 부하로부터 칼을 빼앗아 들었다. 호비는 웃으며 물었다.
[승복할 수 없어 한번 더 싸우자는 것이오?]
봉천남은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저지른 일은 내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소. 이 봉모가 일을 잘못해서 귀
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소이다. 그 일은 자식놈과는 아무 상관이 없소. 이 봉모는
더 살고 싶지 않지만 자식놈의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그는 칼을 들고 자기의 목을 겨누었다.
별안간 대들보 위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봉형님, 안됩니다!]
바로 대들보를 얼싸안고 허공에 매달려 있던 대한이었다.
봉천남은 얼굴에 쓴웃음을 띠우고 칼로 자기 목을 치려했다. 뭇사람들은 놀랐
으나 그 누구도 막으려 들지 못했다. 그의 칼이 목에 날아들게 된다면 그 자리
에서 시체가 되어 쓰러질 판이었다. 홀연 휙휙! 하는 소리가 일면서 하나의 암
기가 대전 문밖 높은 곳으로부터 쏜살같이 쏟아져 오더니 쩡! 하며 봉천남이 들
고 있던 칼을 때렸다. 봉천남의 손이 흔들리며 칼이 비틀어졌지만 완전히 떨치
지 못하고 어깨에 상처를 내며 선혈을 뿌렸다.
쏘아진 암기는 여자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한 알의 반지였다. 봉천남의 팔힘
이 그토록 강한데 조그마한 반지가 손에 들린 칼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반지를
던진 사람의 무공은 자기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
고 몸을 날려 뜨락으로 나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서남쪽에 그림자
가 어른거리며 멀리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가볍게 지붕을 차며 달려갔
으나 어스름한 어둠이 몰려드는 이때 사방은 조용했으며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뒷모습이 갸날프고 날씬한 것이 여자인 것 같다. 설마하니 여자들 가운데 그
런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봉천남 부자가 도망칠까봐 지붕에서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대전 안으로 되돌아 왔다. 봉천남 부자는 서로 얼싸안고 있었고 봉천남의 주름
진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식이 사랑스럽고 불쌍해서 그러는
지 아니면 괴로움과 후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그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봉천남
은 아들을 놓더니 다가와서 털썩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의 목숨은 당신에게 맡기겠으니 아무쪼록 우리 자식놈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요.]
봉일명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당신은 종씨 집안의 원
한을 갚는 뜻에서 나의 배를 가르도록 하시구려.]
호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두 사람을 모두 죽인다면 너무 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 부자가 엎드려 빈다고 용서를 한다면 너
무 수월하게 이들을 놓아주는 것 같았다. 정히 망설이고 있을 때 종아사가 갑자
기 걸어나오더니 입을 열었다.
[나으리께서 소인의 일가족의 억울함을 밝히고 한을 풀어주신 커다란 은덕에
백골난망(白骨難忘)입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몇 번 쿵쿵하며 큰절을 했다. 호비는 재빨리 그를 부축
해 일으켰다.
종아사는 몸을 돌리더니 푸르죽죽한 얼굴을 하고 봉천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 북제야야 앞에서 양심을 걸고 한마디 해주시구려, 우리집 셋째가
봉나으리의 거위를 훔쳐먹었소?]
봉천남은 호비의 위세에 압도되어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내가 잘못 알았네.]
종아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봉나으리, 한번만 더 양심적으로 말해주시구려. 봉나으리가 관부를 시켜 나
를 가두고 아들을 핍박해서 죽도록 만든 것은 우리의 채소밭을 차지하자는 것이
아니었소?]
봉천남은 그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평소에 곱상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시
골 농부가 이빨을 깨물고 두 눈에 불을 뿜을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봉천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려뜨리고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종아사는 거듭 재촉을
했다.
[봉나으리 한번 말씀해 보시구려. 그렇소? 그렇지 않소?]
봉천남은 고개를 천천히 들며 말했다.
[맞았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을 바쳐야 하지. 자네는 나를 죽이도록 하게
나.]
홀연 북제묘 문밖에서 누군가 소리높여 외쳤다.
[발봉모라고 자처하는 좀도적아, 너는 감히 나와 삼백 합을 버틸 수 있겠느
냐? 너는 어째서 북제묘 안에서 꼬리를 감추고 나서지 못하는 거냐?]
이 몇 마디의 말은 지극히 우렁차서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아연해져 서로 쳐
다보았다. 그 소리가 거칠고 탁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무뢰한이나 이 지방의
건달의 말투였다.
호비는 어리둥절하여 북제묘 밖으로 달려나갔다. 앞쪽에 세필의 말을 탄 사내
들이 서쪽으로 급히 말을 몰아 달려가고 있었다. 마상의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
고 부르짖었다.
[머리를 움츠리는 자라새끼야! 아마 너는 나와 손을 쓸 용기는 없을 것이다.]
호비는 대노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그루의 커다란 홍면수(紅棉樹) 아래에
두 필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다짜고짜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두 발로 말배
를 걷어차며 그들을 뒤쫓아갔다.
멀리 세 필의 말을 탄 사람들은 서쪽 냇가를 따라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들 세 사람은 말을 타고 있는 자세로 볼 때 손발이 우둔하고 기마술이 형편없
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은 준마들이라 호비
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 세 사람은 거리낌없이 소리높여 욕을 하며 호비
를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배후에는 지극히 무서운 사람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호비는 초조해서 말을 달리며 몸을 구부려 땅바닥에
서 돌을 몇 개 주워 날려 보냈다. 순간 어이쿠!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은 일제히 말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나뒹굴며 큰소리로 울부짖었고 다른 한 사내는 왼발이 말
등자에 끼어 질질 끌려가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어
깨와 엉덩이를 얼싸안고 끙끙대며 아프다고 야단들이었다. 호비는 한번씩 걷어
차고 물었다.
[너는 나와 삼백 합만 싸우자고 하더니 어째서 일어나 싸우지 않느냐?]
그 사람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누가 노름빚을 지고도 갚지 않는 주제에 왜 이렇게 거칠게 나오시오. 언젠가
는 봉나으리가 친히 처치할 것이오.]
호비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누가 노름빚을 지고도 갚지 않는다는 말이냐?]
순간 기습적으로 다른 한 명이 몸을 와락 일으키며 주먹을 호비의 콧잔등으로
뻗쳐왔다. 이 주먹에는 뚝심이 약간 실린듯 했으나 주먹을 뻗쳐내는 법칙에 어
긋난 것으로 볼 때 무공을 연마한 사람 같지 않았다. 호비는 빙그레 웃으며 손
을 들어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주먹은 옆으로 빗나가 퍽! 하는 소리와 함
께 다른 동료의 콧잔등을 내지르게 되었다. 그의 코에서 대뜸 피가 흘러내렸다.
주먹을 뻗친 자는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가 뻗친 주먹의 기세가
어째서 달라졌는지 알수가 없어 그저 자기의 주먹만 멍하니 어루만지고 있었다.
얻어맞은 사람은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개새끼, 나를 때려!]
그는 발을 들더니 그 자의 허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그 사람 역시 가만히 있
지 않고 다시 주먹질을 했다. 쿵쾅거리며 두 사람은 싸움박질을 했다. 그들은
호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이 무공을 모르는 것을 보고 감히 자신에게 싸
움을 걸어온 이면에는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두
사람의 뒷덜미를 잡고 떼어놓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눈이 씨벌게지도록 싸우고 있었던 터라 손은 멈추었지만 서
로 욕을 해댔다. 한사람은 상대방이 전문적으로 남의 집 무우를 훔치는 자라 했
고, 한 사람은 상대방이 불산진에서 닭을 훔치는 선수라고 했다. 보기에 두 사
람은 시정의 무뢰배같아 더욱 의구심이 일어 호통을 쳤다.
[누가 너희들을 시켜서 나에게 욕을 하도록 했느냐?]
그는 뒷덜미를 잡고 두 사람의 이마를 박치기시켰다. 그러자 그들은 대뜸 두
마리의 독각룡(獨角龍)이 꼴이 되고 말았다.
닭을 잘 훔친다는 도적은 담이 적은 편인지 쓴맛을 보게 되자 연신 입을 열었
다.
[아이구! 조상님, 할아버지, 저는 어르신의 못난 손자올씨다.]
호비는 호통을 내질렀다.
[쳇, 내가 너와 같이 못된 손자를 두어 뭣한단 말이냐? 빨리 말해라!]
닭을 잘 훔친다는 도적은 말했다.
[영웅회관에서 판을 벌였던 광(廣)보관은 당신이 회관에서 노름빚을 갚지 않
는다고 하면서 우리 세 사람에게 당신을 끌어내 매질을 하라고 했지요. 그는 우
리에게 은자 오 전씩 주었으며 이 말도 그가 빌려준 것이외다. 사실 당신이 노
름빚을 갚고 안갚고는 불초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호비는 거기까지 듣더니 아! 하더니 속으로 혀를 찼다.
(야단났구나, 야단났어. 내가 어째서 이토록 멍청하게 적의 조호이산(調虎離
山)의 술수에 말려들게 되었을까!)
그는 손을 뻗쳐 무뢰한들을 땅바닥에 쳐박 다. 그들은 앞으로 엎어져 개가 똥
을 먹는 꼴이 되었다. 호비는 몸을 날려 말을 타고 급히 되돌아가며 속으로 생
각했다.
(봉천남 부자는 틀림없이 몸을 숨겼을 것이다. 그토록 넓은 불산진에서 어떻
게 찾아내지 ? 다행히 그가 벌여놓은 사업이 많으니 한곳 한곳 찾아가 발칵 뒤
집어 놓는다면 언제까지 숨어 있지는 못하겠지.)
곧 그는 북제묘 앞으로 되돌아 왔다.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깨끗이
떠나고 없었으며 어린애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도망갔구나!)
그는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종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대전 안으로 내딛
자 스산한 냉기가 돌며 숨이 콱 막혀 현기증이 나며 하마터면 털석 주저앉을 뻔
했다. 북제묘의 대전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피바다 속에 세 구의 시체가 나뒹굴
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종아사, 종사수, 둘째 아들, 세 사람이었다. 각자 몸에
는 난도질을 당하여 피와 살을 분간할 수 없었다. 진정 목불인견이었다.
호비는 그만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한 가닥 뜨거운 피가 가슴에서 치
미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부르짖었다.
[종사형과 종사 형수님, 그리고 종씨 집의 형제여, 이 호비가 무능해서 그만
당신네들의 목숨을 해치게 되었구려!]
세 사람은 죽었지만 눈을 감지 못하고 얼굴에는 분노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
다. 그는 몸을 일으켜 북제 신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북제야야, 당신께서 증인이 되어 주십시요. 이 호비가 만약 봉천남 부자를
죽여 종씨 집의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나는 돌아와 당신 앞에서 자결을 하겠소
이다.]
그리고는 냅다 일장을 후려쳐 신안(神案)의 한 모퉁이를 박살냈다. 그 바람에
신안 위에 모셔졌던 향로와 촛대들이 땅바닥으로 나뒹굴며 떨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북제묘를 나가 마필을 끌어와 세 구의 시체를 싣고 후회해
마지 않았다.
(내 나이가 어리고 무지해서 강호의 간악한 술수를 잘 모르는데도, 불공평한
일을 처리하겠다고 감히 나섰다가 세 사람의 목숨을 잃도록 만들었구나. 봉가
놈 집안에 설사 칼 산과 기름가마를 장치해 놓았다 하더라도 나는 달려들어가
모조리 때려 잡고야 말겠다!)
그는 즉시 말을 끌고 큰 거리쪽을 걸어나갔다.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있었고
거리는 조용하여 인적을 찾아 볼수 없었다. 다만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석판 위
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호비는 영웅전당포와 영웅주루
로 가서 발길로 대문을 걷어차 보았지만 하나같이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삽시간에 불산진의 수많은 사람들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았다. 전당포와 주루
의 각처에는 나뭇단이나 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시 도박장으로 가 보니 역
시 한 사람도 없었고, 만냥이 넘는 은자는 그대로 문짝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는 대충 수백 냥의 은자를 보따리에 집어 넣고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
다.
(봉천남은 틀림없이 간교한 계책으로 나를 상대하려고 할 것이다. 적은 많고
나는 혼자이니 그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겠구나.)
몇 구비를 길을 돌자 하얀 담장에 검은 기와로 된 저택이 보였다. 문 위에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남해봉제(南海鳳第)라는 커다란 글씨
가 쓰여있었다. 그 저택은 잇따라 오진(五進)으로 이루어졌으며 규모가 웅장하
였다. 대문과 중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저택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썰렁했
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봉가의 집이 수 만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나는 불을 질러 봉가 놈의 자
라 구멍을 태워 봉가 놈이 뛰쳐나오는지, 않는지 두고 보기로 하겠다.)
그가 막 나무와 풀을 찾아 불을 지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집안 뒷쪽과 양옆에
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붙었다. 그는 어리둥정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아차
릴 수 있었다.
(봉천남은 정말 수단이 악독한 놈이구나. 놀랍게도 가업을 버리고 스스로 깨
끗이 태워 없애버리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틀림없이 멀리 도망칠 작정을 했겠
지. 만약에 급히 뒤쫓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종적도 없이 숨어버리겠구나.)
이윽고 그는 마필들을 끌고 봉씨 집의 옆에 있는 종아사의 채소밭으로 가서
땅을 파고 종씨 집안 세 사람을 장사지냈다. 그 채소밭에는 무우와 배추들이 먹
음직스럽게 자라고 있었고 채소밭 옆에는 어린애의 모자와 거칠은 옹기 인형이
떨어져 있었다. 호비는 보면 볼수록 상심되고 성이 나서 땅에 엎드려 몇번 절을
하고 속으로 빌었다.
(종씨 집안 여러 형제여! 구천에서라도 영혼이 있다면 그 흉악한 놈이 도망가
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요.)
갑자기 거리에서 발걸음 소리가 어지럽더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
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인 방화를 한 흉악한 놈을 잡아라!]
[부법천지로 날뛰는 도적놈을 놓치지 말아라!]
[그 애송이 놈은 이곳에 있다!]
호비는 나무 뒤로 숨어서 바깥을 살폈다. 이삼십 명이나 되는 관아의 포졸들
이 무기를 손에 들고 봉씨 집 밖에서 허장성세로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자세
히 살펴보니 봉씨 부자는 보이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봉천남은 관부를 움직여도 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라도 지체
시키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 같구나.)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황량하고 외진 곳으로 말을 달렸다.
불산진에서 벗어나 뒤돌아보자 봉씨 저택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은 점점 거세지
고 있었으며 전당포와 주루, 도박장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보기에 봉천
남은 불산진에 있는 모든 가업을 불사를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그런 점으로 미
루어 볼 때 그는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분노와 증오심
이 복받쳐 올랐지만 한편으로 그의 사람됨이 음침하고 예리해 십여 년간 경영해
온 가산을 가차없이 불지르는 결단력과 용기에 탄복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
다.
(이 사람이 이 정도 계책을 꾸밀 수 있는 인물이라면 몸을 숨길 묘책은 얼마
든지 있을 것 같구나. 어디로 가야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말을 불산진 어귀에 세우고 작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멀리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불을 끄려는 수룡차(水龍車)가 길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 세 무뢰한을 쫓아갔다 되돌아온 시간이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봉
천남의 집과 재산이 많은데 어찌 삽시간에 처리할 수 있겠는가? 오늘밤 그가
돌아와 처리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심복이 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가
서 지시를 받으려 할 것이니 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 될 것이다.)
그는 대낮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윽고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눈을 감고 양신을 하려했지만 종씨 집안 네 식구의 참상이 떠올라
끓어오르는 분노와 비애를 참을 길 없어 속으로 거듭 맹세를 했다.
(봉씨 도적의 전 가족을 몰살시키지 않는다면 이 호비는 이 세상에 헛되이 태
어난 것으로 알겠다.)
어스름 빛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길가로 나아가 커다란 풀 속에 엎드린 채 눈
망울을 크게 뜨고 사방을 살폈다. 몇 시진이 흘러도 아무런 동정을 엿볼 수 없
었다. 달이 훤히 밝아올 무렵까지 야채를 팔러오거나 거름을 주러 오는 농사꾼
들 이외에 달리 불산진을 들락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정히 의기소침하여 있는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필의 쾌마가
불산진쪽에서 달려나왔다. 말을 탄 사람은 무관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사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호비는 봉일명이 그의 부친은 어전시위를 모시느라고 도박판으로 올 수 없다
는 말을 상기하였다. 이 두 명의 시위는 틀림없이 봉천남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필의 말이 어느덧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작은 돌맹이를 들어 튕겨 말의 뒷다리에 적중시켰다. 돌이 공교롭
게 말의 관절에 격중되는 바람에 말은 뒷다리가 구부러지며 뒤로 주저앉아 다리
가 부러지고 말았다.
마상에 있던 사람의 기마술은 무척 정심한듯 갑자기 그런 변고가 일어났으나
몸을 솟구쳐 가볍게 길옆으로 내려섰다. 말은 뒷다리가 부러져 연신 슬피 울부
짖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호비는 그와 약 칠팔 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시위가 말고삐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노릇이오?]
그 시위는 대답을 했다.
[이 놈이 갑자기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져 쓸모가 없게 되었구려.]
호비는 그의 음성을 듣자 별안간 이 사람의 성이 하씨이고, 수 년 전 상가보
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시위가 입을 열었다.
[불산진으로 돌아가 말을 구하도록 하세.]
그 하씨 성의 시위는 서쟁과 싸움을 벌였던 하사호였다. 그는 동료의 말에 천
천히 입을 열었다.
[봉천남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불산진은 난리통이라 아무도 남의 일에
상관을 하지 않을 것이니, 남해현(南海縣)으로 가서 말을 얻도록 하세.]
그리고는 비수를 뽑아들고 말의 정수리에 꽂아 말이 고통을 덜어 주었다.
다른 시위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말을 타고 남해현으로 가지요. 참, 그런데 하형, 형은 봉천남
이 정말로 다시 불산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보시오?]
[집을 불태우고 화를 피해 떠나갔는데 어찌 돌아오겠는가?]
[이번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헛걸음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하형의 명마까지 잃
게 되었구려.]
하사호는 그의 말 뒤에 올라타며 말했다.
[반드시 헛걸음만 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 복대수부(福大師府)의 천하장문인
대회는 얼마나 성대한 계획인가? 봉천남은 오호문의 장문인이니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걸세.]
그는 말 궁둥이를 손으로 치며 천천히 나아갔다. 호비는 복대수부의 천하장문
인 대회라는 한 마디를 듣자 기뻐하며 생각했다.
(천하 장문인들이 모임을 갖는 일이라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겠구나. 봉천남
이 설사 참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어느 곳에 있는지 그 대회에서 소식은
얻어들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복대수가 각 파의 장문인들을 초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
정체 불명의 소녀
호비는 말을 타고 북쪽으로 길을 가는 동안 봉천남과 오호문의 종적을 살피
려고 했으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령(五嶺)을 넘어 어느덧 호남성
(湖南省) 경내로 접어들게 되었다. 연도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황토뿐
이라 영남의 풍치와는 완전히 달라 천하의 광활함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호비는 마가포(馬家鋪)를 지나 서봉(棲鳳) 나루터에 이르렀다. 갑자기 등 뒤
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 필의 백마가 갈기를 흩날리며 질
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귓전으로 휙! 소리가 나며 그의 곁을 지나는데 발굽이
땅에 닿는 것 같지 않았다.
마상에는 자색 옷을 입은 여자가 타고 있었는데 말이 너무 빨리 달려 그 여자
의 얼굴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다만 날씬한 허리에 흔들림 없이 말등에 앉아
있는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어! 저 백마는 조 셋째형이 타고 있던 말 같은데, 어째서 중원 땅까지 왔을
까?)
조반산을 떠올리자 쫓아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큰소리로 불렀다.
[이것 보시오!]
백마는 이미 훨씬 앞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수양버들이 드리우는 가운데 어렴
풋이 자의를 입은 여인이 한번 뒤돌아 보는 것 같았지만 삽시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을 재촉하여 길을 달렸다. 하지만 백마가 그토록
신속하게 달리니 설사 이 말이 지금보다 두배를 더 빨리 주야로 달린다 하더라
도 결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사흘째 되던 날 형양(衡陽)에 도달하였다. 형양은 상남(湘南)의 중심지로서
남악(南嶽)인 형산(衡山)과 그리 멀지않은 고장이었다. 노송이 길옆으로 줄지어
있고 흰구름이 먼 산자락을 감돌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흉금이 상쾌해지
도록 만들었다.
호비가 막 형양의 남문으로 돌어서게 되었을 때 한 음식점의 낭하에 한 필의
백마가 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키가 크고 다리가 훤칠하며 잘 생긴 것이
바로 몇일 전에 보았던 그 백마임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조반산과 의형제를
맺을 때, 그가 타고온 백마를 자세히 본 적이 있었다. 백마는 틀림없이 그때 본
백마였다. 기뻐하며 재빨리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의를 걸친 여자를 찾았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호비는 사환을 불러 물어보고자 했으나 공연히 알지
도 못하는 여자의 행방을 수소문 한다는 것은 거북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는 입구에 앉아 술과 밥을 청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호남 사람들이 사용하는 젓가락은 길고 그릇도 컸
다. 또한 맵지 않은 음식이 없었고 하나같이 맛이 짙어 호탕한 기풍을 느낄 수
있었으며 호비의 성격에 잘 맞았다. 그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자의의 여인과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조 셋째형의 백마를 그 여인이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조 셋째 형과 깊은 관계
가 있을 것이다. 조 셋째형이 나에게 선물한 붉은 꽃을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녀
가 먼저 찾아와 말을 걸지 않겠는가?)
그는 술잔을 든 채 손을 뒤로 뻗쳐 보따리를 쥐려고 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보따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보따리는 분명히 뒤에
놓아두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음식점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으나 의심갈 사람은 없었다.
(만약 좀도적이 슬쩍한 것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다. 아무 기척도 없이 가져
간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갑자기 암산을 해왔다면 영락없이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호남에서 고인을 만나게 된 것 같구나.)
그는 사환에게 물었다.
[보따리를 탁자 옆에 놓아두었는데 어째서 보이지 않소? 혹시 누가 가져가는
걸 보지 못했소?]
사환은 손님의 물건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자 당황해 하며 말했다.
[손님, 돈이나 물건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계산대에 맡겼으면 모
르는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 저희 가게에서는 미안하지만 책임을 질 수 없습니
다.]
호비는 웃었다.
[누가 자네보고 물어달라고 했는가? 나는 다만 자네에게 가져간 사람을 못봤
는가 물어보았을 뿐이네.]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게에 어찌 도적이 있겠습니까? 손님께서는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호비는 그와 이러쿵 저러쿵 해봤자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자기도 알
아차리지 못한 일을 어찌 사환이 알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
환이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 드신 음식값은 모두 은자 일 전 오 푼이니 계산을 해주시지요.]
보따리 안에는 봉천남의 도박장에서 가져온 수백 냥의 은자가 들어 있었지만
몸에 지닌 것은 한푼도 없었다. 사환이 돈을 내라고 재촉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
었다. 사환은 냉소했다.
[만약 손님께서 씀씀이가 거북하시다면 솔직히 말씀을 하셔야지, 보따리가 보
이지 않는다고 억지를 쓰시면 되겠습니까?]
호비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아 낭하에서 자기의 말을 끌어오려고 나와 보니
백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생각했다.
(그 백마와 내 보따리를 훔친 사람은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 자의의 여인에게 한층 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타고온
말을 사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 말은 적어도 은자 팔구 냥은 나갈 것이니, 우선 자네 가게에 맡겨놓겠네.
나중에 내가 은자를 가져와 말에게 먹인 사료값도 지불하고 찾아가도록 하지.]
사환은 즉시 웃는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천천히 찾으러 와도 되니 걱정말고 떠나십시요.]
호비가 백마의 종적을 뒤쫓아 가려고 하는데 사환이 달려오며 웃으며 입을 열
었다.
[손님께서는 밥먹을 곳이 없는 모양인데 제가 일러주는 대로 하신다면 틀림없
이 먹고 주무실 데가 있을 겁니다.]
호비는 그가 잔소리가 많다고 생각하며 꾸짖어 물리치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
에게도 배울 것이 있듯이 혹시 보따리를 찾아 낼 단서를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환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와 같은 일은 백 년 가도 한번 만날까 말까 한 일인데 손님께서는 운이 좋
으신 겁니다. 마침 풍엽장(風葉莊) 만노권사(萬老卷師)가 이레 전애 세상을 뜨
셨는데 오늘이 바로 장사를 치르는 날입니다.]
[그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사환은 웃으며 말했다.
[크게 상관이 있지요.]
그는 계산대에서 초 한자루와 향을 한통 꺼내 호비에게 주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쭉 북쪽으로 삼 마장쯤 가면 단풍에 둘러싸인 커다란 장원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풍엽장이지요. 이 향과 초를 가지고 만노권사의 영전에 조
의를 표한다면 그 장원에서 먹고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손님께서 노자돈
이 모자란다면 장원에서는 적어도 은자 한 두 냥은 줄 것입니다.]
호비는 죽은 사람이 만노권사라는 말을 듣고 같은 무림의 일맥이니 한 번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물었다.
[풍엽장에서는 어째서 그렇게 손님들에게 접대를 잘 해주는가?]
사환은 대답했다.
[상남의 수백 리 안팍에서 만노권사의 시원시원한 돈씀씀이와 대쪽같은 의리
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그는 생전에 영웅호걸들을 사귀기를 좋아했었
지요. 손님같이 무예를 모르시는 분은 이번 기회에 노자돈이나 챙기는 것이지
요.]
호비는 처음에 자기를 무시해 성이 났으나 자기딴에는 생각해주는 것이라 실
소를 하며 말했다.
[가르쳐줘서 고맙네. 그렇다면 오늘 만노권사가 생전에 사귀었던 영웅호걸 친
구들은 모두 조의를 표하러 왔겠구려?]
[그렇고 말고요. 손님께서는 가서 구경만 하시더라도 좋은 일입죠.]
호비는 듣고보니 그럴싸하게 느껴져 초와 향을 받아들고 풍엽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마장쯤 가자 과연 사환이 말한대로 수백 그루의 단풍나무가 커다란 장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장원 담장에는 흰 바탕에 푸른 글씨의 등롱이 걸려 있었고 대
문에는 삼배가 걸려 있었다.
호비가 들어서자 고수(鼓手)들과 나팔수들이 영빈악곡(迎賓樂曲)을 불고 두드
렸다. 커다란 영당(靈堂) 양쪽에는 소장(素樟)과 만련(輓聯)이 가득 걸려있었
다. 호비는 영전으로 나가 큰절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어쨌든 무림의 선배이시니 저의 절을 받으시오.)
그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자 삼베를 두르고 상복을 걸친 세 사람이 바닥에
꿇어앉아 큰절로 답례를 했다. 호비가 몸을 일으키자 세 명의 상주들도 그에게
읍을 하고 사의를 표했으며 호비 역시 읍을 했다.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체
구가 거칠고 건장한 편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키가 적고 다부진 모습이었다. 호
비는 그들의 생김새가 서로 달라 속으로 생각했다.
(만노권사의 아들들은 틀림없이 한 어머니의 소생이 아니고 세 명의 처첩이
각기 배다른 아들을 낳은 모양이구나.)
몸을 돌리고 보니 대청에는 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반쯤은 이웃사람들이나
향신들 같았고 태반은 무림의 호걸들이었다. 호비는 차례로 한사람 한사람 얼굴
을 쓸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봉천남 부자는 물론이거니와 자의의 여인
역시 종적을 찾을 수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뭇 영웅호걸들이 모여 있으니 떠도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오호문 봉씨 부자의
소식을 어느 정도 들을 수도 있겠구나.)
잠시 후 음식들이 차려지게 되었다. 대청과 동서 양쪽의 객청까지 합쳐 칠십
여 탁자에 음식이 차려졌다. 호비는 한쪽 귀퉁이에 앉아 조객들의 동정을 살폈
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서글프고 애잔한 빛을 띠우고 있는 반면, 젊
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웃고 떠드는 것이 만노권사와 교분이
없어 슬퍼하거나 상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호비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세 명의 상주들은 공손하게 두 명의 무관을
데리고 바깥쪽을 향하고 있는 상석으로 안내했다. 호비는 두 무관이 어전시위
복장을 하고 있어 바라보니 그들은 바로 하사호와 그의 동료였다. 상석에는 한
탁자에 세 명의 나이 많은 무사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의 선배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명의 상주들은 아래쪽에서 상석에 앉은 사람들을 시중들
었다.
뭇손님들이 자리에 앉자 체구가 왜소한 상주가 몸을 일으키더니 술잔을 들어
조상(弔喪)을 하러온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그가 사의를 표한 이후 둘째, 셋째
도 사의를 표했다. 그들은 각자 사의를 표했기 때문에 손님들도 세 번씩 일어
나 반례를 하게 되어 귀찮고 번거로운 느낌이 들었다.
호비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서생(書生)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세 명의 상주가 한꺼번에 사의를 표하면 될 것 아닙니까? 만노권사에게 아들
이 열 명 있다면 저런 식으로 한다면 열 번을 앉았다 섰다 해야 되겠군요.]
옆에 있던 중년의 무사가 냉소를 했다.
[열 명은 커녕 만학성(萬鶴聲)에게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서생은 이상한듯 다시 물었다.
[그럼, 저 세 상주들은 그 분의 아들이 아니란 말입니까?]
중년의 무사는 대답했다.
[형제는 본래 만노권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 같구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서 조의를 표하다니, 이와 같은 열성과 인정은 가히 보기 어려운 일이
구려.]
서생은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호비는 속으로 우스웠다.
(저 친구는 나처럼 그저 얻어먹으려고 이곳에 왔구나.)
중년무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질문을 할 때 글줄 꽤나 읽는 양반이 대답을 못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거요. 그런 일이 없도록 형제가 들려줘도 상관없겠지요. 만노권사는
명성을 떨치고 가업은 성취한 셈이지만 애석하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소. 그는
세 명의 제자들을 거두어 들였는데 체구가 왜소한 저 사람은 손복호(孫伏虎)로
서 노권사의 큰 제자이외다. 그리고 얼굴이 큰 저 사내의 이름은 위지련(尉遲
連)이라고 하는 사람으로 둘째 제자이외다. 마지막으로 주먹코에 불그레한 얼굴
을 한 대한은 양빈(楊賓)인데 그 분의 셋째 제자라오. 이 세 사람은 노권사의
무예를 전수받아 무공은 매우 뛰어난 편이지만, 궁핍한 사람은 예의를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대사형이 사의를 표하자 둘째 사형도, 셋째 사제되는 사람도 실례
가 될까봐 덩달아 사의를 표하게 된 것이라오.]
그 서생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 명의 사형제가 각기 사의를 표하게 된 진짜 이유는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호비는 상석과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두 시위가 주고 받는 말 속에 오
호문에 관한 이야기나 봉천남 부자의 행적에 대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귀를 기
울였다. 이때 하사호가 낭랑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복대수의 명을 받고 상남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만노권사를 경사로
모시어 천하 장문인대회에 초청하려 했소. 그랬더라면 천하의 무사들 앞에서
소림 위타문(韋陀門)의 맹위를 떨칠 수 있었을 텐데, 뜻밖에도 만노권사는 영영
가시었으니 정말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구려.]
뭇사람들은 덩달아 탄식을 불어냈다. 하사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노권사는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위타문은 무림의 기둥이니 장문인이 꼭 참
가해야 되지 않겠소? 귀문(貴門)의 장문인은 어느 분이 계승하기로 되어 있소?]
손복호 등 세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뿐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셋째 사제인 양빈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중풍으로 쓰러지셨기 때문에 발작을 일으키고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다른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으흠, 흠! 귀문의 선배와 윗어른들께서는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둘째 제자인 위지련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백과 사숙들을 각지 각처에 흩어져 한 번도 문안을 드리러 온 적이
없었답니다.]
그 시위는 말했다.
[그렇다면 장문인을 세우는 일은 상당히 번잡한 수속을 치러야겠구려. 복대수
께서 주관하시는 장문인 대회는 팔월 중추절로 정해졌소이다. 아직 두 달이 남
아 있으니 귀문에서는 일찌 감치 대책을 마련해 놓는 것이 좋겠소이다.]
사형제 세 사람은 일제히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이때 상석에 있던 노무사가 입을 열었다.
[자고로 어진 분을 세우지 않는다면,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세워왔소. 만
노권사께서 유언이 없었다면 장문인의 자리는 큰 제자인 손사형이 맡을 수 밖에
없을 것 같구려.]
손복호는 빙그레 웃으며 매우 득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의
노무사가 입을 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을 세운다는 것은 틀리지는 않소. 그러나 손사형이 비록
입문은 일찍했지만 나이로 따지자면 위지사형이 한 살 더 많소이다. 위지사형
은 나이가 많고 점잖으며 똑똑하고 부지런하오. 만약 위타문을 그가 이어받아
관장한다면 틀림없이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고, 지하에 계신 만노권사께서
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외다.]
위지련은 소맷자락을 들어올려 눈을 훔치며 사부님을 그리워하고 슬픔을 주체
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번째의 노무사가 연신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 않아. 평소대로라면 본래 이 늙은이도 할 말이 없소이
다. 하지만 이번 북경의 대회는 각문파가 각기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자리이외다. 위타문의 장문인이 만약에 무예로 뭇장문인을 압도하지 못한다면
위타문의 영명(英名))을 그르치는 일이 아니겠소? 고로 이 늙은이의 견해는 장
문인은 반드시 위타문에서 무공이 제일 고강한 고수가 담당해야 옳을 것 같소이
다.]
이와 같은 말에 뭇사람들은 연신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그렇지."하는 대답
을 했다.
그 노무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 사형들은 모두 만노권사가 자랑하는 문하생이고 각기 절예에 정통하여 무
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탄복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옥(玉)
중에 옥(玉)을 꼽는다면 역시 나중에 들어와 윗사형들보다 뛰어나게 된 소사제
인 양빈을 뽑아야 할 것이외다.]
첫번째 노무사가 냉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외다. 무학지도(武學之道)라는 것은 일년 더 연마하면
그만큼 공력이 심후해지는 것이외다. 비록 양사형의 자질이 총명하다고는 하
나, 공력을 두고 말한다면 손사형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외다. 무예를 겨
룬다는 것은 억지를 부릴 수 없는 일이외다.]
두번째의 노무사가 입을 열었다.
[실제로 상대와 맞서 승리를 취하려면 지혜가 상책이고 힘으로 싸우는 것은
차선이외다. 이 형제는 남이지만 양심적으로 말한다면 지모가 출중한 위지사형
을 꼽아야 할 것이외다.]
그들 세 사람은 너 한마디 하면 나 한마디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의를 차리느라고 깍듯했지만 점차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로 말다툼을 했다. 탁
자에 둘러 앉은 뭇손님들은 술잔을 놓은 채 세 사람이 다투는 것에 귀를 기울였
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 노무사는 각기 세 제자들에게 부탁을 받고 세객(說客)으로 온 것 같구
나.)
문상객 중에는 위타문의 입문 제자들이 백여 명이나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냉소하거나 나직이 말다툼을 했지만 나중에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언쟁
을 하기 시작했다. 각처에서 온 친지들이나 친구들과 손님들은 뜯어 말리는 사
람도 있고, 각기 자기 출신을 말하거나, 가까운 사람을 두둔하거나, 상대방을
힐난하는 등 대청을 대뜸 시글벅적하니 어수선해졌다.
그들 중에 성질이 거칠고 평소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탁자를 치면서
서로 욕을 하기에 이르렀고 당장이라도 칼과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지경에 이
르고 말았다.
만노권사의 시체가 싸늘히 식기도 전에 문하의 제자들은 장문인의 자리를 놓
고 동문들끼리 유혈극을 벌일 것 같았다. 수석에 앉아있던 시위들은 시종 아랑
곳하지 않고 그저 만노권사의 영위(靈位)만 바라보며 코웃음치고 있었다. 그러
다가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휘둘러 싸울 형편이 되자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잠시 언쟁을 멈추시고 이 형제의 말을 들어 보시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시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전 이 노무사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위타문의 장문인은 반드시 본
문의 무공에 있어서 으뜸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 점은 여러분들
도 모두 찬성하시지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시위는 재차 입을 열고 제의를 했다.
[무공의 고하는 입으로는 판가름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창과 칼, 그리고 권
각법으로 비교한다면 즉시 강약이 드러나겠지요. 다행히 세 분은 모두 동문 형
제들이니 승패에 관계없이 의를 상하지 않을 것이고, 더우기 위타문의 위명을
실추시키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만노권사의 영위를 모시고 이번 시
합을 주관하기로 하겠소. 그 어르신의 영전에서 정당하게 장문인을 선택한다면
그야말로 무림의 귀감이 되지 않겠소?]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일제히 갈채를 보내며 다투어 말했다.
[그게 가장 공평할 것 같소.]
[모두 위타문의 절예를 구경해 봅시다.]
[무공으로 승부를 가른다면 나중에 다시 다투는 일이 없을거외다.]
[역시 북경에서 오신 시위 나으리의 견식이 넓구려.]
시위는 뭇사람들이 일제히 자기의 말에 찬동하는 것을 보고 득의에 차서 말했
다.
[에, 흠! 동문 사형제끼리 무공을 겨룬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세 분 형제
는 여러 사람 앞에서 한 가지 사실에 응낙해 주기를 바라오.]
위지련은 사형제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부지런한 편이라 즉시 입을 열었다.
[대인의 분부라면 우리 사형제는 당연히 받들 것입니다.]
시위는 말했다.
[무공으로 결정한다면 제일 고강한 사람이 장문인이 되는 것이오. 결과가 어
떻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세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들 세 사람의 무공은 각기 장점이 있었다. 속담에 '문(文)에는 제일(第一)
이 없고, 무(武)에는 제이(第二)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각자 생각해 볼 때 반
드시 이긴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애써 싸운다면 두 동문을 압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시위는 천천히 결론을 지었다.
[그렇다면 모두들 장소를 비우도록 하시지요. 모두들 물러서서 위타문의 절묘
한 무공을 구경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탁자와 의자를 옮겨 영위 앞쪽에 커다란 공간을 마련하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눈앞에 펼쳐지자 사람들은 음식에는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오직 몇
몇 게걸스러운 사람들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그 시위는 넌즈시 물었다.
[어느 두 분이 먼저 나서시겠소? 손사형과 위지사형이 나서시겠소?]
손복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 형제가 먼저 못난 꼴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제자가 칼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손복호는 칼을 받아들고 사부의 영전에 세 번 큰절을 하고 몸을 돌리더니 입
을 열었다.
[위지사제는 나서게.]
위지련은 대사형을 이긴다 하더라도 셋째와 또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
을 먼저 싸우도록 하여 지치게 만든 후, 자기가 나서서 어부지리를 노린다면 수
월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두손을 맞잡고 입을 열었다.
[이 형제는 무예가 사형이나 사제보다도 못한 터이라 본래 장문인을 놓고 감
히 다툴 마음이 없었소이다. 그러나 여러 노사들께서 명령을 하시니 부득이 대
련을 할 수밖에 없는데 두분 사형제가 먼저 나서도록 하시게.]
양빈은 성질이 가장 급한 사람이라 큰 소리로 응했다.
[좋소. 내가 먼저 나서리다.]
그는 제자의 수중에서 칼을 받아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며 먼저 사부의 영위를
향해 절도 올리지 않고 즉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칼을 비껴들
고 왼손은 갈고리처럼 만들며, 오른쪽 다리를 구부리고 왼발을 약간 앞으로 내
밀었다.
이는 바로 육합도봅(六合刀法)의 기수식인 호견도(護肩刀)였다.
소림 위타문은 권(拳), 도(刀), 창(槍) 삼절로 유명했으며 모두다 육합지법
(六合之法)에 따랐다. 소위 육합이라는 것은 정(精), 기(氣), 신(神) 즉 내삼합
(內三合)과 수(手), 안(眼), 신(身) 즉 외삼합을 합친 것이었다. 육합이란 눈
과 마음, 마음과 기, 기와 몸, 몸과 손, 손과 발, 발과 허벅지, 등 여섯가지가
연결되고 통일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신이 안팍으로 혼연일체가 되
는 것이었다. 손님들 중에는 적지않은 무학의 대가들이 있어 양빈이 칼을 비껴
들고 몸을 세우는 것이 완벽한 기본자세를 갖추자 모두들 속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의 무공이 약하지 않구나.)
손복호는 칼을 오른쪽 옆으로 갈무리하고 왼손은 약간 벌려 가슴에서 뒤집듯
내밀어 혼수자찰(混手刺札)이라는 일초를 펼치며 말했다.
[사제 공격하게.]
호비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중년 무사는 자기가 전문가라는 것을 자랑이라
도 하듯 옆에 있는 서생에게 떠벌였다.
[칼이 한 자루일 때 주의하는 것은 손이고, 쌍칼일 때 걸음걸이지. 칼을 한
자루만 쓸 때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고 칼에는 도법이 있으니 신경쓸 것 없
소. 하지만 왼손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적절하게 놓느냐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세.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칼솜씨를 볼 때는 오직 왼손의 초식을
보고 그 고하를 아는 것일세. 저기, 손사형의 왼손을 뒤집듯 뻗쳐내는 것을 보
게. 수비 가운데 공격이 있으니 얼마나 심오한가?]
호비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가 말을 하는 사이에 두 사형제는 어느덧 손을 썼다. 두 칼이 마주치며
창! 창! 하는 소리가 일었다.
중년 무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 두 사람의 도법은 모두 전(展), 말(抹), 구(鉤), 타( ), 감( ), 벽
(劈)으로 여섯 자의 비결인데 법도대로 펼치고 있구만.]
그 서생은 입을 열었다.
[무엇이 찬모구두(鑽母鉤 ) 즉, 어머니 뱃속으로 기어들어가 배를 갈구리로
찢는 수법이 되는 것입니까?]
그 서생은 글줄이나 읽었다고 여섯 구결 중 앞의 전,말,구,타라는 네 글자만
가지고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찬모구두라고 아는 척을 한 것이었다.
중년 무사는 냉소하더니 입을 열었다.
[도법 가운데 어머니 뱃속으로 기어들어가 배를 갈구리로 찢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칼날이 바깥쪽으로 향하는 전(展)이라 하고, 안으로 향하면 말(抹)이
라고 하네. 칼날을 구부리면 구(鉤)이고, 머리 위로 치켜들면 감( )이고, 두
손으로 칼읕 쳐들고 아래로 내리치는 것을 벽(劈)이라 하며, 손과 수평이 되게
하여 아래로 내리치는 것을 타( )라고 하는 것일세.]
서생은 얼굴이 시뺄개져 더 묻지를 못했다.
호비는 도법에 대해서 정통했다. 그러나 그의 도보(刀譜)에는 그와 같이 상세
하게 분류하여 언급한 것이 없었고, 오직 몸을 보호하고 적을 해치는 것을 중시
하는 정묘하고 변화된 초식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중년무사가 하는 말이 모두 옳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법에는 원래 이렇게 따지는 것이 많구나. 그러나 저 사형제가 쓰는 칼의
초식은 별로 특이한 점이 없구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긴박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손복호는 민첩하면서
도 영활(靈活)했으며, 양빈은 팔힘이 뛰어나 서로 고하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웠
다.
한창 싸우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대문 밖에서 한 사람이 걸어들어오며 날카로
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위타문의 도법이 이토록 보잘 것 없단 말이오? 빨리 못난 꼴을 그만 보이도
록 하시오.]
손복호와 양빈 두 사람은 놀라서 동시에 칼을 거두고 물러섰다.
호비는 맑고 또록또록한 음성의 주인공이 묘령의 소녀라는 것을 알아 보았
다. 그녀는 자색옷을 걸치고 몸매가 날씬한 것이 바로 도중에 만났던 백마를 탄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에는 보따리가 하나 매달려 있었는데 바로 밥집에서 잃어
버린 자신의 보따리가 아닌가? 그녀는 얼굴이 갸름했고 두 눈썹은 길어서 아름
답게 뻗쳐 있었다. 살결은 약간 검은 편이었으나 자태와 형색의 수려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호비는 그녀를 보며 아연해졌다.
(저 여자는 내 나이와 비슷한데 어떻게 교묘하게 내 보따리를 가져갈 수 있었
을까? 설마하니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다는 말인가?)
손복호와 양빈 두 사람은 대청에 들어온 사람이 건방진 소리를 하자 똑같이
노기가 끓어올랐지만 칼을 멈추고 보니 갸날프면서도 아리따운 미녀인지라 그만
어안이 벙벙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육합 도법의 정묘함은 모두 허(虛), 실(實), 교(巧), 타(打) 이넉 자에 있어
요. 당신들처럼 무조건 쪼개고 막무가내로 찍어대며 어찌 위타문을 들먹이고 육
합도법를 입에 올릴 수 있겠어요? 만노권사의 영명에 비해 제자들은 형편없군
요.]
그녀의 음성은 시원시원하고 맑아서 모든 사람들은 매우 듣기 좋다고 느꼈다.
이와 같이 말을 한 사람이 만약에 사내였다면 손복호와 양빈 두 사람은 이미
다짜고짜 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잘룩한 허리와 가는 어깨, 그리고 그야말로
바람만 불어도 휘어질 것 같은 연약한 소녀를 앞에 두고 칼질을 해댈 수는 없었
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육합도법의 허,실,교,타 넉자로 이루어진 요결은 틀림
이 없어 일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눈치빠른 위지련이 앞으로 나오더니 포권을 하며 물었다.
[실례하지만 소저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지요.]
그 여인은 코웃음을 칠뿐 대답하지 않았다. 위지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위타문에서는 오늘 선사의 영전에서 장문인을 추대하고자 합니다. 그러
니 소저께서는 상좌에 앉아서 구경을 하시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오른손을 뻗쳐 그녀에게 앉도록 권했다. 그 여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
리며 입을 열었다.
[소림 위타문은 무림에서 유명한 문파인데 이런 사람들 중에서 장문인을 뽑는
다는 것은 무상대사(無相大師)이래로 내려오는 쟁쟁한 위명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 대청에 있던 강호의 선배들은 모두 다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무상대사는 소림사의 득도고승이며 과거 위타저화(韋陀杵和)와 육
합권법(六合拳法)을 정성들여 연구한 분으로 위타문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연약한 소녀가 그와 같은 무림의 원조를 알
고 있는 것이었다.
위지련은 포권을 했다.
[소저는 어느 선배님의 명을 받고 오셨는지요. 저의 위타문에 어떤 가르침을
배풀고자 하시는지요?]
그는 줄곧 겸손한 말을 하고 있었으나, 손복호와 양빈은 이 불청객을 귀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이 여인이 놀라운 말을 하기 때문에 잠시 화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대답을 했다.
[스스로 오고 싶으면 오는 것이지, 누구의 명을 받들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나
는 위타문과 약간 관계가 있어요. 이곳에서 너무 어처구니 없는 소란이 일어나
기에 부득이 달려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양빈은 더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위타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당신이 어느 어른의 수하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하니 빨리 비키시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손복호에게 말했다.
[대사형,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을 하죠.]
양빈은 왼발을 내딛으며 칼을 수평으로 쳐들고 초식을 펼치려 했다.
여인은 입을 열었다.
[그 일초의 횡신란요참(橫身瀾腰斬)에는 허보(虛步)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고
응보(凝步)는 불완전하고, 눈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오히려 나를 곁눈질하고 있
으니 틀렸어요!]
손복호, 양빈, 위지련 세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저 말은 옛날 사부님께서 초식을 가르쳐 주실 때 하신 말씀과 똑같은데 정말
그녀가 육합도법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전시위 하사호는 그 여인이 위지련과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들으며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이때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저는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존사는 어느 분이시오?]
여인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 자리는 소림 위타문의 장문인을 추대하는 자리가 아닌가요?]
하사호는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오.]
[본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무공이 가장 고강하면 그 사람이 바로 이
문파를 관장하게 되어있고 다른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하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오늘 나는 위타문의 장문인 자리를 차지해야겠어요.]
뭇사람들은 그녀의 얼굴빛이 정중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서로 얼굴
만 쳐다보았다.
하사호는 이 여인이 아름다워 암암리에 나중에 한번 어떻게 헤보자는 마음이
들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가 무예를 연마한 적이 있다면 나중에 우리들의 시야를 넓혀 주시구려.
지금은 이들 사형제로 하여금 고하를 가늠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여인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이 사람들은 더 겨룰 필요가 없어요. 한꺼번에 나와 겨루면 될 거예요.]
그녀는 위타문의 제자 중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칼을 나에게 빌려주시오.]
그녀는 나이가 젊고 영리하게 보였지만 말하는 태도 가운데는 위엄이 우러나
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 제자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칼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칼자루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칼끝이 여
인쪽으로 향하도록 내밀었다.
여인은 두 손가락을 내밀더니 가볍게 칼등을 끼고 쳐들었는데 마치 규방에서
난초를 수놓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칼을 허공으로 쳐들고 싸늘히
물었다.
[두 분이 함께 덤빌건가요?]
양빈은 약간 충동적이었지만 애초부터 이 여자를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았고,
속으로 대장부는 여자와 싸우지 않는 법인데 당당한 사내대장부로서 어찌 저런
계집애와 손을 쓸 수 있는가하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이 횡설수설하는 것이 약간은 요상한데가 있어 아예 무시하
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칼을 들고 물러서며 말했다.
[대사형, 대사형이 쫓아 보내도록 하시지요.]
손복호 역시 망설였다.
[아니, 아니야......]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인이 부르짖었다.
[연자략수(燕子 水)!]
두 손가락을 살짝 벌리자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그녀는 오른손을 내려
뜨리며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고 칼날을 위
로쳐들며 자세를 굳히고 다시 왼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몸을 약간 뒤로 움츠렸
다.
이는 바로 위타문 정통의 육합도법이었다.
손복호는 그녀가 초식을 펼치는 것이 이토록 신속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펼치는 도법을 십여년 동안 갈고 닦아온 것이라 지금으
로서는 익숙할대로 익숙해져 있는지라 거의 동시에 금쇄타지(金鎖墮地)라는 일
초로 반격을 했다.
여인은 다시 소리쳤다.
[관평헌인(關平獻印)!]
소리와 함께 칼날을 거꾸로 하더니 위로 쳐들었다.
위치로 따진다면 그녀가 연자략수라는 일초를 펼쳐 칼을 아래에서 위로 올렸
다면 두번째 초식은 또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관평헌인이라는 초식를 쓰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신(刀身)을 기울이더니 더욱 위로 바짝 쳐들
며 갑자기 기이한 초식을 펼쳐 칼날을 옆으로 휘둘렀다.
손복호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
여인은 다시 부르짖었다.
[봉황선화(鳳凰旋 )!]
그녀는 왼손을 벼락같이 내뻗으며 손복호의 손목을 치면서 칼을 위로부터 아
래로 급히 태려쳤다. 그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손복호의 칼이 땅에 떨어지
게 되었고 어느덧 여인의 칼은 그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탁쌍학(韋陀雙鶴)
뭇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칼이 떨어진다면 손복호의
머리통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그칼은 기세가 맹렬했지만 갑자기 멈칫
하면서 칼날이 손복호의 목과 닿으려는 상태에서 정지했다. 이와 같은 무공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읕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삼초로 손복호를 이긴다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최후의 한칼에 기운을 모아
빈틈없이 휘두른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대청에 있던 여러사람들 중에 호비 한 사람만이 그 여인의 무공이 뛰어나다
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삼초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은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되
었다.
손복호는 머리롤 와락 숙여 칼날을 피하려고 했으나 여인의 칼도 따라서 아래
로 떨어졌다. 손복호는 아래로 숙이자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상태에서
칼을 피해 계속 머리를 숙이자 이제는 이마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였다. 마치
그 여인에게 절을 하는 것 같았다. 여인은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칼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봉황선화라는 일초를 연마한 적이 있나요?]
손복호는 고개를 숙였다.
[연마한 적이 있소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초는 내가 한평생 수천 수만 번을 펼쳤지만 한번도 이와 같이 사용한
적은 없었다.)
손복호는 놀람과 의아함에 마음이 어지러워 칼을 들고 물러났다.
양빈은 여인이 삼 초에 대사형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의구심이 일었
다.
(혹시 대사형이 장문직을 빼앗기 위해 저 여자와 결탁해서 무슨 수작을 벌이
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생각이 옳은 것 같아 큰소리로 물었다.
[대사형은 어째서 삼 초만에 양보하다니 무슨 꿍꿍이속이오? 우리 위타문의
위명을 돌보지 않겠다는 것이오?]
손복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엉겹결에 어떻게 자
기가 제압당했는지 알 수가 없어 더듬거렸다.
[나는......나는......]
양빈은 노해 물었다.
[내가 어떻다는 것이오?]
그리고 여인을 손가락질을 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그런데 그 순간 눈앞에 하안 광채가 번득하더니 여인의 칼이 아래서부터 위로
솟구쳐 올랐다. 도법이 너무 빨라 똑똑히 볼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연자략수라
는 일초 같았다.
양빈은 서둘러 금쇄추지라는 일초로 반격을 시도했다. 이것은 그가 사문에서
눈감고도 펼칠 수 있도록 연마했던 수법이었다.
여인은 칼날을 다시 쳐들어 먼저 손복호에게 썼던 관평헌인이라는 일초롤 펼
쳐 비스듬히 옆으로 휘둘렀다.
양빈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봉황선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양빈은 손목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칼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상대방은 어느덧 칼을 자기 목에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이 여인의
삼 초는 조금전에 손복호를 상대했던 것과 똑같았다. 양빈은 목에 들이댄 칼을
피하느라고 손복호와 같이 이마팍은 땅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여인은 냉랭히 물었다.
[승복했나요?]
양빈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승복할 수 없소.]
여인은 서서히 힘을 돋구어 칼날을 밑으로 밀었다. 그러나 양빈은 여전히 고
집을 꺽지 않고 생각했다.
(죽으면 죽었지, 이마팍이 땅에 닿는 치욕은 당할 수 없다.)
동시에 그는 머리와 목을 오히려 위로 약간 뻗쳐올렸다.
여인은 목숨을 해칠 뜻이 없는지 칼을 쳐들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 승복할 수 있겠어요?]
양빈은 그녀의 도법이 요상하지만 정당하게 무공을 겨룬다면 자기를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용기가 있다면 나와 창법을 겨루도록 합시다.]
여인은 칼을 던지며 응낙했다.
[좋아요. 당신의 육합창법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도록 하죠.]
양빈은 펄쩍 뛰듯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그의 얼굴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보라빛을 띠며 외쳤다.
[빨리 창을 가져오너라. 창을 가져와!]
제자가 연무청에서 한 대의 창을 가져왔다.
양빈은 미친듯 노해 냅다 제자의 따귀를 갈기며 욕을 했다.
[이놈아! 저 여자와 창법을 겨룬다는 것을 못들었느냐?]
제자는 그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얼떨떨해 일시에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제자가 다시 때릴까봐 재빨리 말했다.
[제가 가서 한자루 더 가져오도록 하죠.]
그리고 내당으로 달려가 다시 한 자루의 창을 가져왔다. 여인은 창을 받아들
고 말했다.
[받아보세요.]
그리고 창을 들어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펼치는 것은 사이빈복(四夷賓
服)이라는 일초였다. 이 일초는 육합창법 중에서 가장 정묘한 초식으로 이십사
개의 초식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호비는 칼과 권각법에 대해서는 연구한 바가 있지만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서생과 이야기하던 중년무사를 바라보며 가르침을 받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중년 무사의 무공은 평범했으나 만노권사를 오랫동안 모셔왔기 때문에 육합법
으로 무기를 다루거나 권각법에 대해 얻어들은 것은 많았다. 중년 무사는 줄줄
노래를 부르듯 요결을 읊었다.
[중평창(中平槍)은 창법 가운데에 왕이며,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과는 관계
가 없으며, 뻗는 것은 화살같고 오는 것은 실과 같으니......]
그가 가결(歌訣)을 다 외우기도 전에 양빈이 일초를 반격했다. 그 여인은 창
끝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중년무사는 설명했다.
[저 미인인침(美人認針)이라는 일초 역시 평범한 것으로 그녀의 창법은 양사
형에게 따라가지 못할 것 같군......]
그런데 갑자기 여인은 두 손으로 꺽듯이 창끝으로 양빈의 창을 내려누르고 있
는데 바로 육합창법 가운데 영묘보습(靈猫補 )이었다. 이 일초는 무중생유창
(無中生有槍)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허식(虛式)을 펼치며 갑자기 무서운
수법으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삼 초만에 양빈은 또 다시 제압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두 팔에 힘을 주고 벼락같은 일갈을 토해내며 맹렬히 창을 쳐들었다. 그
러자 여인은 창을 들고 한번 떨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양빈의 창이 힘에
눌려 부러지고 말았다.
여인은 창끝으로 그의 아랫배를 겨누며 물었다.
[어때요?]
뭇 사람들은 일제히 양빈을 주시하였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며 백지장처
럼 창백해져 몸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그만! 그만두자.]
그는 후닥닥 몸을 돌려 밖으로 급히 달려나갔다.
제자가 부르며 쫓아가자 양빈은 다리를 들어 그 제자를 곤두박질치도록 걷어
차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대청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놀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여인이 펼치는 도법과 창법은 확실히 위타문의 전통무공이었다.
손복호와 양빈은 모두 위타문의 쟁쟁한 고수였지만 칼과 창을 모두 삼초만에
제압당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위지련은 그 여인을 얕보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나가며 포권을 했다.
[소저의 무공은 정묘하기 이를데 없군요. 불초 역시 적수가 되지 않소이다
만......]
여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당신은 말이 너무 많군요.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만약 승복할 수 있
다면 나를 장문인으로 내세우고 승복하지 않겠다면 손을 쓰도록 해요.]
위지련은 얼굴을 붉히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손만 매서운 것이 아니라 입도 매섭기 이를데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말했다.
[나의 사형과 사제가 모두 졌다고 승복했으니 불초가 못난 꼴을 보이지 않으
려해도 어쩔 수 없구려.]
여인은 그 말을 가로챘다.
[좋아요. 당신은 무엇으로 겨루기를 원하나요?]
위지련은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자고로 위타문은 검, 도, 창 삼절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 여인은 정말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대뜸 기다란 창을 내던지고 입을 열었
다.
[아! 그렇다면 당신은 권각법을 겨루겠다는 것이군요! 나오세요.]
위지련은 입을 열었다.
[불초는 소저보다 훨씬 뒤떨어질 것이니 정통 육합권은 펼칠 필요가 없겠소이
다. 불초로서 가르침 받고 싶은 것은 적구......]
여인은 불쾌한 빛을 띠우며 코웃음쳤다.
[흥! 당신이 적구련권(赤 連拳)을 정성들여 연구한 모양이군. 그것도 좋겠군
요.]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손을 쳐들어 그의 어깨의 비파골을 내리쳤다.
원래 이 적구련권은 위타문의 권법 가운데 하나였다. 이 초식은 육합법을 기
틀로 삼고 후권(帿拳)을 기본형으로 삼는 것으로, 몸을 밀착시켜 싸울 때 펼치
는 소금나수법(小擒拿手法)이었다. 초식의 매 일초는 낚아채거나 할퀴거나 얽는
수법이 아니면 혈도를 찍거나 후려치는 공격 일변도의 초식이었다.
위지련은 그녀의 칼과 창의 초식이 매서운 것을 보았지만 제아무리 고강하다
하더라도 나이 어린 처녀의 팔 힘이 닳고 닳도록 연마해 온 자기보다는 못하리
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몸을 밀착하고 싸운다면 남자들과 몸을 비비게 되어
처녀애들은 말못할 많은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그 기회를 빌어 승기를
잡으려고 생각했다.
헌데 여인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대뜸 손을 쓰자마자 기습을 했다.
위지련은 왼손을 휘둘러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그녀의 견정혈을 짚으려 들었
고, 여인은 손목을 그의 손과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팍에 있는 혈도를 짚으려 했다. 위지련은 크게 기뻐하며 오른손으로 막고 몸을
밀착시키며 손을 그녀의 허리로 가져갔다. 여인은 다리를 뒤에서부터 빙글 돌려
찼다.
위지련은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 곤혹스럽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 그대로 얻어
맞고 석판 위에 나가떨어졌다. 위지련의 뺨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여인이 펼치는 초식은 적구련권이었지만 그로 하여금 몸 가까이 다가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세 명의 사형제 중에서 도리어 위지련이 가장 많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셈
이었다.
하사호는 여인이 그토록 고강한 무공을 펼치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잔에 술
을 가득 따라 공손히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소저의 재간이 뭇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소이다. 설사 만노권사가 다시 태어
난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무공을 지닐 수는 없을 것 같구려. 소저가 오늘 장문
인에 취임하게 된다면 위타문은 세력을 크게 떨칠 것이니 실로 기쁘고도 축하해
야 할 일이외다.]
여인이 술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을 때 한 모퉁이에서 누가 괴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소저는 위타문의 제자요?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구려.]
여인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거
리가 너무 멀어 누가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사호는 냉소를 했다.
[우리가 미리 정해둔 바대로 장문인의 자리는 무공에 의해 결정하기로 했소이
다. 이 소저가 사용한 것은 위타문의 정통무공이고, 칼과 창 그리고 권각법을
펼치는 것을 여러분들이 친히 보았을 것이오. 혹시 위타문의 제자들 가운데 누
가 이 소저를 이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나서도록 하십시요. 이 형제는 복대수의
명을 받고 천하 영웅호걸들을 경사로 초청하고 있소이다. 오신 분들의 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 형제의 체면이 서는 것이니 누구를 편들 필요도 없는 것이
외다.]
그는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듣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다시 여인을 향해 입
을 열었다.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 장문인의 자리는 소저의 것이 되겠구려.
이 형제는 무림에서 각 문파의 장문인들을 수 없이 많이 보아왔지만 한번도 이
와 같이 젊고......, 에, 흠! 이토록 아름다운.....흠! 흠! 이토록 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소이다. 그야말로 영웅호걸은 젊은 사람들 가운데 나오며, 포부는
나이가 든 사람들만이 가지라는 법이 없다는 말은 옳은 것 같구려. 소저를 대면
한 지 오래되었건만 송구스럽게도 소저의 존성대명을 가르침받지 못했구려.]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다시 입을 다물었
다.
하사호는 은근한 어조로 한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위타문의 제자들 가운데 오늘 열에 아홉은 이곳에 와서 장문인을 배견하려고
하고 있으니 소저의 대명을 제자들이 모를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r당신 말이 옳아요. 나의 성은 원(袁)씨이며...... 이름은...... 자의(紫衣)
라고 해요.]
하사호는 무공은 평범했으나 견문이 넓은 편이라 그녀가 말하는 표정을 보고
자색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자의라고 얼버무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소저는 이제 윗자리에 앉도록 하십시요. 나의 이 상석은 그대에게 양보해
야 옳은 일인 줄 압니다.]
예의를 따지자면 하사호가 경사에서 재직하고 있는 지위가 높은 무관이고 또
한 위타문의 손님이니 원자의가 설사 장문인을 이어받는다 하더라도 아래의 주
인자리에서 손님을 모셔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겸손해 하지 않고 하사
호가 자리를 양보하자 도도하게 상석에 앉았다.
갑자기 대청 모서리에서 들려왔던 괴상한 소리의 주인공이 다시 울음을 터뜨
리며 말했다.
[자고로 위타문은 세상에 위명을 떨쳤는데 오늘날에는 이토록 쇠퇴하고 말았
단 말인가? 더군다나 젖비린내 나는 처녀애가 찾아와 업수이 여기다니...... 으
흑......]
그는 정말 슬픈 감정을 드러냈으며 일부러 희롱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자의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직 젖비린내 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서서 고하를 겨루어
보기로 해요?]
그녀는 그 사람이 육십여 세의 몸이 비쩍 마르고 쥐꼬리 같은 수염을 한가닥
기른 노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머리에는 과피소모(瓜皮小帽)를 쓰
고 있었으며 백발에 뒤통수에는 엉성한 변발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탁자 위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만학성! 만학성, 이 사람아! 다른 사람들은 네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이토록!
젊고,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를 대적하지 못한다고 하네. 정말 미녀는 젊은이
가운데 나오고 아름다움은 나이 많은 것에 있지 않다는 말이 옳으네.]
이 최후의 말은 하사호를 비아냥거리며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대청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낄낄거렸고 뭇 사람들은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 노인
은 다시 울부짖었다.
[이 형제는 무림에 있는 각문파의 영웅호걸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지만, 한
번도 저와 같이 파렴치한 벼슬아치는 본 적이 없소이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떨어지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표정을 굳혔다. 그가 그와
같은 말하는 것은 하사호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뜻이었다.
하사호가 어찌 그와 같은 수모를 참을 수 있겠는가? 하사호는 큰소리로 호통
을 내질렀다.
[사내라면 이리 나오시오. 어찌 모퉁이에 숨어서 그런단 말이오. 자라 흉내를
내겠단 말이오?]
노인은 여전히 울부짖었다.
[이 형제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천하의 벼슬아치들을 저승으로 초청하는 임
무를 받은 몸이외다. 초청된 벼슬아치들의 벼슬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 형제는
체면이 선단 말이외다.]
하사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당당하게 대청 모퉁이로 가서 왼손으로 허초를 펼
치며 오른손으로 노인의 목을 움켜잡으려 들었다.
노인은 계속 울부짖고 있었고 사람들은 몸을 일으켜 그 광경을 지켜보려고 했
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대청 모퉁이에서 날아나오더니 쿵! 하며 바닥
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동댕이쳐진 사람은 바로 하사호였다.
뭇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내던져진 것인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다른 시위는
동료가 당하는 것을 보자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 달려나왔다.
이렇게 되자 대청안은 대뜸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검은 그림자가 번득하고 바
람소리가 일며 그 시위는 다시 쿵! 하니 나컬 굴었다.
호비는 줄곧 그 노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시위를 깨끗하
고도 날렵하게 내던졌으며 펼치는 수법은 바로 위지련과 원자의가 조금전에 펼
쳤던 적구연권이었다. 그 노인의 무공은 위지련보다 몇 배나 높은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위타문의 고수인 것 같았다.
호비는 청나라 시위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시위가
나가떨어져 낭패한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원자의는 강적이 나타난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떤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는지 거리낌없이 말씀해 보세요. 나는 다
른 사람들이 나쁜 수작을 부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예요.]
노인은 천천히 대청 모퉁이에서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기에는 얼굴이 비쩍 마르고 광대뼈가 불거지고 두 빰이 움푹꺼진 것이 폐병
을 앓은 사람 같았지만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신을 가다듬
고 기다렸다.
노인은 더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지 않고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소저, 당신은 우리 문중의 사람이 아니구려. 위타문은 당신가문과 아무런 원
한이 없는데 어째서 이번 일을 훼방놓는 것이오 ?]
원자의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당신은 위타문 사람인가요? 당신의 성은 뭐고 이름은 뭐죠?]
[성은 유(劉)요, 이름은 학진(鶴眞)이라 한다오. <위타쌍학(韋陀雙鶴)>이란
말을 당신은 들어 본 적 있소? 내가 위타문의 제자가 아니라면 어찌 만학성과
더불어 위타쌍학으로 일컬어질 수 있겠소?]
위타쌍학이라는 네 글자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들어본 적이 있
었다. 하지만 태반은 만학성의 위인됨이 의협심이 강하고 강호의 명성이 좋아
만학성만 알고 있었지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지 못했다.
이때 쭈그렁 늙은이가 스스로 쌍학의 하나라고 나서고 또한 한 번의 손놀림에
두 시위를 내동댕이치는 것을 목격하여 군호들은 노인을 바라보며 서로 수근덕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내력을 몰라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자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쌍 학이건 오리건 간에 나는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당신은 장문인이 되겠다
는 것이지!]
[아니오. 아니외다. 절대로 억울한 누명은 씌우지 마시오. 나는 사형이고 만
학성은 사제이외다. 내가 장문인이 되고자 했다면 벌써 그때 했지 어찌 지금까
지 기다리고 있었겠소.]
원자의는 입술을 삐쭉내밀었다
[흥! 터무니없는 소리, 누가 당신 말을 믿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
려는 거지요?]
유학진은 천천히 말했다.
[첫째, 위타문의 장문인은 마땅히 본문의 참된 제자가 맡아야 하는 것이고,
둘째, 누가 장문인이 되든 간에 권력에 붙어 알랑거리는 일이 없고, 또한 경사
로 가서 권세높은 양반들과 사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우리들은
무예를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또한 시골뜨기인데 어찌 귀하신 벼슬아치 나으리
들과 사귈 자격이 있겠소?]
세모꼴 눈으로 뭇 사람들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 무공으로 장문인을 정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 것이오. 문(文)을 배우
든 무(武)를 배우든 인품이 제일이오. 만약 비열한 소인배가 무공이 제일 강하
다고 해서 그를 장문인으로 내세울 수 있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행색은 초라하지만 그
말은 그럴싸하다고 여겼다.
원자의는 냉소를 했다.
[그와 같은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조건을 나는 한가지도 받들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유학진은 천천히 그 말을 받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소? 어쩔 수 없이 비쩍말라 비틀어진 이 늙은 뼈다귀는
소저의 분냄새 나는 주먹에 얻어맞을 수밖에 없겠지.]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지 않고 손을 쓰려하자 호비는 노인을 편들고 싶은 심
정이었다. 그는 장성한 이래 강호에서 돌아다니며 조정 관리들의 학정에 시달리
는 백성들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에 평소에 관리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학진이 공공연히 조정의 시위에게 모욕을 안겨주고, 또 내뱉는 말에
정기(正氣)가 서려있는 것을 보고 그가 이기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 자의소녀의
손놀림이 민첩한 것을 볼 때 무서운 고수같아 혹시나 유학진이 그녀를 이기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원자의는 오만한 얼굴빛을 띠우고 유학진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차가
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권각법을 겨루겠어요. 아니면 창과 칼을 겨루겠어요?]
유학진은 담담히 말했다.
[소저가 스스로 위타문의 제자라고 하니 우리들은 위타문의 진문지보(鎭門之
寶)를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원자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진문지보가 뭐예요? 좀 시원시원하게 얘기하세요. 나는 말을 빙돌려서 길게
하는 것은 딱 질색이예요.]
유학진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껄껄 웃더니 입을 열고 말했다.
[하! 본분의 진문지보도 모르면서 어떻게 장문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오?]
원자의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빛이 드러났으나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본문의 무공은 박대정심(搏大情沈)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한다면
설사 가장 평범한 초식이라도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을 거예요. 육합도도 그렇
고, 육합창도 그러하며 어느 것 하나 본문의 보물이 아닌 것이 없지요.]
유학진은 그만 속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본문의 진문
지보가 어떤 무공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정당하여 좀처럼 반박
하기가 어려웠고 본문의 제자들도 하나같이 옳다고 여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왼손으로 입술 밑에 붙어있는 싯누렇고 드문드문 난 수염을 한번 만지고
입을 열었다.
[좋아. 내 당신에게 한가지 사실을 알려주지. 본문의 진문지보는 천강매화춘
(天梅花椿)이라 하는 것이오. 당신은 연마를 해 본 적이 있겠지?]
원자의는 냉소를 했다.
[호호호. 그게 무슨 보물이라 할 수 있어요. 나도 당신에게 한가지 알려주겠
어요. 무공에 있어서는 활짝 트인 평탄한 장소일수록 더욱 귀중하고 유용한 거
예요. 매화춘이니 첨도진(尖刀陣)이니 하는 것은 교묘한 재간으로 사람들을 놀
리거나 어린애를 속이는 술수에 불과한 거예요. 하지만 당신과 겨루지 않는다
면 당신은 승복하지 않겠지요. 매화춘은 어디다 설치했나요?]
유학진은 술잔을 들어 술을 비우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였고 틀림없이 쨍그랑! 하며 술잔이 박살나리라고 생
각했다. 뜻밖에도 술잔은 바닥 위에서 가볍게 미끄러지며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대청바닥의 네모난 벽돌 위에 놓였다. 그는 즉시 두번째의 술잔을 바닥에 내동
댕이쳤다. 그리고 잇따라 두 손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빈 잔이면 그대로 던졌
고 술잔에 남은 술이 반 잔이든 한 잔이든 단숨에 마시고 던졌다.
삽시간에 바닥에는 술잔으로 가득찼다. 모두 서른 여섯 개의 술잔이 엎어져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뭇 사람들은 술잔을 던지는 수법에도 놀랐지만 주량 또한
엄청난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잇따라 마시고 던지는 바람에 적어도 열두석 잔의 독한 술을 마신 셈이었다.
그는 몸을 흔들하더니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오른발을 위로 쳐든 채 왼발로 술
잔을 밟고 두 손을 마주잡고 입을 열었다.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원자의는 실제로 천강매화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
나 자기의 경공법을 믿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왼발로 살짝 바닥을 디디 역시 술잔에 올라섰다.
그녀는 곧장 잔 위에서 두 손을 살짝 쳐들었으나 초식을 펼쳐내지 않고 상대
방이 어떻게 손을 쓰는지 본 연후에 임기응변을 할 작정이었다. 그가 술잔을 내
던지는 솜씨로 보아 손복호등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보
지 않았다.
유학진은 오른발을 한걸음 내딛더니 오른쪽 주먹으로 원자의를 공격했다.
이것은 바로 육합권법 중 삼환투월(三環套月)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었다. 둘
째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네 손가락을 구부리듯 하여 세모꼴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삼각권법(三角拳法)은 혈도를 후려치는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이 모습을 보고 노인은 혈도를 찍는데 일가견이 있을거라고 짐작하
였다. 그리하여 즉시 왼발을 뒤로 물리면서 육합권 가운데 재추(裁錘)라는 일초
로 반격을 했으며 오른손 역시 삼각권으로 주먹을 쥐었다.
유학진은 그녀의 신법, 도법, 권법의 외형이 모두 본문의 정통 무공임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전 손복호 등을 제압할 때 펼쳤던 신법의 변화는 결코
본문에서 전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나타난 미묘한 차이는 본문의 일류고
수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게도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성이 났다.
즉시 왼발을 내딛으며 반궁자성(反躬自省)이라는 일초를 내질렀다. 이 주먹은
손등으로 사람을 치는 것인데 육합권 중에서 고뇌권(苦惱拳)이라 했다. 왜냐하
면 이 권법은 지극히 어려워, 연습하기가 매우 곤혹스럽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
름을 붙인 것이었다. 이 고뇌권은 역시 커다란 위력을 발휘토록 연마하려면 반
드시 십여 년 이상의 공력을 지녀야만 했다.
원자의는 그와 같은 수위(修爲)를 쌓지 못했기 때문에 덩달아 고뇌권을 펼칠
수 없었다. 반면 그녀는 솔수천장(率手穿掌)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오른손으로
는 솔비수(率 手), 왼손으로는 유엽장(柳葉掌)을 펼쳤는데 이들 역시 육합권
가운데 정통무공이었다.
서른 여섯 개의 술잔 위에서 이리저리 맴돌며 오락가락하였고 펼치는 것은 모
두 다 육합권이었다. 천강매화춘 위에서는 중심의 위치를 확보해야 상대방을
바깥 가장자리로 몰아낼 수 있었다. 만약 그와 같이 중심에 자리잡고 손을 쓴다
면 적은 물러날 길이 없어 술잔에서 떨어져 지는 것이었다. 유학진은 어릴 때부
터 이와 같은 천강매화춘에서 수십 년간 고된 정성을 쌓았다. 따라서 좌우로 진
퇴를 하며 걸음을 옮겨놓을 때에는 털끝만한 오차도 없었으며 수 초만에 천강매
화춘의 중심에 자리잡았고 주먹의 힘을 점차 가중시켰다.
그는 이 소녀의 나이가 젊지만 무공은 고인의 전수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공격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한복판에 있는 천강매화춘
만 지킨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의는 손복호와 위지련을 상대로 싸울 때는 첫번째 초식에서 이미 적의 기
선을 제압한 바 있었다. 그러나 매화춘 위에서 유학진과 권법을 겨루며 공격할
때에는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그녀의 발밑에 밟히는 것은 술잔이라 자칫하면 술잔이 깨져 지게 되기 때문에
발이 닿는 위치를 옮겨야 했으며, 일초도 끝까지 펼칠 수 없었다. 또한 적이
착실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방법이 없어 부득이 상승의 경신법
을 펼쳐 상대방의 주위를 돌면서 빈틈을 보일 때 공격할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삼십여 초를 싸우자 육합권법의 초식은 모조리 펼쳐졌다. 그러나
유학진은 비쩍마른 신형을 태산처럼 우뚝 버티면서 권풍을 점차 세차게 하는 것
으로 보아 공력을 모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각문의 무공 가운데는 모두 매화춘같이 말뚝 위에서 무공을 겨루는 방법이 있
었다. 다만 발에 밟는 것에는 여러가지의 변화가 많았다. 어떤 문파에서는 나무
말뚝을 세웠고, 대나무를 박았으며 또 벽돌을 쌓아 올려 발디딜 곳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예리한 칼날을 땅에 꽃아놓고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술잔을 엎어놓고 매화춘을 대신하는 것은 대청의 무사들로서도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 서른여섯 개의 술잔은 아무렇게나 배치한 것 같았지만, 정교하게 매화의
형태를 이룬 것은 아닐지라도 그 가운데에는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다. 그는 이
미 익숙해지도록 연습을 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싸운다 하더라도 잘못 디딜 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원자의는 걸을 때마다 바닥에 있는 술잔의 위치를 확인한
후 발을 내딛었다.
시간이 흐르자 권각법에서 원자의는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유학진은 속으로 기뻐하며 권법을 연신 변화시켰다. 오른손은 삼각권으로 대
혈을 노렸으며 왼손의 고뇌권으로는 무거운 힘을 막고, 빗장을 걸듯이 봉쇄하는
것이 모두다 상대방 공격의 맥을 끊는 수법이었다.
원자의는 대적할 방법이 없게 되자 왼손을 별안간 장법에서 지법으로 변화시
켜 앞으로 찔러냈다. 이것은 놀랍게도 육합창법 가운데 사이빈복(四夷賓服)이었
다.
유학진은 깜짝 놀라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피했다. 원자의는 기습적으로 오
른손을 옆으로 베어왔으며 펼쳐진 초식은 놀랍게도 육합도법 가운데 일초인 구
괘진보련환도(鉤掛進步連環刀)였다.
유학진은 그녀의 권법이 일변하여 맨손으로 펼치는 도법으로 변하는 것을 보
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져 그만 어깨쭉지를 얻어맞게 되었다. 그는 어깨를 내리
며 배어오는 힘을 팔성이나 해소시켰으며 잇따라 주먹을 내뻗었다.
원자의는 왼손으로 백원헌도(白猿獻桃)라는 초식을 펼쳐 아래에서 위로 베어
냈다. 양손을 모두 도법으로 펼쳐 두 자루의 칼을 휘두르는 격이었다. 이와 같
은 손 칼이 베어오자 유학진은 피할 수 없어 흑! 하니 옆구리에 일장을 얻어맞
고 몸을 휘청하며 술잔에서 내려서고 말았다.
호비는 구경을 하며 아 무학의 고수가 상대방의 괴이한 초식아래 패배를 당하
는 것은 애석한 노릇이라 생각되어 술잔을 두개 집어들고 유학진의 수법을 흉내
내 땅바닥에 비스듬히 내던졌다. 두 술잔은 가볍게 미끄러져 정확히 유학진의
발밑에서 멈추었다.
유학진이 매화춘에서 떨어져 자기가 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발밑에
술잔이 밟히는 것을 느끼고 어리둥절했으나 어떤 고인이 몰래 도와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비가 던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원자의는 손가락을 창처럼 사용하고, 손을 칼처럼 변화시키는 수법들읕 썼으
나 여전히 육합창, 육합도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타문에는 이토록
기이한 초식은 없었다. 유학진은 놀람과 의아함을 느끼며 포권을 하며 물었다.
[소저의 무공이 신묘하구려. 불초는 일찌기 한 번도 본 바가 없는데 실례하지
만 소저는 어느 문파, 어느 고인의 전수를 받은 것이오?]
원자의는 천연덕스럽게 내뱉듯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본문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는군요. 좋아요. 만약 내가
육합권으로만 당신을 이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유학진은 그와 같은 한마디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던터라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저가 순수한 본문의 무공으로 불초를 승복시킨다면 그것은 본문을 빛내는
기쁜 일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는 기꺼이 소저의 말채찍을 들
고 다니겠소이다.]
그는 방금 원자의의 무공을 가르침 받았기 때문에 오만한 태도는 사그라져 있
었다. 이어 머리를 돌리고 호비가 앉아있는 쪽으로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고 말
했다.
[이 늙은이가 못난 꼴을 보이게 되었소이다.]
두 손을 맞잡은 것은 호비가 술잔을 던져준 것에 대하여 사의를 표한 것이었
다. 그는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술잔이 어디에서 던져진 것쯤
은 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원자의는 유학진이 자신의 문파를 다그칠 때 이미 방법을 생각해 놓고 있었
다. 유학진이 포권을 하고 걸음을 내밀어 한복판에 있는 술잔을 다시 차지하려
드는 것을 보고 즉시 공수호좌( 手虎坐)라는 일초를 펼치게 되었다. 이것은 과
연 육합권의 정통 무공이었다. 몇 초를 겨루자 유학진은 점차 우세를 차지하였
다. 그는 주먹이나 다리를 내지를 때 그녀가 권초에 또 다시 어떤 수작을 부릴
까 걱정스러워 더욱 조심했다. 몇 초를 더 싸우게 되었을 때 상대방의 권법에
이상한 점이 없자 약간 느긋하게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타호식(打虎式)
라는 일초를 펼치자 즉시 오른발을 앞으로 딛는 척 하면서 오룡탐해(烏龍探海)
라는 일초를 펼쳐냈다.
순간 갑자기 오른쪽 발밑이 이상하여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엎어져 있던 술잔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똑바로 주둥이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가? 다행히 그가 발을 딛는 시늉을 했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밟았다면 틀림없이 술잔이 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몸이 앞쪽으로 기울
어질 것이니 어찌 패배를 당하지 않겠는가?
유학진은 깜짝 놀라 재빨리 걸음을 옮겨 다른 술잔을 밟았다. 몸이 흔들거리
며 등골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그는 원자의가 발을 들며 술잔을 살짝 들어 올
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발밑에 기운을 썼는지 내려놓는 술잔은 이미
주둥이가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세를 빌어 술잔의 주둥이를 밟고 오
른발을 들고 다시 술잔을 뒤집어 놓았는데, 이 경신법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생각했다.
(매서운 초식을 써서 술잔을 모조리 뒤엎어놓기 전에 천강매화춘 위에서 떨어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장력의 힘을 바짝 주면서 더욱 빨리 공격했다.
원자의는 정면에서 주먹으로 맞서지 않고 그저 주위를 오락가락했는데 그 수
법이 신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술잔의 주둥이에 발이 닿기만 하면 즉시 발걸음
을 바꾸는 등 잠시도 머뭇거리는 적이 없었다.
삽시간에 어느덧 서른 여덟 개의 술잔 가운데 서른 여섯 개의 술잔이 뒤집어
졌다. 오직 유학진이 딛고 있는 술잔만이 뒤집어지지 않는 형편이었다. 만약 호
비가 술잔을 두 개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발디딜 곳도 없었으리라.
이와 같은 상태에서 발을 내딛는다면 즉시 술잔을 밟아 깨뜨릴 수 밖에 없었
다. 부득이 유학진은 움직일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이겼소.]
땅에 내려서는 그의 얼굴은 금종이처럼 싯누렇게 되어 있었다. 원자의는 기고
만장해서 물었다.
[이 장문직을 내가 맡을 수 있겠어요?]
[이 늙은이는 당신에게 승복했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구려.]
원자의가 뭇 사람들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갑자기 문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급
하게 일었다.
말발굽 소리를 듣자 자기가 타고온 백마 이외에는 말발굽 소리를 낼 수 없다
고 생각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괴벽(怪癖)을 지닌 낭자
백마는 단풍나무 숲을 돌아가고 있었다. 말에 타고 있는 잿빛 옷의 남자는 바
로 보따리의 주인인 호비였다.
원자의는 소리 높여 외쳤다.
[아 말도둑아! 빨리 멈춰라!]
호비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보따리 도적아! 우리 서로 바꾸지!]
그는 껄껄 웃더니 말을 몰아 급히 달려갔다.
원자의는 크게 노해서 진기를 돋구고 미친듯이 달렸다. 그녀의 경신법이 아무
리 뛰어나다 해도 어찌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쾌마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달려가자 사람과 말의 그림자가 점차 작아지며 끌내는 시야에 사라졌다.
호비는 그녀가 잇따라 위타문의 네 명의 고수를 물리치고 득의양양했던 기분
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녀는 울화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생각했
다.
(그 백마는 영리한데 어째서 저 좀도적이 훔쳐탔는데도 반항하지 않을까?)
수 마장을 달려가자 어느 마을에 이르렀다. 원자의는 말을 찾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찻집에 들어가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 어귀에서 긴 말울
음 소리가 들리는데 귀에 익은 것이 바로 그 백마의 울음 소리가 아닌가? 황급
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 모퉁이를 돌자 호비가 백마를 타고 손을 흔들며 미
소를 짓는 것이었다. 원자의는 손에 잡히는대로 돌맹이를 주어 호비의 등을 향
해 내던졌다. 호비는 모자를 벗더니 날아오는 돌맹이를 받고는 웃으며 입을 열
었다.
[그래도 당신은 내 보따리를 돌려주지 않을 참이오?]
순간 원자의는 몸을 날려 백마를 빼앗으려 했다. 갑자기 획! 하며 하나의 암
기가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잽싸게 손을
뻥쳐 암기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호비에게 던졌던 돌맹이였다. 멈칫하
는 사이에 백마는 순식간에 십여 장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원자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자기가 남의
보따리를 훔쳤던 사실은 생각하지도 않고 호비가 자신을 희롱한 것만 심통부리
고 있었다. 백마 또한 무정하게 자기의 주인을 저버린 채 너무도 빨리 달리는
것이었다. 백마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실컷 두들겨 주었으면 속이 시원
할 것 같았다.
마침 옆집 처마 밑에 청마(靑馬)가 한 필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앞뒤 가
릴 것도 없이 다짜고짜 달려가 말의 고삐를 풀고 몸을 날려 호비가 달아난 길을
따라 쏜살같이 달려갔다.
말주인이 소리치며 욕을 하며 달려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멀리 달려가고 있었
다.
말을 탔다고는 하지만 호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모든 화풀이를
짐승에게 하는듯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며 말의 배를 걷어차곤 했다. 사실 그 청
마로서는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데도 그녀는 너무 느리다고 앙탈을 부리고 있었
다.
수 마장을 달리자 말은 숨을 헐떡거리며 거품을 물고 있었다. 더이상 달린다
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주위를 살피자 마침 넓은 숲이 보였다. 숲 속에서
하얀 물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뜻밖에도 자기의 백마였
다. 그녀는 내심 기뻤으나 호비가 또 무슨 잔꾀를 꾸밀지 모른다는 생각에 주춤
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호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말을 몰아 그
소나무 쪽으로 달려갔다.
몇 마장쯤 떨어진 곳까지 달려가자 나무 위에서 한 사람이 백마 위에서 내려
서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원소저. 우리 한번 더 시합을 해 봅시다.]
원자의는 더 이상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두 발로 말의 발걸이를 딛고 몸을
날리며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호비롤 향해 덮쳤다.
호비는 그녀가 이토록 위협을 무릅쓰고 몸을 날려 덮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기가 일장을 후려친다면 그녀가 허공에서 그 일장을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즉시 말을 틀어 피하려고 하자 뜻밖에도 백마는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고 입으
로 환호성을 토내내듯 히힝! 하며 마중을 나가듯이 두 발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었다.
원자의는 허공에서 오른손으로 호비의 머리에 일격을 가하며 왼손으로 어깨를
잡으려 했다.
호비는 지금까지 한번도 낭자와 싸운 적이 없었다. 그가 백마를 훔친 이유는
백마가 조반산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고자 한 것
이었다. 또한 보따리를 훔쳐간 그녀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살짝 비켜 공격을 피하며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옆을 스치며 청마 위에 올라
탔다. 두 사람은 허공에서 서로 교차하게 되었다. 호비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뻗쳐 그녀의 등에 메고 있는 줄을 잘라 보따리를 잡아챘다.
원자의는 백마를 도로 찾기는 했지만 호비가 보따리를 채간 것을 보자 화가
치밀어 부르짖었다.
[이 나이 어린 호비 녀석아! 네가 감히 나한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
호비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
원자의는 조그만 입술을 삐쭉거리며 냉소를 했다.
[조삼숙(趙三叔)께서는 당신이 뛰어난 영웅호걸이라고 칭찬하셨지만 내가 보
기에는 형편없는 것 같군.]
호비는 조삼숙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웠다.
[아니, 당신이 조 셋째 형님을 어떻게 아시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있소?]
원자의는 고운 얼굴에 더욱 노기를 띠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호가 녀석, 감히 남의 덕을 보려고 하다니 ?]
호비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내가 무슨 남의 덕을 본다는 것이지 ?]
원자의는 뾰로통해지며 말했다.
[아니, 나는 조삼숙이라고 불렀는데 네가 감히 조 셋째 형님이라니! 나보다
어른 행세를 하는 게 아니고 뭐예요?]
호비는 어려서부터 장난을 치고 웃기는 짓을 잘하기 때문에 혀를 낼름 내밀며
웃었다.
[그거야 외람된 일이지. 외람된 일이구 말구.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 분을 조
삼숙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아니, 그럼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단 말이예요?]
그 말에 호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한 항렬 높으니 너의 아저씨 뻘이 되는구나. 이제부터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라. 으흠! 자의야, 조반산 형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냐?]
원자의는 남이 자기를 희롱하는 것을 한번도 그대로 놔준 적이 없었다. 그녀
는 호비와 조반산이 의형제를 맺은 것도 알고 있었지만 호비의 나이가 자기와
비슷한데 꼴사납게 조반산과 호형호제 하면서 자기의 아저씨 노릇을 하려하자
더욱 화가 치밀어 갑자기 허리춤에서 연편을 뽑아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애숭이가 허튼소리를 하는구나! 오늘 내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겠다!]
호비는 그녀의 연편이 은사(銀絲)로 감아 만들었고 끝에는 조그마한 금빛 방
울이 달려 있어 매우 귀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연편을 공중으로 휘두르자
햇빛에 반사된 채찍은 금빛 은빛을 번쩍이는데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호비와 싸우려 했으나 호비가 꾀가 많아 다시 자기의 말
을 뺏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말을 몰며 채찍으로 호비의 머리를 내
려치려고 했다. 연편은 매우 길어 호비의 등뒤를 돌아가더니 끝이 구부러지며
금방울이 호비 등에 있는 대추혈(大推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호비는 말등에 엎드렸다. 연편의 기세로 미루어 볼때 채찍은 등을 스칠듯 지
나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왼손으
로 단도를 뽑아 채찍을 쳐다볼 여유도 없이 되는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탱! 하는 소리가 나면서 단도와 금방울이 서로 부딪쳐 연편은 뒤로 물
러났다.
사실 그녀는 채찍으로 호비의 등을 후려치는 척 하면서 손목을 꺽어 금방울로
오른쪽 어깨에 있는 거골혈(巨骨穴)을 치려 들었다. 그녀는 호비가 말등에 엎
드려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혈도를 적중시켜 반신이 마비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바람소리만 듣고도 마치 등에 눈이 달린 것처
럼 칼과 연편이 맞닥뜨리게 했으며, 그 충격에 그녀는 팔이 약간 저려왔다.
호비는 머리를 들고 '헤헤' 웃었으나 속으로는 이 아가씨의 무공에 대해 새삼
놀람과 의아함을 느꼈다.
연편의 끝으로 혈도를 공격했는데 이것은 매우 연성하기 힘든 무공이었다. 더
군다나 중도에서 초식을 바꿔 길고 부드러운 채찍을 자기 손가락처럼 사용하여
혈도를 치는데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 호비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상처입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
했다.
사실 그는 원자의가 위타문의 고수 네 명을 차례로 물리치는 것을 보고, 그녀
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보다는 못할거라고 여
기며 약간은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연편을 휘두르는
것이 예상을 하지 못한 날카로운 공격이었고 칼을 뒤로 휘두른 것도 그녀가 거
곡혈을 노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여 채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의 무공이 조금이라도 서툴러 채찍이 목표에서 빗나갔다면 호비는
채찍에 등을 얻어 맞고 말았을 것이다. 원자의는 그의 안색과 태도가 태연자약
한 것을 보고 호비가 속으로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약간 기가 꺽였다.
그녀는 재차 채찍을 허공에서 떨치며 팍!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머리를 내려쳐
왔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조 셋째형의 소식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 아가씨의 성질이 독하고 교
만하니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지 않는다면 말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조 셋째형
의 얼굴을 봐서라도 일초를 양보해야겠구나.)
그리하여 채찍 끝이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왼쪽으로 슬쩍 피했다. 피
하는 것은 매우 알맞아 순간 팍! 하며 머리 위의 모자가 채찍 끝에 휘말려 떨어
졌다. 호비는 말 배를 누르며 일장 남짓 피한 후 칼을 꽂고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아가씨의 연편을 휘두르는 신기(神技)에 이 호비는 정말 탄복했소이다. 조
셋째형은 안녕하시오. 그 분은 지금 회강에 계시오? 아니면 중원으로 오셨소?]
만약 호비가 진심으로 양보를 했다면 그 일초로 원자의는 의기양양해져 어쩌
면 그에게 조반산의 소식을 알려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젊고
혈기가 왕성해 지극히 호승심이 강한지라 일초를 양보하기는 했으나 너무 눈에
두드러지도록 양보를 한 셈이었다. 그녀의 채찍을 피하며 모자가 벗겨졌는데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겸연쩍어 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윗어른이 아랫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었다.
원자의는 벌써 알아차리고 냉랭히 말했다.
[당신이 일부러 양보해 준 것을 내가 모를줄 알아요? 모자를 원위치로 되돌려
드리지요.]
그녀는 기다란 채찍을 펼치며 모자를 말아 그의 머리 위에 씌우려 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모자를 다시 내 머리 위에 씌워준다면 그 재간이야 말로 기묘하기 이
를 데 없는 것이다. 내가 손을 뻗쳐 받는다면 그녀의 흥취를 깨뜨리겠지.)
그는 웃으며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정말로 일장 남짓한 연편을 자기 손발처럼
휘두르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런데 채찍의 끝이 가슴팍 앞으로 올라오다가
채찍의 힘이 쇠퇴하여 모자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순간 호비는 재빨리 몸
을 숙이며 모자를 받으려 했는데 갑자기 눈앞에 허연 빛이 번쩍하였다. 아차!
하는 순간 철썩! 하며 두 눈에 불똥이 마구튀며 뼈를 에는 아픔이 빰으로 전해
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암산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말의 배밑으로 기어들었다.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나며 나뭇가루가 날았다. 말안장이 연편에 얻어맞아 박살이 났고 말은
고통에 슬피 울부짖었다.
호비는 말의 배밑에서 그녀의 일격을 피하며 칼을 뽑았다. 그리고 말등으로
다시 올라왔다. 오른쪽 뺨이 매우 아파 손으로 만지니 피가 잔뜩 묻어나는 것이
정말 가볍지 않은 채찍을 맞은 것이었다.
원자의는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은 윗어른으로 행세하겠어요? 이 아가씨가 만약 채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열여덟 대의 이빨은 모두 빠지고 말았을 거예요.]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채찍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광대뼈는 박살
나고 왼쪽 이빨도 모조리 빠지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호비는 무예를 연성한 이
후에 처음으로 패배를 당한 셈이라 노기가 충천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어깨를 칼로 내리 쪼개려했다.
원자의는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상대방이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크게 당했으니 손을 쓴다면 틀림없이 전력을 기울
여 공격해 올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며 호비가
가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큰길 쪽에서 말방울 소리가 울려퍼지며 세 필의 말이 천천히 달려왔다.
그들은 누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을 보자 일제히 말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호비
와 원자의는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명은 청나라 시위의 복색을 하고 있
었고, 한 사람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우람하고 나이는 사십여 세 정
도 되어 보였다.
채찍은 길고 칼은 짧아 호비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가 타
고 있는 말은 상처를 입은 형면없는 말이지만 원자의가 타고 있는 말은 신준
(神駿)하기 이를데 없었다. 또한 그녀는 어릴적부터 말등에서 자란 것처럼 몸놀
림이 자연스럽고 자유자재였다. 십여 초를 겨루어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가 없었다.
호비가 도법을 일변시켜 공격을 취하려고 할 때 시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이, 저 계집애 좀 봐. 얼굴도 반반하고 솜씨도 괜찮은걸.]
다른 시위가 입을 열었다.
[조(曺)형, 마음에 든다면 먼저 손을 뻗쳐 저 녀석이 달콤한 맛을 못보도록
하시구려.]
조씨 성을 가진 시위는 앙천대소했다. 호비는 그들 두 사람의 말이 경박한
것을 보고 노기띤 눈길로 그들을 흘겨보았다. 원자의는 그 틈을 타서 채찍을 휘
둘러 공격을 했다. 호비는 고개를 숙여 연편 밑으로 기어들어 몇 자 정도 앞으
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자 원자의는 버들같은 허리를 틀었으며 백마는 왼쪽
으로 질풍같이 내달았다. 이 기세는 너무나 빨랐다.
순간 은빛 광채가 번뜩이며 조씨 성의 시위는 어깨쭉지에 철썩! 하며 채찍을
얻어맞았다. 그녀가 채찍을 돌려 호비의 머리위를 다시 후려치려 하자 호비는
칼을 들고 막았다. 그러자 백마는 어느덧 다른 시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그녀의 하얀 손이 뻗쳐나가 그 시위의 뒷덜미에 있는 천주혈(天柱穴)을 움켜잡
는 것이었다. 백마가 달려가는 기세는 엄청나서 그 시위는 땅바닥으로 나컬굴었
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고 커다란 채직을 어깨 위로 뻗쳐 세번째 대한을 후
려치려 들었다.
이와 같이 잇따른 네 번의 채찍질은 질풍노도처럼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호비
는 속으로 갈채를 보내며 평상복을 입은 대한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재수
없이 시위들과 동행을 하다가 무단히 채찍질을 당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대한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더니 맨손으로 그녀의 은사연편의 끝을 잡으려 들었
다.
원자의는 그가 손을 갈고리처럼 뻗치는 것을 보고 강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즉시 손목을 떨쳐 채찍 끝을 잡으며 냉소를 했다.
[귀하는 경사로 장문인 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것이지요?]
대한은 어리둥절해졌다.
[소저가 그것을 어떻게 아시오?]
원자의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그 대한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대답했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까 장문인 냄새가 약간 나는구려. 당신의 이름은 뭐지요?
어느 문파의 장문이지요?]
이 두마디의 질문은 무례하기 짝이 없어 대한은 흥! 하고 코웃음칠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씨 성을 가진 시위가 낭패한 꼴로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남사부(藍師傅), 저 썩을 놈의 계집애 버릇 좀 가르쳐 주십시요!]
원자의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자 백마는 바로 조씨 성의 시위에게 달려갔다.
백마가 이와 같이 걸음을 갑자기 옮기는 것은 모두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얼떨
떨해졌다. 조씨 성을 가진 시위는 깜짝 놀라 왼쪽으로 피했으나 원자의의 은사
연편은 어느덧 그의 등으로 뻗쳐가고 있었다.
대한은 사정이 급한 것을 보자 허리에 차고 있던 짧은 검을 뽑아들더니 난요
취수사문검(欄腰取水四門劍)이라는 일초를 펼쳐 비스듬히 숙이며 채찍을 밀어냈
다.
원자의는 발끝으로 가볍게 등자를 밟으며 뒤로 밀자 백마가 갑자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마가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물러나는 것은 속도가 똑같이 신
속했다.
대한은 소리높여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말이군!]
원자의는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누군가 했더니 광서(廣西) 오주(梧州)의 팔선검(八仙劍) 장문인 남진
(藍秦)이구려.]
대한의 이름은 바로 남진이었다. 그는 이 꽃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도대체
얼마나 강호의 경력을 쌓았길래 자기가 펼치는 일초를 보고 자기의 성명과 신분
을 알아맞추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한편으로 약간 우쭐해져 속으로 생각했다.
(남모가 외진 남강(南彊) 땅에 살고 있지만, 나이 어린 소저마저도 나의 위명
을 아는구나.)
그는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는 어떻게 불초의 성명을 알고 있소?]
[나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을 찾고 있었던 참이예요.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
니 참 잘됐네요.]
남진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기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왜 찾을까 궁
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의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이 남모는 무슨 일로 찾는 것이오?]
원자의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경사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려는 거예요. 내가 당신 대신
가면 되죠?]
남진은 더욱 아리송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오 ?]
원자의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그래도 몰라요? 당신의 팔선검 장문인 자리를 나에게 양보하라는 거예요!]
남진은 그녀의 말이 너무나 무례한지라 크게 노했다. 그러나 조금전 그녀가
공격하는 수법이 교묘해 자신도 똑똑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푼의 의구심을 가
지고 있었다.
사실 똑똑히 볼 수 있었더라면 시위가 그토록 낭패한 꼴로 낙마(落馬)하게 하
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세심하면서도 조심성이 많은지라 그녀가 큰소리를
치는데는 믿는 구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화를 삭히며 포권을 했다.
[소저의 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리고 영사는 누구신지 ?]
원자의는 대수롭지 않은듯 말했다.
[나는 당신과 사귀자는 것도 아닌데 내 이름은 알아서 뭘해요? 우리 사부님의
이름은 더욱 알려줄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 사부님은 당신과 면식이 있어요.
만약 옛날 일을 들먹인다면 나는 미안해서 당신에게 양보하라고 떼를 쓰지 못할
거예요?]
남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동안 생각했으나 자기가 알고 있는 무림의 명가들
가운데 어느 분이 연편에 뛰어난 사람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두 명의 시위 가운데 한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고 한 사람은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하나같이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항상 거들먹거려 왔는데
그와 같은 창피를 당하자 어떻게 가만히 있으려고 하겠는가? 두 사람은 일제히
휘파람을 불며 한 사람은 마상에서 한 사람은 걸어서 동시에 원자의에게 달려들
었다. 두 사람은 달려들면서 한 사람은 칼을 뽑고, 한 사람은 허리에 있는 장검
을 뽑으려 했다.
원자의는 가볍게 연편을 휘둘러 장검을 뽑으려던 시위의 손목을 세차게 때렸
다. 그의 손가락이 칼자루에 닿았지만 손목에 뼈를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칼
을 뽑을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원자의의 은사연편은 길고 가늘어 다른 연편과 달랐다. 일초에 그 시위의 칼
자루를 후려치자 채찍끝은 지체하지 않고 뻗쳐나면서 다시 조씨 성의 시위의 검
자루를 감아 위로 쳐들었다. 조씨 성의 시위는 은빛이 번쩍이며 자기 손이 닿기
도 전에 검이 뽑혀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손을 움츠렸지만 그의 손바닥은 새빨
간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원자의가 사정없이 낚아채자 검은 쏜살같이 수십 장 높이로 솟아올랐다. 그런
연후에 그녀는 연편을 허리에 감았다. 마치 자의 위에 은빛 배로 만들어진 띠를
두른 것 같아 전혀 무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허공에 솟아오른 칼을
보지도 않고 남진에게 물었다.
[당신은 장문인 자리를 양보하겠어요? 못하겠어요?]
남진은 고개를 쳐들고 날아오른 장검을 바라보는데 정신이 쏠려 있어 그녀가
말읕 하자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뭐요?]
원자의는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팔선검 장문인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어요.]
이때 장검은 어느덧 그녀의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원자의는 말을 하면서도
무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재간이 있었기 때문에 손을 뻗쳐 검자루를 쥐었다. 장검
이 수십 장이나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기세는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더군
다나 이 검은 검자루 이외에는 전체가 예리한 날로 되어 있었는데도 그녀는 곁
눈질 한번 하지 않고 검자루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이재간에 비단 남진 뿐만 아
니라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호비마저도 의아해 하면서도 탄복해마지 않았다. 호
비는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전 소림 위타문의 장문 자리를 빼앗고 무슨 연유로 또 팔선검의
장문인 자리까지 탐내는 것일까?)
호비는 그녀가 묘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고 이
제까지 조반산 이외에는 무학에 조예자 깊은 고수를 본 적이 없어 탄복한 나머
지 얻어맞은 채찍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진은 그녀가 절기를 펼쳐내자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넌즈시 그녀의 내력을
알아보려고 했다.
[소저, 바람 소리를 듣고 무기를 판가름하는 재간은 마치 산서(山西) 동(冬)
씨 집안의 절기인 것 같구려.]
원자의는 방긋 웃었다.
[당신은 눈썰미가 괜찮은 편이군요. 그렇다면 다시 이 검을 하늘로 던지는 재
간은 어떤지 보세요.]
그녀는 손을 휘둘러 장검을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는
검이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연신 재주를 넘듯 빙글빙글 돌면서 은빛 줄기
를 이루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 기세는 세차지 않았지만 모양이 특이해 장
관이었다.
남진이 고개를 쳐들고 장검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바람소리가 미미하게 일어
몸앞에 이상한 물체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고 급히 뒤로 일장 남짓 물러섰다.
순간 금빛 광채가 번쩍이며 원자의의 은사연편에 달린 조그마한 금방울이 자기
얼굴을 스칠 듯 지나갔다. 재빨리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그의 허리에 있는 검
또한 그녀에게 빼앗길뻔 했던 것이다.
원자의는 남진의 무공이 두 시위보다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검
을 던져 빛무리를 만들어 시선을 빼앗은 후 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그는
눈치 빠르게 피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안타깝다고 부르짖었고 남진은 암암리
에 부끄러운 노릇이라고 자책을 했다.
남진은 서남 지역을 주름잡고 있는 웅주로서 제자들은 광동성, 광서성, 운남
성, 그리고 귀주성 일대에 깔려 있었으며 이십여 년 동안 한번도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젖비린 내 나는 계집애에게 모멸당하자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장검을 뽑아들고 부르짖었다.
[좋소. 내가 아가씨의 절묘한 초식을 가르침 받아보도록 하지.]
이때 하늘로 올랐던 장검의 기세가 사그러지며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원자의
는 은사연편을 휘둘러 검자루의 끝을 말아 앞으로 밀어보내자 장검은 질풍같이
남진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갔다.
두 사람의 간격이 거의 이장이나 되었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검은 그의 가슴팍
앞에 이르렀다. 마치 기다란 검자루를 쥐고 찌르려는 것 같았다. 이 일초 또한
남진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라 그는 깜짝 놀라 검을 비껴들고 막았다.
원자의는 부르짖었다.
[상자취소(湘子吹簫)!]
이 일초는 바로 남진의 팔선검법 중의 하나인 상자취소였다.
팔선검은 서남 각처에서 성행하고 있었다. 남진은 그녀가 자기의 초식을 아는
것은 대수로빚 않다고 생각하고 '어디 한번 니 마음대로 해봐라'하는 심사로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호통을 내질렀다.
[상자취소 다음에는 뭐냐?]
원자의는 냉랭히 외쳤다.
[음양보선(陰陽寶扇)!]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장검을 말아 그의 가슴팍을 나누어 찔러왔다. 이
것은 바로 팔선검의 정통검법인 한종리(漢鍾離) 음양보선이었다.
남진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가 팔선검법을 아는 것은 이상한 것이 없으나
이상할 것은 연편으로 검을 휘어감고 내미는 데 놀랍게도 쏜살같이 찔러오자 즉
시 한걸음 내딛으며 공세를 취하려고 했다. 그는 연편으로 검을 말아 휘두르니
의지할 곳이 없어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했을 것이니 검이 부딪히면 땅바닥에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막 장검을 쳐들고 손을 떨치는 순간 원자의
는 부르짖었다.
[채화헌화(采和獻花)!]
동시에 그녀는 벼락같이 은사연편을 거두어 들였다. 채찍에 실린 힘은 완전히
끝나 장검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채찍을 쥐고 오른손으로
장검을 든 채 방글방글 웃으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남진은 또 다시 일초를 격파당하자 속으로 궁리를 해보았다.
(채찍은 길고 검은 짧다. 또 말은 높고 나는 아래쪽에 있다. 이중으로 불리한
마당에 그녀가 기이한 초식을 마구잡이로 펼쳐내며 희롱하듯 하고 있구나. 혹
정신을 팔았다가 그녀의 술수에 말려든다면 한평생 쌓아올린 위명이 수포로 돌
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즉시 검을 앞가슴에 대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토록 장난처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오. 소저가 진정한 팔선검으로 가
르침을 베풀겠다면 불초는 상대해 드릴 수 있소이다.]
원자의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좋아요. 만약 내가 당신을 정통 팔선검법으로 이길 수 없다면 당신은 장문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리고 나서 말에서 뛰어내리며 어느덧 은사연편을 허리에 감는 것이었다.
남진은 검을 비스듬히 세운 채 검결(劍訣)에 따라 왼손으로 철괴이호로계요
(鐵拐李葫蘆繫腰)라는 반초를 펼쳤다. 그는 상대방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 나
머지 반초를 펼쳐낼 작정이었다.
원자의는 장검을 떨치며 공격하려다가 호비를 바라보더니 남진에게 말했다.
[당신과 무공을 겨루는 것은 상관없지만, 보배같은 내 백마를 저 마적이 훔쳐
가도록 할 수는 없어요.]
호비는 즉시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남과 손을 쓰는 동안에는 나는 말을 노리지 않겠소.]
원자의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호비 녀석은 잔꾀가 많다고 들었는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속아넘어가기
안성마춤이지.]
그녀는 왼손으로 말고삐를 붙잡고 휙! 하니 일검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장과로
도기로(張果老倒騎 )라는 일초를 비스듬히 찔러냈다.
남진은 그녀가 왼손으로 말을 잡고 오른손으로 검을 펼치는 것을 보자 속으로
'네가 죽음을 자초한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마라'하고 코웃음치며 즉시 발운견일
(撥雲見日), 선인지로(仙人指路), 괴성점원(魁星點元)이라는 초식들을 펼쳐 상
대방의 초식을 해소하고 반격을 했다.
원자의는 그의 검수가 매서운 것을 보고도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있
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방을 얕보는 마음을 버리고, 사부의 말씀처럼 과연 팔
선검법은 검법 중에서 검법이고 이 사람은 나의 공력보다 훨씬 심후해 보이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 역시 팔선검법으로 상대방의 초식을 한수 한수 해소시켜 나갔다.
그녀는 왼손에 말고삐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돌려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 또한 몸을 날리거나 솟구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제약
을 받고 있었다.
남진은 그녀가 문호를 엄밀하게 지켜 빈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펼치는 검법이 본문의 직계문하에게서 전수받은 것 같아, 어찌하여 본문에 이와
같은 인물이 나오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곳은 형양성을 남북으로 왕래하는 커다란 관도였다. 두
사람이 십여 차례를 겨루게 되었을 때, 수레를 밀고오는 소금장수들이 한패거
리 나타나게 되었고 남쪽에서도 노새가 끄는 몇 대의 수레가 나타났다. 장사치
들은 노상에서 누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얼마후에
남북 양쪽에서 많은 길손이나 상인들이 도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싸우는 것은 재미있었으나 조정의 무관들이 두려워 조용히 구경만
했다.
다시 한 차례의 공세가 펼쳐졌다. 남진은 상대방이 팔선검법을 배운 것은 사
실이나 검법 가운데 오묘한 점은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위급할 때는 갑자기 팔선검법과 유사한 일초를 펼쳐 자기의 살수
를 해소시켜 나갔다. 때문에 남진은 일시에 승리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더군다나 상대는 한 손에 말고삐를
잡고 있는 소녀였기 때문에, 설사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인다해도 이미 장문인
대회에 참가할 체면이 없어진 셈이라 즉시 검을 바짝 틀어쥐고 수십 년 동안 연
구한 신법을 펼쳐냈다.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그가 싸우면 싸울수록 용감해지고 검의 광채를 번득거
리며 원자의를 연신 맴돌며 공격을 퍼붓는 것을 보고 모두 그녀를 걱정하였다.
오직 두 시위만이 남진이 이겨 수모를 앙갚음하기 바랬다.
원자의는 오랫 동안 싸워도 결과가 없었고 우연히 호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호비는 웃는듯 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비웃고 있는 것처
럼 생각되었다.
(이 녀석 봐라. 네가 나를 보고 비웃고 있는 모양이다만, 이 아가씨가 너에게
솜씨를 보여주지.)
그러나 애초에 팔선검법만 쓰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른 무공은 전혀 펼칠
수 없었다. 게다가 왼손으로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도중에 말고삐를 놓고 무
공을 펼쳐 승리한다 하더라도 호비에게 얕보이게 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
녀는 호승심이 매우 강했다. 남진이 모든 초식을 사용하여 우세를 차지하여 자
신의 검세를 장검으로 뒤덮자 왼손을 가볍게 앞쪽으로 당겼다. 백마는 지극히
영리하여 주인의 지시를 받자 맹렬히 달려들며 앞발을 쳐들었다. 마치 남진의
머리를 짓밟을 것 같았다.
남진이 놀라 옆으로 피하는 순간, 손목이 마비되며 들고 있던 장검이 어느덧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온 신경을 말을 피하는데 쓴 나머지 손에 들
린 무기가 상대방의 암산을 받으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무림에서
일류고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수십 년 동안 매사에 조심을 해왔기 때문에 가
까스로 위명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한평생 조심해 오던 것이 끝내
는 백밀일소(百密一疏)라고 한 아가씨의 손에 패하고 만 것이었다.
남진은 무기가 손에서 빠져나가자 즉시 몸을 날려 자기가 타고온 말에게 달려
가 다시 한자루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원래 이 사람은 일을 행함에 있어 매우
세심하기 때문에 장검을 한자루 더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별안간 허연 광채가 번쩍하더니, 원자의의 장검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두 자루
의 장검은 허공에 부딪히며 빼앗긴 남진의 장검은 대뜸 두 토막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이와 같이 칼날을 부러뜨린 수법은 교묘한 경력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허공에서는 힘을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강철로 만든 장검이
부러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요술을 부리는 듯한 수법을 쓴 이유는 뭇 사람들이 틀림없이 갈채
를 보내리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갈채를 보내게 된다면 남진은 극도로 분노
하고 당황하여 다시 겨룬다면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계략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남진은 일순 어
리둥절해지더니 안색이 크게 변했다. 원자의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장검을 받아
들며 냅다 찔러오며 부르짖었다.
[조국부박판(曺國 拍板)!]
남진은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러자 장검은 다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번
에도 원자의가 술수를 부린 것이었다. 그녀가 펼친 것은 팔선검법이었지만 검이
맞부딪칠 때 검신을 미미하게 변화시켰던 것이었다. 남진은 그녀가 느닷없이 공
격해 오는 바람에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기운을 끌어올리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검신이 동강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검을 옆으로 비껴들게끔 초식을 유
도하여 동강을 낸 것이었다.
원자의가 번개같이 초식을 펼치고 하나의 계책을 펼치면 다시 두번째 계책을
재빨리 펼치니, 그로서는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었다.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아름다운 처녀가 잇따라 두 자루의 검을 부러뜨리자 우
뢰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남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비록 팔선검법으로 이긴 것은 아니지만 무공이 이상야릇해 다시
손을 쓴다 하더라도 헛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가 의기양양해서 말위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두 손을 잡아보였다.
[탄복했소이다.탄복했소이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서 땅에 떨어져 있는 장검 토막을 줍고 입을 열었다.
[불초는 고향으로 내려가 한평생 검(劍)자를 들먹이지 않겠소이다. 다만 사람
들이 불초에게 어느 문파의 어느 영웅호걸의 검아래 졌느냐고 물어온다면 불초
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저의 성은 원씨이고 이름은 자의예요. 그리고 가사의 존함은......]
그리고는 말을 몰아 남진의 곁으로 다가가 귓가에 대고 나직이 몇 마디했다.
그러자 남진의 의기소침하고 고뇌에 찬 표정은 즉시 사라지며 황송하다는 태도
로 말했다.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불초가 어찌 감히 소저와 손을 쓸수 있겠소이까?
소저께서 존사를 뵙는다면 오주의 남모가 어르신에게 문안을 여쭌다고 말씀을
해주시구려.]
그리고는 말을 끌고 세 걸음 물러서며 길옆에서 기다렸다.
원자의는 백마 위에 올라타고 안장을 가볍게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실례했어요.]
그녀는 호비에게도 고개를 돌려 방긋 웃어보이고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백마
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벼락같이 몸을 솟구치더니 십여 대의 소금을 실은 수레
를 뛰어넘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그녀의 뒷모습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과 사람은 이미 사
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멍하니 요원한 북쪽을 바라보는 것이었
다.
'千里眼---名作評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5 金庸 (12) | 2023.08.30 |
---|---|
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4 김용 (13) | 2023.08.29 |
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2 김용 (9) | 2023.08.27 |
무협소설 飛狐外傳비호외전1 지은이 金 庸 (2) | 2023.08.26 |
신홍루몽(新紅樓夢 2010년판) 1편 한글자막 [新红楼梦 第一集 韩语字幕]:[Dream Of Red Mansions Episode 1 KOREAN SUB] (0) | 2023.08.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