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8 김용

一字師 2023.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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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飛狐外傳 비호외전 8 김용

 

                                            图片来源 | 金庸电影全记录,我看着看着就哭了起来|飞狐外传|金庸|倚...

 

대장부의 의기투합

호비가 막 무대 옆으로 다가가자 한 사람이 서둘러 뛰어올라왔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다른 사람과 언쟁을 벌였던 그 대한이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다시 승패를 가리고자 한다면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고, 일각

이라도 지체한다면 마소저는 그만큼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호비는 즉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그 사내의 등을 움켜잡고 말했다.

[사형, 잠깐만 참으시오. 내가 먼저 나서리다!]

호비가 그를 잡은 수법은 바로 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대금나수법이었다.

호비는 커다란 엄지 손가락으로 그 대한의 아홉 번째의 척추에 있는 근축혈(筋

縮穴)을 누르는 동시에 새끼손가락으로는 다섯 번째 척추 아래에 있는 신도혈

(神道穴)을 짚었다. 이 대한은 우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꼼짝할 수가 없

었다.

호비는 몸을 날리던 기세를 빌어 무대의 가장자리에 서며 그 대한을 아래로

내던져 무대 아래에 있는 긴 의자에 정확하게 걸터앉도록 만들었다.

그가 이러한 상승의 무공을 한 차례 펼치자 무대 아래 있던 사람들은 경악을

하였으며 반수나 되는 사람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호비가 베조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라 그가 늙은이인지 젊은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단지

등뒤로 새카맣게 윤이 나는 변발이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견문이 넓은 고수들은 이와 같은 나이에

공력이 그토록 심후하니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인지 몰라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

다.

호비는 무대 위에 있던 사람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자파의 제자 정영호(程靈胡)는 사형에게 가르침을 받고자하오이다.]

정영소는 가산의 뒷쪽에서도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호비가 스

스로 정영호라고 자처하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으나 씁쓸한 감정은 여전히 지

울 수가 없었다.

(만약 저 분이 진짜 나의 친오라버니라면 온갖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텐

데.......)

무대 위에 있던 사람은 호비의 그와 같은 기세를 보자 겁을 집어먹은듯 공손

하게 반례를 했다.

[소제가 배운 재간이 정묘하지 못하니 정사형께서는 손에 사정을 두어 주시구

려.]

호비는 점잖게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그리고는 즉시 오른쪽 다리를 반쯤 구부리고 왼발을 앞으로 내뻗었으며, 오른

손을 옆으로 하고 왼손을 갈고리처럼 했다. 이것은 앞서 고운이라는 여인이 펼

쳤던 화권 중에 첫번째 초식인 '출세과호서악전'이었다.

그 사람은 몸을 돌리더니 무릎을 살짝 들며 손을 내뻗어 백원투도배천정(白猿

偸桃拜天庭)이라는 일초로 응했다. 이 일초는 전적으로 수비를 할 때 사용하는

초식으로 방어만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호비는 발걸음을 옮겨 달려들면서 손을 뻗쳐 오왕시검벽옥전(吳王試劍劈玉 )

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그 사람은 감히 응수를 하지 못하고 철신도보일유연(撤

身弓步沖拳)이라는 일초를 펼치며 방어를 했다.

호비는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마춘화가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사신

란문삽철산(斜身 門揷鐵 )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고리고는 잇따라 요세궁보충권

(拗勢弓步沖拳)이라는 일초로서 왼손을 주먹으로 변화시키며 내뻗으며 오른 주

먹을 동시에 격출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의 기세가 맹렬한 것을 보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고 포기를 한듯 손으로 맞받아내려고 했다. 호비는 내력을 거두어 들이며 그를

무대 아래로 떨어지도록 가볍게 밀었다.

순간 호통소리가 들리며 호비에게 밀려 아래로 떨어졌던 대한이 다시 올라서

며 말했다.

[제기랄! 도대체 너는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호비는 그 말에 상대를 하지 않고 즉시 금붕전시정중참(金鵬展翅庭中站)이라

는 일초를 펼쳐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뻗쳐냈다. 그러자 그 대한은 무대에 제

대로 서지도 못하고 다시 호비에게 떠밀려 아래로 떨어졌다. 호비는 그가 무례

한 말을 한데 대해 성이 나서 공력을 끌어올려 삼푼의 힘을 내뻗은 지라 우지

끈!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대한은 의자로 나뒹굴며 의자를 두 개나 박살내

고 말았다.

그가 잇따라 두 사람들을 물리치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수근덕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옆에 있는 천자파의 문하 사람들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지만 문하의 제자들도 그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예자파의 한 선배가 말했다.

[저 사람은 본문의 무공이 불순(不純)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사문에 입문한 것 같구려. 저 사람은 희노삼(姬老三)이 새로이 거두어

들인 제자가 틀임없을 것이오.]

성자파의 한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희노삼의 잘못이로군. 무공을 지니고 들어온 제자를 보내 장문인의

자리를 다투도록 한다면 도리어 본문의 무공을 혼탁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는

본문의 무공을 끌어내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원래 희노삼은 천자파의 지장이었다. 그의 무공은 서악 화권문에서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었으나 십년 전에 두 다리가 마비되어 잘 걷지를 못하는 형편이었

다. 하지만 그의 위명은 여전히 엄청나 동문 사형제들은 모두 그를 약간은 꺼려

하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천자파의 정영호라는 자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았으며, 또한

희노삼이 파견했다는 아들 희효봉(姬曉峯)이 시종 얼굴을 내밀지 않자 모두들

이 사람이 희노삼의 제자라는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희효봉은 이미 호비에게 혈도를 짚혀 가산 뒤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그들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희노삼은 원래 무공이 강해지자 오만방자해져 동문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으

며, 두 다리가 마비된 이후에는 폐관을 하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일신에 지니고

있던 무공을 모두 아들에게 전수한 것이었다.

이번에 화권문의 다섯 지파의 고수들이 때를 지어 북경으로 모여들어 무공으

로 장문인을 정하려고 하자 희효봉은 이 장문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부

친의 무공을 구성 정도를 전수받았지만 그의 사람됨은 부친과 같이 광명정대하

지 못했다.

원래 그는 살그머니 가산 뒤에 숨어서 적수가 될만한 사람들의 허실을 살펴본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 일격에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

리어 그것이 화근이 되어 호비라는 고수를 만나 일거에 제압을 당해서는 꼼짝달

싹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는 호비가 갑자기 나타나자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암암리에 고수를 매복시

켰다가 자기를 상대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단지 몇 초를 겨루었을

뿐인데 일신에 지닌 무공을 펼칠 기회도 없이 낭패한 꼴을 당해 부친과 자신의

계획이 삽시간에 수포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에 초조해 하며 극도로 분노하고 있

었다. 그는 오직 무대 위로 올라가 호비와 사생결단을 내었으면 속이 시원하겠

다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어쩌겠는가?

이때 호비는 각 지파의 고수를 차례차례로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는 호비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 없어 잠시 후면 장문이 자리가 정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는 초조한 마음에 재빨리 운기행공을 하여 급히 혈도를 풀고 뛰쳐나가려고 했

다.

그러나 혈도를 짚은 호비의 수법은 조상 대대로 전해진 절기로서 희효봉이 해

소시키려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

고 내력을 돋군다 하더라도 막힌 혈도를 풀 수 없을 형편인데 이와 같이 미친

듯이 노해서 충동적으로 일을 서두르니 어찌 무사할 리가 있겠는가?

한차례 내력을 돋구자 진기가 흐트러지면서 그는 대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실 희효봉이 연마한 무공은 강맹하고 매서운 바가 있어 내력이 충만한 상태

였고, 게다가 일이 다급한 것을 느끼고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돌

볼 여유도 없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하자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두

다리가 마비가 된 것이었다.

희효봉은 다시 부친의 전철을 밟은 꼴이 되었으며, 그 흉악하고도 위험천만한

상태는 그의 부친보다 더한 형편이었다.

정영소는 정신을 집중하여 호비가 무대 위에서 겨루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

데 그 일초일식이 방금 전에 사람들이 펼치는 것을 보고 배운 서악의 화권인지

라 속으로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무학에 관해서는 천성적으로 배우기만 하면 터득을 하는 것 같구

나. 서악의 화권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데 그는 잠시동안 남들이 몇 수 겨루는

것을 지켜보고 모두 배운 모양이로구나.)

바로 이때 갑자기 그녀의 옆에 있던 혈도를 짚힌 대한이 나직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우 괴이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혀는 반쯤 내민 채 이빨

에 깨물려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전신은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듯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정영소는 그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풀려고 하다가 도리어 진기가 갈

래길로 들어가 주화입마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제때 치료하지 못한다면

심할 경우 정신착란을 일으켜 실성하게 될 것이고, 가볍다 하더라도 불구의 몸

이 되어 무공을 상실하리라고 느끼고는 내심 생각해 보았다.

(우리와 이 사람과는 아무 원한이 없으며, 더우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해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이윽고 그녀는 작정을 한듯 금침을 꺼내 그의 음유맥(陰維脈)의 염천(廉泉),

천돌(天突), 기문(期門), 대횡(大橫) 등 네 곳의 혈도에 각기 침을 꽂았다.

한참 이후에 희효봉은 천천히 깨어났으며 정영소가 자기를 위해 침을 놓는 것

을 보자 나직이 말했다.

[소저, 정 말 고맙소.]

정영소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이때 호비는 무대 위에서 낭랑히 입을 열었다.

[장문의 자리는 빨리 정해질수록 좋은 것인데 이와 같이 겨루다가는 언제 결

과가 나겠소이까? 여러 사백부님과 사숙부니 사형 사제들 가운데 기꺼이 가르침

을 베풀고자 한다면 서너 분이 함께 올라오도록 하시오. 제자가 지더라도 결코

원망을 하지 않겠소이다!]

뭇 사람은 그 말을 듣자 내심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 오르기를 꺼려했

던 터라 다투어 손을 맞잡고 올라 겨루기를 청했다. 기실 호비가 새로 익힌 초

식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빈틈을 드러낼 것이 뻔한지라 패싸움을 벌여 혼란

중에 요령을 피워 자신의 무공을 펼쳐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했다. 그렇게 된다

면 다른 사람이 쉽사리 알아볼 수가 없을 것이고, 그와 같이 시간을 끌며 싸운

다면 자기의 내력이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기력이 딸릴 것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

다.

더우기 마춘화를 구하는데는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호비는 장력을 내뻗어 다시 한때의 사람들을 물리쳤다. 천자파의 제자들은 그

가 희지장(姬支長)의 명을 받고 온줄 알고 감히 올라와서 손을 쓰려고 하지 않

았지만 나머지 네 지파 가운데 젊고 힘 좀 쓸줄 아는 사람들은 다투어 나서며

겨루기를 청했지만 모두 그의 발길 아래 패하고 말았다. 각 지파에서 명망이 있

는 고수들은 나선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지라 경솔하게 나서

서 한평생 쌓아올린 영명을 해칠까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

다.

이윽고 무리를 지어 공격하던 사람들이 모두 패하게 되자 그때서야 각 지파에

서 권술이 가장 정묘한 고수가 도전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십여 장을 받아냈을

뿐 역시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네 개 지파의 명숙들과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감히 나

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전신에 검은 마괘를 걸치고 있던 채씨 성의 노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입

을 열었다.

[정사형, 당신의 무공이 고강한 것은 정말 사람을 탄복케하는구려. 하지만 이

늙은이가 보기에 당신의 권초는 본문의 무공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구려. 음

음! 그야말로 형(形)은 엇비슷했지만 신(神)은 전혀 다른 것이었소. 이건......

이건 아무래도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겠구려.]

호비는 흠칫하며 내심 생각했다.

(저 늙은이의 눈썰미는 정말 매섭구나. 내가 사용한 권초는 모두 서악의 화권

이지만 충격을 주어 아래로 떨어뜨리거나 넘어뜨리는 내경(內勁)은 자연히 그들

의 화권의 내경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서악 화긴문은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외문의 무공이었다. 단지 몇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본 것에 불과한 호비로서는 그 가운데 있는 정미(精微)하고 오

묘한 점을 터득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앞서 무공을 펼쳤던 사람들은 그 문파

의 고수가 아닌지라 형태는 비슷하다 하더라도 내경을 제대로 뻗쳐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호비는 부득이 체면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권사심팔은 예행성천애요. 만약에 각자 깨닫는 바가 다르지 않다면 어째서

본문이 다섯 지파로 나누어졌겠소? 무학의 도리라는 것은 원래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이외다. 우리 천자파에서 터득한 권법의 이치는 다른 지파들과 약간 다

른 점도 있을 것이외다.]

그는 천자파를 끌어들여 자기를 편들고 나서도록 한다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자파의 제자들을 호비

가 자신의 지파를 은근히 치켜올리자 매우 기뻐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큰소리로

갈채를 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채씨 성의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사형, 당신은 희노삼의 문하가 아닌 것 같구려. 호 당신은 무예를 지닌 몸

으로 사문으로 입문한 것이 아니오? 이 늙은이의 눈은 아직까지 흐리지 않아 당

신이 펼친 것은 십중팔구 본문의 무공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가 있소.]

호비는 가습을 활짝 펴며 말했다.

[채사백부님, 그와 같은 말씀은 제자로서는 감히 심복할 수가 없소이다. 본문

이 만약에 천하 장문인대회에 참가하여 소림, 무당, 태극, 팔괘문 등 거대 문파

들과 자웅을 겨루고 화권문의 위명을 떨치려면 반드시 모든 무공을 하나로 결합

시켜 서로 통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외다. 옛말에도 있듯이 묵은 것에서 새 것

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외다. 제자가 배운 내경은 우리 사부님이 십여 년 동안

폐관을 하고 애써 생각하여 터득해낸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많은 부분이

다를 것이외다. 채사백부님께서 만약 제자가 적합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

하신다면 위로 올라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구려.]

채가라는 노인은 약간 망설이더니 말했다.

[본문에 당신과 같은 걸출한 후배가 있다는 것은 우리 문파의 영광이라 이 늙

은 것이 기뻐해도 모자랄 터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이 늙은이의 마음

속에 의문이 있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소. 자, 이렇게 합시다. 정노제는 무대

위에서 한번 본문의 기본 무공인 일로(一路)의 화권을 펼쳐보여 주시구려. 이곳

에 있는 십여 명의 노형제들이 그것을 본다면 함부로 꼬투리를 잡고 왈가왈부하

지 못할 것이외다. 노제가 정말 본문의 무공에 정통하고 화후의 경지에 도달했

다면 이 늙은이는 춤을 추며 발벗고 나서서 당신을 장문인으로 추대하겠소.]

과연 오래 된 생강이 맵다는 말이 있듯이 호비가 다른 사람들과 손을 쓸 때는

그러저럭 사이비 화권을 빌어 자신의 무공을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홀로 일로

의 궐법을 펼친다면 즉시 그 진위가 가려질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훔쳐 배운

권초는 일로의 화권 가운데 드문드문 섞여 있는 몇 수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질

서정연하게 초식을 펼칠 수 있겠는가?

호비는 비록 지략에 뛰어난 편이라 내심 움직이는 바가 있어 그 말을 듣고 정

히 사양하는 말을 하려고 했을 때 홀연 가산 뒤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채사백부, 당신은 무슨 연유로 우리 천자파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오? 이분

정사형은 우리 아버님이 자랑하는 제자이외다. 그가 우리 아버님의 문하로 들어

온지 이미 십육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설마하니 그 일로의 화권도 연성하지

못했단 말이오?]

이윽고 한 사람이 성큼성큼 무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천자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인 회효봉이었다. 그는 천자파에 무슨 일이 있

다면 언제나 부친을 대신해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은연 중에 그

를 실질적인 천자파의 지장이라고 여기고 있던터라 다른 지파에서도 모르는 사

람이 없었다.

희효봉은 무대 위로 올라서더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엄친께서는 폐관을 하시고 은거한 이후 일신에 지닌 모든 재간을 이 정사형

에게 전수했소이다. 십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정사형을 지도한 것은 바로 오

늘을 위해서 이외다. 이분 정사형의 무공은 나보다 열 배나 강한 편인데 여러분

들은 눈이 있으니 똑똑히 보지 않았소? 그런데 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오?]

뭇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자 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들은 내심 희노삼의

괴팍하고도 강한 호승심에 새삼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희노삼은 원래 그런 인

물이라 한 제자를 몰래 가르쳐 내고는 그가 무공을 연성한 이후에 갑자기 여러

사람 앞에 선을 보이는 것은 그의 인물됨에 걸맞는 일이었다. 게다가 사납고도

굳건한 성격의 소유자인 희효봉마저도 호비를 편들고 나서는데 그 누가 감히 의

심을 하겠는가?

채씨 성을 가진 노인이 다시 질문을 던지려고 하자 희효봉은 낭랑히 입을 열

었다.

[채사백부께서 우리 천자파의 무공을 한번 가늠해 보겠다면 제자가 정사형을

대신해서 일로를 펼쳐보이겠소이다. 아무쪼록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채가라는 노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즉시 두 다리를 모으더니

효성당두즉주긴(曉星當頭卽走拳)을 펼쳤고, 잇따라 '출세과호서악전', '금붕전

시정중참', 위타헌포재흉전(韋陀獻抱在胸前), 파비란문횡철산(把臂 門橫鐵 ),

괴귀앙두료록란(魁鬼仰斗 綠 ), 등 정연하게 일초 일초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리고는 다시 두 팔로 권(拳), 장(掌), 구(鉤), 조(爪)를 선회시키면서 변화를

일으켜 충( ), 추(推), 재(栽), 절(切), 벽(劈), 도(挑), 정(頂), 가(架), 탱(

), 요( ), 천(穿), 요(瑤)의 십이반(十二般)수법을 펼치며 연신 뻗쳐내고 거두

어 들이곤 했다.

그리고 두 다리와 발로서는 궁전보(弓箭步), 마보(馬步), 복보(伏步), 허보

(虛步), 정보(丁步) 등 다섯 가지 보법의 기초를 변화시키며 행보(行步), 도보

(倒步), 매보(邁步), 투보(偸步), 답보(踏步), 격보(擊步), 약보(躍步)의 일곱

가지 보법을 펼쳐냈는데 착실하고 온건할 때는 마치 코끼리가 걸음을 멈추고 호

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으며, 신속하고 민첩할 때는 마치 독수리가 달려

들고 토끼가 달아나는 듯 했다.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본문의 제자인지라 이 일로에 권법에는 익숙

한 터였지만 그의 조예가 그토록 심후한 것을 보자 모두 탄복해마지 않았다. 각

지파의 명망이 있는 선배들마저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때에 봉황선와회신전(鳳凰旋窩回身轉), 퇴등구천충철권(腿 九天 鐵

拳), 영웅타호수초세(英雄打虎收招勢)까지 펼쳐보이고 있었으며 마지막 초식은

권파정전오경천(拳罷庭前五更天)이었다.

과연 이 초식은 법도가 엄밀한 것이 정말 훌륭한 권법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초식을 다 펄치고 두 손을 거두어 들이자 우뢰와 같은 갈채가 터져나왔

다.

호비는 정영소가 어떤 방법을 썼기에 희효봉이 자진해서 난처한 입장에서 구

해주는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권법을 모두 펼치자 호비

역시 내심 탄복을 했다.

(서악 화권은 역시 범상치가 않구나. 이 사람은 내경을 보완할 수만 있다면

명가의 고수가 될만한 자질이 있구나.)

그는 권법을 다 펼치더니 대뜸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몸이 무거워지며 미미하

게 떠는 것이 마치 큰 병을 앓고 있거나 혹은 몸에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아

래에 있는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호비는 바로 곁에 서 있었으므로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더우기 그의 옷자락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결코 무공이

고강한 사람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낭패한 꼴인지라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희효봉은 숨을 가라앉히더니 입을 열었다.

[다시 정사형과 겨루실 분이 있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

랍니다.]

그는 잇따라 세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자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삼가 정사형께서 서악 화권문의 장문인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한 것을 진심으

로 축하하나이다!]

뭇 사람들도 덩달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리하여 호비는 화권문을 집장하게 되었다.

희효봉은 호비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호비는 포권을 하여 반례를 하면서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호비는 그의 두 눈

에 원한과 독기가 가득 서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마춘화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그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희사제, 빨리 조용한 방을 하나 구해주시오? 우리 두 사매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오.]

희효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무대 위에서 내려서는 순간 갑자기 발을 휘청

거렸다. 호비는 무대의 가장자리로 나아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밤새 수고하셨소이다. 이제는 편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쉬시도록

하시구려. 내일 밤 다시 모여 우리 화권문이 천하장문인 대회에서 위명을 떨칠

수 있도록 웅장한 계획을 한번 세워보도록 합시다!]

그 말은 결코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이 화권문에 대해 내심

고마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관병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십중팔구 마춘화는 비명횡사하고 말았으리라!

호비는 내심 인연이 닿는다면 이 화긴문을 위해 조금이라도 영명을 떨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다투어 몸을 일으켜 떠나면서 호비의 무공에 대해

서 수근수근댔다. 호자는 희노삼이 알기보다는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이 훨씬 뛰

어나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희효봉이

펼친 일로의 권법은 정말 화권의 진수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천자파의 제자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으며 몇 사람은 호비에게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다. 호비는 그들에게 단지 포권만 해보이고는 곧장 희효봉을 따라 내

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영소는 혼란을 틈타 마춘화를 부축하고서 사람들 틈에 섞여 내당으로 재빨

리 들어갔다.

이 커다란 저택은 원래 화긴문 문하의 벼슬을 하고 있는 기인(旗人)의 소유였

다. 호비가 장문인이 되자 이 저택의 주인은 극진한 대우를 했다.

호비는 줄곧 얼굴에 가리고 있던 베조각을 벗지 않고 있다가 내실로 들어오자

벗어들며 희효봉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희형, 정말 고마왔소이다. 이 장문인 자리는 당신에게 양보해 드리겠소이

다.]

희효봉은 싸늘히 코웃음 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춘화의 얼굴은 검은 기운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숨을 내쉬는 것도 미미하여

정말 실날 같은 목숨만 붙어있는 것 같았다.

정영소는 마춘화를 안아 편안한 침대 위로 눕히고는 금침을 꺼내 그녀의 열

세 곳의 대혈을 찌르더니 금침의 끝을 모두 조그마한 솜뭉치로 감싸놓았다. 그

녀의 손놀림은 지극히 빨랐으며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호비는 그녀의 안색이 차분하고 평화로운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금침의 끝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영소의 금침은 속안이 비어있는 것으로서 피를 뽑아냄으로써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정영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미미하게 웃더니 약병에서 파란 알약을 하

나 꺼내 희효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희 오라버니, 당신은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이 알약을 열 알만 먹으면 당

신 몸에 있는 독성은 모두 가실 거예요.]

희효봉은 그 알약을 받아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방을 나섰다. 호비는

그제서야 정영소가 그녀의 위력적인 밑천으로 희효봉에게 명을 받들도록 만들었

다는 것을 깨닫고는 넌즈시 웃으며 말했다.

[약왕소저는 가는 곳마다 사태를 유리하게 만드는 신기를 지니고 있는 것 같

구려. 둘째 누이가 독약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아마도 그대의 존사께서도 따

르지 못할 것 같구려.]

정영소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말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 일은 그녀

가 독을 써서 억지로 승복하도록 만든 아니라 희효봉이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

하고 주화입마 상태가 된것을 구원하여 액겁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이다.

그녀가 희효봉에게 쓴 약물은 몸에 닿는다면 몸이 마비되고 근질근질하기 이

를데 없지만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그녀가 준 것은 금창약

으로써 외상을 치료하는 지혈생기환(止血生肌丸)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희

효봉는 외상을 입지 않았으므로 먹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희효봉이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다만 그 독성이 무섭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순순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

다. 설사 의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

다.

정영소는 암암리에 다짐을 했다.

(나는 사부님에게 독을 써서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으니

독수약왕의 수단이 매섭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겠지만 결코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녀는 집게를 들고 검붉은 피가 배어나온 솜을 갈아주고는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그대는 밤새도록 애를 썼으니 잠시 쉬도록 하세요. 내가 마소저를

돌볼테니 오라버니는 안심하세요.]

호비는 피곤이 엄습해 오는지라 비스듬이 목탑 위에 몸을 걸쳤다. 정영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장문인이라는 고귀하신 자리에 있을 때 나는 한가지 일을 다짐받

아야겠어요. 열 두 시진 안으로는 아무도 마소저에게 가까이 와서는 안되며, 더

우기 말을 걸 수도 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내기(內氣)가 다른 곳으로 흘

러나가 독소를 말끔히 뽑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 독소가 조금이라도 남는

다면 이제까지 애쓴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요.]

호비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서악 화권문의 장문인 정영호는 내당문(內堂門) 장문인 정영소의 호령을 삼

가 받들어 분부하시는대로 시행할 것이며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거외다.]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오라버니의 내당 장문인이 될 수 있겠어요? 그분은.......]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멈추고서 몸을 구부리고 마춘화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

고는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호비가 잠을 자지 않고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하나요?]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만약 그들이 진짜 내 모습을 보고 나이가 어린 것을 들먹인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하지만 열 두 시진만 지난다면 우리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떠

날 것이니 별일도 아니라오. 물론 우리들이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

을 가져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태였으니 부득이.......]

정영소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개가 다급해지면 개구멍을 찾을 여유도 없이 담장을 뛰어넘는 격이지요.]

호비는 웃었다.

[그렇소. 엉겹결에 담장을 뛰어넘었다가 팔자에 없는 장문인 자리까지 앉아보

는 구려.]

정영소는 눈길을 들어 미소를 지으며 호비를 바라보더니 나직이 외쳤다.

[좋아요! 바로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무엇을 이렇게 한다는 것이오?]

정영소는 설명하듯 말했다.

[우리는 길을 오면서 수염쟁이로 분장을 했었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역시

오라버니는 멋진 수염쟁이로 분장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럴찌하게 분장을 해드

릴께요. 그렇게 된다면 아마 오라버니는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일 거예요. 사람

들에게 희효봉의 사형으로 자처하려면 적어도 마흔 살은 넘어야 하지 않겠어

요.]

호비는 박장대소를 하며 기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복강안의 부중에서 소란을 피워 그 대회를 구경하지 못

하겠구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둘째 누이가 감쪽같이 멋들어진 수염을 붙여준다면

이 정영호는 정정당당하게 서악 화권문의 장문인으로서 그 대회에 참가하여 견

문을 넓힐 수가 있을 것 같구려!]

정영소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장문인대회까지 참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일만 무사히

지낸다면 마소저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요. 위험을 자초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호비는 호기가 끌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둘째 누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누이는 정말 수염을 그럴듯하게 붙여

줄 수 있소?]

정영소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까짓 수염 하나 만드는 것이 대수로운 일인가요? 진짜 어려운 것은 그 나

이에 어울리도록 표정을 짓고 행동을 하는 것예요.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고 젊

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단번에 탄로날 거예요. 설사 정신이 맑고 일신에 지닌

무공이 높은 노영웅이라 하더라도 젊은 사람처럼 정력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고

노련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거예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늙은 오래비는 는 전력을 다해 임하겠소이다. 그저 한 두시진만 속일 수

있다면 좋겠소.]

정영소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우리 수염을 붙이고 한번 시험을 해보기로 해요. 나는 이번에는 노

파로 분장을 하고 오라버니를 따라 장문인 대회를 구경할 거예요.]

호비는 껄껄 웃으며 신이 나서 말했다.

[둘째 누이, 우리 두 늙은 오누이는 이토록 오래 살아왔고 조만간에는 거동도

불편하게 될터인데 어찌 이렇게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가 있겠소?]

정영소는 나직이 꾸짖었다.

[목소리가 너무 커요!]

순간 마춘화가 침대 위에서 한번 꿈틀거렸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호비는 혀

를 내밀며 손가락으로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이더니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군!]

정영소는 반짓고리를 꺼내 조그마한 가위를 집어들더니 자기

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잘랐다. 그리고는 깨끗한 찻잔에 머리

카락을 넣고 약상자에서 약물을 꺼내 집어넣으며 말했다.

[잠시 쉬도록 하세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거칠거칠한 수염으로 변하게 되면

부를께요.]

호비는 다시 목탑 위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는 내심 이 동생의 총명함과 기

지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뿌듯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마춘화가 독이 퍼져 죽으며 고

통스런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며,

어느 결엔가 자신은 복강안을 붙잡고 그의 독랄한 심사를 준엄하게 꾸짖었는데

잠시 후에는 자기가 뭇 위사들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죽어라하고 그들의 손아귀

에서 발버둥을 쳤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순간 귓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를 깨웠다.

[오라버니, 꿈을 꾸고 계신가요?]

호비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허우적거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마소저를 돌볼테니 누이도 좀 쉬도록 하시구려.]

정영소는 말했다.

[먼저 오라버니께 수염을 붙여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같군요.]

그리고 그녀는 거칠어진 머리카락을 아교풀을 칠해 그의 턱밑과 귀밑뿌리에

붙였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데는 시간이 상당히 걸려 거의 한 시진이나 소모되

었으며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호비는 거울을 들고 비춰보더니 그만 피식!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붙

여진 수염은 구렛나루로서 뻣뻣하게 뻗쳐 있었는데, 얼굴 모습이 완전히 딴 판

으로 절로 위엄이 우러나고 있었다. 호비는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정말 그럴싸하게 어울리는구려. 이후에 정말 이렇게 구렛나루를

기르면 어떻겠소?]

사실 정영소는 이러한 말을 하고 싶었다.

(아마도 오라버니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사람이 반드시 응낙하리라고는 볼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이 목에까지 차 올라왔으나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하룻 밤

을 꼬박 지샌터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듯 마춘화가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잠이들었다.

과연 호비는 이로부터 십 년 후, 이 날의 정을 생각하고 정말로 구렛나루를

길렀는데 이때 정영소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비는 목탑에서 이불을 한장 집어들고 그녀의 몸을 가볍게 감싸안아 목탑 위

에 뉘이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이윽고 호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

식하여 다시 베조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희효봉의 방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불렀

다.

[희형, 안에 있소!]

희효봉는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물었다.

[흥! 누구시오? 무슨 볼일이오?]

호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희효봉은 그를 보자 아! 하고 나직이 탄

성을 내지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하러 왔소이다.]

희효봉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통한에 찬 눈빛을 하고 있

었다.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한가지 일을 희형에게 분명히 해야겠소. 첫째, 나는 결코 귀파의 장문

인이 될 생각이 없소. 다만 일이 공교롭게 되어 소제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희형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말았구려.]

그리고는 마춘화가 어떤 연유로 중독이 되었으며 관병들에게 쫓기던 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부득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손을 쓴 사실들을 낱낱이 이야기

해주었다. 하지만 마춘화가 누구에게 해를 입었으며 그를 추적하던 사람들이 복

강안의 수하라는 사실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희효봉는 묵묵히 들으며 약간 안색이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그저 음! 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내 대장부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태산과 같이 무겁게 여겨야 한다고 했

소. 내가 만약에 열흘 안으로 장문인 자리를 당신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면 나는

칼과 검 아래에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천년 후에도 여전히 강호의 호걸들에

게 더러운 욕을 얻어먹을 것이오.]

사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칼이나 검 아래에서 목숨을 잃는 일

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천하 영웅호걸들의 비웃음을 산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

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

희효봉은 호비가 그와 같이 맹세를 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장문인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소. 더우기 당신

의 무공이 나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다른 문파

의 사람이 본문의 문호를 집장하는 것은 실로 승복하기 어려운 노릇이란 말이외

다.]

호비는 정중히 말했다.

[그렇소. 나는 장문인 대회가 끝나면 전후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귀문의

여러 선배님들 앞에서 정중히 사죄를 하겠소. 그런 연후에 귀문의 여러 제자분

들끼리 다시 무공을 겨루어 장문인을 추대하면 되지 않겠소?]

희효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그때 나서서 얻는 것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구려. 하지만 정형.......]

호비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나의 성은 호씨이고, 우리 누이의 성이 정씨라오.]

그리고 나서 그는 얼굴에 가린 베조각을 벗었다.

희효봉은 그의 턱에 있는 구렛나루가 힘차게 뻗쳐있는 모습이 매우 위풍당당

한지라 내심 찬탄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호형, 본문의 몇 분 선배님들은 매우 까다로우신 분들이라 나중에 진상을 밝

힌다면 아무래도 한차례의 풍파는 피할 수가 없을 것 같구려. 당신이야 무공이

고강하니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사람이 많은 것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소? 우리 서악의 화권문에서는 문호에 관계되는 일이라

면 무엇이던 간에 찰거머리처럼 늘어붙어 죽을 때까지 추근덕거린다오.]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 나 역시 생각해 본 바가 있소이다. 본래 나는 장문인 대회에

서 화권문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반드시 명성을 크게 떨쳐 속죄를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소. 생각컨데 그렇게 된다면 여러 선배님들은 양해해 주실 것이외다.]

희효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몸에 극독이 중독되어 기운을 쓸 수가 없구려. 그렇지 않았

더라면 본문의 무공을 몇 수 더 펼쳐 호형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

절하오. 만약 호형이 몇 가지 초식을 더 배운다면 차후 일이 닥치더라도 오늘처

럼 쉽게 마각을 들어내는 일이 없을테니 말이오.]

호비는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켜 희효봉에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희형, 나는 이 누이를 대신해서 당신께 사과를 하겠소.]

희효봉는 엉겹결에 반례를 하고는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쓴 독에 중독이 되었는데 이 자식은 무엇이 좋아서 이렇게 웃는 것일

까?)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히 겉으로도 못마땅한 빛을 띠게 되었다. 호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의형, 우리 누이에게 중독된 상처는 어디 있소?]

그러자 희효봉은 왼쪽 소맷자락을 걷어올렸다. 과연 그의 팔뚝은 계란크기 정

도로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찢어진 곳은 새끼 손가락만했는데 검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극독에 중독이 된 것 같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둘째 누이가 약을 쓰는 것은 과연 신기에 가깝구나. 어떤 약을 썼길래 그의

팔뚝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만약 나라도 이렇게 상처를 입었다면 식

음을 전폐하고 전전긍긍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호비는 물었다.

[상처는 어떠시오?]

희효봉은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근이 전혀 감각이 없구려.]

호비는 다시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마취를 시키려고 지극히 독한 마약(痲藥)을 쓴 모양이구나.)

내심 생각을 하고는 손을 뻗쳐 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내기 시작했다.

희효봉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안되오. 안돼! 당신은 목숨을 돌보지 않을 참이오?]

그러나 호비의 두 손에 꼭 잡혀 있는 상태라 그는 꼼짝을 할수가 없었다. 그

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린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심 생각했다.

(그러한 극독은 팔에 사용해도 이런 형편인데 입으로 빨아낸다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람과 아무런 관계나 연고도 없는데 어째서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호비는 몇 모금의 피를 빨아내고는 검은 피를 바닥에 뱉으며 웃으며 입을 열

었다.

[하하하! 희형, 놀라거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소. 이 독약은 가짜이외다!]

희효봉은 그의 진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는 당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어찌 함부로 독을 사용하여 당

신을 해치겠소? 그녀가 당신에게 장난을 친것에 불과한 것으로 실은 당신의 팔

에 약간의 마약을 뿌려놓은 것이외다. 당신은 내가 입으로 빨고도 멀쩡한 것을

보았으니 안심을 할 수 있을 거외다.]

희효봉는 정영소가 자기에게 준 약을 먹기는 했으나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

출 수 없었으며, 이 약이 진짜 해약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설

사 독성이 해소된다 해도 후환이 남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비

의 말을 듣자 놀람과 기쁨에 얽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형, 당신은...... 당신이 직접 나에게 사실을 이야기 해주다니. 당신은 내

가 배반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오?]

호비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대장부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따져야 할 것은 성실과 신의인 것이오! 보기

에 희형은 의리가 깊은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어찌 희형으로 하여금 며칠 동안

더 근심에 파묻혀서 살도록 할 수 있겠소?]

희효봉은 크게 기뻐하며 탁자를 치며 말했다.

[좋소!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되기로 결정했소! 호형이 설사 당금 천자의 비위

를 거슬리고 하늘과 같은 큰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소제는 당신을 위해 힘을 다

하겠으며 결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겠소.]

제아무리 간악한 자라 할지라도 영웅호걸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진심으

로 탄복하지 않겠는가?

호비는 정중히 말했다.

[희형의 두터운 뜻에 정말 감사하오. 내가 비위를 거스른 사람은 당금 천자는

아니지만 천자의 권세와 맞먹는 긴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오. 그런데 희형,

어젯밤 내가 보니 당신이 펼치던 화권의 일로 가운데 몸을 돌리고 무릎을 올리

는 천장(穿掌)의 일초를 보여주었는데 그때 간보( 步), 격보(擊步) 다음에 이어

지는 약보( 步)를 펼치면서 어째서 공중에서 방향을 약간 선회시키는 것이오?]

호비가 말하는 일초는 야마회향찬제행(野馬回鄕 蹄行)이라는 초식으로 동작이

무척 번거롭고 복잡했다.

희효봉은 그 말을 듣자 내심 놀라며 생각했다.

(정말 매서운 눈썰미로구나. 어젯밤 내가 일로의 화권을 펼칠 때 시종 정신을

모아 한치라도 실수가 없도록 했으나 야마회향찬제행 그 일초에 이르렀을 때 순

간적으로 독에 중독된 사실을 떠올리며 그만 심신이 흐트러지며 실수를 했다.

만약 그와 대적하여 손을 썼더라면 그에게 빈틈을 보여 낭패함을 면치못할뻔 했

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호형은 정말 눈썰미가 뛰어나구려. 소제는 탄복해 마지 않는 바이오. 사실

그 일초는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이라오.]

그리고는 그는 그 동작을 올바르게 펼쳐보이는 것이었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이제서야 제대로 들어맞는구려. 만약 어젯밤에 희형이 펼친 것처럼 한다면

아마도 적은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올 수 있을 것이오.]

희효봉은 자기가 실수한 것을 꼬집어내자 정신이 번쩍 드는지 포권을 해보이

고 십이로의 서악 화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보였다.

호비는 그의 초식을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 권법 가운데 정묘한 점

은 터득할 수가 있어 칭찬의 말을 했다.

[귀파의 권법은 박대정심(博大情深)하니 집중적으로 연마를 한다면 정말 무궁

한 위력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소. 보기에 이십이로의 화권 가운데 일로만 정통

할 수 있다면 명성을 더욱 높일 수가 있을 것 같구려.]

희효봉은 그가 자기 본문의 무공을 칭찬하자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소. 본문에서는 '화권사십팔, 예성행천애' 라는 두 마디의 말이 있는데

화권 사십팔로의 무공은 십팔로의 등당권(登堂拳)과 십이로의 실권(室拳), 그리

고 십팔로의 도(刀), 창(槍), 검(劍), 곤(棍)을 쓰는 기계공(器械功)으로 나뉘

어지지요. 본문의 제자들 중에는 일정한 경지에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사십팔로

의 무공을 모두 배운 사람도 몇 사람 되지 않지요.]

두 사람은 무예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자 더욱 의기투합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서로 초식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

었다.

주인이 하녀를 보내 몇 차례 식사하러 오기를 청했으나 두 사람은 무공 연마

에 정신이 팔려 있자 그 하녀는 한쪽 편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희효봉이 선풍각(旋風脚)이라는 일초를 펼쳐 공중으

로 솟구치며 돌려차기를 하자 문밖에서 누군가 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풍권벽력상구천(風捲霹靂上九天)이로군!]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는 바로 채씨 성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즉시 웃음

을 띠우고 포권을 하고 앞으로 나서며 인사말을 했다.

목숨을 건 도박(賭博)

이 채가라는 노인의 이름은 외자로서 위(威)라고 했는데 화권문 중에서 신분

이 무척 높은 편이었다. 그는 호비가 얼굴을 가렸던 황색 베조각을 떼어낸 본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호비가 커다란 구렛나루의 사내인 것을 확인하자

자세히 그를 몇 번 훑어보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장문인에게 아뢰오이다. 복대수께서 문서를 보내왔구려.]

호비는 내심 섬칫하여 생각했다.

(이 일은 끝내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 두고보기

로 하자.)

그리고 얼굴에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음!'하는 소리만 냈다. 채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문서는 이 늙은이에게 보내는 것으로서 본문의 장문인을 추대했는지 묻는

구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넉 장의 청첩장도 포함되어 있으니 장문인께서는

중추절에 본문의 세 명의 제자를 대동하고 천하장문인 대회에 참가를 하셔야겠

소이다.......]

호비는 거기까지 듣고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 일이었구나. 나는 그런 것을 모르고 깜짝 놀랬군. 다른 것은 별로

상관이 없지만 다만 하루 밤 동안만은 마소저가 움직일 수 없으니 만약 복강안

이 이 문서에 사람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마소저의 목숨은 끝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혹시나 복강안이 어떤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문서를

받아 자세히 본 후 입을 열었다.

[채 사백부님, 그리고 희사제, 그대 두 분이 나를 벗해 주시구려. 거기다가

나의 소매까지 합하게 된다면 마침 네 사람이 되니 이렇게 장문인대회에 참가하

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채위와 희효봉은 크게 기뻐하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비로소 기다리

고 있던 시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나으리, 채나으리, 희나으리, 세 분께서는 나가서 식사를 하시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영소를 불러 깨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방안

에서 불렀다.

[큰 오라버니, 이리 와 보세요!]

호비는 채위와 희효봉에게 말했다.

[두 분은 먼저 식사를 하러 가시지요. 저는 곧 뒤따라 가겠소이다.]

정영소가 조금하게 부르는 것 같아 그는 즉시 재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

어갔다. 휘장을 밀치자 마자 마춘화가 나직이 불렀다.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이들을 둘 다 이리 데리고와요...... 나는

그 애들을 만나보아야겠어요...... 그 애들은 어디 있어요?]

정영소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나직이 말했다.

[그녀가 반드시 아이들을 봐야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좋지 못해요.]

호비는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두 아이는 심보가 악독한 노파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나 우리가 끝내 방법

을 찾아 구출해 내야 할 것이오.]

정영소는 말했다.

[마소저는 매우 초조하게 생각하면서 즉시 데리고 오라고 하네요. 만약에 애

들을 만나보지 못한다면 울부짖으며 소리를 칠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녀의 병세

는 점점 더 악화될 거예요.]

호비는 한동안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내가 그녀를 진정시켜 보리다.]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정신이 맑지 못하니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즉시 어린애를

데리고 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마음속에 울화가 쌓이게 되요. 그러

면 독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약효마저도 오장육부에 골고루 퍼져나가지

못해요.]

호비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을 해보았으나 일시에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열었다.

[설사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복대수부로 들어가 아이들을 빼앗아 온다 하더라

도 아무리 빨라도 오늘 저녁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오.]

정영소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시 복대수부로 들어간다고요? 그것이야말로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

어요?]

호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어젯밤 천지를 진동

할 큰 일을 일으켜 놓았으니 오늘 복강안의 부중에서는 삼엄하게 경계를 할 것

인데 만약에 한걸음이라도 다시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판

이었다. 그것만도 어렵기 짝이 없는 노릇인데 어떻게 두 아이를 빼앗아 나올 수

있겠는가?

만약에 수십 명의 고수가 동시에 손을 쓴다면 어쩌면 그런대로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손을 쓸만한 사람은 단창필마로서 자신 뿐이었다.

여기에다 정영소를 보태고 기껏해야 다시 희효봉을 보탠다 하더라도 세 사람으

로서는 정말 하늘을 솟아오를 재간이 있지 않고는 해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후 마춘화가 끊임없이 부르짖었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엄마가 편치 않단다. 너희들은 어디로 갔느냐?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호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째 누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녀가 저토록 애절하게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으니 사흘을 넘기지 못해 독기

가 심장으로 파고 들게 될 거예요. 우리들로서는 힘을 다할 뿐이며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요.]

호비는 넌즈시 말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잠시후 다시 상의해 보도록 하지.]

식사를 마친 후, 정영소는 마춘화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약을 갈았다. 그런데

마춘화는 복강안을 부르기 시작했다.

[강 오라버니, 강 오라버니, 그대는 어째서 나를 아랑곳하지 않나요? 그대는

우리의 두 착한 애를 데려 오세요. 나는 그 애들에게 뽀뽀를 해주어야 겠어요.]

잠꼬대처럼 찌걸이는 그녀의 말에 호비는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했다.

정영소는 호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방을 나와 조그마한 객실로 들어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 제가 큰 오라버니에게 한 말 중에 책임을 지지 않은 말이 있었

던가요?]

호비는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소리는 무슨 뜻으로 하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지.]

정영소는 말했다.

[좋아요. 내가 한마디 할테니 잘 들어두세요. 만약에 큰오라버니가 복강안의

부중으로 들어가 마소저의 아들을 빼앗아 오려 한다면 큰 오라버니는 따로 명의

를 모셔와 그녀의 독을 치료를 하도록 하세요. 나는 즉시 남쪽으로 되돌아가겠

어요.]

순간 호비는 어리둥절해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영소는 어느덧 훌쩍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비는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그를 생각해서 하는 말임을 알았다. 사실 그가

지금의 형세를 볼 때 모험을 해서 다시 복강안의 부중으로 들어간다면 그와 같

은 행동은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 이외에 아무런 이득도 없을 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오로지 의협심 때문에 벌인 일이고 옛날 상가보에서 매

를 맞을 때 마춘화가 나서서 사정을 하던 일에 보은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

문에 호비는 이미 내심 한 번 더 시도해 보려고 결심을 한 터였다. 그러나 정영

소가 갑자기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자 만약 자기가 죽음을 무릅쓰고 두

아이들을 구해 낸다고 하더라도 정영소가 화가 나서 떠나버린다면 이 또한 낭패

가 아닌가?

호비는 일시에 어떻게 대책을 세울 수도 없어 마음을 가라앉힐 겸 내키는 대

로 걸음을 옮겨 거리로 나섰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강안의 부중 근처

에 이르게 되었다.

집 주위에는 다섯 걸음이나 열 걸음마다 두 명의 위사가 무기를 들고 엄밀하

게 지키고 있어 복강안 부중으로 뛰어들기는 고사하고 몇 걸음만 더 앞으로 나

간다 하더라도 위사들이 다가와 검문을 할 것 같았다.

호비는 감히 더 지체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서둘러 빠져나갔다. 마침

한 채의 주루가 보여 주루 위로 올라가 술을 시켜 홀로 자작을 하며 두 잔째의

술을 입에 대려고 할 때 갑자기 옆 방에서 들려 온 말소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왕형, 오늘은 우리 이만하고 끝을 냅시다. 오늘 밤은 당직을 서야하니 술을

마시고 얼굴을 벌겋게 하고 다니면 남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외다.]

그러자 한 사람이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좋소, 그럼 우리 석 잔만 더 마시고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호비는 그 사람의 음성을 듣자 그가 왕철악이라는 것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

다.

(천하에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있나. 여기서 그를 또 만나다니 전혀 뜻밖이로

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복강안의 수하이니 잠시 후에

물론 복강안 부중으로 가서 차례대로 수위 노릇을 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이

복강안 부중에서 가장 가깝고 번드레한 주루에서 먼저 술 몇 잔을 마신다는 것

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왕철악 같은 사람이 따분한 당직을 서기

전에 먼저 기분좋게 한 잔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이때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왕형, 당신은 호비를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오?]

호비는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흠칫했으나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

였다.

왕철악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호비 그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비록 젊지만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친

구가 사귀기를 좋아하는 호걸이라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꾸만 복대수와

맞서고 있으며, 어젯밤만 하더라도 복강안 부중으로 뛰어들어 대수를 찔러죽이

려고 했는데 정말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왕형은 호비를 잘 알지만 우리는 그리 운이 좋을 것 같지는 않구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이 기분좋게 한 잔 마시고 나가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친다면 우리

두 사람이 쉽게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큰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소?]

왕철악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당신은 너무나 수월하게 기분이 내키는대로 말을 하는구려. 장구(張

九), 당신의 재간으로는 설사 스무 명이 있다하더라도 그를 잡을 수 있다고 장

담하기가 어려울 것 같소.]

장구는 그 말을 듣고 심술이 나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소? 몇 명의 왕철악이 떼거지로 달려들어야 그를 잡을

수 있단 말이오?]

왕철악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나는 더욱더 안되지요. 설사 마흔 명이나 되는 나와 같은 팔푼이가 있다 하

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외다.]

장구는 냉소를 했다.

[그가 정말 머리가 셋이고 팔이 여섯 개라도 달렸단 말이오? 그렇게 무섭게

이야기 하다니.]

호비는 그들의 말이 서로 의기투합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움직이는 바

가 있었다. 어쩌면 적절한 기회를 놓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짜고짜 휘장을

들치고 옆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왕형,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었구려. 아, 저 분은 장형이시구려. 어이, 점소

이! 내 자리도 이리로 옮겨주게!]

왕철악과 장구는 호비를 보자 모두 어리둥절해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 누구야?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인데.)

왕철악은 그의 음성이 약간 귀에 익기는 했으나 얼굴 가득히 구렛나루를 기르

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호비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호비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나는 주철초 주형과 증철구 중 둘째형을 만나 취영루(聚英樓)에서

한 잔 하기로 했는데 왕형 이야기도 나왔었지요.]

왕철악은 애매하게 대답을 하면서 누구일까 하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주사형과 증사형 등과도 잘 아는 사람일텐데 그렇다면 자신도 마땅히 알

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일시에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의아하게 여겼지만 자기 머리는 역시 멍청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스스

로 자책을 하고 있었다.

점소이가 다시 자리를 정리하여 주자 호비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소제가 한 잔 사겠소. 오랫동안 왕형이나 장형과 한잔 하지 못했구

려.]

그러면서 열 냥의 은자를 꺼내 점소이에게 던지며 말했다.

[계산대에 맡겨놓을테니 숙수가 자랑할만한 정교한 음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오도록 하게.]

점소이는 그의 손 씀씀이가 대담한 것을 보고 즉시 부엌에 있는 숙수에게 특

별히 분부를 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술과 음식이 올라오게 되었다. 호비는 허풍을 떨면서 진내지, 은중

상, 왕검영, 왕검걸 형제 등 몇몇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이야기했고, 잠시 후에

는 무예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고, 다시 도박에 대해서도 논하는 등 마치 모두가

자기와 잘 아는 친구처럼 말했다.

왕철악은 그가 누구일까 답답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이렇게 다정하게

나오는데 만약에 입을 열고 그의 성명을 묻는다면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종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빠개져라 하고 생각을 해도 이

사람이 누군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장구는 그가 왕철악의 친구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그의 손씀씀이가 크고 내

력 또한 얕지 않은 신분인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한 잔 얻어먹을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술을 한동안 마시고 음식도 거의 다 차려지게 되자 왕철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듯 입을 열었다.

[형씨, 내가 무례한 것을 용서해 주시오.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멍청해지

는구려.......]

그리고는 자기 이마를 한 번 후려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갑자기 노형의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구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소이

다.]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왕형은 정말 귀하신 몸이라 일을 잘 잊어버리는 모양이구려. 어젯밤만 하더

라도 왕형은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소? 그러나 애석하게도 패구(牌九)판

을 벌이기도 전에 주형이 남과 손을 쓰는 바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게

되었지요.]

왕철악은 어리둥절하며 말을 더듬었다.

[당신은...... 당신은.......]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는 바로 호비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왕철악과 장구는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소제가 수염을 달았다고 해서 왕형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왕철악은 나직이 말했다.

[말소리를 낮추시오, 호형. 이 성 안에서는 모두 당신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

어 있는데 어째서 당신은 대담하게스리 여기까지 와서 술을 마신단 말이오?]

[아니, 뭐가 두렵단 말이오? 왕형조차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이나를 알아볼 수 있겠소?]

왕철악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북경성 안에서는 더 지체할 수 없을 것이니 빨리 성을 빠져나가도록 하시오.

노자돈은 충분하오?]

호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왕형이 그토록 옛날 지기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것에 대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오. 소제의 은자는 충분하다오.]

그와 같이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성격이 거칠고 충동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인정이 많은 사람이로구

나.)

하지만 장구는 안색이 변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철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성문에서 검문검색이 심하다오. 성을 나갈 때는 빈틈을 보이지 않도

록 나와 장형이 성 밖까지 배웅을 해주는 것이 좋겠구려. 그런데 그 정소저는

어디에 있소?]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성을 나서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에게는 복대수와 다시 따져야 할

것이 있소이다.]

장구는 거기까지 말을 듣자 더욱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왕철악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호형, 내 재간은 당신에게 미칠 수 없지만 한 가지 권유하지 않을 수가 없구

려. 복대수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듯 한데 당신이 정말 그와 원한이 있다 하더라

도 어찌 그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소. 나는 그의 밥을 먹고 그의 문하

에서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감싸줄 수는 없는 형편이라오. 그러나 오

늘만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성 밖까지 배웅을 할테니 빨리 갑시다.]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되오, 왕형. 당신은 내가 무엇 때문에 복대수에게 죄를 지었는지 아시오?]

왕철악은 호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모르겠구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묻고 싶었던 참이오. 그 호비는 복

강안이 어떻게 상가보에서 마춘화를 만나게 되었고, 또 어떤 사정으로 그의 두

아이를 낳았으며 어젯밤 마춘화가 중독된 사연을 일일이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

신이 마춘화를 구하게 된 경위와 그녀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있으면서도 두 아이

들을 보고 싶어하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두 아이를 구출해내서 그녀에게 데리

고 가야만한다는 말을 조목조목 이야기 했다.

왕철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노기가 끓어오르는듯 탁자를 치며 말했다.

[듣고보니 그 사람의 심성이 꽤나 악독하군요. 호형, 당신의 의협심과 영웅호

걸다운 기상은 정말 탄복할만 하오. 하지만 복대수의 부중의 경계가 삼엄하며

수많은 고수들이 사방에서 지키고 있는 형편이니 두 아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지금으로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오.]

호비는 무겁고도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계책이 있소이다. 왕형이 장형의 복장을 빌려서 나

를 위사로 분장시켜서 야음을 틈타 부중으로 들어가 손을 쓰도록 하면 될 것 같

구려.]

장구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호비

는 왼손으로 술잔을 들고 천천히 술을 한모금 들이키면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

으려다 갑자기 술잔에 남은 술을 장구의 얼굴에 뿌렸다.

장구는 어! 하고 놀라 소리를 내지르며 눈을 부렸다. 호비는 재빨리 젓가락을

뻗쳐 그의 신장(神藏)과 중정(中庭) 두 곳의 혈도를 찔렀다. 장구는 맥이 뼈지

는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자 위로 쓰러졌다.

점소이가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리자 달려와 살펴보았으나 호비는 시치미를 떼

며 넌즈시 말했다.

[이 분 총야(總爺)께서 만취하셨으니 객점의 방을 얻어 쉬도록 해야겠네.]

점소이는 입을 열었다.

[다섯 집을 지나가면 안원노점(安遠老店)이 있지요. 소인이 이 총야를 부축해

가도록 하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리고 점소이에게 오전의 은자를 사례비로 주었다. 그 점소이는 신바람이 나

서 싱글벙글하며 장구를 부축해서 그 객점으로 데리고 갔다.

호비는 좋은 방을 달라고 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세 곳의 혈도를 짚어

자정 안으로는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왕철악은 머리 속에서 열 다섯 개의 물통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

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호비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나 호비의 의

협심과 시원시원한 일처리를 보고서 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호비가 하려고 하는 일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시 가슴이 두

근두근해지며 불안해졌다.

호비는 입고 있던 옷을 장구에게 입혀주고 자신은 장구의 무관 복장을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중키라서 몸에 맞는 편이었다.

왕철악은 넌즈시 입을 열었다.

[나는 신시(申時) 정각에 당직을 서야 하는데 잠시 후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

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왕형께서는 장구가 병이 나서 당직을 서지 못한다고 말씀을 해 주시구려. 나

는 이곳에서 왕형을 기다릴테니 이경 무렵에 나를 데리러 오시구려.]

왕철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만약 이 한 마디

를 응낙한다면 한평생 살아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남부끄럽지 않고 꿋꿋한 사배가 되고자 한다

면 어떠한 부귀영화도 흔쾌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은 한마음 한뜻으로 복대수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처지였다. 그는 시

비를 분간할 줄 알았지만 어찌 옳고 그름만 따지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는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호비는 그가 망설이는 것올 보고 맏했다.

[왕형, 이번 일은 일시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니 왕형께서도 지금 대답

을 하실 생각은 하지 마시구려. 나는 오직 이자리에서 왕형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겠소.]

왕철악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곧장 객점을 나섰다.

호비는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지금 그는 자기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박에 건 것은 은자 몇냥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이라는 것

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경 무렵이 되면 어쩌면 왕철악이 혼자 살그머니 자기를 데리고 복강안 부중

으로 잠입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왕철악은 십중팔구 목

숨을 잃게 될 것이다. 왕철악으로서는 자기와 아무런 교분이나 인연도 없었으며

더구나 마춘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처지였다. 아무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왕철악의 인물됨으로서 과연 할 수가 있을까?

그는 어릴적부터 주철초의 분부를 받들어 왔으며 이 대사형에 대해서 신명을

다해 일해 왔다. 더군다나 복강안의 휘하에서 다년간 벼슬을 했으니 공명이록

(功名利祿 : 명예를 떨치고 녹을 받음)이라는 넉 자는 그에게 있어서 적은 일이

아니었다.

만약 진정으로 의기투합하는 강호의 호걸이라면 호비 역시 왕철악을 결코 의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철악은 재간이 평범하고 좀 멍청한 무관이었

다.

만약 그가 벼슬이 오르고 부자가 될 기대에 차 있다면 이경도 되기 전에 이미

백여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을 포위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죽을 힘

을 다해 싸운다 하더라도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리라!

이 가운데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왕철악이 시치미를 떼고 양쪽에

다 협조를 하지 않고 이 일에 대해 고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후 장구가 깨

어난다면 그가 어찌 이 일을 고자질하지 않겠는가?

이미 주사위를 던져졌고 호비는 아직 그 패를 보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형편

이었다. 만약 지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고, 그 열쇠는 전적으로 왕

철악의 생각 여하에 달려있었다.

그는 왕철악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요구한 모험

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고 인생의 갈림길에서도록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호비

로서는 그에게 반 푼 어치라도 보답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철악이라는 사람은 착할 수도 있고 악독해질 수도 있는데, 그 누구라도 이

일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생명이 오직 '그에게 달려있는 커다란 모험이었지만

그러한 방법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복강안 부중은 경계가 삼엄하여 안

내하여 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코 잠입해 들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벼개를 베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으며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는 이

도박의 결과가 어떨 것인가 짐작하며 고민해봤자 골치만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

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어떠한 패가 나올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런데 어림 짐작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한 시진 남짓 잠을 자고 있는데 몽롱한 가운데 객점에서 몇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맞았소. 나는 그렇지 않아도 현(玄)자가 들어있는 호를 가진 그 분 총야를

만나려고 하던 참이오. ......그가 술에 취해있다구요? 공적인 일로 그를 찾는

것이니 당신께서 안내를 해 주시구려.]

호비는 그 목소리가 왕철악의 음성이 아닌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내려 앉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허허, 이번 커다란 도박은 끝내 지고 말았구나.)

그리고는 단도를 꺼내들고 창문을 열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사방은 어둠에 쌓

여있을 뿐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가 엎

드려서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왕철악이 떠나간 이후에는 오직 두 갈래 길만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

을 호비는 알고 있었다. 만약에 왕철악이 의협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혼자 와

서 자기를 이끌고 몰래 복강안부중으로 들어갈 것이고, 만약 그가 몸을 사리고

복록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복강안의 무사들을 데리고 와서 이곳을 포

위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번 일은 틀려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객점 사방에는 매복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자 호비는 뜻

밖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달려와 그를 체포하려는 무사가 안온다면 몰라도 온다

면 몇 명이 아니라 반드시 떼를 지어 올 것이 분명했다. 한 두 명의 고수가 몸

을 숨기고 잠복하고 있다면 몰라도 사람 수가 많다면 그들의 숨소리마저도 호비

는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적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 약간 마음을 놓였다. 그때 창밖에 촛불이 어

른거리더니 점소이가 손에 촛대를 들고 문 밖에서 입을 열었다.

[총야, 이 총야께서 어르신올 한번 뵙고자 합니다.]

호비는 몸을 날려 창문을 통해 소리없이 방으로 들어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구려!]

점소이는 방문을 열고 들어와 촛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웃음을 띠우며 입을

열었다.

[총야께서는 술이 깨셨겠지요? 아직도 거북하시다면 해장국이라도 끓여 드릴

깝쇼?]

호비는 대뜸 거절을 했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그리고는 점소이 등 뒤에 서 있는 위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자의 나이는 약 사십여 세 정도로 잿빛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호비는 경각심을 돋구며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인물이로구나! 혼자 내 방으로 들어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니. 설마하니 어떤 뛰어난 재간이 있길래 이 호비를 염두에 두지 않

는단 말인가?)

그 위사가 입을 열었다.

[이 분이 장대형이시오.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이 없군요. 소제의 성이 임

(任)가로서 임통무(任通武)라고 하며 좌영(左營)에서 근무하고 있다오.]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원래 임형이었구려. 부중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평소에 임형과 가까이하지

못했구려.]

임통무는 맞장구를 쳤다.

[그렇구려. 상부에서 공문이 내려왔는데 소제는 장형에게 갖다주라는 분부롤

받고 이렇게 왔소이다.]

그러면서 그는 공문을 한 장 꺼냈다.

호비가 받아보니 공문 왼쪽 귀퉁이에는 놀랍게도 병부정당(兵部正堂)이라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고 겉봉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즉시 안원객점의 순포우영(巡捕右營) 장구에게 신속히 송달하되 착오가 없도

록 하라.)

호비는 지난 번 복강안 부중에서 강철 상자에 상처를 입었던 속임수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요령이 생겨 바로 공문서를 뜯어보지 않고, 조심

스럽게 봉투를 살펴보고 이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묘인봉이

편지를 뜯다가 두 눈이 독에 중독된 사실을 떠올리고 공문을 아래쪽으로 내린

후에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순간 그는 놀람과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백지 위에는 글자는 한 자도 없고 한 폭의 조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에는 목을 매달아 죽은 귀신이 손짓발짓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대들보에 목

을 매달라고 권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당시 미신에 의하면 한 사람이 목매달아 자결을 하여 귀신이 되었을 때는 반

드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이 귀신이 되도록 유혹을 한다고 믿

었다. 그렇게 해야만이 그 사람이 이승에 연을 끊어버리고 나중에 죽은 자가 대

신 구천을 맴돌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믿고 있었다.

호비는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본 후 떠오르는 바가 있어 그 위사에게 물었

다.

[임형은 오늘밤 복대수 부중에서 당직이오?]

임통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소제는 곧 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호비는 불렀다.

[잠깐! 이번 공문은 누가 임형에게 보낸 것이오?]

임통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우리 임참장(林參將)이 소제를 보낸 것이라오.]

호비는 비로소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원래 왕철악은 그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의 대사형인 주철초를 찾아

가 이번 일을 상의한 모양이었다. 주철초는 호비가 어젯밤 다리를 접골해주고

동패를 되돌려 준 은덕을 생각하여 이러한 계책을 꾸며 왕철악으로 하여금 모험

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죽을 사람을 대신 보내온 모양이

었다.

이 사람이 호비를 데리고 복강안 부중으로 들어간다면 일이 어찌되든 자신의

사형제와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는 성명을 쓰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글자 한자 남기지 않은 것을 볼 때 만일 비밀이 탄로가 나더라도 그

에게 누를 끼치는 일을 막자는 것이었다.

아마 주철초는 이 공문을 좌영의 임참장에게 보내는 서류 속에 끼워넣어 몇

사람의 손을 거치게 만들어 이 공문 어디서 온것인지 알 수 없도록 한 모양이었

다. 그런데 임참장은 병부정당이라는 날인이 된 공문서인 것을 보고 즉시 사람

을 시켜 보내 온 것이었다.

주철초는 이미 좌영의 위사들이 오늘밤 모두 복강안 부중에서 당직을 하며 수

위노릇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참장이 누구를 시켜 편지를 보내든

호비가 편지를 가져온 사람을 따라 부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사이의 우여곡절을 호비로서는 모두다 알 수가 없었지만 대충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주철초의 경륜과 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교묘한 계책

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사에서 수십 년 간 빌어먹은 사람인 만큼 다

른 사람과 일처리하는 것이 과연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호비에게 도움

을 주고자 하는 뜻은 전적으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편으로 고마워했다.

호비는 즉시 입을 열었다.

[상부에서 이 형제에게 임형과 함께 부중으로 들어가 수위를 하라고 명을 내

렸구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기랄! 본래 오늘은 내가 쉬는 날인데 야밤 삼경에 또 사람을 불러가는군.]

임통무는 웃으며 말했다.

[대수 부중에 자객이 뛰어든다는 소문이 있으니 모두들 약간 고생을 하게 되

었구려. 그러나 운이 좋다면 커다란 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외다.]

호비는 눈을 찡긋하며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중애 상금을 받게 된다면 소제가 한턱을 쓰겠으니 우리 형제들끼리 취영루

로 가서 진탕하게 놀아 봅시다. 임형, 임형은 술이나 도박을 좋아하는 거요, 아

니면 역시 색을 좋아하는 거요?]

임통무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주색재기(酒色財氣) 이 네 가지라면 이 형제는 가리지 않고 다 좋아

한다오.]

호비는 매우 다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

다.

[우리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는구려. 정말 이렇게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럽

소. 어이! 점소이, 점소이. 빨리 술을 가져 오게!]

임통무는 주저하며 말했다.

[오늘 나는 당직인데 만약 참장이 술을 마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중에 좋지

않을 거요.]

호비는 그의 어깨를 짚고는 나직이 말했다.

[석 잔 정도 마셨는데 참장이 알기는 개코를 알겠소.]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점소이가 술을 가지고 왔다. 밤중이라 안주는 변변치

못해 단지 소금에 절인 소고기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호비와 임통무는 거푸 석 잔의 술을 마시고 한 냥의 은자를 탁자에 던지며 말

했다.

[나머지는 수고비일세.]

점소이는 크게 기뻐하며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임통무는 대뜸 그 은자를 빼앗

아 들더니 웃으며 말했다.

[장형의 손씀씀이가 너무나 지나치게 크구려. 우리 복대수 부중에 있는 사람

이 술 몇 잔을 마셨기로서니 돈을 쓸 필요가 뭐 있겠소. 자, 갑시다. 시간이 많

이 지체되었소이다.]

그리고 왼손으로 호비의 허리를 잡아끌면서 은자를 자기 품안으로 집어넣었

다. 점소이는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 노기를 띠웠지만 속으로 궁싯거릴 뿐 말을

하지는 못했다.

사실 복강안 부중의 위사들은 북경성 안에서 멋대로 놀아나는 형편이었다. 공

짜로 창극을 구경하거나 먹고 마시는 것은 고사하고 할 일이 없고 심심할 때는

손에 잡히는대로 점포 안의 물건을 집어갔다. 하지만 힘이 없는 백성들이 어찌

감히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호비는 내심 미소를 지으며 이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술을 좋아하니 오히려

상대하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다정히 손을 잡고 객점을 나섰다.

객점을 나서는 순간 지붕 위에서 뚝!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었다. 그 기척은 지

극히 미세하여 호비는 듣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직이 말했다.

[임형, 방 안에 한 가지 물건을 두고 나왔구려. 잠시만 기다려 주시구려.]

그리고는 자기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순간 어둠 속에서 수척하게 마른 신

형이 창문을 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신법이 무척 빠르고 민첩한

것을 보고 어렴풋이 주철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호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내 방에 들어와서 또 무엇을 했을까?)

잠시 생각하면서 침대의 휘장을 들추고 혈도를 짚혀 있던 장구를 들여다 보니

과연 숨이 몇어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시신을 살펴보니 주철초의 중수법에

혈도를 찍힌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호비는 가슴이 서늘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치밀하고 손씀씀이가 악랄하기 이를데 없구나. 장구를 제거

하지 않는다면 그들 사형제 두 사람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 틀림없겠지만 내가

막 객점 문을 나서자마자 잠시 여유도 두지 않고 손을 쓰리라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구나.)

하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게다가 주

철초가 이미 자기를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그들이 자기를 복강안 부중으로 유인하여 손을 쓰는 잔꾀를 부

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는 장구의 몸을 뒤집어 얼굴을 벽쪽으로 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방을 나섰다. 객점 앞에 이르러 임통무에게 입을 열었다.

[임형, 기다리느라고 수고가 많았구려. 우리 갑시다.]

임통무는 기분좋게 말을 받았다.

(아니, 형제들끼리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는 것이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갈 지(之)자 걸음을 하며 복강안 부중으로 향

했다.

용담호혈(龍潭虎穴)

복강안 부중의 바깥 문에는 이십여 명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과연 경계가 전

과 같지 않았다. 호비가 임통무를 따라 문 입구에 이르자 경계를 서고 있던 한

명의 천총(千總)이 나직이 외쳤다.

[위진(威震)---!]

임통무는 접응을 했다.

[----사해(四海)!]

그 천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이 되더라도 모두 좀더 힘을 냅시다.]

임통무는 그 말을 받아 넘겼다.

[그거야 이를 말씀인가요?]

호비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천총 나으리, 당신은 오늘밤 자객이 다시 부중으로 들어 올것 같소? 그렇지

않을 것 같소?]

그 천총은 웃으며 말했다.

[그가 표범의 담이나 호랑이 염통을 삶아먹었다면 모르지!]

호비는 소리내어 껄껄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문에 들어서자 다시 한 소대의 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시 한 천총이 나

직이 호통을 치듯 물었다.

[위진----!]

임통무는 대답했다.

[----절역(絶域)!]

그 천총은 입을 열었다.

[임통무, 그 사람은 얼굴이 매우 낯선데 누구지?]

임통무는 말했다.

[우영의 장형인데 당신은 만나본 적이 없는가요?]

천총은 '음!' 하더니 말했다.

[그 수염이 꽤나 위풍당당하군.]

두 사람은 다시 모퉁이를 돌아 두 곳의 변문(邊門)을 통과하고 화원에 이르렀

다. 화원의 문 입구에는 다시 한 소대의 위사들이 서 있었고, 암호는 '위진과

천추(千秋)'로 변해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임통무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대문을 지나올 수 있었다 하

더라도 두번째 정문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내가 위진사해라는 암호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문마다 암호가 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원으로 들어서자 호비는 길을 알 수가 있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는 말이

있듯이 호비는 일찌감치 손을 써서 마춘화로 하여금 일각이라도 빨리 안심을 시

켜주어야겠다고 작정하면서 정영소를 떠올렸다.

[둘째 누이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니 내가 복강안 부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걱정을 하고 있겠구나.)

그리하여 그는 걸음을 빨리해서 복강안의 어머니가 거처하는 곳으로 걸어갔

다. 임통무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장형, 어디로 가시오?]

호비는 주저없이 대답을 했다.

[상부에서 나에게 태부인(太夫人)을 보호하도록 명령을 내렸소이다. 그러니까

결코 태부인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외다. 임형은 몰랐었소?]

임통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었구려.]

바로 이때 앞에서 두 명의 위사가 아무 기척도 없이 돌아 나왔다. 왼쪽에 있

던 사람이 나직이 외쳤다.

[이름을 대시오?]

임통무는 대답했다.

[좌영의 임통무이외다!]

호비도 따라서 대답했다.

[우영의 장구이외다!]

그 사람은 손을 칼자루로 가져가더니 소리를 내질렀다.

[뭐라고! 당신이 누구라고?]

호비는 속으로 섬칫해져서는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그에게 귀속

말을 했다.

[나는 호비요!]

그 사람은 놀라 어리둥절하여 일시에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호비는 손을 뻗

쳐 그의 혈도를 짚고 왼쪽 팔굽을 휘둘러 다른 위사의 혈도를 봉쇄했다.

임통무는 놀라 어쩔줄 모르고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 뭣하는 것이오!]

호비는 냉랭히 말했다.

[사내대장부라면 걸음을 옮길 때도 성을 바꾸지 않고 앉아있어도 이름을 바꾸

지 않는 법이외다. 나의 성은 호이고 이름은 비라고 하오.]

그리고는 혈도가 짚힌 두 위사를 꽃나무 덩쿨 속으로 던져버렸다.

임통무는 기겁을 하고 휙!하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임형이 나를 데리고 이 부중으로 들어온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았소.

당신이 소리를 지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공연히 같은 자객으로 몰리기 싫

다면 역시 얌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임통무는 놀람과 두려움에 휩싸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목숨을 건지고 싶다면 빨리 나를 따라 오도록 하시오.]

임통무는 아직 작정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니 그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호비가 한 번 팔을 뻗치고 팔굽치를 한 번 올려쳐서 자기보다

무공이 훨씬 고강한 위사들을 둘이나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만약 그와 손을 쓴

다면 부질없이 목숨만 잃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호비가 사

건을 일으켜 자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호비가 이미 부중에 들어왔는데 어찌 일을 벌이지 않겠는가?

임통무가 그처럼 멍청하게 생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해 본 생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호비는 재빠른 걸음으로 상국부인(相國夫人)의 처소 근처에 당도하였다. 그곳

에는 칠팔 명의 위사들이 문 입구에 서 있었다. 만약 문을 뚫고 정면으로 돌파

한다면 신속하게 이곳을 통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궁리를 해 본 끝에 집 옆으

로 돌아가 호통을 내질렀다.

[임통무, 당신은 여기서 뭣하는 것인가! 태부인의 처소로 뛰어들려고 하다니

모반이라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인가?]

이 호통 소리는 임통무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어 그는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

거렸다.

[나는...... 나는.......]

호비는 대갈을 일성했다.

[빨리 멈춰라! 당신은 정말 끔찍한 일을 도모하려는 모양이군!]

뭇 위사들은 그의 호통소리를 듣고는 일제히 달려왔다. 호비는 임통무의 등에

대고 장력을 뻗쳐내자 그의 우람한 체구가 날아가더니 쿵! 하고 창틀에 부딪히

며 창틀을 산산조각 내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그를 잡으시오. 그를 잡아요! 빨리, 빨리!]

뭇 위사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임통무를 잡았다.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태부인을 놀라게 하지 마시오. 이 반역도는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군!]

한편으로 외치며 그는 방안으로 잽싸게 뛰어 들었다. 태부인은 양손에 각각

한 아이를 붙잡고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두 아이는 여전히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갈래요. 엄마한테 갈래!]

호비는 말했다.

[자객입니다! 소인이 태부인과 두 공자 나으리를 모시고 나가도록 하지요.]

태부인은 많은 풍상을 겪은지라 속으로 흠칫했지만 의심이 나는듯 호통을 치

며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그리고 자객은 어디 있는가?]

호비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악랄한 수법을 써서 마춘화를

해치려고 했던 것에 노여움이 복받쳐 올라 즉시 한 걸음 내딛으며 일장을 후려

쳤다.

이 태부인은 상국부인이라는 귀하신 몸이며 당금 황제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또한 그녀의 세 아들은 모두 상서(尙書)라는 직책에 있었으며, 두 며느리는 금

지옥엽의 공주인데 세상 어디에서 이러한 굴욕과 수모를 당한 적이 있겠는가?

호비는 그녀의 심성이 악독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이 많은

부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약하게 일장을 휘두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대의 이가 빠지는 곤욕을 치르자 놀람과 분노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호비는 몸을 구부리고 두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너희 엄마한테로 가마, 너의 어머니는 너희들을 무척

보고 싫어 한단다.]

두 어린에는 얼굴이 밝아지며 하안 조가비 같은 조그마한 네개의 손을 내밀며

호비에게 안기려고 했다. 호비는 왼팔을 벌려 한 팔로 두 아이를 안았다. 그러

나 이미 두 명의 위사가 집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호비는 태부인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

하고 오른손으로 태부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호통을 내질렀다.

[태부인이 나의 손아귀에 들어 있소. 어디 한번 덤벼들어 보시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줄초상이 일어날 것이오!]

호비는 한 팔로는 두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태부인을 끌며 서둘러 바

깥 쪽로 달려나갔다.

이때 몇 명의 위사들은 임통무를 사로잡고 있었다. 임통무는 두 눈을 멀거니

뜨고 호비가 두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태부인을 끌고 나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뭇 위사들은 쥐를 잡는답시고 돌을 던져 독을 깨는 꼴이 될까봐 나서서 손을

쓰지 못했다. 다만 연신 휘파람을 불며 손에 들고 있는 칼과 검으로 호비의 등

을 겨누면서 그의 뒤에서 너댓 걸음 쯤 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호비가 손을 뻗쳐 방어할 수 없는 것을 보고도 감히 무기를 앞으로 들

이밀지 못했다. 호비 역시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화원에는 수많은 위사들이 몰려들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자기 자신은 두

아이와 한 노파를 질질 끌고 가는 형편이니 어떻게 이 복강안의 부중의 대문을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적이 꺼리는 바가 있어 그냥 보고만 있는 상태였지만 만약에 한 사람이

라도 대담하게 나선다면 자신으로서는 진정 그 부인을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았

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형편이라 그는 급히 앞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쌍방은 대치하는 국면을 형성하고 있었다.

뭇 위사들은 감히 나서서 손을 쓰지 못할 상황이었고, 호비 역시 뚫고 나가기

가 어려워졌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위사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어 더욱

위협한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은 고달프게 되었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호

비는 목숨을 내던진다는 생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는 호통을 치고 명령을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고, 이에

답하는 소리도 우렁차게 들려왔다.

호비는 한 손으로 두 어린애를 안고 다른 손으로 태부인을 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걸음을 빨리 할 수가 없어 부득이 어둠컴컴한 곳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불빛이 번쩍하며 누군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객이 공주를 죽이려 한다! 불태워 죽이려 한다! 공주가 불에 타 죽는다!]

호비는 어리둥절했다. 그 소리는 바로 주철초의 음성이 아닌가?

순간 짙은 연기와 화염이 왼쪽에 있는 집 안에서 솟아올랐다.

그곳은 화가(和嘉)공주의 거처로서 그녀는 당금 황제가 아끼는 친딸이니, 만

약 변고가 생긴다면 복강안 부중의 모든 위사들은 무거운 죄를 면하기 어려웠

다.

이때 주철초가 다시 부르짖었다.

[모두 빨리 가서 불을 끄도록 하세! 공주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게. 내가

태부인을 구하겠네!]

주철초는 평소 복강안의 부중에서 위엄과 신의가 있는지라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쭐 모르던 뭇 위사들은 그가 내뱉는 소리에 즉시 우르

르 공주의 거처로 달려갔다.

호비는 이미 그것이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려고 주철초가 펼친 조호이산(調

虎離山)의 계략이라는 것을 알고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주철초가 질풍같이 달려오더니 칼을 내리쳤다. 호비는 옆으로 피하면서 호통

을 내질렀다.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그리고는 태부인을 그에게 밀쳐냈다. 주철초는 태부인을 재빨리 부축하더니

등에 업었다. 호비는 양손에 한 아이씩을 안아들게 되자 발걸음을 빨리 할 수

있었다.

주철초는 다시 진기를 돋구고 부르짖었다.

[자객이 적지 않은 모양이니 각자는 원위치를 엄히 지키고 대수와 두 분 공주

를 보호하도록 하게! 절대로 적의 조호이산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되네!]

뭇 위사들은 '조호이산'이라는 말을 듣자 섬칫해서는 감히 더 쫓아오지를 못

했다. 태부인의 안위도 문제이지만 제각기 책무가 있는 판에 제 위치에서 탈이

생긴다면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호비는 재빨리 화원 뒷문을 통하여 담을 넘어 나갔으나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동쪽과 서쪽에 모두 새까맣게 위사들이 몰려들고 있었

다. 그는 다짜고짜 넓다란 공터를 가로질러 골목길로 달려들어갔다.

뭇 위사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객을 잡아라! 자객을 잡아라!]

그러면서 그들은 뒤를 쫓아왔다.

호비는 골목길을 벗어나자 옆으로 뻗은 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앞쪽

에 노새가 끄는 한 대의 수레가 거리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호비는 수레 위로 대뜸 올라서며 부르짖었다.

[빨리 모시오. 빨리 몰아! 은자는 달라는대로 얼마든지 주겠소!]

마부는 호비의 고함에 노새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채찍을 휘두르자 노새는 달

리기 시작했다.

가뿐 숨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자 호비는 갑자기 구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살펴보니 수레는 분뇨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알고 보니 집집마

다 돌면서 분뇨를 수거하는 수레였던 것이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필이면 똥차라니. 하지만 야밤 삼경에 노새가 끄는 이 수레가 거기에 있었

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뭇 위사들은 호통을 내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순간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 분뇨통을 하나 집어 뒤쪽으로 던졌다. 분

뇨통을 던지는 힘은 지극히 맹렬하여 앞서 달려오던 두 위사가 똥통에 맞아 넘

어지며 온몸에 분뇨를 뒤집어 쓴 채 일시에 일어나지를 못했다.

나머지 위사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당황하며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정선된 무사들이라 칼로 이루어진 산이나 창으로 이루어진 숲

이라 하더라도 놀랄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커다란 똥통이 그야말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니 모두 낭패한 표정으로 그 누구도 감히 그것과 맞서 보려는 엄두를 내

지 못했다.

노새는 발걸음을 쉬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얼마 후 사람 소리가 은연중

뒤에서 들려오며 뭇 위사들이 다시 쫓아왔다.

사실 복강안은 당시 조정의 병부상서로서 천하의 병마대권을 장악하고 있고,

부중의 위사들이 모두 용감무쌍한 고수들인지라 호비가 잇따라 이틀밤에 걸쳐

발칵 뒤집어 놓듯 하자 뭇 위사들로서는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똥통을 던지더라도 미칠 수 없는 거리가 벌어지자 땅에 뒤덮인 분뇨가

밟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호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뒤따라왔다.

호비는 고민이 되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스스로 처소를 누설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마소

저가 아직도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저런 도깨비 같은 작자들

을 데리고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거처로 가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로 숨어야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뭇 위사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으나 다만 똥통이 무서

워서 감히 더이상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멀리서 계속 따라간다면 설마하니 네가 날개라도 달고 북경

성 밖으로 날아갈 수 있겠느냐?]

눈깜짝 할 사이에 노새가 끄는 수레는 네거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다시 분

뇨를 수거하는 수레가 한 대 서 있었다. 호비가 타고 있던 수레는 곧장 그 수레

를 스칠 듯이 지나갔다. 노새를 몰던 마부가 호비에게 손짓을 하며 호통을 내질

렀다.

[건너 뛰시오!]

그러면서 마부는 몸을 날려 다른 분뇨 수레로 건너뛰었다. 호비는 두 아이를

안고 뒤따라 건너뛰었다.

먼저 번 수레의 고삐를 잡고 있던 사내는 곧장 서쪽의 갈래 길로 나아갔고,

호비가 옮겨 탄 분뇨 수레는 동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뭇 위사들이 네거리로 달려왔을 때에는 두 대의 똑같은 분뇨수레가 동서 양쪽

으로 가고 있는지라 자객이 도대체 어느 수레에 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

다. 그들은 잠시 상의를 하더니 두 수레를 나누어 쫓아갔다.

호비는 호통 소리를 내지른 수척한 사내의 신형과 몸을 날리는 신법을 보고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변장한 정영소였던 것이다.

호비는 정영소가 달려와 접응(接應)해 주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둘째 누이, 알고 보니 그대였군.]

정영소는 싸늘히 코웃음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호비는 다시 넌즈시 물었다.

[마소저는 어떠시시오. 병세는 이상이 없겠지요?]

정영소는 싸늘히 말했다.

[몰라요!]

호비는 그녀가 성이 난 것을 알고 부드러운 말로 달래듯 말했다.

[둘째 누이, 누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니, 아무쪼록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해 주시구려.]

정영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하면 치료해 주지 않는 거예요. 설

마하니......]

말을 하는 동안 다시 갈림길에 또 다시 도달하였는데 그곳에는 다시 한 대의

분뇨 수레가 길거리 가운데 서 있었다.

정영소는 이번에는 수레를 바꾸어 타지 않고 휘파람을 불고 손짓을 했다. 그

러자 수레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즉시 출발을 하였고, 두 수레는 남북으로 나뉘

어 동시에 달려갔다.

뭇 위사들은 그곳까지 쫓아왔으나 다시 두 수레가 남북으로 나뉘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쳤다.

[요상하군! 너무나 요상해!]

그리하여 다시 두 패로 나뉘어서 남북 양쪽으로 따라갔다.

북경성의 거리는 마치 바둑판처럼 남북, 좌우로 가로질러 있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갈래길이 나오곤 했으며, 교차로 입구마다 반드시 한 대의 수레

가 머물고 있었다. 만약 번뜻하게 차려입은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똥치는 수레를

죽어라 하고 쫓아가는 꼴을 염라대왕이 하늘에서 내려보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실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정영소는 위사들이 가까이 쫓아올 때는 수레를 바꾸지 않았는데 그것은 위사

들에게 그의 신형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간격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을 때는 호비와 두 아이와 함께 수레를 바꾸어 타면서 노새가 지치지 않고

빨리 달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매번 교차로에 이를 때마다 위사들의 숫자는 반씩 줄어들었고 나중

에는 겨우 대여섯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은 줄곧 쉬지 않고 쫓아온지라 가뿐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도 늦어지고 있었다.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둘째 누이의 이 계책은 정말 절묘하군. 만약 깊은 밤에 분뇨를

수거하는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흔히 보는 커다란 수레를 이용했더라면 야심한

밤에 거리 한복판에 수레가 여기저기 서 있을 것을 보고 순라를 도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의심을 했을 것이오.]

정영소는 냉소하며 말했다.

[의심을 하면 또 어때요. 어찌 되었든 간에 큰 오라버니는 자신의 목숨을 아

낄줄 모르니 설사 순라꾼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고소하게 잘 된 일인지도 모

르지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는 일은 고소할런지 모르지만 다만 소저에게 누를 끼쳐 상심하게 만

든다면 아무래도 미안한 노릇이지.]

정영소는 냉소를 했다.

[오라버니가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니 그 누구도 상심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다정하고 의리가 있는 원소저라면 몰라도...... 어째서

그녀는 달려와 큰 오라버니를 도와주지 않았죠?]

호비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이토록 엉뚱하게 복대수의 부중으로 뛰어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니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오. 다만 천하에 한 분의 소저만이 내가

이토록 멧돼지처럼 날뛰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또한 그녀만이 요긴한 때에

나타나 나의 목숨을 구해 주려고 할 것이오.]

이 몇 마디의 말은 정영소의 마음을 매우 기분좋고 흐뭇하게 해 주었으나 그

녀는 일부러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과거에 큰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한 것이 마소저이기 때문에 그녀를 잊지

못하고 커다란 은혜에 보답하려고 이토록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어찌 마소저의 둘째 누이와 견줄 수가 있겠소?]

정영소는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마소저의 치료를 부탁하려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시는

군요. 나중에 부탁할 것이 없어지면 내 말은 또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냐 하

고 생각을 하시겠죠?]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이 만약 거짓이라면 나는 곱게 죽지 못할 것이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진짜면 진짜이고, 거짓이면 거짓인 것이지, 누가 오라버니 보고 저주의 맹세

까지 하라고 했어요?]

그녀의 야무진 말투가 갈수록 누그러지는 것이 가슴 속의 울화가 많이 사그라

진 모양이었다.

다시 십자로에 이르자 수레 뒤를 따르는 사람은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고삐를 한번 잡아당겨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드리지.]

정영소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노새는 와락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쫓아오던

두 위사들은 몇 걸음 달리지 않아 수레와 가까운 곳에 이르게 되었다.

순간 호비가 갑자기 빈 똥통을 들어 맹렬히 던지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

확히 한 위사의 머리를 덮어씌웠다. 다른 위사는 깜짝 놀라 악! 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을 쳤다.

정영소는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

로 그 웃음으로 인해 그녀의 가슴 속에 가득히 끓어오르던 노기는 사라지고 말

았다.

호비는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레 위에 앉아 고삐를 받아쥐었다. 이때

는 이미 어젯밤에 거처한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 있었고 뒤에서 쫓아

오는 위사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동안 달리다가 수레에서 내려 수레를 원래의 마부에게 넘겨

주고 한 냥의 은자를 사례비로 주고 돌려 보냈다. 그리고 각기 한 아이씩 안고

담장을 넘어 거처하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감쪽같이 일을 처리하고 왔으니 그

누가 이들 두 사람이 방금전 복대수의 부중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이라고 짐작

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마춘화는 두 어린애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드는 듯 기뻐하며 얼싸안고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두 아이 역시 엄마를 보자 마냥 부르기만 했다.

[엄마! 엄마!]

정영소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 나는 큰 오라버니를 탓하지 않겠어요. 우리들이 인륜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아이들을 구해 와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어야 했어요.]

호비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둘째 누이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정영소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오라버니는 내가 분부한 것을 듣지 않

았어요. 나는 그때 오라버니에게 나의 곁을 떠나서도 안되고 손을 써서도 않된

다고 했는데 오라버니는 그 말을 들었었나요?]

호비는 그 말을 듣고는 입가에 넌즈시 미소를 지었다.

마춘화는 어린애를 보자 마음이 놓이는듯 회복이 더욱더 빨라졌고 게다가 정

영소가 침을 놓고 약을 지어주자 체내의 독기가 점점 제거되었다.

다만 그녀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어째서 복강안이 보이지 않는가 물

을 때에 호비와 정영소로서는 분명하게 밝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아이는 나

이가 어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엄마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천하장문인대회(天下掌門人大會)

눈깜짝 할 사이에 며칠이 지나고 어느덧 중추절이 되었다. 이 날 오후 호비는

정영소, 채위, 그리고 희효봉 세 사람과 함께 천하 무림 장문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복강안의 저택으로 갔다.

이번에 호비는 며칠 전과 다르게 분장했다. 그는 수염을 짧게 깍고 노란 색으

로 물을 들였으며, 얼굴에는 담황색 분가루를 발라 마치 황달병이 걸린 사람 같

았다. 또한 몸에는 커다란 비단 옷을 걸치고 비취로 만든 담배대를 들었으며 벽

옥반지를 끼고 커다란 금꽃송이를 그려넣은 부채로 몸치장을 하였다. 얼핏보면

돈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어떻게 보면 속되기 이를데 없는 사람처럼 보였

다.

정영소는 중년 부인으로 분장을 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약간 구부렸고 온

얼굴을 주름살 투성이로 만들어 그 누가 보더라 그녀가 십칠팔 세의 처녀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호비는 채위에게 사부의 명을 받아 장문인대회에서 진면목을 보일 수 없다고

변명을 했으나 채위는 말을 하지 않고 '음!음!' 하고 대답을 할 뿐 더이상 묻지

를 않았다.

그들은 복강안부중의 커다란 대문 앞에 이르렀다. 위사들은 모두 철수했으며,

단지 여덟 명의 안내인들만 문가에서 손님들을 영접하고 있었다. 호비가 문서를

내밀자 안내인들은 공손하게 맞이하며 그들 네 사람을 동쪽에 있는 탁자로 안내

했다.

같은 자리에는 다른 네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들

은 후권대성문( 拳大聖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영소는 그 장

문인의 늙은이의 정수리가 위로 치솟아 있고 입술이 삐쭉 나온데다가 뺨이 붉고

팔이 긴 것이 정말 삼푼쯤 원숭이 상을 닮고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그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대청의 대부분의 자리는 손님들로 채우져 있었으나 대문 밖에는 아직

도 손님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대청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안내인들은

모두 복강안 수하의 무관들이었으며 어떤 안내인은 삼사품(三四品)의 높은 벼슬

아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복강안 부중 밖에서는 명성이 높고 위명이

혁혁한 고관대작이었지만, 부 중에서는 그야말로 시중을 드는 하인들보다 낫기

는 했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아랫 것들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호비가 힐끗보니 주철초와 왕철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왔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화색이 돌고 옷차림과 머리에 쓴 것이 전과 달라 아마 벼슬이 오른 것

같았다. 주철초와 왕철악 두사람은 호비와 정영소 앞을 지나갔지만 물론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때 다른 두 명의 무관이 주철초와 왕철악에게 웃으며 임을 열었다.

[주형, 왕형, 축하하오이다. 그날 밤의 그 공로는 실로 적지 않았소이다.]

왕철악은 기뻐서 커다란 입을 헤벌쩍 벌리고 웃었다.

[그일은 공교롭게 된 것이지 어찌 재간이라 할 수 있겠소?]

또 한 명의 무관이 다시 걸어오더니 물었다.

[한 분은 기명총병(記名總兵)이 되시고, 한 분은 명실상부한 부장(副將)이니,

허허허! 대단하군. 대단해! 복대수의 휘하에서 총애를 받는 사람들 중에서 당신

네 두 분의 승진이 가장 빠르구려.]

주철초는 담담히 웃었다.

[평(平)형은 우스갯소리도 잘 하시는구려. 우리 형제 두 사람은 공도 별로 세

우지 못하고 봉록을 더 많이 축내게 된 셈이지만, 어찌 평형이 싸움터에서 쟁취

한 공명(功名)과 견줄 수가 있겠소.]

그 무관은 정색을 했다.

[주형은 용감하게 상국부인을 구했고, 왕형은 공주님을 보호했소. 만세야(萬

歲爺)께서 친히 어사한 벼슬이니 소제가 어찌 견줄 수가 있겠소?]

주철초와 왕철악은 이르는 곳마다 모든 무관들에게 축하 인사와 칭찬의 말을

들었다.

명가의 장문인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호기심을 느낀듯 그 두 사람이 어떻

게 공을 세우고 주인을 보호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뭇 무관들은 있는 일, 없는

일을 다 보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했다.

호비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었는

데 그 사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원래 그날 밤, 호비가 복강안 부중으로 대담하게 뛰어들어 두 아이를 강탈하

려고 했을 때, 주철초는 먼저 소식을 듣고 연극을 하여 호비로부터 상국 부인을

빼앗았으며 다시 왕철악으로 하여금 먼저 달려가 공주를 보호하도록 했던 것이

다. 그 상국부인은 건륭황제의 연인이고, 공주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딸인

지라 이번 공로는 지극히 수월하게 세운 셈이었다. 그의 깊은 심지와 지략으로

커다란 화를 아무 손실도 없이 해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이는 황제가 볼 때 싸움터에서 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백 배나 더 뛰어난 것이

었다. 때문에 그들을 친히 대궐로 불러 따뜻한 말로 격려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

라, 잇따라 몇 등급이나 승진을 시켜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국부인과 화가공

주, 복강안 등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주보와 금은을 상으로 내렸다.

하룻밤 사이에 왕철악과 주철초 두 사람은 크게 두각을 나타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수 백 명의 자객들이 습격을 해왔는데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상국부인과 화가공주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

다. 뭇 위사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감추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자객의 수를 늘

여서 떠벌렸다. 그들은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 겨우 자객들을 격퇴시키

고 복강안을 지키게 된 것처럼 자기네끼리 공치사를 했다. 결과적으로 뭇 위사

들에게는 잘못이 없고 오로지 공로만 세운 셈이었다.

복강안은 비록 두 아이를 잃고 크게 실의에 빠졌지만 십 여년전 자기가 홍화

회의 사람들에게 잡혀 고생을 한 일에 비한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은 단지 놀랐을 뿐 신변에는 위험이 없었고 자객을 모조리 물리쳤으니

그로서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위사들에게 크게 상금을 내리고 공을 치하했

다.

관계에서의 관례는 원래 이처럼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 사람들끼리는 서로 감

싸주어 몸을 사리며 좋게 지내자는 일면이 있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눈짓을 몇 번 교한하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썼

다. 그러나 주철초가 이와 같은 계략을 써서 공짜로 부귀공명을 얻게 되리라고

는 생각지 못헌 일이라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지모가 깊고 멀리 내다볼 줄 알며 수단 또한 악랄하니 장래에 크

게 출세하여 관계에서의 전도가 양양할 것 같구나.)

소란스러운 가운데 대청안은 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호비가 암암리에 헤

아려보니 모두 예순 두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매 탁자마다 여덟 명이 둘러

앉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 탁자에는 두 개의 문파의 사람이 자리하게 되니

대회에 참가한 총장문인의 숫자는 모두 백 스물 네 개의 문파라는 것을 헤아리

며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에 무공의 문파가 이토록 많구나. 더구나 초청을 거절하고 오지 않은 사

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비어 있거나 자리가 완전히 차지 않은 탁자들을 보고 호비는 자신도 모르게

원자의를 떠올렸다.

(그녀가 오늘 이곳으로 올런지 모르겠구나.)

정영소는 호비가 생각에 잠겨 두 눈에 부드러운 빛을 드러낸 것을 보고 그가

원자의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그녀는 약간 서글픈 감

정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고 얼굴빛이 크게 변하

며 두 눈에 노기가 충천한 것을 보고 그의 눈길을 따라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네 번째 탁자에 체구가 우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철담(鐵 )을 쥐고 있었다.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철담을 드르륵 드르륵 굴

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오호문의 장문인인 봉천남이었다.

정영소는 재빨리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호비는 즉시 깨닫고 고개를 돌리

며 생각을 했다.

(네가 이곳에 온 이상 내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봉천남 너 이 악

당아, 너는 내가 대수부를 발칵 뒤집어 놓아 장문인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것이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감쪽같이 여기에 와 있다! 어디 두

고 보자 이놈!)

오시가 되자 각 좌석에는 모두 사람으로 꽉 차게 되었다. 눈을 들어 대청을

돌아보니 대청의 한복판에는 비단 휘장이 하나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금칠을

한 커다란 여덟 글자가 박혀 있었다.

<이무회우, 군영필지(以武會友, 群英畢至 : 무예로써 친구를 사귀니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모이다.)>

금장 아래에는 나란히 네 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기다란 의자마다 호랑이 가죽을 깔아놓았지만 아직도 좌석이 비어 있는 것으

로 보아 아마도 왕공귀인(王公貴人)을 위해 마련한 자리인 것 같았다.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군요.]

호비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원자의라는 것을 알고도 능청을 떨며 반문했다.

[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오?]

정영소는 혼자 말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이미 아홉 가문의 총장문인이니 어찌 되었든 간에 오기는 올 거예

요.]

다시 잠시 시간이 흐르게 되자 이품의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를 쓴 장군이

몸을 일으키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대 장문인은 자리에 드십시요.]

그러자 뭇 위사들이 줄줄이 그 말을 전달했다.

[사대 장문인께서는 자리에 드시도록 하십시요!]

[사대 장문인께서는 자리에 드시도록 하십시요!]

[사대 장문인께서는 자리에 드시도록 하십시요!]

대청의 군호들은 속으로 똑같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곳의 모임에 참여한 사람은 수행 제자들과 손님의 안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문인인데 어째서 사대(四大)장문인이니 사소(四小) 장문인이

니 하고 떠드는 것일까?)

그러나 대청 안은 엄숙하고 조용해졌다. 잠시 후 두 명의 삼품 무관이 네 사

람을 안내하고 들어오더니 곧장 금장 아래의 호랑이 가죽을 깔아놓은 의자에 이

르러 네 사람을 자리에 앉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앞장을 선 사람은 눈썹이 하얀 노승으로, 손에

는 황양목으로 만든 선장(禪仗)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 모습은 인자하였다. 보기

에 백 살은 되지 않았어도 아흔 살은 넘은 것 같았다. 두번째 사람은 일흔 살

정도의 도사인데 얼굴은 거무튀튀하고 두 눈을 감는듯 마는듯 하고 있어 꽤죄죄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노승과 한 명의 도사는 얼굴 모습이 천치 차이였다. 노화상은 몸집이 크면

서 위엄이 있어 첫눈에 득도한 고승임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도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시주나 받으러 다니며 부적을 써주고 사람들을 속이는 모산도사(茅

山道士) 같은데 어떻게 사대 장문인이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

다.

세번째 사람은 정신이 맑아보이는 노인으로써 나이는 예순살 정도로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으며 양쪽의 태양혈이 불쑥 솟아오른 것으로 미루어 내공이 심후

할 것 같았다. 그는 대청으로 들어오자 웃음을 띠우고 포권을 하며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했다. 백여 명의 장문인 가운데 팔구십 명은 그와 잘 아는 사이

인 것 같아 그는 천하에 두루 교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탕(湯)나으리'라고 부르거나 '탕대협(湯大俠)'이라 칭했

으며, 오직 몇 분의 연세가 무척 높은 무림의 명사만이 그를 '감림형(甘霖兄)'

이라고 불렀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은 감림혜칠성(甘霖惠七星)이라고 불리워지는 탕패(湯沛) 탕대협인

것 같구나. 원소저의 어머니는 바로 그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했었지.

이 사람은 의협심으로 명성이 높고 무림에서는 모두 다 그를 인정이 많고 의리

가 깊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날 이처럼 복강안의 수중에서 농락당할 줄은 생

각지도 못했던 일이구나.)

그런데 그 탕패라는 사람은 즉시 자리에 앉지 않고 탁자마다 찾아다니며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인사말을 하거나 손을 잡고 흔들고, 어깨를 두드리는 등 지극히

다정한 태도를 보였다. 호비가 앉아있는 탁자에 이르러 대성후긴문의 장문인의

손을 잡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늙은 잔나비, 당신도 오셨소. 허허허! 어째서 이 자리에 한 쟁반의 반도(蟠

桃 : 동해의 도색산에 있다는 전설 상의 커다란 복숭아)를 준비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 장문인은 그에게 무척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웃으며 말했다.

[탕대협, 칠 년 동안 어르신을 뵙지 못했구려. 줄곧 어르신에게 안부를 묻지

못했으니 정말 볼기를 맞아야 할 것 같구려. 어르신은 연세가 드실수록 더욱 건

강하고 혈기왕성하시니 정말 보기 드문 일입니다.]

탕패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당신의 화과산(花果山) 수렴동(水簾洞)에 있는 잔나비 아들에다 잔나비 손자

들, 그리고 잔나비 마누라와 잔나비 딸들은 모두 평안하시오?]

그 장문인은 대답했다.

[탕대협의 덕택으로 모두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있습니다.]

탕패는 껄껄 웃더니 희효봉에게 물었다.

[희노삼은 오지 않았는가?]

희효봉은 허리를 구부리고 인사를 한 후 말했다.

[가친께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친께서는 매일 탕대협 말씀을 하시고 종종

탕대협이 내리신 인삼 영양환을 복용하신 후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고 말씀을 하

지요.]

탕패는 말했다.

[자네는 운시랑(雲侍郞)의 저택에 머물고 있지? 내일 내가 다시 자네에게 좀

갖다주기로 하지.]

희효봉은 허리를 구부리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탕패는 호비, 정영소, 채

위 세 사람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른 탁자로 갔다.

대성후권문의 장문인은 입을 열었다.

[탕대협의 별호는 감림호칠성이라고 하는데 사실 어찌 칠성뿐이겠소. 어느 해

인가 내가 호송하고 있던 십팔 만 냥의 은자가 나가는 표화물을 감량(甘凉) 도

상에서 잃게 되고 전 가족이 낙망한 나머지 물로 뛰어들려고 했었지. 그때 만약

탕대협이 나서서 체면을 불구하고 칼을 쓰지 않았다면 어찌 주천삼호(酒泉三虎)

가 우리에게 표화물을 되돌려 주었겠소?]

그러면서 입에 침을 튀기며 과거의 일을 이야기했다. 원래 그는 탕패에게 커

다란 은혜를 입어 그야말로 백골난망인 셈이었다. 그래서 일단 기회가 있다 하

면 그에게 입은 덕을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탕패가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참으로 대장군의 위세가 팔방으로 미치는 형국

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사대 장문인 중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의 위명에 일시 빛을 잃을 정도였다.

네번째 사람은 무관의 복색을 하고 머리에는 사품(四品)의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대청 안에는 관직이 높은 무관이 많이 있었으나 그의

걸음걸이가 침착하고 온건하며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이 은연 중에 일파의 대종

사(大宗師)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기에는 약 오십 세 남짓한데 네모난

얼굴에 커다란 귀와 두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 칼처럼 뻗어 있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네 번째 자리에 턱 앉는 것이 마치 커다란 물줄

기가 멈추는 것 같고, 산악이 우뚝 버티고 선 것 같았으며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주위의 소란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호비는 그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 역시 대단한 인물이로구나.)

호비 장문인 대회에 참석할 때는 가슴 가득히 웅심(雄心)을 가지고 그 누구라

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사대 장문인을 대하자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했다.

(탕대협과 저 무관 중에 어떤 한 사람이라도 나로서는 대적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저 화상과 도사의 이름이 그들 두 사람보다 위에 있으니 그들도

자연히 용렬한 고수는 아니겠지. 오늘 나는 신분을 절대로 노출해서는 안되겠구

나. 여기에 있는 백여 명이나 되는 장문인들이 절정의 고수들이니 저 승려와 도

사, 그리고 탕대협 및 무관 네 사람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나를 여유있게 제압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이 들자 즉시 호박씨를 한웅큼 집어 까먹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지 않았다. 혹시나 복강안 휘하 무사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자 탕패는 겨우 인사를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윽

고 많은 후배들이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탕패는 원래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평소부터 정의를 내세우고 올바른 일에 재

물을 사용해 왔다. 그를 뒤따르고 있는 문하 제자들은 미리 많은 붉은 봉투를

준비하고 있다가 생면부지인 후배가 절을 올리기만 한다면 넉 냥의 은자를 상견

례의 선물로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바람에 한차례 다시 소란이 일은 이후에

야 겨우 인사를 끝냈다.

한 이품의 무관이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술을 따라 올려라!]

그러자 탁자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하인들이 여러 사람에게 술을 따라 주

었다. 그러자 그 무관이 낭랑히 입을 열고 말했다.

[각파의 장문인이신 선배 무사들께서 멀리 경사까지 와주신데 대해서 복대수

께서는 지극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제 형제가 먼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한

잔의 술을 올리는 바이며, 잠시 후 복대수께서 친히 여러분들에게 경의의 술잔

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이곳에 오신 분들은 모두 무림에서 영웅호걸이십니다. 자고로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지요. 복대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사대 장문인이 일

제히 왕림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소개를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첫번째 자리에 앉아있는 눈썹이 하얀 노승을 가리키며 말했

다.

[이 분은 하남 숭산 소림사의 방장(方文)인 대지선사(大智先師)이옵니다. 천

여 년 동안 소림파는 줄곧 천하 무학의 근원이었지요. 오늘의 천하장문인 대회

에서는 마땅히 대지선사를 수석에 앉혀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군호들은 일제히 화답을 하며 손뼉을 쳤다. 소림파를 종가(宗家)로 한 각 문

파가 대단히 왕성하여 이 모임에 참가한 문파의 삼분의 일은 소림파를 그 근원

으로 두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그 무관이 소림사의 고승을 그렇게 받들어 모시

는데 대해 모두다 기뻐했다.

무관은 두번째 앉은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림파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무당파(武當派)가 가장 어른으로 추대되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은 무당산의 태화궁(太和宮) 관주(觀主)이신 무청자(無

靑子) 도장이외다.......]

무당파의 위명은 매우 높은 편으로 내가권검(內家拳劍)의 시조라 할 수 있었

다. 군호들은 그 도사가 초라하게 생겼고 또한 정신이 맑지 않은 것 같으며 얼

굴 모습마저도 속된 것을 보고 모두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약간 견

문이 넓은 고수들은 무당파의 현실을 걱정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십 년전 무당파의 장문인인 마옥(馬鈺)이 세상을 떠나고 무당의 고수인 장소

중(張召重)이 회강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뿐 다시 장문인을 내세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태화궁의 관주 무청자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이상하구나.)

세번째 탕패 탕대협의 명성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터라 무관이 나서서 소

개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말을 했다.

[이분 감림혜칠성은 삼재검(三才劍)의 장문인이외다. 탕대협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고 인정 많고 의리가 깊은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니 소제

가 더 혀를 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그가 소개하자 뭇 사람들은 일제히 덩달아 환호성을 지르며 탕패를 치켜올렸

다. 이러한 광경은 무청자를 소개할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

만 소림사 방장 대지선사가 소개되었을 때도 이렇듯 열광하지는 않았다.

호비는 옆 탁자에 앉아있는 노인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림에서 어떤 문파는 소속된 문하 사람들의 명성을 덩달아 높여주고, 어떤

사람은 문파의 명성을 높여 주기도 하지. 저무청자 무슨 도장인가 하는 사람은

무당파 태화궁의 관주이기 때문에 천하 사대 장문인의 한 사람으로 뽑힌 모양이

지만 내가 보기에는 진짜 실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 그러나 삼재검이라는 일

문(一門)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탕대협 같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

배출되었기에 무림에서 쟁쟁한 문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지!]

그러자 한 장정이 그 말을 받았다.

[사숙부의 말씀이 옳습니다.]

호비는 그 말을 듣고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뭇 사람들이 한차례를 소란을 피우고 난 이후 시선을 모두다 네번째 자리에

단정히 앉아있는 무관에게로 옮겨졌다.

길게 말을 늘어뜨려 소개를 하는 무관은 재차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우리 만주의 영웅이신 해란필(海蘭弼) 해대인이시며, 상황기( 黃旗)

요기영( 騎營)의 좌령(左領)이시며, 요동 흑룡문(黑龍門)의 장문인이시죠.]

해란필의 관직이 그보다 낮았지만 그 이품 무관은 그의 자리에서 물러나 엄숙

히 말을 하였고, 태도는 무척 공손하면서도 근엄해 보였다.

호비의 이웃 탁자에 앉아있던 노인이 다시 옆 사람에게 수근덕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분으로 말하면 관직이 문파를 끌어올린 셈이로군. 요동 흑룡문은 허허,

무림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문파인데 어느결에 사대 장문으로 손꼽힐 수 있

단 말인가? 만약 사대 장문인이 모두 한(漢)족 출신이고 만주 사람을 한 사람이

라도 섞어놓지 않는다면 복대수의 체면이 서지 않는단 말씀이야. 저 분해대인은

기껏해야 몇 백근의 뚝심이 있을 것 같은데 어찌 중원 각 대문파의 명가 고수와

겨룰 수 있겠는가?]

그 장정은 다시 맞장구를 쳤다.

[사숙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번에 호비는 속으로 그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만주의 호걸을 너무 얕보고 있군. 저 사람은 영기가 안으로 갈무리 되어

있고, 온건하면서도 단정하고 무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쭈그렁 영감탱이보다

는 아무래도 훨씬 나을 것 같군.)

이윽고 사대 장문인들이 하나 하나 일어나 군호들에게 일배로써 경의를 표했

으며 각자 몇 마디의 겸손의 말들을 했다.

대지선사는 품도가 의젓한 것이 확실히 영도자 격인 행동을 보였다. 탕패는

말솜씨가 매우 뛰어나 겨우 일곱 여덟 마디의 말을 했을 뿐이지만 세 차례나 왁

자지껄한 웃음 소리를 터뜨리도록 만들었다. 무청자와 해란필은 모두 언변이 뛰

어나지 못한 편이었다. 무청자는 호북성의 사투리를 쓰면서 말투가 올라가 대부

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호비는 그러한 무청자 도장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도장은 목소리에도 기가 부족한데 어찌 무당파와 같은 대문파의 장문인이

되었을까? 십중팔구 그는 무예가 낮기는 하나 배분이 높고 덕망이 있기 때문에

문하의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곧이어 음식이 날라져 왔다. 복대수부에서 베푼 연회라 잔치는 다른 곳에서

볼 에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단지 이십 년 묵은 장원홍진소(狀元紅陳紹)만 하더

라도 맛보기 힘든 매우 진귀한 술이었다.

호비는 잔을 입에 가져가는대로 비워 단숨에 스무 잔 이상을 마셨다. 정영소

는 그의 주흥이 호탕한 것을 보고 소리없이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그리고 가끔

가다가 봉천남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그가 종적을 감추지나 않을까 감시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일곱 여덟가지의 음식이 나왔을 때 갑자기 뭇 시위들이 소리 높여 고했다.

[복대수께서 도착하셨소이다!]

그러자 갑자기 휙휙! 하는 바람소리가 일면서 대청에 있던 뭇무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하게 도열을 했으며 삽시간 사람들은 모두다 석상처럼 꼼

짝도 하지 않았다. 각문파의 장문인들은 모두 무림의 호걸이라 이와같이 군기가

엄격한 태도와 위세를 본 적이 없었던터라 놀라서 두세 명씩 주섬주섬 몸을 일

으켰다.

발소리가 나면서 몇 사람이 뚜벅뚜벅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대청에 있는 무관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대수에게 인사드립니다!]

그리고는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고 반쯤 무릎을 꿇었다. 복강안은 손을 내저으

며 말했다.

[됐소! 그만 일어나시오!]

뭇 무관들은 대답했다.

[대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복강안의 군기가 엄격한 것을 보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여러

차레 출정을 하며 승리를 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러다가 복강안의 온 얼굴에 봄바람과 같이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한 것을 보

고 다시 생각했다.

(저 사람은 전혀 양심이 없는 사람인 것 같구나. 두 아들을 남에게 빼앗겼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군.)

복강안은 좌중의 호걸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주도록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

게 분부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여러 무사들께서 경사로 오신데 대해 본관은 이 자리를 빌어 환영하는 바이

외다. 자! 건배!]

그리고 그는 술잔들어 잔을 비웠고 군웅들도 일제히 건배를 했다.

호비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을 뿐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복강안의 심보가

악랄하여 어머니가 마춘화에게 독을 쓴 것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건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복강안은 술을 비우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이 천하장문인 대회에 대해서는 만세야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조금

전에 황제께서 부르시어 스물 네 개의 잔을 하사하시며 본관에게 명하여 스물

네 명의 장문인에게 건네주라고 하셨소이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자 신하들이 세 개의 상자를 받쳐들고 탁자 위에 비단보를

깔고 내려놓은 후 상자 안에서 잔을 꺼냈다.

첫 번쫓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여덟 개의 옥배(玉杯)였고, 두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여덟 개의 금배(金杯)였으며, 세번째 상자에는 여덟 개의 은배(銀杯)

였는데 그것들을 세 줄로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옥의 빛은 수정과 같은 맑은

빛을 띠고 있었고, 금빛은 찬란했고 은빛은 휘황했다. 각 잔에는 요철(凹凸)이

뚜렷하게 꽃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내의 고수 장인의 솜씨인지라

역시 다른 바가 있었다.

복강안은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옥배에 새겨진 것은 용이 비약하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옥룡배(玉

龍杯)라고 부르며 가장 진귀한 것이고, 금배에 새겨진 것은 날아가는 봉황의 모

습을 새긴 것이라 금봉배(金鳳杯)라고 부르며, 은배에 새겨진 것은 물살을 가르

고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은리배(銀鯉杯)라고 한답니다.]

뭇 사람들은 황제가 하사한 어배(御杯)를 바라보며 모두 생각했다.

(이 대회에 참가한 장문인들은 모두 백 여 명이나 되는 데 어배는 겨우 스물

네 개 밖에 안되는데 누구에게 준다는 말인가? 설마 제비뽑기라도 하란 말인가?

더군다나 옥룡배는 은리배보다 훨씬 귀중한 것이니 누가 옥룡배를 얻고 누가 은

리배를 얻게 되는 것일까?)

이윽고 복강안은 네 개의 옥배를 들고 친히 사대 장문인 자리에 하나씩 가져

다 주며 말했다.

[네 분 장문인은 무림의 영도자 격이니 각기 옥룡배를 하나씩 받도록 했소이

다.]

대지선사 등은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고 답례를 했다.

복강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스무 개의 어배가 남아있는데 본관은 여러분들이 절예를 펼

쳐 무공이 가장 고강한 네분에게 옥룡배를 나누어 드리도록 하겠소. 그리고 그

문파들은 이후 소림, 무당, 삼재검, 그리고 흑룡문 등 사대 문파와 더불어 '옥

룡팔문(玉龍八門),이라고 일컬어지며 천하 제일가는 대 문파가 될 것이외다. 그

다음에 여덟 명의 장문인들은 금봉배를 나누어 가지며 '금봉팔문'이 되는 것이

외다. 그리고 다시 여덟 분이 은리배를 나누어 가지며 그 여덟 개의 문파는 '은

리팔문'이 되는 것이외다. 이후 각문 각파는 등급가 서열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렇게 되면 무림에서는 많은 분쟁이 없어지게 될 것이외다. 대지선사와 무청자

도장, 탕대협, 그리고 해좌령 네 분에게 무공의 높고 낮음을 사정하는 공중인이

되어 주시기를 청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이의가 없겠지요?]

견식이 넓은 장문인들은 하나같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분쟁을 적게 만든다는 것일까? 각문 각파가 일단 등급과 서열이

매겨진다면 무림에서는 서로 저 어배를 빼앗으려는 끊임없는 환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 무인들은 이후 명성을 다투기 위해 싸움을 할

것이고, 서로 죽고 죽이며 칼에 피를 묻히며 평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복대수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벌써 몇 사람이 찬성

을 하며 부화뇌동하고 나서는 판이라 다투어 군웅들은 억지로 갈채를 보냈다.

복강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스물 네 개의 어배를 얻는 사람들은 자연히 잘 보관을 해야 할 것이외다.

만약 다른 문파에서 빼앗아 가거나 훔쳐가게 된다면 이 옥룡팔문이나 금봉팔문,

은리팔문은 오늘 정한 것과 달라지게 되는 것이오!]

이러한 말은 더 한층 명백히 그의 의도를 밝힌 것임을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무인들이 부화뇌동하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찬동했다.

호비는 복강안이 하는 말을 듣자 원자의가 일전에 복강안이 천하장문인 대회

를 열려는 의도에 대하여 말한 바를 상기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에 나 역시도 복강안이 천하 장문인들을 망라해서 단지 자기 편으로 끌

어들여 이용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의 목적이 이토록 독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 그는 일부러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각문파에 분쟁을 일으켜서 천하 무

학에 뜻을 둔 인사로 하여금 조그마한 명성을 위해 서로 죽이게 만들어 다시는

만청(滿淸)에 항거할 수 있는 소지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구나!)

정히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정영소가 식지를 뻗더니 찻물을 찍어 탁자 위

에 '이(二)'자를 쓰고 다시 '도(桃)'를 쓰더니 즉시 손으로 지워버렸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알의 복숭아로 세 용사를 죽인 고사를 떠올렸다.

(옛날에 안영(晏 )이 이도삼살사(二桃三殺士)의 계책을 써서 단지 두 알의 복

숭아로 세 사람의 오만방자한 용사들을 서로 죽이도록 만든 일이 있다던데 오늘

복강안이 난쟁이 안영의 계책을 써먹으려고 하는구나. 복강안은 스물 네 개의

잔으로 천하의 무인들을 모조리 해치려고 하는군.)

호비는 사방을 훑어보았는데 소장층의 무인들은 대부분이 신이 나서 싱글벙글

하며 빨리 자기의 솜씨를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중년과 노

년의 장문인들은 못마땅한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이 역시 어배를 두고 벌어질 후

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청의 뭇 사람들은 각기 이론이 분분하여 시끌벅적하게 되었다. 이때 호비의

옆 탁자에 앉아 있던 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왕(王)나으리, 당신네 신권문(神拳門)의 무공이 출중하여 천하에 적수가 적

으니 틀림없이 옥룡배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것이외다.]

왕나으리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겸손의 말을 했다.

[옥룡배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고 단지 하나의 은리배라도 가지고 집

에 돌아갈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체면은 세울 수 있을 것 같구려.]

그러자 그 누가 나직이 냉소를 하며 말했다.

[은리배마저 하나 가져가지 못한다면 창피하여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걸.]

그 왕가라는 노인은 노기띤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나 비아냥거리던 사람은 태연

자약하게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일시에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귓속말

을 주고 받았는데 서로 논하는 것은 물론 스물네 개의 어배였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복강안은 갑자기 옆에 있는 시종에게 세 번 손뼉을 치고

말을 하도록 했다.

[여러분들께서는 조용히 해주십시요. 복대수께서는 아직까지 하실 말씀이 계

십니다.]

대청에 시끌벅적하던 소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다만 군호들은 평소에 어떤 제

약을 받지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아 왔기 때문에 군인들처럼 명령만 떨어지면 복

종하는 성격이 아니라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다.

복강안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술을 더 드시도록 하십시요. 배도 부르고 주흥도 오르면 각자 절

예를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무예를 겨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안

(安) 제독(提督)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십시오.]

그 옆에 서 있는 안 제독은 허리가 굵고 어깨가 벌어진 것이 위풍당당하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마음 편히 가지시고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시지요. 연회석이

끝나면 이 형제가 다시 설명을 드리도록 하지요. 자자, 형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잔의 술로서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커다란 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단숨에 마셨다.

대회에 참가한 군웅들은 주량이 큰 사람들이었으나 이때는 식사 후에 벌어질

격렬한 싸움을 대비하여 모두들 술을 자제했다. 따라서 어배를 차지한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입에 술잔을 갖다대고 마시는 시

늉만 하고 술잔을 내려 놓을 뿐이었다.

주연은 풍성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탁자에 가득한 산해진미를 느긋하게 맛볼 여유를 갖지 못하

고 오직 차후에 손을 쓸 생각으로 밥만 든든하게 많이 먹었다.

연회석이 치워지자 안 제독은 손뼉을 세 번 쳤다. 그러자 부중의 하인들과 일

꾼들이 대청 가운데 나란히 여덟 개의 태사의(太]師椅)를 놓았다. 그리고 동서

양쪽 대청에도 나란히 여덟 개의 태사의를 놓았다. 대청에 놓인 여덟 개의 태사

의에는 금실로 수놓은 붉은 비단 방석이 놓였고 동쪽 태사의에는 녹색의 비단

방석이 놓여졌으며, 서쪽 대청의 태사의에는 하얀 비단 방석이 놓이게 되었다.

세 명의 위사가 옥룡배, 금룡배, 은리배를 받쳐들고 각기 대청과 동청, 서청의

탁자 위에 놓았다.

안 제독은 안배가 끝난 것을 보고는 낭랑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오늘 무릇 무공으로서 친구를 사귀고자 하는 것이라, 승패는 손이

먼저 닿는대로 끝나는 것이외다. 따라서 누구에게라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자

는 것이니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소.

하지만 손을 써서 무공을 겨루는 와중에 칼과 창은 눈이 없으니 실수를 하지 말

라는 보장은 없지요. 복대수께서 분부하시기를 어떤 분이라도 경미한 상처를 입

는다면 오십 냥의 탕약비를 건네드리라 하셨으며, 중상을 입은 사람에게는 삼백

냥, 그리고 불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는 복대수께서 은전을 베풀어 특별히

가족들을 보살피도록 문은 일천 냥을 내린답니다. 대회에서 실수를 하여 사람에

게 상처를 입힌다 하더라도 어떤 죄를 짓는 것이나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것이야말로 공공연히 우리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는 소리가 아닌가?)

안 제독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무공을 겨루도록 하겠으니 사대 장문인께서는 자리로 드시기 바랍니

다.]

네 명의 위사들은 각기 대지선사, 무청자, 탕패, 해란필 앞으로 다가가 그들

을 안내하여 대청 가운데 있는 태사의에 각기 한 사람씩 앉도록 하였다. 네 사

람은 각기 한 자리씩 띠어 앉았고, 네 의자는 비어 있었다.

안 제독은 빙그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천하 각문각파의 장문인들께서 복대수의 면전에서 각파의 절예를 펼쳐

보이시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어느 분이건 은리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서쪽 대청으로 가서 앉아 주시고, 금룡배를 얻을 자신이 있는 분은 동쪽

대청으로 가서 앉아 주십시요.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정말 기예에 있어서 모든 장

문인들을 압도할 수 있고 사대 장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하

는 사람은 가운데 대청에 있는 태사의에 앉아 주십시요. 스무 분의 장문인이 자

리에 앉고 난 이후에 나머지 장문인들 중에서 승복을 할 수 없는 분이 있다면

자리에 앉아 있는 분에게 도전을 하시면 됩니다. 패자는 물러나고 승자가 그 자

리를 차지하는 것이며, 이 시합은 도전하러 나서는 사람들이 없을 때 비로소 끝

이 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방법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뭇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십 계단의 탑을 쌓듯이 서로를 구분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크게 혼전을 벌이면 살상을 당하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힘이 강한 자가

이긴다는 점에서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무사들은 큰 소리로 좋다고

대답했으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 복강안은 좌측 윗자리에 있는 커다란 의자가 앉아있었는데 양쪽에는

열여섯 명의 고수와 위사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주철초와 왕검영도 모두 그 안

에 있었다. 엄밀하게 호휘하는 것이 마치 뭇 무사들 가운데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섞여 있어 어쩌면 자객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경계를

삼엄하게 하는 것 같았다.

정영소는 호비를 가볍게 끌며 입술을 옆으로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뒷모서리에 위사들이 무기를 들고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보기에

오늘 복강안 부중에서 경계의 엄중함은 황궁(皇宮) 내원(內院)보다 더 한 것 같

았으며, 눈에 뜨이지는 않았지만 저택의 주위에도 물론 정예 군사들이 잠복해

있음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호비는 내심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오늘 저 악적 봉천남의 종적을 찾은 것으로 일단 소원풀이를 한 셈이

니 아무튼 나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을 보전하

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만약 화권문을 위해 은리배를 하나 빼앗을 수 있다

면 이 희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늦게 손을 써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해야 좋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

다. 다만 호비가 생각한 것은 자기가 변장한 것이 탄로날까 봐 두려워한 것이라

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 싸워 지친 후에 최후에 나서서 어부지리를 얻자는 것이

었다. 그리하여 안 제독이 연신 '여러분들은 어서 자리에 앉도록 하십시요' 라

고 말했으나 스무 개의 빈 의자는 시종 채워지지가 않았고 한 명의 무사도 나서

서 앉는 사람이 없었다.

속담에 문(文)은 제일이 없고, 무(武)는 제이가 없다는 말처럼 무릇 문인이라

면 천고이래로 자기 자신의 문장과 학문이 천하제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겠

지만 무예를 닦는 사람들 중 특별히 수양이 깊은 고수 이외에는 남에게 뒤떨어

지는 것을 싫어했다.

더군다나 이날 이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일파의 우두머리들이고 평소에 하

나같이 자기가 제일이라고 뻐기고 있던 터라 그저 듣기 좋게 자신은 명리에는

관심이 없고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집장하고 있는 자신

의 문파의 위명만은 결코 떨어뜨릴 수 없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번 대회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자기의 문중에 수천수만의 제자들이 앞

으로 어떻게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며, 자기 본문에 돌아갔을 때 무

슨 면목으로 문하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심

장문인 노릇도 계속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 마음이란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었

다. 그들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적당히 변명을 하고 넘길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손을 쓰게 되면 반드시 옥룡배를 차지해야 한다. 그까짓 금룡배나 은리배

를 손에 넣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따라서 뭇 무사들의 시선은 대청 가운데 비어있는 네 개의 태사의에 집중되었

고, 동서 양쪽에 있는 금룡배와 은리배에 대해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

고 있었다.

잠시 간 무거운 침묵이 흐른 이후 안 제독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놀랍게도 이토록 겸허하신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지쳐 쓰러

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 나서서 이미 다 된 것을 차지하여 덕을 보겠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학의 도리에 어긋납죠.]

이 말은 우스개 말 같았으나 사실 여러 사람들의 심사를 갈파한 것이었고 자

극을 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전투구(泥田鬪狗)

과연 그의 말이 끝나게 되자 두 사람이 동시에 걸어나왔다. 한 명은 허우대가

큰 사내로서 몸집이 철탑과 같았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태사의가 우드득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다른 사람은 중키에

노란 수염을 기른 사람었다. 그 사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 두 사람이 바위를 깨뜨려 옥을 뽑아내는 심정으로 앞장을 서도록

합시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많은 노사부님과 대고수님들을 감안래 볼 때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설마하니 옥룡배를 들고 집으로 들아갈 수 있겠소이까? 그러니

당신은 의자에 앉아서 무너지게 만들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앉도록 하구려.]

그러자 그 가무티티한 대한은 흑!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이 매우 흉하게 일그

러진 것이 분명히 그의 농담에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한 명의 사품(四品) 무관의 옷차림을 한 사람이 모자를 쓰고 걸어 나오더니

그 대한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이분은 이랑권(二郞拳)의 장문인인 황희절(黃希節) 황노사이외다.]

그리고 그는 다시 노란 수염을 기른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연청권(燕靑拳)의 장문인인 구양공정(歐陽公政) 구양노사이외다.]

호비는 이웃 탁자에 앉은 그 늙은이가 나직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군. 천리독행협(千里獨行俠) 구양공정같은 도적놈까지도 옥

룡배를 손에 넣으려고 하다니.]

호비는 속으로 흠칫했다. 원래 구양공정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천리독행협

'이라는 별호를 자칭했는데 기실 독각대도(獨脚大盜)로서 헛되이 협도(俠盜)의

세계에 이름을 올려 놓았 뿐 실제로는 그런 좋은 일은 한적이 없었다. 그는 무

림에서는 명망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악명일 뿐이었다. 호비도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이 자리에 앉게 되자 곧이어 한 사람의 도사가 나섰다. 이 도사

는 곤륜도(崑崙刀)의 장문인인 서령도인(西靈道人)이었다. 그는 무기도 지니지

않은채 미소를 띠며 매우 자신있는 표정으로 남은 좌석에 가서 앉았다. 많은 사

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도사는 곤륜도의 장문인인데 어찌 칼을 가지고 나서지 않는 것일까?)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머지 빈의자를 주시하며 누가

나설 것인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 안 제독이 재차 입을 열었다.

[또 하나의 옥배가 남아있는데 누가 차지하겠소?]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좋소! 나머지 것은 이 주귀(酒鬼)가 술을 담아 마시도록 하겠소.]

한 명의 키가 크고 비쩍마른 사내가 비척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는 한 손에는

술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대청 한복판

에 이르더니 어리벙벙한 듯 원을 두 번 들고 나더니 갑자기 몸을 들려 거꾸로

나가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떨어진 곳은 빈 의자 한가운데였다. 이 한 수의 신

법은 날렵하기 이를데 없어 그가 일신에 지닌 무공이 매우 고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무공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어느덧 누군가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정말 훌륭한 장과로도기로(張果老倒騎 ), 솔재고교상( 在高橋上)이라는 일초

로군!]

원래 이 사람은 취팔선(醉八仙)의 장문인인 천배거사(千杯居士) 문취옹(文醉

翁)이었다. 그런데 그의 옷은 남루했으며 온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했고 술 냄새

가 푹푹 풍기고 있어, 정말 자신의 풍모를 헤어릴 수 없도록 만드는 모습이었

다.

안 제독은 입을 열었다.

[네 분 노사는 담력과 견식이 뛰어나군요. 정말 존경스럽고 탄복해 마지 않소

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네 분보다 무예가 뛰어나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나서서 도전을 해 주시지요. 만약에 도전하시는 분이 없다면 이랑권, 연청권,

곤륜도, 취팔선 이 네 개의 문파가 옥룡팔문의 서열에 오르는 영예를 얻는 것으

로 하겠소이다.]

그러자 동쪽에서 한 사람이 서둘러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주륭(周隆)인데 기꺼이 '천리독행협' 구양노사와 한번 겨루어 보겠소

이다.]

이 사람은 온 몸에 근육이 울퉁불퉁했으며 체구가 왜소하면서도 건강한 편이

라 그야말로 한 마리 노새를 연상케 했다.

호비는 이 몇 명의 무림인물에 대해서 모르는 처지지만 옆 탁자의 노인이 사

람들을 보고 하는 설명을 듣고 어렴풋이 알게되는 형편이었다. 그 노인은 자신

의 견문이 넓은 것을 자랑스럽게 과시라도 하는듯이 무릇 알고 있는 것은 모조

리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저 주노사는 금강권(金剛拳)의 장문인이고, 또한 산서(山西) 대동부(大同府)

의 흥륭표국(興隆 局)의 총표국주이외다. 소문에 들으니 구양공정이 그의 표화

물을 훔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원한이 있으리라고

보여지는군. 내가 보기에 저 주노사가 나선 뜻은 반드시 옥룡배에 있다고는 볼

수 없겠네.]

호비는 속으로 생각을 했다.

(무림의 은원 관계는 서로 얽혀 있군. 내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번에

는 전적으로 봉천남이라는 악적때문에 온 것인데 각 문파들도 수 세대에 걸쳐

원한을 맺게 된 사람들 가운데 수 백 년 동안 원한을 갚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

을 것이다. 그렇다고 설마하니 오늘 이 대회에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비는 자신도 모르게 봉천남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런데 봉천남은 끊임없이 두 알의 철담을 데르룩 데르룩 굴리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호비가 복강안의 부증에서 이틀밤을 연속으로 소란

을 피웠기 때문에 구성(九城)에서 까다롭게 검문을 하고 있으므로 봉남천은 호

비가 북경에서 도망쳐 멀리 떠났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악독한 자가 어찌 호비와 같은 대장부의 의협심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로서

는 이 용담호혈과 같은 장문인 대회에 호비가 다시 잠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할 수 없었으리라!

주륭이 이와 같이 도전하자 구양공정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내려서더니

입을 열었다.

[주 총표국주, 근래에 재미는 많이 보았소? 어때 장사는 잘 되시오?]

주륭은 몇 년 전에 호송하고 있던 팔 만 냥의 은자에 해당하는 표화물을 구양

공정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것을 배상하느라고 수 십년간 쌓아온 재산을

하룻 밤에 날려버리게 되었으니 어찌 이를 갈지 않겠는가?

그는 즉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쌍벽쌍당(雙劈雙撞)이라는 일초를 곧장 격

출해냈다. 구양공정은 연청권 가운데 탈화전신(脫靴轉身)이라는 일초를 펼쳐 반

격을 하였고 두 사람은 대뜸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주륭은 힘이 좋고 초식이 무거우며 하반신이 차분하면서도 견고한 것이 돋보

였고, 구양공정은 권초의 날렵함과 신법이 가볍고 민첩함을 장점으로 삼고 있었

다. 주륭이 일신에 쌓은 횡련공(橫練功)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적이

펼쳐오는 초식을 피하지 않고 어깨쭉지나 가슴으로 잇따라 세 대의 주먹을 직접

맞받았으나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벼락같이 휙! 하니 일권을 뻗쳐내는데 놀

랍게도 금강권 가운데 영풍타(迎風打)였다.

구양공정은 껄껄 웃으며 피해서는 몸을 날리며 발길질을 하여 그의 다리를 걷

어차는데 성공했다. 주륭은 창배대삼박(背大三拍)라는 수법으로 곧장 땅바닥으

로 몸을 뒹굴어 넘어졌다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사오 십 초를 겨루자 주륭은 십 여 차례 권각법에 얻어맞았다. 다

시 코에 한 대 얻어맞게 되자 코피를 주루룩 흘리게 되었고 옷자락이 모두 선혈

로 물들었다. 구양공정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노사, 나는 단지 표화물을 훔쳤을 뿐이고 당신의 마누라를 훔친 것은 아니

며 또한 애비를 죽인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니지 않소? 이 정도로 그만 둡시다.]

그러자 주륭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초식을 내뻗었으나 구양공정은 경신법

의 뛰어남을 바탕으로 몸을 날려 옆으로 피하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경박한 말

을 늘어놓아 상대방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한참 싸우다가 주륭은 다시 아랫배를 걷어차이자 그는 왼손으로 배를 움켜쥐

고 고통에 찬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오른손으로 금구괘옥(金鉤掛玉)이라는 수법

을 쓰면서 한걸음 내딛더니 재차 몰차란(沒遮 )이라는 일초를 펼쳐 정통으로 적

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순간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나면서 구양공정은 몇 대의 늑골이 부러지며 몸을

비틀거리며 한 모금의 선혈을 뿜어냈다.

주륭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는지라 일초에 승리를 거두게 되자 잇따라 다시

독수를 펼치려 하였다. 이때 구양공정은 자기가 대항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고

통을 참으며 몸을 날려 물러서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겼소.......]

주륭이 추격을 하려고 하자 탕패가 말했다.

[주노사, 승부는 판가름 났으니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소이다. 당신이 앉도록

하시오.]

주륭은 탕패의 말을 듣고 감히 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포권을 하며 말했

다.

[소인은 감히 옥룡배를 얻을 생각은 없소이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자기 자리에 앉았다.

뭇 무사들은 대부분이 구양공정의 위인됨을 업수이 여기는터라 주륭이 고전을

한 끝에 승리한 것을 보고 다투어 다가와 위로의 말을 했다. 구양공정은 부끄러

운 빛을 가득 띠웠으나 감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 저택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중

상을 입고 있는 처지라 일단 복대수부에서 나가기만한다면 다른 사람이 쫓아와

손을 쓸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특히 주륭이 맨먼저 달려나올 것 같았

다. 그는 즉시 내 상약을 술에 타서 마시고 고통을 참은 채 그 자리에 앉아서

음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는 말과 조소를 그저 못

들은 척 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주륭은 보기에 너무나 정직해서 모자란 듯 하지만 기실총명하기 이를데

없구나. 그의 무공으로 옥룡배는 결코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니 한 번 겨루어 이

기자 명성을 보전하려고 물러서는구나. 금강권이 비록 옥룡팔문의 대열에 낄 수

는 없지만 강호에서는 함부로 얕볼 수 없을 것 같구나.)

이때 탕패가 입을 열었다.

[주노사의 뜻이 어배에 없다면 어느 노사께서 이 자리에 앉으시겠소?]

남아 있는 하나의 빈 의자에 싸우지 않고 앉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한 번의

싸움만큼 기운을 아낄 수 있는 셈이라 벌써부터 이 점을 노리고 두 명의 사내가

좌우 양쪽에서 서둘러 달려나왔다.

두 사람과 태사의와의 거리는 마찬가지라 누군가 한 사람이 발걸음이 빠르다

면 바로 그 의자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다급한 나머지 달려

나오는 기세로 의자 가까이에서 서로 어깨를 마주 부딪히며 각자 두어 걸음씩

물러서게 되었다. 바로 이때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사람들 틈에서

달려나오더니 두 팔을 한 번 떨치고 마치 커다란 새가 날아오르는 듯이 가볍고

도 교묘하게 의자에 내려 앉았다. 그는 나중에 출발했으나 먼저 도달한 셈이었

다. 이와 같은 경신법은 그야말로 멋진 것이라 사람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

냈다. 서로 어깨를 맞부딪힌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선수를 쳐서 의자에 앉는

것을 보자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일제히 소리를 쳤다.

[아, 당신이군!]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공격을 해 갔다. 그 사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왼발을 뻗어내 왼쪽의 사내를 곤두박질치도록 만들며 오른손을 동시에

뻗쳐내 오른 편 사내의 뒷덜미를 감아 쥐고 빙글 돌리더니 그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닥치는대로 손과 발을 써서 두 사람을 물리친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생각했다.

(저 사람의 무공이 어찌 저토록 훌륭한가?)

안 제독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형편이라 두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이까? 어느 문파의 장문인이죠?]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던 두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 중 한 사내가 버럭 고함을 내 질렀고, 다른 사람은 악을 쓰듯 마구잡이로 욕

을 퍼부으며 재차 그 사람을 치려고 들었다. 두 사람이 고함을 치고 악을 쓰며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볼 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대방에게 실컷 모욕을 당하

고 희롱을 받는 등 그에게 쓴맛을 단단히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차

력타력(借力打力)의 신법을 펼쳐 왼손을 왼쪽 사내의 등에 대고 밀었고, 오른

발을 구부려 돌려차 오른쪽 사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두 사람은 그만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다행

히도 두 사람의 임기응변이 빨라 머리가 부딪히기 전에 손을 뻗어 서로 상대방

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달려가는 기세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제대로 서지

못하고 뒤엉켜 쓰러졌다.

왼쪽에 있던 사내는 부르짖었다.

[제노이(齊老二), 우리의 일은 나중에 다시 따지기로 하고 오늘은 합심하여

이 녀석을 요리한 후에 다시 논하도록 하세!]

오른쪽에 있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맞았네!]

그리고는 몸을 솟구치며 허리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들었다.

호비는 이웃 탁자의 노인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압형문(鴨形門)의 번강부( 江鳧)가 죽자 뒤를 이은 두 명의제자는 정말 형편

이 없군.]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더 설명을 하지 않았다.

호비는 그 사내의 신법이 무척 이상한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어 옆 자리에 있

는 노인에게 다가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실례하지만 선배님께 여쭙겠는데 저 두 사람은 압형문의 사람인가요?]

그러자 그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는 낯이 매우 설구려.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호비가 대답을 하기 전에 채위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내가 두 분을 소개해드리지요. 이분은 폐문의 신임 장문인인 정영호(程靈胡)

정노사이고, 이분은 선천권(先天拳)의 장문인인 곽옥당(郭玉堂) 곽노사이시지

요. 두 분께서는 서로 사귀어 보십시요.]

곽옥당은 채위를 알고 있었으며 화권문에서 인재가 배출되고 있으며 북방 권

법에 있어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대 문파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터라 호비에

대해서 존경심을 나타내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정노사, 우리 이 탁자에는 네 사람 밖에 없으니 이쪽으로 오시지 않겠소?]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것 참 잘됐군요.]

그리고 그는 대성문의 잔나비 같은 늙은이에게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정영소

와 채위, 희효봉 세 사람과 함께 마시던 술잔과 젓가락을 들고 곽옥당의 탁자로

옮겨 앉았다.

이 선천권은 내력이 무척 오래되어 당나라 시대에 창건이 되었다. 그러나 역

대의 권사(拳士)들이 재간을 전수할 때 사사로이 자기 자신을 위해 초식의 전수

를 꺼려했기 때문에 천 여 년 동안에 뛰어난 영웅호걸이 없어 청나라 때에는 이

미 쇠퇴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곽옥당 자신으로서는 다른 문파의 명가

고수들과 무공을 견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어배를 손에

넣겠다는 뜻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에 앉아서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싸움 구경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호비가 먼저 던진 질문에 대답을 했다.

[압형권의 모양은 보기에 매우 어색하지만 마보(馬步)가 낮고 하반신이 공고

해서 수면 위에서 펼치는 무공은 대단히 훌륭하다오. 과거 번강부가 살아있을

때는 하투(河套) 일대는 그가 주름을 잡았지요. 번강부가 죽자 두 제자가 그 자

리를 잇게 되었는데 저 비수를 들고 있는 사람이 제백도(齊伯濤)라고 하고, 저

파갑추(破甲錐)를 펼치고 있는 사람이 진고파(陳高波)라고 한다오. 두 사람은

장문인 자리를 놓고 이미 십여 년 동안 싸워 왔지만 서로 승복을 하지 못하고

있었소이다. 그러다가 이번 복대수가 각문각파의 장문인을 초청하자 염치없게도

사형제 두사람이 체면불구하고 함께 온 것이라오!]

이 때 제백도와 진고파는 각기 한 자루의 짧은 무기를 들고 좌우 양쪽에서 공

격해 들어갔으나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않고 꾸짖었

다.

[이 못난 것들 같으니! 내가 난주(蘭州)에서 자네들에게 무어라고 했는가? 북

경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끝내 고집을 피우고 올라오다니!]

그 사람은 머리가 삼각형처럼 뾰족했고, 얼굴은 작은 편이었다. 그는 담뱃대

를 들고 뻑뻑 빨아대고 있었고 입가에는 두 가닥의 노란 쥐꼬리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나이는 오십 여세 정도로 보였다.

안 제독이 시종 그의 문파와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비

는 그의 손과 발이 매우 길어 대충 양쪽으로 손을 뻗쳐내며 발길질을 하여 제백

도와 진고파의 초식을 해소시키는 것이 고강한 무공은 아니었지만 초식이 지극

히 괴이하여 곽옥당에게 물었다.

[곽노사, 저분 선배님은 누구시죠?]

곽옥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그건.......]

그 역시 잘 모르는듯 겸연쩍게 얼굴을 붉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공이 뒤떨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

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때 담뱃대를 빨고 있던 노인이 꾸짖었다.

[이 비천한 것들아! 내가 만약 세상을 떠난 형제 번강부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희들 일에 상관을 하지 않는다. 번강부는 한평생 영웅호걸로 지냈는

데 너희들은 부귀공명을 탐하여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니 한심하구나! 너희들은

돌아가겠느냐? 돌아가지 않겠느냐?]

진고파는 파갑추를 곧장 찌르며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 사부님이 언제 당신과 같은 고약한 친구를 사귀었단 말이오. 나는 사부

문하에서 칠 팔 년 동안 지내 왔지만 당신과 같은 쭈그렁 영감탱이는 본 적이

없소!]

그 노인은 욕을 했다.

[번강부는 나와 어렸을 때 흙장난을 같이 하고 벌레와 개미를 같이 잡던 친구

인데 너 같은 애숭이가 뭘 안다고 하느냐?]

그리고는 돌연 손을 뻗쳐 철썩! 하고 그의 따귀를 한 대 갈겼다. 이때 제백도

가 어느덧 그의 읜쪽으로 공격을 하자 발을 들어 정확히 그의 안면을 걷어차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의 사부님이 돌아가셨으니 내가 대신 너희들의 버릇을 가르쳐 놓겠다!]

대청 안의 군웅들은 세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싸우는 것을 보고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재백도와 진고파는 정말 멍청한 인물인지 그 누구도 그 노

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애를 쓰며 늘어붙고 있

었다. 그 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복대수가 너희들을 부른 것이 설마하니 정말 호의를 가지고 그런. 줄 아느

냐? 그는 너희들이 서로 싸워 죽이고 죽도록 유도를 하는 것이야! 술을 마시기

에도 적당히 않고 오강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그릇 나부랭이를 가지고서 몇 잔의

술로 사람을 꼬득여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싸우기를 바라는 것이란 말이다!]

이 몇 마디의 말은 겉으로는 제백도와 진고파 두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었지만

그 소리는 우렁차서 대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선배님은 겉보기와는 달리 퍽이나 견식이 있구나. 저 같이 거침없이 말을

하다니 정말 담력이 대단하구나!)

과연 안 제독은 그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듯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왜 여기서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훼방을 놓는

것이오?]

그는 뭇 사람들의 얼굴을 보아 초청받고 온 손님 대접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손이 올라갔어도 벌써 올라갔으리라!

그 노인은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스스로 나의 두 후배를 가르치는데 당신에게 무슨 방해가 된다는 것이

오?]

그리고는 담뱃대를 뻗쳐 쩡쩡! 소리가 나도록 후려쳐 제백도와 진고파의 손에

들린 비수와 파갑추를 떨어뜨리고 담뱃대를 허리춤에 푹 찌르더니 양손으로 각

기 한 명의 귀를 잡고는 횅하니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 두 사람은 순순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끌려갔다. 입을 씰룩거리

며 눈을 감고 있는 것이 고통을 참는 듯 보였으며 그 표정이 지극히 우스꽝스러

워 군중들은 모두들 실소를 금치 못했다.

원래 그 노인은 양손의 엄지 손가락과 식지로 귀를 움켜잡고 나머지 세 손가

락으로는 그들 뒷통수에 있는 강간(强間)과 풍부(風府) 두 혈도를 거머쥐어 그

들의 손과 발이 맥이 빠져 반항을 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선배님은 사리도 잘 판단하고 무공도 고강하니 강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

다면 사귀어 볼만 하겠구나. 제백도와 진고파 두 사람이 만약 그의 가르침을 받

게 된다면 장래에 저토록 못난 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안 제독은 욕지거리를 해댔다.

[빌어먹을 후레자식 같으니...... 대수부로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다니 정말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군.......]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 틈에서 고기 완자가 날아와 그의 입 속으

로 쳐박혔다.

안 제독은 깜짝 놀란 나머지 그만 꿀꺽하고 그 고기 완자를 엉겁결에 삼키고

입을 벌린 채 두 눈이 휘둥그레져 말을 하지 못했다. 고기를 먹은 것 같다는 느

낌을 받았을 뿐 도대체 어떤 괴이한 것을 뱃속으로 삼키게 되었는지 또 그 완자

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고기 완자를 누가 던졌는

지 알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입을 벌이고 놀람과 당황한 표정을 띠우고 하던 욕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탕패는 안 제독의 등 뒤에 앉아 있다가 넌즈시 입을 열고 말했다.

[강호에는 초야에 은거하여 사는 인사들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이 없소이다. 저 분 선배는 매우 청고(淸高)하여 우리들과 같은 속세의 사

람들과 벗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니 그만 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의자가 비어있으니 어느 노사께서 앉으시겠소이까?]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내가 가겠소!]

뭇 사람들은 그 소리만 들을 수 있었지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한

참 후에야 한 명의 난장이가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키가 석 자

일곱 치에 불과했고 온 얼굴에 구렛나루를 기르고 있었는데 모양이 무척이나 흉

악했다.

어떤 나이 어린 무사들은 그가 야릇할 정도로 키가 작은 것을 보고 그만 실소

를 했다. 그 난장이는 고개를 들리고 노기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것이 절로 위엄이 드러나 뭇 사람들은 더이상 웃지를 못

했다.

그 난장이는 이랑권 황희절 앞에 이르더니 그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황희절은 의자에 앉아있는데도 그 난장이가 서 있는 것보다 머리

반은 더 컸다. 그 난장이는 그를 아래위로 연신 훑어보며 말은 하지 않았다.

황희절패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뭘 보는 것이오? 나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는 것이오?]

그러자 그 난장이는 코웃음을 치더니 의자 뒤로 돌아가 다시 그의 뒷모습을

살펴 보는 것이었다. 황희절은 그가 뒤에서 암산을 할까 두려워 덩달아 고개를

들리자 그 난장이는 다시 앞으로 돌아나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한 채 눈을 부

릅뜨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사품의 무관이 입을 열었다.

[이분 노사는 섬서 지당권(地堂拳)의 장문인인 종웅(宗雄) 종노사이외다.]

황희절은 그가 찬찬히 뜯어보자 모골이 송연해져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종노사, 불초는 당신의 지당권이라는 절초를 한번 가르침 받아보도록 하겠소

이다.]

헌데 종웅은 두 발을 들어 그 옆에 놓여있는 빈 의자로 올라가서 앉았다. 황

희절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와 겨루고 싶지 않다면 그것도 괜찮지!]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종웅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

의 앞으로 가서 수박통 같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황희절을 바라보는 것이었

다.

황희절은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이오?]

종웅은 담담히 말했다.

[조금 전 당신은 술을 마시면서 왜 나를 보고 웃었소? 당신은 내가 너무 키가

작다고 웃은 것이 아니었소?]

황희절은 웃었다.

[당신 키가 작은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오?]

종웅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그래도 나에게 덕을 보려고 하는군!]

황희절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째서 내가 당신의 덕을 보려 한다는 것이오?]

종웅은 여전히 노기를 띠운 채 말했다.

[당신은 내 키가 작은 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했지? 허허! 내가

태어날 때부터 키가 작은 것은 우리 아버지와 상관이 있을 뿐인데 당신은 가상

하다고 생각하며 웃는 것이 우리 애비로 자처하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 말이 떨어지자 대청에서는 대뜸 와! 하는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오게 되었

다.

복강안은 차를 마시다가 그만 참지를 못하고 사래가 들린듯 찻물을 뿜어냈다.

정영소는 탁자 위에 엎드려서 웃느라고 배가 아플 지경이었고, 호비는 붙여놓은

수염이 떨어질까봐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황희절은 웃으며 그 말에 응수를 했다.

[감당할 수가 없소.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내 아들은 종노사보다도 훨씬 잘

난 편이라오.]

종웅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휙! 하니 주먹을 뻗쳐 그의 아랫배를 후려치려

고 들었다. 황희절은 이미 경계를 하고 있었는 듯 우람한 체구는 민첩하게 움직

여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러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종웅의 주먹은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의자를 쪼개버렸다.

이 한 대의 주먹이 뻗쳐지자 대청에는 웃음소리가 그쳤다. 뭇 사람들은 그의

생김새가 추악하고 말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의 신력은 놀라운지라 얕볼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종웅은 주먹이 빗나가자 몸을 뒤로 젖히더니 냅다 발을 들어 황희절을 걷어차

려고 했다. 황희절은 왼쪽 발을 움츠리며 영웅독립(英雄獨立)이라는 신법을 펼

쳐더니 이어 타팔식타자각(打八式 子脚)이라는 일초로 반격을 했다.

종웅은 즉시 땅바닥에 몸을 내던지듯 뒹굴며 지당권을 펼쳐냈다. 손과 발을

한꺼번에 써서 집요하게 상대방의 아랫쪽 세갈래를 노리고 공격을 해왔다. 황희

절은 여전히 소당퇴(掃堂腿)와 퇴보과호세(退步跨虎勢), 도전보(跳箭步) 등 수

초를 잇따라 펼쳐내며 공수를 겸비했다.

그러나 그의 이랑권의 장점은 권법과 장법에 있는 것이고 발길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보통 사람과 싸울 때라면 그가 이랑담산장(二郞擔山掌), 개마삼

권(蓋馬三拳) 등 절초를 펼쳐낸다면 그의 빠르고 중후한 주먹을 상대방이 막아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쉽사리 싸움을 벌여나갈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가 연마한 퇴법이 와심퇴(窩心腿) 및 요음퇴( 陰腿) 등 상대방의 상반신이나 허

리를 걷어차는 수법이었는데 이때 종웅이 땅바닥을 뒹굴어 공격을 하자 한평생

연성한 무공이 모조리 쓸데없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비단 주먹으로 사람을 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길질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어 단지 몸을 날려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얼마 후 오금을 종웅에게 몇 차례나 걷어차였다. 다시 종웅이 두

다리로 얽어 오자 황희절은 제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

았다.

종웅이 몸을 날려 덮쳐들었다. 그러나 황희절은 땅에 쓰러지게 되자 오히려

자기의 재간을 펼칠 수 있게 되어 내지른 주먹이 정확히 상대방의 어깨를 격타

하며 텅! 소리와 함께 종웅은 일장 남짓 밀려나게 되었다. 종웅은 다시 바닥에

몸을 던지며 굴러와 재차 공격을 해왔다.

황희절은 아예 땅에 무릎을 꿇고 상대와 키를 맞춘 다음 상대방이 달려오는

기세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가 왼쪽은 손으로 오른쪽은 주먹을 동시에 격출해

내자 종웅은 몸을 비스듬히 굴려 피했다.

두 사람이 이와같이 몸을 땅바닥에 붙이듯 하고 싸우자 펑!

퍽!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며 각기 몸에 상대방의 초식이 적중하였다. 그러

나 두 사람 다 가죽이 두껍고 살이 거칠어 맷집이 좋은 편이라 너 한 대 때리면

나 한 대 때리는 등 일시에 승부를 낼 수가 없었다. 격투가 이러한 상황으로 벌

어지자 되자 이미 종웅도 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별안간 황희절이 빈틈을 보

여 종웅을 유인하였다. 그는 가슴에 주먹을 맞을 각오를 하고 두 손을 일제히

뻗쳐 종웅의 목을 움켜쥐고 몸을 뒤집어 그를 몸 아래로 짓누르며 조여갔다. 종

웅는 주먹을 맹렬히 뻗쳐 황희절의 옆구리를 가격했지만 황희절은 간신히 적의

요혈을 움켜잡은터라 어찌 놓으려고 하겠는가?

종웅을 숨을 쉴 수가 없어 온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가지색으로 변하며 뻗쳐

내는 주먹도 점점 무력해졌다.

군웅들은 두 사람의 뚝심으로 난투극을 벌이는 것이 마치 시정잡배들이 싸우

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어 장문인의 품위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지라 모두들

고개를 흔들며 암암리에 조소를 보냈다.

차츰 종웅이 견뎌내지 못하자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더니 황희절

의 등을 후려치려 들었다.

안 제독은 재빨리 호통을 내질렀다.

[물러서시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할 수는 없소!]

그러나 그 사람의 주먹은 황희절의 등을 후려쳤다. 황희절은 고통을 참지 못

하고 손을 풀자 종웅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다시 한 사람이 달려나오더

니 주먹을 휘둘러 황희절을 공격한 사내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원래 이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종웅의 큰 제자였고, 다른 사람은 황희

절의 아들이라 각자 나서서 아버지와 사부를 편든 것이었다.

대청은 대뜸 쌍쌍이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 되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고함읕 지르며 위세를 돋구고 손뼉을 치면서 좋

다고 소리를 내질렀다. 무림의 장문인들이 무예를 겨룬다는 것이 장난을 치듯

장엄한 구석이 하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종웅은 한 번 낭패를 당하자 감히 요행을 바라지 못하고 즉시 엄히 문호를 지

키면서 황희절과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였다. 황희절의 아들은 대적 경험이 부족

하여 상대방의 발길질에 차여 몇 번이나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되자 그는 노해

신발에서 단도를 뽑아들고 적을 찌르려고 했다. 종웅의 제자는 깜짝 놀랐으나

몸에 지닌 무기가 없어 탕패 옆에 놓여있던 빈 태사의를 집어들고 휘두르며 막

았다.

이러한 모습은 완전히 시정잡배의 패싸움으로 가면 갈수록 품위를 잃고 말이

아니었다.

홍화회의 출현

안 제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그들은 모두 물러서시오!]

그러나 네 사람은 한창 싸움에 정신이 팔려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해란필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제독 대인의 말을 당신들은 듣지 못했소?]

순간 황희절의 아들이 칼로 상대방을 찌르려고 했는데 그만 허공을 찌르고 말

았다. 해란필은 손을 뻗쳐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바깥으로 던지고, 동시에 손을

뒤로 돌려 종웅의 제자를 잡아 뜨락으로 내던졌다.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였으

며 해란필은 다시 종웅과 황희절을 양손에 잡고 동시에 내던졌다. 그러자 네 사

람은 한데 얽혀 나가 떨어지게 되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골이 뻑적지근 해오

자 그만 무턱대고 상대방을 붙잡고 비틀며 때리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몇 명의

위사들이 달려가 그들을 떼어놓자 겨우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네 사람 다 하나

같이 눈두덩이가 부어오르고 코는 시퍼런 멍이 들었는데도 여전히 서로 욕지거

리를 해대고 있었다.

해란필이 솜씨를 드러내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서늘해지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사대 장문인에 꼽혔는데 과연 지극히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

구나. 아무렇게나 잡아 던지는데도 마치 종웅과 황희절 두 사람을 허수아비처럼

내던지다니 대단한 사람이구나.)

사실 종웅과 황희절은 매우 낭패한 몰골로 싸웠지만 강호에서는 실로 재간이

있는 축에 끼는 사람들이었고, 강호에서 또한 명성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 쉽

게 볼 인물들이 아니었다.

해란필은 네 사람을 집어던지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탕패는

칭찬의 말을 했다.

[해대인의 훌륭한 솜씨에 정말 탄복했소이다.]

해란필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야말로 탕대협께서는 보고 웃었겠소이다. 실로 꼴사납게 소란을 피우니 말

이 통할 것 같지 않아 부득이 손을 쓴 것이외다.]

이때 시중을 드는 하인들과 일꾼들이 부서진 의자를 치우고 다시 태사의를 가

져왔다. 곤륜도의 장문인 서령도인은 줄곧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다가 해란필

이 한 수의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자 스스로 그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옥룡팔

문의 장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렵다고 느낀 나머지 약간 초조하

고 불안해졌다. 그 옆에 있던 취팔문의 장문인 천배거사는 여전히 술을 자작하

며 취한 눈을 몽롱하게 뜨고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 제독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복대수께서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초청하신 것은 무공을 겨루고 절예의 고하

를 정하자는 것이니 절대로 방금 전의 몇 분처럼 마구잡이로 손을 써서 점잖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않도록 하십시요.]

그러자 종웅이 낭하에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엇이 점잖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이고, 점잖지 못한 사람의 울

음을 산다는 것이오? 당신은 무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어디 나와 한 번 겨루

어 봅시다.]

안 제독은 못들은 척하고 말했다.

[아직 두 개의 자리가 비어 있는데 어느 참된 영웅호걸이 올라와서 앉으시겠

소이까?]

종웅은 대노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진짜 영웅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설마하니 내가 영웅이 아니라 구웅(狗熊)이란 말이오?]

그는 조금 전 해란필에게 나가 떨어진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낭하에서

달려오더니 안 제독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휘청거리며 곤두박질쳤다.

한 명의 위사가 발을 걸어 그를 넘어지도록 만든 것이었다. 종웅은 대노해서

몸을 돌려 자기를 암산한 사람을 찾으려 했으나 그 위사는 어느덧 동료들 사이

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종웅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 아마도

누가 몰래 그의 다리를 걸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때 뭇 사람들은 대청 가운데에 놓여있는 두 개의 새로 놓여진 태사의에 시

선을 집중시키며 앉아있을 뿐 종웅을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하나의 빈 의자에는 월백승포(月白僧袍)를 걸친 화상이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듯 이름을 부르는 무관은 그 사람을 몽고(蒙古)의 합적대사(哈赤大

師)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빈 의자에는 비좁음을 무릅쓰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은 똑같았는데 거꾸로 매달린 듯한 눈썹에 닭의 눈

망울 같은 눈은 콧날 옆에 붙어 있었다. 나이는 사십여 세 정도 되어 보였으며,

복장이나 치장이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쌍동이 형제임이 틀림없

어 보였다. 이들 두 사람의 용모는 별로 특징이 없어보였지만 한 쌍의 투계(鬪

鷄)와 같은 눈동자는 그 얼굴의 생김새를 무척 이상야릇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

다. 곧이어 무관이 노래를 부르듯 이름을 외쳤다.

[이 두 분은 귀주(貴州) 쌍자문(雙子門)의 장문인인 예불대(倪不大)와 예불소

(倪不小) 예씨 쌍웅입니다.]

뭇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 미소를 머금은 채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

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용모와 몸매를 보니 완전히 똑같이 닮아 도대

체 예불대가 형인지 예불소가 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한 명이 예대(倪大)

라고 불리고 다른 사람이 예소(倪小)라고 불리게 되었다면 어릴 적부터 형과 동

생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불대'는 마치 적은 것을 나타내고, '불소'는 큰 것을

나타내는 것 같았으며, 어떻게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손을 옷자락 속에 넣고 있어 매우 추위를 타는 것처럼 보였

다. 뭇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의논을 했으며 심지어 몇몇 사람은 내기를 했

고, 어떤 사람들은 예불대가 형이고, 호자는 예불소가 형이라고 했지만 예불소

가 누군지 예불대가 누군지 분간하기도 매우 어려웠다.

두 형제의 안색은 무표정하였으며 네 개의 눈동자는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수척한 편은 아니었지만 함께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도 조금도 비

좁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릴 적부터 그렇게 앉는 것이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복강안은 두 사람을 보면서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있었는데 매우 흥미를 느끼

고 있는 것 같았다.

뭇 사람들이 정히 의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 앞이 훤해지며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그 여인은 몸에 담황색의 비단 장삼을 걸치고 초록색의 치마를 걸

치고 있었는데 나이는 스물 두셋 정도로 살결이 희고 고운 것이 퍽이나 매력적

인 모습이었다. 노래를 부르듯 소개를 하는 무관이 다시 소리를 쳤다.

[봉양부(鳳陽府) 오호문(五湖門)의 장문인인 상비홍(桑飛虹) 소저이외다.]

뭇 무사들은 갑자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나자 모두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곽옥당은 호비에게 말했다.

[오호문의 제자들은 모두 강호에서 재주를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인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 장문인은 반드시 여자라야만 했소. 설사 무예가

고강하고 품도가 있는 남자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장문인이 될 수 없지요. 그런

데 저 상소저는 나이가 저토록 어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진짜 재간을 지니고 있

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구려.]

이때 상비홍은 예씨 형제들 앞으로 다가서더니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웃으며

말했다.

[실례하지만 두 나으리 중에서 어느 분이 형인가요?]

두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비홍은 웃으며 다시 입

을 열었다.

[설사 쌍동이라 하더라도 일찍 나고 늦게 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니 노대(老

大)와 노이(老二)로 나누어지지 않겠어요?]

예씨 형제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비홍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재차 입

을 열었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그리고 이어 그녀는 왼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이 노대인가요?]

그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다시 오른 쪽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노대인가요?]

그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상비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목숨처

럼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러자 왼편에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누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오? 나는 이 녀석의 형도 아니고, 이 녀석 역시

나의 형이 아니란 말이오.]

상비홍은 의아한 표정으로 넌즈시 물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간에 두 분은 쌍동이 형제가 아니겠어요?]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젔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그들

두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닮았는데도 쌍동이 형제가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연유

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상비홍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들이 거짓말을 안한다구요? 당신들이 쌍동이 형제가 아니라고 한

다면 내 목을 내놓아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어느 분이 예불대예요?]

왼쪽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내가 예불대이외다.]

상비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먼저 세상에 먼저 태어났나요? 아니면 저분이 먼저 세상에

태어났나요?]

예불대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귀찮게 만드는구려. 당신이 우리 형제들과 혼사를 맺는 것도 아

닌데 그건 왜 묻소?]

상비홍은 강호를 떠돌아 다닌 관계로 그의 경박한 말에 전혀 개의치를 않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호호호! 됐어요. 이제 당신 스스로 형제라는 것을 인정했군요.]

예불대는 말했다.

[우리들은 형제이지만 결코 쌍동이 형제는 아니란 말이외다.]

상비홍은 식지를 뻗쳐 뺨에 갖다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예불대는 말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그만 두시구려. 누가 당신보고 믿어달라고 했소?]

상비홍은 고집스럽게 집요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이 쌍동이 형제라고 뭐 나쁠 것이 있어요? 어째서 인정을 하려고 하지

않는거죠?]

예불소가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반드시 그 내력을 알아야겠다면 말헤줘도 상관이 없지만 우리 형제들

에게는 규칙이 있는데 우리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연후에는 우리 형제들의

삼 장을 맞아야 하오. 만약 견딜 재간이 없다면 우리 형제들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려야 한단 말이외다.]

상비홍은 실로 호기심이 끌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내심 생각을 했

다.

(그들이 나에게 삼장을 후려친다고 하지만 반드시 적중시키리라고는 볼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 그 비밀을 들어본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말씀해보세요.]

예씨 형제는 맙자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일어서는 행동도 또한 전혀 차

이가 없어 정말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상비홍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도 두 쌍동이 형제가 아니라고요. 정말 귀신을 속일 수 있다하더라도 믿

을 수가 없어요.]

이때 그들 두 사람은 손을 소맷자락에서 뽑아냈는데 그 순간 금빛이 번쩍번쩍

했다. 원래 그 두 사람의 손에는 뾰족하고도 긴 금빛의 골무같은 것이 끼어 있

어 만약 사람을 할키려고 든다면 쉽게 막아낼 수 없는 예리한 무기인 것 같았

다.

예씨 형제들은 손을 내밀자마자 몸을 흔들하며 손가락을 뻗쳐 상비홍을 잡으

려 들었다. 상비홍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날려 피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뭐하는 거예요?]

예불대는 동남쪽 모서리에 서 있었고, 예불소는 서북쪽 모서리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팔을 뻗쳐내자 손가락에 날카롭고 뾰족한 금빛 골무같은 것이

보태져 모두 일고 여덟 치의 길이가 되며 순식간에 상비홍을 에워싸는 것이었

다.

안 제독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늘 대회의 규칙은 일대 일의 싸움을 벌일 수 있지, 사람의 수가 많은 것으

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이오.]

예불소의 투계와 같은 두 개의 눈동자가 바로 콧날 옆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

기 좌우로 눈동자를 나누어 째려보더니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안대인, 당신은 우리 형제들이 어느 문파의 사람인지 아시죠?]

안 제독은 그 말을 받았다.

[당신들은 귀주의 쌍자문이 아니오?]

예불대 역시 두 눈을 옆으로 나누며 말했다.

[우리 쌍자문은 자고로 거두어 들인 제자가 두 쌍동이 형제가 아니면 쌍동이

자매였으며, 남과 손을 쓰게 되었을 때 한번도 일대 일의 싸움을 벌인 적이 없

소이다.]

안 제독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상비홍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것봐요. 당신네들은 방금 쌍동이 형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인정을 하는군요.]

예불소는 그 말을 받았다.

[우리는 쌍동이 형제가 아니오!]

뭇 사람들은 두 사람이 되풀이해서 그러한 말을 하자 하나같이 이 뚱단지 같

은 형제가 약간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다. 상비홍은 깔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당신네들과 쓸데없이 말씨름을 하지 않겠어요. 어찌되었든 간에 나

는 저 옥룡배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예불소는 두 손으로 그녀를 막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우리 형제들에 내력을 알게 되었소. 그러니 삼장을 얻어맞겠소?

아니면 세 번 큰절을 하겠소?]

상비홍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줄곧 딱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어떤 때는 형제라고 하고 어떤 때는

쌍동이 형제가 아니라고 했어요.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여기에 계시니 어디 한

번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평을 해주세요.]

예불대는 그 말을 받았다.

[좋소. 당신이 굳이 듣겠다고 한다면 말을 하리다.]

예불소가 그 말을 이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 어머니의 친형제요.]

예불대는 동생의 말을 이었다.

[우리 형제는 모두 세 사람이었소.]

다시 예불소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세 쌍동이 중의 두 형제이오.]

예불대가 다시 말을 받았다.

[때문에 우리는 형제이기는 하지만 두 쌍동이 형제는 아니란 말이오.]

그러자 예불소가 다시 설명을 했다.

[큰형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그만 천국으로 올라가시고 말았소.]

예불대는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세상에 태어났고 따라서 선후를 분간할 수가 없었

소.]

예불소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머리는 둘이었지만 어깨부터 몸뚱이가 서로 붙어 있었소.]

예불대는 그 다음을 이었다.

[명의가 교묘한 수술을 해서 우리 형제 두 사람을 칼로 갈라놓은 것이외다.]

예불소는 다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예불대는 덧붙이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형이 아니고, 이 녀석 역시 동생이 아니란 말이오.]

두 사람은 네 한마디 하면 나 한마디 하는 식으로 단숨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

가운데 머뭇거리는 것이 없이 어투가 연관되어 있었으며 음조(音調)가 같았기

때문에 누가 벽을 사이에 두고 들었다면 결코 이 말들이 두 사람의 입에서 나왔

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청에 있던 뭇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여

기고 있었지만 사실 기묘하기는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모두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상비홍은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랬었군요. 그러한 일은 천하에서 보기 드문 일이며 나 역시 오늘 처

음 듣는군요.]

예불소는 물었다.

[당신은 절을 하지 않겠소?]

상비홍은 말했다.

[절은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때리겠다면 손을 쓰도록 하세요. 그러나 나는

반격하지 않겠다고 응낙하지는 않았어요.]

예불대와 예불소 두 형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갑자기 동시에 금빛 광채를

번득이며 스무 개의 예리한 금빛 골무를 낀 손가락을 질풍과 같이 휘둘러 할퀴

려고 들었다. 상비흥은 신법이 영민한 편이라 스무 개의 기다란 손톱 사이를 빠

져나갔다.

예씨 형제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래 한 시진도 따로 떨어져 있었던 적

이 없었고, 배운 무공 역시 모든 것이 분진합격지술(分進合擊之術)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한 사람과 결코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네 개의 팔다리를 가지고 스

무 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처럼 두 사람은 환상적인 배합을 이루었다.

예불대가 왼손을 맞뻗치자 예불소는 어느덧 왼쪽으로부터 끌어안을 듯이 쓸어

쳐왔다. 상비홍의 신법이 매끄럽기 이를데 없었으나 일초도 반격하지 못했으며,

이와 같은 국면이 지속된다면 결코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

을 한다면 끝내 두 형제의 손톱에 상처를 입고 말리라.

대청에서 구경을 하던 군웅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르

짖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치다니 이것이야말로 어찌 영웅호걸이 할 짓이겠소? 역

시 개영웅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허우대가 멀쩡한 두 사내가 젊은 소저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그야

말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

[상대 소저는 맨손인데 두 분 나으리의 손가락에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

지 않소!]

[소형제, 자네가 가서 도와주게. 그렇다면 저 다 큰 처녀는 소형제의 손목이

라도 한번 잡아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허허허!]

한창 시끌벅적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불대와 예불소는 동시에 어! 하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시력을 모아 복강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쁨과 놀람의 빛을 가득 띠우고 있었다.

뭇 사람들이 일제히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복강안을 바라보니 복강안은 싱글

벙글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는 양손에 어린아이를 하나씩 붙잡고 나직이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 두 어린애는 매우 귀엽게 생겼으며 얼굴 모습이 똑같아 틀림없

이 또 한쌍의 쌍동이 형제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예불대 형제들과 비교해 볼 때, 두 어린애는 준수했으나 예씨 쌍웅은

추악하기 이를데 었어 서로 대조를 이루니 더욱 가관이었다. 따라서 뭇 사람들

은 그렇게 귀여운 어린 쌍동이 형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같이 즐거워 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속으로 섬칫했다. 두아이들은 다름아

닌 마춘화의 아들인데 무슨 수를 썼는지 복강안이 다시 빼앗아 온 모양이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동시에 생각했다.

(애들을 그에게 빼앗긴 이상 우리들의 행적도 조만간 그에게 간파당할 것이

다.)

정영소는 즉시 호비에게 눈짓을 하여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자는 뜻을 전했

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이 만약 간파했다면 자연히 암암리에 안배를 해 놓았을테니 지금으로

서는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임기응변으로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불대와 예불소 형제는 두 어린애를 훑어보며, 마치 넋을 잃은듯 실성한 듯

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같았다.

상비홍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두 어린애는 무척 귀엽군요. 당신들은 저 어린애들을 제자로 거두어 들일

참인가요?]

바로 이 두 마디 말은 예씨 형제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 이었다.

사실 무림에서는 제자가 사부를 선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부가 유능한

제자를 뽑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무학이 심후하고 지도력

이 뛰어난 사부를 만나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지만, 한 명의 총명하고 재능

이 있는 제자 역시 기연이 닿아야만 수하로 거두어 들일 수가 있었다.

쌍자문의 기예와 무공은 두 사람이 동시에 연마하고 동시에 펼쳐야했으므로

나이가 같고 신체와 성격이나 자질이 비슷한 사람을 받아들여 훈련을 시킬 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두 쌍동이 형제가 가장 훌륭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쌍

동이 형제들은 비단 정신이나 지혜와 신체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종종 마음과

뜻이 은연중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적을 상대할 때는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

는 예상밖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쌍자문의 무사들이 한 쌍의 자랑스러운 제자들 거두어 들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보다 백배 천배나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예씨 형제는 복강안의 쌍동이 형제가 자질이나 근골이 모두 으뜸으로 꼽

힐 수 있는 것을 보고는 정말 마음이 근질근질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며 한편으로

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으나 괴롭기도 했다.

복강안은 희희낙낙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두 분 사부님을 보아라. 그들 역시 쌍동이로 한 핏줄 한 형제란다. 그들

두 분의 얼굴 모습은 완전히 같지 않냐? 알아맞춰 보렴. 저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분이 형님이지?]

복강안은 아들을 되찾아오자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다른 쌍동이 형제를 보

자 두 아이들을 불러 구경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두 어린애는 예씨 형제를 멀거니 바라 보았다. 두 사람은 본래 쌍동이 형제인

지라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특이한 감각을 따로이 갖추고 있어 두 형제

가운데 누가 크고 누가 작은지 쉽게 분간할 수 있었지만 예씨 형제 세 사람이

동시에 세상에 태어나고 또 몸뚱아리가 한덩어리였었는데 나중에 갈라 놓았기

때문에 두 어린애로서도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나이 많은 쪽의 한 사

람을 바라 보았다가 다시 나이 적은 쪽을 바라보면서 모두 다 싱글벙글 웃으며

서로 나직이 뭐라고들 수근거렸다.

별안간 예씨 형제는 일성을 대갈하더니 맹렬히 좌우로 나누어 서더니 복강안

의 안면을 할퀴려는 듯 손을 갈고리처럼 하고 공격해 갔다. 복강안은 깜짝 놀라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섰던 두 명의 위사가 선뜻 달려나와 적을

맞이했다.

헌데 예씨 형제의 신법은 무척 괴이해서 중도에 이르게 되었을 때 원래 왼쪽

에 섰던 예불대가 오른쪽으로 돌고 오른쪽의 예불소는 왼쪽으로 돌면서 서로 교

차하여 위치를 바꾸더니 달려드는 두 명의 위사를 등뒤로 낙아채며 나뒹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복앙안을 습격하려는 초식은 허초에 불과했으며 두 사람은 각

가 양쪽에서 발을 뻗쳐내며 일제히 날려서는 쿵! 하니 복강안이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걷어차버렸다.

대청안은 대뜸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꽈당! 쿵쿵!했으며, 어이쿠 어이

쿠!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막으려고 달려오던 네 명의 위사가

어느덧 예씨 형제의 발길질에 채여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하나씩

어린애를 겨드랑이에 끼고는 대청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사람들의 그림자가 휙 스치더니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예씨 형제의 등을 습격했다. 두 사람이 펼친 초식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한 손

으로 예불소의 뒷목덜미를 움켜잡으려고 했는데 그 수법이 재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탕패는 예불대의 뒷허리께를 향해서 일장의 면장(綿掌)을 후려치는 것

이었다. 이 두 초식은 강하고 약함의 구별이 있었으나 매우 무서운 초식이었다.

예씨 형제들은 급히 돌아서서 맞받았으나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예불소의

몸이 휙하고 날아갔고, 예불대는 다리를 휘청하더니 입으로부터 한 모금의 선혈

을 토해 내었고 두 사람은 손에 안고 있던 애를 내려놓고 말았다.

이때 왕검영과 주철초가 달려들어 어린애를 안았다. 왕검영과 주철초의 무공

은 예씨 형제들 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에 두 어린애들이 그들 두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예씨 형제들은 다시는 뺏을 수가 없게 되었다.

복강안은 놀라고 혼이 빠져 헤매다가 정신을 차린 후 성이 나서 외쳤다.

[미친 것들 같으니라구, 잡아라!]

해란필과 탕패가 서둘러 두 걸음을 내딛으며 한 사람은 금나수법을 썼고 한

사람은 쇄골법(鎖骨法)을 써서 나누어 예씨 형제를 움켜잡았다.

예씨 형제들은 조금전에 그들과 권장을 한 번 교환하는 순간 똑같이 내상을

입게 되었고, 이때에는 더욱더 항거할 방도가 없게 된 형편이었다. 해란필과 탕

패 두 사람이 예씨 형제를 잡고 정히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갑자기 처마끝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휙 스치더니 두 사람이 뛰어 내렸다.

대청에는 촛불이 켜져 있어 백주와 다름없었지만 뭇 사람들은 살아있는 유령

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 두 사람의 체구는 뼈가 앙상했으며 얼굴은 깡마른데다

가 길어서 마치 전설속에 나오는 혼백을 빼앗아간다는 무상귀(無常鬼)

와 같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얼굴 모습 역시 똑같아서 놀랍게도 다

시 두 사람의 쌍동이를 만난 것 같았다. 그들 두사람의 신법은 번개와 같았는데

한 사람은 손을 써서 해란필을 공격했고, 한 사람은 각자 손을 뻗쳐서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순간적으로 팍팍!하는 가벼운 음량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해란

필은 전신의 뼈마디가 우두둑 우두둑!소리를 마구냈고, 탕패는 몸을 휘청거렸

다.

군웅들이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졌으며, 줄곧 태사의에 태연하게 앉아 있었던

취팔선 장문인 문취옹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놀라 부르짖었

다.

[흑무상(黑無常), 백무상(白無常)이다!]

그 한쌍의 비쩍마른 사람들은 손을 뻗쳐서 해란필과 탕패 두 사람의 반격을

맞받으면서 번개같은 시선으로 문취옹의 얼굴을 쏘아 보더니 왼쪽의 한 사람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못된 짓을 일삼아놓고도 오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사람은 장력을 쏟아내자 해란필과 탕패 두 사람은 각기 한 걸음 뒤로 물러

섰다. 그 한 쌍의 키가 크고 깡마른 사람들은 어느덧 예씨 형제를 붙잡아 일으

켰다.

그리고 오른쪽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들 두 사람들은 우리 형제들과 친지도 아니고 연고도 없으나 모두 다 같은

쌍동이 형제라는 점을 보아서 이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오.]

그리고 왼쪽의 사람은 포권을 하고 둥글게 손을 맞잡고 절을 해보이고서는 낭

랑히 말했다.

[홍화회의 상혁지(常赫志),상백지(常伯志)는 천하의 영웅들에게 문안드리오.]

해란필과 탕패 두 사람은 그들과 일장을 맞바꾸게 되었는데 다같이 가슴팍의

기운이 끓어오르는지라 속으로 암암리에 약간 운기조식을 하고 나서 다시 앞으

로 나서서 싸우려고 했을 때 갑자기 상혁지, 상백지 두 사람의 성명을 듣고는

어!하는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상씨 형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더니 예씨 형제들을 붙잡고서 처마 위

로 올라갔다. 그 순간 어이쿠! 흥! 앗!하는 소리가 지붕 위에서 들려오더니 점

차 소리가 작아지며 잠잠해졌다. 그것은 물론 지붕위에서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상씨 형제들에게 밀려나 아래로 떨어지면서 내지르는 소리였다.

해란필과 탕패는 똑같이 손바닥이 마비되고 것을 느끼고서 손을 들고 바라보

다가 자심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들 두 사람의 손바닥은 이미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비로소 서천

쌍협(西川雙俠) 흑무상과 백무상 상씨형제의 흑사장(黑沙掌)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만큼 과연 소문 그대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에 암암리에 혀를 내

둘렀다.

복강안이 이번 천하 장문인 대회를 열게된 의도 가운데 하나는 본래 홍화회의

군웅들을 상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뭇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가운데 상씨 형제들

이 마치 다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신출귀몰하면서 사라지자 복강안은 치미

는 분노를 삭이며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대청 가운데 놓여진 태사의를 바라보았

다.

그러고 보니 소림사의 대지선사는 수심에 잠긴 듯 눈을 내리뜨고 담담한 모습

을 앉아있었고, 무당파의 무청자는 얼굴에 당황과 의혹의 빛을 띠우고 있는 것

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문취옹은 꼿꼿하게 선 채 꼼작하지 않

고 앞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상씨 형제가 이미 멀리 사라졌지만 여전히 놀라

서 혼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 일막의 광경을 호비는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호비는 홍화회라는 세 글자

를 듣게 되자 가슴을 두근거리며 상씨 형제가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떠나는 등

대청안의 무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설레임과 벅찬 감동에

온 몸이 취해오는 것을 느끼며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떠올리고 있었다.

(이래야만이 영웅호걸이지!)

상비홍은 줄곧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취옹이 놀라서 여전히 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뻗쳐서 그의 팔을 가볍게 밀고는 웃었다.

[앉으세요. 한쌍의 무상귀는 벌써 갔어요!]

순간 문취옹은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상비홍이 깜짝 놀라 몸을 구부리고 바라보니 그의 온 얼굴은 청자색(靑紫色)

으로 물들어져 있었으며 이미 간담이 찢어져 죽어 있는지라 재빨리 부르짖었다.

[죽었어요. 죽었어요. 이 사람은 놀라 죽었어요.]

대청들의 군웅들은 그 소리를 듣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삽시간에 대청

은 소란스러워졌다. 문취옹 태사의에 앉아서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는 등 그 누

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야말로 내가 천하에서 제일입네

하는 기개를 엿보게 했는데 뜻밖에도 상씨 형제가 나타내서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만 놀라 죽어버린 것이었다.

곽옥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죽어도 남음이 있지. 남음이 있어.]

호비는 물었다.

[곽 선배님, 저 문가 곧 평소 품행이 좋지 못했던 모양이죠?]

곽옥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품행만 좋지 않겠소. 간음과 노략질 등 하지 않은 짓이 없었소. 나는

본래 죽은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

었으니 뭐 감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나는 이미 그가 결코 곱게 죽지 못하

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흑백무상에게 단번에 놀라 죽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지 못했구려.]

다른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마도 상씨 형제가 오랫동안 그를 찾은 모양인데 오늘은 원수를 외나무다리

에서 만난격으로 다시 공교롭게 발견된 셈이겠죠.]

곽옥당은 한동안 생각해보더니 나직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 문가는 틀림없이 상씨 형제에게 잡힌 적이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상씨 형제들 앞에서 어떤 맹세를 한 것 같구려.]

옆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업자득이지!]

곽옥당은 천천히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시비는 헛되이 입을 많이 놀리는 데서 비롯되고 번뇌는 쓸데없

이 나서서 자초한다는 말이 아니겠소. 만약에 그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알

고 무슨 옥룡어배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말고 사람들 틈에 숨어있었더라면

서천쌍협도 그를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 [ 4권 끝 ]

 

[출처] 飛狐外傳 비호외전 8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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