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화산논검 서독 구양봉 3 김용

一字師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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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화산논검 서독 구양봉 3 김용

 

                                                              图片来源 | 创意华山论剑海报 /印刷海报-凡科快图

 

제13장 철장방의 패배

이윽고 계단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아홉 사람이 올라왔다. 웃고 떠드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층에 두 무리의 손님이 있는 것을 보았다. 구양적네 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꺼리지 않는 눈치였으나, 자기들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남쪽 창문가의 식탁을 건너다보고는 금세 표정이 흐려졌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 자리를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복판에 선 사람이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들이 여기 앉으면 돼."

먼저 말을 꺼냈던 사람이 공손히 대답한 뒤 구양적네가 앉은 곳에서 의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 소맷자락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은 후 자기네 방주에게 앉도록 권하고, 주인을 불러 술과 안주를 청했다. 주인이 물러가자 아홉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술과 안주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구양적은 이 아홉 사람들 중 적어도 일곱 사람은 무예가 뛰어나다고 짐작했다. 그들 중 가장 억센 기상을 지닌 사내가 상관위 방주로 마흔 고개를 넘은 것 같았다. 무쇠로 부어 만든 것 같은 시커먼 손만 보아도 출중한 장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위층에 올라올 때만 해도 웃고 떠들어댔지만, 식탁에 모여 앉은 거지 무리를 발견한 뒤로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방주가 한마디했다.

"빨리 먹고 떠나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안주가 오기만 기다렸다. 안주가 오자 다들 게걸스레 먹어댔다. 그들 방주만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가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술집 주인이 술단지를 하나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이 상관위 방주란 사내는 술단지 뚜껑을 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이때 문어귀에서 꼬마 사내아이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한눈에 거지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시커먼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상관위 방주 앞을 지나쳤다. 그곳을 지나 거지 무리가 모여 앉은 식탁으로 달려가 먹을 것을 구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가 그만 술단지를 잡은 방주의 팔을 툭 쳤다. 술단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거지애는 겁이 나

서 비명을 질렀다.

술단지가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려는 순간, 방주가 히죽 웃으면서 발끝으로 술단지를 차 올렸다. 그러자 술단지가 솟구쳐 올라 다시 머리 위쪽으로 날아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대뜸 두 손을 뻗어 술단지를 받았다.

상관 방주 옆에 있던 사내가 거지 아이를 냉큼 붙잡았다.

"네 애비 상이라도 당했느냐?"

거지 아이는 겁에 질려 말은 못하고 질질 울기만 하더니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방주가 말은 안 하지만 자기가 거지 아이를 한바탕 때려 줄 것을 바란다고 여겼는지, 일어서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놈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도 말썽을 부릴 거야!"

그 사내는 주먹을 들어 거지 아이를 때리려 했다.

그 순간 상관위 방주 옆에 앉아 있던 체구가 큰 젊은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제지를 했다. 그는 거지아이를 보면서 몇 년 전 제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날도 상관위 방주가 주루에 들어왔을 때 다른 쪽에 개방의 어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천인은 그 당시 구걸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상관위에게 구걸을 한다는 것이 그만 술단지를 와락 쏟아부어 혼찌검이 날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상관위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면서 구천인의 옷자락을 와락 낚아챘다. 거지 아이의 너덜너덜한 옷자락이 뭉청 뜯겨져 나갔다. 거지 아이는 엉엉 울면서 대들었다.

"내 옷을 내놔요, 옷을 내놔요!"

그 사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듣기 싫어! 네가 우리 방주님의 술을 쏟았지만 널더러 술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까짓 넝마조각이야 찢어지면 어떠냐?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 볼래?"

옆의 사내가 매를 들려는데 상관위 방주가 말리더니, 몸을 낮추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거지 아이는 방주가 몸을 낮추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자 울음을 그치고 겁먹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지 아이는 입속말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구천인( 千 )이라고 해요."

상관위 방주가 유쾌하게 웃어젖히며 말했다.

"훌륭한 이름이로구나! 천인이라, 그럼 네 키가 아주 크겠구나, 허허허!"

거지 아이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내 키는 별로 안 커요. 난 두 번째로 크지요. 내 형은 구천장( 千丈)인데 나보다 더 커요. 내 여동생은 구천척( 千尺)인데 나보다 키가 작구요."

한쪽에서는 소씨 거렁뱅이를 비롯한 개방파 사람들이 상관위의 태도를 주시해 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상관위가 험악하게 군다면 소씨 거렁뱅이는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을 날려 그 사내의 팔뚝에 정확히 꽂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상관위 방주가 상냥한 기색으로 거지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소씨 거렁뱅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상관위 방주가 거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상관위다. 내 이름이 네 이름보다 못하구나."

그리고 방주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분부했다.

"가삼(賈三) 동생, 자네 맞은편 가게에 가서 옷을 좀 사 오게. 최고급으로 말이네."

가삼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방주님, 누구의 옷입니까? 방주님의 옷이 더러워져서 갈아입으시려고요?"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무슨 옷을 갈아입어? 이 아이, 아니 이 구 공자님의 옷을 보란 말이다. 네가 찢어서 볼썽사납게 되었잖아. 어서 가서 새 옷을 사다가 갈아입혀 줘라."

가삼은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방준의 명령이므로 더 묻지 못하고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그래, 형과 누이동생은 어디 있니?"

상관위가 아이에게 물었다.

그 말에 아이는 눈물을 홀리며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남의 집에서 삯일을……."

"남의 집이라니? 누구네 집에서?"

상관위의 기색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장대선(張大善)네 집에서 일해요. 형은 심부름을 하고 누이동생은 종으로 있어요."

"그 장대선이란 사람이 너희들에게 잘 대해 주더냐?"

상관위의 물음에 구천인이라는 아이는 대답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 형과 누이동생을 데려오면 어떨까?"

"안 돼요. 장대선이란 사람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우릴 때려죽일 거예요."

아이는 놀라서 부르짖다시피 했다.

"그 사람이 네 형에게 은자를 얼마나 주지?"

상관위가 물었다.

"은자는 안 주고 그냥 밥만 줘요."

어린아이의 대답에 상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형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하고 네 누이동생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해서 매달 은 30냥씩을 주면 어떨까?"

상관위의 말에 구천인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거죠?"

"내가 왜 널 놀리겠니?"

상관위는 그러면서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키 큰 사나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키 큰 사나이가 은자 한 정(錠)을 꺼냈다. 상관위는 그 은자를 손에 들고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50냥짜리 은괴란다. 가져가서 형과 누이동생에 보여 줘라. 그래도 그들이 안 오겠다고 하겠느냐?"

이렇게 큰 은자를 난생 처음 본 구천인은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더듬더듬 말했다.

"제……제가 마……말하면 꼭 올 거예요."

그러자 상관위는 옆사람에게 분부했다.

"자네가 장대선 씨에게 말해서 이 아이의 형과 누이동생을 우리방(幇)으로 데려오게."

지시를 받은 자는 즉시 일어서서 장대선을 만나러 갔다.

소씨 거렁뱅이의 얼굴에 의혹의 그림자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흥,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저러는 걸까? 자기가 뭐 보살(菩薩)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철장방의 방주 상관위가 어린아이에게 그토록 부드럽고 정답게 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장방' 하면 강호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강호의 백도(百道)나 흑도(黑道)를 막론하고 타매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관위는 이 악명 높은 철장방의 방주로 흉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상관위가 오늘 왜 이렇게

곰살스럽게 구는 것일까.

상관위가 아이를 자리에 앉히자 부하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주인 어디 있어? 당장 이리 와 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술집 주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철장방의 위엄을 알고 있는지 주인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굽신거렸다.

"무슨 일인지 그저 분부만 하십쇼, 방주 나으리."

"이 술단지에 독을 넣었지?"

그의 말에 술집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술집 주인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손을 내저었다.

"독이라니요? 아이고, 방주 나으리.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 술은 금방 꺼낸 상등술인뎁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방주 나으리. 나으리께선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도 전 간이 떨어집니다요."

그러자 상관위는 듣기 싫다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 아이와 부딪치는 바람에 술이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술에 독이 있는 줄도 모르고 고스란히 당할 뻔했다. 내가 이 술을 마시고 죽어 나자빠졌어야 네 속이 후련했을 텐데 말야!"

상관위는 손을 뻗쳐 술집 주인에게 일장을 갈기려 했다. 철장방 방주의 손바닥에 한 번만 맞아도 목숨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술집 주인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고정합쇼. 방주 나으리, 고정합쇼. 소인이 가서 영문을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쨌다는 거냐?"

상관위는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술에 독이 있다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말이냐? 내가 할 일이 없어 네 따위와 농담이나 하자는 건 줄 알아? 이 상관위가 네 놈에겐 그렇게 실없는 놈으로 보이느냐?"

상관위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지 눈을 부라리더니 단지를 번쩍 들어 일격을 가했다. 그러자 바닥은 순식간에 술천지가 되었고 술에서는 '칙칙' 하고 거품 끓는 소리가 났다. 독이 든 게 분명했다. 술집 주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할말을 잃은 듯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래도 잡아뗄 테냐?"

주인은 찍소리도 못한 채 술이 괸 바닥만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감히 우리 방주를 독주로 해치려 들다니! 이 놈이 대관절 담이 얼마나 크기에 이런 짓을 한 거야?"

상관위 옆에 있던 카 큰 사나이가 비아냥거리며 일어서더니 다짜고짜 술집 주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술집 주인은 변명하려고 정신을 가다듬었으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두서없이 더듬거리기만 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의심만 가중시켰다. 키 큰 사나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비수를 빼어 들고 소리쳤다.

"네 이 놈! 이래도 딴소리를 할 테냐? 누가 한 짓인지 당장 이실직고 하지 않으면 단칼에 네 놈 숨통을 끊어 버릴 테다."

이때 전체 청우루의 주인이 위층에서 들려 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어떤 하릴없는 놈들이 소란을 떠는가 싶어 돼지처럼 비대한 몸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이고, 야단났네. 강호의 패거리들을 건드려 놓았으니 이 주루는 이제 요절나게 생겼구나.'

그는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빌기 시작했다.

"손님, 제발 고정하시지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못마땅한 게 있으시면 분부만 내리십쇼. 당장 시정하겠습니다요. 그저 분부만 합쇼."

그러자 키 큰 사나이는 이층의 술집 주인은 떼밀어 버리고 이번엔 전체 주루의 주인인 뚱뚱보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래 네가 이 주루의 주인이렷다? 좋다. 그럼 너하고 시비를 가려 보자."

"이러지 맙쇼. 제발 이러지 맙쇼. 어떤 분부라도 기꺼이 시행하겠으니 제발 이 멱살은 좀 놔 줍쇼."

"이깟 정도로 웬 엄살이냐.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사실대로 말 해! 대체 어떤 놈의 짓이야?"

이때 별안간 누군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저것들 좀 보라지. 도저히 눈뜨고는 못 봐 주겠군. 이거야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 아닌가? 한낱 계명구도(鷄嗚狗盜) 무리에 지나지 않던 철장방이 하루아침에 득의양양 사람 대접을 받겠다는 거야 뭐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소씨 거렁뱅이였다. 그는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계속 떠들어댔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씨 거렁뱅이를 비롯하여 한쪽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개방의 사람들이었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그들이 개방의 보통 제자들이 아니라 수뇌 인물들임을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아보았다. 그 속에는 개방의 새로운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는 물론 근래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홍칠도 끼여 있었다.

홍칠이 말석에 앉아 있는 걸로 보아 소씨 거렁뱅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신분이 모두 홍칠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철장방 패거리들로서는 그들과 부딪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사실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을 발견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었다. 그랬던 것을 방주 상관위가 눌러앉히는 바람에 마지못해 주저앉았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얽혀 들고야 만 것이다.

'이거 야단났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상문성(喪門星) 소씨 거렁뱅이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큰 화를 당하는데.'

철장방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한 채 불안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철장방 방주인 상관위가 그냥 못 들은 척 물러설 수는 없었다.

"선배님, 우리 철장방을 너무 얕잡아 보시는 거 아닙니까?"

"철장방이 도대체 뭔데? 내 일도 돌볼 새가 없는데 철장방이고 뭐고 그런 건 알 것 없고, 이거나 좀 보라구. 내가 입은 이 옷 어떤가? 멋지지?"

그의 말에 상관위는 벨이 뒤틀리는 것을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공손하게 읍하였다.

"저희 눈이 멀지 않았다면 선배님은 소씨 나으리심에 틀림없으시지요?"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손을 활활 내저었다.

"선배님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선배님이냐? 그리고 무슨 놈의 나으리야? 난 거렁뱅이야! 소씨 거렁뱅이. 알겠지? 잘 기억해 둬라."

상관위는 소씨의 모욕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끝까지 눌러 참으며 은근히 응수했다.

"선배님, 저희들 일에 선배님께서 간섭하시는 걸 보니 이 독주와 선배님네 개방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군요?"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그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상관위 앞으로 걸어와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며 말했다.

"관련은 무슨 개떡 같은 관련! 우리 개방은 강호를 떠다니면서 독을 쓰고 암살이나 하는 비열한 짓은 절대 안 한다. 우린 매사에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지."

소씨 거렁뱅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듣자니 한 달 전에 너희들 철장방 사람들이 태호(太湖)에서 어선 열두 척을 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

상관위는 술에 독약을 넣은 게 바로 이자들이라고 단정했다.

"소씨 거렁뱅이 나으리, 우리 철장방과 겨루어 보려고 찾아오신 듯하온데?"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냉큼 탁자 위에 뛰어올라 쪼그리고 앉더니 아홉 명의 철장방을 내려다보았다.

"네 말이 맞았다. 한번 겨루어 볼 생각인데 어떠냐? 이 거렁뱅이가 요즘 심기가 좋지 못하거든. 먹고 입고 자는 것까지 죄 남한테 간섭을 받으려니 심기가 편할 수가 있겠어? 아무래도 한바탕 운동을 해야 심기가 풀어질 성싶구먼. 상관위, 자네도 방주 나도 방주인데 우리 둘이 한판 붙어 볼까? 어때?"

"그럼 그러지요."

상관위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상관위의 수하들이 일제히 달려들 기세가 되었다. 상관위는 얼른 제지했다. 개방의 고수들이 한 무리 앉아 있는데 그들 역시 무리로 달려들 경우 철장방이 패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빨리 속으로 생각했다.

'듣자니 소씨 거렁뱅이는 입은 칼날 같아도 마음은 무르다고 하니, 일 대 일로 싸우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싸우다가 내가 진다 해도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한편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철장방 방주 상관위가 감히 천하에서 제일 큰 방(幇)인 개방의 방주 소씨 거렁뱅이와 겨루려 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필시 초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였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 있던 소씨 거렁뱅이는 뜻밖에도 상관위가 도전적인 자세로 나오자 이 기회에 단단히 혼찌검을 내주자고 작정했다.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탁자에서 뛰어내렸다.

"강남 무림에 쌍어(雙魚), 음검(陰劍), 철장(鐵掌), 이 세 패거리가 있다는 건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다. 내가 철장방 두목을 찾아 한번 속시 원하게 몸 좀 풀어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으니 잘됐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일랑 말아라."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마치 판소리나 하듯 목청을 빼며 사설을 엮어 내려갔다.

거렁뱅이 신세 한심타고 사람마다 비웃지만

세상일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타령하며 개 쫓으며 남들은 문전걸식하지만

유독 이 소씨 거렁뱅이만은 그뿐만이 아니네.

강산도 쉽게 변한다는 강산이개(江山易改)!

강산이개 요리만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이름이 났더라, 천하에 이름이 났어.

소씨 거렁뱅이는 일순 사설을 멈추고 술잔을 집어 들더니 "얏!"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손을 모로 세워 칼로 내려찍듯 상관위를 향해 날렸다. 상관위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 소리를 지르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철장방은 사문방파(邪門幇派)의 한 갈래로, 방주는 역대를 내려오면서 독특한 철장 무공을 익히게 되어 있다. 이 무공은 오로지 방주에게만 전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이 독특한 철장 무공은 반드시 한 단계 한 단계 순서와 절차를 밟아 가며 익혀야 한다. 4단까지 익히면 돌과 나무를 단번에 빠갤 수가 있다. 5단에 이르러 철장 한 장(掌)을 내리치면 돌과 나무가 겉은 멀쩡한

것 같지만 속은 그렇지 않아, 나무는 그 속이 톱밥처럼 변하고 돌은 절구질이나 당한 듯 가루가 된다. 그리고 6단이나 7단에 이르면 철장이 미치는 힘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치어 사람을 조금만 스쳐도 피가 말라 즉사한다. 철장방 방주 상관위의 철장은 6단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선지 그가 공격 태세를 취하는 순간 그에게선 범상치 않은 날카로운 기(氣)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씨 거렁뱅이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너털웃음을 웃으며 떠들어댔다.

"너한테는 네 장법(掌法)이 있고 나한테는 내 장법이 있다. 네 장법이 강철 같은 철장법이라면 내 장법은 두부처럼 무른 두부장법이지. 철장법이 이길지 두부장법이 이길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일이고!"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손바닥을 쳐들어 공격 태세를 취하였다.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을 본 상관위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법을 쓸 때 먼저 상삼로(上三路)로부터 손을 쓴다. 사람의 손과 팔은 상체와 통해 있기 때문에 먼저 가슴 앞, 옆구리, 허리로부터 손이 나와야 손 쓰기가 쉬운 법이다. 그런데 이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은 희한하게도 머리께에서 손을 내어 몸 앞으로 가져오는데 이렇듯 둔한 동작으로 도대체 어떻게 힘

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이 장법은 개방 방주들이 역대로 내려오면서 물려받은 개방 최상의 장법,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다. 소씨 거렁뱅이의 일장이 나가자 바람이 씽 일며 그 장력에 스친 물건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 깜짝할 새에 손바닥을 옆구리로 쑥 내밀었다. 그러자 상관위 뒤에 있던 탁자가 풍비박산이 난 것은 물론이고, 철장방 네댓 명도 그 장풍(掌風)에 스쳐 얼굴이 아리고 가슴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주 대단한 장법이었다.

이 장법은 강룡십팔장 중의 한 가지 술수인 항룡유회(亢龍有悔)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가볍게 일장을 내쳤을 뿐인데도 상관위는 그 엄청난 위력에 비틀비틀 뒷걸음질치다가 하마터면 거꾸러질 뻔하며 사색이 되었다.

'정말 보통 장력이 아니구나. 저 소씨 거렁뱅이가 강룡십팔장에 조금만 더 힘을 넣으면 목숨이 붙어 나지 않겠어.'

상관위는 순간 주춤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에게 항복한다면 강호의 조롱과 모욕을 장차 어떻게 견디랴 싶어 그대로는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술집에는 개방의 무리들과 철장방 일행 외에도 주루 주인과 열세 살 난 소년 하나가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구천인이라는 이 총명한 아이는 조금 아까 자기에게 무척 다정하게 대해 주던 상관위가 행여 싸움에 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상관위는 그에게 선뜻 은자 50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 구천장, 누이동생 구

천적이 와서 철장방 일을 거들어 주면 밥도 먹여 주고 매달 30냥씩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니 소년에게 상관위는 귀인인 셈이었다. 그에 반해 그와 싸우는 소씨 거렁뱅이는 나쁜 놈으로 보였다. 소년은 상관위가 일장에 거렁뱅이 놈을 쳐죽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위가 반드시 이길 것이며, 그렇게 되기만 하면 자기들 삼남매는 당장에 철장방에

가담하리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항룡유회로 인해 타격을 받은 상관위는 가슴이 뻐근해지며 숨결이 가빠옴을 느꼈다. 그는 얼른 숨을 조절하여 다시 철장법을 썼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빙그르 돌리며 뒤로 출장(出掌)하여 두 번째 술수인 견룡재전(見龍在田)을 썼다. 그런데 이 술수가 어찌나 맹렬한 힘을 가졌던지, 힘을 다한 게 아니었는데도 상관위는 다시금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뒤통수를 찧고

말았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철장방 패거리들은 모두 잔뜩 긴장해서 가슴을 졸이고 있는 반면 개방 패거리들은 도리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홍칠은 이쪽 싸움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리고 말석에 앉아서 목을 젖히고 술만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여덟 사람도 소씨 거렁뱅이 싸움은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주거니 받거니 떠들며 술만 퍼마셨다.

그런데 철장방 패거리들은 갈수록 긴장하여 병기들을 움켜쥐고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둘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일단 상관위가 위험하다 싶으면 그중 여섯이 동시에 덤벼들 태세였다.

"상관위, 조심해라!"

소씨 거렁뱅이는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상관위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다시금 일장을 갈겼다. 손바닥을 잽싸게 뒤집으며 갈기는 이 용전어야(龍戰於野)라는 장법은 신묘하기 그지없어서 상관위의 몸은 맥없이 붕 떠올라 저만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상관위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더러운 거렁뱅이! 날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 꼴을 본 철장방 패거리들은 결국 참다못해 병기를 들고 노호처럼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칼은 그의 목으로 날아들고 검은 그의 가슴을 찌르려 하며 독사 같은 채찍은 그의 목덜미를 휘감으려 했다. 어린 구천인마저 일어나서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라고 외쳐 댔다.

한동안 툭탁거리는 소리와 칼날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술집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채찍은 맥없이 허공을 가르고 칼은 마룻바닥에 푹 꽂히고 한 자루의 장검은 탁자 위로 날아가 박혔다. 모든 반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친 듯이 덤벼들던 철장방 패거리들은 그만 기가 꺾여 소씨 거렁뱅이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침묵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며 호통을 쳤다.

"네 이 놈 상관위, 그래도 너가 명색이 방주라는 체면을 봐서 더는 손을 쓰지 않겠다만, 너희들이 강남에서 한 악행에 대해서는 이제 양 장로(長老)께서 낱낱이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러자 술좌석에서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금의파의 개방 장로가 다가왔다.

"철장방이 이 이태 동안 해 놓은 업적이 실로 적지 않으렷다? 나도 눈이 있어 견식을 좀 넓혔는데, 그간 적어 놓은 행적들을 방주님께 좀 읽어 드릴까 한다."

그는 퉁퉁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품에서 양피지 몇 장을 꺼내 들고는 뒤적이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년 5월 초닷샛날, 설류장(雪柳庄) 노소 백삼 명을 죽이고 금과 은을 도합 3만 냥 빼앗아 갔다. 작년 가을엔 영웅 서 노인의 환갑에 뛰어들어 서른일곱 명을 독살시키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납치해 갔다. 작년 춘월(春月) 18일엔 서역 대사막의 백타산장 사람들을 셋이나 죽이고 그 시체를 황야에 내던졌다. 지난달 초아흐렛날, 철장방 방주 상관위는 처가쪽 사람을 일곱이나 죽이고 집을

불살라 죄증을 없애고는 그 살인 죄명을 우리 개방에게 덮어씌웠다."

근거가 분명한 죄증 앞에서 아연실색한 천장방 패거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죄상을 읽어 가는 양 장로의 음성은 염라부 지옥의 판관 목소리처럼 차디찼다. 양 장로는 잠깐 읽던 것을 멈추고는 칼날 같은 눈길로 철장방 패거리들을 쏘아보았다.

"계속해서 읽어 볼까?"

상관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장탄식을 했다.

"이기면 왕, 지면 역적으로 몰리기 마련, 진 놈한테 온갖 죄를 덮어씌우기야 간단한 일 아니겠소. 내가 한 일만큼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소."

죄를 시인하는 건지 부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소리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탁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손 장로, 상관위가 이렇듯 많은 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에서 규율을 위반한 제자를 다스리듯 그 처벌 여하를 집법장로(執法長老)에게 물었다. 집법장로는 이 물음이 타당치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방주의 말이니 그 자리에서 탓할 수 도 없었다. 집법장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 생각으로 저 사람은 극악무도하기가 이를 데 없어 개방의 율(律)에 따라 먼저 방에서 축출한 다음 죽여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손 장로는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 말 역시 스스로도 어색하고 적절하지 않게 여겨졌다. 상관위는 철장방의 방주다. 그런데 개방의 제자도 아닌 그를 '먼저 방에서 축출한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 소린가? 그러나 어쨌든 개방의 율에 따라 '죽여 마땅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그는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소꺼 거렁뱅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렇지, 죽여 마땅하지, 마땅하고말고. 그렇다면 죽게 해 줘야지."

소씨 거렁뱅이는 손짓을 했다.

개방의 율에 의하면 방주의 말은 곧 법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소씨 거렁뱅이의 이 말 한마디가 철장방 방주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개방이 예의지방(禮儀之幇)이라면 도리를 지켜야 하지 않는가? 철장방이 잔인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백주에 이 주루에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송의 형률에는 형장, 유배, 교살 같은 것이 있고, 가장 엄중한 것으로 는 음짐(飮塢 ; 짐주를 먹여 독살시키는 것), 분시(分尸), 참수(

斬首) 등도 있지만 그것은 관이 판결할 일이지 일개 개방 방주가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철장방의 한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관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철장방의 단검(斷劍) 질의(那義), 용편(龍鞭) 장립(章立), 소유신(小游神) 호산아(虎傘兒), 곡소신(哭笑神) 정씨 형제, 박도(薄刀) 서명(緖明)은 방주님을 대신하여 죽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는 개방 쪽을 향해 어깨를 펴고 돌아서며 늠름하게 말했다.

"개방 사람들은 들으시오. 저희 철장방이 오늘 여기서 패하여 방주께선 중상을 입었지만, 만일 그대들이 저희 방주를 해치려고 한다면 우리 여섯이 먼저 자결하겠소."

그는 칼집에서 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 칼은 절반 동강이 난 단검이었다. 그는 그 검을 자기의 목에다 가져다 대며 소리쳤다.

"저희 방주를 해치지 마시오. 저희 방주에게 욕을 보임은 저희에게 욕 보이는 것보다 몇 배 더 참을 수 없소."

그러자 다른 다섯 명도 병기를 들어 일제히 자결할 태세를 취하였다.

원래 개방 사람들은 철장방을 대단히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 같은 사악한 사문파엔 정직한 인물도 없고 용감하고 의로운 인물은 더욱 없을 것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 여섯 사람의 거동을 보자 개방 사람들은 실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 역시 뜻하지 않은 상황에 난감해져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젠장, 이렇게 되면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잖아. 놈은 죽지 않겠다니 못 봐주겠고, 죽지 않아도 되는 놈들이 죽겠다니 답답한 일 아닌가. 이거야말로 내가 만드는 요리 강산이개나 다를 바가 없군 그래."

사람들은 '강산이 변하기 쉽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홍안루 요리사로 있을 적에 이 괴상한 이름을 가진 요리로 명성을 날렸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실로 답답했다. 철장방 패거리 여섯이 정말로 자살하여 그 소문이 퍼진다면 강호에서 개방의 체면은 여지없이 깎여 내릴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는 상관위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소년 구천인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구천인은 얼른 튕겨 일어나 상관위에게로 달려갔다.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세요, 어르신. 죽으면 안 돼요."

그는 엉엉 울면서 상관위를 흔들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르신처럼 좋으신 분은 뵙지 못 했어요. 날 데리고 가겠다고 했잖아요? 우리 형과 누이동생에게 일자리도 주고 매달 은자 30냥빅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착한 어르신,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착한 어르신……."

애간장을 끊는 듯한 아이의 통곡 소리가 술집 안에 가득 찼다. 이를 지켜 보던 소씨 거렁뱅이와 개방의 다른 장로들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아려옴을 느꼈다. 어린것의 울음 때문에도 상관위에게 손을 대기는 어렵게 돼 버렸다.

상관위의 몸에 엎드려 통곡하는 아이를 끌어내고서까지 상관위를 죽인다는 것은 강호의 호걸이라 자처하는 그들로서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가슴이 미어지게 통곡하는 아이를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손 장로가 나서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얘, 울지 말고 일어나거라.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은 네가 이렇게 통곡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이 어르신이 왜 나빠요? 나쁜 사람은 당신들이에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 들며 아이가 항의했다.

"네가 잘 몰라서 이러는 거야. 저 사람은 사람을 수 없이 죽였어.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 때문에 그 가족들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지. 그런데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죽여 마땅한 사람이다."

"오히려 당신들을 죽여야 해요. 당신이 죽어야 해요!"

어린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를 손가락질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코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이냐?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 그래. 난 일찍부터 죽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죽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저 상관위처럼 악한 짓을 아직 덜한 탓이지. 알아듣겠냐?"

"이 어르신이 당신들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 주루에 올라와 술만 마셨는데. 그러다가 술에 독이 있어 물어 본 것뿐인데 무엇이 나빠요? 당신들은 이 어르신을 나쁘다지만 내 보기엔 당신들이 나빠요. 당신이 먼저 싸움을 걸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천하의 악인이에요."

구천인은 생각할 수록 악이 받치는지 다짜고짜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들더니 필사적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줄곧 한쪽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홍칠이 불쑥 한마디 했다.

"사부님, 그만 하고 가십시다!"

"뭐, 가자고?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자식, 네 생각이 그렇다면 가야지. 가자는 데 가야지."

소씨 거렁뱅이는 말을 마치자 홍칠과 더불어 몸을 솟구치는가 싶더니 창 밖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멀어져 갔다.

소씨 거렁뱅이가 사라지자 개방의 장로들도 금의파, 오의파 할 것 없이 전부 누각을 내려와 각기 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상관위는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기쁨을 감추며 부하에게 물었다.

"개방 사람들이…… 이젠…… 이젠 다 갔느냐?"

"다 갔습니다. 이 아이 덕입니다."

단검 질의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상관위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얘야, 넌 벌써 두 번째로 날 살려 주는구나."

자초지종을 들은 상관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아이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었다. 아이는 말없이 상관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옛 기억을 더듬던 구천인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 자리에서 이 상관위를 만나지 못했던들 자기는 한낱 거지로 떠돌며 사람들에게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았으리라. 그날의 치명타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사부 상관위를 안타깜고 경모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벌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말없이 은전 한 잎을 내주며 어서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놀란 아이가 잠시 멀뚱하게 서 있더니 상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연신 굽혀 대며 황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그럼 이젠 떠나자. 여긴 우리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상관위도 쓰라린 기억이 떠오르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체구가 큰 구천인이 힐끗 소씨 거렁뱅이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마차를 불러 타고 완전히 그곳을 떠나자 구양 형제와 모용쟁은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잠자코 술만 마셨다. 구양적이 아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동생,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은 정말 천하에 드문 장법이라더군. 절세신공(絶世神功)이라던데? 개방의 한다 하는 인물들의 무공을 보지 못한 게 아쉽군."

셋은 개방과 철장방이 한판 대결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긴장감이 잠시 맴돌았을 뿐 아무 일도 없듯 철장방은 서둘러 빠져 나가고 그들이 가고 나자 개방의 무리들은 조금 전 그 논의로 다시 열을 올렸다.

"저와 저 끝에 앉은 홍칠이 함께 황궁 안의 어선방에 간 적이 있는데, 어선방 음식 맛이 정말 별미더군요. 그 원앙오진회(鴛鴦五珍贈)라는 요리는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기막혔어요. 천상일미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더라구요. 지금도 그 맛을 생각하면 침이 넘어가요. 형님, 제가 보기에 개방엔 대단한 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동생, 홍칠이가 소씨 거렁뱅이의 제자라고 했지?"

"글쎄 그건 저도 잘 몰라요. 황궁 어선방에서 홍칠이와 황궁 다섯 요리사들이 싸울 때 그런 말을 합디다만, 정말로 홍칠이 소씨 거렁뱅이의 제자인지는 모르겠는데요? 그와 소씨 거렁뱅이가 허물없이 지내며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해대는 걸 보면 사제지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만 갖고야 알 수 있나."

구양적은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동생이 나와 내 스승 간의 일을 알면 놀라겠구나' 생각했다. 구양적의 스승도 다정다감한 사람이어서 속세의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오자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록 남방의 대도시처럼 번화하지는 않아도 변량도 큰 도시라서 사막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모용쟁은 여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 이를테면 수놓는 실이나 분함 같은 것들을 사기 위해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런 물건들을 사게 되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구양 형제한테도 살갑게 굴었다.

구양적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 모용쟁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없이 들어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모용쟁도 구양적에 대한 태도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모용쟁과 형 구양적의 태도를 살피던 구양봉은 이 기회에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침 훌륭한 묘안이 떠올랐다. 그는 형에게 선비들이 모여 있는 국자감(國字監)에 가 보자고 제의했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구양적과 모용쟁은 분명 그런 곳에 가서 뭘 하겠느냐며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역시 구양봉의 짐작은 적중했다.

구양적은 동생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정 가고 싶으면 혼자 가거라."

 

 

 

 

제14장 북국의 행로

구양봉이 변량 외성에 이르러 보니 성안에는 저자들이 많았고 놀음하는 장소와 점 보는 곳도 있었다. 구양봉은 구경삼아 휘휘 둘러 보며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한 말라깽이 점쟁이 앞에 이르렀다.

점쟁이 앞에는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왕망이 한(漢)을 찬탈하고 찍어 낸 동전인 신전(新錢) 세 닢이 놓여 있었다. 손님이 없어 한가롭게 앉아 있는 점쟁이의 손에는 죽통이 하나 들려 있고 그 죽통 안에는 인간의 생사와 길흉을 점치는 죽첨(竹潛), 즉 대꼬챙이들이 담겨 있었다.

구양봉은 심심하던 차에 내일 운수나 한번 짚어 볼 셈으로 점쟁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점쟁이가 내건 주련이 실로 이상했다. 다른 점쟁이들이 내거는 주련은 모두 듣기 좋은 말들이다. 예를 들면, '신기묘산(神機妙算)은 강남 천하에서 으뜸이요, 금심수구(錦心銹口)로는 천하의 미래를 짚어 보인다'라든가 '철구(鐵口)로는 천하를 평정하고 묘산(妙算)으로는 재앙을 해소한

다'라든가 하는 미사여구들을 내거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점쟁이는 달랐다. 주련의 내용도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가 무슨 놈의 주련인지 상련(上聯)은 완전한데 하련(下聯)은 절반밖에 없었다. 상련은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上飛鳳凰, 鳳凰乘風鳳凰力)'인데 하련은 오직 '땅에서 기는 두꺼비…… (地上爬蛤 ……)'뿐 그 아래 절반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주련을 내 걸었을까…….'

구양봉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봉황과 땅 위의 두꺼비를 대조하는 것부터가 이 점쟁이의 학식이 얼마나 얕은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정말 무식한 점쟁이로군.'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자 점쟁이가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손님께선 뜻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양봉은 순간 흠칫하였으나 점을 보려는가 어쩌려는가를 묻는다고 생각하고 되는대로 대답했다.

"점칠 뜻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소?"

"자고로 뜻이 있으면 대도(大道)가 성사되는 법이오, 뜻이 없으면 피안에 당도한다 해도 수포가 되지요."

점쟁이는 허허 웃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승벽이 강한 구양봉으로 하여금 그대로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네가 나한테 유학 선생(儒學先生)을 자처하며 입씨름을 해 보자는 거냐? 나 구양봉도 유가(儒家) 선비이다. 불선(佛禪)을 논함도 유가 학설을 논함도 우리 송의 대소 유학 선비들의 소임이거늘 감히 나와 겨루려 들다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자.'

구양봉은 점쟁이에게 읍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자고로 뭔가를 달성하고 말겠다는 욕심에 일심전력 산으로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불상도 못 찾아 참배도 못 드리고 돌아 나오는 헛고생만 하는 수가 많지만, 반대로 무심히 산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정과(正果)를 얻어 진리를 깨닫는 수가 있지요."

뜻밖의 말에 놀란 점쟁이는 잠시 구양봉을 가만 올려다보다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선생께선 무슨 일로 여길 오셨습니까?"

"하릴없이 오고 하릴없이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겠소?"

구양봉은 점쟁이가 불선을 담론하자는 줄로 알고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이 말에는 자기가 형 구양적처럼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중원에 온 것이 아니라 구경삼아 왔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선생의 손을 좀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구양봉이 손을 내밀어 보이자 점쟁이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점괘도 잘 보지만 의술에도 능합니다. 선생의 골격을 보니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 원하신다면 점괘를 보아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무방하다는 생각에 구양봉은 손을 내밀어 맥부터 짚어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한참이나 걸려서야 떨리는 손으로 겨우 구양봉의 맥을 짚어 냈다. 그는 한동안 맥을 짚고 있더니 갑자기 무척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선……선생은 워낙 무공은 모르시는군요."

구양봉은 은근히 놀랐다.

'아니, 그러고 보니 꽤나 능한 점쟁이로군. 내가 무공에 익숙치 않다는 걸 진맥 한 번에 알아 맞추다니.'

그러나 구양봉은 자기가 무공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스스로 비꼬듯 말했다.

"내가 무공을 몰라 스스로 화날 때가 많은데 당신은 그 사실에 오히려 기뻐하다니. 그래 이것도 무심과 유심의 구별이란 말이오?"

그러자 점쟁이는 빙긋 웃었다.

"선생의 문장이 대단히 능하지 않고서야 이렇듯 무공을 가볍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이 말에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 여기 주련 한 쌍이 있는데 재간이 없어 절반은 놔 두고 있습지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절반을 맞추어 주느라고 하였지만 어느 하나도 소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놔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번 도와주시 지 않으시렵니까?"

점쟁이의 청이었다.

'그 잘난 두꺼비 주련 말이지?'

구양봉은 속으로 뇌까리다가 엉터리 주련을 맞추어 내어 점쟁이를 놀려먹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선뜻 두꺼비 주련을 맞추겠노라 승낙했다.

"부탁이 그러하시다면 내가 한번 맞추어 보지요."

구양봉이 웃으며 말하자 점쟁이는 잠시 묵묵히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제 짐작대로 문장이 대단하신 분임에 틀림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호의로 선생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주련이 얼핏 봐선 시시해 보이나 아직까지 자연스럽고도 운치 있게 맞춰 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도 너무 얕잡아 보시진 마십시오."

그러나 구양봉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 같소. 이렇게 짧은 주련을 못 맞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 점쟁이는 비로소 기뻐하는 기색을 뚜렷이 보이며 구양봉을 재촉했다.

"이제야 제대로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선생의 글재간을 믿겠습니다. 제발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어 주십시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는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소인이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여기에 나와 앉아 바람에 낯가죽이 트고 빗줄기에 온몸을 적시는 고생을 하던 참입니다. 제발 소인의 이 고초를 헤아려 아무쪼록 선생의 천하 문장을 보여 주십시오."

구양봉은 의아한 눈길로 점쟁이를 바라보았다.

'이 잘난 주련을 가지고 날마다 여기서 기다려 왔다니? 이 중원에 한다 하는 유생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 주련 하나 맞출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아마 모두들 이 점쟁이를 곯려 주느라고 아무렇게나 해 주다 보니 그리 된 것이겠지. 이까짓 게 무슨 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구양봉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말씀을 들어 보니 나도 그리 자신이 서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 한번 맞추어 보지요. 잘 맞추지 못하더라도 웃지는 마십시오. 물론 괜찮게 된 성싶으면 웃음 한 번으로 흘려 보내도 좋겠지만."

그러자 점쟁이는 웃으며 읍을 하고 어서 맞출 것을 권했다.

구양봉은 즉시 상련으로부터 시작하여 단숨에 내리 읊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天上飛鳳凰)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鳳凰乘風鳳凰力)

땅 위를 기는 두꺼비(地上爬蛤 )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蛤 獨行蛤 功).

주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쟁이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서며 구양봉의 옷자락을 텁석 부여잡았다.

"멋지네요. 참 멋집니다.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참 멋들어지게 맞추셨습니다!"

구양봉은 이 사람이 그 잘난 주련을 갖고 왜 이다지도 기뻐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점쟁이는 갑자기 탁자 위에 놓았던 죽통을 와락 거머쥐더니 땅바닥에 냅다 던져 버렸다.

"이거 경사입니다, 경사예요. 선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학수고대하던 선생이 과연 오셨구려.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 경사겠습니까……?"

그는 너스레를 떨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점치는 탁자까지 일장에 박살을 내고 또 그 왕망이 한을 찬탈하였을 때 찍은 신전 세 닢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다.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과연 멋들어집니다."

점쟁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비 오듯 흘려 댔다.

구양봉은 얼떨떨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자기가 맞춘 주련이 제아무리 신묘하다 해도 전렇게까지 미친 듯이 날뛸 수가 있나 싶었다. 점쟁이의 하는 양을 보면, 오로지 주련을 제대로 맞추는 사람만 나타나면 점치는 일은 그 즉시 집어치울 작정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련을 한 쌍 맞춘 데 불과한데 어찌 그리 기뻐하시오?"

구양봉의 물음에 점쟁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웃음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아심하우(我心何憂)는 천지척척(天之戚戚)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은 하늘만이 안다는 말이다. 그는 이어서 무엇을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구양봉에게 읍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듯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선생과 더불어 어디 가서 술 한잔 했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공이 없이는 녹을 받지 말라 했는데, 초면에 그런 폐를 끼칠 수가 있겠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일견이 여구하다는 말도 있는데 폐라니요? 다 그렇게 해서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점쟁이가 점치는 도구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간청하다시피 하는 데다가 어느새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서는 바람에 구양봉은 점쟁이가 끄는 대로 따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작은 성을 나와 주기 (酒旗)가 펄럭이는 한 주점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주기를 보던 구양봉은 소스라쳐 놀랐다. 주기의 글자는 술 주(酒)자가 아니라 독(毒)자였다. 주점이 분명한데 독자를 써 놓다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술꾼들을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점 안의 정경이었다. 주점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벌겋게 된 눈을 게슴츠레 뜨고 구양봉과 점쟁이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술집 주인이 점쟁이를 보고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둘째 동생이 이 시간에 술 마시러 오는 걸 보니 일이 성공한 모양이네그려?"

그러자 점쟁이는 희색이 만면하여 떠들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성공하다마다요. 3년을 내처 기다리다가 끝내 이렇게 만났단 말이오. 보시오, 이 공자님을 보시오. 이 공자님이 내가 날이면 날마다 풍우를 무릅쓰고 앉아 학수고대하던, 3년이나 기다리던 그분이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양봉에게 쏠렸다.

구양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쟁이의 말에 설령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학수고대하였단 말이 거짓은 아닌 성싶었다. 그렇다면 구양봉을 3년이나 기다렸다는 말이 되는데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잘난 두꺼비 주련을 맞출 사람을 3년씩이나 기다릴 만한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멋진 수염을 가진 한 장한(壯漢)이 구양봉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 당신이 그 주련을 맞췄단 말인가?"

적의를 품은 장한의 태도에 구양봉은 더욱 놀랐다. 기껏해야 주련을 맞춰 준 일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걸까?

구양봉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자 장한이 그에게로 바싹 다가오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형장께서 그렇듯 재간이 좋으시다니 어디 한번 형장의 수단이 어떠한지를 겨뤄 봅시다."

그는 당장 구양봉을 잡아당기려 했다. 구양봉은 이 사내가 왜 이러는가 싶어 얼른 뒤로 물러섰으나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괴상한 동작을 하며 구양봉의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구양봉은 비록 무공이 익숙치 못해도 상대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술법은 극히 교묘하여 형님의 스승도 이보다 뛰어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큰 화

를 당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기가 올라 나 같은 걸 죽이려고 든다면 그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안 구양봉은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그가 무슨 짓을 하든지 참고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구양봉이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자 장한은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손에 한껏 힘을 넣었다. 장한에게 붙잡힌 손이 바스러지는 듯 아파 왔으나 구양봉은 비명 소리도 내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앙다물었다.

장한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구양봉이 어떤 특출한 무공을 갖고 있어서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점점 힘을 넣다가 어째선지 구양봉이 전혀 내공을 쓰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정말 천하에 없는 고수인지라 엄청난 정력을 갖고 있어서 나 같은 건 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너무 주제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손에 계속 힘을 넣으면서 보니 상대방은 말없이 비지땀만 흘릴 뿐 특별한 무공은 없는 것 같았다. 장한은 마음이 놓여 구양봉을 골탕먹이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애걸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동정을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는 한 방에 장한을 쳐죽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원통할 뿐이었다.

장한은 자기의 이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술법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반도 안 되는 힘만 써도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구양봉은 그러지 않는 것이 화가 났다. 그는 어떻게든 구양봉이 애걸복걸 무릎을 꿇게 하겠다고 작심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써도 구양봉은 여전했다. 장한은 놀라는 한편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 인간에게 정말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이 분근착골의 술법을 견뎌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왜 묵묵히 참고 견디기만 하면서 손은 쓰지 않는단 말인가.

구양봉이 고초를 겪는 동안 점쟁이는 한쪽 탁자에 앉아 술 한 주전자를 청해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구양봉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하는 것을 보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무공을 지니고 계시면 마음대로 쳐 갈겨 보시오. 저 사람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리다."

구양봉은 그의 괘씸한 태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원래 네 놈들의 그 두꺼비 주련은 나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구나. 여기로 나를 데리고 온 것도 작당하여 나를 욕보이자는 것이었고. 내가 너희들과 도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 짓들이냐?'

그가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는데 장한의 손에 다시금 힘이 가해졌다. 구양봉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더 이상은 아픔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그가 얼음 동굴에 있을 때 형님의 스승이 읊어 주던 시가 생각났다. 속을 찢어 발기는 듯한 아픔을 덜어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 무심코 그 시가 흘러 나왔다.

얼음같이 찬 세상

세상 인심이 이러하도다

세상이 이런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세상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랴.

이 시는 당시 구양봉이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면서 형님의 스승 백면라살에게 추위를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있겠는가고 물었을 때 그가 읊어 준 시였다.

지금 구양봉이 그 시를 읊은 것은 생각을 딴 데로 돌려서라도 어떻게든 고통을 견뎌 보자는 행동에 불과했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스라쳐 놀랐다. 장한의 분근착골 술법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법이 구양봉에게는 먹혀 드는 것 같지 않더니 급기야 난데없이 시를 읊어 대지 않는가. 뜻하지 않은 구양봉의 태도에 장한마저 흠칫하여 손을 놓았다.

'그렇다. 대도(大道)를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고통 앞에서 이렇듯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제히 구양봉에 대한 존경심으로 숙연해졌다.

"둘째 동생, 정말 바로 모셔 왔네."

술집 주인은 점쟁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구양봉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장한도 웃으며 구양봉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떨떨해진 구양봉은 얼결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한은 아예 덜컥 무릎을 꿇더니 머리로 바닥을 찧을 듯 넙죽 절까지 한 뒤 희색이 만면하여 일어서는 게 아닌가.

한동안 주점 안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로 술렁였다. 술집 주인도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소리쳤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자,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사람들인 양 집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어린애들처럼 기뻐 날뛰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자꾸만 주절대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 선생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대호(大號)는 무엇이며 어디 분이십니까?"

점쟁이가 물었다.

'반나절이나 실랑이질을 하고서 이제 통성명을 하자고?'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

"서역 사람이오. 이름은 봉으로 구양씨인데 형님과 더불어 강남 구경을 왔소."

물론 형님이 중원을 찾아온 진정한 까닭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북국 사람들입니다. 모두 형제나 다름없죠.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점쟁이가 자기 패거리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에게 욕을 보이던 장한은 석초수(石楚秀), 점쟁이는 속문성(續文成), 나이 지긋한 노인은 제갈정(諸葛征), 그리고 또 장비같이 험하게 생긴 사나이가 둘, 이렇게 모두 다섯이었다. 구양봉은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건성으로 흘려 들었다. 다섯 명의 이름을 일시에 모두 기억할 수도 없었거니와,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인데 그 이

름을 기억하여 무얼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이러다 헤어지면 모두들 구름같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기약 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소개가 끝나고 점쟁이 속문성이 말했다.

"저희들은 여기서 꼬박 3년이나 기다렸지요. 우리 집 주인님께서 꼭 이 북지(北地) 변경( 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기다리면 꼭 오신다고 말입니다. 과연 저희 주인님의 말씀대로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구양 선생께선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응낙하시지 않더라도 저희들은 반드시 선생을 저희 주인님께 모셔 갈 것입니다."

순간 구양봉은 형님 구양적과 모용쟁을 떠올리고 초조해졌다. 설령 동행이 없는 혼자 몸이라 해도 생전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을 따라 그 주인을 만나러 갈 이유가 없었다. 구양봉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나는 북국에 갈 수가 없소."

속문성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공손하게 대꾸했다.

"구양 선생 뜻이 그러시다 해도 저희들은 선생을 북국으로 모셔갈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겠다는데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문성은 구양봉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습지요. 구양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심이 상책인데, 그러면 저희들이 사람을 보내어 구양 선생의 형님에게 알린 뒤에 이곳을 떠나 북국으로 가는 것이고, 중책은 저희들이 하는 수 없이 선생을 협박해서라도 모셔 가는 것인데 그러면 가는 동안 선생님께 자유를 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 하책은, 선생께서 끝까지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신다면 우리는 부득

불 선생의 형님을 죽이고 선생을 마취시켜서라도 북국엘 모셔 가는 것입니다."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다.

'이자들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우리 형님 구양적도 나처럼 아무렇게나 주물러도 될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줄 알았다간 큰코 다치지. 우리 형님이 서역 대사막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고수인 줄도 모르고. 하긴 내 형님이 고수라는 걸 네놈들이 알 리가 없지.'.

구양봉은 이자들을 형님한테 데리고 가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들 중에 가장 힘을 쓴다는 놈이 장한이라면 아마도 그의 분근착골 술법이 이자들 중에선 가장 위력을 가진 것일 터였다. 그것은 형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놈들이야 상대나 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선선히 말했다.

"정 그렇다면 좋소. 우필 형님한테 먼저 가 봅시다. 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신들을 따라 북국으로 가겠소."

그러자 모두들 기뻐하며 구양봉을 따라 구양적을 만나러 떠났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객점에서 구양봉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국자감인지 어딘지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도록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때맞춰 구양봉이 성큼 객점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친구들 몇을 데리고 왔습니다."

'친구라니? 변경에 친구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데.'

구양적은 납득이 안 가는 얼굴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뭣 하는 사람들이지?'

불청객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구양적은 은근히 놀랐다. 그들은 모두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무림의 인물들이었다. 맨 앞에 선 속문성도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거니와, 그 뒤에 있는 장한 석초수도 한의 맹장 번쾌(樊 )처럼 생겼고, 깡마른 영감도 무공의 정도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구양봉은 형을 만나자 자기 일을 말 하기에만 급급했다.

"형님, 이 사람들이 날 억지로 북국에 데려가겠다지 뭐요? 뭐,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다나요?"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라니요? 뭔데요?"

모용쟁이 입빠르게 물었다.

"합의하에 좋게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상책이고, 나를 묶어 억지로 잡아가는 것이 중책이고, 하책은 형님을 죽이고 나를 마취시켜 잡아가는 것이랍니다."

구양적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하책은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인다고 했습니다. 구양 선생께서 끝내 우리 소청을 거절할 경우 당신과 이 처녀는 여기서 죽습니다."

속문성이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구양적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래 우리 세 사람이 그렇게도 만만히 죽을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오?"

구양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사장(蛇杖)을 들고 버텨 섰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으면 우리 동생 석초수가 있고, 석초수가 죽이지 못하면 또 제갈정이 있지요. 우리는 한번 한다 하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들이오."

속문성의 수작에 격노한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장 손을 쓰지 않소?"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등이 눈길과 수평이 되게 했다.

"자, 덤벼 보시오."

조용히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리는 태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개 점쟁이에 지나지 않던 속문성은 태도를 바꿔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오른손을 펴 내밀었다. 손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보란 듯 주먹을 쥐자 네 손가락 사이에서 큼직큼직한 동전 세 닢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전 복판의 네모난 구멍으로 손가락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큰 동전이었다. 그렇게 큰 동전을 병기로 쓰는 걸로 보아 속문성의 무공이 여간이 아님을 짐

작할 수 있었다.

속문성은 동전 세 닢을 한번 추스려 보이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한마디 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양손을 이용하여 구양적의 앞가슴에 있는 육대 사혈(六大死穴)을 향해 동전 여섯 개를 내뿌리면서 중얼거렸다.

석숭(石崇)은 돈을 만들어 부자가 되었고

자야(子耶)는 쌀을 팔아 가난뱅이가 되었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동전만 바람 타고 날아다니네.

구양적은 사장을 휘둘러 동전을 막으면서 속문성의 무공에 은근히 탄복했다. 병법에 의하면 치[寸]가 척(尺)보다 짧다는 걸 알아야 한다지 않던가. 그런데 속문성은 구양봉이 마구 휘두르는 사장 앞에서도 때를 놓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동전을 내뿌리곤 하였다. 구양적의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의 상양(商陽)·오리(五里)·곡지(曲池) 삼혈(三穴)을 공격하는가 하면, 또 술법을 바꾸어

구양적의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불용(不容)·유근(乳根)·대거(大巨) 삼혈을 겨냥했다. 사실 구양적도 웬만하면 속문성을 단번에 사장으로 요절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양적의 사장이 속문성의 골통을 내리치려고 하면 동전 세 닢이 그의 삼혈을 향하여 날아오는 통에 그걸 막기에 급급했다. 구양적은 화가 났다. 속문성의 무공은 그에 비하여 변법도 많았거니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날쌔기까지 하였다. 미인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듯한 몸짓 또한 일품이었다. 반면에 구양적은 사장을 휘두르기조차 점점 벅차 왔다. 이런 식으로라면 승부는 뻔했다.

"잠깐!"

구양적은 소리 지르면서 한 옆으로 물러섰다. 속문성도 싸움을 멈추고 뒷짐을 지며 서 버렸다. 아주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누구보다 놀라고 얼떨떨해진 사람은 구양봉이었다. 그는 형님이 한 번만 손을 쓰면 이 오합지졸 같은 북국의 사람들이 당장에 무릎을 꿇거나 놀라 달아나 버리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형님의 절묘한 장법(杖法)이 속문성의 여섯 개 동전을 막지 못하고 패하고 말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구양적이 입을 다물고 있자 속문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쯤에서 동생이 북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동생의 안전은 염려 마십시오. 이 속문성이 보장하리다."

구양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저이의 일을 왜 저한테 먼저 물어 보지 않습니까?"

"낭자는 누구시오? 구양봉 선생은 형님 말만 꺼냈지 다른 사람에 대해선 말이 없었소."

속문성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모용쟁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없었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오, 그래요. 저와 한바탕 다투다가 화가 나서 국자감 구경을 간다고 훌쩍 가 버렸거든요. 그런데 당신네 같은 괴물들을 데리고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참, 저이가 저한테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저의……."

모용쟁은 말을 끌다가 불쑥 내뱉었다.

"저의 남편이에요."

이 말이 떨어지자 구양적과 구양봉은 동시에 놀라 쳐다보았다.

속문성네도 어리둥절해져서 모용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낭자의 뜻은 무엇입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모용쟁이 미소를 띤 채 그들 몇 사람을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거죠. 속문성 선생은 우리 아주버님과 겨루어 보았으니 그만두시고, 저는 저 두 형제와 겨루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래서 내가 지면 또 저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언제든 한 번은 이길 때가 있겠죠."

"이기면 어쩌구 지면 어쩌자는 거요?"

속문성의 물음에 모용쟁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기면야 내 남편을 당신들에게 내줄 수가 없죠. 진다고 해도 전 끝까지 해 보겠어요."

"그래서야 됩니까? 우리들 중 어느 한사람과 겨루어 보십시오. 그래서 이기면 낭자의 뜻대로 하시고 지면 두말할 것 없이 구양봉 공자님을 우리와 함께 가시도록 하는 겁니다.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낭자 역시 우리와 함께 가시든가요."

속문성의 이 말은 구양봉네 세 사람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

구양적은 모용쟁이 동생 구양봉에 대한 마음을 오늘에야 제대로 내보인 것 같아 내심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생과 모용쟁을 천리 밖인 북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과 모용쟁을 놈들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모용쟁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모용쟁은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었다.

'저 바보같이 서 있는 구양봉이 내 남편이라구? 어림도 없는 소리. 사나이다운 기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바보를 내 남편이라고 한 것은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야. 저 바보를 구해내려고 머리를 쓴 것뿐이라구.'

대답을 기다리던 속문성은 답답한 듯 하늘을 올려보다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답답할 데가 있나. 구양 공자님, 우리 주인님께서 공자님을 학수고대한 지 벌써 3년이나 됩니다. 연로하신 주인님께서는 매일 문설주에 기대 서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 세 사람은 모두 가솔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렇게 3년을 타관 객지에서 지냈습니다. 자라나는 자식들이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게 되었고, 꿈속에서나마 아버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이

고충을 널리 헤아리시어 부디 저희와 함께 북국으로 가서 우리 주인님의 갈망을 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합니다."

속문성의 간곡한 애원이었다. 그의 달라진 태도에 구양봉은 연민과 의협심이 발동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럼 따라가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북국으로 가는 길의 길흉을 가늠할 수가 없는 터라 무슨 일이 생길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요. 속 선생께서 내놓으신 제안에 따르기로 하죠. 하지만 누구와 무공을 겨룰지 그 상대는 내가 결정하겠어요."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열 손가락도 각각 그 길이가 다른데 무공이 모두 속문성과 같지야 않겠지, 동전 여섯 닢으로 독장(毒杖)을 막아낼 정도면 보통 무공은 아니거든. 어디 보자……. 저들 중에 저 석씨라는 사람이 제일 힘이 센 것 같은데, 자칫하다간 주먹 한 방에 등뼈가 부서지겠어……. 뒤에 서 있는 저치들도 만만치 않겠군. 태양혈이 튀어나오고 기름을 바른 듯 얼굴이 번들번들한 것만 봐도 내공과 외공을

모두 겸비한 작자들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모용쟁은 속문성 패거리들을 살피다가 한쪽에 서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저 노인은 눈썹이 축 늘어지고 작은 눈이 게슴츠레한 게 정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꼴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울 정도군. 얼굴색은 꼭 산송장 같은 게 칼 한 번만 가볍게 휘둘러도 밑둥 잘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겠어.'

모용쟁은 함빡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그러자 속문성과 그 일행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그들이 웃거나 말거나 자신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스스로 자족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다른 사람과 겨루어 보는 것이 더 좋을 성싶구려."

속문성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필이면 너희들 중 제일 약한 고리를 짚어서 후회가 되는가 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이니 사정을 봐 주리라 기대하진 말아라.'

"칼 받아라!"

모용쟁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칼을 내찔렀다. 그런데 그 노인은 너무 늙어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지 칼아 가슴팍에 다가온 순간에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모용쟁은 이런 무기력한 노인을 이렇게 간단히 죽여 버릴 생각까진 없었으므로 얼른 칼끝을 옆으로 빗나가게 하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검 끝이 노인의 의복을 찢으며 가슴에 푹 박히는가 싶었으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노인은 놀랍게도 오른손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모용쟁의 칼날을 간단히 막아낸 것이다.

"보아하니 아가씨의 마음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으니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노인은 느릿느릿 말하더니 칼을 잡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칼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모용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모용쟁이 만만하게 본 이 노인이 사실은 그들 패거리 가운데 무공이 제일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잠자코 지켜 보던 속문성이 느긋하게 물었다.

"구양 공자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가씨도 함께 데리고 가시렵니까, 아니면 혼자 따라가시겠습니까?"

일이 이쯤 되자 구양적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동생을 당신들이 데리고 가려면 당신들이 대관절 어떤 사람들이며 우리 동생을 데리고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소."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이 한 가지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저희가 둘째 공자님을 북국에 모시고 가는 데는 절대 악의가 없으니 아무 염려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낭자께서도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면 저희들이 함께 모시고 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많은 시간 공자님과 헤어져 혼자 계셔야 할 것임을 미리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혼자 있다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모용쟁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거기 가시면 구양 공자님께선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시게 될 것입니다."

구양적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속문성 일행의 무공이 대단함은 이제 명약관화했다. 제갈정이라는 노인 한 사람도 대적하기 어렵거늘 일류 고수들인 속문성과 저 장한들을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

는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침묵만 지키는데 속문성이 갑자기 모용쟁의 손목을 덥석 잡아 쥐더니 동강난 칼을 낚아채어 번쩍 치켜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짧은 순간에 자기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내리쳤다. 끊어진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구양 공자를 잘못 건드린다면 이 손가락처럼 될 것입니다."

구양적과 모용쟁, 그리고 구양봉은 말문이 막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속문성이 이처럼 독한 맹세까지 하면서 구양봉을 북국으로 끌고 가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정을 하는데야 무턱대고 반대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구양적은 비로소 긴장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동생을 보내도록 하겠소.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게 궁금하오."

"빠르면 1, 2년 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주인님의 마음에 들면 3년이 될 수도 있으나 마음에 들지 못할 경우엔 반년도 못 되어 돌려보낼 수도 있지요."

속문성의 말에 구양적은 동생의 손을 잡아 쥐었다.

"내게 일이 없으면 너를 따라 나도 북국에 가 보고 싶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모용쟁을 돌아보았다. 동생을 따라갈지 말지 모용쟁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모용쟁은 구양적의 눈길을 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정말로 얼뜨기 구양봉을 좋아하는 줄 아는가 보지?'

그녀는 고생길이 훤한 구양봉을 따라가서 괜히 자기까지 화를 입을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백 타산장의 장주(莊主)에게 끌려 사막에 가서 그 고생 한 것도 몸서리쳐지는데 내가 또 무슨 고생을 하자고 북국엘 가?'

모용쟁이 잠자코 딴청을 부리자 구양적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반감이 치밀었다. 동생 구양봉을 자기 남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을 정도면 그만큼 정이 깊다는 얘긴데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 태도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못 가면서 모용쟁더러만 따라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형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구양봉의 마음은 전에 없이 슬퍼졌다. 구양봉이 딱 한 번 형과 헤어져 홀로 경성 임안에 가 본 적이 있지만 잠시뿐이고, 그 이후로는 형과 헤어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북국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고 또 어떻게 될지 그 길흉화복을 점칠 수도 없지 않은가. 구양봉은 코끝이 시큰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구양적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중원에 중요한 일이 있어 따라갈 수가 없다. 여기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북국으로 가겠다.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꼭 찾아가마. 그동안 네가 무사하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릴 테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사부님을 모시고와서 저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마음속 근심을 털어 버릴 수 없는 구양적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홀로 떠나 보내기가 여간 괴롭지 않았다. 두 형제가 눈물겹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속문성네 일행은 한편에 서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형님과 모용쟁을 뒤로하고 속문성을 따라 몇 걸음 걷다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닦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용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용쟁은 형님을 좋아해. 이제 형님과 단둘이 있게 됐으니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형님이 구해 준 은공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되지.

그들 일행은 어느 큰 읍에 이르렀다.

속문성은 준마 여섯 필을 샀다. 그들 여섯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깊어서야 주막에 들면서 북으로 북으로 말을 달렸다. 말이 지치면 또 새로 준마를 사서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며칠 만에 천여 리 길을 달려왔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북국에 가는지도 모르는 채 구양봉 역시 속문성 일행을 따라 말을 재촉했다. 모두 무예가 뛰어난 속문성네 일행은 길을 가는 동안 아무리 괴상한

일을 만나도 끼여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술도 한잔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속문성은 자기들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구양봉한테만큼은 각별한 태도로 술을 권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량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장한은 매번 끼니마다 술이 없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술잔을 움켜쥐곤 할 정도였는데, 빈 잔이라도 들고 있어야 술 생각이 달래진다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들의

이러한 인내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구양봉은 틈만 나면 속문성에게, 왜 자기를 북국에 데려가는 것이며, 주인이 자기를 그토록 기다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과연 무슨 일을 시키려 하는 건지를 물어 보곤 했다. 그러나 속문성은 그냥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8월 가을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더욱 쌀쌀해서 옷을 두텁게 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향이 가까워 오자 석씨 성을 가진 장한은 눈물이 글썽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창창한 하늘

망망한 들판

내 고향 귀틀집

내 옷을 빨아 주는

사랑하는 내 아내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

우리 함께 사냥하여

사슴을 잡고

우리 함께 자식 낳아

가죽옷 입혀 기르네.

석초수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일행의 향수를 자아내는 듯 나머지 다섯도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

내 고향 귀틀집

사랑하는 아내여

혹진주 같은 눈동자로

남편의 환향을 기다리네

휘장을 드리우고

원앙처럼 즐겨 보세

검은 머리 흴 때까지

백년해로 잊지 마세.

그들의 노랫소리에 구양봉도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런 사람들이 두꺼비 주련을 맞출 줄 아는 자기 같은 사람을 찾느라고 변경에서 3년이나 고생하며 지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구양봉은 그들을 따라 이미 천리 밖인 북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숲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지키는 사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들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달아날까봐 경계심도 늦추지 않고 있음을 구양봉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구양봉은 잠결에 느닷없이 들려 오는 함성과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눈을 떴다. 저만치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가죽옷을 입고 창칼이나 활 같은 무기들을 지닌 그들은 하나같이 용맹스런 모습이었다. 구양봉 일행에게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그들 중 한 사람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네 이 놈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우리는 북국의 범, 표범, 이리, 늑대, 개로 알려진 다섯 맹수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무릎을 꿇고 냉큼 물건들을 내놓아라!"

느닷없는 기습에 일제히 잠에서 깨어난 속문성 일행은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그들의 무공이 비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저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저마다 활을 지닌 마당에 속문성네가 무슨 재간으로 막아낼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속문성과 그 일행들은 웃는 낯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도적떼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향 친구들이라도 만난 듯한 기색이었다.

"어서 물건들을 내놓지 못할까? 그래 내 칼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두목인 듯한 놈이 소리쳤다.

"물건을 내놓으라구? 물건이야 있지. 멀고먼 변경에서 왔는데 귀한 물건이 없을 리 있겠나."

속문성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 마주보며 너털웃음을 쳤다.

"대관절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칼을 들이대며 죽일 듯이 위협하는데도 너털웃음을 웃는 작자들을 보고 놀란 듯 두목이 물었다.

"이 사람 둘째, 이런 한심한 일이 있나. 변경에 가서 3년 있다 왔다고 이렇게도 사람을 몰라본단 말인가?"

늙은 제갈정이 개탄하였다.

"형님, 내버려두시오. 몇 마디 하다 보면 자연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될 테니."

속문성의 말이 끝나자 다섯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자 도적 두목이 갑자기 겁을 먹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유운장(留雲庄) 분들이 아니십니까?"

다섯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이들이 틀림없는 유운장의 다섯 형제들임을 깨딜은 두목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나으리들을 몰라보다니,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너희들 다섯 맹수가 어떤 죽을 죄를 저질렀는지 그건 알 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단잠이 들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떨었으니, 그래 무엇으로 우리 형제들의 용서를 바라겠느냐?"

속문성이 빈정대자 다섯 맹수 중의 형인 범이란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눈이 있어도 유운장 다섯 형제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 눈을 뭣에 쓰겠습니까?"

그는 대뜸 제 손가락으로 제 눈알을 후벼 파내더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에 서 있던 네 사람도 일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놈들, 어서 물러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우린 노독이 풀리지 않아 한잠 푹 자야겠다."

속문성이 빙글거리며 성가시다는 듯 말하자 도적출은 번개처럼 일어나 삽시간에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제15장 유혹

그 일이 있은 뒤 그들 여섯은 별일 없이 북국 천산(千山) 자락에 있는 큰 장원 앞에 이르렀다. 남방의 장원과 달리 이 큰 장원은 모두 빽빽한 수림에 싸여 있어서 먼데서 보면 지붕 끝만 보일 듯 말 듯했다. 장원의 규모는 실로 대단해서 눈짐작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장원의 원문(圓門)은 족히 오층집 높이는 되고, 맹수를 조각한 추녀가 아주 위풍이 있었다. 문어귀에는 장정 열 명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속문성 일행을 발견한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 중 두목으로 보이는 얼굴이 칼날처럼 길쭉한 사나이가 몹시 반기며 달려와 제갈정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아이구! 이게 웬일입니까? 다섯 형제분이 마침내 이렇게 돌아오셨구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다른 사람들과도 뜨겁게 포옹을 하고는 부하들을 향해 큰소리로 명령했다.

"대문을 열어라, 어서! 그리고 누구 한 사람은 중당(中堂)에 들어가 후원 정실(靜室) 밖에 계시는 꼬마 사숙(師叔)님께 다섯 형제분이 오셨다고 아뢰어라."

말을 마친 그는 마치 희귀한 보물을 보는 양 구양봉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형님, 이번엔 제대로 물색을 하신 거요? 작년인가, 병호(病虎) 조춘(曹春)이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주인님께서 주야로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냈다고 떠들어댔었어요. 주인님께서는 물론 무척 기뻐하시며 그 사람을 모셔 들이라 했는데, 막상 시험을 해 보니 영 둔자(鈍者)지 뭡니까? 주인님은 기가 막혀 말을 못하셨지요. 이번 사람은 어떻소? 또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아야 할 텐데."

"쾌도(快刀),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되네. 우리 다섯 형제가 사람을 잘못 고를 리가 있겠나."

속문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 일행은 쾌도라는 사람을 따라 가벼운 걸음으로 대문을 들어섰다.

대문 안에 들어서자 구양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의 장원은 대문 안에 조벽(照壁 ;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막는 바람벽)이 있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의 조벽은 크기도 엄청난데다가 그 위에 씌어진 주련 또한 기이한 것이었다. 주련 복판에 유난히 크게 씌어진 글자 하나는 처음 속문성을 따라갔을 때 본 술집 주기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독(毒)이라는 글자였다. 송 때의 세속적인

관례대로라면 무장의 조벽에는 범 호(虎)자를 쓰고 문관의 조벽에는 단정하게 조용할 정(靜)자를 써 놓음이 마땅했다. 범 호를 쓰는 것은 호장(虎將)은 호문(虎門)에서 나고 호장(虎莊)에는 호자(虎子)가 많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의미에선지 조벽에다 독할 독(毒)자를 크게 써 놓았는가 하면, 주련의 상련에는 '집에 주인님이 계시니 복이 많고', 하련에는 '방에 어머님이 계시니

가슴이 설레는구나.' 하는 알 수 없는 문장을 써 놓고 있었다. 구양봉은 암만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때 앞에서 안내하던 쾌도라는 작자가 구양봉을 떠볼 작정인 듯 읍을 하며 치근덕거렸다.

"공자님, 이 주련을 한번 봐 주십시오. 우리 주인님께서 써 주신 건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어디 그 뜻을 해독할 수가 있습니까? 공자님께서 우리 유운장에 오신 걸 보니 아주 총명하신 분임에 틀림없사오니 이 주련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겠지요. 좀 가르쳐 주십시오."

'분명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렷다?'

그래도 모두 북국에선 내노라 하는 인사들일 텐데 제집 주인이 쓴 주련의 의미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구양봉은 생각했다.

'만일 내가 저것을 해독하지 못한다면 이자들이 나를 업신여길 게 분명해.'

구양봉은 보통 사람과 성미가 달랐다. 어떤 때는 고집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였으나 어떤 때는 고지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강호의 예법을 알지 못했다. 강호 사람들처럼 겸손을 차리며 양보할 줄도, 듣기 좋은 말로 슬그머니 위기를 모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슬쩍 미룰 줄도 몰랐다. 구양봉은 어떻게든 자신의 학식을 과시하고 싶었다. 강호에서 제 잘난 척하다가는 왕왕 큰코를 다

친다는 것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련을 보니 당신네 주인님은 신농씨(神農氏)와 같은 인물이겠습니다. 옛날 신농씨께선 몸소 백초(百草)를 맛보시면서 독 있는 풀들을 잡수셨지요. 그분이 독 있는 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독 있는 풀을 가려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당신네 주인님께서도 그 같은 탁견이 계시기에 신농씨와 같은 의미로 독자를 크게 써붙인 것이 아닙니까? 저 주련이 그걸 잘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상련엔 주인 주(主)자가 있고 하련엔 어미 모(母)자가 있는데, 그것을 합치면 집에 주모(主母)가 있다는 의미가 되고 이 주모를 하나의 글자로 만들면 독할 독 자가 되지요. 이렇듯 독의 중함을 아니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소생이 보건대 당신네 주인님께서는 학식이 비범할 뿐만 아니라 독을 쓰고 또 해독도 할 줄 아는 천하의 대인인 듯싶습니다."

구양봉의 말을 귀담아듣던 여섯 사람은 일제히 구양봉을 향해 존경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쾌도라는 사나이는 더욱 크게 탄복하여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까지 했다.

"공자님 말씀을 듣고 보니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습니다. 공자님의 가르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이어서 다섯 형제에게도 공경을 표했다.

"제갈 형님, 그간 변경에서의 3년 고생이 헛고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쾌도와 다섯 형제는 다 같이 유쾌하게 웃었다.

여섯은 우선 구양봉을 데리고 객방을 지나 중간채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신 뒤 그들은 또 구양봉을 데리고 후당으로 향했다.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어에 이르기를, 천자는 당(堂)이 아홉 개요, 제후는 당이 일곱 개고, 지부(知府)는 당이 다섯 개요, 현령 (縣令)은 당이 세 개이고, 선비는 당이 하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은 도대체 무슨 신분이기에 천자나 다름

없이 당을 아홉 개나 가지고 있단 말인가? 어쨌든 이 집 주인이 범상치 않은 일대 명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북국 천산에 어찌 이런 인물이 있을까?'

구양봉은 내심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후당을 지나니 아름드리 나무들이 여러 그루 한데 모여 있는데 무성하게 자란 가지들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집이 있어 늘어진 가지들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집안은 어두컴컴하여 밖에서는 아무것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속문성 일행은 여기에 당도하자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제갈노인이 앞에 서고 점쟁이 속문성이 그 뒤에 섰으며, 그 다음은 석초수, 그 다음은 시종일관 말이 없던 두 형제, 그리고 맨 마지막은 쾌도라고 불리는 사나이 순으로 줄을 지어 섰다. 제갈 노인이 목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말했다.

"주인님, 늙은 노복 제갈정을 비롯한 여섯 노복이 변경에서 돌아와 주인님께 복명하나이다."

노인은 마치 앓는 병자가 놀랄까 봐 저어하듯이, 혹은 자는 아이가 깨어날까 봐 저어하듯이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아주 조심스레 말했다. 구양봉의 형님과 모용쟁을 대할 때의 그 위풍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엇이 저 노인으로 하여금 나무 아래 오두막집에 이르러선 저렇듯 쩔쩔매게 하는 것일까. 구양봉은 아마도 그 오두막집 안에 그들 다섯 형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

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라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제갈 노인이 거듭 두 번이나 말했으나 집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제갈 노인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일렬로 늘어선 일행과 함께 묵묵히 기다렸다.

'참, 이 주인님이란 사람 성미 한번 고약하군. 그렇게 벌벌 떨면서 부르는데 얼마나 더 위풍을 떨겠다는 거야? 그만하면 안으로 들게 해도 좋을 성싶은데…….'

구양봉은 은근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기는 외지에서 온 손님인데다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도 알 수 없는 터라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보건대 너희들 다섯 중에 하나도 쓸 만한 놈이 없는 성싶다. 늙다리는 밤낮 남들을 못살게 굴 생각만 하느라고 빼빼 여위었고, 너 속문성은 언제나 빚쟁이처럼 표정이 굳어 있고, 그리고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언제나 성난 얼굴을 하고 있기에 피가 몰려서 얼굴이 수수떡 같고 배가 두꺼비 배가 되었구나. 그런가 하면 저 두 젊은 녀석은 하루 종일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하는 녀석들

아냐? 장가든 날 밤에도 신방에 들어서 촛불이 다 타도록 땀만 뻘뻘 흘리며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이젠 잡시다' 한마디 했다던가……?"

구양봉은 방금 들은 목소리가 분명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 목소리인데 말투는 너무나 어른스러워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이렇게 만나자마자 욕을 해대는 것인가.

그런데 속문성 일행은 누구 하나 그 말에 대꾸하려 들지 않고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이번에도 한결같이 허리를 크게 굽혀 인사를 올렸다.

"사숙님, 안녕하셨습니까?"

구양봉은 그제야 지붕같이 얽힌 나뭇가지 위에 한 어린애가 가지를 흔들며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몸에는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한 갈래로 땋아 늘인 모습이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기껏해야 아홉 살이나 열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가 어째서 제갈 노인과 다른 네 어른들의 사숙이 된다는 것인지 구양봉으로선 납득이 안 되었다.

"제갈정, 자네가 가 있는 3년 동안에 자네 처가 나한테 아주 불손하게 굴었지. 지난달엔 엿을 고아서 나한테는 작은 걸로 한 옹배기밖에 주지 않더란 말이야. 뭐 많이 먹으면 탈이 날까 봐 그런다나? 흥! 윗사람을 공대할 줄 모르고 거짓말이나 일삼다니. 게다가 자네 손자 놈은 나와 탄자(彈子) 놀이를 하다가 나를 윽박지르지를 않나. 이젠 자네가 왔으니 잘 좀 교육시키란 얘기야. 다음부터

이 어른 공대 좀 잘하게 버릇 좀 가르치라구."

구양봉은 기가 막혀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다섯 형제는 그런 말에 익숙한 듯 조금도 개의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갈 노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숙님, 천만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어린것은 이제 그 허우대 좋은 장한을 가리키며 훈계를 시작했다.

"석초수, 자네 여편네는 3년 동안 얼마나 울어댔는지 아나? 밤만 되면 버릇처럼 베개를 끌어안고 엉엉 울더라구. 아마도 자네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 그런데 울다간 또 웃곤 하더군. 웃긴 왜 웃냔 말이야. 자네 들어가거든 물어 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나한테 알려 줘."

장한은 그저 얼굴이 시뻘개져서 꺽꺽거릴 뿐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었다. 구양봉은 저 조그만 것이 무슨 수로 열 길도 넘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갔으며, 어떻게 제갈 노인의 사숙이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어린것이 비로소 구양봉을 발견하고 손뼉을 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옳아, 저것들이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자네구나?"

어린것의 직접적인 질문에 구양봉은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소. 저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이오."

구양봉의 대답에 어린것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아이구 야단났네, 야단났어. 속았어, 속았다고!"

"속다니?"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하여 반문했다.

어린것은 냉큼 몸을 솟구치더니 나뭇잎처럼 후르르 나무에서 날아 내려왔다. 그는 구양봉 앞에 마주서기가 무섭게 말을 이었다.

"잔말 말고 빨리 튀어. 저것들이 임자를 데리고 온 건 흑심이 있기 때문이야. 자네더러 독(毒)을 배우라는 건데 독을 배우는 게 좋은 일인 줄 아나? 이 어르신도 그 해를 단단히 입었지. 저것들한테 붙잡혀 왔으니 자넨 이제 큰일났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달아나라구. 이 어르신한테 양식도 있고 노자도 있으니 어서 갖고 내빼. 내 혼자 저것들 다섯을 막아 줄 테니 어서 내빼라니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엿 세 가락과 떡 두 쪽, 은 석 냥을 꺼내어 구양봉에게 건네주었다.

어린것이 나무 위에 있을 적엔 몰랐는데 내려온 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백납의(百衲衣)를 입고 있었다. 백납의란 당시 아이를 낳으면 백여 집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에서 꽃무늬 천 한 쪼가리씩을 얻어 만든 저고리로, 장수하란 뜻에서 아이에게 입힌다. 이런 꽃저고리를 입으면 백 살까지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양봉은 호주머니에 엿가락을 넣고 다니는 코흘리개가 자기더러 어서 달아나라고 재촉하는 통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이때였다. 늙은 노인의 짱짱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이제야 돌아들 왔느냐?"

그 소리에 속문성은 바짝 긴장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부님, 저희 다섯 형제가 돌아왔음을 아뢰옵니다."

"그래 찾아오라는 사람은 찾아왔느냐?"

"예, 찾아왔나이다. 구양봉이라는 분으로 바로 여기 서 계십니다."

속문성이 급히 대답했다.

노인의 말소리가 들리자 어린것도 대번에 안색이 변하여 구양봉에게 소곤거렸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영감이 깨어났으니 이젠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구."

그리고는 모둠발로 팔짝 뛰어 단번에 여덟 장이나 뛰어나갔다. 그는 이렇게 두세 번 반복하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문성네 다섯 형제도 구양봉만 큰 나무 앞에 세워 놓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드디어 노인이 구양봉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구양봉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집 안에 들어서니 그곳은 커다란 나무 구새였다. 구새통 안의 노인을 발견한 구양봉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노인은 벽에 기대어 물구나무를 서 있었는데 풀어져 거꾸로 드리운 머리카락은 마치 지심을 향해 뻗은 나무뿌리 같았다. 발은 맨발인데 발바닥이 나무에 닿게 매어져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구양봉

은 보지도 않고 물었다.

"자네가 내 주련을 맞춘 잔가?"

"그렇습니다. 제가 변경에서 한가로이 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그 주련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주련을 읊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

구양봉은 자기더러 하련을 다시 맞추어 읊어 보라는 줄로 알고 소리 내어 하련을 읊었다.

"땅 위를 기는 두꺼비,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네는 틀렸네. 자고로 문행사육(文行四六)은 그 글귀가 짝이 되게 맞추는 법이야. 하늘 천(天)은 따지(地)로 맞추고, 날 일(日)은 달 월(月)로, 청풍(淸風)은 유수(流水)로 맞추지. 학식이 있다는 사람이면 이런 도리쯤은 어련히 알고 있을 터인데, '바람 타고 난다'는 '승풍(乘風)'에다 '혼자서 기어간다'는 '독행(獨行)'을 갖다 대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봉황력(鳳凰力)이라

는 힘 력(力)자에 합마공(蛤 功)의 공력 공(功)자를 맞추는 법도 없지. 잘못되었으니 어디 다시 새로 맞추어 보지 않으려나?"

"어르신께서 이 집의 주인 어른이 틀림 없으십니까?"

구양봉이 물었다.

노인은 또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제가 대문을 들어서며 조벽을 보니 거기에도 주련이 있던데 그 주련도 주인 어른의 글이 틀림 없습니까?"

구양봉이 웃으며 또 물었다.

"생각나는 대로 쓴 난필이니 웃지 말게."

"제가 보기에 그건 아주 잘 쓰신 주련입니다. 의미도 범상치 않고 글 속에 그림도 있고, 두 연을 합쳐 놓으면 한 개 글자가 되고 두 연을 갈라놓으면 주인 어른의 흉금을 과시하게 되니 이런 극치가 없을 줄 압니다."

"글쎄, 난 그 주련이 어떻게 좋은지는 아직 모르고 있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노인의 얼굴은 득의로 가득 찼다.

"그러나 주인 어른의 그 주련도 소생이 맞춘 주련처럼 짝이 전혀 맞지 않는 주련입니다. 대단히 틀린 주련이지요."

이 말은 한창 득의에 차 있는 노인의 머리에 냉수를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분이 상한 노인이 싸늘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주련의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 말해 보게나."

그러면서 노인은 손을 홱 내저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뭇가지 하나가 휙 날아와 구양봉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순간 구양봉은 자신의 머리가 두 조각이 나는 듯한 아픔에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쳐서 벽에 기대 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만져 봤다. 머리칼 사이에 꽂힌 나뭇가지의 한 끝이 나무 구새 벽 속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손에 피는 묻어 나지 않았다.

"노인장, 왜 이러십니까?"

"다른 소리 말고 그 주련이 어디가 통하지 않는가만 말해 봐라."

"그 주련은 분명 짝이 맞지 않습니다. 내가 '바람 타고 난다'는 '승풍(乘風)'에 '혼자 간다'는 '독행(獨行)'을 맞춘 것이 틀리다면, 노인장께서 주인이라는 '주(主)'자에 어머니라는 '모(母)'자를 맞춘 것이나, 집 '가(家)'에 방 '실(室)'을 맞춘 것이나, 많을 '다(多)'에 고칠 '갱(更)'을 맞춘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양봉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껄껄 웃어대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 그럴 듯하구먼. 자네 지적이 틀리지는 않아. 난 실은 책벌레, 서방의 꽁생원 따위는 눈꼴시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일세. 그자들은 밤낮 공자왈 맹자왈 글을 외우고 글을 쓸 때도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많지. 그리고 큰 학문이나 있는 듯이 때로는 옛적 현인들의 시도 몇 줄 읊고 또 무슨 큰 도리나 알고 있는 듯 경서의 말도 이 말 저 말 가져다 쓰지만, 기실은 권세와 금전 앞에서는 오금

을 못 쓰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지. 이런 자들을 난 보는 족족 깨끗이 죽여 버리고만 싶네."

"옳은 말씀입니다. 묘한 말씀입니다. 노인장의 말씀은 내 마음과 딱 맞습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솟구치며 외쳤다. 그러자 꽂힌 나뭇가지에 상투가 당겨지는 바람에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그래도 자넨 세상에 '혼자 간다'는 독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됐네. 내 이름이 바로 신독행(愼獨行)일세."

그제야 구양봉은 자기가 맞춘 그 주련이 바로 노인의 이름을 맞춘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몇 마디 묻겠는데, 사실대로 대답해야 되네."

노인의 말에 구양봉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자네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군가?"

노인의 갑작스런 물음에 구양봉은 어리둥절해졌다.

'제일 미운 사람이라고?'

그는 일순 백타산장 임일천과 백방으로 그를 못살게 굴던 소씨 거렁뱅이를 떠올려 보았으나 딱히 누구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만일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들을 죽여 버릴 생각이 있겠지?"

구양봉은 임일천의 행패가 생각나서 주저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죽여 버릴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또 껄껄 웃었다.

"그래 자네는 재물과 권세, 술과 미녀들도 좋아하겠지?"

구양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물론 좋아하지요. 하지만 속으로 꿈에서나 좋아할 뿐, 소생 같은 인간에게 어디 차례나 오겠습니까?"

노인은 그 말에 또 웃었다. 그러더니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위로 솟구쳤다. 훌쩍 날아 구양봉 앞에 내려앉았다.

"젊은이, 자네가 내 주련을 맞힌 걸 보면 우리들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지닌 기이한 무공을 몽땅 자네에게 가르쳐 주지."

그리고 노인은 목소리를 길게 빼며 주련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

땅 위를 기는 두꺼비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노인은 다시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공중에서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술법은 형님 구양적의 스승인 백면라살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굉장했다. 노인은 또 땅으로 내려와 사지를 두꺼비처럼 웅크리고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크게 벌리며 '꽥, 꽥!' 두꺼비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두 팔을 번개처럼 휘두르는데 마치 천여 개의 팔이 한꺼번

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뒤 노인은 다시 한 번 '꽥'소리를 지르더니 양손바닥을 펴서 세워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 고목이 절반이나 빠개져 나가면서 푸른 하늘이 환하게 내다보였다.

"이건 천하에 없는 두 가지 무공이지. 한 가지는 봉황력이요 다른 한 가지는 합마공인데, 원한다면 내가 이 두 가지 무공을 모두 가르쳐 줄 작정이네."

노인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구양봉은 물론 바라는 바였다. 그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땅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노인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이러지 말고 내 말을 더 듣게. 내 이 신공(神功)을 배우려면 먼저 독을 쓰고 독을 먹을 줄 알아 독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네."

구양봉은 자기더러 어서 달아나라던 어린아이의 말이 생각났다. 이 노인이 독약을 먼저 먹이는 모양인데 그것을 먹다가 죽어 버리면 송장밖에 더 되겠는가 싶어 구양봉은 더럭 겁이 났다. 한 목숨 죽으면 그만인데 무공이고 나발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절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런 독 있는 사람은 안 되렵니다. 그런 사람은 되기 싫습니다."

그의 말에 노인은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모르는 소리. 독 있는 사람이 뭐가 나쁘다는 겐가? 독 있는 사람이 하고많은데 자네 하나 더 늘어난다고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전 싫습니다. 정말 싫습니다."

"내 말 좀 듣게. 그 조그만 녀석의 말은 괘념치 말아. 그 녀석의 말은 믿을 게 못 돼. 내 말만 듣게. 어떤가?"

구양봉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한테 자꾸만 눈길이 쏠림을 어쩔 수 없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이 생각났다. 모용쟁도 백타산장 난쟁이 임일천한테 잡혀가 하루를 지냈는데, 그 난쟁이의 눈을 자꾸만 들여다보다가 그만 부지불식간에 난쟁이를 졸졸 따라 나서게 되었다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노인도 그런 섭혼술(攝魂術)로 자기를 사로잡으려는 건지도 몰랐다.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업신여기며 때리고 욕하곤 하지?"

구양봉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맞서 싸우지 못하나? 왜 강약을 겨루어 보지 못하지?"

구양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무공이 있어야지요."

노인은 구양봉의 말에 다시 껄껄 웃더니 말했다.

"난 자네가 숱한 미녀와 노복을 거느리고 맘껏 부려먹으며 살게 할 수도 있네. 자네를 천하에 으뜸가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지. 황제가 원이라면 황제로 올려 놓을 수도 있고 황제가 싫다면 무림의 패자로 만들 수도 있어. 어쨌든 천하의 지존이 되게 할 수가 있으니 자네 의사가 어떤가에 달렸네."

구양봉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노인의 말을 거부하자니 여태까지 겪어 큰 치욕적인 생활을 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활개치고 다니고 싶은 욕심이 앞서고, 노인의 말을 따르자니 그러다가 사악한 길에 빠져 들어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구양봉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대꾸가 없었다.

그의 심중을 읽은 듯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구양 공자, 어디 한번 나 같은 향락을 맛보지 않겠나?"

그는 곧장 사람을 불렀다. 자그마한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시녀는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주인님께선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요?"

"구양 공자를 내 집으로 모셔 가거라. 내 집에서 오늘 밤 유숙하게 하여라."

시녀는 노인의 말을 듣고 놀란 눈길을 던졌다. 마치 노인의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듯한 태도였다.

"주인님의 방은 이미 여러 해째 비워 두었는데요."

시녀가 급히 하는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 공자님을 모시고 가서 인간의 쾌락을 한번 잘 맛보시게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구양 공자님께선 절 따라오시지요."

시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한들한들 앞서 걸어갔다.

그들은 높은 담벽 사이의 긴 복도를 지나서 엄청나게 큰 집 앞에 이르렀다.

"주인님의 정실로 왜 외간 사람을 데리고 오시나?"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시녀에게 물었다.

"외간 사람이라니요? 주인님께서 한 집안 사람으로 대하는 분이세요. 공자님을 집에 모셔서 주인님의 향락을 누려 보시게 하라고 하셨어요."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시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문지기는 곧 자세를 바로하며 구양봉에게 절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용서하시고 어서 드십시오."

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은 아주 조용하면서 사치스러웠다. 창문 쪽으로는 높이가 칠 척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산호 나무가 있고 그 위에는 숱한 구슬이 달려 있는데 모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귀한 보물들이었다.

"공자님, 어두우면 저 나무를 조금 움직이세요. 그럼 환해진답니다."

시녀가 보란 듯 산호 나무를 조금 밀어 놓으니 산호 가지가 움직이는 소리와 더불어 엄청나게 큰 야명주 하나가 드러나며 눈부신 빛을 뿌렸다.

구양봉은 혀를 내둘렀다. 시녀는 또 구양봉에게 집 안에 있는 보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모두 진귀한 진주 보석들 아니면 제왕들만이 쓸 수 있는 옥석기명들이었다.

'과연 내가 이런 진귀한 보물들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내가 이런 향락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천하에 몇 안 되는 제왕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 유운장의 가주(家主)와 같아지는 게 아닌가?'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시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구양봉은 흥분을 달래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순간 조심조심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은 눈을 내리깐 채 난초같이 그윽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공자님, 목욕 준비가 되었는데요."

침대 좌우에 두 여인이 와 서 있었다. 둘 다 대단한 미녀들로 모용쟁에 비할 게 아니었다.

"먼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어서 목욕을 하고 한잠 푹 주무시지요."

두 미인은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다가와서는 구양봉을 부드럽게 부축해 일으켰다. 구양봉은 두 여인에게 이끌려 방을 나와 두 개의 긴 낭하를 지나 둥근 지붕을 한 큰 집에 이르렀다. 집 안에는 더운 물이 담긴 큰 욕조가 있고 욕조 옆에는 두 미녀가 알몸으로 서서 구양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인들이 내 몸을 씻어 줄 모양이구나.'

구양봉은 쑥스러운 한편 가슴이 뛰었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나체의 두 미인이 인사를 했다. 구양봉은 두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은 그리 뜨겁지 않아 좋았다. 두 여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이 구양봉을 흥분시켰다. 여태까지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구양봉은 어쩔 줄을 몰랐다. 한 여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목욕을 하십니다. 공자님께선 이게 싫으신가요?"

"아니, 좋소. 그저 주인님에게 하던 대로 하시오."

구양봉이 이렇게 대답하자 이인들은 마음이 놓이는지 구양봉의 몸을 부드럽게 씻어 주고 밀어 주기 시작했다. 삼단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들의 몸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가볍게 문질러 대는 여인의 손길이 구양봉의 마음을 한껏 흥분시켰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런 기분은 맛본 적이 없었다.

'일개 서생이면 어떻고 황제면 어떤가? 인생에 이런 향락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게 천하 제일이지.'

구양봉운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구양봉의 눈이 흥분으로 충혈되는 것을 본 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저희 주인님께선 그런 연세에도 목욕탕에 들어온시면 세 번 이상 운우지정을 푸시는데 공자님은 한창 젊으신 나이에 점잔만 빼시는 게 이상하네요. 그렇게 속만 태우시지 말고 내키시는 대로 하시지요."

그녀들은 정감 어린 눈길로 교태를 부리며 농담을 했다. 구양봉은 말문이 막혔다. 목욕이 끝나자 두 여인은 구양봉을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호리호리한 허리에다 매끈한 팔다리가 눈이 부셨다.

구양봉은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며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와 주질 않았다. 문득 모용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가 모용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절감했다.

또 미인들 몇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도 있고 얇은 천 따위로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린 여인도 있었다.

"어느 애가 마음에 드세요? 누구든 원하시는 아이에게 수청 들도록 해드리지요."

구양봉의 몸을 씻어 주던 미인 하나가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절세미인들을 한꺼번에 만나 본단 말인가. 여자들은 하나같이 구양봉의 눈에 들기 위해 자태를 뽐내느라 야단이었다. 봄날의 난초나 가을의 국화나 각기 자기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고인의 시구가 생각날 정도로 어느 하나 버리기가 아까운 심정이었다. 구양봉은 실로 난감해졌다.

목욕을 시켜 주던 여인이 다시 소곤거렸다.

"공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 애들은 한꺼번에 공자님 수청을 들 것이에요. 어때요?"

구양봉은 물론 그랬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직 여인들과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데다가, 이 생소한 곳에 오자마자 이 많은 여인들을 한꺼번에 안아 본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의 몸을 씻어 주던 여인이 그중 부드럽고 돋보이는 것 같아 어색함을 숨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애들은 다 돌려보내고 너만 남거라."

"좋아요."

여인이 함빡 웃음을 떠올렸다.

다른 여인들이 다 돌아가자 고요한 욕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성년이 되어 여태까지 여인을 한 번도 안아 보지 못한 구양봉은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 남게 되자 더욱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여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윽고 구양봉은 난생 처음 엄청난 쾌락을 맛보았다.

구양봉이 방으로 돌아와 나른한 기분으로 앉아 있노라니 또 한 여자가 들어와 무릎을 꿇으며 주과(朱果) 한 알을 올렸다. 천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주과인데 먹으면 내력이 커지는 선약(仙葯)이라는 것이다. 구양봉은 두말 없이 그 주과를 받아 먹었다. 첫맛은 좀 씁쓸한 것 같더니 다음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게다가 단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정신이 번쩍 들고 온몸에 기운이 솟는

듯했다.

이어서 여인들 몇 명이 또 안으로 들어왔다.

"구양 공자님께서는 아악(雅樂)을 즐기시는지요?"

구양봉은 너무 기뻤다. 듣기에 공자(孔子)는 아악을 즐기느라고 석 달 동안 고기 맛도 몰랐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아악을 자신이 몸소 듣게 된 것이다.

"전에 주인님께서 이 아악을 구하느라 무진 애를 썼지요. 온 세상을 헤매고도 구하지 못하던 것을 가주님의 하인 한 분이 낙양(洛陽)에서 발견하였지요. 어느 고총을 팠는데 그 고총 안에 이 악보가 있더랍니다. 그래 그것을 정리하니 이런 멋들어진 곡이 되었지요. 공자님께서도 즐겨 들으실 줄 믿습니다."

구양봉은 이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들려 주구려."

구양봉은 미소를 떠올렸다.

일곱 미인들은 일곱 가지 서로 다른 악기를 갖고 있었다. 철쟁(鐵錚)·공후( ) 같은 것은 구양봉도 본 적이 있으나 옹자배기 같은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민간에서 쓰는 호(瓠)라는 악기 같기도 했다.

'사람들 중엔 글 읽는 선비가 되어 일생을 청고(淸高)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청고함이란 참 한심스런 것이구나. 저 악기가 무슨 악기인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귀인에게도 학문이 있고 사치 속에도 학문이 있는 셈이지 뭔가.'

기악 소리가 은은히 울리기 시작했다. 미인들은 제각기 재주를 다하여 구양봉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다.

아악은 확실히 고상한 음악이었다. 바다처럼 의젓한 기백이 흐르는 곡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대지의 광활함과 인생의 기쁨을 감지하게 했으며 세상의 평화로움과 산천경개의 수려함을 느끼게 했다. 그 크나큰 감동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멋지구나, 멋져!"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 소리쳤다.

'글 읽는 선비라는 위인이 여태까지 이렇듯 좋은 음악인 아악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니. 유운장에 오지 않았다면 이 아악을 어디서 들어 본단 말인가? 유운장의 가주는 확실히 아무나 쉽사리 누릴 수 없는 쾌락을 누리고 있구나.'

구양봉은 내심 감탄을 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고 이젠 돌아들 가요. 다음에 또 듣기로 하지."

여인들은 일제히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구양봉을 바라보며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들 그러고 앉았느냐?"

구양봉이 의아해서 물었다.

"공자님께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을 올릴까 합니다."

한 여인이 말했다.

'정풍과 위풍이라니?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구양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 여자들이 정풍과 위풍도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듣기에 공자는 정풍과 위풍이 가장 음탕하다고 하였다는데, 도대체 정풍과 위풍이 어떻기에 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선비들 중에도 정풍과 위풍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기실 그들도 정풍과 위풍을 직접 들어 본 것은 아니고 오로지 공자의 말을 그대로 빌어 쓰는 것이 아닐까?'

"공자님, 저희 주인님께서는 저희를 불러서 언제나 아악을 들은 뒤 정풍과 위풍의 가무를 보시곤 하셨어요. 공자님께서도 정풍과 위풍을 들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좋소, 그렇다면 들어 봐야지."

구양봉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악기들을 만져 보지 못했던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 정풍과 위풍을 연주해 보지 못했던 것인지, 여인들은 구양봉의 말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미묘한 선율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구성지고 애절하기 짝이 없는 기악 소리는 마치 규방의 미인이 우수에 젖은 감상으로 속마음을 하소연하는 듯했다. 기악 소리에 맞춰 몇 명은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악 소리도 듣기 좋았지만 미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여인들은 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구양봉을 싸고 돌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의 마음을

내 가슴에 묻어 주세요

봉긋한 나의 젖봉오리는

그대의 분묘예요

그대의 마음

영원히 내 가슴에 살아 있으리

헤어져 만나지 못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있으리.

달콤한 미녀들의 노랫소리는 점차 노골적인 사랑가로 변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되어 몸이 달아올랐다.

오신다니 기다려요

물이 불어도 기다려요

물이 불어 발목을 적시는데도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오신다니 기다려요

물이 불어 허리를 적셔도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애간장이 타도록 기다리는데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오시려나 마시려나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

이 얼마나 애절한 노래인가? 시시각각 불어 오르는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움직이지 않고 서서 사랑하는 님을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는 그 애달픔, 그 뜨거운 사랑을 미인들의 달콤한 노랫소리로 듣노라니 구양봉의 가슴도 절절한 욕망으로 벅차 올랐다.

오신다니 기다렸어요

물이 불어 목을 넘어도

기다렸어요. 기다렸어요

이대로 나는 죽어요

그대만 홀로 남겨 놓고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물이 너무 깊어

빠질까 봐 겁이 나요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여인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사랑에 미친 옛이야기, 사랑에 미친 한 여인이 사나이를 애간장이 타도록 기다리는 옛이야기, 불어 오르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냥 서서 오로지 사랑하는 이만 생각하는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여인들의 가무에 흠뻑 취한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내게도 저토록 기다려 주는 여인이 있다면……. 아니, 나는 저렇게 기다리게 내버려둘 수 없어. 사람을 기다리는 일처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구양봉이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느닷없이 노랫소리가 뚝 멎더니 여인들이 우르르 다가와 구양봉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저희들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시니 공자님도 다감하신 분이시네요. 공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저희들의 크나큰 복이에요."

여자들은 다시 일어나 되풀이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신다니 기다렸어요

물이 불어 목을 넘어도

기다렸어요. 기다렸어요 ……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곁에 앉아 있던 여인은 매끄러운 손길로 구양봉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구양봉인지라 이내 숨이 거칠어지고 흥분으로 몸이 녹아날 지경이었다.

그림처럼 고운 여인들, 노래처럼 달콤한 여인들, 시처럼 우아한 여인들! 구양봉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제왕도 부럽지 않게 이렇게 살아야 산 보람이 있는 거야. 나 구양봉이라고 이렇게 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 집 주인의 합마공만 배운다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을 테고, 이 강호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다.'

그날 밤, 구양봉은 미인들을 끌어안고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잠결에 그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구양 공자, 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무슨 잠을 이렇게 자나?"

구양봉은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요? 왜 이러시는 거요?"

"내가 누구냐구? 그래,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단 말인가?"

구슬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몽롱하게 보였다. 눈을 비비며 자세히 살피다가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자기에게 집을 내준 그 노인이 앉아 있지 않는가? 노인은 웃는 눈으로 구양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떤가? 이런 향락을 누리고 싶나?"

구양봉은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우리 유운장에는 천하 제일의 미인도 있고 천하 제일의 금은보화도 있고 산 같은 재화도 있지. 난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 말아. 모두 내 마음에 달렸거든.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손아귀에 들어 있네. 기분이 좋으면 천하 재해민들을 구해 주어 집집에서 나의 장생위패(長生位牌)를 모시게 할 수도 있으나, 기분이 나쁘면 무림 파벌 하나쯤 하룻밤 사이에 깨끗이 죽여 없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학벌이 어떤 특출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지. 어떤가? 젊은이,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노인의 물음에 구양봉은 그렇게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려면 나같이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하네.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땐 사람을 죽여야 해. 저 계집들은 내 것이지만 내가 죽이고 싶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릴 수 있어. 며칠 지나 더 예쁜 계집들을 구해 오면 되니까."

노인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들을 하찮다는 눈길로 돌아보았다. 여자들은 이미 노인한테 혼수혈(昏睡穴)을 눌린 터라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유운장의 주인인 이 노인은 천하를 하찮게 보는 명실상부한 영웅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유운장의 주인은 구름같이 떠도는 손님, 운객을 머물게 하면서도 천하 무림을 하찮게 여기는 영웅이다.'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천하에 드문 영웅이 되는 걸세. 기공(奇功)을 지닌 강호의 필수가 되는 거지."

노인의 말이었다.

구양봉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제자가 되어 노인의 무공을 계승하여 천하를 종횡하는 독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제16장 신기한 합마공

세상일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유운장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구양봉은 자신이 이 노인의 제자가 되어 세상 최고의 독물(毒物)이 되기를 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신독행 영감을 스승으로 모시고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기한 술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자그마한 나무집 안에서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말했다.

"이 무공을 난 이제껏 제자들에게 전수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지. 이 기이한 무공은 마음이 아주 독하여 독단 독행하는, 그러면서도 문무가 겸비된 제자에게만 전수되어 내려오는 까닭이지. 무림의 세계에서 무공은 정파(正派)와 사파(邪派) 이렇게 두 개 파로 나뉜다. 정파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정직하다는 뜻에서 정파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배우는 주공이 내

공으로부터 시작한다 해서 그렇게 일컫는 것이야. 어려서부터 내공과 심법(心法)을 수련하여 한 단계씩 순서대로 점진하는데, 이래야 10년에 성(成)이 되고, 20년에 형(形)을 이루고, 30년에 파(派)를 가지며, 40년엔 명(名)이 있어, 50년에 이르러야 엄연한 대가가 되는 것이지. 정과가 무공을 배움이 대저 그러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가?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평생을 모두 무공을 닦는

데만 보낼 수 있겠나? 50년 만에야 대가가 될 수 있다니, 그때에 이르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는데 무공을 닦아 어디다 쓰겠냔 말이지."

구양봉은 노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가르치는 사파(邪派) 무공은 그렇지 않지. 정파 무공처럼 단순히 평(平)·순(順)·달(達)·오(悟)·명(明)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邪)·괴(怪)·독(毒)·한(恨)을 강조하지. 사람들은 합마공이 천하에 둘도 없는, 얼마나 기이한 무공인지 모르고 얕잡아 보는데, 생각해 봐라. 두꺼비만큼 센 것이 어디 있는가? 대저 내공이란 기(氣)를 강구하는 법인데, 세상 만물, 큰 것으로 말하

면 말에서부터 작은 것을 말하면 곤충에 이르기까지 두꺼비처럼 운기(運氣)하여 자기 몸뚱어리를 몇 배 크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기가 이르면 돌도 깨지는 것이 합마공이야. 합마공의 신묘한 용처는 무궁무진하니 다음날 자세히 더 얘기하기로 하자."

노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나만이 갖고 있는 봉황력이라는 경공(輕功)이지. 장자(莊子)의 말대로라면 세상 만물 중에 곤붕(鯤鵬)만큼 큰 짐승이 없는데, 한 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 리를 난다고 해. 그럼 곤붕이란 무엇인가? 곤붕이란 즉 봉황이야. 새들의 왕이지. 새들의 왕이 아니면 어떻게 한 번에 구만 리를 날 수 있겠나? 내 이 봉황력이란 바로 봉황이 나래 치는 자세를 본딴 것인데 도합 13식(式)으로

되어 있지. 이 13식이 천하에 둘도 없는 경공을 이루는 거야. 내 먼저 설명부터 하고 시범을 보여 주지."

노인은 구양봉에게 봉황력 13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상구천(鳳翔丸天)·봉시출소(鳳翅出巢)·단족입애(單足立崖)·일시충소(一翅沖 )·박격만리(搏擊萬里)·봉환소(鳳還巢)…… 이렇게 13식을 차례로 설명한 뒤에 노인은 두 발을 급히 구르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서 쑥 날아올라 열 장도 더 돼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나뭇가지 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노인

은 마치 한줌의 솜뭉치처럼 아주 가볍게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천하에 가장 절륜한 경공이었다. 사막에서 최고의 고수로 알려진 형님이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바람처럼 질주하곤 했지만 신독행과 같은 비상한 재주는 갖고 있지 못했다. 형님더러 신독행처럼 몸을 솟구쳐 열 장 높이의 나무 끝에 솜처럼 가볍게 올라앉으라 하면 올라앉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인은 다시 가볍게 몸을 움직여 나무에서 내려오는 듯하더니 공중에서 자세를 몇 번 바꾸어 다시 나무 끝으로 날아 올라갔다. 아마 이게 봉환소라는 것인가 보았다. 자고로 봉황은 깃들 때 곧바로 둥지에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둥지가 있는 오동나무를 싸고 돌며 울다가 둥지에 든다고 한다. 노인의 동작이 그러했다. 놀란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리개가 날갯짓하며 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구양봉, 내 이 봉황력이란 이름은 장자의 '소요유·북명의 물고기(逍遙游·北冥有魚)'에서 따낸 것이다. 자네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 장자의 이 글을 외워 읊을 수가 있겠지?"

노인의 말에 구양봉은 미소를 떠올리며 또렷한 음성으로 그 글을 읊기 시작하였다.

북쪽 먼 바다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나니 그 이름을 일컬어 곤(鯤)이라고 하였다. 곤은 몸의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곤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일컬어 붕(鵬)이라고 한다. 붕의 등도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붕이 날갯짓하여 높이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리는 채운(彩雲) 같았다. 붕은 광풍이 일고 파도가 하늘로 치솟을 적이면 남쪽 머나먼 바다로 날아가곤

하였다. 남쪽의 먼 바다는 천지(天池)이다.

《제해(齋諧)》란 책은 괴이한 사물만 기재한 책인데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적이면 퍼덕이는 날개에 부딪친 바닷물이 3천 리 밖까지 퉁겨 나가고 대붕은 세차게 이는 선풍을 타고 구만 리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붕은 6월의 세찬 폭풍을 타고 먼데로 날아간다.'

원야 임택(林澤)에 야생마가 달리는 듯한 안개는 티끌이 나는 것인바 그것은 생물이 내뿜는 숨결로 이루어짐이라.

하늘의 푸른 빛깔은 진정 하늘의 본색인가? 하늘은 원래 무한히 높고 멀어 아무래도 그 끝이 닿지 못하는 걸까? 가령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러하리라.

모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가 뜰 수 있는 부력이 모자라고, 웅덩이에 물 한 그릇 부어서는 풀잎밖에 띄울 수 없다. 만약 그릇을 띄우려 한다면 밑에 가라앉고 말 것이다. 물이 너무 얕은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풍력이 강하지 못하면 대붕의 거대한 날개도 힘을 잃게 된다. 그러하기에 오직 구만 리 창공 위라야만이 대붕의 두 날개를 받들어 주는 강대한 풍력이 있을 수 있고, 대붕은 이를

빌어 날갯짓을 할 수 있으며 대붕의 등이 아무런 거침이 없이 창천에 높이 뜰 수 있기에 남해로 날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인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장자의 말이 옳지. 말 잘했어. 내가 평생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장자야. 장자는 처가 죽은 다음 묘 앞에서 술을 먹으며 양푼을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불렀다지? 그야말로 진정한 우리 사파의 인물이야. 생각해 봐라. 사파 인물이 아니라면 그도 여느 정파의 인간들처럼 안 나오는 눈물을 쥐어짜며 꺼이꺼이 남이 듣기도 괴로운 곡을 하느라고 야단했을 게 아니냐? 난 그런 정파 인간들의 위선

을 가장 싫어해. 7척 장검으로 쳐죽이고 싶은 심정이지. 눈에 띄는 족족 모조리 쳐죽이고 싶단 말이야."

유운장에서 노인과 함께 머무는 동안 구양봉에겐 줄곧 떨쳐지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노인이 왜 그 좋은 집에서 살지 않고 하필이면 허름한 나무 구새 안에서 사는지 궁금했을 뿐더러, 제갈정을 비롯한 다섯 형제는 무슨 까닭으로 노인 앞에만 사면 벌벌 떨며 범을 만난 듯 겁을 집어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다짜고짜 유운장에서

도망가라고 권했는지 그것도 시종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한편 구양봉은 노인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문장을 듣는 가운데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묻겠다. 만약 네가 아버지와 처 이렇게 셋이서 한 배에 탔다가 배가 뒤집혀 모두 물에 빠졌다면 도대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구양봉은 잠시 망설이다가 되물었다.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엔 별일이 다 있는 법이지. 가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겠느냐 이 말이다."

구양봉은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 아버님부터 구해야지요. 사람들의 뼈는 아버지한테서 오고 피는 어머니한테서 오는 법인데 부모님부터 구하지 않는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틀렸다. 그 말은 틀려!"

노인이 거칠게 소리쳤다.

구양봉은 노인의 반응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옳아! 노인은 대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처가 있어야 아들딸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말씀은 먼저 처부터 구해야 된다는 겁니까?"

그의 대꾸에 노인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들어 보아라. 나는 40년 넘게 강호를 종횡해 오며 '늙은 독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강호에서 나만큼 독한 사람은 없지. 가령 배가 뒤집어져서 아버지와 처가 모두 물에 빠진 경우 누구를 먼저 건져 낼까. 이건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거야. 만약 아버지가 거부여서 자식들을 호의호식 잘살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아버지부터 구해야 하지.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에게 얹혀 지

내면서 잔소리나 해대는 경우라면 구해 내서 뭣하겠느냐? 처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처가 꽃같이 아름다운 미인이라면 죽게 내버려두긴 너무 아깝지 않느냐? 또다시 그런 어여쁜 아내를 얻을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생기기도 못난데다가 밤낮으로 바가지나 긁는 여편네라면 살려 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만 평생 고생이지. 세상 일이란 이러하니 대장부라면 매사에 과단성 있

게 맺고 끊어야 하는 법. 그래야 큰일을 하는 법이다."

구양봉은 겉으로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배은망덕하게 부모와 처자를 어떻게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노인은 마치 구양봉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나 하는 것처럼 냉소하며 말했다.

"오늘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간 조만간에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밤이 되자 구양봉은 다시 노인의 정실로 가 잠자리에 들었다. 정실에서는 미인들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구양봉의 웃음 소리가 화기롭게 흘러 나왔다. 유운장에 오는 날부터 말 그대로 여색에 빠진 것이다. 문득문득 모용쟁의 얼굴이 떠오르거나 그녀와 함께 별빛 흐르는 사막의 밤을 동행하던 일들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모용쟁은 지금 형님과 함께 풍경이 수려한

강남을 다니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모용쟁은 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을 뿐 자기 같은 책벌레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용쟁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선녀 같은 유운장의 미녀들이 꽃 같은 웃음으로 이렇듯 나를 위해 주지 않는가!'

구양봉은 유운장 여인들 속에 파묻혀 모용쟁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구양봉은 자기를 목욕시켜 주는 두 여자를 끼고 앉아서 서역의 사막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의 풍습과 인정에 대하여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새로 온 녀석이지?"

구양봉은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등뒤 탁자 위에 사숙이라고 불리는 어린아이가 척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구양봉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때 그는 한 팔로는 한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다른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양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초장왕(楚莊王)을 연상하게 했다.

"자낸 아직 속까지는 썩지 않았구만. 늙은 영감네 제자들은 누구 하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썩어 고름이 질질 나지 않는 자가 없는 데 말이야. 자네는 내가 보는 데선 계집들을 끼고 뒹굴지 않는 게 좋아. 그러다가 이 어르신의 비위를 거슬려 놓으면……."

"사숙께서도 재미를 보시겠으면 사숙 마음대로 골라잡으십시오. 유운장에 미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구양봉의 대꾸에 어린아이는 성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아니, 이 어르신이 네 놈 같은 줄 아느냐? 이 어르신은 30여 년을 살았지만 계집들과 놀아난 적은 한 번도 없다."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애가 제갈정네 다섯 형제의 사숙이며 또 제 입으로 서른이 넘은 어른이라고 하니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하지만 그가 신독행의 사제라면 지니고 있는 무공이 매우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 구양봉은 단단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형(師兄)이 자네한테 뭘 가르쳐 주겠다던가? 봉황력과 합마공을 가르쳐 주겠다지?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천하절기(天下絶技)라고 하였을 테고. 그래, 안 그래?"

구양봉은 잠시 무어라고 대답할지 생각이 안 나서 엉뚱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이 우리 사부의 사제가 맞습니까?"

그러자 아이는 자기 가슴을 툭 치며 으쓱해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는 신독행이고 난 사자우(査自雨)라고 해. 알아? 내가 그 영감의 사제라는 건 강호인 모두가 알고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물어 봐."

"저희 사부의 사제시 라면 저에게는 사숙이 되는데, 그렇게 어리디어린 나이에 사숙이 되다니 잘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러자 아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숙이면 사숙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자네같이 도문(道門)에 갓 들어온 풋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저 심보 더러운 제갈정이나 꾀 많은 속문성까지도 내 앞에선 설설 기는 판인데. 이 어르신 춘추가 올해 얼마인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린가?"

"기껏해야 올해 열 살이나 되었겠지요."

아이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너도 시정의 바보들처럼 이 어르신을 열 살로밖에 안 보는구나. 이 어르신은 올해 서른아홉이야. 알겠어? 신축년(辛丑年) 국월(菊月) 초닷새 생이니 어디 꼽아 봐. 올해 딱 서른아홉이 아닌가?"

겉으로 봐선 암만해도 열 살 안팎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한사코

서른아홉이라고 우기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구양봉은 생각했다. 이때 어린아이가 바짝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29년 전 내가 한창 합마공을 수련하고 있을 때 너의 그 망나니 사부가 나를 주화입마(走火入魔)시켰단 말이다. 다행히 내 사부가 구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난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야."

구양봉은 적이 놀랐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합마공은 꼭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해 내려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사부님의 말씀은 그 두 절기(絶技)는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 한다고 하던데요. 저희 사부님께서 합마공을 전수받았는데 어떻게 사숙도 같이 배울 수 있었습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독행을 사부로 삼았으면 신독행한테 가서 물어 보지 왜 나한테 묻나?"

"사숙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사부님께서 솔직한 답변을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테지. 당시 나와 그는 구사독옹(九邪毒翁)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하였는데 그는 스승의 큰 제자이고 나는 스승의 관문제자(關門第子)였어. 사부님은 그한테는 봉황력을 가르치고 나한테는 합마공을 가르치셨지. 그런데 그는 사부님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서, 내가 한창 수련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내 내력을 분산시켜 버렸지. 그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주화입마가 되어 죽을 뻔한 거야,

그런 걸 내 스승님이 구해 주셨는데, 내가 이렇게 자라지 못하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구양봉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봉황력은 사부가 마흔 살 때 자기 스스로 창조한 절세의 경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숙은 그 것이 이 사문(師門)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도대체 어느 말이 옳단 말인가?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사숙께선 어린 나이에 나를 속이는 군요.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네 선생한테 가서 대놓고 물어 보면 될 거 아냐!"

아이는 사납게 내뱉고는 눈물을 훔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말할 수 없이 언짢은 기분이 되어 여자들을 물러가게 한 뒤 정실을 나왔다. 그가 큰 나무 아래에 이르자 사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구양봉이냐? 어서 들어오너라."

구양봉이 허리를 굽히며 나무집 안에 들어가니 사부는 처음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구나무 선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구양봉은 묻고 싶은 말이 속에 가득하였으나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정실에서 재미를 보지 않고 이 음산한 곳엔 왜 찾아왔느냐?"

매우 인정 어린 어조로 사부가 말했다. 순간 구양봉은 마음이 훈훈해지며 방금까지 품었던 온갖 의문들이 봄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사부님이 이 정도로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시는데 사숙의 말에 쉽게 의심을 품다니. 사숙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어. 공연히 사부님 심기만 흐려 드릴 뻔했구나.'

구양봉은 사부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의 방에서 향락을 누리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런 데서 고생하고 계시니 마음이 불편하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양봉, 재삼 일깨워 주는데, 네가 내 두 가지 절기를 익히고 나면 반드시 모든 무림들을 경계해야 한다. 네가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기만 하면 이 신독행은 죽어도 한이 없다."

사부는 절실하고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의 말을 듣는 동안 구양봉은 이제 사숙의 말 따위는 까마득히 잊게 되었다.

'사부님이 이렇게까지 나를 총애하시는데 나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그는 사숙의 말을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구양봉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구양봉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 사부가 물었다.

"오늘 심기가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인데, 그래 어째서 이 밤중에 여길 나왔느냐?"

"제가 정실에 있는데 어린 사숙님이……."

구양봉은 하는 수 없이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하더냐?"

"사부님, 제자는……."

구양봉은 잠시 더듬거렸다.

"내가 자기를 해쳤다고 했겠지?"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곧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기 어린 어조로 사부가 다시 물었다.

"나 때문에 주화입마가 되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고도 말했겠지?"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부는 야릇한 소리를 내며 웃다가 한바퀴 허공돌기를 하더니 구양봉 앞에 똑바로 마주섰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구양봉을 쏘아 보았다.

"네 스승이 그처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이 정색하여 묻는 바람에 구양봉은 가슴이 후두둑 뛰어 급히 대답했다.

"그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의 말을 믿을 리 있겠습니까? 비록 사숙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 놈의 말은 전부 사실이야!"

사부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제 귀를 의심하며 사부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 정도로 지독한 독물이야. 네 사숙을 내가 해쳤을 뿐만 아니라 너의 사형들에게도 내가 손을 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들이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설설 기겠느냐?"

"사부님, 설마……설마 사부님께서……."

"이 놈아, 내가 너를 속여 무엇하겠느냐? 내 다시 일깨워 주지. 장차 강호를 종횡하려면 반드시 독해져야 한다. 독하지 않고야 어떻게 천하를 횡행하겠느냐? 약육강식이라 하였다. 독하지 못하면 독한 남에게 먹히게 되어 있지. 그때 가서 독하지 못했던 걸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부님.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습니까?"

"뭐?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느냐고?"

신독행은 앙천대소하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구양봉, 네가 나로부터 합마공을 배워 내면 네 사형들이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으려고 할 거다. 그 놈들이 불원천리 변경에서 너를 데려온 것은 자기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냐. 내가 그 녀석들한테 독약을 먹여 놓고 매년 봄마다 변경에서 너 같은 사람을 찾아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지. 난 우리 사문의 대를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그 녀석들처럼 아둔하지 않은 후계자를 말이야.

마침 천행으로 그 소원이 실현되었다."

사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이 돌아오자 난 한 놈에게 한 알씩 해독약을 먹였다. 그 한 알이면 명년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니라."

실로 놀라울 일이었다. 구양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도 잘못 보이면 그들처럼 독약을 먹게 되겠구나.'

구양봉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이때 밖에서 사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제자들 알현하고자 합니다."

"봐라. 녀석들이 왔다. 녀석들이 좋은 심보를 가지고 날 찾아올 리는 없고, 나를 죽이려고 왔는지도 모르지."

노인은 낮은 소리로 구양봉에게 말하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구양봉은 눈을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앞에는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가, 뒤에는 언제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너무나 공손한 태도였다.

"사부님, 제갈정 등 제자 다섯이 사부님의 알현을 바라옵니다."

재차 들려 오는 소리에도 사부는 그냥 내다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구양봉에게 다시 소곤거렸다.

"저 놈들 다섯은 언제나 나에 대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 지금도 분명 나를 해치려고 왔을 거야."

구양봉은 도무지 사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형제가 이렇게 야밤에 찾아온 데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때 제갈정이 술단지 하나를 앞으로 내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저희가 이번에 변경에 갔다가 변경 황궁 안에 굉장히 좋은 화주(火酒)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단지 구해 왔나이다. 변경에서 불원천리 가져온 진품인지라 이렇게 들고 왔사옵니다."

구양봉은 속으로 탄식했다.

'사부님이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게야. 저런 제자들을 믿지 못하다니. 사부님께 드리려고 불원천리 변경에서 맛좋은 술까지 구해 오는 제자들을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의심하니 답답한 일이구나.'

"분명 저 술에다가 독약을 풀었을 거야……."

사부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냉소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 늙다리 독물의 제자들이 저 술을 그냥 줄 리가 없지. 제갈정과 속문성도 이젠 독약을 쓰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거든."

이때 제갈정이 마치 사부의 심중을 헤아린 듯 말했다.

"저를 낳은 사람은 부모님이고 저를 아는 사람은 사부님이시지요. 변경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도 사부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화주를, 불공스럽지만 제자가 먼저 검식을 하여 드리겠습니 다."

제갈정은 소매 안에서 술잔을 꺼냈다. 고풍스러운 옥잔으로 달빛에 반사되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 술잔을 본 신독행은 놀라며 물었다.

"제갈정, 그 술잔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이 술잔은 변경 황궁 안의 보물인데 제자가 궁에 들어갔다가 슬쩍 훔쳐내 온 겁니다. 사부님 마음에 드신다면 사부님께 올리겠습니다."

제갈정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옥잔을 손에 드니 화주에 속이 훈훈합니다. 술맛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별맛이옵니다."

그는 술잔을 단지 위에 올려 놓은 뒤 형제들과 더불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부는 새삼 탐욕스런 눈길로 술단지 위에서 빛나는 옥잔을 노려보았다. 부드러운 광채를 뿌리는 옥잔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진품이었다.

"구양봉, 저 옥잔은 필시 그것이다. 그 옥잔이 틀림없어. 이 어르신이 몇 해를 줄곧 생각해 오던 그 옥잔이야. 그런데 제갈정 저 나쁜 녀석의 손에 들어갈 수가 있다니. 하여튼 대단한 놈이다."

구양봉은 사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잠자코 얼굴만 바라보았다. 사부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 술잔은 은나라 주왕(紂王)께서 여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옥잔이다. 한 팔로는 여자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저 옥잔을 들었었지. 주왕은 대단한 풍류객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이 주왕과 같으면야 살아 볼 만하지. 저 놈들이 나쁜 맘을 품고 있든 어떻든 한번 나가 봐야겠다. 옥잔에 화주가 일생에 몇 번 있겠느냐?"

사부는 천천히 나무집에서 걸어 나갔다. 그는 술단지 앞으로 가서 옥잔을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추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그는 제갈정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들 정성으로 이 좋은 술을 옥잔으로 마시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그리고는 석초수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술에 무슨 다른 건 없겠지?"

석초수는 흠칫 놀라며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나와 더불어 몇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담만 커져서 못하는 짓이라곤 없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사부의 말에 제갈정 일행은 쩔쩔매며 몸둘 바를 몰랐다.

사부는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술단지를 덮은 마개를 떼어 던져 버리고는 옥잔으로 술을 휘저었다. 그윽한 술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사부는 더는 말하지 않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일단 맛을 본 그는 아예 술독을 끌어안고 몇 잔을 거푸 퍼마시더니 입을 닦으며 다섯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술맛 참 좋다. 제갈정, 그래, 이렇게만 이 사부님을 모셔라. 그러면 앞으로 꼭 좋은 일이 있을 게다."

"사부님, 화주란 독한 술이오니 과음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속문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뭣이 어째? 아니, 날 단속하려 드는 거냐?"

사부는 대뜸 눈을 부릅뜨며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쇠 돌 깨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속문성의 이마에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자들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순식간에 술단지는 동이 났다. 빈 단지를 들여다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쨉쩝 다시던 사부는 급기야 푸르르 역정을 냈다.

"제갈정, 이 얼간이 같으니.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느냐?"

제갈정이 몸을 떨며 대꾸했다.

"저희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부님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습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이 좋은 술을 왜 딱 한 단지만 가져왔느냐, 엉!"

구양봉은 사부의 행동거지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미 한번 고약한 늙은이군. 제갈정네 형제들은 참 어진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사부의 입에서 '윽'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곧장 몸을 날려 제갈정을 덮쳤다.

미리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듯 제갈정 일행은 날쌔게 피해 물러났다.

"이……이 놈……이……놈들이 나를 독살시키려고 했겠다?"

노인은 서릿발같이 매서운 표정이 되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꺾고 앉아 내력을 운기하여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본 제갈정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성공이다, 성공! 망할 놈의 영감탱이야, 우리 손에 꺼꾸러져 봐라."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은 사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몇 걸음 다가오다가는 겁이 나는지 그저 에워싸고만 있었다.

사부는 오랫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제갈정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네가 우리를 제자로 보지 않는데 우리가 너를 사부님으로 섬길 줄 알았느냐? 우리 모르게 독초를 먹이지를 않나, 우리 집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놓고 협박하지를 않나. 그 동안 네 놈이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쳐죽여도 분이 안 풀린다. 이 망할 놈아, 너 같은 건 하루빨리 죽어야 해. 너 같은 것이 죽으면 이 세상에 독물이 하나 줄어들고 큰 화근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좋

은 일이냐?"

구양봉은 사부를 구할 마음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제갈정 다섯 형제를 당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노인이 속문성을 쳐다보며 사정했다.

"문성아, 넌 어려서부터 날 따랐지 않느냐? 내가 너를 세 번이나 살려 주었는데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를 해치려 한단 말이냐? 내가 내상을 치료할 동안만 날 보호해 다오. 내 몸이 회복되면 꼭 너에게 합마공을 가르쳐 주마. 유운장의 제5대 장주가 되게 해 주마."

사부의 말에 구양봉은 한가닥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속문성이 사부의 말을 듣고 사부를 도우려고만 하면 그의 무공과 기지로 사부를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부님, 저한테 정말 합마공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선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문성아, 나를 구하지 않고 어딜 가는 게냐?"

"구양봉이란 녀석을 요절내고 오겠습니다."

속문성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애를 왜 죽인단 말이냐?"

"그 놈을 죽여야 사부님이 나한테 합마공을 가르쳐 주실 거 아닙니까?"

속문성은 노인을 떠보듯 음흉스레 웃었다.

노인은 그만 할말을 잃었다. 노인은 구양봉을 죽이기 싫었다. 구양봉의 행동과 처사가 자신과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천 리나 먼 변경에서 그 같은 사람을 데려오기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재를 함부로 죽이기란 너무 아까웠다.

"날 속이려 들다니. 내가 속을 줄 알았나? 이 망할 늙은이를 그냥……."

속문성은 당장이라도 쳐죽일 듯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은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제갈정네 다섯은 변경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밤낮으로 사부 신독행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해 왔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온 것이다.

"신독행, 독공비적(毒功 籍)도 이리 내고 합마공도 바쳐라! 그러면 편히 죽여 주겠다."

제갈정이 강요했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속문성이 부드럽게 구슬렀다.

"사부님, 극독이 이미 몸에 배어 골수에 미쳤으니 가만 놔 두면 조만간 죽습니다. 그 두 가지 무공을 우리한테 넘겨주면 죽어도 편히 죽게 해 드리겠다니까요. 어떻습니까?"

"사부님, 어서 말씀하세요. 사부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큰형님도 둘째 형님도 사부님이 편하게 눈을 감게 해 드린답니다."

석초수도 거들었다. 한쪽에 선 두 젊은이는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신독행이 세상을 횡행하다가 너희 같은 망나니들한테 죽게 될 줄은 참으로 몰랐구나."

신독행이 길게 탄식했다. 제갈정은 득의양양해서 웃어댔다.

"어차피 내 손에 죽게 된 마당에 말이 많구나."

그는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넷째 동생과 다섯째 동생, 동생들 둘이 덮쳐서 한 사람이 일장 씩 갈겨 뼈가 부러지도록 중상을 입혀 놓게."

벙어리처럼 과묵한 장한 둘은 제갈정과 땅에 앉아 있는 사부를 번갈아 보면서 몹시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사형들과 뜻을 같이하긴 했으나 막상 자기들 손으로 사부를 죽이자니 망설여졌던 것이다.

"우리 형제들 다섯이 모두 손을 써야 해.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 명은 우리 모두 함께 감당하는 거다. 누구도 발뺌을 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제갈정이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 앞에 이르자 하나가 불쑥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한 뒤 결연히 몸을 일으키더니 단번에 노인의 왼쪽 어깨를 한 장 갈겼다. 힘을 반밖에 넣지 않았는데도 노인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왈칵 피를 토했다.

다른 하나도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노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노인은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기침을 하며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제갈정이 비아냥거렸다.

"사부님, 이미 그 지경이 된 바엔 죽는 편이 더 나을 거외다. 그 많은 금은보화에 그 많은 천하절색을 거느리고서도 마음놓고 한 번 즐겨 보지 못하고 밤낮 나무에만 거꾸로 매달려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뒷일일랑 염려 붙들어매시고 가기나 하시구려. 가신 다음 장사만큼은 후하게 지내 드리리다. 사부님께서 아끼던 금은보화 십분의 일쯤 순장품으로 넣어 드리고 사부님께서 총애하

던 계집들도 몇은 순장을 시켜 딸려 보낼 생각이오. 어떻습니까, 사부님?"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사부님, 사부님의 그 창자가 끊어질 듯한 독초는 내가 이미 손에 넣었습니다. 그 따위로 우리 형제를 협박할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요."

속문성이 낄낄거렸다.

제갈정이 석초수에게 일렀다.

"셋째 아우, 이번엔 아우가 저 화상을 한 대 갈기게. 조심해서 저 화상의 한쪽 다리만 부러뜨려 놓게."

그러자 석초수는 어두운 기색이 되며 머뭇거렸다.

"셋째, 왜 꾸물거리나!"

제갈정이 엄하게 다그쳤다. 옆에서 지켜 보던 속문성이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가만, 내가 잊을 뻔했군. 자네가 손을 대지 않으면 자네 처는 오늘 중독이 되어……."

석초수가 급히 외쳤다.

"둘째 형님,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돌아가지 못하면 절명단(絶命丹) 한 알을 셋째 제수에게 먹이라고 내 처에게 당부해 놓고 왔을 뿐이야."

속문성은 음흉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되자 석초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좋소. 형님들 말을 들어야지요."

석초수는 신독행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친 뒤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사부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의 일장에 신독행은 몸서리쳐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푹 거꾸러졌다.

제갈정과 속문성은 서로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요.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쓸까요?"

"우리 둘 중 어느 한 사람만 손을 써도 숨이 끊어질 테니 아우가 마저 끝을 맺어 버리게나."

제갈정이 잔인하게 웃었다. 마치 양보라도 하는 듯한 제갈정의 태도에 속문성은 혐오감을 느꼈다.

'나한테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나중에 나마저 해치우려는 수작이로군. 내가 그 따위 흉계에 걸려들 줄 알고?'

하지만 차마 제갈정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갈정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다가는 당장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신독행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제자 인사 올립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읍만 세 번 했다. 그러자 석초수가 나무랐다.

"둘째 형님, 우린 모두 사부님께 큰절을 했는데 형님께선 왜 읍만 하십니까?"

속문성이 대꾸했다.

"큰절하는 놈은 큰절하는 이유가 있고 읍하는 나는 읍만 하는 까닭이 있지. 사부님은 나를 자네들을 대하듯 잘 대해 주지 않았어. 사부님이 지닌 절기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나에겐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나로선 이 정도도 대단한 인사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훌쩍 뛰어오르더니 신독행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노인은 이제 살 가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스러웠다. 그는 절단난 노인의 오른쪽 다리를 가슴 아프게 바라 보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혼절해 넘어졌던 노인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다섯 형제를 노려보더니 독한 웃음을 사려 물었다.

"나를 그렇게 수월하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제갈정 이 놈, 네가 덤벼라. 난 네 놈 손에 죽겠다."

제갈정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속문성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노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사부님의 최후를 장식해 드릴 테니까요."

제갈정은 노인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천천히 치켜 들었다. 그가 한 번만 내리치면 노인은 그대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조급해진 구양봉은 그대로 뛰쳐나가 다섯 형제와 죽기살기로 싸워 볼 작정을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참 답답한 일이로군. 구해 주자니 내 마음이 허락칠 않고, 그렇다고 제갈정 같은 망나니들이 자기 사부님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자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구사독옹 문하를 손가락질하며 웃을까봐 무섭고. 그렇게 되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 밥을 먹겠는가? 이 어르신이 눈을 뻔히 뜨고 있는 한 이런 짓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놀란 제갈정이 사위를 둘러 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숙님, 할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말하시오. 왜 숨어서 그러십니까?"

제갈정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왜 나서라는 건가? 내가 나가기만 하면 자넨 낭패를 볼 텐데."

아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사숙님, 사숙님도 사부님께 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이 이러는 것이 기실은 사숙님 분풀이를 해 드리는 게 아닙니까?"

제갈정의 말에 아이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그래도 안 되네. 자네들이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이 강호에 퍼지면 내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니겠냔 말야. 그럴 바엔 내가 죽이는 편이 낫지. 나와는 형제지간이니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은 아니 들을 게 아닌가? 내 말이 어떤가?"

그의 말은 제갈정에게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사실 노인을 죽일 작정은 했으나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명을 들을 일이 내심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자기 대신 이 일을 책임져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다 노인은 이미 다리가 끊어지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더는 걱정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사숙님, 사숙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저희로선 기쁜 일이지요."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자 사숙이 조르르 달려나와 노인 앞에 턱 버텨 섰다. 그는 자기 사형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안됐구려. 그 총명하신 양반이 어리석을 때는 또 한없이 어리석거든. 제갈정이 평소 형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형님도 잘 알고 있었으련만 이렇게 저들 올가미에 걸려들다니."

그는 제갈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독약을 썼기에 독약에 대해서는 세상 으뜸인 너희들 사부를 다 꺼꾸러뜨렸지?"

제갈정은 내심 우쭐하였으나 겸손을 가장하여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번에 변경에 가서 제법 멋들어진 처방을 얻어 왔는데, 반독(半毒)·반독(半毒)·반독(半毒), 즉 '삼반(三半)'이라고 하지요. 소상히 말씀드리자면 술에 독이 절반 있고 옥잔에 독이 또 절반 있고 사람에게 독이 또 절반 있는데 이 세 가지 독이 합쳐지면 누구든지 죽고야 마는 그런 처방입니다. 사부님께선 이 세 가지 독을 모두 가지게 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이지요."

아이가 뒷짐을 진 채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제갈정, 사람에게 독이 절반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사숙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고 있는 제갈정은 그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얼른 대답했다.

"그건 말입니다, 술은 화주이기에 맹렬하고 강한 물건이고 옥은 찬 물건인데, 그 옥잔에 화주를 먹으면 음양이 서로 조화되어 사람에게 대단히 이롭지요. 하지만 음기가 과한 사람이 마시면 음위(陰淮) 양위(陽淮) 두 맥이 상하게 되어, 사람에게 절반의 독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 가지 독이 한데 엉키면 죽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제갈정의 말에 아이는 땅 꺼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노인을 향해 말했다.

"자업자득이라고, 악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끝을 못 맺는 법인데, 형님은 지금 후회되는 일이 없소?"

"후회는 무슨 후회! 난 오직 저 놈들을 쳐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노인은 이를 갈았다.

아이는 눈을 굴리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손뼉을 짝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솔직히 말하면 형님을 가장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요. 그런데 난 지금 제갈정도 미워하오. 글쎄 제갈정의 여편네는 나한테 엿을 주지 않지, 아들 녀석은 나하고 싸우려고 하지, 이것들한텐 위아래가 없다니까. 덜돼먹은 인간들이지요. 저 속문성도 마찬가지요. 그 여편네는 귀신 대가리 두꺼비 눈깔을 해 가지고 속문성보다 더 못돼 먹었어요. 유유상종이라더니 부

부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내 저것들 버릇을 좀 단단히 고쳐 놔야겠소. 형님께서 돌아가시면 저 자식들이 날 안중에도 안 둘 것인데, 안 되겠어. 형님을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지."

아이는 갑자기 동정심까지 생기는지 조그마한 손으로 신독행의 얼굴에 흐르는 피까지 닦아 주었다.

"사숙님, 그 따위 헛생각 말아요. 우리 다섯이 손을 쓰면 사숙 혼자서 견디기 힘들 거외다!"

제갈정이 소리쳤다.

"좋다. 그럼 싸워 볼까?"

아이가 흔쾌히 말했다. 그는 곧장 제갈정에게 덮쳐들 듯하다가는 갑자기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참, 한 가지 잊었군. 아주 중요한 걸 깜빡 잊어먹을 뻔했어. 그는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석초수를 가리켰다.

"네 이 놈 셋째야, 내가 금방 네 집에서 네 처와 함께 햇비둘기를 구워 먹었는데, 글쎄 햇비둘기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네 처가 까무러쳐 넘어지더구나. 날이 무덥지도 않은데 갑자기 더위를 먹은 건가?"

그 말에 석초수는 크게 놀라 당장 집으로 달려갔다.

"서둘러라. 잘못하면 그 사이에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석초수의 등에 대고 소리친 뒤 킥킥 웃으며 이번에는 속문성을 향해 말했다.

"속문성, 너도 여편네가 어떻게 됐나 집에 가 보지 그래?"

속문성이 음산하게 대꾸했다.

"소인의 여편네야 늙어 볼 것이 없으니 차라리 사숙님 손에 죽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젊고 이쁜 여편네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보다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속문성이 끄떡도 하지 않자 아이는 내심 당황했다. 이때를 틈타 제갈정과 속문성, 그리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아이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아이는 더럭 겁을 집어먹으며 소리쳤다.

"야단났네. 야단났어! 이 놈들이 사람 죽인다!"

그러나 유운장에서 이곳은 금지 구역으로 누구 하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어린애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달려나와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제갈정을 보고 웃었다.

"아 참, 나한테 사탕이 원래는 여섯 알이 있었지. 그런데 내가 하나 먹었으니 몇 개 남았겠나?"

아이는 제갈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마를 탁 쳤다.

"다섯 개가 남아야 하는데, 보라구. 몇 개 남았나? 네 개밖에 없잖나. 이거 큰일났군. 제갈정, 자네 손자 녀석이 내 사탕을 한 알 훔쳐먹은 게 틀림없어!"

제갈정의 안색이 확 변했다. 주춤거리자 속문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형님, 사숙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오. 사숙을 죽이면 해독약 정도 찾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오."

"흥, 과연 그럴까? 난 주머니에 사탕을 열일곱 개나 가지고 다니는데 어느 것에 어떤 독이 있는지 알고 해독약을 쓴단 말이냐? 사탕알마다 독이 다른데 그걸 먹여 보다간 네 손자 녀석은 목숨이 끊어지고 말걸?"

아이는 고개를 비딱하니 젖히고 소리 내어 웃어댔다.

 

 

 

제17장 새로운 시작

잔인무도한 제갈정이지만 자기 손자만은 몹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손자가 독사탕을 먹었다는 말을 듣자 몹시 불안해졌다. 일순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사부를 죽이려고 작심한 지 10여 년이나 되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지만 어린 손자의 생명도 경각을 다투는 판이니 방심할 수가 없었다.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형님, 사숙의 말을 곧이듣지 마시오. 거짓말입니다."

속문성이 소리쳤으나 어린 손자 녀석에 대한 근심만 더해 갈 뿐이었다.

"사숙님, 정말 우리 손자한테 독사탁을 먹였단 말씀입니까?"

제갈정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 같은 어린 사람들의 말엔 거짓이 없어. 내가 자네들처럼 거짓말로 밥벌이하는 줄 아는가? 우린 거짓말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자, 보라구. 가슴이 뛰길 하나 얼굴색이 변하길 했나?"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때 갑자기 제갈정이 소리쳤다.

"아서라, 멈추지 못할까!"

제갈정과 사숙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속문성이 신독행을 죽이기 위해 슬그머니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양호위환(養虎爲患)이란 말도 모르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조만간 우리가 해를 입습니다."

속문성의 말에 제갈정은 성난 얼굴로 고집했다.

"잔말 말고 내 말 들어!"

제갈정은 속문성을 노려보았다. 제 자식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제갈정은 속문성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숙은 가냘픈 숨을 몰아쉬는 신독행과 망설이고 있는 제갈정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제갈정이 문득 물었다.

"사숙님, 저희들이 사부님을 놓아주면 사숙님도 우리를 놓아주겠지요?"

아이는 깊이 생각해 보는 척하다 한참 만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녀석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구나. 기다려라, 조만간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있을 게다.'

제갈정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정중하게 물었다.

"사숙님께서 해독하는 처방을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셋이 집에 돌아가 해독을 시키지요. 사부님 일은 사숙님께 맡기겠습니다."

아이는 이에 두말없이 주머니를 뒤져 알사탕 두 알을 꺼내 제갈정과 속문성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서, 어서 가지고 가라. 다시 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제갈정과 속문성은 그 알사탕이 도대체 진짜 해독제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심스런 마음을 숨기고 일단 가져다가 먹이고 보자는 심산으로 급히 그곳을 떠났다.

아이는 신독행을 살피고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나무집 안을 향해 꽥 소리쳤다.

"이 녀석, 냉큼 이리로 나오지 못할까!"

그리고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식, 대단한 놈이군. 늙은 독물과 꼭 같아. 사부님이 죽어 가는데도 제자란 녀석이 꼼짝도 않고 제 목숨 부지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 형님, 천하에 인종이 많아도 이런 인종은 드문데 어떻게 이렇게 형님이 몽땅 긁어 왔소?"

그러다가 그는 재차 꽥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 이 자식아, 냉큼 나오지 못해!"

구양봉은 내심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님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제자로서 나가 보지조차 않았으니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사부를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았겠는가.

구양봉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밖으로 나갔다.

달빛 아래 꼬마 사숙이 서 있고 그 곁에는 기절해 쓰러진 신독행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신독행에게 다가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았다. 스승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 보니 겨우 실낱 같은 숨결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초조와 불안에 싸인 구양봉이 아이를 향해 물었다.

"사숙님, 사부님께선 과연 회생할 수가 있을까요?"

구양봉을 보는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에 없는 소린 하지도 마. 네 사부가 죽으면 너야 좀 좋으냐? 그 두 가지 절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심산에 들어가 수련만 제대로 하고 나면 고금에 위풍을 떨치는 무학 대가가 될 텐데 말야. 넌 아마 사부님이 죽으면 속으로는 춤을 출 게다."

그 말에 당황한 구양봉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더듬거리며 변명하려 하자 아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다. 됐어. 나와 같이 사부님을 정실로 모셔 가기부터 하자."

구양봉은 아이와 함께 사부를 맞들고 조심스레 정실로 향했다. 몸을 움직이자 고통이 느껴지는지 신독행은 처절한 신음 소리를 냈다. 아이가 중얼거렸다.

"이런 꼴에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물로 자처하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게 총명하다는 사람이 제자들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불쌍도 하지."

구양봉은 입을 다문 채 사숙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의 일세영명(一世英名)이 이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구나. 사람이 살려면 정말 독하지 않고는 안 되는가 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사부님이 제자들에게 독하게 굴지 않았던들 제갈정네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을 모의했겠는가…….'

정실로 들어간 그들은 노인을 큰 옥침대 위에 눕혔다. 종잇장같이 창백해진 신독행은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봉과 아이는 옆에서 조용히 노인을 지켰다.

어느덧 날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닭이 홰치는 소리와 더불어 유운장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마치 신독행이 깨어나면 찔러 죽이기라도 할 듯이 단도를 쥐고 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신독행은 숨이 막히는 듯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하지만 아이는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앉아 뱅그르르 몸을 돌리는 재미에 빠져 신독행의 생명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 같았다.

"사숙님, 사부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구양봉이 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아이는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웃어댔다.

"네 사부의 목숨은 천하에 가장 뛰어난 의원이 와도 구해 내긴 다 틀렸어. 그러니 우리 같은 것이 암만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낸 그저 눈물 몇 방울 쥐어짜는 성의나 보이면 돼."

"사숙님, 이 궤짝에 가득한 약 가운데 소용되는 약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사부님께 드리려면 어떤 약이 좋을까요?"

"그래, 그래. 약을 먹여, 약을 먹여야지. 독약을 먹여 죽으면 모든 것이 시원하게 끝이 나는 거고, 좋은 약을 먹여 되살아나면 비록 큰 효과는 없다 해도 몇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겠지."

아이는 공연히 신명이 나서 떠들더니 약상자 앞으로 냉큼 뛰어갔다.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약이나 마구 가져다가 신독행의 입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신독행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들은 신독행의 입가에서 흘러내려 비단 이불을 더럽혔다.

"왜 이 모양이야! 약을 먹어야지. 약 먹어, 약을 먹으라니까."

아이는 짜증스레 떠들어대더니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신독행의 입을 벌리고는 다시 약을 던져 넣었다. 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덜미의 대혈을 꼬집자 약이 목구멍으로 굴러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환약 하나가 너무 큰 탓인지 목구멍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아이는 신독행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사정없이 북 치듯 하는지 구양봉은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주먹으로 두드린 탓인지 목에 걸렸던 약은 신독행의 목을 넘어 뱃 속으로 쑥 내려가는 눈치였다.

신독행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암담한 우수와 처량한 비애가 서린 눈으로 아이와 구양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가 날 구했구나."

노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형님이 뭐 좋다고 내가 구해 줘? 난 형님을 사람으로도 안 보는데."

아이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내가 너를 두 번 구해 주고 이번엔 네가 날 두 번째로 구해 주었으니 우린 서로 빚갚음을 한 셈이구나. 다음엔 너도 날 죽일 수 있고 나도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인간 봐라? 목숨이 겨우 붙어 있으면서도 다음 타령이네?"

아이가 빈정댔다.

"개 같은 자식, 죽지 못해 까부느냐?"

신독행은 노하여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냉큼 침대 머리맡에 올라앉더니 신독행의 얼굴에 대고 사설을 늘어놓았다.

"20년 전 형님이 맞아들인 제자가 누구요? 제갈정이지? 제갈정이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악인이 없다고 좋아하며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어떤가? 아둔하고 심보 더럽고, 악인도 제대로 된 악인인가? 이런 제자를 둔 게 잘했소?"

"글쎄 그건 잘못했네."

노인은 한탄했다.

"잘못한 줄 알면 어디 그 악과가 어떤지 맛 좀 보시오."

아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독행의 입 언저리에서 수염 몇 개를 쭉 뽑아 들더니 입으로 휘휘 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5년이 지나 또 술집에서 거렁뱅이 떼를 만났는데 그 거렁뱅이들이 마침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패고 있었지. 그 아이가 급한 나머지 거렁뱅이 주머니에서 독사를 뽑아 내어 휘둘러 댔겠다? 독사한테 물린 거렁뱅이들이 아우성 치며 야단이 났었는데 이것을 보고 형님은 그 아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이라고 기뻐하며 데리고 와 둘째 제자를 삼았지요? 그런데 이 속문성이라는

둘째 제자도 음흉하고 괴벽한 엉터리 악종임을 누가 알았겠소? 제자감이 아닌 걸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래 이건 잘못이 아니오?"

신독행은 역시 풀이 죽어 대꾸했다.

"잘못이지, 그것도 큰 잘못이지. 세상에 진정한 악인이란 드물거든."

아이는 그 말에 히죽 웃더니 또 잽싸게 신독행의 입에서 수염을 몇 가닥 뽑아 냈다. 신독행의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구양봉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말끝마다 운운하는 그 진정한 악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부님, 사숙님, 두 분께선 말끝마다 진정으로 큰 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진정한 악인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구양봉이 참다못해 이렇게 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날 보고 네 사부님을 보면 안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 큰 두 악인들이다. 난 형님보다 못됐고 형님은 나보다 악하고."

아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신독행이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나보다 악하고, 내가 너보다 못됐지."

둘은 누가 더 악한가를 가지고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아이가 먼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만둡시다. 그만둬요. 나이 먹은 늙은이가 나 같은 어린애와 다투다니, 나이가 아깝지 않소?"

"이 녀석아. 네가 아이냐? 자라지 못해 그렇지, 꾀는 누구보다 멀쩡한 놈이."

둘은 또 옥신각신하였다.

"사부님, 사숙님, 진정한 큰 악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갈정이나 속문성도 큰 악인에 드나요?"

구양봉이 물었다.

신독행이 말 같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아이 쪽에서 입을 열었다.

"우리 구사독옹 문하는 악인도 여느 악인이 아니라 천하의 가장 큰 악인이 되는 게 소원이지. 평생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첫번째는 진나라 개국 황제인 진시황 영정이야. 그는 젊어서 진왕(秦王)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중부(仲父), 기실은 그의 친아버지인 여불위를 죽였지. 그리고 그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살아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을 산 채로 마대에 넣

고 때려죽였어. 그리고 6국을 삼키고는 6국의 재물은 물론 미녀란 미녀들은 몽땅 수레로 끌어다가 몇십 리나 되는 아방궁을 지어 놓고 밤낮으로 뚱땅거리면서 온갖 향락을 다 누렸지. 후에 그가 죽자 다른 사람이 그 아방궁에 불을 질렀는데 타는 데만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나? 그래 이 진시황이 천하 최고의 악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신독행도 진시황을 흠모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악인은, 그 사람은 당나라의 두 황제와 놀아난 여인인데, 태종과 고종 두 황제의 귀비가 되어 황후 노릇을 했지. 아들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서는 태후 노릇에 성이 안 차 아들을 제치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지,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한고 자기 이름은 무조(武 )라고 부르게 했는데, 이 조( )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글자로 해와 달이 떠있는 하늘이란 뜻이지. 그러니 그 야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잖아? 그리고 여자만 남의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을 것이 아니라 남자도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서 남자들을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는데,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파리 잡듯 죽여 버리곤 했지. 그리고 계집들도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그땐 여자들도 재주가 있으면 과거하여 벼슬할 수 있었지. 이렇게 그 여자로 인하여 천하의 남자 일과 여자 일이 뒤

죽박죽 뒤집어지게 되었어. 사람이 살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주 큰 재주잖아?"

신독행은 어느새 숙연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대해 경모의 심정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그들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시황 영정을 폭군이라고 한다. 6국을 삼키고 무고한 사람을 수 없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중부를 죽였으니 인정이 없고, 동생들을 산 채로 때려죽였으니 의(義)가 없고, 장성을 쌓느라고 무수한

창생을 죽였으니 제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해도 폭군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폭군을 숭배하면서 그런 사람이 되기가 소원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게다가 여인이라면 단정하고 현숙하고 부드러워야 할진대 남자처럼 세상을 쥐고 흔들려 해서야 어디 여인다운 여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측천무후가 대주 황제가 된 다음 후궁엔 남자 첩이 활개치고 음탕한 일이 천하에 널리 퍼졌는데

세상 천지에 이런 악한 여자는 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부와 사숙이 그런 측천무후를 이토록 칭송하니 구양봉으로서는 납득하려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어이가 없어 멍청히 앉아 있자 아이가 놀리듯 말했다.

"자낸 나쁜 일을 하고 싶지 않나? 나쁜 짓을 하다가 남에게 들킬 때 기분이 어때? 기쁘지 않아? 악인이 돼 봐. 제 마음대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어 좋거든. 세상에 큰 악인이 또 하나 있는데, 나와 네 사부님이 모두 감복하는 사람이야. 그 악인이 누군가 하면 남송의 재상 진회란 인물이지. 그만하면 나쁜 것도 합격이고 악한 것도 합격이야. 남송 천하를 아예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거든.

뻔히 이겨 놓고도 악비를 억울하게 죽이고 금에게 노예처럼 해마다 숱한 공물을 바치게 하였으니 날고 뛰는 사람이 아닌가? 천하에 악인이 적지 않지만 진회처럼 나쁘고도 능력 있는 자는 별로 없거든. 듣자 하니 임안 철왕묘(鐵王廟)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진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처인 왕씨라더군. 어떤 사람이 진회의 동상을 보고 성이 나서 주먹질을 냅다 했

는데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몰랐을 정도래. 진회에 대한 증오심이 그 정도면 진회는 실로 굉장한 악인이지. 자네도 악인이 되려면 제멋대로 아무 짓이나 할 줄 알아야 하네. 남이야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말야.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기나 하나?"

구양봉은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는 글을 읽으며 언제나 선악을 분별하여 자기를 단속하는 삶을 살아왔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건 상상조차 안 해 봤다. 정말 사람이 저 하고 싶은대로 자유자재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쾌락일까?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도덕과 윤리는 꼭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닐까? 구양봉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때 신독행이 말했다.

"구양봉, 머잖아 제갈정 패거리가 다시 돌아와 날 죽이려고 할 게다. 두고 봐라,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구양봉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제갈정이 사부님께 사죄하러 온다면 모르겠지만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이 할말을 찾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는데 신독행이 그의 귀에 대고 다시금 소곤거렸다.

"난 아무래도 살 것 같지 않구나. 너는 이미 나한테서 신공 두 가지를 얻었으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어서 달아나거라. 내가 죽기만 하면 사숙도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을 거다. 죽일 거야."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사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부님을 구해 준 사숙이다. 그런데 설마 나를 죽이기야…….'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사숙을 바라보았다. 구양봉은 사숙이 금방 세 악인을 칭송하던 말을 떠올리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사부를 저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사부님, 전 여기서 사부님을 구완하겠습니다. 사부님께는 현재 병구완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네 사숙은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도망가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

사부는 한숨을 쉬었다.

구양봉은 사숙을 돌아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죽일 테면 죽이라지.'

밤은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흘러갔다. 세 사람은 이제 지친 듯 각자 침묵을 지켰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일이 지나면 저 구양봉도 진정한 대악인이 될 놈이다. 나만 살아 있으면 구양봉은 성미도 점차 사납게 되고 사람도 점차 악하게 되어 나 같은 늙은 독물이 될 것인데, 내 목숨이 경각을 다투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저게 약빠르지 않으면 저 조그만 귀신 같은 녀석이나 제갈정 패거리에게 꼼짝없이 당할 텐데. 그러면 구양봉에게 가르친 신공 두 가지가 그들의 손에 넘어갈 게

뻔한 데, 차라리 구양봉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구양봉은 사숙이 어린 몸에 고생이 많다는 생각에 신독행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지 못한 채 말했다.

"사숙님, 사숙님은 돌아가 쉬시지요. 제가 사부님을 돌봐 드리다가 임종하실 것 같으면 사숙님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숙은 빙긋이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그르치지 않지."

"큰일이라니요? 무슨 일인치요? 저한테 알려 주시면 제가 때를 어기지 않고 깨워 드리지요."

"네가 날 깨워 줘?"

사숙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 뭘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난 네 사부님이 숨을 거두면 두 가지 일을 해낼 계획이야. 한 가지는 화공대법(化功大法)으로 네 사부의 공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네 사부의 몸을 들추어 그 두 신공을 적은 비적을 찾아내는 거야. 그런데도 날 깨워 주겠다는 겐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사부님, 저 사숙님이 지금 농을 하시는 겁니까?"

신독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농이 아니다. 내가 죽고 나면 너도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 시체를 짓이겨 맘껏 원한을 풀 게다."

구양봉은 비로소 자신이 처한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사부는 비록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하나? 사부님이 돌아가시면 나 혼자서 싸워야 하는데 좋은 방책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부의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숨결도 점점 가늘어졌다. 구양봉은 황황한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부가 죽으면 자기는 사숙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밤이 깊어 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부가 힘없는 목소리로 사숙을 불렀다.

"자우(自雨), 여보게,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몇 마디 가르칠 테니 옆에서 엿듣지 말게."

그러자 아이가 화를 벌컥 냈다.

"둘 다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엿들을 필요가 뭐 있소? 난 형님이 죽고 나면 저것도 죽일 작정이오. 그러면 저것이 무릎을 꿇고 손발이 닳도록 빌며 목숨을 구하고자 봉황력과 합마공의 비결을 토설할 게 뻔한데 내가 뭣 때문에 좀스럽게 엿듣는 짓을 한단말요?"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려 주면 구양봉이 자네를 이길 텐데 겁나지 않나?"

"구양봉이 아무리 무공을 닦은들 한 마리 두꺼비밖에 더 될까? 겁나긴 뭐가 겁난단 말요?"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구양봉, 내 곁으로 가까이 좀 오너라."

구양봉은 사부의 말대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부의 창백한 모습에 구양봉은 목이 메었다.

'사부님이 죽더라도 그 시체를 사숙이 능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숙의 손아귀에서 사부님을 구해 내야 할 텐데……."

구양봉은 암만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사숙이 사부님을 다치기만 하면 나도 생사 결단으로 사숙과 싸우리라.'

신독행은 구양봉을 향해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내가 죽게 되면 네 사형들처럼 속으로 기뻐하겠지?"

사부의 뜻하지 않은 말에 구양봉은 급히 대답했다.

"사부님, 전…… 전……."

기뻐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늙은 독물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사부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 사숙님이 사부님을 손대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 뿐입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한동안 숨을 헐떡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 신독행은 평생 악한 짓만 한 사람인데 너와 같은 착한 제자를 얻게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기쁘다는 소리인지 못마땅하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심란한 심중을 헤아려 묵묵히 듣고만 앉아 있었다.

"자, 이런 소린 그만두자. 아무튼 너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니 어쨌든 합마공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겠다."

천하기공(天下奇功)인 합마공을 잘못 수련하다가는 주화입마가 되어 오히려 화를 입음을 잘 알고 있기에 신독행은 지금까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초보적인 입문에 관한 것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지 합마공의 내공심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워진 지금, 구양봉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가르쳐 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공심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다.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앉아 있던 아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신독행, 이 늙은 것아, 넌 정말 총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가 여기서 내공심법을 얘기하면 내가 못 들을 것 같으냐? 저 미련한 놈이 미처 알아듣기도 전에 내 쪽에서 먼저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터득할 터인데, 네 놈이 죽은 뒤 저 제자 놈마저 내가 죽여 버리면 천하에 합마공을 아는 사람은 나만 남을 게 아니냐?'

아이는 쾌재라도 부를 듯 득의에 차서 희색이 만면해졌다.

"자우야, 구양봉에게 합마공을 가르치는 것을 몰래 엿들으면 안된다. 천하 악인들은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하느니라."

신독행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어린 사숙은 구양봉과 신독행을 번갈아 살핀 뒤 대꾸했다.

"좋아요. 듣지 말라면 그렇게 하겠소."

아이는 제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저 못된 화상이 중요한 대목에서 얼버무리고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상태로 영감태기가 죽어 버리면 내가 어디 가서 합마공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구양봉에게나마 제대로 전수하도록 피해 주자. 어쨌든 구양봉은 내 초롱에 든 새요, 구양봉의 것이 조만간에 내 것이 될 텐데 서두를 까닭이 없지.'

아이는 덧붙여 말했다.

"영감, 그 잘난 합마공이 뭐라구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는 거야? 나는 합마공이라면 진저리가 나는 사람이야. 조만간에 난 영감의 저 보배 제자와 더불어 합마공을 매장해 버릴 생각이오. 그래서 천하에 합마공의 뿌리를 아예 없애 치우고 말겠어."

그가 합마공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가 되었기에 합마공을 이처럼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한 신독행은 그가 정말 나중에 구양봉을 생매장시킬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신독행은 눈짓으로 구양봉을 자기 곁에 더 바싹 다가앉게 했다.

구양봉은 사부가 자기에게 합마공 비결을 얘기해 주려는 줄 알고 사부의 곁에 바싹 다가갔다. 갑자기 신독행이 손으로 침대 다리를 부여잡고는 소리를 내질렀다.

"쾌도!"

그 순간 침대는 '쩍' 소리를 내며 그대로 땅 밑으로 꺼져 내렸다. 어린 사숙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 잽싸게 침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데 돌연 뒷덜미에 칼날이 날아드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손을 떼고 얼른 몸을 돌렸다. 침대가 내려감과 동시에 거기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는 바로 구양봉이 유운장에 들어설 때 만났던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굴의 쾌도라는 사나이였다. 쾌도는 매우 얇은 절도(切刀)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칼 쓰는 법이 놀라울 정도로 정묘하고 번개 같았다. 쾌도는 시퍼런 칼날을 정신없이 휘둘러 순식간에 어린 사숙을 벽 한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 침대는 땅 밑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양옆으로부터 석판 두 개가 밀려 나와 입구를 딱 막아 버렸다. 신독행과 구양봉은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쾌도에게 분노를 느꼈다. 쾌도만 아니었어도 그는 벌써 신독행을 쫓아 밀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 어디 가서 신독행을 찾으며 합마공의 내심공법은 어디 가서 알아낸단 말인가?

"쾌도 이 놈아, 내 너를 박살내고 말겠다!"

아이는 악이 받쳐서 미친 듯이 덮쳐 들었다.

사실 쾌도는 오래 전부터 지하 밀실에서 기다리다가 침대 다리만 움직이면 뛰쳐나오기로 돼 있었다. 밀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오로지 칼 쓰는 법만 연구했다. 그래선지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번개 같이 날쌘 것은 물론 그 동작도 맹호같이 사나웠다. 그는 아이를 상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아이는 처음엔 쾌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밀실로 들어가 신독행을 죽

이고 구양봉의 입에서 내공심법을 받아 내는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점점 사납게 달려드는 쾌도의 칼끝에 그만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의복이 찢어지고 살가죽이 베어져 뻘건 피가 내비쳤다. 몸놀림이 민첩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 칼에 배가 두 쪽으로 갈라질 뻔했다.

아이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내도, 네 이 놈! 당장 달아라든가 아니면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해라!"

그러나 그의 위협에는 아랑곳없이 쾌도의 칼은 점점 독해지고 날쌔졌다. 아이는 참다못해 맞받아 나가며 연속 몇 장을 쳐 갈겼다. 장풍이 어찌나 센지 쾌도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더욱 묘한 몸놀림으로 쾌도의 칼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뜻하지 않은 순간에 쾌도의 오른쪽 손목을 텁석 잡았다. 다급해진 쾌도는 칼로 아이를 치려고 했으나 아이는 틈을 주지 않고 두 손가

락으로 쾌도의 수양명대장경맥(手陽明大腸經脈) 위의 하렴(下廉)·편력(偏歷) 두 혈을 잽싸게 짚어 버렸다. 그러자 쾌도의 얼굴은 금세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더니 죽을 각오를 한 듯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이는 쾌도의 출현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듯 물었다.

"도대체 신독행이 너한테 무슨 이득을 주었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드는 거냐? 나한테 밀실로 들어가는 길만 말해 다오. 그럼 내 너를 죽이진 않을 테니."

그 말에 쾌도는 처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죽어야 내 처자를 살려 주겠다고 했소. 내가 죽지 않으면 처자가 죽게 되오. 그러니 난 죽어도 원통하지 않소."

말을 마치자 쾌도는 갑자기 덥석 칼을 집어 들었다. 곁에서 말릴 새도 없이 쾌도의 목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이는 화가 나서 죽은 쾌도의 시체에 화풀이를 한 뒤 밀실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 입구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집안을 빙빙 돌며 구양봉과 신독행을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문득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이렇게 찾아서야 그 놈들을 찾을 수가 없지. 온 유운장 사람들을 불러와야 한다. 장주님이 큰 봉변을 당하여 어디론지 사라졌다면 그들이 모두 찾으러 다닐 게 아닌가? 그러면야 밀실을 못 찾을리 없지. 어떻게든 내 손에 걸려들기 만 해 봐라. 그 길로 저승행이 될 테니까.'

그는 사람들을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양봉과 사부는 향이 반 대쯤 탈 시간이 지나서야 지하에 이르렀다.

구양봉이 정신을 가다듬어 사위를 둘러보니 사면의 벽이 모두 돌로 쌓여진 크나큰 석실이었다. 석실 안에는 식량과 물이 있고 탁자와 걸상, 또 다른 물건들도 있어 얼마간 살아가는 데는 걱정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여기가 어딥니까?"

신독행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었다.

"여긴 내 무덤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나를 여기에 순장시킬 셈인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사부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내가 합마공을 가르쳐 주면 넌 나를 죽이고 이 밀실을 속히 나가라. 그렇지 않았다간 이 밀실에 갇혀 너도 죽는다."

"사부님, 사부님 병구완을 하여 같이 나가겠습니다."

신독행은 차갑게 웃으며 더 말이 없었다. 구양봉은 사부를 의자에 옮겨 앉힌 다음 물을 한 그릇 떠다가 탁자 위에 놓았다.

신독행이 구양봉을 보고 갑자기 말했다.

"너는 지금 네 궤계가 이루어졌다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겠지? 그래, 나하고 같이 있게 되었으니 합마공, 이 천하 기공을 이젠 얻게 되었다고 정말 믿겠지?"

구양봉은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만 웃었다. 사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왜 침대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뛰쳐나가지 않았느냐?"

"사부님만 놔 두고 나만 살자고 뛰쳐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전 사부님과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대가 떨어질 때 저도 사부님과 함께 떨어져 내려온 겁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의 말이 미덥지 않은지 희미한 냉소만 입가에 머금었다.

구양봉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사부와 마주앉은 채 석실을 휘 둘러보았다. 석실은 백 사람도 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었다. 그런 큰 공간에 두 사람만 앉아 있자니 몹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 쾌도가 우리 침대 주변에서 나타났는지는 묻지 않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묻는 뜻을 지레 짐작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사부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격한 쾌도가 은혜를 갚기 위해 날마다 사부님의 침대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사부님이 위험하다 싶으니 보호하고자 뛰쳐나온 거겠지요."

그의 말에 신독행은 앙천대소를 했다.

"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래, 내가 그렇듯 인정 있는 착한사람 같아 보인단 말이냐? 내가 천하에서 제일 악한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야? 난 지금껏 누구에게도 착하게 대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게끔 되어야 일이 제대로 되느니라. 쾌도는 내가 두려워 그러는 거다. 쾌도가 왜 날 두려워하는지 아느냐?"

"그건 모릅니다."

구양봉의 대답에 노인은 아주 자만스레 말했다.

"내가 그 놈의 처와 아들을 한 곳에 데려다 가두었다. 아주 좋은 곳이지, 조용하고. 그 놈은 처자와 매달 반나절만 만날 수 있지. 그래, 한 달에 반나절만 만나도 만족스러울까?"

구양봉은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처와 자식을 사랑한다면 한 달에 반나절만으로야 절대 만족스러울 리가 없지.'

"물론 만족스러울 리 없겠지. 나는 그 놈에게, 그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여기에서 한 달 있으면 처자와 반나절을 만날 수 있고, 그 놈이 두 달 여기 있으면 처자와 하루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그 놈이 날 위해 애를 쓰거든. 알겠느냐? 구양봉, 어째 말이 없느냐?"

"말할 게 있어야지요."

"난 중상을 입었어. 장차 네가 여길 나가게 될 경우 너는 그 못된 다섯 형제 놈들을 모두 죽여 줄 테냐? 내 마귀 같은 사제를 꼭 죽여 버릴 테냐? 어디 대답해 봐라."

구양봉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을 하면 장차 그 여섯을 꼭 죽여야 하는데, 나 같은 무공을 갖고야 그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사부님이 화를 낼 텐데 그러면 사부님의 몸에 얼마나 해로운가.'

구양봉이 대답을 하지 않자 신독행은 버럭 성을 내었다.

"그러기 싫단 말이지? 싫으면 좋다. 어서 여기를 나가!"

구양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가 중상을 입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가, 어서 가란 말이야. 난 너 따위들은 보기 싫다. 너 같은 인간들은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나쁜 놈이야. 나를 속여 절세신공이나 얻어 볼까 해서 지키고 앉아 있기만 하는 놈, 네 놈의 심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약간 비켜 앉았다.

'다섯 제자들에게 참혹하게 중상을 입은 판국에 속이 좋을 리 없지. 그런 와중에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게 무리지.'

그런데 신독행은 구양봉이 비켜 앉자 자기가 싫어서인 줄 알고 더욱 성이 나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너도 그놈들과 같은 놈이다. 너도 날 속이려고만 해!"

신독행은 또 왈칵 피를 토하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부님, 고정하시고 좀 쉬세요. 이렇게 성을 내시면 몸에 해롭다니까요?"

신독행이 냉소를 머금으며 악이 받쳐 소리쳤다.

"뭐? 사부님? 상처가 어떻다고? 네깟 놈이, 네가 어떤 놈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나한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환심을 사려 들어?"

그는 돌연 구양봉을 덮쳤다. 중상을 입었지만 손엔 그래도 강한 힘이 남아 있었다. 그는 구양봉의 목을 움켜쥐고 조이기 시작했다..

"사부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구양봉은 대항해 볼 수도 있었으나 차마 사부와 싸울 수가 없어 애원을 하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깨어나 보니 사부는 자기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기분은 좀 맑아진 듯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넌 악인이 되려면 멀었어. 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 네가 악인이었다면 날 죽였을 게다."

신독행이 구양봉의 목을 조일 때 구양봉이 이미 갖고 있는 정도의 합마공만 썼어도 신독행은 당장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양봉은 마음이 약한 탓으로 도리어 신독행에게 목 졸려 죽을 뻔한 것이다. 이 점은 구양봉이나 신독행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독행은 탄식을 했다. 변경에서 겨우 찾아내어 데려왔다는 구양봉이 악인이 아니고 우유부단한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인간인 줄 애당초 알았다면 벌써 없애 치웠을 텐데……."

신독행은 몇 번이고 푸념하면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난 합마공을 가르쳐 줄 수 없다. 너 같은 위인은 합마공을 완전히 익혀서 고수가 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강호에서 남의 손에 죽기나 할 것이니 그러면 내 합마공의 가치만 떨어뜨리는 꼴이 되지. 이렇듯 내 명성이나 더럽힐 짓을 내가 뭣 땜에 하겠느냐?"

구양봉은 말이 없었다.

'나더러 자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야단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어쨌든 사부가 아닌가? 사부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구양봉, 세상에는 간악도 큰 간악이 있고 작은 간악이 있는 법, 너는 작은 간악에 속하는 소인배다. 마음이 착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가령 조금 전의 그런 일이 강호에서 생겼다면 너 같은 위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벌써 죽었을 게다. 대단한 기공을 가졌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큰 간악을 가진 자만이 큰일을 하고 큰 영웅이 되는 법이야. 알겠느냐?"

구양봉은 그의 말을 되새겼다. 가령 방금 자기가 사부의 손에 죽었다면 값없는 원귀밖에 더 되었겠는가. 아무런 큰일도 못해 보고 여기서 초개처럼 죽임을 당했다면 그처럼 덧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옳은지 어떤지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공감을 느꼈다.

신독행은 또 말했다.

"인간이란 좋은 일을 하기는 쉬우나 나쁜 일을 하기는 쉽지 않느니라. 나쁜 일에는 대저 세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 나쁜 일이 자기와 남에게 모두 좋은 점이 없는 것이지. 이런 나쁜 일을 하는 인간은 따라 배울 바가 못 된다. 이런 인간을 보면 죽여 버려. 공연히 천하 대악인의 명성만 더럽히지 않게 말이야. 두 번째 부류는 나쁜 일을 한 것이 남에게는 조금도 좋은 점이 없지만 자기

한테는 좋은 점이 있는 것인데, 이것도 소인지견(小人之見)에 불과하기에 나, 이 늙은 독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부류는 그들이 해놓은 나쁜 일이 자기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좋은 점이 아주 많은 것이지. 나쁜 일을 한 것이 자기에게는 큰 위업이 되고 또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된다면 왜 이런 일을 안 하겠느냐? 네 사숙이 말하던 그 측천무후를 봐라. 자기는 황제가

되었고 남에게는 좋은 일을 좀 많이 했느냐? 측천무후가 너처럼 주춤거리기만 했다면 그런 큰일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구양봉은 사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나 남에게 모두 좋은 일이라면 살인을 못할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문인은 문필로 사람을 주살하고, 무장은 창검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판에 흉악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사숙도, 다섯 사형들도 모두 악인이며 살인하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죽일 것이며, 내가 살려면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이다. 그들이 죽지 않는데 내가 왜 먼저 죽겠는가?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신독행이 또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녀석, 이젠 머리가 좀 돌아가느냐? 그렇지 않다면 합마공을 더 배울 것 없이 일찌감치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앞으로 봐라. 네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그 다섯 놈들이 꼭 너를 찾을 거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지 놈들은 너를 찾아내어 합마공을 알아내고 그 다음엔 너를 죽여 없앨 거야."

"전 합마공을 끝까지 배우지 못했는데요."

구양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나한테 할 필요가 없어. 그 놈들한테 가서 해. 그 놈들한테 난 합마공을 채 못 배웠습니다 하면 그 놈들이 아주 잘 믿겠다. 곧이듣겠어."

신독행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구양봉은 신독행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구양봉한테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아내려고 괴롭힌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것이다. 죽이지 않아도 병신을 만들어 죽느니 만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구양봉은 가슴이 떨렸다. 어찌하면 좋을까? 놈들에게 죽기보다 여기서 천하 무적인 합마공을 익혀 놈들을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제18장 폐허가 된 유운장

밤이 깊어선지 가을 바람이 몹시 싸늘했다. 이 외딴 폐허에는 날짐승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이곳은 너무나도 황막하여 있다면 도깨비나 남아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허물어진 담벽들과 잎새가 말라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금방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 허물어진 담벽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이지러진 구름을 보노라니

바람에 밀려 파도가 이는 듯

구름 송이 하나 남아서

마을을 장식하누나

강산이 짓밟히고 인걸이 뒤바뀌니

쓸쓸한 그 광경 애처롭기 그지없네

뉘 말했던고,

산천이 의구하고

고국의 모습 강개하였다고

모든 것은 유수처럼 흘러가 버리고

하늘엔 석양빛만 붉게 타누나.

산천과 영웅을 기리는 노래이건만 그 노랫소리는 애간장을 말릴 듯 한없이 처량했다.

멀리 울창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그 속에서 어른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멍하니 서서 허물어진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난 폐허의 광경은 무척 기괴하게 보였다. 불에 타다 만 흔적들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으나 그 사람은 별다른 기색 없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축축한 밤이슬을 맞은데다가 소슬한 가을바람까지

불어오자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산(珊), 산…… 가엾은 사람…… 그대가 그렇게 죽다니. 단 하룻밤밖에 정을 나누지 못했는데……. 그 기나긴 밤에 난 변경에서 돌아와 그대에게 머리 장식품을 주었지. 평소에 머리 장식품을 그렇게도 즐기던 그대가 그날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만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나만 꼭 끌어 안았지. 그날 밤 우린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를 꼭 끌어안고만 있었지. 그 밤이 지나자 난 사부님

의 일로 또 바삐 보내게 되었는데 그대가 이렇게 죽어 버릴 줄이야……. 내가 그 놈을 죽일 테야. 그 놈을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오래도록 폐허를 바라보았다.

한편 무너진 길다란 담벽 위에 자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농가의 어린애가 구들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있듯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는데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한바탕 웃고 나서 또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고로 악인들이 강량(强梁)을 떠들었지만

그가 어찌 무검(舞劍) 항장(項庄)에 미칠 수 있으리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방벽을 이루었고

목왕(穆王)이 여덟 준마 휘몰아

서왕모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도다

그대 정녕 악인이 되려 할진대

여불위 뒤에 시황제가 있듯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깨달아야 하리라

하건만 이 모든 풍류 귀객들

가차없이 한줌의 흙이 되었어라!

그는 웃다가 울다가 하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허물어진 담벽 앞에는 그말고도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아무 기척도 없이 발자국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그 작은 사람 앞에서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노인이었는데 남루한 옷을 걸치고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섰고 손도 시뻘겋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 하나를 등에 들쳐 업고

있었는데 아이는 오래 전에 죽은 듯 눈이 말라붙고 입이 까매졌을 뿐만 아니라 역한 시취까지 풍겼다. 그 노인은 노래 부르는 어린아이를 뼈다귀째 씹어 삼킬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노인의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데 깨끗한 얼굴에 선비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도 음흉한 웃음을 띤 채 담벽에 걸터앉아 노래부르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두아야, 너 지쳤구나. 지쳤으면 이 할애비랑 가서 자자. 남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돼. 남의 음식이란 좋지 않단다. 좋은 음식이 라도 먹으면 안 돼. 남의 집 꿀떡 속엔 독이 있어."

노인은 머리를 돌려 자애로운 표정으로 등에 업힌 아이를 쓰다듬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큰형님, 그러지 마슈. 그 앤 이미 죽었어요. 벌써 독이 퍼져 냄새까지 나는데 왜 자꾸 그러시우?"

노인이 버럭 역정을 냈다.

"둘째, 지금 뭐라 했나? 두아가 죽었다구? 자네야말로 죽었어. 자네야말로 벌써 죽었어야 했어!"

그는 흥분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주먹과 손바닥을 엇갈아 내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정없이 치고 받고 하였으나 사형제 처지라 서로 상대방의 권법에 아주 익숙하여 수십 합을 싸워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들은 몹시 지쳐 숨이 턱에 차서야 싸움을 그만두었다.

속문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갈정 형님, 나한테 이러자 마슈. 형님의 원수는 저쪽에 앉아 있는데 저 놈 죽일 생각은 않고 왜 나한테 분풀이요?"

"둘째, 두 번 다시 두아가 죽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자넬 죽여 버릴 테야!"

제갈정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거칠게 내뱉고는 머리를 돌려 담벽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를 보더니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들도 오셨군!"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속문성이 입을 열었다.

"사숙님, 우리 오형제는 사숙님을 대단찮게 보아 왔었는데 오늘 만나 뵙고 나니 큰 오산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숙님의 총명하심은 우리 형제들은 비길 바가 아니십니다."

속문성이 굽신거리자 아이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너희들 오형제는 너희들 사부한테 하는 것과는 달리 날 여지없이 깔보았지.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날 사숙님이라 부르면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사숙님은 아주 총명하십니다. 사숙님께선 이젠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손에 넣었으니 자연히 천하 으뜸이 되었소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비적을 얻었더라면 가만히 숨어서 그 무예를 마저 익혔을 것인데, 사숙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으니 우리 오형제가 어찌 사숙님을 죽일 수 있겠소이까. 그러니 저희가 어찌하면 사숙님께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감추신 곳을 알 수 있겠소이까?"

속문성의 말에 아이는 삿대질을 하며 웃어댔다.

"너희 오형제처럼 어리석은 놈들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내가 만약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터득했다면 벌써 너희들 다섯 놈과 가족들을 몽땅 독살해 버렸지 이라고 있겠느냐?"

속문성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사숙님이 아무리 대단한 재간을 가졌다 해도 우리들 다섯 형제를 한꺼번에 죽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일 저와 큰형님, 셋째 동생이 함께 손을 쓰게 되면 사숙님 하나 정도야 죽이고도 남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변하면서 이를 갈았다.

"넌 내 마누라를 죽였어. 난 네 놈의 가죽을 벗기고야 말 테다. 이 괘씸한 놈!"

그러자 아이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받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네 말대로 했을 뿐인데. 넌 분명 네 마누라를 싫어하지 않았느냐? 난 네가 한 말을 듣고 너를 도운 것 뿐이야.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지. 부부간의 정이란 그렇게 깊어야 하는 거야. 한데 네 놈은 나에게 네 여편네를 대신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나? 너희들 연놈이 억지로 붙어 살고 있는 판인데 내가 널 대신해서 그 년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네가 어떻게 젊고 예쁜 계집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 놈아, 다 너를 위해 한 일인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야?"

이때 제갈정이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우리 두아를 살려내! 우리 두아를 살려내란 말이다!"

그는 곧장 아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맞붙더니 주먹과 손바닥이 정신없이 오갔다. 싸우는 그들을 지켜 보면서 속문성은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네 놈들이 언제까지 싸우는지 보자. 제갈정이란 교활한 늙다리가 열넷이나 되는 일가족이 저 놈의 마수에 걸려 죽지만 않았어도 이처럼 대노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 절호의 기회다. 이 둘째한테 이처럼 훌륭한 기회가 주어질 줄이야!'

제갈정은 불붙는 듯한 분노로 평소보다 더 지독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우리 두아를 살려내! 우리 두아를 살려내란 말이다!"

제갈정은 끓어오르는 비분으로 목이 메였다. 아이는 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제갈정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이윽고 큰소리로 말했다.

"제갈정, 이 바보야. 자네는 유운장에 수십 년 간 살면서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았지. 개미가 쳇바퀴 안을 맴돌 듯 말이야. 자네는 유운장이 천하에 가장 무서운 곳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도 찢겨 내려오는 곳인데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그처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그 많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것은 괴이한

일 아닌가? 이번에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들을 보내 버린 것을 자네는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잠 한 번 편히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게 하던 시름거리를 덜어 준 셈이니 말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실 아내와 자식들이 없으면 혼자 몸으로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숱한 식솔들을 거느리느라 제갈정은 정말이지 여간 마음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이 유운장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언제 어떻게 죽어 나갈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결국 비명에 죽고 말았다. 그는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말을 듣곤 난 그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쩌면 사숙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지. 내가 여편네를 얻지 않았던들 자식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테고, 또 자식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이처럼 손자를 잃어 가슴 아파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사뭇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갈정, 인생도 초목과 같아 한번 가면 오질 않아. 자네의 가족이 그렇듯 전부 죽어 버렸는데 자네만 살아서 뭐 하겠다는 건가? 살아서 무슨 낙이 있겠느냔 말이야? 제갈정, 자네는 50년 동안이나 공력을 들여 장가를 들고 아들들이 숙성해지고 손자 놈들이 무릎 아래서 재롱을 부리는 걸 보아 왔지. 하지만 50년 세월이 흘러 결국엔 그것을 몽땅 잃어버렸는데 어디 가서 찾아오려나? 차라리

따라 죽는 편이 낫지. 그러면 큰 시름을 덜게 될 거니까."

심기가 어지러워진 제갈정은 마음속으로 자문해 보았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온 집안 식솔들이 모두 비명에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무슨 낙이 있겠는가. 차라리 죽어 버리느니 만 못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이윽고 천천히 두 손을 치켜 들었다.

곁에서 지켜 보던 속문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형님, 형님은 가족을 위해 복수하기를 포기할 참이오?"

제갈정이 그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복수를 한단 말인가? 두아가 죽고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죽었는데 나 혼자만 살아 뭣해?"

속문성은 몹시 초조해졌다. 만일 제갈정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자기 또한 사숙의 적수가 못 되는 만큼 이곳에서 죽게 될 게 뻔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형님, 형님이 늙은 독물 신독행한테 몸을 맡긴 건 대악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그런데 되려던 악인은 못 되고 오히려 남의 손에 죽으려 하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소?"

"내가 악인이 되려 했다고? 악인이 돼서 뭘 하겠나? 온 가족이 다 비명에 죽어 버렸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갈정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는 제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다급해진 속문성이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의 정혈(井穴)을 눌렀다. 그러자 제갈정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이가 손뼉을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둘째, 자네가 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계책에 말려들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임자와 제갈정은 모두 그 늙다리만 생각하고 나를 잊어버렸단 말야. 이젠 늦었어.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됐지."

아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자네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니 말해 보게. 자네의 사부가 죽게 될 때면 누구에게든 그 합마공 심법을 전수해 주지 않겠는가?"

둘째는 한동안 망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부님 성미로 보아 꼭 전수할 것이오. 당초에 사부님께서는 우리 다섯 사람을 눈에 들어하지 않았던 터라 거짓말을 했지요. 하시는 말씀이, 경성 변량에 그의 전인(博人)이 있는데 우리들더러 주련 한 폭을 갖고 가서 그 전인을 찾아내어 맞추어 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을 없애 버릴까봐 두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의 전인을 찾아내게 하려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도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는 사부님한테 세상 없는 글벌레를 찾아다 주기로 약속했지요. 아무리 가르쳐 봤자 악인으로 만들지 못할 그런 작자를 찾아다 주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이나 알 노릇이지, 우린 끝내 오산을 한 것이지요. 지금 사숙이 사부님의 내공심법을 갖고 있는데 우릴 이렇게 못살게 굴 필요가 어디 있소? 너무 억누르면 모두가 죽고 맙니다."

그의 말에 아이가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불똥이 튀는 듯한 눈으로 속문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난 그 내공심법이란 걸 가져온 일이 없네. 자네가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어."

속문성은 그의 말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남의 말을 그대로 믿다가는 모가지가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 유운장이 아니던가.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자세한 내용을 속문성에게 차근 차근 얘기해 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쾌도가 죽은 뒤 암실의 통로를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급한 나머지 온 마을 사람들을 몽땅 불러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한나절이 넘게 찾아도 신독행의 종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는 분통이 터진 나머지 한 하인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신가 놈아, 너를 태워 죽일 테다. 이 산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기 전에 냉큼 나오지 못하겠느냐?"

그는 횃불을 휘둘러 여기저기에 불을 붙였다. 불이 번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 세간살이를 챙겨들고 뿔뿔이 도망쳤다. 불길이 점점 세차게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아이는 구양봉과 신독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길이 뜨겁게 타올라 용마루가 주저 앉았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지르길 잘했어. 합마공의 심법을 손안에 넣지 못할 바에야 신독행 그 놈을 태워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나 불타 버린 폐허를 둘러보는 동안 그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신독행과 구양봉이 정말 불에 타 죽었는지 어쨌는지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속문성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더러 지금 그 말들을 믿으라는 거요?"

"믿지 못한대도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난 자네에게 내 말을 믿으라고 권하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자네한테도 좋은 점이 없을 테니까."

속문성이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유운장은 없어졌어도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만일 자네들 두 사람이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있다면 함께 강호로 나가세. 힘만 합하면 강호 사람들한테도 우리 유운장의 본때를 보여 줄 수가 있지 않겠나?"

그는 말을 마치고 큰소리로 웃었다.

속문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께서 돌아가시자 유운장은 얼음이 녹듯 절로 무너져 내렸다. 나와 큰 사형, 셋째 사제, 거기다가 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는 두 작자는 강호에 나가도 어쩌지 못할 것이며 사숙과 한패거리 노릇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문성이 비로소 대답했다.

"우린 사숙과 한패거리 노릇은 할 수 없소. 사숙은 툭하면 남한테 마수를 뻗쳐 인명을 해치기 일쑤인데 우리가 어찌 사숙과 함께 있을 수 있겠소?"

그러자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 스스로를 잘 판단해 봐. 하나는 미친놈이고 다른 하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지. 만약 나와함께 하지 않을 경우 자네들이 강호에서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속문성은 마음이 흔들려 제갈정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큰형님, 어쨌든 우린 무공이 사숙님만 못하니 사숙님 뜻에 따르는 게 어떻겠소?"

제갈정은 그의 제안이 탐탁치 않았으나 혈도가 막힌 관계로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숙을 쏘아보았다

"사숙, 당신은 내 가족을 죽인 사람이오. 그런데 내가 어찌 당신과 한패거리가 될 수 있겠소?"

"자네가 나와 손잡기만 하면 천하를 주름 잡으며 무림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이런 개인적인 은원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그의 말에 제갈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제갈정의 혈도를 풀어 준 후 세 사람은 담벽에 걸터앉아 폐허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천하의 악인이 될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지금은 은신할 곳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인 것이다. 세 사람은 사실 그 큰 유운장이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나자 서운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각자 착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광풍이 일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나

이가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그는 정면으로 사숙을 내리치며 외쳤다.

"산의 목숨을 살려내! 산의 목숨을 살려내란 말이다!"

사숙은 그가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자 반격할 틈도 없이 그저 피하기에 급급했다. 사나이는 더욱더 민첩하게 칼을 휘둘러 대면서 바싹 다가들었다.

다급해진 사숙이 소리쳤다.

"제갈정, 속문성! 자네들은 그곳에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건가? 빨리 손을 써서 이 놈을 막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두 사람은 다 움직이려고 들지 않았다.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속문성이 빈정대듯 말했다.

"사숙님, 당신이 이 셋째 동생한테 손을 쓰면 우리 셋째 동생이 아마 당해 내지 못할 겁니다. 큰형님한테 본때를 보이던 것처럼 한 번 본때를 보여 주시지요. 저 사람 눈엔 존장(尊長)이라는 게 없으니 사숙께선 그리 아시오."

이때까지도 얼떨떨해 있던 제갈정이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듯 중얼거렸다.

"나도 저 놈을 죽여야 한다. 암, 죽여야 하고말고. 우리 두아를 위해 복수해야지! 우리 두아를 위해 복수해야 해!"

그가 사숙에게 덤벼들려 하자 속문성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큰형님, 셋째 동생의 칼 쓰는 기법을 좀 보시오. 여지껏 본 적 없는 수법이 아닌가요?"

아닌게아니라 석초수의 칼놀림은 실로 기가 막혔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 방식이 괴이하고 수법이 달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제갈정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실로 종래에 본 적이 없는 것이군. 저 기법은 실로 괴이해. 옳아, 그렇지. 셋째가 저렇게 칼을 쓰는 건 왼손이 칼을 쓸 때마다 바깥쪽으로 돌기 때문인 거지. 안 그런가? 둘째, 셋째의 저 기법은 자네를 대적할 때 쓰던 기법이야, 안 그런가?"

속문성이 음흉스럽게 말을 받았다.

"자세히 보슈. 저 칼 쓰는 법은 복판이 아니라 비스듬히 머리를 겨누는 거요. 저건 분명히 형님을 대적할 때 쓰던 '출수운수(出水雲袖)'란 기법이외다."

두 사람은 속으로 움찔 놀랐다. 평소 석초수의 행동거지로 보아 이런 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 석초수는 자기 처자가 살해당한 복수심에 불타 평소 익혀 두었던 칼 쓰는 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아이는 그가 결사적으로 나오자 내심 은근히 걱정되었다. 석초수 하나야 크게 두려울 것이 없지만 그 옆에 다른 두 사람이 버티고 있지 않는가. 제갈정과 속문성 역시 자기를 죽일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로서 무공도 이 석초수보다 약하지 않았다. 석가 녀석을 물리쳐 버리지 못한 채 두 놈마저 덤벼들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아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석초수, 내가 독을 쓰겠다!"

이 거친 사나이는 평소 아이가 독을 사용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어 사숙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그는 그와 더불어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네 놈이 독을 쓴다 해도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는 아이의 위협 따위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빈틈없는 자세로 칼을 휘둘러 댔다.

아이가 손을 펼치자 한 줄기의 연기가 석초수 쪽으로 풍겨 갔다. 연무가 흩어져 오는 데도 석초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연기를 들이마신 석초수가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당신, 패왕분(霜王粉)을…… 썼구나!"

석초수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속문성이 소리쳤다.

"대단하군요. 사숙님은 실로 고명하외다. 독을 쓰는 덴 정말 고수라니까요. 그 수법엔 제자들도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하지만 제갈정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사숙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온 식솔을 죽인 그의 지독한 수법이 이가 갈리도록 증오스러웠다.

둘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숙, 당신은 저 사람을 어떻게 할 셈이오?"

"어떡했으면 좋겠나?"

"죽인다고 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사숙은 대악인이라 저 사람을 죽이는 따위의 하찮은 짓은 안 할 거요. 저 사람을 살려 두고 사숙을 위해 일하게 함이 어떻겠소?"

속문성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거 놈의 꼴을 보니 나를 위해 일할 성싶지가 않아. 자낸 허튼소리 말게."

속문성이 말을 받았다.

"사숙께선 노파심이 지나치시군요. 저 사람한테 독을 좀 남겨 놓기만 하면 그가 어찌 사숙의 말씀을 안 들을 수 있겠소?"

그의 말에 아이는 손뼉을 쳤다.

"그렇기도 해! 옳은 말이야. 망정산(忘情散) 한 봉지만 먹이면 자연히 내 사람이 될 거야!"

그는 기분이 좋아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유운장이 불바다가 되던 날, 구양봉은 밀실에서 쇠약한 사부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물과 음식을 날랐다. 신독행은 처음에는 그래도 약간의 음식을 들었으나 나중에는 조금도 먹지 못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숱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이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님,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신독행이 그 말을 듣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 꼬맹이 놈이 발광하는 게지. 그 놈이 마을 사람들을 있는 대로 불러내어 이 밀실을 찾고 있는 게야."

그의 말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사부님, 그들이 우릴 찾아내면 어쩌지요?"

"네가 합마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달아난다 해도 죽는 도리밖엔 없다!"

사부의 꾸지람을 들은 구양봉은 풀이 죽어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인간에 대해 무자비할 것을 요구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다. 사부님의 뜻에 어긋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천하의 악인이 되라 하는데 내가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밖에서 이상한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거친 소리였다. 구양봉과 신독행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양봉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사부님, 어째서 저런 바람이 부는 걸까요?"

신독행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바람은 무슨 바람? 그 놈이 마음을 불태우는 소리다."

구양봉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나나 너나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 난 이미 죽을 몸이니 죽으면 그만이구, 어차피 여기가 내 묘지이니 잘 되었다. 너도 여기서 날 배웅하게 되었으니 정말 잘됐어."

신독행은 말을 마친 뒤 눈을 감고는 더는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곳까지 불길이 닿을 리는 없지만 나갈 방법이 없게 되는구나. 나는 결국 이곳에 갇힌 채 죽고야 마는 것인가.'

구양봉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미친 듯이 암실 바깥쪽을 향해 달려갔다. 거기서 커다란 석판을 찾아내고는 곧 그것이 출입구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힘껏 그 석판을 떠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편에 자그마한 기관이 있었다. 그는 너무도 기뻐 기관을 틀어쥐고 한나절이나 비틀었지만 삐걱삐걱 소리가 날 뿐 소용이 없었다. 무너져 내린 기와며 담벽들이 석판을 짓누르

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맥이 풀렸다.

'젠장, 호인이고 악인이고 간에 아무것도 되긴 글렀구나. 어두운 지옥에서 악귀가 될 수밖에 없게 됐어.'

그는 갑자기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며 기관에 대고 주먹질을 해 댔다. 얼마나 두들겨 댔는지 주먹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와 신독행의 맞은편에 주저앉아 입을 확 다물어 버렸다. 신독행이 그를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 게 좋아. 만일 지금 밖에 나갔다간 그 놈한테 죽고 만다. 차라리 죽으면 그게 낫지,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면서 볶아대면 그걸 어찌 견디겠느냐?"

구양봉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형님과 모용쟁의 생각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 때문인지 신독행에 대한 미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찌 이게 훌륭한 사부랄 수 있어? 제 식구끼리 죽이고 해치기를 일삼는 무림의 떨거지들 같으니. 이렇게 하다가는 강호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몽땅 죽어 버리고 말겠는데 어떻게 천하에서 으뜸 가는 대악인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지.'

신독행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 봐라. 너는 도대체 합마공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구양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합마공을 배워 사부님처럼 자기 목숨 하나 건사하지 못할 바에야 배워 뭘 하겠습니까?"

신독행은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는 웃다가 상처에 통증이 오는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놈아, 감히 내 유운장의 신공을 업수이 여기다니, 죽고 싶으냐? 당년에 난 이 합마공으로 한 자 두께가 되는 석벽도 뚫어 내었느니라."

구양봉은 그 말에 가슴이 후두둑 뛰었다. 그는 신독행이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합마공의 위력은 필시 대단할 것이다.

구양봉이 다급히 물었다.

"제가 합마공을 배운다면 능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겠소이까?"

생사에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합마공을 배우기만 한다면 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를 누비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지독한 맹세를 해야 한다. 네가 이 동굴을 빠져 나가게 되면 반드시 유운장의 모든사람들을 손수 죽여 버려야 한다. 제갈정의 온 집안, 석초수네 일가와 속문성네 일가, 그리고 그 막(莫)씨 성을 가진 두 형제까지. 이 밖에도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건 그 어린애 같은

사숙이다. 알겠느냐?"

"사부님, 왜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합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신독행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러는 줄 아느냐? 그 놈들도 밖에서 우릴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느냐? 그 놈들이 우리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산장을 불태우지 않았을 거다. 넌 그 놈들이 너한테 무슨 좋은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줄 아느냐? 그 놈들은 네가 강호에 나오기만 하면 천방백계로 널 대적할 생각만 하고 있다. 만일 네가 합마공을 알지 못하면 그 놈들이 마수를 뻗쳐도 막아내지

못할 게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을 쓴다 해도 그 놈들이 독을 사용하기만 하면 넌 꼼짝없이 죽고 마는 거다!"

신독행은 독설을 퍼붓다가 실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구양봉은 마음이 쓰라려 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합마공을 배우지 않았다가는 끝내 이곳에서 죽고 말 것이타. 그는 사부를 바라보며 결연히 대답했다.

"사부님, 배우겠습니다."

신독행은 몹시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60년이 되도록 강호를 떠돌아다녔건만 적수를 만나지 못 했었다. 하지만 난 허장성세를 하지 않았고 강호에는 내가 유운장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나는 워낙 큰일을 해 보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마흔 살 나던 해에 너의 사숙과 다투게 되었다. 그 사람은 물론 나도 상처가 중하여 세상에 대한 웅심이 없어지고 말았지. 네가 합마공을 배우는데, 두려워할 사람은 당세의 기인

이다. 내가 앞서 들은 말에 의하면 중원에 기서가 있는데, 도종 황제 때 황상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서 《구음진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책은 실로 천하의 무학기보로서 여길 나가게 되면 꼭 그걸 찾아내어 익혀야 하느니라."

구양봉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부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구음진경》은 바로 형님이 중원에서 찾으려는 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부가 아주 큰 성의를 갖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독행은 말을 이었다.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실로 비할 바 없이 기묘한 책이다. 일찍이 누구한텐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지금 종남산 전진교의 젊은 교주 왕중양의 손에 있다고 한다. 네가 가게 되면 기필코 그 사람과 한판 겨루어야 할 게다. 그래서 네가 그를 이겨야만 그 경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큰 교의 교주인 그가 쉽사리 너한테 그 기서를 넘겨줄 리가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구양봉은 아주 독한 자가 되어 중원에 가서 그 기서를 수중에 넣을 생각을 해 보았다. 더는 연약한 서생으로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뛰었다.

구양봉은 그 자리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하고 맹세했다.

"제자 구양봉은 노독물 신독행을 본받아 강호로 나가서 한평생 독과 악을 행하며 인간다운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나이다. 사부님의 합마공을 배운 후 나가서 사숙 사자우를 죽이고 유운장의 크고 작은 모든 작자들을 죽여 버리겠나이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사부님, 마을의 하인들도 죽여야 하옵니까?"

신독행은 수염을 흔들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질렀다.

"당연하지. 왜 죽이지 않겠느냐? 그들이라고 우리를 가만 놔둘 것 같으냐? 그들도 우리를 발견하면 발견하기가 무섭게 죽여 버리고 도망갈 거다. 그런 놈들을 죽여 버린다고 해서 아까울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한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하인들도 죽여 버릴 것이며 유운장 안의 크고 작은 사람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리겠나이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이 구양봉은 칼을 맞고 화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구양봉의 확고한 맹세에 신독행은 몹시 기뻐했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나의 후신을 찾은 것이다. 드디어 지금 네가 나의 뜻을 이어받게 되었으니 이 어찌 내가 중생(重生)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지켜 보는 구양봉의 가슴은 노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그는 비록 사부가 한평생 뜻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기나마 그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드려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석살 안에서 구양봉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사부로부터 합마공 심법에 대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 합마공 심법은 배우기가 무척 어려우니 잘 듣거라. 너의 사숙은 어렸을 때 조 사부님의 귀여움을 받았는지라 몇 마디를 가만 히 훔쳐 듣고 슬그머니 합마공을 익히려다가 주화입마가 되어 그때부터 키가 자라지 못했느니라. 그 놈은 줄곧 나를 원망하면서 내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사실과는 다르니라. 그 놈은 합마공을 익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비명에 죽게

될 거다. 내가 그 놈을 미워하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총명한 사람이니 무공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며 반드시 스스로 합마공을 익혀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공심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듣고 기억해두어라."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 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대력 (大力)이 허하면 오규(五竅)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 실(實)이 온몸에 전부 들어와 올바르게 유도되지 못하면 기가 빠지지 못한다. 기가 온몸에 차고 넘치면 마구 토하고 싶게 되느니라. 손으로 지기(地氣)를 접하여 상지(上肢)를 지탱하면 마치 호랑이나 늑대와 같이 날쌔진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끌어 잡아당기면 지기가 움직이고 그 기가 온몸에 차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기는 발로

부터 몸에 들어왔다가 손을 통하여 나가며 손으로 들어왔다가는 발을 통하여 나가는데 이처럼 무궁하게 순환하는 법이다. 만일 소리를 내면 꾸꾸꾸 하는 두꺼비 소리가 나는데, 호랑이나 독수리 울음 소리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그 기가 닿는 한 쇠붙이나 돌도 부서지고 말며 사람의 인력으로는 감당해 내지 못한다."

총칙을 이야기한 뒤 그는 한 단락의 법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어찌나 총명한지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마다 그대로 다 깨우쳐서 신독행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몸이 성하다면 저처럼 총명한 놈이 있는 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경계하다가 결국 죽여 버려야 했을 게다. 이 정도로 총명한 놈이면 이 노독물이 죽은 후에라도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테니 복이 굴러온 셈이구나.'

신독행은 제자의 총명함에 크나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이 합마공은 사문의 내공심법으로서 이것을 몸에 익히기만 하면 다른 어떤 기술을 배우든지 간에 힘이 덜 들고 효과가 곱절로 높아진다. 구양봉은 사부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히 자세를 취하고 일합막준거식(一蛤 踞式)이나 쌍수안전변환수식(雙手眼前變換數式) 등을 연습해 보았는데, 이것들은 다 내력을 끌어내 오는 기공이었다. 그 다음에는 몸을 도약하여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으로,

공중에서 마음대로 회전하다가 땅에 내려서는 훈련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두꺼비처럼 '꾹꾹' 하는 소리도 내었다. 이 소리를 내는 데도 내력을 모아야 하는데, 땅에서 내력을 끌어들여 대력을 키우면 무궁무진한 힘이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적과 싸울 때 무림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힘을 이어 대지 못하여 중도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상대가 열 가지 법수를 알고 있

는데 다섯 가지 법수밖에 모르면서도 맨주먹으로 싸운다면 실속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저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알게 되었으니 수시로 내력을 끌어낼 수 있으며 남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한 사람은 정성들여 가르치고 다른 한 사람은 신중하게 배웠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운 탓에 전수해 주고 배우는 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열흘 동안 배우고 나자 구양봉은 제법 숙련된 합마공을 펼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사부님이 길이 잠든 틈을 타서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굴 어귀로 나갔다.

'사부님께서 이 합마공을 배우기만 하면 굴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으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나갈 수 있다면 사부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리라.'

그는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고 신력을 모아 굴 문을 힘껏 후려쳤다. 와르르 하는 소리에 놀란 구양봉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굴 어귀를 바라보았다. 흙벽이 무너져 내려 먼지가 뭉실뭉실 피어 올랐으나 길은 들리지 않았다.

'내 힘으로는 이 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사부님께서 나를 나무라시겠구나! 만일 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 혼자 이곳에 남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 애썼으나 끝내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신독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모르게 가서 시험해 보았던 게지? 그래 굴 문이 열리더냐?"

구양봉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아니요."

"네가 지금 굴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이제 막 합마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굴 문을 열어젖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내가 이렇듯 몸이 상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굴 문을 열었을 텐데……."

구양봉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그럴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이 석굴 안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굴 안에 머물러 있는 석 달 동안 사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상처가 하루하루 악화되어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그가 닦은 합마공은 어느 정도 보람이 있어 두 손바닥으로 밀면 석벽의 흙덩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신독행은 구양봉의 합마공이 이젠 3, 4할쯤은 숙련되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신독행이 몹시 기진맥진하여 구양봉을 불렀다.

"양봉아, 너는 오늘부터 천하에 드문 악인이고 독물이다. 하지만 너는 절대로 날 미워해선 안……."

구양봉은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 사부님께선 저를 구해 주셨고 저는 오직 감사할 따름인데 미워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날 미워하는 건 대수롭지 않으나 네가 한 맹세만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네가 그걸 시행하지 않는다면 난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이며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노라 대답했다.

신독행이 기운을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합마공엔 화공대법(化功大法)이란 법수가 있다. 화공대법으로 네 손을 나의 전중혈( 中穴)에 갖다 대면 거기로부터 나의 공력을 흡수할 수 있다. 나의 공력을 흡수하기만 하면 너는 굴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양봉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아니, 사부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넌 그래 이 구사독옹의 문하생이 아니더냐? 행동거지가 이처럼 계집년 같아서야 어찌 나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양봉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다."

그는 기를 쓰고 구양봉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손을 틀어쥐고 자기의 전중혈에 갖다 대면서 힘껏 토해냈다. 그의 대력이 구양봉에게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이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가 배우는 합마공은 일종의 기공으로서 적수가 강하면 강할 수록 내력이 도리어 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부가 기를 쓰고 공력을 토해 내자 이에 따라 그의 내력도 스스로 터져 나와 사부의 공력과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두 갈래의 내력이 한데 모아지자 사부의 전중혈에 갖다 댄 그의 손은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긴장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부의 내력을 받아들였다. 신독행은 자기의 내력이 구양봉한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도리어 기분이 느긋해지는 눈치였다. 그는 한마음으로 구양봉에게 내력을 주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신독행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틀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구양봉은 쓰라린 심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 이러실 필요까진 없으셨는데……."

신독행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양봉아,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넌 이 사부를 기억하고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어 큰일을 하거라……."

사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숨결은 점점 미미해지다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구양봉은 만감이 교차해서 망연히 사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자기의 다섯 제자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나한테만은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셨다. 난 반드시 그런 사부님의 뜻을 따라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리라. 난 그 꼬마 사숙을 죽여 사부님의 복수를 해 드릴 테다. 내 손으로 그 유운장의 인간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말리라.'

구양봉은 눈물을 흘리며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내력이 커져서 사부의 60년 공력을 몽땅 흡수했음을 절감했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얽힌 심정으로 그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제 이곳에서 나가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사부님을 위해 복수하여 사부님께서 구천에서도 편안히 눈을 감으시게 하리라.'

그는 사부의 유체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한 뒤 소리 내어 말했다.

"사부님, 저는 이제 떠나가겠습니다. 만일 사부님 말씀이 옳으시다면 전 꼭 밖으로 나갈수 있을 겁니다. 제가 나가게 되면 사부님 대신 반드시 복수를 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그는 굴 어귀로 향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쉰 다음 내공을 끌어올려 석판을 힘껏 떼밀었다.

 

[출처] 화산논검 - 서독 구양봉 3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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