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임꺽정 양반편4
- 홍명희
임꺽정 3: 양반편 | 홍명희 - 모바일교보문고
제 4장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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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가 정사를 알음한 뒤 오륙 년 동안 허무한 옥사와 애매한 죄목으로 허다한 인물을 죽이고 귀양 보낼 때에 한세상을 만난 간신들은 부귀공명을 천년만년 누릴 것 같았지만 역시 오륙 년 동안에 죽은 자도 있었고 귀양 간 자도 없지 아니하였다. 임백령은 이조판서로 우찬성으로 벼슬이 높아져서 시색 좋은 재상의 한 사람으로 조정에 드날리는 판이라 맘이 만족하였을 것이지만, 죽을 애를 쓰고 뺏어온 옥매향이 빌미 모를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는 것이 한걱정이 되었었다. 옥매향의 병은 자다가 한축하고 얻은 병이라 뜬것의 짓인지 모른다고 무당 들여 굿도 하고 판수 불러 경도 읽었지만 병이 차차로 중하여서 달포 뒤에는 대낮에 도 자리보전하고 눕는 때가 많아졌다. 어느 날 임백령이 조반에서 나오는 길로 옥매향에게 와서 보니 옥매향이 누워 간신히 일어 맞으며 "일찍이 나오셨습니다. " 하고 딴기 적은 말소리로 인사하였다. "오늘은 신기가 어떠하냐? “ "마찬가지지요. " "윤판서가 좋은 의원을 천거하기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 옥매향이는 윤판서란 말에 깜짝 놀라는 빛이 있다가 곧 가라앉으며 "윤판서가요? ”하고 속살거리듯 말하였다. "그래, 윤판서도 너의 병을 걱정하는 까닭에 일부러 의원을 알아보았다고 말하더라. " "저는 오래 못 살 것 같아요. " "그건 무슨 소리야? “ "아까 못된 꿈을 꾸었세요. " "못된 꿈을 꾸면 오래 못 사나?" "윤판서가 와서 년이니 놈이니 해가면서 같이 살 줄 아느냐 하고 호령호령 하겠지요. 꿈을 깨고 나니까 찬땀이 쭉 흘렀세요. " "윤판서라니? 윤임시 말이냐? ” “녜.” "별소리를 다한다, 지금 윤임이가 살았어도 별수가 없을 터인데 죽은 귀신이 무슨 수가 있어서 같이 못 살게 한단 말이냐? 부지깽이로 턱을 고이어서라도 오래 살도록 해줄 것이니 걱정 마라. " 하고 임백령이는 다정스럽게 옥매향의 머리를 짚어 주었다. "대감, 대국 사신을 가게 되시거든 아무쪼록 피하세요. " "그건 어째서?“ "윤판서가 호령할 때 대국 사신 가는 날이 마지막이니 알고 있거라 하고 영절스럽게 말해요. " "별소리를 다한다. 네가 몸이 성치 않으니까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이다. " "꿈도 허사가 아니랍니다. " "그래. 내가 아무쪼록 피할 것이니 염려 마라. " 하고 임백령이는 옥매향의 파리한 볼을 손등으로 문질러 주며 위로조로 말하였다. 살육 나던 이듬캐에 중국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상사물망이 임백령에게로 돌아갔다. 임백령이 옥매향의 꿈이야기는 잊었지만 앓는옥매향을두고 멀리 떠나기가 어려워서 이 탈 저 탈 하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대왕대비가 친히 불러서 이번 사신은 경이 가도록 하라고 말씀한 까닭에 못한다고 거역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 중국으토 사신 가게 되었다. 임백령이 떠날 때에 "빨리 갔다 오면 두서너 달밖에 안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이나 조리해라. " 하고 눈물 흘리는 옥매향을 위로하였으나 옥매향은 "안녕히 다녀오세요. 저는 대감을 다시 뵈올는지 모르겠어요. " 하고 앞짧은 소리를 하며 수건으로 눈을 가리었었다. 임백령이 사신 가는 길에 병이 들어 영평부에서 객사하게 되어서 사신 행차로 건너간 압록강을 상행으로 건너왔다. 임백령이 죽을 임시에 혀가 꼬부라져서 말을 못하게 된 까닭에 "옥 옥... " 하고 또 뒤미처 "윤 윤...” 하고 이내 운명하였다는 말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옥은 옥매향 말이고 윤은 윤원형 말이라고 추측들 하였으나, 옥매향이만은 옥은 저의 말이 분명하거니와 윤은 윤원형 말인지 윤임 말인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여 아픈 가슴이 더 아픈 것 같았었다. 옥매향이는 기름 등잔에 기름 마르듯이 기운이 말라들어가서 임백령의 졸곡도 채 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임백령이 살아 있었다면 장사나 마 훌륭하게 지내 주었으련마는 그 장사까지도 초초하였다 그러나 옥매향의 상여인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상여를 가리키며 "그년이 오늘날까지 산 것이 천도가 무심하지. " 하고 혀들을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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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령이 죽어 대상이 지나기 전에 삼십 명 공신 중의 수훈 공신인 좌의정 정순붕이 귀신 모를 죽음을 당하였다. 처음에 정순붕이 이기, 윤원형 등과 자주 상종하기 시작할 때, 그의 맏아들 정렴은 포천현감으로 있었는데 근친하러 올라와서 집에서 묵는 동안에 이것을 알고 밤저녁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이기, 윤원형 같은 인물과 상종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정렴은 총명이 과인할 뿐 아니라 인품이 절등한 까닭에 아들일망정 꺼리고 어려워하는 터이라 순붕이 "그저 우연히 상종하게 된 것이야. " 하고 우물쭈물하려다가 "우연히라도 상종하시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 하는 아들의 말에 "차차 상종하지 않지. " 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붕이 상종하지 않겠다던 사람들과 심장을 서로 맞잇게 되어 큰 사변을 일으키려고 음모할 때쯤은 정렴이 벼슬을 버리고 집에 와서 있을 때라, 순붕이 맏아들의 눈을 가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못된 짓 하는 자제가 부형의 눈을 기이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째아들 정현과 사위 이만년과 청지기 박정원을 데리고 수군수군 무엇을 공론하다가도 맏아들의 신발 소리나 기침 소리가 들리면 "저리들 가거라. " 하고 말하여 아닌보살을 차리었다. 정렴이 이것을 모를 사람이 아니라 청지기는 덮어두고 그 아우를 준절히 꾸짖고 그 매부를 간절히 책망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순붕이 윤원형의 청을 들어 모함 상소를 올리고 박정원의 꾀를 좇아 녹훈 계획을 세울 때에 정렴이 이것을 알고 지성을 다하여 그 부친을 말리었더니, 순붕은 꺼리고 어려워함이 역정으로 변하고 또 부끄러움이 노여움으로 변하여 "너의 아비는 천하 소인인 까닭에 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 하고 말을 막고 "네가 내 앞에서 죽는다 해도 내 맘은 변할 수 없다. 소안의 공명을 탐내는 맘이 그렇게 용이히 변할 듯하냐?“ 하고 엎드려 우는 점잖은 아들을 발길로 차고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정렴이 그 부친의 하는
일을 애닮게 여기어 자기 사랑 뜰 위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하는데 그 아우 정현이 앞에 와 서서 조롱하듯이 말하였다. ”형님은 순임금 같은 효자십니다. 호읍우민천을 하십니다그려. " 정렴이 울음을 그치고 눈을 부릅뜨며 "네가 사람이냐? “ 하고 소리를 지르니 "사람이 아니면 무어요? ” 하고 정현은 빈들빈들 말하였다. 열서너 살 먹은 어린 아우 정작이 옆에 서서 보다가 "여보, 둘째형님 저리 가시오. " 하고 정현의 앞을 가로막아 서니 "둘째형은 형 값에 못 가느냐? “ 하고 정현이 어린 아우를 앞으로 잡아 낚았다. 정렴이 이것을 보고 "완패한 것이란 할 수 없다. " 하고 꾸짖으니 정현이 발끈 화를 내며 ” "누구더러 완패하다오? 아비 모르는 자식은 완패하지 않소? “ 하고 그 형에게 욕설하였다. "블패천이다. " "불외지는 어떻소?” "저리 가거라. " "이것이 아직은 아버지의 집이오. 형님이 가거라 말거라 할 터수가 아니오. " 정렴이와 같은 점잖은 사람으로도 화를 참지 못하여 기등에 걸리었던 전반을 떼어내려서 한번 그 아우의 몸을 후려쳤다. "누구를 때리오, 누구를 때리어! " 하고 정현이가 형에게로 덤비는데 어린 정작이가 정렴을 가리고서서 "큰형님,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 하고 권하여 정렴이 귀여워하는 어린 아우의 말을 좇아 마루 위로 올라서면서 "어, 괴악한 것. " 하고 둘째아우를 괘씸히 말하니 정현이는 돌아서 나가면서 "어디 봅시다. " 하고 그 형을 별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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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붕은 그 맏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하여 접어 않기는 고사하고 일체로 대면하기를 싫어하게까지 되었다. 정렴이 조석 문안을 올 때에는 참답게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벽을 향하여 드러눕고, 계제가 눕지 못하게 되면 외면하고 본 체 아니하고 경우가 외면하지 못하게 되면 눈을 곱지 않게 뜨고 바라보았다. 정렴이 오래 서서 물러가지 아니하여 귀찮고 성가신즉 말한다는 것이 "노형, 서 계시기에 다리 아프지 않으시오? 고만 가시오. " 하고 듣기 미안하도록 말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청지기나 상노를 불러서 "나으리 자기 사랑으로 가시게 해라. " 하고 말하여 체면 좋게 끌어내었다. 그러하니 정렴의 민망한 처지와 애달픈 심정과 억울한 회포는 추측으로 말하기 어려을 지경이었다. 정순붕이 일등 수훈공신이 되고 정현이와 이만년이도 공신에 참예되어 순붕의 집에서는 상하가 경사라고 떠들 때에 정렴이는 손두 맞은 사람같이 혼자 방안에 들어앉아 눈물을 흘리었다. 정작이가 십여 살밖에 못 된 아이로되 시비 분간이 분명하여 부친이 그르고 백씨가 옳은 것을 능히 알 뿐 아니라 백씨의 난처한 처지까지 십분 요량하여 떠드는 틈에 섞여 있지 아니하고 혼자 있는 백씨를 위로하러 왔다. 정렴과 정작이는 연치가 삼십 년 가까이 틀리어서 형제간이라도 부자간과 다름이 없었으나, 정렴이가 이 아우를 특별히 귀여워하여 글을 가르쳐 줄 뿐이 아니라 간간이 의약 묘리도 일러주고 선가의 연단하는 방법도 말하여 주는 까닭으로 데리고 앉으면 해 가는 줄을 모르는 터이라 정렴이는 "너 오느냐7" 하고 아우 오는 것을 반겨하였다. 작은사랑에 형제 들어앉아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큰사랑에서는 치하하는 손이 그친 틈에 정현이가 부친을 보고 형의 일을 말하였다. "오늘 형이 무슨 말씀 해요? “ "무슨 말을 해? ” "그래 아무 말도 없세요? 사람이 오괴해도 분수가 있지요. " "제가 아무리 정인군자인 체해도 소인의 아들은 면할 수 없을 터이지. " "천하에 저의 부모를 그르나고 하는 정인군자가 허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을 그대로 두시면 작이까지 버리겠어요. " "그대로 두지 않으면 죽인단 말이냐? 어떻게 한단 말이냐? “ "그렇게는 못하시더라도 어디로 보내시기라도 하시지요. " "제가 가지 않는 것을 어디로 보낸단 말이냐? ” "가라시지요. " "아이구, 성가시다. " "아버지께서 말씀 아니하시면 제가 가라겠습니까. " "네가 가란다고 갈 사람이냐? “ "집에 있지 못하게만 하면 고만 아니겠세요. 두고 보세요. " 하고 정현이는 저의 형을 욕보이려고 맘먹게 되었다. 정현이는 낭속 중에 불량한 자 하나를 가리어서 밤저녁에 불러들이어 주식을 먹이고 꾀를 가르쳤다. 어느 날 초저녁에 그자가 술을 잔뜩 처먹고 작은사랑으로 들어와서 마루에 걸터앉으며 "여보게 사결이. " 하고 부르는 사결이는 정렴의 자이다. 정렴이는 벌써 짐작이 있는 듯이 들은 체도 아니하고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었다. 그자가 나중에 머리맡 영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안을 들여다보며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가? 부르는데 어째 대답이 없나7" 하고 곧 뒤를 이어서 "양반이란 것은 조상의 뼈로 양반이 아닌가? 자네는 부모를 모르는 사람이니 자네나 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허교하기가 내가 창피할 지경일세만 허교하고 지내세. " 하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때껏 몸을 꼼짝 아니하고 가만히 앉았던 정렬이 ”이놈 ! " 하고 호령하며 벌떡 일어서며 벽에 걸린 환도를 떼어내려서 칼날을 뽑아들고 윗간 영창을 열고 쫓아나오니 그자는 "애고 죽겠다. " 하고 도망하여 나갔다. 정렴이는 그자를 쫓아버릴 맘으로 환도를 들고 나온 것이라 그자의 뒤를 쫓지 아니하고 방안으로 다시 들어와서 칼날을 집에 꽃아 벽에 걸고 자리에 앉으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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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흉한 심장이 말할 수 얼었다. 낭속을 시켜 저의 형을 욕 보이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또 달리 욕보일 것을 생각하였다. 정렴이가 아침 자리 속에서 말하기 전에 약 한 첩을 먹는 버릇이 있으므로 정현은 이것을 기회삼아 형을 약으로 욕보이려고 작정하고 파두를 구하여 몸에 지니고 틈을 엿보다가 어느 날 식전에 상노가 약을 안쳐놓고 뒤를 보러 간 틈에 그 파두를 약에 넣었다. 정렴이 약을 먹고 나서 뒷맛이 다른 것을 쾨상히 생각하여 상노를 불러서 "무슨 약을 달였느냐? “ 하고 물은즉 상노는 도리어 그 묻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며 "일상 잡수시는 약이지 무슨 약이에요. " 하고 대답하였다. 멀마 아니 지나서 정렴이는 복중이 괴란하기 시작하여 일상 먹는 약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상노더러 약 찌끼를 가져오라 하여 헤치고 살펴보니 재료에 없는 파두가 많이 들어 있었다. "네가 약을 달일 때 왔다 간 사람이 없느냐? ” "없습니다. " "그러면 약을 달이다 두고 어디를 갔었느냐? “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잠간 소피 보러 간 일밖에 없습니다. " 정렴이는 약을 알고 또 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에 구하여 두는 약재가 거의 구비하였다. 그 약재 중에서 생황련을 꺼내서 즙을 내어 먹고 소 그 위에 날콩즙을 내다 먹은 까닭으로 파두독이 곧 풀리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두어 차례 설사는 면치 못하였다. 정렴은 파두의 묘맥을 짐작 못하지 않으므로 상노를 나무라지 아니하고 "이 다음 약 달일 제는 자리를 뜨지 마라. " 하고 신칙할 뿐이었다. 정현이는 파두의 효험이 신통치 못한 것을 보고 "여기 어디 비상독도 푸나 보자. " 하고 맘을 독하게 먹었다. 상노아이가 조심하여 약 달일 제 자리를 뜨지 아니하므로 틈을 얻기가 응이치 못하다가 어느 날 일이 공교히 되느라고 개 한 마리가 신짝을 입에 물고 꽁지를 샅에 끼고 마당가로 살그머니 지나가는 것을 상노가 보고 생각 없이 약을 짜다 말고 쫓아내려갔다. 정현이가 이 틈에 비상 봉지를 짜놓은 약째 털어넣고 한두 번 휘휘 저어놓았다. 상노가 신짝을 들고 돌아서 오다가 정현이와 마주쳐서 "나으리 식전 일찍 웬일이십니까? ”하고 인사하니 정현이는 "큰나으리를 좀 보이러 왔더니 아직 아니 일어나셨구나. "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버렸다. 정렴이 그 약을 먹고 보시기에 남은 약 찌끼로 비상이 든 것을 알았다. 정렴이가 둘째아우가 왔다 간 말을 상노에게서 듣고 어이없어 하는 중에 정작이 백씨에게 아침 문안을 왔다가 이것을 알고 "이런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께 여쭐랍니다. 아무리 아버지시라도 이것이야 가만둘 리 없으실 터이지요. " 하고 급히 나가니 정렴이 나가는 아우를 불러서 "이애, 떠들지 마라. 창피하다. 아버지께 아시게 하면 무엇 하느냐? 맘만 상하시게 할 뿐이지. 아예 떠들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냉수 한 그릇이나 내보내라. " 하고 이른 뒤에 당여지를 작말하여 냉수에 타서 먹었다. 정작이가 안에 들어가서 녹두죽을 쑤어 달라고 하여 손수 들고 나오니 정렴이 이것을 보고 "녹두죽을 아니 먹어도 관계없다. 신석 해독제로는 여지말이 신약이다. 여지말을 먹었으니 염려 마라. " 하고 여지말의 신효를 말하여 주다가 "녹두도 해독이 된다니 잡수어 두시지요. " 하고 어린 아우가 권하는 바람에 정렴이는 녹두죽까지 먹어 두었다. 여지말의 효력으로 정렴이는 비상에 죽지 않았으나 얼마 동안은 음식을 잘 먹지 못하였다. 정렴이 둘째아우의 소행을 괘씸히 생각하나 어떻게 조처할 도리가 없어 자기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이 수선하니 시골 가서 있겠노라고 말하고, 그 뒤로는 과천 청계산과 양주 과라리로 넘나다니고 별로 서울집에 오지 아니하니 정현이는 저의 꾀로 시원하게 형을 쫓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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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 유인숙, 윤임의 집에서 몰수한 노자와 비자를 소위 공신들에게 사패로 내릴 때에 정순붕은 수훈 공 신이라고 다른 일등공신 명색들보다 수많은 노자, 비자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순붕이 집안 권속을 데리고 안대청에 앉아서 새로 생긴 노자, 비자의 현신을 받는 중에 나이 어린 비자 하나가 눈에 뜨이었다. 그 인물이 어여쁘게 생길 뿐 아니라 그 거동이 현저하게 남과 달랐다. 옛 상전을 생각하고 질끔거리는 사람도 없지 아 니하고 새 주인을 꺼리어서 질끔거리지는 못하더라도 낙심한 모양으로 풀기 없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린 비자는 낙심한 모양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상글거리기까지 하였다. 순붕이 그 비자를 앞으로 불러 내세우고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너의 이름이 주엇이냐? “ "갑이올시다. " "나이는 몇 살인고? ” "열네 살이올시다. " 짧은 대답일망정 똑똑한 말소리가 귀엽게 들리었다. 순붕은 대답을 들어보려고 짐짓 말을 묻기 시작하였다. "너의 옛 상전은 누구이냐? “ "인숙이올시다. " "옛 상전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있을까? " "나라의 죄인이라 휘하지 못합니다. " "너는 옛 상전을 생각하는 맘이 없느냐? ” "오늘날부터는 새 상전 뫼실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 능란한 말대답에 놀란 순붕이 갑의 사람을 신통히 생각하여 뜰 위에 올라서라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입가에는 어린 양이 떠돌고 눈 속에는 총명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갑이는 유판서의 부인이 딸같이 여기고 길러놓은 아이종이라 손길에 곱게 자란 표가 드러났다. 순붕이가
이것을 살펴보고 "이때까지 험한 허드렛일은 해보지 못했구나? 방 심부름했느냐? “ 하고 물은 뒤에 "내게서도 방안 심부름을 해라. " 하고 갑이의 소임을 정하여 주었다. 순붕이 옆에 섰던 아들 현이를 돌아보며 "고년, 참 똑똑하다. " 하고 갑이를 칭찬한즉 현이가 "그 나이에 똑똑한 품이 작이와 비등합니다. " 하고 저의 부친 칭찬에 붙좇아 찰하였다가 작이가 얼굴빛을 변하며 "형님이 아우를 너무 사랑하셔서 모든 데다 똑똑하다고 내세우십니다그려. " 하고 불쾌히 말하여 순붕이는 "네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똑똑하단 말을 듣지 않지. " 하고 허허 웃었다. 갑이가 처음 얼마 동안은 안방에서 방안 심부름을 하였는데, 백령백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아니하는 중에 더욱이 순붕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나중에 갑이는 사랑방에 나가서 순붕의 손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순붕의 입에서 말이 떨어질 때 지성으로 말을 좇아 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말이 없을 때 짐작으로 뜻을 받아나가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가령 순붕이가 "다리 좀 쳐다오. " 하고 말할 때 밤이 늦도록 졸지 아니하고 다리를 칠 뿐이 아니라 순붕이 한두 번 거북하게 트림만 하면 어느 틈에 생강차를 달여 내오고 순붕의 얼굴에 잠간 피곤한 빛만 보이면 얼른 일어서서 퇴침을 갖다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말하자면 갑이는 순붕의 입의 혀 보다도 더 잘 노는 셈이었다. 이삼 년 지나서 갑이의 나이 열육칠세 된 뒤로는 순붕의 총애가 갑이 한몸 위에 쏟키어서 특별히 사랑하던 상노 계놈이란 아이까지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벼슬로는 좌의정이고 나이로는 환갑이 지난 순붕이가 계집아이종 갑이가 없으면 낮에 밥을 달게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편히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순붕의 앞에서는 감히 갑이의 말을 헐뜯어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때 정렴이가 집에 다니어 왔다가 "갑이는 미간에 살기가 있으니 너무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 하고 조용히 그 부친에게 말하였더니 "나는 네가 보기 싫으니 곧 시골로 가거라. " 하고 역증을 내어서 정렴이는 다시 두말 하지 못하고 그 아우 정작이에게 이 일을 말하고 그 부친의 침혹한 것을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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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놈이는 갑이와 연갑 되는 아이이었다. 계놈이가 주인 대감의 몸시중 드는 것은 갑이에게 앗기었으나 그래도 상노들 중에서는 가장 신임을 받아서 다른 상노들보다 자주 대감 사랑에를 드나드는 까닭으로 갑이를 많이 보게 되고, 또 간간이 갑이와 서로 말까지 하게 되었었다. 순붕이는 뒤가 조하여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는 때까지 있으므로 뒷간에 가서 더운물로 항문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뒤가 남보다 몇 배 오래 걸리어서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며칠이고 참고 지낼지언정 거연히 뒤보려고 생의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참는 끝에는 더욱이 심하여서 몇 시간 동안 산부 해복하느니나 다름없는 고초를 겪은 뒤에 쌍부축을 받고야 겨우 일어 나오고 한동안 다리를 주물리고야 간신히 기동하였다. 순붕이 뒷간에 있을 때에 뒷물 대야를 들어가고 내어오고 하는 것은 계놈이의 소임이었다. 어느 날 순붕이 뒤 보러 간 때 계놈이가 수건을 가지러 사랑에 들어왔다가 갑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이애, 수건 좀 찾아다오. " 하고 말을 붙이니 갑이는 새침하고 앉아 있다가 "네가 나하고 말해 보자는 말이냐? “ 하고 살며시 돌아다보았다. "좀 찾아주면 어떠냐? 탈나니? ” "네가 둔 걸 네가 찾지, 왜 나더러 찾아 달라느냐? “ "내 손 좀 보아라. " 하고 계놈이가 두 손을 앞으로 내어밀면서 "지금 뒷물 놓느라고 물이 묻었다. " 하고 갑이의 눈치를 보았다. "누가 씻지 말라드냐? ” 하고 계놈이가 흔잣말하며 두 손을 바지 뒤에 문지르고 수건 둔 것을 꺼내려고 탁자 있는 편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갑이가 "불쌍하니 꺼내 줄까. " 하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발을 멈추고 기다리었다. 갑이가 탁자 서랍에서 접어둔 수건을 내어줄 때 계놈이는 받는다고 손가락으로 수건 밑에 든 갑이의 손등을 눌러보니 갑이가 선뜻 뿌리치피도 아니하고 "이것이 수건 받는 거냐? “ 하고 계놈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계놈이는 면난하여 고개를 숙이고 "얼른 받느라고. " 하고 중얼거리었다. 갑이가 "손가락을 못 떼느냐? ” 하고 성을 내다가 말고 "요담부터는 좀 찬찬히 받아 버릇해라. " 하고 뱅그레 웃는 것이 계놈이에게는 뜻에 맞는 뜻밖 일이었라. 계놈이가 수건을 가지고 가써 저의 주인이 다 쓰기가 무섭게 갖다두러 다시 왔다. "아까는 잘못했습니다. " "네가 누구를 놀리는 셈이냐? “ "놀리 다니. " "그러면 무어냐? " "아니야. " "아니라니? 이따가 대감마님 들어오시거든 여쭈어 보자. 그것이 놀리는 것인가 아닌가. " 계놈이가 눈이 동그래지며 진정으로 "잘못했다. " 하고 사과하였다. 새침하게 앉았던 갑이가 흘저에 또 빙그레 웃으며 "꿇어 앉아 빌어라. "하고 말하니 계놈이는 겁나던 맘이 너누룩하여져서 갑이 앞에 꿇어 앉았다. "이애 년석이 사내자식인가. " 하고 갑이가 계놈이의 뺨을 쳤다. 아프게 친 것은 아니나 찰싹하고 소리가 났다. 갑이의 보드라운 손이 뺨에 닿을 때 계놈이는 손끝 발끝까지 짜르르하는 것 같았다. "이런 뺨은 밤낮 맞아도 좋겠다. " "뺨 맞기가 소원이면 더 좀 맞아보려느냐?" "자.“ 하고 계놈이가 뺨을 내어밀었다. 이리 돌리며 이 뺨을 맞고 저리 돌리며 저 뺨을 맞다가 계놈이는 갑이의 손목을 쥐고 "손바닥 아프지?” 하고 그 손을 들여다보니 "이애 놓아라, 남이 보면 수상하다. " 하고 갑이는 남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계놈이가 쥐었던 손목을 놓고 "품앗이로 인제는 네 뺨 좀 때려보자. " 하고 웃고 "이애가 매쳤나. 누가 너같이 뺨 맞기 소원이라드냐? “ 하고 갑이가 뒤로 물러앉는 것을 "꼭 한 번만 때려보자. " 하고 팔을 늘이어서 손으로 그 뺨을 어루만지니 갑이는 "수컷인 체하느라고 그중에. " 하고 계놈이의 손을 뿌리쳤다. 이때 영창 밖에 신발 소리가 들리었다. 계놈이가 황망히 일어나서 영창을 열고 내다노니 청지기 한 사람이 "대감 뒤보러 가셨니? ” 하고 묻고 또 뒤를 이어 "너 거기서 무엇하니? “ 하고 물어서 계놈이는 "수건 두러 왔소. " 하고 대답하며 곧 밖으로 나갔다.
7
계놈이가 그 뒤에 틈틈이 갑이를 보고 눈으로 뜻을 말하면 갑이도 두서너 번에 한 번씩으로 대답하는데, 아리땁고 열기 있는 눈이 말로 하지 못할 말까지 말하는 듯할 때 계놈이는 온몸이 그 눈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계놈이가 갑이의 혼자 있는 틈을 엿보고 지나는 중에 어느 날 밤에 순붕이 이기와 같이 윤원형에게 가서 오랫동안 무엇을 공론하고 밤 늦게 들아왔다. 아들들의 저녁 문안을 받고 자리에 누워서 갑이에게 발바닥을 문질리다가 갑자기 "안에 더운물이 있겠지? “ 하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발을 씻으시렵니까? ” "뒤를 볼까 하고 물었다. 벌써 여러 날 뒤를 못 보았는데 아까 윤판서 집에서 뒤 마려운 것을 참았더니 지금 다시 마려운 듯하구나. " "하룻밤이라도 참으시면 내일 더 괴로우실 터이니 아주 보고 주무시지요. " "귀찮지만 그래 볼까. " 하고 순붕이 곧 일어 앉아서 "이리 오너라. " 하고 상노를 불렀다. 계놈이가 엿보던 틈을 얻게 되었다. "사람 좀 살려라. " "누가 죽인다더냐? “ 이와 같은 몇 마디 수작이 있은 뒤에 계놈이가 갑이의 손목을 쥐고 골방으로 끌었다. "놓아라. 놓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테다. " "아무리나 해라. 죽기는 일반이다. " 계놈이가 열에 띄어 정신없이 끄는데 갑이가 소리는 지르지 아니하였다. 갑이가 골방에서 나와서 머리를 쓰다듬고 앉았는데, 계놈이가 쭈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들여다보며 "속량해 나가서 초례를 지내자. " 하고 속살거리니 갑이가 입속으로 두어 번 속량이란 말을 뇌다가 "어서 가서 대감의 쭉지나 치켜들고 오너라. " 하고 계놈이를 떠다밀었다. 이 뒤로 계놈이는 갑이에게 매어 지내게 되어 갑이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아니 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때 옥사에 간련된 어느 집에서 그 집의 전가보물인 옥잔을 정순붕에게 뇌물로 보내었다. 순붕이 그 옥잔을 얻어가지고 아들들에게 칭찬하고 또 갑이에게 자랑하였다. 갑이더러 말이 "내가 전에 너의 옛 상전에게서 이 옥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 하고 옥잔을 들어 보이며 "이 옥잔이 원나라 공주가 고려 임금에게로 시집 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이란다. 옥빛만 보아도 예사 옥과 다르지 아니하냐? ” 하고 싱글벙글 좋아하였다. "유씨가 보물 알아볼 눈이 있는가요? “ "남의 말을 듣고 말한 것이겠지. " "그렇지요. 사람이 몽종하고 쌀쌀할 뿐이었지 무슨 재주가 있던 사람일세 말이지요. " "너로는 말이 과하다. " "과하기는 무엇이 과해요. 어릴 때 몹시 당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는데요. " "원명이가 우리 갑이에게 득죄한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구나.” (원명은 유인숙의 자다)하고 순붕이가 실없이 말하며 허허 웃었다. 순붕이가 옥잔을 머리 맡에 놓고 보다가 미처 간수하지 못하고 출입하였다. 갑이는 옛 상전을 들추어 말하게 된 것이 옥잔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그 옥잔을 미워하여 혼자 있는 틈에 방바닥에 메어쳐서 두 조각에 내었다. 갑이가 밖에 사람이 없는 틈을 엿보아 옥잔 조각을 가지고 나가서 쪼각쪼각 마아 가지고 땅을 파고 묻어버리었다. 순붕이 돌아왔을 때 옥잔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여 "옥잔 어디 갔느냐? “ 하고 놀랐다. 찾아보고 물어보고 한바당 야단법석을 내었건만 옥잔 간 곳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의 의심이 갑이에게로 모이는데 순붕이 역시 갑이를 치의하지 아니할 길이 없었다. "옥잔이 어디 간 것을 네가 모르느냐? ” "모릅니다. " "네가 혼자 이 방에 있었다면서 모르다니 말이 되느냐? “ "잠간 밖에를 나갔다 온 일이 있으나 있기는 혼자 있었습니다. " "밖에를 나갔다 왔을 때 옥잔이 있더냐? ” "있든지 없든지 정신차려 보지 아니했습니다. " "무엇에 정신이 빠졌더냐? “ "편지 휴지 정돈했습니다. " 순붕이 한동안 쓴입맛을 다시다가 "옥잔이 없어진 것은 아무래도 너의 소위이니 사기가 로란하기 전에 내어놓아라. " 하고 눈을 부릅뜨니 갑이가 쪽쪽 울면서 "제가 댁에 온 뒤로 재상가 자녀 부럽지 않게 지내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도적질을 합니까? 또 제가 옥잔을 훔쳐서 무엇에 씁니까? “ 하고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하여 저고리 앞설이 흠씬 젖었다. 순붕이 귀에 갑이의 말이 옳게 들리어서 "고만두어라. 우지 마라. " 하고 다시 쓴입맛만 다시었다.
8
계놈이는 옥잔이 없어진 줄을 안 뒤에 갑이가 불을 받게 되지 아니할까 은근히 걱정하여 맘이 조마조마하였다. 갑이가 종아리를 맞게 될까, 또는 물볼가를 맞게 될까? 물볼기를 맞는다면 그 꼴을 어찌 볼까? 갖은 생각으로 속을 태우며 윗간 영창 밖에 붙어서서 방안 동정을 살피는 중에 갑이의 발명하는 말과 순붕의 용서하는 말을 모두 엿듣게 되었다. 계놈이는 혼잣말로 '그러면 그렇지. 갑이가 그까짓 옥잔을 훔칠 리가 있나. ' 하고 갑치의 말을 역성들기도 하고 또 '갑이가 아니었어 보아. 악지공사로라도 벼락을 내렸을 터이지. 바로 용서성이나 있는 듯이, 고만두어라야. ' 하고 대감의 말을 비웃기도 하였다. 그날 저녁에 이기가 정순붕을 찾아와서 윤결의 옥사를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언평에게로 가서 같이 이야기합시다. " 하고 윤원형에게 가자고 말사여 순붕이도 "그렇게 합시다. " 말하고 곧 갑이를 불러서 출입옷을 내어놓으라고 이르게 되었다. 갑이가 순붕의 옷을 갈아입힐 때 순붕이가 "또 무엇이나 잃어버릴라. 똑똑히 방을 지켜라. " 하고 넌지시 말하는 것을 이기가 귓결에 듣고 "대감, 무슨 실물하셨소? " 하고 물어서 순붕이가 옥잔 없어진 일을 대강 이야기하고 그 옥잔이 오래 전부터 집에 전하여 오는 귀한 물건이라고 말한즉 이기가 "옥잔이 우화했구려. " 하고 허허 웃는데 순붕이도 "글쎄요, 우화했나 보이다.“ 하고 웃었다. 순붕이 나간 뒤에 갑이가 계놈이와 붙어앉아서 서로 속살거리게 되었다. "사람이 분해 살 수가 없다. " "대체 옥잔이 어떻게 되었을까? ” "그걸 낸들 아니? “ "너나 하니까 불을 아니 받았지, 다른 사람이었더면 목숨이 위태하였을 것이다. " "고만둔다는 것이 의심이 풀린 것이 아니니까 나도 어떻게 될는지 모른다. " ”설마. " "설마가 사람 잡아. " “그러면 어떻게 할 테냐?" "어떻게 하기는 어떻게 해? 당하는 대로 당하지. ” "애매히 죄를 당해? “ "당하지 않는 수가 무어야? 내가 고초를 받다 받다 못 견디면 너도 끌어넣게 될는지 모르니 이것만은 미리 알아두어라. " "공연한 사람을 어떻게 끌어넣니? ” "훔치지도 아니한 것을 훔쳤다고 매질하며 대라면 훔쳐서 너를 주었다고라도 말했지 별수 있니. " "나는 어떻게 하라고. " "죽더라도 같이 죽지. " "같이 죽는 것은 좋지만 네나 내나 그런 얼뜬 죽음이 어디 있니? “ "나라 옥사를 생각해 보아라. 유명한 인물들도 모두 얼뜨게 죽는 세상이니 우리야 말할 것이 있니. " "그래도 얼뜨게 죽을 까닭이 없다. 우리들이 오늘 밤으로 도망하자. " "정신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 도망한다고 하여 십리 밖도
나가기 전에 붙잡힐 걸 도망한단 말이냐? ” "그러면 어떻게 하니?“ 하고 계놈이가 조바심을 하는데 갑이는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으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수가 있다. 옥잔을 훔쳐간 사람이 옥잔을 도루 갖다놓으면 우리는 살 것이다. " 하고 말하였다. "누가 훔쳐갔는지도 알지 못하며 어떻게 도로 갖다놓게 하니? ” "내가 방자하는 법을 아니까 도루 갖다놓도록 방자해 보면 어떨까 말이다. " "어서 해라. 훔쳐간 사람이 당장에 급살맞을 방자라도 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먼저 살고 보아야지. " "그런데 방자를 하라면 갓죽은 송장의 뼈마디가 있어야 한다. " "아이구, 그것을 어떻게 구하니? “ "팔 한 마디나 다리 한 마디가 있으면 제일 좋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마디 하나만 있어도 쓸 수가 있다. 네가 구해 줄 수 있겠니?” "그것을 어디 가서 구하니? “ "수구문 밖을 나가 보면 구할 수 있을 게다. " "송장이 있기로 어떻게 만지나7" 하고 계놈이가 허락하기를 꺼리다가 갑이의 호들갑에 맘을 굳게 먹게 되어서 "내일 어머니 보러 간다고 하고 수구문 밖에 나서서 구해 보마. " 하고 말하였다. 갑이가 뼈마디 구해 준단 말을 들은 뒤에는 계놈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뱅글뱅글 웃기도 하고 계놈이는 어깨에 입을 대고 옷 위로 자근자근 물기도 하였다. 계놈이는 꽃향기에 취하는 나비와 같이 갑이의 냄새에 취하였었다.
9
계놈이가 무서움을 타는 까닭에 만일 갑이에게 흘리지 아니하였던들 초빈 송장의 뼈마디를 훔치러 가려고 생의도 못하였을 것인데, 값이가 딴 기운을 주어서 수구문 밖에 나가서 어느 거적송장의 엄지손마디를 잘라오게 되었다. 갑이가 남모르게 그 뼈마디를 받아 두었다가 순붕의 베갯잇을 고쳐 시칠 때에 을그머니 베갯속을 뜯고 집어넣었다. 순붕이가 밤메 꿈자리가 사나워서 식전 자리 속에서 갑이를 보고 "요즈막 신기가 좋지 못한 까닭인지 꿈자리가 괴악하다. " 하고 상을 찌푸릴 때가 많았다. 갑이가 뼈마디로 방자할 때 사나 운 꿈자리를 바란 것이 아니므로 사오 일 된 뒤로는 다른 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이가 계놈이를 보고 "옥잔이 나오지 아니하니 달리 방자를 해보겠다. " 하고 말하니 계놈이는 "우리가 탈만 아니 당하면 고만이지 구태여 옥잔을 찾으려고 애 쓸 것이 없다. " 하고 갑이를 말리다가 갑이가 "옥잔 까닭에 치의 받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분해서 못살겠다. 내가 방자를 아는 대로는 골고루 해볼 테다. " 하고 고집을 세워서 계놈이도 "네 맘대로 해보려무나. " 하고 마침내 동의하게 되었다. "산도야지의 등성마루털이 있어야 할 터인데 네가 얻어 줄 수 있겠니?“ "사냥질 가면 얻어 줄 수 있지. " "남은 진정으로 말하는데 실없은 말이 무어냐. 너까지 내 속을 상해 줄 터이냐? ” "아니다. 골내지 마라. 그러나 산도야지털을 어디 가서 얻어 오니? 집도야지털은 못 쓰겠니? “ "그건 나도 모른다. 나도 산도야지털만 쓴단 말만 들었다. " "그걸 어디 가서 구하나? 네 방자는 예사 방자가 아니로구나. 어째 그렇게 괴상한 물건만 찾느냐?” "예사 방자거나 아니거나 얻어 달라는 거나 얻어다오. " "어디 물어서 구해 보마. " 하고 갑이에게 허락한 계놈이는 의심 사지 아니할 사람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는 중에 친한 별배에게서 갖바치들에게 가면 산도야지털이 있단 말을 듣고 그 별배에게 얻어 달라고까지 부탁하여 며칠 뒤에 산도야지의 등성마루털 서너 낱을 갑이 손에 쥐어주게 되었다. 순붕이 꿈자리 사나운 것을 성가시게 여기어 갑이를 보고 한걱정할 때에 값이가 "약주를 좀 잡수시고 주무셔 보시지요. " 하고 말하여 술취한 김에 별로 꿈이 없이 하룻밤을 지내고 그 뒤로는 잘 자리에 술을 먹게 되었는데 "술도 하루이틀 먹어 버릇하니까 처음만 못해서 먹으나 안 먹으나 꿈자리가 사납기는 일반이니 술을 고만두고 싶다. " "한번 취하도록 잡수셔 보시지요. " "글쎄. " 순붕이는 한번 폭취해 보려고 작정하고 갑이의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먹다가 나중에는 망양이 되어 자리에 꺼꾸러졌다. 갑이는 청지기와 상노의 손을 빌어 순붕을 자리 속에 뉘인 뒤에 전과 같이 혼자서 수청을 잤었는데, 밤중에 순붕의 몸을 흔들어서 정신 모르는 것을 보고 흔잣말로 "옳다, 되었다. " 하고 일어나서 산도야지털을 순붕의 배꼽 속에 비비어 박았다. 겉으로 보면 털이 박힌 것 같지도 않을 만큼 깜쪽같이 박았다. 순붕이 그날 밤 술에 취하여 자리에 꺼꾸러진 채로 다시는 영영 일어나 보지 못하였다. 발상한 상제들은 경황 없는 중에도 그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허무한 것을 의심하여 시체도 자세히 살펴보고 먹다 남은 술도 맛보았으나 수상한 흔적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정렴이와 정작이 형제는 미리 짐작이 없지 아니한 터이므로 갑이의 동정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갑이가 조음도 수상한 거동이 없을 뿐 아니라 때때로 슬피 통곡하는 것이 친자녀에서 지나면 지나지 못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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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에서 장전에 유명한 무당을 불러다가 넋두리를 시키었다. 그 무당이 고리짝을 긁으며 망자를 청하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늙은 망자가 내렸다고 넋풀이를 시작하여 저생 사자에게 구박받는 슬큼을 이야기하고 집안 식구를 면면히 찾고 또 이 세상에서 품고 간 원한을 말하는데 그중에 가다가 "내가 죽을 것을 죽은 줄 아느냐? 내가 죽고 싶어 죽은 줄 아느냐? 내가 아들이 없는 사람이냐? 내가 재물이 없는 사람이냐? 그런 내가 죽을 때에 의원 하나를 보았느냐? 약 한 첩을 먹었느냐? 수청 자는 것들이야 살붙이냐? 뼈붙이냐? 잠이 들면 고만이지 죽는 줄이나 알 것이냐? 전후좌우 널려 있던 사람 중에 마지막길 떠날 나를 보내 준 사람이 누구이냐? 어, 허무하지그려! 어, 원통하지그려! 날 잡아간 귀신이 벼개에 있는 것은 누구이고 알았을 리 없지마는 벼개 하나 바로 베어주지 못한 너희들의 일분 성심 없는 것도 어, 야속하지그려! " 하고 무당의 입에서 흘러나오든 푸념에 늙은 것들은 "그렇습지요. " "그러시고말고. "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젊은 것들은 "대감께서 살아오셔서 꾸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 "어떻게 들으면 말소리까지 아주 대감이 오셨어요. " 하고 종없이 지껄이었다. 정씨 집의 안식구들이 베개에 귀신 있다는 말을 듣고 베개를 없애고 싶은 맘이 있던 차에 둘째 상제 정현이 넋하는 것을 듣고 나서 옆에 있던 늙은 침모를 돌아보며 "대감이 근래 어떤 벼개를 비셨든가?“ 하고 물으니 그 침모가 ”아마 궁수봉황 모 벼개이겠지요. 갑이가 자세히 알 터이니 불러 물어보시지요. " 하고 대답하는데 이때 갑이는 빈소에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정현이가 갑이를 부르러 보내려고 할 즈음에 젊은 침모가 “대감께서 근래 비시던 벼개는 마루방에 치워 둔 이부자리 속에 든 것이겠지요. 물어볼 것도 없지 않아요. " 하고 말하여 정현이는 곧 계집하인 한 사람을 시켜서 마루방에 있는 베개를 가져오게 하였다. 안식구들은 베개를 그대로 살라 버리려고 하였으나 정현이가 한번 속을 뜯어보고 사르자고 주장하여 베개의 잇을 뜯고 또 베개의 속을 꺼내어 보게 되었다. 베갯속을 꺼내던 계집하인이 "애그머니, 이게 무어야. " 하고 손에서 뿌리쳐 내던지는 물건이 있어서 여러 사람의 눈이 일시에 한곳으로 쏠리었다. 그 물건이 사람의 엄지손 마디인 것을 안 뒤에 여러 사람은 다같이 놀랐다. "벼개에 귀신이 있단 말이 참말이구려. " "유명한 무당이 다르구려. " "그러니 대감이 방자를 받고 돌아가신 모양이지. " "그렇기에 내가 죽을 것을 죽은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아요. " 하고 침모들과 계집하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지껄이는 중에 정현이가 그 엄지손 마디를 싸서 들고 여막에 있는 형에게로 쫓아나갔다. 형제간에 의논이 달랐다. 베갯속의 엄지손 마디를 방자로 보는 것과 방자한 사람을 갑이로 치의하는 것은 형제 다름이 없었으나, 정렴이는 갑이를 치죄하자면 그 부친에게 욕스러운 말이 없지 아니할 것을 요량하고 "방자한 것의 소위는 괘씸하나 사람의 생사가 방자에 달리지 아니하였으니 방자한 것은 유야무야 중에 덮어두고 갑이를 내어쫓자. " 하고 주장하고 정현이는 그 부친이 방자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니 말이 되오. 문초를 받아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거든 갑이를 대매에 때려죽입시다. " 하고 고집하여 한동안 형제간에 말이 왔다갔다 하다가 나중에 현이가 분을 내면서 "형님은 고만두시오. 형님은 본래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터이니까 원수 갚을 생각도 없을 터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불공대천의 큰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없소.” 하고 일어서 나가려는 것을 정렴이가 "잠간만 앉아라. " 하고 붙들어 앉히고 "그 일을 사실하려거든 밤저녁 사람 없는 때 조용히 하도록 해라. " 하고 말하였으나 정현이는 "형님은 상관 마오. 내 원수를 대낮에 갚든지 오밤중에 갚든지 형님에게 아랑곳이 무엇이오. " 하고 상옷자락에 바람이 차도록 핑하게 여막 밖으로 나갔다. 상주 형제가 여막 안에서 말할 때에 맏상주의 말소리는 한결같이 나직나직하였지만, 둘째상주는 처음부터 그 형과 시비를 차리는 것같이 언성이 높았었다. 계놈이가 마침 여막 밖으로 지나가다가 갑이의 문초 받고 대매에 죽이자는 말을 귓결에 듣고 놀라 여막 아래 앉아 있는 거상 하인에게로 와서 "둘째상제님이 왜 저렇게 떠드시우?" 하고 가만히 말을 물으니 그 하인이 손을 내어젓다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섰는 계놈이 귀에 입을 대고 "대감이 방자에 죽었단다. 방자한 사람은 갑이인 듯하고 방자한 물건은 사람의 엄지손 마디란다. 지금 둘째가 방자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원수를 갚자고 떠드는 판이야. " 하고 일러 주었다. 계놈이가 경겁하여 말도 더 묻지 못하고 공연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간신히 "큰일났구려. " 하고 한마디 말을 뒤에 남기고 곧 갑이를 찾아갔다. 빈소 뒤 툇마루에 갑이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계놈이가 정신없이 앞으로 대어들었다. "이애, 큰일났다. " "무슨 큰일?" "여기 있다는 죽을 테니 지금 당장 도망하자. " "대체 무슨 큰일이냐? “ "네가 그것을 가지고 대감을 방자했다며? ” 갑이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다가 사르르 펴이면서 "나는 무슨 큰일이라고? “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무슨 큰일이라니? 지금 상주 형제가 너를 죽이자고 공론하는 중이 야. " "죽이면 죽지, 큰일 될 것 없다. " 하고 갑이는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었다. "이애, 그런 법이 어디 있니? 나는 너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죽으란 말이냐? ” 갑이가 둘레둘레 바라보다가 뒤꼍에 있는 나무광 문이 지쳐만 있는 것을 보고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다가는 남의 눈에 들킬는지 모르니 저 나무광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 하고 계놈이를 끌었다. 광 속 나뭇단 뒤에 둘이 숨어 앉아 길게 이야기하고 다시 나을 때에 갑이가 "나의 전후 사정은 네가 인에 다 알았으니까 다시 더 말할 것이 없고 영결로 한마디 말할 것은 내가 정가의 집에 온 뒤 사 년 동안에 꼭 한번 남의 말을 진정으로 기쁘게 들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네가 골방에서 나와서 나를 보고 속량해 나가서 같이 살자고 말한 것이다. 내가 저생에 가서라도 너의 신세를 갚도록 할 터이리 우리 저생에 다서 만나자. " 하고 다정스럽게 말하고 나서 "너 먼저 앞으로 나가거라. " 하고 말하여 계놈이가 얼빠진 사람같이 걸어갈 때에 갑이는 그 뒷 모양을 바라보며 거짓없는 눈물을 흘리었다. 정현이가 여막에서 나오며 곧 거조를 차리려고 할 즈음에 점잖은 조객이 와서 다시 여막으로 들어가 형과 함께 조상을 받고 '조객이나 또 오면 비편하니 밤까지 참으리라. ' 하고 생각하여 낮에는 말이 없이 지내었다. 그날 밤에 정현이 빈소 앞마루에 등불을 밝히고 앉아서 갑이를 잡아내어 뜰 아래 세우고 "대감마님을 방자한 엄지손 마디의 출처는 네가 알 터이니 일호기망 없이 바른 대로 말해라. " 하고 호령하니 갑이는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이 "내가 말을 할 테니 말하는 동안에는 되지 못한 호령을 마시오. 개호령을 겁낼 내가 아니오. " 하고 대담스럽게 말하여 둘러섰던 하인들은 말할 것이 없고 정현 이까지도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다. "자, 말하리다. " 하고 갑이가 짧게 기침 한번 하고 나서 마루 위를 치어다보며 "너의 집 늙은 것이 우리 상전을 죽인 놈이다. 내가 우리 상전의 원수를 갚으려고 늙은 놈을 벼른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대체 그 늙은 놈이 우리 상전과는 친구로 사귀고 사돈으로 연혼까지 한 놈이 무슨 원혐이 있어서 그렇게 흉악하게 모함을 한단 말이냐? 그놈의 심장은 사람의 심장으로 알 수 없지 아니하냐? “ 하고 욕설을 퍼부을 때 정현이 듣다 못하여 "그년의 주둥이를 비비지 못하느냐! " 하고 하인을 호령하니 갑이가 "그러면 고만두어라. 너희들도 듣기 시원하게 전후 사실을 자세히 말하여 주려고 했더니 되지 못하게 호령질을 하니 인제 나는 말을 아니할 테다. 너희들 생각대로 해라. " 하고 입을 다물었다.
11
갑이는 여러 차례 얻어맞아서 뺨이 부어오르고 쥐어질리어서 입 귀에 피가 흐르고 또 걷어차이어서 땅바닥에 주물러앉게 되었다. 그러차 입은 닫힌 채로 떼지 아니하여 아프단 소리 한마디가 없었다. 정현이 이것을 보고 "조그만 년이 괘씸스럽게 얼마나 말 안 하고 배길 테냐! " 하고 소리를 지르고 곧 하인을 호령하여 물볼기 때릴 거조를 차리게 하였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갑이를 속곳 하나만 남겨두고 아래옷을 모두 벗긴 뒤에 멍석 위에 잡아 엎지르고 속곳 위에 동미 물을 들어부으니 속곳이 살에 달라붙어서 올통볼통한 살모양이 드러났다. 매질이 시작되었다. 값이의 고운 살이 첫매에 부르터지기 시작되어 매 열 개 안에 불그스름한 핏물이 멍석 위에 고이었다. "그 손마디가 어디서 났느냐? “ "그 손마디를 누가 얻어 주었느냐? ” 하고 매질 사이에 고찰하는 호령은 서리 같으나 갑이는 벙어리 된 듯이 대답이 없었다. 아래웃니가 마주치는 딱딱 소리 외에는 이를 가는 아드득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독한 년이다. 톡톡이 쳐라! " 하고 호령인 떨어진 뒤 매질이 더욱 무지스러웠다. 매 잡은 하인의 긴 대답이 연해 나는 중에 계놈이가 어디서 뛰어나와서 뜰 아래에 엎드리며 "매질을 그치라십시오. 소인이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그 손마디는 소인이 얻어 준 것이올시다. " 하고 말하여 갑이를 제치어 놓고 계놈이의 문초를 받으려고 할 즈음에 갑이가 감았던 눈을 뜨고 계놈이를 보더니 "저 얼뜬 자식이 내게 속은 것도 분하지 아니한가. " 하고 비로소 입을 떼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다 말할 것이니까 계놈이 같은 얼뜬 자식에게 물을 것이 없소. 내가 상전의 원수 갚을 꾀를 생각하고 말 안 내고 심부름해 줄 사람을 구하는 중에 계놈이가 내게 부니는 눈치가 뵈입디다. 그래서 이 자식을 한번 놀려서 심부름꾼을 만들어 보리라 작정했소. 내가 저에게 끌리는 체한 것이 실상은 내가 저를 끈 것이오. " 하고 말하여 가다가 "말할 것은 많은데 목이 타서 말을 못하겠으니 물 한 모금 먹여 주시오.“ 하고 말차려 정현이는 갑이의 말을 들으려고 물을 먹이어 주게 하였다. 갑이가 물 몇 모금을 받아먹은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계놈이를 내 손에 넣게 되었소. 옥잔 야단이 났을 때 옥잔은 내가 없이 한 것이오. 옥잔을 가지고 우리 상전을 들추는 것이 괘씸해서 내가 깨뜨려버렸소. 깨뜨린 것은 뒤꼍 굴뚝 옆에 묻었으니 궁금하거든 나중에 파보시오. 그래 옥잔 까닭에 치의받아서 죽을 곡경을 치를는지 모른다고 계놈이를 혼동하고 옥잔 훔쳐간 사람을 방자한다고 초빈 송장의 뼈마디를 얻어달라고 했소. 그 뒤에 뼈마디 방자가 잘 안 된다고 또 산도야지털을 얻어 달라고 했소. " 하고 말하는데 정현이가 "산도야지털은 무엇에 썼느냐? “ 하고 물었다. 갑이가 무심결에 몸을 움직이려다가 아픔을 참느라고 한동안 입을 악물고 있는 것을 "무엇에 쓴 것을 바로 대라. " 하고 정현이가 호령하니 갑이가 고개를 들고 치어다보며 "호령 마시오. " 하고 타박한 뒤에 또다시 말을 이었다. "그 도야지털은 늙은 것이 술취해 곤드라졌을 때 배꼽 속에 박았소. 미심하거든 염한 것을 풀고 보시오. " 하고 다시 물을 좀 먹여 찰라고 하인에게 손짓하는 것을 정현이가 보고 "말을 더 들을 것이 없다. 물 먹여 주지 마라. " 하고 이르는데 옆에서 보던 정작이가 그 형에게 "내가 몇 마디 물어볼 말이 있으니 물을 먹이라고 하시오. ” 하고 말하여 갑이는 다시 물 몇 모금 얻어먹게 되었다. "네가 유씨만 상전이라고 말하니 우리는 너의 상전이 아니란 말이냐? “ "상전의 원수이시, 상전은 무슨 상전이오? 우리 상전이 나를 친자녀같이 기른 은공을 말하면 상전이요 부모이니까 우리 상전은 예사 상전과도 다르지요. " ”대감 돌아가신 뒤에 네가 설게 운 것은 작죄한 것이 무서워 운것이냐? “ "여보, 어린애 소리 고만두시오. 나는 내 설움에 울었지 당신네 집 초상에는 상관도 없소. " 하고 갑이는 정작이의 묻는 말을 웃첬다. 정현이 그 아우를 돌아보며 그만두라고 말하고 작도를 들이라고 하여 갑이를 공석에 두루루 말아서 작도에 넣고 목을 자르게 하였다. 계놈이까지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정작이가 죄의 경중을 분간해 말하여 계놈이는 죽도록 매만 맞았었다.
12
순붕이 명에 죽지 못한 것을 그 집에서는 깊이 숨기고 말이 밖에 나가지 아니하도콕 안팎 하인들을 단속하였다. 조객이 와서 "무슨 병환에 그렇게 졸지에 궂기셨소? “ 하고 물으면 상주들은 "약주가 좀 과히 취하신 중에 동풍이 되셔서 갑자기 상사가 나셨습니다. " 하고 대답하고, 겉 풍문을 듣고 와서 체면없이 "무슨 하인의 변이 있었다니 참말이오? ” 하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손버릇 사나운 아이종이 매맞은 끝에 죽은 일이 있습니다. " 하고 대답을 하였다. 순붕의 졸곡이 지난 뒤에 어느 날 이기가 상주들을 보러 와서 "선대감 작고하신 뒤에는 무슨 일 하나 서로 의논할 사람이 없네그려.“ 하고 한탄하듯이 말하니 정렴이는 속으로 불쾌히 여기며 잠자코 앉았고 정현이는 "대감께서 소인의 선친과 좀 자별히 지내셨습니까? ”하고 말을 받들어 주었다. 이기가 자연히 정현이와 많이 수작하게 되어서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무슨 말끝에 "선대감 생존시에 가까이 시중하던 아이종년이 있었지? “ 하고 말하여 정현이 ”녜.“ 하고 대답한 뒤에 "그년이 어디 갔나? ” 하고 물으니 정현이 대답이 없었다. "죽었단 말이 있으니 그것이 참말인가? “ "죽었습니다. 대감께서 그것을 어떻게 들으셔 계십지까? ” "나도 귀가 있으니까 듣지그려. 그런데 그년이 어떻게 죽었나? “ 하고 밑을 캐어물으니 정현이 까닭을 몰라 황당하여 하며 대답하였다. "그년이 홍한 년이에요. 그년이 상노놈과 부동해 가지고 선친이 신명같이 아끼시던 옥잔을 훔쳐갔습니다. 선친도 생존시에 그년을 치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친 작고하신 뒤에 그년이 적실히 훔쳐간 것을 알게 되어 소인이 형의 몸을 받아서 치죄했습니다. 죽게까지 치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년이 매를 맞아보지 못한 탓으로 장독이 심했던 모양이올시다. " 이기가 정현의 말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나는 듣기를 그년이 전 상전의 원수라고 선대감을 치독했다고 들었어. 거짓말이 많은 세상이라 할 수 없네. 옥단 잃은 것은 나도 아는 일일세. ”하고 얼굴에 안심하는 빛이 있었다. 사실로 이기는 배의라는 친한 의관에게서 소문을 들은 뒤에 전에 사패한 노자와 비자들은 일절 앞에 가까이 하지 않는 터이었다. 이기가 조용히 집에 있을 때 배의가 온 것을 방으로 불러들이었다. "여보게, 이 사람 향자에 자네가 정의정 집 소문을 이야기난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거짓말이데. " "허무한 말이와요.“ "꼬투리는 있으니까 허무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거짓말은 거짓말이야.” "정의정댁 상노로 있던 아이놈이 장독으로 소인의 약을 먹었삽는데 그놈의 입에서 난 말이올시다. " "글쎄, 요전에도 말했지, 그런데 내가 알아본즉 아이종년이 상노놈과 부동해 가지고 수엇을 훔쳐냈더라네, 그 집에서 치죄는 좀 과히 했던 모앙이야. " "대체 그 아이놈의 아비가 저의 자식의 매맞은 까닭을 말하는 것이 동에 잘 닿지 않아서 거짓말인 듯한 의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의심나는 소문이라도 소인이 들은 바에야 대감께 아니와서 여쭐 길이 있습니까. " "암, 그렇지. " "황송하오나 오늘은 소인이 대감께 여쭐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 무슨 말인가? “ "가까이 전의에 변동이 있으리라고 말들 하옵는데 대감께서 소인의 일을 특별히 하념 하옵시는 터이오니 이번에 제조 대감께 편지 한 장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때 허자가 이조판서로 전의 제조를 겸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일세만 남중이가 내 말을 들을는지 모르겠네.” "어디로 보기로 허판서가 대감 말씀을 무일 수가 있습니까. " "그렇지도 않아. 연전에 위에서 공신 자제를 녹훈하라실 때 남중이가 유독 사양하는 것을 내가 그I리 못하는 법이라고 나무래기까지 하였건만 육칠 차나 고사해서 그예 사양했었네, 그때 공신의 자제로 정현이 하나만 녹훈된 것이 남중이가 고집을 부린 까닭일세. "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옵지요. " "아무래도 편지로는 어려을 듯하니 내가 지금 녹사를 보내서 말해 봄세. " 하고 이기는 허자에게 녹사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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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영의정 이기의 녹사가 허자에게 갔다 왔다. "대답이 무어라든고? “ "소인이 가서 처음에 말씀을 여쭈온즉 못 들은 체하고 앉으셨기에 재차 말씀을 여쭈었습지요. 그리하였삽더니 흘저에 벌떡 일어 서서 소인의 뒷덜미를 잡고 휘두르며 내가 정부 서리란 말이냐? 그 따위 청을 어디 와 말하느냐? 하고 호령짓거리를 하시겠지요. 항거할 수 있습니까? 꼼짝없이 당했습지요. " "무엇이 어째! " 하고 이기가 발끈 화를 내는데 배의관이 "허판서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 말하고 또 녹사가 "소인아 녹사를 차닌 지 십여 년에 오늘 같은 봉변은 처음이올시다. " 말하여 화를 돋아주어서 칠십 노인 이기가 한동안은 철없는 젊은 사람들 골내듯이 손발 하나 가만두지 못하고 펄펄 뛰다가 조금 진정이 된 뒤에 "되지 못한 기광 얼마나 부리나 두고 보자. "하고 허자를 별렀다. 허자는 자기의 소행이 그른 것을 알고 일등공신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므로 한때 만난 듯이 부귀공명을 자랑하는 다른 공신들과는 심사가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공신들 중에서 허자의 심사를 알아주는 사람은 좌찬성 민제인 한 사람뿐이라 허자가 이기에게 문후할 틈아 있으면 그 틈을 가지고 민계인을 심방하였다. 허자와 민제인이 서로 막역하게 지내는 것이 과부 설움을 동무 과부가 차는 격이었다. 어느 날 허자가 민제인을 찾아왔다가 그 얼굴에 분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대감이 무슨 분한 일을 보았소?" 하고 물었다. 그때 민제인은 한 동리에 사는 젊은 친구 김난상을 찾아갔다가 창피한 대접을 받고 온 길이었다. 민제인이 김난상에게 가서 통자한즉 직품으로 보든지 연기로 보든지 무엇으로 보든피 진동한동 뛰어나와서 맞아들여야 할 사람이 방금 머리를 빗는 중이니 문 안에 들어서서 기다리라고 아이종에게 말을 일러보냈으니 이것은 남에게 말도 못할 창피한 대접이라 민제인이 분하게 여기어 바로 곧 집으로 돌아왔었다. 민제인이 허자의 묻는 말에 "대감이 아니면 말도 할 수 없는 분한 일이오. " 하고 김난상에게 창피 받는 것을 이야기하고 "내가 한번 죽지 못한 탓으로 동리 소년에게까지 봉변하고 살게 되니 이런 분하고 절통한 일이 어디 있겠소. " "지금 대감이나 나에게는 남은 것이 욕뿐이오. " "지금 욕만 먹소? 후세의 악명은 어떻게 하오. " "대감은 그래도 나보다는 덜할 것이오. " "한번 소인 이름이 붙는 날이면 더하고 덜할 것이 무엇 있소. " "우리가 모인 소리 듣기는 원통하지 아니하오. " 하고 허자와 민제인은 서로 손 맞잡고 눈물까지 흘리었었다. 안명세 옥사 때에 민제인이 사기를 고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죄인을 두둔해 말하다가 죄로 몰리어서 공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민제인이 집이 가난한 까닭으로 귀양 간 뒤에 의식이 군간 하여 그 아우 제영이 한걱정으로 지내는데, 허자가 이것을 알고 민제영을 당진 현감으로 제수하게 하니 그 형을 돌보아주라는 뜻이었다. 이때 마침 허자의 친한 사람이 이기에게 가서 "연전 옥사를 일으킨 공로로 녹훈까지 된 것은 한 되는 일이로다. " 하고 허자가 말한 것을 옮기었더니 이기가 속으로 '옳다, 되었다. ' 하고 대사헌 진복창과 사간 이무강을 불러서 허자를 탄핵하도록 지주하였다. 허자가 대간 탄핵에 몰리어서 일등공신이 삼등으로 깎이고 함경도 홍원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기는 이것도 맘에 부족하여 사사하도록 가죄하기를 청하려고 계초를 품에 품고 예궐하여 탑전에서 먼저 다른 일을 아뢰는 중에 갑자기 현기가 나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대비가 이것을 보고 놀라 여러 내시를 시켜서 빈청으로 내어다 뉘게 하고 여러 의관을 시켜서 의약으로 구호하게 하였으나 이기는 나이 칠십이 넘은 사람이라 평일의 근력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종시 젊은 사람과 달라서 돌리지 못하고 집에 나올 사이도 없이 운명하게 되었는데, 죽을 때 정신 혼몽한 중에 "이해가 나를 죽인다. " 하고 소리를 지르고 이내 성각이 없어졌었다. 이기가 급사하는 바람에 허자는 다행히 가죄를 면하였으나 얼마 뒤에 구경 배소에서 병들어 죽었다.
14
정순붕, 이기 등이 차례로 죽은 위에 조정은 윤원형의 독판이라 사헌부 대사헌이니, 사간원 대사간이니 또는 홍문관 부제학이니 서슬 좋은 조정 관원들씨 대개는 원형의 앞에서 견마의 충성을 다하는 인물들이었다. 대체 말이나 개의 주인 위하는 충성은 일호 거짓이 없지마는 사람으로서 말 노릇 개 노릇 하는 것은 충성이 곧 거짓이라 말이나 개만 못한 거짓 충성이 주인의 눈의 밖에 나서 좋지 못하게 신세를 마치는 것은 첩경 있기 쉬운 일이다. 대사헌 진복창은 세상 사람에게 독사 지목을 받아가며 원형의 미워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구축하고 살육하되 항상 원형의 소망에 지나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복창도 원형의 눈의 밖에 나는 날이 있어서 원형의 말이 "내가 남을 해치려고 독사를 기를 사람이 아니다. " 하고 복창의 허물을 잡아 대비께 품하고 삼수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부제학 정언각즌 양재 익명서를 큰 공로거리로 생각하여 귀 뒤의 옥관자가 쉽사리 두서너 번 변하여 도리어 승품 재상이 될 것을 꿈꾸고 있었으나 꿈은 꿈대로 떨어지고 관자는 좀처럼 변하지 아니하였다. 아침에 소세하고 망건을 쓸 때 관자의 연화수조를 들여다보며 쓴입맛을 다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언각이 익명서의 공로만 가지고는 속히 현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원형의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하여 원형의 집 청지기에게 약간 토심받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정언각이 원형의 집에 와서 원형의 거처하는 방이 조용한 것을 보고 청지기에게 말을 물었다. "대감이 어디 가셨나?“ "작은댁에 가셨어요. " "곧 오시겠나?” "그걸 알 수가 있나요. " "좀 기다려 볼까? “ "요량대로 하시지요. " "사랑으로 들어갈까?” "대감이 아니 계신 때는 영치정 대감이 오셔도 사랑에 들이지 아니 해요. " "그러면 마루에 앉아 기다림세. " 하고 정언각이 한두 시각을 착실히 기다린 뒤에 '에라 쉬' 소리가 나며 원형이 탄 남여가 사랑 뜰 아래에 와서 놓이었다. 원형이 청지기의 좌우 부축으로 마루에 올라을 새 뜰 위에 내려섰는 정언각을 보고 잠깐 고개를 끄덕이었다. 정언각이 원형의 뒤를 따라 사랑에 들어와서 장지 밖에 꿇어앉으니 원형이 인삿말도 하기 전에 "영감이 말을 타고 왔소? “ 하고 물었다. "녜, 말을 탔습니다. " "그 말이 장히 눈에 익기는 한데 뉘 말이든지 생각이 아니 나서 지금 들어오다가 하인들더러 물어보기까지 하였소. 본래는 영감의 말이 아니지? ” “아니올시다. 전에 임형수 타던 말이랍니다. " "옳지, 임형수 타고 다니던 말이야. 말이 좋더군. " "걸음이 시일해서 좋아요. 조금 사납기는 하지만 자견으로 다녀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 "우선 생김생김이 잘생겼어. " "대감께서 세워 보실 의향이 계시다면 바치겠습니다. " "아니, 나는 말이 소용없소. " 하고 원형이 주는 말은 받지 아니하였으나 주는 뜻은 받아서 언각을 술대접까지 하여 보내었다. 언각이 원형의 돌보아 주는 힘을 입어서 옥관자를 금관자로 바꾸어 붙이게 되고 얼마 뒤에 경기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언각이 예궐 숙배하고 나와서 원형의 집을 향하여 오는 길에 하인들은 뒤에 따르게 하고 자견하고 앞서 오는데, 언각이 정신 놓고 무엇을 생각하는 중에 말이 무엇에 놀랐던지 갑자기 뒤를 솟치어서 말 위에서 떨어졌다. 아주 다 떨어지기나 하였더면 낙상할 뿐이었겠지만, 한 발이 동자에 걸리어서 몸이 매어달리게 된데다가 뒤에 오던 하인들이 무망중에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말이 들고 뛰기 시작하여 언각은 두골이 깨어지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갈리고 찢어져서 즉사하게 되었다. 정언각이 임형수의 말에게 죽었다는 말이 세상에 퍼진 뒤에 "천도가 무심치 않다. " "보복이 무섭다. "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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