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임꺽정 의형제편 박유복이3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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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이가 고서방의 장인 큰골 노첨지란 자가 빈틈없이 자기의 원수인 것을 알고 맘에는 곧 그 시각으로 큰골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급한 맘을 가라앉히고 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밤이 이슥한 뒤 놀러왔던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각기 돌아가고 유복이와 김서방과 단 두 사람이 같이 자게 되었는데, 김서방은 누우며 바로 잠이 들어 드르렁드르렁 코를 쏠고 유복이는 이 생각 저 생각 조각 생각이 머릿속에 오락가락하여 잠을 잃고 어두운 속에 눈을 뜨고 누워 있었다. 한밤중이 지나서 사방이 고요한데 어디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어서 유복이가 귀를 기울이고 들으니 말소리가 안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였다. 사내소리와 여편네 소리가 섞이어 나오는데 사내 소리는 나직나믹하고 수가 적으나여편네 소리는 새되고도 수다하였다. 처음에 말은 둘다 알아듣기 어렵던 것이차차로 말소리가 높아져서 여편네 말은 고사하고 사내 말까지도 짐작 섞어서 알아듣게 되었다. "내가 하두 부처님 같으니까 아무 짓을 해두 좋을 줄 알구. " "부처님이면 치성이나 들어오지 밥먹구 하는 것이 무어야? 큰 소리만 하면 제일인가. " "나이 사십이야. 너무 지각없이 굴지 말게. " "지각이 안 났으니 어쩔 테야! 지각 난 사람 다 보았어. " "말만 받아넘기면 장사냐. " "자다 말구 남의 비우를 왜 긁어, 가만히 있는 사람을. 미쳤나!“ ”왜 이렇게 큰소리야.“ ”누가할 소린지. 큰소리 작작 질러. 어린애 잠 깨겠어.“ ”저까지 자식 뉘 자식인지알아.“ ”더 할 소리 없네. 뉘 자식인가 모르거든 가르쳐 줄까? 내 뱃속으로 나온 거야. 내 자식이야.“ ”뻔뻔한 년 같으니.“ ”누구더러 년이래!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 같이 살기가 싫거든 되지 못하게 속에 넣고 우물거리지 말고 사내답게 갈라서자고 그래. 그러면 나는 이 밤이라도 우리 집으로 갈 테야. “ ”다른 놈하구 살기 좋게?“ ”걱정두 많아. 갈라선 뒤에야 남이 누구하고 살건 말건 걱정이 무어야?“ 그 다음에는 방문 열어젖히는 소리, 어린아이 우는 소리,여러 소리가 뒤섞여 들리엇다. 유복이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고서방 내외쌈이근저가 깊은 모양인데 아까 머슴들의 말과 같이 칼질까지 난다 하면 자기가 살인 옥사에 증인으로라도 붙잡혀 갈 것이 정한 일이라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의외에 봉변할 것 같아서 슬그머니 일어서서 보따리를 찾아들고 방문을 소리없이여닫히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바로 큰골로 가려고 해주길을 찾아나서다가오밤중에 길 가는 것이 남에게 수상하게 보일 염려가 있어서 맘을 고쳐먹고 걸음을 돌치어서 다시 대상집을 찾아왔다. 화톳불 앞에서 밤새움하는 사람들이 밤윷을 가지고 노름하다가 유복이 오는 것을 보고 ”저이가 초저녁에 왔다간 이아니라구.“ ”고서방 따라가던 이로군.“ 하고 서로 지껄이고 ”어째서 자지 않고 밤중에 왔소?“ 하고 한 사람이 묻는 것을 유복이는 긴말 아니하고 ”새벽제삿밥 얻어먹으려구 왔소.“ 하고 대답한 뒤 곧 화톳불 가까이 가서 앉았다.
유복이가 여러 사람들 틈에 섞여 앉아서 건밤을 새는 동안에 곰배팔이 오서방의 고모 내외를 한 번 찾아보고 갈 맘이 나서 노름 아니하는 사람에게 말을 물어서 오서방 집 가는 길도 알았고, 오서방의 고모부는 벌써 전에 작고하고 오서방의 고모가 아들을 데리고 사는데 그 집이 오서방 집 이웃인 것도 알았다. 날이 밝은 뒤에 유복이는 제삿밥으로 요기하고 젊은 주인을 찾아서 누누이 치사하고 대상집에서 나오며 곧 오서방 집을 찾아왔다. 쓰러져가는 삼간 초가에 울타리와 삽작문이 명색만 있어서 문 밖에서 집 안이 들여다보이었다. 마당에서 오서방이 한 손으로 비질하는 것을 유복이가 “여보 오서방. " 하고 부르니 오서방이 비를 놓고 나와서 유복이를 보더니 곧 “어제 고서방네 집에서 주무신 손님이로군. " 하고 알아보고 뒤를 이어 “어째서 나를 찾으셨소?” 하고 유복이의온 뜻을 물었다. 유복이가 노가 원수를 갚기 전에 본색 드러내는 것을 재미없게생각하여 그저 들떼놓고 뒤 부탁이 있어서 오서방의 고모를 잠깐 찾아보러 왔노라고 말하니 오서방이 뉘 부탁이냐고 굳이 캐어물어서 유복이는 한참 동안 끙끙
거리다가 이모부의 성명을 대고 자기가 그와 한동네 사는 사람인데 찾아보고 오라는 부탁이 있었다고 꾸며대었다. “그러시면 내가 가서 우리 아주머니가 일어나셨나 보구 올 테니 여기 서서 잠깐만 기다리시우. " 하고 오서방이 곧 이웃집으로 가더니 한동안 뒤에 그 집 삽작 밖에 나서서 유복이를 바라보며 “이리 오시오. " 하고 성한 손으로 손짓하였다. 유복이가 그 앞에 와서 오서방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열어놓은 건넌방 되창문 안에 키가 작달막한 늙은 할머니가 문틀을 짚고 서서 내다보다가 무슨 의외 일을 보는 것같이 놀라면서 “세상에 별일도 많다. " 하고 혼자 말하였다. 유복이가 오서방의 지도하는 대로건넌방에 들어와서 절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뒤에 그 늙은 할머니는 유심히유복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성씨가 뉘댁이오?” 하고 유복이의 성을 물었다.
유복이가 거짓말하기가 난중하여 어물어물하다가 나중에 “김가올시다. " 하고대답하니 “녜, 김서방이오. " 하고 그 늙은 할머니는 곧 자기 조카를 돌아보며“향나뭇골댁 남편 박서방 이야기를 너는 많이 들었지?” 하고 동에 닿지 않는말을 물었다. “어떤 박서방 말입니까?” “아따, 서울 잡혀가서 매 맞아 죽은 박서방 말이야. " “듣구말구요. 어젯밤에두 이야기가 났었습니다. " 하고 오서방이그 고모의 말에 대답하고 곧 유복이를 향하여 “큰골 노첨지가 모함해서 죽였다는 이 말이오? 그가 박서방이라우. " 하고 가르쳐 주듯이 말하니 유복이는 힘없이 입안 소리로 “녜. " 하고 대답하였다. 그 늙은 할머니가 옆에 놓이 장끼목을집어서 눈을 씻고 다시 유복이의 얼굴을 바라다보면서 “남남까리도 같은 사람이 있지만 김서방이 어떻게 그 박서방과 같은지 아까 들어오실 때 나는 깜짝 놀랬으니. " 하고 혼잣말하듯이 말하고 나서 “김서방 무슨 생이시오?” 하고 유복이의 나이를 물었다. “임오생 서른네 살입니다. " “바로 박서방 돌아가던 해에 났었구려. 죄없이 죽은 이라 곧 인도환생했을 테지. 김서방이 혹 그 후신인가 보오. " “녜. " “향나뭇골댁이 남편 뒤를 쫓아갈 때 태중이었습니다. 그 뒤에 유복자로 아들을 났단 말까지 들었는데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여기를올 것도 같건마는 영이 소식이 없습디다. " 하고 그 늙은 할머니 말하는 것이 유복이의 본색을 짐작하는 것도 같아서 유복이는 낯이 간지러울 지경이나 억지로시침을 떼었다. “그 사람이 지금도 자기 이모부의 집에 얹혀 있는데 이십 전부터 앉을뱅이가 되어서 걸음을 못 걷습니다. " “무어 앉을뱅이요? 아이구 앉을뱅이가 웬일일까. 하느님 맙시사. 향나뭇골댁이 살아서 보았더면 오죽 가슴을 짓찧었을까. " 하고 그 늙은 할머니는 괴탄하다가 "그 사람이 장가나 들었소? " 하고물어서 유복이가 "누가 병신 보구 딸을 줍니까, 그저 총각입니다. " 하고 대답하니 "향나뭇골댁 본집이 병신 동생 하나가 있다가 장가도 못 들고 죽어서 씨없이망했는데 시집도 마저 손이 끊일 모양일세. 그런 기막힐 일이 또 어디 있겠나.그이가 숫제 보지 않고 진작 죽은 것이 팔자 좋은 편이로군. " 하로 그 늙은 할머니는 또다시 괴탄하였다.
유복이가 그 늙은 할머니의 진심으로 괴탄하는 것을 보고 본색을 감추고는 오래 앉았기가 죄만스러워서 자세히 물어보고 싶던 임오년 이야기도 물어보지 못하고 다만 먼저 말휘갑으로 이모부의 안부만 대강 전하고서 곧 그 늙은 할머니에게 하직하고 오서방과 같이 나오다가 일부러 그의 아들을 찾아서 인사하고 총총히 떠나서 해주길로 향하였다.
큰골이 강령읍내서 멀지도 않거니와 대로변에서 가까워서 길이 소삽하지 아니한 까닭에 초행 사람도 별로 묻지 않고 찾아을 만하였다. 유복이가 동네 앞에와서 논둑에서 풀 깎는 아이 하나를 보고 다리 쉬는 체하고 논둑에 와 앉아서그 아이를 붙들고 말을 물었다. "배 잘 되었다. 너의 집 논이냐? " "아니오, 주인집 논이오. " "머슴 사는구나. " “녜. ” "큰골 동네 노첨지 집을 아니? “ "알구말구요. 우리 주인집인데요. " "그래, 네가 노첨지 집에 있어? ” "노첨지 영
감 큰아들네 집에 있소. " "노첨지 아들이 많다지? “ ”녜. “ "다 따루 사니?" "그 셋째아들은 우리 집 옆에서 살구요, 첨지 영감은 넷째아들 데리구 사우. ""둘째아들은 ? " "여기서 살다가 몇 해 전에 해주 쌍거리루 이사 나갔소. 그런데지금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나요. 일전에 쌍거리서 사람이 와서 첨지 영감이 셋째아들 데리구 나가셨소. " "지금 노첨지가 집에 없어? ” “녜. ” "언제 오니? " "모르지요. " "쌍거리가 연안서 해주 오는 길목이구나. " "그렇답디다. " "
노첨지가 걸어갔니? " "그러먼요. " "칠십 늙은이가 걸음을 잘 걷니? “ "새마누라 얻기 전에는 젊은 사람 볼 쥐어지르게 근력이 좋더니 요새는 전만 못하우.요전에 나하구 읍내 내려갈 때두 헐떡헐떡 하십디다. " "십리 길에 헐떡거리는늙은이가 팔구십 리를 어떻게 갔을까. " "하루에는 몰라두 이틀에는 넉넉히 갔을게요. " "그래 어느 날 떠났니? ” "그저께요. " "수이 돌아올까? " "아들이 죽으면 장사 지내구 올걸요. "
유복이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곧 노첨지를 좇아서 쌍거리로 갈 작정을 하면서도 그래도 미심하여 큰골 동네로 들어왔다. 몇 사람에게 말을 물어서 아이 말이 틀림없는 것을 알고, 그 뒤에 동네 복판에 있는 노첨지의 큰집과 동네 안침에 있는 노첨지의 새집을 한바퀴 돌아보고 큰골서 나와서 또다시 해주길로 향하였다.
유복이가 우티골 와서 어느 농자에서 사잇밥을 얻어먹고 요기할 때부터 몸이찌뿌드드하더니 우티재를 넘을 때쯤 오슬오슬 추운 기가 들기 시작하여 몸이 떨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백 리나 이백리같이 멀게 생각되는 이십 리 길을 와서취야정 냇가에 당도하였을 때, 믐은 떨리는지만지 하나 두 눈이 캄캄하여 폭폭앞으로 꺼꾸러질 것 같았다. 냇물을 어떻게 건넛는지 인가를 어떻게 찾아왔는지 유복이는 정신없이 취야정 등네 어느 집 삽작 밖에 와서 주저앉았다. 유복이가그 집에서 하룻밤을 되게 앓고 이튿날 식전에는 씻은 듯 부신 듯 일어났다. 압맛만 깔깔할 뿐이지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길을 갈 만하나 쌍거리 가서 그런병이 또 발작되면 원수도 못 갚고 욕만 보려니 생각하고 맘에 주저하는 중에 인심 좋은 주인이 앓던 병이 당학같으니 오늘 내일 지내 보고 가라고 붙들어서 유복이가 그 집에서 묵새기는데 그 이튿날은 전번만은 못하나 역시 몸이 달달 떨리어서 웅숭그리고 하루 해를 지내었다, 당학이 분명한 뒤에 주인이 약이라고쥐며느리를 잡아서 밀가루 환도 지어주고 생강즙을 내어서 밤이슬도 맞혀 주고,또 예방이라고 뒷간 앞에 있는 돌을 할으라고 가르쳐 주어서 유복이는 얼른 나을 욕심으로 해주는 약을 받아먹을 뿐 아니라 예방까지 가르쳐 주는 대로 다하였다.
유복이가 취야정에서 당학 두 직을 앓고 강령을 떠난 뒤 엿새 되는 날 겨우 쌍거리를 오게 되었다. 쌍거리 올 때 이번에는 노첨지를 만나서 원수를 갚으려니 하였더니 급기야 와서 알아본즉 노첨지는 그 동안 벌써 강령으로 가버리었었다. 노첨지의 둘째아들은 병이 고황에 들어서 오늘 내일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이지만, 노첨지 집안에 살인이 났다고 강령서 전인이 와서 노첨지가 데리고 왔던 셋째아들만 쌍거리에 남겨두고 강령으로 갔다는데 갔다는 날짜를 따져 보연 유복이가 당학 두 직째 앓던 날 노첨지는 취야정 앞을 지났을 것 같았다.
유복이가 하릴없이 다시 두번째 강령길을 하게 되었는데 쌍거리서 길을 돌쳐서기 전에 연안 가는 길거리와 재령 가는 길거리를 한동안 맥없이 바장인 까닭에 해주 부중에 들어왔을 때 저녁 때가 거의 다 된 것을 보고, 캄캄한 때 취야정에 나와서 신세 많이 진 집에서 또 하룻밤 신세를 끼치었다. 유복이가 밤에 자면서 생각하여 보니 노첨지, 집안에 살인난 것이 적실하다면 고서방이 안해를 죽였기가 쉬울 것이고 과연 고서방이 안해를 죽였으면 노첨지는 읍에 가서 있기가 쉬울 것이라 먼저 강령읍에 가서 소식도 듣고 동정도 보고 큰골을 가든지 말든지 작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유복이가 이튿날 첫새벽 취야정서 떠나서 늦은 아침때 큰골 앞을 지나오는데 잠깐 들러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들르지 않고 그대로 강령읍내로 직행하였다. 여기저기 다니며 묻느니 낯익은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먼저 곰배팔이 오서방을 찾으니 오서방은 마침 집에 없고 다음에 오서방의 고모집을 들여다보니 늙은 할머니가 혼자 봉당에 앉아 있었다. 유복이가 마당 안으로 들어오며 "무어 하십니까? " 하고 소리를 지르니 그 늙은 할머니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번에 왔던 김서방이 아니라구. 곧 간다더니 이때껏 못 갔소 그려. “ 하고 얼굴에 놀라는 빛이 있었다 . "아드님 어디 갔습니까? ” "나무 갔소. " '며느님은? “ "이웃집에 품방아를 찌러 갔나 보오. " "혼자 기십니다그려. " "늙은 사람이 집 보지요. " 유복이가 봉당에 와서 걸터앉으며 "아주머니. " 하고 정답게 말을 붙이고 "큰골 노첨지 집안에 살인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 하고 물으니 그 늙은 할머니가 고개를 흔들며 "그놈의 늙은이 집에서 무슨 살인이 났단 말이오. 그 사위 고서방이 저의 안해를 칼로 찔렀을 뿐이지. " 하고 대답하였다. "고서방의 안해가 노첨지의 딸이라지요. 그래 그 딸이 죽었습니까? “ "칼로 배를 찔리고 머리를 찍혔어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오. " "고서방은 어떻게 되었나요? " "관가로 잡혀갔지. " "그럼, 노첨지가 지금 고서방네 집에 와서 있겠습니다그려. " "엊그저께 그 딸을 승교바탕에 담아가지고 같이 큰골로 올라갔 다오. " "녜, 큰골로 갔어요. " 하고 유복이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치어들고 "저 아주머니께 할 말씀이 있소. " 하고 뒤를 이어 자기 본색을 말하니 늙은 할머니는 손뼉을 치며 "그럼 그렇지. 남남끼리 그렇게 같을 수가 있나, 그런데 저번에 나를 왜 속이고 갔나? ” 하고 정답게 하게로 나무랐다. 유복이가 원수 갚으려고 노첨지를 뒤쫓아다니는 사연까지 말하고 디 다음 노첨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기까지는 이 말을 입밖에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늙은 할머니가 "그렇다뿐인가. 자네가 잡혀 갇히면 내가 힘자라는 대로 옥바라지라도 해줌세. " 하고 말하는데 유복이는 "내가 배천 가서는 붙잡힐는지 몰라두 여기서는 붙잡히지 아니할 작정입니다. " 대답하고 그 늙은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맘개로 하나? " 하고 의심하는데 유복이는 "그건 염려 없습니다. " 하고 믿음 있게 잘라 말하였다.
유복이가 그 늙은 할머니에게서 점심 한 끼를 든든히 얻어먹고 되돌아서 큰골로 나오는 중에 찬찬히 앞에 할 일을 생각하느라고 길가에 앉아서 늑장을 부린 까닭에 큰골 앞에 왔을 때 해가 이미 설핏하였다. 유복이가 동네에 들어와서 노첨시가 어느 집에 있는 것을 알아본 뒤 동네집과 동네길을 다시 자세히 눈살펴 두고 노첨지 있는 산밑 새집을 울 밖으로 돌아보고 남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산기슭 으슥한 곳에 숨어 앉아서 준비를 차리었다. 보따리에 싸가지고 다니던 표창과 짧은 환도를 꺼내어서 표창 너덧 개는 손에 쥐고 그 나머지는 유지에 싼채 괴춤에 넣고 환도는 허리띠에 지르고 고의적삼만 다시 보에 돌돌 말아서 배에 차고 신들메를 단단히 하고 그리하고 노첨지 집 삽작문께로 걸어왔다. 노첨지는 칠십 늙은이가 쌍거리를 근두박질하듯이 갔다오느라고 길에 지쳤을 뿐 아니라 아들의 병과 딸의 횡액으로 말미암아 화가 떠서 다른 음식은 잘 먹지 못하고 며칠 동안 술만 먹고 지내는체, 집안 식구들이 부쩌지 못하도록 밤낮 야단을 치더니 이날은 식전부터 점심때까지 술도 먹지 않고 야단도 치지 않고 전에 없이 넋 잃은 사람같이 우두머니 앉아서 때때로 혼자 중얼거리었었다. 작은 마누라가 옆에 와 앉아서 어린애 젖을 먹이다가 어린애 대신 하는 말로 "아버지 나 좀 보십시오. " 하고 어린애 얼굴을 앞으로 내미시 전 같으면 너털웃음을 웃고 들여다볼 노첨지가 말이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덤덤하니 앉았었다. 그 동안 며칠 늙은 영감 야단바람에 쥐구멍을 찾던 어린애를 보아주는 계집애가 점심때 어린애를 업고 추썩거리다가 어린애 머리를 기둥에 부딪뜨려 울린 까닭에 노첨지는 화가 천등같이 나서 그 계집애를 죽일 년 잡도리하듯 하였다. 그 계집애 온몸에 구렁이를 감아놓고도 부족하여 "이년, 네 대가리를 성하게 둘 줄 아느냐!" 하고 대가리를 수없이 쥐어박고 나중에는 발길로 차서 마당에 굴리기까지 하였다. 노첨지가 이때부터 화를 내기 시작하여 종일 야단을 치는데 아들 며느리까지 앞에 얼씬하기가 무섭게 공연한 트집을 잡아 야단을 치니, 아들은 무슨 핑계하고 밖으로 나가고 며느리는 부엌 속에 처박혀 앉아서 밥 지어 주는 여편네와 속살속살 뒷공론하고 작은마누라만 어린애를 들쳐 업고 앞에서 돌아다니었다. 이때 해는 저녁때가 다 되었었는데 삽작 밖에서 "노첨지 노첨지. "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방에 들어앉았던 노첨지가 봉당에서 돌아다니는 작은마누라를 내다보고 "밖에 누가 왔나? " 하고 물어서 작은마누라가 마당으로 내려가더니 뻐꼼히 삽작문 밖을 내다보고 들어와서 "과객 인가 보오. " 하고 대답하였다.
"재워 주지 않는다구 하게. " "내가 가래서 잘 가겠소. " "이 망한 자식은 어디를갔단 말이. " 하고 노첨지가 넷째아들이 집에 없는 것을 탓하는 중에 밖에서 노첨지를 찾던 사람이 삽작 안으로 들어왔다. "저런, 남의 집을 막 들어오네. " 하고 작은마누라가 소리를 지르니 노첨지는 "어떤 죽일 놈이 남의 집에를 막 들어와! " 하고 벌떡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와서 방문 뒤에 세워 두는 지팡막대를 집어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삽작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이 노첨지 나오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서니, 노첨지가 몇 걸음 앞으로 쫓아나오다가 무춤하고 멈추더니 박은 듯이 서서 어린듯이 바라보고 나중에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팡막대를 떨어뜨리고 두 손을 앞으로 내흔들며 "귀신 보아라! " 하고 힘없이 소리를 질렀다.
이때 노첨지의 아들이 삽작 밖에 와서 저의 아비가 무슨 야단이나 치지 않나하고 집안 동정을 살피다가 저의 아비가 낯모르는 사람과 마주 섰는 광경을 보고 삽작 안에 들어서며 곧 "누구요? 저리 나가우. " 하고 그 사람 앞으로 대어드니 그 사람이 말도 없이 노첨지 아들의 귀퉁이를 주먹으로 우리었다. 노첨지 아들이 비슬비슬하다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이놈 봐라, 사람 친다. " 하고 소리를 질렀다. 노첨지네 머슴이 꼴을 한 바소구리 지고 들어오다가 이것을 보고 얼른 등에 진 꼴짐을 지게에 박아버리고 손에 든 지겟작대기로 그 사람의 골통을내리치니 그 사람이 작대기를 받아 잡고 앞으로 채뜨려서 머슴은 작대기를 놓고 맨주먹으로 대어들고 노첨지의 아들은 어느 틈에 도끼를 찾아들고 다시 대어 들었다. 그 사람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을 번뜻하더니 날카로운 쇠끝이 살같이 들어가서 노첨지 아들의 바른편 눈에 꽂히었다. 노첨지의 아들이 도끼를 내던지고 넘어지는 것을 머슴이 보고 잠깐 어리두절하는 동안에 쇠끝 하나가 콧등에 들어와 박히어서 머슴은 "아이쿠! " 하고 펄썩 주저앉으며 코는 가만두고 두 눈을 부등켜 쥐었다. 이 동안에 노첨지가 정신이 나서 도망질을 치려고 건넌방모롱이 울타리에 구멍을 뚫느라고 엎드려 어부적거리었다. 뒤에서 이놈아 소리가 나며 노첨지 궁둥이가 화끈하여 엉겁결에 벌떡 일어서니 이번에는 뒤꼭지가 화끈하며 정신을 잃고 나가자빠졌다, 그 사람이 노첨지 자빠지는 것을 보고는 노첨지 아들의 눈에서 차 머슴의 콧잔등이에서 쇠끝을 뽑아서 괴춤에 넣고 마당에 매어 있는 빨랫줄을 끊어서 머슴과 노첨지 아들을 뒷결박을 지우는데, 머슴은 실장정이고 노첨지 아들도 풋기운꼴 쓰는 젊은 사람이건마는 반송장들이 다 되어서 조금도 항거하지 못하고 결박들을 당하였다. 노첨지의 아들이 정신기가 돌아서 "사람 죽인다! " 하고 고성을 지르니 그 사람은 발길로 주등이를 내지르고 "이놈, 어서 소리질러라. " 하고 눈을 부라리었다. 그 사람이 결박을 다 지운 뒤에 소리 지르는 노첨지의 아들은 줄에 널리었던 흩옷을 찢어서 재갈을 먹여놓았다. 노첨지의 작은마누라는 업었던 어린애를 치마에 휴 싸서 안 고 봉당에 주저앉아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고, 노첨지 며느리와 밥 지어 주는 여편네는 서로 손을 잡고 부엌 구석에 숨어서 있고, 매 맞고 아랫방에 들어가 있던 계집애는 한번 바깥을 내다보더니 곧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덮고 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을 뿐 외라 눈에 보이는 사람까지 본체만체하고 자빠져 있는 노첨지에게로 쫓아갔다. 노첨지는 정신이 돌아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사지를 꿈실거리는데 그 사람이 서서 내려다보며 한번 싱긋 웃고 "내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네가 모함해서 죽인 박서방의 아들이다. 이놈아, 정신 차려서 똑똑히 들어라. 네 배를 가르구 간을 내서 씹구 싶지마는 드러워서 내가 고만둔다. 네 모가지만은 내가 가지구 가서 우리 아버지께 드릴 테다. " 하고 타이르듯이 말한 뒤 허리에 찬 환도를 캐어들고 앉으니 노첨지의 눈이 감겨졌다, 환도가 두어 번 번쩍거리더니 고추상투 달린 노첨지의 목이 몸에서 떨어졌다. 유복이가 흘러나오는 피를 주체하려고 노첨지의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비비다가 피가 잘 그치지 아니하여 머리를 가지고 부엌에 들어가서 매운 재에 피를 먹이는 데 이때는 부엌에 사람이 없었다. 유복이가 노첨지의 머리를 싸는데 꼴풀을 듬뿍 가져바가 초벌 싸고 그 위에 흩옷 몇 가지를 집어다가 덧싸서 어깨에 엇메었다. 유복이가 한번 사방을 돌아본 뒤 다시 송장 옆에 와서 뒤꼭지에서 빼놓은 표창과 엉덩이에서 뽑아 낸 표창을 송장 몸에다 문질러 씻어서 괴춤에 넣었다. 이때 동네에서 아우성 소리가 나서 마구 쓰는 여벌 표창 칠팔 개를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줌에 쥐고 일어났다.
유복이가 노첨지에게로 쫓아갈 때 부엌에 숨어 있던 노첨지 넷째 며느리와 밥 지어 주는 여편네가 살그머니 부엌 뒤 울타리에 개구멍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노첨지의 며느리는 다리가 떨리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을 그 여편네가 노첨지의 큰 아들을 보고 본 대로 대강대강 이야기하고 "얼른 가보세요. 우리가 나을 때 영감께로 쫓아가는 걸 보았으니까 그 동안 벌써 큰일이 났을는지 몰라요." 하고 말하여 노첨지 큰아들이 분분히 집안에 있는 창을 찾아들고 나서는 걸 그 안해가 내달아서 "여보, 혼자 갈라오? 장정 둘이 꼼짝 못하고 결박당하더라오. 혼자 가서 어떻게 할라오. " 하고 책망하였다. 그 자식 형제가 옆에 있다가 그중의 맏놈이 "우리 형제두 가구 머슴두 가지요. " 하고 어미에게 말하니 그 아비가 "너희들두 갈라거든 어서 도끼나 낫이나 들구 나서라. " 하고 자식들을 돌아보았다. "저까짓 것들만 데리고 가서 무어하오? 동네 군을 푸시오. " "글쎄. "노첨지의 넷째며느리가 맏동서 내외간 하는 말을 듣고 "언제 동네 군을 풀고 있어요? " 하고 재촉하여 노첨지 큰아들이 저의 안해를 보고 "시각이 급하니까 우리가 먼저 갈께 뒤에 곧 동네 사람을 모아 보내게. " 하고 말을 이르고 바로 나 가려고 하니 그 안해가 옷소매를 붙들고 비죽비죽 울면서 "여보, 삼대 사대 함께 몰사죽음하면 무어하오? 아주 동네 군을 풀어가지고 가시오. " 하고 붙들었다.
도첨지의 큰아들이 안해 말을 옳게 듣고 저의 자식 형제와 상머슴 어른과 곁머슴 아이를 다 내놓아서 동네 사람을 모았다. 노첨지네 집이 동네 제일 부자일 뿐 아니라 노첨지는 다년 동네 존위요, 노첨지의 큰아들은 그해 동네 일좌라 동네 사람이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모여들어서 구경으로 몰려온 여편네와 아이들은 치지 말코 손에 하다못해 식칼이라도 들고 온 어른 사내가 근 이십 명이었다. 그중에 사람이 걸출인 이좌 보는 유서방이 일을 분별하는데 걸음 잰 사람을 골라서 관가에 기별하고 기운 든든한 사람들을 뽑아서 동네 길목을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 십여 명을 유서방이 노첨지 큰아들과 같이 앞장서서 끌고 가기로 하였다. 이 동안에 노첨지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져서 피를 재에 빨릴 대로 다 빨리고 유복이는 보물로 아는 표창을 한 개 소실 않고 다 찾게 된 것이다.
여러 사람이 산 밑에 가까이 와서는 유이좌의 지휘대로 줄로 늘어서서 노첨지집을 에워싸고 들어오며 아우성들을 질렀다. 유복이가 아우성 소리를 듣고도 천천히 주머니 끈을 매고 뒷산으로 기어올랐다. "사람 죽인 놈 저기 있다. " "저놈산으루 올라간다. " 늘어섰던 여러 사람들이 한데로 몰리어서 산으로 뒤쫓아 올라오니 유복이는 도망가다 말고 돌쳐서서 큼직한 바위 위에 뛰어올라 섰다. 유복이가 아래서 기어올라오는 여러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부모 원수를 갚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 나를 잡을 생의 마라. 너희에게 잡힐 내가 아니다." 하고 고성을 질러서 외치니 여러 사람들 눈에 유복이가 허리에 짧은 환도를 하나 찼을 뿐이지 손에 다른 병장기가 없는 것을 보고 맨손인 줄로 알고 업신여기어서 앞을 선 유이좌부터 "이놈, 무슨 소리냐! " 하고 호령하고 여러 사람이 "이놈, 이놈. " 하고 떠들면서 올라왔다. 유복이가 왼손에 쥐었던 표창을 하나씩 바른손으로 옮겨 잡으며 연주전을 쏘듯이 연해서 댓 개를 내리쳤다. 유이좌가 먼저 "아이쿠! " 하고 주저앉고 노첨지의 큰아들이 또 "아이쿠! " 하고 넘어지고 그 외의 서너 사람이 아이쿠지쿠 하며 엎어지고 자빠지니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일시에 와 하고 몰려내려갔다. 읍내서 관속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는 살인범인을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노첨지의 아들 손자 외에 살인 시종을 자세 본 노첨지의 작은 마누라와 노첨지 집 머슴을 데리고 읍내로 들어갔다.
강령현감이 그날 밤으로 즉시 수형리를 대동하고 큰골을 나와서 현장을 임검하고 검시한 결과에 시친들의 초사를 참작하여 살인 전말을 적고 범인이 비상하여 유유히 도타한 사연까지 붙이어 첩보를 만들어서 해주 순영 서울 포청에 올려보내고 황해감사가 현감의 첩보대로 임금께 장계를 올린 뒤에 일변으로 관하 각관 에 관자를 돌리어 범인을 체포하라고 신칙하고, 또 일변으로 타도에 이관을 부치어 범인을 기찰하여 달라고 의뢰하였다. 이것은 다 뒷이야기고, 그때 유복이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산을 패어 넘다가 솔포기 밑에 앉아서 고의적삼을 갈아 입고 신발을 고쳐 신고 노첨지의 머리와 허리띠에 질렀던 환도는 벗은 옷과 같이 보따리에 싸서 걸머지고 원길을 찾아 나와서 밤길을 걸었다. 유복이가 조심하느라고 그날 밤뿐 아니라 내처 밤길만 걸어써 배천을 향하고 오는데 촌가에서 하루 한두 끼 밥을 얻어먹었지만, 항상 허기질 때가 많았고 또 밤길이 잘 붓지 아니하여 원수 갚던 날부터 나흘 되는 날 새벽에 간신히 배천 한 다리를 대어 와서 오는 길로 바로 산으로 올라왔다. 유복이가 보따리를 끄르고 원수의 머리를 꺼내서 피와 함께 말라붙은 재와 풀잎을 덧쌌던 옷가지로 말짱하게 훔쳐서 두 손으로 들고 부모의 산소 앞으로 나완다. 봉분 앞에 원수의 머리를 놓고 한 걸음 물러가 꿇어앉아서 유복이는 무덤에 대고 말하였다. "어머니, 유복이가 아버지 원수를 갚았소. 아버지께 말씀하오. 앞에 놓인 것이 노가의 대가리요. 아버지가 같이 다닐 때는 젊었겠지만 지금은 늙어서 그 모양이오. 아버지가 요전데 내 등에 업혀 오셨으니까 혹시 나를 아실는지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몰라요. 아버지 얼굴이 내 얼굴과 같다지요. 노가놈이 나를 보고 아버지가 왔다구 놀랍디다. 어머니가 전에 나더러 아버지 원수를 잊지 말라구 두구두구 당부하시더니 인제 시원하시지요. 어머니, 아셨소? 어머니, 내가 이번에 가면 다시 산소에를 올지말지 하니 부디 안녕히들 계시구이 다음 내가 어디서 죽든지 내 혼은 이리 데려다 주시오. " 하고 유복이는 복받쳐 올라오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어린아이 같이 엉엉 울었다. 처음에는 꿇어앉은 채 울다가 나중에는 두 다리를 뻗고 울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가며 울었다, 소나무를 흔들어 물소리를 지어내던 새벽 바람도 그치고 죽은 사암의 대가리를 보고 날아와서 근처 나무에 앉은 까마귀들도 짖지 아니하고 유복이의 울음소리만 온 산에 가득하였다.
초군 아이 두엇이 울음소리를 듣고 왔다가 사람의 대가리 놓인 것을 보고 곧 동네로 뛰어내려가서 이 사람보고 말하고 저 사람보고 말하였다. 이때 해주 감영의 기별이 돌아서 배천 사령도 강령 범인을 잡으려도 나도는 중이라, 전날밤에 한다리 나와서 수색하던 사령 두 사람이 주막에서 묵은 까닭에 초군의 전하는 소문이 손쌀같이 사령들 귀에 들어갔다. 유복이가 울다 울다 목이 갈라져서 소리가 안 나오도록 울고 겨우 울음을 그치고 한동안 앉아서 정신을 차린 뒤에 일어나서 "인제 유복이는 갑니다. " 하고 무덤에 대고 절할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얼른 일어서 돌아보니 산수털벙거지들이 눈에 뜨이었다. 유복이가 그대로 순순히 잡혀갈까 생각하고 주저앉으려고 할 즈음에 '어서 내빼라. ‘하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유복이 머릿속에 울려서 유복이는 그 소리가 무덤 속에서 나온 줄로 여기었다, 유복이가 온몸에 기운이 샘솟듯 솟았다. 사령뜰이 다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령들에게로 쫓아나갔다. 사령이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발길로 내지르고 하나는 잡아서 메어쳤다. 두 사령이 산 아래로 굴러내려 가는 것을 보고 유복이는 돌아서서 원수의 머리는 집어 팽개치고 헌옷은 버리고 환도만 보에 싸서 몸에 지니고 도망하였다. 유복이가 선뜻 큰길로 나서기가 주니가 나서 팽가골도 못 가고 성안 마을로 내려서서 버드내 근처에 와서 한나절 파묻혀 있다가 다시 저녁때 큰길로 나와서 슬금슬금 벽란나루로 내려왔다. 유복이가 벽란나루로 내려오면서도 속으로는 나루를 무사히 건너게 될까 염려가 없지 않았는데 그것이 공연한 염려가 아니었다. 한다리 같은 곳에도 사령이 나와 돌았으이 나룻배만 한번 타면 타도로 갈 수 있는 벽란나루를 지키지 않을 리가 만무하였다. 사실로 이틀 전부터 배천 장교들이 나룻가에 나와 묵으면서 기광을 부리고 행인들을 성가시게 하는 중이었다. 장교들이 배타는 사람 기찰하는 것을 유복이가 멀찍이서 바라보고 장교들 눈에 뜨이기 전에 가로새어 미라산 속으로 들어가서 산촉에서 헤매다가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식전에 밤 사이 동정을 보려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룻가로 다시 나왔다.
한다리에서 사령 둘이 하나는 면상에 생채기가 과히 났을 뿐이고 또 하나는 머리가 조금 깨어졌었는데, 저희들은 죽어간다고 핑계하고 한다리 주막에 편히 누워 있고 사람을 대신 읍에 들여보냈었다. 배천 관가메서는 이 소식을 듣고 홍살문 안이 발끈 뒤집히다시피 되어 수교 장교와 사령 군노가 한다리로 쏟아져나갔는데 그날 저녁때 범인이 버드내 근처에 숨어 있단 소문이 들리어서 한다리서는 곧 버드내로 내려가서 우터버드내, 비선버드내로 돌아다니며 가가호호 적간들 하고 벽란나루서는 밤에 삼거리로 을라가서 길목을 지기게 되었었다. 삼거리 간 장교들이 밤들도록 술타령하고 늦잠을 자고 있어서 벽란나루는 비었었는데, 유복이가 마침 이틈에 와서 말썽없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유복이가 배 안에 있을 때 이 길로 곧 다시 평안도로 갈까 생각하다가 꺽정이와 봉학이를 이번에 못 만나면 언제 만날는지 모르고, 또 평안도까지 멀리 가자면 붙잡힐 염려가 더 많아서 양주 꺽정이에게 가서 만나도 보고 피신도 하다가 차차 보아가며 평안도로 가리라 고쳐 생각하고 나루를 건너왔다. 송도 가는 큰길을 버리고 사잇길로 들어서서 얼마 오다가 인가에 들어가서 밥술을 얻어먹고 모르는 길을 이리저리 헤매어 오는데, 작은 냇물과 큰 냇물을 수삼차 건너서 한냇골이딴 동네에 와서 요기를 얻어 하려고 어느 농가를 찾아들어가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집에서는 마침 사돈 대접을 하는 중이었다. 유복이가 부전부전한 손이지만 문전 나그네를 흔연 대접하는 인심 좋던 세월이라 그 집 주인이 유복이를 맞아들여서 점심 한 끼를 대접하였다. 유복이가 여러 날 변변히 먹지 못하고 굶주린 끝에 채불리 먹고 음식에 감기어서 길 갈 기운이 없어졌다. 주인의 눈치는 가기를 조이는 모양이나, 유복이는 염치 불고하고 그대로 눌러앉았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하룻밤을 붙어 자고 이튿날 아침 그 집 사돈이 떠날 때 같이 떠났다. 그 사람이 길에서 “댁은 어디루 가실라오? " 하고 묻는데 유복이는 구태여 양주로 간다고 말할 것이 없어서 "서울루 갈라오. " 하고 대답하였다. "장단으루 나가서 서울을 갈라면 우리 동네까지 동행해두 좋겠소. " "어느 동네요?" "가는골이오. " "내가 초행에 잘 되었소. 동행합시다. " 유복이는 그 사람과 동행하여 가는골 와서 동행한 연분으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또 하룻밤 자고, 이튿날 장단 나가는 길을 배워가지고 떠나서 나가는 길에 장띠산골이란 동네 못 미쳐서 길에서 포교를 만났다. 강령 살인 범인이 벽란나무를 건너서 송도로 들어간 형적이 있다고 배천 기별이 송도에 와서 유수가 전날 포교를 각처에 늘어놓게 한 것이었다. 유복이 만난 포교가 복색을 평인같이 차리어서 유복이는 처음에 포교인지 모르고 장지산골을 이 길로 가느냐고 말을 물었더니 그차가 유복이의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고 대번에 "당신 배천서 오지 않소? ” 하고 물었다. 유복이가 그 묻는 것이 수상하여 얼른 대답 안 하고 우물우물하였더니 "이놈아, 네가 배천서 오지? " 하고 그자가 눈결에 육모방망이로 유복이의 골통을 내리쳤다. 방망이가 다행히 미끄러져서 한쪽 어깨만 얻어맞고 유복이는 그제야 포교인 줄 심작하고 그자에게로 대어들어 끼어안고 잠시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자를 지지눌러 걸터앉고 그자의 방망이로 그 자의 어깻죽지와 등줄기를 실컷 먹여주고 일어나서 도망질하여 미촌골이란 데서 길도 없는 덕적산 속으로 들어갔다,
[출처]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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