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3
3)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이른바 명말청초는 이 책에서는 주로 명 천계(天啓), 숭정(崇禎)과 청 순치(順治), 강희(康熙) 사이의 백 년 간을 가리킨다. 이 백년은 고대 소설평점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소설평점은 수량도 방대할 뿐아니라 소설이 전파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아울러 평점의 질 역시 크게 제고되었다. 그러므로 소설평점사에서 질적으로 가치 있는 평점 저작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완성되어 공개적으로 출판되었다.
명말청초의 소설평점은 만력 시기에 싹을 틔운 소설평점을 계승해 그 장대한 발전의 기세를 드러냈는데, 이것은 소설평점이 맹아기에서 번성기로 나아간 백년이었다. 동시에 소설평점 역시 이 시기에 그 황금기를 보냈다. 이 시기의 평점이 번성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표지가 있다.
우선 명말청초는 중국의 고대소설이 비교적 크게 발전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곧 이러한 소설 창작의 배경에 의탁해서 공동으로 고대 소설의 전파에 개입하고 소설 예술의 발전을 추동했던 것이다.
명말청초에 새롭게 창작된 소설은 ‘사대기서’와 같이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작품들은 없었지만, 소설 창작의 숫자만큼은 방대했고, 종류 또한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전파되었다. 역사연의소설, 신마소설 등 전통적인 소설 형식은 진일보한 모습으로 계승되었고, 재자가인소설이 주체가 된 인정소설 역시 매우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밖에도 ‘삼언이박(三言二拍)’을 대표로 하는 화본소설은 소설이 전파되는 가운데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고, 고대 문언소설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요재지이》 역시 강희 연간에 작품이 나왔다. 더욱 주의할 만한 것은 중국 소설의 전파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명대의 ‘사대기서’ 역시 바로 이 시기에 최종적으로 틀을 갖추어 청대에 유행한 정규의 소설 독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소설 창작이 번성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해 이 시기의 소설평점의 수량도 대폭 증가해 [이때 나타난] 소설 평본은 대략 백 여 종이 넘었으며, 이는 대체로 명청소설 평본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이 통계는 대략적인 숫자이며, 필자가 《고본소설집성(古本小說集成)》(1~5)과 《중국통속소설서목(中國通俗小說書目)》 및 몇 가지 산견하는 소설 평본의 통계를 정리해 얻은 것이다]. 또 평점의 질 역시 근본적으로 제고되었다. 여기에는 진성탄(金聖嘆)이 평한 《수호전》에서 장주포(張竹坡)가 평한 《금병매》까지 중국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평본이 모두 포함된다.
다음으로 명말청초의 소설평점은 만력 시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소설평점의 상업성과 문인적인 성격이 보조를 발 맞추어 발전했고, 또 양자가 합류하는 추세로 점차 나아갔다.
소설평점이 만력시기의 시험기를 거치면서, 특히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 《수호전》이 사회적으로 비교적 큰 반향을 일으킨 뒤, 소설을 간행하는 이와 소설 독자들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 평점은 일종의 상업 수단으로서 이미 소설의 전파 과정에 완전히 진입했다. 이런 소설평점의 상업성은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는 이 시기 소설평점이 서방 주인들의 상업적인 고려의 영향을 비교적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의 평점자들은 평점의 대상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나 어떤 목적을 갖고 선택하는 경우가 비교적 적었고, 소설 작품 자체의 사상적 예술 가치는 대량의 소설 평본 중에서는 아직까지는 중요한 선택 근거나 평가 기준이 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소설 창작은 옥석이 가려지지 않은 채 양극으로 나뉜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대기서’가 진일보한 개조와 정형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고대소설은 정점에 달했고, 펑멍룽(馮夢龍)의 ‘삼언’ 역시 비교적 높은 사상 예술적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소설 작품은 오히려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작품들에 대해 소설평점은 아직 완전하게 비평의 책무를 이행하지 못했고, 하나같이 평점으로 이들 소설의 전파만을 노렸다.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중에는 이런 류의 평본이 가장 많았는데, 이로써 소설평점의 상업성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둘째로는 소설평점의 상업 수단이 갈수록 풍부해져 유명 인사의 이름을 도용하는 일이 잇달았다. 이를테면 리줘우(李卓吾) 평점이라 서(署)한 것으로 명말에만 《무목정충전(武穆精忠傳)》, 《서유기》, 《삼국연의》, 《상정공안(詳情公案)》, 《영웅보(英雄譜)》 등 몇 가지가 있었고, 청대에도 《후삼국석주연의(後三國石珠演義)》, 《혼당후전(混唐後傳)》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중싱(鍾惺)과 펑멍룽, 진성탄 등으로 서한 것 역시 몇 가지가 있었다. 어떤 평본은 여러 명의 유명 인사들을 한 가지 책에 모아 놓았는데, 이를테면 앞서의 청대에 나온 두 권의 소설이 그것으로 전자의 경우 “성탄외서(聖嘆外書)”, “리줘우 선생 비평(李卓吾先生批評)”이라 서했고, 후자의 경우는 ‘줘우 평열(卓吾評閱)“, ”징링 중보징 정(竟陵鍾伯敬定)“이라 서하고, 권수(卷首)의 서(序) 역시 ”징링 중보징 제(竟陵鍾伯敬題)“라 서했다. 그러나 이 서는 실제로는 《수당연의》의 추런훠(褚人獲)의 서와 같은 것으로 몇 글자만 바꾼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정당한 상업 수단 역시 끝없이 평점의 영역에 들어왔는데, 이를테면 ”계열 평본(系列評本)“, ”집평(集評)“ 등의 수단 역시 소설평점 중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소설평점이 점차 성숙해가고 규범화되면서 소설의 유통에 중요한 전파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 역시 이 시기에 분명하게 증강되었다. 많은 문인들이 소설평점의 행렬에 참여함으로써 만력 시기에 주로 서방(書坊)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되었던 틀이 크게 바뀌었고, 소설평점의 이론적인 성격과 사상성 역시 명확하게 제고되었다. 동시에 평점자 역시 점차 소설평점을 입신을 위한 하나의 사업이나 감정 표현의 제재로 여겼다. 이것은 소설평점이 번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그 사상과 이론의 품위를 제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리줘우의 소설평점의 전통을 계승해 평점으로 자신의 사상 감정을 표출했다. 이것은 진성탄의 《수호전》 평점 중에서 충분히 체현되었다. 그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감개와 정치적인 이상, 그리고 우환의식을 붓끝에 실어 평점이 그의 감정 표현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게 하였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이 광범위하게 유포됨에 따라 이러한 비평적 함의를 수많은 평점자가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마오 씨 부자와 장주포 등의 평점 작품이 그를 계승해 빛을 발했다. 장주포는 자신의 평점 동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곧 그는 “최근에는 빈곤과 슬픔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염량세태”에 부대끼다가(邇來爲窮愁所逼, 炎凉所激)” 본래 자신이 한 권을 책을 짓고자 했으나, “앞뒤로 이야기 줄거리를 꾸며내는 것이 몹시 힘이 들었기에(前後結構, 甚費經營)”, 《금병매》를 평점함으로써, “마음 속에 쌓인 회포를 풀어버릴 수 있고(可以排遣悶懷)”, 또 “나는 내 자신의 《금병매》를 지은 것이다. 내 어찌 다른 사람과 《금병매》를 비평할 겨를이 있겠는가(我自做我之《金甁梅》, 我何暇與人批《金甁梅》也哉!)”라고 천명했다[<주포 한화(竹坡閑話)>]. 명말청초 소설평점의 이러한 특색은 이 시기 평점에 비교적 높은 사상 이론적 가치를 체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더욱 주의할 만한 것은 이들 문인 평점가들이 비록 리줘우의 평점 전통을 계승하긴 했지만, 일률적으로 개별적인 감정의 서사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평점은 그 붓끝이 대부분 작품의 감정상의 함의와 작품의 예술적 기교를 드러내는 데 향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종의 독서 지도(導讀) 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소설 평점 가운데 감정의 동일시와 예술의 감상은 소설평점에 종사하는 두 가지 커다란 기본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에 소설평점의 상업적인 전파 또한 더 한 층 높은 경지로 향상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성격이 융합되었다.
셋째, 이 시기 소설평점의 번영은 소설평점의 전체 가치가 제고되는 가운데 체현되었다. 소설평점 가치의 삼대 측면은 ‘전파’와 ‘이론’, ‘텍스트’인데, 이 시기의 소설평점 중에는 이전에 일찍이 없었던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 있었다.
‘전파 가치’로 말하자면, 평점본이 대량으로 증가하고, 평점의 질이 큰 폭으로 제고됨에 따라 고대소설의 전파가 촉진되었다. 이 시기 소설평점자의 작품에 대한 수정과 증보 역시 소설의 사상 예술적 가치를 제고했는데, 명대 ‘사대기서’가 평점자에 의해 광범위하게 수정된 것 이외에도 기타 몇몇 소설 역시 그 정도는 다르지만 증보와 수정을 거쳤다. 이를테면 숭정 4년(1631년) 런루이탕(人瑞堂)에서 간행한 《수 양제 염사(隋煬帝艶史)》와 숭정 6년(1633년) 졘샤오커(劍嘯閣)에서 간행한 《수사유문(隋史遺文)》에서 강희 연간 쓰쉐탕(四雪堂)에서 간행한 추런훠(褚人獲) 개편 자평(改編自評) 본 《수당연의》에 이르기까지 이런 제재의 작품들이 부단한 수정을 거치면서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모두 일정하게 향상되었는데, 후대에 《수당연의》는 같은 제재가 가장 유행했던 독본이 되었다. 이 시기 평점의 이론적 가치는 특히 고대 소설평점사에서 최고봉에 이르렀다. 펑멍룽의 ‘삼언’ 평본은 ‘일서일미(一序一眉)’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미비(眉批)는 아주 간략했지만 세 편의 서언(序言)은 자못 가치 있는 소설 논문이었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의 전기소설(傳奇小說) 비평과 마오 씨가 비한 《삼국연의》의 역사소설 비평, 그리고 장주포가 비한 《금병매》의 인정소설 비평은 모두 같은 유형의 소설 비평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들인 동시에 소설 이론의 보편성을 체현하고 있으며, 이론적 함의 역시 심각하고 풍부하다.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의 평점은 비록 《서유기》의 주지(主旨)를 천명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아 이론적으로는 상술한 세 소설에 비할 바는 아니나, 역시 가치 있는 이론 사상을 몇 가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중보징(鍾伯敬)이라 서(署)한 《수호전》, 《삼국연의》 평점과 두쥔쥔(杜浚濬)이 비평한 리위(李漁)의 소설 《무성희(無聲戱)》와 《십이루(十二樓)》 평점, 그리고 ‘관화탕 비평(貫華堂批評)’이라 탁명(托名)한 《금운교(金雲翹)》 평점, 《여선외사(女仙外史)》의 평점 가운데 류팅지(劉廷璣)의 ‘품제(品題)’, 추런훠(褚人獲)의 《수당연의》 평점 등은 모두 중시할 만한 이론과 사상이 풍부하게 있는 평점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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