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와 전투의 상징 체계 1-모험으로 상징된 수행의 과정
무엇보다도 『서유기』는 전통 시기 중국인들이 중원 중심적이고 정적靜的이며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모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서구 편향적인 선입견들을 통렬히 비웃는다. 하긴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 때부터 일찍이 중원 밖의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험가들을 파견했고, 명나라 영락제永樂帝(1402~1424 재위) 때에는 콜럼버스에 못지않은 정화鄭和(본명은 마삼보馬三保, 1371?~1435)라는 탐험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는 독자라면 그런 선입견이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서유기』는 그러한 모험의 전통을 특별한 문학적 장치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나는 『서유기』 작품 전체가 고도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기 때문에, ‘서유’의 의미 또한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이제 독자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기』는 ‘사대기서’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선악의 대결이나 충신과 간신의 대결처럼 단선적인 대립과 갈등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갈등의 구조를 엮어낸다. 물론 여기에도 선악의 대립은 뚜렷이 묘사되어 있다. 즉 중생의 구제와 사직社稷의 안녕을 위해 서역으로 향한 험난한 길을 가는 삼장법사 일행이 선의 축이라면, 그들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요괴들과 토착 세력들은 악의 축에 해당한다. 그러나 『서유기』에는 이러한 선과 악의 축을 오가는, 혹은 그 성격이 겹쳐지는 특별한 존재들로서 하늘나라에 속한 여러 존재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때에 따라 인간 세계의 선악을 그대로 대표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선악의 역할이 뒤바뀐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복잡한 상호관계와 인과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모든 묘사가 인간이 사는 현실 세계나 우주 속의 각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기도 하고, 동시에 ‘도’의 수련을 통해 초월적 존재가 되기를 추구하는 한 개인의 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사회의 계급적 갈등은 물론 개인의 철학적 고뇌, 종교의 제도적 문제 등을 두루 포괄하는 야심 찬 문학적 기획의 산물인 셈이다.
불후의 고전으로서 『서유기』의 가치는 어쩌면 거기에 담긴 상징들이 단지 철학적 혹은 종교적 차원 가운데 어느 한 쪽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서유기』에서 모험과 갈등의 중심축이 되는 ‘서유’의 많은 의미들 가운데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해볼까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의미들을 사색하여 파악하고, 나아가 내 해설을 보충하거나 거기에 반박할 자유가 충분히 있다.
1 모험으로 상징된 수행의 과정
『서유기』에 등장하는 산이나 강 등의 모든 지리적 장애물들은 그 자체의 험준함보다 거기에 둥지를 틀고 살며 주위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삼장법사의 서역행을 방해하는 요괴들의 터전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장법사 일행은 직접적으로 높고 험한 산을 넘거나 깊고 물결 센 강을 건너는 방법들—등산장비를 준비한다든지 간편하고 효율적인 배를 급조해낸다든지 하는 따위의—을 연구하는 것보다 요괴를 물리치고 굴복시키는 데에 더 골몰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요괴들이 단순히 지리의 험난함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삼장법사의 서역행이 초월자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수행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을 때, 그 요괴들은 안팎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심마心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에 해당하는 요괴들 가운데 상당수는 관음보살이 의도적으로 안배해놓은 경우가 많다. 심지어 관음보살은 9×9=81이라는 수를 채우기 위해, 팔대금강을 시켜서 경전을 얻어 돌아가는 삼장법사 일행에게 최후의 고난을 안배하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도와 덕이 높으면 마귀의 시험도 높으니
참선의 비결은 본래 고요한 것이나 고요함 속에서 요마가 생겨난다네.
손오공은 바르고 곧아 중도를 행하고
저팔계는 어리석고 고집 있어 잘못된 길을 가는구나.
용마는 말없이 애욕을 품고 있고
사오정은 묵묵히 혼자서 근심하여 속을 태우네.
지나가던 요괴는 뜻을 이뤄 쓸데없이 기뻐하나
결국에는 또한 올바름을 따라 사라지게 되리라.(제40회)
道德高隆魔障高 禪機本靜靜生妖
心君正直行中道 木母痴頑躧外趫
意馬不言懷愛慾 黃婆無語自憂焦
客邪得志空懽喜 畢竟還從正處消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괴들은 대부분 실패가 예정된 도발을 통해 삼장법사를 시험하거나 좀 더 성실한 정진精進을 독촉하는 조교助敎들에 지나지 않는다. 삼장법사 일행은 그들이 겪는 요괴를 통해 서로간의 잠재적 갈등을 표면화하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오행의 조화를 이룬 ‘단丹’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된 고난으로서 서역행의 성격은 손오공을 비롯한 삼장법사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제2회에서 손오공에게 도를 가르쳐준 수보리조사는 ‘삼재三災’ 즉 바람과 물과 불의 재앙을 방비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즉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의 경지에 이른 후에도 하늘은 오백년을 주기로 우레의 재앙과 불—음화陰火—의 재앙, 바람—인체 내의 담膽, 위胃, 소장小腸, 대장大腸, 삼초三焦, 방광膀胱 여섯 개 기관에 바람이 드는 ‘비풍贔風’을 가리킴—의 재앙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손오공이 하늘 궁전에서 소란을 피우다 석가모니에게 붙잡혀 오행산五行山에 갇히게 되고, 그 죄를 씻기 위해 불경을 가지러 서천으로 가는 삼장법사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 모두 그가 진정한 초월자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수련의 과정에서 안배된 관문들임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삼장법사 일행의 여행은 종종 작품 안에서 ‘삼삼행三三行’으로 표현된다. 당나라의 역사에서 이 기간은 정관 13년(639) 9월 12일부터 정관 27년(653)까지의 십사 년 동안을 가리키며, 현실 세계의 물리적 거리로는 십만 팔천 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비록 대단히 모호한 형태로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수행의 과정에 대한 어떤 상징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삼삼’은 아홉을 나타내니 양의 수 가운데 가장 큰 수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삼장법사 일행은 다시 ‘구구九九’ 즉 여든한 가지의 고난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착오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긴 하지만, 삼장법사의 마지막 고행은 능운도凌雲渡에서 인간의 태를 벗는 것으로 안배되었다. 결국 ‘삼삼행’은 곧 초월을 향한 ‘말할 수 없이 길고 힘겨운’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십사’는 십이 간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두 단계를 나아간 상태를 가리킨다고도 풀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무(혹은 혼돈)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무(또는 혼돈)로 순환하는 하나의 지난한 수행의 기간을 거쳐서, 새로운 단계의 수행에 이제 막 두 걸음을 내딛은 상태인 것이다. 고난을 끝낸 삼장법사 일행은 각기 공덕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각각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과 투전승불鬬戰勝佛이라는 부처가 되고, 아직 어리석은 마음과 색정色情을 씻지 못한 저팔계는 정단사자淨壇使者, 사오정은 금신나한, 백마는 팔부천룡八部天龍으로 그 지위가 올라가는 것이다(제100회). 그러나 그들의 수행은 거기가 끝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석가여래나 옥황상제, 혹은 태상노군과 같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역행으로 암시되는 ‘말할 수 없이 길고 힘겨운’ 한 차례의 수행을 거쳤지만, 그들에게는 인간 세상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겪어야 할 새로운 수행—궁극적으로 옥황상제나 석가여래와 같은 수준으로 초월자가 되기 위한—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그들은 이제 막 두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표면적으로 삼장법사 일행이 서역으로 가는 목적은 석가여래에게서 경전을 얻어 당나라에 전하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제98회에는 ‘경전’의 의미에 대한 재미있는 암시를 품고 있는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즉 석가여래의 명을 받은 아난阿難과 가섭伽葉은 삼장법사가 마땅한 예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핑계로 35부 15,105권에 해당하는 ‘글자 없는 경전[無字經]’을 내주었다가, 결국 연등고불燃燈古佛의 도움으로 진상을 알게 된 삼장법사 일행에게 35부 5,048권의 ‘글자 있는 경전[有字經]’을 내주게 된다. 당연히 불평을 터뜨리는 손오공에게 석가여래는 오히려 자신의 제자들을 옹호하면서, 어리석고 몽매하여 깨닫지 못하는 동방의 백성들에게는 글자 없는 경전이면 족하다고 말한다.
물론 석가여래는 다시 글자가 있는 경전을 내주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에는 화자(작자)의 은밀한 생각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즉 경전이란 석가여래의 말처럼 유교와 도교, 불교 ‘삼교三敎’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심오한 책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글자에 연연하면 경전의 내용을 협소한 불교의 테두리 안으로 한정시켜 이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글자 없는 경전은 수행자 자신들의 깨달음을 적어야 할 백지이므로, 어떤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도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열린 마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듯이, 화자(작자)는 세계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진지한 사유는 경전의 제목들로 암시되는 공통의 진리 즉 ‘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그런 사유야말로 진정한 종교 철학의 본색本色임을 강조하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물에 젖은 경전을 말리다가 『불본행경佛本行經』 몇 권이 바위에 들러붙어 끝부분이 찢겨 나가버렸다고 묘사한 것(제99회)도 실은 이런 맥락에서 안배된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하는 삼장법사에게 손오공이 “하늘과 땅이 온전하지 않은데, 이 경전은 원래 온전했기 때문에 이제 바위에 붙어 찢긴 것입니다. 바로 불완전한 것에 대응하는 오묘한 뜻이 깃든 일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위로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서천이라는 극락세계에 있지 않고 하늘과 땅의 위상조차 불안한 사바세계沙婆世界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채워진 경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제 강을 건너는 순간 버려야 할 뗏목[登岸捨筏]이 된다. 그러므로 백 회에 걸친 모험이 끝나고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순간 삼장법사 일행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수행을 위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함께한 독자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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