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서유’와 전투의 상징 체계 2-민중의식과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

一字師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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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와 전투의 상징 체계 2-민중의식과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

 
 

2 민중의식과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

작품 안에서도 누차 강조되었듯이, 서역을 향한 삼장법사 일행의 여행이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한 모든 중생의 제도를 목표로 하는 대승 불법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 작품에 무시할 수 없는 민중의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대승 불법을 얻어 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당나라 왕실을 포함한 귀족이나 승려 등의 특권 계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삶의 질곡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도 기존의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 질서의 변혁을 지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삼장법사가 서역에서 경전을 얻어오는 것은 그러한 변혁을 완성하는 것을 뜻하고, 그런 삼장법사를 방해하는 요괴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득권을 누리거나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역’이란 민중의 자유와 권익이 보장되는 이상적 세계를 상징하며, 결국 삼장법사 일행은 그러한 이상적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당나라라는 지리적 경계 안을 돌아다니며 장애물과 방해자들을 제거하는 영웅들이 되는 셈이다.

 

16세기 무렵 중국은 문화적으로는 『영락대전永樂大典』과 같은 많은 업적들이 정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특히 환관宦官과 결탁한 간신들은 조정의 정치를 좌우하면서, 동창東廠과 금의위金衣衛라는 특수 정보기관과 무력 단체를 이용하여 갖가지 탄압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과도한 부세賦稅와 요역徭役에 시달리다 못해 산야山野를 떠돌거나 도적의 무리로 변해갔고, 그러한 민심을 등에 업은 각종 민간 신앙들이 비밀리에 성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갈등은 황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잦은 대규모의 농민 폭동을 유발했다. 명나라 황실의 새로운 세금원稅金源으로 급부상한 대도시의 신흥 시민들도 상공업을 억압하는 전통적 유가 관념과 과도한 세금 때문에 끊임없이 지배 세력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당연히 양심과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진 일부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시대적 현상은 무언가 근본적인 변혁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이 모든 혼란과 부조리의 근원을 명분과 격식만 따지면서 불합리한 예교禮敎에 얽매인 성리학性理學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의 혁신을 위한 새로운 사상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흔히 ‘태주학파泰州學派’라고 알려진 양명학陽明學 좌파左派의 사상은 그런 사조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면서 민간 문예의 변천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특히 각종 소설 작품의 평론가로 널리 이름이 도용되기도 했던 이지는 유명한 「동심설童心說」이라는 글에서, 성리학이 “옷을 입고 밥을 먹는(穿衣喫飯)”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억제하며 위선을 떠는 ‘가짜 도학[假道學]’이라고 비판하면서, 순수한 백성들의 마음을 담은 ‘생활 속의 자잘한 말들[邇言]’에 들어 있는 ‘동심童心’을 배워 양지良知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는 유가가 추켜세우는 시대에 뒤쳐진 엉터리 경전들을 폐기하고, 현대現代—명나라 시대—를 올바로 반영하는 가장 훌륭한 책인 소설과 희곡을 중시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단異端으로 매도당해서 결국 이지 자신도 감옥에서 생을 마쳐야 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민간 문학의 작자들은 소설이나 희곡을 창작하고 전파하는 행위에 대해 새로운 정당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패한 봉건 사회에 대응시켰을 때, 『서유기』의 요괴들은 어떤 식으로건 중앙의 집권자들과 끈을 가진 지방의 토호土豪 세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손오공에 의해 밝혀진 요괴의 정체가 원래 태상노군이 기르던 푸른 소(제50~52회)이거나 미륵불 앞에서 경쇠를 연주하던 누런 눈썹의 하인[黃眉童](제65~66회), 태을구고천존太乙救苦天尊이 기르던 머리 아홉 달린 사자(제88~89회), 탁탑천왕托塔天王의 수양딸(제81~83회)처럼 상당히 높은 힘을 가진 초월자들 밑에서 나름대로 특혜를 누리던 존재들이었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대개 초월자(기득권자)들의 보물(권력)을 훔쳐서 요술(무력과 술수)을 부려 백성들을 기만하고 착취하며 호사를 누린다. 나찰녀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녀는 화염산의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 불을 완전히 꺼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파초선은 어느 신선에게서 훔쳐온 것이 아니니, 이것은 그녀가 본래부터 그 지역에 터를 잡고 있던 권력자였음을 암시한다. 어쨌든 그녀는 매년 일정 시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불기운을 약하게 해주는 대신 막대한 뇌물을 요구하며, 그렇게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신선 세계 같이 아름다운 곳에 거처를 지어놓고 편안한 생활을 즐긴다. 비록 그녀가 화염산의 재난 자체를 조장한 것은 아니지만(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방법이 없는 이 무시무시한 불길은 손오공이 태상노군의 팔괘로八卦爐에서 탈출할 때 튀어나간 불씨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민중의 재난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착취를 일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어느 지역을 장악한 요괴는 심지어 그 지역의 토지신—이 존재는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리에 해당한다—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예를 들어서, 평정산平頂山의 은각대왕銀角大王(제33회)은 멀리 다른 지역에 있는 산의 토지신을 부려서 그 산을 옮겨와 손오공을 눌러놓을 정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요괴들이 누구나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그를 잡아먹기 위해 눈에 불을 켠다는 것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삼장법사가 “열 세상을 돌며 수행한 맑고 깨끗한 몸[元身]”이라 그의 고기를 한 점만 먹어도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기존의 지배 질서를 깨뜨리려는 주동자를 붙잡아 처단함으로써 더욱 안정적인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토호들의 야욕을 은유한다고도 할 수 있다. 백골부인(제27회)처럼 특정한 세력을 가지지 못한 요괴들은 특출한 공적을 세워 지배자의 집단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부랑자들을 상징한다. 또한 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직접적이지만, 삼장법사에게 부와 권력을 미끼로 혼인을 요구하는 요괴나 국왕들 역시 민중 해방의 사명을 위해 헌신하려는 선구자를 방해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삼장법사를 제거하여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삼장법사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 명분을 강화하고, 아울러 삼장법사의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은근한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이 외에도 『서유기』에는 당唐·송宋 이래 지속된 도교와 유교 사이의 세력 다툼을 상징하는 징후들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늘 궁전에서 소동을 벌인 손오공을 제압한 주체가 다름 아닌 석가여래라는 점을 중시하여, 이 이야기가 곧 불교의 권능[佛法]이 도교의 권능[道法]보다 강력하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손오공이 도교의 수련을 통해 신선의 반열에 오르고 술법을 익혔으나 석가여래의 불법 앞에서는 그야말로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가소로운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옥황상제나 태상노군도 어쩌지 못하는 손오공을 오직 석가여래만이 완전하게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이후에 손오공이 불교에 귀의하여 삼장법사의 충실한 수행자가 된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유용하겠지만, 그 자체로 몇 가지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손오공이 수보리조사에게서 배운 것은 그 안에 도교와 불교, 유교 등을 총망라한 광범한 의미의 ‘도’였다. 이에 따라 그는 정精, 기氣, 신神의 수련을 통해 ‘법성法性’을 깨닫고 ‘근원根源’을 다지는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오공의 수련을 좁은 의미의 도교의 범주 안으로 묶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자명하다. 또한 손오공을 제압한 석가여래의 의미도 단순히 도교의 권능보다 뛰어난 불교의 권능을 상징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 손오공의 패배는 수련의 수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또한 이미 언급했듯이, 수보리조사에게 쫓겨날 때 그는 일흔두 가지 술법을 깨우친 상태였는데, 이것은 여든한 가지 즉 지고한 경지를 나타내는 ‘구구’의 단계보다 한 차원 낮은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비유하자면, 손오공과 석가여래의 대결은 무술에서 9단과 8단의 대결처럼, 애초부터 체급이나 수준이 다른 불공정한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단위의 차이는 백 척尺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데에 비유되는 지난한 깨달음의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실력의 우열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석가여래나 옥황상제, 태상노군 등이 ‘구구’의 단계를 넘어선 경지에서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은 간접적으로나마 자주 언급된다. 그것은 실제로 작품 속에서 옥황상제는 손오공과 직접 실력을 겨룬 적이 없지만, 태상노군이 ‘금강탁金剛琢’을 이용하여 손쉽게 손오공을 무력화시키는 장면—조금 비겁한 ‘기습’이었다는 혐의는 있지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태상노군의 팔괘로와 석가여래의 오행산도 실질적으로 비슷한 효능을 가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미리 지적해둬야 할 점은 손오공이 팔괘로를 탈출할 때에도 자신의 힘으로 화로의 뚜껑을 열었다거나 화로를 깨뜨리고 탈출한 것이 아니라 태상노군이 화로의 뚜껑을 여는 틈을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단약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순전히 손오공을 가둬둘 목적으로만 사용했다면, 손오공도 화로의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팔괘로가 인간 세상이 아닌 태상노군의 거처 즉 하늘나라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갇혀 지낸 사십구 일의 세월이 곧 인간 세계의 사백구십 년에 해당하니,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혀 있던 오백년과 비슷하다.

道祖太上老君 출처 腾讯道学

그런데 문제는 오행산에서 풀려난 손오공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손오공이 도교의 권능보다 불교의 권능이 뛰어나다고 판단해서 개종改宗을 결행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손오공을 불교에 귀의하게 만든 것은 앞서 언급한 민중 해방 사상으로서 대승 불교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진사과進士科 출신의 선비들을 우대하기 시작한 이래, 당나라 중엽에 이르면 신진 사대부들은 본격적으로 문벌 귀족들과 권력 싸움을 시작하게 될 정도로 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문벌 귀족의 세력이 그만큼 약화되었고, 그와 더불어 당나라 초기부터 황실과 문벌 귀족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도교의 위세도 동반 하락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밀 결사로 결집된 민중 봉기에 힘입어 건립된 송나라 왕조 때부터 도교는 다시 황실을 중심으로 우대받게 되지만, 민간에서는 독자적인 권위가 이미 상당히 흐려진 상태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당나라 중엽부터 도교의 권위가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불교—특히 대승 불교—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고, 또한 그 과정에서 불교가 도교와 유교는 물론 무속巫俗을 비롯한 각종 토속 신앙들과 결합하며 ‘중국화’를 적극적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인도의 불교와 달라진 것임은 물론이고, 소승 불교처럼 특정한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민간에서 도교와 불교는 선을 행하며 복을 기원하기 위한 통로라는 면에서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처럼 중국화된 불교의 성격은 송나라 이후로 『서유기』가 만들어진 명나라 중엽은 물론, 청淸나라 황실에서 정책적으로 밀교密敎 계통의 라마교를 장려할 때에조차 민간에서는 거의 그대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결국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진보적 민중 신앙으로서 대승 불교의 유입과 전파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혹은 그들)의 관점에서 손오공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넓은 의미의 ‘도’를 추구하는 순수한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즉 손오공은 교파敎派와 종파宗派의 구분을 넘어선 통합적 종교—혹은 철학—적 수행의 마당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서 불교에 귀의한 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을 이해한다면, 손오공을 불교에 귀의시킨 화자(작자)의 의도를 협소한 교파의 의미에서 불교와 도교의 우열론으로 몰고 가려는 모든 논의는 무의미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있다. 즉, 손오공과 삼장법사를 통해 나타난 『서유기』의 화자(작자)의 정치적 지향점이 결코 민주주의나 공화주의共和主義에 근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는 손오공으로 하여금 ‘황제를 만드는 보물[立帝貨]’(제37회)이나 눈이 어두워 사리를 올바로 판별하지 못하고 간신들의 손에 휘둘리는 국왕의 병을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제68~71회)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16세기 중국의 대중문학 작가—혁명가가 아니라—로서 오승은 혹은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작가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상적 한계이다. 최소한 그(혹은 그들)에게 이상적인 국가란 현명한 성군聖君에 의해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재능 있는 인재가 발탁되어 어진 덕성으로 백성을 교화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분위기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공유하는 체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유교의 태평성대太平聖代라는 이념에 불교와 도교의 도덕적 수양이 더해진 모습이었으며, 16세기 중국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혹은 그들)에게 허용된 최선의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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