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원중도袁中道 -분서焚書 이온릉전李溫陵傳

一字師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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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중도袁中道 -분서焚書 이온릉전李溫陵傳

 

이온릉전李溫陵傳

원중도袁中道1

이온릉(李溫陵)의 이름은 재지(載贄)이다.2 젊어서 효렴3으로 거인에 추천되었지만 도성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다고 더 이상 회시에 참여하지 않고,4 교관(校官)이 되어 낭서(郎署) 사이를 왕래했고, 뒤에 요안태수(姚安太守)가 되었다.

공(公)의 사람됨은 속내는 따뜻하지만 겉으로는 냉엄하였으며, 풍골이 늠름하고 청렴고상했다. 성격이 매우 급해, 면전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는 일이 많아, 마음속 깊은 교류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공과 함께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체의 언행을 천성대로 내맡기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하는 법이 없었다.

예전에 아직 학문을 몰랐을 때 어떤 도학(道學)선생이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합니까?”라고 묻자, 공은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인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도학선생이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서 어째서 도(道)를 배우지 않습니까? 도를 배우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요”라고 하자, 공은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더니, 마침내 도의 세계에 깊이 몰두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자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언어와 문자의 범주를 초월하는 경지에 올라서, 언어와 문자의 범주에 얶매인 기성의 학문적 방법에 얽매인 사람들이 따라잡을 바가 못되었다.

태수(太守)로 일할 때는 법령이 분명하고 간결하여, 일일이 말을 하지 않아도 관할 구역이 다스려졌다. 매번 절간에 가서도 공무를 처리하곤 하였으며 일을 보다가도 관청에서 간혹 유명한 고승을 그 사이에 앉혀두고, 공무를 보다가 틈이 나면 곧바로 함께 불도(佛道)의 이치5를 토론했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지만, 공은 신경쓰지 않았다. 받는 봉록 이외에는 어떤 잉여 재물도 없어서, 육적(陸績)의 울림석(鬱林石)6이나 임방(任昉)의 도화미(桃花米)7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마후 관직 생활에 염증을 느껴, 마침내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가 불교의 경전을 읽으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어사(御史) 유유가 공의 기풍을 기이하게 여겨, 상소를 올려서 정식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귀향할 수 있도록 했다.8

그 전부터 초(楚, 湖北)의 황안(黃安) 출신 경자용(耿子庸)9과 친하게 사귀었던 터라, 관직을 사퇴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이제 늙었으니, 좋은 친구 한 둘 있어 종일토록 즐겁게 이야기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인데, 어찌 꼭 고향에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결국 아내와 딸을 데리고 황안에서 타향살이했다.

중년에 아들을 몇 얻었지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체구가 원래 여위고, 음악이나 여색 등의 유흥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데다가, 또한 결벽증이 있어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비록 아들이 없어도 첩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아내와 딸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서둘러 돌려보내고, 자기 스스로를 ‘유우객자’10라고 일컬었다.

더 이상 식솔을 거느릴 책임이 없어지자, 다시 속세의 인연을 끊고 불도(佛道)의 이치를 탐구하여, 초월함과 깨달음이 극에 달하였고, 살갗을 갈라서 뼈가 훤히 드러나는 것처럼 치열하고 사변적인 방법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였다. 공이 펼치는 논의는 모두 칼날 위에 서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 듯하여, 사자(獅子)가 고해(苦海)에 젖을 뿌려주듯,11 코끼리가 고통의 강물에서 물살을 막아서 중생을 건너게 하듯,12 고고(孤高)하게 울려 퍼져, 이에 응수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경자용이 세상을 떠나자, 경자용의 형 천대공13은 공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자식이나 조카들이 이를 본받아서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병이 들까 염려하여, 자주 공을 찾아가 훈계하고 나무랐다. 공은 결국 마성(麻城) 용담(龍潭)의 호숫가에 가서 승려 무념14․주우산15․구탄지16․양정(楊定) 등과 함께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고, 날마다 독서에만 전념했다. 천성이 마당 쓸기를 좋아하여, 몇 사람이 비를 엮어 대주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더할 나위 없이 청결하게 옷을 빨아 입고, 얼굴이나 몸을 문지르고 씻는 것이 수음(水淫)17과 같았다.

속세의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미처 사양할 겨를도 없이 손님이 찾아왔을 때는 그저 수인사만 한 번 나누고 멀리 떨어져서 앉게 하면서, 속세에 찌든 냄새와 때를 싫어했다. 좋아하고 흠모하는 사람과는 하루 종일 담소를 나누었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었다. 해학과 기지를 거침없이 쏟아내어, 턱이 벌어질 정도로 상대방을 웃기는가 하면 뼈를 찌르는 아픔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공이 읽은 책은 모두 베껴 선본(善本)으로 만들어서, 동국(東國)의 비어(秘語)나 서방(西方)의 영문(靈文)은 물론이요, <이소>,18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의 역사서,19 도연명20․사령운21․유종원22․두보23의 시(詩), 그밖에 기서(奇書)에 속하는 패관소설,24 송(宋)․원(元) 시대의 유명한 희곡에 이르기까지, 붉은 붓으로 표시해가며 글자 하나하나까지 따져 교정하고 상세하게 문맥과 의미를 분석하여, 때로 새로운 해석을 내기도 했다.25

공의 글은 결코 많지 않았지만, 가슴속의 독자적 견해를 피력할 때에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듯하여,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시(詩)도 많이 짓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신운(神韻)의 경지가 깃들어 있다. 또한 서예를 즐겨서, 매번 먹을 갈고 종이를 펼치면 옷을 벗고 크게 소리치며, 토끼가 펄쩍 뛰어오르고 매가 세차게 하강하는 듯한 기세로 써내려갔다. 그 중 득의한 작품은 역시 대단히 훌륭했는데, 수척하면서도 기운차고 기세가 넘치고 빼어나서, 만 근의 철완(鐵腕)으로 써낸 듯하여, 날카롭고 거침없는 기골이 종이 위에 거칠고 거세게 펼쳐졌다.

하루는 머리도 긁기 싫고 빗질 하는 것도 권태로워, 마침내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려, 구레나룻과 수염만 남기기도 했다. 공의 기개가 격정적이고 행동 또한 일상의 규범을 벗어난 바가 있어, 이단을 배척한다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눈을 흘겼다. 경공(耿公)과 논쟁을 주고받을 때는 매번 서찰을 보낼 때마다 수많은 말들이 쌓여, 도학의 심오한 내용을 펼치는 것이 비바람이 몰아쳐 강에 물결이 일듯 했다. 읽은 사람들은 그 견식을 높이 보고, 그 재능에 탄복하면서도, 그 붓을 두려워하여, 결국 근거없는 말을 꾸며서 당국자에게 고발하여, 당국자가 그를 내쫓았다.

이 때 좌할26 유동성27이라는 분이 무창(武昌)에서 공을 맞이하여 개공28의 집에서 묵게 했다. 이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돌아오곤 했는데, 유공(劉公)은 항상 심수(沁水)에서 맞아주었고, 매중승29은 운중(雲中)에서 맞아주었고, 초약후30라는 분은 말릉(秣陵)에서 맞아주었다. 공은 어느 곳에서도 잠시만 머물렀을 뿐, 곧 다시 마성(麻城)으로 돌아갔다.

그 때 또 어떤 사람이 근거없는 말로 당국자에게 고발하였는데, 당국자 또한 그대로 믿고 그를 내쫓고, 용호(龍湖)의 사원을 불태우게 했다. 이 때, 어사(御史) 마경륜31이 몸소 북통주(北通州)에서 맞아주었다. 이 때 당국자는 다시 이단을 배척하고 육경(六經)의 뜻에서 벗어난 문장을 바로잡자는 명목으로 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당국에서 집금오32 소속의 체포 담당관을 파견하여, 공을 체포했다.

이에 앞서서 공은 병이 들었다. 병환 중에서도 예전에 저술했던 《역인》33을 다시 수정했는데, 그 책의 이름이 《구정역인》이다. 공은 항상 “나는 《구정역인》만 완성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역인》이 완성되자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바로 이 무렵에 체포 담당관이 도착하여, 머물던 객사가 소란스러웠다. 공이 마공(馬公)에게 이유를 물으니, 마공이 “선생님을 체포하려는 병사들이 도착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은 병환 중에도 애써 기운을 내 일어나 몇 걸음 가면서 큰 소리로 “나를 잡으러 왔구나! 어서 나를 위해 문짝을 하나만 떼어다 주시게!”라고 소리쳤다. (문짝을 떼어 가지고 오자) 그 위에 눕더니 “빨리 가자! 나는 죄인이니, 여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소리쳤다. 마공이 따라가려고 하자 공은 “도망자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 나라의 법이다. 또한 그대에게는 늙으신 부친이 계시지 않는가?”라고 하며 말렸다. 그러자 마공은 “조정에서 선생님을 요망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저는 요망한 사람을 숨겨준 사람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으면 그 뿐, 절대로 선생님 혼자 가게 하고 저 혼자 여기에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결국 함께 출발했다. 통주(通州) 성 밖에 이르자, 마공에게 함께 가는 것을 금한다는 명령 공문이 북경에서 속속 도착했고, 그의 집안 하인 수십 명이 또한 쫓아와서 가지 말라는 부친의 명을 전하고 울면서 말렸다. 그러나 마공은 듣지 않고 끝내 공과 동행했다.

체포된 다음날 대금오(大金吾)의 심문이 열리게 되어, 시종들이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들어와 계단 위에 뉘었다. 금오(金吾)가 “너는 어찌하여 망령된 책을 썼는가?”라고 심문하자 공은 “이 죄인이 지은 책은 아주 많아, 지금도 모두 남아 있는데, 성인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는 것만 있을 뿐 해를 끼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금오는 그의 꿋꿋함에 크게 웃고, 더 이상 심문하지 않고 대략 그치더니, 본적지로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오래 지나도 처분하는 교지는 내려오지 않았는데, 공은 감옥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 하루는 시종을 불러 머리를 깎게 했다. 시종이 가고 나서, 머리 깎던 칼을 집어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었는데, 이틀 동안이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시종이 “스님! 아프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손가락으로 시종의 손에 “아프지 않다네”라고 썼다. 다시 “스님! 왜 스스로 목을 베셨어요?”라고 묻자, 공은 “나이 일흔이나 먹은 늙은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나?”라고 쓰고, 결국 숨이 끊어졌다. 그 때 마공은 사태가 조금 진정된 듯하여 부친을 만나러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소식을 듣고는 “내가 지키고 보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구나. 슬프도다!”라고 하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공의 유해를 통주로 모시고 가서 분묘를 마련해주고 사찰을 지어서 봉양했다.

공은 원래 책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 경공(耿公)과 논쟁을 벌였던 것들을 대부분 서기가 기록해 놓았는데, 나중에 편집하여 만든 것이 《분서》이다. 그 후 때때로 성현의 깊은 뜻을 올바르게 풀이한 것을 《설서》(說書)라는 제목으로 편찬했다. 마지막으로 공이 예전에 조목조목 풀이했던 역사 이야기를 초공(焦公) 등이 남경(南京)에서 간행했는데, 이것이 《장서》(藏書)이다.

공은 시문을 읽고 외는 틈틈이 역사책 읽는 것을 특히 좋아해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의 미묘한 점들을 크게 꿰뚫어보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안위치란(安危治亂)의 기미는 숨 한 번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보다 빠른 순간에 의해서 결정되고, 곡식의 작은 낟알보다 미세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세상의 소인배들은 요행을 기대하다가 나라를 해치기도 하고,34 세상의 군자라는 사람들은 진리를 보는 눈이 가려진 경우가 너무 많고,35 명예를 따지는 것이 무척 심하고, 자신의 주장을 지키고 아끼는 것이 매우 강하며, 틀에 박힌 격식과 관습에 얽매여서, 옛날 사람들이 청정무위(淸淨無爲)함과 인위적 가식이 없음을 추구했던 뜻과 세속의 허물을 참으며 자신을 감추고 경우에 따라서 자기 주장을 굽히고 원만하게 어울렸던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군자는 소인을 부리지 못하고 소인이 군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왕 겉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서 자신을 깊이 감추지 않고, 격동하는 세파에 휩쓸려 평정을 찾지 못함으로써 화를 입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세상의 유학자(儒學者)들은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필 경우 한결같이 일률적인 잣대로만 살펴볼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편안히 하여 장점 중에도 단점이 있음을 찾지 못하고, 얼핏 보기에 완벽한 옥에도 흠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에도 나쁜 점이 있고 싫어하는 것에도 좋은 점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울려 퍼지는 메아리 소리만 듣고 또 그것을 그대로 전하여, 이를 답습하고 추종하는 견해가 이미 사람들의 뼛속까지 자리잡아, 어떻게 깨뜨릴 방도가 없다.

그러나 공은 상하 수천년 동안의 역사를 남다른 눈으로 보아, 옛날에 위대한 군자라고 일컬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때로 그 단점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고, 도저히 상종하지 못할 부류라고 낙인찍힌 소인들에 대해서도 때로 그 장점을 덮어두는 법이 없었다. 그 의도는 오직 거짓으로 꾸미기만 한 글을 몰아내어 실용성을 추구하고,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보여주며, 허황된 이치를 버리고 참다운 인정을 추구하는 것에 있었다.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지나쳐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처럼 조금 한쪽으로 치우치게 경중을 따진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꼬거나 풍자하거나 우스개로 하는 말을 제외하고 세심하게 읽어보면 정곡을 정확히 맞추어 꿰뚫은 바가 있어, 세상의 교화와 인심의 수양에 상당히 보탬이 되는 점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국 공의 책이 사회윤리에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겨, 성인을 비난하고 도를 배반했다고 평하는데, 이 또한 지나친 점이 있다.

옛날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저마다 자기 견해에 입각해서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 사마천은 황로학(黃老學)을 우선시하고 육경(六經)을 뒤로 했으며 처사(處士)를 뒤로 하고 유협(游俠)을 우선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반고 역시 수절(守節)하는 것을 배척하고 정직함을 비루하게 보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두 역사서에 독창적인 견해가 있으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폐단이 있음을 거울 삼아, 역사서를 쓸 때 역사가 자신의 견해를 넣지 않고, 순정(醇正)한 역사를 쓴다는 쪽으로 하나하나 돌아섰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역사서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해나 달을 보듯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반면, 당(唐)․송(宋) 시대 역사서는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서 ‘아함’ 하고 하품만 나오고 기지개만 켜게 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기》와 《한서》는) 작자만의 독특한 견해가 있어 그 강렬한 빛을 소멸시키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오늘날 거침없고 자유분방함을 논하자면 《장자》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장자》를 읽었기 때문에 거침없고 자유분방해진 사람은 아직 없었으며,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사람이 반드시 《장자》를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또 오늘날 천성이 각박한 것을 논하자면 《한비자》(韓非子)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한비자》를 읽었기 때문에 천성이 각박해진 사람은 아직 없었으며,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 반드시 《한비자》를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 두 책이 세상에 나온 이후, 《장자》를 읽은 사람 중에서 그 빼어난 운치를 터득함으로써 명리(名利)를 저 멀리 초월하여 초연한 삶을 보낸 사람들이 대대로 적지 않았고,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의 책을 읽은 사람 중에서 그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정신을 터득한 사람들이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고 조정의 위세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처럼 순정(醇正)한 사람도 자기의 의견을 일일이 직접 써서 후주(後主)36에게 바쳤지만 어찌 일찍이 의견이 소소하고 잡다하다 하여 결국 모두 폐기된 적이 있었는가?

육경(六經)이나 그밖에 유가(儒家)의 사상을 다룬 책37은 기름진 곡식이나 고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곡식과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사람은 또한 막히고 쌓여서 체증에 걸릴 수가 있다. 까닭에 이를 치료하는 사람은 대황(大黃)이나 촉두(蜀豆)같은 것을 써서 그 쌓인 찌끼를 씻어내니, 그래야 비장과 위장이 회복되어 병이 가라앉는다. 귀빈을 대접하는 초호화 연회인 구빈(九賓)의 연회에서는 닭․돼지․양․생선 등이 연달아 나온다. 그런데 바다의 진미 중에서도 강요의 패주38 같은 것들은 입술이 헐고 혀가 갈라질 정도로 독한 맛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번쯤 먹어서 입을 후련하게 하고 싶어한다. 이로써 보자면 공의 책은 쌓이고 막힌 것을 풀고 뚫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진기한 책 중의 하나여서,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둘이 있어서도 안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세상에 나온 것이 너무 이르기 때문에 독자의 마음에 참뜻이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이런저런 비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공이 화를 당한 연유를 여러 모로 따져보면, 또한 꼭 책이 화를 불러들인 것도 아니다. 대체로 공의 사람됨은 정말로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자신은 본래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을 끊은 사람이었으면서도 오로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들을 말하면서 천하의 일은 결코 명예를 추구하는 소인배 유학자(儒學者)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본래 깨끗함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여 행동거지가 마치 얼음이나 서릿발같은 사람이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담박하고 깨끗한 절조를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나 각박하고 잘은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여, 그 해악이 반드시 자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래 풍류와 여색을 일체 물리쳐 끊어버리고 정욕을 보기를 마치 똥묻은 흙처럼 보는 사람이었지만, 자연의 풍광을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꽃․달․여인의 심상도 매우 즐겨 감상하여, 마치 이로써 자신의 적막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본래 의심하는 것이 많고 인정하는 것이 적어 외부 세계와 화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한가지 장점이나 한가지 뛰어남이 있는 인물에게는 사랑과 사모를 아낌없이 쏟아부어,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본래 명리에 대한 마음을 끊고 세상 일을 잊고 살아, 마치 죽은 나무나 타버린 재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옛날 충신․의인․협객․검객들이 존망(存亡)을 걸고 남다른 우의를 다지며 생사를 걸고 우정을 주고받는 그들의 행적을 읽게 되면 손가락을 깨물고 책상을 내리치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을 하곤 했다. 기골이 쇠나 바위처럼 굳건하고 기개가 하늘에 닿아, 해야겠다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뱉어내곤 하여, 어디 간들 자신의 의견을 굽힌 적이 없었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문을 밀어젖히고라도 엿보았으며, 왕공대인(王公大人)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융(孔融)39은 위(魏)나라 무제(武帝)40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했으며 혜강(嵇康)41은 종회(鍾會)를 마치 노예처럼 대했다. 봉황의 둥지를 엎을 수는 있어도 그 부리를 변하게 할 수는 없고, 난(鸞)새42의 날개를 뽑을 수는 있어도 그 용(龍)과 같은 천성을 길들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영지(靈芝)가 불태워지고 혜란(蕙蘭)이 제거되기도 하며,43 오(吳) 지방 사람들은 강을 건널 때 칼을 입에 물고 강을 건너기도 하고, 기러기는 독초 꼭두서니를 입에 물고 다닌다는 것이다.44

아아! 재주가 너무 높고 기개가 너무 호방하여, 평범히 속세에 파묻혀 지내지 못하고, 마침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유하혜(柳下惠)에게도 부끄럽고 손등(孫登)에게도 부끄러우니’,45 애석한 일이로다! 경계할 일이로다!

공은 만년에 《역경》(易經)을 읽고 《구정역인》(九正易因)이란 책을 저술했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공이 《역경》에서 크게 얻은 바가 있어, ‘항’(亢)을 버리고 ‘겸’(謙)에 들어가려는 것이었는데,46 이제 결국 연로했구나! 가버렸구나! 공이 펴낸 책은 《양명선생연보》(陽明先生年譜)․《용계어록》(龍谿語錄) 등이 있는데, 그 종류가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다.

혹자가 나에게 “당신은 온릉(溫陵)에게서 배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리라.

“비록 좋아하지만 배우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고,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공은 배운 사람으로 관직에 있을 때 그 맑은 절조가 늠름했는데, 우리같은 무리들은 그저 남이 주는대로 받아먹어, 절조가 보통 사람과 똑같으니, 이것이 첫번째 배울 수 없는 점이다. 공은 젊은 여자의 방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어여쁜 소녀의 침상에는 올라가지 않았는데, 우리같은 무리들은 끊임없이 정욕을 불태워, 첩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 끊이지 않으니, 이것이 두번째 배울 수 없는 점이다. 공은 지극한 도(道)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서 그 큰 것을 보았건만, 우리같은 무리들은 고지식하게 문자만 지키고 있어서,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으니, 이것이 세번째 배울 수 없는 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책 읽는 것만을 알았지만, 우리같은 무리들은 세속의 인연에 골몰하여 책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이것이 네번째 배울 수 없는 점이다. 공은 곧은 기개와 강한 절조로 남에게 굽히지 않았는데, 우리같은 무리들은 겁 많고 나약하여 남들을 추종하며 굽신거리고 우러러보니, 이것이 다섯번째 배울 수 없는 점이다.

억세게 기를 부리기 좋아하고, 거리낌없이 은인과 원수를 만들고, 안된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붓을 휘둘러 써내려가곤 했으니, 이것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첫번째이다. 한 번 벼슬을 버리고 떠났으면 마땅히 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춰야 하거늘, 인간 세상에서 배회하여 그 이름이 드러남에 따라 화가 뒤따랐으니, 이것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두번째이다. 대승(大乘)을 중시하고 계율을 경시하여, 세세한 행실을 닦지 않고, 감정에 맡기어 나오는 그대로 말을 하여 마치 난도(鸞刀)47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세번째이다.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배울 수 없을 것이요,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결코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좋아하지만 배우지는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남을 현혹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이 일찌감치 삭발하고서도 여전히 관(冠)을 쓰고 현자(賢者)를 추천하며, 팔십의 나이가 되도록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는데, 과연 그런 사실이 있는가! 속담에 이른바 ‘두꺼비가 똥을 쌀 때는 자기 입으로 내뱉는다’[蟾蜍擲糞, 自其口出]라고 했으니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소리로다.”

公安派 袁氏 三兄弟의 墓

1 원중도(袁中道)의 자는 소수(小修)이고, 원종도(袁宗道)와 원굉도(袁宏道)의 동생이다. 10여세에 《황산부》(黃山賦)와 《설부》(雪賦) 등 5000여 마디를 지었다. 장성하면서 더욱 거침 없는 성품을 가졌다. 두 형과 함께 수도로 벼슬길에 올라 사방에서 많은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큰 발자취를 천하에 남겼다. 만력(萬曆) 44년(1616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와 남경예부주사(南京禮部主事)를 거쳤다. 천계(天啓) 4년(1624년) 남경이부낭중(南京吏部郎中)을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두 형과 함께 문학적으로 이름을 떨쳐서 ‘세 원씨 형제’라는 ‘삼원’(三袁)으로 칭송되었다. 문집으로 《아설재집》(珂雪齋集)이 있다.
2 《복건통지》(福建通志) <선거표>(選擧表) 및 《광서수요주지》(光緖修姚州志) 권5 <순리전>(循吏傳) 등에 이지의 원래 이름이 재지(載贄)였다는 기록이 있다.
3 효렴(孝廉)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부터 각 지방에서 매년 효행이 뛰어난 사람과 청렴결백한 사람을 한 사람씩 관리로 추천하는 임용제도가 있었다. 뒤에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이러한 뜻이 바뀌어 지방에서 과거를 보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4 원문에서는 ‘더 이상 공거를 타지 않았다’[不再上公車]고 했는데, ‘공거’(公車)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회시(會試)에 참여하는 거인(擧人)에게 제공되었던 교통 수단이거나, 회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교통 수단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에는 지방에서 우수한 인재로 추천된 사람, 즉 거인이 수도에 모여 회시를 보고, 이를 통과하면 정식으로 관리에 임명되었다. 거인으로 추천되는 것 자체도 극히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지는 회시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5 원문에서는 허현(虛玄)이라고 했다. 허현은 ‘허’(虛)와 ‘현’(玄)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유가(儒家)를 표방한 학자들이 유가 이외의 학문, 즉 불가와 도가를 부정적 의미로 일컬을 때 썼던 용어이다. 여기서는 승려와 토론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불교의 이치를 토론한 것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
6 삼국 시대 오(吳)나라의 육적(陸績)이 울림태수(鬱林太守)로 있다가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짐이 너무 없어서 배가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리자, 커다란 돌을 싣고 나서야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연유하여, 청렴한 관직 생활 끝에 아무 재물도 모은 것 없이 퇴직할 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울림석이라고 한다.
7 도화미(桃花米)란 제대로 찧지 않아 복사꽃 빛깔을 띤 쌀이다. 또는 일설에는 너무 오래 묵어 복사꽃 빛깔을 띤 쌀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에 살았던 임방(任昉)은 신안태수(新安太守)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집안에 남은 것이라곤 도화미 20석뿐이어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화미 역시 청렴한 관리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8 유유(劉維)의 호는 구택(九澤)이고 강릉 사람이다. 유신(劉愼)의 아들로 국사학록(國史學錄), 남대어사(南臺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운남성과 초웅부를 순찰하고 있었다. 이지가 가족을 이끌고 요안에서 출발하여 초웅으로 가서 그에게 벼슬자리를 사영하였다. 유유가 말렸지만 이지가 고집하여 벼슬을 거두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이 때가 명(明) 만력(萬曆) 8년(1580년)으로, 당시 이지의 나이 54세 때였다.
9 경초공(耿楚倥)은 경씨(耿氏) 4형제 경정향(耿定向)․경정리(耿定理, 1534~1584)․경정력(耿定力)․경정유(耿定裕) 중의 둘째로, 호북(湖北) 황안(黃安) 사람이다. 《분서》 <경초공선생전>(耿楚倥先生傳)에 보다 자세한 행적이 실려 있다. 그가 50세에 세상을 떠나자 맏형 경정향은 “형제는 수족(手足)과 같다지만, 둘째는 나의 심장이자 눈과 귀였다. 하늘이 둘째를 데려간 것은 내 눈을 파낸 것이요, 내 귀를 태운 것이요, 내 심장을 도려낸 것이다.”라고 하며 극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담원집》(澹園集) 권33, <천대경선생행장>(天臺耿先生行狀) 참조.
10 유우객자(流寓客子)란 글자 그대로는 ‘여기저기 떠돌며 아무 데서나 묵곤 하는 나그네’라는 뜻이다. 이지는 <예약․감개평생>(豫約․感慨平生)(《분서》, 권4)에서 이 호칭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했다. 뒤의 역문 참조.
11 《화엄경》(華嚴經) 권78에 나오는 비유이다. 소․양 등 온갖 동물의 젖이 대해(大海)에 가득 차 있는데, 사자가 젖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모든 젖이 변질되지 않는다고 하여, 여래(如來)가 번뇌로 가득 찬 대해에 사자가 젖을 주듯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는 비유이다. 여기서는 이지의 논의가 그만큼 용맹함을 비유한다.
12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삼수도하(三獸渡河)의 비유이다. 토끼․말․코끼리 세 동물이 강을 건너는데, 토끼는 발이 물 위에 둥둥 떠서 건널 수 없고, 말은 발이 중간 밖에 닿지 않아 건널 수 없어, 발이 바닥에 닿는 코끼리가 물살을 막아서 건너게 해주듯, 보살이 번뇌의 물살을 막아서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지의 논의가 그만큼 투철하고 진지함을 비유한다.
13 천대공(天臺公)은 경정향(耿定向, 1524~1596)으로, 자는 재륜(在倫), 호는 초동(楚侗)이다. 경사구(耿司寇)․경중승(耿中丞) 등은 그가 재직했던 형부(刑部)의 관직에 의한 호칭이다. 이지와 뜨거운 논쟁을 벌였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정향이 기존의 윤리와 사상을 옹호하고 고수하려는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이미 낡은 구시대의 도통(道統) 관념에 부정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지와는 같은 기반 위에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는 그와 가장 심각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고, 이 글의 후반에서 볼 수 있듯이, 화해의 길을 가기도 했다. 미조구찌 유우조우는 이 두 사람의 논쟁이야말로 ‘당시 많은 인사의 이목을 모았던, 명대 사상계 과제의 첨단을 달렸던 논쟁’이라고 하기도 했다.
14 무념(無念)은 이지를 모시던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5 주우산(周友山)은 마성(麻城)에서 이지를 모셨던 승려 중의 하나이다. 이름은 사경(思敬)이고 호가 우산이다. 주류당(周柳塘)의 아우이다. 이지의 글에서 아주 많이 거론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온릉전>(李溫陵傳)․<팔물>(八物)․<예약>(豫約) 등 참조.
16 구탄지(丘坦之)는 이름이 탄(坦)이고 자가 탄지이다. 호는 장유(長孺)이며 호북 마성 사람이다. 일찍이 원(袁)씨 형제들과 사귀었는데 이들을 통해서 이지와 만나게 되었다.
17 남제(南齊) 때 하동지(何佟之)라는 사람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하루에 10여 차례 몸을 씻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수음(水淫)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8 <이소>(離騷)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었다고 하는 《초사》(楚辭)의 대표적 편명이다.
19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말한다.
20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은 자이다. 위진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존칭되었다. 어려서부터 박학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일찍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저술하여 자신을 경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다. 술을 좋아하고 자연을 즐기면서 언제나 세상일에 관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인물이었다. 저작으로는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전한다.
21 사령운(謝靈運)은 남북조(南北朝) 시기 남조 송(宋)나라의 양하 사람이다. 사현(謝玄)의 손자로 당시의 뛰어난 시인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뭇 경전에 통달하였다.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문장은 강좌제일(江左第一)이었다. 강락공(康樂公)의 작위를 이어받았으므로 사강락이라고 불렸다. 뒤에 모반에 연루되어 생을 마쳤다. 그의 청신(淸新)한 시풍(詩風)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22 유종원(柳宗元)은 당나라 사람으로 자가 자후(子厚)이다. 박학하고 사부(詞賦)를 잘 지었던 문학자이다. 한유(韓愈)와 함께 이름을 날려 ‘한유’(韓柳)라고 칭송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영주팔기》(永州八記), 《유선생문집》(柳先生文集)이 전한다.
23 두보(杜甫)는 당(唐)나라 때 양양 사람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두릉(杜陵)에 살면서 스스로 두릉포의(杜陵布衣) 또는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불렀다. 현종(玄宗) 때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곧이어 일어난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이리저리 유랑하게 된다. 그의 시는 웅혼하고 침통하며 충후한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쌍벽을 이루면서 ‘이두’(李杜)라고 칭송되었다. 저서로는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전한다.
24 패관소설(稗官小說)이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조사하는 벼슬인 패관에서 유래하였다. 뜻이 확대되어 거리의 이야기나 민간의 전설 등을 적어 모은 소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5 이지의 독서량이 당시 학자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대단히 광범위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전통 중국 문인들의 입장에서 정통 문학으로 간주되던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송(宋)․원(元) 시대에 유행한 통속 소설․희곡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주변 이민족의 언어에도 상당히 정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6 좌할(左轄)은 좌승(左丞)이라는 관직의 별칭이다. 상서성(尙書省)에 좌승(左丞)과 우승(右丞)을 두었다.
27 유동성(劉東星, 1538~1601)의 호는 진천(晉川), 자는 자명(子明), 산서(山西) 심수(沁水) 사람이다. 그의 아들 용상(用相, 호는 肖川)과 더불어 이지가 만년에 교유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총리하조(總理河漕)를 겸임하다 임기 중에 사망했다.
28 개공(蓋公)은 한대(漢代) 사람으로, 황로(黃老)의 서적에 통달하여, 제상(齊相) 조참(曹參)에게 조언하여 치국(治國)을 보좌했다.
29 매중승(梅中丞)은 매국정(梅國禎, 1542~1605)을 가리킨다. 자는 극생(克生), 호는 형상(衡相)이고, 마성(麻城) 사람이다. 자가 객생(客生)이라고 언급한 곳도 있다. 같은 사람인데 극(克)과 객(客)의 음이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킨 듯하다.
30 초약후(焦弱侯)는 초굉(焦竤, 1540~1620)으로, 자가 약후(弱侯)이며, 호는 담원(澹園) 또는 의원(漪園)이다. 강소성 강녕 사람이다. 경정향(耿定向)에게 배우고 나근계(羅近溪)에게 질의하였다는 기록이 《명사》(明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지나 경정향과의 친하게 교류하였다. 이지와 주고 받은 편지가 《분서》와 《속분서》에 매우 많이 수록되어 있음에도 그 교류 정도를 알 수 있다. 매우 박학다식한 인물로 저술한 저작의 양과 질에서도 매우 광범위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사상적인 입장은 이지보다는 경정향에게 가까웠으며, 경정향을 스승으로 존중하며 일생토록 변치 않았다. <초약후에게>[與焦弱侯] <초의원에게 답하다>[答焦漪園書]등 참조.
31 마경륜(馬經綸)의 자는 주일(主一), 호는 성소(誠所) 또는 역산(歷山), 순천(順天) 통주(通州) 사람이다. 만력(萬曆) 17년(1589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만력(萬曆) 28년(1600년)에 이지가 머물고 있던 마성의 지불원(芝佛院)이 지방관의 선동으로 인해 대중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고 파괴되어, 이지는 황얼산(黃蘖山)으로 난을 피하였다. 그곳에서 이지를 사모하여 통주에서 찾아온 마경륜과 함께 역학(易學)을 공부했고, 다음해 2월 마경륜과 함께 통주에 도착하여, 《역인》(易因)을 개정하여 《구정역인》(九正易因)을 완성했다. 원중도(袁中道)가 찾아와 방문한 것은 이 때 무렵으로, 이지의 나이 75세 때이다. 이지는 그 이듬해 3월 16일에 옥중에서 자살했다. 이지가 박해받을 당시 그를 가장 열렬하게 변호한 인물이 마경륜이었고, 이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당국에 이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친구들에게 격문을 돌리는 등 명예 회복에 앞장 선 인물도 마경륜이다.
32 집금오(執金吾)는 금오(金吾)라고도 했으며, 수도와 궁문의 순찰 및 호위를 담당하던 부서였다.
33 미조구찌 유우조우(溝口雄三)는 《역인》(易因) 또는 《구정역인》(九成易因)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그의 해석을 간략히 인용한다. “왕본아(汪本鈳)의 <곡이탁오선사고문>(哭李卓吾先師告文) 내용에 따르면, 이지는 마경륜과 통주에서 《역경》을 읽고, 《역인》을 개정하여 《구정역인》으로 펴냈다고 한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지가 세상을 떠나기 거의 직전의 일이다.……용조조(容肇祖)는 ‘이지가 노년에 남경(南京)에 갔다가, 추운 겨울 긴긴 밤을 이기려고 《역경》을 읽기 시작하여, 3년 동안 문을 닫고 읽은 끝에 《역인》을 완성하였다’고 《역인》의 저술 과정을 추정하였고, 이는 1598년(만력 26년)부터 1600년(만력 28년)까지 3년 동안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해, 즉 이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 마경륜과 함께 통주에 가서 《역경》을 읽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구정역인》을 완성하였다면, 이지는 만년 마지막 5년 동안 《역경》에 매달렸다는 말이다.……이상으로 추측하면, 《구정역인》에는 인간의 생생한 실존에 대한 이지의 통찰이 체계적으로 풍부하게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지가 말년에 《역경》으로 회귀했다고 하여, 그가 불가의 영역에서 유가의 영역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피상적인 견해이다. 그는 유불의 계파를 초월하여 리얼한 인간을 투시하려 하였으며, 그 때문에 유가와도 불가와도 완전히 가까워질 수 없었고, 유가도 불가도 아니었다.……《역인》과 《구정역인》도 이지가 확립한 사상적 기반에 의한 새로운 해석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이 두 저술은 이지 연구의 중요한 자료일 수도 있다.”
34 《장자》 <재유>(在宥) 참조.
35 원문에서는 ‘이장이 너무 많다’[理障太多]고 했다. 이장은 원래 불교 용어로, 왜곡된 이치나 선입견에 빠져 참된 깨달음의 길에 이르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36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선주(先主)인 유비(劉備)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유선(劉禪)을 말한다.
37 원문에서는 ‘수․사의 책’[洙泗之書]이라고 했다. 수(洙)와 사(泗)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말하는데, 수수는 북쪽에 있고 사수는 남쪽에 있다. 두 강물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사수현(泗水縣) 북쪽에서 합류하여 곡부(曲阜) 북쪽까지 흐르다가 다시 둘로 갈라진다. 이 지역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속했다. 공자가 말년에 수수와 사수의 사이에서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수․사는 공자 및 유가를 일컫는 별칭으로 쓰였다.
38 강요(江瑤)는 조개의 일종으로, 강요(江珧)․강요(江鰩)로도 쓴다. 국내 사전에는 안다미조개 또는 살조개라고 풀이되어 있다. 강요(江瑤)의 패주(貝柱), 즉 근육질 조개관자를 강요주(江瑤珠)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중국 요리의 별미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기호에 따라서, 신선한 별미가 있다고 하여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린내가 심하고 너무 질겨서 먹기가 무척 힘들다면서 즐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39 공융(孔融)의 자는 문거(文擧)이다. 문학자로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헌제(獻帝) 때 북해(北海)의 재상으로 학교를 세우고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한왕조를 구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조조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 참조.
40 조조(曹操)를 말한다.
41 혜강(嵇康)의 자는 숙야(叔夜)이다. 회계(會稽, 지금의 浙江 紹興)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하나이다. 위(魏)․진(晉) 교체 시기 귀족 출신이자 대관료인 종회(鍾會)가 혜강의 명성을 듣고 사귀어보고 싶어서 부하 관리들을 거느리고 찾아갔다. 마침 혜강은 어느 큰 나무 밑에서 쇠를 단련하고 있었다. 귀족의 거창한 행차가 자기를 만나러 멀리서 오는 것을 발견했지만, 혜강은 종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라, 못본 척 하며 일을 계속했다. 종회가 곁에서 한참 기다려도, 혜강은 방약무인한 태도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종회가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문득 혜강이 입을 열어 “무엇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시오?”라고 냉랭하게 물었다. 종회는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본 것을 보고 간다네”라고 맞장구치고 가버렸다. 이로써 혜강은 종회의 미움을 사서, 후에 결국 종회의 모함에 빠져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42 난(鸞)새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령스러운 새이다. 봉황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털은 다섯 가지 빛깔[五彩]을 갖추었고 소리는 다섯 가지 소리[五音]에 맞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새 가운데 푸른 빛이 도는 새를 봉(鳳)이라 불렀다고 한다.
43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은 나라가 혼란한 지경에 처한 것을 향초(香草)가 독초(毒草)의 등살에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비유적 표현의 초사(楚辭)를 남겼다.
44 삼국시대 오(吳) 지방에 떠돌던 동요의 가사에 ‘강을 건널 때 강가의 동물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다만 물 속의 용이 무서워 늘 칼을 입에 물고 강을 건넌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러기는 증시(矰矢, 화살에 줄을 매어 화살에 맞은 새를 찾기 쉽게 만든 활의 일종)를 두려워하여, 꼭두서니라는 독초를 입에 물고 다니며, 증시에 맞으면 온몸에 감긴 줄을 끊었다고 한다. 이 구절의 뜻은 안목과 식견이 눈에 띄게 남다르면 항상 남의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로 인해 가장 먼저 제거와 희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45 ‘유하혜(柳下惠)에게도 부끄럽고 손등(孫登)에게도 부끄럽다’는 말 자체는 혜강(嵇康)의 <유분시>(幽憤詩, 마음속 울분을 토로한 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유하혜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대부 전획(展獲)으로, 자가 계(季) 또는 금(禽)이다. 오늘날 법관에 해당되는 사사(士師)라는 관직에 있었고, 유하(柳下)라는 곳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사후에 혜(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전금(展禽)․유하계(柳下季)․유사사(柳士師)․유하혜(柳下惠) 등의 명칭으로 불린다. 유하혜는 군주의 현명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자기 이상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오직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려고 노력했다. 손등은 진(晉)나라 때 은사(隱士)로, 휘파람을 잘 불었다. 같은 은사이며 죽림필현(竹林七賢) 중의 하나였던 완적(阮籍)이 소문산(蘇門山)으로 손등을 찾아가 신선 도인술에 대해 논하려고 했는데 손등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완적은 길게 휘파람을 불고 돌아가는데, 산을 반 쯤 내려갔을 무렵 봉황이 우는 듯한 소리가 골짜기 가득 메아리쳐서, 알고 보니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여기서는 유하혜처럼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 일에 참여하지도 않고, 손등처럼 철저하게 은둔함으로써 자기 명을 보전하지도 못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부끄럽다는 뜻으로 인용되었다.
46 《역경》에서 건괘(乾卦)의 상구(上九) 즉 맨 위 양효(陽爻)의 효사(爻辭)가 항룡유회(亢龍有悔)이다. 그래서 이 효(爻)의 자리를 ‘항’(亢)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이 자리는 국가나 개인의 운명 또는 어떤 현상 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 즉 극성(極盛)의 상태에 도달하여서 쇠하기 직전의 상태로 풀이되었다. ‘겸’(謙)은 64괘 중의 하나로, ‘간’(艮)의 다음 ‘곤’(坤)의 이전이다. 밑에서 세 번째 효가 양효이고 나머지는 모두 음효(陰爻)이다. ‘땅 속에 산이 숨어 든 모양’을 뜻한다. 존엄과 덕망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겸손과 겸양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항(亢)을 버리고 겸(謙)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지가 만년에 이르러 그 때까지 세상에 나서서 거침없는 언론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거센 공격을 받던 처지를 벗어나 수도 및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조용히 살려고 했음을 일컫는 말이다.
47 칼 끝과 자루에 난(鸞) 모양의 방울을 단 칼이다. 고대 제사에서 희생물을 벨 때 사용했다.

李溫陵傳

 李温陵者,名载贽。少举孝廉,以道远,不再上公车,为校官,徘徊郎署间。后为姚安太守。公为人中燠外冷,丰骨稜稜,性甚卞争,好面折人过,士非参其神契者不与言。强力任性,不强其意之所不欲。初未知学,有道学先生语之曰:“公怖死否?”公曰:“死矣,安得不怖?”曰:“公既怖死,何不学道?学道所以免生死也。”公曰:“有是哉?”遂潜心道妙。久之自有所契,超于语言文字之表,诸执筌蹄者了不能及。为守,法令清简,不言而治。每至伽蓝,判了公事,坐堂皇上,或置名僧之间,簿书有隙,即与参论虚玄。人皆怪之,公亦不顾。禄俸之外,了无长物,陆绩郁林之石,任昉桃花之米,无以过也。久之,厌圭组,遂入鸡足山阅龙藏不出。御史刘维奇其节,疏令致仕以归。

  初与楚黄安耿子庸善,罢郡遂不归。曰:“我老矣,得一二胜友,终日晤言以遣余日,即为至快,何必故乡也?”遂携妻女客黄安。中年得数男,皆不育。体素癯,澹于声色,又癖洁,恶近妇人,故虽无子,不置妾婢。后妻女欲归,趣归之。自称“流寓客子”。既无家累,又断俗缘,参求乘理,极其超悟,剔肤见骨,迥绝理路。出为议论,皆为刀剑上事,狮子迸乳,香象绝流,发咏孤高,少有酬其机者。

  子庸死,子庸之兄天台公惜其超脱,恐子侄效之,有遗弃之病,数至箴切。公遂至麻城龙潭湖上,与僧无念、周友山、丘坦之、杨定见聚,闭门下键,日以读书为事。性爱扫地,数人缚帚不给。衿裙浣洗,极其鲜洁,拭面拂身,有同水淫。不喜俗客,客不获辞而至,但一交手,即令之远坐,嫌其臭秽。其忻赏者,镇日言笑,意所不契,寂无一语。滑稽排调,冲口而发,既能解颐,亦可刺骨。所读书皆钞写为善本,东国之秘语,西方之灵文,离骚、马、班之篇,陶、谢、柳、杜之诗,下至稗官小说之奇,宋元名人之曲,雪藤丹笔,逐字雠校,肌襞理分,时出新意。其为文不阡不陌,摅其胸中之独见,精光凛凛,不可迫视。诗不多作,大有神境。亦喜作书,每研墨伸楮,则解衣大叫,作兔起鹘落之状。其得意者亦甚可爱,瘦劲险绝,铁腕万均,骨稜稜纸上。一日恶头痒,倦于梳栉,遂去其发,独存鬓须。

  公气既激昂,行复诡异,斥异端者日益侧目。与耿公往复辩论,每一札,累累万言,发道学之隐情,风雨江波,读之者高其识,钦其才,畏其笔,始有以幻语闻当事,当事者逐之。

  于时左辖刘公东星迎公武昌,舍盖公之堂。自后屡归屡游:刘公迎之沁水,梅中丞迎之云中,而焦公弱侯迎之秣陵。无何,复归麻城。时又有以幻语闻当事,当事者又误信而逐之,火其兰若,而马御史经纶遂恭迎之于北通州。又会当事者欲刊异端以正文体,疏论之。遣金吾缇骑逮公。

  初公病,病中复定所作《易因》,其名曰《九正易因》。常曰:“我得《九正易因》,死快矣。”《易因》成,病转甚。至是逮者至,邸舍怱怱,公以问马公。马公曰:“卫士至。”公力疾起,行数步,大声曰:“是为我也。为我取门片来!”遂卧其上,疾呼曰:“速行!我罪人也,不宜留。”马公愿从。公曰:“逐臣不入城,制也。且君有老父在。”马公曰:“朝廷以先生为妖人,我藏妖人者也。死则俱死耳。终不令先生往而己独留。”马公卒同行。至通州城外,都门之牍尼马公行者纷至,其仆数十人,奉其父命,泣留之。马公不听,竟与公偕。明日,大金吾置讯,侍者掖而入,卧于阶上。金吾曰:“若何以妄著书?”公曰:“罪人著书甚多,具在,于圣教有益无损。”大金吾笑其倔强,狱竟无所置词,大略止回籍耳。久之旨不下,公于狱舍中作诗读书自如。一日,呼侍者薙发。侍者去,遂持刀自割其喉,气不绝者两日。侍者问:“和尚痛否?”以指书其手曰:“不痛。”又问曰:“和尚何自割?”书曰:“七十老翁何所求!”遂绝。时马公以事缓,归觐其父,至是闻而伤之,曰:“吾护持不谨,以致于斯也。伤哉!”乃归其骸于通,为之大治冢墓,营佛刹云。

  公素不爱著书。初与耿公辩论之语,多为掌记者所录,遂裒之为《焚书》。后以时义诠圣贤深旨,为《说书》。最后理其先所诠次之史,焦公等刻之于南京,是为《藏书》。盖公于诵读之暇,尤爱读史,于古人作用之妙,大有所窥。以为世道安危治乱之机,捷于呼吸,微于缕黍。世之小人既侥幸丧人之国,而世之君子理障太多,名心太重,护惜太甚,为格套局面所拘,不知古人清静无为、行所无事之旨,与藏身忍垢、委曲周旋之用。使君子不能以用小人,而小人得以制君子。故往往明而不晦,激而不平,以至于乱。而世儒观古人之迹,又概绳以一切之法,不能虚心平气,求短于长,见瑕于瑜,好不知恶,恶不知美。至于今,接响传声,其观场逐队之见,已入人之骨髓而不可破。于是上下数千年之间,别出手眼,凡古所称为大君子者,有时攻其所短;而所称为小人不足齿者,有时不没其长。其意大抵在于黜虚文,求实用;舍皮毛,见神骨;去浮理,揣人情。即矫枉之过,不无偏有重轻,而舍其批驳谑笑之语,细心读之,其破的中窾之处,大有补于世道人心。而人遂以为得罪于名教,比之毁圣叛道,则已过矣。

  昔马迁、班固各以意见为史:司马迁先“黄老”后《六经》,退处士进游侠,当时非之;而班固亦排守节,鄙正直。后世鉴二史之弊,汰其意见,──归之醇正,然二家之书若揭日月,而唐宋之史读不终篇,而已兀然作欠伸状,何也?岂非以独见之处,即其精光之不可磨灭者欤!且夫今之言汪洋自恣,莫如《庄子》,然未有因读《庄子》而汪洋自恣者也,即汪洋自恣之人,又未必读《庄子》也。今之言天性刻薄,莫如《韩子》,然未有因读《韩子》而天性刻薄者也,即天性刻薄之人,亦未必读《韩子》也。自有此二书以来,读《庄子》者撮其胜韵,超然名利之外者,代不乏人,读申、韩之书,得其信赏必罚者,亦足以强主而尊朝廷。即醇正如诸葛,亦手写之以进后主,何尝以意见少驳,遂尽废之哉!

  夫《六经》洙泗之书,粱肉也。世之食粱肉太多者,亦能留滞而成痞,故治者以大黄蜀豆泻其积秽,然后脾胃复而无病。九宾之筵,鸡豚羊鱼相继而进。至于海错,若江珧柱之属,弊吻裂舌,而人思一快朵颐。则谓公之书为消积导滞之书可;谓世间一种珍奇,不可无一不可有二之书亦可。特其出之也太早,故观者之成心不化,而指摘生焉。

  然而穷公之所以罹祸,又不自书中来也。大都公之为人,真有不可知者:本绝意仕进人也,而专谈用世之略,谓天下事决非好名小儒之所能为。本狷洁自厉,操若冰霜人也,而深恶枯清自矜,刻薄琐细者,谓其害必在子孙。本屏绝声色,视情欲如粪土人也,而爱怜光景,于花月儿女之情状亦极其赏玩,若借以文其寂寞。本多怪少可,与物不和人也,而于士之有一长一能者,倾注爱慕,自从为不如。本息机忘世,槁木死灰人也,而于古之忠臣义士、侠儿剑客,存亡雅谊,生死交情,读其遗事,为之咋指斫案,投袂而起,泣泪横流,痛哭滂沱而不自禁。若夫骨坚金石,气薄云天;言有触而必吐,意无往而不伸。排搨胜己,跌宕王公,孔文举调魏武若稚子,嵇叔夜视锺会如奴隶。鸟巢可覆,不改其凤咮,鸾翮可铩,不驯其龙性,斯所由焚芝锄蕙,衔刀若卢者也。嗟乎!才太高,气太豪,不能埋照溷俗,卒就囹圄,惭柳下而愧孙登,可惜也夫!可戒也夫!

  公晚年读《易》,著书曰《九正易因》。意者公于《易》大有得,舍亢入谦,而今遂老矣逝矣!公所表章之书,若《阳明先生年谱》,及《龙谿语录》,其类多不可悉记云。

  或问袁中道曰:“公之于温陵也学之否?”予曰:“虽好之,不学之也。其人不能学者有五,不愿学者有三。公为士居官,清节凛凛,而吾辈随来辄受,操同中人,一不能学也。公不入季女之室,不登冶童之床,而吾辈不断情欲,未绝嬖宠,二不能学也。公深入至道,见其大者,而吾辈株守文字,不得玄旨,三不能学也。公自小至老,惟知读书,而吾辈汩没尘缘,不亲韦编,四不能学也。公直气劲节,不为人屈,而吾辈胆力怯弱,随人俯仰,五不能学也。若好刚使气,快意恩仇,意所不可,动笔之书,不愿学者一矣。既已离仕而隐,即宜遁迹入山,而乃徘徊人世,祸逐名起,不愿学者二矣。急乘缓戒,细行不修,任情适口,鸾刀狼籍,不愿学者三矣。夫其所不能学者,将终身不能学;而其所不愿学者,断断乎其不学之矣。故曰虽好之,不学之也。若夫幻人之谈,谓其既已髡法,仍冠进贤,八十之年,不忘欲想者,有是哉!所谓蟾蜍掷粪,自其口出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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