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초약후에게與焦弱侯
초약후1에게與焦弱侯
사람이 물과 같다면 호걸은 큰 물고기와 같다. 큰 물고기를 얻으려면 반드시 남달리 큰 물을 찾아야 하며, 호걸을 얻으려면 반드시 남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는 분명한 이치이다.
우물물을 보면, 깨끗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맛이 감미롭지 않은 것이 없고, 날마다 마시고 먹는 데 사람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어, 단 하루나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공2의 낚싯대를 가진 사람은 우물로 낚시하러 가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우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단 세 치 짜리 물고기라도 구해보려 해도 구할 수가 없다.
바닷물을 보면, 일찍이 그다지 깨끗한 적도 없었고, 일찍이 그다지 맛이 감미로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만 곡(斛)이나 되는 큰 배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아니면 바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또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도 있고 또한 사람을 궁핍하게 할 수도 있다. 믿고서 편안히 여기거나 의지하며 평상처럼 여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바다에서 곤(鵾)이 붕(鵬)으로 변화하고3 교룡(蛟龍)이 그 곳에 숨어 있으며,4 온갖 보물이 모두 모여 있고, 배를 삼킬 정도로 커다란 고래가 좋아하며 마음껏 헤엄치고 논다. 그것이 일단 입을 한 번 벌렸다 하면 100 장(丈) 크기의 범선이 물살과 함께 막힘없이 빨려 들어가니, 그 뱃속이 본래 장강(長江)․한수(漢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그 본래의 모습이니, 어찌 예차5가 다스릴 수 있겠으며, 그물로 끌어 당길 수 있겠는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죽고, 스스로 가고 스스로 오며, 물 속에 사는 것들이 천억 가지인데, 모두 보고 놀라 괴이하게 여기며 길게 한숨만 쉴 뿐이니, 하물며 사람은 그것을 아직 본 적도 없지 않은가!
나의 고향 천주(泉州) 근처 바다에서,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큰 물고기가 항구에 들어왔는데, 썰물 때 따라 나가지 못한 놈이었지요.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칼이나 도끼를 들고 곧장 물고기 등 위에 올라가서 마음대로 가르고 잘라서, 연달아 수백 석(石)을 떼어냈건만, 이 물고기는 오히려 평상시처럼 편안한 듯 했답니다. 얼마 있다 밀물이 들어오자 다시 조수를 타고 가버렸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 중 작은 것이다. 조수를 타고 항구에 들어와서, 항구가 그 몸을 담을 수만 있었다면, 이 물고기 또한 고통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내 친구 중에 막(莫)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뇌해(雷海)라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전중(滇中)에서 함께 관리 생활할 때 내게 직접 말했다.
“산같이 커다란 물고기가 있었는데, 처음에 보았을 때는 마치 구름인 듯 안개인 듯 했습니다. 정오 쯤에 안개가 걷히니, 과연 바다 속에 산 하나가 나타난 것 같았는데, 태항산(太行山)처럼 길게 뻗어 있었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는데, 줄곧 반 달을 가서야 쉬더군요.”
그렇다면 이 물고기는 길이가 단지 3천여 리 뿐이었겠는가!
아아! 호걸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이다. 지금 만약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호걸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우물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 때문인가? 호걸은 결코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며, 마을 사람 중에서는 또한 결코 호걸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금의 성현은 모두 호걸이었으니, 호걸이 아닌데 성현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예로부터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천하의 호걸이나 성현과 함께 하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호걸을 찾으니, 단지 호걸을 잃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현의 길까지 잃는 것이다. 이른바 ‘수레 끌채는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으로 가려 한다’[北轅而南其轍]는 격이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나는 이러한 사람은 결코 호걸이 아니며 또한 결코 성현이 되려는 진정한 뜻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진정한 호걸이라면 호걸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결코 없을 것이요, 만약 성현이 되려는 진정한 뜻을 가졌다면 성현의 길을 모르는 사람이 결코 없을 것이다. 우물에 앉아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이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권1)
1 초약후(焦弱侯)는 앞에서 말한 초굉(焦竤)를 가리킨다.
2 임공(任公)은 《장자》 <외물>(外物)의 우언에 나오는 임공자(任公子)란 인물을 말한다. 그는 거대한 낚시 바늘에 굵은 밧줄을 낚싯줄 삼아, 거대한 황소 50마리를 미끼로 하여, 회계(會稽)에 걸터앉아서 동해(東海)로 낚시를 드리웠다. 날마다 물고기가 걸리기를 기다렸지만, 1년이 다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결국 큰 물고기가 미끼를 삼켜, 거대한 바늘에 걸린 채 바다로 가라앉는데, 지느러미가 움직일 때마다 산같은 파도가 요동치고 바닷물이 진동했다. 이 고기를 낚아 포를 뜨니, 제하(制河) 동쪽부터 창오(蒼梧) 이북까지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았다. 결국 큰 인물을 찾기 위해 큰 미끼를 드리운다는 뜻이다.
3 《장자》 <소요유>(逍遙遊) 제일 처음에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라고 시작되는 대붕 새의 우화가 실려 있다. 바로 이 우화에서 큰 인물, 즉 호걸을 비유한 것이다.
4 교룡(蛟龍)은 용의 한 종류이며 바다에 살고 있으며 큰 파도를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네 발이 달려 있고 뱀의 몸과 비슷하다고 한다.
5 예차(豫且)는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이름난 어부로, 그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한대(漢代)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정간>(正諫)의 내용이다, “옛날 백룡(白龍)이 청냉(淸冷)한 연못에 내려와 물고기로 변했는데, 어부 예차가 활을 쏘아 그 눈을 맞추었다. 백룡이 하늘로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하소연하니……천제는 ‘물고기란 원래 사람이 보면 쏘아 잡는 것인데, 네가 이 꼴이 되었다 한들 예차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사기》 <귀책열전>(龜策列傳)의 내용이다, “송 원왕(元王) 2년에 강(江)이 신귀(神龜)를 하(河)에 사절로 보냈는데, 천양(泉陽)에 이르러 어부 예차가 그물로 잡아서 가두어놓았다.” 두 이야기 모두 물고기를 잘 잡는 어부를 말한다.
卷一 書答 與焦弱侯
人猶水也,豪傑猶巨魚也。欲求巨魚,必須異水;欲求豪傑,必須異人。此的然之理也。
今夫井,非不清潔也,味非不甘美也,日用飲食非不切切于人,若不可缺以旦夕也。然持任公之釣者,則未嘗井焉之之矣。何也?以井不生魚也。欲求三寸之魚,亦了不可得矣。今夫海,未嘗清潔也,未嘗甘旨也。然非萬斛之舟不可入,非生長于海者不可以履于海。蓋能活人,亦能殺人,能富人,亦能貧人。其不可恃之以為安,倚之以為常也明矣。然而鯤鵬化焉,蛟龍藏焉,萬寶之都,而吞舟之魚所樂而游遨也。彼但一開口,而百丈風帆並流以入,曾無所于礙,則其腹中固已江、漢若矣。此其為物,豈豫且之所能制,網罟之所能牽邪!自生自死,自去自來,水族千億,惟有驚怪長太息而已,而況人未之見乎!
余家泉海,哼人謂余言:“有大魚入港,潮去不得去。呼集數十百人,持刀斧,直上魚背,恣意砍割,連數十百石,是魚猶恬然如故也而潮至,複乘之而去矣。”然此猶其小者也。乘潮入港,港可容身,則茲魚亦苦不大也。余有友莫姓者,住雷海之濱,同官滇中,親為我言:“有大魚如山,初視,猶以為云若霧也。中午霧盡收,果見一山在海中,連亙若太行,自東徙西,直至半月日乃休。”則是魚也,其長又奚啻三千餘里者哉!
嗟乎!豪傑之士,亦若此焉爾矣。今若索豪士于鄉人皆好之中,是猶釣魚于井也,胡可得也!則其人可謂智者歟!何也?豪傑之士決非鄉人之所好,而鄉人之中亦決不生豪傑。古今賢聖皆豪傑為之,非豪傑而能為聖賢者,自古無之矣。今日夜汲汲,欲與天下之豪傑共為賢聖,而乃索豪傑于鄉人,則非但失卻豪傑,亦且失卻賢聖之路矣。所謂北轅而南其轍,亦又安可得也!吾見其人決非豪傑,亦決非有為聖賢之真志者。何也?若是真豪傑,決無有不識豪傑之人,若是真志要為聖賢,決無有不知賢聖之路者。尚安有坐井釣魚之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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