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大衆歌謠)
대중음악 개념: 근대 이후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을 통해 전달되면서 대중 사이에서 즐겨 불려온 노래. 유행가.
정의
근대 이후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을 통해 전달되면서 대중 사이에서 즐겨 불려온 노래. 유행가.
개설
대중가요의 정의와 범주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근대의 시기, 상업성, 서민대중들이 향유하는 노래라는 점에서는 대체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서민대중들이 향유하는 노래이기는 하지만, 대중매체와 상업성, 작품의 오리지널리티 여부 등에서, 구전을 통해 적층적으로 형성되는 전근대시대의 민요나 근대 이후의 구전가요는 대중가요에서 제외하는 것이 통설이다. 일각에서는 자본주의화의 초창기적 모습을 보이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전문예인들의 노래까지를 포함시키는 의견, 혹은 일제강점기의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에서 불린 통속민요나 잡가까지 포함시키는 의견도 제기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대중가요라는 말에는,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을 통해 전달되는 통속민요와 잡가를 포함시키지 않는 경향이 강하므로, 결국 대중가요는 대중매체와 상업적 공연으로 전달되는 노래 중, 동요나 가곡 같은 본격음악계의 노래나 통속민요 · 잡가 등 국악 분야의 노래와는 구별되는 나름의 작품적 전통을 지닌 노래만을 통상적으로 지칭한다.
일제강점기
대중매체 수록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창작에 간여한 유행창가로 음반에 수록된 최초의 노래는 1923년 일축레코드에 수록된 박채선 · 이류색이 부른 「이 풍진 세월」이다. 당시 창가집에 「탕자자탄가」, 「청년경계가」 등의 제목으로 악보가 수록되어 있고, 해방 후에는 「희망가」라 불린 이 노래는, 미국의 노래가 일본으로 이입되어 새로운 가사로 불려지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새 가사가 붙여진 경우이다. 이 시기에 일본 노래 「카추샤의 노래」, 「장한몽가」, 「시드른 방초」 등이 우리말 가사로 음반에 수록되어 있으나, 가사가 번역이거나 이와 다를 바 없는 번안가사이다. 그에 비해 「이 풍진 세월」, 「자라메라」, 「사의 찬미」 등은 외국 악곡에 우리나라 사람이 창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가사가 붙여져 있다는 점에서 한국대중가요사의 첫 자리에 놓일 만하다. 이 중 음반 취입으로는 「이 풍진 세월」이 가장 이르며, 1926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취입 후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 사건이 센세이션을 일으켜 조선어 대중가요 음반의 생산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사뿐 아니라 작곡까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노래로 음반에 수록된 첫 작품은 1928년(이하 연도는 음반 출발을 기준으로 함) 「낙화유수」와 같은 해 트로트 양식을 보여준 「세 동무」가 김서정의 작곡으로 출반되고, 전래의 민요 어법에 서양음악이 적극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신민요의 출발로 볼 수 있는 창작자 미상의 영화주제가 「아리랑」(1929)이 출반되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창작으로 이루어진 대중가요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는, 일본 대중가요의 음악을 받아들여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와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이나 ‘라’의 비중이 높은 트로트 양식(당시에는 유행가, 유행소곡이라 불린)과, 민요의 어법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외래적 음악언어와 혼융한 신민요가 양대 축을 형성하였고, 재즈나 블루스, 탱고 등 서양의 음악언어를 좀 더 본격적으로 사용한 재즈송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이외에 가사에서 희극성이 강조된 노래는 따로 만요(漫謠)라 지칭했다.
트로트 양식의 노래는 이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1932, 일명, 「황성 옛 터」), 고복수의 「타향」(1934, 일명 「타향살이」)을 거쳐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서 양식적 관습이 대체로 정돈되었고, 이후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알뜰한 당신」의 황금심 등의 인기 가수들을 낳으며 오랫동안 한국대중가요사의 주도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작곡가로는 전수린,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재호 등이 인기를 얻었으며, 작사가로는 왕평, 박영호, 조명암, 박노홍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한편, 신민요는 창작자 미상의 영화주제가 「아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1931, 32년 강석연이 부른 「오동나무」와 「방아타령」을 거쳐, 1934년에 이르러 강홍식의 「처녀총각」과 「개나리고개」,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 박부용의 「노들강변」 등 다양한 경향의 신민요가 대거 인기를 얻으며 등장하면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이은파의 「관서천리」, 선우일선의 「조선팔경가」, 이화자의 「꼴망태 목동」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신민요 여자가수는 전통적 가창을 배운 기생 출신들의 약진이 돋보였다는 특징이 있으며, 신민요의 작곡가로는 문호월, 형석기, 김준영, 전기현 등이 활약했고 본격음악 작곡가라 할 수 있는 안기영과 이면상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트로트와 신민요는 가사와 정서적 내용에서도 그 차이가 컸다. 트로트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비애스러운 탄식,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처지에 대한 한스러움 등을 드러내는 진지한 태도의 노래라면, 신민요는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 삶을 즐겁게 표현하는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가 대도시에서 신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방식과 감정을 드러내는 양식이었다면, 신민요는 이보다 좀 더 익숙하고 즐거우며 편안한 대중적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수적으로 소수인 재즈송은, 김해송의 「청춘삘딩」,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등에서 보이듯, 주로 근대적 대도시의 삶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노래들로 가사에서 외래어 · 외국어의 과시적 사용이나 대도시의 생활풍속의 언급이 상대적으로 많은 노래였다. 작곡자이자 가수인 김해송과 발랄한 목소리의 박향림이 재즈송을 많이 불렀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트로트에서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에 ‘라’의 비중이 높은 노래들이 새롭게 인기를 얻으며, 만주, 중국과 동남아 등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상상력을 담은 이국적인 노래들과 노골적인 친일가요들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대중가요의 중요한 장은 음반과 공연이었으며 라디오뿐인 방송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음반을 생산하는 오케, 빅타, 콜롬비아, 태평 등의 음반사는 모두 일본 회사였고, 식민지 조선에는 회사는 물론 녹음 스튜디오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악극단, 반도악극단 등 음반회사를 중심으로 한 악극단들이, 노래와 연주, 춤을 결합한 버라이어티쇼와 악극 등을 결합하여 종합적인 대중예술 공연물을 공연하는 방식으로 많은 대중을 만났다.
광복 이후와 1950년대
해방 후에도 분단으로 창작자와 가수들 일부의 월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작곡가들이 남한에 남음으로써 1950년대까지는 트로트와 신민요의 주도는 이어졌다. 이 시기 인기 있던 트로트 작품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와 「유정천리」, 남인수의 「청춘고백」, 신민요인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등은 가사나 음악 모두에서 일제강점기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러나 트로트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경험을 반영하여 절절한 비애를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 발표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전쟁 이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등이 대표적인 노래이다.
그와 함께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이 거세어지면서 다양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트로트는 장세정의 「고향초」, 신세영의 「전선야곡」 등 7음계적 측면이 강해지는 노래, 혹은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안정애의 「무정 블루스」에서처럼 블루스 등 새로운 리듬과 결합하는 노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음악과의 결합은 신민요에서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서 황정자의 「오동동타령」, 「노랫가락 차차차」, 백설희의 「도라지 맘보」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음악 중 특히 탱고, 맘보, 부기우기, 블루스 등 춤곡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쓴 현인의 「서울야곡」, 도미의 「비의 탱고」, 김정애의 「닐니리 맘보」, 윤일로의 「기타 부기」, 나애심의 「미사의 종」 등이 대거 출현했고, 특히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인기를 모았다. 또한 일제 말기에 나타났던 아시아적 이국성의 노래들이, 국제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 시기에도 여전히 유지되어 현인의 「신라의 달밤」, 장세정의 「샌프란시스코」,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허민의 「페르샤 왕자」,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 등이 인기를 모았다.
이들 기존 대중가요인들의 활동 영역은 여전히 음반과 악극단이었다. 해방과 함께 생산지가 사라진 음반은 1948년이 되어야만 대중가요 음반 생산이 가능해지고, 악극단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 중 육군 군예대로 종군활동을 하였고 작곡가 박시춘이 이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전쟁이 끝나면서는 미8군 밤무대와 방송국이 새로운 활동의 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기존의 트로트 · 신민요와는 다른 경향의 대중가요를 만들고 유포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국은 1956년부터 안다성의 「청실홍실」과 「꿈은 사라지고」,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금사향의 「소녀의 꿈」 등, 1960년대에 주류로 등장할 스탠더드팝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유포하면서 새로운 경향을 주도했다. 때마침 1958년부터 악극단이 영화에 밀려 쇠락하면서, 트로트와 신민요의 전성시대는 한 매듭을 향해 나아갔다.
1960년대
1960년대 대중가요의 가장 큰 특징은, 여태껏 주류의 선도적 양식의 위상을 놓치지 않았던 트로트를 누르고, 미국풍 대중가요인 스탠더드팝이 주류의 선도적 양식으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대유행이 그 계기가 되었는데, 이 흐름을 이끈 작곡가 손석우는 1960년대 초 단순하고 명랑한 스탠더드팝의 가장 중요한 창작자로 부상했다. 1964년부터 영화주제가인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과 「하숙생」,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와 「보고 싶은 얼굴」, 패티김의 「초우」와 「빛과 그림자」, 김상국의 「불나비」 등이 히트하며, 초기의 명랑한 분위기를 이어간 이시스터즈의 「서울의 아가씨」, 블루벨즈의 「즐거운 잔칫날」, 봉봉사중창단의 「꽃집 아가씨」 등과 함께 스탠더드팝의 시대를 굳건히 했다. 작곡가로는 1950년대에 트로트와 팝을 오갔던 박춘석이 여전히 힘을 발휘했고, 이봉조, 길옥윤의 스타급 작곡가를 비롯하여 김인배, 정민섭, 김호길 등 악단장을 겸한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이들 스탠더드팝은 서양근대음악의 7음계와 기능화성을 기초로 하여 트로트 특유의 일본색을 제거하면서 신파적으로 과잉된 비애의 미감을 현격하게 감소시켰다. 또한 피아노와 관악 · 현악기를 고루 배치한 빅밴드 · 캄보밴드의 편곡 방식, 화성을 중시하는 중창단의 유행 등, 서양근대음악의 어법이 좀 더 깊숙이 자리 잡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가사에서도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최희준의 「내 사랑 쥬리안」,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 등 서양적 근대성을 확연히 갖추어가는 대도시의 삶을 명랑하고 아름답게 그리거나,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김용만 「회전의자」 등 도시 서민들의 삶을 낙관적으로 그렸다. 슬픔의 감정도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 최희준의 「길 잃은 철새」, 정훈희의 「안개」 등에서처럼 신파적으로 흐느끼지 않는 절제된 비극성을 보여주었다.
스탠더드팝이 1960년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흐름이기는 했지만 트로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1960년대 초에 급격한 쇠락의 징후를 보였지만 1960년대 중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필두로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이 연달아 인기를 얻으면서 확실하게 부활했다. 이후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남진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의 인기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에 부활한 트로트는, 편곡과 가창에서 스탠더드팝의 특징을 받아들여 다소 담담하고 중후한 가창, 화성이 강화된 빅밴드 · 캄보밴드의 반주를 특징으로 하였다. 특히 선율에서의 변화는 두드러져 7음계적인 요소가 강화된 작품이 더 늘어났고, 이미자의 「사랑했는데」, 「서울이여 안녕」,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 번」, 「불타는 연가」, 배호의 「마지막 잎새」 등에서 보이듯 트로트를 주도한 사람들이 스탠더드팝의 형태를 지닌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두 양식 사이의 혼융은 활발해졌다.
이 시기 트로트의 부활이 가능해진 것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도록 트로트가 계속 확산되며 수용자 층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에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가 시골과 도시 하층민에게까지 보급되어, 대도시 젊은이들이 텔레비전과 음반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스탠더드팝과 달리, 트로트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60년대의 트로트는, 1930년대의 트로트와 달리 시골이나 향토적 이미지가 강하며, 급격히 산업화 · 서구화되는 대도시와 달리 다소 정체되고 뒤떨어진 시골과 하층민의 소외된 감정과 절망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등이 드러내 보이는 서울을 향한 절망감이나, 조미미의 「먼 데서 오신 손님」,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같은 하층민의 절망을 드러내는 노래들의 유행은, 트로트가 지닌 세상에 대한 소극적이며 비관적인 대응 태도가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한편, 1950년대까지 여전히 굳건하던 신민요는, 1960년대에 김세레나 등의 인기로 마지막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인기 레퍼토리들은 「새타령」,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기존 민요 · 대중가요의 리메이크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쇠락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반면에 1964년 비틀즈 바람을 타고 키보이스, 에드훠 등이 음반을 내기 시작한 록은 주로 공연에서 기존 곡의 연주에 머물었고, 에드훠와 퀘스천스를 이끈 신중현이 1968년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과 1969년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등 춤추는 여자가수의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1970, 71년 이후의 록 히트곡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한편 1960년대는 대중가요계를 좌우할 여러 제도들이 정돈되고 매체와 기술의 발전도 이룩된 시기였다. 1961년 5 · 16 이후 한국연예협회가 발족했고 1962년 한국방송윤리위원회, 19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활동 개시로 대중가요에 대한 심의를 주도했다. 1960년대 후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많은 트로트 가요들이 ‘왜색’을 이유로 금지될 수 있었던 법적 근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또한 1968년 음반법이 시행되어 설비 기준이 적용되면서, 1960년대 중반에 40, 50여 개에 달하던 음반사의 수가 10여 개로 축소되었다. 음반의 콘텐츠를 담당한 것은 편곡자, 프로듀서, 악단장의 역할을 모두 맡은 작곡자였는데, 적지 않은 음반들이 이들 이름을 내세운 ‘작곡집’의 모습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음반은 에스피(SP)에서 엘피(LP)로 바뀌었고,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모노 음향에서 스테레오 음향으로 바뀌는 등 음반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1961년 말에 개국한 KBS TV를 필두로 1964년 TBC, 1969년 MBC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유지된 3채널 시대를 열었고, 대중가요 역시 이들을 매체로 한 새로운 활동의 시대를 시작했다.
1970년대
1960년대 말부터 조짐이 보이던 포크송과 록의 부상은 1970, 71년 은희의 「꽃반지 끼고」, 라나에로스포 「사랑해」, 키보이스 「해변으로 가요」, 히식스 「초원의 빛」 등이 음반은 물론 텔레비전에서까지 히트하면서, 대중가요계의 인기 판도를 뒤집는 데에 이르렀다. 비판적 포크의 대표곡으로 거론되는 김민기와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나와 인기를 얻은 것, 트윈폴리오 멤버였던 송창식과 윤형주가 외국 곡이 아닌 신작 「창밖에는 비오고요」, 「라라라」로 각각 인기를 얻으며, 「그리운 사람끼리」의 뚜아에무아, 「토요일 밤에」의 김세환, 「그건 너」의 이장희, 「아름다운 사람」의 서유석, 「새색시 시집가네」의 이연실, 「옛 사랑」의 4월과5월 등 주요 가수들이 음반으로 첫 선을 보인 때도 이즈음이다. 즉 1970, 71년을 계기로 청년문화 바람을 탄 포크송은 대중가요계의 주류로 진입했고, 급기야 1974, 75년에는 어니언스의 「편지」, 송창식의 「한번쯤」,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 등의 큰 히트가 보여주듯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을 밀어내고 대중가요계의 주도적 양식의 위상을 굳혔다.
포크송은 몇 가지 점에서 이전의 대중가요와의 변별되었다. 현역 대학생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 젊은이들의 음악감상실 등에서 출발하여 라디오를 거쳐 텔레비전으로 진입하는 방식, 관현악 반주를 거부하고 가수 스스로 어쿠스틱 기타를 반주하는 연주 방식,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의 의상과 무대 매너, 자작곡가수의 본격화 등은, 악단장 · 작곡가 중심의 1960년대 대중가요계의 여러 관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분명 상업적인 대중가요였고, 이들이 영향 받은 미국의 모던포크운동의 노래들처럼 그다지 사회비판적인 특성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상업적이고 순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가사에서도 하얗다, 맑다, 약하다, 가난하다, 작다, 어리다, 모르다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 집중적으로 쓰임으로써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와 물질적 발전을 추구해온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대립하는, 순수성과 정신지향의 가치관을 드러냈고, 이를 절정부 없고 노골적 감정적 분출이 적은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이 중 김민기와 한대수는 주로 남녀 간의 사랑에 치우쳐있던 다른 자작곡가수들과는 차별적으로, 비판적 포크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김민기는 이성적이면서도 섬세한 태도로 세상의 어두운 면과 내면의 고통까지 포착하고 이를 단정하게 잘 정돈된 음악과 절제된 감정의 언어로 형상화했고, 한대수는 비문명적이고 자연친화적 태도, 자유에 대한 열망과 욕망에 대한 긍정 등 미국적인 자유주의의 태도를 포크록이라 할 수 있는 음악과 함께 보여주었다.
한편 이 시기에 록도, 솔로 가수가 아닌 록밴드의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얻을 정도로 부상했다. 「해변으로 가요」의 키보이스, 「초원의 빛」의 히식스, , 「달무리」의 영사운드 등이 대표적이며, 솔로 가수로 김추자를 비롯하여 「마른 잎」의 장현, 「무지개빛」의 윤항기 등이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아직 이 시기 록의 대부분은 기존 작곡가들의 곡에 의존해 스탠더드팝의 선율에 록사운드의 편곡이 결합된 양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 못하는 곡이 많았다. 록밴드의 무대 연주 레퍼토리 대부분은 신작이 아닌 외국 곡의 연주였다. 이 중 김추자, 장현 등 ‘신중현 사단’의 작품들이 스탠더드팝을 크게 벗어난 선율을 보여주었는데, 1974년 청년문화의 기운이 최고조에 오른 시기에 록밴드 신중현과엽전들이 발표한 「미인」은 1970년대 전반기 가장 파격적인 록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신중현까지 포함하여 이 시기 록은 여전히 익숙한 가사의 사랑 노래였고, 포크송처럼 독자적인 세계인식과 태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포크송과 록이 급상승하는 흐름을 보이면서 트로트는 확연한 쇠락의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진과 나훈아는 각각 「임과 함께」, 「물레방아 도는데」로 마지막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이들은 초기와는 달리 이농민이나 시골사람의 경험과 취향에 머무는 모습을 보였고, 대부분의 트로트 히트곡이 이런 특성을 보였다.
유신정권의 후반기에 들어선 1975년에 터진 대마초사건은 포크송과 록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의 두 양식의 기세를 꺾었다.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신중현, 김추자 등 상당수의 대중가요인들이 연루되어 투옥되거나 활동을 중지 당했다. 1970년대 후반에 포크송과 록과 트로트나 스탠더드팝과 혼융된 작품들로 순치되는데 특히 이는 텔레비전에서 심했다. 이 시기 송창식은 여전히 많은 노래를 발표했지만 「한 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부류만 텔레비전의 인기를 모았고, 서유석은 「가는 세월」 같은 중장년 감수성의 노래를 내놓았다. 반면 「여고졸업반」의 김인순, 「푸른 시절」의 김만수, 「긴 머리 소녀」의 둘다섯 등, 초기 포크에 비해 현격히 취향이 어려지고 속류화된 부류가 인기를 모았다. 초기 포크와 같은 깊이와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섬소년」의 이정선이나 「시인의 마을」의 정태춘, 「작은 배」의 조동진처럼 텔레비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언더그라운드 활동으로 내려앉는 양상을 보였다. 록의 변화는 더욱 극심하여, 밴드 출신 리드보컬이 솔로로 독립하여 트로트 선율과 록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결합한 이른바 ‘트로트 고고’ 작품으로 인기를 모았다. 「오동잎」의 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등이 대표적이며,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조용필 역시 이 부류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MBC대학가요제’, ‘TBC해변가요제’ 등의 대학생 중심의 가요제를 통해, 밤무대 출신의 시대에서 캠퍼스 밴드의 시대로 옮겨가는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록적인 세계인식과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음악적 활력에서는 상승의 흐름을 보여준 「탈춤」의 활주로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1980년대는 크게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뉘며, 1991년 즈음까지 지속된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초중반은 슈퍼스타 조용필의 주도가, 후반은 발라드의 주도 속에 댄스뮤직과 언더그라운드 록이 약진하는 양상을 보였다.
1980년대 초중반 내내 최고 스타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조용필은, 한편으로 1980년대 초중반을 주도하는 새로운 작품 경향을 창출하고 선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국대중가요사의 중요 양식을 총 망라하는 백화점식 작품세계로 여러 세대와 취향의 수용자를 포용했다. 1980년대를 연 「창밖의 여자」는, 익숙한 1960년대식 단조 스탠더드팝의 선율을 기본으로 하여 록을 결합시키면서, 기승전결을 파괴한 분절적 구성과 샤우팅 등 록의 특성을 화려한 화성과 선율로 감싸 안았다. 그 결과 장년층에까지 익숙한 비극적 정조에 록적인 강렬함을 더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었고, 이후 「비련」, 「촛불」, 「못 찾겠다 꾀꼬리」를 거쳐 「눈물의 파티」, 「마도요」에 이르기까지 히트를 계속하며 1980년대 초중반의 주도적 경향으로 굳혀 나갔다. 스탠더드팝의 선율에 록을 결합하는 이 방식은, 「꽃 한 송이」의 김수철,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송골매, 「J에게」의 이선희, 「열애」의 윤시내 등 이 시기 대부분의 인기 가수들의 히트곡들이 채택한 방식이었다. 또한 이러한 주도적 경향 외에도, 모던록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에서부터 정통 단조 스탠더드팝 「정」, 트로트 「일편단심 민들레야」, 「미워 미워 미워」, 「허공」, 민요 리메이크 「한오백년」에 이르기까지, 포크를 제외한 한국대중가요사의 전 양식을 망라한 작품세계를 동시적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조용필은 10대부터 중노년층에 이르는 거의 모든 세대를 수용자로 끌어안았으며, 자작곡가수이면서도 작가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중지향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한편 1988년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의 히트에서부터 새로운 주도적 양식으로 등극한 발라드는, 1980년대 초중반의 이용, 최성수, 이광조 등의 인기를 딛고 양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전반기는 조용필의 주도 속에 록적인 강렬함이 주도했다면, 1985년을 계기로 좀 더 섬세한 내면을 화려한 선율과 화성을 노래하는 작품들의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언더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사랑하기 때문에」의 유재하, 이영훈이 지은 「난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을 부른 이문세의 인기를 거치며 섬세함과 화려함이 깊어졌고, 1988년 변진섭을 계기로 발라드의 전형적인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보인다. 이후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의 이상우, 「마지막 콘서트」의 이승철,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신해철, 「이별의 그늘」의 윤상, 「미소 속에 비친 그대」의 신승훈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1984년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를 계기로 트로트 특유의 비극성이 청산된 새로운 트로트 경향이 부상해 현철 등이 인기를 얻었고, 나미의 「빙글빙글」을 시발로 시작된 댄스뮤직은 「오늘밤」의 김완선, 「사랑의 불시착」의 박남정 등으로 독자적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포크는 1980년대 전반까지 남궁옥분, 해바라기, 신형원 등이 간간이 대중적 히트곡을 내었지만, 상당수는 언더그라운드로 새로운 모색을 하였다.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등의 조동진, 「북한강에서」의 정태춘이 포크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을 이끌고 신예인 「사랑일기」의 시인과촌장에 이르기까지 사색과 관조의 태도를 주조해나갔다. 그러나 포크로 출발한 사람 중 몇몇은 블루스, 록 등으로 작품세계를 이동시켰다. 급기야 1985년 포크로 활동을 시작한 전인권과 최성원이 주도하는 록그룹 들국화의 첫 음반이 텔레비전의 도움 없이도 30만장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와 록의 시대의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무엇보다도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등 들국화의 노래들은 신중현에서 송골매에 이르기까지 텔레비전을 향해 달려온 록이 보여주지 못한, 록적인 세계인식과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이후 「라디오를 켜고」의 시나위를 비롯하여 부활, 백두산 등 헤비메탈 그룹들이 음반을 내며 언더그라운드의 중심을 굳혔으며, 1970년대 말부터 록으로 시작하여 1980년대 중후반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의 히트곡을 낸 김현식이 록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한편 포크에서 시작한 이정선이 엄인호와 손잡고 한영애, 김현식 등을 규합하여 만든 신촌블루스는 한국대중가요 양식의 지평을 넓혔고, 이 멤버들은 「누구 없소」의 한영애에서 보이듯 각자 솔로로서 입지를 다졌다.
1987년 6월시민항쟁을 계기로, 대중가요계의 바깥에서 구전과 운동조직에 의존해 존재했던 민중가요가, 대중가요 시장 안으로 진입한 것도 한국대중가요사 전체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노래를찾는사람들, 노래마을 등은 민주화 열기와 함께 인기를 누리며 민중가요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 「그날이 오면」, 「백두산」 등을 일반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노래로 만들었다. 이들의 존재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김민기, ᄒᆞᆫ돌 등 사회비판적 포크 자작곡가수의 존재를 한 진영으로 묶어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이후 정태춘, 김광석, 안치환 등 대중가요권 안의 민중가요의 흐름을 만들어나갔다. 이들의 활동은 방송매체에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음반과 공연에서 바람몰이를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고, 1990년대 이후 대중가요의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급기야 음반 검열 철폐로까지 나아가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에도 대중가요의 매체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자리 잡은 카세트테이프는 엘피(LP)에 비해 복제와 휴대가 편한 음반으로 각광받고 있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세칭 워크맨이라 불린 소형 카세트플레이어가 급격히 보급되었다. 워크맨 같은 1인기기로 노래를 혼자 듣는 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1980년대 후반 언더그라운드는 이 토대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품성을 중시하는 언더그라운드의 수용자들은 1980년대 말 시작된 고음질의 컴팩트디스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수용자로 부상했다. 반면 텔레비전은 본격적인 컬러텔레비전 시대에 돌입하여 대중가요의 시각성은 점점 중요해졌고, 1980년대 중반부터의 댄스뮤직 바람은 이러한 매체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예술사의 1990년대가 시작된 1992년에, 대중가요에서도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아이들을 필두로 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이는 신세대문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고, 기획영화와 트렌디드라마 등 대중예술의 대대적 변화 조짐과 함께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또한 이는 30년 동안 이어진 군인 출신 대통령과 민주화운동 시대, 그리고 냉전시대와 이념대립의 시대가 종말을 맞은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대중가요의 주류 경향은 단번에 댄스뮤직으로 바뀌었고, 발라드는 크게 위축되었다. 1970년대 생들은 ‘신세대’를 이 시대의 중심 화두로 던지며, 가볍고 욕망에 충실하며 솔직한 태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윤리에 대한 무감각, 소비 중심적인 생활방식 등을 도발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서태지와아이들로 대표되는 댄스뮤직은, 이 신세대문화를 대표하는 음악이었고 그 뒤를 「나를 돌아봐」의 듀스, 「날개 잃은 천사」의 룰라,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의 박미경, 「핑계」의 김건모 등이 이었다. 이들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노래이긴 했지만, 구세대의 고정관념의 타파와 자기해방의 선언을 포함하고 있었고, 따라서 가사와 형식에서 모두 파격적이었다. 이러한 댄스뮤직의 승승장구는 발라드가 신승훈을 중심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간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한편 댄스뮤직과 함께 이 시대를 견인한 것은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이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공일오비, 「라구요」의 강산에, 「도시인」의 넥스트 등 이 시대의 언더그라운드는 문명비판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세상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여갔고, 록은 드디어 이 시대에 이르러 사회비판적인 사유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와 동반하여 이루어진 저항적 록 담론의 유행은 이러한 흐름을 다름 아닌 수용자들이 북돋우며 가꾸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수용자들의 요구에 응답하며 댄스뮤직과 언더그라운드가 경쟁적으로 밀고나간 이 시대의 파격성과 저항성은 1994, 95년 텔레비전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서태지와아이들조차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 「시대유감」 등 사회비판적 내용의 노래를 내놓는 상황에까지 치받쳐 올라간다. 한편, 김현철, 이소라, 패닉 등 매우 다양한 성향의 대중음악이 공존하며, 각기 자신의 할 말과 음악적 실험을 거리낌 없이 내어놓는 상황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펼쳐졌다.
이러한 상승의 흐름은 1996년 서태지와아이들의 은퇴를 계기로 그 주도권이 텔레비전 영역에서 언더그라운드 영역으로 급격히 이동하지만, 외환위기가 오는 1997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된다. 댄스뮤직 분야에서 「전사의 후예」의 HOT, 「사나이 가는 길」의 젝스키스 등 대형 기획사가 육성한 가수들의 세력이 주도하면서 반대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사회비판적 태도와 대중음악산업에서 자본의 논리에 대한 반감도 크게 나타났고 그 결과 인디음악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제6공화국 이후 정태춘과 노래운동권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음반 검열 철폐투쟁이 결실을 맺었고, 1996년에는 음반 검열이 사라져 이러한 언더그라운드와 인디의 표현의 자유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넥스트의 「머니」, 강산에의 「태극기」, 황신혜밴드의 「짬뽕」,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패닉의 「벌레」처럼, 음반 검열이 존재했다면 도저히 음반화될 수 없었을 노래들이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대중가요계는, 마치 1970년대 전반처럼 새로운 시도와 흐름들이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였다.
1998년 외환위기 시기부터 시작된 몇 년 간은 1990년대의 흐름이 크게 흔들리는 시기였다. 우선 ‘3저 호황의 시대’라 일컬어진 경제적 환경을 바탕으로 한 1990년대 대중가요의 파격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는, 국가부도를 걱정할 수준의 경제 환경에서 위축되었고, 가사와 내용 모두에서 보수적인 회귀의 태도를 보였다. 댄스뮤직은 위축되거나, GOD의 「어머님께」, 한스밴드의 「오락실」에서 확인되듯 저항적이지 않게 순치된 양상을 보이고, 대신 인간 간의 감정적 유대를 중시하는 발라드가 부활했다. 조성모의 「투 해븐」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음반산업이 위축되면서, 끝나가기 시작하는 음반의 시대가 매우 빠른 종말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의 시대에 돌입하면서 대중가요 전달의 매체가 음반에서 음원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창출 방식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음반을 사기보다는 인터넷 사이트나 휴대전화에서 다운로드 받은 음원을 듣게 되었다. 불법복제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음반산업은 붕괴됐고, 통신산업에게 유리한 수익금 배분 방식은 이러한 현상을 고착시켰다.
이러한 매체환경의 변화를 겪으며 노래 자체의 완성도와 호소력을 중시하는 작가주의적 매력을 지닌 노래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수용자들의 귀는 높아지고 감수성도 다양해졌지만 음반의 다양성은 크게 떨어지고 작가주의적 음악인들의 입지도 점점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클럽 연주와 페스티벌 등에 기대는 록과 재즈, PC통신이나 인터넷 같은 사이버공간을 통한 유통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 몇몇 성공사례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다양한 대중가요 · 대중음악이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대형 기획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빠르게 선회하며 이 상황을 돌파했는데, 하나는 노래 작품에 승부하는 가수보다는 쇼, 광고, 드라마 등을 고루 소화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를 만들어 수익의 원천을 다변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정된 한국 시장을 넘어서는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이것의 귀결이 이른바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노래들이다. 이들 노래의 특징은, 아주 쉽고 단순한 가사와, 매끈하게 정돈되었으나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은 음악, 섹시함으로 대중을 자극하는 가수들의 몸과 춤, 화려한 쇼 연출, 그리고 진지한 감상이 아닌 모바일 음향만으로도 빠르게 기억되는 반복의 구조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여러 세대와 여러 나라의 다양한 취향에 고루 호소력을 발휘하며, 노래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지 않은 대중들까지 빠르고 쉽게 끌어들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도록 잘 계산되고 다듬어져 있다. 이러한 케이팝들은 산업과 비즈니스 기술의 향상과 대중가요의 다양성과 창의성 약화라는 발전과 퇴보 양면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2012년에 이르러 케이팝을 이끄는 걸그룹들이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서유럽 진출에 성공했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한국대중가요사상 최초로 빌보드 순위 2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외, 한울, 2012)
『아이돌』(이동연 외, 이매진, 2011)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 민속원, 2006)
『한국 팝의 고고학』 1·2(신현준 외, 한길사, 2005)
「식민지시대 대중가요 연구의 쟁점과 그 의미」(이영미, 김시업 외,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 소명출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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