逸話傳---人物傳記

진시황(秦始皇), 그는 누구인가?

一字師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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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 그는 누구인가?

 

본명- 영정(BC 259~BC 210)

국적- 중국 진나라

직업- 중국 최초의 황제

좌우명- 사람 위에 내가 있고, 사람 밑에 네가 있다(가끔 자신과 신을 동격이라고 여겼다)

습관- 매일 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일 중독증 환자

특기- 건축, 거슬리는 사람들 순식간에 정리하기

취미- 자아도취, 통일하기(도량형, 화폐, 문자, 바퀴 폭 등)

좋아하는 색- 검은색, 노란색(왕위에 오른 후 황제의 색으로 지정했다)

관심분야- 여행(황제가 된 후로 다섯 차례나 전국 국토 대장정에 나섰다)

싫어하는 놀이- 자리 뺏기(누가 내 왕자리 채갈까봐;)

좋아하는 여성상- 없음(바람둥이 엄마의 영향으로 여자를 믿지 못하나 사랑받고 싶어 늘 몸부림치는 인물)

희망사항- 만화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영원한 생명

 

최초의 황제로서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드디어 중국 천하를 평정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했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부터 쓰던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신과 마찬가지라는 뜻을 가진 '황제(皇帝)'에, 최초라는 뜻의 '시(始)'자를 덧붙여 자신을 '시황제'라 부르기로 했다. 이후 황제라는 단어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되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난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 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 이라는 인식이 중국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의 분립시대나 남북조 분열시대에도 중국인들은 '언젠가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중국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중국을 영어로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이유도 진나라의 진(Chi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진시황은 여러 가지 제도를 새롭게 제정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문자의 통일'이다.

 

천하를 통일했을 당시,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다. 그 근본은 모두 은나라의 갑골문자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글자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은 폐지시켰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사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시황은 단순히 국토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당시 중국 전역은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나, 길이를 재는 단위 등이 약간씩 달랐다. 그래서 되나 말이 지역마다 달라서 이곳에서의 1말이 저곳에서의 1말보다 적을 경우가 많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바로 그 해에 한 홉(0.33㎡, 180ml)이라는 표준용기를 제작해,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편리하게 거래가 오가게 되고, 따라서 산업과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진의 화폐가 전국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진시황은 바퀴 폭도 통일했다. 통일되기 전의 대륙 각국은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제각기 달리했다. 즉 수레는 대부분 전차였는데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냈고 이것은 레일처럼 골을 만들었다. 알다시피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바퀴 폭을 다르게 해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 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진시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더 이상 적의 침입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퀴자국의 차이가 이제는 전국의 교통흐름을 제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도로를 만들고 바퀴의 폭을 통일시켰다.

 

통일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이 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匈奴族)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들을 증축 . 개축하도록 하는 임무를 몽염장군(蒙恬將軍)에게 맡겼다. 그래서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만리장성 요새(萬里長城要塞)를 구축했으며, 10여 년 만에 임조에서 요동으로 이르는 1만여 리의 대장정을 완성했다. 이 대공사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진시황은 건축광(建築狂)이었다. 그는 만리장성과 사치의 상징으로 악명 높은 아방궁(阿房宮) 등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만들기 위해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는 바람에 통일된 후에는 세금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의 불평과 원성이 자자할 정도였다.

 

당시 젊은이들은 나라에서 내린 엄명에 따라 부모형제나 처자와 헤어져 삭풍이 몰아치는 만리장성의 공사장으로 끌려갔다. 강제 노동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가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만리장성의 그늘에는 백성의 피와 눈물과 땀이 서려 있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이 묻혀 있다.

 

만리장성은 험준한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이 이어져 있는데, 그런 만리장성를 보고 있노라면 고대 중국인들의 축조기술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사실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은 진시황이 아니라 따로 있다고 한다. 진나라가 세워지기 전인 전국시대, 중국이 '7웅'이라는 대국 7개로 나누어져 있을 때 그들 나라가 각각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경선에 장성을 둘러쌓았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각국의 장성을 서로 연결해 보강한 것뿐이다.

 

만리장성의 지도상의 총 길이는 2,700km이나 실제 길이는 5,000km, 환산하면 1만 리가 조금 넘는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 들어간 돌이나 벽돌로 높이 5m, 두께 1m가 되는 벽을 다시 쌓는다면 지구를 한 바퀴나 돌고도 남으며, 높이 5m, 두께 35cm가 되는 길을 닦는다면 지구를 서너 바퀴나 돌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어마어마하다;

 

혹자들은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안 보인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무려 38만 4,400여 km. 달에 착륙했던 우주인들에 의하면 육안으로는 지구상의 그 어떤 인공 구조물(人工構造物)도 볼 수 없다고 한다. NASA 관계자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질문을 하는 탓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달에서 보는 지구는 지구에서 보는 달보다 지름이 3.7배 정도 더 큰 쟁반처럼 보인다.

 

또한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사상서(法家思想書)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도 소지할 수 없도록 했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들은 자유로운 학술토론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곧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 수거되어 잿더미로 변했다. 옛 서적에 대해 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나라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 이를 비판하는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진시황은 자신에 대해 안 좋은 비판을 하거나 진나라 고유의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싫어했다. 진시황은 주로 자신을 비방한다고 생각한 유생들이었다. 그래서 결국 진시황은 전국의 유생들을 붙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갱유사건(坑儒事件)이다.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승상인 이사는 나라를 36개의 군으로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이사는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면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 하여, 결국 사관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여러 학파인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몰수해 불태운 것이다.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马俑坑)은 그 구조가 하나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진시황의 묘는 전체 면적이 60여 만 평에 달하는 지하 4층의 거대한 궁전이다. 또한 묘역 안팎에 내성과 외성을 쌓았는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전체적으로 한자인 '돌아올 회(回)' 자 모양새를 나타낸다고 한다.

 

진시황의 지하무덤은, 천장에 하늘의 별과 달의 천문도를 보석으로 재현했으며 온갖 세상의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으며 수은 강이 흐른다고 <사기(史記)>에 저술되어 있다. 실제로 그 지역의 수은 함량치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게 탐지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사실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진시황릉(秦始皇陵)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진시황릉은 선서성의 옛 도읍지인 서안 부근에 있다. 얼핏 보면 거대한 산 같은 진시황릉은 진시황이 즉위하면서 착공에 들어가 50㎦에 달하는 부지와 각종 부장품(副葬品)을 마련하고 70만 명을 동원해 30년 동안이나 공사를 하였다. 1974년에 처음 발견된 후 시작된 진시황의 지하무덤 발굴 작업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무덤 안에는 거대한 지하궁이 건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마용의 발굴은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각국 정부의 수뇌, 외국의 원수들이 중국으로 몰려와 이 세기의 기적을 관람했으며 특히 프랑스의 총리 시라크는 병마용갱을 세계 제8대 불가사의라 칭하며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서 이집트에 가 보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병마용을 보지 않고서는 정말로 중국을 가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병마용갱(兵馬俑坑)전경

'세계 제 8대불가사의' 라 일컬어지는 병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의 명령으로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을 자세히 보면 한결 같이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 모양이다. 당시 유행하던 최고의 머리 스타일은 아니라고 한다. 정작 그런 머리 스타일을 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바로 전쟁시 적군이 머리채를 잡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머리 때문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면 너무 억울할 듯;

 

갱 안에서 도열하고 있는 진시황의 병사들

완벽주의자였던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 바닥재에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진시황릉의 바닥에는 중국 지도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중국을 흐르는 100여개의 강을 정밀하게 그려 넣은 수은으로 채운 후 기계장치를 이용해 실제의 강물처럼 흐르게 했다고 한다.

 

진시황릉 봉분에서 발견된 청동마차로, 수천 개의 부품이 마치 실물처럼 정교하게 조립되어 있다.

 

진시황은 행차 시 자신이 타고 있는 마차에 거대한 방울을 달아 멀리서도 자신의 행차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만이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를 만들어 그 길에 높은 담을 쳤다.

 

거기다 똑같은 모양의 마차를 동원해 어느 마차에 황제가 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했다니, 굳이 방울을 달 필요가 있었을까?

 

병마용들은 발굴 당시 모두 진짜 칼, 창, 쇠뇌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 쇠붙이 무기들은 2,0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화살촉과 칼 등에는 구리, 주석, 마그네슘, 니켈, 코발트 같은 성분들이 13가지나 섞여 있었으며, 특히 진시황의 것으로 추측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날이 정교해 감탄을 자아냈다.

 

갑옷 없이 장포를 입은 입사용은 발을 모로 하고 활을 거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1987년, 20여 명 가량의 앞을 보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중국의 병마용갱을 보러 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용갱의 웅장하고 신비스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박물관측은 특별히 그들에게만 병마용을 만져볼 수 있게 허용했고, 병마용을 만져 본 이들은 유물의 아름다움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진나라 때에는 투구가 없었다'는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돌갑옷과 돌투구가 1998년 진시황릉 남동쪽과 내외성 사이의 대형 배장갱 내에서 발견되었다. 돌조각에 하나하나 구멍을 내고 이어 만든 이 정교한 모양의 갑옷과 투구는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벌을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진나라는, 가혹한 강압 정치와 만리장성 . 아방궁 같은 대공사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이 황제가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멸망하게 된다. 통일한 지 겨우 14년 만의 일이었다.

 

타락과 환락의 극치, 아방궁

진시황이 지은 아방궁 앞에는 전국에서 몰수한 병기를 녹여 만든 거대한 시황제의 동상이 12개나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아방궁의 문은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자객(刺客)을 색출해 내기 위해 자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흉기를 품고 궁으로 들어오려던 자객들이 문에 딱 붙는 모습,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시황제는 12만 호의 부호를 전국에서 강제 이주시키고 70만 명의 죄수를 동원하여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을 건조시켰다. 동서로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의 아방궁은 무려 1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진 화려한 궁전이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강력한 키리스마와 추진력으로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 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것에 완벽을 추구하는 진시황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진시황은 서시에게 어린 소년 소녀 500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해동 봉래산)에 가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초와 약을 구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서시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신선이라 자칭하는 노생과 후생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불로장생약을 얻으려 했으니 그들 역시 찾지 못했다. 그래도 불로초를 찾기 위한 진시황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봉래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봉래산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고 불로초가 실은 영지나 산삼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바다 위에 산 하나만 홀로 서 있는 화산섬이라는 설로 지금도 제주도에는 진시황이 보낸 소년 소녀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믿거나 말거나;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세 신산(神山)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다. 이곳에서 자라는 나무열매를 따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을 시켜 삼신산을 찾아 불로초를 가져오게 했으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일컬었다.

 

영원히 살고자 했으나 결국 50세의 나이에 명을 달리하고 만 진시황. 그의 사망 원인은 그동안 그가 오래 살기 위해 찾아 먹은 각종 약들에 있다 하니 정말 아이러니컬하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먹고 얼굴에 바르기도 한 수은은, 소량 섭취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으나 결국 몸에 쌓여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액체 금속이다.

 

아무리 후궁이 많았던 중국의 황제라도 황후는 항상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중국역사에서 황후를 들이지 않은 황제가 딱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진시황이다. 평소 아무도 믿지 못하는 괴팍한 성격의 그는 후궁은 많이 두었으나 죽을 때까지 황후는 두지 않았으며, 부부가 합장을 한 다른 황제들과 달리 죽어서도 혼자 묻혔다.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고로 역대 황제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을 쓴 진나라의 시황제 이후로 총 245명의 황제가 군림했으며, 시황제 전에는 한나라의 우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주시대의 걸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75명의 왕이 있었다.

 

'중국이라는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말라. 중국이 잠에서 깨어나면 골치 아프게 된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중국의 잠재력을 몰라보고 무시하고 있을 때 오직 나폴레옹 황제만 이 중국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유럽도 중국처럼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고자 하는 야망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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