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道敎)
도교(道敎, 영어: Taoism, Daoism)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중국의 민족 종교로, 신선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음양 · 오행 · 복서 · 무축 · 참위 등을 더하고, 거기에 도가(道家)의 철학을 도입하고, 다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도 계통의 종교이다. 도교는 하나인 도(道)의 세 가지 모습인 옥청(玉清: 원시천존) · 상청(上清: 영보천존) · 태청(太清: 도덕천존)의 삼청(三清)을 최고신으로 하는 다신교이다. 경전으로는 도교 성전의 집성인 《도장(道藏)》이 있다. 도교의 신자를 도교인 또는 도교도라고 하며,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목표로 하는 무리라는 뜻에서 우류(羽流)라고 하기도 한다. 도사(道士)는 도교의 전문적 종교가이며 여성 도사는 여관(女冠)이라고 한다.
도교는 크게 도교 경전으로서의 《도장》, 도교 사원으로서의 도관, 도교의 성직자 또는 전문적인 종교인으로서 도사 · 여도사의 체제를 갖춘 교단 도교 또는 성립 도교와 이에서 벗어난 도교 단체 또는 도교 신앙을 통칭하는 민중 도교로 구분한다. 현세이익적인 면도 있지만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도교에 비해 민중 도교는 전적으로 현세이익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 또는 천사도의 창시자인 후한(25~220)시대의 장도릉(34~156)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북위(386~534)의 구겸지(365-448)로, 구겸지는 도교를 집대성한 사람 또는 최초의 교단 도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2]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인 황제와 도가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 사상 또는 황로교라고도 한다.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 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개설
도가와 도교는 사상과 신앙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도가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는 종교로서의 도교에서는 신선으로, 옥황상제에 버금가는 신격화가 이루어질 정도이다. 도가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주축으로 하나, 도교는 노자의 저서인 《도덕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경전화하였다. 중국의 민간 신앙으로서의 도교는 중국인의 신앙 체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즉 중국인은 어떤 종교를 믿든지 그 기본 신앙에는 도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교도 여러 가지 파가 있다. 그중에 천사도는 장씨가 교주를 세습하여 현재 대만에도 천사도의 마지막 교주가 생존하고 있다. 신선 · 연단 · 불로장생 · 옥황상제 등을 믿는다. 불교와 교류하면서 서로 강력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도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신선 사상에 중국의 민간 신앙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종교다. 흔히들 "유불선" 삼교라고는 말하지만 "유불도" 삼교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에서는 도교와 신선도를 흔히 같은 단어로 이해한다. 그 골자는 불로장생에 있으며, 의학 · 약학 · 화학 · 연금술(鍊金術)을 동반하고, 그 위에 신비적인 방술(方術)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진인(眞人) · 신인(神人) 또는 선인(仙人)이 되기를 원한다.
도교가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성리학처럼 배타주의나 편향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로움을 지녔기 때문이다. 민간신앙으로서의 도교는 현세의 이익을 전적으로 하여 농민 폭동과도 관련을 맺어 송나라 이후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보권(寶卷)》 《공과격(功過格)》 등의 책이 나타났다.
중국의 무술도 도교와 관련이 되어있다. 주로 도교 사원 내에서 또는 도교 고승들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훈련되었으며, 후에 평신도들에게 전파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양식에는 도교의 원리,철학 이미지등이 포함되어있다. 대표적으로 무당파의 무당권이 있다.
역사
용호산
후한(25-220) 말기에 성립된, 장도릉(34-156)을 개조로 하는 오두미도 또는 천사도가 도교의 원류이다. 장도릉의 자손은 장시성의 용호산(龍虎山)에서 정일교를 개교하였다. 서진(265-317)의 재상의 딸인 위화존(魏華存: 3세기말-4세기)은 모산파 또는 상청파를 열었다. 동진(317-420) 시대에 갈홍(283-c.343)은 《포박자》를 지어 일파를 열었다.
하지만 아직 민간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북위(386-534)의 구겸지(365-448)에 이르러 교단도교)로 확립되어 국가적 종교로 불교와 대립했다.[2] 양나라(502-557)의 도홍경(452-536)은 모산파를 대성하였다. 당(618-907) · 송(960-1279) 시대에는 조정의 지지를 얻어 도교가 성행하였다. 이후 도사들이 퇴폐풍조를 초래하여서 금나라(1115-1234) 때는 혁신 운동이 일어나 전진도(全眞道) · 태일도(太一道) · 진대도(眞大道)의 세 파가 발생하였다.
경전
도교의 경전으로는 불교의 대장경에 해당하는 도장(道藏)이 있다. 현재의 도장은 5,305권의 《정통도장》과 180권의 《속장》을 합하여 총 5,48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통도장》은 동현(洞玄) · 동진(洞眞) · 동신(洞神)의 "삼동(三洞)"과 태현(太玄) · 태평(太平) · 태청(太淸) · 정일(正一)의 "사보"로 구성된 삼동사보(三洞四輔: 세 개의 중심부과 네 개의 보완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2] 이러한 구성 체계는 당시에 중국의 한역(漢譯) 불교경전이 체계화되던 것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삼동(三洞)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성립되었고 사보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성립되었다.[2]
도교의 신
용을 타고 있는 세 신선:
E. T. C. 베르너, 《중국의 신화와 전설》, 1922
도교는 다신교이다. 도교의 최고신("天尊 · 천존")은 하나인 도(道)의 다른 모습인 옥청(玉清) · 상청(上清) · 태청(太清)의 삼청(三清 · Three Pure Ones)이다.[1] 옥청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은 영보천존 또는 태상도군, 태청은 도덕천존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불린다.[1] 하나인 도(道)가 삼청의 신 또는 신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일기화삼청(一炁化三清: 하나의 기운이 세 가지 맑음으로 나타나다)"이라고 한다.[1]
삼청 (三清 · Three Pure Ones)
원시천존 (元始天尊 · Yuanshi Tianzun)
태초의 시작으로서의 우주적인 존재
(Universal Lord of the Primordial Beginning)
영보천존 · 태상도군 (靈寶天尊 · 太上道君 · Lingbao Tianzun)
영험한 보석으로서의 우주적인 존재
(Universal Lord of the Numinous Treasure)
도덕천존 · 태상노군 (道德天尊 · 太上老君 · Daode Tianzun)
길과 덕으로서의 우주적인 존재
(Universal Lord of the Way and its Virtue)
사어 (四御 · Four Emperors)
옥황상제 · 옥황대제 (玉皇大帝 · Jade Emperor · Yu Huang)
중천자미북극대제 (中天紫微北極大帝 · Beiji Dadi)
구진상궁천황대제 (勾陳上宮天皇大帝 · Tianhuang Dadi)
후천황지기 (后土皇地祇 · Empress of Earth)
팔선 (八仙 · Eight Immortals)
종리권 (鍾離權 · Zhongli Quan)
이철괴 (李鐵拐 · Tie Guaili · Iron-Crutch Li)
한상자 (韓湘子 · Han Xiangzi)
조국구 (曹國舅 · Cao Guojiu · Royal Uncle Cao)
여동빈 (呂洞賓 · Lu Dongbin)
장국로 (張國老 · Zhang Guolao · Elder Zhang Guo)
남채하 (藍采和 · Lan Caihe)
하선고 (何仙姑 · He Xiangu · Immortal Woman He)
서왕모(西王母 · Xi Wangmu)
동방동극청화대제태을구고천존
서방태극천황대제
남방남극장생대제옥청진왕: 원시천존의 9번째 아들
북방북극중천자미대제
승천효법후토황지지
남방남극관음
동방숭은성제
3도10주선옹동화대제군
북방북극현령두모원군
중앙황극황각대선
금광성모
항아
탁탑천왕
나타
이랑진군
토지공
태산대제
뇌공
천령
교단 도교와 민중 도교
도교는 본래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중국의 자연 종교(自然宗敎)이다. 도교는 정령 숭배를 기반으로 하여 신선 사상(神仙思想)을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도가 역 음양오행 복서 참위 점성 등의 사상 및 이론과 무격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그 위에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떠 결합한,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편 수(壽: 장수) · 복(福: 오복) · 록(祿: 높은 벼슬)을 구하는 현세이익적인 자연 종교이다.
이 자연 종교로서의 도교는 후대에 종교 교단으로서의 체제와 조직을 갖추어 교단 도교(敎團道敎)가 되었다. 즉, 도교 경전으로서의 《도장(道藏)》, 도교 사원(寺院)으로서의 도관(道觀), 도교의 성직자 또는 전문적인 종교인으로서 도사(道士) · 여도사(女道士)의 체제를 갖추어 성립적(成立的) 종교 또는 교단적 종교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에 따라 도사들 간에 주장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많은 분파(分派)가 생겼다. 1910년 경에는 중국에서 140여 개의 도교 종파가 있었다. 이 종파 종교를 성립 도교(成立道敎) 또는 교단 도교(敎團道敎)라 부르고 이에서 벗어난 도교 및 그 집단을 민중 도교(民衆道敎)라고 부른다.
민중 도교는 매우 강한 주술성을 보이며, 고타마 붓다 · 공자 · 관음보살 · 예수 그리스도 · 무함마드 · 관우(關羽) · 토지신 등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을 토대로 형성된 보권(寶卷) 계통의 성격을 띤 종교이다. 민중 도교에 속하는 분파 또는 단체로는 무위교(無爲敎) · 원돈교(圓頓敎) · 홍양교(弘陽敎) · 선천교(先天敎) · 구궁도(九宮道) · 금단팔괘도(金丹八卦道) · 일관도(一貫道) 등이 있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현세이익적이다.
한국의 도교
삼국 시대
한반도로 도교가 전래된 첫 기록은 기원후 624년의 고구려(BC c.37-AD 668) 영류왕(재위 618-642) 7년 때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에서는 천존상(天尊像) · 도법(道法)과 함께 도사(道士)를 파견하였다. 파견된 도사는 노자(老子)의 도법을 강의하였는데 영류왕과 수천 명의 고구려인들이 강의를 들었다. 이듬해인 625년에는 고구려에서 학인들이 당나라로 파견되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왔다.
고구려의 도교와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643년과 650년의 기록이 있다. 643년의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2년에는 당시의 실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당나라에서 숙달(叔達)을 포함한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한 사찰에 이들 파견된 도사들이 거처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 사원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50년의 고구려 보장왕 9년에는 수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盤龍寺)의 승려 보덕(普德)이 고구려에서 국가적으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경시하여 불교가 쇠퇴하자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며 백제로 옮겨가 전주에 경복사(景福寺)를 세우고 열반종의 교의를 강론하였다.[3]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일시적으로 도교를 매우 숭상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융성했던 도교는 《삼국유사》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의 고려본기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오두미도였는데, 장도릉이 창시한 최초의 오두미도가 아니라 상당히 수정되고 발전된 형태의 것이었다.
신라(BC 57-AD 935)는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으므로 도교가 상당히 유행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術聖母)를 일명 선도성모(仙桃聖母)라 하여 후세에 여선(女仙)으로 숭배한 일이 있으며, 국가의 제사에 오악신(五岳神)을 받들어 어느 정도 도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는 기록은 있다. 신라 말기의 김가기(金可紀: ?~859) · 최치원(崔致遠: 857~?) 등은 도교 혹은 신선사상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었다.
고려
고려(918-1392)에 들어와서는 도교를 중시하는 송나라(960-1279)의 풍습이 조금씩 전래하다가 예종(재위 1105-1122) 때에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이 도사 두 명을 보내어 도법을 전하였고, 이에 고려에서는 개성(開城)의 북쪽에 복원관(福源觀)이라는 도관(道觀)을 세워 삼청상(三淸像)을 모시고 도사(道士)를 두었다. 그러나 도교는 국가 중심의 도교 의식에 그치고 일반 민중의 종교적 발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고, 성신(星辰)에 대한 신앙, 부적(符籍)의 사용, 경신(庚申)을 지키는 것 등이 대중화되었다. 도교에서 행하는 제사 및 기도 의식을 재초(齋醮)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정사색(淨事色)이란 마을이 있어서 여기에서 재초가 행해졌다.
조선
조선에서는 고려의 뒤를 이어 도교의 재초를 행였지만 복원관을 비롯한 여러 재초 거행 장소를 폐지하고 경복궁의 북쪽에 소격서(昭格署)를 한 군데만 두었다. 소격서에 태일전(太一殿) · 삼청전(三淸殿) 등을 세우고 천존(天尊) · 성군(星君) · 신장(神將) 등 수백위(數百位)를 모셔 놓고 때때로 재초를 거행하였다. 지금의 삼청동(三淸洞) · 성제정(星祭井) · 소격동(昭格洞) 등이 당시의 도교 유적이다. 조선에서 도교는 국가적으로는 그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단학(丹學)과 선풍(仙風) 및 도교에서 유래한 풍습이 전대(前代)에 비하여 많이 행해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나라의 군사들에게서 배운 관우(關羽) 숭배 등이 유행하였다.
같이 보기
종교
불교
도장
도안: 도장의 성립에 영향을 끼친 불교 승려
손자병법 - 도교철학에 기초한 병법서 VS 오자병법 - 유교철학에 기초한 병법서
삼성훈경
유교,도교,불교 ‘삼교사상’
“모든 유(有)는 다 무(無)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때가 곧 만물의 시작으로서 형체도 있고 이름도 있는 때에 이르러 그것을 생장시킨다. 도(道)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이 만물을 형성한다는 것은 만물이 도에 근거해서 시작되고 형성되지만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노자》 제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에 대한 왕필주)
삼교(三敎)는, 고대 중국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를 아울러 가리키던 용어이며 이 세 종교사상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각각 공자·석가모니·노자이다.
공자, 노자, 석가는 모두 성인이시며 때를 따르고,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길을 달리 했을 뿐, 안팎으로 서로 도와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
다만 유교와 도교는 권교로서 결국은 불교만이 진리라고 하였다. 삼교의 같음과 다름은, 근기가 큰 사람이 쓴다면 같은 것이고 약한 자가 쓴다면 다른 것이다. 유교·불교·도교사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근기의 차별에 따라 셋으로 나뉘었으니 같고 다름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에 따른 것이지 교에 차이가 있는 새로운 차원의 관점이다.
고대부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도교와 유교.불교가 삼교(三敎)로 일컬어지며 중시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도교 제사를 많이 지낸 고려시대에는 개인이 도교적 지식을 갖추고 신선처럼 생활하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졌다. 도교의 지위가 크게 낮아진 조선시대에도 삼교의 어우러짐을 형상화한 문학이나 회화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런하 하면 저명한 유학자들이 『도덕경』이나 『장자』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도교는 불교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도교의 조직체계나 의례는 불교의 그것을 본뜬 것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신들이 불교의 수호신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도교는 19세기 말에 동학이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도교(道敎)는 유교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토착종이다. 중국 전통 신선사상과 토착신앙에서 유래하여 후한과 남북조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경전과 교리를 갖춘 종교로서 모습을 갖추었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과 일맥상통한 점이 많아 쉽게 받아들여졌다.
도교는 종교로서 모습을 갖추던 때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는 등 다른 종교와 상호 형향을 주고 받으며 춘추전국시대 노자와 장자의 영향을 받아 후한대에 처음 생겨난 도교가 도가사상이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
도교는 하늘과 땅을 숭배한 종교로 많은 신들을 존재하며 시대에 따라 생기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초기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 부르며 최고의 신으로 여겨졌다. 남북조시대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도교의 신들로 체계를 갖추게 되고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숭배대상인 해와달, 별, 땅의 신, 물의 신 등이 도교의 신으로 자리잡았다.
도교가 종교적인 체계를 완비한 것은 4세기 이후이다. 고대 중국의 《노자》, 《장자》, 《추연》, 《여씨춘추》에서 《회남자》 및 점성가, 의방가, 참위가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간들의 사유의 성과물을 흡수했으며, 아울러 도가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이 합일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특히 초나라에 유전되어 온 여러 가지 신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개조, 안배하여 법도가 엄정하고 명목이 다양한 신의 계보를 만들었다. 또한 이를 앞에서 서술한 철리적 요소와 상호 결합시켜 종교적 형태로 전화시켰다. 그리고 고대 중국, 특히 초나라 문화권에서 성행하던 산천, 일월성신, 귀신들에 대한 제사의식을 형식으로 규정화시키고 무의의 주술과 고약 등을 통한 의술 행위, 민간에서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이나 부적으로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고 귀신을 몰아내는 방식등을 법술로 발전시켰다. 당시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흡수하고, 도인 등의 건신술을 상호 결합하는 한편 도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유교로 대표되는 인문주의의 이성적 태도와 다른 비이성주의적 일면, 곧 강력한 생존 욕망과 향락에 대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도교의 중요한 요소인 신선사상 등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으며, 유교 국가적인 차원의 의식적인 도교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수련하거나 도가사상을 이해려는 측면의 연구와 생활속의 민간신앙으로서 도교는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유교와 도교는 종교로서의 측면과 학문으로서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우리나라는 사회·문화적으로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대체로 학문적 연구와 적용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종교의 범주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유교와 도교는 종교냐, 순수학문이냐 하는 기로에 선 덕분에 ‘종교철학’을 뛰어넘는 동양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신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서양 종교와 비교해 본다면, 유교와 도교는 종교이면서 학문에 적용할 수 있는 유연함으로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교의 대표 인물은 공자, 시기상 노자가 공자보다 늦게 등장했는데 유교의 단점을 비판하며 새롭게 등장한 사상이 바로 도교이다. 먼저 유교는 당시 사회적으로 아주 큰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종교철학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그러한 유교의 대표 사상은 ‘인(仁)’이다.
공자의 인(仁)사상은 인간의 도리 즉, 규범의 근거를 천명(초월적 존재, 신)이 아닌,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인간 마음속에 자리한 보편적인 심미성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인간 마음에는 군자에 대한 존경심, 타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역지사지할 줄 아는 이성의 능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기질을 내세워, 유교는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유교는 이러한 인간성을 토대로 보편적 질서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론의 핵심은 극기복례와 인도주의, 그리고 성인이다. 극기복례는,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기심을 버리고 사회적 규범을 지켜 유교의 핵심사상인 ‘인(仁)’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 극기복례를 통해 자신의 욕구와 예를 일치하는 경지에 도달해 군자의 인간상을 완성한 인간을 성인이라 부룬다. 유교사상이 소망하는 조화로운 세계인 ‘보편적 질서가 확립된 사회’는 많은 사람이 극기복례한 성인군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각자의 신분과 위치에 맞는 삶(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을 살아가는 세상 즉, 인도주의가 꽃피운 세상을 의미한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위와 같은 조화의 세계를 역설하는 한편, ‘종심소욕불유구(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말을 통해 극기복례, 성인, 인도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공자는 인간은 자신의 신분을 천명으로 생각하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의 ‘정명’을 통해 인도에 해당하는 개념을 강조했다. 이는 자신답게 살면서 사회를 먼저 위하는 마음을 갈고닦으면 결국 나의 욕구가 사회의 욕구와 같아져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유교사상이 만연한 때, 도교는 당당히 유교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으며 등장한다.
유교나 도교는 많은 면에서 다르지만, 각자의 방법을 통해 추구하는 이상향에 다가가며, 올바른 마음을 갈고닦고자 하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불교와 같이, 동아시아의 종교철학은 모두 뛰어난 동양학문으로 자리 잡은 반면 종교로 인한 분쟁은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교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은, 불교는 사후세계와 부처라는 신을 기본으로한 "종교" 이며 유교는 인간사의 이치와 사회적 규범을 설법한 "사상" 이다.
불교의 등장 배경은 기원전 인도의 신분제도와 그 제도의 기본인 브라만교의 타락으로 평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워 짐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때에 석가모니는 인간세상의 삶을 고통의 바다라 비유하고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을 통한 부처가 되길 가르쳤다.
불교의 사후세계에 대한 주요 사상은 윤회사상인데, 이것은 다른말로 전생과 후생을 나누는 것이다. 불교와 도교는 유교와 함께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전통 사상 문화의 주류를 형성하여 소위 유불도 삼교라고 지칭된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 문화적 특징을 또 달리 표현한다면, 심리(心理)와 생리(生理)라는 범주로서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불교가 심리적 종교요 철학이라면 도교는 생리적 종교요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철학이 중관과 함께 유식(唯識)이라는 일종의 심리 철학으로 발전한 반면, 도교는 기(氣)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와 도교를 동아시아 전통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관점에서도 대비할 수 있다.
예컨대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 동아시아 전통 과학 사상은 거의 도교적 배경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도교와 불교는 종교와 현학적 사유라는 공통된 범주의 사상 문화이기 때문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먼저 도교와의 융합을 이룬다. 아니 융합이라기보다는 불교가 도교에 의지해서 자신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토양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 문화는 유, 불, 도 삼교의 상호 교섭과 보완에 기초해서 형성되었다. 삼교는 각각의 사상적 정체성의 차이로 말미암아 충돌하고 갈등하였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하여 각각의 약점을 보완함으로써 자신의 사상내용을 충실하게 발전시켰다. 도교와 불교는 상호 교섭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우리나라가 불교, 유교, 그리고 도교에 대해 학문적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 종교융합이 우리나라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그 모든 종교분쟁에 무관심할 타당성은 없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종교철학 공부는 인간이 지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종교의 참의미도 이해하는 인류의 평화로 나타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사상 체계가 역사를 초월하여 보존되기 위해서는 그 사상 자체의 정체성이 확고해야 하며, 아울러 다른 사상과의 융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사상은 시대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한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은 바로 그 시대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시대별 키워드가 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사상의 출현은 반드시 그 당시 모든 사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하게 되며 종교사상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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