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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찌르는 암봉, 그 곁에 걸친 운무… 신이 빚은 무릉도원에 취하다[박경일기자의 여행]

一字師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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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황석채(黃石寨)’ 주변의 압도적인 경관. ‘금편계(金鞭溪)’란 계곡을 끼고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 이 중 가장 높은 봉우리 ‘금편암(金鞭岩)’에는 진시황이 던져둔 관음보살 머리카락으로 만든 채찍이 봉우리로 변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한국인의 스테디셀러 여행지 중국 ‘장가계’ (上)

비밀의 절경, 1982년 중국 첫 ‘국가삼림공원’ 지정 후 입소문
수십년간 효도관광·패키지 상품으로 인식돼 과소평가 됐지만
무협지 나올법한 경관·즐길 거리 많아 남녀노소 여행하기 제격

바위기둥 가득한 ‘무릉원구’… 황석채·원가계 등 한편의 산수화
유방 도와 漢나라 세운 장량, 토사구팽 피하려고 숨었다는 說도
세계 최장 케이블카로 오르는 천문산엔 ‘하늘로 뚫린 거대한 門’

장가계(중국)=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장가계는 왜 노인들이 차지했나

중국 호남성(湖南省·후난성) 서북쪽의 ‘장가계(張家界·장자제)’는 수십 년째 한국의 중년 이상이 과점(寡占)하고 있는 여행지다. 해외 단체여행의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 장가계는 중년 이상 여행자의 여행목적지로 견줄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20∼30대의 과점현상은 흔한 일이지만, 중년 혹은 노년이 과점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장가계의 한국 중년 이상의 여행자 과점현상은 이례적이다. 이 대목에서 드는 두 가지 의문. ‘장가계는 왜, 노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일까.’ ‘노인 세대 과점 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두 개의 질문을 안고 장가계에 갔다.

다녀와서 느낀 건, 장가계가 턱없이 ‘과소평가’된 여행지라는 것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한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가는 곳마다 입이 딱 벌어질 만한 다채로운 볼거리가 이어지는 곳. 장가계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탄성이 나오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여행지였다. 이곳만큼 세대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연령층이 좋아할 만한 여행지가 또 있을까 싶다. 과도한 쇼핑과 바가지 옵션이 난무하는 패키지 여행상품이 장가계를 가리고 있어서 다른 세대들에게는 장가계에 대한 접점도, 정보도 없었을 따름이다.

다음은 장가계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뛰어난 경관을 품고 있는지와 수십 년 넘게 낡은 효도관광 목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한 얘기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패키지 여행을 택하지 않고도 장가계를 잘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요령을 곁들였다. 장가계 일대는 경관이 워낙 다채롭고 해야 할 말도 많아 기사는 두 번으로 나눠 쓰기로 한다. 먼저 쓰는 얘기는 천문산(天門山·톈먼산)과 무릉원구(武陵源區) 등 ‘장가계 안쪽’에 대한 것이고, 다음 주에 이어 쓰는 건 주변과 봉황고성, 부용진 등 ‘장가계 바깥’의 명소를 둘러본 얘기다.

# 장가계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장가계는 유명한 관광지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어떤 곳인지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장가계는 다른 여행지처럼 로망이나 판타지가 없다. 일찌감치 노인들이 효도관광이나 가는 그렇고 그런 여행지쯤으로 인식된 탓이다. 장가계는 어떤 곳일까. ‘원가계(袁家界)’는 또 뭐고, 아! ‘양가계(楊家界)’도 있다던데…. 그리고 천문산은 또 어디 있는 걸까. 장가계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여행자들이 관심이 없어서다. 그건 전적으로 편견 때문이다.

지금부터 장가계를 하나하나 뜯어보자. 우선 ‘장가계’란 지명부터. 장가계는 본래 무릉산맥 깊숙한 첩첩산중을 부르는 지명에서 왔다. 이름을 풀면 ‘장(張)씨 집안(家)이 사는 경계(界)’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 깊은 산중에 살았다는 장 씨는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유력한 건 이 지역을 지켰던 명나라 대의 뛰어난 장수 장만총(張萬聰)이다. 그의 공적을 기려 황실이 무릉산맥 일대의 땅을 하사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그곳에 정착했다.

장가계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뒤다. 장만총의 6대손이 공직에 임명돼 산중에 관청을 열자 그곳이 장 씨 가문의 세습영토로 바깥에 알려지면서 장가계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것. 그 뒤로 장 씨 가문은 20세기 초반까지 17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다. 쭉 내려오던 장가계란 지명은 1949년 신중국 성립과 함께 행정지명이 도입되면서 지워졌다. 대신 장가계는 작은 마을 행정구역 명인 ‘대용현(大庸縣)’이 됐고, 뒤에 ‘대용시(大庸市)’가 됐다.

장가계란 이름을 되찾은 건 500여 년만인 1958년. 중국 정부는 장 씨 일가가 살았던 지역에 국유 산림농장을 설립하고, 농장 이름을 ‘장가계’로 결정했다. 이 농장이 1982년 중국의 첫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장가계란 이름이 외부에 널리 알려졌다. 다시 불려 나온 장가계는, 명성을 등에 업고 도시 지명이 됐다. 1994년 대용시와 인근 현(縣) 지역을 통합해 우리로 치면 도(道) 단위쯤 되는, 인구 150만 명의 도시를 출범시키면서 지명을 ‘장가계시’로 정했던 것. ‘대용’보다는 ‘장가계’란 지명이 관광객 대상 홍보에 훨씬 더 적합했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장가계가 본격적으로 관광 투자를 확대하면서 관광명소로 떠오른 것도 이때 무렵이다.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기이한 자연에다 잔도(棧道)를 놓고,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을 설치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례 없는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장가계를 찾는 최대의 손님은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장가계를 방문하는 전체 관광객의 80%를 차지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 장가계에 가면 헷갈리는 이유

장가계에 가면 헷갈린다. 도대체 어디가 장가계인지 알기 어렵다. 장가계가 충남도 땅에다 대구를 합한 것과 맞먹는 거대한 면적을 가진 시(市)의 행정지명이면서,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의 이름인 것과 동시에, 장 씨 일가가 살았다던 무릉산맥의 깊은 산중의 명승지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해서 그렇다. 도시의 행정지명과 삼림공원의 명칭, 깊은 산의 명승을 구분하지 않고 다 장가계라 부르니, 헷갈릴 수밖에….

‘장가계’라고 하면 따로 그런 이름의 명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장가계란 이름을 가진 특정한 장소는 없다. 설악산이 ‘설악’이란 산이 아니라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산의 무리를 부르는 이름이고, 지리산이 천왕봉과 그 주변의 산과 능선을 모두 일컫는 말인 것과 비슷하다. 장가계는 구체적인 장소가 있는 게 아니고, 무릉산맥 일대의 명승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장가계는 개발된 역사가 짧다. 본격적으로 관광지로 개발된 건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의 내력을 가진 다른 중국의 관광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국의 이름난 관광 명소는 보통 이렇게 만들어진다. 가장 먼저 내로라하는 ‘인플루언서’가 그곳을 다녀가는 게 시작이다. 지금이야 인플루언서는 인기 유튜버들이지만, 1000년 전쯤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플루언서는 단연 시인이었다. 동영상도, 사진도 없던 시절, 이태백과 두보 같은 시인이 천하의 절경을 찾아가 그걸 시로 읊으면, 그를 흠모하는 이들이 순례하듯 뒤따라 와서 시를 지어 보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로라하는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이 지나간 자리는 명소가 되고, 그들의 사연과 시는 그대로 역사가 되는 게 순서였다.

# 산이 다 이런 줄 알았다고?

경관은 더없이 우람하고 웅장하지만, 역사와 기록의 측면에서 보면 장가계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풍경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거기 걸어놓을 이렇다 할 시도, 문장도, 기록도 없다. 옛 시인들이 다녀간 흔적도 없고, 옛 그림 한 장 없다. 왜 그럴까. 한번 와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한 풍경이어서 누구든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을 법한데….

이유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장가계 일대가 내륙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험준한 산악지역이어서 외지인들이 들어올 엄두조차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시인, 그러니까 인플루언서들은 내륙으로 걸어 들어가기보다는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더 멀리 다니며 풍류를 즐기고 여행했다.

밖에서 들어오지 못한다면 여기 사람들이 나가서 전하면 될 일. 장가계 사람들은 왜, 산중에 이런 기막힌 절경이 있다고 바깥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중국인 가이드가 설명해줬다. “이곳 사람들은 오랫동안 세상의 산들이 다 이렇게 생긴 줄 알았답니다. 이쯤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선계(仙界)를 그린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장가계 풍경도, 여기 사는 이들에게 그저 일상일 따름이라는 게 새삼스럽다.

1979년의 일이니 한참 늦긴 했지만, 장가계의 명승을 외부에 알린 건 역시 화가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중국 화가 중 한 명인 오관중(吳冠中·우관중). 장가계나 호남성 출신은 아니고, 강소성(江蘇省·장쑤성) 사람인데, 장가계를 현대적인 필치로 그림에 담아 미술전에 출품했다. 다들 그림 속 풍경을 비현실적인 상상이라고 여기자, 그는 심사위원을 장가계로 초청해 그림 속 풍경이 실제로 있음을 보여줬다. 장가계의 절경이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장가계 국가삼림공원 한가운데에 오관중 동상을 세워둔 건, 그가 지금의 장가계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 장가계 관광 중심, 천문산·무릉원구

장가계시 관광의 주된 목적지는, 크게 나누면 두 덩어리다. 하나는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천문산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바위기둥으로 가득한 무릉원구다. 맞다. ‘무릉도원’의 그 ‘무릉’이다. 무릉원구는 장가계 시내에서 차로 40분쯤 거리인 도심 서북쪽에 있는데, 황석채(黃石寨·황쉬자이), 원가계, 양가계 등 무협지 속 풍경 같은 절경이 죄다 여기에 몰려 있다.

천문산과 무릉원구 중에서 먼저 무릉원구로 간다. 무릉원구의 장가계 국가삼림공원 중심에 황석채가 있다. 장가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해 관광객을 받아들인 구역이다. 명나라 때의 장 씨 가문이 대대로 은거했던 장가계가 실제로 어디였는지를 찾는다면 국가삼림공원 한가운데 있는 여기 황석채 인근이 아닐까.

황석채에 오른 날,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가계는 연중 비가 잦다. 비 내리는 날이 1년에 200일 정도란다. 맑은 날이 관광에 최상인 건 물론이지만, 비가 와도 그리 나쁘지 않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운치가 있어서다.

황석채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산 아래 계곡 ‘금편계(金鞭溪)’를 먼저 들러 땅에서 황석채를 봤다. 우뚝 일어선 바위기둥을 아래에서 보는 걷는 길이다. 계곡 물길 옆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봉우리가 구름 속에서 솟았고, 계곡과 숲은 비로 촉촉하게 젖었다.

빗속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황석채에 오르면 위에서 기기묘묘하게 솟은 바위기둥을 감상할 수 있다. 능선 곳곳에 전망대가 있는데, 어디에 서든 발아래로 입이 딱 벌어질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곳곳에서 치솟은 바위기둥은 마치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죽순처럼 보였다. 늘어선 바위기둥이 다섯 손가락을 닮은 ‘오지봉(五指峰)’에도, 집채만 한 암봉이 열린 바위 문 형상을 한 ‘쌍문영빈(雙門迎賓)’에도 운무가 걸렸다. 비 오는 날이 선사한 선물 같은 풍경이다.

# 믿기지 않는 풍경이 그곳에 있다

장가계 곳곳에는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가져다가 덧댄 흔적이 있다. 부족한 역사와 인문을, 꾸민 이야기로나마 메꾸고자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장가계에 은거했던 이가, 2000여 년 전 한나라 때 인물인 ‘장량(張良)’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장량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책사로 꼽힌다.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다시 세운 개국공신이었지만, 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돌연 물러나 은거했다.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무수한 공을 세운 한신을, 반란죄로 몰아 비참하게 죽인 유방. 유방의 칼끝이 언제 자기로 향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책사 중의 책사였던 장량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자신의 퇴장까지도 전략적이었던 그는 천생 책략가였다. 후세 사람들은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과감하게 물러났던 그의 판단을, 멈춤의 절제로 해석한다. 홀연히 물러서는 것으로 그는 ‘영웅적 전략가’ 반열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 뒤끝에 뜬금없이 ‘그가 물러나 숨은 곳이 장가계’라는 근거 없어 보이는 스토리가 붙여졌다. 장량은 사당이 있는, 중국 섬서성(陝西省·산시성)의 자백산(紫栢山·쯔보산)에 은거하고 신선처럼 살며 말년을 보냈다는 게 정설.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 자백산은, 장가계에서 북쪽으로 자그마치 1000㎞ 떨어진 곳에 있다.

장가계에 덧붙여진 장량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황석채의 지명유래까지 이어진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장량에게 병법서를 건네줘 전략가로 거듭나게 한 ‘황석공(黃石公)’ 이야기가 나온다. 장량의 스승격인 황석공이 여기 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황석채’다.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장량의 경우처럼 황석공 얘기도 믿을 만한 건 아니다.

무릉원구에는 황석채 말고도 두 곳의 명승, 원가계와 양가계가 있다. 장가계와 작명 방식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 두 곳의 지명은 장가계의 명성에 힘입어 훗날 지어진 것이란 혐의가 짙다. 장가계와 마찬가지로 원가계는 ‘원(袁)씨 집안의 영토’를, 양가계는 ‘양(楊)씨 집안의 영토’를 뜻한다.

원가계는 당나라 말 농민봉기인 ‘황소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원 씨 성을 가진 황소의 부하가 심산유곡을 찾아 숨어들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름 붙여진 땅. 양가계의 지명유래는 이보다 더 흐릿하다.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송나라를 지켰던 양 씨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작자 미상의 소설 속 주인공의 영웅적 서사에 기대 붙여진 지명이다.

그게 만든 얘기거나 터무니없는 허풍인들 무슨 상관일까. 어디든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펼쳐지는 풍경이 이야기를 완벽하게 압도하니, 그저 그 풍경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바쁘다. 원가계에는 단양의 석문을 열 배쯤 뻥튀기해놓은 듯한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가 있고, 늘어선 바위봉우리가 정신을 잃을 만큼 아름다워 ‘미혼대(迷魂臺)’라 부르는 명소도 있다. 원가계를 대표하는 볼거리는 거대한 바위에 등을 대고서 356m를 오르내리는 백룡 엘리베이터, 그리고 석영사암으로 이뤄진 기둥 같은 바위 봉우리들이 숲을 이룬 후화원(后花園)이다. 가장 나중에 개발된 양가계는 기기묘묘한 협곡과 기암괴석의 풍경이 힘차고 거칠어서 또 다른 맛을 준다.

거기가 황석채든, 원가계든, 양가계든, 분명한 건 어디서나 탄성이 한숨처럼 저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소싯적 무협지를 보며 상상했거나, 먹을 찍어 기기묘묘하게 그려낸 산수화를 보며 감탄했던 ‘신선의 산세’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있으니, 왜 안 그럴까.

천문산(天門山) 정상 아래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다. 하늘로 이어지는 문을 뜻하는 ‘천문동(天門洞)’이다. 바위를 뚫어 놓은 에스컬레이터로 오를 수 있는데도, 기기묘묘한 천문산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걸어서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다.



# 하늘로 뚫린 구멍…천문산

이제 무릉원구와 더불어 장가계 관광을 이루는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인 천문산으로 간다. 천문산은 이름처럼 ‘하늘(天)’에 ‘문(門)’이 있는 산이다.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해발 1528m의 산정 아래 난데없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구멍이 만들어진 건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때인 263년. 천둥 번개가 치는 가운데 바위 절벽이 무너지면서 산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는 기이한 일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천문산은 무릉원구의 다른 풍경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무릉원구의 원가계나 양가계 경관이 기이하고 화려하다면, 천문산은 선이 굵고 웅장한 느낌이다. 천문산은 장가계시 도심 한복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올라간다. 운행 거리는 편도 7.45㎞.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까지는 편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케이블카를 타면 멀리 천문산의 거대한 실루엣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석회암으로 이뤄진 산의 첫인상이 기이하다. 천문산에서 압도적인 건 산정에 뚫린 높이 131m, 폭 57m의 거대한 구멍인 천문동(天門洞)이다. 보통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 가까이까지 오른 뒤 깎아지른 벼랑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은 잔도를 걷다가, 산속 바위를 뚫어서 놓은 에스컬레이터 7개를 갈아타고 천문동까지 내려가는 게 순서. 천문동을 둘러 보고 또다시 5개의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내려간 뒤에 케이블카를 타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천문산 정상부근 까마득한 벼랑에다 매달듯이 놓은 잔도.



천문산에서 감탄하게 되는 건 산악 경관의 거대한 스케일. 웅장한 자연 못지않게 곳곳에 매달아 놓은 케이블카부터, 산을 타고 오르는 아흔아홉 구비길, 바위 동굴을 뚫어서 만든 에스컬레이터, 투명유리로 바닥을 마감한 잔도처럼 인간이 만든 것들에도 눈이 간다. 천문산의 자연을 마치 인공건축물 다루듯 거침없이 이런저런 편의 시설을 다 들여놓았다. 무릉원구와 마찬가지로 천문산도 인문과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약점을 편의와 ‘새로 만든 것들’로 메운다는 느낌이다.

관광 인프라뿐만 아니다. 천문산은 관광객 상대의 스토리텔링도 새롭다. 장가계 공항 곳곳에 걸어놓은 사진 중에 편대를 이룬 비행기 세 대가 천문산 구멍을 통과하거나, 윙슈트를 입은 모험가가 산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여러 장이다. 전통적인 산악관광이나 등산 홍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다. 장가계는 마치 금기가 없는 듯하다. 인프라 건설도 그렇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홍보도 그렇다. 장가계가 낡은 듯하면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여행지인 이유다.

여기까지가 장가계 안쪽에서 만났던 것들에 대한 얘기다. 다음 주에는 장가계 바깥의 매력적인 명소 이야기와 함께, 장가계 패키지 여행의 장단점, 글로벌 온라인여행플랫폼을 활용해 장가계를 개별 여행하는 방법 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 장가계가 바다였다?

장가계의 경관 중에서 가장 기이한 건 거대한 죽순처럼 삐죽삐죽 솟은 3000개나 된다는 바위기둥이다. 이런 기둥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잘 믿기지 않지만, 장가계 일대는 3억8000만 년 전에는 바다였다. 1억 년쯤을 주기로 융기와 침강을 거듭하면서 장가계는 바다→육지→바다→육지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마지막 육지가 되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조산(造山)운동으로 거대한 산군(山群)이 됐다.

하늘 찌르는 암봉, 그 곁에 걸친 운무… 신이 빚은 무릉도원에 취하다[박경일기자의 여행]

 

하늘 찌르는 암봉, 그 곁에 걸친 운무… 신이 빚은 무릉도원에 취하다[박경일기자의 여행]

■ 박경일기자의 여행 - 한국인의 스테디셀러 여행지 중국 ‘장가계’ (上)비밀의 절경, 1982년 중국 첫 ‘국가삼림공원’ 지정 후 입소문수십년간 효도관광·패키지 상품으로 인식돼 과소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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