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이지李贄-분서焚書 배반자 세 사람三叛記

一字師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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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贄-분서焚書 배반자 세 사람三叛記

 
 

배반자 세 사람三叛記[1]

때는 중복(中伏)이라, 한낮에는 괴롭도록 덥더니, 밤에는 그런대로 시원하다. 호수에 어느덧 물이 차오르고, 보름달이 마악 올라오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 객이 찾아와 함께 지내니, 이것이 바로 노자가 ‘恥目合’ 했던 때이다.

 

양반(楊胖)은 평소에 꾸벅꾸벅 잘 조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밤에는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하고, 그렇게 좋은 일도 없는데 빙그레 웃으며, 나비가 장주(莊周)의 꿈을 꾼 듯 놀라고,[2] 철저(鐵杵)가 광(廣)을 먹은 것처럼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화상(和尙)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네는 왜 그리 웃는가?”라고 묻자, “지금 생각하니 세 배반자가 있어서, 전기(傳記)를 좀 쓰려는데, 잘 되지 않아서 웃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세 배반자란 누구이며 전기는 또 어떻게 쓰려고 하는지 물었다.

 

양반이 말했다. “양도(楊道)는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다녔습니다. 지금 나이 스물다섯인데, 내가 아직 공명(功名)도 이루지 못하고 나이 또한 많은 것을 보고, 아무 까닭없이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배반자입니다. 회희(懷喜)는 본래 양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는데, 다행히 ‘용호(龍湖)의 중’[3]을 만나 삭발하여, 결국 그 중을 스승으로 모시고 심(深)을 조사(祖師)로 모셨습니다. 심(深)은 회희가 밑에 들어온 이후, 동서남북으로 이리저리 다닐 때는 항상 그와 같이 다니면서, 음식이든 의복이든 모두 회희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회희는 하루 아침에 (조사를) 버리고 떠나며, 도시에 들어가 문을 닫고 들어앉아 경(經)이나 읽겠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도시는 시끄럽고 복잡한데, 어떻게 문을 닫고 들어앉을 곳이 되겠습니까? 이는 분명히 조사를 등진 것인데, 도리어 ‘조사는 이(李) 어른을 등지고 황백(黃柏)으로 가도 되고, 나는 조사를 등지고 도시에서 문을 닫고 들어앉으면 안된단 말이냐?’고 떠들고 다닙니다. 조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턱을 비비며 여러 차례 간곡히 만류해도 돌아보지 않으니, 이것이 두번째[4] 배반자입니다.” 나는 또 세번째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기만 하는 것이, 아마도 조사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 때 어목자(魚目子)⋅동방생(東方生)⋅묘유객(卯酉客) 등이 함께 자리에 있었다.

어목자가 “비록 그들이 세 배반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중이 다른 점은 없는가?”라고 묻자, 동방생이 “세 사람은 모두 죽어 마땅한데, 무슨 경중이 있겠나? 세상에서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와도 비교할 수 없다. 이적이나 금수는 그래도 오히려 의리를 지키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미 배반자라고 지목했으면 일체의 경중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어목자가 말했다. “심의 죄는 더 이상 밝힐 필요도 없이 분명히 정해졌네만, 양도의 경우는 회희가 조사의 은혜를 받아 오랫동안 부양을 받은 것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만약 심이 한 것의 만분의 일 만큼이라도 양반이 양도를 대했다면, 양도 역시 필시 죽음으로 지키면 지켰지, 양반을 배반하고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비록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요컨대 평소에 오간 정이 두터우냐 엷은가에 응당 차이가 있는 것이고, 하물며 양도는 영리하여, 오히려 회희보다 뛰어난 바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품을 논하자면 양도가 제일 위요, 회희가 중간이요, 심이 가장 아래이고, 법대로 하는 것을 논하자면 조사가 최고형을 받아야 하고, 회희가 그 다음이요, 양도가 또한 그 다음이다. 이는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동방생은 끝내 어목자의 설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고, 따라서 어목자도 끊임없이 그와 반론을 주고 받았다.

동방생이 말했다. “회희가 떠나는 것을 조사가 마음아파한 것이 어찌 진실로 회희가 총명하여 함께 도를 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아파한 것이겠는가? 또는 어찌 회희의 의지와 기개가 과연 평범한 중과 달랐기 때문에 마음아파한 것이겠는가? 또는 어찌 인품과 기골이 정말 도를 전수하는 그 큰 일을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회희도 양도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조사로서는 단지 회희가 음식으로 자기를 봉양할 수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긴 것이요, 잠자리의 베개와 방석을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함으로써 자기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긴 것이다. 조사는 회희가 있으면 자기에게 이로움이 있기 때문에 회희가 떠나는 것을 마음아파한 것이다. 이는 자기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떠나기 때문에 그 아픔을 받아들인 것이다. 보답하고 베풀던 관계가 때가 되니 이제 끝나버려 남은 것이 없으니, 마치 일꾼을 고용했다가 일이 끝난 것과 같을 뿐이다. 어찌 양도와 같은 부류에 넣지 않을 수 있는가?”

 

두 사람의 논쟁이 결말이 나지 않고, 양반 또한 묵묵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묘유객이 옆에서 칼을 쥐고 일어나 말했다.

“세 사람은 모두 아직 죽으면 안되고, 오직 늙은 화상이 죽어야 한다. 어서 빨리 이 늙은이를 죽여서 천하의 태평을 꾀하는 것이 좋겠다! 사실 원래 아무 의지도 기개도 없었던 자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분양(汾陽)에 견주고 포대(布袋)에 견주었으니 말이다. 큰 뜻이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눈이 없는 것이요, 큰 뜻이 없는데 큰 뜻이 있는 자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도 역시 눈이 없는 것이다. 이는 죽여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의 의지와 기개를 키우겠다고 하다가 자기의 위풍을 없앴으니, 당장 죽이지 않고 또 무얼 기다린단 말인가!”

 

칼을 쥐고 곧장 화상에게 다가갔다. 화상은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그야말로 정말 옳은 말씀이오. 그야말로 정말 옳은 말씀이오. 그저 이 머리가 몸에 붙어 있도록 한 번만 살려주기를 애걸하나니, 머리 없는 귀신일랑 되지 않게 해주오!”

아아! 이전에는 눈이 없더니 이제는 또 머리가 없게 되었구나! 화는 겹쳐 오게 마련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로구나! (권3)

 

[1] 이 글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쓴 것인지, 혹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해학적 수법으로 쓴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후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화자(話者), 즉 글을 쓰는 사람은 ‘나’(이지)이고 직접화법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은 화상(和尙)․양반․어목자․동방생․묘유객 등인데, 내용으로 보아 화상은 이지를 말하는 듯하며, 기타 인물의 호칭도 자호(字號)나 실명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 유명한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의 우화를 인용하고 있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스스로 즐기며 뜻하는 대로 가고 있어, 자신임을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깨달으니 곧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장주와 나비와는 곧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자연과 나, 꿈과 현실의 이원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현실 속의 지식이나 집착에 대해서 경고하는 교훈을 갖고 있다. 인생의 덧없음을 소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경지를 의미한다. 이지 역시 산사의 종과 북소리를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아감을 비유한 것이다.

 

[3] 용호의 중이란 이지를 말한다. 원문에서는 호승(湖僧)이라고 했다. 역문처럼 글자를 하나씩 풀어서 ‘용호의 중’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별명이나 별칭인지 확실하지 않다.

[4] 원문은 ‘삼반’(三叛)이지만, 이후의 내용을 보면 문맥상 ‘두번째’가 맞는다.

 

卷三 雜述 三叛記

時在中伏,晝日苦熱,夜間頗涼。湖水驟滿,望月初上,和風拂面,有客來伴,此正老子恥眙時也。楊胖平日好磕睡,不知此夜何忽眼青,乃無上事,欣然而笑,驚蝴蝶之夢周,怪鐵杵之啖廣。和尚不覺矍然開眼而問曰:“子何笑?”曰:“吾笑此時有三叛人,欲作傳而未果耳。”余謂三叛是誰?爾傳又欲如何作?胖曰:“楊道自幼跟我,今年二十五矣,見我功名未就,年紀又長,無故而逃,是一叛也。懷喜本是楊道一類人,幸得湖僧與之落發,遂以此僧為師,以深為師祖。故深自有懷喜,東西游行,咸以為伴,飲食衣服,盡與喜同。

今亦一旦棄之而去,托言入縣閉關誦經。夫縣城喧雜,豈閉關地耶?明是背祖,反揚言祖可以背李老去上黃柏,吾獨不可背之以閉關城下乎?雖祖涕泗交頤,再四苦留,亦不之顧,是三叛也。”余又問何者是三,不答,但笑,蓋指祖也。

時有魚目子、東方生、卯酉客並在座,魚目子問曰:“雖是三叛,獨無輕重不同科乎?”

東方生曰:“三者皆可死,有何輕重!蓋天下唯忘恩背義之人不可以比于夷狄禽獸,以夷狄禽獸尚知守義報恩也。既名為叛,則一切無輕重皆殺!”魚目子曰:“深之罪,不須再申明定奪矣,若喜受祖恩養日久,豈道所可同乎?使楊胖之待道有深萬一,則道亦必守死而不肯叛楊以去矣。二子人物雖同,要當以平日情意厚薄為差,況道之靈利可使,猶有過喜者哉!

故論人品則道為上,喜居中,深乃最下;論如法則祖服上刑,喜次之,道又次之。此論不可易也。”東方生終不然其說,魚目子因與之反詰不已。公方生曰:“夫祖之痛喜,豈誠痛喜之聰明可以語道耶?抑痛喜之志氣果不同于凡僧耶?抑又以人品氣骨真足以繼此段大事耶?

同是道一樣人,特利其能飲食供奉己也,寢處枕席之足以備冬溫夏涼之快己也。此以有利于己而痛之,此以能利于彼而受其痛,報者施者,即時已畢,無余剩矣,如今之雇工人是已,安得而使之不與道同科也?”

二子既爭論不決,而楊又默默無言,于是卯酉客從旁持刀而立曰:“三者皆未可死,唯老和尚可死,速殺此老,貴圖天下太平!本等是一個老實無志氣的,乃過而愛之,至比之汾陽,比之布袋。夫有大志而不知,無目者也。蓋有大志,而以愛大志之愛愛之,亦無目者也。

是可殺也。長別人志氣,滅自己威風。不殺更又何待!”持刀直逼和尚。和尚跪而請曰:“此實正論,此實正論。且乞饒頭,免做無頭鬼!”嗚呼!昔既無目,今又無頭,人言禍不單行,諒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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