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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3-2

一字師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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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3-2

제3장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 관통론, 유기설, 우열론, 구조학, 탐일학(探佚學)

3. 앞쪽 80회의 이문(異文) 연구에 관한 각종 문제

3) 텍스트의 수정과 작자의 의도

경진본에서는 제13회에 진가경이 죽은 후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는데, 녕국부 사람들의 반응이 각 필사본에 따라 다르다.

당시 온 집안에서 다 알고 모두들 희한한 일이라 생각하며 조금 의심했다.
彼時闔家皆知, 無不納罕, 都有些疑心.

판본 교감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희한하게 여김[納罕]’과 ‘의심’ 두 단어에서 비롯된다. 이 두 단어는 다른 판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였다.

1. 납한(納罕): 경진본, 기묘본, 몽고본, 갑술본, 서서본, 열장본
납민(納悶): 갑진본, 정갑본, 정을본
납탄(納嘆): 척서본, 척녕본
찬탄(贊嘆): 몽부본
2. 의심(疑心): 경진본, 기묘본, 갑술본, 몽부본, 서서본, 갑진본, 정갑본
상심(傷心): 척서본, 척녕본, 정을본
“都有些疑心” 부분이 빠짐: 몽부본

청나라 때 장신지(張新之)는 그 구절 아래에 이렇게 평했다.

오랫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이라 장례 준비도 이미 갖춰져 있어서 그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터인데 무슨 답답한 마음이 들겠으며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서술이 애매하다. 어떤 판본에는 ‘모두들 조금 상심’했다고 되어 있으나 옳지 않다.

이로 보건대 청나라 때의 독자들도 이미 정갑본의 ‘납민(納悶)’과 ‘의심’이라는 어휘가 앞글의 오랫동안 병을 앓았다는 서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판본에서 ‘상심’이라고 한 것은 또 앞에서 ‘납민’이라고 한 표현과 딱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장신지는 이에 대해 더 깊이 분석하지 않았다.

중화민국 초기에 이르러 위핑보가 명확하게 지적했다. 첫째, “동시 온 집안의 사람들이 다 알고 누구나 답답해하며 조금 의심했다.”는 구절은 “조금 의심했다”는 구절이 앞쪽의 “답답해했다”는 표현과 짝을 이룬다. 둘째, 정을본의 “조금 상심했다”는 구절은 위로는 “답답해했다”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고 아래로는 “구슬피 울부짖으며 통곡했다[悲號痛哭]”는 서술과 들어맞지 않는다. 셋째, 유정본(有正本)에서 ‘납탄(納嘆)’, ‘상심’이라고 쓴 것은 아마 ‘납한(納罕)’이나 ‘납민(納悶)’이 ‘상심’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고친 듯하다. 위핑보는 갖가지 흔적을 통해 원문은 분명히 ‘납민’과 ‘의심’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이렇게 해야 합리적(앞뒤가 호응하는) 구법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 구절을 통해서 다시 “진씨의 죽음은 병 때문이 아니”었다고 추정했다. 이것은 관통론을 운용하여 텍스트를 논의한 현저한 예 가운데 하나인데, 나중에 갑술본에 들어 있는 비평은 진가경의 병으로 죽은 이야기는 확실히 개정한 이후에야 들어간 내용임을 증명했다.

어쨌든 위핑보는 판본상의 근거를 무척 중시했는데, 당시 ‘의심’으로 쓴 판본은 장신지의 비평이 들어 있는 판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심’으로 쓴 판본은 세 개가 더 있다. 첫째는 그가 갖고 있던 ‘새로운 판본’(응당 정을본의 번인본[飜印本]일 것이다)이고, 둘째는 구졔깡이 갖고 있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판본 《석두기》, 셋째는 유정서국의 필사본이다. 그러므로 위핑보는 이렇게 말했다.

문맥으로 추측해 보면 당연히 ‘의심’이지만 이런 주관적 효과에만 의지하는 것은 근거가 아주 박약하다. 그러니 판본에서 증거를 찾아야 한다. ……결국 주관적인 내 의견은 원본이 응당 ‘의심’으로 되어 있으리라 굳게 믿지만, 《홍루몽》 옛 판본을 찾아 방증으로 삼기 이전에는 이 증거를 취소하거나 의심스럽지만 잠시 보류해 두고자 한다. ……의심스러운 증거를 끌어댈 필요 있겠는가? ……그러므로 《홍루몽》의 판본도 확실히 중요하다.

이로 보건대 위핑보는 단순히 자기의 의견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각 판본에서 유리한 ‘증거’를 임의로 골라 취해서 자기의 주장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판중궤이의 방법과는 다르다.)

위핑보는 ‘의심’인지 ‘상심’인지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가 이 문제에서 작자의 의도를 추측할 때에는 선입견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이른바 ‘선입견’이란 자서전설을 가리킨다. 자서전설은 《홍루몽》이 조설근의 집안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위핑보는 조설근이 사실대로 기록하고 남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해 은밀히 쓸 필요가 있는 곳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목을 매 죽은 일을 그대로 기록한다면 그 원인을 쓰지 않을 수 없고, 그 원인을 쓰면 그 추악한 내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작자가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있었던 일을 완전히 바꿔서 그 진실을 잃는 지경에 이르는 것도 작자의 의도가 아니다.”

다음으로 위핑보는 이런 창작 방법은 “곳곳에서 표현을 에둘러서 그것을 밝힌다[處處旁敲側擊以明之]”고 주장했다. 그는 ‘납한/납민’, ‘의심’과 태허환경의 책자에 그려진 목을 매 죽은 미인의 그림 등등이 모두 작자가 자서전 형식의 창작 방법을 유지하면서 남긴 단서 즉, 위핑보 자신이 말하는 ‘명백한 곳[明白處]’이라고 했다.

현존하는 지연재 비평본에서 보면 위핑보가 자서전설에서 출발하여 추측해 낸 ‘작자의 의도’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갑술본의 비평에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가경이 음란함 때문에 천향루에서 죽다[秦可卿淫死天香樓]’라는 부분은 작자가 역사가의 필치로 쓴 것이다. 다행히 혼령이 왕희봉에게 가씨 가문의 뒷일 두 가지를 부탁한 일은 편안히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면 어찌 생각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은 비록 누설되지 않았지만 그 말과 그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잠시 용서해 주어서 근계(芹溪)로 하여금 삭제하게 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작자는 결코 ‘사실의 기록’을 유지할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진가경이 음란함 때문에 천향루에서 죽은’ 것이 조씨 가문에 실제 있었던 일(원형[原型])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연구가 필요하다. 위에서 인용한 비평으로 보건대 삭제된 천향루의 사건은 그저 비평가의 의도일 뿐이며, 또한 진가경의 “혼령이 왕희봉에게 가씨 가문의 뒷일 두 가지를 부탁한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삭제한 것이지 결코 작자가 일부러 에둘러서 은밀히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판본학자 쏘프(James Thorpe: 1915~ )는 〈텍스트 비평의 미학〉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완전히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문학 작품은 작자가 작품을 창작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종종 안내를 받거나 지시를 받거나 통제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형성되는 역사를 통해 다양한 수정이 일어나기 쉽다. 우리가 작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의도는 생산물에 이해관계를 가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도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술 작품이다.

제84회에서 임사낭(林四娘)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분 역시 같은 상황이다.

다른 한 편, 위핑보의 ‘에둘러 표현하기’라는 설도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납한/납민’, ‘의심’과 태허환경의 책자에 적힌 글은 모두 작자가 수정할 여력이 없어서 그대로 남은 원고의 구절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파커는 《불완전한 텍스트와 어구의 상》에서 이런 상황을 논의했다. 그는 이미 수정된 문장에 아직 수정되지 않은 어구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면 작자의 본래 의도와 새로운 의도는 어울릴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파커의 이 말은 제13회의 수정 사황을 설명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

우리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이전 연구자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석을 통해 텍스트 비평의 내재적 관행(convention)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해석학에는 ‘사전(事前) 이해’의 개념이 있으니, 해석이 해석자의 ‘사전 이해’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위핑보의 ‘사전 이해’는 자서전설이었다. 이 관점에서 구축된 ‘의도적 해석(intentional reading)’은 결코 정확하지 않다. 맥간은 《현대 테스트 비평에 대한 비판》에서 작자가 결코 주체적(autonomous)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곳곳에서 일깨운다. ‘진가경 사건’은 바로 《홍루몽》의 창작의 다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작자의 의도’를 강구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위핑보가 ‘납한/의심’을 논의한 것은 1921년 6월의 일이다. 나중에 그는 또 갑진본과 유정본, 정갑본 및 각종 방각본(坊刻本)의 제13회와 제14회의 세 곳에서 “가씨 집안 진씨 공인[賈門秦氏恭人]”을 “가씨 집안 진씨 의인(宜人)”으로 써 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체적인 정황은 이러하다.

1. [제13회] 靈前供用執事等物俱按五品職例, 靈牌疏上皆寫天朝誥授賈門秦氏恭人之靈位.
2. [제13회] 對面高起著宣壇, 僧道對壇榜文, 榜上大書世襲寧國公冢孫婦防護內廷御前侍衛龍禁尉賈門秦氏恭人之喪.
3. [제14회] 前面銘旌上大書: 奉天洪建兆年不易之朝誥封一等寧國公冢孫婦防護內廷紫禁道御前侍衛龍禁尉享强壽賈門秦氏恭人之靈位.

이 세 곳은 경진본과 기묘본, 몽고본, 갑술본, 몽부본, 척녕본, 서서본, 열장본에서는 모두 ‘공인(恭人)’으로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척서본과 갑진본, 정갑본, 정을본을 포함하는 네 개의 판본에서는 ‘의인(宜人)’으로 적어 놓고 있다. 위핑보는 ‘의인’은 교정자가 관료제도에 의거해 원작을 개정한 것이며, 교정 뒤에는 관료제도상으로는 가용(賈蓉)의 5품 관함(官銜)과 대응하지만 원래의 ‘공인’은 작자가 ‘특별히 쓴 것[特筆]’이니, 원작자가 이렇게 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깊은 뜻’은 무엇인가? 위핑보는 부인의 위패에 “(남편의 직위가) 3품이면 ‘공인’이면 5품이면 ‘의인’”으로 쓰는 것이 상식이니, 진가경을 ‘공인’으로 봉한 것은 가진(賈珍)의 직급이 3품인 것과 동등한데 그것을 진가경의 위패와 경방(經榜), 명정(銘旌)에 옮겼다고 주장했다. 이런 서술 방법은 정리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것이지만 작자가 일부러 독자에게 파탄을 제공한 것으로서, 다른 형태의 수사법을 이용해 “음란함 때문에 천향루에서 죽은” 일을 묘사하여 가진과 진가경 사이의 불륜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에게 파탄을 제공하는” 서술 방법은 위핑보가 ‘의심/상심’을 논의할 때의 사유 방식과 일치한다.

하지만 위핑보의 추론도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명나라와 청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3품의 문무 관리들의 아내는 ‘숙인(淑人)’에 봉하고 4품 관리의 아내는 ‘공인’에 봉하도록 되어 있지 결코 위핑보의 주장처럼 ‘3품은 공인이고 5품은 의인’이라는 방식이 아니었다. 가진은 3품 벼슬아치이니, 만약 작자가 진가경의 품급을 가진과 관련시키려고 했다면 응당 “가씨 가문 진씨 숙인”이라고 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작자가 ‘공인’이라는 품계를 쓴 것은 가진의 품계를 “무단히 진가경의 위패와 경방, 명정으로 옮긴”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바꿔 말하자면 위핑보의 결론(“작자의 의도 역시 극히 깊고 절실하게 드러나는” “다른 형태의 수사법을 이용해 이 회를 쓴 것”)은 관료제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둘째, 봉호(封號)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소설의 내재 논리로 보더라도 위핑보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공인’이 풍자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면 가씨 가문이 ‘공인’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스스로 집안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녕국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가진과 진씨의 문란을 공포한 셈이기 때문이다. 위핑보의 이해는 남부끄러운 음란한 일이 있었다는 선입견을 미리 갖고 나서 비로소 작자가 ‘공인’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에 대해 의심을 품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자기가 인정한) 작자의 의도’로 소설의 내내 논리를 압도해 버린 것이라 하겠다.

또 다른 연구자 치공(啓功: 1912~2005)은 ‘공인’이라는 단어를 토대로 또 다른 ‘작자의 의도’를 추론했다. 치공은 작자가 줄곧 청나라의 특징을 드러내기를 꺼렸으며 특히 관료제도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핑보와 마찬가지로 원본의 ‘공인’이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 때에는 5품 관리의 부인을 ‘의인’, 6품 관리의 부인을 ‘공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작자가 잘못 쓴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에 고악과 정위원 판각본 계열은 모두 직접적으로 ‘의인’이라고 고쳤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가 바로 품계와 봉호를 다르게 씀으로써 비로소 청나라 때 관료제도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인’으로 고쳐 버리면 청나라 때의 관료제도와는 맞겠지만 작자의 본래 의도는 그르치게 된다.

치공의 주장 역시 하나의 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관례에 따르면 4품 관리의 아내를 ‘공인’에 봉하고 5품 관리의 아내를 ‘의인’, 6품 관리의 아내를 ‘안인(安人)’에 봉한다. 치공이 “청나라 때에는 5품 관리의 부인을 ‘의인’, 6품 관리의 부인을 ‘공인’”이라고 했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원사[元史]》, 권84, 〈지[志]〉 제34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가용이 5품 벼슬아치이니 진씨는 본래 ‘의인’에 봉해져야 하지만, 옛날 풍속에는 상을 치를 때 체면을 생각해서 만장이나 위패에 죽은 사람의 품계를 한 등급 올려 쓸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있으니, 명나라 때의 소설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 제63회에서 이병아(李甁兒)의 상을 치르는 장면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서문경(西門慶)의 첩 이병아가 죽자 당시 5품 관리였던 서문경은 그녀의 위패에 “조봉금의서문공인이씨구(詔封錦衣西門恭人李氏柩)”라고 썼다. 응백작(應伯爵)은 재삼 그에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공인’이라는 단어를 썼다(제65회). 어쩌면 《홍루몽》의 작자가 이런 예를 모방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예는 《홍루몽》의 이문과 ‘작자의 의도에 대한 추정’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파커(Hershel Parker)이 서양 작품을 논의하면서 하나의 문장에 상호 모순되는 의도가 포함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때는 한 텍스트 안의 어떤 문장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다른, 그리고 모순적인 작자의 의도를 구현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가경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 역시 유사한 예가 될 수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도 즉, 비평가의 의도와 작자의 의도가 혼합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논자가 제기한 ‘파탄을 제공’한다는 주장이나 ‘청나라 제도를 회피’한다는 주장이 작자의 원래 의도에 속하는지 여부에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2007년 보충] 진가경 문제는 《홍루몽》 연구자들이 즐겨 얘기하는 화제여서 추측과 색은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옛날 원고에서는 진가경이 가진의 아내였는데 그녀가 시아버지인 가경(賈敬)과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이는 진가경과 가보옥이 사통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류신우(劉心武: 1942~ )에 이르면 진가경이 폐위된 태자의 딸을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진학(秦學)’의 성과를 추모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문(異文) 문제에 대해서 마오궈야오(毛國瑤)는 척서본과 유정본의 ‘의인’이라는 글자는 글자체가 가늘고 작은데다가 필체도 다른 걸로 보건데 누군가 고쳐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핑보 본인은 1964년 6월 22일 마오궈야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근래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는데, 작자가 《홍루몽》에서 사실과 허구를 모두 허구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명과 벼슬 명칭, 만주족과 한족의 복장 등등을 비롯해서 봉고(封誥) 역시 마찬가지이다. 5품 관리의 부인은 청나라 제도에서는 ‘의인’이 되어야 하는데 (작자가) 오히려 잘못 뒤섞듯이 ‘공인’이라고 쓴 것 또한 현실을 회피하고 당시 사람들의 기탄을 면하려는 방책이 아니었을까?

위핑보의 이런 생각은 치공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위핑보가 마오궈야오에게 보낸 편지는 사실 1964년에 쓴 것이니, 위핑보의 생각은 당시 또는 그보다 조금 뒤까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었다. 치공의 서문은 1979년 가을에 써서 1987년 북경사범대학출판사(北京師範大學出版社) 판본에 실렸다. 위핑보와 치공 두 사람 사이에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필자가 짐작할 수 없다. 또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논의는 이미 글로 발표되었으니, 그 글은 《홍루몽학간(紅樓夢學刊)》 총 제86집, 2000년 제3집(2000년 8월)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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