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3-4
제3장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 관통론, 유기설, 우열론, 구조학, 탐일학(探佚學)
3. 앞쪽 80회의 이문(異文) 연구에 관한 각종 문제
5) 작자의 본래 의도와 텍스트의 지위
기묘본과 경진본, 척서본, 척녕본까지 네 개의 필사본에 따르면 제63회에서 가보옥은 농취암(櫳翠庵)에 답장을 보내고 바로 뒤이어 방관(芳官)의 차림새를 바꾸고 이름을 바꾸면서 가보옥이 거창한 논의를 펼치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 중국예술연구원의 교주본(校註本)에 들어 있는 해당 부분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방관이 머리를 감고 나서 위로 틀어올린 채 꽃을 몇 송이 꽂고 있었다. 가보옥은 얼른 머리 모양을 바꾸고 주위의 짧은 머리를 깎아서 파릇한 머리 피부를 드러내고, 정수리에 남은 긴 머리를 갈라서 땋게 했다.
“겨울에 담비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호랑이 문양과 오색 구름무늬가 들어간 짧은 장화를 신어라. 혹시 대님을 풀면 하얀 버선에 바닥이 두꺼운 신을 신어라. 그리고 방관이라는 이름은 별로 안 좋으니까 남자 이름으로 바꾸면 특별한 운치가 있겠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웅노(雄奴)’로 바꾸라고 하자, 방관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도련님 외출하실 때 저도 데려가주셔요. 사람들이 물으면 저도 명연이와 같은 하인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하하, 그래도 사람들이 눈치 챌 걸?”
“호호, 도련님께선 저더러 재주가 없다고 하시잖아요. 이 댁에는 지금 소수민족이 몇 명 있으니까, 저도 나이 어린 소수민족이라고 하면 돼요. 게다가 다들 제가 머리를 땋아 내린 게 보기 좋다고 하는데, 그게 괜찮은 생각 아닌가요?”
가보옥은 무척 기뻐하며 웃었다.
“그것도 좋겠구나. 나도 관리들이 비바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말고삐를 잘 잡아주는, 외국에서 바치거나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걸 자주 본 적이 있지. 그렇다면 네 이름도 소수민족처럼 고쳐서 ‘야율웅노(耶律雄奴)’라고 해야겠구나. ‘웅노’라는 이름의 발음은 또 흉노(匈奴)와도 통하니 전부 견융(犬戎) 민족의 이름인 게지. 게다가 그 두 민족은 요(堯), 순(舜) 시절부터 중국의 우환 덩어리였고, 진(晉)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그들한테 많은 피해를 입었지. 다행히 우리는 복을 받아서 위대한 순 임금의 정통 후예로서 순 임금의 공덕과 어짊, 효성으로 하늘을 크게 감동시켜 천지, 일월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는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니, 역대 왕조에서 창궐하여 못된 짓을 일삼던 것들도 지금은 창칼 한 번 쓸 필요 없이 모두 하늘이 그들로 하여금 두 손 모으고 머리 숙여 멀리서부터 찾아와 투항하도록 만들었지. 그러니 그들에게 모욕을 주어서 천자 폐하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드리자꾸나!”
“호호, 그럼 도련님께서도 말 타고 활 쏘는 무예를 익혀 출정하셔서 천자에 반항하는 무리들을 몇 명 잡아 오시면 더욱 충성을 다하는 게 되겠군요? 왜 하필 저희를 끌어들여 장광설을 늘어놓고 혼자 기분풀이를 하면서, 말로만 공덕을 칭송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하하, 그러니까 네가 뭘 모른다는 거야. 지금은 온 천하가 천자 폐하께 복종하여 온 누리가 평안하니 천년만년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어졌어. 우리야 장난삼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공덕을 칭송해야 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거야.”
방관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둘은 곧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가보옥은 방관을 ‘야율웅노’라고 부르게 되었다.
잉비청(應必誠)의 통계에 따르면 이 부분은 모두 1,100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판본마다 이 부분이 들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서 적지 않은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우선 각 판본에서 이 부분의 상황이 어떠한지 보자.
1. 남아 있는지 빠진 것인지 불분명: 갑술본, 서서본(두 판본 모두 이 회가 빠져 있음)
2. 이 부분의 문장이 들어 있음: 기묘본, 경진본, 척서본, 척녕본, 몽부본
3. 이 부분의 문장이 빠져 있음: 열장본, 몽고본, 갑진본, 정갑본, 정을본
위핑보는 《홍루몽변》을 쓸 때 이 부분을 무척 싫어하면서 두 측면에서 비판했다. 그는 첫째, 문학 감상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둘째, 텍스트의 진위 관점에서 논의했다. 그의 첫 번째 기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인물의 말투와 문장의 어휘, 구조의 세 측면에 착안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얻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문학적’ 분석은 위핑보의 감상 능력을 반영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신념은 작자의 창작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문학적 분석’이 위핑보의 판본 판단의 기준 가운데 차지하는 지위는 ‘작자의 의도’에 미치지 못한다.
위핑보는 유정본 제52회에서 진진국(眞眞國) 여자가 쓴 시에서 ‘한남(漢南)’이라는 단어를 ‘만남(滿南)’으로 쓴 것을 발견했는데, 이 ‘만남’이라는 유정본의 ‘내적 증거’는 그로 하여금 유정본이 누군가의 수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했다. 그가 보기에 유정본의 이 부분은 모두 ‘민족주의’의 관점(반만설)을 지지하는 듯했다. 위핑보는 조설근이 이 작품의 작자라고 인정하고, ‘작자의 의도’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작자의 신세와 환경, 그리고 처한 시대를 놓고 보면 민족 사상이 생겨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설령 그런 게 있었다 해도 당시의 삼엄한 문자옥 환경 아래에서는 절대 이처럼 드러내 놓고 쓸 수 없다. 작자는 생각이 영민하고 글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절대 이처럼 졸렬하게 썼을 리 없다. 이 세 단계의 추측을 통해 나는 차라리 고악 판본이 진짜 원고에 더 가까우며 척료생(戚蓼生) 판본은 후세 사람의 수정을 거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이른바 세 단계의 ‘추측’이란 바로 두 가지 작자의 의도에 관련된 것으로서, 첫째 단계는 직접적인 접근이고 두 가지는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의 첫째 추측과 ‘작자의 의도’ 사이에는 획분할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즉 작자(조설근)의 신분으로 보건대 이런 ‘민족주의’적인 글을 썼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의 바탕에는 이 문장이 조설근의 원고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둘째 단계는 외재적 요소로서 작자와는 무관한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엄한 문자옥 아래에서 작자가 이처럼 ‘드러내 놓고’ 글을 쓸 수 있느냐는 문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작자의 의도’라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다음은 바로 세 번째 단계인 작자의 창작 능력이다. “작자는 생각이 영민하고 글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절대 이처럼 졸렬하게 썼을 리 없다.”는 것도 문장의 우열을 판본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위핑보의 논점 가운데 가장 마지막 자리에 위치해 있다.
《홍루몽 연구》가 간행될 때(1953)에 이르면 방관이 ‘소수민족의 이름[番名]’으로 고치는 부분에 대한 위핑보의 생각이 크게 변화한다. 《홍루몽변》에서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총평은 “완전히 꿈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보옥의 말투[口吻]가 전혀 없고” “문장이 아주 졸렬하여 역겨움을 느끼게 하며” “문장의 앞뒤 기세로 보더라도 역시 이런 이상한 문장이 도저히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격렬한 어조는 《홍루몽변》에서도 드문 것이었다. 그런데 《홍루몽 연구》에 이르면 그의 총평은 “이도저도 아니게 전혀 닮지 않았다[不倫不類]”라고 바뀌면서 이전에 비해 어조가 대단히 부드러워졌다. 구체적인 분석 역시 그저 “가보옥이 평소 얘기하던 때의 정신이 사라져 버렸다.”라고만 했다. 《홍루몽변》에서 작자의 의도를 바탕으로 판단했던 문장들이 깨끗이 삭제되어 버렸던 것이다.
판본의 이문(異文)에 대한 판단에서 위핑보가 이렇게 큰 전환을 보여준 원인은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23년 《홍루몽변》이 출판될 때 그는 자서전설을 믿고 있었다. 자서전설의 핵심적인 두 가지 믿음은 첫째 작자가 기인 출신의 귀족 조설근이고 둘째, 작품의 주인공 가보옥이 바로 조설근이라는 것이다. 가보옥이 ‘(한족) 민족주의’를 지니고 있다면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과 같아진다는 뜻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위핑보는 작자가 기인 출신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신념이 판본의 이문에 대한 그의 판단에도 영향을 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당시 그는 척서본과 유정본만을 갖고 있었다. 유정본과 판각본 계열을 대비해 보면 유정본의 이 부분은 그저 ‘민족주의’에만 유리한 특별한 문장일 뿐이니 그가 의심스럽게 본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가 1952년에 이르러 그는 이미 ‘자서전설’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으니, 이것은 작자 본위(author-centered)의 그의 연구 신념을 약화시켰다. 이에 따라 판본에 대한 논의에서 자연히 1923년(혹은 그보다 조금 전) 같은 굳건한 입장은 사라졌다.
위핑보는 《홍루몽변》에서 이 부분이 정고본이 간행된 후 유정본에 끼워 넣어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이 부분의 문장은 유정본의 원문이 아니고 척료생(戚蓼生)이 결코 보지 못했던 문장이다. 왜냐하면 척료생은 청나라 때에 벼슬을 살았으니 민족주의를 품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또한 감히 민족주의 사상이 담긴 책에 서문을 쓰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심지어 유정서국이 중화민국 초기의 반 만주족 정서에 영합하여 독자를 끌기 위해 이 부분을 덧붙인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지금은 그의 두 가지 추론이 모두 문제임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확실히 유정본의 저본이 된 척장본(戚張本)에 원래 있었으므로 척료생도 당연히 그 부분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유정본은 원래의 필사본을 근거로 석인(石印)하면서 개별적인 글자만 고쳤을 뿐, 독자를 끌기 위해 함부로 고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웨이사오창(魏紹昌: 1922~2000)의 《홍루몽 판본 소고(小考)》 들어 있는 〈‘유정본’의 저본에 대하여[談‘有正本’的底本]〉을 참조할 만하다.
초기에 위핑보는 이 부분의 문장이 작자의 원문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현존하는 필사본에 문장이 남아 있거나 빠진 상황으로 보더라도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사본의 양대 계열 즉 ‘사평정리본’ 계열과 ‘몽, 척’ 계열(즉 정칭산이 《입송헌본 석두기 고변(立松軒本石頭記考辨)》에서 분석한 ‘입송헌 판본’)에 모두 이 부분이 들어 있으니 척서본의 내용이 결코 독특한 것이 아님을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위핑보의 ‘위작’설은 쉽게 정설이 될 수 없다.
종합하자면 우리는 판본학 연구가 ‘작자의 의도’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경향에 주목했다. 위핑보의 예에서 보았듯이, 그는 자신이 구상한 ‘작자의 의도’에 따라 텍스트 문장의 진실성을 충분히 부정할 수 있었다.
이후 학자들의 해당 부분에 대한 해석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만주족 청나라를 풍자한다고 여기는 부류이고, 둘째는 만주족 청나라에 대한 송가(頌歌)라고 여기는 부류(이후로는 임시로 ‘만주족에 대한 아첨설’로 칭함)이다. 만주족 청나라에 대한 풍자라고 여기는 학자로는 팡중궤이와 우언위(吳恩裕), 위잉스, 류멍시(劉夢溪) 등이 있고, 청나라에 대한 송가라고 여기는 학자로는 후스와 후녠이(胡念貽), 자오깡(趙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두 부류로 묶으면 문제의 복잡성을 전혀 반영할 수 없다. 문장이 남아 있고 빠져 있음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또 다른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중궤이와 후스는 이 부분의 의의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의 논쟁은 저작권 층면에서 진행되었다. 1951년에 판중궤이는 〈민족의 피로 주조된 《홍루몽》〉을 발표하여 ‘야율웅노’ 부분의 내용이 “한족의 입장에서 이민족을 크게 꾸짖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해석은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닌데, 판중궤이는 이 해석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작권 문제를 논증했기 때문이다. “한족의 입장에서 이민족을 크게 꾸짖은 것”이라면 그 작품은 기인 출신의 귀족에게서 나온 것일 수 없으니, “조설근 자신이 기인 출신이면서 한족을 대신해 이민족을 크게 꾸짖는 것”을 판중궤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그가 ‘작자는 조설근’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 부분이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후스는 “이 부분은 명백히 기인 출신의 작자가 만주족 청나라 황실을 위세와 덕을 칭송한 것”이라고 했으니, 그의 해석은 판중궤이와 정반대이다. 저우루창 역시 조설근의 마음속에서 만주족은 “찬란한 대순(大舜)”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청나라 조정이 오이라트 갈단(Oirat Galdan)에 대처한 것을 비유하며, “조설근이 ‘가씨 집안’에도 ‘어린 토번 아이’가 있다고 쓴 것은 모든 것이 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후스가 《홍루몽》의 작자는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판중궤이는 “이 책의 자자는 분명 명나라 유민일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깊이 분석하지 않았지만, 둘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뜻으로 해석하여 이 부분을 자신들의 전체 해석 체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저우루창도 같은 방식으로 방관 이야기를 자서전설의 증거 가운데 하나로 첨가했다.
이 부분의 의의에 대해서는 조설근의 저작권을 인정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우언위는 1954년에 〈조설근의 《홍루몽》과 정치〉라는 글에서 이 부분에 주목했는데, 당시 그는 조설근을 작자로 인정하면서도 위핑보처럼 이 부분을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조설근이 비록 기인 출신이지만 혈통상으로는 본래 한족이기 때문에 “대순(大舜)의 후예”라는 말로 엄호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청나라 황실이 이민족임을 꾸짖은 것이라고 했다. 우언위의 주장은 후녠이의 반박을 야기했다. 후녠이는 ‘대순의 후예’ 등의 말이 엄호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무슨 민족 사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장난삼아 ’지금 조정의 공덕‘을 대대적으로 과장하여 칭송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허치팡(何其芳: 1912~1977)은 이렇게 말했다.
(조설근)이 노래한 것은 분명 당시의 청나라 조정으로서, 청나라가 국내 소수민족을 정복한 점을 노래했다. 맹가(孟軻)는 순(舜)이 동이족(東夷族) 출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가보옥은 만주족을 대순의 후예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이 송가가 결국 진심에서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부연한 말에 지나지 않는지는 판단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로 보건대 허치팡도 ‘만주족에 대한 아첨설’을 위주로 하지만, 또한 작자가 ‘부연한 말’일 뿐 진심으로 노래한 송가는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여 년이 지난 1974년에 위잉스는 〈《홍루몽》의 작가와 사상 문제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방관의 이름을 야율웅노로 바꾼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면서 이것이 바로 조설근이 만주족을 등지고 한족으로 귀순한 증거라며 그가 ‘한족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비해 자오깡은 “조설근은 옹정제의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에 담긴 이론을 직접 인용하여 만주족이 중원을 주재하는 법통(法統)을 이어받았음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위잉스 외에도 천자오(陳昭), 류멍시, 하오신(郝炘), 위앤즈판(元之凡), 자오웨이방(趙衛邦), 류춘런(劉存仁), 치우쩡성(仇曾升), 류상성(劉上生) 등도 모두 이 부분이 만주족에 반대하는 작자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기본적으로 ‘한족 동질감’과 ‘반어적인 화법[反話正說]’이라는 옛 견해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 부분의 이야기가 이민족을 통렬히 꾸짖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꾸짖음을 당하는 흉노족이 만주족을 비유한 것인가? 둘째 화자(가보옥)가 어느 입장에서 흉노족을 꾸짖는가? 판중궤이는 “한족의 입장에 서 있다”고 했지만 원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가보옥은 “대순의 후예”로 자처하며 흉노족을 ‘멸시[作踐]’하고 있다. 비난설과 ‘아첨설’은 똑같이 이 부분을 청나라 조정의 배경 위에 두고 이해한다. 하지만 “대순의 후예‘와 《대의각미록》이 관계가 있다는 것은 결코 견강부회의 주장이 아니다. 정 나라 세종은 《대의각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한 이적(夷狄)의 명칭을 본 왕조에서는 기피하지 않는다. 《맹자》에서는 “순은 동이족이다. 문왕은 서이족(西夷族)이다.”라고 했다. 그들이 태어난 곳을 바탕으로 한 말이니, 오늘날 사람들의 관적(貫籍)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한, 당, 송, 명나라 때에는 영토가 넓지 않아 서북쪽 곳곳에서 사나운 적이 있어서 변방에서 수시로 경보가 전해졌고 봉화 연기가 꺼지지 않았다. 중원의 백성은 세금을 내느라 모든 재산을 털렸고 부역에 지치도록 시달렸으니 또한 위태롭고 괴로웠도다! 이제 본 왕조는 영토가 아주 넓어서 중국과 외부의 민족들이 신하로 복종하고 있으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존재라면 누구나 이마에 손을 얹고 공경하며 태평성대를 노래한다.
가보옥은 이렇게 말했다.
그 두 민족[토번과 흉노]은 요(堯), 순(舜) 시절부터 중국의 우환 덩어리였고, 진(晉)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그들한테 많은 피해를 입었지. ……역대 왕조에서 창궐하여 못된 짓을 일삼던 것들도 지금은 창칼 한 번 쓸 필요 없이 모두 하늘이 그들로 하여금 두 손 모으고 머리 숙여 멀리서부터 찾아와 투항하도록 만들었지. ……우리야 장난삼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공덕을 칭송해야 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거야.
가보옥의 말투는 청나라 세종의 말과 사실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반만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대순의 후예’라는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언위처럼 그것이 수사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주장을 따져 보면 ‘대순의 후예’가 《대의각미록》을 모방했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있지만(우언위 본인도 작자가 ‘대순의 후예’라는 말로 청나라 통치자들을 가리켰다고 인정했음), 수사적 표현이라는 주장은 독자의 주관적인 추측일 뿐 작자 본인이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자오깡의 주장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홍루몽》에서 ‘지금[當今]’ 조정을 칭송한 말도 제63회의 이 부분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제16회에서 왕희봉은 “그러니 지금 조정의 크나큰 은혜를 알 수 있지요. 이제까지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거나 연극을 보았어도 옛날에 이런 일은 없었어요.” 하고 칭찬하자, 가련도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만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시니……” 하고 칭송했다. 작품 속 인물의 말이 단지 그 인물 자체만을 대표한다면 다른 단락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가령 제55회의 서술문에서도 “지금 황제는 효(孝)로 천하를 다스리고”라고 했고, 제63회에서도 “원래 황제는 지극히 어질고 효성스러운 분이라서”라고 했다. 이런 말들도 모두 ‘지금’ 조정에 대해 한 말인데, 꾸짖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늘 높이 떠받들고 있다.
또한 청나라가 변방 소수민족을 정벌할 때 포로로 잡힌 소수민족[土番] 역시 노예로 부려진 사실이 확실히 있다.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어느 연구자는 조인(曹寅)의 《연정시초(楝亭詩鈔)》에 들어 있는 20수 연작시 〈남원잡시(南轅雜詩)〉의 제12수를 지적한 바 있다.
林間繫馬集歸雅 숲 속에 말을 매니 둥지로 돌아가는 까마귀 모여들고
屋上炊煙指歇家 지붕 위 밥 짓는 연기 보니 주인이 들어와 쉬나 보다.
隨處風光期好語 가는 곳마다 풍경은 훌륭하다는 감탄을 자아내고
奚兒爭拾白楊花 어린 하인들은 다투어 하얀 버들 꽃을 줍네.
여기서 ‘어린 하인[奚兒]’는 당시 사로잡힌 소수민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위핑보는 초기에 작자 관념의 영향을 받아 이 부분의 문장이 작자의 원작이 아니라 후세에 유정본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런데 이후의 학자들은 모두 이 부분이 위작이라고 여기지 않는 듯하다. 몽고본이나 갑진본, 열장본 등의 필사본을 살펴봐도 모두 방관이 ‘야율웅노’로 개명한 일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제63회에서 야율웅노에서 다시 금성파리(金星玻璃), 온도리나(溫都裏納)로 고친 등등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제70회와 제73회, 제77회에는 여전히 방관의 바뀐 이름인 웅노, 금성파리, 야율웅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필사본에도 원래 방관이 개명하고 가보옥이 일장 연설을 한 부분이 들어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삭제되어 버렸고, 뒤에 나오는 웅노나 금성파리 등은 그물에서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깨끗이 삭제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반만설과 아첨설 모두 그들의 해석 기점에서 출발하여 이 부분의 문장이 삭제된 이유를 추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중궤이는 120회본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아마 당시 문자옥이 엄해서 비록 ‘송나라 사람이 요(遼)나라나 금(金)나라 얘기를 하고’ ‘명나라 사람이 원나라 얘기를 하는’ 형식이라 할지라도 이민족을 언급하면 모두 책이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당연히 삭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자오깡은 “조설근은 완전히 《대의각미록》의 어투를 모방해서 건륭제의 ‘완전무결한 무공(武功)’을 칭송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야 장난삼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공덕을 칭송해야’ 한다는 구절을 덧붙였으니, 정말 지나치게 낯간지럽다. 후세 사람들이 이 부분을 삭제해 버린 것은 차라리 정말 잘한 일이다.”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판중궤이가 보기에 이 부분이 삭제된 것은 문장 자체가 만주족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증거라는 것이고, 자오깡은 조정을 칭송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무슨 이유로 삭제되었든 간에 이 예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해석자는 작자의 신분과 텍스트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자신들의 갖가지 가설에 따라 문장의 의미를 결정한다. 둘째, 텍스트가 삭제된 일 자체도 텍스트의 지위가 위협을 받았음을 반영하며, 독자의 해석은 완전히 텍스트의 권위를 압도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홍루몽》을 경전으로 떠받들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경전의 지위는 너무나 불안하다!
원문을 삭제하는 것은 일종의 아주 특수하고 드문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근대의 녜간누(聶紺弩)는 방관이 개명한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런 가공송덕의 문장을 조설근이 썼을 때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지는 이미 알 수 없지만, 예술 작품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가보옥이 천시하는 부패한 유생과 녹을 축내는 벼슬아치들의 어투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제국주의 파시스트의 말투와 같으니, 가보옥의 성격과 사상에서는 모두 용납될 수 없다. 설마 또 원상회복의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앞 장에서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경향을 취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 또 다른 읽기의 방법 즉, “나를 거스르면 죽는다[逆我則死].”라는 방법을 또렷이 파악할 수 있겠다. 《문심조룡(文心雕龍)》 〈지음(知音)〉에서는 “자신과 뜻이 맞으면 감탄하며 풍자하고, 나와 뜻이 다르면 가로막아 없애 버린다[會己則嗟諷, 異我則沮棄].”고 했다. 이 말은 이러한 해석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이상의 분석은 두 가지 문제와 연관된다. 첫째, 작자의 창작 심리. 둘째, 후세 사람들이 삭제한 의도. 사실 몽고본과 갑진본, 열장본의 “삭제하지 못한[失刪]” 상황(즉 ‘웅노’, ‘금성파리’ 등의 뒤쪽 어휘)으로 보면 각 판본들의 저본 또는 조본(祖本)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이 부분의 문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점이 확실하다고 해서 ‘사열정리본’ 계열(기묘본과 갑진본)과 ‘입송헌’ 계열(척서본, 척녕본, 몽부본)의 문장이 원고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청나라 때의 범개(范鍇: 1764~1845)는 옛날 필사본과 정갑본을 대조한 바 있다. 그가 본 필사본의 제63회 문장도 방관이 개명한 부분이 들어 있었지만, 문장은 ‘사열정리본’ 계열 및 ‘입송헌’ 계열에 비해 간결해서 겨우 500자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옛날 필사본에는 ‘흉노’라는 말이 언급되지도 않았고 “장난삼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조정의 공덕을) 칭송해야” 한다는 구절도 없다. 런사오동(任少東)과 자오진밍(趙金銘)의 연구에 따르면 기묘본과 경진본, 몽부본, 척서본에서 이 필사본보다 많은 문장들은 분명 후세 사람들이 보충한 것이라 하지만, 저우처종(周策縱)은 그것들도 삭제되어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반만설’과 ‘아첨설’의 논거는 작자의 원고가 이미 만들어져 있느냐의 문제이니, 이 부분의 문장을 통해 조설근의 ‘창작 의도’를 추측하는 것은 실로 명실상부하지 않은 우를 범하는 일이다. 이 점은 바로 탠설(Thomas Tanselle)의 주장을 입증해 준다. 즉 논자는 잘못된 텍스트에 바탕을 두더라도 구구절절 옳음 분석을 해 낼 수 있지만, 이런 토대 위에서 ‘작자의 의도’를 논하는 것은 아무 의의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예는 텍스트의 의의가 불안정하며 독자의 주관적인 구상이 읽을 때 아주 중대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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