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북개 홍칠공 2 김용
제6장 개방의 방주
"이러지 마시오!"
사개 정원이 여아의 손목을 번개같이 텁석 잡으며 꽥 소리쳤다.
"왜 이래요? 방주님이 내가 죽기를 바란다니 그 뜻에 따르려는데 왜 이래요?"
여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아씨, 아씨를 시켜 방주를 독해한 사람이 누구요? 그것만 밝히시오."
소미타가 물었다. 여아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미운산이 날 의심하고 있구나…….'
여아는 기가 막혔다. 방주의 생각이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명명백백 죽음밖에 없을 것이었다.
사개는 다가와서 여아의 머리칼을 몇 가닥 거머쥐었다.
"참 탐스러운 머리칼이로군. 이 좋은 머리칼이 다 뽑히면 그야말로 볼 만하겠는걸?"
그는 여아의 머리칼을 홱 잡아채어 한줌 뽑아 버렸다.
"악―!"
여아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자, 계속 버텨 봤자 아씨만 힘들어져. 누가 아씨를 시켰는가만 솔직히 말하시오."
"난 모르는 일이에요. 나더러 뭘 말하라는 거예요?"
여아가 울부짖었다.
"암만해도 된맛을 좀 보여 줘야겠구만."
소미타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더니 여아의 옷을 다짜고짜 쫙쫙 찢어발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알몸뚱이가 된 여아는 희고 탄탄한 젖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오돌오돌 떨었다.
"이래도 말 못하겠나?"
소미타가 손톱 끝으로 여아의 아랫배를 한 줄 죽 내리그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소미타의 손톱에 긁힌 여아의 아랫배에선 금세 피가 흘러 나왔다. 여아는 뱃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
"난 방주님을 독해한 일이 절대 없어요. 날더러 뭘 말하라는 거예요?"
"방주님께선 그렇게 알고 계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방주님은 속일 수 없을걸?"
"날 방주님께 데려가 줘요. 방주님 앞에서 내 진실을 밝혀 보이겠어요."
여아의 말에 사개가 차갑게 웃었다.
"방주님이 만나려고 해야 만나지. 방주님이 뭐 널 다시 보겠대?"
그는 뱀 한 마리를 여아에게 바짝 들이댔다. 여아는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여아의 젖꼭지를 탐욕스레 핥았다. 대혈이 눌려 꼼짝할 수 없게 된 여아는 진저리를 치며 악을 썼다.
"난 아니야, 난 아니야―!"
그러나 그녀의 피맺힌 절규는 허공에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보름달이 밝았다. 개방의 사람들은 멀리 10리 밖까지 보초들을 세워 개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해 놓고 서호 호숫가에 모여 앉았다. 서호 십경이 멀리 어렴풋이 바라보였다.
이윽고 수레 위에 앉은 개방 방주 미운산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밤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게 한 것은 한 가지 상론할 문제가 있어서요. 우리 개방은 백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영웅 호걸들을 배출해 냈소. 그런데 이 미운산 대에 그 기상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는 형제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나 미운산이 무능하여 개방을 중흥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런데다 부실하게도 이 몸에 독해를 입어 난 이제 더는 방주 자리를 지키기가 어렵게 됐소. 때문에 오늘 개방의 여러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주를 새로 천거함이 어떠
할지 여러 형제들의 고견을 들어 보고자 이렇게 모이라 했소."
미운산의 양옆에는 개방의 11대 장로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왼편에는 개방 금의파 6대 장로인 부귀관인 범장천, 청한자자 노명성, 출수표 노경, 운중연 서불성, 사개 정원, 옥면검객 호심 등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오의파 4대 장로인 일점지(一點 ) 나장태(羅長太), 소검(少創) 오평(伍平), 소미타 추우, 과천청(過天靑) 제갈옥생(諸葛玉笙) 등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앉아 있는 장로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금의파도 아니요 오의파도 아닌 강호의 기인 소씨 거렁뱅이였다.
이 11대 장로들은 방주의 말에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운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방주로 있으면서 우리 개방을 흥성 발달은 못 시켰지만 우리 개방의 명예를 손상시키지도 않았소. 그러나 오늘 현명한 방주를 새롭게 내세운다면 개방 여러 형제들을 이끌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테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사람들은 미운산의 말이 옳다고는 여기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미운산만큼 공정하고 정직한 방주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금의파 장로를 방주로 내세우면 오의파에서 불만을 품을 것이고 오의파 장로를 방주로 내세우면 금의파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기정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방주로 내세울 수 있겠는가?
미운산이 다시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개방에 인재들이 많으니 방주 하나 뽑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소. 내 소견에는 개방의 풍속대로 무공을 겨루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방주로 뽑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형제들 생각은 어떠시오?"
사람들은 미운산의 의견이 썩 탐탁치는 않았지만 지금 이 정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번 개방대회를 소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방주를 새로 뽑으려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그 문제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여 금의파 사람들은 자기네 금의파 여섯 장로들 중에 한 사람을 방주로 뽑으려 하였고, 오의파는 오의파대로 자기네 네 장로들 중 한 사람이 새 방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로의 세력만 봐서는 금의파가 우세였지만
수하에 거느린 거렁뱅이 수로 따지면 오의파 쪽이 훨씬 우세하여 두 파 간의 강약을 가량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미운산의 제의는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내 실력으로 방주 자리를 차지하는 데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고 은근히 기대를 품으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였다.
이때였다. 부귀산인 범장천이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고는 입을 열었다.
"방주님의 뜻을 안 지는 우리도 오래 되었으나 우리 여섯 장로들은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개방을 아주 잘 다스려 오시던 방주님께서 뜻밖에도 암해를 당했으니 그 악독한 놈을 잡아내어 능지처참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방주님께서 개방대회를 열어 방주 자리를 내놓겠다 하시니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를 않습니다."
범장천은 사뭇 심각하게 둘러앉은 개방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방주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우리는 그 뜻을 따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개방의 한 식구들이니 무공을 겨룰 때 너무 지나치지 않게 그저 혈도나 찔러 이기면 끝나는 것으로 합시다. 오의파에는 장로가 넷뿐인데 우린 여섯이니 우리 편에서도 넷만 나가 각각 네 번씩 겨루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방주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오의파 장로들 중 성미가 급한 일점지 나장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우고 싸울 테면 어서 싸워 보자. 자네 범장천이 녹옥죽봉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벌써부터 호시탐탐 수작을 꾸민 줄 누가 모르는 줄 아나?"
"나 장로, 방주가 되고 싶으면 말부터 점잖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그러지 않고서야 개방 삼십만 형제를 어떻게 올바로 이끌겠는가?"
부귀산인이 빈정거렸다.
"내가 방주가 되고 안 되고는 우리 둘이 겨루어 보면 알게 될 터인즉, 개방을 이끌어 가는 문제는 자네가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지!"
"그럼 입방아만 찧을 것 없이 방주님 의견대로 한번 겨루어 볼까?"
범장천의 말에 뭇 거렁뱅이들은 어서 시작하자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자 미운산이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우리 개방이 강호에서 이렇듯 큰 방이 되어 누구라도 두려워하게 된 것은 우리 형제들이 서로 혈육 같은 정으로 의좋게 도와 가며 살아왔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번에 방주를 새로 뽑는 일로 파벌간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심히 우려 되는구려. 그래, 내 생각엔 무공을 겨루어 방주를 뽑는 이 짓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심기가 좋지 않아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11대 장로들을 하나하나 쳐다본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11대 장로 중의 하나인 소씨 거렁뱅이를 다음 대 방주로 세웠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오. 금의파도 오의파도 아닌 그가 방주가 되면 개방이 더는 분열되는 일이 없을 것 아니오?"
금의파 사람들도 말이 없었고 오의파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평소 허랑방탕한 세월만 보내며 자기 단속도 잘 못하는 소씨 거렁뱅이를 어떻게 방주로 내세운단 말인가? 사람들은 제각각 수군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태도에 소씨 거렁뱅이는 은근히 오기가 났다.
'이러리라고 짐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이 소씨 거렁뱅이를 그렇게 만만하게 본단 말이지?'
이렇게 생각한 소씨 거렁뱅이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는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 소씨 거렁뱅이는 솔직히 내 몫이 아니라 생각하여 방주 자리는 꿈도 꾼 적이 없소.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를 방주로 추대했다면 나는 한사코 거절했을 거요.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소. 여러분들이 하나같이 나를 업수히 여기는데, 그걸 아는 이상 오기가 나서라도 방주 자리를 차지하고야 말겠소."
그리고는 한동안 껄껄 웃어대더니 장로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약을 올렸다.
"오의파고 금의파고 피장파장 매일반, 쓸 만한 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오합지졸들 뿐인데 거기에 무슨 방주감이 있는가?"
그러자 소검 오평이 벌떡 일어나며 칼을 빼려고 했다. 소미타 추우가 얼른 오평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금의파 여섯 장로를 감당하기도 벅찬데 괜히 소씨 거렁뱅이까지 건드려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금의파 장로 청한자자 노명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 장로…… ."
그가 막 입을 여는데 소씨가 그의 말허리를 끊으며 큰소리로 웃어댔다.
"뭐 나한테 그렇게 예의를 차릴 건 없지. 앉게. 앉아서 말해도 괜찮으니까."
완전히 노명성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노명성은 방주 다음으로 개방 장로들 가운데 가장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씨 거렁뱅이의 무례함을 탓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소 장로의 실력은 나도 한두 가지는 알고 있소. 다른 것은 몰라도 두 가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노 장로께서 말씀하시는 그 두 가지란 무엇입니까?"
소미타가 물었다.
"하나는 술이요, 다른 하나는 안주 장만을 잘하는 것이지요."
노 장로가 점잖게 내뱉는 말에 뭇 거렁뱅이들은 와―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웃지 않고 정색하며 말했다.
"좋다, 노명성! 내 오늘 본때를 좀 보여 주지."
미운산이 손을 한 번 휙 저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사람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미운산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말씨름을 할 것 없네. 쓸데없이 시간만 질질 끌 게 아니라 이렇게 하세. 먼저 금의파 장로 넷과 오의파 네 장로가 겨루어 보고, 소 장로는 금의파 나머지 두 장로와 겨루기로 하세. 이렇게 각각 한 차례씩 겨루어 마지막까지 남는 두 사람이 그 승부를 가리는 걸세. 어떤가?"
개방 사람들은 일제히 찬성의 뜻을 표했다.
개방 집법장로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가 장로들 속에서 나와 방주 양옆에 섰다.
"자, 시작들 합시다!"
사개 정원이 소리쳤다.
금의파에서는 출수표 노경이 나오고 오의파에서는 과천청 제갈옥생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암기의 명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당연히 암기 쓰는 재주를 겨루리라고 짐작했다.
"제갈 장로님, 우리 둘은 서로 혈도만 찌르는 것으로 승부를 냅시다. 개방 형제들이 보고 있는 데서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히면 앞으로 형제들 보기 민망하지 않겠소?"
출수표 노경이 말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인 과천청 제갈옥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주서서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상대방의 어깨와 팔만 노려보았다.
개방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명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출수표 노경은 표도( 刀) 열 개를 던져 열 사람을 동시에 찔러 눕히고 노주 4괴(四怪)의 포위를 간단히 물리친 바가 있다. 그런가 하면 과천청 제갈옥생은 손 한 번 번쩍하면 암기가 새까맣게 하늘을 가렸다가 쏟아져 내리는데 이렇듯 암기 던지는 재주가 뛰어나다해서 우과청천(雨過靑天) 과청천으로 불리기도 했다. 둘의 암기 실력이 이러하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치러 보지 않고서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을 그렇게 꼼짝 않고 마주서 있었다. 너무도 긴장하여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눈치였다. 누구라도 한치의 빈틈만 보였다간 그대로 패할 것이었다. 그런데 출수표 노경의 팔소매가 아쉽게도 너무 길었다. 소매가 길면 자연 손 쓰는 데 방해가 된다.
제갈옥생에게도 약점이 보였다. 그는 머리 뒤에 시정배들이 쓰는 족두리모자를 썼는데 그 꼭대기에 술이 있고 뒤통수엔 댕기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이것도 암기를 쓰는 데 장애가 될 게 틀림없었다.
문득 출수표 노경이 눈을 깜빡했다. 이때를 틈타 과청천이 잽싸게 손을 움직였다. 순간 한 무리 황충이 날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쉬익쉭 일며 향적(向笛), 비침(飛針) 그리고 철질(鐵疾) 같은 여러 종의 암기 몇십 개가 노경을 향해 날아갔다. 출수표는 앞뒤로 암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출수표 노경도 약간 늦었을 뿐, 과청천이 암기를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미 은표(銀 ) 열두 개를 내던진 상태였다. 그것들은 과청천의 대혈을 겨냥하고 날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출수표 노경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려 했다. 비침이 어깨의 혈도를 찔러 어깨가 마비되는 통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과청천 제갈옥생도 팔에 은표를 맞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혈도를 찔리지는 않아 이 첫번 시합에선 오의파 장로 과청천 제갈옥생이 이긴 셈이었다.
금의파 장로 부귀산인 범장천은 맞은편에서 소검 오평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사뭇 긴장했다.
개방에는 이름난 검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를 소검 오평이고 다른 하나는 옥면검객 호심이었다. 소검 오평의 검술은 피를 보면 더욱 날렵해지는데 그 자신도 남과 싸울 때 부상을 입지 않은 적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상을 입을수록 검술이 비상해지니 이상한 일이었다. 한편 옥면검객 호심은 그가 개방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알 수가 없으며, 때문에 그의 검술이 어느 문하의 검술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넓고
두텁고 녹이 슨 칼 한 자루를 그저 무작위로 휘둘러 대는 듯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보고 검술에 대한 학문은 없이 오직 사람 죽이기만 즐길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오의파에서 소검 오평이 나왔으니 금의파에서는 자연 옥면검객 호심이 나와 대적해야 할 것이다.
"호 장로, 호 장로가 오 장로와 겨루어 봄이 어떻겠소?"
범장천의 말에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호심에게로 쏠렸다. 호심은 달빛에 검을 뽑아 비춰 보면서 심드렁히 말했다.
"범 장로님, 이 검은 남과 겨루어 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을 죽이는 데 쓰는 검인 줄 모르시오?"
그리고는 검을 보지도 않고 공중에다 힘껏 집어 던졌다. 검은 꼿꼿이 하늘을 찌르며 까마득히 올라가더니 내려올 때는 칼끝이 땅을 향하고 있었다. 호심은 가볍게 칼집을 내밀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떨어지는 칼을 받아 냈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나 실은 수월치 않은 재주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소검 오평이 옥면검객 호심에게 다가갔다.
"지금 그런 녹슨 칼로 잔재간이나 부릴 땐가? 자, 나하고 당장 자웅을 겨뤄 보자구."
소검 오평의 말에 옥면검객은 냉소를 흘렸다.
"내 이 칼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지 남과 겨루는 데 쓰는 칼이 아니라니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검 오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발끈한 소검 오평은 당장 칼을 쫙 뽑아 옥면검객 호심 앞에 휘두르며 열몇 가지 검법을 과시해 보였다. 그것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것으로 누구라도 당해 낼 수 없을 만큼 빈틈없어 보였다. 그러나 옥면검객은 참선하는 중처럼 눈을 감고 무심한 태도를 취했다.
기실 이것은 소검 오평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오만한 호심의 태도에 오평은 화가 날대로 났다. 그는 호심의 왼쪽 팔에 칼끝을 갖다 대고 소리쳤다.
"네가 말 한마디만 하면 이 칼을 떼겠다."
그는 칼끝으로 호심의 의복을 어깨로부터 죽 내리그었다. 그러나 호심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오평은 호심을 쏘아보면서 그를 한칼에 찔러 죽이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상대가 전혀 손을 쓰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찔러 죽일 수 있겠는가?
이때였다. 일점지 나장태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금의파엔 사람이 없나? 이렇다 할 검법도 없는 옥면검객을 내보내서 지금 뭐하자는 건가?"
그러나 금의파 장로들은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물론 그들도 심기가 편할 수는 없었다. 호심이 아무리 평소에 말이 없고 우직한 성격의 사나이라 하지만 이렇듯 방주 자리를 놓고 다투는 판국에도 저렇듯 꿈쩍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칼끝은 옥면검객 호심의 팔뚝에 더욱 깊이 파고들어 급기야 피가 샘솟듯 하였다. 호심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짓더니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평이, 자네가 날 이렇게 협박하니 하는 수 없군.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나 말게."
오평이 호심의 팔에서 칼을 뽑으며 내뱉었다.
"원망하고 안 하고는 차후 문제지."
"겁 많은 자가 오히려 용감한 척하고 용감한 자가 오히려 겁 많아 보인다는 도리를 자넨 모르는 모양이군. 자네가 오늘 지면 오히려 검도대가(劍刀大家)란 말을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
그러면서 옥면검객은 칼을 번쩍 뽑아 들었다.
둘은 드디어 한데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과청천 제갈옥생과 출수표 노경의 싸움과는 사뭇 달랐다. 암기로 싸우는 것은 물론 교묘한 재주를 보는 구경거리이기는 하지만 이렇듯 피투성이가 되도록 씨름하는 칼싸움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지는 않았다.
오평은 옥면검객 호심의 주변을 돌면서 칼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러 대고, 옥면검객 호심은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칼집을 들고 오른발 왼발을 바꾸어 디디면서 소검 오평의 칼을 피하기만 했다. 옥면검객은 이미 어깨와 허벅지에 칼을 맞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옥면검객을 걱정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평 저 친구는 검법이 너무 약해."
이때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섬광이 한번 번뜩하더니 어지럽게 휘두르던 오평의 검이 뚝 멎으면서 그 대신 호심의 검이 오평의 가슴을 내질렀다.
"으악!"
오평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검 오평은 옥면검객의 칼에 왼팔이 절반이나 뭉텅 끊겨 달아났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팔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오평의 고통스러운 기색은 눈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오의파 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과청천 제갈옥생이 급히 뛰어가 구급치료를 하느라 야단이었다.
방주 미운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혈도를 누르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하였는데 저렇듯 독하게 손을 대다니……."
옥면검객 호심이 미운산에게 읍을 하며 조용히 대꾸했다.
"개방의 장로로서 오늘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줄 저도 압니다. 이제부터 저는 개방의 일에 절대 상관을 안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칼을 허공에 던져 올렸다. 이번에는 칼자루가 먼저 내려왔다. 그는 칼을 잡더니 대뜸 칼집을 세 번 내리쳤다. 칼집은 세 동강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동안 개방에 있으면서 은혜를 입은 분들과는 이제부터 그 은정을 끊는 것이요, 나와 원수진 사람은 개방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나를 찾아와도 좋다는 말입니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 말을 하고는 그 녹슨 칼을 들고 그곳을 떠났다.
옥면검객 호심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탄해 마지않았다. 옥면검객 호심이 소검 오평과 겨루다가 그를 다치게 했으니 금의파와 오의파 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호심은 이것을 단순히 자기 개인과 오평 간의 은원에 귀결시키면서 개방을 적대시하는 말을 하였다. 이렇듯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금의파를 위해서는 좋을지 몰라도 그 자신이 앞으로 강호에서 활동하는 데는 상당히 불리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옥면검객 호심의 사내다운 처사에 감격하여 그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 소미타 추우가 갑자기 소리쳤다.
"금의파가 하는 짓이란 게 그렇지! 겁쟁이들이 아니면 허명만 가진 것들이! 자, 누구든 나와 겨루어 볼 자는 나오시오!"
그러자 청한자자 노명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원래 돈이 굉장히 많은 부호였으나 가산을 모두 흩어 버리고 개방에 들어와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9대 장로가 되었다. 개방 안에서도 성망이 아주 높은 장로였다.
"소미타, 자넨 개방의 집법장로가 아닌가? 그럼 말도 점잖아야지. 방중 제자들이 웃네, 웃어."
소미타가 앙천대소를 하였다.
"청한자자라구? 이름은 좋다. 개방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이간이나 일삼고 시비사단만 일으키면서도 청한자자라구? 금의파에 온통 자네 같은 작자들만 모여 있으니 우리 개방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지."
그러자 금의파와 오의파에서는 동시에 서로를 탓하며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노명성, 어디 자신이 있으면 한번 덤벼 봐! 왜 덤비지 못해?"
소미타의 말에 노명성이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추 장로, 자넨 웬만하면 나하고 붙지 않는 게 좋을걸? 개방에서 나보다 센 사람은 오로지 범 장로와 나 장로뿐이야. 자네 같은 사람은 나한테 상대도 안 된다구."
소미타는 겉으로 볼 땐 성질이 너그러워 보이나 사실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개방의 집법장로가 되었겠는가?
"노명성, 네가 강녕(江寧)에서 무수한 사람을 죽인 일을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 그러고도 개방에 들어와선 부처님 같은 얼굴을 하고 점잖은 체해? 남들이 인품 좋은 사람이라고 너를 칭찬할 때 부끄럽지도 않더냐?"
소미타가 마구 지껄였다.
순간 노명성의 기색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강녕에서의 일이 들춰지는 것을 가장 꺼려 했다. 그런데 소미타가 오늘 개방 사람들이 다 모인 앞에서 그 일을 들먹이니 속이 뒤집혔다.
"좋다. 네가 기어이 나와 겨루어 보겠다면 나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지."
노명성은 한걸음 다가서며 소미타를 겨냥하여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노명성의 장력은 일종의 면장공부(綿掌功夫)라고도 하는 아주 무서운 것이었다. 손바닥을 내밀 때는 별것 아닌 듯 조용하지만 일단 장력에 닿기만 하면 분신쇄골이 되곤 하였던 것이다. 노명성이 손을 쓰자 소미타도 노명성의 장법이 보통이 아님을 아는지라 황급히 대적해 나섰으나 몇 합도 못 가서 금세 허둥대기 시작했다. 소미타의 무공이란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혈도를 찌르거나 손톱으로 살가죽을 찢어 상대방을 상하게 하는 재주뿐으로 노명성 같은 고수들 앞에서는
그 재주를 그나마 발휘하지 못했다. 소미타는 병장기라도 쓸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럴 수도 없어 그저 피하기만 했다. 노명성은 한치의 틈도 주지 않고 공격을 가하면서 장을 후려쳤다. 아예 소미타를 요절낼 심산이었다.
"청한자자 노명성! 날 죽일 테면 죽여라. 이렇듯 독한 술법을 쓰는 네 심보를 누가 모를 줄 아느냐?"
소미타가 위험함을 안 오의파 장로들은 모두 가슴을 죄었다.
"이러다간 또 한 사람이 죽겠다!"
갑자기 탄식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뛰쳐나와 그 싸움에 끼여들었다. 그는 소미타와 더불어 노명성을 대적하였다. 사람들이 웅성내기 시작했다. 싸움에 끼여든 사람은 놀랍게도 금의파 장로사개 정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금의파 장로이지만 평소 소미타 추우와 가장 친했다. 둘은 다 같이 개방의 집법장로로서 매사에 행동을 같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현재 소미타 추우가 노명성의 손에 크게 상할 것 같으니 정원은 자신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무조건 뛰쳐
나와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노명성은 어이없어 하다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사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젠 이겼다 하고 추 장로를 돌려 보내시오. 이겼으면 됐지, 사람을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겠소?"
사개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노명성은 평소의 청한자자가 아니었다.
"사개, 넌 간참 말아!"
노명성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소미타를 공격하여 사경으로 몰아 넣으려 했다. 그의 과거를 까발긴 소미타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는 소미타에게 본때를 보여 줌으로 해서 누구라도 자기의 과거를 들먹이는 자는 용서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보다못한 사개가 느닷없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어디선가 뱀 세 마리가 튀어나왔다. 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노명성에게 날아가더니 그의 어깨와 목을 칭칭 휘감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자 은근히 고소해졌다. 평소 엄연한 장자(長者)의 체풍으로 점잔을 빼던 노명성이 이 꼴이 되었으니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죽일 놈아, 어서 뱀을 못 치우겠느냐? 이런 못된 짓이 어디 있어?"
노명성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사개는 소미타를 끌고 몇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가 노명성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가짜 부처님, 항복하시지요. 항복 안 한다구요? 그럼 나하고 또 백여 합 싸워 볼까요?"
소미타는 차마 웃지 못하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패배를 자인하고 있었다.
사개 정원은 아까와는 달리 느리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뱀들은 비로소 노명성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사개에게로 구불구불 기어오더니 그의 머리며 목덜미에 유순하게 매달렸다.
금의파와 오의파는 세 번을 연거푸 겨룬 셈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귀산인 범장천과 일점지 나장태의 차례가 되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주목했다. 범장천의 술수가 교묘하고 세밀하다면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몇십 합을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범장천과 나장태는 서로가 한치의 양보 없이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날뛰었고 그 술수는 점점 독해져 갔다. 그러나 반나절을 싸워도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미운산은 소씨 거렁뱅이를 돌아보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그들 둘과 싸워 보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를 눈치챈 소씨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기가 차는군. 나 혼자서 저 두 사람을 상대하라구?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인가?'
그러나 그는 미운산 앞에서 이미 개방 방주를 당분간 맡아보겠다고 약속한 터라 모르는 척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서며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을 쳤다.
"잠깐!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한창 죽기살기로 싸우던 두 사람은 엉뚱하게 소씨 거렁뱅이가 뛰어들자 일시에 그에게로 격분이 쏠렸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한패가 되어, 범장천은 36식 탈혼장(奪魂掌)으로 나장태는 적고권(赤尻拳)으로 일제히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취권(醉拳)을 써서 두 사람을 대적했다. 비틀비틀하면서 주먹으로 나 장로를 후려갈기기도 하고 발길질로 범장천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잠시도 숨돌릴 틈 없이 반나절이나 싸웠다. 소씨 거렁뱅이의 손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나장태와 범장천은 소씨 거렁뱅이가 엉뚱한 짓을 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와 한 번도 싸워 본 적은 없었는데 막상 겨루어 보니 그 내력이 보통이 넘었다.
나장태는 권법을 바꿔 적고권 대신 금나24식(擒拿二十四式)을 써서 소씨 거렁뱅이를 공격했다. 그중에도 꼬집고 비틀고 뜯는 술법 몇 가지가 극히 교묘했고 특히 꼬집는 술수가 비상했다. 이로써 소씨 거렁뱅이의 기세가 다소 기우는 조짐을 보였다. 이를 눈치챈 범장천이 소리쳤다.
"이봐 소씨, 그 잘난 무공을 자랑하고 싶어서 끼여든 모양인데, 어서 덤벼 보라구."
그리고는 나 장로보다 더욱 독한 장법으로 공격을 해댔다.
두 사람은 혈도를 찌르는 정도로 싸움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소씨 거렁뱅이를 아예 죽여 버릴 작정으로 돌아쳤다. 그러나 소씨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둘 사이를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아슬아슬하게 피해 다니다가 돌연 나장태의 어깻죽지를 냅다 후려쳤다.
"어이쿠!"
나장태는 단말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저만치 날려가 '쿵' 하고 떨어졌다.
소씨가 한숨 돌리며 범장천을 향해 말했다.
"이쯤에서 끝내기로 합시다."
소씨가 자리를 뜨려 하자 범장천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소씨 거렁뱅이! 난 너하고 끝장을 볼 테다!"
그는 잽싸게 소씨 거렁뱅이의 앞을 막아 섰다.
소씨 거렁뱅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범장천을 노려보았다. 범장천은 그 기세에 눌린 듯 주먹을 휘두르려다 말고 소리쳤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테냐! 감히 덤비지는 못하는 걸 보니 내가 무서운 모양이지?"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미운산이 한심한 듯 끌끌 혀를 찼다. 평소에 범장천이 그토록 속 좁은 사람인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저렇듯 자제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에게 어찌 개방 방주 자리를 맡길 수 있겠는가?
"범 장로, 얘기 좀 하세."
미운산이 범 장로를 불렀다. 범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싸움을 그만두고 못 이기는 척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솔직히 막상 싸움을 계속한다면 소씨 거렁뱅이를 이길 자신도 없던 터였다.
미운산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사람들을 향해 읍을 하고는 말했다.
"약속대로 모두 한차례씩 무공을 겨뤄 봤소. 결과는 역시 내가 짐작했던 대로요. 자,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소씨를 새 방주로 내세웠으며 하는데 아직도 반대하는 분이 계시오?"
소검 오평이 상하고 소미타 추우와 일점지 나장태가 패한 오의파에서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모두들 웅심(雄心)을 품고 방주 자리를 차지해 보겠다고 그 야단을 쳤는데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그들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를 방주로 내세우겠다구? 제기랄, 마음대로 하라지. 매사에 제멋대로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소씨가 방주가 되면 유리한 점도 없지 않아. 어쨌든 소씨가 금의파는 아니니 그것만도 다행이야. 소씨 같은 방주야 우리 파에서 적당히 주물러 주면 되는거구.'
한편 이번 싸움에 옥면검객 호심을 잃게 된 금의파 장로들은 서글픈 기분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옥면검객 호심은 무뚝뚝하고 과묵한 성격이긴 해도 금의파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가 다 도맡다시피 했었다. 호심이 있기에 금의파는 그만큼 위풍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호심을 잃게 되다니……. 그들은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나장태를 방주로 앉히는 것보다는 소씨 거렁뱅이가 낫다고 그들도 한편으로 생각했다.
미운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몸이 지금 큰 병에 걸렸지만 앞으로 회복이 될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소. 난 개방의 일을 새로운 방주에게 맡기고 소림사(少林寺)에 가 있을까 하오. 그래서 치료하여 독을 뽑아 버리면 다시 돌아와 개방의 일을 주관하겠소."
미운산의 말에 개방 사람들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소씨 거렁뱅이가 방주 자리에 아주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미운산이 병을 치료하는 동안 얼마간 맡아보게 하는 정도라면 그다지 염려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편 몇몇 사람은 소씨의 성격상 방주 자리에 며칠만 앉아 있으면 누가 밀어내지 않아도 제풀에 좀이 쑤셔 물러날 것이라고 단정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반대하는 기미가 없자 미운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녹옥죽봉을 이리 내어라!"
미운산이 운낭과 미립을 향해 명령했다. 운낭과 미립이 녹옥죽봉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소씨 거렁뱅이, 이젠 자네가 이 녹옥죽봉으로 우리의 수많은 개방 식구들을 통솔하게. 물론 매사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하네."
아무리 실없는 짓을 잘하는 소씨 거렁뱅이일지라도 이 엄숙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공손히 절하며 두 손으로 녹옥죽봉을 받아 들었다.
녹옥죽봉을 받아 든 그는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간수해야 할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홍안루에서 요리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함부로 굴리거나 잃어버려서도 안 되니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었다.
녹옥죽봉을 받아 든 소씨 거렁뱅이의 얼굴에 전혀 기쁨의 빛이 보이질 않자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씨 거렁뱅이가 지금 녹옥죽봉을 어떻게 건사할까를 걱정하며 다시 홍안루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개방 제14대 방주 미운산은 방주 자리를 지금부터 정식으로 제15대 방주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기노라!"
미운산이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녹옥죽봉을 오른손에 쥔 소씨 거렁뱅이는 땅에 앉아 개방 사람들의 축하를 기다렸다.
맨 처음으로 전임 방주 미운산이 다가와서 깊숙이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수하 미운산이 방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미운산까지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하니 소씨 거렁뱅이는 속이 흐뭇해졌다.
'그래야지, 아무렴 그래야지. 녹옥죽봉을 넘겨주면서 나더러 수고 좀 해 달라구? 그런 부탁을 하자면, 아무렴 무릎쯤은 꿇어야지.'
그러다가 그는 문득 미운산의 눈길에서 질투 같기도 하고 앙심을 품는 듯하기도 한 날카로운 빛을 읽었다.
'왜 저러지? 자기가 스스로 방주 자리를 나한테 떠맡겨 놓고는 마치 내가 빼앗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잖아?'
그러나 미운산은 곧 웃는 낯으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수하는 방주님이 만사 여의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소씨 거렁뱅이도 곧 생각을 달리했다.
'하긴 독해를 당해 방주 자리를 내놓았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지. 당연히 섭섭할 거야.'
미운산은 소씨 거렁뱅이에게 침을 탁 뱉고는 사람들 시중을 받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다음은 금의파 다섯 장로가 함께 걸어와 소씨 거렁뱅이에게 절을 하였다.
"금의파 장로 범장천, 노명성, 서불성, 정원, 노경 등 다섯은 이제부터 방주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미운산이 했던 것처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침을 뱉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금의파 장로들을 일일이 주시해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서불성이나 노경은 그래도 괜찮지만 범장천이나 노명성, 정원 같은 친구들은 믿을 게 못 돼.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큰코다칠지도 몰라.'
그들이 물러나고 나자 이번엔 오의파 장로 넷이 걸어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방주님께서 만사 여의하기를 바랍니다."
그들 중 일점지 나장태의 눈길이 좋지 않은 것은 소씨 거렁뱅이에게 어깨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분이 삭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한쪽 팔이 잘려 나간 소검 오평의 날카로운 눈빛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 자식은 또 왜 저래? 팔이 절단난 게 어디 내 탓인가? 망할 것들, 눈길들을 보니 날 잡아먹지 못해 야단들이구나. 이거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았다간 제 명에 못 죽겠어.'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거 미운산의 꼭두각시 놀음에 괜히 휘말려 든 거 아냐?'
일점지 나장태는 있는 한껏 가래를 끓어올려 소씨 거렁뱅이의 얼굴에 대고 칵 내뱉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부아가 났으나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제기랄, 팔자에도 없는 방주질 하려니 꼴 좋구만. 남들이 면상에다 침을 탁탁 뱉어 놔도 찍소리도 못하고 등신처럼 앉아 있어야 하니. 빌어먹을, 도대체 누가 이따위 개코 같은 예법을 만들어 놔가지구…….'
개방 사람들은 계속 차례대로 걸어 나와 절을 하고는 침을 뱉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사람들이 침을 다 뱉은 후에야 문득 홍칠이 떠올랐다.
'홍칠인 어딜 간 거지? 자식, 왜 오지도 않았을까?'
제7장 두 남매와의 만남
홍칠은 절의 법당 안에 누워서 지금이라도 개방대회에 가 볼지 어쩔지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쯤 소씨 거렁뱅이의 방주 취임식이 거행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홍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때였다.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 몇이 들어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옷자락이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중치막을 입고 허리엔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에 검정 비단띠를 질끈 동여맨 것으로 보아 철장방 무리들이 틀림없었다.
네 사람은 곧장 홍칠에게로 걸어왔다. 홍칠은 그들이 바짝 다가올때까지 잠자코 쳐다보기만 했다.
"넌 개방 놈이 틀림없지?"
한 놈이 소리쳤다.
홍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가 홍칠이냐?"
넷은 히죽 웃었다.
홍칠이 웃는 낯으로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홍칠이오. 무슨 일로 나를 찾소?"
"우리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한 놈이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차림새를 보니 철장방 분들 같소만."
"맞았어. 눈썰미가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군."
넷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들은 홍칠을 에워싸더니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홍칠이 두 손을 움직이는 듯하자 넷은 일사불란하게 왼손을 가슴 앞으로 들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홍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래, 나를 찾아온 까닭이 뭐요? 어디 술 먹을 일이라도 생겼나?"
"술? 죽음이 박두한 줄도 모르고 한가한 소리 하는군. 아직 콩인지 팥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모양인데?"
넷은 돌연 손을 뻗쳤다. 한 놈은 홍칠의 배후에서 홍칠의 등을 겨냥하여 절륜의 힘으로 장을 갈겼다. 홍칠은 잽싸게 위로 뛰어오르며 장을 피했다. 그러자 다른 두 놈이 병장기를 꺼냈다. 하나는 철장(鐵掌)이고 다른 한 놈이 든 것은 정강단봉(精鋼短棒)이었다. 단봉을 쥔 놈은 홍칠의 두 다리를 겨냥하여 마구 내리치고 철장을 쥔 놈은 홍칠의 가슴팍를 쥐어뜯으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옆에 있는 다른 한 놈은 슬그머니 독장(毒掌)을 발산했다.
넷은 아주 호흡이 잘 맞았다.
홍칠이 몸을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오는 순간 넷은 다시 한 번 일격을 가해 왔다. 홍칠은 큰소리를 내지르며 한 발로는 단봉을 차내 버리고 다른 한 발로는 독장을 내미는 장한을 걷어찼다. 단봉을 든 놈이 다시 달려들어 홍칠의 두 발을 겨냥하고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홍칠은 냉큼 위로 뛰어오르며 손바닥에 기를 모아 놈의 정수리를 가차없이 내리쳤다. 놈은 두 눈에 시뻘건 피를 내뿜으며 나무토막 쓰러지듯 그대로 쓰러졌다.
"아니, 철장방엔 그렇게도 인물이 없더냐? 어디서 네 놈들 같은 허섭쓰레기를 내게 보냈는지 모르겠구나."
홍칠은 실실 약을 올리며 나머지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철장방이라면 그래도 강호에서 꽤 큰 방인데 오늘 보니 한심한 놈들만 모인 것 같구나. 그래가지고야 어디 이 홍칠을 당해 내겠느냐?"
이때였다. 누군가 큰소리로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홍칠이 영웅인 줄이야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 오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군."
홍칠은 얼른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활짝 열리며 한 무리의 인간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앞장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구천인은 홍칠을 노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홍칠이, 목숨이 아까우면 일찌감치 항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자네 개방 식구들을 몽땅 우리 철장방의 부하로 만들 셈인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라구?"
홍칠이 앙천대소를 했다.
"구천인, 사람들이 널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강호에 나타난 미치광이라고 하던데, 오늘 보니 그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구나. 이 미치광이야, 그래 네가 보기에 우리 개방 사람들이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더냐?"
"그야 두고 볼 일이지. 내가 너를 먼저 요절내고 소씨 거렁뱅이까지 목을 치면 너희들 개방이 내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그럼 좋다. 어디 겨루어 보자."
홍칠이 유유히 말했다.
"홍칠이 네가 여기서 죽는 것쯤은 별문제 아니겠으나 개방대회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거야. 너희들 개방의 그 미친 개들이 지금 어쩌고 있는지 아느냐? 한식구끼리 서로 물고 뜯느라 야단이다. 지금쯤 서호 기슭엔 너희들 더러운 거렁뱅이 시체로 쫙 깔렸을 거다."
구천인은 지금 개방 사람들이 방주 자리를 놓고 싸우느라 무수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몹시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운산 방주는 지금 방내의 문제에만 정신이 팔려 방외 놈들이 개방을 한입에 먹어 치우려 한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겠지……."
이렇게 생각한 그는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개 큰 방의 방주로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불 난 집에서 도적질할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구나. 실력이 있으면 나하고 얼마든지 싸워 보자. 나를 이기면 두말 않고 철장방에 무릎을 꿇지."
구천인은 큰소리로 웃더니 느릿느릿 말했다.
"잘 생각했다. 난 한번 죽이려고 맘먹으면 반드시 죽이고야 마는 성미거든. 네 놈이고 소씨 거렁뱅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죽여 버리면 다른 놈들이야 자연 내 앞에 무릎 꿇게 되겠지."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안색을 바꾸며 짧게 외쳤다.
"저 놈을 에워싸라!"
그러자 철장방 몇십 명이 홍칠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홍칠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구천인, 듣자 하니 산에서 무슨 도깨비 같은 철장공을 연마했다면서? 글쎄, 독약을 쓰는 내기를 하면 너도 크게 뒤지지야 않겠지만 무공을 겨룬다면 너 정도 재주로는 어림도 없어. 너희들 철장방 놈들이 모두 덤빈다 해도 날 상대하긴 어려울 거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오늘 밤이 네 제삿날인 줄만 알라구!"
구천인은 손을 들어 휙 저었다. 그러자 몇십 명 철장방 무리들이 겹겹으로 에워싸며 홍칠에게로 다가들었다.
홍칠은 그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고 싸울 준비를 하였다.
"홍칠이, 전번에 독약 먹기 내기를 할 때는 네가 솥에 있는 독수리와 뱀을 먹었으니 이겼다고 하자. 그러나 이번에도 과연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다음에 다시 한 번 겨뤄 볼 기회가 있는 거고."
구천인이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칠의 배후에 있던 놈 하나가 장을 내밀었다. 몸 뒤에서 장풍 소리가 나자 홍칠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한 장 마주 내밀었다. 그것은 아주 엄청난 장력으로 상대방의 손바닥이 거기에 마주치기만 하면 당장에 팔이 부러질 정도였다. 상대방은 급히 손을 거둬 들이며 홍칠의 장풍을 피하느라 비틀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앞뒤에 있는 다른 세 놈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놈은 홍칠의 가슴을 겨냥하고 다른 두 놈은 홍칠의 양쪽 옆구리를 각각 들이쳤다.
"생쥐 같은 놈들! 정말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홍칠은 한번 히죽 웃더니 기를 모아 몸을 훌쩍 솟구쳐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요유권법(逍遙游拳法)으로 '소요유'란 장자(莊子)의 <소요편(逍遙篇)>에서 나온 말이다. 그 내용에는 사람도 곤붕(鯤鵬)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으면 하는 염원이 반영되어 있다.
진을 치고 있던 철장방 놈들은 저마다 홍칠을 잡기 위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하였다. 놈들은 홍칠의 장법과 권법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지금 같은 독특한 술법은 예상치 못했었다. 홍칠은 달리 손을 쓰려는 기색은 없이 '소요유'를 써서 철장방 놈들을 이리저리 끌고만 다녔다. 그것은 순전히 철장대진(鐵掌大陣)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홍칠이 하나 정도야 간단히 해치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철장방 패들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내심 당황했다.
홍칠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 무섭다는 철장대권이 겨우 요거냐? 어디 한번 혼들 좀 나봐라.'
이때였다. 보다못한 구천인이 소리쳤다.
"어서 저 놈을 죽여 버려라!"
철장방 패들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열 명도 넘는 인원이 철장대진을 치고도 홍칠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강호 바닥을 활개치랴! 안에 있던 넷은 일제히 소리를 내지르며 홍칠을 향해 각기 방장을 내밀었다. 그 장풍이 어찌나 센지 무쇠로 된 몸이라도 견뎌 내지 못할 성싶자 홍칠은 자기도 모르게 강룡십팔장의 견룡재전을 썼다. 견룡재전은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홍칠이 한 번씩 장을 휘두를 때마다 철장방 무리들은 손도 못 쓰고 뒤로 밀려나곤 했다.
구천인은 홍칠이 개방 방주만이 전수받을 수 있는 전가지보(傳家之寶)인 강룡십팔장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홍칠이 개방 방주만이 알고 있는 강룡십팔장을 쓸 수 있게 된 걸까? 장법을 쓰는 솜씨가 방주 미운산 못지않으니 정말 놀랄 일이로군.'
구천인은 홍칠을 노려보다가 외쳤다.
"홍칠이! 그러고 보니 개방 방주가 된 모양이군? 그런데 어쩐다지? 정말 애석한 일이군 그래."
"애석하긴 뭐가 애석하단 말이냐?"
홍칠이 되물었다.
"애석한 일이고말고. 방주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황천길로 가게 생겼으니 이런 딱한 일이 어디 있겠나?"
"정말 네가 날 죽일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죽여 봐라. 너한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 보자."
"네 놈들 개방의 하는 짓거리가 평소에 여간 거슬리는 게 아냐. 일개 거렁뱅이들의 모임인 주제에 뭐 잘났다고 나랏일까지 참견이냐? 뭐 송나라를 흥성시켜야 한다느니 간신들을 잡아죽여야 한다느니 제 코도 못 씻는 주제에 그런 걸 운운할 때냐, 네 놈들이? 쓸데없는 짓 말고 네 놈들 개방 일이나 잘하란 말야!"
그제야 홍칠은 알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 철장방이 우리 개방을 원수처럼 여기는 까닭은 무슨 개인적인 원심에서가 아니라 우리 개방이 나랏일에 너무 나서는 데 불만인 거로구나. 그러나 개방이 정의를 외면하고 철장방과 한 무리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홍칠은 구천인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구천인, 너야말로 우리 개방 일에 웬 참견이냐? 정말 주제 넘는 놈이구나!"
"개방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큰소리냐, 큰소리는? 일찌감치 무릎 꿇고 철장방에 들어오는 게 탈이 없을 거야."
구천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너같이 둔한 놈이 우리 개방을 먹어 삼키겠다구? 과연 미치광이다운 발상이로구나."
"홍칠이! 너 정말 죽지 못해 환장한 모양이구나!"
구천인이 약이 올라 소리쳤다.
철장방 무리들은 다시 홍칠을 에워싸며 기회를 노렸다. 홍칠의 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렇듯 에워싸고 오랜 시간 진을 빼면 내력이 소모되어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구천인, 능력이 있으면 어서 덤벼 봐라."
"죽을 놈이 급하게 서두르긴. 아무튼 한 가지는 약속하지. 시체는 온전하게 놔둘 거야."
홍칠은 다시 철장방 무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번 싸움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았다. 홍칠의 장법이 무섭다는 것을 안 철장방 무리들은 그가 손만 내밀면 잽싸게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들곤 하면서 이렇다 할 공격은 하지 않고 애만 태웠다. 홍칠은 점차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철장대진에 치여 죽기 십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홍칠의 내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그가 내치는 장력도 이전처럼 맹렬하지 못했다.
"핫하하, 기분이 어떤가? 보아하니 기운이 딸리는 모양인데, 더 이상 헛수고할 필요 없이 항복하지 그래?"
구천인이 통쾌해 하며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홍칠은 화가 나서 연거푸 몇 장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장력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그제야 구천인은 느릿느릿 홍칠에게 다가섰다. 그는 손짓으로 부하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홍칠을 향해 천천히 장을 내밀었다. 물론 그 장법은 철장방 무리들에 비해 무척 고명한 장법이었다. 구천인이 장력을 발산하자 홍칠이 잽싸게 맞받았다. 두 장력이 마주치자 둘은 비틀하며 뒤로 밀려났는데 홍칠이 두어 걸음 더 밀려났다.
다른 때 같으면 홍칠이 구천인보다 더 강했을 것이지만 힘을 많이 소진한 지금은 그 반대였다.
"홍칠이, 이번엔 영락없이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은 한바탕 웃어대더니 더욱 매서운 기세로 홍칠을 맹공격 하였다.
구천인의 철장공은 확실히 대단했다. 홍칠은 구천인이 공격할 때마다 뒤로 밀려나서 더는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홍칠이 입을 악물며 구천인의 장을 맞받아 힘껏 밀어내자 이번엔 어느 한쪽도 기울어짐이 없이 팽팽히 맞섰다. 홍칠은 있는 힘을 다해 버팅기며 생각했다.
'구천인과 단둘이서 내력을 겨룬다면야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문제는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저 부하 놈들이다. 어느 놈이든 슬그머니 나서서 내 등을 한 번만 후려치면 난 꼼짝없이 죽고 말거야.'
홍칠은 안 되겠다 싶어 소리쳤다.
"구천인, 네가 정말 능력이 있다면 나하고 일 대 일로 내력을 겨루어 보자!"
홍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구천인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었다.
"네가 내 이 철장한독(鐵掌寒毒)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무공이 그렇게 센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쩔쩔매지? 어쨌거나 이 한 가지만 알아 두라고. 네가 나하고 내력을 겨룰 때 내 부하들 중 하나가 네 놈 등판을 한 번만 슬쩍 건드려도 너는 그대로 황천행이야."
홍칠은 그 말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구천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이때였다. 구천인의 얼굴이 갑자기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엄청난 힘이 밀려 왔다. 홍칠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제야 홍칠은 구천인이 자기의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수작으로 그런 말을 지껄였음을 문득 깨달았다. 홍칠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기를 모아 죽을 힘을 다해 장력을 내뿜었다.
구천인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야? 그렇게 멍청히 쳐다만 보고 있을 거냐?"
구천인의 말에 철장방 사람 하나가 홍칠의 등뒤로 여유작작 다가왔다. 그는 손을 들어 홍칠을 겨냥하며 확인하듯 물었다.
"죽이라는 겁니까?"
구천인은 답답하다는 듯 놈을 향해 눈을 부릅떠 보였다. 일개 방주로서 차마 그 말은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놈은 그제야 구천인의 속뜻을 알아듣고 손을 치켜 들어 홍칠의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홍칠은 그만 숨이 턱 막히면서 속에서 울컥 더운 것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하, 홍칠이, 이제 토하기만 하면 넌 죽는다."
구천인이 신난다고 웃어댔다.
홍칠은 피를 토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악물었으나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울컥 피를 토하고야 말았다.
"핫하하, 잘한다. 너희들도 어서 한 놈씩 와서 이 놈의 등판을 가볍게 안마해 줘라. 죽지는 않고 피만 토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은 재미겠다."
구천인의 말에 철장방 부하 몇이 등뒤로 다가섰다. 먼저 한 놈이 홍칠의 등에 있는 폐문소계(肺門所系)를 가볍게 내리쳤다. 홍칠은 다시 한 번 왈칵 피를 토했다. 이번에는 다른 놈이 홍칠의 어깻죽지를 슬쩍 내리쳤다. 홍칠은 낯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계속 피를 토했다.
"홍칠이, 너도 참 안됐구나.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었으니 이런 딱한 노릇이 어디 있겠나? 어쨌거나 이 구천인을 원망 마라. 나도 다 시켜서 하는 짓이니까. 누가 너를 죽이라고 시켰는지를 알면 너는 아마 놀라 기절해 넘어질……."
이때였다. 누군가가 구천인의 말꼬리를 낚아채며 끼여들었다.
"거 참, 말이 너무 많군 그래."
구천인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얼른 손을 거두고 부하들에게도 가만히 있으라는 눈치를 보냈다.
홍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써서 얼굴을 가린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홍칠에게 다가왔다.
"홍칠이, 내 보기엔 개방 방주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개방 사람들은 천하를 집으로 삼고 동가숙 서가식하는 걸 운명으로 여기거늘 내 집이 어디 있다구 내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요?"
"너희들 개방은 지금쯤 이미 풍비박산되어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네 사부 소씨 거렁뱅이가 개방 방주 자리에 오른다 해도 며칠 못 가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니,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개방 일에 상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홍칠은 이 여인이 개방의 일을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생각을 숨기고 은근히 모르는 척 물었다.
"미운산 방주님이 계신데 내 사부님이 무슨 방주 자리엘 앉는단 말이오?"
홍칠의 말에 여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미운산 방주야 독해를 당한 몸이니 자연 물러나지 않을 수 없지. 천하 영웅 중에 미운산 방주처럼 영민한 사람이 없지. 처사가 그러하면 자연 큰 탈은 안 생기는 법이야."
홍칠은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호를 횡행하는 구천인마저 쩔쩔매는 것으로 보아 보통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내 일에 간섭하는 것이오?"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 뭐하려구? 아무튼 죽지만 않고 살아 있으면 조만간에 알게 될거야."
여인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웃더니 이번엔 구천인을 향해 말했다.
"구 방주님, 이쯤 해 두고 저 사람을 놓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저 놈은 한 마리 호랑이나 다름없습니다. 놓아주었다간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오."
구천인이 홍칠을 노려보며 말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요. 어쨌거나 저 사람은 이제 병신이 다 된 호랑이가 아닌가요?"
여인의 말에 구천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떠나가면서도 구천인은 홍칠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홍칠이, 이번엔 살려 준다만 다음엔 날 만나지 않게끔 각별히 조심해!"
홍칠은 코웃음을 쳤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놈이다.'
여인이 홍칠에게 어서 돌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홍칠은 몸을 돌리려다 말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절을 나선 홍칠은 현기증을 느끼며 가까스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넘어지며 간신히 걸음을 옮긴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어느 집의 문앞에 이르렀다.
그는 벽에 기대어 숨을 돌린 뒤 기운을 내어 문을 밀쳤다.
"아무도 없습니까?"
홍칠이 소리쳤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홍칠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집 안에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위에 금방 꺾어 온 듯한 생화가 꽂힌 화병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홍칠은 다시금 어지럼증을 느끼며 탁자 옆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주인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자. 그래서 주인이 오면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그는 다시 구토증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주인이 오기 전에 쓰러지면 안 돼. 주인이 올 때까지만…….'
그가 혼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낭랑한 계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깐? 계속 그러면 같이 안 놀 테야?"
그러자 이번엔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 놀 테면 그만둬. 누가 겁난다나?"
그러더니 문이 열리며 아가씨 하나와 자그마한 사내애 하나가 들어왔다. 그림같이 이쁘게 생긴 아가씨였다. 홍칠은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누난 평소엔 자기 침대에 딴사람은 앉지도 못하게 하더니 오늘은 왜 가만히 있어? 저 사람은 아예 누나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러자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홍칠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누군데 이 방에 들어와 있죠?"
기력이 쇠할대로 쇠한 홍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난 홍칠이란 사람이오……."
그러나 그의 말은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아가씨가 물끄러미 홍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홍칠은 다시금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누나, 저 사람은 죽을 것 같애. 저 사람이 누나 침대 위에서 죽으면 무서워서 어떡해? 어떡해, 누나?"
사내아이가 떠들어댔다.
아가씨가 듣기 싫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따위 소리 말고 무서우면 밖으로 나가."
그녀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자그마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턱 치며 소리쳤다.
"무섭긴! 산 사람도 무섭지 않은데 죽는 사람이 왜 무서워?"
"얘, 네가 가서 저 사람이 어디가 안 좋은가 살펴봐라."
"내가 보면 아나, 뭐? 누나가 직접 살펴보지 왜 나한테 시켜?"
사내애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아가씨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동생에게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너는 같은 사내끼리잖아. 사내들끼린 괜찮단 말이야. 어서 가서 어디가 안 좋은지 좀 살펴봐."
"저 꼴을 보면 몰라? 온몸이 피투성이인데 상하지 않은 데가 어디 있겠어? 자기는 가만있고 뭐든 나만 시키려구 들어."
사내애는 툴툴거리며 다가오더니 홍칠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홍칠의 옷은 그가 토한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낯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한 게 흡사 산송장 같았다.
아가씨는 동생이 홍칠의 옷을 벗기는 것을 바라보다가 홍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얼굴을 붉히며 외면했다.
사내애는 홍칠의 옷을 벗겨 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야. 몇 대 얻어맞았을 뿐인데, 뭐. 그런데 말도 한마디 못하고 다 죽어 가는 몰골이라니, 이상한데?"
"어딜 상한 것 같으니?"
아가씨가 먼발치에서 물었다.
"뭐 그렇게 크게 상한 것 같진 않아. 앞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좀 다쳤을 뿐이야. 이런 정도 맞아서는 나도 견뎌 내겠는데 이런 어른이 꼼짝을 못하고 죽어 가다니, 좀 이상해……."
"다른 데 또 상처가 없나 자세히 살펴봐."
"다른 데? 다른 데가 어디야? 그런 데를 어떻게 살펴보란 말이야?"
사내아이는 계속 툴툴댔다.
"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고 살펴보란 말이야."
사내애는 성가시다는 듯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급기야 홍칠의 사타구니에서 심각한 상처를 발견해 냈다. 철장에 할퀸 상처였다.
"그러면 그렇지. 큰일났어, 누나!"
사내애가 놀라서 소리쳤다.
"왜 그러니?"
"글쎄 이 바보 같은 사람 좀 봐. 철장방네 철장환혼술(鐵掌還魂術)도 못 피했어."
"아니 어디를 철장환혼에 상처를 입었다는 거니?"
"글쎄 사타구니를 형편없이 할퀴었어."
사내애의 말에 처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사내애는 홍칠을 흘낏 보고는 누나에게 소리쳤다.
"왜 그러구 서 있기만 해?"
"네가 어떻게 손을 써 봐."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난 약도 바를 줄 모르는데, 어서 누나가 와 봐."
처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애는 아직 어려서 누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처녀는 홍칠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벌거벗은 남자에게 접근할 입장이 아니라서 몹시 애가 탔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난 곤란해. 내가 여기서 가르쳐 줄 테니 네가 약을 붙여주는 게 어떻겠니?"
"싫어. 난 못해. 이걸 보란 말야. 살이 다 찢어져 뼈가 다 내보이는데, 어떻게 해……?"
사내애가 끔찍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처녀는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굴렀다.
"이것 봐, 누나. 숨이 넘어가려고 해. 어떡할 거야? 그냥 쳐다만 보고 있을 거야?"
사내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처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홍칠에게 다가갔다.
홍칠은 백지장 같은 얼굴로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처녀를 바라보았다.
'남녀유별이고 뭐고, 구해 놓고 봐야지 어쩌겠어?'
처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사내애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가서 약이나 가져와."
사내애도 정황이 급하다는 것을 아는지라 군말없이 뛰쳐나갔다.
잠시 후 그는 참대 광주리 하나를 안고 왔다. 처녀는 약 광주리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더니 먼저 홍칠의 상처를 씻고는 그 약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약을 다 바르자 그녀는 사내애와 더불어 홍칠을 엎드리게 하고는 등이며 어깻죽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장방의 철장 자국이 세 곳이나 찍힌 등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바보가 아니면 등신이야."
사내애가 소리쳤다.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이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처녀가 나무랐다.
"왜 몰라? 등신이 아니면 왜 멍청하게 남한테 맞고만 있었겠어? 당할 수 없으면 달아나기라도 했어야지. 그랬으면 이 지경이 되도록 얻어맞진 않았을 거 아냐?"
"도망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처녀는 홍칠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헛고생 하지 마. 내가 보기에 살려내긴 틀렸어. 어차피 죽을 바에야 지금 죽는 게 낫지. 공연히 시간만 끌어 봐야 고생밖에 더하겠어?"
처녀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사위가 잠잠해졌다.
처녀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넌 그만 가 자거라. 이 사람은 내가 보살필 테니."
"뭐라구?"
사내애가 되물었다.
"평소에 누나가 뭐라고 했어? 누나는 여자고 나는 남자니까 한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구 했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 남자와 한 방에서 잔다는 거야?"
"무슨 허튼소리야? 누가 잔댔어? 곁에서 보살펴 준다고 했지. 그냥 지켜 본다구!"
처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미 내력도 쓰고 약도 발라 주었는데 뭘 더 어쩌겠다구?"
사내애도 입을 삐죽거리며 비양댔다. 처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넌 가서 자도록 해. 아무래도 내가 곁에 있어야지, 만일 사람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겠니?"
사내애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정신이 좀 드세요?"
혼미한 의식 속에 웬 처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홍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상처는 아까처럼 그렇게 찢어지듯 아프지는 않은데 눈 앞에 웬 처녀가 앉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여기가 어디요? 내가 왜 여기에……?"
홍칠은 모기만한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여긴 저희 집이에요."
홍칠은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천인과 싸우고 절 문을 나섰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는 좀처럼 생각나질 않았다. 그는 몇 마디 더 묻고 싶었으나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점잖고 예절 바르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들려 왔다.
홍칠은 사뭇 긴장한 눈빛으로 처녀를 쳐다보았다.
"누굴까? 올 사람이 없는데……?"
처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멎어다간 다시 들려 오고 멎었다간 다시 들려 오고 한동안 계속되더니 이번엔 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하룻밤 여기서 묵어갈 수 없겠습니까? 대가는 섭섭치 않게 치러 드리겠습니다."
처녀는 홍칠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자신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홍칠에게 약을 발라 주느라고 그녀의 옷은 부분부분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이런 몰골로 밖에 나갔다간 공연히 남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라는 생각에 문 열어 주는 것을 단념해 버렸다.
"보아하니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것 같사온데 문을 떼고 들어가 하룻밤 묵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극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무례한 일을 할 수가 있나? 만일 그랬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꼴이 뭐가 되겠느냐?"
"저희야 문전 노숙을 하여도 무방하지만 어르신께서 이 황량한 야지에서 노숙을 하시다니 그게 될 말씀입니까요?"
또 다른 음성이 말했다.
"아니, 하룻밤 노숙을 한다고 큰 변이 난다던가? 내 염려는 말게나."
"그러시다면 분부대로 시행하리다."
서넛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은 이내 조용해졌다.
문앞을 떠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처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홍칠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처녀도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처녀는 소스라쳐 눈을 떴다.
이어 사납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누구세요?"
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홍칠도 놀라서 깨어났다.
처녀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무례하게 문을 마구 두들겨 대는 불청객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문을 열어라! 우린 개방 사람들이다!"
처녀는 흠칫 놀라는 태도를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개방 사람들이 여긴 왜 왔나요?"
사람들이 문을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개방을 떠났다고 이젠 개방 사람을 모르는 체할 작정이냐?"
처녀는 입술을 깨물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개방이라니? 내게 또 무슨 볼일이 남아서……."
그녀가 뼈아픈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서 문 못 열겠나?"
누군가가 문을 때려부술 듯 소리쳤다.
"개방 사람들이면 돌아들 가세요. 난 이미 개방을 떠난 몸이니 개방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개방에서 날 찾을 일이 뭐예요?"
처녀가 맞받아 소리쳤다.
"좋다! 문을 안 열면 문을 떼고라고 들어가는 수밖에 별수없지."
처녀가 놀란 표정으로 홍칠을 돌아보았다.
곧이어 무엇인가 둔중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지끈하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이어서 험상궂게 생긴 세 사내가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흥, 문을 안 열어 주면 못 들어올 줄 알았더냐?"
놈들은 처녀를 둘러싸더니 위협적인 눈초리로 처녀를 노려보았다. 그중 한 놈이 말했다.
"아가씰 찾는 사람이 있으니 함께 가야겠어."
"날 뭣 때문에 찾죠? 난 개방과 인연을 끊은 지가 오래니 누가 찾는다고 해서 갈 이유도 없어요."
처녀는 담담한 기색으로 조용히 말했다.
놈이 차디찬 웃음을 히죽 웃었다.
"글쎄,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어쨌든 개방에서 아가씨를 데려오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우린 아가씨를 데려가기만 하면 돼."
처녀는 말없이 홍칠을 돌아보았다. 홍칠은 처녀를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 이었다.
처녀는 다시 그 세 사람에게도 눈길을 던지더니 갑자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좋아요. 방주님의 분부가 있었다니 일단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죠."
이때였다. 한 녀석이 갑작스레 소리쳤다.
"가만? 거(巨) 형, 침대에 누운 놈을 좀 봐요. 그 어린 놈 같지가 않은데요?"
그러자 거씨라 불린 사내가 침대 위를 힐끗 보고는 앙천대소를 하였다.
"이 아가씨가 보통내기가 아닌데? 집에 사내까지 숨겨 놓고 산다?"
처녀가 두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느냐? 한 번만 더 함부로 지껄이면 내 손에 요절날 줄 알아라!"
사내들이 가소롭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사내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제법 호기 있게 말을 이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너희들 셋은 어서 썩 물러가거라. 그러지 않았다간 내 손에 너희 세 놈의 숨통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놈들은 지붕이 날아갈 듯 일제히 웃음을 웃어댔다.
"이거, 가만히 들어 주자니 소 웃다 뱃고래 터지겠구나!"
처녀는 세 놈을 쏘아보기만 할 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누나, 누가 왔어?"
사내애가 선잠이 깬 듯 눈을 비비며 들어섰다. 그는 세 괴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날 잡으러 온 사람들이야. 잘못하면 너도 죽일지 몰라."
처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누나를 데려가겠다고? 그 따위 개꿈은 꾸지도 마!"
사내애가 겁없이 소리쳤다.
이때였다. 놈들 중 하나가 와락 달려들어 사내애의 머리칼을 텁석 움켜쥐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내 손에 죽지 못해 야단이냐? 죽으면 그 혓바닥 못 놀리겠지?"
놈은 당장 사내애의 정수리를 내리칠 듯 손을 치켜 올렸다.
처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 애를 내려놔요. 할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요!"
처녀의 말에 놈이 푸와하―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엔 그렇게 잔꾀가 많더니 이젠 빌 줄도 아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이젠 소용없다고!"
놈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금 손을 치켜 올렸다.
"얏!"
처녀가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며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욱!"
놈이 앞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처녀가 날렵하게 놈의 가슴에 장을 날린 것이다.
"왜 여길 찾아왔나 사실대로 말해요. 개방 방주가 날 보자던가요?"
처녀가 놈들을 노려오며 물었다. 놈들이 일제히 앙천대소를 했다.
"그런 꿈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방주는 다시는 널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 방주가 원하는 건 네 년의 송장이다. 네 년의 송장을 가져다 바치는 게 우리 셋의 의무라구!"
거씨라는 사내가 지껄여 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세 놈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처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올랐다.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럴 리가……."
홍칠은 이 처녀와 개방 방주 미운산과의 사이에 알지 못할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저 세 놈의 말에 이렇듯 상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겠는가.
"방주가 우릴 죽이겠다구? 죽이려면 죽이라지. 난 겁나지 않아!"
사내애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곧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세요? 어디 이름이나 들어 봅시다."
처녀가 거씨에게 물었다.
"모두들 나를 거수(巨手)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아둬."
처녀는 눈물을 닦아 내고 조용히 말했다.
"저 애를 놔줘요. 저 애는 아직 어린아이예요. 저 애를 놓아주면 나는 당신들이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그 말이 정말이겠다?"
"정말이에요. 그저 저 애만 놔주면 돼요. 그런 다음엔 마음대로 하세요."
"누나, 저 놈들 말을 믿지 말어! 저 놈들은 나쁜 놈들이야! 개방에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구 저것들 말을 믿어. 저것들 말을 믿다간 우리 둘 다 죽어!"
사내애가 여전히 거수의 손아귀에 잡힌 채 몸부림치며 외쳐 댔다.
"어서 저 년의 혈도를 눌러 놔라!"
거수가 곁의 놈에게 명했다. 그리고는 처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꿈쩍 말고 서 있어. 여차하면 네 동생부터 죽일 테니까!"
발버둥치며 악을 쓰는 동생을 바라보던 처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놈이 자기의 구도대혈(九道大穴)들을 다 눌러 놓을 때까지 꼼짝도 안 했다.
"좋다. 그럼 약속대로 이 조그만 자식은 놓아주지."
거수는 큰 인심이라도 배풀 듯 사내애를 놓아주었다.
"누나!"
사내아이는 달아나지 않고 제 누이를 부둥켜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누나……."
"이러지 말고 지금부터 누나 말을 잘 들어라. 예전에 누나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개방 중의 그 두 사람을 꼭 찾아가야 한다. 한 사람은 홍칠이고 다른 한 사람은 홍안루에서 요리사로 있는 소씨
거렁뱅이란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을 찾아가 무예를 배워야 한다."
처녀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웃어 보였다.
"어서 가 그 사람들을 찾거라.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하기에 달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홍칠은 처녀의 입에서 자기와 사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눈을 크게 떴다. 이 처녀는 개방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으나 불시에 뛰어든 세 놈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옷차림은 개방 차림을 했지만 놈들의 손만 봐도 개방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거수라는 놈의 그 큰 손은 희멀건한 게 고생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홍칠은 옴쭉달싹 못한 채 멍청히 두 남매의 수난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속이 끓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서 가!"
처녀가 사내애를 밀어냈다.
"누나……."
"어서!"
사내애는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말 명심해야 한다?"
처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갈게, 누나."
사내애가 과감히 몸을 돌렸다. 그는 몇 발짝 걸어 나가다가 고개를 다시 누나를 쳐다보았다. 처녀가 얼른 사내애를 외면했다. 아이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세 놈은 처녀에게 음탕한 눈길을 던지며 능글맞게 웃어댔다.
"혈도가 눌렸으니 네 목숨은 이제 우리 손에 달린 거야. 알아?"
거수란 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진정 개방 사람들이라면 의당 날 방주한테 데리고 가서 방주의 처리에 맡겨야 도리이지, 여기서 날 죽인다면 개방에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처녀의 말에 거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아직도 정신이 안 드는 모양이구나. 오늘 밤 우리 셋이 실컷 재미를 본 다음에 널 죽여서 네 시체를 네 기둥서방과 함께 한 침대에 눕힌 다음 이 집에 불을 질러 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신도 모를 거라구. 핫하하……."
놈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처녀에게로 다가들었다.
이때였다. 곁의 놈이 갑자기 그를 잡아당기며 홍칠을 가리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홍칠의 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거수라는 놈이 비아냥거렸다.
"계집년의 수작도 보통이 넘지. 사내를 얼마나 제멋대로 다루고 싶으면 저렇게 꼼짝못하게 만들어 놨을까? 음탕한 계집년 같으니."
놈은 홍칠이 누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홍칠을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다 죽어 가는 몰골인데 내 깨끗이 저 세상으로 보내 주지. 이 침대는 오늘 밤 우리 셋이 쓰기에도 비좁으니까!"
그는 한바탕 웃어대고는 홍칠의 이마 위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제8장 애증의 인연
거수가 손을 치켜 들어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치려고 하자 홍칠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속으로 탄식했다.
'이제는 끝장이로구나. 엉뚱하게 이런 놈들 손에 죽게 되다니…….'
그런데 세차게 내려오던 손바닥은 홍칠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딱 멎어 버렸다. 순간 거수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며 온몸이 나무처럼 꼿꼿이 굳어졌다.
"나무아미타불……."
문득 염불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메아리치듯 들려 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서른 살 가량의 젊은 공자 하나가 문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무늬가 아롱지고 색깔이 현란한, 일견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보이는 호화로운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유난히 크고 또렷했다. 눈빛이 어찌나 위엄 있고 무서워 보이는지 거수 일행은 대뜸 이 공자가 보통 범속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공자의 뒤에는 또 네 명의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모습들이 저마다 달랐다. 횐 바탕에 검은 무늬가 그려진 옷차림의 여윈 사람은 길고 넓은 소맷자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일견 글 읽는 선비인 듯했고, 작달막한 키에 몸이 다소 비대해 보이는 한 사나이는 호복(胡服) 차림에 짚신을 신었는데 일견 농군 같았다. 그런가 하면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몸집이 여위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았으나 떡 벌어진 어깨에 손에는 도끼를 한 자루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첫눈에도
나무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손에 가늘고 긴 막대기를 하나 쥐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낚싯줄이 매여 있었다. 초립을 쓰고 있는 그 사람은 어째선지 거수를 보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등허리가 침으로 쑤셔 대는 듯 아파 오면서 허파, 쓸개, 콩팥 등 내장과 척추가 모두 뻣뻣하게 마비되어 버린 거수는 그동안 연마해 온 무공이 모두 무산되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이러는 거요?"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철장방 놈들이 아니냐?"
"철장방이고 개방이고 네 놈이 무슨 상관이냐? 우리 손에 죽지 못해 환장했느냐?"
거수는 악에 받쳐 소리치고 부하들을 시켜 공자에게 덮쳐 들게 했다.
"나무아미타불……."
공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꿈쩍도 하지 않고 염불만 외웠다.
거수 일행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공자를 후려치려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감히 우리 주인님을 해치려 하다니."
공자 뒤에 서 있던 네 사람이 일제히 공자를 에워싸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거수 일행 중 한 놈이 호복 차림의 사나이를 겨냥하여 칼을 내리치자 호복 차림의 사나이는 긴 피리 하나를 번개같이 꺼내어 칼을 막았다. 피리가 칼에 부딪치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허공에 날려 멀리 떨어졌다. 놈은 그만 혼백이 나간 듯 눈을 흡뜨고 피리 든 서생 타입의 사나이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한편 다른 한 놈은 낚싯대를 든 사나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어부 차림의 사나이는 잽싸게 낚싯줄을 던져 놈의 허리를 걸어 홱 잡아당겼다. 놈은 낚싯줄에 걸린 생선처럼 질질 끌려 오다가는 어느 순간 대들보 위로 휙 던져 올려졌다. 어부는 낚싯줄을 몇 번 흔들어 놈의 허리띠에서 낚시를 빼고는 낚싯줄로 도로 감아 버렸다.
"이 망할 놈들아! 어서 나를 못 내려놓겠느냐?"
놈이 대들보 위에서 소리쳤다.
이를 지켜 보던 공자가 천천히 처녀에게로 다가섰다.
"아가씨는 누구요? 이자들이 뭣 때문에 아가씨를 해치려는 거요?
처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갑자기 공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여인들의 마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겉으로만 봐서는 그 속생각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게 여인들이라니까."
그리고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어쩐지 쓸쓸한 빛이 감도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속세에 나오질 말아야 했어. 속세에 나와 봐야 이렇듯 마음만 흐려지는걸……."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그가 문득 홍칠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홍칠은 이 공자를 어디서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은 언젠가 만났던 일속과 흡사했는데, 일속보다는 얼굴이 좀 크고 눈은 작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당신은 혹시 대리 단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신지요?"
홍칠은 있는 힘을 다해 가까스로 물었다.
공자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대리 단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지요?"
"난 홍칠이란 사람입니다."
단 공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녀에게로 몸을 돌려 손가락을 천천히 뻗쳤다. 순간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처녀의 눌렸던 혈도들이 모두 풀어졌다.
처녀는 공자에게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단 공자님의 이 은공은 잊지 않겠습니다."
"원래는 당신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칠까 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저 세 사람들이 뛰어드는 바람에 우리도 이렇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마치 자기가 처녀의 평안한 휴식을 깨뜨려 놓기라도 한 듯 몹시 미안한 태도를 보였다.
처녀는 천천히 홍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 바로 앞에 그래도 개방 사람 중에 믿을 수 있던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홍칠이 지금 심한 내상을 당해 곤경에 처해 있지 않은가.
단 공자와 그의 수하 넷은 대들보 위에 던져 놓았던 자를 끌어내려 놈들의 혈도를 모두 눌러 놓고는 조용히 한쪽에 가 앉았다. 잠시 후 방안엔 단 공자의 염불하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명심명불(明心明佛), 내 마음에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을 내가 보았거늘 온갖 사악한 것들은 침노를 못하리라. 마음은 대도(大道)를 향하니 크게 깨달음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이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어린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요. 어서 와 보시라니깐요?"
"내 말했잖느냐. 난 이제 개방 사람이 아니라고."
한 사나이의 옹글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개방 사람이 아니라니요? 누가 모르는 줄 알아요? 어르신이 개방 11대 장로 중 한 분이시란 걸 난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개방 사람들이 지금 해를 입고 있는데 알고도 모른 체하신다면 전 두고두고 어르신을 원망할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엔 안타까운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난 이미 개방에서 나온 사람이다. 이젠 나하고 개방은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다."
"그 놈들이 우리 누나를 죽이려고 해요. 개방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부터 구하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가 답답한 듯 울며 소리쳤다.
"난 개방 사람이 아니야. 이 점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야."
사나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아이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래, 좋다. 갈 테면 가라! 옥면검객 호심이라구? 이름이 좋다! 네깐 놈이 무슨 검객이냐!"
아이는 울면서 문을 밀었다. 문이 안으로 잠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은 아주 손쉽게 열렸다.
집 안에 들어선 아이는 역시 뜻밖의 정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안은 그가 떠날 때보다 더 어지러워졌고 사람도 다섯 명이나 더 늘어 있었다.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한 공자는 그가 들어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염불을 외우고 있었고, 다른 네 사람은 그 옆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정신을 가다듬어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듯했다. 한편 거수네 패거리 셋은 문어귀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는데 보아하니 혈도가 눌린 듯했다. 아이는 급히 집안을 둘
러보다가 침대 옆 걸상에 앉아 있는 처녀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누나!"
처녀가 목이 메어 간신히 한마디했다.
"네가…… 네가 왔구나……."
찌뿌둥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 있던 옥면검객 호심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호 장로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처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호심은 자기를 알아보는 처녀의 말에 놀라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 셋이 자칭 개방 사람이라 주장하면서 저와 동생을 죽이려 했어요. 마침 오셨으니 한번 봐 주세요. 저 사람들이 정말 개방 사람들인가요?"
옥면검객 호심은 말없이 그들 셋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람들은 옥면검객 호심이 그들 셋을 요절내려는 줄 알고 긴장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심은 칼끝으로 거수의 털북숭이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수련한 것이 한장(寒掌) 무공임에 틀림없으니 개방 사람은 아니고 십중팔구 철장방 인간일 것이오."
말수 적은 옥면검객이 이렇듯 한 번에 네 마디 이상이나 말을 한다는 것은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옥면검객은 고개를 돌려 단 공자 일행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호심이 놀라 물었다.
"대리국(大理國) 황제 단지흥(段智興)이라는 분이 아니십니까?"
대리 황제 단지흥이 천하 최고의 무림 고수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일양지신공(一陽指神功)은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단한 무공이었다.
옥면검객 호심은 얼른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시생이 단 공자께 인사 올립니다."
단지흥은 날카로운 눈길로 옥면검객 호심을 훑어보더니 묵묵히 답례를 하였다.
옥면검객 호심은 단지흥 일행 네 사람에게도 읍을 했다.
"대리의 준걸이신 어(漁)·경(耕)·초(樵)·독(讀), 이 네 분의 명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단지흥 수하 넷도 말없이 답례를 했다.
옥면검객 호심은 이제 거수 패거리를 향해 말했다.
"네 놈들 셋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우리 개방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 모양인데 나를 만났으니 참 안됐구나."
옥면검객은 들고 있던 칼끝으로 거수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옥면검객의 이 칼은 일단 뽑았다 하면 하늘에 나는 참새든 바다에 솟구치는 파도든 간에 무엇이든 찔러 꺼꾸러뜨려야만이 직성이 풀렸다. 그러한 그의 칼이 거수의 가슴팍에 막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단지흥의 입에서 긴 탄식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소리에 호심은 들었던 손을 멈췄다.
"선생의 그 칼엔 극히 흉한 운수가 깃들어 있는 것 같으니 그 칼을 그냥 쓰는 것은 대단히 상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단지흥의 말에 옥면검객 호심은 적이 놀랐다. 불경에 능통하며 대단히 박식한 대리 황제 단지흥이 자기 검에서 무슨 불길한 징조를 보아 내지 않고서야 섣불리 이런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검객들은 모두 자기 손때 묻은 장검들을 아주 아끼는 법이다. 호심도 마찬가지였다. 호심은 자기 손에 들린 장검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스스로도 칼을 쓰면서 한 번도 흡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으니 하늘을 기쁘게 하기란 더욱 불가능하지요. 내 마음속에 쌓인 울분도 이 칼로 풀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단지흥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 검을 내려놓으시오. 한 10년 그 검을 쓰지 않아야 큰 재앙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호심이 큰소리로 웃었다.
"저더러 검을 내려놓으라구요? 검객이 검을 내려놓고도 어찌 산 목숨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호 장로님, 내가 장로님의 검을 보니 불평과 울분이 가득 서려 있는데 그 연고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호심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와 소검 오평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충 들려주었다.
"내가 이 칼로 무고한 사람 하나를 해쳤으니 창천이 나를 용서치 않을 겁니다. 암요, 용서하지 않고말고요……."
호심이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단지흥도 한숨을 지었다.
그때서야 호심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홍칠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라 홍칠을 향해 물었다.
"홍칠이, 어떻게 된건가? 도대체 누가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나? 저 놈들 짓인가?"
순간 홍칠의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이 세 놈들이 자기를 직접 해친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철장방 무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그들을 살려 두었다가는 나중에 또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생각이 이쯤 이른 그
는 호심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로 이 세 놈이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이 놈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옥면검객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수를 향해 힘을 주어 칼을 푹 내질렀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옥면검객 호심의 검에 거수가 즉사하는 것을 본 나머지 둘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부르짖었다.
"단 공자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쇼. 제발……."
단지흥은 머리를 숙이고 무심히 염불만 외웠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그였으나 더는 옥면검객 호심을 말릴 수 없었고 세 놈의 소행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호심은 검을 몇 번 휘두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두 놈을 모두 요절내어 버렸다. 그런 다음 호심이 처녀에게 말했다.
"난 이제 개방 사람이 아니오. 그저 나를 수검(銹劍) 호심이라고 부르든가 아니면 그저 호심이라고 부르시오. 개방과 난 이제부터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었소."
그는 곧 단 공자 일행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단지흥 일행은 잠이 든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홍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황야(段皇爺),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소이다."
단지흥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일속 대사도 홍칠공을 호걸답다고 칭찬하시던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철장방 구천인과 내력을 겨루는데 그 패거리들이 등을 기습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홍칠공의 상처는 내가 치료해 드릴 수 있지만 한나절이 실히 걸려야 합니다. 잠시 후에 내가 치료해 드리리다."
홍칠이 깨어난 것을 본 처녀는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문득 모두들 시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쌀이 있으니 저와 동생이 가서 밥을 지어 오겠습니다."
그녀는 곧 사내애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조촐한 밥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아닌게아니라 몹시 배가 고팠던 단지흥 일행은 체면 불구하고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홍칠은 안타깝게도 젓가락을 집을 기운조차 없어 물끄러미 제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저분을 좀 도와드리렴."
처녀가 동생에게 말했다.
"그런 건 여자인 누나가 하는 거지, 무슨 나한테 시켜?"
사내애가 투덜거렸다.
"조그만 게 남자 행세부터 하려 들어? 너도 남자 축에 드니?"
처녀가 툭 내쏘았다. 그녀는 홍칠을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가 아무래도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그녀가 밥그릇을 들며 말했다.
"몇 숟가락이라도 좀 들어 보세요."
홍칠은 밥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처녀의 성의를 봐서 몇 술 받아 먹어 보았다. 그러나 음식물이 들어가자 창자가 뒤틀리는 듯하며 자기도 모르게 왈칵 토해 버리고 말았다. 내용물은 온통 처녀의 옷자락에 튀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홍칠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처녀는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물대접을 들어 홍칠에게 권했다.
"밥을 못 잡수시겠으면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세요."
조반을 다 먹고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단지흥은 수하들에게 분부했다.
"홍칠공을 치료하자면 한나절은 실히 걸릴 것 같네. 그런데 이곳은 아무래도 위험이 많은 곳 같으니 자네들 넷은 내가 치료하는 동안 외부인이 얼씬대지 못하도록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넷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이제 처녀와 사내애에게 부탁했다.
"두 사람도 밖으로 나가 기다려 주게.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들어와선 안 되네."
단지흥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중히 말하자 처녀도 숙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공자님 말씀대로 따르지요."
그녀는 지체없이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단지흥은 홍칠을 부축하여 똑바로 앉게 하고는 홍칠의 등뒤에 앉으며 말했다.
"이 상처는 나만이 치료할 수 있소. 이것을 대리 일양지공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당신의 심맥이 철장공에 의해 크게 상한 상태라 당장 절맥지법(截脈之法)을 써서 심장을 옆으로 좀 당겨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의 심장 위치와는 좀 달라지는데 이게 아주 어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홍칠은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담담히 말했다.
"생사는 하늘에 달렸은즉 단황야께서는 마음놓고 법수를 써 보십시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천하에 으뜸가는 절기의 하나로서 그 기교가 복잡하고 공력이 깊어 여느 장법들은 상대가 안 되었다.
단지흥은 손을 내밀어 우선 홍칠의 심포낙도경맥(心包絡圖徑賑)을 눌러 일양지공의 세찬 힘에 그의 심맥이 상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다. 그는 잠시 후 홍칠의 뒷머리에 있는 옥침혈(玉枕穴)을 누르면서 그 혈을 통해 천천히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 줄기 큰 힘이 뒷머리의 옥침혈로부터 경추를 지나 심실로 들어갔다가 온몸에 퍼지는 바람에 홍칠은 온몸이 따뜻해지고 가뿐해짐을 느꼈다. 단지흥이 홍칠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무공이 뛰어난 분인데 어쩌다 이렇듯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홍칠은 깜짝 놀랐다. 대리 단씨의 무공이 기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내력을 발산하면서도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말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리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이 단씨 가문의 무학은 중원의 무공에 조금도 처지지 않는구나. 그리고 이 단지흥은 불학(佛學)이 심히 깊은 사람으로 그의 일언일행이 보통사람과는 확실히 다르구나.
이때였다. 단지흥이 문득 탄식조로 말했다.
"내가 괜한 말을 물어 보았구려. 이럴 때 다른 생각이 오가면 뜻밖의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깜빡 잊고 말이오. 그러니 이제부터 정신을 가다듬어 단전(丹田)만 지키면서 생각을 집중시키시오."
단지흥도 더는 말이 없이 오로지 내력을 불어넣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홍칠은 온몸이 시원하고 개운해져 갔다. 그는 눈을 감고 점차 망아(忘我)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느닷없이 밖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수, 거수! 여지껏 뭘 하고 있는 거냐?"
누군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철장방 무리들이 다시 온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력을 불어넣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홍칠도 잠자코 있었다.
"내 말 들으시오. 대리국 사걸이 여기 있으니 할말이 있으면 떠들지 말고 우리 넷한테 말하시오."
대리국 사걸 중 한 사람의 음성이었다.
"대리국 사걸이라구? 아하, 그래서 그 계집이 우리 철장방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구만 그래? 대리국 단황 나으리가 뒷받침을 해 주고 있다 이거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철장방 방주이신 모양이구려?"
선비 차림의 사람이 묻는 말소리였다.
"그렇소, 내가 구천인이오!"
순간 홍칠과 단지흥은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말 구천인이라면 대리 사걸의 힘으로는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존함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 뵙게 되는군요."
빈정대는 듯한 선비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건가? 내가 사람 죽이기로 유명한데, 그 소문을 듣고 중원에 와 나를 죽여 큰 명성을 떨쳐 보겠다 이건가?"
구천인이 계속해서 지껄였다.
"너희들 대리 사걸은 언제나 단황 나으리를 꼬리처럼 따라다니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더니만 웬일로 오늘은 너희들끼리만 있는 거냐? 단황 나으리는 어디 있지?"
선비가 대꾸했다.
"우리 단황 나으리는 왜 찾지? 그 정도 재주로 단황 나으리와 겨뤄 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주제 넘는 소리 그만하고 재주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먼저 우리 사형제와 자웅을 겨뤄 보자구."
"단지흥! 안에 있으면 어서 나오시오! 당신의 일양지가 더 센지 내 철장공이 더 센지 어디 겨루어 봅시다!"
구천인은 사걸을 무시하고 집 안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에서는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구천인은 네 사람을 노려보며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이 놈들부터 요절을 내거라!"
이때였다. 철장방 무리들의 눈에 시체 세 구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거수네 패거리의 시체임을 확인한 철장방 무리들은 일제히 격노하여 서로의 눈길을 주고받았다.
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달려들어 대리 사걸을 철장으로 후려쳤다. 그러나 대리 사걸도 만만치가 않았다. 단지흥과 대리 사걸은 비록 주복(主僕)의 관계이지만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로 단지흥이 자기가 갖고 있는 무예를 거의 다 그들에게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선비 차림의 사내가 긴 피리를 휘둘러 대고 나무꾼이 도끼로 정신없이 후려갈기자 철장방 무리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가 하면 어부는 낚싯대를 휘둘러 낚싯바늘로 철장방 무리들의 머리채를 낚아채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곤 하였는데 멀리서도 백발백중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한편 농부 차림의 사나이는 엄청나게 큰 호미를 쓰고 있었는데 내밀면 창이 되고 당기면 갈고리처럼 쓰이고 옆으로 후려치면 철퇴와도 같아서 병장기치고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구천인은 스무 명이 넘는 부하들이 대리 사걸과 싸우는 모양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리 사걸이 여기 있으니 단지흥도 분명 집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들어가 단지흥을 만나 보아야겠다.'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냉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였다. 문어귀를 지켜 섰던 두 사람이 그를 막아 섰다. 구천인은 그들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름아닌 처녀와 어린 사내애였던 것이다.
"집 안엔 아무도 없어요."
사내애가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막아 설 이유가 없지 않을까?"
구천인이 웃으며 응수했다.
"내 허락 없이는 못 들어가는 줄 아세요."
이번엔 처녀가 막아 섰다.
"이것들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구천인은 코웃음을 치고는 처녀를 향해 두어 장 날렸다. 처녀는 날렵하게 검은색 철봉 하나를 휘두르며 구천인의 장을 막아냈다. 구천인은 처녀가 철봉을 휘둘러 대는 솜씨를 보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처녀는 구천인 앞가슴의 중요한 혈도를 겨냥하여 철봉을 내지르곤 했는데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구천인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어 얼결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구천인이 뒤로 물러서자 처녀는 더욱 기세가 사나워져서 더욱 매섭게 덤벼들었다. 구천인은 잽싸게 철장을 써서 처녀의 철봉을 막아냈으나 미처 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내 이 철장이 저 계집의 철봉 중간을 쳐 갈기기만 하면 저 계집이 어쩌지를 못하겠지만 철봉의 변화를 가늠할 수가 없으니 잘못하다가는 헛물을 켤 수가 있다. 그러면 도리어 내가 난처해지기 쉬우니 그런 모험은 될수록 피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한 구천인은 몸을 한바퀴 뒤로 돌리면서 슬쩍 일장을 내갈겼다.
이때였다. 사내애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누나! 봉도쌍견(棒桃雙犬)을 쓰면 안 된다니깐. 그렇게 가까이서 봉도쌍견을 쓰다니?"
그러자 처녀가 방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정말 미인인데? 그런데 저 타구봉법은 누구에게서 전수받은 거지? 개방 방주 미운산한테서 전수받은 것이라면 이 계집과 개방과는 보통 관계가 아니겠군.'
구천인은 이런 생각으로 손을 약간 늦추었다. 비록 자신이 호시탐탐 개방을 삼키기 위해 노리고는 있으나 이 처녀와 개방 방주 사이가 보통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이 처녀를 죽여야 할지 말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이때였다. 노기충천한 대리 사걸이 일제히 구천인에게로 덤벼들었다. 구천인이 집 안에 뛰어들 경우 홍칠과 단지흥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어부가 먼저 고함을 지르며 구천인에게로 몸을 날리자 철장방 무리 대여섯도 따라 쫓아왔다. 이를 본 농부와 나무꾼이 뒤에서 뛰어오며 놈들을 덮쳤다. 대리 사걸은 다시금 철장방 무리들에 에워싸여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싸우다가 농부가 다리에 철장을 맞아 다리를 절게 되자 나무꾼과 선비가 잽싸게 농부에게로 달려가 셋이 한 덩어리가 되어 철장방을 막았다.
처녀는 여전히 혼신의 힘으로 철봉을 휘두르며 구천인을 막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처녀와 철봉을 요리조리 피하며 유심히 살피던 구천인은 처녀의 타구봉법이 비록 정묘하기는 하지만 내력이 아직 평범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아무래도 집 안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어서 속히 들어가 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구천인은 고함을 세게 지르며 손을 쭉 뻗쳐 처녀의 철봉을 잡아 콱 비틀었다. 그 힘이 어찌나 완강한지 처녀는 결국 당해 내지 못하고 철봉을 놓치고 말았다. 구천인은 빼앗은 철봉을 땅바닥에 냅다 내리꽂았다.
처녀는 흠칫 놀랐으나 이랜 정신을 가다듬어 몸을 솟구쳐서 구천인의 머리를 겨냥하여 장을 갈겼다. 개방 방주의 전가지보인 강룡십팔장이었다.
"미운산은 너와 어떤 관계냐?"
구천인이 소리쳐 물었다.
처녀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연거푸 장만 휘둘렀다.
구천인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네가 나를 막는다고 순순히 물러날 것 같으냐? 내 기어코 집 안 구경을 해봐야 하겠다!"
구천인은 철장을 앞으로 쑥 내밀며 처녀의 앞가슴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앗!"
처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려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를 본 사내애가 급히 달려가 처녀의 머리를 부둥켜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누나!"
처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사실 구천인이 자기 손바닥에 모든 힘을 다 넣었더라면 처녀는 그대로 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천인이 처녀의 앞가슴을 겨냥하여 손바닥을 내미는 순간, 낚싯바늘 하나가 느닷없이 그의 두 눈을 향해 날아와서 그것을 피하느라고 제대로 손바닥에 힘을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부 차림의 사나이가 위기일발의 순간에 처녀의 목숨을 구해 낸 셈이었다.
구천인은 어부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대로 집 안으로 뛰어 들려 했다. 그러나 어부가 그를 그냥 들여보낼 턱이 없었다. 낚싯줄이 구천인의 머리 위에서 윙윙 날며 몸에 있는 대혈을 꿸 듯 기승을 부렸다.
화가 난 구천인은 몸을 돌려 장풍을 날리며 어부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부는 구천인의 철장이 듣던 대로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적이 겁을 집어 먹었다. 어부의 낚싯줄은 천하의 어떤 날카로운 병장기로도 베어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질겼다. 어부의 낚싯줄은 구천인의 머리 위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호시탐탐 구천인을 낚아채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구천인은 피한다고 피했으나 간간이 낚싯줄에 긁혀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이 놈들아, 내가 네 놈들 따위한테 당할 성싶으냐? 구천인이 그 정도 위인밖에 안 된다면 이 중원 무림에서 벌써 송장이 됐을거다!"
구천인은 대노하여 고함을 지르며 몸을 솟구쳤다. 그는 머리 위를 후려치는 낚싯줄을 덥석 손에 감아 쥐었다. 어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낚싯줄은 보통 낚싯줄과는 달라서 그가 힘껏 한번만 잡아채면 손바닥이 결딴날 판이었다.
어부는 힘을 다해 낚싯줄을 잡아채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그러나 구천인 역시 만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건방진 놈! 네 놈이 감히 나를 해 보겠다는 거냐?"
구천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치더니 있는 힘을 다해 낚싯줄을 홱 잡아당겼다. 순간 어부의 몸이 맥을 못추고 구천인에게로 주루륵 딸려 갔다. 구천인은 또 한 번 낚싯줄을 홱 잡아챘다. 보통사람 같으면 손에 낚싯줄이 감긴 이상 피투성이가 되거나 동강이 났을 텐데 구천인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서 낚싯대를 놓고 물러서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구천인이 소리쳤다.
그러나 어부는 냉소를 하더니 여전히 낚싯대를 움켜쥔 채 뒤로 당기며 버텼다. 구천인은 냉큼 손을 뻗쳐 낚싯대 끌을 잡았다. 낚싯대는 금강쇠로 만든 것인데, 구천인은 일장에 낚싯대를 뚝 꺾어버렸다.
대노한 어부는 동강난 낚싯대를 장검삼아 구천인을 찔러 댔다.
"네 이 놈! 정말 끝까지 발악할 테냐?"
구천인이 격분하여 낚싯대 끝을 홱 잡아챘다.
"어서 손을 못 놓겠느냐?"
어부는 한사코 낚싯대를 틀어쥐고 놓지 않았다. 급기야 아주 큰 힘이 낚싯대를 통해 어부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전류가 흐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에 놀란 어부는 자기도 모르게 낚싯대를 놓아 버렸다. 구천인은 낚싯대로 어부의 왼쪽 팔을 냅다 후려쳤다. 어부의 왼팔이 나뭇가지 잘리듯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너희들 대리 사걸이 지키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 좀 보자. 이 초가집을 대리의 황금으로 알고 지키고 있지는 않겠지."
구천인은 이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온 구천인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앞뒤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앞에는 홍칠이 웃통을 벗고 앉아 있었고 뒤에는 단지흥이 앉아 홍칠의 등허리를 한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에선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홍칠이 철장방으로부터 입은 독을 지금 단지흥이 뽑아 주고 있음을 단번에 알았다.
'잘됐다. 화산 시합에나 가야 단지흥이니 황약사니, 그리고 왕중양이니 하는 자들을 만날 줄 알았더니 뜻밖에 여기서 그중 한 놈을 만나게 되었구나. 여기서 아예 이 단지흥인지 단황 나으린지 하는 놈을 죽여 버리면 적수 하나가 줄어드는 셈 아닌가? 그리고 이 흥칠인 또 부상을 입은 상태니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 둘을 한꺼번에 죽여 버려 후환거리를 없애 버려야지. 홍칠이 성한 몸으로 나와 맞붙으면 자칫 내가 패하기 십상인데, 오늘 재수 좋게 병신이 된 홍칠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구천인은 신이 나서 두 사람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홍칠이, 잘 만났다. 아주 볼 만하구나. 살아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 모양인데 나를 다시 만난 이상 너는 끝장이다. 인간의 생사와 부귀란 인간에게 달린 게 아니야. 다 하늘의 뜻이지."
그는 한바탕 소리내어 웃고는 또 득의양양 단지흥을 향해 지껄였다.
"거기는 단황 나으리가 분명하겠지?"
"그렇소만, 그대는 여기에 어인 일이오?"
단지흥이 여유 있게 웃으며 대꾸했다.
"구천인, 해 볼 테면 나하고 해 봅시다. 홍칠공은 부상을 당했으니 이런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강호 사람으로서 떳떳한 행동이 아닐 것이오."
단지흥이 엄숙하게 말했다.
구천인은 속이 꿈틀했다.
'확실이 대리 단씨 가문의 일양지공은 정말 신기한 무공이구나. 단지흥이 저렇듯 내력으로 홍칠을 치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점만 봐도 그래. 이렇게 분심(分心)하여 동시에 두 가지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듣건대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천룡사(天龍寺)에서 온 것이요, 그가 배운 것은 불가 정통의 선공(禪功)이라고 하거늘, 아무리 봐도 이 단지흥의 무공은 절대 얕잡아 볼 게 아니야. 아무튼 섣부르게 행동하진 말아야
겠다.'
그러나 구천인은 생각을 숨기며 비아냥거렸다.
"단황 나으리, 당신도 여기서 죽게 된 판에 지금 남 걱정하게 되었소?"
단지흥은 고개를 들어 매서운 눈길로 구천인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는 기색을 누그러뜨리며 탄식조로 말했다.
"부처님이 가르치시길, 욕심이 많지 않으면 마음이 가볍고 부처님을 속에 간직하면 한도 없고 원도 없어 마음에 평온이 깃들고 육근(六根)이 깨끗해지고 조용해져 남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자기에겐 복이 차례진다고 하였소. 구 방주, 그대는 사람을 많이 죽여 얼굴에 살기가 잔뜩 끼었으니 부처님의 꾸지람을 들을 거요."
구천인은 단지흥의 말에 내심 뜨끔했다. 그러나 그는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칠게 말했다.
"단황, 그 따위 부처님 얘기는 나한테 할 필요 없이 속에 담아 두었다가 지옥에 가서 원귀들에게나 들려주라구. 알아듣겠나?"
그리고는 철장에 힘을 잔뜩 넣어 단지흥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한편 철장방 무리들에 에워싸여 혈전을 벌이던 대리 사걸은 구천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들이 포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철장방 무리들은 틈을 주지 않고 더욱 겹겹이 에워싸며 공격을 가해 왔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대리 사걸은 점점 더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중천을 날아오르는 학의 울음 소리 같기도 하고 구름 속을 누비며 나는 수리개의 울부짖음 소리 같기도 한 세찬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마치 이 수리개의 뒤를 따라 구름 위로 날아오는 작은 멧새의 울음 소리같이 청아한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이 휘파람 소리는 앞의 휘파람 소리와 가락을 맞춰 조화를 이루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내기 어려운 이 소리에 대리 사걸과 철장방 무리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곧이어 뿌연 연무 같은 것이 날아오는 것 같더니 사람 하나가 눈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나타났다. 3, 4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수염이 긴 도사였다. 도사가 진불(塵拂)을 든 손으로 읍을 하며 말했다.
"빈도(貧道)가 인사 올립니다. 여러분께서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이렇게 뛰어들었음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철장방 무리들은 이 도사의 공손한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도사가 이렇듯 굽신거리는 것으로 보아 별로 큰 무공은 없는 것이 분명하고 방금의 휘파람 소리도 이 도사가 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철장방 무리 중 한 놈이 앞으로 나서며 돼먹지 않게 소리쳤다.
"피를 보고 싶지 않거든 어르신들 일에 간참 말고 어서 갈 길이나 가거라!"
도인은 그 말엔 대꾸도 없이 대리 사걸을 보며 물었다.
"네 분은 중원의 분들이 아니신지요?"
"그렇소이다. 우리 넷은 대리 사람들입니다."
도사의 행동거지에 호감을 느낀 선비 차림의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대꾸했다.
"그러면 단황 나으리도 오셨겠군요?"
도사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대리 사걸은 그의 친근한 태도에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문득 또 한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왕 교주님의 경공도 그저 그렇군요."
사람들은 고개를 들리다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횐 소복 차림의 여인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운 눈매에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며 왕중양을 쳐다볼 뿐 철장방 무리들과 대리 사걸은 안중에도 없는 듯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마치 그녀의 눈앞에는 왕중양 혼자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임 시주님의 경공을 내가 어찌 따라잡겠습니까? 내가 졌습니다."
왕중양이 여인에게 겸손하게 말하자 여인은 눈을 곱게 흘기며 쏘아붙였다.
"그런 소리 집어치워요. 교주님의 경공이 나만 못하다는 건가요? 내 말은 교주님의 경공이 아무리 세다 해도 나를 떼버리지는 못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 둘이 비긴 셈이지요. 아무튼 마음에도 없는 말씀은 왜 하세요?"
왕중양은 도량 있게 웃어 보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임 시주님, 아무래도 이 집 안이 수상쩍습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안에서 누군가 지금 해를 입고 있습니다. 대리 사걸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철장방 사람들이 한사코 막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은 바로 임조영(林朝英)이었다.
왕중양의 말에 임조영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집 안에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있기 쉽소. 그 사람은 강호에서 악한 짓을 수없이 한 사람인데, 임 시주님이 들어가 그 사람을 잡아내 온다면 임 시주님이 나를 이긴 것으로 칩시다. 그렇지 못하겠다면 임 시주님이 밖에서 이 철장방 무리들을 해치우시오. 구천인은 내가 들어가 상대할 테니깐. 어떻소?"
"구천인이라면 철장방 방주 말씀입니까? 내가 들어가 보지요."
임조영이 큰소리를 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맑은 물에 떠있는 부용과도 같이 깨끗한 모습으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임조영을 넋 나간 듯 바라보던 철장방 무리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임조영을 막아 서려 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철장방 무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철장방 무리들이 임조영에게 손을 대려는 찰나였다. 왕중양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진불을 후려쳤다.
달려들던 철장방 무리들의 머리칼이 진불에 쓸려 몽땅 날아가 버리고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철장방 무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임조영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제9장 여인들
"야앗!"
구천인은 있는 한껏 내력을 모아 단지흥을 향해 장력을 발산했다. 10년 넘게 수련하여 기른 힘을 모두 이 한 번에 응집시켜 단지흥을 일거에 꺼꾸러뜨릴 작정이었다.
단지흥이 이 장풍에 격중되면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상은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단지흥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던 듯 오른손은 여전히 홍칠의 등에 댄 채로 왼손을 들어 구천인의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勞宮穴)을 가리켰다.
"이크!"
구천인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며 단지흥에게 혈도가 눌릴까 봐 잽싸게 한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가 발산한 장풍은 엉뚱하게 방안의 나무걸상을 박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구천인은 역시 단지흥의 무공이 만만치 않음에 내심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흥은 구천인은 보지 않고 여전히 눈을 내리뜬 채로 말했다.
"악이 마음에서 생기면 마음은 악의 늪이 되고 그 늪이 깊어지면 다시 고치기 어렵거늘 내가 보기엔 방주께서 손을 떼야 할 땐 손을 떼고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해 줌이 옳을 줄로 아오."
'뭐? 손을 떼야 할 땐 손을 떼고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해 줘야 한다고?'
구천인의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
'내가 이제 중도에서 그만두면 네가 화산 무예시합에서 주인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나더러 이 절호의 기회에 너를 그냥 놓아주는 바보 짓을 하란 말이냐?'
이렇게 생각한 구천인은 전술을 바꾸어 이번에는 홍칠에게 공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극히 교활한 생각이었다. 만약 재차 단지흥을 공격한다면 단지흥은 구천인의 공격을 몇 번이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칠을 공격한다면 단지흥은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입장이라 그 공격을 막아 주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구천인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홍칠의 앞가슴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구천인이 홍칠을 공격하자 단지흥은 역시 짐작대로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는 황급히 구천인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그러나 그의 일양지공은 구천인에게 채 미치지 못한 채 그대로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구천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홍칠을 향해 장풍을 날리려 했다.
구천인의 독한 심보를 꿰뚫어 본 단지흥은 부지중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악한 마음이 생기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더러워진 마음을 악이라고 하오. 구 방주 마음이 더러워지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일지라도 고치기가 어려운 법이니 아무쪼록 회심하여 선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어떻소?"
그러나 구천인의 귀에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계속해서 홍칠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단지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음만 조급해졌다. 홍칠에게서 손을 떼고 전력으로 구천인과 싸우면 이길 수가 있겠지만 그럴 경우 홍칠의 생명을 보존키가 어려웠다. 현재 단지흥은 일양지진력(一陽指眞力)으로 홍칠이 전신의 혈도를 통하게 하고 그 심맥을 당겨 심실과 이어 놓으며 심맥에 입은 극히 위험한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말로는 쉬우나 실제로는 아주 복잡한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홍칠의 몸에서 손을 떼서는 안 되는데, 손을 떼는
순간 홍칠은 그대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지흥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나 인간들끼리 서로 자비를 베풀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이때였다. 느닷없이 구천인의 귀에 속살거리는 듯한 가벼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젠 그만둘 때가 되었잖아요?"
구천인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소복 단장을 한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여인은 한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서서 구천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소리 하나 없이 자기의 몸 뒤에까지 와 서 있는 걸 보면 이 여인은 기이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인은 홍칠에게 가하던 공격을 멈추고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여인이 구천인을 향해 씽긋 웃어 보였다. 구천인은 그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주 냉염한, 깊은 원한이 서려 있는 듯한 차디찬 웃음이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방주님, 이제 그만하고 물러가는 것이 좋겠어요. 여기서 송장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에요."
여인의 말에 구천인은 다시금 악이 받쳤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사람 죽이기로 유명한 구천인이다. 네 년 하나쯤 죽여 없애는 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구천인은 속으로 으르렁거리며 여인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섰다. 이러다가 돌연 손을 써서 단번에 여인을 쳐 죽일 작정이었다.
여인이 그의 생각을 빤히 읽은 듯 냉소를 지었다.
"구 방주님, 날 해칠 작정이세요? 그렇다면 철장탈혼(鐵掌奪魂)을 쓸 건가요, 쌍장추정(雙掌推鼎)을 쓸 건가요?"
구천인은 흠칫 놀랐다.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길래 철장방의 무공을 이처럼 익숙히도 알고 있단 말인가?
"넌 도대체 누구냐? 어서 물러가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이 소리쳤다.
여인은 단지흥과 홍칠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구천인에게 물었다.
"단황 나으리와 홍칠공을 죽일 작정이었나 보죠?"
"그렇다. 내 비위를 거슬리기만 하면 난 누구나 다 죽인다!"
구천인은 턱을 치켜 들며 거만하게 대꾸했다.
"내가 비위를 건드리면 나도 죽이겠군요?"
여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거야 물론. 내가 죽인다면 죽는 거야."
구천인은 이 여인이 다른 병장기는 없이 다만 진불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기의 독한 철장으로 서너 번만 공격하면 여인은 당장에 피를 물고 꼬꾸라질 게 뻔했다. 그는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냉큼 몸을 솟구쳐 여인을 향해 장을 내밀었다.
여인은 구천인의 돌연한 습격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진불을 들어 홱 휘둘렀다. 순간 수많은 화살이 한시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구천인은 대번에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진불 한번 휘두르는데 저렇듯 광풍이 이는 듯하니 이 여인의 무공도 놀라울 정도가 아닌가?
구천인은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을 돌리며 진불의 공격을 피했는데 몸을 돌리는 순간 바람에 날린 옷소매가 진불에 맞아 쭉 찢어졌다.
임조영은 이번엔 구천인의 두 다리를 겨냥하여 진불을 내리쳤다.
"어이쿠!"
구천인은 냉큼 날아오르며 아래로 장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만소문예(漫掃蚊 )'의 법식을 취하며 허공에 뜬 구천인의 배를 후려갈기려 들었다. 구천인은 다른 법수는 쓸 수 없어 두 손바닥으로 장풍을 아래로 내리쳐 진불의 힘을 막았다. 그러나 그 장풍이 아무리 세다고 한들 갈기처럼 퍼져 나오는 진불을 몽땅 막아낼 도리는 없었다. 몇 오리의 진불 가닥이 구천인의 손을 후려치자 구천인은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끼며 허둥지둥
땅에 내려섰다.
땅에 내려온 구천인은 몸을 돌리며 큰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더니 다시금 임조영을 향해 공격태세를 취했다. 임조영은 자기의 이번 진불 공격에 구천인이 피를 흘리든가 크게 상할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아무렇지도 않자 구천인의 무공이 범속치 않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왕중양의 말이 과연 옳군. 과연 철장방 방주다운 솜씨야.'
이렇게 생각한 임조영은 오히려 더 신이 났다. 임조영은 왕중양과 무예를 겨룰 때도 어떻게든 이겨 볼 욕심으로 조금도 양보를 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러한 그녀에게 왕중양말고도 겨루어 볼 만한 적수가 나타난 셈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진불을 내두르며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그녀가 쓰는 법수는 스스로 창조하여 집대성한 일명 '옥녀심경(玉女心徑)'이라는 검술인데 하나하나의 법술이 모두 정묘하기 그지없어 구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구천인은 열세에 몰려 자꾸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천하에 이렇듯 강한 여인이 다 있단 말인가? 구천인은 문득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대가 임조영?"
구천인이 소리쳤다.
"그렇다. 내가 임조영이다. 이제야 사람을 알아보는 모양인데 사정을 봐주기엔 이미 늦었어. 넌 오늘 내 손에 죽는 줄만 알아라."
임조영의 공세는 점점 날렵해졌다. 구천인은 그것을 막느라고 갈팡질팡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둘이 한창 어지럽게 싸우는데 문득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사나이는 한편에서 임조영과 구천인이 싸우는 것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그의 손에도 진불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이구, 저 놈도 왔네.'
구천인은 한눈에 그가 왕중양임을 알아보고 더욱 맥이 풀렸다.
당시 무림인들치고 전진교 교주 왕중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에게 탄복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악하기로 유명한 흑도(黑道)의 효웅(梟雄)들도 왕중양의 이름만 듣고도 멀리 피하거나 두려워할 정도였다. 구천인은 임조영 하나도 당해 내기 어려운 판에 왕중양까지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임조영을 막아내고 있는데 다시금 사람 넷이 연달아 뛰어들었다. 다름아닌 단지흥의 호위병들인 어부, 농부,
나무꾼과 선비였다. 한바탕 혈전을 벌인 끝인 듯 농부는 다리를 절었고 어부는 왼팔을 상한 눈치였다. 넷은 늠름하게 방안에 들어와 양편으로 갈라서더니 왕중양과 단지흥의 분부를 기다렸다.
왕중양은 한눈에 벌써 임조영이 구천인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 단지흥과 홍칠에게 시선을 주었다.
단지흥은 내공으로 홍칠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홍칠이 지금 긴급한 관두에 올라 있는 듯 단지흥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져 갔다. 그는 느닷없이 구천인이 뛰어드는 바람에 그와 대항하느라고 진력(眞力)을 적지 않게 소모한 터라 홍칠을 치료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눈치였다.
왕중양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홍칠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 식지와 중지에다 기를 모아 홍칠의 심장 부위를 천천히 눌렀다.
"중양진인,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왕중양은 단지흥이 이 말을 할 때 극히 깊은 내공을 쓰고 있음을 알고 내심 탄복하며 물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어떤 고견이 계시는지요?"
"홍칠은 구천인한테 그만 심맥을 다쳤습니다. 나는 지금 홍칠의 심장 위치를 움직여 심맥에 잇대어 놓고 있는데 이렇게만 되면 큰 탈은 없을 겁니다."
왕중양도 그 이치를 알고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홍칠의 심장 부위를 누르고 있는 두 손가락은 떼지 않았다. 홍칠의 상황을 알게 된 왕중양은 더욱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단지흥은 왕중양이 하는 양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출지법을 보니 우리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과 같아 보이는데 우리처럼 손가락 하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두 개를 쓰는 게 다르구나. 참으로 묘한 일이로군.'
왕중양은 진력을 홍칠의 몸에 천천히 주입시켰다.
멀지 않아 홍칠의 낯빛이 점점 생기가 돌고 발그레한 혈색이 비치며 호흡도 점차 평온해졌다.
"단황 나으리, 이 홍칠이 영웅호걸이란 말은 벌써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진력을 주입시켜 줌이 어떻겠습니까?"
문득 왕중양이 말했다.
단지흥도 이 왕중양이 영웅협객들을 좋아하며 천하 영웅들을 사귀기를 즐겨할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침략을 일거에 격퇴시키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대답했다.
"중양진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리 하십시다."
둘은 모두 왼손을 들어 동시에 장풍을 일으키더니 다시 그것을 회수하며 손가락을 갈고리같이 만들어 각기 홍칠의 오른손과 왼손을 턱 잡아 쥐었다. 그러자 큰 힘 두 가닥이 홍칠의 오른손과 왼손의 노궁혈을 통해 체내로 끊임없이 흘러 들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홍칠은 가슴속 깊이에서 산악을 뒤흔들 듯한 큰 힘이 용솟음쳐 올라 흉벽을 두드리며 줄기차게 흐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아― 아―" 하는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왕중양과 단지흥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는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역시 고함을 내질렀다. 우렁찬 왕중양의 음성에는 패주의 기운이 넘쳤고 맑은 단지흥의 음성에는 왕자의 기운이 넘쳤다. 한편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홍칠의 고함소리에는 울화와 분노,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홍칠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앉더니 왕중양과 단지흥에게 말했다.
"대은불언사(大恩不言謝)라고 긴말은 아니 올리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사를 올리고는 더 말이 없었다.
왕중양과 단지흥도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팔짱을 끼고 임조영과 구천인이 싸우는 것에 눈길을 돌렸다.
임조영과 구천인은 여전히 한창 어지럽게 싸우고 있었다. 불리한 처지에 빠진 구천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발악하듯 대항하다가 문득 홍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홍칠이 언제 상처를 입었는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홍칠까지 달려들면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아닌가. 게다가 밖에 있는 부하들 스무 나믄 명도 이미 대리 사걸들한테 녹아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구천인은 완전히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이럴 땐 다른 생각 말고 몸을 피하는 게 현명한 거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달려드는 임조영을 필사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뜻하지 않은 엄청난 장풍에 임조영이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때다 싶은 구천인은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구천인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왕중양이 쫓아가 붙잡으려는 듯 발딱 몸을 일으켰다. 단지흥이 그를 말렸다.
"불심에 마음을 두시고 공명을 즐기시며 가원(家院)에서 유한히 시간을 보내시고 산애(山崖)에서 도를 닦으십시오. 저런 사람은 가면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뒤를 쫓아 무엇하겠습니까?"
단지흥의 말에 왕중양도 깊이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끄떡이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지흥과 왕중양, 홍칠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들을 바라보던 임조영은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녀는 한쪽에서 잠자코 서 있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바로 이날 황제는 황궁 안의 전당에 앉아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간척(千戚)이라는 춤이었는데 각각 여덟 명씩 네 줄로 서서 손에 제각기 간극(千戟)을 들고 추는 춤이다. 황제는 남송(南宋)의 영종(寧宗) 조괄(趙括)이었다. 그가 경원(慶元) 성대(盛代) 용의에 앉아서 기쁨이 한량없는 표정으로 30여 명 궁녀의 춤과 기악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환관 하나가 곁에 다가오더니 뭔가 여쭐 말이 있다는 눈치를 보였다. 영종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환관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영종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큰소리로 명하였다.
"됐다. 이제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궁녀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살금살금 물러 나갔다.
"그래 그 계집이 왔다, 이거렷다?"
영종이 환관에게 물었다.
환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벽(玉壁) 하나를 영종에게 올렸다. 반 조각 난 옥벽이었다. 영종은 그것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며 환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 뜻을 안 환관은 난각(暖閣)으로 가서 자그마한 용봉갑(龍鳳匣)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들어왔다. 황제는 용봉갑을 열고 안에 있는 반 조각 옥벽을 꺼내어 두 조각의 옥벽을 맞춰 보았다. 두 조각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자 황제가 큰소리로 분부했다.
"좋다. 수향헌(漱香軒)으로 불러들여라."
수향헌은 자그마한 난각으로서 커다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을 뿐 다른 시설들은 별로 없는 깨끗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위아래 온통 검은색 무림의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황제 앞에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여쭈었다.
"폐하께 신첩 인사 올립니다."
여인은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어서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짐 앞에서까지 이런 복장을 할 필요가 있는고?"
황제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신첩은 어명을 따르겠나이다."
여인은 머리를 조아리더니 일어나 옷을 벗었다. 황제 앞이건만 옷을 벗는 품이 매우 당당했다. 그녀는 먼저 두건을 벗어 땅에 내려놓고 이어서 무림의 복장을 벗었다. 그녀는 곧 스무 살 안팍의 젊은 궁녀복 차림의 요염한 여인으로 둔갑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다.
"고생이 많았다. 그래 짐이 분부한 일들은 어떻게 되었는고?"
황제의 물음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근사하게 되어가나이다. 그런데 차제 개방에 분란이 많아져 당분간은 더 손쓰기가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경의 말대로 하면 철장방이 짐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하겠다고 한다면서?"
황제의 말에 여인은 눈을 치뜨고 한번 황제를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명이신데 철장방이 감히 거역할 리 있겠습니까마는 철장방의 세력이 아직까지는 강호에서 그렇게 크게 미치지 못하여 일호백낙(一呼百諾)은 어려운 상황이옵니다."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누가 강호에서 일호백낙을 할 수 있단 말인고? 개방 방주 미운산인가, 아니면 전진교 교주 왕중양인가?"
"왕중양이올시다."
여인이 대답했다.
"경은 왕중양을 만날 수 있는고?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고? 그 사람에게 용의 자태나 천자(天子)의 외표라도 있단 말인가?"
황제의 물음에 여인이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용의 자태가 다 뭡니까? 그건 모두 하릴없는 대신들의 헛소리에 불과한데 폐하께선 어찌 그 말을 곧이들으시옵니까?"
이에 황제는 기뻐 웃으며 여인을 향해 말했다.
"경이 내 곁을 떠난 후로 난 매일이다시피 그런 말을 귀로 들었기에 묻는 것이니라."
그리고는 여인을 넋 나간 표정으로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황궁에서 황제는 매일 미녀들을 상대하고 있고 어떤 때는 하룻밤에 미인 서넛을 한꺼번에 끼고 자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인들 가운데는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 여인을 마주하자 황제는 너무나도 황홀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 이리 가까이 오지 못하는고?"
여인이 빙긋이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임금님 모시기가 호랑이 모시기란 말이 있지요. 폐하께서는 황제이시니 호랑이도 보통 호랑이가 아닌 줄 아옵니다. 호랑이한테 그냥 안겨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고? 글쎄 대신들이 내 곁에 붙어 있는 건 나도 싫어. 사내들끼리 한데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하지만 자네는 다르잖은가? 자, 이리 가까이 오게나. 어서."
황제가 팔을 벌려 보이며 애가 타는 듯 재촉했다.
여인은 또 생긋 웃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황제를 떠보듯 말했다.
"삼천 궁녀가 곁에 있는데 신첩 같은 거야 벌써 잊으셨을 줄로 아는데요?"
"무슨 소리? 내가 어찌 한시인들 그대를 잊었겠는가? 괜한 투정 부리지 말고 어서 내 무르팍에 와 앉거라."
그러나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독 여인만이 황제의 부름에 이렇듯 부동의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환관들이 보면 또 뭐라고 수군거리겠나이까? 황제께서 음락에 빠졌다고 뒷소리할 거고 그러면 어느 대신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입궁하여 황제께 또 간할 것이옵니다. 선조께서 몽진(蒙塵) 중에 계시오니 폐하께서 자중하시와 음락을 경계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여인의 말에 황제는 허허 소리내어 웃었다.
"자네는 참 말도 많구만."
그는 고개를 돌려 환관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내 명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와선 안되느니라."
"예잇―."
환관들은 두말없이 서둘러 물러갔다.
수향헌에는 황제와 여인만이 남았다. 여인은 엉덩이를 한들한들 흔들며 사뿐이 황제 앞에 다가오더니 그대로 선 채 어리광하듯 물었다.
"아이 참, 폐하의 무릎 위엘 어떻게 앉으란 말씀이옵니까?"
황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여인의 손목을 잡아당겨 냉큼 끌어안았다. 그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숨찬 소리로 물었다.
"임자, 밖에서 잘생긴 사내들을 더러 보았겠지?"
여인이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나, 폐하처럼 잘생긴 미남이 천하 어디 있다고 그러시옵니까?"
"글쎄 그걸 나도 모르겠다 이거야. 궁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내 앞에선 무릎을 꿇고 맹수나 만난 듯 오돌오돌 떨기만 하거든. 그래 그녀들이 정말 내가 좋아서 그럴까?"
"그야 저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여인은 탄식조로 대답했다.
황제는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짐은 오직 임자가 날 좋아함을 알고 있지. 짐은 임자를 강호 바닥에 내놓아 고생시켜야 하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몰라. 하지만 어쩌겠나? 짐이 휘종(徵宗) 선제처럼 되어서 자기 여인을 내놓아 남의 사내를 수청 들게 한다면 그처럼 수치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짐은 이런 수치를 사전에 방비하고자 이러는 거야."
황제는 이렇게 말하며 여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이 여인은 다른 궁녀와 달라서 황제 앞에서 어떤 행동이든 부담없이 할 수가 있었다. 황제의 수염을 잡아당길 수도 있고 다른 궁녀들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욕지거리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더 받고 있는 여인이었다.
"저 미운산 있잖아요."
여인이 교태 섞인 음성으로 떠보듯 입을 열었다.
"그는 정말 사내 중의 사내더군요."
"그래?"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나 여인은 그의 속을 빤히 꿰뚫어 보면서도 모르는 척 약을 올렸다.
"미운산이 남자 구실할 때면 정말……."
여인은 미운산과의 황홀했던 밤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듯 다분히 흥분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확실히 미운산은 절륜의 기력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였다. 그녀의 몸 위에서 미운산은 맹수와 같은 힘으로 그녀를 미칠 듯한 격랑에 휩싸이게 했는데 쾌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 정도였다. 미운산과의 밤을 생각하고 여인은 어느덧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숨결이 절로 가빠졌다.
"그래 그 녀석과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과 정말로……."
황제는 약이 바싹 올랐다.
여인이 깔깔 웃었다.
"폐하도 참……, 그냥 농담을 해 본 것뿐이옵니다."
그러나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짐은 일찍이 신신당부한 바 있으렷다? 오로지 짐한테만 충성을 해야 하고 다른 놈들과는 임기응변으로 그러는 척만 하라고 하였는데 그래 그걸 잊었단 말인가?"
"어찌 감히 그걸 잊었겠사옵니까? 누구의 엄명이시라고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신첩만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희비들과 궁녀들한테 폐하도 임기응변 그러는 척만 하셨나이까?"
여인이 능청스레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임자가 황제인가? 황제가 뭔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인가?"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야……."
"무엄하도다. 황제란 오늘 밤에 끌어안고 좋아하던 여인도 다음 날 아침 사람을 시켜 죽여 버릴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이니라.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황제의 눈에 날카로운 핏발이 섰다.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미운산한테 정이 들었단 말이렷다? 좋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마.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황제가 밖에 대고 버럭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작은 체구를 가진 태감 하나가 설설 기면서 들어왔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네가 한번 말해 보아라. 짐이 이 계집을 어떻게 죽이면 좋겠느냐? 장살(杖殺)을 시킬까, 교살(絞殺)을 시킬까?"
태감은 어리둥절해져 말문이 막힌 듯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도 이 여인이 황제에게 그 누구보다 큰 총애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이 여인을 죽여 버리겠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황제는 앙상하고 창백한 손으로 여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고로 제일 무정한 사람이 제왕들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내 말 한마디면 너 같은 목숨은 당장에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무섭지 않느냐?"
"무섭지 않습니다. 무서울 게 없지요. 폐하께서 신첩을 강호에 내보낼 제 신첩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사옵니다. 그러한 몸이 더 무엇을 두려워 하겠나이까?"
여인은 차분히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젖히며 허허 웃고는 태감에게 명했다.
"어서 잠자리 시중이나 들도록 해라."
태감은 서둘러 원앙휘장을 드리우고 쌍베개를 놓고 비단 이불을 펴는 등 한동안 부산을 떨더니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다 되었나이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여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여인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여인의 미끈한 몸매가 드러나자 황제는 완전히 넋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을 미친 듯이 주물러 대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강호에 가서 야성을 좀 배웠겠는데 왜 짐한테 그 야성을 좀 부려 보지 못하는고?"
그러자 여인이 와락 몸을 일으켜 황제를 깔고 앉으며 소곤거렸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 맛을 보여 드리지요."
여인은 정말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용상 위에 누운 황제를 떡 주무르듯하며 온갖 음탕한 짓을 다하였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자 황제는 지칠대로 지쳐 나른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배 위에 앉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황제는 다시금 기운을 내어 여인의 목을 와락 당겨 안았다.
"이 세상에 폐하를 따를 사내는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가 최고이옵니다."
여인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황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인의 말에 황제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그럼, 내가 누구냐? 내가 이 나라 황제가 아니더냐……?"
여아는 한 자그마한 집 안에 앉아 있었다. 소미타와 사개에 의해 죽은 거나 다름없던 그녀는 한 괴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녀는 빠개지는 듯 아픈 머리를 싸쥐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너무도 끔찍한 정경에 여아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모두 내 탓이야. 내가 그 마차를 타지 않았으면 마부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이 집에 들지 않았으면 이 집의 노파와 아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지 않았을 거야. 모두 내 잘못이야. 당신들의 원혼이 있다면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문득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집 안에 누구 계십니까?"
노인의 음성이었다.
여아는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구신지 들어오세요."
여아는 다 죽어 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혼자말로 웅얼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상하구만. 집 안이 왜 이렇게 캄캄하고 어둡지?"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더듬더듬 사람을 찾는 것 같더니 땅에 쓰러져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일어나요, 일어나. 객이 왔는데도 잠만 잘 거요?"
노파가 움직이질 않자 그가 혀를 찼다.
"허 참, 단단히 곯아떨어진 모양이구만. 이런 한심한 일이 다 있나?"
그는 투덜대며 이번에는 마부와 노파의 아들을 흔들어 댔다. 문득 그는 뭔가를 깨달은 듯 소스라쳐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구, 몽땅 죽은 사람들 아냐? 세상에……."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이번엔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여아를 가만 들여다보더니 킥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의 눈이 이처럼 큰 건 처음 보는군 그래."
그는 손바닥을 펼쳐 여아의 눈앞에 대고 오락가락 흔들어 보고는 여아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그래, 옛말이 하나 틀린 거 없다니깐? 한이 많은 사람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더니만 꼭 그 짝이야. 그러면 이 여자는 무슨 한을 그렇게 품고 죽었을까?"
그는 여아의 맞은편에 풀썩 주저앉았다.
여아는 여아대로 이 사람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그는 옷차림부터가 희한했다. 위에 공자삼(公子衫)이라는 저고리를 입었는데 앞가슴엔 새 몇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에는 공자건(公自巾)이라는 두건을 썼는데 그 두건에는 저잣거리에서 파는 아이들 노리갯감 따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황아장수들이 쓰는 딸랑이북에다 다는 딸랑이, 엿장수들이 쓰는 방울, 귀염둥이 아이들 옷에 달아 주는 백보대(百寶袋) 따위로, 아무리 적게 봐도 3, 40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이런 것을 달고 다니니 실로 가관이었다
그가 여아의 코에 손을 대보더니 중얼거렸다.
"아니,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인데? 아이고, 안 되겠다. 이러다가 아예 마저 죽어 버리면 내가 큰 변을 당하지. 죽은 원귀가 나를 끌고 가면 나까지 죽는 거다. 아이고, 어서 내빼자. 이럴 땐 내빼는 게 상수야."
그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여아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애걸하는 듯한 여아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측은한 듯 말했다.
"내 묻는 말에 대답해 봐요. 말을 못하겠으면 눈이라도 꿈쩍거려 봐요. 그대는 여자임에 틀림없지?"
여아는 그 물음에 눈을 꿈쩍했다.
"죽지 않은 건 틀림없군."
여아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서글프게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한테 이런 해코지를 당한 거요?"
그 말에 여아는 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가 미운산의 여인이 된 지는 오랜 옛날 일로 운낭과 더불어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왔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운산의 정이 점차 식어 가기 시작했는데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오늘은 미운산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죽이게까지 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 역시 미운산에 대한 정이 완전히 식어 버렸다. 그녀는 미운산을 위해 아낌없이 청춘을 바쳐 온 지난날이 한없이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여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바라보던 사나이가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걸 보고 그냥 갈 수는 없고, 어디 봅시다."
그는 여아의 팔목을 쥐고 맥을 짚어 보았다.
"남한테 목을 조여 혼절했다가 겨우 깨어났구만. 말도 못하겠고 몸도 안 움직여진다 이거지?"
여아가 그렇다는 듯 눈을 한 번 꿈쩍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마음 푹 놓게나. 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댈 치료해 줄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양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여러 날 병구완을 하여서야 여아는 몸이 차차 회복되어 갔다. 그제야 여아는 자기를 돌봐 주는 사나이의 이름은 주백통이고 별명은 노완동임을 알게 되었다. 여아가 그를 오라버님이라고 부르자 노완동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여아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작은 마을의 집 한 채를 얻어 10여 일 가량을 병을 치료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여아는 이제 일어나서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둘은 농담도 하며 아주 가깝게 지냈다.
여아는 이 노완동이 아주 솔직하고 너그러우며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임을 알고 속으로 아주 존경하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여아는 바깥 방에 있고 노완동은 안방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여아는 오늘따라 가슴이 뛰었다. 여아는 노완동이 곁으로 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곁에 와서 종남산 전진교의 일들이며, 그의 사형인 왕중양의 이야기며 그가 어떻게 왕중양의 사제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노완동 자신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매우 즐거운 눈치였다.
여아는 지금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갈망했다. 노완동은 비록 말이나 행동이 실없고 의젓하지 못한 것 같기는 하나 마음씨 하나만은 무던하고 너그러웠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 따위는 근본적으로 없는 사람이었다. 여아는 이런 남자와 같이 살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아는 노완동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직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한편 노완동은 혼자서 술을 마시며 여아와는 아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형님,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시우? 미인이 화근이란 말도 모르우? 그깐 임조영과 밤낮 코를 맞대고 있다간 좋지 않은 일을 당할게 분명해요. 제발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 무예나 수련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텐데……."
여아는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우리 둘은 오다가다 이렇게 만난 사이로 내 속마음을 이 기회에 터놓지 않으면 결국 후회하게 될 거야. 시일이 더 지나 내가 완쾌되면 저분은 훌쩍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텐데 그때 가서 후회하느니 당장 고백해야지."
여아는 조급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라버님, 이리 좀 와 보세요. 이리루 와 보시래두요?"
여아의 부름에 노완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싶어 급히 건너가며 물었다.
"여아, 무슨 일인가?"
"오라버님도, 내 곁으로 가까이 오시면 큰일이라도 나나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여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주백통이 어정쩡하게 물었다.
"무서워서 그래요. 곁에 앉아 말벗이나 좀 해 줘요."
남녀간의 일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짝이 없는 노완동은 여아가 정말 혼자 있기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어린애 달래듯 말했다.
"참, 무섭긴? 여아는 여기 있고 나는 저기 있지만 한 집 안에 있는데 무섭긴 뭐가 무섭다는 겐가?"
"그래도 난 무섭단 말예요. 무서워서 말벗이나 해 달라는데 싫단 말이에요?"
여아가 뾰로통한 기색으로 투정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지. 여아가 원하는 일인데 마다할 수야 있나."
주백통은 여아의 곁에 주저앉았다.
여아의 얼굴이 봄날 피어나는 해당화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노완동은 여아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벽창호 같은 소리만 해댔다.
"여아, 정말 그렇게 무서우면, 자, 내 손을 잡지."
주백통의 말에 여아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오라버님은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말인가? 난……."
주백통은 갑자기 어색해서 말끝을 흐렸다. 무예를 닦는 데만 일심정력을 기울여 온 탓으로 그는 여태까지 여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여아로부터 이런 질문을 듣고 보니 그는 그만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녀가 함께 있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오라버님은 그 재미를 모르세요?"
"그래 봐야 아이나 낳고 살림이나 하며 둘이 함께 다니는 것뿐인데 거기에 재미가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여아는 주백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날 보세요. 우리 둘이 이렇게 같이 지내는 건 어떨 것 같애요? 싫으세요?"
주백통은 눈을 크게 뜨고 여아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아는 개방 방주 미운산과 부처간이 아닌가? 미운산이 여아를 버렸다고 해도 나하고는 부처가 될 수 없어. 난 여인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사형인 왕중양 형님께서도 말했듯이 난 천상 무예나 닦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깐. 나는 일심정력 무예나 닦아 장차 좀 큰일을 해 볼 생각이야. 여하튼 난 여자와 같이 살 사람은 아니라구."
그의 말에 여아는 눈물이 글썽하여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나 같은 건 싫단 말이군요. 나 같은 건 싫다 이거예요."
주백통은 여아에게 어떻게 제 속을 내보여야 할지 답답해졌다.
여아는 주백통의 손을 잡아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뭣 땜에 날 살려 주었어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난 오라버니를 사랑해요. 정말 진심으로 사랑해요……."
주백통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여아가 자기 손을 붙들고 흐느껴 우는 것을 당장 한 이불 안에 들자는 뜻으로 알고 황급히 머리를 내저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우리 둘은 자리를 같이할 수 없어."
여아는 그만 수치를 느꼈다. 주백통이 자기를 경시하고 있으니 자기가 아무리 사랑을 고백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더욱 서글퍼졌다.
이때였다. 두 사나이의 말소리가 불쑥 끼여들었다.
"저런 음탕한 년 같으니. 그래 도저히 못 참겠다 이거지? 사내라면 한바탕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건가?"
다른 한 녀석이 핫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저런 바보 같은 사내 놈도 다 있군. 자네 같으면 저 녀석처럼 가만있겠어? 계집이 몸뚱이를 던지며 눈물을 흘리는데 바보처럼 멍청히 보고만 있겠나? 나 같으면 그냥……."
그들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음란한 말들을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재밌다고 웃어젖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여아와 주백통 앞에 나타났다. 여아는 한눈에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하나는 개방의 금의파 장로인 운중연 서불성이고 다른 하나는 오의파 장로인 과청천 제갈옥생이었다. 그들은 한심하다는 듯 주백통을 바라보았다.
"뭣하는 사람들이오? 여긴 왜 왔소?"
주백통이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저 여자가 누군지나 알고 그러고 있느냐?"
과천청 제갈옥생이 빈정대듯 웃었다.
"누구긴 누구겠소? 여아지."
주백통은 좀 얼떨떨해서 대답했다.
"물론 여아지. 내 말은 저 여자가 누구의 여자인지 아느냐 그 말이야."
과천청이 또 비양거리며 물었다.
주백통이 다시 대꾸했다.
"저 여자가 과거에 개방 방주 미운산한테 있었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쯤 알고 있으면 됐다! 저 여자는 말이야, 개방 방주의 여자란 말이다. 너 같은 놈이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주백통이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대꾸했다.
"여아가 미운산의 여자이기에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못한다 이말이오? 그럼 어쩐다지? 난 이미 여아를 구하기 위해 팔에 안아도 봤고 무서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여 손도 잡아 주었는데, 그래 이걸 어쩐단 말이오?"
노완동은 난처하게 되었다는 듯 머리 아픈 시늉을 했다. 개방의 두 장로는 한심해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난 서불성이 빈정대며 말했다.
"뭐 어쩌겠나? 자결을 하는 수밖에."
"자살? 내가 왜 자살을 한단 말이오?"
노완동은 눈을 부릅떴다.
"자살하기가 무서우면 우리가 도와주지. 우리 형제들이 먼저 너를 죽이고 나서 저 여인을 마저 요절내겠다!"
"당신들 둘이 날 죽일 수 있다고?"
노완동이 히히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여자는 뭣 땜에 죽이겠다는 거요?"
"말해 준들 네깐 놈이 알아듣기나 하겠느냐? 서로 명복이나 빌어 주는 게 좋을 거다."
과천청이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은 노완동의 겉모양만 보고 여지없이 깔보고 있었다.
"자, 우리 둘이 합세하여 먼저 저 놈부터 저승으로 보내고 저 년을 처치하자구."
과천청의 말이 떨어지자 둘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과천청은 노완동의 눈, 인후, 심장을 겨냥하여 암기 열 개를 내던졌고 운중연 서불성은 노완동의 몸을 겨냥하여 두 손으로 장풍을 날렸다.
제10장 가짜 미립
과천청이 던진 암기 열 개와 서불성이 날린 장풍이 일시에 노완동에게로 날아왔다. 거기에 맞기만 하면 노완동은 꼼짝없이 죽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완동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쑥 움츠러뜨리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자 암기 열 개는 노완동의 머리 위로 흘러가 버리고 서불성의 장풍도 빗나갔다. 노완동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뭣 때문에 건드리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나?"
노완동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서불성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서불성은 그만 저만치 뒤로 날려가 떨어지고 말았다.
노완동은 이제 과천청 제갈옥생에게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를 죽이겠다구? 어디 죽여 봐. 그 따위 재간으로는 좀 어려울걸?"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며 번개같이 과천청의 수양명대장경맥(手陽明大腸徑脈) 위의 오리(五里), 곡지(曲池) 이 두 개 대혈을 찔러버렸다. 과천청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노완동은 과천청의 자루에서 암기들을 꺼내 보았다. 모두 새파란 빛이 번뜩거리는 게 독이 묻은 암기들이었다.
"이렇게 독을 묻힌 암기로 사람을 죽이다니, 너희 개방이 이처럼 악독한 줄은 정말 몰랐다."
노완동은 과천청을 꾸짖었다.
"네 이 놈, 이 암기로 남을 죽이면서도 너는 이 암기 맛을 모르고 있을 테지? 내 오늘 네 놈에게 이 암기 맛을 보여 주마."
노완동은 당장 암기 하나를 과천청의 몸에 송곳처럼 박아 넣었다.
"악―!"
과천청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노완동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물었다.
"그래, 너의 이 암기는 얼마 있으면 독이 발작하지?"
"반시간쯤 지나서."
과천청이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 암기 열 개를 모두 박아 넣어야겠다. 반시간이나 끌 필요 없지. 안 그런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는데."
노완동은 마치 아이들이 장난질하듯 실실 웃으며 나머지 암기들을 하나하나 제갈옥생의 몸에 박아 넣었다. 제갈옥생은 아픔을 참지 못해 미친 듯이 악을 썼다.
노완동은 암기 열 개를 모두 박아 넣고 나서 고개를 돌려 여아를 불렀다.
"여아, 이것 좀 보라구. 볼 만하지?"
뒤를 돌아보던 노완동의 얼굴색이 갑자기 확 변했다. 여아가 입귀에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노완동은 달려가 여아를 마구 흔들어 댔다.
"여아, 여아!"
그러나 여아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여아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노완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운중연 서불성과 과천청 제갈옥생이 여아를 죽였을 리는 없고 도대체 누가 그녀를 죽였단 말인가. 운중연 서불성은 노완동의
장풍 한 번에 날려가 쓰러져 혼절하였고 과천청 제갈옥생은 혈도를 눌리고 암기에 찔려 죽어 가는 판인데 여아에게 손을 뻗칠 사이가 어디 있었겠는가. 이건 필시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숨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게 분명했다.
"누구냐? 누가 여아를 죽였느냐? 당장 나오너라!"
노완동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때 운중연 서불성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노완동은 달려가 캐어 물었다.
"도대체 누가 여아를 죽였느냐? 여아를 해친 놈이 누구냐? 말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예 죽여 버리겠다."
운중연 서불성은 노완동을 쏘아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을 들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과천청이 대신 내뱉었다.
"거 참, 재미나는 놈들이군. 그래 너희 둘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노완동이 물었다.
"우리 둘은 모두 개방 10대 장로들이다."
과천청이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겠지,.너희들이 10대 장로에 속한다면 장로에게 명령할 수 있는 놈은 개방 방주밖에 없겠지. 개방 방주의 명이라면 네 놈들은 하기 싫어도 시행하기 마련, 네 놈들이 여길 온 것도 방주가 시켜서렷다? 망할 놈의 개방 방주, 내 그 놈을 찾아가 요절을 내리라."
이어 주백통은 여아의 시체를 돌아보며 결연히 말했다.
"여아, 내 당장 개방 방주를 찾아가서 원수를 갚고 오겠으니 여기서 기다려."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의 방주가 되기는 하였으나 홍안루에서 주방장으로 있던 나날들이 잊혀지질 않았다.
'개방 방주가 다 뭐야? 온종일 집 안에 앉아 꼼짝도 못하니 답답해서 살 수가 없군. 홍안루 주인을 찾아가서 요리사 일을 다시 해 보겠다고 말해 볼까? 나한테는 그 일이 제격인데.'
소씨 거렁뱅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흔들흔들 홍안루로 향했다.
이날 아침, 여느 때처럼 문을 열기 위해 밖으로 나온 홍안루의 심부름꾼은 저만치서 어정어정 걸어오는 소씨 거렁뱅이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이거 오늘 또 재수 사납겠는데? 접때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비단옷을 입은 영감들과 거러지 열몇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홍안루가 온통 쑥밭이 되었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고 저 영감이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치는 거야?'
심부름꾼은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흘리며 소씨 거렁뱅이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허허, 무엇을 잡수시러 예까지 오십니까요?"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심부름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개방 방주의 증빙(證憑)인 녹옥죽봉을 흔들며 텅텅 누각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녹옥죽봉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게 누구 없느냐!"
심부름꾼이 헐레벌떡 뛰어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아이고 요리사 어른, 헤헤, 무엇을 잡수시겠습니까요? 분부만 하옵시면 제가 주방에 가 시키겠습니다. 요리사 어른이 오셨다면 모두들 정성껏 대접해 드릴 겁니다."
"그건 나중 문제고, 먼저 홍안루 주인부터 불러와."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쳤다.
아직도 마누라를 껴안고 코를 골던 주인은 주루 안에 무슨 큰일이 났나 해서 나는 듯이 달려왔다. 먼발치에서 소씨 거렁뱅이를 발견한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소씨 어른, 안녕하십니까?"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소씨 거렁뱅이는 주인의 뒤통수라도 두드리듯 녹옥죽봉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한 가지 요청이 있네. 내가 다시 와서 주방일을 보고 싶은데 받아 주겠나?"
주루의 주인은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고 어디로 피해 버리는 건데, 하고 후회하였다. 소씨 거렁뱅이가 주루에 있으면 다시 사람들이 찾아와 난리를 칠 텐데 그러면 홍안루는 끝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주루 주인은 어린애 어르듯 조심스레 말했다.
"홍안루같이 형편없는 작은 주루에 오셔서 무슨 고생을 하시겠다고 그러십니까? 그같은 재주로는 얼마든지 좋은 데서 일할 수 있으실 텐데요."
그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땅바닥을 탕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바닥이 뺑 뚫렸다.
"내 보기엔 여기도 좋아. 내 재주가 모자란 것 같으면 재주가 모자란다고 말할 것이지 무슨 가당찮은 소린가? 품삯이 과하다면 그깐 은자 몇 잎 내가 적게 받으면 될 게 아닌가?"
소씨 거렁뱅이가 언성을 높였다.
주인은 좋은 말로 구슬려 소씨 거럼뱅이를 돌려보낼 작정을 했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성을 버럭 내며 한사코 홍안루에서 주방일을 하고야 말겠다니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은 얼굴에 속 좋은 웃음을 담고 여전히 소씨 거렁뱅이를 구슬리려 들었다.
"아이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르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우리 주루의 사정이 지금 여의칠 않아서, 그러다가 요리사님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돼서 그러는 거지요."
"그 따위 말은 듣기 싫네."
소씨 거렁뱅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저 날 받아 줄지 말지만 딱 부러지게 얘기하라구!"
기실 주루 주인도 만만치는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어차피 소씨 거렁뱅이의 비위를 거슬린 바에 끝까지 버텨 보기로 작정했다.
"아무래도 어른께선 다른 곳을 택해 찾아가는 것이 피차 좋을 성 싶습니다."
갑자기 소씨 거렁뱅이가 목을 젖히며 크게 웃었다.
"악한 짓을 안 하면 악한 놈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더니 정말 그런가 보군. 주인장,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주점 주인은 그제야 소씨 거렁뱅이의 손에 들린 물건을 찬찬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새파란 옥으로 만든 막대기인데 거기에는 아주 정묘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녹옥으로 만든 지팡이로군요."
"주인장 눈썰미가 그만하면 괜찮구먼. 맞았어. 이건 녹옥죽봉이지. 이 녹옥죽봉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아나?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지. 용처가 두 가지라, 하나는 개를 단도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부르는 것인데, 천하의 개들, 살찐 개, 여윈 개, 비루 먹은 개, 사냥개 할 것 없이 이 녹옥죽봉에 맞았다 하면 어느 것 하나 살아남지를 못한다 이거야. 그리고 이 녹옥죽봉을 들고 사람을 부르면 천하 개방 제자들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을 못하고 모두 모여든다
이거야."
주루 주인은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런 소리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를 갸웃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을 이었다.
"전번에 개방 10대 장로가 홍안루에 와 좀 번거롭게 굴었다고 주인장이 나를 내보냈었지만 이번엔 만일 나를 홍안루 요리사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 내가 이 녹옥죽봉을 들고 문앞에 있는 거렁뱅이를 한번 부르기만 하면 반시간도 못 되어 이 홍안루 위아래층 앞뒤 뜨락이 모두 우리 거렁뱅이 천하가 될 텐데 어찌 생각하나?"
주루 주인은 그만 얼굴이 울상이 되어 버렸다. 정말 이 소씨 거렁뱅이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천하 거렁뱅이들이 몽땅 몰려드는 날이면 홍안루는 그대로 망할 것이다. 주루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땅 꺼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어쩌겠습니까? 이 누추한 홍안루에서라도 일하시게 해 드려야지요."
소씨 거렁뱅이는 대뜸 회색이 만면하여 두 손을 모아 쥐고 읍까지 하였다.
"고맙네, 고마워."
그는 당장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신명이 나서 주방 안에서 한창 솜씨를 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주 소중한 물건인 녹옥죽봉도 부뚜막 한쪽에 되는대로 세워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싱글거리는 품이 홍안루의 요리사 일이 개방 방주 자리보다 몇 갑절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주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나는 사개 정원이고 다른 하나는 소미타 추우였다.
소미타가 웃으며 말했다.
"방주님께 아뢸 일이 있어 왔소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다짜고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만 가만. 내가 그럴 새가 어디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는 걸 보지 못하나. 여하튼 우선 누각 위에 올라가 앉아서 술이나 몇 잔 마시고 있으라구. 이따 객이 적어지면 내려와 나를 다시 찾게나."
그러나 사개 정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느 놈이 개방 장로를 둘이나 죽였는데 신임 방주님께서 조처를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뭐? 누가 죽었다고?"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서 장로와 제갈 장로님이 죽었습니다."
사개 정원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주걱을 옆에 있는 요리사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어느 놈의 소행이지?"
"우리도 모릅니다. 아무튼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여아 아씨까지 죽였습니다."
"여아 아씨가 누구야?"
"미운산 방주님의 여인입지요."
소미타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 둘이 집법장로가 아닌가? 그러니 자네들이 가서 그 흉수를 알아 오게. 알게 되면 나한테 알리게나."
사개와 소미타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개방 방주라면 개방의 대소사를 모두 관여하고 처리해야 하는 법인데 이런 중대한 일까지 남에게 미루어 버린다면 그게 무슨 방주인가? 그러나 그들은 감히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소씨 거렁뱅이는 지금 일대제자가 아니라 개방의 방주이다. 그러니만큼 소씨 거렁뱅이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소씨 거렁뱅이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둘이 한동안 의논을 하고는 하는 수 없이 부하들을 풀어 수소문하게 했다.
소씨는 부뚜막 앞에서 바삐 몸을 놀리며 방금 소미타와 사개가 와서 하던 말을 머리에 되새겨 보았다.
'두 장로를 죽이고도 또 미운산의 여인까지 죽였다고? 왜 미운산의 여인까지 죽였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개방하고 원수를 졌다면 개방 장로를 죽이면 그만이지 여아 아씨까지 죽일 건 뭔가?'
이때였다. 심부름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요리사님, 손님 한 분이 강산이개 요리를 청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씨 거렁뱅이는 강산이개 같은 걸 만들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개방의 일이 염려되어 밖으로 나가 볼 참이었다. 계속해서 심부름꾼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씨 거렁뱅이는 화가 났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강산이개를 청할 게 뭐야?'
"아직 멀었습니까요? 빨리 음식을 내놓라고 야단들인뎁쇼!"
심부름꾼이 다시 재촉했다.
"내 즉시 해다 줄 테니 좀 가만있으라고 해라!"
소씨 거렁뱅이는 이렇게 소리치고 재료들을 갖추어 놓고 강산이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속언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서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 소씨 거렁뱅이는 마음 급하여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강산이개를 처음 먹어 보는 사람들이라면 음식이 되었는지 어떤지 알 게 뭐냐?'
소씨 거렁뱅이는 평소와는 달리 강산이개의 맛이 좀 덜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심부름꾼을 불렀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그 강산이개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자마자 욕지거리가 들려 왔다. 놈들은 홍안루의 요리사는 물론 홍안루 주인에게까지 모조리 욕을 해댔는데 그 욕지거리는 점점 더 거칠어 졌다. 그 바람에 다른 주객들은 겁이 나서 모두 슬슬 피해 가 버렸다.
이에 놀란 주루 주인이 황황히 올라가 보니 흉악하게 생긴 세 사람이 앉아서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손님들께서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신지요? 잘못된 일이 있으면 널리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인이 걱정스레 말하자 세 사람 중 까까머리를 한 자가 사납게 물었다.
"이 홍안루에 제일 이름난 요리가 강산이개 맞지?"
"그렇습니다만……."
주인은 대답을 하면서 심부름꾼에게 어서 소씨 거렁뱅이를 불러 오라는 눈짓을 하였다.
누각 위에 올라온 소씨 거렁뱅이는 첫눈에 벌써 이 세 놈이 좋지 않은 놈들임을 알아보고 눈길이 매서워졌다. 까까머리가 강산이개 접시를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소씨 거렁뱅이지?"
"그렇다."
소씨 거렁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니 네가 뭐 거렁뱅이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녹옥죽봉인지 뭔지를 들고 다닌다면서?"
까까머리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대답 대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소문에 의하면 강산이개가 아주 대단한 요리인 것 같던데 막상 와서 먹어 보니 순전 엉터리구나. 이런 형편없는 잡탕으로 사람들을 속이다니, 이래 가지구 계속 장사를 해먹겠느냐? 그래, 이게 그 잘난 강산이개라구? 어디 네가 맛 좀 봐라. 강산이개 맛이 어떤지?"
까까머리는 강산이개 접시를 젓가락으로 집더니 소씨 거렁뱅이 면상에 대고 홱 집어 던졌다. 소씨가 코웃음을 치며 슬쩍 한 손으로 그 접시를 받아 들었다.
"은자 석 냥이나 들인 요리를 먹지 않고 함부로 내던지다니, 거 너무하는구만."
소씨 거렁뱅이는 웃으면서 접시를 척 받쳐들더니 몸을 한바퀴 뱅그르 돌아 제자리에 내려섰다.
"강산이개 맛을 모르는 모양인데 내 톡톡히 맛을 보여 주지."
소씨 거렁뱅이는 탁자 위에서 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접시 위의 고깃덩이 열 개를 한 번에 한 칼씩 얇게 베어 냈다. 그는 베는 족족 세 놈의 면상을 향해 집어 던졌는데 종잇장처럼 얇은 고기 조각들은 주름살 하나 없이 놈들의 얼굴에 착착 들러붙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손을 놀리며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이건 돼지고기…… 이건 꿩고기다……. 이건 양고기고…… 이건 개고기다……."
세 놈은 하나같이 크게 놀랐다. 보통 무공으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들은 요리를 트집잡아 소씨 거렁뱅이를 혼내 줄 작정을 했던 것인데 생각 밖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무공이 자기들보다 높은 것을 알고 잔뜩 기가 죽었다.
"우린 안산(雁山) 삼귀(三鬼)다."
까까머리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담량이 있으면 오늘 저녁 수림으로 오거라. 거기서 한판 겨뤄보자."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고기 조각을 떼어 낼 생각도 못하고 일행들과 함께 서둘러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주루 주인을 한번 힐끗 보고는 곧장 주방으로 가서 요리사들에게 일을 맡기고는 홍안루를 나왔다.
밤이 깊어 갔다.
먼 곳에서 야경꾼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불조심하시오 불조심!"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미운산과 운낭은 넓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미운산은 운낭을 보며 말이 없었고 운낭은 머리를 길게 풀어 내려 그 까만 머리칼로 미운산의 목을 부드럽게 감으며 정답게 소곤거렸다.
"방주를 그만둔 건 잘한 거예요. 그간 방주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뭐해요? 공연히 마음만 복잡하지. 그나저나 아래를 못쓰게 되었으니 그게 무엇보다 답답한 일이군요. 여아도 떠나가고……. 당신은 여아가 떠난 걸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죠?"
미운산은 운낭의 희고 풍만한 젖가슴을 들여다보며 두 젖무덤 사이의 계곡을 묵묵히 쓰다듬기만 했다. 운낭의 유방은 여아의 유방보다 풍만하고 탄력이 있었다.
"여아 생각을 하시는군요."
운낭이 소곤거렸다.
"그래……, 여아는 날 떠나지 말아야 했어."
미운산은 한숨을 지었다.
"당신이 이해하셔야죠. 여아는 나하곤 달라요. 당신이 성할 때도 여아는……."
"그만해!"
미운산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그래 운낭은 어떤가? 자네의 속마음을 실토해 봐. 나 같은 병신과 허구한 날 이렇게 밤을 새우는 게 운낭도 진저리가 나지? 솔직히 말해 보라구!"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구요."
운낭은 미운산의 가슴에 얼굴을 얹으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여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난 누구보다 잘 알아요. 여아가 떠난 걸 못내 서운하게 여기신다는걸. 그러면 못 가게 붙들면 되었을 것을 죽이긴 왜 죽인단 말이에요? 왜……."
미운산은 괴로운 듯 다시 역정을 냈다.
"듣기 싫다! 너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 계집들이란 다 한가지야! 맘에도 없는 소리로 날 우롱하지 말고 떠날 테면 어서 떠나라구!"
운낭의 울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당신이 절 데려 왔잖아요? 난 당신의 여자인데 가긴 어디로 가란 말이에요? 난 못 가요. 당신의 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요. 이런 당신을 두고 어떻게 가요. 난 못 가요. 못 간다구요……."
운낭의 울부짖음에 미운산도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내가……."
운낭이 와락 미운산을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둘은 서로 얼싸안은 채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미운산이 운낭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맥없이 말했다.
"내가 자네를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은 자네를 망치는 일이야. 내 걱정은 말고 자네도 어디로든 떠나게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런데 그럴려면……."
미운산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운낭이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끼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저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신 거죠?"
운낭이 다그쳐 묻자 미운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하는 수 없군 그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자네는 나를 떠나되 여아처럼 떠나지는 말아. 그렇게 떠나다간 여아처럼 죽게 될 테니까. 떠나려거든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떠나버려."
미운산은 말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여기 있을 거라구요."
미운산은 말없이 운낭을 바라보았다. 여아의 일로 상심한 그는 운낭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잠시 후 운낭은 미운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들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숨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미운산은 자신의 목을 감은 운낭의 머리칼을 풀어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깊게 잠이 든 운낭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미운산은 한동안 운낭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다리를 끌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미운산은 힘겹게 어느 밀실에 이르렀다. 밀실 안에서는 한 젊은 여인이 꼭두각시들을 갖고 놀고 있었는데 얼굴은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너는 오빠, 너는 누이동생, 아니, 아버지와 딸이 좋겠다……."
미운산이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니 그제야 여인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바로 미립이었다. 미립이 미운산을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나, 아버지가 오셨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난 아버지가 웃을 때가 젤 좋더라. 웃어 봐요, 어서!"
그녀의 애교에 미운산이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립이라는 여자, 미운산의 분부를 받고 홍칠도 불러오고 소씨 거렁뱅이도 불러오던 그녀는 자신이 미운산의 딸이라고 했었다.
미립은 미운산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와락 미운산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심기가 영 좋질 않아 보이시는데?"
"무슨. 심기 나쁠 턱이 없지. 너를 만나면 난 즐겁기만 한데?"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미립은 미운산의 목에 매달려 말없이 그에게 음란한 눈길을 보냈다. 미운산은 그녀의 젖가슴이 뭉클하니 눌러 오는 느낌에 숨이 가빠졌다.
"이…… 이 손을 놓으라구……."
미운산이 가까스로 말했다.
미립은 씩 웃어 보이고는 천천히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곧 백옥같이 하얀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알몸이 고혹적으로 드러났다. 미립의 모습은 너무도 요염했다.
그녀는 잘록한 허리를 배배 꼬며 앵두 같은 입을 열었다.
"남들은 내가 당신의 딸인 줄로만 아는데 지금 우리 둘의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놀랄까요? 그래 당신은 무섭지 않아요?"
"무섭긴 왜 무서워?"
미운산이 나직이 대답했다.
"무섭지 않다고요? 당신이 병신이 아니고 당신의 그 다리도 독해당한 것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이 지금 독해를 당하여 병신이 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까 봐 겁나지 않아요. 강호의 영웅이, 개방의 방주가 이런 짓을 한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텐데요?"
미립의 말에 화가 난 미운산은 사나운 기색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쳐 죽일 듯한 기색이었다.
미립도 표독스러운 눈길로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미운산이 갑자기 요란하게 웃어댔다.
"웃긴 왜 웃어요?"
미립이 여전히 표독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네 걱정이나 하라구. 그래 네가 미립이 아니고 조정에서 보낸 어린 갈보년이란 걸 남들이 알면 넌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냐? 네가 개방에 기어든 세작(細作)인 줄 개방 삼십만 형제들이 알게 되는 날엔 어떻게 될까? 한 개 분타의 사람들만 모여들어도 너 같은 건 그냥 육장이 되고 말걸? 그 참혹한 광경을 말해야 알겠느냐?"
미운산이 언성을 높였다.
"그런가요?"
미립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미운산의 눈길은 어느새 분노로부터 색탐과 음욕의 눈길로 바뀌었다.
미운산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의 젖통을 와락 움켜쥐더니 사정없이 비틀었다.
"방주님, 왜 이러세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네가 무슨 내 딸이냐? 내 딸을 어쨌느냐? 진짜 내 딸을 데려와……."
미운산이 거칠게 미립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운산과 미립은 땀이 흥건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좀 전의 그런 매서운 눈길들은 물론 아니었다. 미립이 팔을 벌려 미운산을 끌어안고 한 쌍의 젖무덤을 미운산의 가슴에 지그시 눌러 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정말 내 아버지가 되어 주지 않을래요? 그러면 난 사랑도 더 받고 응석도 더 부릴 수 있을 텐데. 안 그래요?"
미운산은 지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지 뭐. 넌 내 딸, 내 미립이다……."
갑자기 미운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어올랐다.
"미립…… 미립아……."
미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군. 눈물을 백 날 흘려 봐요. 딸이 돌아오나. 그런 꿈은 꾸지도 말아요."
그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매섭게 말했다.
미운산은 잠자코 계집을 쏘아보았다.
'네 년이 내 딸을 어디다 치우고는 내 딸로 가장하여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하신을 못쓰는 것처럼 가장하게끔 나를 협박하여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냐? 좋다. 내 딸 미립을 찾을 때까지만 참아주마. 미립을 찾기만 하면 조만간에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이 개방 방주의 재주가 여인들과 살을 섞는 데만 있지 않다는 걸 꼭 보여 주리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평소 미운산의 뒤에 서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을 천진하게 웃곤 하던 그녀가 가짜 미립이리라고 누가 감히 의심이나 해 봤겠는가? 미운산은 망연자실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미운산을 마주하고 앉아 그의 알몸을 손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 만지기도 하던 손이 하복부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사타구니 사이의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미운산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재미있다
는 듯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호……. 아래는 든든한데 그저 담이 작은 게 탈이라니깐요."
미운산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다시 방주 자리를 차지하려면 힘이 좀 들텐데……. 먼저 내가 지금 방주로 내세운 소씨 거렁뱅이를 죽여 주지요. 그리고나서 홍칠이까지 없애 치우면 다른 것들이야 염려할 게 없겠죠?"
"……."
"지금쯤 안산 삼귀가 소씨 거렁뱅이를 없애 치웠는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에 미운산이 툭 내뱉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안산 삼귀가 소씨를 없애 치워? 도리어 소씨한테 맞아죽지나 말라지. 사람을 잘못 내세웠네."
그러나 여인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느린 걸음걸이로 숲에 당도했다. 이곳은 홍안루 앞에 있는 한 수림으로 여름이면 과일들을 난전에 내어 놓고 팔곤 했다. 이미 날이 저물었는지라 인적이 끊기고 날짐승 한 마리 날지 않아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숲에서 세 사나이가 소씨 거렁뱅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소씨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 세 사람은 보아하니 홍안루에 음식이나 먹으러 온 손님같지는 않은데 무슨 속셈으로 날 찾아온 건지 어디 말해 보시지."
까까머리가 대꾸했다.
"소씨 거렁뱅이, 네 놈이 강호에서 대단한 자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 하지만 소문만으로야 알 수 있나? 그래 정말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또 마침 네 놈의 머리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 안산 삼귀가 돈벌이도 할 겸 네 놈과 겨뤄 보러 왔다. 어쩌겠느냐? 한판 싸우다가 죽겠느냐 그저 순순히 목을 내놓겠느냐?"
놈이 말을 마치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 목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구? 그게 누구냐? 죽을 땐 죽더라도 누가 날 죽이려 하는지는 알고 죽어야 할 게 아니냐?"
"죽으면 그만인데 그건 알아 뭐하겠느냐?"
까까머리는 이렇게 말하며 느닷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배꼽 아래쪽에 있는 기해혈(氣海穴)을 찌르려 하였다. 적안귀라 불리는 다른 놈도 까까머리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고함을 지르며 덮쳐 들었다. 도사(道士) 행색을 한 세 번째 놈도 장검을 휘두르며 덤볐다. 놈이 쓰는 장검은 끝이 뾰족하고 폭이 아주 좁지만 보통 검에 비해 퍽 길었다.
세 놈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소씨 거렁뱅이는 삽시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녹옥죽봉을 꺼내어 세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먼저 도사의 장검을 쳐 물리치고는 몸을 비틀며 적안귀의 어깨뼈를 후려쳤다.
"아이쿠!"
적안귀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 놈은 뒤로 물러서서 놀란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바라보았다.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생각보다 탁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놈은 강호에서 흑도(黑道)의 살인 백정으로서 목숨을 내걸고 나쁜 짓만 해 온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자기들보다 월등 높은 것을 알아차리고도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와 더불어 죽기로 작심했다.
도사는 장검으로 또다시 소씨 거렁뱅이를 들이찔렀다. 어깨뼈가 부서진 적안귀도 성한 손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틀어잡으려고 날뛰었다. 세 놈은 합심하여 물샐틈없이 소씨 거렁뱅이를 공격했다.
형편이 위급하게 되니 소씨 거렁뱅이의 녹옥죽봉도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술을 좋아하는 소씨 거렁뱅이인지라 그 죽봉도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변화 무쌍하여 그 법수와 법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세 놈도 그에 따라 법수와 법식을 바꾸면서 다섯 합쯤 더 싸워 보았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적안귀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 힘이 어찌나 컸던지 적안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휙 밀려 나갔다. 소씨는 그
틈으로 몸을 날려 빠져 나갔다.
까까머리가 소리쳤다.
"저 놈을 놓쳐선 안 돼!"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그 까까머리의 미간을 냅다 찔렀다. 까까머리는 녹옥죽봉 한 방에 두 눈알이 튀어나오고 피가 솟구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놈이 눈을 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내 눈! 내 눈!"
소씨는 땅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는 놈의 머리통을 다시 한 번 후려갈겼다. 놈은 그대로 혀를 빼물고 즉사하고 말았다.
이때였다. 도사가 검을 휘두르며 배후에서 공격해 왔다. 소씨가 녹옥죽봉으로 놈의 머리를 내리치자 놈은 급히 장검으로 막았다. 순간 장검이 녹옥죽봉에 맞아 부러져 나갔다. 도사는 잽싸게 끊어진 검날을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날렸다. 검날이 소씨 거렁뱅이의 어깨에 들어박혔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날려 도사에게로 다가섰다. 이제 빈손이 된 도사는 당황하여 달아날 생각도 못하고 멍청히 소씨를 쳐다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죽봉을 치켜 들어 냅다 도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도사는 찍소리도 못하고 나무등걸 쓰러지듯 쿵 쓰러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적안귀에게로 다가갔다.
"누가 너희들더러 날 죽이라고 시켰느냐?"
그가 물었다.
적안귀는 튀어나온 눈을 감싸쥐고 고통스레 대꾸했다.
"대답할 수 없다. 그래 봐야 기껏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너희들 세 놈은 애초에 나의 상대도 안 되는 놈들이다. 어느 놈이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들은 너희들이 어리석은 놈들이지 뭐냐? 자, 어서 말해라. 누가 시킨 일이냐?"
"그렇게 궁금하다면 이 말만은 해 주겠다. 네 놈을 죽이라고 한 건 바로 개방 사람이다. 네 놈의 개방에서 누가 오천 냥 은자를 내놓으면서 우리더러 널 죽이라고 했어."
역시 짐작대로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개방인 가운데 오천 냥 은자를 내어 놓을 만한 사람은 금의파 장로들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놈인지 알수가 있나?'
소씨 거렁뱅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누구냐? 누가 너희들더러 날 죽이라고 시켰느냐?"
"말할 수 없다. 네 놈이 날 죽이지 않더라도 조만간에 그 놈한테 죽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너한테 죽겠다. 그 놈이 살아 있어야 다른 놈을 써서라도 널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적안귀는 이렇게 말하고는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허리춤께서 쇠사슬을 꺼내어 제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놈은 요란한 소리를 지르더니 쇠사슬을 위로 힘껏 당겨 올렸다. 소씨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놈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다.
제11장 또 하나의 미립
홍칠은 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색으로 두 눈을 꼭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보아 상처가 꽤 중한 듯싶었다.
홍칠이 미안한 심정으로 말했다.
"날 구해 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당신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에요."
처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당신의 상처가 나으셨으면 가 보세요."
"소저의 상처가 나은 다음 떠나겠소."
홍칠이 대답했다. 처녀가 자기 때문에 철장방 무리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어찌 모르는 척하고 떠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단지흥과 대리 사걸도 떠나가고 이 집엔 처녀와 어린 소년밖에 없지 않은가?
처녀는 잠자코 홍칠을 바라보다가 수줄은 미소를 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홍칠은 밖으로 나가 문앞에 자리를 잡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처녀와 한 방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짚단을 깔고 되는대로 드러누웠다. 날이 밝으면 처녀에게 밥을 지어 주고 약을 달여 줄 생각이었다.
처녀의 상처는 제법 심각했으나 다행히도 단지흥이 떠나갈 때 남겨 두고 간 약이 있는데다가 홍칠이 보살펴 준 덕분에 상처가 하루하루 나아갔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구질구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홍칠은 처마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갑자기 누군가 낄낄대며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앉아 있는 꼬락서니라니. 정말 상거지가 따로 없구만."
홍칠이 얼른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는데 나이는 홍칠과 비슷해 보였으나 행색은 어린아이와 같은 희한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요? 날 본 적이 있수?"
그 사람은 장난기 섞인 어조로 물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노완동이라는 사람이오. 이름은 들어 봤겠지?"
홍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노완동은 흉내를 내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어댔다.
"이거 영 섭섭하구만. 그러면 이 노완동은 몰라도 전진교는 알고 있겠지? 설사 전진교는 모른다고 치더라도 나의 사형인 왕중양은 알고 있을 거요. 당신은 나와 사형을 만나 본 일이 없수?"
그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홍칠은 비로소 그의 무예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그가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라면 그의 무예도 상당히 놀라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누가 오셨나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처녀가 물었다.
홍칠이 대답했다.
"찾아오신 분이 전진교 사람이라고 하는데 대협(大俠) 왕중양의 사제라고 하는구려."
노완동이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당신은 개방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소?"
홍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홍칠이라 하오."
"그나저나 궂은 날씨에 왜 밖에서 이러고 있소.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소?"
노완동이 물었다.
"안 되오."
"왜 안 된다는 거요?"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뭇사내가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오."
"방금 그 여자 말이오?"
노완동이 히히거리며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가 문득 홍칠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날 속이는구만. 집 안에 여자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뭣 땜에 거짓말을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거요?"
그제야 홍칠은 집 안에 사내애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대답했다.
"그건 낭자의 동생이오. 당신은 남이니까 들어가선 안 되오."
노완동은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참말 웃기는군. 여자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들어가면 좀 어떤가?"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며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흥칠은 그를 막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얼결에 주먹을 날렸다.
"이크!"
노완동이 얼른 몸을 피했다. 그는 홍칠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당신 무예가 대단하구려. 개방의 장로들인 과천청 제갈옥생과 운중연 서불성보다 퍽 낫구만."
"당신이 제갈 장로와 서 장로를 어찌 아오?"
홍칠이 놀라 물었다.
"알다마다. 내 이 손으로 그 두 사람을 죽여 버렸지."
노완동이 과시하듯 말했다.
"뭐라구?"
홍칠은 깜짝 놀랐다.
"네 놈이 우리 개방 장로 두 분을 죽였다구?"
홍칠은 분노를 느꼈다.
"잘 만났다. 네 놈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발로 호랑이 굴엘 찾아 들었구나."
그는 냅다 장을 날렸다.
노완동이 잽싸게 홍칠의 장을 맞받았다.
두 사람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10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홍칠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긴 것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노완동이 왕중양 사제로 무공이 대단하리라 짐작했지만 이토록 고명한 무공을 지녔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싸움에만 열중하여 처녀와 사내애가 문을 열고 자기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 지켜 보던 처녀가 보다못해 말했다.
"그만들 하세요. 그분께서 안으로 들고 싶어 하시는데 들어오시게 하시지요."
두 사람은 동시에 우뚝 멈춰섰다.
"이것 보라구. 들어와도 된다잖아."
노완동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홍칠은 더는 노완동을 막지 않았다. 노완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선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더니 불쑥 내뱉었다.
"뭐 대단한 보물이라도 감춰 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구만."
홍칠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노완동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 이제 알겠어. 보아하니 자네가 낭자한테 흑심을 품은 게로구만?"
"무슨 허튼소리야?"
홍칠이 펄쩍 뛰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두세. 자네 눈치를 보니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말야.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뭐."
홍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도 사내인지라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어떤 이름 못할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노완동이 한마디로 그것을 꼬집어 내자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처녀도 노완동의 말에 부끄러운지 귀 밑까지 새빨개졌다. 두 사람의 모양새를 본 노완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 노완동은 한쪽에 따분히 앉아 있는 사내애에게 말을 건넸다.
"저 두 사람은 정말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둘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게 어떻겠냐?"
"당신한테 재미있는 게 뭐 있나요? 있으면 꺼내 보여 줘요."
소년이 물었다.
주백통은 주머니에서 수정으로 된 유리알을 꺼내 들었다. 소년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수정 구슬이군요. 좋아요. 전 아저씨와 놀래요."
주백통은 바닥에 구멍 몇 개를 그려 놓고 손에 들고 있던 유리알을 소년에게 나눠 주었다. 두 사람은 방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재미있게 구슬치기 놀이를 했다.
처녀가 홍칠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전 아직도 맥이 없어 견디기 어려워요. 그래서 침대에 앉은 채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세요?"
홍칠은 고개를 끄덕이고 처녀를 침대에 오르도록 부축해 주었다. 처녀가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처녀는 비록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나 같은 떠돌이 거렁뱅이 주제에 뭘 어쩌겠는가? 그저 목숨을 구해 준 데 대해 감사나 해야지.'
처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의 장법이 개방 방주의 강룡십팔장 같아 보이는데 안 그런가요?"
"그렇소. 하지만 이 장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법수와 동작이 좀 서투르오."
홍칠이 대답했다.
"그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 개방 방주의 두 가지 기공(奇功)이란 걸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개방 방주가 무엇 때문에 당신한테 이 법수를 전수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처녀가 다시 물었다.
홍칠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꿈틀 놀랐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소상히 얘기하려다가 얼른 생각을 바꿨다.
'이 처녀는 개방의 적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지껄였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구나.'
홍칠의 생각을 모르는 처녀가 계속 물었다.
"방주께서 당신한테 강룡십팔장을 전수한 이상 타구봉법도 전수했을 테죠?"
홍칠은 그저 말없이 웃어 보일 뿐 이렇다저렇다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낭자,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아는 것 보니 실로 대단하오. 어떻게 이 강룡십팔장을 알게 되었소?"
홍칠의 물음에 처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그 항룡유회 법수는 너무 딱딱해 보이더군요. 가는 것은 부러지기 쉽고 깨끗한 것은 더럽혀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당신은 손을 쓰는 게 딱딱하기만 하고 축력(蓄力)이 모자란 것 같아요. 그러니 장을 내밀어도 용이 움직이는 듯한 감을 주긴 어렵지요. 비록 몸의 자세가 변하지 않게 하더라도 동작의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요. 항룡유회는 이렇게……."
그녀는 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앞으로 곧게 뻗더니 팔로 파도가 굼실거리는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장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 동작을 지켜 보던 홍칠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항룡유회는 홍칠 자신이 가장 흡족하게 여기는 법수였다. 그는 강룡십팔장을 익히면서 이 법수를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자기보다도 항룡유회에 대해 더 많은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칠은 너무도 기가 막혀 그녀를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한 법수 한 법수씩 나머지 장식(掌式)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홍칠은 그녀의 설명을 듣는 동안 강룡십팔장에 대해 많은 이치들을 터득하게 되었다.
"내 보기엔 이 강룡십팔장엔 보충해야 할 부족한 점들이 많은 것 같소. 방주께서도 전해 내려오면서 실전된 부분이 있다고 하셨소."
홍칠이 말했다. 처녀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방주님께서 그런 말씀도 해주셨나요?"
처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고치며 말을 이었다.
"방주님께서는 당신이 강룡십팔장을 보강해 완벽한 무공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 같군요."
홍칠은 그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체 방주와 어떤 사이길래 방주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저런 얘기를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자기를 인정해 주었다는 의미이므로 내심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가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강룡십팔장을 내가? '용이 하늘을 날으니 어찌 절묘하지 않으랴' 하는 식이로구먼."
그가 큰소리로 하하 웃었다.
처녀도 따라 웃으며 홍칠을 조용히 응시했다.
한쪽에서 사내애와 한창 구슬치기를 하던 노완동은 두 사람이 강룡십팔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 불쑥 끼여들었다.
"홍칠공, 당신이 만약 강룡십팔장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면 나는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겠소. 어떻소?"
홍칠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처녀가 다시 말을 건넸다.
"당신은 강룡십팔장을 터득하면 개방 방주의 그 타구봉법도 터득 한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되자 홍칠은 자기가 방주로부터 강룡십팔장만을 전수받게 된 과정을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차근차근 그 경과를 이야기해 주었으나 미운산이 불구가 된 일과 소씨 거렁뱅이를 개방 방주로 정하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처녀는 홍칠이 미운산 방주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는 입을 열었다.
"미 방주께서는 매사에 용의주도한 분이라 당신이 그분의 강룡십팔장을 배우게 된 건 예삿일이 아니에요. 제 생각에 그분은 당신한테 타구봉법은 미처 가르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홍칠은 또다시 그녀가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길래 개방의 일을 그다지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거요?"
처녀는 홍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
"당신은 개방의 타구봉법을 배울 생각이 있나요?"
홍칠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배울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홍칠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개방의 이 타구봉법은 역대 방주들에게만 전수해 내려오는 것인데 이 여인이 어찌 그 절묘한 타구봉법을 안단 말인가?'
홍칠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처녀가 말했다.
"당신의 기색을 보니 제가 타구봉법을 알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홍칠이 얼른 대답했다.
처녀는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작은 나뭇가지 한 개를 주워 들고 가벼운 동작으로 타구봉법을 펼쳐 보였다.
홍칠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정채로운 동작 하나하나가 진짜 타구봉법이로구나. 한데 이 여인이 어디에서 이런 타구봉법을 배워 냈을까? 아무래도 이 여인은 개방 방주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한 홍칠이 큰소리로 물었다.
"낭자는 이 타구봉법을 누구에게 배웠소?"
"방주께서 일찍 당신한테 이 봉법(棒法)을 전수할 뜻이 있었다면 당신은 나한테 배우면 되는 거예요. 무슨 어려운 점이라도 있나요?"
처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낭잔 대체 누구요? 타구봉법을 배우더라도 낭자가 누군지는 알고 배워야 할 것 아니오?"
홍칠의 물음에 여인은 대답할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홍칠이 덧붙였다.
"요 며칠 사이에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모두 이상한 일들뿐이오. 우리 개방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낭자도 그 패나 아닌지 모르겠구만. 만일 그렇다면 난 사정을 두지 않겠소."
홍칠은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노완동과 소년이 구슬치기하던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우리 누날 다치지 말아요!"
소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도 너의 누날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자기가 누구라는 걸 밝히라는 것뿐이야."
처녀는 홍칠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전 미립이에요."
"미립? 미립이라고 했소?"
홍칠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는 예전에 미립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처녀와는 판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칠은 처녀의 얼굴을 새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여인이 노상 미운산의 곁에 붙어 다니던 그 미립이란 말인가?
"낭자는 미 방주와 어떻게 되는 사이요?
홍칠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처녀는 돌연 왈칵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 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다못한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누난 미립이고 난 미기(米奇)예요. 미운산 방주님은 우리 아버지구요."
소년이 큰소리로 말했다.
홍칠은 깜짝 놀라 미립을 바라보다가는 또 미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난 미 방주가 있던 곳에서 미립을 본 일이 있소."
그의 어조에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 처녀는 미운산의 딸 미립이 틀림없었다. 미운산이 방주 노릇을 하기 시작한 후 두 남매는 조정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누군가에게 구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미립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 일들을 홍칠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개방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아버지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둘이서 이렇게 지내게 된 거예요."
홍칠은 비로소 미운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소나마 알 것 같았다.
'보아하니 방주의 두 다리는 그 가짜 미립의 독수에 걸려 잘못된 것이로구나. 그 여인이 친딸로 가장해 가지고 그분의 신변에 접근하여 그분을 해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엇 때문에 미운산은 방주의 자리를 사부님과 나한테 넘겨주려는 것일까?'
홍칠은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 미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름에 잠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미운산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를 눈치챈 홍칠이 위로하듯 말했다.
"내 생각에 방주님의 신변에 더는 큰 위험이 없을 것 같소. 그자들은 자기들이 공개적으로 나서거나 방주님의 목숨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요. 지금 그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나와 소씨 사부님이오. 이 시각 누구보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은 나의 사부님인 것 같소."
홍칠은 진정 소씨 거렁뱅이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 낡은 절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이제 홍안루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홍안루에 붙어 있다가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조차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벽에 기대 앉아 한창 술을 들이키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이러고 앉아 있는가 했더니 바로 소씨였구만?"
소씨는 술을 마시다 말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옥면검객 호심이었던 것이다.
호심은 서호의 개방대회에서 소검 오평과 무예를 겨루고는 개방을 떠난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자넨 이곳에 뭣하러 왔나?"
소씨가 물었다.
호심이 되물었다.
"듣자니 누군가가 개방의 장로 제갈옥생과 서불성을 죽였다고들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래, 사실일세. 하지만 그분들을 살해한 놈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네."
호심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가 소검 오평에게 부상을 입힌 일은 자네만의 책임도 아닌데 왜 금의파를 떠났나?"
소씨의 물음에 호심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금의파 사람이 방주 노릇을 하든 오의파 사람이 방주 노릇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세. 난 그런 골치 아픈 일에 관여하기 싫어서 나왔어."
소씨 거렁뱅이는 옥면검객 호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넨 개방 사람이면서도 왜 이처럼 늘 제멋대로 노는가? 개방의 일에 자네나 나나 결국은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하네."
이때였다. 돌연 밖에서 몇몇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이어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옥면검객, 네 놈이 소검을 상하게 했은즉 그 원수를 갚으러 왔다!"
옥면검객이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웬 놈들이 이다지도 소란을 떠는 게냐?"
그는 들고 있던 조롱박의 술을 마시며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개방 사람의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호심이 문을 열고 나오자 일제히 그를 에워쌌다.
옥면검객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놈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호심, 각오 단단히 해라. 네 목숨은 오늘로서 끝장이 날 테니까!"
20여 명 되는 놈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둥근 참대통이었는데 놈들은 그 참대통을 치켜 들고 한 줄로 늘어서서 옥면검객을 바짝 죄어 왔다.
호심은 그 죽통에 담긴 것이 극독임을 알아챘다. 그는 냉소했다.
"그래, 독약으로 독살하는 것으로써 소검의 원수를 갚겠다는 거냐?"
놈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만 손에 죽통을 든 채로 옥면검객을 노려보았다. 옥면검객은 뽑아 든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독을 뿌려라!"
우두머리가 큰소리로 명령했다.
놈들은 일제히 호심을 향해 독약을 뿌렸다. 호심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온몸에 독약을 뒤집어썼다. 순간 호심의 온몸에는 검은 반점들이 생기면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등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검을 쥔 오른손의 맥이 빠져 나갔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검을 집어 들려고 하자 죽통의 극독이 다시금 호심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검을 놓친 호심은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은 독약을 뒤집어쓴 호심이 죽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에 더는 상대하려 하지 않고 멀찌감치 슬슬 피하기만 하였다.
놈들이 피하면 피할수록 호심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러 가며 필사적으로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난 이제 개방 사람이 아니야! 난 금의파도 오의파도 아니야! 그런데 무슨 원수를 졌다고 끝까지 날 못살게 구는 거냐?"
그의 말에 우두머리인 듯한 놈이 흉악한 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오의파면 어떻고 금의파면 어때? 우린 너희들과 같은 개방 사람이 아니야. 우린 다만 네 놈을 죽여 개방 놈들한테 넘겨주려 할 따름이다. 그래서 너희들 개방에 내분을 일으켜 강호에서 서로 참살하게 하는 게 우리 의무지."
옥면검객 호심은 비로소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떨어뜨린 검을 바라보았다.
"검…… 나의 검을……."
검객인 그는 한평생 검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끔찍해져 갔다. 그의 옷자락은 독약의 독성에 의해 완전히 타들어 갔고 몸은 처음에는 반점이 생기다가 점점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검을 한 번 잡아 보고 싶었다. 검객은 죽는 순간까지도 검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검을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이를 지켜 보던 우두머리가 얼른 호심의 검을 집어 들고는 물었다.
"이 검을 원하느냐?"
호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검…… 검을……."
"이따위 녹슨 검으로 뭘 어쩌겠다구. 옜다!"
놈은 선심이나 쓰듯 호심을 향해 검을 쑥 내밀었다.
호심은 그가 자기에게 검을 넘겨주는 줄로만 알고 얼른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단말마적인 비명이 튀어나왔다. 놈이 내민 검이 그대로 호심의 팔을 냅다 후려쳤던 것이다.
옥면검객 호심의 비명 소리를 들은 소씨 거렁뱅이는 냅다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옥면검객 호심이 강호에서 일류 가는 호수로서 공력이 뛰어났으므로 이번 싸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호심이 궁지에 몰리는가 싶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급히 밖으로 튀어나오니 누군가가 앞을 막아 섰다. 그는 아주 오만한 기색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씨 거렁뱅이, 참견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는 웅대한 체구에 위풍이 당당해 보이는 건장한 사내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비끌어 매었고 호복인 듯한 짧은 저고리를 입었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는 아주 괴상한 모양새로 손잡이에는 길다란 사람의 머리가 부각되어 있었고 두 개의 커다란 구리로 된 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그 머리의 콧구멍, 눈, 귓구멍으로는 자그마한 뱀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소씨가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 당신은 날 몰라서 그러오,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거요? 언젠가 당신의 제자 홍칠이 날 데리고 황궁을 유람하고 황궁 안의 다섯 요리사들과 싸운 적이 있는데, 기억 못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바로 구양봉이라 불리는 나약한 선비였다.
어느 날 홍칠은 구양봉을 데리고 황궁에 들어갔다가 다섯 요리사들한테 발각되었다. 그들 두 사람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자 소씨 거렁뱅이가 가서 그 다섯 요리사들과 싸워 두 사람을 구해 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구양봉은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아주 흉악하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몰골이 영 딴사람이 되었구만. 그땐 점잖은 서생 티가 찰찰 흘렀는데 말이야."
그러자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난 그때의 구양봉이 아니오.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번 보여 주지. 어서 그 개방 방주의 녹옥죽봉을 들고 나와 한판 붙어 보자구. 나의 독사장 솜씨가 어떤지 보여 줄 테니까."
구양봉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독사장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소씨는 구양봉이 홍칠을 따라 어선방에 들어갔다가 골탕을 먹던 일을 떠올리곤 코웃음을 쳤다.
그는 구양봉이 유운장(留雲莊)에 들어가 구사독옹(九邪毒翁) 문하에서 노독물 신독행을 스승으로 모시고 천하의 양대신공(兩大神功)인 봉황력과 합마공을 배워 천하에 드문 일류의 고수가 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날 가로막는 걸 보니 자기 재주를 상당히 믿고 덤비는 것 같은데 좌우간 한마디 묻겠네. 자넨 누가 불러서 이렇게 온 건가?"
소씨가 여유 있게 물었다.
구양봉이 거만하게 대답했다.
"누가 청하지 않았다면 내가 뭣 땜에 당신의 개방을 시끄럽게 굴겠소?"
"구양봉, 자넨 서생의 몸으로 손에 사두장을 들기는 했지만 그 재주를 가지고선 날 당하지 못해. 그러니 목숨 중한 줄 알거든 함부로 날뛰지 말게."
소씨가 타이르듯 말했다.
소씨의 말에 구양봉이 한바탕 너털웃음을 쳤다.
옥면검객 호심이 걱정되어 마음이 조급해진 소씨 거렁뱅이가 무섭게 소리쳤다.
"어서 길을 비켜! 비켜서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를 막아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자한 놈 같으니.'
소씨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좋다. 네 놈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디 한번 겨루어 보자. 호 장로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순전히 네 놈 때문이니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아라."
"너의 그 호 장로라는 녀석은 벌써 죽었다."
구양봉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검객이 손에서 검을 놓쳤으니 죽을밖에!"
이때였다. 호심의 비명 소리가 다시금 들려 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처절한지 소씨는 더는 지체할 수 없어졌다. 호심의 성격에 웬만한 고통으로 이렇게까지 비명을 질러 대진 않을 것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구양봉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서 구양봉을 물리치고 호심에게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구양봉에게 날린 주먹은 소림복호권(少林伏虎拳)이란 것이었다. 구양봉이 냉큼 몸을 피하며 빈정댔다.
"그 따위 재주를 가졌다고 개방에서 네 놈을 방주로 삼았단 말이냐? 실로 가소롭구나. 그런 재주를 가지고 어찌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들고 있던 사두장을 휘둘렀다.
구양봉이 독사장을 휘두르자 소씨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이 독사장을 휘두르는 법수는 절묘하기 그지없어 그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씨 거렁뱅이가 뒷걸음질을 치자 구양봉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공격을 가해 왔다.
워낙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과 무예 실력이 비슷하였으나 주도권을 빼앗긴데다가 병장기도 없이 빈손으로 맞붙다 보니 여간 벅차지 않았다. 구양봉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말했다.
"철장방 방주가 네 놈의 무예가 대단하니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하기에 그런 줄만 알았더니 순 헛소리였구나? 오늘 네 놈을 없애 버려 개방에 본때를 보여 주고야 말겠다!"
그는 더욱 기세 사납게 소씨의 머리와 가슴을 겨냥하여 사두장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소씨 거렁뱅이는 급하다 못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 그것을 무기삼아 맞서 싸웠다. 그는 술단지를 집어 구양봉을 향해 냅다 던졌다. 술단지가 사두장에 맞아 박살이 났다. 그는 또다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촛대를 집으려 했다. 그러나 촛대는 구양봉의 사두장에 맞아 저만치로 나가떨어졌다.
'보아하니 이 놈과 싸우자면 녹옥죽봉을 쓰지 않고선 안 되겠구나.'
소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지금껏 녹옥죽봉을 쓰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타구봉법을 배워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그 법수를 알지 못한 채로 녹옥죽봉을 갖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며칠 시간을 두고 방 중의 악한이 누구인지를 밝혀 내어 놈을 없애 버린 후에 그 성가신 방주니 뭐니 하는 자리를 팽개쳐 버릴 작정이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타구봉법을 배울 생각이야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 녹옥죽봉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구양봉, 네 놈이 진짜 호수라면 어디 이 몽둥이를 견뎌 내나 보자!"
소씨 거렁뱅이는 저돌적으로 구양봉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제 2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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