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화산논검 동사 황약사 4 김용

一字師 202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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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화산논검 동사 황약사 4 김용

 

                                                  图片来源 | 2020华山论剑狼人杀职业联赛秋季常规馆赛第二轮

 

제19장 동방화촉

구천인을 놓치고 다시 시가지로 돌아온 구양봉은 구천척이 공손지를 끌고 술집에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둘의 모습은 실로 우스웠다. 구천척은 수줍은 듯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온갖 교태를 다 부리며 걸어가는 듯했고 그녀에게 끌려가는 공손지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기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둘은 천천 큰길을 걸어 시가지를 벗어났다. 절정곡 사람들이 뒤를 따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구양봉은 생각했다.

'내가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는데 저 공손지의 음양도란인법이 크게 도움이 될텐데. 왼손으로 지팡이를 쓰고 오른손으로는 장법을 쓰면 그 위력이 대단해지련만 공손지가 수련한 내공이 도대체 어떤 심법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것만 배워 내면 두려울 게 없겠는데…….'

구양봉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 두 사람을 따라갔다.

공손지와 구천척은 시가지를 벗어나 어느 수림 안에 들어서더니 멈춰 섰다. 뒤따르던 하인들도 먼발치에 서서 감히 더 다가가지를 못하였다.

공손지는 구천척의 희고 매끄러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의 봉긋한 부분을 만질 때의 쾌감이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천척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탄탄한 젖봉오리를 조심스럽게 주무르며 빙그레 웃었다.

"천척 낭자, 낭자의 오라버니가 낭자를 내게 맡기다니 정말 뜻밖이오. 정말 기쁘기 한량없소."

구천척이 입을 삐쭉하며 웃었다.

"오라버니가 언제 나를 당신에게 맡겼어요? 단지 내 몸의 독을 해독시키라고만 했을 뿐이니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구천척은 황혼빛에 물든 공손지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전에는 그토록 형편없던 몰골이 이렇듯 딴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암만 생각해도 신기했다. 게다가 다섯 살 연하인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소년이 어쩌면 이렇게 성숙한 아녀자를 익숙하게 다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나직이 소곤거렸다I

"절정곡에 정화는 있는데 곡주께선 정이 있는지 없는지?"

공손지는 정감 어린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귀밑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남녀지간의 정이 있고 없음을 어찌 말로 증명할 수 있겠소? 낭자가 나와 성혼을 하여 함께 지내노라면 저절로 알게 될 것 아니겠소?"

그 말에 구천척은 다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정화에 중독되었으니 난 연정을 품으려 하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구천척은 갑자기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신음을 삼키는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화독이 또 발작한 것이었다.

"낭자, 낭자, 왜 이러오?"

공손지는 구천척을 안으며 급히 물었다.

"공손지, 내 마음이 왜 이럴까요……? 내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보자 마음이 끌린 것만은 사실이에요. 당신이 추남이건 절름발이 건 늙은이건 어린애이건 이제 아무 상관 없어요. 난,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구천척은 신음하며 말했다.

"낭자, 그 말이 정말이오? 정말로 이 공손지를 좋아한단 말이오?"

공손지는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정말이에요. 난 내가 고통스럽더라도 당신과……."

구천척은 떨리는 손으로 공손지를 부둥켜안았다.

"낭자, 안 돼! 이러지 마오. 내겐 지금 해독약이 없소. 낭자의 마음에 정욕이 일어나면 낭잔 무서운 고통을 겪게 되오."

구천척은 이미 머리칼이 흩어지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정염에 나른해진 몸을 공손지의 품에 맡긴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듯 감미로움과 고통이, 사랑과 미움이 한데 범벅이 되어 끓어오르는 마음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랑과 원망이 뒤얽힌 착잡한 심정으로 원망하듯 공손지를 향해 말했다.

"말해 봐요, 왜 나를 정화로 중독시켰어요? 정화를 먹고 내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미안하오.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후회막급이구려."

공손지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생각난 듯 품속에서 자그마한 꽃쌈지를 꺼내 들며 말했다.

"낭자는 정화 꽃잎을 다섯 잎 먹었지? 나는 열 잎을 먹겠소. 난 낭자와 고통을 같이 나눌 테요."

그는 꽃쌈지에서 마른 꽃잎 몇 잎을 꺼내 들고는 한숨 섞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천하에 이 정화처럼 기이한 꽃은 없지. 말라서도 이처럼 색이 고을 수가 있나? 낭자, 난 천척 낭자를 사랑하오!"

그는 꽃잎을 한 장 한 장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구천척은 놀란 시선으로 공손지를 바라보았다. 공손지는 정말로 정화 꽃잎을 열 잎이나 먹었다.

"천척 낭자, 낭자는 다섯 잎을 먹었는데 란 열 잎이나 먹었으니 정염이 동하면 이젠 내가 더 고통을 겪게 될 거요."

공손지의 말에 구천척의 두 눈엔 감격의 눈물이 가득 괴어 올랐다.

"그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에요. 나 하나 고생하면 됐지 왜 당신까지 사서 고생이에요?"

"낭자, 나하고 삽시다. 그러면 고통이 덜할지도 몰라. 생이별이 가장 고통스럽다지 않소?"

공손지의 말에 구천척은 눈물을 닦아 내며 투정하듯 말했다.

"원수야 원수. 헤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살기는 그렇고……."

"그게 무슨 소리요? 낭자도 날 좋아한다지 않았소? 우리 여기서 당장 혼인을 합시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면 그만큼 고통을 견뎌 내기가 수월할 거요."

공손지의 눈은 열기로 번쩍였다.

"그런 소리 말아요. 날 구할 수 있어야지, 그러지 못하면 우리가 성혼해도 이 고통을 계속 당해야 한다는 말 아녜요? 그러지 말고 우리 어서 절정곡에 돌아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요. 그 길밖엔 없어요."

"낭자, 내게 비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오. 나는 절정단(絶情丹)이라는 기이한 해독약을 만들 수가 있소. 그거면 정화독을 해독시킬 수가 있을 거요. 그런데 난 지금을 참지 못하겠소. 우리 둘이 이렇게 정으로 불타오르는데……."

"그래도 참아야지. 며칠 참았다가……."

하지만 구천척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끓어오르는 정염을 참아내기가 몹시 어려운 눈치였다.

"낭자, 내 말대로 합시다. 나와 부부지 간이 돼서 살을 섞노라면 자연히 정화독은 뽑혀 나갈 거요."

구천척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한동안 말이 없다가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별수 없군요. 당신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손지는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좀 멀리 물러가 있거라!"

하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멀찍이 모습을 감췄다.

공손지는 곧 쿵쿵 뛰는 가슴으로 한 나무 아래에 있는 큰 너럭바위 위에 구천척을 안아 눕혔다. 너럭바위를 신혼 밤의 원앙침대로 삼고 공손지는 구천척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봉긋 솟은 구천척의 젖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녀는 뜨거운 눈길로 공손지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아프오?"

공손지가 물었다.

"꼭…… 꼭…… 우리 둘이…… 이래야만 돼요……?"

아픔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구천척의 모습은 가엾고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낭자, 두려워할 것 없소. 아무것도 아니오……."

구천척을 달래는 공손지의 목소리도 은근히 떨려 나왔다. 사실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에 불과한 그는 여인과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난생 처음인지라 구천척보다 더 긴장한 상태였다.

구천척이 열에 들떠 있는 틈을 타서 그는 고개를 돌려 슬며시 약한 알을 입에 집어 넣었다. 바로 절정곡 안에서만 쓰는 비방해독약절정단이었다. 정화꽃을 열 잎이나 금방 먹었기에 정욕이 크게 동하기 시작했고 또 그 탓으로 속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파 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절정단 한 알을 몰래 삼킨 그는 혀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오뉴월에 얼음을 삼킨 듯 시원해짐을 느꼈다.

"낭자……."

공손지는 속삭이며 혀끝을 구천척의 앵두같이 빨간 입술 사이로 들이밀었다.

구천척은 자신의 혀끝에 공손지의 혀가 닿자 혀끝이 시원해지면서 고통이 다소 덜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놀라면서 방금 공손지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손지와 혼인하여 몸을 섞노라면 정말로 정화독을 뽑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천척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공손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긴장을 풀었다.

달빛 어린 수림 속.

공손지는 구천척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공손지가 그녀의 옷을 몽땅 벗겨 버리자 그녀의 숨은 더욱 가빠졌다. 탄력있는 젖무덤이 더욱 봉긋하니 부풀어올랐다.

공손지는 아무래도 소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구천척을 으스러지게 껴안고 입술을 미친 듯이 빨아 댔다. 공손지의 입에는 마치 정화독을 뽑는 마력이라도 있는 듯 구천척은 키스를 하면서 몸의 아픔이 한결 덜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공손지의 입에 절정단 한 알이 물려 있는 줄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공손지는 흡족하여 이제는 좀더 과감히 구천척의 아랫도리 쪽으로 손을 옮겨 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구천척의 두 손가락이 공손지의 목울대를 집게처럼 확 움켜잡았다. 뜻밖의 일이라 공손지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구천척이 쌀쌀하게 웃었다.

"우리 구씨네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던가?"

공손지는 몹시 당황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바야흐로 구천척의 몸에 돌입하여 남녀간의 극치를 맛보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듯 갑자기 구천척이 자기 숨통을 조일 줄이야.

"공손지, 네 나이가 도대체 얼마지?"

공손지는 구천척이 자기 나이를 묻는 게 제일 싫었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열다섯이라구 아까 말했……."

그는 꺽꺽거리며 말을 맺지 못했다.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나이에 벌써 여색을 이렇게 밝혀? 나이가 조금만 더 들면 대단한 색마가 되겠어?"

구천척은 손가락에 힘을 바싹 주었다. 공손지는 밸 나오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둥거렸다.

"공손지, 어디 말해 봐. 정말 나하고 성혼할 생각을 했었나?"

"진…… 진짜, 진짜라니깐."

공손지는 다급히 대답했다.

"그럼 좋아. 그게 진심이라면 어서 절정단을 이리 내."

"무, 무슨 소리요? 절정단이라니? 그런 진귀한 해독약을 아무 때나 함부로 들고 다니는 줄 아오?"

"그럼 좋다. 절정단을 내놓지 않겠다면 어디 좀 견뎌 봐라."

구천척은 눈을 부릅떴다.

"안 내놓겠다는 게 아니라니깐. 지금 내 몸에 지닌 것이 없다는 것뿐이지. 날 따라 절정곡에 돌아가면 해독약이 왜 없겠소?"

공손지는 가까스로 웃는 낯을 지어 보였다.

구천적이 코웃음을 쳤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분명 금방 해독약을 입에 물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구천척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공손지의 태도로 보아 그는 그녀를 속여 그녀의 몸을 빼앗자는 것밖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천척은 두 손가락에 다시 한 번 바짝 힘을 주었다. 숨이 막힌 공손지는 캑캑거리며 고개를 흔들다가 속이 뒤집히는지 왈칵 토하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구천척은 벌거벗겨진 몸으로 천천히 일어나서 공손지를 쏘아보았다.

"공손지, 어디 또 한 번 나를 속여 보시지?"

공손지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자 구천척은 품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공손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 철장방에서 무공을 수련할 때 쓰는 철장화염단(鐵掌火焰丹)이었다. 10년 이상 무공을 수련한 철장방 사람들이 철장공을 닦을 때 이 약을 손바닥에 놓고 비비면 몸에 내력이 커지는데, 한 알이면 1, 2년의 공력을 보태 줄 수 있다. 그러나 철장방 밖의 사람들이 먹으면 오히려 독약이 된다

구천척은 통쾌한 기분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은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만 이 약을 먹은 이상 온전치는 못할 거다.'

구천척은 공손지의 혈도를 찔러 놓고는 부랴부랴 옷을 입고 휘파람을 획 불었다. 곧 절정곡의 하인 하나가 나타났다.

"자네 주인이 급작스레 병이 났네. 도대체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네 주인 말에 의하면 날 위해 정화를 먹어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내가 가만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방금 자네 주인님은 자기를 어서 절정곡으로 보내 달라고 했네. 그러니 어서 말을 구해다가 밤낮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아."

곡주님이 갑작스레 급병이 나 인사불성이 되었다니 하인은 놀라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자기네 무리들을 두 패로 나누어서 한 패는 읍으로 달려가 말을 사오게 하고 한 패는 수림의 나무를 찍어 들것을 만들어 공손지를 메고 수림을 떴다.

지금까지 줄곧 나무 뒤에 숨어 두 남녀의 하는 양을 훔쳐보던 구양봉은 두 남녀가 서로 꾀를 써 가면서 서로 싸우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고 남녀지간의 사랑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만약 저 구천척과 공손지가 앞으로 정말 부부가 된다면 장차 무림에 효웅(梟雄)이 한 쌍 생길 것이다. 서로를 속이고 속이는 그들의 소행은 흡사 그의 사문(師門)인 유운장 사람들을 방불케 했다. 구양봉은 공손지와 구천척이 멀어지자 입가에 냉소를 머금으며 그곳을

떴다.

절정곡 곡주 공손지의 잔칫날이 되었다. 그는 끝내 철장방 수상표 구천인의 누이동생 구천척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절정곡 안은 기쁨이 넘쳐흐르고 사람들은 혼인식을 준비하고 신방을 꾸미느라 분주했다.

편벽한 골짜기인 절정곡은 외계의 사람들이 들어오기가 어려워서 바깥과의 왕래가 아주 드물었다. 절정곡 안의 사람들은 몇백 년 동안 바깥으로 나다닌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절정곡은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였다.

잔치가 끝나자 공손지와 구천척은 신방에 들어왔다.

"이제는 내 몸에 있는 정화독을 뽑아 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 노릇을 하겠어?"

구천척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뽑아 줘야지. 그런데 당신도 나한테 해독약을 줘야잖아. 나도 철장방독을 뽑아야지."

둘은 히히덕거렸다. 그러면서 각기, 서로가 꾀가 많고 계책을 잘 쓰므로 앞으로 강호를 넘나들며 서로에게 큰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구천척은 공손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거기도 이젠 나이는 어려도 내 낭군이 되었는데 내가 왜 홀대를 할까? 내게 절정단만 주면 앞으로 잘할게."

구천척이 교태를 부리며 달콤하게 말하자 공손지가 대답했다.

"임자, 오늘 밤 동방화촉이 지나 내일 주면 되잖아? 절정단 말이야."

"정말?"

구천척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낭군님, 이제 당신은 내 낭군이지요? 그러니 이제부터 나를 때릴려면 때리고 욕할려면 욕하고 마음대로 해요. 우리 삼남매 중에 큰 오라버니는 날 귀여워하고 아껴 주었지만 작은 오라버니는 나를 때리고 욕했지. 작은 오라버니하고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나빴어. 작은 오라버니가 나를 때리면 난 작은 오라버니를 욕했지. 욕하고 나면 속이 좀 풀리잖아. 이제 당신은 내 낭군이니까 날 때리고 욕해도 가만 있을 테야, "

그녀는 또 정화독이 발작하는지 신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낭군님, 난 낭군님을 사랑해. 난 낭군을 위해 죽어도 한이 없어……."

그녀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임자, 왜 이러시오?"

공손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구천척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낭군님, 난 정말 아파서…… 견딜 수가……."

그녀의 얼굴엔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공손지도 가슴이 아팠으나 마음을 독하게 사려먹었다. 구천척이 자기의 몸에서 철장독을 먼저 뽑아 주지 않으면 자기도 구천척에게 절정단을 먹이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구천척이 말했다.

"낭군님, 제 품속에 있는 약낭에 단약이 한 알 있어요. 철장방의 해독약인데 먹으면 금방 해독이 될 거예요……."

공손지는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품속에서 해독약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녀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한참 후 공손지는 적이 감격스러운 눈길로 구천척을 바라보며 해독약을 입에 넣고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한 갈래 열기가 단전에서 샘솟아 전신에 퍼지는 듯했다. 해독이 되어가는 것이다.

공손지는 기뻐 침대 옆으로 가서 구천척을 내려다보았다. 구천척은 눈을 내리감고 말없이 누워 있었는데 그 표정이 몹시 슬퍼 보였다.

"천척, 왜 그러오?"

"낭군님, 난 이제 낭군님의 아내가 되었는데도 낭군님은 밤새도록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건가요?"

구천척은 다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공손지는 다시금 정욕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의 몸이 해독되었으니 구천척의 정화독도 해독시켜 한시 빨리 정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환약 한 알을 입에 물고 구천척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임자, 내게 입을 맞춰 주오. 그럼 이 해독약을 먹여 주지."

공손지의 입에서 절정단이 녹기 시작하는지 벌써 약향기가 방안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구천척은 얼른 공손지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서늘한 기운이 혀끝에 닿으며 점차 온몸으로 퍼졌다. 한동안 잠자코 약기운에 몸을 맡기고 있던 구천척이 눈을 떴다.

"낭군님, 고마워."

구천척이 생긋 웃어 보였다.

몸이 거뜬해진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공손지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며 뺨에다가 키스를 퍼부었다.

"요 꼬맹이 남편아, 요 마음 좋은 내 낭군.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 오늘 밤 톡톡히 보답해 줄 테야."

그녀는 옷들을 훌훌 벗어 던졌다. 봉긋한 젖가슴, 둥글고 탄력있는 둔부, 그리고 아름다운 허리의 곡선…… 절세미녀의 황홀한 나체가 완벽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공손지 앞에서 춤을 추듯 몸을 한 번 휘 돌리고는 공손지를 덮치듯 끌어안고서 귓속말로 속살거렸다.

"날 침대에 안아다 줘. 그럼 내가 어떻게 보답해 줄지 알게 될거야."

공손지는 급히 손을 뻗쳐 구천척의 잘록한 허리를 꽉 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그는 발정한 수캐처럼 서둘러 아랫도리를 벗고 구천척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이때였다. 갑자기 구천척이 공손지의 대혈을 꾹 눌렀다. 공손지는 그만 침대 곁에 목석처럼 우뚝 서 버렸다.

구천척이 몸을 발딱 일으키며 말했다.

"공손지, 내가 너 같은 코흘리개한테 순순히 몸을 맡길 줄 알았어? 꿈 같은 생각은 하지도 말아."

그녀는 거칠게 발길질을 하여 공손지를 자기 앞에 꿇어앉혔다.

"호호호…… 공손지 씨. 에비애미 앞에서도 이렇게 공손히 꿇어앉겠지?"

공손지는 화가 치밀었으나 묵묵히 구천척을 흘겨볼 뿐이었다.

"이봐, 대추만한 것이 색시를 얻겠다구? 너무 이르다는 생각 안 들어?"

구천척은 어린아이 다루듯 공손지의 볼을 톡톡 두들기더니 강제로 입을 벌리게 했다.

"어디 좀 보자. 이갈이나 했는가? 열두세 살이 돼야 젖니를 다 간다는데 말이야."

그녀는 그의 턱을 확 밀쳐 버리고는 소리내어 웃으며 옷을 주워 입었다.

공손지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젖히고 구천척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구천척을 쳐다보다가 문득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너무 기대하진 마……."

"뭐? 그게 무슨 소리지?"

구천척이 얼른 웃음을 그쳤다.

"내가 왜 절정단을 직접 먹게 주지 않고 내 입에 먼저 물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

구천척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려 줄까? 내가 준 건 반 알뿐이야, 알아? 이제 한 달내로 나머지 절정단을 먹지 못하면 그땐 죽을 수밖에 없어."

공손지는 득의양양해서 실실 웃었다.

구천척은 놀란 눈길로 공손지를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누군가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신방의 휘장 위에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네들 같은 인간들이 성혼은 무슨 성혼을 한다고 야단들인가?"

두 사람은 뜻밖의 상환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언제 여기를 들어왔을까?'

공손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행색을 보니 서역 사람 같군."

"그렇네. 난 서역 사람일세."

구양봉이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런데 여긴 왜 왔소?"

공손지의 물음에 구양봉은 크게 웃기부터 했다.

"공손지, 난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다. 듣자니 네가 음양도란인법인가 뭔가를 가지고 이 절정곡에서 위세를 부린다기에 내가 네 놈을 요절내고 그 음양도란인법을 체득해 가려고 왔다."

그제야 공손지와 구천척은 자기네가 이때까지 티격태격 실없이 다투며 이곳에 오는 동안 그가 뒤 쫓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공손지와 구천척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구천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서역의 노독물 구양봉이시군요."

"계집애들까지 내 이름을 그렇듯 익히 아는 것을 보니 이 노독물의 명성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인데?"

구양봉은 히죽 웃었다.

구천척은 강호에서 가장 포악한 자가 서역 대사막의 백타산 산군이라던 둘째 오라버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의도적으로 말했다.

"당신을 만나 반가워요. 내 대신 저 공손지를 죽여 주세요. 내가 혈도를 눌러 놓아 꼼짝을 못하니까 가볍게 한 번만 쳐갈기면 숨이 넘어갈 거예요."

그러자 공손지도 외쳤다.

"저 년을 죽이시오. 저 년을 죽인다면 내가 음양도란인법을 가르쳐 주겠소."

"거 좋은 생각이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구양봉은 얼른 휘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먼저 공손지에게 다가가 손으로 두어 번 밀어 보았다. 과연 몸을 앞뒤로 흔들 뿐 꼼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구천척에게 혈도를 눌린 게 틀림없었다. 그는 구천척을 향해 돌아서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 같은 계집을 죽인다 해도 세웅 사람들에게 욕은 안 먹을 게다. 네 남편이 너를 죽이라고 하였은즉 날 원망하진 말아라!"

구양봉은 구레나룻과 머리칼로 온통 뒤덮인 얼굴을 쳐들고 구천척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내 장 한 번이면 정화독이니 뭐니로 더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지."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구천척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손바닥을 들었다. 그가 막 구천척의 정수리를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생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엄청난 힘이 밀어닥쳤다. 구양봉을 혼자 대처하기에는 힘에 부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구천척이 재빨리 공손지의 혈도를 풀어 주었고 몸의 혈도가 풀린 그가 구양봉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치는 한편 다른 한 손가락으로는 구양봉의 허리를 찔러 왔던 것이다. 구양봉은 얼른 몸을 돌리면서 오른팔을 휘둘러 '위타점저(爲陀點杵)'라는 술수를 썼다. 이때를 틈타 구천척이 잽싸게 두 손바닥으로 구양봉의 아랫배를 쳐갈겨왔다.

구양봉은 순간 충격을 느끼며 합마공을 써 허공돌기를 하며 저만치로 몸을 피했다. 구천척의 장력이 어찌나 센지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구천척과 공손지를 건너다보았다.

"과연 둘이 배필은 배필인데?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니."

구양봉은 비양거리며 둘을 향해 다가갔다.

"천척 낭자, 안 되겠소. 나와 손을 맞춰 저자를 꺼꾸러뜨립시다!"

공손지가 구천척에게 소리쳤다.

구천척은 얼른 두 손에 기를 모아 한 손바닥으로는 면문(面門)을 막고 다른 한 손바닥으로는 가슴을 막았다. 그녀의 무공은 둘째 오라버니인 구천인에게 배운 것으로써 장법이 아주 훌륭했다.

둘을 상대하게 된 구양봉은 사태가 위급함을 직감하였다. 실로 구천척의 장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가슴을 맞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양봉이 가지고 있는 합마공은 워낙 무섭고 특별한 것이라 상대방의 힘이 뻗쳐 오면 체내에 저절로 그 힘을 막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구천척의 두 손바닥의 공세가 아무리 세다 해도 구양봉을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지는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칼을 나눠 들고 구양봉에게 덮쳐 들었다. 그는 칼로 찍고 검으로 찌르면서 맹공격을 가하였다. 구양봉은 공손지가 칼과 검을 번갈아 쓰며 음양을 바꾸는 것을 눈여겨보며, 속으로 검은 가볍고 칼은 무거우니 칼은 찍는 것을 피하고 검은 찌르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천척은 공손지가 칼과 검을 쓰는 틈을 이용하여 측면으로 구양봉을 협격해 왔다.

구양봉은 50여 합을 싸워도 두 사람을 이길 수가 없게 되자 화가 버럭 났다.

'내가 이 둘도 못 이기고서야 어떻게 《구음진경》을 차지할 수가 있겠는가?'

구양봉은 있는 힘을 다해 구천척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구천척은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한쪽 탁자께로 나동그라졌다. 우지끈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공손지!"

구천척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란 공손지는 이를 악물고 검으로 구양봉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힘껏 내리쳤다. 구양봉은 날쌔게 그 검을 피하며 부서진 탁자를 들어 공손지를 향해 내던졌다. 공손지도 얼른 몸을 피했다.

구양봉이 살기등등하여 공손지를 노려보았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구천척은 얼른 품고 있던 암기 몇 개를 꺼내 구양봉을 향해 던졌다.

"이걸 받아라!"

암기들은 번개같이 구양봉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구양봉은 얼른 몸을 피했으나 암기 하나가 결국 그의 어깻죽지에 들이박혔다.

구양봉은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미친 듯이 소리쳤다.

"구천척, 네 이 년! 너희 두 부부는 오늘 내 손에서 죽는 줄 알아라!"

구양봉은 두꺼비같이 몸을 웅크려 쭈그리고 앉더니 손바닥으로는 땅을 짚고 허리를 구부리며 두꺼비 울음 소리를 세 번 냈다. 거대한 신력이 체내에서 솟구치자 구양봉은 두 손바닥을 펴서 무서운 장력을 뿜어냈다. 순간 그 힘에 떠밀린 공손지가 침대 위로 엎어지며 침대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구천척이 미친 듯이 구양봉에게 달려들었다.

구양봉이 냉큼 몸을 피하자 구천척은 제 힘에 못 이겨 그만 공손지의 몸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구양봉, 죽일 테면 죽여라! 우리 둘을 같이 죽여라!"

구천척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구양봉이 최후의 일장을 날리기 위해 손을 치켜 들었다. 순간 구천척이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엉뚱하게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한테 듣자니 당신은 평생 잊지 못하는 여인이 하나 있다더군요?"

구양봉의 치켜 올려졌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구천척은 물끄러미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일부러 공손지에게 물었다.

"눈앞의 여자가 만일 가장 사랑하는 여자라면 정말 즉일 수 있을까?"

구양봉은 자기더러 들으라는 소린 줄 짐작하고 차갑게 웃었다.

"사랑하는 여인이라……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렇군요. 좋아요. 이젠 우리 둘을 죽여요. 우린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더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구천척의 말에 구양봉은 문득 낡은 절간에서 모용쟁과 생이별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후로 그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눈물의 나날을 보내 왔다. 구양봉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들어 망연자실 구천척과 공손지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구양봉은 갑자기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다 말고 두 사람을 서글픈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돌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신방 천장을 뚫고 올라가서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구천척과 공손지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갑자기 아주 어색해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지 알 수 없어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구천척이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원수야, 원수. 첫날밤을 그냥 이렇게 흘려 보내고 말 거예요?"

"여보!"

공손지는 들고 있던 칼과 검을 획 내던지며 구천척을 와락 끌어 안았다.

구천척은 공손지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며 여전히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어린 사람의 아내가 되다니……. 정말 한심한 팔자로구나……."

 

 

 

제20장 열 여섯 자매들의 수난

미화 공자와 열 여섯 자매는 태호방을 나와 배를 탔다. 아형이 염려되는 미화 공자는 아형을 만나기 위해 호심장에 다시 한 번 가보기로 작정했다. 미화 공자의 심정을 헤아린 열 여섯 자매는 치음 공자가 살아 있다면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삼 죽은 치음 공자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호심장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다르자 멀리 큰 배 한척이 마주 오는 게 바라보였다. 여인들은 대뜸 그 배가 사불과 악귀의 태호 보선임을 알아보았다.

미화는 그들을 피하고자 여인들에게 뱃머리를 돌려 다른 길로 갈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태호 보선은 돛을 높이며 속도를 내어 어느새 미화네 배로 접근해 왔다. 배가 가까워지자 뱃머리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사불과 악귀, 그리고 병묘였다. 순간 미화와 병묘의 머리 속에선 동시에 아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읍을 하였다.

"미화 공자께선 어디로 가시기에 이렇게 바쁘십니까?"

사불의 인사말이었다.

"태호방에게 항주 삼공자 중 하나인 치음은 죽고 나만 간신히 살아 남았는데, 치음의 이 자매들과 어디로 갈지 딱히 정해진 곳은 없소이다."

미화가 대꾸했다.

"그러면 저와 함께 소인을 만나러 가시지 않겠는지요?"

소인의 명성은 들었으나 그가 미녀들을 잡아다가 차녀음공을 수련하고 있음은 알 길 없는 미화 공자는 사불의 말에 순순히 응낙했다..

두 배는 반나절 가량 달려서 한 수림지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수림 사이를 한동안 돌고 누벼서야 겨우 소인 앞에 이르렀다.

"태호의 미화 공자와 병묘 공자, 치음 공자의 하속들이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사불이 읍하였다.

소인은 차가운 낯빛으로 나무 위에 앉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워낙 협착한 곳이라 이 많은 분들을 제대로 환접하기가 불편하니 나무라지는 마시오."

소인의 말에 병묘가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빌려 갔던 진주 두 알을 다시 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럼 그건 원수구퇴에 갖다 놓게."

병묘는 시키는 대로 야명주 두 개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너무 협소한 섬이라 빈객들의 발길이 드물더니 오늘 이렇게 많이들 왔구려. 반갑소. 아무튼 재주껏 대접해 드리리다."

소인은 대뜸 등뒤로 손을 홱 내저었다. 그러자 한 가닥 명주끈 같은 것이 소인 뒤의 호숫물로 뿌려져 들어갔다. 소인이 다시 그 명주끈을 앞으로 홱 잡아채자 이번엔 한 자 남짓한 물고기 한 마리가 미화 공자 앞에 뚝 떨어졌다. 소인은 같은 방법으로 물고기 한 마리를 더 잡아 올려서는 자기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왼손으로 꾹 눌렀다. 물고기는 꼬리를 마구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황량한 작은 섬이라 대접할 건 물고기뿐이외다."

그는 손가락끝으로 물고기 등을 째어 껍질을 벗기더니 살점을 뜯어내어 입에 넣고 맛있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소인은 고기 한 마리를 날것으로 먹고 나서 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손을 내밀며 사람들에게 권했다.

"여러분들도 맛 좀 보시오."

미화나 병묘는 태호의 농어를 회쳐 먹어 본 적이 몇 번 있는 터라 소인의 권유에 따라 날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곧 사불과 악귀도 합세하여 먹기 시작하자 여자들 열 여섯은 경악실색하여 서로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소인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왜 먹지 않으시오? 대접이 대접 같지 않단 말씀이오?"

소희아가 절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선배님의 환접은 실로 고마우나 저희들은 날생선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선배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세요. 우리는 불을 지펴 구워 먹었으면 합니다."

희아의 말이 끝나자 열 여섯 자매 중 한 여인이 품에서 부싯돌과 부시를 꺼내 불을 피우려 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은실 같은 것이 번쩍하더니 부시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소인이 은실로 부시를 낚아채어 태호에 던져 넣었던 것이다.

"여기는 불빛을 보여서는 절대 안 되는 곳이야."

소인은 기분 나쁜 얼굴로 쌀쌀하게 말했다.

열 여섯 자매는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소인이 불쑥 물었다.

"그래, 치음네 사람들이시라구?"

"예, 그래요. 공자님의 태산 같은 은혜를 우린 잊지 않고 있어요.

희아의 대답에 소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치음이 어떤 작자인지 나도 알아. 그런 자를 위해 그렇게 마음을 다 바쳤나?"

희아가 다시 대꾸하려 하자 병묘가 눈짓을 했다. 공연히 소인의 비위를 거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희아는 더 대꾸하지 않고 샐쭉하니 입을 다물었다.

"치음네 사람들이라면 그저 밤낮으로 노래나 부르는게 일이겠구만 그래?"

소인이 비양거리듯 말하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공자님을 모독하지 마세요. 우리한테 베푼 공자님의 은혜는 태산 같아요. 저희들은 비록 공자님의 풍악단에 불과하지만 공자님은 평소 저희들을 몹시 존중해 주셨어요."

다른 여인들도 모두 화가 나서 일제히 소인을 노려보았다.

"낭자들 열 여섯이 여기서 나를 도와 천하의 기이한 무공을 수련하게 해주면 낭자들이 죽더라도 내가 영당을 세워 밤낮으로 기도를 드려 주겠네."

소인은 다시 소리내어 너털웃음을 쳤다.

"난 자네들을 이용하여 무공을 수련하겠단 말이야. 자네들 열 여섯은 나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해."

"우리 열 여섯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인가요?"

희아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 자네하고 저 아가씨, 그리고 저 아가씨 이렇게 셋은 숫처녀가 아니어서 내 수련에 별로 도움되지 않아."

그는 첫눈에 벌써 열 여섯 여인 중 셋은 치음과 동침한 적이 있으나 나머지 열셋은 숫처녀임을 알아보았다.

열 여섯 자매는 졸지에 눈앞이 깜깜해져 옴을 느졌다. 자신들이 어쩌다 저런 사람을 만나 이 같은 수모를 당하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옆에 서 있던 사불이 보기가 딱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여인들은 모두 치음 공자네 사람들인데 선배님께서 사정 좀……."

소인이 사불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저 병묘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해서 내가 치료해 주었고, 게다가 내가 그토록 아끼던 수신주(水神珠)까지 빌려 뒀는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사불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병묘의 일로 도움을 받은 판에 또 무슨 일을 사정한단 말인가?

열 여섯 자매는 이대로 나가다간 큰일나겠다 싶어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일심으로 마음을 모았다. 여인 일곱이 선두가 되어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소인에게 덮쳐 들었다. 비파, 편종, 그리고 악기 두드리는 방망이 두 개가 소인의 머리로 날아들고, 향주(響珠) 세 개와 목탁 하나가 소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으며 비단끈 한 가닥과 젓대 하나는 소인의 다리 아래로 날아들었다. 일곱이 함께 손을 쓰자 마치 회오리바람이 이는 듯 그 위력이 대단했다.

소인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손에 쥔 명주끈을 홱 내뿌렸다. 그러자 달려들던 일곱 여인들은 맥을 못 추고 뿔뿔이 흩어지며 나뒹굴었다.

"너희들 열 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난 무섭지 않다."

소인이 거들먹거렸다.

"나까지 나서면 어쩔 셈이오?"

미화 공자의 말이었다.

소인은 그 말에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왜 웃으시오?"

소인은 웃음을 멈추고 미화 공자를 내려다보았다.

"항주부 삼공자 중에 그래도 자네가 제일이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니나 자넨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그런 미련둥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 내 말이 틀렸나?"

"그야 그렇소만……."

미화 공자는 말끝을 흘리며 소인을 바라보았다. 소인이 무공이 대단한데다가 자기는 내상을 입은 몸이니 자칫하다간 소인에게 맞아 죽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불과 악귀는 모두 소인과 가까운 사이로 여차하면 소인을 도와 나설 것이었다. 이리 따져 보고 저리 따져 봐도 이길 가망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화는 팔짱을 지르며 더는 참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문득 병묘가 소리쳤다.

"나하고 한번 겨뤄 봄이 어떻소?"

"병묘, 네가? 넌 벌써 나한테 중독된 몸이다. 너희들 몇이 금방 농어를 먹지 않았나? 그 농어들은 내가 태호에서 잡아다가 저 웅덩이에서 기른 것들인데, 음독이 대단하거든. 그런 걸 먹었으니 필경 내력이 다 흩어졌을 텐데 나하고 싸워 보겠다구?"

소인은 비양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정말……."

병묘가 울컥 치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사불이 재빠르게 병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공연한 짓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병묘와 소인이 싸우면 둘 중에 하나는 상하기 마련인데 어느 쪽이 상해도 사불에게는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때 희아가 불쑥 말했다.

"우린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열다섯 여인들과 미화도 그녀의 뒤를 따라 호숫가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호숫가에 나와 보니 가없는 푸른 물만 보일 뿐 그들이 타고 온 목선은 물론 태호 보선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뒤이어 도착한 병묘와 사불, 악귀도 난색을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넓은 태호에 배가 없으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였다.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획 나더니 끈 하나가 날아와서 한 여인의 팔을 휘감아 낚아채 갔다.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니 소인은 벌써 그 여자를 자기 앞에 데려다 놓고 손으로 여자의 대혈을 누르고 있었다. 여인은 소인의 품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인을 향해 달려갔다.

"게 섰거라. 누구든 한 발짝만 다가서면 이 년을 당장 죽여 버릴테다."

소인이 꽥 소리쳤다.

사람들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못박인 듯 멈춰 섰다. 소인은 나무에 기대 앉아서 알몸뚱이의 여인을 끌어안고 젖가슴을 마음대로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여인들은 격분하여 욕설을 퍼부어 대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저런 죽일 놈! 저 놈을 죽여라!"

격분에 치를 떨던 희아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자 다른 여인들도 칼을 휘두르며 소인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나 소인은 방약무인 계속해서 하던 짓에만 열중했다.

"어서 저 놈을 죽여 버리자!"

희아의 외침에 여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소인이 잽싸게 여인의 젖가슴에서 손을 떼며 끈뭉치를 홱 내뿌렸다. 그 끈이 한 여인의 목에 두르르 감기자 소인은 마치 태호의 농어를 낚아채듯 그 끈을 홱 잡아당겼다. 여인은 그대로 나무숲으로 날려가 떨어졌다. 빽빽한 나뭇가지에 걸린 여인은 꼼짝도 못한 채 체념한 듯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소인은 번개같이 손을 써서 어느덧 열네 명의 여인들을 모두 나무숲에 내던져 버려 마지막엔 희아 하나만 남았다. 소인은 발악하듯 덮쳐 드는 희아의 어깨를 한 장 세게 후려

갈겨 저만치 날려 보냈다.

"저 계집들이 순순히 내 말을 따랐으면 이런 욕은 안 보지.

소인은 병묘와 미화를 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병묘는 이가 갈렸으나 방법이 없었다. 몸에 내상이 심하여 힘이 무척 줄어든 그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소인은 다시 손을 뻗쳐 가슴에 안긴 여인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힘을 다해 음력을 빨아들였다.

반나절쯤 지나자 소인은 비로소 몸을 일으키며 목을 젖히고 통쾌한 듯 웃어댔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금 소인의 품에서 벗어난 여인은 기진맥진한 듯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히 앉아 있었는데 가만 보니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까맣게 윤기 돌던 머리가 어느덧 하얗게 세 버리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더니 석류 속같이 희던 치아도 어느새 검게 삭아 부서져 나왔다. 젊디젊던 아가씨가 이렇듯 순식간에 할망구가 돼

버린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소인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머리를 젖히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들 듣거라. 나는 무림을 몽땅 내 손아귀에 넣으련다. 치음이 정성 들여 가꿔 놓은 계집들로 나의 절세신공을 닦으련다! 핫하하……"

소인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열다섯 여인들은 자기들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여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사불도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병묘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병묘는 그녀가 소인과 한패라는 생각에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보기 싫소. 당신도 저 작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소!"

그는 곧장 호숫가로 뛰어가서 물로 첨벙 뛰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소인은 미화를 보며 물었다.

"임자도 항주부 삼공자 중에 하나인데……"

"사세에 맞춰 처사함이 본 공자의 철칙이지요."

미화는 비굴한 웃음을 떠올렸다.

소인은 미화가 담이 콩알만해져서 자기한테 꼼짝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얼굴에 약간 웃음을 떠올렸다.

쓰러져 있는 자매에게 다가가 그녀의 주검을 확인한 소희아는 사무치는 비분에 눈물을 흘렸다. 다른 여인들도 흐느껴 울었다. 어쩌다 사불에게 홀려 와서 소인의 제물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눈앞이 깜깜하고 원통했다.

"너희들은 똑똑히 듣거라. 내 명을 거역하기만 하면 모두 한번에 생죽음을 당할 줄 알아라!"

소인이 여인들을 향해 못을 박았다. 그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웃는 낯으로 미화 공자를 불렀다.

"미화 공자, 미안하지만 저 계집들을 몽땅 잡아다 혈도를 눌러 놓게."

미화 공자는 잠시 소인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신하더니 여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닥치는 대로 여인들의 혈도를 하나하나 눌러 놓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욕을 퍼부었다.

"너 같은 놈이 항주부 삼공자라구?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그래도 명색이 사낸데 제 목숨 하나 지키자고 벌벌 떨면서 소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나약한 아녀자들을 괴롭혀?"

미화 공자는 여인들이 욕설을 퍼부어 대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다섯 여인 모두를 옴쭉달싹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맙네, 미화 공자."

소인이 궁둥이를 털썩거리며 웃자 미화 공자도 따라 웃었다.

"어른의 부탁을 제가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제 사불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름이 사불이니 속세의 정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 되거늘 어찌하여 병묘만 보면 이상하게 질정을 못하는가?"

사불은 소인을 흘깃 보고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을 못했다.

"그럼 자네들은 가서 보선이나 찾아오게. 멀리 떠내려가진 않았을 게야."

사불과 악귀는 말없이 읍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미화는 불현듯 이곳에 혼자 남는 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았다가 자칫하여 소인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사불 악귀, 같이 갑시다!"

미화는 급히 사불을 따라갔다.

"나도 같이 가서 보선 찾는 일을 돕겠소."

미화의 말에 사불은 입을 삐죽했다.

"쓸데없는 고생일랑 마시고 여기 남아 계시지요, 왜?"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악귀와 더불어 첨벙 물 속에 뛰어 들었다.

오늘 소인의 심기는 아주 즐거웠다. 평소 같으면 시내에 나가서 2, 3일은 걸려야 겨우 미녀 하나를 잡아올 수 있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한꺼번에 미인을 열 여섯이나,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는 미화를 시켜 이미 죽은 계집은 가져다 버리게 하고는 나무 위에 올라앉은 채 눈을 감고 기를 모아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그는 황약사와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는데, 다행히도 사불과 악귀가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소인이 한동안 태호를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붙박여 지냈던 것도 순전히 그 일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처는 점차 회복기에 접어든데다가 한꺼번에 미인 열 여섯 명을 데리고 차녀음공을 수련하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이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은 매일 해가 지고 달이 뜰 무렵이면 여자 하나씩을 잡아다가 그녀의 젖가슴으로 자기의 차녀음공을 수련하였는데, 이곳은 외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호젓하고 조용한 섬이라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희아는 여전히 미화를 향해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항주부에 너 같은 망나니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삼공자의 얼굴에 똥칠하는 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한심한 놈, 네 놈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나 미화는 희아의 욕설에 입을 봉한 채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그는 소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막듯이 말했다.

"선배님처럼 절세의 신공을 지닌 분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겁니다. 저는 앞으로 선배님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선배님, 아무쪼록 이 몸에 박힌 음독을 뽑아 주십시오. 그래야 선배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소인은 한층 더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그저 날 위해 일만 잘해라. 그러면 서운하게는 하지 않을테니. 저 뒤에 있는 큰 거북이 껍질 위에 며칠만 누워 있거라. 그럼 거뜬히 회복될 거다."

그는 덧붙여서 그 엄청나게 큰 거북이 껍질의 좋은 점을 알려 주었다.

미화는 당장 거북이 껍질 위로 올라가 앉았다.

원래 이 거북이 껍질은 원수구퇴라는 기이한 물건인데 미화가 거기에 앉아 구사주(驅邪珠)를 보고 있자니 한 가닥 서늘한 기운이 미려혈로부터 앞가슴과 머리로 올라와서 12중루(十二重樓)를 지나고 36주천(三十六周天)을 돌았다. 이렇게 한 번 기가 돌고 나니 몸에 힘이 오르고 독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간 느낌이었다.

그 사이 소인은 벌써 여인을 셋이나 더 음력을 빨아 죽였다. 여인들은 이를 갈며 흐느낄 뿐 속수무책이었다. 희아는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이제는 목이 쉬어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자 혼자말로 탄식했다.

"우리 자매 열 여섯은 치음 공자를 따르며 일심으로 화목하게 살았는데 오늘 소인의 마수에 걸려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복수할 방법이 없구나. 우리 열 여섯 자매의 운명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그녀의 넋두리를 듣다 못한 소인이 버럭 성을 냈다.

"네 이 년, 넌 내게 쓸모가 없으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당장 꺼져 버려라.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희아는 흐느끼면서 수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자매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난 가요.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인들은 일제히 통곡을 터뜨렸다.

여자들이란 자고로 자기의 용모를 목숨처럼 중히 여겨 죽더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죽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소인에게 음력을 빨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가 빠진 파파할머니가 되어 죽게 되었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희아를 보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희아야……, 그럼 잘…… 잘가……."

여인들은 이젠 하도 울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서 가 버리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소인이 다시 소리쳤다. 그가 수련하는 데 필요한 것은 숫처녀의 음력이지 이미 남자와 살을 섞어 순결을 잃은 그런 여인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희아는 자매들을 떠나 자기 혼자만 살면 뭐하나 싶어 태호에 뛰어들어 자결할 결심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자기네 자매들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는 설움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호숫가에 다다랐다. 그녀는 물끄러미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수림 쪽을 바라보았다.

빼곡한 나무에 가려져서 자매들도, 소인이나 미화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이렇게 서두를 건 없지.'

희아는 바위 위에 앉아 태호를 바라보았다. 치음 공자를 생각하고 자기 자매들을 생각하니 다시금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한바탕 흐느껴 울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지쳐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몸에 더운 열기가 닿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선 사람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미화도 아니고 소인도 아니었다. 선이 굵은 얼굴에 선량한 웃음을 가진 사나이였다.

"왜 자결이라도 하려고 여길 나왔나?"

사나이의 말에 희아는 눈물이 앞섰다.

"울긴 또 왜 우나? 울지 말아요. 나 이 거렁뱅이는 누구든 내 앞에서 우는 건 제일 질색이거든. 가만, 배가 고파 그러나? 배가 너무 고프면 죽고 싶은 생각이 날 수도 있거든. 뭔가 요기 좀 하면 이 거렁뱅이처럼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

사나이는 갑자기 희아를 바위에서 안아 땅에 내려놓고는 자기가 그 바위 위에 올라서서 호수로부터 줄을 한 가라 한 가닥씩 당겨 올렸다. 그 줄들에는 괴상하게 생긴 작은 낚시들이 달려 있었다. 그 낚시들은 강호에서 쓰는 오구검(吳鉤劍)의 모양과 비슷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좀더 가늘고 작고 정교해 보인다는 정이었다. 어떤 낚시는 미끼만 끊은 채 빈 낚시로 올라왔으나 대부분이 농어가 잔뜩 달려 나왔다. 사나이는 그중 두 마리를 손에 쥐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배가 고프면 이 농어를 먹어 봐요. 농어를 먹고 나면 죽고 싶던 마음이 싹 달아날 거요."

희아는 농어를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흘 가량을 아 먹지 못한 그녀였지만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칭 거렁뱅이라 하는 사나이는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작은 손칼 하나를 품에서 꺼내었다. 이 칼은 아주 작고 얇았으나 그 대신 날이 파랗게 선 아주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제 내가 물고기를 얇게 저며 줄 테니깐 어디 먹어 봐요. 천하없는 별미라는 생각이 들거요."

사나이는 품에서 유포로 싼 것을 하나 꺼내더니 조심스레 한 겹 한 겹 풀었다. 약가루였다. 사나이는 물고기를 손에 들고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물고기도 있고 양념도 있으니 이젠 먹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어디 이 거렁뱅이가 오늘 포식 한번 해볼까?"

희아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허기도 잊고 사나이가 날생선을 맛깔스럽게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신 기막힌 솜씨로 물고기를 칼질하여 그 살점을 약가루에 찍어서는 입에 밀어 넣으며 희아를 향해 말했다.

"역시 기가 막힌 맛이로군! 태호의 농어가 천하 별미라더니 과연 듣던 대로야. 나 같은 거렁뱅이도 먹을 복은 있어 오늘 태호 농어맛을 실컷 보게 되었구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농어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워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나이는 얼굴에 아주 만족한 기색을 띠며 叫만 남은 물고기를 호수를 향해 집어 던졌다. 사나이는 계속해서 농어 한 마리를 더 먹고는 조롱박을 꺼내 목을 젖히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실컷 마시고 난 그는 입가를 쓱쓱 문지르며 희아에게 다시 권했다.

"별미라니깐, 한번 먹어 보기나 하래두."

희아는 물고기를 먹는 사나이의 솜씨에 내심 감탄했다. 소인의 서툰 솜씨에 비교해 볼 때 이 사나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손놀림으로 손에 피 한 방을 묻히지 않고 물고기를 저며 내는 것이었다. 그가 어찌나 물고기를 맛있게 먹는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 태호 농어는 천하에 이름이 난 고기지. 강 고기건 바다 고기건 태호 농어만큼 맛있는 고기는 없거든. 내 말이 믿기질 않나? 한입만 먹어 보면 태호 농어가 어떤지 대번에 안다니깐?"

사나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다시 한 번 권하였다.

희아는 먹을 자신이 없었지만 군침이 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머뭇머뭇 말했다

"어디 먹……먹어 볼까요……?"

"이 거렁뱅이는 절대 거짓말 같은 건 안 해. 한입만 먹어 봐. 그 맛을 평생 두고 잊을 수 없을 테니깐."

희아는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듯 사나이를 건너다보았다.

"염려 말고 먹어 봐요. 그렇게 근심스러우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요. 눈을 딱 감고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이야, 내가 지금 산해진미를 먹는다 생각하면서 냉큼 먹어 봐. 입에 물어만 봐도 맛을 안다니까? 얼마나 감칠맛이 나는데?"

희아는 사나이가 시키는 해로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려 얼른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도 구미가 동하였다

"됐어!"

사나이가 반갑게 소리쳤다. 희아는 입 안에 미끌한 감촉이 느껴지더니 이어서 고소하게 녹아 버리는 맛에 눈을 번쩍 떴다. 비리지도 않고 부드러운 게 아주 감칠맛이 있었으며 게다가 입 안에 향기까지 도는 것 같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맛있네요."

그녀가 감탄했다.

"그것 봐. 내 말이 틀리지 않지? 그래, 또 먹어 볼 텐가?"

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거렁뱅이는 신이 나서 다시금 고기를 저며 냈다. 이번에는 자기 혼자 먹을 때와는 달리 한 번에 네 점씩 연이어 두 번을 저며 내서는 여덟 점을 칼끝에 찍어 약가루를 묻혀 가지고 희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어떻게 먹느냐고, 미처 말할 새도 없이 그녀의 입에 밀어 넣어진 물고기 살은 눈 깜짝할 새에 녹아 스르륵 목구멍을 넘어가 버렸다. 날생선 맛이 이렇게 기가 막히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희아는 놀라운 얼굴로 사나이를 쳐다 보았다.

"좋아, 좋아. 나보다도 맛있게 얼른 먹어 치우는데?"

사나이는 신명이 나서 더욱 빠르게 고기를 저며 냈다. 어느새 그 큰 고기가 또 뼈만 남았다. 희아는 이렇게 농어를 세 마리나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정말 맛이 기막히군요. 더 먹고 싶지만 이젠 그만두어야겠어요. 며칠을 굶은 터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아서요."

희아는 정말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사나이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걱정은 말라구. 방금 찍어 먹은 가루약이 뭔지 아나? 그 약을 찍어 먹으면 얼마든지 먹어도 탈이 나질 않거든!"

그는 다시 생선을 저며 희아에게 건넸다. 희아는 그의 소탈한 태도에 마음을 놓고 다시금 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희아가 배부르게 먹은 것을 보고서야 사나이는 손칼을 넣고 가루약을 싼 유포를 여몄다. 그가 유포 쌈지를 들고 물었다.

"금방 먹은 이 약이 무슨 약인 줄 아나? 이 약은 천하사독(天下四毒)이라는 거야."

사나이의 말에 희아는 별생각 없이 포만감에 빙긋이 웃었다.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거기도 이 거렁뱅이처럼 사심이 없는 사람이구만."

그는 이제 조롱박을 집어 희아에게 권했다. 희아는 술을 못하지만 사나이의 성의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고 두어 모금 마시다가 그만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됐어, 됐어. 그만. 아깝게도 남자가 아니니 우리 개방에 들게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마음에 드는 사람이군."

거렁뱅이는 무척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거기는 대관절 어쩌다가 이런 데를 와 있나?"

그의 말에 희아는 다시금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수림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울먹이며 낱낱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거렁뱅이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바위를 바라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글쎄 여기에 왜 이렇게 크고 살진 농어들이 많은가 했더니 그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그러니 여기에 음기가 이렇듯 성하지."

그는 알 만하다는 듯 한바탕 크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놈이 아무리 그렇게 흉악한 놈이라 해도 그 사이에 그 많은 자매들을 전부 죽여 없애지는 못했겠지. 어디 한 번 가 보자. 그 놈이 나를 어쩌나 보게."

"가시지 마세요. 항주부의 유명한 삼공자 중 하나인 미화까지도 무서워 설설 기며 그자의 시종 노릇을 쓸꼬 있는 판인걸요? 공연히 가셨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희아가 눈물이 글썽하여 사나이를 말렸다.

사나이는 또 한바탕 앙천대소를 하였다.

"걱정 말라구. 내가 가서 농어 고기를 대접해 주겠다는데도 날 해코지할까? 걱정 말고 가자구."

거렁뱅이 사나이는 한 손에 조롱박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희아의 손목을 끌고는 수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 고강하신 분이 내 섬엘 오셨는지 반갑습니다."

수림 속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거렁뱅이 사나이는 수림이 떠나갈 듯 크게 웃어대더니 대답했다.

"개방의 홍칠이 농어잡이를 왔소이다."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 얽힌 수림은 나무들이 너무나 빼곡하여 그 밑으로 빠져 나가기가 아주 불편했다. 홍칠은 희아의 손목을 잡고 수림 위로 몸을 솟구쳤다.

희아는 순간 아찔해졌다. 이 수림의 나무들은 육지의 나무들에 비해 키가 엄청나게 커서 웬만한 무림의 고수들도 이 나무 꼭대기를 날아오르기 가 어려웠다. 그런데 한낱 거렁뱅이가 무슨 수로 이 나무를 날아오른단 말인가. 희아는 속으로 여간 염려스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몸이 새털같이 가벼워지며 상상도 못한 큰 힘에 딸려 올라가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발 밑에 구름을 디딘 듯 훌훌 날아올라 나무 위에 내려선 그녀는 너무나 놀라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겉보기엔 한낱 거렁뱅이에 불과한 사람이 어디서 이런 신공을 얻었을까?'

홍칠은 그녀를 끌고 나무 위를 성큼성큼 건너뛰어 한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순간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질 뻔한 희아를 홍칠이 얼른 손을 뻗어 허리를 받쳐 주었다. 비로소 두 사람은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았다.

소인은 일개 거렁뱅이에 불과한 홍칠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혼자 몸도 아닌 그가 한 여인을 데리고 높은 나무들을 건너뛰어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은 이 거렁뱅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은근히 긴장이 됐다.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나 말이오? 난 거렁뱅이 홍칠이라 하오. 아까 말했잖소."

홍칠은 또 크게 웃어댔다.

소인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렇다면 이자가 그 천하 제일의 대방인 개방의 방주 홍칠공이란 말인가? 소인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후드득 떨렸다.

"홍칠공께서 왕림하신 줄 모르고 영접이 늦었으니 죄송합니다."

소인의 말에 홍칠이 히죽 웃었다.

"소인, 그렇게 내 앞에서 설설 길 것까지는 없어. 이 거렁뱅이가 왜 왔는지 알아? 더운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온 게 아니야. 바로 네 목을 따러 왔다! 건강, 평강, 임안 이런 데서 네 놈이 양갓집 규수들을 무수히 잡아다 죽였지. 그리고 지난달 우리 개방 허옥(許玉)이가 널 죽이려다가 오히려 네 놈에게 해코지를 당했지. 오늘 이 거렁뱅이는 그 원수를 한꺼번에 갚으려고 왔다!"

소인은 그 말에 겁은 났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열 여섯 자매 중 열하나가 아직도 나무 아래 쓰러져 있었는데 자기와 홍칠이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소인은 한껏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홍칠, 이 놈! 네가 만일 나를 성가시게 군다면 먼저 저 계집들부터 살아 남지 못하는 줄 알아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거렁뱅이가 너를 가만 자들 줄 아느냐? 산채로 회를 쳐 먹을 테다!"

그의 말에 소인은 또 흠칫 몸을 떨었다. 성미가 사나운 홍칠은 말을 뱉으면 그대로 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인은 눈알을 한바퀴 팽 굴리더니 소리쳤다.

"미화! 어서 그 계집들을 죽여 버리지 못할까?"

소인의 말에 미화는 뒷짐을 지고 건들거리며 대꾸했다.

"이젠 그만 해두시지. 내가 언제까지 고 네 놈 노복질이나 할 줄 알았나?

"아니 저 놈이?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을 거역하시겠다, 이건가? 내 말을 거역했다간 어떻게 될는지 잘 알텐데? 네 놈 몸에 박힌 음독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런 염려는 붙들어매시지. 천하에 가장 큰 개방의 방주이신 홍칠공께서 여지 계신데 무슨 독인들 빼주지 못하겠어? 네 놈이나 일찌감치 홍칠 선배 앞에 무릎 꿇는 게 좋을걸?"

미화는 말을 마치고는 곧장 여인들에게로 다가가 눌러 왔던 혈도들을 도로 풀어 주었다. 혈도가 풀려 다시 살아난 여인들은 정신이 들어 소인과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모여 섰다.

"그럴 필요 없네. 홍칠 선배님이 오셨으니 아가씨들은 가만 있으라구. 홍칠 선배님이 저 놈을 가볍게 해치울 테니깐."

미화가 여인들을 말렸다.

그러자 홍칠이 크게 웃고는 소인에게 말했다.

"소인은 들어라. 네깐 놈에게 손을 대자니 이 홍칠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 같아 손대기가 싫구나. 그러니 네 스스로 목숨을 끊는게 어떻겠느냐?"

"그럴 것까진 없지. 홍칠공이 나와 겨뤄 이기기만 하면 나는 홍칠공의 어떤 분부라도 듣겠소."

소인은 좀 수그러드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좋다. 네가 먼저 시작을 해라. 무엇을 겨루든 내가 응전을 하지."

소인은 은근히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산 물고기를 드릴 테니 어디 맛을 좀 보시지요."

그는 명주끈을 던져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올려서는 홍칠의 머리 위로 내던졌다. 홍칠은 조롱박을 얼른 품에 넣고 날아오는 물고기를 한 손으로 턱 잡았다. 다른 물건이면 몰라도 펄펄 뛰는 산 물고기를 단번에 한 손으로 아가미를 쥐어 잡는다는 것은 보통 재간이 아니고선 어려웠다. 소인은 놀랐다. 하지만 소인은 또 물고기를 낚아채어 홍칠에게 내던졌다.

"홍칠공, 태호 농어란 흔치 않은 별미인데 어디 맛 좀 보시지요.

물고기를 손에 쥔 홍칠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소인이 기른 고기는 홍칠이 아까 바위 옆에서 낚은 고기보다 더욱 싸늘했다. 이렇게 얼음같이 찬 고기가 펄펄 살아 뛴다는 게 믿어지지 않도록 기이했다. 오랫동안 음기로 키워진 게 틀림없었다.

홍칠은 말없이 유포를 꺼내 무릎 위에 놓고 물고기를 손으로 한 번 꽉 쥐었다 놓았다. 물고기는 기절을 했는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맙네, 소인. 이런 좋은 물고기를 대접 받으니 이 거렁뱅이 마음이 대단히 기쁘구먼. 그 보답으로 내 자네를 죽일 때 사정 좀 봐 주겠네. 고통을 좀 덜 겪으며 죽게 해주겠단 말이야."

홍칠은 이렇게 비양거리고는 물고기를 아귀아귀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맛이 좋군. 정말 맛이 좋아."

홍칠은 연신 감탄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기를 세 마리나 먹었다.

소인도 그 사이 세 마리를 먹고 나서 넌지시 홍칠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홍칠은 조롱박을 기울여 술만 꿀꺽꿀꺽 마실 뿐 아무 이상도 없었다. 소인은 가슴이 떨렸다.

'나도 물고기 세 마리를 먹으니 온몸이 오싹해지며 추워져서 불이라도 쬐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는데 저 놈은 어찌 끄떡도 않지? 저 놈의 음독공(陰毒功)이 나보다도 세단 말인가?'

"소인 이 놈, 내가 물고기 대접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 대접을 해야지? 옛다. 내 술이나 마셔 봐라."

홍칠은 손을 번쩍 치켜 들어 조롱박을 소인 쪽으로 내던졌다. 소인은 급히 손을 뻗어 조롱박을 받아 들었다. 순간 그의 몸이 기우뚱하며 나무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철퇴를 받기라도 한 듯 엄청난 충격이 온몸에 전해 왔던 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조롱박을 기울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몇 모금 마시던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무슨 놈의 술이 얼음보다 더 차서 뼈를 에는 듯했는데 농어 따위엔 비교도 안 될 것 같았다. 이렇듯 지독히도 음랭한 술을 마시는 홍칠을 자기가 농어 세 마리로 독살시키려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 술은 잘못 먹었다가는 목구멍까지 얼어붙는 술이었다. 소인은 겨우 세 모금을 마시고 나서는 목구멍이 얼어 뻣뻣해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조롱박을 홍칠에게 도로 던져 주었다.

"소인 이 놈아, 순량한 사람을 네 놈이 무수히 죽였은즉 오늘은 살아 남지 못할 줄 알아라!"

홍칠은 나무에서 날아 내리며 호령했다. 그는 소인이 피할 겨를도 없이 손바닥에 기를 넣어 한 장 날렸다. 무서운 굉음이 일며 소인이 앉은 나무가 마치 태호에서 휘몰아치는 광풍에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라도 하는 듯 정신없이 요동쳤다.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게 된 소인은 떨어지듯 굴러 내려오며 홍칠을 향해 고함쳤다.

"당대 무림의 고수라면 기본적인 법도가 있어야지, 내 상처가 아직 채 낫지도 않은 틈을 타서 날 해치려 하나? 강호 무림에 이런 너절한 일이 어디 있나? 명성이 아깝군 그래!"

그의 말에 홍칠은 배를 끌어안고 한바탕 웃어젖혔다.

"이 놈아! 이 거렁뱅이 홍칠을 무슨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알았더냐? 네깐 놈을 해치는데 도전서가 다 무슨 소용인가? 네가 비루 먹은 개새끼든 튼튼한 사냥개든 난 상관없어, 오직 한 장에 쳐죽이면 그만이니까 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워!"

홍칠은 양 손바닥에 기를 넣으며 항룡유회 술수를 썼다. 그러자 거대한 힘이 소인을 냅다 후려치는 통에 소인은 입귀에 피를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기는 도저히 홍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후회막급이었다. 내상만 없어도 자기만의 유일한 차녀음공으로 홍칠과 몇십 합쯤은 싸워 볼 수도 있겠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소인은 풀어헤쳐진 머리칼을 흩날리며 죽기 살기로 홍칠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두 손바닥에 기를 모아 홍칠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홍칠은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두 손을 합장하고 서서 멀뚱하니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지 않는가.

여인들은 홍칠이 죽지 않으면 크게 중상을 입었으리라 생각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홍칠은 가슴과 배를 안으로 집어 넣으며 소인의 독장을 양손으로 턱 붙잡았다. 소인의 두 손바닥은 홍칠의 가슴에 닿는 순간 착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소인이 아무리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을 쳐도 마치 거대한 자석에 붙은 쇠뭉치처럼 옴쭉 달싹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홍칠의 몸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그 손바닥을 통해 소인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그 열기는 보통 열기가 아니라 아주 큰 내력을 지닌 양강지력 (陽剛之力)이었다. 소인은 위기감

을 느끼며 불안스레 홍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홍칠이 빙그레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소인을 마주보았다.

"이 놈, 양순한 양갓집 규수들만을 골라 흉악하게 죽인 놈이 네 놈이었지? 그 처녀들이 죽으면서 겪었을 그 고통을 오늘은 네가 한번 맛보아라."

홍칠은 더욱 큰 열기를 내뿜었다. 뜨거운 열기가 소인의 체내에 점점 더 깊이 흘러들었다.

소인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 열기를 막아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열기는 어깨로 해서 심포락도경맥(心包落圖經脈)을 따라 심실(心室)로 흘러들었다. 열기가 심장에 닿는 순간이면 그는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인은 홍칠을 망연자실 바라볼 뿐 이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여인들과 미화는 놀라운 눈길로 소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광풍이 휩쓸어 가는 듯 소인의 머리칼이 뭉팅뭉팅 뽑혀 떨어지더니 어느새 머리칼 한 올 남지 않은 대머리가 되었고, 후들후들 경련이 일던 얼굴은 점점 사그라들어 밭고랑 같은 주름살들이 깊이 패었다. 곧 눈썹마저 하얗게 세어 버린 그는 순식간에 7, 80가량의 중늙은이가 돼 버렸다.

"난…… 난…… 황…… 황 약사한테 죽…… 죽는다…… 황약사가…… 날 죽였다……."

소인은 입귀로 시꺼먼 피를 뿜어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홍칠은 소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인은 왜 개방의 방주 홍칠에게 죽으면서 황 약사한테 죽는다고 말한 것일까?

 

 

 

 

제21장 끝없는 환난

학 영감에게 끌어안겨 응취봉 아래로 떨어지게 된 아형의 귓전에는 바람이 쌩쌩 울었다. 천길 높이의 벼랑에서 떨어졌으니 살아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이 학 영감의 손에서 죽는구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문득 눈을 뜨고 서글픈 심정으로 학 영감을 바라보았다.

아형을 끌어안은 채 산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학 영감의 가슴속엔 여전히 노여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호수 위로 떨어져 내리면서 눈을 떠보니 자기를 바라보는 아형의 맑은 눈동자엔 원망의 기색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고 오히려 애련한 비애만 감돌고 있었다. 아형의 눈을 들여다보던 학 영감의 가슴에 불현듯 후회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 이 천상 선녀 같은 처녀 애까지 죽일건 없지 않나……?'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생각이었고, 그들은 이미 태호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이었다. 학 영감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몸을 뒤채어 아형의 몸을 위로 가게 하고 자신은 아래로 위치를 바꾸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형은 떨어지는 속도에 의해 태호 바닥에 닿아 분신쇄골이 될 것이었다.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던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 아형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순간 아형은 떨어지는 속도를 줄일 수 있었으나 학 영감은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려 급기야

는 '짱―! '하는 얼음 깨지는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뒤이어 아형도 물 위에 떨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물살에 밀려 정신없이 떠내려가던 아형은 무의식중에 손에 걸리는 것이 있어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것은 자그마한 나무상자였는데, 그녀는 상자의 부력에 의지하여 정처없이 떠다니다가 어느 섬의 초석에 걸리게 되었다. 올려다보니, 태호 일흔두 개 봉우리 중의 하나인 탄환봉(彈丸峰)이었다. 이 봉우리를 탄환봉이라 함은 탄환처럼 너무도 작아 사람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산봉우리는 높이 10여 장 정도가 물 위에 솟아 있는 엄청나게 큰 바위 하나만으로

되어 있어 사람이 근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 봉우리 가장자리에 초석이 두어 개 물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한 아형은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며칠을 굶주린데다가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초석 위에 기어오르기가 무섭게 그대로 까무라쳐 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형은 귓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망연히 흐르는 물결 위에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여기서 죽고야 마는 모양이다. 내 운명이 그렇다면 그 누구를 원망하랴…….'

그녀는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문득 마지막 순간의 학 영감을 떠올렸다. 죽음에 임박한 그는 뜻밖에도 아형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람없이 결국은 죽고야 마는구나 생각하니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헤엄을 칠 줄도 모르고 고기잡이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망연자실 흘러가는 태호의 물결만 바라보다가 또다시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허기가 지는데다 기진맥진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이때였다. 문득 아주 호화로운 배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형은 눈이 번쩍 뜨여 안간힘을 써서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안타깝게도 배가 움직이는 속도는 몹시 느려서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았다.

'하늘이여, 이 불쌍한 것을 굽어살피시사 저 배가 저를 그냥 스쳐 지나지 않게 해주소서. 이 불쌍한 것을 그냥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아형은 하늘을 향해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배는 아형이 있는 초석까지 밀려 왔다. 배가 바짝 닿아 오자 아형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배 위에 기어올랐다.

"누구 있어요?"

아형이 소리쳤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그녀는 선실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선실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는 아주 크고 멋들어진 것으로 선실도 여러 개였다. 한 큰 선실에는 사방의 선반들마다에 보물들과 옥그릇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모두 아주 진귀한 것들로, 이 보물들은 가는 금실로 엮은 그물들로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문득 선실 복판에 있는 탁자에 시선을 주었다. 그 탁자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태호 보선의 물건들에 손대지 말 것. 누구든 감히 손을 대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아형은 이 배가 보통 배가 아닌 태호 바닥의 도적 배임을 알았다. 아마도 태호방의 배일 가능성이 많았다.

아형은 누구네 배든 간에 먼저 굶주린 배부터 채워야 했다. 선실 안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다. 아형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며 자기의 기막힌 운명을 한탄했다.

배는 며칠 몇 날을 풍랑에 밀려 다녔다.

아형은 그동안 크고 작은 배들을 여러 척 보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이 태호 보선에 접근할 생각은 전혀 못하는 듯 눈에 띄기만 하면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곤 했다. 아형은 뱃머리로 나가 몇 번이고 손짓하며 불러 보았지만 번번이 배들은 본체만체 급히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었다. 아형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된 것 같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러나 어찌하랴! 어쨌든 선실 안에는 먹을 게 아직도 많으니 그럭저럭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배 주인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감사를 드리면 그만이라고 그녀는 마음을 편히 가지려 애썼다. 닻을 내려 배를 멈출 줄도 모르고 키를 잡아 배를 부릴 줄도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저 풍랑에 밀려 다니다 주인을 만나게 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황혼 무렵이었다. 아형이 저녁을 지어 먹으려고 불을 지피는데 갑자기 배 밖으로부터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괴한 몇이 배 위로 뛰어올라왔다. 험상궂게 생긴 괴한들은 선실에 뛰어들어 기웃거리다가 갑판으로 나와 아형을 에워싸고 칼을 겨누었다.

"사불인가?"

소스라치게 놀란 아형은 무작정 고개만 저었다.

"아니에요, 난 사불이 아니에요. 난 아형이에요."

사불이 아니라고 하자 괴한들은 다소 마음을 놓는 듯하더니 다시 아형의 가슴을 칼끝으로 겨누었다.

"사불인 줄 모를 줄 알아? 잔말 말고 칼이나 받아라!"

한 놈이 다짜고짜 아형의 가슴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아형은 급히 몸을 피했으나 괴한의 칼은 끝내 그녀의 어깻죽지를 찌르고 말았다. 괴한들은 상대방이 그렇게 수월하게 칼에 찔리는 게 오히려 이상할 듯 흠칫했다.

"사불이란 게 뭐 이렇게 맥이 없어?"

한 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죽거렸다. 넷은 아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그중 하나가 불쑥 물었다.

"사불이 정말 아닌가?"

"난 사불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저 혼자 풍랑에 밀려 다니다가 이 배를 보고 기어올랐어요."

아형은 어깻죽지의 아픔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넷은 앙천대소를 했다. 아형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조그마한 계집애가 우릴 속이려 들어?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린 오늘 사불을 찾아 결판내러 온 사람들이야. 네가 사불의 하인이라도 좋다. 보아하니 무예도 변변찮은 것 같은데 지금부터 우리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라.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를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버릴 테니깐!"

한 놈이 칼끝으로 아형을 가리키며 엄포를 놓았다.

아형은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괴한 넷은 태호 보선에 있는 보물들을 모두 꺼내서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는 아주 흡족한지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이번에는 그 여우 같은 계집이 우리 소행인 줄 꿈에도 모르겠지?"

물건을 모두 쓸어 담고 나자 한 놈이 배를 아예 태워 버리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다른 한 놈이 급히 손을 저었다.

"아서! 배를 태우다가 그 불빛을 보고 사불과 악귀가 달려오면 어쩌려고 그래? 가자구. 쥐도 새도 모르게 슬며시 사라지는 게 상책이야!"

넷은 아형을 끌고 그들이 타고 온 작은 배로 옮겨 갔다.

날이 어두워서야 그들은 어느 자그마한 뜰에 들어섰다. 그들은 아형을 끌고 뜰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이 오셨수?"

한 놈이 물으니 집 안에서 한 자가 대답했다

"주인님은 오랫동안 여기를 오지 않고 있습지요."

넷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놈이 말했다.

"하는 수 없군.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항주로 가야겠어."

그들은 그날 밤은 그곳에서 자고 이튿날 아형을 끌고 마차를 탔다.

이틀이나 걸려서야 항주에 도착한 그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아형은 이 큰 집에 들어올 때까지 눈이 가려진 채 바깥 상황은 귀로만 짐작했다. 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괴한 넷을 보고 인사를 하던 것과, 이 집이 큰 집이며 사람도 많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괴한들은 아형을 집 안에 끌고 들어가서야 눈가리개를 풀어 주었다.

"네가 가령 진짜 사불이 아니어도 널 놓아줄 수는 없다. 우리가 사불의 보물을 가져온 걸 네가 봤으니 너를 놓아주면 우리한테 불리하거든. 미안하지만 우선은 여기서 푹 쉬고 있도록 해. 우리 주인님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구."

아형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이 집 주인이 흉악한 놈이라면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자기를 놓아줄 성싶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방법도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넷은 온종일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만 퍼마셨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날이 어두워지자 술에 고주망태가 된 괴한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아형을 노려보며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아형은 바짝 긴장하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형님, 저 계집을 보면서부터 난 그게 꾸물꾸물해서 도무지……. 저 계집애 생김새를 보십쇼. 그저 한입에……."

한 놈이 이렇게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자 다른 한 놈도 떠들었다.

"저 계집이 사불이 아니랬지? 그러면 우리가 재미 좀 본들 문제될 게 없잖아? 공자님이 돌아와도 나무라진 않을 거야, 우리가 보물을 그렇게 많이 앗아 왔으니 도리어 칭찬을 할 테니까……."

"그러면 어서 손을 쓰자! 저 예쁜 계집을 안타깝게 기다리게 할 거 뭐 있겠어? 오히려 계집이 매달릴 때를 기다릴 셈인가?"

한 녀석까지 맞장구를 치자 네 놈은 술기운에 시뻘개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형에게 다가들었다.

아형은 겁에 질려 사람 살리라고 소리쳤다. 놈들이 술에 취하였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하나 달려와 주는 사람은 없었다. 녀석들은 승냥이같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아형을 노려보며 히히덕거렸다.

"난 배에 오르자마자 한눈에 알아봤지. 보물이 한 배 가득하지만 저 계집 하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거든……."

"형님 말이 맞소. 보물은 이 계집애가 보물이지요. 공자님이 없는 틈에 우리가 먼저 재미 봅시다."

그중 덩치가 가장 큰 놈이 아형의 팔을 붙잡아 비틀자 다른 한 놈이 달려들어 아형의 옷을 쭉 찢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아형이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미화! 미화! 왜 안 나와! 왜 아직도 가만 있어!"

아형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오자 네 놈은 돌연 어벙벙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형은 그들의 겁에 질린 기색을 눈치채고 더욱 큰소리로 소리쳤다.

"미화! 어서 미화를 좀 불리 줘요!"

이 위기일발의 순간 그녀는 문득 집 안에 있는 화분의 꽃 한 송이를 발견했던 것이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기이한 꽃이었다. 순간 아형의 머리 속엔 퍼뜩 미화가 떠올랐다. 이런 기이한 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은 미화 공자의 집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라구? 지금 뭐라구 했지?"

네 녀석은 아형을 얼떨떨해서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야 물었다.

"이 집이 미화 공자네 집인 줄 내가 모를 줄 알아? 어서 미화를 불러 줘!"

아형이 또 소리쳤다.

"공자님은 없는데……."

겁에 질린 한 녀석이 어정정하게 대답했다.

"어서 미화 공자를 못 데려오겠어?"

"공자를 데려오라구? 공자님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래 네가 공자님을 만나 보도록 우리가 그냥 놔둘 성싶으냐?"

한 녀석이 음흉한 웃음을 웃었다.

네 놈은 아형의 태도를 보아 그녀가 미화 공자와 보통 사이가 아님을 눈치챘으나 이미 작정한 일이므로 끝까지 그녀를 겁탈하려 들었다. 녀석들은 미화 공자도 없는 마당에 아형을 겁탈한 뒤 죽여 버리면 이 사실을 그가 어찌 알랴 싶었던 것이다.

"넌 오늘이 마지막이다. 귀신이 되기 전에 향락을 누려 보다가 죽어야 나중에 저승 가서도 원이 없을 거야."

한 녀석이 비양거리며 아형에게 덮쳐 들었다. 다른 세 녀석도 합세하여 아형을 침대로 끌고 갔다.

"미화! 미화!"

아형은 목이 터져라 미화를 불러 댔다.

"있지도 않은 공자님을 천백 번 불러 봐, 소용 있나? 그럴 힘이 있으면 아껴 뒀다가 우리 넷이나 제대로 받들어 모셔."

한 녀석이 흐물흐물 웃었다.

아형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하늘도 땅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고 스스로 자결을 하려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이때였다.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쩌렁 울렸다.

"누가 미화 공자가 없다는 게냐?"

네 녀석이 손을 떼며 일제히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소스라쳐 놀랐다.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 뒷짐을 지고 서서 싸늘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미화 공자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놈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형!"

미화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아형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화는 다시 네 녀석들을 돌아보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너희들 이 놈, 아형 아가씨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죽고 싶어서 환장들 했구나!"

놈들은 미화의 표정에 살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는 무조건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린 저 아가씨가 아형 아가씨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미화는 차갑게 노려만 볼 뿐 대꾸가 없었다. 넷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희들이 태호 보선에서 보물들을 훔쳐 왔습니다. 그 보물을 모두 공자님께 드리겠사오니 제발 저희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한 녀석이 이렇게 말하자 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거 참, 반가운 소리로군."

네 녀석은 이 말이 자기들을 살려 주겠다는 뜻인 줄로 알고 감지덕지하여 몇 번이고 땅바닥을 짓찧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미화가 돌연 안색을 바꾸며 꽥 소리쳤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내가 너희들을 살려 두어 무엇에 쓴단 말이냐?"

그는 냅다 한 녀석의 정수리에 일장을 갈겼다. 녀석은 대번에 피를 물고 꼬꾸라졌다. 그 바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나머지 세 녀석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벌떡 일어나 사나운 짐승들처럼 미화에게 덮쳐 들었다.

미화는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웃으면서 잽싸게 몸을 피했다. 놈들은 졸지에 저희들끼리 이마를 짓찧으며 서로의 가슴에 주먹질을 해대는 꼴이 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놈들의 머리채를 양손에 움켜쥔 미화는 놈들의 머리를 서로에게 꽝꽝 부딪쳤다. 놈들은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밑동 잘린 나무들처럼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아형은 놀람과 기쁨이 어린 시선으로 눈물을 흘리며 미화 공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큰일날 뻔했구려.

미화 공자가 말했다.

"역시……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요. 저 화분을 보고 이 집이 미화 공자님의 집이라고 짐작했어요."

아형은 목이 메어 가까스로 말했다. 며칠 동안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그녀인지라 뜻밖의 장소에서 이렇게 미화를 만나게 되니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그녀는 이것이 꿈이 아닌가 싶어 한동안 말을 일은 채 미화의 얼굴만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미화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놈들 넷은 본래 강호에서 악한 짓만 하던 놈들이었소. 원수에게 쫓겨 거의 죽게 된 걸 불쌍한 생각에 구해 뒀더니 지금까지도 그 악습을 못 고치고 짐승 같은 짓을 하려고 했구려."

아형은 미화가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은 그리 마땅치 않았으나 미화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화는 아형을 보고 씩 웃더니 하인을 불렀다. 곧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이 시체들을 끌어내다가 묻어 버려라!"

하인은 굽신하고는 몇 사람을 데리고 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체들을 끌어내고 바닥의 핏자국을 닦아 버렸다.

미화가 다시 분부했다.

"듣자니 저 놈들 넷이 태호 보선의 보물들을 훔쳐 온 모양인데 어서 그 보물들을 도로 보물선에 갖다 놓아라. 그리고 사불과 악귀를 만나게 되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라."

그런 후 그는 술상을 마련하여 아형을 위로했다. 그는 그동안의 일들을 물으며 아형에게 술을 권했다.

"……말을 들으니 정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구려. 하지만 이제부턴 아무 걱정 마시오. 대난에 죽지 않으면 큰 복을 만난다지 않소. 이제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없을 거요."

아형은 미화가 호심장에서 볼 때와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겪고 난 아형에게 미화는 누구보다 친절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태호 보선에서 훔쳐 온 보물들을 도로 가져다 주라는 태도만 보아도 얼마나 사내다운 처사인가. 그녀는 그가 정말 항주부 삼대 공자답다고 내심 감탄했다.

"병…… 병묘 오라버니는…… 어떻게 됐어요?"

이윽고 아형은 궁금했던 병묘의 생사 여부를 조심스레 물었다.

미화는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창가로 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아형의 뇌리를 스쳤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혹시…… 잘못되기라도……?"

아형은 다급해진 마음으로 되물었다.

미화가 조용히 아형을 돌아보았다.

"아형, 아형에겐 언제나 병묘 생각뿐이구려. 병묘를 생각하는 반만큼이라도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미화는 아주 서운한 듯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아형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미화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형의 심정을 읽은 미화는 측은한 생각이 드는지 병묘의 일을 소상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병묘는 지금 사불과 함께 붙어 다니고 있으며, 두 사람 사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아주 극진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그는 강조했다. 그는 길게 탄식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까 그 네 녀석들이 태호 보선에서 노략질한 것도 기실 생각해 보면 다 까닭이 있는 거요. 나와 사불 악귀는 원래 서로간에 만날 일도 없었고 원수진 일도 없었소. 오직 병묘가 아형을 버리고 사불과 가까워지니까 내 부하들이 분해서 그런 짓을 한거요. 사불 악귀에게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미화의 말을 듣는 아형의 눈에는 소탈한 병묘의 사내다운 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호심도를 오가며 병묘는 그녀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는 호탕하게 웃기도 잘했고 술도 아주 잘 마셨다. 그런가 하면 도박판에서까지 그는 솔직하고 소탈하게 놀았다. 그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런데 그가 사불 악귀와 가깝게 지내다니. 아형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형은 이번에는 황약사를 떠올렸다. 응취봉에서 헤어진 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지금은 웅취봉을 내려왔을까? 황약사를 생각하니 아형의 마음은 또다시 한없이 서글퍼졌다.

"그 도화도에서 왔다는 황약사는 못 봤어요?"

아형이 물었다.

미화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사불 말로는 자기들이 무림의 고수 하나를 죽였다는데 그가 누군지 나는 몰랐소. 그런데 다른 사람들 말을 들으니 황약사가 사불 악귀 손에 죽었다더군."

미화는 안됐다는 듯 아형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형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지금까지의 환난과 고초를 이야기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한껏 가까워졌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술을 마셨다.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지자 미화가 입을 열었다.

"아형, 이제 아형의 앞날에는 언제나 쾌락만이 넘치기를 기원하겠소."

미화가 술잔을 들며 잔을 권했다.

아형은 잔을 들지 들하고 머리를 숙였다.

"내 일생에 무슨 쾌락이 있겠어요."

아형이 서글픈 어조로 대꾸했다. 미화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시오? 성사(成事)는 하늘에 달렸지만 모사(謀事)는 사람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소? 아형같이 총명한 사람이 어린 계집애들처럼 그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되겠소? 자그마한 일에 눈물부터 보이는 것은 아형답지 않소."

아형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미화가 또 술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아형, 이 술잔을 마저 비우고 밖으로 나갑시다. 뒤뜰에 꽃들이 만발한 화원이 있소. 가 보시면 마음이 활짝 필거요."

술잔이 비자 미화는 비틀거리며 앞장서서 아형을 데리고 화원으로 향했다. 그는 갈짓자로 걸음을 옮기며 될 새 없이 중얼거렸다.

동풍에 살랑대는 꽃잎

사람이 얼마나 살지 알지도 못하고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에 놀란 마음

흐르는 눈물 걷잡을 수 없어라…….

미화는 구불구불한 화랑을 무수히 에돌아 크나큰 화원에 이르렀다. 화원 안엔 울긋불긋한 생화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었는데 아름다운 기화요초들을 보게 되자 아형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속의 비애도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전번에 천하에서 제일 가는 꽃을 드렸는데도 본체만체 계집종을 시켜 태호물에 버리게 하여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시오? 내 오늘 그보다 훌륭한 꽃을 보여 줄까 하오. 따라가 보겠소?"

미화가 웃으며 말했다.

아형은 호기심이 동하여 머리를 끄덕였다.

미화 공자는 앞서 걸어가 문 하나를 살며시 열었다.

"이리로 들어갑시다."

아형이 따라 들어가 보니 그 안엔 침대와 탁자, 걸상이 있을 뿐 꽃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형은 의아한 듯 미화를 쳐다보았다.

"침실……이 아닌가요?"

아형의 물음에 미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는 내가 평소에 거처하는 곳인데 다른 사람은 누구도 얼씬 못하오."

그는 아형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천하 제일 가는 꽃은 어디 있어요?"

아형이 다시 물었다.

미화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도 모르겠소? 눈앞에 천하 제일 가는 꽃이 분명 있는데도 아형 눈엔 보이질 않는단 말이오?"

아형은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평범한 침실에 화분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미화는 연신 웃어대다가 나지막이 소리쳤다.

"자, 봐요!"

그는 침대 앞의 휘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순간 아형의 눈은 화등잔만해졌다. 침대 위에는 이불이 정갈하게 개어져 있었는데 한 여인이 수놓아진 침대보가 확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아형을 향해 음탕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아형은 입이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인은 생김새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과 너무도 흡사했던 것이다.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형을 지켜 보던 미화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수를 누가 놓았는지 아오? 항주에서 솜씨가 제일인 운영 낭자가 수놓은 거요. 천하 제일 가는 꽃을 수놓은 거지. 난 매일 여기에 누워서 저 꽃에 입맞추고 저 꽃을 품에 안고 자오. 어떻소? 맘에 들지 않소?"

아형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미화가 이처럼 음탕한 인간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녀는 눈앞이 깜깜해져 옴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런 미화에게서 무사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저게 천하 제일 가는 꽃이라구요? 정말 한심하네요. 꽃이란 신(信) 아(雅) 미(味), 삼신(三信)이 갖춰져야 하는데 어디 저기에 삼신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미화 공자는 다시금 음탕한 미소를 흘렸다.

"신이 없다니? 이 꽃은 말이오, 내가 입맞추고 싶으면 언제나 입맞출 수 있는데 왜 신이 없겠소? 아도 있소. 보오. 언제나 성이라고는 낼 줄 모르고 웃는 낯으로 나한테 교태를 보이지 않소? 돼먹지 못한 계집들처럼 제 잘난 줄만 알고 나를 흘겨보는 일은 절대 없거든. 그리고 이 꽃의 향기는 더 말할 게 없소. 나는 밤마다 이 여인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그 향기에 취해 잠이 들곤 하거든."

그는 말하는 동안 아형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걸음 한걸음 다가들었다.

아무리 총명한 아형이라도 이 지경에 이르러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다가 침대머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으며 걸터 앉았다.

아형에게 다가든 미화는 손가락 끝으로 아형의 이마를 튕기며 다시금 소리내어 웃었다.

"이 몰골로 천하 제일 가는 꽃이라고? 이 미화 공자가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학 영감처럼 한 손에 더럭 움켜잡아다가 침대에 내동댕이쳤더라면 시원했을 텐데, 공연히 침대 위의 그림만 보며 허송세월을 했단 말이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아형의 옷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아형이 악을 쓰자 그는 아형의 대혈 세 곳을 꾹꾹 찔러 놓고는 옷들을 하나하나 벗겨 내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형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미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젖가슴이며 허벅지를 마구 주물러 댔다.

"이 미화 공자가 오늘은 꽃밭에 넘어져 꽃향기에 흠뻑 취해 봐야겠다!"

미화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아형을 침대에 쓰러 눕혔다.

이때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급하게 났다.

"웬 소란이냐?"

미화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공자님, 밖에 웬 사람이 공자님을 찾아왔는뎁쇼."

"그냥 돌려보내!"

"공자님, 남녀 두 분이 어찌나 엄하게 구는지……."

하인은 갑자기 "어이쿠!"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한창 열이 올라 아형을 겁탈하려던 미화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사불과 악귀였던 것이다.

"아이고, 또 이런 걸 보네. 요 며칠은 어째 줄창 이따위 일만 눈에 띄지? 아이고, 볼썽사나워라……."

악귀가 얼른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러나 사불은 아랑곳없이 서릿발 같은 어조로 소리쳤다.

"미화, 태호 보선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죽는다는 걸 알겠지? 항주 사람이면 미화도 이 사불 악귀의 명성을 들었을 텐데?"

"내가 그 따위 허섭쓰레기를 건드릴 놈으로 보이나?"

미화는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히 대꾸했다.

"오리발을 내밀 셈인가?"

사불은 탁자 위에 무엇인가를 탕 내려놓았다. 태호 보선에 있던 '목왕팔준(穆王八張)'이었다. 빛깔 좋은 신기한 옥석인데 그 위에는 열 마리의 각기 다른 종류의 준마가 새겨져 있었다. 홍황백흑(紅黃白黑) 갖가지 색깔로 아롱진 이 목왕팔준은 미묘하기 그지없어서 태호 보선 안의 많은 보물 중에서도 대단히 희귀한 보물이었다.

"일명 사괴(四怪)라 불리는 네 녀석이 보물선에서 보물을 훔쳐 왔길래 난 이미 그 놈들을 죽여 버렸어."

미화는 히죽 웃더니 탁자를 탕 쳤다. 그러자 양쪽 벽의 문이 열리더니 장정 둘이 걸어 나왔다.

"그 사괴의 수급을 가져다 보여라."

미화의 명이 떨어지자 둘은 즉각 밖으로 나가 사괴의 수급을 목판에 담아 들고 들어왔다.

"저리 가져가! 아이고 끔찍해. 난 죽은 사람만 보면 잠을 못 잔다니깐. 꿈에 자꾸 나타나서."

악귀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사불은 네 도적놈의 수급을 한번 힐끗 보고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그만하면 미화도 바보는 아니군. 그건 그렇고, 우리 보물들을 모두 상자에 도로 넣어요. 가져 가야겠어."

사불은 이렇게 말하며 아형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형인 줄 난 첫눈에 알았어."

그녀는 아형에게로 다가갔다.

아형은 수치심에 줄곧 눈물만 흘렸다.

사불은 날카롭게 미화를 쏘아보았다.

"사내 놈들이란 어쩌면 이렇게 다 똑같을까……."

사불은 아형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와 함께 가도록 해요. 오매불망 아형만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거든."

사불과 악귀가 아형을 데리고 나가자 미화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필이면 이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이 나타날 건 뭐란 말인가? 미화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쫓아 나가 쳐죽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사불 악귀를 대적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지금은 소인의 농어에 중독된 몸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이를 같았다.

'두고 보자. 언젠가는 나의 손에 당할 날이 있을 거다.'

아형을 데리고 배에 오른 사불과 악귀는 빠른 속도로 배를 달리기 시작했다. 호심에 이르자 태호 일흔두 개 봉이 아주 아득하게 보이고 주위에는 배 한 척도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사불이 호들갑스럽게 웃더니 아형에게 말했다.

"듣자니 그대는 아주 총명한 여자라고 하던데 내가 왜 그대를 구했는지 아나?"

"글쎄요……."

아형은 고개를 저었다.

사불은 빙긋이 웃으면서 거울을 꺼내 들고 자기 얼굴을 바짝 아형에게 갖다 붙이며 말했다.

"아형, 거울을 좀 보라구. 그대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미인인가?"

아형은 물끄러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대답해 보라구."

사불이 재촉했다.

아형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사불의 모습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아형에게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형은 생각 끝에 대답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모보다는 마음에 달렸지요."

아형의 말이 떨어지자 사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대뜸 순금으로 된 거울을 와락 물 속에 던져 넣었다.

"웃기는 소리! 그럼 내가 마음이 나빠서 미모도 그대한테 뒤떨어진단 말인가?"

아형은 놀랍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그녀가 말한 뜻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 말은……."

"듣기 싫어!"

사불이 소리쳤다. 아형은 할말을 잃고 물끄러미 사불을 쳐다보았다. 사불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아형에게 몸을 기대며 부드럽게 물었다.

"내가 마침 그대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미화한테 봉변을 당했을 테지?"

"그래요."

아형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대의 목숨을 살려 준 셈이지?"

아형은 사불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대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그대 목숨은 이제 내 것 아니겠나?"

사불은 안색을 바꾸며 거칠게 아형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대 머리숱이 나보다 적으니 안됐어. 아니, 머리를 빡빡 깎아 버리면 더 이쁠 거야."

순간 사불의 손이 번쩍 쳐들리는가 싶더니 검고 탐스러운 아형의 머리칼들이 눈앞에 흩날리며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불은 검을 휘둘러 아형의 머리를 고슴도치 꼴로 만들어 버렸다. 아형은 분노가 치밀었으나 고스란히 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사불은 아형의 팔을 밧줄로 묶어 밧줄 한 끝은 고물에 매고 아형을 물에 던져 넣었다.

"좀더 빨리 달릴 순 없나?"

사불이 악귀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악귀는 더욱 속도를 내어 배를 몰았다.

아형은 처음 얼마 동안은 파도가 치는 대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며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아형이 거의 의식을 잃어 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 사람 좀 보게나? 태호에서 이게 무슨 장난이지? 그러지 말고 어서 배에 올라가요."

그는 아형을 번쩍 쳐들어 배를 향해 던져 올렸다. 아형의 몸은 허공에 날아올라 배의 갑판 위에 떨어졌다. 보통 이렇게 떨어지면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속도가 늦춰지며 아형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사불이 깜짝 놀라 아형에게로 달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아형에게 이렇듯 공중을 날아 배 위에 올라올 만한 재주가 있었나 싶어 눈이 휘둥그래졌다. 손은 여전히 밧줄에 묶여 있었는데 아형에게 아무리 신력이 있다 해도 이 같은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불은 요모조모를 살펴보다가 나름대로 단정지었다.

'큰 물고기의 짓임에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아형을 향해 짜증스레 소리쳤다.

"보기 싫다니깐 또 왔구나. 용왕도 널 싫다 하고 나도 네가 귀찮으니 어쩔까? 태호에 던져 고기밥이나 되게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을 것 같다."

사불은 검을 번쩍 치켜 들어 고물에 매어 있던 밧줄 한 끝을 툭 끊어 버리고는 다시 아형을 물에 집어 던졌다. 아형이 물에 떨어지는 순간 물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끊어진 밧줄 끝을 잽싸게 거머쥐었다.

"왜 또 물에 뛰어드는 건가? 내가 겨우 물에서 건져 배에 집어 던졌더니만."

그는 도로 아형을 배 위로 던져 올리고 자기도 갑판 위에 올라섰다.

사불과 악귀는 다시금 소스라쳐 놀랐다. 한 거렁뱅이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로 씩 웃고 서 있었는데 맨발에다 어깨엔 조롱박 하나를 달랑 메고 있는 게 유독 눈길을 끌었다.

"넌 누구냐?"

사불이 꽥 소리쳤다.

거렁뱅이가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왜 이렇게 사납게 구나? 모양을 보니 무슨 해적질이나 하는 것 같은데, 오라, 그러고 보니 사불이 틀림 없겠군. 듣자니 태호에서 최고로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이 사불과 악귀라던데 오늘 마침 잘 만났다."

그는 이제 아형을 향해 말했다.

"아니,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어쩌다 저런 악한 여자를 만나 고생인가?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사불이야 사불!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해서 시집도 못 가는 여잔데 어쩌자고 저런 여자를 다 가까이 하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는 거야 그래?"

사불은 그 말에 속이 발칵 뒤집혔다. 얼마 전 병묘가 모진 말을 퍼붓고 호숫물에 뛰어들면서부터 사불은 줄곧 속이 부글부글 끊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한 터에 아형을 만나게 되자 더욱 속이 끓었다. 항주부 삼공자들이 모두 아형에게 마음을 두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불은, 병묘가 자기를 싫어하는 까닭이 아형에게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형을 죽임으로써 병묘의 미련을 끊어 버리려 했던 것인데 한낱 거렁뱅이까지 자기를

'세상 사람이 모두 싫어해서 시집도 못 가는 여자'라고 못을 박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 되었다.

'빌어먹을 놈. 네가 누구든 간에 오늘 내 손에 죽는 줄 알아라. 네 놈의 아가리에 난도질을 해놓을 테다!'

사불은 악을 쓰며 거렁뱅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은 곧장 거렁뱅이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튀어나왔다.

"악!"

아형이 얼굴을 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사불은 자기 검이 너무도 쉽게 상대방의 가슴을 뚫어 버리자 오히려 흠칫 놀랐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며 모로 쓰러지는 거렁뱅이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흥, 날 탓하진 말라구. 이건 네가 자청한 거야."

이때였다. 갑자기 거렁뱅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 내 탓이니 네 탓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거나 검술이 영 형편없구만. 가슴을 못 찌르고 하필이면 이 거렁뱅이 겨드랑을 찌르다니, 그런 재주 갖고 이 거렁뱅이와 자웅을 다투겠다고?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그래."

거렁뱅이는 앙천대소를 하였다.

사불은 악이 받쳐 사나운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거렁뱅이에게 다시 덮쳐 들었다. 거렁뱅이가 막 손을 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이는 듯했다. 누군가 발길질을 한다는 것을 느낀 거렁뱅이는 얼른 몸을 날려 선창을 뚫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렁뱅이의 뒤를 덮치던 악귀는 거렁뱅이가 잽싸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몸을 제지할 수가 없어 그대로 사불과 맞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사불이 비명을 질렀다.

둘이 잠시 어정정하게 서 있는데 거렁뱅이가 술잔 하나를 들고 선실에서 뛰어나왔다.

"근사하군! 술잔이 참 근사해.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면 맛이 어떨까?"

거렁뱅이는 당장 어깨에서 조롱박을 내려 들고는 입으로 마개를 뽑았다. 그는 조롱박을 기울여 방금 들고 나온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조롱박을 허공에 던져 올리고 입에 물었던 마개를 훅 내뱉었다. 순간 사불과 악귀는 입이 쩍 벌어졌다. 허공에 날아오른 조롱박과 마개가 너무도 절묘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거렁뱅이는 떨어져 내리는 조롱박을 맵시 있게 척 받아 쥐고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카―, 술맛 좋군."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이번에는 그 옥잔을 선실 안으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거렁뱅이 조롱박만은 못해. 옥잔이고 나발이고 이 조롱박에 직접 입을 대고 마시는 게 최고거든."

사불과 악귀는 얼른 선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잔은 신기하게도 원래의 자리에 감쪽같이 놓여 있었는데, 옥잔을 싸고 있던 금실 그물까지 전혀 손댄 흔적이 없으니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불과 악귀는 이 거렁뱅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깨닫고 은근히 긴장했다. 사불은 애써 존경스런 태도를 취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선배님께선 어디 사는 누구이시며 태호의 저를 찾아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사불의 달라진 태도에 홍칠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갑자기 뚝 그치며 말했다.

"난 개방 방주 홍칠이다. 너희들 둘이 소인의 앞잡이가 되어 태호에서 갖은 악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어 왔다.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저승 구경을 좀 시켜 줄까 해서이다."

그 말에 사불과 악귀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홍칠에게로 덮쳐 들었다. 홍칠은 얼른 허리를 굽히고 왼손을 끌어들이는 듯하면서 오른손으로 장을 내밀었다. 순간 무거운 굉음이 일며 사불과 악귀는 종잇장처럼 뱃머리로 날려 갔다.

사태가 불리함을 느낀 두 사람은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물로 뛰어 들어 달아나려 했다.

"도망가려 해요, 저봐요!"

아형이 소리쳤다.

"꼼짝 마라!"

홍칠이 몸을 솟구쳐 그들에게로 날아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푸른 타구봉이 쥐어져 있었다. 홍칠은 타구봉 끝으로 악귀를 들어 올려 갑판 한가운데 에 내동댕이친 뒤 대혈 세 군데를 찔러 놓았다. 악귀가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자 사불은 죽기 살기로 홍칠에게 달려 들었다. 홍칠은 타구 봉으로 사불의 양어깨를 잽싸게 내리쳤다. 사불은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홍칠은 다시 전자결(纏宇訣)을 외우며 타구봉 끝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러 빙

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사불은 하늘과 땅이 뒤섞이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불과 악귀는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끝까지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홍칠을 올려다보았다. 홍칠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둘이 그동안 태호에서 자행한 악행을 생각하면 당장 쳐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그만두겠다. 내 오늘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앞으로는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라."

홍칠은 말을 마치더니 사불과 악귀의 단중(壇中)과 기혈(氣穴)을 눌러 앞으로는 무공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때였다. 갑자기 호수 먼 곳으로부터 쪽배 10여 척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사불 악귀는 게 섰거라!"

잠깐 사이에 그들은 태호 보선을 에워쌌다. 쪽배 위의 사람들 중엔 태호 귀운장의 몇몇 형제들도 있었는데 선두에 선 사람은 큰형 육승룡이었다. 그들은 다투어 태호 보선에 뛰어올랐다.

그들은 사불과 악귀와 사생결단을 내려고 뛰어올랐다가 눈앞에 벌어진 뜻밖의 정경에 하나같이 놀랐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홍칠이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육승룡, 개방의 홍칠을 몰라 보겠나? 사불과 악귀는 내가 이미 무공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니 더는 신경쓸 것 없네. 여비나 좀 주어 가고 싶은 데로 가게 하고, 이 배의 보물은 자네들이 가져다가 태호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나."

사람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홍칠과 아형, 사불 악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홍칠은 또 한바탕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로 웃더니 누가 붙들 새도 없이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제22장 도화도의 사랑

진현풍과 매초풍을 데리고 동해에 온 황약사는 배를 하나 얻어 주산(舟山)으로 향했다.

한참 가다가 황약사는 사공에게 말했다.

"키를 돌려 도화도로 향해 주시오."

사공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도화도는 갈 수 없는뎁쇼."

"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황약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손님께서는 아마 모르고 계시는 모양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도화도엔 마귀가 있답니다요. 눈이 네 개나 달렸는데 생사람을 잡아먹는대요. 힘이 얼마나 센지 사람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사지를 쭉쭉 찢어 먹는다지 뭡니까? 이 연해 일대 사람들은 모두 그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도화도를 가다니요? 억만금을 준대도 거기는 못 갑니다요."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맞장구를 쳤다.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현풍과 매초풍이 황약사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긴 왜 웃나?"

황약사의 말에 둘은 찔끔 웃음을 거두었다.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또 물었다.

"그래 사공께서 보시기에 나는 어떻게 보이시오? 도화도의 그 마귀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소?"

사공은 황약사를 보고 크게 웃었다.

"손님이야 미남이신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악마는 지독한 악마랍니다. 생사람을 벙어리로 만들어 갖고 도화도에 데려다가 온갖 고생을 다 시킨답니다. 접때 제 동생이 말도 못하는 벙어리 하나를 배에 태웠는데 글쎄 자꾸만 도화도로 가자고 하더랍니다. 누가 감히 거길 가겠다고 나서겠수? 그래 동생이 못 가겠다고 하니까 그 벙어리가 지랄발광을 하더랍니다. 배를 부수고 사람을 막 치고, 그 바람에 사공이 넷이나 죽었지요. 동생은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나 이틀

이나 바다에서 떠다니다가 구출이 되었지요. 동생이 말하기를 도화도의 그 악마가 이름 모를 약을 먹여서 벙어리가 그런 광기를 부렸다고 합디다."

황약사는 그저 허허 웃었다. 그러자 사공은 신명이 나서 입에 게거품을 물며 도화도 악마에 대해 욕을 퍼부어 댔다.

"천하에 그런 악마가 어디 있단 말이오? 멀쩡한 사람을 병신을 만들다니, 하늘이 가만있지 않을 거외다."

"그러다가 정말 그 악마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황약사가 빈정거렸다.

"어쩌긴 어째요? 내가 무서워할 줄 아시우? 기껏해야 그 놈 손에 죽기밖에 더 하겠소?"

사공은 자기 가슴을 툭 치며 호기를 부렸다.

"이 놈! 내가 바로 그 악마다!"

황약사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사공은 움찔하여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약사의 기색이 추상 같을 뿐만 아니라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더럭 겁이 났다.

"소…… 손님두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 네 놈과 농담을 하겠느냐?"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사공에게 다가섰다.

"게 서라, 게 섰거라!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물에 처넣을 테다!"

사공은 급히 노를 거머쥐고 소리쳤다.

황약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사공은 이를 사려물고 황약사의 허리를 노로 후려갈겼다. 어찌나 힘이 센지 바람이 씽 일었다. 황약사는 두 손가락을 뻗쳐 노를 잡았다. 순간 노는 마치 작두에 잘린 듯 싹뚝 잘려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사공은 반만 남은 노를 쥐고 마치 도깨비라도 만난 듯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릴 엄두도 못 내고 공포에 질려 두 사람을 지켜 볼 뿐이었다.

황약사는 다가가 동강난 노를 빼앗아 마저 박살을 내서는 바닷물에 집어 던졌다.

사공은 겁에 질린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부들부들 떨며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사공의 두 손을 등뒤로 모아 쥐고는 배 난간으로 끌고 가서 그의 머리를 바닷물에 처박았다.

"말해 봐. 그 악마란 놈이 생사람을 어떻게 찢어 죽였다던가? 나도 한번 그대로 해봐야겠다."

"아이고, 살려 주십쇼, 제발 목숨만……."

사공은 급히 소리치다가 머리가 바닷물에 박히는 바람에 몸만 버둥했다. 황약사는 사공의 머리를 몇 번 물 속에 잠갔다 꺼냈다 한 뒤 다시 말했다.

"내가 바로 네 놈이 말하던 그 악마다. 그러니 냉큼 우리를 도화도로 모셔라. 조금만 지체했다간 네 놈의 사지를 찢어 바다에 처넣을 테다."

사공은 부들부들 떨면서 찍소리도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화도로 향했다.

도화도에 도착하자 황약사는 사공의 뒷덜미를 잡아 거의 끌다시피 하여 배에서 내렸다. 그는 배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알아서 돌아가도록 해라. 이 사공 놈은 내가 끌고 가서 버릇 좀 고쳐 줘야겠다."

그러자 사람들 셋은 덜컥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사공을 놓아 달라고 애걸했다. 황약사는 은전 몇 닢을 배 위로 휙 집어 던졌다. 은전들은 쏜살같이 날아가 배의 바닥에 깊이 박혔다.

"그것을 가지고 냉큼 돌아들 가!"

황약사는 더는 말하지 않고 사공의 뒷덜미를 쥔 채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은 쫓아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어지는 황약사 일행을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황약사는 몇 발자국 가다가 사공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죽어도 한이야 없겠지?"

강직한 성격의 사공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악마 같은 놈? 무고한 인명을 마음대로 해치는 네 놈을 하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황약사는 히죽 웃음을 떠올렸다.

"또 아가리 질을 해봐. 네 놈의 혓바닥을 도려내고 귓구멍을 파서 이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할테니!"

"과연 틀림없군. 동생 말이 틀림없어! 난 그래도 동생 말이 다분히 꾸며 낸 말인 줄 알았더니 바로 네 놈의 그 악마로구나."

사공은 계속해서 황약사를 욕하며 심기를 건드렸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황약사의 기색을 살피며 사공은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공이 죽는 것이 불쌍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황약사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웃다 말고 사공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바다를 향해 내던졌다.

바닷물에 첨벙 떨어진 사공은 간신히 헤엄쳐서 자기가 몰고 왔던 배 위에 기어올랐다. 사공이 죽지 않고 돌아가게 되자 사람들은 감지덕지하여 황약사를 향해 몇 번이고 절을 하더니 부랴부랴 노를 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화도에는 소문대로 벙어리 노복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기이한 무공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침울한 기색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 세계의 망나니들이었는데 황약사한테 붙들려 그 꼴이 된 것이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도화도에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러 달이 지나갔다.

둘은 무공을 익히는 솜씨가 매우 빨랐다. 내력은 아직 많이 약하지만 무술 동작은 어디에 내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학 대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었다. 두 사람은 오로지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만으로 무예를 배우는 데 전념했다.

때가 바로 복숭아꽃이 만발할 때라, 어느 날 수련을 마친 매초풍은 복숭아꽃을 꺾어 들고 사부의 처소로 향했다. 곱게 핀 꽃을 가져다가 사부의 서재와 침실을 장식해 드리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황약사의 서재는 엄청나게 컸다. 서재에는 책상자와 책 광주리가 아주 많았는데 책상자에 새겨져 있던 글은 황약사가 손가락으로 모두 후벼 파내 버렸다.

황약사는 책상자에 새긴 '금수문장(錦袴文章)'이니 '학부사해(學富四海)'니 '진사급제(進士及第)'니 하는 글들이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심심하면 손가락으로 그것을 후벼 파내 버리곤 했던 것인데 그로 인하여 책 상자에는 구멍이 숭숭하였다. 창가에는 대나무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는 문방사보(文房四寶) 지필묵이 놓여 있었다.

꽃들을 꽃병에 꽃아 놓고, 매초풍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 꽃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악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벙어리 노복 하나가 손짓발짓을 해 가며 뭐라고 말하는데 눈치로 보아 어서 이곳을 나가라는 것 같았다.

매초풍은 마땅치 않다는 듯 벙어리 노복을 쏘아보았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 일이나 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매초풍이 말했다.

그러나 벙어리 노복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손짓발짓을 해 가며 황약사께서 이곳에 다른 사람을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음을 전달했다.

매초풍은 그 뜻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잖아."

그녀는 벙어리 노복을 골려 먹는 것에 은근히 재미를 느끼며 남은 복숭아꽃을 들고 황약사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매초풍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의 침실은 상상 밖으로 매우 간소했다. 나무침대 하나에 침대 휘장이 하나, 괴상한 검이 한 자루, 그리고 벽에는 옥소가 걸려 있고 바닥엔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책이 몇 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검소한 사부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나쁘게만 말하다니…… 아, 사부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선비같이 문장도 좋고 금기서화(琴樵書畵), 기문술수(奇門術數) 어느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것이 얼지 않은가?'

매초풍은 황약사가 고금에 없는 천하 제일의 기인이라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사부의 침대머리에 걸려 있는 그림 한 폭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옷의 주름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정밀하게 그린 인물화였는데 아주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림의 여인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생긋이 웃고 있는 눈이며 입매가 성미 부드러운 여인의 다정다감한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하여 사랑스러웠다.

'이 그림의 미인은 도대체 누굴까? 이렇게 침대머리에 걸어 놓은 걸 봐서는 사부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틀림없는데 사부님의 어머님이실까? 아니면 사부님의 사랑하는 사람일까?'

매초풍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그림 쪽으로 점점 다가갔다.

가까이가 올려다보니 그림의 미인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미목(眉目)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달라 보였는데 발뒤꿈치를 들고 보니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아주 달랐다.

'그러니 사부님 키로는 언제나 이렇게 생생하게 보이겠구나. 침대에서 보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또 달라 보이겠지? 그렇다면 이 그림의 여인은 사부님의 어머님은 절대 아니야. 아무리 어머님을 사랑한다 해도 이렇듯 매일 침대 위에 걸어 놓고 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분명 사부님이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연인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듯 사부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행복한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모르긴 해도 사부

님은 매일 이 그림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속의 정담을 나누곤 하겠지…….'

생각이 이쯤 미치자 매초풍은 어쩐 일인지 자기 얼굴이 확 달아 오름을 느꼈다.

매초풍은 그림을 좀더 똑똑히 보려고 이번에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면 볼수록 그림의 미인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매초풍은 손바닥으로 그림을 쓸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구지? 무슨 재주로 우리 사부님을 이렇게 반하게 했을까? 눈동자가 맑고 고운데 무슨 수로 우리 사부님을 홀렸을까?"

이때였다. 갑자기 엄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어머나!"

매초풍은 기겁을 하여 몸을 일으키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초풍이!"

등뒤에서 들리는 음성엔 노기가 가득했다.

매초풍은 앉은뱅이처럼 궁둥이를 움직여 미끌어지듯 침대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벌벌 떨며 황약사의 큰 키를 올려다보았다.

"사, 사부님…… 저는 꽃, 꽃을 꽂아 드리려고

"뭐? 어쨌다고?"

황약사가 매섭게 되물었다.

황약사의 노기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던 매초풍은 갑자기 낯을 붉히며 키득 웃었다.

"사부님, 저는 방금 저 그림을 봤어요."

그 말에 황약사는 무심코 벽에 걸린 그림을 힐끗 돌아보았다. 순간 황약사의 눈길에 부드러운 정이 내비치다 사라지는 것을 매초풍은 놓치지 않았다. 이에 담이 커진 매초풍이 물었다.

"사부님, 저 그림의 미인은 누군가요? 저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에요."

황약사는 흠칫하며 매초풍을 돌아보았다. 황약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황약사가 다소 누그러지는 기미를 보이자 매초풍은 마음놓고 말했다.

"사부님, 저 그림 좀 보세요. 사람도 아름답지만 사부님께서 그리기도 잘하셨어요. 막 살아 있는 것 같잖아요."

이 그림의 여인은 다름아닌 황약사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아형이었다. 황약사는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 아형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아, 아형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시금 아형의 생각에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아형은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었다. 학 영감에게 안겨 태호에 떨어졌는데 무슨 수로 살아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 미치자 황약사는 괴로운 듯 다시 고함을 쳤다.

"썩 물러가거라, 어서!"

한동안 제 흥에 겨워 말을 늘어놓던 매초풍은 돌변한 황약사의 태도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매초풍은 몸둘 바를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사부의 뇌성벽력 뒤에는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매초풍이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모르자 황약사는 더욱 성이 났다. 그는 갑자기 차디찬 미소를 흘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그냥 버틸 셈인가?"

매초풍은 가슴이 뛰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저는……."

"어서 썩 나가지 못해!"

황약사는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다시 한 번 소리치고는 매초풍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마당에 내던졌다. 이어 복숭아꽃 몇 가지도 허공을 날아 매초풍을 스치며 그녀의 주변에 내리꽂혔다.

매초풍의 귀에 문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매초풍은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사부가 자기를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나를 헌 물건 집어 던지듯이 창 밖으로 내던지다니. 단순히 사부님 침대머리에 있는 그 그림을 보았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까닭이 있는 걸까? 내가 그림을 보고 사부님 비위 상할 소리를 한 건가? 그림의 여인이 예쁘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날 이렇듯 천대하는 거야? '

매초풍은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오랫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매초풍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가 내던진 복숭아꽃 가지가 주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복숭아꽃 가지는 모두 열두 개였는데 아직 꽃봉오리 상태인 것과 활짝 핀 것을 어쩌면 그렇게 순서대로 꽃아 놓았는지 일부러 그렇게 꽂으려 해도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매초풍은 넋을 잃고 꽃들을 바라보노라니 황약사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사부님을 노엽게 만든 것은 모두 내 탓이야. 벙어리 노복이 나에게 사부님의 서재와 침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내가 듣지 않고 부득불 들어가지 않았는가? 꽃을 꽃아 드린다는 핑계로 사부님의 서재와 침실을 구경하고 싶었던 거지. 어쨌거나 사부님을 탓할 게 아니야. 모두 내 잘못이지…….'

매초풍이 이렇듯 슬픔에 잠겨 자신을 나무라고 있는데 문득 진현풍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 매초풍!"

진현풍은 매초풍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사부님 처소에까지 이른 것이다. 진현풍은 매초풍이 사부님 서재 앞뜰에 맥없이 주저앉아 땅에 꽂혀 있는 복숭아꽃 가지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초풍,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매초풍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진현풍을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 붙이듯 말했다.

"정말 귀찮게 구네. 사부님 명대로 함께 무공을 수련할 때도 시끄럽게 굴더니만 뭣 펌에 날 그렇게 찾아다녀요?"

진현풍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매초풍과 같이…… 바다 구경을……."

"비켜요. 누가 바다 구경을 가겠다나? 당신 아버지는 진백만이고 어머니는 부호집 딸이시고 집에는 재산이 얼마가 있고, 또 이따위 집자랑이나 하려구요?"

진현풍은 쩔쩔매며 얼굴에 애써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매초풍, 우리 바닷가에 나가 돌 던지기를 하자. 누가 더 멀리 던지는가 내기를 하자구."

"아이고 시끄러워. 세 살밖이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이 나이에 그런 장난이나 하고 놀 것 같아요?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예요?"

매초풍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더니 갑자기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진현풍은 황당해졌다.

"아니, 왜, 왜 그래? 싫으면 그만이지 뭘 울고 그래?"

그는 속으로 여자애들이란 이 나이가 되면 금세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 식으로 변덕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는 매초풍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로 다가가다가 곁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복숭아꽃 가지를 발로 쓰러뜨리려 했다.

"그건 왜 건드려요?"

매초풍이 성을 발끈 내며 진현풍을 한 장 내리쳤다. 낙영장법이었다. 평소 매초풍과 무예를 익히면서 이에 숙달된 진현풍인지라 얼른 매초풍의 공격을 막았다. 진현풍의 장력도 보통이 아니어서 바람이 씽 일었다.

"아니, 나한테 손을 대?"

매초풍은 악이 나서 진현풍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둘이 한바탕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황약사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둘은 하는 수 없이 싸움을 멈췄다. 황약사가 천천히 둘에게로 다가왔다. 잠시 후 열 여섯 명의 노복들도 뒤따라 왔다. 하나같이 귀먹고 혀가 없어 말을 못하는 벙어리 노복들이었다. 황약사 옆에까지 온 그들은 벌벌 떨며 허리를 굽혔다.

"매초풍, 네가 내 서재에 들어왔을 때 벙어리 노복이 있었느냐?"

황약사의 물음에 매초풍도 허리를 굽히며 얼른 대답했다.

"예, 있었습니다. 벙어리 노복이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을 제가 뿌리치고……."

"난 벙어리 노복이 있었는가만 물었다!"

황약사가 꽥 소리쳤다.

"예, 있었습니다."

매초풍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며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황약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노복 하나를 손가락질하자 그 노복은 새우등같이 허리를 굽히고 잔걸음으로 나와서는 황약사를 향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토해냈다. 아마도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 같았다.

"내 서재와 침실에 사람을 들여놓는 놈이 이 다음 나쁜 놈이 와서 칼로 위협하면 무슨 짓을 못할까? 내 집에 들여놓는 건 물론이고 나를 독살하라면 독살까지 할 것이다. 너같이 간악한 놈을 내가 살려 두어 어디다 써 먹겠느냐?"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자갈 두 개가 튕겨 나와 벙어리 노복의 눈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벙어리 노복은 몸서리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황약사가 튕긴 자갈은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벙어리 노복의 눈을 꿰뚫고 들어가 골 속에 틀어 박혔던 것이다.

황약사가 이렇듯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매초풍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벙어리 노복이 저런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초풍은 벙어리 노복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진현풍은 진현풍대로 매초풍의 거동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대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사부님 앞에서 안절부절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는 게 평소의 매초풍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던 것이다.

"현풍과 초풍은 듣거라. 내 명이 없이는 누구도 내 서재와 침실을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정중히 대답했다.

어느 날, 바다에 배 두 척이 갑자기 나타났다.

모두 튼튼하고 큰 배들인데 돛대를 높이 올리고 도화도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을 본 진현풍은 나는 듯이 집으로 돌아와서 황약사에게 알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황약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진현풍과 매초풍을 앞세우고 바닷가로 나갔다. 배가 서서히 기슭에 닿자 닻이 내려졌다. 한 사람이 뱃머리로 걸어 나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가 도화도입니까?"

"그렇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평소 외지 사람이 오는 것을 보기가 극히 드물었던지라 진현풍은 공연히 기쁜 마음이 앞섰다.

"태호 귀운장 무학 후배인 육승룡 등이 황 선배님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매초풍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생긴 걸 봐서는 우리 사부님보다 젊지 않은데 왜 무학 후배로 자칭할까? 우리 사부님의 명성이 강호에 크게 났기 때문일까? 그런데 우리 사부님을 만나려는 이유는 뭐지? 사부님더러 자기네 원수를 갚아 달라고 모시러 온 걸까?'

잠시 후 세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그들 육승룡, 무천웅, 곡영소는 황약사 앞에 이르러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세 분은 무슨 연고로 이런 큰 예를 차리시오?"

황약사가 물었다.

"우리 형제 셋은 강호에서 몇 년 무공을 배우기는 하였습니다만 도주 선배님의 무공을 보고서야 그 몇 년 배운 것이 아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 선배님을 찾아왔으니 아무쪼록 이 천한 것들을 선배님께서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옥승룡의 말이었다.

"말씀이 너무 과하시구려, 나와 여러분은 우연히 태호의 싸움에서 단 한 번 손을 잡은 적이 있을 뿐이오. 그때 나를 도와준 은정을 생각해서 세 분을 도화도에 모시겠으니 며칠 동안 섬 구경이나 하시며 이야기나 나누다가 돌아가시오."

황약사는 담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뜻인즉, 육승룡 일행과는 사제지간의 연분이 없으니 그런 마음은 아예 먹지도 말고 그저 섬에서 며칠 묵기나 하다가 가라는 것이었다.

육승룡과 곡영소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뭔가 할말이 있으나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세 분께선 달리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하속을 따라 섬 구경이나 하시오. 난 일이 있어 들어가 봐야겠소."

황약사의 말에 육승룡은 곡영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과연 홍칠 선배님의 말이 맞긴 맞군 그려."

황약사는 가려다가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홍칠공이 뭐 어쨌다는 거요?"

"우리가 태호에서 홍칠 선배님을 만났댔는데 홍칠 선배님 말씀이, 도화도 무공이 천하 제일인 것은 아니니 도화도로 가지 말라더군요. 그러면서 우리가 가도 헛고생만 하지 선배님이 우리를 받아 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시면서……."

육승룡의 대답에 황약사는 덤덤한 어조로 한마디했다.

"그래?"

"그리고 천하에 가장 센 것이 자기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라면서……."

황약사의 얼굴에 대뜸 노기가 어렸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이런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제깐 놈이 감히 내 무공을 얕잡아 봐?'

하지만 속이 깊은 황약사는 분노를 잠시 눌러앉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그런데 난 어째서 그런 말을 못 들었을까?"

그 말에 육승룡과 곡영소는, 황약사가 드디어 자신들의 꾀에 걸려든다고 생각하여 내심 기뻐하였다.

"홍칠공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린 황 도주님만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천리 뱃길을 멀다 않고 이렇게 도화도로 찾아왔습니다."

육승룡의 말에 황약사가 물었다.

"왜 홍칠공을 찾아가지 않고?"

셋은 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대답했다.

"홍칠공께서는 자기네 개방의 절기는 외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도화도 절기는 외인에게 전수하는 것으로 알았나?"

황약사의 말엔 가시가 돋쳤다.

셋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들이 황약사를 찾아온 것은 홍칠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홍칠공 운운한 것은 순전히 황약사를 자극하여 자기네를 제자로 받아 들이게 하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그런데 황약사가 이에 걸려들지 않고 냉정하게 나오자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섬에 올라가 기회를 봐서 황약사에게 또 사정해 보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떠나가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곡영소가 갑자기 소리쳤다.

"황 도주님, 잠깐 내 말 좀 들으십시오!"

황약사는 서서히 몸을 돌려 매섭게 쳐다보았다.

"내 뜻을 이미 분명히 말했거늘 또 무슨 할말이 있소? 다른 말이 없으면 난 가겠소."

곡영소는 황약사의 매서운 눈초리에 겁이 났으나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선배님의 구명지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황약사는 헛기침을 했다.

"저희 형제 셋은 도주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여기까지 왔지만 도주님께서 한사코 마다하시니 섭섭해도 하는 수 없군요. 그러나 저희들 배에 도주님과 가까운 분 한 분이 동승하여 오셨으니 도주님께서 한 번 만나보시지 않으시겠는지요?"

곡영소는 말을 마치고는 배를 향해 휘파람을 획 불었다. 그러자 한 여인이 뱃머리에 나와 서며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이 뛰었다. 그 여인의 모습은 아형과 너무도 흡사했던 것이다.

여인은 배에서 사뿐사뿐 내려왔다. 그녀는 사람들과 가까워지자 황약사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여러 번 저를 구해 준 공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약사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의 차갑고도 사나운 기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곁에서 지켜 보고 있던 매초풍은 짚이는 바가 있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틀림없이 그 그림 속의 여인이야. 예쁜 눈동자도 그렇고 줄곧 웃는 것 같던 저 입매도 그렇고…… 이제 보니 사부님은 이미 마음속에 그리는 여인이 있은 지 오래였구나.'

이때 황약사가 읍을 하며 말했다.

"육 장주께서 아형 낭자를 모셔 와 줘서 정말 고맙소. 자, 모두들 어서 제집으로 갑시다."

황약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앞장서 걸어갔다. 몇 발자국 걷다가 그는 매초풍을 향해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매초풍은 냉큼 황약사에게로 다가갔다. 황약사는 귓속말로 분부했다.

"어서 내 방에 가서 그 그림을 때어 내 어디 깊숙이 잘 두도록 해라."

매초풍은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나는 듯이 뛰어갔다.

아형은 황약사 뒤에서 빙긋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황약사는 마음속에 할말이 수두룩하였으나 어쩐지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둘은 복숭아꽃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 섬에 만개한 복숭아 꽃! 복숭아꽃처럼 아리따운 아형의 얼굴!

"아형 낭자, 그 사이…… 무고, 무고하셨소?"

드디어 황약사가 한마디했다.

정다운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길에 아형은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황 공자님도 그간 편안……."

아형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말없이 눈길만 주고받았다. 그동안의 그 파란만장했던 일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황약사를 따라 서재에 들어간 아형은 가슴이 뛰었다. 창 너머 바라보이는 복숭아꽃밭,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서 출렁이는 푸르른 바닷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서재는 조용했다. 황약사는 아형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하인을 불러 차를 따르게 했다. 노복 하나가 정교한 찻잔을 들고 들어왔는데 유명한 경덕진(景德鎭)에서 나는 무의 있는 사기 찻잔이었고 차도 '천목우첨 (天目雨尖)'이라고 하는 고급차였다.

벙어리 노복이 차를 따르려고 하자 아형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무어 그리 우습소?"

황약사가 이상한 듯 물었다.

"이렇듯 좋은 찻잔에, 게다가 이렇게 좋은 차를 하필이면 왜 저런 노복을 시켜 따르게 하십니까? 황 공자님네는 시녀가 없나요?"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웃었다.

"사실 말이지, 우리 섬엔 몇십 년 동안 여성이라고는 저희 어머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최근에 내가 여자애 하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긴 하였습니다만……"

그 말에 아형은 적이 놀라며 벙어리 노복에게 말했다.

"그만두고 나가요. 내가 직접 따를게요."

그러나 말을 듣지 못하는 벙어리 노복은 그냥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는데 찻물이 튀어 찻잔 밖으로 흘러 나왔다. 벙어리 노복은 기겁하여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아진 황약사는 벙어리 노복을 나무라기는커녕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벙어리 노 복은 이 웃음에 가슴이 섬뜩하여 주전자를 놓고 덜컥 무릎을 꿇으며 황약사에게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그제야 아형은 이 노복이 벙어리인 줄을 깨닫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노복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런 불구의 몸으로 와서 차를 따르니 내 마음이 불안하군요. 여긴 걱정 말고 나가 보도록 해요."

그러나 노복은 황약사의 눈치만 살필 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갑자기 험상궂은 낯으로 소리쳤다.

"어서 물러가지 못해!"

황약사가 화를 내자 노복은 오히려 기뻐하며 몇 번 굽신거리고는 냉큼 일어나 달려 나갔다.

아형이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황약사가 대답했다.

"아형 낭자는 모를 겁니다만, 우리 도화도는 아버지가 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일가친척 외에는 여성이 없었지요. 도화도의 노복들은 모두 아버지나 내가 중원에 가서 못된 짓을 일삼는 놈들만 잡아 다가 귀를 멀게 하고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어 데리고 온 놈들입니다. 방금 낭자가 본 그 놈도 강남 건강부에서 잡아온 강호의 악한인데 대력 허패라고 합니다."

아형은 황약사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허허 웃더니 책을 한 권 꺼내 보였다.

"이것 보시오!"

아형은 대력 허패의 죄상을 쓴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대력 허패가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을 한 죄상이 낱낱이 적혀 있었는데 그의 이름 아래에는 굵게 쳐진 밑줄과 함께 '차(茶)'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대력 허패란 놈은 사람을 무수히 죽였소. 강남에서 소문난 악한이었지요. 난 그 놈을 잡아다가 꽃을 가꾸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차에 대해 퍽이나 조예가 있더군요. 그래 서재에 불러다가 차심부름을 시키지요."

황약사의 말을 듣는 동안 아형의 심정은 착잡해졌다. 당당하고 깔끔한 인품의 공자로만 알았던 황약사가 이렇듯 사람 죽이기를 식은 죽 먹듯하고,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귀머거리, 벙어리로 만들어 노복으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형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겪은 터라 간악한 무리들이 있으면 선량한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는 섭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황약사처럼 세상의 관악한 자들을 잡아다가 죽

여 버리는 것도 선량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형 낭자, 이렇게 오신 김에 오래오래 놀다 가십시오."

황약사의 말에 아형은 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 이젠 호심장에 집도 없어지고 부리던 계집애도 죽었어요. 저 혼자 그 호심장으로 돌아가서 뭘 하겠어요? 어디서든 머물 수만 있다면 그로써 족하지요."

아형은 말을 마치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황약사가 다시 말했다.

"아형 낭자, 그러면 이 섬에서 아예 사시지요. 온 섬에 만개한 복숭아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곳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정토입니다. 이런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요. 이렇듯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은 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섬엔 외인이 오래 머물 수가 없고 여인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율이 있다 하니 어쩌겠어요. 저도 육 장주님을 따라 돌아가야지요.

황약사는 자신의 심정을 몰라주는 아형을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 보았다. 아형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아형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기를 떠보고 있음을 깨달은 황약사는 탁자를 탁 쳤다.

"율은 무슨 율이오? 아형, 근심 말고 여기 있으시오. 일년이고 이 년이고 얼마든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시오. 아 염려할 것은 없소."

황약사는 몹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이때 창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황약사가 나는 듯 창가로가 내다보니 남녀 둘이서 소리내어 웃으며 손을 잡고 달아나고 있었다.

"율은 무슨 율이오? 얼마든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시오……."

멀어지는 두 사람으로부터 황약사를 흉내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진현풍과 매초풍이었다.

황약사는 대청에 나가 앉았다.

그의 뒤에는 벙어리 노복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좌우에는 진현풍과 매초풍이 서 있었다.

"육 장주님을 모셔 들여라."

황약사가 분부했다.

육승룡과 곡영소, 그리고 무천웅 세 사람은 황약사가 축객령(逐客令)을 내리려는 줄 알고 좋지 않은 기색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상황이 좀 달랐다. 앞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한 의자에 황약사가 앉아 있었고 다른 한 의자는 비어 있었다.

셋의 태도가 냉담하고 말도 없이 읍도 하지 않는 것을 본 황약사는 또다시 분부했다.

"이젠 아형 아가씨를 모셔 들여라."

"네."

매초풍이 얼른 대답하고는 나는 듯이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아형을 데리고 나와 의자에 앉혔다.

육승룡네 셋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물끄러미 황약사만 쳐다보았다.

"육 장주, 배에 따라온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배를 몰고 돌아갈 수 있소?"

황약사가 문득 물었다.

셋은 그만 속이 뒤틀렸다. 그들은 황약사가 자기들 셋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싫어서 돌려보내지도 않고 그냥 억류시키려는 것만 같이 여겨졌다. 황약사가 무슨 일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셋은 겁이 났다. 황약사가 그들 셋을 남겨 앞의 벙어리 노복 같은 노복을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곡영소가 황약사에게 허리를 굽히며 한마디 했다.

"황 도주님, 우린 도화도에 있는 율을 모르고 일편단심 도주님을 사부님으로 모셔 보고자 온 몸들입니다. 더불어 아형 아가씨도 모시고 와서 공자님과 만나게 해드리려는 뜻도 있었구요. 속언에 '부지자부죄(不知者不罪)'라 하였거늘 황 도주님께선 부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미 급한 무천웅도 소리쳤다.

"황약사 어른, 우리를 제자로 받기 싫으면 놓아주면 그만이지 해코지할 건 뭐요? 그리고 아형 아가씨도 이 섬에 여인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율을 모르고 온 건데, 나 참, 그 무슨 개떡 같은 율이 다 있소? 여인들의 출입을 막는 율이 있는데 어떻게 제자는 여자를 두었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약사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셋을 바라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가 웃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승룡이, 자네들 셋이 태호 귀운장에서 여기까지 천리 뱃길을 멀다 않고 오로지 나 황약사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왔단 말이지?"

셋은 그 말에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중 눈치가 가장 빠른 곡영소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 곡영소 인사 올립니다."

육승룡도 꿇어 엎디었다.

그런데 무천웅은 아직도 눈치를 모르고 투덜댔다.

"우리가 싫다는데 자꾸 절은 해서 뭐해?"

곡영소가 얼른 소매를 당겨 그도 무릎 꿇게 했다.

"승룡이, 자네들을 제자로 삼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아형 아가씨의 덕일 줄 알게. 그러니 절은 나한테 할 게 아니라 아형 아가씨에게 해야지."

황약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셋은 또 부랴부랴 아형에게 절을 올렸다.

아형은 당황하여 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니깐요."

"감사합니다, 아형 아가씨."

셋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가씨가 뭐야?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야지.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요."

매초풍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황약사는 매초풍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겨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나이가 많지만 내 문하에 늦게 들어왔으니 현풍과 초풍을 사형으로 모셔야 하네. 그리고 자네들 이름도 듣기 좋고 기억하기도 좋게 승풍, 영풍, 천중으로 고치는 게 좋겠네,"

"당장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셋은 너무나 기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제23장 결혼

천하 무림의 종사(宗師)들인 남제 대리 황제 단지흥, 북개 방주 홍칠,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 서독 백타산군 구양봉, 그리고 종남산 전진교 교주인 왕중양, 이 몇은 약속대로 화산에 모여 무예를 겨루게 되었다. 그 장면과 상황이 정채 절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는데, 모두 《구음진경》을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였으나 결국은 허사가 되고 《구음진경》은 여전히 중신통(中神通) 왕중양이 보관하게 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같이 앙앙불락이었다.

"왕중양의 실력을 난 인정할 수 없소. 왕중양은 오로지 《구음진경》의 덕으로 이긴 셈이오. 화산 무예 시합을 다시 한 번 열어 제대로 싸워 봅시다."

서독 구양봉이 약이 올라 발을 굴렀다.

왕중양은 조용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단지흥은 중얼중얼 염불을 하고는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가볍게 떠나갔다. 그런가 하면 홍칠은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술만 벌컥벌컥 마셔 댔고 동사 황약사는 《구음진경》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을 한탄했다. 이번에 그 신기한 책을 구경도 못했으니 몇십 년 뒤에야 비로소 기회가 오게 될 것이다. 황약사는 생각할수록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들 넷은 확실히 왕중양보다 무공이 부족했다.

과거에 황약사는 왕중양에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최고의 승리자는 《구음진경》을 자기가 가지고, 제2의 승리자는 《구음진경》을 한 달 남짓 빌려 보고, 마지막엔 며칠만이라도 빌려 볼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황약사 생각으로는 설사 자기가 제1의 승리자는 못 되더라도 두 번째는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산 무예 시합에서 왕중양은 상대방 넷을 단번에 일 같지도 않게 꺼꾸러뜨려 버렸으니 황약사는 《구음진경》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할 주제가 못 되었다.

황약사가 비통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조용히 지켜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구음진경》은 잃었지만 그 대신 당신을 얻었으니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소."

황약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아형을 바라보다가 아형의 손목을 잡고 산을 내려왔다.

"난 말이오, 마음이 헤퍼서 한 가지 일을 계속 속에 두고 있는 법이 좀처럼 없소. 이번에 왕중양에게 졌는데, 난 내 실력이 부족해서임을 진정으로 자인하고 있소. 어쩌면 《구음진경》을 못 가진 게 차라리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그것을 얻었으면 매일 밤낮 그것만 들여다보느라고 당신과 말할 새도 없을 테니까……."

황약사의 말에 아형은 눈을 곱게 흘기며 웃었다.

"내가 그러시도록 가만 놓아둘 것 같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황약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황약사는 아형을 데리고 중원과 북국, 그리고 변강 여러 곳의 명승 고적들을 두루 편답하며 돌아다녔다. 아형과 함께라서인지 피곤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황약사는 《구음진경》에 대해서는 아예 까마득히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화산의 싸움이 있은 지도 어느덧 일년 세월이 흘렀다.

대협객 왕중양은 지난해 《구음진경》을 다투던 싸움에서 승리한 후로 무림의 제일인자라는 명호를 얻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울적하기만 했다. 그는 평소 국사(國事)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밤마다 그는 육방옹(陸放翁)의 〈시아(示兒)〉와 악소보(岳少保)의 〈만강홍(滿江紅)〉을 속으로 외우면서 나라의 운명을 애통해 했다. 자기의 평생의 뜻을 풀어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고 자기와 임조영이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사로 갈라지게 된 것이 서럽기

만 했다.

그의 울적한 심기는 쌓이고 쌓여 끝내는 병이 되어 드러눕게 되었고 결국엔 구 양봉과의 싸움 끝에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임종시 왕중양은 노완동(老項童) 주백통에게 《구음진경》 상·하권을 나누어서 각각 따로 보관할 것을 부탁했다. 그래야 상·하 두권의 《구음진경》이 모두 간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완동은 사형의 유언대로 《구음진경》 상권은 한 곳에 깊숙이 감추어 놓고 하권만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적당한 비밀장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 주백통은 아이들처럼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성미로 종이를 잔뜩 접어 놓고는 제비뽑기를 했다.

"사형께서 보우하소서. 좋은 고장이 잡히게 보우하소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제비를 밥아 펼쳤다. 종이쪽지에는 '안탕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백통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 좋아. 안탕산도 좋지. 안탕산은 내가 한 번도 못 가 본 산이거든 듣건대 봉우리마다 서로 형국이 달라 천자만태 경승이라더라. 가 보자, 어서 가 보자. 이럴 때 못 가 보면 평생의 한이 되리."

주백통은 《구음진경》 하권을 품에 깊숙이 간직하고 안탕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때마침 황약사와 아형도 안탕산에 와 머물고 있었다. 그날따라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둘은 산등성이에 올라앉아 안탕산의 밤 경치를 구경했다. 기실 이것은 아형의 의사를 따른 것이었다. 달빛 아래서 안탕산의 풍경을 구경하면 대단히 멋질 것이니 안탕산 야경을 보러 가자고 아형이 졸랐던 것이다. 황약사는 아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안탕산에 오르자 두 사람은 적당한 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주앉았다. 한참 동안 타오르는 모닥불만 바라보던 아형이 입을 열었다.

"안탕산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지네요. 푸르른 산봉우리는 암만 세월이 흘러도 저렇듯 변함없이 웅위로운데 인간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을 맺잖아요?"

아형은 말소리는 아주 처량했다.

황약사는 아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은 마오. 쓸쓸한 생각을 품으면 쉽게 늙는다오. 즐거운 마음으로 기분좋게 살아야지.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황약사를 욕하고 미워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소. 내게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또 없었소. 난 당신을 아내로 삼고 도화도에 돌아가서 이젠 편안한 세월을 보내고 싶소. 이젠 나도 결심했소. 그까짓 《구음진경》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당신과 같이 흥이 나면 시를 읊고 심심하

면 칼춤이나 추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작정이오. 당신 생각은 어떻소?"

아형은 말없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아형의 어깨에 올린 황약사의 손이 긴장한 듯 가볍게 떨렸다. 아형이 자기의 청혼을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황약사를 지배했다.

아형은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어깨에 올려 놓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말했다.

"마음 상했다면 용서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바보 같은 소리를……."

아형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비친 해맑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함빡 피어나고 있었다.

"바보는 왜 바보예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인데……."

아형이 속살거리듯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소. 당신과 앉으면 난 꼭 바보가 돼 버리는 것 같다니깐?"

황약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형은 슬며시 황약사의 두 손을 잡아 쥐었다.

"남들이 당신을 무어라고 욕하든 난 개의치 않아요. 동사라고 부르면 어떻고 서사라고 부르면 어때요? 당신 마음이 중요하지. 당신네 무림 종사 다섯이 모두 신통하다고 뭐 중신통(中神通), 남신통, 북신통, 동신통, 서신통, 이렇게 불러 줄 것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죠?"

아형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산천명월도 취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황약사도 아형의 웃음에 취하여 넋을 잃었다.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슬며시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들 당신을 동사라고 하지만 내 보기엔 아직도 사(邪)가 모자라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황약사가 묻자 아형은 문득 수줍은 얼굴이 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도화도에 돌아가서……. 오늘 밤을 그냥 보내면 난 당신과 다시는 같이 안 있겠어요."

그 말에 황약사는 기뻐 튕겨 일어났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소?"

그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말 이 동사 황약사는 바보요. 아형보다도 용기가 없으니 바보 중의 바보지. 그런데도 날보고 황 약사라고?"

황약사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부랴부랴 돌 세 개를 주워다가 앞에 놓고 또 나뭇가지 아홉 개를 꺾어다가 돌 앞에 차례로 꽂았다.

아형은 한편에 서서 황약사의 하는 양을 보며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일이 끝난 황약사는 아형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제 우리 둘이 맞절만 올리면 부부가 되는 거지?"

"돌은 하나면 되는데 뭐하러 세 개씩이나 갖다 왔어요?"

아형이 돌 세 개를 보고 입을 싸쥐며 웃었다.

"허, 그런 게 아니라네. 왜 꼭 세 개여야 하는가 하면…… 어디 당신이 맞혀 보구려."

황약사는 웃으며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아형은 황약사의 손목을 끌고 돌 앞에 다가가서 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금생(今生)·내세(來世)·재생(再生)! 이런 뜻이桑? 누가 모를 줄 알고?"

황약사는 아형을 와락 껴안았다.

"맞소, 맞아! 역시 아형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구려. 이 동사 황약사한텐 이제 아형밖엔 없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물이지."

물같이 부드러운 달빛이 안탕산을 적셨다.

"뭇산은 화촉이 되어 경사스러운 이 밤 내 신부를 비춰 주고……."

황약사가 감격한 어조로 시 한 구절을 자작하여 읊조리자 아형도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수목은 빗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내 신랑의 머리를 빗겨 주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백년해로의 깊은 가약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호심장에서 만났을 때 낭군님은 우리에게 이런 연분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셨나요?"

황약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아형을 그리워했는지, 아형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을 태웠는지 그녀는 짐작도 못할 것이었다.

"당신네들이 화산에서 살기등등해 싸우고 있을 때 난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요. 내가 당신과 같이 있어야 당신이 그런 싸움을 그만두고 남한테도…… 그래서 그때 난……."

황약사는 아형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말이지 황약사가 아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 사이에 이렇듯 살뜰한 정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베풀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자기를 살뜰하게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의 마음도 그렇듯 다감해 짐을 느꼈다. 그만큼 황약사는 심경이 부드러워지고 즐거워졌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까짓 《구음진경》 같은 건 이젠 생각도 하지 않겠소. 내겐 이제 당신밖에는 아 필요 없소."

"그 《구음진경》이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그 야단들인가요?"

아형이 물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깊고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왕중양의 무공은 확실히 대단하오. 우리 몇은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하지. 실제 겨루어 봐도 그렇지만 무공을 담론함에도 우린 그를 따를 수가 없었소. 왕중양의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그 《구음진경》에 의한 것이니, 누군들 그 책을 탐내지 않을 수 있겠소. 《구음진경》과 같은 기이한 책은 세상에 또 없을 거요."

"그럼 당신도 한 권 쓰지요, 왜? 활상(黃裳)도 써냈는데 당신은 왜 못 써요? 학식이 그렇게 높은데……."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소?"

아형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세상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자기 낭군이 큰일을 하기를 원하는 법이에요. 나도 그렇죠, 난 당신이 꼭 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럼 나도 써 보지. 나도 써낼 거요. 당신을 위하여 고금에 없는 무학 기서를 내 꼭 써낼 테요. 당신이 보고 놀라게끔."

황약사는 다짐하듯 말했다.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당신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이때였다. 누군가가 앵무새처럼 아형의 말을 흉내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둘은 놀라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황약사가 낯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 처의 말을 흉내내는 거냐?"

그러자 목소리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이번에는 황약사의 말을 흉내냈다. 그는 '내 처'라는 부분에서 어색한지 말을 더듬었는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음성이었다.

황약사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노완동이구만! 필시 노완동 주백통이 틀림없어!"

"노완동 주백통이라니? 노완동 주백통이 누구요? 난 당신과는 생면부지인데."

"생면부지? 노완동 주백통이 나하고 생면부지라고? 장난 그만치고 어서 나오게."

황약사가 웃자 아형도 따라 웃었다.

"맞아요. 틀림없는 노완동이에요."

그러자 상대방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참 답답하군. 내가 노완동 주……주 뭐라던가? 주……주백통이 아니라는데 왜들 저러지? 난 큰 바보 황약사란 사람인데."

그러더니 수림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우거지상을 하고 서 있는 그를 보고 아형은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주백통도 히죽 웃었다.

"아형 아가씨, 웃긴 왜 웃소?"

"아형 아가씨가 뭔가? 우린 부부야. 그러니 형수님이라고 하든가 그것이 싫으면 아주머니라고 불러. 알겠나?"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주백통은 그 말에 아주 놀라는 척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형을 보더니 낮게 소곤거렸다.

"아형 아가씨, 정말 황약사와 성혼을 했수?"

아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백통이 떠들었다.

"아이고, 이거 기가 막혀 죽을 일이네. 기막혀 죽을 일이지."

"기막혀 죽다니요?"

아형이 묻자 주백통이 대꾸했다.

"아니, 이게 기막혀 죽을 일이 아니고 뭐요? 이렇게 총명한 아형 아가씨가 시집을 가다니? 시집은 왜 가요? 시집을 안 가야 아형 아가씨란 말을 들을 건데, 아, 형, 아, 가, 씨! 봐요, 얼마나 듣기 좋은가? 그런데 이젠 아가씨란 말은 다 듣게 되잖았수? 이제부터는 아주머니 소릴 듣게 되었으니 이거야 기막힐 일이 아니우. 아주머니가 뭐요, 아주머니가? 게다가 세상에 하고많은 남정네들 중에 왜 하필 황약사요? 이런 사람이 뭐 좋다고 이 사람의 부인이 된단 말이오?

기가 막혀 죽을 일이지,"

노완동 주백통이 너스레를 떨자 황약사와 아형은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주백통은 계속 떠들어댔다.

"황약사, 난 당신을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 봤는데 그게 아니구만? 혼인은 왜 한단 말이우? 처자식이 딸리면 공연히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다구? 무공 수련도 전념할 수가 없을 뿐더러 어딜 가든 성가시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그런 골칫거리 혹덩이를 뭣 땜에 만들어?"

"노완동, 자네같이 늙은 총각 놈은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만 떠들게. 혼인해서 좋은 점을 자네가 어찌 알겠나?"

황약사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혼인하면 좋은 점이라? 그러니까,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이불 덮어 주는 사람이 있어 좋은 건가?"

그 말에 아형이 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백통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 아내 웃는 태깔이 곱수. 아무튼 아내를 얻으려면 저 아가씨같이 잘 웃는 여자를 얻어야지, 밤낮 얼굴이 고양이 낙태상이 되어 바가지만 긁는 여자를 얻었다간 평생 고생이지. 그랬다간 나 같은건 하루도 못살아. 암, 하루도 못살지."

황약사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아형을 돌아보았다.

'아형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할 거야.'

황약사는 주백통을 앉히고서 술을 권했다.

"노완동, 이 사람. 안탕산은 왜 왔나?"

황약사가 물었다.

"왕중양 형님이 세상을 떴수."

약지 못한 주백통이 곧이곧대로 말하고는 입귀를 비죽거리며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황약사는 너무도 놀라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내가 뭣 땜에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

주백통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황약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황약사의 심경을 헤아린 아형은 말이 없었으나 주백통은 무척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중양이 살아 있을 때는 그와 싸우지 못해서 야단이던 황약사가 왜 왕중양이 저 세상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양이 쥐 생각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왕중양이 갔으니 내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꼬?"

황약사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길게 탄식했다.

노완동 주백통은 황약사의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만 들렸다.

'왕중양 형님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이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우리 사형이 뭐 자기 말동무인가? 말동무야 나도 해줄 수 있고 혼인할 저 낭자도 해줄 수 있는 일, 말동무해 줄 사람이야 세상 천지에 쌔고 쌨는데 무슨 걱정이야?'

황약사는 비통한 어조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안탕산 봉우리 봉마다 아름답지만

천하엔 그래도 중양이 제일 높거늘

중양이 없는 날 안탕의 산봉우리도 몇천 길 낮아지네.

'정말 황약사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골라 하는군. 우리 왕중양 형님이 없다고 해서 무슨 안탕산이 몇천 길 낮아질까? '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왕중양이 자기에게 베푼 은정들이 떠올라 그만 목이 메어 흑흑 흐느꼈다.

"노완동, 형님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세상을 하직하시게 되었나?"

황약사가 묻자 주백통은 또 울음이 북받쳐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만에야 그는 사형 왕중양이 죽은 척하여 구양봉을 속였다가 그를 물리친 과정을 죽 이야기했다.

"오라, 그러고 보니 자넨 그 《구음진경》을 감추려고 안탕산에 온 모양이군?"

황약사가 불쑥 내뱉는 말에 주백통은 아차 싶었다.

'내가 그만 실언을 했구나.'

그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오. 난 안탕산이 좋다기에 구경을 왔을 뿐이오."

황약사와 아형은 주백통을 보며 조용히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주백통은 속이 켕겼다.

"《구음진경》이 나한테 있기는 있지. 하지만 남에게 절대 보이지 말라는 우리 형님의 유언이 있었소."

"《구음진경》이란 말은 저도 귀가 닳도록 들었어요. 가지고 계시면 어디 한 번만 좀 보여 줘요. 저도 구경이나 좀 하게."

아형이 주백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주백통은 급히 도리질을 했다.

"안 돼요, 안 돼.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황약사와 결혼을 안 했으면 혹시 보여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아가씨가 보면 황 약사라고 모를 리가 있소?"

"전 그저 호기심이 나서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다섯 무림 종사들이 그 책을 갖겠다고 화산 꼭대기 얼음판에서 죽기살기로 싸움질을 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아형이 웃으며 하는 말에 주백통은 우쭐해서 말했다.

"책이야 물론 좋은 책이지요. 왕중양 형님의 말씀대로라면 그 용처가 무궁무진한 책이지요. 아가씨는 무공을 모르니깐 말씀드려도 모를 거요."

"백통이, 우리 안사람은 정말 무공이란 하나도 모르네. 젊은 나이에 호기심이 부쩍 동하여 그러니 한 번 구경이나 시켜 주게. 얼핏 구경하는 정도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난 절대 보지 않을 테니까. 이 황약사 눈길이 그 책에 한 번만 가도 자네한테 내 눈알을 뽑아 주지."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황약사로 말하면 당세에 으뜸가는 무림의 고수인데 설마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그러나 주백통은 곧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아니야. 이 책은 극히 중요한 책이다. 황약사 말에 넘어가서는 안 돼…….'

주백통이 한사코 거절하자 황약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의 입장이야 나도 충분히 이해하네만, 내 안사람에게 얼핏 구경만 시켜 줘도 이 황약사가 자네네 전진교파에게 일후 꼭 보답을 할 텐데 정 보여 줄 수 없다면야 하는 수 없지. 오늘은 나와 자네의 우정을 봐서라도 물러서는 수밖엔 없지만 그러나 알아두게. 이제부터 나는 자네 외의 전진교 사람들은 본 적이 없으니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하진 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주백통은 등골이 오싹해 짐을 느꼈다.

'동사 황약사는 사악하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황약사의 지금 말은 그 뜻이 분명하다. 나 노완동한테는 손을 쓸 수 없지만 전진교 제자들인 마옥이나 구처기한테는 사정을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약사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다. 이 황약사가 중양궁에 들어가 좌충우돌 때려부수면 마옥이나 구처기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

이쯤 생각이 미친 주백통은 황약사를 달랬다.

"황약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나 노완동하고 해결해야지 애매한 우리 사제들을 들먹일 거야 없지 않소?"

아형은 주백통이 자칭 노완동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워 킥킥거렸다. '노완동'이란 말에는 늙은 개구장이란 뜻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다.

"스스로 자기를 노완동이라네? 정말 그런 늙은 개구장이라면 우리 한번 애들처럼 장난을 쳐 볼까요? 《구음진경》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말예요."

그리고는 황약사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은 그 구양씨라는 사람이 가져간 모양이에요. 주백통 어른께서 내놓지 못하는 걸 봐요. 그러니 체면 없이 자꾸 괴롭히지 마세요."

"하긴 그래. 백통이, 나하고 같이 서독 구양봉을 찾아가 볼까? 자네 혼자 힘으로는 구양봉을 당해 내지 못할 테니까."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고지식한 주백통은 솔직히 말했다.

"《구음진경》이 나한테 있기는 하오. 아주머니한테만 보이는 건 무방한 일이지만,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는군. 어디 우리 둘 중 누가 센가 한번 겨루어 볼까?"

황약사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노완동과 무공을 겨루다가는 의가 상하기 쉬우니깐 그건 그만둡세. 자네는 노완동, 늙은 개구장이니까 우리 어린애들이 노는 내기나 해 보지."

'이 황약사가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걸까? 바닷가에서 사는 친구니까 바다에 관련된 내기를 하면 이 노완동은 영락없이 지고 말거야. '

주백통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형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둘이서 구슬치기를 하면 어때요?"

"구슬치기? 그거 좋겠군. 구슬치기는 이 노완동만큼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테니깐."

주백통은 선뜻 대답했다. 황약사와 시를 한 수 읊는다던가 하는 식의 내기를 하면 꼼짝못하고 지겠지만 그까짓 구슬치기 정도로야 황약사를 못 이기겠나 싶었던 것이다.

"백통 어른, 어른께서 지면 《구음진경》을 나한테 보여 주어야 하고…… 그런데 이 양반이 지면 어떻게 할까요?"

"아니, 전진교에 보물이 있는데 도화도라고 그만한 보물이 없겠소?"

황약사는 냉큼 보따리를 풀어 검은 빛깔의 고슴도치같이 가시투성이인 의복 하나를 꺼내어 돌 위에 놓았다.

"아니 그게 뭐요?"

주백통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이건 도화도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연위갑(軟 甲)이라는 걸세. 날 이기면 가져가게."

"아이고, 그만두시오.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다구."

주백통이 손사래를 쳤다.

"백통인 무공이 절륜하니 이 호신갑(護身甲)이 소용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후에 여완동(女玩童)을 얻어 소완동(小玩童)을 낳으면 쓸 데가 많을 걸세. 소완동에게 이 호신갑을 입혀 보게,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구슬치기에서 내가 지라는 법은 없지. 도화도의 일등 보물을 그리 쉽게 내줄 수는 없으니까."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이 웃으며 받았다.

"그간 여완동이고 뭐고 난 얻지 않을 테니 소완동이라는 것도 생길 리가 없지만 어쨌든 내가 이기면 그건 내 것이 된단 말이지? 무림계에서 그토록 이름난 것이라니 그걸 입고 강호를 다니면서, 이건 내가 도화도 도주 황약사를 이겨 빼앗은 거다, 하고 자랑할만하겠구만. 천하 호걸들이 다 알도록 말이야."

"말로만 하지 말고 어서들 겨루어 보세요. 이기고 지는 거야 겨루어 봐야 아는 거죠."

아형이 웃으며 재촉했다.

그들은 각각 구슬 아홉 개씩을 나눠 가지고 구멍 열여덟 개에 튕겨 넣기로 했는데 구슬 아홉 개를 먼저 튕겨 넣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

"구슬은 나한테 많아. 늘 가지고 다니니깐."

주백통이 말했다.

셋은 구슬치기 하기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옮겼다. 주백통은 발로 땅을 뭉개며 한동안 돌아쳤다. 그러자 땅은 풀 한 포기 걸리지 않게 평평해졌다.

자리를 옮겨 오는 동안 주백통은 아형의 걸음걸이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몸놀림과 걸음걸이만 봐도 무공은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형에게 《구음진경》을 구경시키는 건 그다지 위험스런 일은 아닌 것 같아, 무공을 전혀 모르는 여인이니 《구음진경》을 봐도 소경 경 읽기일 테니까, 황약사는 보고 싶어도 절대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 하지만 그 안타까워하는 꼴을 어떻게 보지? 아내는 소경 경 읽듯 하고 남편은 안타까워 속에 불이 일고. 거 제법 재미나겠는데?'

주백통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이 웃었다.

"아니 백통이,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미친 놈처럼 혼자 시물시물 웃긴 왜 웃어?"

황약사의 물음에 주백통은 급기야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황약사와 주백통이 구슬치기를 하다니, 개구장이들처럼 구슬치기를 하다니 암만 생각해도 우스워서 그러네."

그러면서 주백통은 어떻게 해야 빨리 이길까 머리를 굴렸다. 황약사는 누구보다도 암기를 쓰는 재주가 비상하고 그중에도 손가락으로 튕기는 재주가 뛰어남을 주백통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슬치기는 암기 튕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는 생각했다. 비슷한 점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구슬치기는 아이들 장난이라 그로서의 묘법이 따로 있는 법인 것이다.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며 구멍 열여덟 개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생김새가 밑이 좁고 위가 넓은 반듯한 종지사발

같았다. 그 안에 구슬을 튕겨 넣으려면 힘이 과해도 안 되고 덜해도 안 되었다. 튕겨 들어간 구슬이 그 안에서 정확히 멈추도록 힘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힘이 덜하면 미치지 못할 것이요, 힘이 과하면 구멍 안에 들어갔던 구슬이 도로 튀어나오게 마련이었다.

"자, 어서 먼저 구슬을 골라잡으라구."

주백통은 주머니에서 구슬 열여덟 개를 꺼내 놓았다. 황약사는 웃으면서 아홉 개를 골라 들었다.

"우리 동시에 시작하여 먼저 아홉 알을 다 넣은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는 걸세?"

주백통이 다시 조건을 확인했다.

"물론이지."

황약사가 대답했다.

구슬치기가 시작되자 둘은 동시에 구슬을 튕겨 넣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연거푸 세 개를 튕겼는데 모두 곧바로 적중되어 구멍 안에 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도로 굴러 나오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황약사 너도 곰처럼 둔하구나. 그 구멍에는 튀어나오는 탄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튕겨 넣기만 하면 만사 대길인 줄 아느냐? '

그는 쾌재를 부르며 득의양양 연거푸 다섯 알이나 구멍 안에 집어 넣었다. 던져 넣는 족족 적중하는 주백통의 솜씨에 황약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황약사는 이번엔 구멍에 있는 주백통의 구슬 옆을 겨냥하여 구슬 하나를 탁 튕겼다. 그러자 거기에 맞은 주백통의 구슬은 구멍 한편으로 비켜나고 그 반작용으로 황약사의 것이 구멍안에 남게 되었다. 황약사는 연이어 같은 방법으로 구슬 세 개를 튕겨 넣었다.

그 사이 주백통은 또 하나를 넣었다.

"황약사, 그런다고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헤헤, 난 벌써 여섯 개가 들어갔네. 이제 세 개만 더 넣으면 내가 이기는 거야. 여태까지 세 개밖에 못 넣었으니 아예 손을 들지 그래?"

주백통이 좋아라 떠들었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는 이번엔 더 힘을 주어 주백통의 구슬을 겨냥했다.

"내 구슬을 맞추어 멀리 날려 보낼 셈인가? 그래도 소용이 없네. 자네는 아직 일곱 개나 남았는데 나는 이제 세 개밖에 안 남았다구. 내가 아무리 천천히 튕겨도 이 내기는 내가 이긴 거나 다름없다니깐?"

그런데 황약사가 연이어 튕긴 세 개의 구슬은 주백통의 구슬 세 개를 아예 박살내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황약사의 구슬 세 개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 황약사는 즐거운 낯으로 말했다.

"자, 어떤가? 저렇듯 박살이 나 버렸는데 무슨 수로 아홉 개를 채우겠나?"

황약사는 잽싸게 나머지 구슬을 마저 튕겨 넣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젠 졌지, 주백통?"

"그 따위로 노는 법이 어디 있어? 자기 구멍에 안 넣고 내 구슬을 가루로 만들다니, 이런 반칙이 어딨냐구?"

"어쨌든 우린 분명히 약속했어, 먼저 구슬 아홉 개를 모두 넣는 사람이 이긴다고 했지? 구슬이 가루가 되었든 나한테 빼앗겼든간에 아홉 개를 채워 놓지 못하면 지는 거지,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린가?"

주백통이 생각해 보니 이 황약사가 약은 꾀를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승강이질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하긴 황약사의 그 술수도 재주는 재주였다. 자기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아마 못했을 것이었다. 황약사의 재주에 탄복한 주백통은 아형에게 선선히 말했다.

"아주머니, 약속대로 《구음진경》을 보여 드리지요. 그러나 오늘 해지기 전엔 돌려주셔야 하오."

어느덧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주백통은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형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른께서는 별호가 노완동이지만 생각은 역시 어른이시군요. 내가 이 책을 돌려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신 모양이죠? 염라 마세요. 내가 여기 앉은 자리에서 쭉 보고 당장 돌려 드릴게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옆에 앉아 지키세요."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동사 황 약사라면 몰라도 아형이야 농간을 안 부리겠지. 아형 같은 여인에겐 책을 보여줘도 예상 밖의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공연히 여인들한테 좀스럽다는 말을 듣느니 사나이답게 행동해야지.'

주백통은 드디어 품에서 《구음진경》을 꺼내어 아형에게 주었다. 《구음진경》을 받아 든 아형은 더는 말하지 않고 돌 하나를 깔고 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구음진경》을 아형에게 빌려 주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아형이 하는 품을 계속 힐끔거렸다. 이를 눈치챈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린 술이나 한잔 하세, "

황약사가 술을 권하자 주백통은 술잔을 손에 쥐고도 흘깃흘깃 아형을 살폈다. 혹시 어떤 놈이 불쑥 나타나 책을 앗아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엔 이 세상에 자네와 나를 이길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 같은가?"

"당신 황약사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만 나를 이길 사람이야 당신까지 포함하여 적어도 네댓은 있겠지."

"지나친 과찬이구만. 기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이 넷은 각기 저마다의 장점들이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형편이지. 그런데 구양봉이 자네 사형 왕중양으로 인해 합마공이 여지없이 묵사발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10년 내엔 나를 이기기 어려울 거고, 철장방의 수상표 구천인의 무공도 대단하다고들 하나 어째서인지 이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오지를 않았지. 구천인의 무공이 아무리고 강하다고 해도 짐작컨대 아직까지 정상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쯤 되면

노완동 자네의 무공도 결코 스스로 얕잡아 볼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말한 그 몇을 빼면 자네도 무림의 고수라 이거야. 그러니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천하에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우리 둘만 합치면 무적이고말고."

"그렇다면 안절부절못할 게 뭐야? 우리 둘이 여기서 지키는데 어느 놈이 와서 《구음진경》을 앗아 가겠는가?"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은 마음이 좀 놓였다.

주백통은 술을 마시며 아형을 바라보았다. 아형은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책장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히 읽어 보는 것 같았다. 주백통은 아형의 모양새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 여인은 뭘 알기나 하고 저렇게 세심히 보는 건가? 《구음진경》에 씌어진 것이 무슨 내용인 줄이나 아나?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정묘한 무공을 적은 것인데 무학지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아녀자가 보면 뭘 안다고 저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 거지?'

그러나 아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조급증이 나서 몇 번이나 궁둥이를 들썩였다. 아무튼 해지기 전까지는 돌려 받기로 약속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 번 끝까지 보고 난 아형은 다시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안 되었을 시간이었다. 아형은 드디어 책장을 덮고 주백통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구음진경》을 주백통에게 돌려주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군요. 이건 《구음진경》이 아니에요."

"뭐? 《구음진경》이 아니라구? 분명 사형께서 임종시 나에게 준 경서인데 그럴 리가 있나?"

주백통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예삿일이 아닌 성싶군. 백통이 자네, 《구음진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는가?"

주백통은 망연자실 고개를 저었다.

"어른께선 속으신 거라니깐요? 표지만 비슷하면 뭘 해요? 내용이 딴판인데. 진짜 《구음진경》은 구양봉이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 이건 팔자소관을 보는 복술(卜術)책이에요."

주백통은 반신반의, 말을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르신, 정말 《구음진경》진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세요?"

아형이 물었다.

"《구음진경》이 사형 손에 들어간 다음 누구도 읽어 본 사람이 없어요. 당시 사형은, '내가 이레 낮 이레 밤에 걸쳐 《구음진경》을 독파함은 무림 중의 일대 화액을 방지하고자 함이고 여기에 개인적인 욕심은 절대 없다'고 하셨소. 그리고 전진교 제자들은 누구도 《구음진경》의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주백통의 말에 아형은 감탄하며 말했다.

"왕 진인의 인의지심은 실로 세인이 탄복할 바입니다만 결국 그때문에 남에게 빼앗겼군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이 책을 펼쳐 보세요."

주백통은 주춤거렸다. 문득 옛일이 생각났다.

주백통이 왕중양의 제자가 되려고 왕중양을 찾아가 떼를 쓰다시피 사정하였을 때다. 왕중양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 사이엔 사도(師徒)의 연분도 없거니와 자넨 우리 전진교 계율을 견뎌 내지 못할 사람이네. 하지만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이니 우리 전진교에 와 있으면 우리도 그 복을 받게 될 것이므로 내가 사제로는 삼겠네."

"제가 천하 최고의 무공을 지닌 분을 사부님으로 모시려고 도처를 헤매다가 요행히도 이렇게 뵙게 되었는데, 나를 제자가 아니라 사제로 삼겠다니 웬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주백통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내 사제가 되어야 마옥이나 구처기보다 한 급 높아질 테고, 그러면 그들한테서도 존경을 받고 도사질도 안 하고 아침 조과(早課)에 안 나와도 되는데, 좀 좋은가?"

"좋기는 합니다만 마옥이나 구처기 무공으로야 날 가르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주님께선 저의 사부님이 안 되겠다고 고집이시니 난 누가 가르친단 말입니까?"

이에 왕중양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자네야 내가 가르쳐 주지. 장차 전진교에 일이 없으면 자넨 자기 일만 하면 되네만, 일단 전진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도와 나서야 하네."

"교주님의 무공이 천하 제일인데 내가 도와 나설 게 뭡니까?"

왕중양은 그저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주백통은 이 순간 왕중양의 말이 귀에 울리는 듯하여 가슴이 미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사형의 유언을 저버릴 수는 없소. 난 《구음진경》을 보지 않을테요."

"이건 강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복술책이라는데도 믿질 않으시는군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책이에요. 설령 《구음진경》이라 해도 그래요. 보기만 하고 그 무공을 배우지 않으면 중양진인의 뜻을 어기는 게 아니잖아요?"

아형이 답답한 듯 말했다.

듣고 보니 아형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주백통은 결심을 굳히고 책을 펼쳤다. 몇 장 읽어 나가던 주백통은 기가 막힌 듯 아형을 쳐다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암만 봐도 제반 무공에 대한 수련법과 비결이 적힌 《(구음진경》임에 틀림없는데 이를 보고 복술책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책들은 난 다섯 살 때 벌써 읽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줄 외웠어요. 강남 아이들은 열에 아홉은 다 이런 책들을 외울 줄 알아요. 믿지 못하겠어요? 내가 외워 볼 테니 한번 들어 보실래요?"

아형은 곧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산유수로 외워 내려갔는데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책을 보는 주백통은 등골이 다 서늘했다.

황약사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어디 어른께서 마음대로 아무 갈피나 넘겨서 물어 보세요. 첫 마디만 말해 주면 내가 죽 외워 볼 테니깐요. 원래 어렸을 때 통달한 책은 늙어도 잊지 않는 법이지요."

아형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주백통은 임의로 몇 단락을 짚어 외워 보게 했다. 아형은 정말 얼음판에 썰매 타듯 거침없이 줄줄 외워 내려갔다.

아형이 외우는 것을 듣고 난 황약사는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주백통, 자네는 남한테 속았다니깐?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속았어."

주백통은 그만 화가 솟구쳤다. 그는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책장을 와락 찢어 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책을 찢어 대던 그는 아예 불을 질러 그 조각들을 몽땅 태워 버렸다.

주백통은 아형이 얼마나 놀라운 천재인가를 미처 알지 못했다. 집에 책이 몇 권 없으나 그녀는 이미 아주 많은 책을 독파한 인재였다. 그녀는 책을 한 번만 읽으면 모조리 줄줄 외웠는데 그러면 그 책을 없애 버리곤 했다. 이 《구음진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책을 외운 뒤 주백통에게 복술책이라고 속인 것인데 주백통은 그런 줄은 전혀 모르고 진짜 《구음진경》은 구양봉이 앗아 간 걸로 믿게 된 것이다.

사형이 맡겨 준 《구음진경》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하니 주백통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주백통이 《구음진경》을 찢어 버리리라고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형과 황약사는 찢겨 없어진 책도 아까웠지만 주백통에게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개구장이 같으니라구. 그만 진정하고 이 연위갑이나 가지게."

황약사가 말했다.

여태껏 자기가 황약사의 농간에 우롱당하고 있음은 조금도 모르고 있는 주백통은 황약사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황약사가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선심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위갑은 도화도의 귀중한 보물인데 내가 왜 공연히 그걸 가지겠나?"

주백통은 고집스레 거절했다.

맥이 빠진 그는 한없이 서글퍼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자. 고향에 가서 아무데도 나다니지 말고 새로운 무공을 대여섯 개 더 수련한 뒤 서역에 가 구양봉으로부터 《구음진경》을 찾아오자, 지금은 구양봉의 상대가 안 되니 가 봤자 소용이 없다. 아, 사형이 그토록 신신당부한 것을 지켜 내지 못했으니 살 가치도 없구나…….'

주백통은 아형과 황약사에게 읍하고는 곧장 길을 떠났다.

황약사와 아형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형이 자책하듯 말했다.

"내가 저분을 해쳤어요.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 탓이 아니오. 나쁘기야 이 황약사가 나쁘지. 내가 그렇게 일을 만들었으니깐."

아형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맹세하오. 이 책을 가지게 되었지만 진인 왕중양의 유훈(這訓)은 잊지 않겠소. 이 책의 무공으로 무림 중의 좋은 일을 도모하고 나쁜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소."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슬며시 안기며 말했다.

"황 공자님, 모두들 공자님을 동사라고 하지만 난 공자님을 믿어요.

"낭군님 소리는 어딜 가고 갑자기 호칭이 그게 뭐요? 그럴 바엔 차라리 이름을 부르시오."

황약사가 섭섭하다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그 이름이 뭐 좋다고 불러요? 남들이 들으면 약방의 약사를 부르는 줄로 알 텐데. 거듭 부르면 싸우면서 약 달라는 줄로 알 거구요."

"그런 말 말어. 세상에 내 이름처럼 좋은 이름이 또 어딨다구?"

황약사는 기분이 좋아 허허 웃고는 아형을 번쩍 들어 안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제24장 서글픈 사랑

황약사와 함께 도화도로 돌아온 아형은 《구음진경》 한 권을 전부 묵사(默寫)해 냈다.

황약사는 대단한 일을 해낸 아형이 장하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기억력은 따르지 못할 거요."

"《구음진경》상권만 얻으면 이 책은 완벽해질 거예요."

아형도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상권을 얻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겠소."

황약사가 《구음진경》을 읽어 보니 확실히 그 내용이 심오하고도 광범위했다. 그러나 《구음진경》을 완벽하게 터득하려면 상권을 먼저 읽어야 했다. 수련에 필요한 입문 지식과 법문(法門)이 상권에 있는 모양인데 그것을 모르고서는 《구음진경》하권에 있는 초인간적인 무공들을 습득할 수가 없었다.

"이 《구음진경》하권을 잘 보관해 놓았다가 나중에 상권을 구하면 그때 함께 보고 익혀야겠소."

황약사는 사랑스런 아내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덧 아형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황약사는 매일 아형과 마주앉아 시와 문장을 담론했다.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면서 매일 시를 논하시는군요. 애를 장원 급제라도 시킬 작정이세요?"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장원 급제? 그 따위는 해서 뭘 하오. 사내아이라면 절세의 무공을 지니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여자들이 잘 따른단 말이오."

그러자 아형이 피식 웃었다.

"여자애라면 풍류를 알아야 남자들의 이목을 끌지요."

그렇게 말하는 아형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미화·병묘·치음 삼대 공자는 말할 것 없고 태호방 방주 필소해나 학 영감까지 아형에게 반해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여자는 풍류를 알아야 사내들의 이목을 끈다는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만일 딸을 낳으면 이름을 용아(蓉兒)라고 하는 게 어떻소?"

황약사가 물었다.

"용아요? 무슨 용자인데요? 용이(容易)하다는 용(容)자인가요, 부용(芙蓉)이라는 용(蓉)자인가요?"

"물론 부용이라는 용 자를 써야지. 맑은 물 위에 피어난 부용처럼 예쁘고 총명하라고 말이오. 당신처럼."

두 사람은 정이 가득 담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한편 황약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육승풍 등 세 명은 원래 내공과 외력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자 그 무공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 셋은 황약사를 더욱더 숭배하게 되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의 무공은 그들 세 사람을 따르지 못했지만 황약사는 오히려 이 두사람의 전도가 더 밝다고 말했다. 이들은 나이도 육승풍네보다 어렸고, 전에 무공을 익힌 적이 없었으므로 도화도의 내공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 것이다. 진현풍은 장력 (掌力)을 수련하고 있었으므로 황약사는 그에게 천하장법(天下掌法)을 가르쳤다. 그리고 매초풍은 긴 채찍인 장편(長鞭)을 썼으므로 독룡십팔식 (獨龍十八式)과 기연산 조씨 삼십육편(祁連山趙氏三十六鞭)을 가르쳤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그들의 사제인 육승풍네보다 더욱 열심히 무공을 배웠다. 그들 둘은 건강성 내의 염방사람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무공을 다 익힌 후에 그들을 처참하게 죽일 작정이었다.

어느 날 하루의 수련을 마친 진현풍과 매초풍은 복숭아 나무 아래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현풍은 매초풍과 단둘이 있으면 은근히 겁이 났다. 매초풍의 성미가 점점 더 괴팍해져서 걸핏하면 발칵발칵 성을 내는 통에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쩔쩔 매곤 했다. 언제나처럼 매초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형 생각엔 무림에서 우리 사부님을 이길 사람이 누구 같아요?"

진현풍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이전에는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 했지. 왕중양이 죽은 지금은 나머지 몇의 실력이 사부님과 엇비슷하다더군. 개방 방주 홍칠공, 대리 황제 남제 단지흥, 서독 구양봉, 이들 모두 무림에서는 첫손 꼽히는 고수들이 지."

매초풍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형은 사부님한테 헛 배웠군요. 자기 사부님도 잘 모르면서 나한테 어떻게 사형 노릇을 한단 말이에요? 정말 가소롭군요."

진현풍은 눈을 둥글게 뜨고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서독 구양봉이 독하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사부님보다 독하진 못해요."

진현풍은 깜짝 놀라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사매, 무슨 말을 그렇게……."

진현풍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떨려 나왔다. 이 말이 사부님의 귀에 들어가면 매초풍이 야단맞는 건 물론 자기까지 크게 혼날 것이었다.

"겁낼 필요 없어요. 사형이 한 말도 아니고 내가 한 말인데……. 우리 사부님은 일생 동안 숱한 사람을 죽였는데 한결같이 강호에서 명성 높은 자들이었어요. 사부님이 부리고 있는 노복들을 봐요. 사부님한테 귀가 멀고 혀를 잘려 병신이 되었는데도 제 발로 찾아와 종 노릇을 하고 있잖아요. 그들 모두 옛날에는 강호에서 큰소리치고 다니던 실력자들이었어요. 이것만 봐도 사부님이 구양봉보다 세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진현풍은 머리를 끄덕였다.

매초풍은 계속 종알거렸다.

"북개 홍칠공도 우리 사구님보다 강하지 못해요. 홍칠공이 악인들만 골라 백 명도 넘게 죽였다고 해서 평판이 제일 좋은 모양인데, 사실 백 명이 뭐 그리 대단해요? 우리 사부님은 해마다 중원에서 몇십 명씩 악인들을 잡아 오는데, 홍칠공은 악인들을 그냥 죽여 버리지만 우리 사부님은 병신을 만들어 한평생 고생을 하다가 죽게 하잖아요."

"글쎄, 이치가 있는 말이긴 한데……"

진현풍이 수긍하자 매초풍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남제 단지흥과 비교해도 사부님이 못할 게 없죠. 이름은 무슨 제왕이나 황제 같지만 문무도략(文武稻略)이나 기문술수(奇門術數)로 말하자면 우리 사부님도 무소부지(無所不知), 무소불통(無所不通)이거든요. 우리 사부님이 생각이 없으니 그렇지 정말 황제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천하를 독차지했을 거예요."

"사매 말이 옳긴 옳아."

진현풍이 맞장구를 치자 매초풍은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그리고 사모님에 대한 사부님의 애틋한 정을 보아도 다른 남자들한테선 찾아볼 수 없는 면이 있어요. 사부님의 장점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은 바로 정이 많다는 거예요. 북개는 일생 동안 여색엔 접근도 하지 않는 무정한 인간이니, 따지고 보면 영웅도 아니죠. 그런가 하면 남제 단지흥은 엄청난 후궁과 궁녀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참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서독 구양봉은 여인을 가지고 놀 줄밖에 모르니 역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천하에서 인물

잘나고, 여인에게 사랑을 쏟을 줄 알고, 풍류를 아시면서도 무공이 제일인 분이 우리 사부님이 아니고 누구겠어요?"

매초풍은 말을 마치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진현풍은 속으로 적이 놀랐다. 매초풍이 사부님에게 반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제자라면 사부님께 마땅히 존경심을 가져야지, 그 외의 사념을 가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진현풍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훌륭하셔도 우리한텐 사부님일 뿐이니, 분수에 넘치는 생각은 하지 말아."

그 말에 발끈한 매초풍은 매서운 눈길로 진현풍을 쏘아보았다.

"사형, 지금 질투하나요? 그렇다면 사형이 날 좋아하는 거예요?

진현풍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윤기가 흐르는 매초풍의 검은 머리에서 청결하고 달콤한 처녀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매초풍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건강부 거부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참변을 당하여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황약사가 목숨을 구해 주어 그를 사부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제 두 사람 모두 이성에 눈뜰 나이였다. 매초풍의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찔해진 진현풍은 그녀의 매서운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사형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 알아요? 사형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부님 발꿈치도 못 따라가요.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사형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난 진현풍 역시 기개가 있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칭찬만 해주었더니 이 계집애가 나를 아주 우습게 아는군.'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매초풍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정말…… 이게……."

하지만 연약한 여자를 때릴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매초풍의 멱살을 잡은 채 바보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게 정말……."

매초풍은 여전히 진현풍을 쏘아보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이 손 놔요. 당장 놓지 않으면 사부님께 일러바칠 거예요. 사부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사형 목숨은 끝장이라구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겁이 덜컥 났다. 사부님과 나이가 비슷한 사제들도 사부님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노하면 어떤 벌을 내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데, 종종 그 벌이 너무나 참혹했다. 진현풍은 사부님의 벌을 생각하자 손이 떨려서 매초풍을 얼른 놔주었다.

"일러바치라지. 사부님이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왜 안 믿어요? 내 머리를 수세미처럼 헝클어뜨리고 옷을 북북 찢은 뒤 울며 말하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안 믿으실 수 있겠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진현풍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둘이 한참 다투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사람 살려!" 하는 비명이 들려 왔다. 둘은 깜짝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사나이가 아이 하나를 밀치며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사나이 셋은 어린아이를 넘어뜨리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지만 이제 네 애비 에미를 따라가거라. 저승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을 게다. 돈 좀 있다고 우쭐대더니 꼴 좋다! 공연히 우리 형제들 비위를 건드려서 이 모양이 되는구나. 우리가 너희 집 돈을 몽땅 차지했으니 대신 널 부모에게 보내 주마."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다른 말을 꺼냈다.

"우선 말야, 돈 문제부터 해결하자구. 셋이 똑같이 나누는 게 좋을까, 아니면 수고한 정도에 따라 나누는 게 좋을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다른 한 사람이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그 은 1천 냥을 10등분 해서 1백 냥씩 묶어 놓고, 이 아이를 단 칼에 죽이지 말고 돌아가면서 한 번씩 칼을 내리치는데, 칼질을 제일 묘하게 하는 사람이 은자를 제일 많이 가지는 거야. 어때?"

그 말에 나머지 두 놈이 좋다고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말도 못하고 입술만 앙다물고 있었는데, 어찌나 세게 물고 있는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한 놈이 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첫번째로 칼을 댈까? 이 검법은 '일도구룡(一刀九龍)'이라는 거라구. 칼질 한 번에 칼자국이 아홉 개 나는데 그 생채기들이 용처럼 구불구불하지 않으면 오씨라는 내 성을 갈겠어."

그리고는 칼을 치켜 들더니 아이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아이를 구하려고 얼른 일어서다가 흠칫 놀라 멈추어 섰다.

오씨 성을 가진 사공이 칼을 내리치는 찰나, 황약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웃는 얼굴로 오씨가 잡은 칼을 두 손가락으로 잡았다.

"여보시오, 지금 그 일도구룡으로 내 손가락을 치는 거요?"

사공 오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기 칼과 황약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칼엔 적어도 4, 5백 근의 기력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손가락 끝으로 잡아낼 수가 있지? 아무래도 이자는 요술장이가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사공은 자기 혓바닥을 확 깨물더니 피를 황약사에게 내뱉었다. 요술장이는 피를 보면 꼼짝못한다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황약사는 그가 피를 내뱉는 것을 무슨 암기를 쓰는 것으로 잘못 알고 소매를 휘둘러 얼른 막았다. 그 바람에 사공이 뱉은 피는 주인에게로 되돌아갔고, 사공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황약사는 어느새 그의 칼을 들고 있었다.

"일도구룡이란 검법이 무척 희한한 모양인데 어디 나도 좀 배워 볼까?"

황약사는 칼을 번쩍 치켜 들더니 사공의 얼굴을 슬쩍 내리쳤다. 얼굴에 칼을 맞은 사공 오씨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꼿꼿이 서서 황약사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오씨의 얼굴에 구불구불한 흰 줄 몇 개가 생겼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얼굴에 난 아홉 마리 백룡 같은 생채기가 붉은 혈룡(血龍)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그 생채기들이 벌어지면서 참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었다.

칼을 맞은 순간 감각을 잃은 사공 오씨는 얼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자, 그제야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 황약사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그를 피하지도 않고 빼앗았던 사공의 칼을 뚝뚝 부러뜨려 사공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한 조각은 사공의 왼쪽 발을 뚫고 땅에 박혔으며 또 한 조각은 오른쪽 발을 뚫었다. 그리고 양 어깨에 하나씩, 양쪽 귀에도 하나씩 박혔다.

사공이 휘두르던 주먹은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발과 어깨, 그리고 귀에 박힌 칼 조각이 살을 찢는 바람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두 사람은 기가 질릴 대로 질려 냅다 뺑소니를 치기 시작했다.

"이 놈들, 게 서라!"

황약사는 손을 번쩍 들더니 나머지 칼 조각 두 개를 힘껏 던졌다. 두 놈은 칼 조각에 어깨를 맞고 모래밭에 고꾸라졌다.

황약사는 넘어져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저 놈들이 네 부모를 죽였느냐?"

어린아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영리하게 생긴 아이를 보고 황약사는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풍묵풍이라고 해요."

"풍묵풍이라……. 무슨 풍자냐? 바람 풍(鳳)자냐, 풍년 풍(望) 자냐?"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땅에다가 풍묵풍(馮默鳳)이라는 이름 석 자를 크게 썼다.

그것을 본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아이의 이름이 제자들의 이름과 항렬이 같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쓰러져 있는 두 놈에게 걸어갔다. 놈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어느 놈이 네 부모를 죽였지?"

아이는 두 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 놈을 먼저 가리키고, 이어 또 한 놈도 가리켰다. 사공 오씨가 두 놈을 시켜 한 놈은 풍묵풍의 아버지를 물에 처넣게 하고, 다른 한 놈은 어머니를 물에 처넣게 했던 것이다.

"이 놈이 네 아버지를 죽였단 말이냐?"

황약사가 한 놈을 가리키며 물으니 풍묵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약사는 그 놈의 허리에서 비수를 뽑아 아이에게 쥐여 주었다.

"얘야, 놈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라."

그러자 아이는 비수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깐 은자를 빼앗으려고 네 부모를 죽이고 너까지 죽이려 했는데 놈을 죽이지 못하겠단 말이냐?"

풍묵풍은 이제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놈들 손에 부모가 죽은 생각을 하면 원통하고 분했지만 막상 죽이자니 몸이 떨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자기 대신 원수를 죽여 달라는 듯이 애달픈 눈빛으로 황약사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놈들에게 너희 부모가 몰살을 당하고 집안이 망했는데도 네 손으로 원수를 갚지 못한단 말이냐? 네가 두 놈을 죽이면 널 내 제자로 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 놈부터 죽이겠다."

황약사가 가장 흉악한 놈을 쉽사리 죽여 버린 것을 본 풍묵풍은 그의 말에 겁이 더럭 났다.

어린 풍묵풍은 이를 악물고 비수를 들어 원수의 가슴에 칼을 찔렀다. 놈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황약사가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던져 아혈을 맞추자 놈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풍묵풍은 눈을 꼭 감은 채 정신없이 죽은 사람을 계속 찔렀다.

그러자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이젠 됐으니, 다른 놈을 찔러 죽여라."

풍묵풍이 눈을 떠보니 칼에 난자당한 피투성이 송장이 눈앞에 있었다. 비수를 집어 던진 아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사람을……."

"이 놈아, 이 세상엔 살인을 안 하는 놈이 없다. 상인은 돈으로 살인하고 서생은 책으로 살인하고 부모는 이런저런 단속으로 살인을 하지. 세상엔 좋은 사람이란 없단 말이다. 나머지 한 놈도 어서 죽여라."

황약사의 말을 들은 아이는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싫어요! 난 못 죽여요!"

황약사는 얼른 아이를 잡아당겼다.

"이 놈아, 원수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 거야!"

그가 풍묵풍의 대별을 툭 건드리자 풍묵풍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황약사가 말했다.

"놈들 손에 억울하게 죽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넌 원수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장차 악한들을 만나 싸우게 되더라도 두려움이 없어져. 정 놈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네가 대신 죽겠느냐?"

풍묵풍은 하는 수 없이 아직도 피가 흥건한 비수를 집어 들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 걸어가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야! 죽어! 죽어 버려!"

이윽고 어린 풍묵풍은 기절하여 쓰러졌다.

먼 곳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진현풍과 매초풍은 사부가 아이를 죽인 줄 알고 돌 뒤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차디찬 황약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현풍인 뭘 하고 있는 게냐?

두 사람은 황약사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현풍아,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푹 쉬게 해라."

황약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아이를 안고 얼른 사라졌다. 달려가는 진현풍을 보며 황약사가 매초풍에게 물었다.

"넌 현풍이와 바위 뒤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매초풍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사부님을 향한 내 사랑을 고백해 볼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우리와는 말 한마디 나누는 적이 없는 사부님이시니 말이야. '

이 순간 황약사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틈만 있으면 아형과 문장을 담론하느라 제자들과는 이야기 한 번 나누어 본 적이 없었구나. 가장 불행한 아이가 매초풍과 진현풍일 거야. 이 애들에게 내가 좀더 따뜻하게 대해 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한 황약사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물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도 한 번 들어 보자꾸나."

매초풍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억누를 길 없는 이 연정을 사부님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도화도 안팎을 다 뒤져 봐도 진짜 사나이는 사부님밖에 없으니 말이야. 내가 솔직하게 고백한다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생각이 이쯤 미친 매초풍은 진현풍과 함께 오대 고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기가 사부님을 가장 높이 칭찬했다는 얘기부터 넌지시 꺼내었다.

그러자 황약사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황약사의 느닷없는 물음에 매초풍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부님도 날 좋아하실 거야. 내게는 다른 제자들보다 친절하게 대해 주셨으니까. 이번 기회에 사부님의 속마음을 알아보자.'

"사부님, 전 몇 달째 잠이 안 와요……."

매초풍은 황약사의 기색을 살피며 슬그머니 말했다.

"왜, 병이라도 났나?"

매초풍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저는…… 사부님을……."

매초풍은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초풍은 황약사가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줄 알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인간은 그 생각에 묻혀 있어서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매초풍 역시 이와 같아서 상대방인 황약사의 마음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와 똑같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사부님, 전 매일 밤 사부님 생각뿐이에요. 밤만 되면 사부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매초풍의 말에 황약사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낙영신장의 초보 장법을 익히느라 너무 애써서 그런 모양이구나. 나도 처음에 그 장법을 배울 땐 너무 어려워서 잠이 안 왔지. 눈앞에 장법이 자꾸 어른거리는 거야. 초풍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익히거라. 그래야 성공하는 거야."

그러나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매초풍은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전 꿈에도…… 언제나 사부님과 함께……."

그러다가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황약사는 허허 웃었다.

"글쎄, 나도 그랬다니까. 나도 처음에 무공을 배울 땐 매일 밤 꿈마다 사부님이 보였지. 물론 우리 아버님이었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꿈에 사부님과 함께 무공을 익히는 게 아니라 사부님과……."

황약사는 진작부터 매초풍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매초풍이 스스로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정을 조절하기는커녕 이제 노골적으로 고백을 하려는 걸 보자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스승이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자 매초풍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부님이 저를 구해 주신 그때부터 저는 사부님을 사모했어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아 가슴이 후련했지만 매초풍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매초풍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초풍아, 네 이름이 원래는 매초풍이 아니었지?"

"예, 매약화였죠."

황약사는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왜 네 이름을 매초풍이라고 고쳤는지 알고 있느냐?"

"알아요. 사부님의 제자로 들어오면서 이름을 그렇게 고친 거죠."

황약사는 화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면서도 그 따위 수작이냐? 네가 내 제자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스승과 제자는 부자지간과 다름없다는 걸 모르느냐?"

서릿발 같은 스승의 꾸지람을 듣고도 매초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설령 사부님이 절 죽이신다 해도 제 마음은 죽이지 못하실 거예요."

매초풍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내심 놀란 황약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초풍아, 너 내 말을 따르겠느냐?"

"예, 사부님께서 칼을 물고 불바다에 뛰어들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매초풍은 그렇게 말하고 무릎을 꿇었다.

황약사는 재빨리 손가락을 뻗어 매초풍의 혈도 하나를 눌렀다.

"초풍아, 너는 도화도의 율을 어겨 우리의 명성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러니 네 발로 바다에 뛰어들어라. 죽음은 모든 번뇌를 잊게 해줄 것이다. 내가 네 혈도를 눌러 놓았으니 편안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초풍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스승에게 큰절을 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결연히 말했다.

"사부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는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녀는 바닷가로 다가가면서 멀지 않아 사부님이 자기를 불러 세우리라 믿고 있었다. 이윽고 차디찬 바닷물이 발목을 적셨으나 사부님이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이 날 생각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구나. 사부님은 누구에게나 엄격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셨지. 하지만 내겐 다른 줄 알았어. 그래…… 이렇게 몇 걸음만 더 나가면 사부님의 마음이 변해서 나를 부르실지도 몰라. 그러면 난 평생 사부님을 모시고 그 분이 시키는 대로 할거야.'

매초풍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바닷물이 허벅다리를 적시더니 아랫배를, 그리고는 젖가슴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약사는 묵묵히 서서 매초풍이 바닷물에 빠져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매초풍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황약사가 미워졌다.

'한창 피어나는 꽃 같은 제자가 바다로 들어가 자결을 하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다니, 세상에 이런 냉혈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사랑했던 사람이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미쳤지.'

회오리처럼 물려오는 후회와 실망, 원망과 그리움이 매초풍을 휘어감았다.

매초풍은 점점 더 깊이 바다에 잠겨 들었다. 바닷물이 목까지 적시더니 순식간에 짠물이 입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무서운 절망감에 자신을 내던졌다.

'사부님이 날 거부하신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때 바위 뒤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던 진현풍은 저 혼자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풍묵풍을 집에 뉘어 놓고 이내 바닷가로 돌아온 그는 매초풍이 사부님의 명령대로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애꿎은 바위만 주먹으로 쳐서 손에 피를 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안아 들고 바다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사부님이 지켜 보고 계시니 그럴 순 없었다. 사부님의 성질이 워낙 불 같아서 까딱 잘못하다간 자기 목숨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때였다. 뒤에서 매초풍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초풍아, 초풍아!"

황약사가 돌아보니 아형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왜 그러오?"

황약사가 당황하여 아형에게 물었다.

"어서 저 애를 구해요!"

"저 아이가 글쎄……."

황약사는 말하려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형에게 할말도 아니거니와 아형의 기색을 보니 그런 말을 할 계제도 아닌 것 같았다.

황약사는 한숨을 쉬고는 바다로 첨벙 뛰어들었다

매초풍을 건져서 모래밭에 눕힌 황약사는 아형과 함께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글쎄 이 아이가……."

황약사의 말에 아형이 조용히 웃었다.

"모르다니, 내가 왜 몰라요? 제자가 자기 사부님을 짝사랑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죄예요?"

아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황약사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당신도…… 내가 그래……."

황약사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형은 매초풍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초풍아, 너도 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그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약사로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형은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여자애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기이한 인물이시니까요."

황약사는 아형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사실 아형을 만나기 전까지 황약사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풍류정사(風流情事)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실로 사랑한 여자는 아형뿐이었다. 황약사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이 순간 가장 애가 타는 사람은 진현풍이었다.

'초풍아,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버릴 거야. 바보같이 내 마음도 몰라주고 저 냉정한 사부님만 좋아하더니…… 저 봐. 네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잖아. 이 다음에 무공을 닦으면 사부님을 죽여 버릴 테야.'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황약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형은 매초풍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됐어요. 이제 초풍이를 안아다 집에 눕히고 좀 쉬게 해야겠어요."

그러자 황약사가 큰소리로 진현풍을 불렀다.

"현풍아. 어서 나오너라!"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진현풍은 부들부들 떨며 바닷가로 나아갔다.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사부님이 자기까지 죽일 줄 알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아형이 물었다.

"아니, 자네 어디 아픈가?"

그러자 황약사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숨어 있자니 몸살이 날 만도 하지. 어서 초풍이를 데려다 뉘어라."

그 말을 들은 진현풍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그는 얼른 매초풍을 안고 날다시피 하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복숭아밭까지 와서야 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는 축 늘어진 매초풍을 안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녀의 젖은 얼굴에 해초일 하나가 묻어 있는 걸 보았다. 그걸 보자 초풍이 더욱 가여워진 진현풍은 그녀를 안은 채 얼굴에 붙은 해초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다.

이때였다. 막 정신이 들기 시작한 매초풍은 소스라쳐 놀랐다. 진현풍이 자기를 꼭 끌어안고 한 손으로 자기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얼른 진현풍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놀란 진현풍은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화들짝 뒤로 물러앉았다.

"아이쿠, 아야!"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매초풍이 비명을 질렀다. 진현풍은 재빨리 그녀의 입을 감싸 쥐었다. 사부님이 들으시면 야단이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진현풍을 밀어 버리더니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너……너까지…… 날…… 업신여겨……."

매초풍은 울음 소리는 내지 못하고 어깨만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진현풍은 무릎을 꿇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사매, 왜 이래?"

이때 황약사와 아형이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아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매초풍은 두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일어나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읍을 하고는 돌아서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다 제 탓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제3권에 계속-

 

[출처] 화산논검 - 동사 황약사 4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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