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동사 황약사 2 김용
제6장 독수리와의 싸움
황약사와 육승룡 형제는 각각 생각에 잠겨 응취봉을 향해 배를 몰아갔다. 드디어 일흔두 개의 봉우리를 돌아다니며 태호방을 요절낼 날이 온 것이다.
응취봉은 일흔두 개의 봉우리 가운데서 제일 높고 경치가 좋은 봉우리였는데 그 위에서 태호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천하의 절경이었다. 그러나 봉우리가 하도 험준하여 집을 짓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태호방 사람들은 봉우리 아래의 기슭에다가 집들을 짓고 봉우리 앞 큰 바위들에 말뚝을 박아 배들을 세워 두는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나루터에는 몇십 척의 쪽배들이 서 있고 큰 배
도 몇 척 눈에 띄었다. 황 약사는 응취봉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병묘가 붙잡혀 여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가 여기에 갇혀 있다면 구해 낼 수 있을 텐데.'
쪽배는 풍세를 빌려 잠깐 사이에 나루터에 다다랐다.
태호방 놈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 배냐?"
황약사 일행은 그 말에 대답하는 척하면서 배를 가까이로 몰아갔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황약사는 잽싸게 삿대를 휘둘러 놈을 물속에 거꾸러뜨렸다. 나루터에 있던 다른 한 놈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외부인의 습격이다!"
삽시에 수많은 태호방 놈들이 손에 칼을 들고 나루터로 달려 나왔다.
황약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태호방이 무섭다고 소문이 났던데 결국 이런 오합지졸들뿐이냐?'
그는 달려 나오는 놈들을 향해 벽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놈들은 질겁하여 마치 바람에 날려 가는 허깨비들마냥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슭에 있던 놈들은 그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황약사를 향해 던졌다.
황약사는 잽싸게 자기를 향해 날아오던 무기들을 되돌려 놈들에게로 날아가게 했다. 놈들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던졌던 무기에 얻어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황약사는 슬며시 청피면구(靑皮面具)를 꺼내어 얼굴에 썼다. 여러 가지 색깔로 무섭게 칠해진 이 면구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의 일흔두 개 봉우리의 두령들을 찾고 있다. 냉큼 뛰어가서 도화도 도주 황약사가 왔다고 전하거라."
응취봉 기슭에는 참대로 지은 집이 수십 채 있었는데 아주 깨끗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백 명이나 되는 태호방 놈들이 칼을 세워 들고 집 앞에서 황약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은 황약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칼을 휘두르며 몰려 나왔다.
황약사는 놈들이 덤벼들자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얼굴에 면구를 쓴 무서운 사람이 우뚝 저 있는 것을 보자 우르르 달려들던 태호방 놈들도 더는 덤비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 속에는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 중의 한 사람인 삼두교도 섞여 있었다. 그가 황약사를 보고 물었다.
"넌 누구냐? 왜 함부로 태호방 총부 앞까지 와서 이 야단이냐?"
황약사가 대답을 하지 않고 쓴웃음을 짓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바로 저 놈이다. 저 놈이 호숫가에서 우리 형제 수십 명을 죽였어!"
삼두교는 그 말에 움찔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면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짐짓 점잖은 체하며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길래 우리 태호방에 와서 시끄럽게 구는 거요?"
황약사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쏘아보기만 하다가 드디어 물었다.
"그 늙다린 어디 있나?"
황약사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삼두교는 속으로 몹시 화가 났다.
'요 며칠 재수가 없을라니 저런 놈만 만나게 되는군. 만나는 놈마다 상문신(喪門神)이거든. 하지만 이 상두교가 네 놈을 두려워 할 줄 아느냐? '
그러나 삼두교는 태연한 척 황약사를 향해 소리쳤다.
"네 놈이 감히 우리 태호방의 총타주와 겨루어 보겠다구?"
삼두교는 냉큼 오른손에 된 단도로 황약사의 면상을 내리찍으며 거듭 소리쳤다.
"네 놈이 사람인가 귀신인가 어디 보자!"
삼두교가 휘두른 칼은 획 소리를 내며 황약사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황약사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손을 뻗쳐 삼두교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황약사가 불호령을 했다.
"말해라. 그 늙은 두상은 어디 있느냐?"
삼두교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놈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발로 걷어차 놈의 왼쪽 정강이를 꺾어 놓았다. 삼두교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황약사가 다시 윽박질렀다.
"네 놈이 말하지 않는다면 태호에 해가 출아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나 삼두교는 이빨을 사려물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황약사는 다시 발길을 날려 놈의 오른쪽 다리를 걷어찼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지고 말았다.
"네 놈이 말하지 않으면 이 손가락으로 네 놈의 눈알을 파낼 테다. 평생 앞 못 보는 장님으로 살고 싶으냐?"
삼두교는 황약사를 쏘아보며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네 놈이 뭐라 해도 난 말하지 않을 테다!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황약사는 태호의 비적 따위가 이처럼 의지가 굳셀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삼두교를 쳐다보았다. 삼두교는 머리칼을 틀어잡힌 채 황약사가 두 손가락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이 직접 눈에 닿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으로부터 나오는 내력으로 인해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어찌나 아픈지 살두교는 자기 손으로라도 눈알을 파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두교가 입을 열었다.
"네 놈은 어떤 놈이냐? 얼굴을 볼 수 있게 그 면구를 벗어라!"
황약사가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이다. 이미 눈이 멀었으니 나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을 테니까."
삼두교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었다.
"네 놈을 꼭 보았으면 좋겠다. 죽어서라도 네 놈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원수 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라도 알고 죽어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호방 놈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황약사를 둘러쌌다. 놈들은 결사적으로 삼두교를 구해 내려고 했다.
위험을 느낀 황약사는 삼두교를 무기로 삼아 번쩍 내던졌다. 삼두교의 몸뚱이가 날려 가자 거기에 맞아 당장에 두 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황약사는 놈들의 포위를 뚫고 나와 곧장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그 산봉우리는 거대한 바위로 되어 있었다. 그 바위 아래에 큰 돌비석이 있었는데 정방형으로 된 비석의 길이와 너비는 똑같이 다섯 자나 되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었다.
태호 만경에서 내가 생령들을 지키나니
내가 호령하면 온 호수에 풍파가 일리로다
하지만 나의 방( )에 들어오면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지리니
부요한 두 호수에서 이내 몸 내달리리!
비문을 읽고 난 황약사는 속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방 사람들이 악착스럽다는 건 이 비문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구나. 이 놈들을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천리(天理)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태호방 놈들은 멀찌감치 서서 감히 덤벼들 생각도 못하고 황약사의 행동거지를 묵묵히 주시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오른손을 들어 일장을 먹인 다음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내력으로 인해 바위는 가루가 되어 슬슬 떨어졌다. 바위는 곧 하나의 비석처럼 매끈해졌다.
황약사는 옥소를 꺼내어 반반하게 된 돌비석에다 비문을 써넣기 시작했다.
대대로 동해 도화도에서 사노라니
세상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네
일거에 태호방을 소멸하여
동사(東邪)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리.
비문을 다 적고 나자 황약사는 마음이 가뿐해 짐을 느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육승룡, 무천웅네 형제가 장정들을 거느리고 한창 태호방 놈들과 싸우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태호방 놈들은 그들에게 쫓겨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황약사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굵은 밧줄로 만든 사다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등나무덩굴과 잡풀에 온통 뒤덮여 있었다.
'여기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 '
황약사는 몹시 기뻤다. 이 밧줄 사다리는 틀림없이 태호방 총타주의 본부와 연결된 것이리라. 그는 당장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황약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절반이나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가집들이 딱정벌레처럼 작아 보였고 푸른 호수가 한눈에 안겨 왔다. 그는 계속해서 몇십 계단을 더 올라갔다. 이젠 운무가 그의 발밑에서 감돌았다.
그는 머리를 들어 눈앞에 닥친 정상을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그가 다시 막 기어오르는데 갑자기 위로부터 큰 바위 몇 개가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민첩하게 몸을 틀어 밧줄사다리를 버리고 사다리 옆에 두드러져 나온 큰 돌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크고 작은 돌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면서 잇달아 굴러 내려 요란한 굉음을 일으켰다.
황약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사다리로 옮겨 가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사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각별히 조심하였다. 태호방 놈들이 그를 발견하는 순간 밧줄사다리를 끊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였다. 갑자기 독수리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산꼭대기에서 네 마리의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 내리더니 검은 그림자를 던지며 황약사에게로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내심 당황했으나 얼른 옥소를 꺼내어 독수리들을 막아냈다. 독수리들은 아주 영리하여 황약사를 둘러싸고 선회하면서 공격할 틈을 노렸다. 황약사는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옥소를 들고 몸을 바짝 긴장
시켰다. 독수리도 독수리지만 여차하면 발을 헛디뎌 천길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게 더 끔찍했다.
네 마리의 독수리는 번갈아 가며 날개로 황약사의 얼굴을 할퀴어 놓는가 하면 날카로운 부리로 두 다리를 쪼아 놓곤 했다. 만일 평지 같으면 이따위 독수리쯤을 무서워할 황약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벼랑에 걸린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몸이니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는 옥소를 가지고도 독수리들을 대처해 낼 수 없게 되자 아예 옥소를 도로 허리춤에 집어 넣었다. 그는 왼손으로 밧줄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절벽에서 돌멩이를 한 개씩 파내어서 독수리를 향해 던지려 했다. 손가락을 쉽기는 법수로 독수리들을 죽여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과는 달리 잘 안 되었다. 돌멩이가 독수리의 몸에 맞아 털이 북북 빠져 나가는데도 악착스레 덮쳐 들며 물고 뜯는 데는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황약사는 어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속으로 개탄했다.
'그래 이 황약사가 이따위 날짐승한테 죽고 만단 말인가. 요까짓 자그마한 독수리 몇 마리를 당해 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내 이름이 부끄럽구나! '
예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허리춤에서 옥패(玉濕)를 꺼내 들었다. 이 옥패는 활약사의 부모가 물려준 것으로 거기에는 그림 한 폭이 그려져 있었다. 한 사내애가 손에 연꽃을 들고 한 계집애가 연줄기를 틀어쥐고 있는 그림인데 남녀의 결합과 백년해로를 상징하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황약사는 부모가 물려준 이 유물을 여간해선 꺼내 드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위급한 순간에 그것으로
밖에는 위험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황약사는 옥패를 손에 들자 용기가 생겼다. 황약사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기 머리에 바짝 다가드는 순간 손을 휘둘러 옥패를 던지며 소리쳤다.
"옥패야, 내 뜻을 이루어 다오!"
그 옥패는 곧장 독수리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놈은 비명을 지르면서 양 날개를 접더니 돌멩이처럼 땅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놈이 땅에 떨어지자 다른 한 마리도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에 화살처럼 떨어져 처박혔다. 놈은 자기의 짝이 죽자 자기도 그 뒤를 따라 죽어 버린 것이다.
이제 두 마리의 독수리가 남았다. 두 놈은 좀 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고 교묘하게 행동했다. 황약사가 움직이지 않으면 놈들도 가만히 있고, 일단 황약사가 기어오르려고만 하면 사정없이 덮쳐 드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황약사의 속은 바질바질 타서 재가 될 지경이 되었다.
'이 사다리가 아무리 길다고 해도 독수리만 없다면 응취봉에 오르기는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독수리 두 마리도 물리쳐 내지 못한다면 이까짓 재주로 어떻게 왕중양의 그 《구음진경》을 빼앗아 온단 말인가? 이런 털 가진 날짐승 두 마리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화산에 가서 무예 시합에 참가할 수 있으며 천하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겠는가?'
황약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돌려 독수리를 마주보면서 한 손과 두 발로 암석을 등지고 천천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밧줄사다리를 발꿈치로 밟고 올라가야 하고 왼손만을 써야 하는 것이다.
10여 계단 올라가니 두 마리의 독수리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한 마리는 왼쪽으로, 다른 한 마리는 오른쪽으로 갈라져서 동시에 황약사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한 마리의 독수리가 덮쳐 들며 발톱으로 가슴을 잡아챘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황약사의 옷이 찢겨져 나가면서 가슴팍에 길다란 상처를 남겨 놓았다. 황약사는 옥소를 꺼내어 그 독수리의 발을 때렸다. 놈은 앙칼진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으로 급급히 날아올랐다. 이때 다른 한 마리의 독수리가 황약사의 어깨를 꽉 틀어잡았다. 독수리의 발톱이 살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 란 독수리는 엉겁결에 황약사의 어깨를 움켜쥔 채로 푸드득 날아 올랐다. 독수리가 어찌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지 거친 바람이 황약사의 얼굴을 때리며 씽씽 지나갔다. 황약사는 놀란 가슴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가집과 산봉우리들이 그의 눈 아래로 휙휙 지나갔다. 황약사는 급히 옥소를 허리춤에 집어 넣고 두 손
으로 독수리의 발목을 틀어쥐었다. 놀란 독수리가 몇 장이나 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황약사는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만일 독수리가 다쳐 떨어지게 되면 자기의 목숨이라고 붙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황약사를 끌고 질풍같이 날아갔다.
응취봉은 갈수록 멀어져 좁은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몇십 리나 왔을까. 다시금 태호의 수역이 황약사의 시야에 들어 왔다.
독수리는 몹시 지친 듯 황약사를 놓아 버리려고 했다. 황약사는 필사적으로 독수리의 발목에 매달렸다. 독수리는 괴상한 소리로 울어 대며 아래로 급강하하다가는 발을 마구 흔들어 대기도 하고 다시 꼿꼿이 날아오르는 등 몸부림을 쳤지만 황약사를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놈은 성이 나서 발톱에 힘을 주어 황약사의 어깨뼈를 부스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황약사가 놈의 발목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는 바람에 더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안되겠는지 태호의 물결을 향해 급강하했다.
독수리가 수면을 스치듯 날면서 황약사를 끌고 가는 바람에 물보라가 일어나 황약사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황약사를 호수 수면 위를 한참 동안이나 끌고 다니다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황약사도 더는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아형은 뱃머리가 몹시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쪽배가 반쪽으로 쫙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황약사는 그녀의 곁에 서 있었는데 몸을 휘청거리다가 곧 평형을 유지하였다. 이때였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선미에서 태호방 놈 하나가 입에 비수를 물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입에 물었던 비수를 들고 곧장 아형 쪽으로 달려왔다. 아형은 자기도 모르게
호수로 몸을 던지면서 황약사를 소리쳐 불렀다.
아형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곁으로 헤엄쳐 왔다. 그 사람의 손길이 아형을 잡아 끌었다. 순간 아형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형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물에서 건져 올려져 배에 실려 있는 상태였다. 이 배는 강호의 유람선 같아 보였는데 울긋불긋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형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좌우 사방을 둘러보았다. 호수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태호의 수면에는 물그림자가 출렁이며 수많은 고기 떼들이 배 주위에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아형은 선창에 기대어 노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창 물고기에 정신을 뺏기고 榮는데 누구인가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구두신취 학 영감이었다. 학 영감이 아형의 맞은편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 배를 타 보니 어떤가? 이 배는 태호에서 가장 호화로운 배야. 이 배엔 이런 작은 방이 수없이 많아. 이건 내가 수많은 황금을 주고 페르시아에서 사들인 수정이야. 낭자는 아마 이렇게 크고 훌륭한 수정은 생전 처음 볼걸?"
아형은 물끄러미 학 영감을 바라보았다.
"아형 낭자, 낭자가 나한테 시집오기만 한다면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옷을 즐기면서 온갖 향락을 다 누릴 수 있어. 그래도 날 따라갈 생각이 없나?"
아형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웃으며 계속 지껄여 댔다
"아형 낭자, 태호의 일흔두 개의 봉우리는 주위의 둘레가 만 경이나 되는데, 낭잔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
"태호의 천리나 되는 넓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낭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야."
아형은 어이가 없는 듯 학 영감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학 영감은 수정으로 된 선실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오만하게 지껄여 댔다.
"아형 낭자, 낭잔 지혜와 재주도 뛰어나지만 이 태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미인이야. 나는 이 태호에서 풍운을 질타하는 절세의 영웅이고.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아형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학 영감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어댔는데, 입을 벌릴 때마다 몇 대 남지 않은 이빨들이 볼썽사납게 드러나 보이곤 했다.
아형은 그의 형편없는 몰골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머리털도 다 빠지고 이빨도 없는 주제에 젊은 총각이기나 한 듯 호기를 부리는 데는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형 낭자, 선인들이 하는 말이 미인의 웃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더니만 과연 그렇군. 낭자의 웃음은 내게 시집오는 것을 쾌히 승낙한다는 뜻이겠지?"
아형은 그의 말에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철면피한 늙으니 같으니, 告어 죽을 때가 되니 망령이 난 모양이지?"
아형은 기가 막혀서 또다시 실소했다.
학 영감은 태호에서 총타주 노릇을 하면서 이처럼 불손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형이 자기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던지는 것을 보자 학 영감은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학 영감은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팔목과 두 주먹에 힘줄이 툭 솟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비치는 것을 보고 아형은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학영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에서 부유한 고장은 모두 항주 부근에 집중되어 있고 교통운수는 모두 운하에 의거하고 있는데 태호가 바로 그 운하의 중심지이지. 그러나 태호의 중심을 틀어쥐고 있는 게 바로 나야. 나는 제왕들도 부럽지 않을 만큼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지. 아형 낭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구."
아형이 웃으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태호에서 태어나고 자라기는 하였지만 여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부귀와는 인연이 없소! 노인장께선 날 내가 살던 호심도로 보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학 영감은 말로 해서는 안 되자 험상궂은 기색을 드러내면서 시꺼먼 갈고리 손으로 아형의 옷을 거머쥐었다.
"이 년이? 이 태호에선 내가 바로 황제인 거야. 좋건 싫건 간에 넌 날 따라야만 해!"
학 영감은 아형을 확 밀쳐 버렸다.
아형은 속으로 설움이 왈칵 치밀어 올랐으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학 영감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늙어 빠져 송장을 치울 날도 멀지 않은 놈이 나와 동방화촉을 꿈꾸다니…….'
하지만 아형은 그와 계속 맞서다가는 신상에 해로울 것 같아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날 데리고 배 위에 올라가 태호를 구경시켜 주세요."
학 영감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진작 이렇게 나을 것이지. 결국엔 날 따르게 될 거면서 뭣 땜에 괜한 앙탈을 부리는 거냐? 이 구두신취가 네 년 하나를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한다면 어찌 태호의 총타주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아형에게 말했다.
"올라가 보고 싶으면 올라가 봐도 돼.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지 뭐 볼 것 있다구 그래?"
아형은 뱃머리로 올라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남쪽 방향에 태호의 큰 부락인 귀운장(歸雲莊)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을 바라보니 그쪽은 바로 세 공자가 배를 타고 그녀를 찾아오던 방향이었다. 북쪽을 바라보니 뭍이 어슴푸레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호심도였다. 아형은 호심도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했다.
'병묘 오라버닌 어디 있나요? 살았나요, 죽었나요? 그리고 그토록 재주가 많은 황 공자는 태호방 놈들한테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이때였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 있는데 멀리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수면을 스치며 날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놈의 발톱 밑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걸려 있는 듯했는데 독수리가 날아올랐다가 내리꽂히곤 할 때마다 그 큰 물고기도 발톱에 매달린 채 따라 움직였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갑판에 몰려 나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러나 독수리가 배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독수리의 발톱에 걸려 있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한 학 영감은 소리 없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 독수리는 바로 그가 기르고 있는 네 마리의 피독수리 중의 한 놈이었던 것이다. 그 피 독수리는 사람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는데 발톱이 살 속 깊이 파고들어 누구라도 견뎌 낼 수 없을 것이었다.
학 영감은 몹시 기뻐하면 독수리를 뱃전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바로 이때였다. 아형의 실성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황 공자가? 저건 황 공자가 아닌가요?"
그러자 학 영감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도 피 독수리의 발톱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전날에 자기와 싸우던 그 선비, 동해 도화도의 도주라고 자칭하던 황약사임을 알아보았다.
학 영감은 질투심으로 속이 끓어올랐다.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형이 황약사를 발견하자 안타깝게 불러 대는 모습이 여간 눈꼴사납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형이 보는 앞에서 독수리를 불러들여 황약사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약사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면 아형은 그를 더욱 미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피 독수리에게 맡겨 두는 게 현명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저 놈은 결국 죽게 될 테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을 고쳐 먹고는 입을 꾹 다물고 피 독수리의 거동을 주시했다. 피 독수리는 황약사를 끌고 하늘로 솟아올랐다가는 다시 곤두박질치듯 하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황 공자님―!"
아형의 애끓는 듯한 음성이 태호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내 출렁이는 물결 소리에 잦아들었고 황약사의 모습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황약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아형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7장 늙다리 악마와 처녀
독수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는 아형의 마음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제 황약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병묘도 이미 태호방에 잡혀 갔고 황 약사마저 독수리한테 채여 갔으니 자기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것 같았다. 그녀는 학 영감이 억지로 자기와 성혼하려 하면 목숨을 걸고 반항하리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반항하다가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나 학 영감은 그다지 아형을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뱃머리에 앉아서 술만 마시면서 졸개 세 놈을 시켜 아형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할 뿐이었다. 배는 꼬박 이틀이나 지나서야 태호 일흔두개 봉우리 중의 하나인 철판봉에 닿았다.
배가 뭍에 닿자 일흔두 개 봉우리의 두령들이 달려 나와 일일이 학 영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속에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도 있었다. 학 영감은 배에서 내려 오만하게 턱을 치켜 들고는 뭇두령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봉우리 앞으로 걸어갔다.
철판봉은 그야말로 괴상하게 생긴 봉우리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복판을 커다란 도끼로 내리찍어 놓은 듯이 양쪽으로 갈라진 봉우리가 하늘에 치솟아 있었는데 그 사이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봉우리 앞자락으로 쏟아져 내리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폭포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수가 괴어서 이루어진 못에는 다리가 가로질러 있었는데 철판교라 불리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철
판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앗줄로 꼬아 만든 것에 불과했다.
학 영감은 졸개들과 함께 아형을 데리고 이 다리 앞에 이르렀다. 학 영감이 좌우를 둘러보면서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거라."
태호방 두목들은 고분고분 영을 따랐다. 그들은 저마다 술법을 부리면서 흔들거리는 다리 위를 날아 넘었다. 자기와 아형만이 남자 학 영감이 말했다.
"아형 낭자, 태호방으로 가려면 이 철판교를 건너야 해. 낭자가 무예를 모르니 내가 건너 주어야 하겠구만."
학 영감은 재빨리 손을 뻗어 아형의 대혈 세 군데를 찔러 그녀로 하여금 옴쭉달싹 못하게 하였다. 아형은 어쩔 수 없이 학 영감의 등에 업혀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아형이 다리 아래를 굽어보니 몇 길 되는 다리 밑에는 집채 같은 바위들이 울뚝불뚝 솟아 있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바위들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형이, 눈을 뜨고 보라구!"
아형이 학 영감의 말에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이미 철판봉의 두 봉우리 사이에 이르러 있었다. 바위틈 사이로 올려다 보니 하늘이 마치 실오라기처럼 가늘어 보였다. 여기서 다시 바위 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는데 몇 굽이를 돌고 나자 어마어마하게 큰 석실이 나타났다.
줄곧 아형을 품에 안고 올라온 학 영감은 그녀를 내려놓고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피독수리가 그 선비 놈을 붙잡아 가긴 했지만 녀석은 무예가 출중한 놈이다. 여기까지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니 요 며칠은 만사에 조심하도록 해라!"
부하들은 읍을 하며 공손히 대답을 올리고는 하나씩 물러갔다.
이 석실은 실로 컸다. 석실의 정면 복판은 평평한 석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석벽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독수리의 날개는 길이가 천리나 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번개가 이는 듯한 두 눈으로 땅 위의 창생들을 흉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독수리의 몸 아래에는 태호의 노한 파도와 크고 작은 일흔두
개 봉우리가 마치 실물을 떠다 옮겨 놓기라도 한 듯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특히 그 큰 독수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학 영감은 공포에 사로잡혀 석벽을 응시하는 아형을 보면서 지껄였다.
"아형 낭자, 저 석벽에 새겨져 있는 신령스러운 독수리는 바로 날세. 태호의 만경 파도와 일흔두 개의 봉우리는 모두 내 날개 밑에 있다는 뜻이지 ."
말을 마친 학 영감은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아형은 사실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학 영감은 청혼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치음 공자나 미화 공자처럼 순순히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형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학 영감은 한사코 성혼하자고 떼를 썼다.
'어떻게 하면 이 영감태기의 청혼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냥 무턱대고 거절하다가는 영감태기의 성질만 건드리기 십상이야. 무슨 묘안이 없을까? '
아형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선 태호방의 최고 두령이시고 태호방에서 제일로 유명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시어 소녀가 병묘를 한 번만 만나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실 수는 없사옵니까?"
"그자를 보구 신다구? 그럼 좋아."
학 영감은 선뜻 아형을 데리고 다른 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석실을 벗어나 몇십 층의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높다란 돌기둥이 나타났다. 그 돌기둥의 모양은 마치 죽순처럼 생겼는데 낭떠러지 위에 곧게 치솟아 있었고 돌기둥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못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병묘가 돌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봉두난발을 한 채 기진맥진하여 머리를 가누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태호방 놈들은 죄다 망종들이야! 태호엔 자라들이 많지. 네 놈들이 바로 이런 자라들을 퍼뜨린 종자들이란 말야!"
이어서 병묘의 입에서는 도저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이 터져 나왔다. 병묘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는 아형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오라버니, 저 아형이에요!"
"아형이, 아형이! 정말 아형이란 말이오?"
병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여기예요, 오라버니. 여기 이렇게 아형이 왔어요!"
며칠째 공포와 불안으로 가슴을 조이면서 고통을 하소연할 데도 없이 지내 오던 아형은 오빠와도 같은 병묘를 만나자 일시에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금세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병묘는 표범과도 같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아형을 건너다보며 소리쳤다.
"내가 황약사에게 아형일 잘 보살피라구 신신당부했는데, 그 자식은 어딜 갔나? 아형이, 얼마나 고생했어?"
학 영감이 냉소했다.
"나의 피 독수리는 천성적으로 용맹하고 잔인해서 황약사 따위가 견뎌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워낙 성미가 급한 병묘는 학 영감의 말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학 영감은 가소롭다는 듯 히죽거렸다.
"병묘 이 놈아, 네 놈은 명색이 태호 삼공자 중의 한 놈으로 이 구두신취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는 눈치구나. 내 오늘 네 놈에게 된맛을 보여 주마!"
"마음대로 해봐라! 난 하나도 무섭지 않다!"
병묘는 기진맥진한 소리로 대꾸했다.
이리들 오너라!"
학 영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호방의 무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알아서 병묘를 끌어내려서는 그의 몸뚱이를 길다란 밧줄로 칭칭 동여맸다. 그들은 다시 병묘를 매달아 올리는 듯싶더니 돌기둥 아래의 물 속에 처박았다.
쏟아지는 폭포수가 병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병묘는 눈을 뜰 수도 없었고 숨이 컥컥 막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으나 물이 차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아형은 그에게로 달려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그는 다름아닌 학 영감이었다.
"아형아, 만일 네가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넌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거다. 하하하……."
학 영감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아형은 학 영감을 빤히 마주보았다. 그녀는 불현듯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학 영감을 향해 태연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영감의 머리를 매만지며 교태를 부리듯 말했다.
"이런 나이에 성혼을 하시겠다니, 나 원 참……."
학 영감은 아형의 행동에 부지중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태호의 간웅으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으면서 무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아리따운 처녀의 부드러운 손길은 처음 접한 것이다. 맑고 새까만 두 눈으로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자기를 쳐다보는 아형의 눈길에 학 영감의 마음은 둥둥 떠올랐다.
"영감님께선 저 같은 계집들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요. 제 사람으로 만들려면 먼저 계집의 맘을 사로잡아야 하는 거예요."
아형이 계속해서 달콤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그녀의 말에 학 영감은 귀가 솔깃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 듯싶었다.
"영감님께선 너무 늙으신 건 아니에요. 아직도 혈색이 이렇게 좋으신걸요? 하지만 여인들한테 곰살궂게 굴 줄도 알아야 해요. 웃는 남자들은 언제나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영감님께선 왜 언제나 성난 얼굴을 하고 계세요?"
학 영감은 본디 태호를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아 온 화적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에는 전족을 하지 않은 계집을 얻어서 아들까지 하나 본 적이 있었으나 그 후 태호에 화적 무리가 들끓기 시작하자 마누라와 아들을 칼로 찍어 죽이고는 다시는 고기잡이, 배몰이 같은 허드렛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누라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박색인데다 심보마저 고약해서 입만 벌리면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래서 학 영감은 줄곧 계집이란 죄다 제 마누라 같은 물건인 줄로만 여겨 오던 터에 다 늦게 아형 같은 여자를 만나고 보니 온몸이 절로 녹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요? 영감님께서 저더러 영감님한테 시집을 오라고 합니다만, 청혼이란 육례를 갖추어 법도에 맞게 하여야 성사가 되는 거예요. 영감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먼저 예장을 보내 와야 해요. 사람을 보내어 우리 집에 비단필 같은 걸 예장으로 가져와야 해요. 비단필이 아니더라도 전안례는 갖추어야 하지요. 만일 우리 집에서 들고 온
기러기를 받는다면 청혼을 어느 정도 수락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연후에 영감님께서는 매파를 보내어 궁합을 맞추어 봐야 해요. 우리 둘의 사주팔자를 붉은 종이에 써서 점쟁이한테 보여야 하지요. 다들 닭띠와 원숭이띠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영감님께선 원숭이띠고 소녀는 닭띠니 우리 두 사람의 궁합은 맞지 않아요……."
학 영감이 바보 같은 말투로 자긴 원숭이띠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형이 기쁜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원숭이띠가 아니면 다행이에요. 하지만 절차로 보아선 먼저 청혼을 하고 예장을 보내고 길일을 택하고 나서야 색시를 맞아올 수 있어요. 절차가 복잡하지만 다들 그걸 따르고 있지요."
학 영감은 아형의 속을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저 좋은대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아형이 나를 완전히 꺼리는 것은 아니구나. 계집의 마음이 다 그런 거야. 무엇 한 가지도 남한테 뒤지고 싶지 않은 거지. 하지만 육례를 다 갖추자면 얼마나 번잡스러운가. 전안례를 갖추고는 사주팔자 단자를 보내야 하고……. 이것저것 챙기다가 세월이 다 가겠는걸? '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영감님께서 저와 성혼하시려면 먼저 병묘 오라버니를 놓아주셔야 해요. 저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저 역시 영감님 뜻을 따를 수가 없어요.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어요?"
학 영감은 워낙 병묘를 놓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아형이 슬슬 구슬리는 바람에 어리석게도 아형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낭자가 놓아주라니 놓아주겠어!"
학 영감은 당장 병묘를 놓아주라고 영을 내렸다. 그의 졸개들이 못에서 병묘를 끄집어 내어 한쪽으로 던졌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병묘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기진맥진하여 연신 물을 토해내더니 이윽고 학 영감을 노려보며 말했다.
"언제든지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는지 한번 기다려 보지."
학 영감은 이렇게 빈정대더니 병묘를 끌어내게 했다. 졸개들은 병묘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들은 돌아와서 학 영감에게 병묘를 놓아준 일을 보고했다.
"작은 배에 태워 아무데로나 흘러가도록 띄워 보냈습니다.
학 영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형 말대로 병묘를 놓아주었네. 이제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 주겠는가?"
"영감님한테 몇 번이나 말씀 올렸어요? 숫처녀와 성혼하려면 육례를 갖추어야만 한다니까요."
아형의 말에 학 영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낭자가 나더러 자꾸 육례를 갖추라구 하는데 누구에게 갖춘단 말인가? 듣자니 낭자네 집엔 낭자와 하녀, 단 두 사람뿐이고 딸린 식구라고는 하나도 없다던데 내가 육례를 갖춘다 한들 그걸 받을 사람이 있기나 한가? 어디 대답해 보라구."
학 영감의 말에 아형은 새삼 마음이 쓰려 왔다. 계집애와 단둘이서 보내던 평온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아형은 계집애가 태호방 무리들한테 억울하게 생죽음을 당하던 처참한 광경을 회상하고는 불현듯 진저리를 쳤다.
학 영감은 아형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형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형이를 총명한 여자라고들 하더구만. 하지만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소용없어.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는 게 아형에게도 좋을 거야."
순간 아형의 가슴속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나쁜 놈…… 죽으면 죽었지 네 놈과는 안 산다. 네 놈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형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쌀쌀하게 내쏘았다.
"내가 왜 미화 공자와 치음 공자의 청혼을 거절했는지 알고나 계세요?"
학 영감은 얼떨떨해졌다.
"글쎄…… 낸들 알 수가 있나. 어쨌거나 마음에 안 드니까 그랬겠지?"
"치음 공자는 너무 말랐어요.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것 같지 뭐예요?"
학 영감은 자기 가슴을 탁 치면서 떠벌렸다.
"이 구두신취는 이만하면 보기에 괜찮지?"
아형은 경멸에 찬 눈길로 학 영감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영감님께선 장가를 들려면 왜 태호 주변에서 마누라를 찾으시지 않지요? 아무 노파든지 몸이 아직 건강하고 인품이 괜찮으면 되지 않아요?"
학 영감은 아형이 자기를 조롱한파는 것을 알고는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덮쳐 들어 아형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형 낭자, 내가 낭자를 중히 여기고는 있지만 낭자가 무서워 이러는 게 아니야. 낭잔 오늘 나와 성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낭자를 굴복시키고 말 테니까."
이때였다. 어디선가 웬 사람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 웃음소리는 이상야릇하게 높아졌다가 낮아지곤 하면서 마치 고저와 장단을 갖춘 노랫가락처럼 들려 왔다.
학 영감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러나 상대방은 대꾸는 하지 않고 여전히 웃어대기만 했다. 학 영감은 갑자기 짚이는 게 있었다.
"네 놈이 치음이지? 숨어 있지만 말고 냉큼 나와 봐라!"
그제야 웃음 소리의 임자가 점잖은 음성으로 대꾸해 왔다.
"구두신취, 네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냐? 그 나이에 너무 주책이라는 생각 안 드냐?"
학 영감은 냉소했다. 그의 웃음 소리는 석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학 영감이 대단한 내력을 썼음이 분명했다. 그는 이 웃음 소리로 사람의 정신을 혼란시키려 했던 것이다.
커다란 석상 앞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그는 짐작대로 치음 공자였다. 치음이 아형을 향해 말했다.
"아형, 그대의 운명은 왜 이다지 불운하오? 이 태호방의 소굴에까지 잡혀 와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오."
아형의 두 눈에서는 삽시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치음을 만나게 되니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치음 공자는 그녀에게 여러 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형을 좋아했으며 학 영감처럼 혼인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아형의 말이 옳소. 난 사실 너무 말랐소……."
치음이 말했다. 그 음성은 풀이 죽은 듯 조용했다.
아형은 치음이 나타나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학 영감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그러한 말을 치음이 엿들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치음에게 몇 마디 변명의 말을 하려 했지만 치음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형, 더는 말하지 말아 주오."
치음은 대범하게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돌려 석벽에 새겨져 있는 독수리를 보았다.
"이 꽁지 빠진 수탉 같은 짐승이 태호에서 우쭐거리려 하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
치음은 이렇게 냉소를 하더니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그 독수리에게 덮쳐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아형은 치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학 영감은 눈썰미가 빨라서 치음이 독수리의 두 눈에 박아놓은 야광주를 뜯어냈음을 알아챘다. 두 눈이 빛을 잃자 독수리의 흉맹스럽던 기세는 맥없이 사그라졌다.
치음은 자기 손바닥에 놓인 야광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한텐 계집이 하나 있는데 그 계집의 이름은 소희아라고 불러. 이 야광주를 그 계집애의 머리에 달아 주면 더욱 아름다워 보일 거야……."
말을 마친 치음은 그 야광주를 품속에 넣었다. 학 영감은 치음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말을 건했다.
"치음 공잔 정말 취미가 고상하군. 그 야광주는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야. 공자가 탐내고, 또 애첩한테 선물하겠다니 이 늙은이는 비록 아깝기는 하지만 달갑게 선물하겠네."
치음은 사실 학 영감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를 격노시키려 했다. 그가 격노하여 손을 쓰게 되면 허점을 찾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 학 영감은 참을성이 대단해서 그가 우상으로 섬기는 독수리의 눈알을 빼 냈는데도 성깔을 부리지 않고 태연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치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품속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가느다란 줄을 꺼냈다. 그는 그 금줄의 한쪽 끝을 발밑에 눌러 고정시키고는 왼손으로 다른 한쪽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윽고 그가 오른쪽의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금줄을 튕기자 금줄에서는 가락이 흘러 나왔다. 치음이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본래 천상의 신선인데
평생토록 삼현육각을 좋아했네
옥황상제가 나를 천상에 내려보내
혼란한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라 했네
기묘한 가락을 내가 만들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놀음으로 여기네
내가 그대 위해 한 곡조만 타면
붉은 해는 서산에 질 줄 몰라
불야천 (不夜天)을 이루고
내가 그대를 위해 한 곡조만 부르면
그대는 평생토록 잠들지 못하리.
금줄은 한 가닥뿐이었지만 별의별 기묘한 음조가 다 흘러 나왔다. 때로는 급류가 흐르는 듯 잦은 가락으로 울리다가도 때로는 잔잔한 호수마냥 느린 가락으로 은은하게 울리기도 했다. 아형과 학영감은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게 그 음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치음은 마지막 소절을 거의 불렀을 즈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디 맛 좀 봐라!"
그는 줄을 휘둘러 학 영감을 후려쳤다.
학 영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아형의 대혈 두 곳을 찔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급히 몸을 돌려 치음과 맞섰다.
천하의 무학에는 정해진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밭을 갈고 베를 짜고 노를 젓고 광주리를 짜고, 여하튼 아무 일에서나 모두 무예의 술법을 터득해 낼 수 있다. 자기의 손에 익은 물건이면 차차 표리가 생겨 그것을 병장기로 바꾸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듯 치음 공자 역시 한 가닥의 금줄로 별의별 술법을 다 부렸다. 찌르고, 휘감고, 때리고 하면서 달려드는 바람에 학 영감은 몸을
피하기에 급급해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치음의 자태는 아주 유연했다. 그는 두 발로 걸어도 궁상칠음(富商七韻)에 맞추어 다섯 발자국은 길고 두 발자국은 짧았는데, 이처럼 장단에 맞춘 그의 보법은 그야말로 절묘했다. 그는 진공을 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시까지 읊었다.
백아(伯牙)의 거문고 하나에
소근(昭君)의 여러 날 밤 아쟁 소리
문군(文君)의 백 가지 공후( )에
치음의 만 가닥 금줄이 울부짖네.
학 영감은 치음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음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와 아형 사이의 혼사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는가. 그는 당장이라도 치음을 잡아죽이고 싶었지만 금줄이 휙휙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날아오는지 라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 자신의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 잡는' 법수를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치음과 10여 합을 싸우는 동안 계속해서 몰리기만 했다
. 금줄이 그의 몸뚱이에 두 가닥의 길다란 상처를 남겼다. 양쪽 바짓가랑이도 치음의 금줄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너덜거리는 바짓가랑이가 자꾸 발목을 휘감는 통에 발을 움직이기가 아주 불편했다. 어느덧 그의 등도 금줄에 맞아 적삼이 다 찢어졌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학 영감은 대노하여 크게 세 번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석실 사면의 벽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시커먼 동굴이 나타났다. 그 동굴로부터 괴한 일곱이 날쌔게 달려 나왔다. 이들은 모두 태호방 일흔두개 봉의 두령들에 속하는 자들로 저마다 무예가 만만치 않았다.
학 영감이 두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소리쳤다
"이 놈을 죽여라!"
일곱 놈들은 치음을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일제히 덮쳐 들었다. 치음도 금줄을 더욱 잽싸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때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사나이가 양손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치음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내리찍으려 했다. 이는 이른바 '화산을 내리 찍는다〔力劈華山〕'는 술법이었는데 그 내리찍는 힘은 누구도 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치음은 태연하게 몸을 슬쩍 비키면서 금줄을 날려 그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금줄은 곧장 그의 면상으로 날아가서 두 눈을 후려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남은 여섯 놈은 고기잡는 작살이며 배에서 쓰는 큰 노, 긴 쇠사슬, 수화방패(水火 牌) 같은 것을 휘두르면서 달려 들었으나 치음의 술법에 기가 질려 함부로 설치지는 못했다. 놈들은 일제히 치음을 에워싸고는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치음도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태호방에는 일흔두 개의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만만치 않은 두목들이 있을 것이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 그들을 당해 내겠는가.
'얼른 손을 써서 이 몇 놈을 죽여 버리면 태호방 놈들이 나만 보면 겁이 나서 벌벌 떨거야.'
이렇게 생각한 치음은 더욱 거세게 금줄을 휘두르면서 〈큰 바람이 몰아치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원래 한고조 유방이 지은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금줄을 날리자 금줄은 마치 화살처럼 노를 들고 있는 자를 향해 날아갔다. 놈은 힘이 장사로 그가 손에 든 노는 무게가 쉰 근도 넘는 무쇠노였다.
금줄에 맞자 놈은 처음에는 모기한테 물린 듯이 가렵기만 했으나 갑자기 온몸이 마구 아파 왔다. 졸지에 왼쪽 팔소매가 찢어지더니 팔뚝의 근육이 천천히 갈라 터지면서 뼈까지 드러났다. 놈은 팔을 부둥켜안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치음은 다시 그 금줄을 거두어 들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몇 송이의 꽃을 만들어 냈다. 이제 그는 〈구름아 날아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다른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몇 떨기의 꽃송이처럼 변했던 금줄이 다시 송이송이 구름덩이처럼 다섯 놈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송이 구름이 검을 휘두르는 자 앞으로 흘러갔다
놈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금줄 복판을 찔렀다. 한데 놀랍게도 놈이 검으로 찌른 꽃송이는 환영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금줄은 복판이 비어 있었는데, 놈이 검으로 찌르자 오히려 동그랗게 된 금줄이 놈의 검을 따라 솟구쳐서 그의 손목을 옥죄었다.
"악―!"
비명 소리가 남과 동시에 놈의 오른손이 잘려 검과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치음의 이 선풍식 술법은 그야말로 무서웠다. 싸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셋이나 꺼꾸러뜨리자 남은 넷은 모두 멀리 그를 피했다. 그와 계속 싸우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던 것이다.
아형은 치음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도 이토록 미묘한 술법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녀는 한편으론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치음이 이기면 자기는 태호방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치음은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했다. 그는 금줄을 손에 쥐고 호통을 쳤다.
"태호는 일망무제하고 일흔두 개의 봉이 솟아 있어 살기는 어렵지 않은 곳이다. 네 놈들이 아형을 놓아주면 편안히 살게 내버려두겠지만 아형을 놓아주지 않으면 태호의 일흔두 개 봉우리를 몽땅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
"잠깐만!"
학영감이 소리쳤다. 그는 한 손으로 아형을 움켜잡고 치음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나두 치음 공자가 아형 낭자한테 빠졌다는 얘긴 들었어. 한데 그게 정말인가?"
치음이 대꾸하지 않자 학영감이 말을 이었다.
"태호 기슭에 계집들이 하늘의 잔별처럼 많지만 아형이 제일로 예쁘지. 네가 아형이를 좋아하고 그토록 흠모하지만 아형의 진짜 모습은 아마 보지 못했을걸?"
영감은 다짜고짜 손을 뻗쳐 아형의 뒤통수에서 은비녀를 뽑아 석벽 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순간 아형의 삼단 같은 머리가 폭포처럼 양어깨로 흘러내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미녀의 모습이 가장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여 주지. 치음 공자, 내 말이 틀리나?"
치음의 두 눈에는 갑자기 긴장의 빛이 어렸다.
"지금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가 더듬거렸다.
학 영감은 또다시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흐……. 너한테 아형 낭자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려는 거야……."
그는 이번에는 독수리발톱 같은 손가락을 들어 거리낌없이 아형의 옷을 찢어 냈다. 순간 상의가 홀랑 벗겨지더니 동실한 양어깨로부터 상반신이 여실이 드러났다. 봉긋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치음의 두 눈에 안겨 왔다.
치음은 얼른 그녀를 외면했다. 그는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는 길게 웃으면서 천천히 머리를 숙인 채로 몸을 돌리더니 체념조로 말했다.
"아형이를 난처하게 굴지 말아라. 내가 네 말을 들을테니."
"계집에 대한 사랑에도 이 세상에선 치음이를 따를 사내가 없을거야. 이처럼 사랑을 쏟는 사내가 있으니 아형 남잔 여한이 없겠구만. 으흐흐흐……."
학 영감은 한참이나 너털웃음을 웃어대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 놈을 죽여라!"
치음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석벽을 마주하고 서서 아형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한사코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평소에 날이면 날마다 아형의 알몸을 그려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형의 청초한 모습이 떠올라 그의 머리 속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꿈속에서의 상상일 뿐, 그는 오매불망 아형을 사모해 오면서도 아형에 대해 더러운 욕심을 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
다. 이러한 치음이 어떻게 아형의 알몸을 두 눈 버젓이 뜨고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겠는가. 치음은 몸을 기울여 두 손으로 석벽을 어루만지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다 싶은 쇠사슬잡이가 달려들면서 치음의 등판을 향해 쇠사슬을 냅다 후려갈겼다. 단번에 치음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왼쪽 어깨뼈가 부서지고 입에서는 왈칵 피가 쏟아졌다. 치음은 두 손으로 석벽을 더듬으며 천천히 일어서더니 얼마 서 있지도 못하고 스르르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아형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치음 도련님,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요……."
아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네 놈들은 저마다 병 장기들을 휘두르면서 마음껏 후려치고 찔러댔다. 치음은 거의 반주검 상태가 되었다. 급기야 치음의 금줄에 맞아 장님이 된 자까지 허우적거리며 달려들더니 쉰 근도 넘는 무쇠노로 치음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치음은 찍소리도 못하고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형은 더는 울지도 못하고 멍청히 치음을 바라보았다.
치음이 죽고 나자 학 영감은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욕정이 발동했다. 그는 음흉한 눈길로 아형의 알몸을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아형의 앵두알 같은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슬슬 건드렸다.
'무수한 영웅 호걸들이 목숨을 바쳐 가면서라도 얻으려 하던 계집이 끝내 이 어른의 노리개가 되는구나.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네 년을 굴복시키고야 말 테다……."
이렇게 생각한 학 영감은 독수리발톱마냥 두 손을 좌악 벌리고 덮쳐 들려 했다. 아형은 온몸이 조여드는 듯했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아형의 마음은 치음의 혼을 따라 훨훨 나는 듯싶었다. 아형은 여지껏 치음이 자기를 찾는 것을 한때의 욕정으로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만 여겨 왔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치음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형은
자기가 치음의 마음을 곡해하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치음의 죽음이 순전히 자기 때문이라 여기고 자신도 마땅히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그토록 사모하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린 사내를 따라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형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학 영감은 아형을 할퀴려다 말고 이상한 듯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학 영감은 대뜸 짐작이 갔다. 그의 얼굴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치음이를 따라 죽으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난 네 년을 반드시 내 계집으로 만들고야 말 테다! 네 년한테 사내만 보면 미치는 미약(媚藥)을 먹여서 나만 보면 사족을 못쓰게 만들 테야!"
학 영감은 거칠게 아형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는 아형의 아랫도리마저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석실 안에 꽃향기가 가득 풍겨 왔다.
학 영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 사내가 동굴 입구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꽃향기는 휜 장삼 차림의 그에게서 풍겨 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동굴 입구에 꿇어앉더니 치음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치음, 자넨 언제나 나와 겨루었지. 한평생 겨루어 왔단 말이네. 하지만 자네의 죽음을 보고 난 내가 졌음을 인정하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연거푸 삼배를 올리더니 몸을 일으키며 태호방의 두목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는 쇠사슬을 거머쥔 자를 향해 물었다.
"치음의 어깨뼈는 자네가 부스러뜨렸나?"
놈이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네 놈이 50일에서 하루 모자라는 49일 동안 고통을 겪게 해주마. 네 놈의 몸은 살점들이 한 점 한 점 썩어 들어가 나중에는 네 놈 스스로 마구 후비고 긁어 온몸이 상처와 고름투성이로 될거다!"
쇠사슬을 잡은 자는 이 말을 듣고는 부지중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네가 악에 받쳐 치음을 무쇠노로 때려죽였지? 네 놈은 죽어도 제일 처참하게 죽어 마땅하지만, 두 눈깔이 그 모양이 되었으니 널 기분 좋게 죽여 주겠다. 킬킬거리면서 웃다가 죽게 해주겠단 말이다!"
미화 공자는 그 밖의 몇 놈들에게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일일이 알려 주었다.
미화가 안하무인격으로 거들먹거려자 학영감이 비양거렸다.
"오호, 그럼 난 어떻게 죽일 작정이지?"
미화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치맛자락으로 간신히 알몸을 가린 채 수치심으로 떨긴 있는 아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른 시선을 거두며 씹어 뱉듯 말했다.
"네 놈은 아형 낭자의 뜻에 맡기겠다. 아형이 찔러 죽이라면 찔러 죽이고, 토막내어 죽이라면 그대로 따를 것이다!"
학 영감은 악에 받쳐 대꾸했다.
"좋아, 좋아. 보아하니 네 놈에겐 빼어난 술법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솜씨를 보여 봐라!"
말을 마친 학 영감은 아협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면서 한 보 한 보 미화에게 다가들었다.
미화가 아랑곳없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 학 영감은 오산했어……."
학 영감은 다소 놀란 듯 흠칫했다. 미화가 큰소리를 쳤다.
"학 영감은 내가 치음이처럼 어리석은 줄 아는가?"
학영감이 여전히 다가오자 미화는 벽력같이 소리쳤다.
"거기 멈춰 서지 못할까!"
학영감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죽이려고 들면 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지 어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 봐라!"
미화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쇠노를 잡은 실명한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순간 그 사내는 삽시에 기색이 돌변하면서 얼굴의 살가죽이 경련을 일으키듯 푸들푸들 떨었다. 이윽고 그는 단말마작으로 비명을 세 번 올리더니 데굴데굴 구르다가는 급기야 킬킬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점차 뻗뻗하게 굳어져 갔다.
태호방의 무리들은 그가 졸지에 돌처럼 굳어 버리는 것을 보고는 하나같이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못박인 듯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미화는 넋 나간 듯 멍청하니 서 있는 태호방 무리들을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다가는 다시 학 영감을 노려보았다.
"학 영감, 방금 내 생각이 달라졌어. 만일 영감이 다시 아형 낭자를 건드리는 날에는 그 자리서 죽는 줄로 알라구!"
제8장 미화와 병묘
태호방의 무리들은 모두 이 미화 공자를 잘 알고 있었다. 미화에게 있어서 꽃은 남을 제압하는 극약이었다. 사람이 꽃에 혹하면 정독(情毒)이요, 사람이 꽃에 취하면 심독(心l毒)이다. 태호방 무리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미화의 화독(花毒)이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너무나 강하며 누구나 취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 꽃향기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미화가 겁을 주자 학 영감은 더는 아형을 미끼로 미화를 협박하지 못했다.
미화는 태호방 무리들을 둘러보면서 호통을 쳤다.
"네 놈들은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종들이다! 모조리 죽여 없애야 내 속이 시원하겠어!"
그의 말에 쇠사슬을 거머쥔 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자식의 말대로라면 난 49일 동안 견디기 어려운 시달림을 받다가 죽게 돼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는 거 시간을 끌며 고통받기보다는 싸워 보기라도 하다가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마음을 굳히고 두 손을 휘둘러 미화의 정수리를 향해 쇠사슬을 날렸다. 그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휘두르니 쇠사슬은 미화의 목과 정수리를 향해 윙윙 소리를 내며 번개같이 이쪽저쪽으로 내리꽂혔다. 미화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몇 발짝 물러서면서 겁을 주었다.
"원래 네 놈은 49일 만에 죽게 돼 있었는데 이처럼 기운을 다 뺐으니 기가 대혈로 빠지고 기가 온몸에 흘러서 독성은 당장 네 온몸에서 발작할 것이다!"
하지만 놈은 믿지 않고 계속 쇠사슬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미화는 요리조리 피할 뿐 손을 쓰지 않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갑자기 놈은 두 눈을 커다랗게 흡뜨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가락들이 안으로 굽어 들더니 완전히 오그라졌고 동시에 목 안에서도 숨이 막히는 소리가 꺽꺽 들려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의 두 눈알이 개구리눈깔처럼 밖으로 튀어나오더니 급기야는 두 줄기의 피가 왈칵 쏟아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태호방 무리들은 하나같이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 미화가 드리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꽃이 향기롭다고들 말하지만 난 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싶다. 꽃이 향기롭다면 이상할 게 조금도 없지만 꽃이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다들 아마 무슨 뜻이냐고 머리를 갸우뚱할 거야."
미화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면서 학 영감 쪽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차 영감은 그의 손을 아형의 등에 얹은 채 미화를 주시했다. 학 정감이 손바닥에 장력을 넣기만 하면 아형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게 된다. 학 영감은 미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바짝 눈여겨 보았다. 미화가 암암리에 술법을 피워서 언제 자기를 죽일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학 영감, 아형을 놓아주기만 하면 난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난 영감의 태호방 일흔두 봉우리의 무리들을 하나도 날기지 않고 몽땅 씨를 말려 버릴 테요."
미화의 이 위협에 학 영감fall 대꾸했다.
"미화 공자, 사람들이 모두들 공자를 어리석다 하지만 난 여지껏 이 말을 믿질 않았네. 그런데 지금 보자니 그게 사실이구만."
미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허허, 내가 어리석다구? 그럼 학 어른님께서 잘 일깨워 주시구려."
"사람이 꽃밭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객이라고들 한다네. 듣자니 자네한테는 계집이 백도 넘는다면서? 그리구 계집들마다 다 그럴듯한 꽃이름이 붙여져 있구. 대관절 자넨 그 중에서 어느 계집을 제일 좋아하나?"
학 영감의 물음에 미화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집엔 실로 백에 가까운 계집들이 있지. 그 계집들은 시골의 촌뜨기들과는 달리 저마다 미목이 청수하고 몸매도 아름답지. 난 그 계집들에게 난초며, 매화, 국화 등의 꽃이름으로 아명(雅名)을 붙여 주었지. 그러니 학 영감의 말처럼 내가 꽃밭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백에 가까운 계집들 중에 아형을 능가할 계집은 하나도 없어. 아형은 영리하고 총명할
뿐더러 취미가 고상하고 떡자로서의 결벽함과 오기도 갖추고 있어 보통 계집들과는 확실히 달라.'
미화가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학영감이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미화 공자께서는 꽃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있고, 또 그러다 보니 천하의 어여쁜 꽃들을 숱하게 독차지하지 않았소? 그 많은 꽃 같은 계집들 속에서 공자는 한평생 얼마든지 재미를 볼 수 있을텐데 뭣 땜에 아형이까지 끌어가지 못해 야단인가?"
미화는 더는 들은 체도 않고 계속해서 학 영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호방의 무리들은 누구 하나 감히 덤벼들 엄두를 못 내고 물끄러미 미화의 거동을 지켜 볼 뿐이었다.
미화는 곧 학 영감의 앞에 멈춰 섰다.
아형은 미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고 담담했다.
미화는 아형에게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아형 낭자, 그 꽃을 찾을 수 있겠소?"
아형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미화 도련님께서 전번에 오셨을 때 전 방안에 숨어서 나가지도 않았어요. 정말 실례를 했어요. 옛날 책을 들춰 보았더니 그 꽃에 대해 좋은 점이 많이 적혀 있더군요."
"무슨 좋은 점들이 씌어 있었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학 영감은 부지중 속이 뒤틀렸다.
'제기랄, 연놈들이 별지랄을 다하고 있네. 마치 제집 뒤뜰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학 영감은 한마디 하려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미화가 대뜸 소리쳤다.
"입을 다물라구! 입을 열었다간 후회하는 일이 생길 테니까!"
학 영감은 찍소리도 못했다.
미화는 아형을 바라보며 계속 물었다.
"그 고서에 무어라 적혀 있었소?"
아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첫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윽한 그 향기는 사향이나 난초에서 풍기는 듯하도다. 가까이 가면 은은하고 멀리서는 짙도다. 은은한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고 짙은 향기는 그윽한 상념에 잠기게 하는구나."
미화는 아형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훌륭한 문구로구만, 이것은 꽃의 향내를 말했지만 꽃의 기(氣)를 말한 것이기도 하오."
아형은 계속하여 고서의 문구를 이야기했다.
"그 꽃을 보면 마치 친숙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하여라. 바람에 한들거리는 나뭇가지와 잎새들은 모두 무슨 말을 속삭이는 듯하여 일지일엽 (一枝一葉)은 모두 꽃의 마음을 드러낸 듯하도다."
미화는 또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훌륭한 문구로구만. 이것은 바로 화식(花識)과 화용(花容)을 말한 것이오."
아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꽃의 모양은 천태만상이다. 어여쁘지만 요염하지는 않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는 하지만 너무 혹하게는 만들지 않는다."
미화는 손뼉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
"옳아. 이것은 꽃의 고아(高雅)함과 꽃의 정신을 말한 것이오."
"진시(辰時)라고 말할 때면 이미 사시 (巳時)가 아니며 자시(子時)라고 말할 때면 축시(丑時)가 아닌 법이도다. 꽃은 피는 철이 있는 법이니 시일을 기다릴 수 있도다. 마치 점잖은 군자마냥 신의를 지키나니 절대 변심치 않을 것이로다."
"훌륭하오. 이것은 꽃의 신의와 꽃의 품위를 말한 것이오."
"고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조목들에 다 맞는 꽃이야말로 천하의 꽃들 중의 왕이라는 거였어요."
아형의 말에 미화는 갑자기 멍청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중지왕, 화중지왕……. 난 너무 아둔해. 왜 여태껏 이건 생각지 못했을까?"
학 영감은 미화가 멍청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눈치채고 이 틈에 손을 쓸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만일 손을 잘못 썼다가 미화를 꺼꾸러뜨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던 것이다.
이때 미화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 들었다.
'나는 여지껏 헛수고를 한 게 아닌가. 만물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것을 모르고 억지로 꽃들을 떠다 집에다 옮겨 화중지왕으로 키우려 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방도로 화중지왕을 얻으려 하는 것 은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아형의 말대로 인간세상에서 화중지왕을 찾으려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천연(天綠)에 달렸지 사람의 힘으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
이쯤 생각한 그는 학 영감을 건너다보며 구슬리기 시작했다.
"아형 낭자를 놓아주기만 하면 난 절대 영감을 성가시게 굴지 않겠소."
학 영감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형을 놓아주면 무슨 수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잔말 말구 냉큼 사라지라구. 난 꼭 아형을 내 마누라로 만들 테니까.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어!"
미화가 이죽거렸다.
"속담에 붉은 꽃은 푸른 잎이 받쳐 주어야 한다고 했어. 학 영감, 오줌을 싸서 그 오줌물에 낯짝을 한번 비춰 보라구. 그 쭈글쭈글한 낯가죽을 가지고 아형과 함께 살겠다니 소 웃다 뱃고래 터질 일 아닌가?"
미화는 못 참겠다는 듯 껄껄 웃어댔다. 웃음 소리는 석실 안에서 오래오래 메아리쳤다.
"이 놈아, 닥치지 못할까!"
학 영감은 크게 노하여 아형의 대혈 세 곳을 찌른 뒤 몸을 날려 미화에게로 덮쳐 들었다.
미화는 슬쩍 몸을 피해 일장을 갈겼다. 학 영감은 한쪽으로 나뒹굴면서 잽싸게 아형을 끌어당겼다. 바로 이때 둘이 선 땅바닥에서 널빤지 하나가 툭 솟아오르더니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미화는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물론 한쪽에서 지켜 보고 있던 태호방 무리들까지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때였다. 동굴 문이 우릉우릉 소리를 내더니 꽉 닫혀 버렸다. 미화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돌문이 닫히면 그는 꼼짝없이 이 석실 안에 갇히게 된다. 그는 잽싸게 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문을 밀어 보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휑뎅그렁한 석실 안에는 미화 한 사람만 남았다. 사방이 온통 석벽으로 돼 있는 석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 나갈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는 체념한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아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호방 학 영감의 손아귀에 든 이상 아형의 운명도 절망적이었다. 이제 누가 나서서 아형을 구할 수 있겠는가.
병묘는 태호방의 졸개들에 의해 작은 쪽배에 처박혀진 후 바람따라 물결 따라 반나절이나 정처없이 표류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혈도들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는 그는 허기까지 겹쳐 배에 몸을 맡긴 채 쿨쿨 잠만 잤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눈앞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어른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 배는 호수 기슭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갑판에 널린 빨래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옷들은 울긋불긋한 여자 옷이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자유자재로 나부꼈다.
큰 배에서 웬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저길 봐. 웬 쪽배가 떠오네!"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대꾸했다.
"저 배에 무슨 좋은 물건이라도 있을 것 같나 부지?"
"저 따위 작은 배에 있긴 뭐가 있겠어?"
"아마두 빈 밸 거야. 있어 봤자 죽은 사람 시체 정도겠지."
병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내가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데 시체로 보다니……."
쪽배는 바람에 밀려 큰 배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병묘는 죽은 듯이 누워 큰 배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배는 돈 많은 부잣집에서 나 갖출 수 있는 훌륭한 것으로 고기잡이나 하는 배는 아니었다.
한 아리따운 처녀와 사내아이의 모습이 병묘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아이가 소리쳤다.
"저것 봐! 묘하게도 맞췄네. 정말 죽은 사람이 누워 있잖아?"
처녀와 사내아이가 고개를 잔뜩 빼고 병묘가 탄 허를 내려다보았다. 병묘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숨소리마저 낮추었다. 사내애가 다사 입을 열었다.
"와, 되게 잘생겼는데? 누난 언제나 남자는 살갗이 너무 희고, 여자처럼 곱게 생기면 못쓴다구 했지 않았어? 그런 사내는 사내답지 못하다구 말이야. 사내라면 눈썹이 짙고 두 눈이 부리부리해야 한다구. 누나 말대로 이 사람은 눈썹은 아주 짙은데 눈이 부리부리한지는 알 수 없군."
"어머, 가엾어라. 무슨 고초를 당했길래 이 모양이 되었을까?"
처녀는 온통 상처투성이인 병묘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삿대를 가져다가 저리로 밀어 버릴까?"
"아니야,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지도 모르잖아."
"누나도 참, 보면 몰라? 죽은 시체가 분명해."
"내가 내려가서 보고 오겠어."
처녀는 뱃머리에 나와 섰다.
그녀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병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한참 망설이다가는 마음을 다잡아 작은 배에 뛰어내렸다.
부드러운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어 보는 처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병묘는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위안을 받았다. 처녀는 손을 옮겨 병묘의 팔목과 발목도 만져 보았다.
"어떤 놈들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었을까? 정말 지독하군……."
병묘는 처녀의 말속에서 자기에 대한 한없는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는 감히 눈을 뜨지 못한 채 코끝에 감겨 오는 처녀의 체취를 가만히 음미했다.
병묘가 한참 황홀경에 빠져 있는데 '퉁!'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몹시 흔들렸다. 다름아닌 사내애가 배에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는 병묘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죽은 지 오래 라니까? 암만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야!"
처녀는 대꾸를 하지 않고 병묘만 지켜 보았다.
사내애가 다시 말했다.
"혹시 태호방한테 모해를 당한 게 아닐까?"
"조용히 해."
처녀가 나지막한 소리로 나무랐다. 그러나 사내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내 생각엔 수장(水葬)을 하는 게 좋겠어. 누구든지 이 꼴을 보면 간이 떨어지게 생겼거든."
사내애의 말에 처녀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병묘는 속으로 당황했다.
'나를 물 속에 던져 수장을 하겠다구? 가만 있다간 물귀신이 되게 생겼군.'
사내애가 마땅찮은 듯 투덜거렸다.
"누난 뭘 그렇게 자꾸 들여다봐? 생판 모르는 죽은 사람을 자꾸 들여다보면 돈이라도 나오나?"
병묘는 여전히 숨을 죽이고 죽은 체했다.
이때 사내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옳지, 좋은 수가 있어. 이 시체에다 몇 번 더 칼질을 해서 물 속에 처넣으면 고기들이 좋아라고 모여들어 깨끗하게 먹어 치울 거야? 어떻게 생각해, 누나?"
처녀는 성이 나서 사내애의 팔을 집어뜯었다.
"허튼 짓 말어!"
처녀는 병묘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세요, 숨이 붙어 있으면서 왜 죽은 척해요?"
그러자 병묘는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농담을 던졌다.
"난 죽었댔소. 한데 낭자의 어진 마음에 의해 다시 살아난 거요."
병묘는 큰 배에 올랐다. 그는 몹시 놀랐다. 이 배는 밖에서 보기보다 직접 선실에 들어가 보니 그 호화로움이 비길 데가 없었다. 배의 갑판은 침향목(沈香木)으로 깔았고 탁자와 걸상은 모두 배에 고정시켜 놓았으며 수많은 골동품과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병묘는 선반 위에 진열된 골동품들과 진주, 보석, 옥기들이 흔치 않은 것들이며 그 가치는 돈으로는 계산할 수도 없는 것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처녀와 사내애는 병묘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차를 가져왔다. 병묘는 찻잔을 들어 단숨에 쭉 마셔 버리고는 말했다.
"차보다는 술이 나은데."
"맞아요. 과연 사내 대장부다우신 말씀이에요."
사내애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사내애는 곧장 선실 뒤쪽으로 달려가 술단지를 안고 왔다.
"술 생각이 나시면 사양 말고 마시세요."
사내애가 이렇게 권하자 병묘는 빙그레 웃으면서 술단지를 봉한 뚜껑을 뜯었다. 그가 기뻐하며 말했다.
"좋은 술이로구만. 정말 좋은 술이오!"
원래 이 술은 소문난 명주로 유난히 물처럼 맑았으나 술맛이 향기롭고 짙어서 서너 잔이면 누구나 취하게 돼 있었다.
사내애가 병묘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술시중을 들어 본 적이 없는지 술을 따르는 솜씨가 매우 서툴렀다. 병묘는 술을 받기가 무섭게 걸신들린 사람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를 지켜 보던 처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는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성은 병( )씨구 이름은 묘(苗)라서 병묘라구 한답니다. 더러는 사안묘라고도 부르지요."
"손님의 모양을 보아서는 태호에서 배나 다루는 뱃사람 같지는 않고 부잣집 도련님 같아요."
처녀의 말에 사내애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 손님이 도련님 같으면 나는 왕자님 같겠네?"
사내애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병묘를 시답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병묘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한 병모를 보며 처녀가 만류했다.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워요."
이때였다. 사내애가 갑자기 술단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내기 안 할래?"
내기를 하자는 말에 병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리멍텅하던 두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는 대뜸 사내애를 건너다보았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사내애는 자기를 보고 말을 걸어 온 게 아니라 처녀를 보고 한 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어. 손님이 계신데 내기는 무슨 내기야?"
처녀가 나무라자 사내애가 퉁명스레 대구했다.
"내기를 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기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처녀는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내긴데?"
사내애가 가슴팍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난 이분이 술고래라는 걸 첫눈에 알아봤어. 난 이분이 한꺼번에 이 술단지를 바닥낼 수 있다고 믿어! 누나 생각은 어때?"
처녀는 빙긋이 웃으며 병묘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이 애 말처럼 그렇게 술을 잘 마시나요?"
병묘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 먹는 재주야 둘째가라면 서럽지요."
병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내애가 말했다.
"어떤 잔으로 마시겠어요?"
그는 곧장 다람쥐처럼 뛰어가서 선반 위에 있는 표주박들을 가져왔다. 이런 표주박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제일 작은 것은 사람의 귀만 했고 제일 큰 것은 큰 바가지만 했다. 사내애는 작은 것부터 차례로 병묘 앞에 내밀면서 물었다.
"이 잔이 어때요?"
이렇게 물을 때마다 병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내애는 결국 제일 커다란 표주박에 술을 철철 넘치게 따랐다. 병묘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는 마치 황소가 강물이라도 들이켜듯 벌컥벌컥 마셨다. 잔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처녀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으세요……?"
그러나 병묘는 온몸에 술기운이 퍼지기 시작하자 술만이 더욱 당겼다.
"이 술단지를 마저 비워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
그는 처녀와 사내애가 대답할 새도 없이 두 손으로 술단지를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처녀와 사내애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번갈아 쳐다볼 뿐 말을 못했다.
술 한 단지를 다 비우고 나자 병묘는 비로소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제끼고 처녀와 사내애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병묘의 눈에 비친 처녀의 용모는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다. 두 눈은 호수처럼 크고 맑았고 오똑한 콧날에 얌전하게 다물어진 입매가 언제나 웃는 듯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밖에도 담황색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는 그녀의 용모와 청초한 몸매를 더욱 돋
보이게 했다. 사내애는 걸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병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병묘는 이제 눈길을 돌려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선실은 침대 네 개를 놓을 만한 크기였는데 삼면은 벽이고 한쪽에만 창문이 두 개 있었다. 삼면 벽에는 정교하게 만든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고 선반 위에는 처음 들어을 때와 마찬가지로 희귀한 골동품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병묘가 보기에 처녀와 사내애는 이 배에서 일하는 하인들 같았다. 이들의 차림새로 보아 절대로 배의 주인인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배의 주인님은 어디 사는 누구요?"
병묘의 물음에 사내애는 처녀에게 눈길을 주다가는 다시 병묘를 바라보았다.
"그…… 그분은 안 계세요."
"아가씨와 젊은이는 이 배에서 심부름을 하는 게지요?"
처녀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사내애는 팔딱 뛰어 걸상에 앉으면서 놀랍다는 듯 물었다.
"손님께선 어떻게 우리가 배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병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과연 내 짐작대로군. 한데 이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처녀가 남의 배에서 심부름이나 하다니 너무 아까운데?'
병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처녀가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무슨 연고로 배에 실려 여기까지 표류해 오신 건가요?"
처녀의 물음에 병묘는 난감해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내막도 잘 모르는 처녀와 사내애 앞에서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어물거리자 처녀도 더는 캐묻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병묘는 처녀를 슬며시 훔쳐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처녀도 아형처럼 솜씨가 있고 마음이 착한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아형만큼은 아냐. 어떤 여자도 아형을 능가하진 못해.'
그는 아형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아형은 지금 그 늙다리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그 늙다리는 여전히 성혼하자고 아형을 못살게 굴고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당장 찾아가서 아형을 구하지 않으면 그녀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리라.
병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녀와 사내애를 향해 읍을 했다.
"난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게 있소. 폐를 많이 끼쳤는데 실로 감사하오."
이렇게 인사를 한 병묘는 처녀와 사내애가 만류할 새도 없이 선실 밖으로 나갔다.
선미에 나가 서서 사방을 살피던 병묘는 절망감을 느꼈다. 타고 온 배를 고물에 단단히 매어 놓지 않은 탓에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병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처녀와 사내애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처녀가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급한 용무가 계신지요? 만일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힘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병묘는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했다. 처녀에게 자기의 상황을 털어놓는 게 어떨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남의 배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므로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난 복수를 하려는 것이오. 태호방 무리들을 찾아서 복수해야 할 일이 있소. 두 분은 남의 배에서 일을 보시는 처지에도 내게 술도 주고 잘 쉬게 해주어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아무튼 정말 고맙소."
그는 말을 마친 뒤 다시 읍을 하고 몸을 돌렸다. 헤엄을 쳐서라도 다른 배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물에 뛰어들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아랫배에 통증이 엄습해 온 것이다. 그는 너무 아파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지쳤으니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여기고는 뱃머리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공자님, 낯색이 말이 아니군요. 몸조리를 잘 하신 후에 태호방을 찾아가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스러운 듯 처녀가 말했다.
"난 하루라도 빨리 태호방 놈들을 찾아가야 하오. 우선은 나를 철판봉까지 데려다 줄 배를 찾는 게 시급하오."
병묘는 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병묘를 바라보는 처녀의 눈길에는 동정과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태호방을 찾아가 복수를 해요?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아요? 하루나 이틀을 쉰다 해서 복수를 못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병묘는 처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했으나 당장 아형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생각해 주어 감사하오, 하지만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럴만한 사정이 있소."
병묘는 그 말을 마치자 풍덩 물에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몸이 물 위에 떠 주지를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 몸에 힘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 처녀가 얼른 물 속에 뛰어들었다. 처녀의 수영 솜씨는 대단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병묘에게 다가와서 그의 목덜미를 거머쥐고는 큰 배 옆으로 끌고 갔다. 사내애가 배 위에서 밧줄 두 가닥을 던져 주자 처녀는 그 밧줄로 병묘를 묶은 뒤 잡아당기라고 눈짓을 했다. 사내애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병묘를 배에 끌어 올렸다.
병묘는 온몸이 물에 젖어 후줄근한 채 갑판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확연히 깨달았다. 태호방 놈들은 그가 모르는 새에 그를 독약에 중독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놈들이 어찌 그처럼 간단히 그를 놓아줄 수 있었겠는가.
병묘는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아팠다. 무공을 상실한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아형을 구할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헤엄도 치지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아형을 구하겠는가.
처녀는 허리를 굽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병묘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보기에 공자님께선 병이 들었어요. 가벼운 병이 아닌 것 같아요. 선실 안에 들어가 푹 쉬시는 게 좋겠어요."
병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철판봉에 가는 일은 거의 포기상태였다. 아형을 구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건사하기 어려운 판에 태호방 놈들을 찾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처녀와 사내애는 병묘를 부축하여 선실에 데려다 눕혔다. 처녀가 말했다.
"어서 옷부터 바꿔 입으세요. 여기에 갈아입을 옷들이 있어요. 그 젖은 옷을 벗고 몸을 말려야 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사내애는 병묘가 젖은 옷들을 벗는 것을 거들었다. 병묘는 옷을 갈아입고는 사내애에게 물었다.
"이봐, 젊은 친구. 누님은 이름을 뭐라고 부르나?"
사내애는 한심하다는 듯 병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손님께선 정말 딱하시군요.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 이름이 필지도 모르고 있다니요? 실례도 그런 실례가 어딨어요?"
병묘는 민망해져서 더는 캐묻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처녀는 갑판에서 대나무로 만든 바지랑대에 걸려 있던 옷들을 거두어 가지고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처녀가 물었다. 병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공자님 안색을 보아서는 병이 가벼운 것 같지 않아요. 저희들과 함께 의원을 찾아가 맥을 짚어 봐야겠어요."
병묘는 거절하려 했으나 여전히 끊어질 듯 배가 아픈데다 기진맥진하여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선실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절커덕거리면서 닻을 감아 올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병묘는 배가 곧 떠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찰싹찰싹 물소리가 가볍게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배가 물을 가르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병묘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배엔 자기말고 사람이 둘뿐이고 그나마 하나는 섬약한 처녀에다 다른 하나는 아직은 풋내기 소년인데 이 큰 배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무침대에 누운 채 열려진 선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연달아 뒤로 물러서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보아 달리는 배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 배는 오랫동안 달리다가 좌우로 뱃머리를 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병묘가 다시 밖을 내다보니 배는 끝없이 펼쳐진 갈밭 속을 요리조리 헤치며 물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갈꽃이 한창인 계절일지라 흩날리는 갈꽃가루들이 끝없이 선창 안으로 날아들었다. 병묘는 시선을 돌려 선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 보았다. 아무리 화려한 선실이라 할지라도 병든 환자가 혼자
누워 있기엔 썰렁하기만 했다. 병묘의 가슴은 재가 된 듯했다. 이제 그에겐 아무런 욕구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죽은 듯이 누워서 이미 흘러간 자기의 반평생을 들이켜보았다. 이 몇십 년 동안 그는 강호바닥을 누비며 일단 마음먹은 일이면 반드시 해치웠으며, 또 감히 방해하는 자도 얼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지경으로까지 되었으니 강호의 옛 친구들을 무슨 낯으로 대한단 말인가? 그는 암담한 생각에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그는 이 배를 나서는 대로 사람들이 모르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 조용히 목숨을 끊으리라 마음먹었다.
제9장 사불과 악귀
배는 낭하처럼 뻗어 나간 비좁은 물길에 들어섰다. 배가 지나는 양편에는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배는 이렇게 한참을 전진하다가 드디어 뭍에 닿았다. 이 뭍에는 이상하게도 줄기와 가지들이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다. 닻을 내리자 처녀가 선실에 들어섰다.
"도착했어요."
그녀는 병묘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병묘가 선실 밖에 나가서 둘러보니 이 개활지는 그다지 넓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마치 물 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았는데 인가 하나 없이 온통 나무들뿐으로 그나마 너무나도 빽빽하게 모여 있어 마치 몽땅 한 뿌리에서 돋아난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은 배를 떠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들어가니 나무 숲은 더욱 무성했다. 비집고 나갈 틈새가 없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사람의 위엄 있는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에헴, 그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오? 여긴 왜 찾아왔소?"
"저희들은 태호의 보선(寶船)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기 한 분이 독약에 중독되어서 선배님을 찾아오는 길이에요."
처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위엄 있는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태호의 보선에서 산다니 그대는 사불이겠군?"
병묘는 들려 오는 음성을 듣고 음성의 주인은 적어도 육칠십 세쯤 되는 노인일 거라고 단정했다.
처녀는 양팔을 엇갈아 앞가슴에 가져다 대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래요, 소녀가 바로 사불이에요."
"그럼 그대와 함께 동행한 사람은 악귀이겠구만?
"그래요, 제가 바로 악귀랍니다."
사내애는 기뻐서 이내 대답했다.
"그대 둘의 음성을 들으니, 비록 내력은 쓰지 않았지만 숨소리가 평온하니 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은 누구지?"
"상처를 입은 분은 태호에서 이름있는 병씨네 도련님이에요. 태호방의 놈들과 무슨 일로인지 싸우다가 독약에 중독되어 이 지경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배님을 찾아왔어요. 불쌍히 여기셔서 목숨을 구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처녀가 이렇듯 간청하자 상대방은 대답은 하지 않고 껄껄 웃어댔다.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이윽고 그는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난 남을 도와도 절대 그저 도와준 적이 없어!"
처녀가 대답했다.
"소녀는 전부터 선배님의 이런 법도를 잘 알고 있지요. 소녀는 선배님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태호 보선에는 쓸 만한 물건들이 적지 않으니깐요. 병 도련님의 목숨만 살려 주시면 무엇이든 선배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골라서 드리겠어요."
처녀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웃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다. 이 웃음 소리에는 분명히 야유와 조소가 섞여 있었다.
"태호 보선? 그 배에 대관절 무슨 물건들이 실려 있기에 태호 보선이라고 해? 사불과 악귀는 내 말을 잘 들어라! 그 따위 헐망한 배 한 척을 타고 다니면서 우쭐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 안 드느냐?"
그는 또다시 한바탕 웃어댔다.
사내애는 부지중 부아가 났다.
"남의 배 안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나 알구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아. 아무튼 그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는 보여 주어야겠어. 다시는 허풍을 떨면서 돌아다니지 못하게 말이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세 사람의 눈앞이 환해졌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목소리의 임자가 그들이 서 있는 주변의 나무들을 뽑아 멀찍이 던져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창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 앞으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훤히 나타났다.
셋은 서로 부축하면서 그 통로를 따라 나무숲 복판에 닿았다.
그들의 눈안에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무숲 복판에는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두 층으로 나뭇가지들이 자라고 있었다. 첫층은 땅에서 7,8척이 되었는데 나뭇가지들은 몽땅 옆으로만 뻗어 있었다. 바로 이 첫층의 나뭇가지들이 얽힌 곳에 목판이 걸쳐져 있고 웬 사람 하나가 그 목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려 등과 앞가슴을 가렸는데 그 백발은 신비로운 빛을 자아냈으며 백설같이 흰 눈썹 또한 말할 수 없이 신령스러워 보이게 했다. 그는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무 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가슴 언저리에만 자그마한 물고기 껍질이 붙어 있었다.
처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금 공손히 청을 했다.
"선배님께 부탁하옵니다. 병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나무 위의 사람이 물었다.
"내가 병 도령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면 넌 나한테 뭘 주겠느냐?"
"이건 소녀의 태호 보선에 실려 있는 금은보화들과 골동품들을 일일이 다 적어 넣은 물목단자이옵니다. 선배님께서 어느 것이든지 마음에 드시는 것이면 이 단자에 표시를 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처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손을 휘익 저었다. 그녀의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얇은 가죽 한 장이 나무 위의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병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난 이 처녀와 사내애를 지금껏 남의 배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종쯤으로 여겼는데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
가죽장을 받아 쥔 백발의 사나이는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 가죽장을 몇 번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고는 대답했다.
"사불아, 아무래도 네 흥을 깨야 하겠다. 이 물목단자에 적혀 있는 물건들이 2백여 종은 족히 되는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 따위 물건들이 대단한 보물로 보일지 모르겠다만 내 눈엔 죄다 폐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그가 손을 휘익 저었다.
그 엷은 가죽장은 다시 허공을 날았다. 처녀가 손을 내밀어 받아 쥐려고 하는데 그 가죽장은 묘하게도 방향을 획 바꾸어 사내애의 옆을 뱅그르르 돌더니 다시 처녀 앞으로 날아왔다. 사내애는 허우적거리면서 겨우 그 가죽장을 잡았다. 순간 그는 거대한 힘에 밀린 듯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나무 위에 올라앉은 괴인이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악귀야! 그 가죽장을 받아 쥐는 걸 보니 네 공력이 대단하구나."
병묘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이 사내애도 과연 괴인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큰 힘을 가진 가죽장을 받아 쥐었으니 말이다.
처녀는 잠자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놀라운 재주에 저희들은 실로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는 대관절 무슨 보물들을 가지고 계시기에 저희들의 태호 보선을 이토록 멸시하십니까?"
괴인은 다시금 크게 웃어댔다. 괴인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사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이 소인(巢人)의 재물들을 보여 주지!"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사불아, 너희들 셋이 왼쪽으로 몇 발자국만 가면 나의 첫번째 보물인 침대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들 셋은 소인의 말대로 몇 발짝 움직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침대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눈앞에는 크기가 거의 침대만한 조개 껍데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조개 껍데기가 아니라 딱딱한 거북이등 같아 보였다. 사내애가 호기심에 주먹으로 몇 번 치자 댕댕댕 괴상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셋은 서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이따위 거북이 등 같은 물건이 왜 보배라고 자랑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처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배께서 저희들한테 보이신 이 물건이 대관절 어째서 희귀한 보물이라고 하십니까? 저희들은 영문을 잘 모르겠으니 똑똑히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거북이 껍질에서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셋은 그 거북이 껍질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거북이 껍질이 침대만큼이나 큰데도 움푹하게 패인 곳에는 물 한 방울도 없었고 티끌 하나 없었으며 심지어 풀잎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셋 중에서는 그래도 사내애가 가장 약삭빨랐다. 그는 땅에서 마른 풀 한 개를 집어서 거북이 껍질 안에 던졌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마른 풀은 나풀거리면서 거북이 껍질 안에 날아 들어가기는 했으나 바깥 쪽으로 뱅뱅 돌면서 마치 거북이 껍질 안에 들어가기 싫은 듯 좀처럼 내려앉지를 않았다. 풀은 결국 거북이 껍질 가장자리로 밀려 나오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들 셋은 모두 크게 놀랐다. 사내애는 다시 허리를 굽혀 옆 웅덩이에서 물 한 움큼을 떠서 거북이 껍질 안에 부어 넣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마치 벌겋게 달구어진 솥 안에 물을 붓기라도 한 듯이 거북이 접질 바닥으로부터 찌르륵찌르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얼마 안 가 물 한 방을 남지 않았다. 사내애는 손을 뻗쳐 거북이 껍질을 만져 보았다. 몹시 뜨거우리라고 여겼
는데 오히려 차가웠다. 이 커다란 거북이 껍질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선배의 이 거북이 껍질은 기이한 보물임에 틀림없어요. 하지만 저희들은 안목이 짧아서 도대체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처녀의 말에 소인이 개탄했다.
"요새 세상에는 진짜 보배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 실로 드물단 말이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아주 기이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지. 그 책 이름은 《수신기(搜神記)》라고 하는데 이 책에는 나사귀시(羅煞鬼市)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 한 사람이 귀신시장에서 원수구퇴( 讐 退)라는 거북이 껍질을 내놓고 팔았지만 누구도 그 보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 사불이는 태호 보선
의 주인이니까 이 고사종이야 알고 있겠지?"
처녀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더니 갑자기 기색이 크게 변했다.
"선배께서 방금 말씀하신 원수구퇴란 용왕의 아홉째 아들이 벗어 놓았다는 그 거북이 껍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처녀가 말한 고사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진(晋) 시절에 한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하루는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전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창 배가 암초에 부딪치지 나 않을까 가슴을 조이는데 갑자기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붉은 등불들이 죽 나타나더니 뱃길을 밝혀 주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붉은 등불이 밝혀 주는 대로 배를 몰아 한참 후에 해안에 닿게 되었다. 뭍에 올라 둘러보니 땅이 왜 넓었고 사
람들이 해안에서 오락가락했다. 이곳은 바로 장터였는데 장터에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코가 크고 눈동자가 파랗고 머리칼이 샛노란 사람들로 키도 훨씬 크고 지껄이는 말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장터에는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소인이 가지고 있는 원수구퇴란 거북이 껍질을 팔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장터에서 제일 귀중한 물건
이었다. 사람들은 멀리서 건너다볼 뿐 감히 값도 묻지 못했다. 이때 누군가 "동해의 용태자가 왕림하셨사옵나이다!" 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궁등(宮燈)이 길을 안내하는데 그 뒤로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알이 푹 꺼져 들어간, 이를 데 없이 추하게 생긴 사람이 걸어왔다. 그 사람은 진주 백 말과 금은보화를 잔뜩 주고 그 원수구퇴라는 거북이 껍질을 샀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원
수구퇴는 바로 용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용왕 모양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거북이의 모양을 타고난 것이다. 용왕의 아홉 째 아들은 9백99년을 살다가, 얼마 전인 9월 9일 중양절(重陽節)날 해 뜰 무렵에 이 거북이 껍질을 벗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보통사람들이야 어떻게 이런 보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거북이 등에는 아홉 갈래의 줄이 나
있는데 그 줄이 끝난 데마다 한 쌍의 진주가 있다고 하며 이 한 쌍은 자웅이라고 한다. 이 아홉 쌍의 진주는 각기 야명주(夜明珠), 겁독주(祛毒珠), 벽화주(酸欠珠), 분수주(分水珠), 구사주(驅邪珠), 명목주(明目珠), 양심주(養心珠), 정안주(定顔珠), 모주(母珠)이다. 이 열여덟 알의 진주는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있고 늙은 사람은 장수할 수 있게 하고 물과 불 속에서도 사람을 구해 낼 수
있으므로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보배라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호에도 용의 족속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이한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천년이나 살았다는 용왕의 아홉째 아들이 남기고 갔다는 원수구퇴를 소인이 수중에 넣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소인은 여전히 나무 위에 앉아 입을 열었다.
"사불아, 나한테 이 침대가 있기에 천지만물은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비가 쏟아져도 몸이 젖는 법이 없고 하늘에서 벼락이 쳐도 나를 어쩌지 못하고 그 어떤 극독약으로도 나를 중독시키지 못한단 말이다."
득의양양하여 자랑을 늘어놓는 소인의 말허리를 끊으며 처녀가 말했다.
"선배께서는 이 보물을 가지고 계시니까 저의 태호 보선의 물건 같은 건 눈에 차지 않으실 만도 하군요. 하지만 병 도련님이 독약에 중독되었으니 선배께선 죽는 사람을 살려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통쾌하게 대답했다.
"근심을 말아라. 그 침대를 보았듯이 매일 오시(午時)에 그 침대에 올라가 앉아 한쪽 손은 위로 올려 다섯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의 중로궁혈(中勞宮穴)이 겁독주(祜毒珠)를 마주하기만 하면 열흘 안으로 온몸의 독기가 말끔히 가실 것이다."
처녀는 몹시 기뻐했다.
"선배께서 병 도련님을 해독시켜 주시기만 하면 저는 앞으로 선배의 말씀이라면 무슨 일이든 따르겠사옵니다."
"나중에 딴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소인이 정색을 하고 다짐받으려 했다.
처녀는 조금도 주저없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대답했다.
"선배께서 병 도련님을 구해 주시기만 하시면 무슨 일이든 선배의 분부를 따르겠사옵니다."
사내애가 옆에서 처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자꾸만 말리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처녀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병묘는 마음속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아가씨가 낯선 사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이렇듯 헌신적일 수 있단 말인가.
소인이 처녀를 향해 물었다.
"듣자니까 사불에게는 자기의 징표로 구슬꽃〔珠花〕두 떨기가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처녀가 사실이라고 대답하자 소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 구슬꽃 두 떨기 중에서 한 떨기만 나를 다오. 내가 무슨 용무가 있으면 널 불러서 알려 주겠다. 그럴 때 넌 내가 시키는 일들을 해주어야 한다. 아까 약속한 대로 말이야."
그 구슬꽃은 처녀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머리에서 꽃을 뽑아냈다. 구슬꽃은 한 떨기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만지자 두 떨기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한 떨기를 소인에게 넘겨주고는 말했다.
"선배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시든지 죄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열흘 후에 와서 병 도련님을 모셔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읍을 한 뒤 사내애와 함께 돌아갔다.
소인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을 지그시 감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병모는 소인이 무슨 술법을 연마하는 중임을 알아챘다.
병묘는 몸을 돌려 처녀와 사내애의 뒤를 따라 호숫가에 이르렀다.
사내애는 닻줄을 풀어 힘껏 배를 향해 던지고는 몸을 날려 배에 뛰어올랐다. 처녀는 배에 오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병묘를 바라보았다. 처녀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병묘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처녀는 병묘를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병묘 도련님, 몸을 잘 돌보세요. 열흘 후에 제가 모시러 오겠어요."
병묘가 대답할 새도 없이 처녀는 힘껏 몸을 날려 배를 향해 날아갔다.
호수 기슭에 서서 병묘는 생각에 잠겼다.
'소인과 아가씨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두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걸 봐서는 초면인 것 같지만 소인에 대해 그토록 공손한 걸 봐서는 진작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인 것 같은데…….'
병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배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배는 질풍같이 미끄러져 잠깐 사이에 나무숲이 울창한 섬으로부터 멀어졌다.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사내애가 배를 조종하며 훔쳐보니 처녀는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수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애는 잡았던 키를 놓고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처녀는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여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사내애가 개탄했다
"한심하군, 한심해. 부처님마저 범속한 인간의 정에 사로잡혔으니 한심한 일이지 뭐냐?"
사내애가 이렇게 이죽거렸지만 처녀는 여전히 못 들은 체하고 멀거니 뒤만 돌아다보았다.
"어허, 참말루 병 도련님인지 뭔지 하는 사내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했는가 보군. 하지만 소인이 서로 좋아 지내게 가만히 놔둘까?"
처녀는 사내애의 말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멍청히 떠나온 쪽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사내애는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배는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 어느덧 호숫가에 닿았다. 그들 둘은 배에서 내려 호수 기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위에는 고즈넉이 정적이 깃들었다.
어느 결에 하늘에는 둥근 달이 솟아올라 태호의 수면에 교교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처녀가 갑자기 손을 위로 올렸다가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무언가 받아드는 시늉을 하자 놋사발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그 놋사발에는 물고기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부싯돌을 그어 기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연거푸 놋사발 네 개에 불을 붙여 한쪽에다 죽
늘어놓았다.
이때 멀리서부터 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사불―! 악귀―!"
그 소리는 한참을 태호 기슭에 메아리치더니 호수에서 갑자기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들려 왔다. 가만 눈여겨보니 자그마한 쪽배 하나가 물을 가르면서 나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쪽배가 기슭에 닿자 웬 사람이 뛰어내리더니 허둥지둥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네 개의 놋사발을 향해 일일이 절을 했다.
"태호방 방주 필소해가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사옵니다!"
그가 절을 마치고 일어서자 졸개 둘이 배 안에서 궤짝 하나를 들어 내렸다. 궤짝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뚜껑이 덮여 있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궤짝을 날라 온 두 사람이 뚜껑을 열려고 하자 처녀가 열지 못하게 손짓했다.
"됐어. 궤짝은 여기에 내려놓고 너희들은 물러가라!"
처녀가 이렇게 분부하자 필소해는 희색이 만면했다.
"사불님께서 이 궤짝만 받으시면 우리 태호방은 금년에도 무사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필소해는 기쁜 마음으로 처녀와 사내애한테 다시 꾸벅 절을 하고는 물러가려 했다.
처녀가 필소해를 불러 세웠다.
"필 방주, 자네 태호방에서 최근에 독약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해쳤다면서?"
필소해는 처녀의 말투에서 뭔가 상서롭지 못한 조짐을 느끼고는 급히 무릎을 꿇으면서 대답했다.
"사불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태호방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처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필소해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변명을 했다.
"우리 태호방에서는 요즘 들어 매사에 아주 조심들을 하고 있습니다. 값 나가는 금은보화나 재물들을 얻으면 사불님과 악귀님을 잊어 본 적이 없지요. 저희들이 무얼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앞으로라도 시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필소해는 매우 놀란 듯 처녀의 눈치를 살폈다.
사내애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일부러 위엄을 부렸다.
"듣자니 태호방이 항주부 삼공자를 못살게 굴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사내애의 물음에 필소해는 속이 섬뜩해졌다.
'사불과 악귀가 이 일을 어떻게 알았지?'
필소해는 몹시 놀랐으나 사불과 악귀에게 방내의 내막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아형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그였다. 한데 태호방의 총타주인 구두신취 학영감이 가로채서는 한사코 아형과 성혼하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는 도리상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학영감이 몹시 미웠다. 그러나 아무리 학영감이 미워도 이런 불만을 사불과 악귀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사불과 악귀는 이런저런 내막을 묻고 싶었으나 필소해를 따라온 졸개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두 졸개는 태호방의 총타주인 구두신취의 심복들이었다. 평소에는 필소해의 시종으로 따라다녔지만 암암리에는 필소해를 감시하고 그 행적을 낱낱이 학 영감에게 고해 바치도록 돼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눈치를 챈 사불은 악귀에게 두 사람을 처치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악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졸개들을 불러 한쪽으로 끌고 갔다.
"긴히 물어 볼 말이 있으니 날 따라 오너라."
두 졸개는 도적 무리에 몸을 담은 지 오래로 강남의 사불과 악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둘은 악귀의 부름에 잔뜩 긴장하여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뒤를 따랐다.
필소해는 평소에 이 두 시종을 제일 미워했다. 그러한 두 놈이 악귀에게 불려 가자 두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이 대충 짐작이 갔지만 짐짓 모르는 체했다.
사불이 필 방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필 방주, 자네가 사람을 죽이려 하니 우리가 대신 죽여 주겠네. 이젠 속에 숨겼던 말을 실토해도 거리낄 게 없겠지?"
이때였다. '악!' 하는 비명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잠시 후 악귀 혼자 손을 탁탁 털며 돌아왔다.
필소해는 은근히 후련한 기분이 들어 작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태호방의 무리는 그 수효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들 중에서도 따져 보면 시시껄렁한 좀도둑이 적지 않지요. 이런 오합지졸이 모여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자연히 말썽도 많이 생깁니다. 전 원래부터 항주부의 삼공자들과 원수로 지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태호방의 총타주 학영감이 호심장에 사는 아형이란 아가씨를 눈독들이 고는 억지로 붙잡아다가 성혼
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일로 항주성이 불안해졌고 태호 인근에서도 분위기가 살벌해졌지요. 총타주님께선 지금 아형이란 아가씨를 잡아 놓고 빠른 시일 내에 성혼을 하자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시켜 치음을 죽이고, 미화를 가두고, 도박쟁이한테도 독약을 안겼지요. 이렇게 해놓고 보니 학 영감은 꿩 먹고 알 먹고 등지 털어 불 땐 셈이 되었습니다. 어여쁜 계집을
차지하게 됐고 평소 눈엣가시이던 항주부 삼공자들마저 일거에 제거했으니 말입니다."
사불은 조용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아형이란 여자가 그렇게도 아름다운가? 소문에 의하면 항주부의 그 내노라 하는 도련님 세 분이 하나같이 그 여자를 사모했다던데. 세 사람이 하도 그 여자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한때는 태호의 뱃길마저 붐빌 정도였다고 들었지. 세 분만이 아니라 강남의 숱한 사내들이 다 그 여자만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한다던데, 사실인가?"
필소해는 누구든지 구두신취 학 영감과 맞붙어 그가 아형과 성혼하지 못하게 했으면 하고 바라던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항주부에는 학 영감과 겨루어 이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사불과 악귀를 대하고 보니 희망이 생기는 듯 싶었다. 사불과 악귀 정도면 학 영감을 능히 처치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부추겨 학 영감과 싸움을 붙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필소해는 이런 엉큼한 궁리를 하면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아형의 용모는 실로 대단해서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지요."
사불은 짐짓 태연한 척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
필소해는 사불의 눈치를 살펴 가면서 아형의 입술이 앵두 같다느니, 이빨은 박속같이 희다느니, 살갗은 백옥 같다느니 하면서 마구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사불은 잠자코 머리를 숙인 채 듣고만 있었다. 한창 떠들어대던 필소해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혹시라도 사불의 비위를 거슬리는 게 아닌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악귀가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 보게나."
그가 부드럽게 말하자, 필소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두 사람에게 절을 하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태호방의 두 졸개의 시체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필소해가 사라지고 나자 사불과 악귀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때였다. 호수 기슭으로부터 웬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 사람은 얼핏 관가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두 사람 앞에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항주부에서 문독압사(文牘押司)로 있는 문의 (文義)가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문의라고 자칭한 이 사람은 예를 마치고는 일어나서 놋사발이 놓여 있는 한쪽에 좌정하더니 중이 참선이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사불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는 품이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악귀는 어둠 속에 잠긴 태호의 수면에 눈길을 준 채 말이 없다가 한참 후 문의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문의, 자네가 금년에 질어난 큰 사건들을 좀 말해 보게!"
문의는 아문에서 오랫동안 밥을 먹어 온 사람답게 품속에서 공문장 하나를 꺼내더니 불빛을 빌려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년 정월에 항주 성주방(成綢坊)에 도난사건이 일어나 은과 금을 도합 만 냥이나 도난당하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철장방 무리들이 한 짓이라고 하는데 항주 대옥에는 지금 철장방에 가담했던 도적 세 놈이 갇혀 있습니다."
"그 세 놈을 놓아주도록 해라!"
악귀가 호기스럽게 분부를 내리자 문의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금년 봄, 항주부 외답청(外踏靑)에 살고 있는 대부자 전정인(鑛正仁)의 딸 전소소(錢素素)는 채화적(采花賊) 운지(雲智)라는 중농한테 능욕을 당했는데 나중에 전소소는 죽고 운지라는 중놈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몸을 피했습니다. 소인이 그 놈을 나포하여 사형수만 가두는 옥에 처넣었습니다."
악귀는 사불의 눈치를 살폈다. 사불이 양미간을 찌푸리자 악귀가 말했다.
"그 놈한테 독사발을 안겨 옥 안에서 죽여 버리도록 하라!"
문의가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운지란 중놈이 저지른 이 겁탈사건에 대해 항주부에서는 이미 형부에 공문을 올려 가을에 참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약사발을 안기지 않아도 그 놈은 죽게끔 되어 있는데요……?"
악귀는 갑자기 새된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놈을 빨리 죽여 달라고 은전을 찔러 준 사람이 있어. 만일 자네가 가을까지 기다려서 참형을 한다면 그 은전을 쓴 사람이 얼마나 원통해 하겠나? 그래, 약사발을 안기겠나, 안기지 않겠나?"
문의는 사불과 악귀의 잔인한 수단을 잘 알고 있는지라 얼른 대답했다.
"예, 빠른 시일 내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항주부에는 전번 달에 또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웬 놈이 관가의 은고(銀庫)를 털었는데 금은을 몽땅 도난당했습니다. 소인이 두 분을 배알하러 온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밝혀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해서입니다. 이 금은만 찾아 주신다면 일후에 두 분께 무슨 큰일이 생기실 때 소인한테 분부만 하십시오, 그럼 소인은 언제든지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불이 머리를 끄덕이자 악귀가 장담을 했다.
"좋네. 그럼 이 사건은 나한테 맡기게. 관가에 금은이 없어서는 안 되는 거구, 더구나 이따위 일로 자네가 벼슬 자리까지 내놓게 돼서는 안 되지 ."
문의는 몹시 기뻐하며 거듭 감사의 말을 했다. 이어서 그는 또 항주부에서 생긴 큰 사건들을 알리고는 사불과 악귀의 분부를 들었다. 악귀가 죽이라든가 혹은 살리라든가 하면 문의는 일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사건 처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 사람의 걸음은 아주 느렸다. 무쇠지팡이로 땅을 짚으면서 걸어오다 보니 한식경이나 걸려서야 겨우 사불과 악귀 앞에 당도했다.
"항주의 귀수(鬼手) 진삼(陳三)이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사옵니다!"
이자는 절름발이로 걸을 때마다 몹시 기우뚱거렸다. 이자의 행색을 볼라치면 머리는 봉두난발이요, 두 눈은 마치 무슨 먹을 거라도 찾는 쥐새끼 눈깔처럼 쉴 새 없이 번들거렸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소문난 독각대도(獨脚大盜) 진삼이었다.
악귀는 역시 사불의 눈치를 살폈다. 사불이 양미간을 찌푸리자 악귀는 쌀쌀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진삼아, 요즘 사는 형편이 어떠냐?"
진삼이 한숨을 지었다.
"항주가 비록 천하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는 하지만, 저같은 놈은 워낙 타고난 팔자가 그래선지 형편이 말이 아닙지요. 오늘 얼마 안 되는 금과 은을 가져와 두 분께 드리옵니다. 앞으로도 두 분께서 하시는 일들이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키가 훤칠하게 큰 사나이 넷이 조심조심 다가오더니 궤짝 두 개를 등잔불 앞에 갖다 놓았다. 진삼이 궤짝 뚜껑을 탁 치자 궤짝들이 벌컥벌컥 열렸다. 궤짝 안을 들여다보니 몽땅 황금과 은으로 꽉 찼는데 적어도 만 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악귀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술법을 피우더니 궤짝 가장자리에 날아가 걸터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궤짝 속의 금덩이와 은덩이들을 집어 올렸다가는 주르르 떨구면서 한참 장난하는 듯싶더니 불쑥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는 궤짝 안의 금과 은을 더욱 찬찬히 살펴보곤 역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진삼이 곰살궂게 웃으며 물었다.
"무얼 찾으십니까? 소인이 도와드리지요."
악귀가 빙그레 웃으면서 반문했다.
"듣자니까 네가 항주부 관가에서 조은(槽銀) 20만 냥을 훔쳤다고 하는데 나한테 가져온 건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진삼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잠시 후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사불님과 악귀 님께서는 모두 눈이 밝으신 분들이지요. 두 분의 눈은 정말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때 사불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진삼아, 내 보기에 이 조은을 도로 가져다가 관가에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관가에서 기황이든 고장에 보낼 수 있도록 말이야."
진삼이 한참 침묵을 지키고 섰다가 가볍게 탄식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늦기는 왜 늦었단 말이냐?"
악귀가 의아해 하며 묻자 진삼이 대답했다.
"그것들을 몽땅 투전판에 밀어 넣었다가 잃고 말았습니다."
악귀는 혀를 끌끌 차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불이 물었다.
"진삼아, 그럼 그 조은을 누구한테 잃었느냐?"
"투전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항주부의 병묘란 도령한테 잃었지요. 그래서 지금 제 손엔 3만 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요."
진삼은 이렇게 대꾸하면서 사불을 곁눈질해 보았다. 사불의 용모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를 한낱 아름다운 아가씨로만 보았다가는 큰코다친다. 그녀처럼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잔인한 여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강호의 사람들은 그녀를 사악한 부처라는 뜻으로 사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사불은 진삼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됐다.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해라."
진삼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몇 발자국도 채 못 가서 사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진삼아, 가져온 물건들을 도로 가져가거라."
진삼의 얼굴은 당장 흙빛으로 변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사불은 궤짝 두 개를 가리키면서 빙긋이 웃었다.
"이 궤짝들은 진삼이가 가져온 것이니 도로 가져가."
진삼은 긴장하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서 되물었다.
"사불님과 악귀 님께선 오늘따라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이전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두 분은 상관하지 않았지요. 한데 오늘은 전과는 달리 이상하십니다?"
"나 사불이나 저 애 악귀도 때로는 한두 번씩 괴상한 짓거리를 할 때가 있지. 그러니 그렇게 이상하게까지 생각할 건 없다."
진삼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그는 궤짝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않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부터는 서쪽에서 해가 뜨겠소이다. 사불님과 악귀님께서도 선행을 베풀려 하시니 말입니다. 보아하니 세상이 정말 변했소이다. 변해도 이만저만 변한 게 아니야……."
진삼이 변했다는 말을 하자 장승 같은 사내 넷은 마치 군령이라도 떨어진 듯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사불과 악귀에게로 덮쳐 들었다.
넷의 도법(刀法)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칼을 휘두르면서 사불과 악귀를 공격했다. 바로 이 틈을 타서 진삼은 잽싸게 놋사발 쪽으로 달려갔다. 사불과 악귀한테는 괴상한 법도가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놋사발 등잔 네 개를 몽땅 빼앗기만 하면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졌음을 시인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불과 악귀 앞에 이 네 개의 놋사발 등잔이 없으면 세
상의 인간과 귀신들에게서 더는 회뢰를 받아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삼은 민첩하게 놋사발 등잔을 호숫물에 차 넣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는 법. 사불이 어느새 몸을 날려 진삼의 앞에 뛰어내렸다. 진삼의 무쇠지팡이가 놋사발 하나를 겨냥하여 날아가는데 사불이 잽싸게 그 무쇠지팡이를 낚아챘다.
사불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허튼 짓을 하려 드느냐?"
진삼은 내친 김에 사불과 사생결단을 내기로 작심했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는 무쇠지팡이를 번개같이 휘두르며 죽기살기로 덤볐다. 진삼이 마구잡이로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달려들자 사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구나. 이런 미친 개하고 싸워 봤자 나만 손해지."
사불은 진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삼은 그녀가 무슨 술법을 피울지 몰라 주춤거리면서 사불을 바라보았다. 순간 진삼의 눈이 커졌다. 부르르 떨던 사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갑자기 양쪽 옆구리에서 두 손이 삐죽이 나오는 게 아닌가. 사람의 손이 어떻게 갈빗대를 비집고 나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진삼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하지만 이것이
남의 시선을 흐트리는 계책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사불의 한 손이 그의 얼굴을 거칠게 할퀴고 난 뒤였다. 진삼은 너무나 아파 미친 듯이 비명을 올리며 땅바닥을 대굴대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결국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진삼이 죽자 네 사내는 더욱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던 악귀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진삼이가 이미 죽었는데 네 놈들은 윌 바라고 이 지랄들이냐?"
넷은 주춤거리더니 쓰러진 진삼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아마도 죽음을 각오한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넷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칼로 자기의 목을 베고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제10장 풍악꾼 열 여섯 자매
황약사는 독수리한테 채인 채로 태호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굽어보니 새파란 호수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그 대신 논밭이 펼쳐진 전야가 나타나고 이어서 가옥들이 즐비한 마을과 시가지들이 펼쳐지더니 나중에는 청첩으로 이어진 산들이 보였다.
황약사는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을 다 당하는구나. 이 놈의 새새끼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나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작정이지? 한 방 올려붙일 수도 없고, 이 황약사 꼴이 말이 아니구나.'
아형을 떠올려 보니 더욱 불안했다. 지금 그가 독수리한테 끌려 다니게 된 것도 순전히 아형 때문이다. 당당한 무학의 대가인 황약사가 날짐승한테 수모를 당한 것을 알게 된다면 무림의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독수리의 두 발을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서슬에 독수리는 위쪽으로 힘껏 날개를 퍼득였다. 이렇게 황약사와 독수리는 하늘에서 승강이를 했다. 독수리가 황약사를 움켜 잡은 채 위쪽으로 솟구치면 황약사는 반대로 독수리를 아래로 잡아 당기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독수리는 힘이 부치는지 황약사를 떨쳐 내려 했다. 황약사는 더욱 세게 독
수리의 두 발목을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더욱 힘껏 아래로 잡아당겼다. 독수리는 그 힘을 당하지 못해 아래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지면으로부터 대여섯 길밖에 안 되는 지점까지 내려오자 황약사는 잽싸게 두 발목을 거머쥐었던 한쪽 손을 풀면서 주먹으로 한 대 갈겼다. 독수리는 더욱 낮게 떨어져 내렸다. 이때다 싶은 황약사는 한 손마저 풀면서 땅에 뛰어내렸다.
독수리는 몸체를 기우뚱거렸다. 몸뚱이에서는 깃털이 가득 날렸다. 독수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맞은편에 있는 가파른 비탈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드디어 땅바닥에 내려섰다.
'여긴 어디쯤일까…….'
그는 주변의 낯선 풍경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이 태호와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간에 그는 어떻게든 태호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자기가 어느 고장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기와 갈증이 몹시 느껴졌다. 어디든 가서 목부터 축여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나는 듯이 걸어 인근 주막을 찾아 나섰다.
어느새 그는 길 옆의 자그마한 주막에 이르렀다. 주막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주막 주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큰길 옆에 있는 주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막에는 손님이 그닥 많지 않았다. 서넛밖에 안 되는 손님들이 한 상에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농삿일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황약사는 주막의 주인을 불러 술 한 단지와 간단한 안주를 청한 뒤 무심히 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때였다. 큰길에서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면서 마차 행렬이 달려왔다. 모두 여섯 대였는데 마차가 무척 화려할 뿐만 아니라 말들도 하나같이 훌륭했고 마부들도 보아하니 모두 능숙한 고참들임이 분명했다. 마차는 방을 소리를 찰랑찰랑 울리면서 주막 앞에 와서 멈췄다.
"얘들아, 모두 내려서 요기나 좀 하고 가자꾸나."
마차 안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인의 고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윽고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 오더니 미모의 아가씨들이 마차에서 죽 내리기 시작했다. 아가씨들은 모두 열 여섯이었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긴 치맛자락을 가볍게 끌면서 주막으로 들어섰다. 주막에 앉아 있던 사내들은 모두 흘끔거리면서 아가씨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아가씨들은 몸매나 키는 서로 달랐지만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
는 미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저마다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황약사는 대뜸 그것이 연주할 때 쓰는 악기임을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주단으로 겹겹이 싸여 있었는데 아주 귀히 여기는 물건들임이 분명했다. 아가씨들은 악기를 조심스레 다루어 각자의 옆에 놓고는 주인이 음식을 주문하러 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주막의 주인도 천하에 보기 드문 미인들이 자그마치 열 여섯이나 들어와 앉자 대뜸 기분이 좋아져서 얼른 아가씨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서며 물었다.
"아가씨들은 무얼 드시렵니까?"
주막 안의 여러 사내들은 음식을 들 생각도 않고 이 아가씨들한테만 눈길을 모았다. 아가씨들의 아리따운 자태와 얌전한 거동에 모두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열 여섯 아가씨들 중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바로 길을 떠나야 하니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걸로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주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예,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술은 드시지 않겠는지요?"
그러자 중간에 앉은 한 아가씨가 그 앳되게 생긴 아가씨를 향해 말했다.
"희아야, 난 술 한잔하고 싶은데? 도련님께서도 여기 계시다면 굳이 반대하진 않으실 거야."
이 아가씨가 이렇게 제 주장을 펴지 못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보아 앳되게 생긴 아가씨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는 성싶었다.
희아라고 불린 아가씨는 어림도 없다는 듯 쌀쌀하게 대답했다.
"만일 도련님께서 여기 계시다면야 설사 곤죽이 되도록 취해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요. 하지만 도련님께서 여기 안 계시니 아무래도 모든 것을 내가 주관해야 돼요. 오늘은 절대 술을 못 마시는 줄로만 아세요!"
"알았사옵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따르겠사옵니다."
술을 마시겠다던 아가씨가 농담조로 깍듯이 말하자 아가씨들은 모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황약사는 희아라는 아가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제일 어려 보였으나 열 여섯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는 것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음식이 날라져 오자 아가씨들은 조용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릇들을 깔끔하게 비워 낸 아가씨들은 은전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처음처럼 줄을 지어 주막 문으로 향했다.
"잠깐만!"
희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가씨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희아는 가볍게 걸음을 옮겨 황약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곱게 인사를 했다.
"소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공자님께서는 저희들과 구면인 것 같은데요? 태호 호심장에서 얼핏 만나 뵌 것 같은데, 아닌가요?"
희아의 말을 듣고 보니 여러 아가씨들도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들은 모두 치음 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풍악단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황약사를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적삼이 너덜거리고 양 어깨는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황약사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희아는 본디 눈치가 빠르고 민활했다. 그녀는 의자를 끌어당겨 황약사 가까이에 다가앉으면서 마치 황약사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이기라도 한 듯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공자님께선 이 평강부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황약사가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자 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황약사의 어색해 하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희아의 등뒤에서는 몇몇 아가씨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거렸다. 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도련님은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리고 고향은 어디시구요?"
황약사는 여전히 거들떠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렸다.
희아는 그만 약이 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별안간 환약사의 유돌대혈(乳突大穴)을 찌르려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쳤다. 황약사는 잽싸게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어느결에 그 빈 술잔으로 희아의 손가락을 막았다. 희아는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찔끔 쏟으면서 얼른 손을 빼내 감추었다.
"천첩은 뜻이 있사오나 도련님께서는 무전하오니 일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군요."
그녀는 황약사를 쏘아보며 한마디 던지고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다른 아가씨들도 악기를 들고 희아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말들이 울부짖고 마차바퀴들이 구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주막 안은 이내 조용해졌다.
황약사도 곧 술잔을 놓고 주막에서 나왔다.
황약사는 어디로 갈지 몰라 여유 있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 수림이 보였다. 그는 갑자기 식곤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제기랄, 그 놈의 독수리와 승강이질을 하다가 맥이 다 빠졌어. 저 수림 속에 들어가 잠이나 늘어지게 잤으면 제일 좋을 것 같구나.'
황약사는 졸음을 쫓으며 가까스로 수림에 닿았다. 수림 속에서 그는 적당한 나무 한 그루를 골랐다. 그는 몸을 솟구쳐 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가지 위에 눕기가 무섭게 당장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황약사는 잠결에 들려 오는 악기 소리에 눈을 떴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누군가 손가락으로 거문고줄을 튕기면서 악기를 조절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웬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천경개 속에서 백주에 낮잠이라니 아깝다는 생각 안 드세요?"
황약사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뜻밖에도 그가 누워 있는 나무 아래에 열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죽 앉아 있었는데 조금 아까 주막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단으로 감싼 물건 하나씩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희아만이 거문고를 땅바닥에 놓고 둥기당둥기당 뜯으면서 음을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다른 아가씨들도 전부 자기 악기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쟁, 피리, 북, 목탁 같은 것들로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치음의 배에서 다루던 편종(編鐘)이나 공후(壟漢) 같은 큰 종류의 악기들 대신 대나무로 만든 대관(大管)이나 죽생(竹笙)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황약사는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결같이 얼굴이 예쁘고 여리게들 생겼군. 한데 손에 악기만 잡으면 숙연해지고 자태도 대단히 점잖고 우아해지는 게 암만 봐도 신기해.'
이때 희아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먼저 〈해하풍(垓下風)〉이라는 가락을 연주해 올리겠사오니 도련님께서 소녀들이 연주하는 것을 잘 들어주십시오."
황약사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아악을 들으면서 잘 수야 없지."
황약사는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천지만물의 가장 귀한 소리인 아악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가씨가 나를 위해 연주한다니 고마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겠소."
이어 황약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나무 기둥을 타고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선 그는 사방에 읍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마음의 가락을 이 황약사가 알아들을 수 있기만을 바라옵니다."
아가씨들은 모두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녀들은 저마다 정신을 가다듬어 손들을 악기에'가져다대곤 긴장된 마음으로 희아의 영만 조용히 기다렸다. 희아가 별안간 거문고 줄을 세 번 잡아 뜯자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가락을 잡기 시작했다. 여러 악기들의 소리는 합세하여 마치 큰 강물이 흐르는 듯 비장한 가락을 이루었다. 〈해하풍〉의 비장한 가락에 황약사는 갑자기 처량하고 슬
픈 기분에 휩싸였다.
'난 아형을 좋아하지만 아형도 날 좋아할까? 아형을 그토록 좋아하면서 속을 털어놓지 못한 채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미인박명이라구, 아형의 팔자도 가련하지. 태호에 빠졌으니 헤엄칠 줄 모르는 아형이 살아 남았을 리 만무하고……. 아, 과연 이 세상에서 아형처럼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초패왕의 우희처럼 뜻이 맞는 여인을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을까? '
황약사의 마음은 어지럽고 복잡했다. 일시에 서초패왕과 우희의 비장한 최후며, 자기와 아형의 생이별이며, 홍안지기를 구할 수 없는 고뇌 같은 것이 몰려드는 바람에 마음이 산란하여 걷잡을 수 없었다.
한편 희아가 〈해하풍〉을 연주한 데는 그녀대로 앙큼한 계산이 있었다.
이 가락은 바로 절망에 빠진 인간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서초패왕 항우와 우희가 사별할 때처럼 고통을 느끼게 하며, 마치 우희가 검으로 제 목을 베었듯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곡이었다. 이 처절한 가락에 황약사의 마음은 불안과 고통으로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황약사는 부지중 몸이 무거워지면서 수십 길 되는 나무 꼭대기에
서 곤두박질쳐 아가씨들이 죽 앉아 있는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아가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락을 더욱 빨리 했다. 북소리가 둥둥 가슴을 울려 주고 대관 소리는 휘이휘이 사람의 가슴을 후비는 것같이 들렸다. 이 밖에도 거문고를 비롯한 현악기들은 청승맞은 아련한 탄식조로 사람의 울적한 심사를 더욱 아프게 건드려 놓았다.
황약사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처량한 가락에 빠져 들었다. 이 가락은 부지중 그의 생각을 아형에게로 몰고 갔다.
'아형, 조금만 일찍 낭자를 만났더라면 낭자를 도화도에 데려갔을 텐데……. 애석하게도 우리 둘 사이엔 그런 인연이 없는 모양이구려.
그의 마음은 한없이 쓰리고 아팠다.
이때 네 명의 아가씨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악기들을 내려놓았다. 그녀들은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황약사에게로 걸어오면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서초패왕과 우희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엮어 부른 것이었다.
별이 총총 깊은 밤에
초국병영 고요한데
서초패왕 우희왕후
최후일야 지새우네
둥둥둥둥 북소리가
삼경임을 알리는데
천하영웅 서초패왕
갑옷투구 다 벗었네
맹호같이 달려들어
허리 담쑥 안았지만
도화 같은 얼굴에는
피눈물이 흐르누나
이 밤 지나 새날 오면
황천길이 지척인데
동져 하늘 뜨는 효성 (曉星)
무엇으로 막으리오
아가씨들은 쌍방이 춤을 추며 연신 황약사를 향해 유혹의 눈길을 던졌다. 황약사가 아무리 무학의 대가라 해도 역시 칠정육욕(七情六欲)을 가진 인간인지라 그 유혹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가씨들의 춤추는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황약사가 한창 넋을 놓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 희아가 느닷없이 황약사에게로 날아오더니 그의 가슴팍에 있는 대혈 세 곳을 번개같이 찔렀다. 황약사는 졸지에 사지를 놀리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 돌처럼 굳어졌다.
희아가 득의양양하여 아가씨들을 향해 말했다.
"이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몰라요. 호심장에 있는 걸 본 적이 있을 따름인데, 그때 보니까 아형이란 처녀와 잘 아는 사이 같더군요. 어쨌든 이 도련님을 너무 괴롭힐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가는 데로 끌고 다녀 봅시다."
희아의 말에 여러 아가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들은 악기들을 조심스레 감싼 후 마차에 올라탔다. 황약사도 두 아가씨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 태호 방향으로 질풍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마차는 며칠을 달려서야 태호에 도착했다. 태호의 맑은 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가씨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호숫가로 달려나가 물을 끼얹으며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희아가 한 아가씨에게 배 한 척을 구해 오도록 지시했다. 그 아가씨는 헐레벌떡 달려가더니 얼마 안 지나 돌아와서는 희아에게 보고했다.
"큰 배 한 척을 구했어. 곧 올 거야."
멀지 않아 큼직한 배 한 척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러 아가씨들이 모두 배에 오르자 배는 돛을 올리고 호심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호심장이 병화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아형도 거기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 터라 호심장으로 가는 게 달갑지 않았다.
호심장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조용했으며 달라진 것이라면 마을의 언덕에 새 무덤이 몇 개 더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갈밭을 돌아 마을에 다다르자 아가씨들은 배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일제히 아형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형의 집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구석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아가씨들은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다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두들 아형의 행방을 전혀 모르면서도 이러쿵저러쿵 어림짐작을 해대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했다.
한참 지나 말소리가 잠잠해지자 희아가 말문을 열었다.
"아형 아가씨는 종래로 호심장을 떠나 본 적이 없어요. 기껏해야 마을 주위를 빙빙 돌거나 호숫가에 나가 앉아 있는 정도였죠. 배타고 밖으로 나가는 일들은 죄다 일하는 계집애한테 맡기곤 했어요. 보아하니 아형 아가씨가 제 발로 이 마을을 떠난 건 절대 아니에요. 이 집 벽이 이 모양으로 된 걸 봐도 그렇고 마을 분위기도 그렇고,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아가씨들은 모두 희아의 말에 동의했다. 아형이 여기에 없으니 치음 도련님도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하고 미화 도련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약사는 아가씨들에게 태호에서 얼마 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려다가 그녀들이 경우 없이 자기에게 손을 쓴 것을 생각하곤 괘씸한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그녀들이 찧고 까부는 소리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희아가 다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태호방 방주가 아형 아가씨에게 억지로 성혼하자고 한대요.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도 아가씨들은 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아가씨들은 속으로 고소해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음 공자의 아형에 대한 마음을 그녀들은 너무나 잘 알고 來었으며 아형에 대해 하나같이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아형에 대한 질투심으로 알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태호방을 찾아가 그 필소해라는 자에게 물어 보면 치음 도련님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희아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다시 배로 돌아가 태호방을 향해 출발했다.
철판봉이 가까워 왔다. 멀리서 바라보니 철판봉 아래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배가 기슭에 닿자 대안으로부터 숱한 사람들이 달려오더니 배 주위에 둘러섰다. 이들은 모두 태호방의 무리들로 눈을 부릅뜨고 병장기들을 거머쥔 채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아가 뱃머리에 서서 생글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귀방(貴 )의 이 보배 땅에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마도 소란을 좀 끼쳐야 할 것 같아요. 두령님께 이 말을 전해 주세요. 제가 필 방주님과 상의할 일이 있다구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이내 사람들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바로 태호방 방주 필소해였다.
필소해가 쌀쌀하게 물었다.
"아가씨는 뭐 하는 사람이오? 나를 찾는 까닭이 뭐지?"
"우리 도련님께서 집을 나선 지 여러 날 되시는데 여지껏 돌아오시지 않아 다들 근심이 태산 같아요. 혹시 필 방주님께서 우리 도련님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 해서 찾아왔어요."
"아가씨네 도련님이 없어진 게 우리 태호방과 무슨 상관이지?"
필소해가 시치미를 때자 희아가 말머리를 돌렸다.
"듣자니까 필 방주님께서는 호심장의 규수 아형 낭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신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필소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이름만 들어도 역정이 나는 사람이 따로 아형이 아니던가. 그는 희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뭐라구? 네깐 년이 그런 건 물어 뭘 어쩌겠다는 거냐?"
필소해가 화를 버럭 내자 희아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걸로 보아 아형 낭자가 여기 있는 게 분명하군요. 그러면 우리 도련님 역시 여기에 계실 테고, 미화 도련님 역시 여기에 계실 거예요."
필소해는 희아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엉뚱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형이야 내가 먼저 눈독들인 계집이지. 그런데 엉뚱하게 학 영감태기가 나서서 가로챘으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나?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내 대신 복수를 해줄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 계집들이라도 열 여섯이나 되니 출시할 수 없고, 게다가 여기에 온 적이 있는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도 저기 보이는데, 저 연놈들이 힘을 합쳐 싸운다면 혹시 학 영감을 죽여 버릴 수도 있
을지 몰라…….'
생각이 이쯤 미치자 필소해는 희아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아. 그렇게 생각된다면 날 따라 산에 올라가 찾아보면 될 거 아닌가?"
필소해는 당장 아가씨들을 이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멀지 않아 어둠침침한 석굴 안에 들어섰다.
필소해가 입을 열었다.
"이 석굴은 우리 태호방의 중요한 밀실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못해. 내가 아가씨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태호방은 아가씨들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 함이야. 치음 공자와 미화 공자는 여기 온 적이 없어. 아가씨들이 믿든 말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하라구."
황약사는 석실 안을 둘러보면서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석실은 네 벽이 다 외부와 통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 석실 안에 갇히기만 하면 빠져 나가기 힘들겠어. 이 계집들이 필소해의 속생각을 눈치나 채고 있는지 모르겠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고초를 당해도 큰 고초를 당하겠는걸?'
이때였다. 희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필 방주님께서 우리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오신 진짜 이유는 뭐죠? 단순히 우리 도련님이 여기에 안 계시다는 걸 알려 주시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허, 아가씨 생각엔 그런가?"
필소해는 능청맞게 웃으며 재빨리 구석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황약사는 예감했던 대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쏜살같이 뒤쫓아가서 필소해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필소해는 옆으로 몸을 피해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더니 '쾅!'하는 굉음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 아가씨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아우성을 치며 허둥댔다.
"조용히들 해!"
희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석실 안은 삽시에 잠잠해졌다.
"불을 밝혀요!"
희아가 다시 영을 내리자 누군가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탁탁 쳐서는 횃불에 불을 밝혔다. 횃불들에 불을 붙이니 석실 안의 진면목이 환하게 드러났다.
석실 안은 무척 넓었으나 한편에 높은 석대가 하나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석대 위의 석벽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독수리의 날개 아래에 새겨져 있는 성난 파도가 바로 태호였다. 그 파도 한복판에는 태호의 일흔두 개의 봉우리와 일부 촌락들이 새겨져 있었다. 황약사는 이상하게도 독수리의 눈이 없이 그 자리가 뺑 뚫려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황약사는 당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문앞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다름아닌 치음이었다. 온통 피투성이인 그는 죽은 지 오래인 듯했고 등뒤에 큰 상처가 있었으며 머리는 무슨 무거운 병장기에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여인들은 모두 멍청해졌다. 그녀들은 말없이 치음의 시체 앞에 꿇어 엎드렸다. 희아가 나서서 치음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자기의 긴 옷자락으로 치음의 철굴을 천천히 닦아 주기 시작했다. 희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어 여인들의 통곡 소리가 석실을 온통 뒤흔들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속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석실 안에 갇힌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눈앞에 보이는 듯했던 것이다.
그는 여인들처럼 치음의 죽음을 비통해 하기보다는 석실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에만 골몰했다. 구석을 살피며 돌아다니던 황약사는 벽 모서리태서 또 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황약사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름아닌 미화였던 것이다.
황약사는 미화를 안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입술은 말라 터져 있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들어 죽은 것이 분명했다. 황약사는 기황지술(岐黃之術)에도 정통했는지라 미화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해보고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미화의 몸에는 아직까지 흘러 다니는 유기(游氣)가 얼마간 남아 있었고 염통 부위가 가냘프게나마 아직은 뛰고 있었던 것이
다. 그는 미화의 뒷잔등에 자기의 두 손바닥을 붙이고는 내력으로 미화를 구하려 했다.
아가씨들은 치음을 안아 일으켜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석벽 아래에 앉힌 후 자신들의 눈물로 치음의 얼굴과 손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그녀들은 치음의 깔끔한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치음은 자기의 옷에 티끌 한 점만 묻어도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들은 하나하나 치음을 향해 절을 올렸다.
희아가 허리를 펴고는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안심하세요. 우리 열 여섯 자매들이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 테니까요."
여인들의 가슴속엔 비분이 넘쳐흘렀다.
희아가 손바닥에 커다란 야광주를 받쳐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열 여섯 자매들 중에서 누구든지 도련님을 위해 복수를 하기만 하면 이 야광주는 그 애한테 주겠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남은 열다섯 자매는 그 사람을 두령으로 모시겠어요. 만일 외인이 했다해도 역시 그렇게 하겠어요."
이 야광주는 치음의 움켜쥔 손가락을 펴다가 발견한 것인데, 다름아닌 석벽에 새겨진 독수리의 눈에서 뽑아 낸 것이었다.
열 여섯 자매는 일제히 맹세를 하고 나서 모두 각자의 악기들을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들은 숙연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가락의 한 소절이라도 어긋날까 봐 정성을 다해 악기들을 다루었는데 마치 치음의 음령(陰靈)이 자기를 꾸짖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황약사는 몹시 난처해졌다. 미화의 목숨을 살리자면 조용해야만 하는데 열 여섯 자매가 합주를 하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인들에게 연주를 멈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어 보았다. 황약사가 미화를 살리기 위해 내력을 쏟고 있는 동안 어느새 음악이 끝났다.
연주를 끝낸 여인들은 이제 차례차례 치음의 시체 앞에 다가가 아홉 번씩 절을 올렸다. 희아가 선참으로 예를 올리고는 자기의 긴 옷을 벗어서 치음의 시체 위에 덮어 놓고 물러서자 남은 열다섯도 그대로 따랐다. 어떤 옷들은 치음의 머리 위에 덮여졌고 어떤 옷들은 치음의 팔에 매 여지기도 했다. 또 어떤 여인들은 자기 옷을 치음의 허리에 둘러 주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여인들은 자기 속
옷마저 벗어서 치음의 몸에 감아 놓기도 했다. 그것은 평소에 자기의 알몸을 치음에게 맡겨 보지 못했던 한을 죽은 치음의 시체를 통해서나마 풀어 보자는 심사였다. 오래지 않아 치음의 온몸은 열 여섯 자매의 하얀 옷들에 온통 감싸였다.
이때 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언제부턴지 석실 입구가 약간 벌려져 있었는데 그 틈새로 음흉하게 웃고 있는 필소해의 모습이 바라보였다.
"희아야, 난 네가 치음의 열 여섯 희첩 중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었다는 걸 알고 있다. 너희들을 풀어 주면 너희 열 여섯 자매가 나를 따르겠느냐?"
열 여섯 자매들 중에는 성미가 불 같은 계집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치음 공자와 함께 이 석실 속에서 죽을지언정 태호방의 노리개가 되지는 않겠다고 소리쳤다.
필소해가 위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동굴 입구를 막아 버리기만 하면 너희들은 몽땅 죽고 말아! 이삼십일이 지나서 다시 와 보면 시체들이 수두룩할 거야."
필소해는 당장이라도 동굴 입구를 막아 버릴 듯 서둘렀다.
"잠깐만!"
희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냉큼 필소해 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필 방주님, 우리 열 여섯 자매에게 원하시는 게 뭐죠?"
필소해가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이 세상에 치음이나 미화와 병묘 같은 자식들만 풍류를 즐기라는 법이 있느냐? 태호방도 천하대방(天下大 )이야. 나 필소해도 강호의 영웅이란 말이야. 술 처먹고, 계집질하구, 바람이나 피우는 걸 누구라고 못해? 너희들 열 여섯 자매가 우리 태호방에 들어오면 난 너희들을 내 곁에 두고 시중을 들도록 하겠어!"
필소해는 득의양양해서 히죽거렸다.
희아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한참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은 이미 죽었으니 저희들은 이제 둥지 잃은 새나 다름없어요. 의탁할 데라고는 전혀 없는 저희들을 필 방주님께서 거둬 주시겠다니 실로 감사해요."
이때 열 여섯 자매들 중 하나가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희아야, 도련님께선 생전에 너를 제일 아껴 주셨어. 그런데도 련님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제 살 궁리만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그녀의 말에 희아가 대뜸 소리쳤다.
"입 다물지 못해? 도련님께선 모든 일을 내게 맡기셨어. 이제 도련님이 안 계신 이상 모두 내 말에 따라야 해. 알아듣겠어?"
자매들은 흠칫하고는 찍소리도 못했다. 동료들이 조용해지자 희아가 다시 필소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필 방주님, 저희들을 거둬 주시기만 한다면 저희들은 당연히 방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
필소해는 크게 기뻐하며 대꾸했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너희들 생각이 그렇다면 우선 저 놈을 좀 보아라."
필소해는 한쪽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선 황약사가 한창 내력을 넣어 미화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 열 여섯 자매가 일제히 손을 써서 저 두 놈들을 죽여 버리면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가도록 해주겠다!"
필소해의 말에 희아는 미화와 황닥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돌려 자기 동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제11장 동사 황약사의 악명
희아는 자그마한 계집이었지만 어지간한 사내보다 마음이 더 모질었다. 필소해가 돌아가고 나자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약사와 미화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 열 여섯 자매는 이 석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열 여섯 자매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여인들은 황 약사와 미화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석실 안에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미화는 종이 한 장 들 힘도 없었다. 황약사가 얼마쯤 내력을 넣어 주기는 했으나 남과 싸울 만한 힘은 여전히 없었다.
희아가 황 약사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난 호심장에서 네 놈이 어떤 놈인가 이미 알아봤어. 아형의 몸에서 그 음탕한 눈길을 때지 못하는 걸 보고 말이야. 네 놈만 없었더라면 아형인 우리 도련님한테 시집을 왔을 거야. 도련님이 비명횡사하시게 된 데는 네 놈의 죄가 크다!"
황약사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꾸미느라 애를 쓰고 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아는 이번엔 미화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네 놈도 역시 나쁜 놈이다! 삼대 공자라구? 삼대 공자는 무슨 얼어 죽을 삼대 공자! 우리 도련님을 제외하곤 다 망나니들이야. 한 놈은 계집들의 궁둥이만 쫓아다니는 오입장이구, 한 놈은 투전에 미친 놈이니 망나니도 그런 망나니들이 없지. 네 놈만 없었다면 아형인 벌써 우리 도련님의 아내가 됐을 거야. 그랬으면 우리 집 도련님이 황천객이 되지도 않았을 테구. 우리 도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도 네 놈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미화는 희아를 멀거니 건너다볼 뿐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그런 희아를 바라보면서 태연스레 웃었다.
열 여섯 자매는 수중의 악기를 들더니 악기를 감쌌던 보자기들을 벗겨 던지고는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희아는 두 사내를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들은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나을 거다. 우리가 손을 쓰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열 여섯 자매는 한 쌍씩 짝을 지어 팔괘진(八掛陣)을 친 후 두 사내를 조일 듯이 다가들었다. 황약사와 미화는 서로 등을 맞대고 열 여섯 자매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이때 미화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노형, 난 노형의 배후에 저 년들이 범접 못하게 할 수 있네."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황약사는 손을 검처럼 내밀고 '낙영신검 (落英神劍)'이라는 검법을 쓸 태세를 취했다. 이 검법은 가장 변화무장한 검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는 거듭 술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한 검이 열 여섯 개로 변하여 동시에 열 여섯 자매의 진공을 물리쳤다. 그의 정면에서 진공해 오던 계집 여덟이 당해 내지 못하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배후에서 진공하는 넷은 미화를 상대로 덤
벼들었다. 미화는 내력이 다 빠졌는지 라 계집들의 공격에 방어만 할 뿐 달리 힘을 쓰진 못했다. 몇 합 안 되어 미화는 그나마도 감당해 낼 수 없어서 쩔쩔 매기 시작했다.
싸움에 한창 열을 올리던 황약사는 문득 속으로 개탄했다.
'허허, 네 신세가 이 지경이 되다니. 비록 점잖은 군자라고는 할 수 없으나 헌헌장부가 한 무리 계집들과 싸워서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황약사는 점차 기세를 늦추기 시작했다.
황약사의 뛰어난 무예와 용맹에 겁에 질린 열 여섯 자매는 황약사를 싸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섣불리 손을 쓰진 못했다.
이때였다.
"황 형, 난…… 난……."
미화가 몇 마디 더듬거리다가 앞으로 콱 고꾸라졌다.
황약사는 재빨리 손을 뻗쳐 미화를 부축했다. 그는 미화를 품에 안고는 네 계집들을 향해 연거푸 장을 내갈겼다. 그의 장에 넷은 하는 수 없이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의워 놓았다. 황약사는 문앞 까지 뛰어갔으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황약사는 석벽에 기대어 천천히 앉으면서 거의 정신을 잃어 가는 미화를 무릎에 앉혔다. 그는 석벽에 등을 기대고는 계집들을 쏘아보았다.
계집들은 모두 그의 무예 실력을 아는지라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희아는 별안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련님께서 한평생 우리들한테 무예를 가르치셨는데 저 놈 하나도 죽일 수 없다니……."
희아를 바라보던 다른 계집들도 방어하기 좋게 이십팔성숙공위 (二十八星宿拱位)로 둘러앉았다.
희아는 거문고를 끌어당기며 다시 중얼거렸다.
"도련님께서는 거문고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가르쳤어요. 오늘 전 도련님의 가르침대로 저 두 놈을 죽이고 말 테예요. 그럼 도련님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희아는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다른 열다섯 계집들도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악기들을 다루기 시작하자 일시에 풍악소리가 진동을 했다. 살기가 가득 찬 풍악 소리를 들으며 황약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이 풍악 소리로 날 죽이려 하지만 그건 망상이야. 너희들 열 여섯 자매가 아니라 너희들의 그 치음 공잔지 뭔지 하는 작자가 환생한다 해도 이 어르신을 어쩌지는 못할 거다!'
그런데 미화를 들여다보니 창백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는 품이 이 풍악 소리에 도취되었음이 분명했다. 황약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난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중상을 입은 미화가 이 풍악 소리에 견뎌 내긴 어렵겠어. 저 년들이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어 풍악을 울리면 미화는 심맥이 울려 터지면서 목숨을 잃고 말 거야.'
황약사는 품속에서 옥소를 꺼냈다. 그가 옥소를 꺼내는 것을 본 희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 따위 옥소로 우리 십육인 합주를 당해 낼 성싶으냐? 만일 이 십육인 합주의 힘을 당해 낸다면 음률에서의 조예가 천하 제일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만한 재주를 가진 분은 이 세상에 치음 도련님 밖엔 없어.'
희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문고줄을 힘껏 잡아뜯자 다른 계집들도 더욱 힘을 내어 악기를 다루었다. 삽시에 석실 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 내릴 것 같은 요란한 풍악 소리로 가득 찼다.
이 열 여섯 자매가 연주하는 것은 〈북리지무(北里之舞)〉라는 가락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은나라 주(紂)왕은 주색잡기에 빠져서 나라까지 망친 임금이었는데, 그는 자기 수하의 악공들을 시켜 이 〈북리지무〉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 곡이 만들어지자 주왕은 또 악공들에게 이 곡을 연주하게 했다. 당시 주왕의 곁에는 궁녀 10여 명이 있었는데 이 곡을 듣고는 저마다 음탕한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서 갖은 추태를 다 부렸다. 주왕은 몹시 만족하여
악공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도록 분부했다. 이때부터 궁궐 깊숙한 곳에서는 음탕한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주황과 궁 안의 궁녀들은 더욱 음탕스러워졌다. 이리하여 주색잡기에 빠진 주왕은 끝내 나라를 망치고 역사에 오명을 남긴 것이다.
이렇듯 〈북리지무〉는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 인성을 흐리게 하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절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곡은 처음에는 잦은가락으로 북 장단마저 경쾌하게 들려 오더니 점차 가락과 장단이 느려지면서 유연하고 처량하게 울려 왔다. 이 곡조는 마치 절세의 미인이 자기의 아리따운 용모와 몸매를 자랑하면서 한 보 한 보 춤추며 다가오는 것만 갈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황약사는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미화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별안간 아형을 부르며 얼
빠진 소리를 하더니 이윽고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심금을 울리는 풍악소리에 크게 내상을 입은 듯했다.
황약사는 부랴부랴 옥소를 입술에 대고 〈고풍(古風)〉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약사의 옥소 소리는 열 여섯 자매의 합주와 맞서 힘을 겨루었다. 옥소는 때로는 낮고도 느리게 때로는 높고도 빠른 가락으로 열 여섯 자매의 합주보다 더 힘있게 울렸다. 얼마 안 가 열 여섯 자매 중의 몇몇 여인들은 악기를 다루던 손길을 멈추고 황약사의 옥소 소리에 취해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그 눈길들에는 흠모의 정이 담뿍 담겨져 있었다. 계집 중 하나가 별안간 손에 잡았
던 빈고(拏鼓)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북채를 쥐고 푹 찔렀다. 북채 두 개가 동시에 가죽을 꿰뚫으면서 빈고에 박혔다. 그녀는 이렇게 성깔을 부리고 나서는 다시금 황약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른 계집 서넛이 수중의 악기들을 팽개치고는 서로 끌어안고 볼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어떤 계집은 제 손으로 자기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기까지 했는데, 솟구치는 음욕을 누를 길이
없는 듯 신음을 삼키며 음탕한 눈길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희아는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을 느끼고 더욱 미친 듯이 거문고를 튕겨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황약사의 옥소 소리를 눌러 버리려 했다.
황약사는 한 곡을 다 불고는 옥소를 무릎 위에 슬며시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한텐 또 〈벽해조생곡〉이라는 곡이 있어. 이 곡만 불면 너희들은 전부 크게 다칠 텐데 이쯤에서 그만두기를 권고한다. 순순히 타이를 때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뭐냐? 우리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이 세상에서 우리보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분밖에 없어. 치음 도련님 딱 한 분 뿐이라구!"
희아가 이렇게 대꾸하자 황약사가 계속 타일렀다.
"참 답답하구나, 너희들이나 난 모두 같은 처지야. 다 같이 필소해의 함정에 빠졌단 말이다. 네가 날 죽이고 태호방의 계집이 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너희들의 그 치음 도령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
계집들 중의 일부는 황약사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약사는 자기 말에 동조하는 계집들이 적지 않음을 눈치채고 넌지시 희아에게 말했다.
"내게 한 가지 묘안이 있다. 필소해가 다시 오면 너는 필소해를 보고 이 황약사가 죽었다고 해라. 그럼 너희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고 나는 나대로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대책을 강구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희아는 내심 황약사의 태도에 탄복하며 그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치음 공자만을 담고 있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기네 열 여섯 자매를 옥소 하나로 거뜬히 물리쳐 내는 황약사의 뛰어난 재주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군들 죽은 치음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황약사는 미화 옆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미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보게, 미안하지만 잠깐 고생을 좀 해야겠구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뻗쳐 미화의 혈도 두 곳을 가볍게 튕겼다. 미화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이윽고 황약사도 일부러 큰소리로 소리쳤다.
"네……네 년들이 사, 사람을 죽이는구나!"
황약사마저 땅바닥에 쓰러지자 자매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필소해를 속여넘길 수 있을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희아는 자기들이 계속 싸운다 해도 황약사를 죽여 버릴 수 없음을 잘 아는지라 되든 안 죄든 일단 부딪쳐 보기로 작정했다.
"모두들 악기들을 챙기도록 해요. 나갈 준비를 해야겠어."
희아는 이렇게 지시하고는 동굴 입구께로 다가가서 소리 높여 외쳤다.
"필 방주님―! 필 방주님―!"
필 방주는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석실 안의 동정을 엿듣다가 동굴 문을 약간 밀쳐 보았다. 그는 희아의 눈길과 마주치자 얼른 물었다.
"미화와 황약사를 죽였느냐?"
"저길 보세요!"
필소해는 희아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석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미화와 황약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워낙 산전수전을 다 겪은 놈인지라 쉽사리 희아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치음이가 아니야, 시도 읊을 줄 모르고 풍류도 모르지. 그런데 자색이 뛰어나고 풍류의 대가인 너희들이 나 같은 사람을 거들떠나 보겠나?"
희아가 교태를 부리며 대답했다.
"필 방주님께서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태호방 방주님이시라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는데 우리 열 여섯 자매들이 항주부에서 필 방주님한테 몸을 의탁하지 않으면 무슨 방도로 살아가겠어요?"
필소해는 풍류남아로서의 기질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여색을 밝혔다. 그러니 아름다운 계집의 교태 앞에서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으랴.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주머니를 흔들며 석실 안에 대고 소리쳤다.
"너희들이 이 환약을 먹으면 당장 이곳을 나가게 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정말로 이 필소해를 따를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필소해는 득의양양해져서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만일 열 여섯 자매가 이 태호의 어독(魚毒)을 삼키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필소해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희아가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필 방주님께서는 생각을 잘못하셨어요."
"뭘 잘못 생각했단 말이냐?"
"방주님께선 우리들이 어떤 여 자들인지 잘 모르셔요. 치음 도련님께서도 생전에 우리들을 마음대로 다루진 못했어요. 언제나 우리들을 깍듯이 대해 주셨죠. 제가 이렇게 말하면 믿으시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열 여섯 중에 도련님과 잠자리를 같이해 본 사람은 불과 서넛에 지나지 않아요. 그 밖엔 죄다 깨끗한 숫처녀들이지요. 우리들에게 몽혼약을 먹여 놓고 마음대로 다루어 보자는 생각이
신 모양인데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희아는 잠깐 말을 멈추고 필소해를 쌀쌀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필 방주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저로서도 달리 할말이 없군요. 우리 열 여섯 자매의 송장이나 치울 채비를 하시랄밖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해. 필 방주님의 판단에 따라 우리들의 생사가 결정될 테니까."
여인들은 희아의 말에 따라 각자의 악기들을 들고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입적할 채비를 하고 앉은 여승들을 방불케 했다.
필소해는 이 열 여섯 자매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저마다 옷 한 가지씩을 벗어서 치음의 시체 위에 덮어 놓은 상태라 모두 속옷과 몸에 착 붙는 엷은 속적삼 바람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욕정이 끓어올랐다. 이전 절세 미녀들의 알몸에 가까운 요염한 자태를 어디서 또 구경하겠는가.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천하의 계집들은 그 성미가 다 물과 같다는데 내가 치음이처럼 잘만 대해 주면 고분고분 나를 따르지 않을라구. 그렇게 되면 멀지 않아 전부 내 사람이 될 텐데, 아까운 계집들을 괜히 죽게 할 건 없지.'
생각을 고쳐 먹은 필소해는 석실 안에 대고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들일랑 그만두어라. 내가 너희들을 몽땅 풀어 줄 테니까!"
이윽고 석실 밖 문어귀에 태호방 무리들이 잔뜩 몰려오더니 돌문이 드르릉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석실 밖에는 태호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에 속하는 자들 가운데 일여덟 명 가량 지켜 서 있었는데 이들은 계집들이 석실에서 걸어 나오기가 무섭게 그녀들의 혈도를 재빨리 찔러 놓았다. 열 여섯 자매들은 혈도를 찔려 옴쭉달싹 못하고 석실 밖에 몰려 섰다.
필소해는 흐뭇했다. 혈도를 찔러 놓았으니 아무리 사나운 계집들이라도 새장에 갇힌 새나 다름없지 않은가.
희아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필소해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내 명령을 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니 모두 이 알약을 삼키고 맹세를 해라. 한평생 태호방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희아는 더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필소해를 쏘아보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호방의 두령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징글맞게 웃어대면서 열 여섯 자매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이들이 발정난 수캐들처럼 마구 덮쳐 들자 삽시에 여인들의 욕설과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개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별안간 한 사내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필소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미화를 부축한 황약사가 석실 문앞에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필소해는 이내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여우 같은 년들! 과연 내가 짐작했던 대로구나! '
그는 황약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황약사 이 놈아! 네가 석실 안에서 요행히 살아 나오긴 했다만 우리 태호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어려울 거다!"
"좋다. 어디 한번 겨뤄 보자!"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몸을 훌쩍 날려 태호방패거리들과 여인들이 몰려 서 있는 복판에 뛰어내렸다. 황약사는 열 손가락을 쫘악 펴들고 여인들의 혈도를 눈 깜짝할 새에 전부 풀어놓았다.
혈도가 풀려 몸이 자유로워진 희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태호방 놈들을 깡그리 잡아죽여 도련님의 복수를 하자!"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거문고를 휘두르며 태호방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였다. 황약사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휘파람 소리에 태호방 무리들과 열 여섯 자매들은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몇 놈 안 되는 태호방 놈들을 처치하는데 아가씨들의 손을 빌릴 필요까진 없다!"
황약사는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는 필소해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러자 태호방의 두령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황약사를 둘러쌌다.
필소해는 흐뭇한 시선으로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우쭐거리며 황약사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황약사와 필소해 일행이 한창 어울려 싸우는 것을 지켜 보던 여인들은 한 사람을 상대로 개떼처럼 덮쳐 드는 태호방 무리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여인들이 황약사를 돕기 위해 달려 나가려 하자 미화가 조용히 만류했다.
"아가씨들은 가만히 보고나 있어요. 태호방 놈들은 오늘 잠자는 범을 건드려 놓은 거나 진배없소. 두고 보면 알겠지만 황약사란 사람은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오. 아가씨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여인들은 미화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에 땀을 쥐며 싸움을 지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황약사의 두 눈에 별안간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무섭게 고함을 지르면서 옥소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그는 먼저 태호방의 귀두도(鬼頭刀)를 잡고 있는 자를 겨냥하고 돌진했다.
황약사의 옥소가 놈의 정수리를 후려 갈기자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피를 쏟으며 땅에 고꾸라졌다.
태호방 놈들은 모두 악착스런 비적들이어서 한 놈이 고꾸라졌다 해서 무서워 도망칠 놈들은 아니었다. 놈들은 더욱 악이 받쳐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황약사가 다시금 번개처럼 옥소를 휘둘렀다. 태호방 놈 하나가 여지없이 쓰러져 나갔다. 놈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쏘아보면 서 왈칵 피를 토하더니 황약사의 발밑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쯤 되자 태호방 무리들은 모두 주춤거리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태호방에 가담하여 지금껏 숱한 싸움판에 뛰어들어 보았지만 황약사와의 싸움처럼 어렵고도 무서운 싸움은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도 없고 그런다고 계속 싸울 용기도 없어 한동안 어쩔 바를 몰라 했다.
황약사가 식은 죽 먹기로'태호방의 사내들을 죽여 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열 여섯 자매는 하나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미화도 한쪽에 앉아서 황약사의 뛰어난 무예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파리를 잡는 것보다 더 쉬우니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황약사의 노기는 여전히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난 네 놈들에게 진 빚이 있다. 내 오늘 기필코 그 빚을 갚아 주고야 말 테다!"
그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천천히 필소해를 향해 다가들었다.
필소해의 가슴속에는 적개심이 타올랐다.
'아무래도 내 힘으로는 이 놈을 당해 랠 수가 없겠군. 그러나 내가 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이 놈이 나를 죽일 테니 달리 방법이 없구나.'
필소해는 갑자기 큰소리로 길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고함소리는 다른 태호방 무리들을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눈 깜짝할 새에 이삼십 명 가량의 태호방 무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필소해는 자기 편 한 무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황약사를 향해 거들먹거렸다.
"황약사, 감히 우리 태호방을 건드리는 걸 보니 네 놈은 과연 영웅호걸이다. 이 필소해도 그 용기에 탄복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 해도 우리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들을 전부 상대해 내긴 어려울걸?"
황약사는 대꾸하지 않고 굽이굽이 뻗은 돌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했다.
"너희 일흔두 봉의 인마들이란 대관절 어떤 놈들인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보나마나 자라 거북이 새끼 같은 놈들이겠지 만 이 동해 도화도 황약사의 솜씨를 한번 보여 주도록 하지."
황약사는 한 계단 한 계단 되짚어 내려오면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조나라 협객 모자에 붉은 술 날리고
허리에 찬 검날 서릿발 같구나
말잔등에 은빛 안장 얹으니
백마는 유난히 날렵하구나
십 보에 한 놈씩 목을 자르니
천리에 도적떼 사라졌어라
의로운 일 한 후엔 옷매무새 바로잡고
심산에 숨어서 몸과 이름 숨기네
이 이백(李白)의 〈협객행(依客行)〉을 읊노라니 황약사 가슴속에는 호기가 넘치고 용기가 백 배해졌다. 그는 필소해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 태호방 일흔두 봉의 인마들이 전부 모였느냐? 그럼 다들 황천길 떠날 채비나 하여라!"
말을 마친 황약사는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태호방 무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태호방 무리들을 향해 날아가면서 옥소로 연거푸 두 놈의 머리를 내리갈겼다. 두 놈은 당장에 머리가 묵사발이 되어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태호방 무리는 그래도 무서워하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어 땅 위에 내려선 황약사를 둘러쌌다.
태호방 무리 중에는 천수여래 (千手如來)라는 암기를 잘 쓰는 놈이 있었다. 그는 황약사가 태연하게 무방비 상태로 서 있자 그 틈을 타 슬그머니 어골침(魚骨針) 열네 개를 꺼내어 황약사를 향해 날렸다. 이 어골침에는 극독약이 발라져 있어 누구든 그 침에 맞기만 하면 꼼짝없이 죽게끔 되어 있었다. 어골침들은 휙휙 소리를 내면서 황약사에게로 날아갔다. 황약사는 대뜸 널따란 팔소매를
날리면서 손을 획 내저었다. 이 어골침들은 곧장 방향을 바꿔 어골침을 뿌린 자를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어골침은 눈 깜짝할 새에 놈의 두 눈과 숨통에 꽂혔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자기가 던진 어골침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어골침 열네 대는 태호방의 일여덟 놈을 연거푸 꺼꾸러뜨렸다.
황약사는 상대방이 암기를 쓰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격분한 그는 자기가 올라서 있던 큰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태호방 놈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옥소를 휘둘렀다.
잠깐 사이에 30여 명 중에서 일여덟 놈이나 꺼꾸러졌다. 태호방 놈들은 더는 덤비지 못하고 버터 선 채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황약사는 별안간 크게 너털웃음을 웃더니 숱한 눈길이 쏘아보는 가운데 태연하게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옷자락으로 옥소에 묻은 핏자국을 슬슬 닦으며 말했다.
"네 놈들은 태호에서 배 타고 노략질을 일삼아 왔으니 태호의 과도 소리야 익히 들어 왔겠지? 그리고 태호의 광풍과 파도의 맛도 많이 보았을 테지? 그럼 내가 지금부터 네 놈들한테 동해의 파도소리를 들려주겠다."
황약사는 옥소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불기 시작했다.
옥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필소해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네 놈이 아무리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예를 지녔다 해도 우리 태호방을 이렇게 깔볼 수가 있느냐? 네 놈이 아무리 안하무인이기로서니 태연히 앉아서 퉁소를 불기까지 하다니. 우리 스물이 힘을 합쳐 싸우면 네 놈 하나쯤은 얼마든지 꺼꾸러뜨리고도 남아.'
필소해는 당장 몸을 날려 황약사에게로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황약사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마치 앞에 철벽이라도 막아 선 듯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게 된 그는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라 쩔쩔맸다.
희아는 황약사의 이 〈벽해조생곡〉은 소리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동료들을 몽땅 한자리에 모여 앉도록 지시하고는 서로의 손을 잡고 저마다 숨결을 조절하면서 내력으로 이 옥소 소리를 막게 했다. 미화는 몸이 허약해져서 이 옥소 소리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는 옷자락을 찢어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태호방 놈들은 차츰 옥소 소리에 정신이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황약사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황약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집채 같은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한복판에 앉은 듯 오장육부가 온통 뒤집혔고 염통이 목구멍에라도 걸린 듯 피가 역류했으며 머리는 빠개지는 듯 아파 왔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귀를 막으며 옥소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바다의 성난 파도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제압할 수 있으며 바위나 산마저 칼로 도려내듯 모양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듯 옥소 소리는 점차 더욱 기승을 부리며 칼이나 검처럼 태호방 무리들의 가슴을 후벼 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태호방 놈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아 들고 제 몸을 푹 찔렀다.
다른 한 놈은 큰 바위 위에 기어오르더니 손을 뻗쳐 황약사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이윽고 놈은 품속에서 어독(魚毒)을 꺼내어 입 안에 집어 넣고는 마구 씹어 대기 시작했다. 놈은 어독을 삼키기가 무섭게 꽥꽥거리며 구역질을 하다가 피를 토하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황약사의 옥소는 더욱 힘차게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과 땅을 몽땅 삼키기라도 할 듯이 무섭게 요동쳤다.
희아네 열 여섯 자매들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들은 황약사의 이 〈벽해조생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손을 맞잡고 있어 내력이 합쳐져서 그런대로 견뎌 낼 수 있었지만 옥소 소리가 계속 이어지니 여간 괴롭지가 않았다.
희아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조로 유명한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한나라 황제는 여색을 밝히는지라
경국지색에 빠져 지냈네,
그녀의 동료들은 희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치음이 살아 있을 때 그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에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연습하게 했었다. 누구든 이 노래를 부르며 그 음률을 마음속으로 되살리노라면 황약사의 옥소 소리를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아의 오른쪽에 앉은 계집이 희아의 노래를 받았다.
"궁중에서는 여러 해나 찾을 수 없어……."
열 여섯 자매들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장한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성난 파도 소리와 폭풍우 쏟아지는 것 같던 황약사의 옥소 소리가 별안간 느려지면서 그 대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 술법은 더욱 지독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오장육부가 뒤집혀 피를 토하던 태호방 무리들은 별안간 고요해진 옥소 소리에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
희아는 계속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임금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며 구하지 못하는데……."
다른 한 계집이 응수했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피눈물이 흐르는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매들은 마외역(馬嵬驛)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양옥환(楊玉環)을 생각하면서 오로지 그녀의 비참한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황약사의 옥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또 그 옥소 소리로 인해 몸과 마음도 괴롭지 않게 되었다.
황약사는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태호방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네 놈들은 오늘 몽땅 내 손에 죽을 텐데, 내세에 다시 태어나거든 다시는 악한 짓들을 하지 말아라."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더니 태호방 놈들 중 한 놈의 머리에 있는 백회대혈 (百會大穴)을 겨냥하고 한 장 내갈겼다.
살인을 장난하듯 하는 황약사를 바라보고 있던 미화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황약사, 이제 그만해 두게! 사람을 죽여도 너무 지독하게 죽이는군!
그러나 그의 소리는 맥이 없어 마치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황약사는 쓴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게, 나 아니면 여태껏 자네 목숨이 붙어 있었을 것 같은가?"
그리고는 필소해를 향해 물었다.
"그 구두신취 학 영감은 지금 어디 있느냐?"
황약사의 물음에 필소해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네 놈한테 그런 건 말해 주어 뭣 하겠느냐?"
그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죽일 테면 죽이라는 듯이 대들었다.
황약사는 쓴웃음을 웃었다.
"네 놈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하는 수 없구나. 나한텐 뼈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부골침(附骨針)이란 독침이 있다. 내가 그 독침을 네 등허리에 꽃아 놓기만 하면 네 놈은 살아 있어도 차라리 죽은 것만 못한 나날을 보내게 될거다. 그 독이 하루하루 몸에 퍼지면서 고통을 겪을 텐데 마지막 죽을 무렵에 당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지. 자, 어떡하겠느냐? 학 영감의 거
처를 순순히 대했느냐, 아니면 부골침을 맞겠느냐?"
필소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구두신취 학 영감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로 말하면 아형까지도 가로챈 원수 같은 영감태기가 아니던가? 그런 영감태기를 위해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고통을 당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학 영감은 응취봉(默鷲蜂)에 있다. 밧줄을 타고 오르면 봉우리 위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자칫하다간 학 영감을 만나기도 전에 봉우리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런 줄 알아라."
그의 말이 끝나자 황약사는 필소해의 정수리에 손을 畿었다.
"네 놈은 아형이를 죽였지? 네 놈을 죽이지 않으면 아형이 어찌 황천에서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그는 대뜸 손에 힘을 주었다. 필소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지러지는 소리로 떠듬거렸다.
"아형은…… 아형은……."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두개골은 묵사발이 되었으며 삽시에 칠규로 피를 쏟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황약사는 미화 앞에 다가오더니 한마디 던졌다.
"나란 사람은 보다시피 성미가 사납고 행동이 괴팍한 사람이오.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그런 줄 알고 되도록 말을 삼가는 게 좋겠소."
그리고는 희아를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치음 공자는 실로 복 있는 사람이오."
황약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곧장 응취봉을 향해 떠나갔다. 여인들은 옷자락을 날리며 달려가는 황약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한달음에 호수 기슭에 닿은 황약사는 쪽배에 몸을 싣고 급히 노를 저어 가기 시작했다.
제12장 보물선의 구슬
황약사는 쪽배를 타고 응취봉 밑에 이르렀다. 사방을 둘러보니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백사장에는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나루터에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쪽배를 나루터의 말뚝에 매어 놓고 봉우리 아래 판잣집 옆에서 필소해가 말하던 그 밧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밧줄은 보이지 않았다. 전번에 여기에 왔을 때는 바로 이 절벽 밑에서 밧줄을 발견했고 그 밧줄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독수리를 만나 그만 평강부까지 채여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암만 찾아도 밧줄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어쩌면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필소해란 놈이 거짓말을 했을까? 아니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곳엔 밧줄 사다리가 있었어. 그런데 그게 어디로 사라진거지?'
황약사는 틀림없이 이 봉우리 위에 구두신취 학영감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봉우리 위에 올라갈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응취봉은 태호 일흔두 개의 봉우리 중에서 제일 높고 아름다운 봉우리였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태호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파도가 출렁이는 태호.라 옹기종기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마치 산수화마냥 수려했다.
이 응취봉 꼭대기에는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 앞에는 빗물받이용 돌절구통이 열두 개나 줄지어 놓여 있다. 큰 바위 옆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둘려 있는데 동굴 안에 들어서면 돌계단이 속으로 뻗어 있다. 이 돌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석실이 나타난다. 이 동굴 앞에 한 아가씨가 앉아 있는데 이 아가씨가 바로 아형이었다.
아형은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붙잡혀 왔는지 잘 몰랐다. 그날 학 영감은 횐 천으로 그녀를 칭칭 휘감으며 말했다.
"임자는 이제 하늘 위에 올라가게 됐어. 거기 올라가기만 하면 위로는 신선들과 친구가 되어 한담을 할 수 있고 아래로는 속세와 인연을 끊어 누구도 임자를 찾을 수 없게 되지."
말을 마친 학 영감은 제풀에 좋아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큰 독수리 두 마리가 날아오더니 아형의 몸을 동여맨 밧줄을 억센 발톱으로 확 틀어잡았다. 독수리들은 날개를 퍼득이면서 하늘로 솟구치더니 태호 위를 한참 동안 날다가 응취봉 위에 내려섰다.
응취봉은 다른 산봉우리들과는 달랐다. 산꼭대기는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졌는데 마치 누가 일부러 깎아 놓기라도 한 듯 평평했다.
아형은 자기가 태호방 총타주 학 영감에게 끌려온 이상 어느 방 안에 갇혀서 학 영감으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꼭대기 위에 내던져지자 오히려 더 불안했다.
아형은 물이 담겨져 있는 열두 개의 돌절구통을 발견했다. 그녀는 대뜸 그것이 빗물을 받기 위한 것임을 알아챘다.
이때 독수리들이 칼날 같은 부리로 아형의 몸을 휘감은 천을 쭉쭉 째기 시작했다.
행동거지가 자유로워진 아형은 재빨리 산봉우리의 가장자리께로 걸어가 보았다. 봉우리 아래로 통하는 길을 찾아 호심장으로 돌아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낭떠러지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어디나 칼로 깎은 듯한 천길 절벽이어서 설사 날개가 돋혔다 해도 날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굳어 버렸다. 아형은 너무나 기가 질려 눈앞
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실컷 울고 난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빗물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돌절구통 열두 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암담하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옴을 느꼈다.
'여긴 꼭 사람이 살거야. 만일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이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어 .
이렇게 생각한 아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움푹 패인 커다란 바위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다가 큰 바위 옆에 뚫린 동굴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형은 다가가서 굴 속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누가 있나요?"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웅웅거리며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형은 몸을 움츠리고 동굴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 한참 들어가니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복판에는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는데 다름아닌 태호방의 총타주 학 영감이었다.
"어서 오게."
아형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결국은 그를 여기서 만나고야 마는구나 싶었다.
학 영감은 아형에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낭잔 날 맘에 안 들어하지? 하지만 이 응취봉 꼭대기에 사람이라고는 낭자와 나 둘 뿐이야. 나와 성혼하지 않고서는 여기서 내려 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 내 말 알아듣겠나?"
아형은 눈살이 꼿꼿해지면서 쌀쌀하게 대꾸했다.
"천만에요. 당신 같은 늙은이한테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돌절구통한테 가겠어요."
학 영감은 화를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난 임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자는 생각뿐이지 임자를 괴롭히자는 생각은 없어. 이 응취봉 위에서는 내 말을 따르는 길밖엔 없어. 내 말을 거역하면 고초만 당하게 될거야. 결국엔 내 말을 들을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생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형은 여전히 쌀쌀하게 대답했다.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렸어요. 당신이 암만 무어라 해도 내 맘은 변하지 않아요."
아형과 학 영감은 봉우리 꼭대기에서 함께 하루를 보냈다. 아형에게 있어서 이 하루는 마치 10년은 되는 듯 길고 지리했다. 때때로 독수리 두 마리가 물고기나 산토끼를 잡아다가 아형과 학 영감 앞에 던져 주를 했다. 학 영감은 서슴없이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쥐고는 발기발기 찢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들을 입 안에 넣고 쩝쩝 씹어 댔다.
"참 맛있구나, 참 맛있어!"
학 영감은 먹으면서 연신 중얼거리더니 물고기 등살을 쭉 찢어서 아형에게도 던져 주었다.
굶은 야수처럼 날생선을 씹어 먹는 학 영감을 이따금 건너다보면서 아형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임자도 요기를 하지 그래?"
학영감이 한마디 던졌다. 아형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두 마디 톡톡 쏘던 아형이 별안간 침묵을 지키자 학 영감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슬금슬금 아형에게로 다가앉았다. 아형은 냉큼 몸을 돌려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래도 그가 계속해서 다가들자 아형은 아예 돌절구통 옆으로 가 피해 앉았다.
학 영감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형이, 이 돌절구통 열두 개에 물이 가득 차 있으니 첫번째 것은 세수와 양치질에 쓰고, 두 번째 것은 손 씻는 데 쓰고, 세 번째 것은 목욕하는 데 쓰라구. 그렇게 한 달을 써도 다 쓰진 못할 거야."
아형이 돌절구통을 보며 물었다.
"이 돌절구통 열두 개의 물을 다 쓰면 이 산꼭대기에서 내려갈 수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학 영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로 천진한 생각이로구나. 이 돌절구통 열두 개에 담겨 있는 물을 다 쓰기도 전에 하늘에선 또 비가 내릴 테고 그러면 물이 가득 채워질 텐데, 다 쓰긴 어느 세월에 다 쓴단 말이냐? 여기서 내려가자면 나하고 성혼을 해야만 한다지 않았느냐?"
아형은 학 영감을 쳐다보면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와 더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형이 잠자코 있자 학영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형이, 임자가 나처럼 이 독수리들을 타고 다닐 수만 있다면 나도 임자가 여기서 내려가는 걸 말리지 않겠어. 이 독수리들이 임자를 등에 태우려 하겠는지, 한 번 타볼 생각이 있나?"
학영감이 휘파람을 휘익 불자 하늘에서 빙빙 날던 독수리 두 마리가 급히 봉우리를 향해 날아오더니 몇 바퀴 선회하다가 두 사람 곁에 내려앉았다.
"어떤가? 이 독수리들이 임자가 등에 타도록 가만히 있으면 난 임잘 여기서 떠나게 하겠어."
학 영감은 이렇게 말하더니 독수리의 등에 올라앉아 두 손으로 독수리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그가 또 휘파람을 휘익 불자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기 시작했다. 독수리는 봉우리 아래까지 내리꽂히기도 하고 하늘 높이 치솟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날다가 다시 응취봉 꼭대기에 내려섰다.
독수리 등에서 내린 학영감이 다시 말했다.
"원한다면 독수리를 타는 법을 알려 주겠다. 그럼 여기서 내려갈 수 있지 않느냐?"
아형은 학 영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웅취봉 아래를 굽어보았다. 콩알만큼 작게 보이는 집 몇 채와 백사장, 그리고 태호의 푸른 물이 내려다보였다.
'그래, 네 놈이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면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그만이다.'
아형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학 영감은 갑자기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했다.
"아형이, 난 솔직히 아형일 괴롭힐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 하지만 아형이 이처럼 끝까지 매정하게 굴면 내 참을성에도 한도가 있는 거야."
"영감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난 영감님과 성혼할 생각이 없어요. 난 정말로 싫어요. 그러니 더는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계속 이렇게 괴롭히신다면 난 여기서 뛰어내리고 말겠어요."
아형이 이렇게 잘라 말하자 학 영감으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 뜻이 그렇다면 나도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독수리 등에 올라 앉아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한편 병묘는 태호의 작은 나무숲에 있는 커다란 거북이 껍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불과 악귀가 소인과 맺은 약속에 따라 병묘는 거북이 껍질 안에서 열흘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흐레가 지나자 그는 더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몸에 밴 독을 전부 몰아내자면 내력을 모아 두 손바닥을 한 쌍의 겁독주에 대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아형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묘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소인이 말했다.
"자네가 잡생각을 하면서 정신을 모으지 못하면 독은 혈맥 안에 가라앉게 되어 다시는 그 독을 몰아내지 못하게 되네, 만일 독이 그냥 피 속에 남아 있으면 술을 한 번 먹거나 몸에 약간의 상처만 나도 독이 퍼져 목숨이 위태로워져."
그의 말에 병묘가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 보시기에 제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네를 보니 이승에서는 6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피 속에 독이 있으면 자네가 아무리 이승과 인연이 깊다고 해도 쉰을 넘기기 어려울 거야."
소인의 말에 병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 같은 신세에 쉰 살만 살면 족합니다. 더 살아 봤자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병묘는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날려 원수구퇴에서 튀어나와 나무 위에 앉은 소인을 향해 읍을 했다.
"목숨을 살려 주신 선생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한데 지금 저의 한 친구가 사경에 처해 있으므로 계속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이쯤에서 작별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병묘는 인사를 마치고는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휙 소리가 나면서 사등(蛇藤)이 병묘의 목에 척 감겨들었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병묘의 몸뚱이는 가볍게 쉽게 올라 다시금 소인 앞으로 끌려갔다.
소인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자네가 가겠다니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세상 인심이란 험한 줄 알아야 돼, 자네는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여자가 자넬 어떻게 대할지는 생각해 봤나?"
소인의 이 말에 병묘는 잠깐 침묵을 지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형인 날 친혈육처럼 대했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엔 나를 두고 있었을 거야. 난 호심장에서 마치 아형과 한 식구처럼 지냈었어. 아형은 애사에 날 도왔고 일일이 날 보살펴 주었어. 내가 가서 아형일 구하지 않으면 누가 그녀를 구한단 말인가.'
병묘는 다시금 결연히 말했다.
"선생님, 전 꼭 가야 합니다."
"그럼 좋아!"
소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한 번 힘껏 펼쳤다. 그러자 네 개의 나뭇가지가 날아와 병묘의 몸에 꽂혔다.
병묘는 깜짝 놀라 제 몸을 살펴보았다. 두 가지는 몸에 꽂혔고 다른 두 가지는 어깨에 꽂혔는데 수소음심경맥(手少陰心經脈)의 극천혈과 수태양장경맥(手太煬腸經脈)의 양로혈(養老穴)에 꽂혔다. 병묘는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소인이 자기를 가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러나 소인은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 피 속에 남아 있던 독은 이미 몰아냈네. 하지만 수소음심경맥과 수태양장경맥에 있는 독은 아직 채 몰아내지 못했어. 자네 몸에 내가 나뭇가지 네 개를 꽂아 놓은 데는 다른 목적은 없네. 다만 나뭇가지가 꽂힌 자리는 네 대혈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게, 자넨 적에게 손을 쓰기 전에는 절대 그 나뭇가지들을 뽑아서는 안 되지만 손을 쓸 때에는 반드시 뽑아 내야 하네. 그래야만 자네 뜻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아무튼 최선을 다해 친구를 구하도록 하게나."
병묘는 소인의 말을 명심했다. 그는 소인을 향해 읍을 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호숫가로 향했다. 그러나 호숫가에 다다른 그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이곳을 떠나려 하니 배 한 척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배가 없어 곤란하게 됐군. 내가 도와줄까?"
그의 귓전에 소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한창 조바심이 나 있던 병묘는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말했다.
"부탁입니다. 친구를 구하는 게 무척 시급한 일이니 선생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넨 복이 있는 사람이야. 친구를 위하는 그 마음이 갸륵해서 나도 도와줄 마음이 생기네. 원수구퇴에 다시 돌아가서 분수주자(分水珠子) 한 쌍을 가져다 쓰도록 하게 다 쓴 뒤엔 반드시 돌려 주어야 해."
병묘는 몹시 기뻐하며 거듭 인사를 했다. 원수구퇴에 꼬박 아흐레나 앉아 있었는지라 그는 그 구슬의 위력을 다소나마 알고 있었다.
겁독주 옆에 붙은 한 쌍의 구슬은 야명주였다. 조용한 밤이면 이 진주들은 반짝반짝 빛을 뿌렸는데, 그 때문에 태호에 사는 물새와 모기, 파리 같은 벌레들은 그 불빛을 찾아 수없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새들과 벌레들은 멀리서 날아다닐 뿐 감히 다가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독을 쫓는 신령스러운 구슬과 다섯 번째 줄에 있는 사악한 것을 쫓는 구슬은 모두 보배들이었기 때문이다.
병묘는 사악한 것을 쫓는 구사주(驅邪珠) 옆에 붙은 구슬 한 쌍은 두 눈을 보호해 주고 정기를 돌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원수구퇴에 앉아서 독을 뽑는 동안에 그는 이러한 구슬들의 기묘한 용도를 알게 되었다. 야광주로는 어둠을 밝힐 수 있고, 구독주(驅毒珠)로는 독을 물리칠 수 있고, 벽화주로는 불을 끌 수 있고, 구사주로는 사악한 무리가 범접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고, 명목주로는
눈을 보호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양심주는 염통을 보호하고, 정안주는 사람의 얼굴을 늙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모주라는 것은 더욱 신기했다. 매일 동틀 무렵이면 이 모주 아래에는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태호의 진주들이 가득 쌓이곤 했다. 태호의 갯바닥에서 살던 진주조개들이 밤이면 이 모주의 빛을 보고 원수구퇴에까지 기어와서 자기 뱃속에 품고 있던 진주를 살며
시 토해 놓고 물러가곤 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 매일 새벽마다 이런 진주들을 거두어 간다면 며칠 새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병묘는 소인이 말한 분수주자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원수구퇴 옆에 다가가서 네 번째 줄을 더듬어 볼록하게 돋아난 구슬 한 쌍을 만져 냈다.
소인은 병묘를 등지고 앉은 채 말했다.
"자네가 두 손바닥을 그 거북이 껍질에 붙이고 손바닥 복판에 있는 노궁혈(勞宮穴)로 내력을 내보내어 바짝 힘을 주면 거북이 껍질은 저절로 깨지면서 진주를 토해낼 걸세. 그러나 십분 조심해야 돼. 진주가 굴러 나오는 속도가 번개처럼 빠르니깐. 자네가 만일 붙잡지 못하면 태호에 굴러 들어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니 말이야."
병묘는 소인의 말대로 두 손바닥을 거북이 껍질에 붙이고 온몸의 내력을 기울였다. 이윽고 병묘의 손바닥이 뜨거워지더니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진주 한 쌍이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병묘는 잽싸게 손을 뻗쳐 그것을 받아 쥐었다.
병묘가 소인에게 읍을 하자 소인이 다시금 다짐을 했다.
"자네가 나의 이 진주 한 쌍을 가져가면 이 원수구퇴는 물 속에 들어가기 어려워. 그러니 다 쓰고는 꼭 나한테 돌려줘야 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 줄만 알아."
"제가 죽지만 않으면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병묘는 굳게 맹세를 하고는 호숫가로 달려갔다.
병묘는 소인의 말대로 그 진주 한 쌍을 주머니에 넣고는 곧장 호수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몸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호숫물이 양쪽으로 확확 갈라지는 게 아닌가. 병묘는 마치 땅 위를 걷기라도 하듯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철판봉 밑에 이르렀다.
호수 기슭에 올라서서 보니 그의 몸에는 물 한 방을 묻어 있지 않았다. 기슭에 오른 그는 철관봉의 철판교를 나는 듯이 건너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는 다시 태호를 바라보다가 문득 큰 배 한 척이 파도를 가르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사불과 악귀의 은호 보선이었다. 그는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잽싸게 철판봉의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태호 보선은 이내 호수 기슭에 닿아 멈춰 섰다. 병묘는 숨을 죽이고 배의 동태를 살폈다.
뱃머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악귀였다. 악귀는 닻을 들어올려 서는 힘껏 물 속에 내던졌다. 닻은 모래바닥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고 닻줄은 삽시에 팽팽해졌다. 닻을 내린 악귀는 고개를 돌려 선실을 향해 뭐라고 고함을 지르더니 닻줄을 타고 호수 기슭에 미끄러져 내렸다.
악귀가 기슭에 내려서는 순간 몸매가 호리호리한 처녀가 뱃머리에 나타났다. 처녀는 뱃머리에 선 채 철판봉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녀의 눈길이 병묘가 몸을 숨긴 바위 쪽으로 들려지자 병묘의 가슴은 후드득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기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처녀는 무심히 흩날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배에서 내려왔다.
뭍에 내려선 그녀는 악귀와 함께 큰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둘은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악귀는 왼쪽에, 처녀는 오른쪽에 앉았다. 처녀는 널찍한 소매 안에서 무슨 물건을 꺼내더니 앞에 던졌다. 그것은 모두 네 개로 악귀가 손을 한 번 칠 때마다 불꽃이 튕기면서 방금 던진 네 개의 물건에 차례로 불이 붙었다.
대낮이어서 그 불빛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괴상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물건들에 전부 불이 붙자 둘은 각자 팔짱을 지르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제야 병묘는 이 두 사람이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들의 거동을 보아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후에 호수의 수면 위로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해 왔는데 뜻밖에도 독수리였다. 독수리는 잠깐 사이에 철판봉을 몇 번 맴돌더니 백사장에 내려앉았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기가 무섭게 독수리 등에서 웬 사람 하나가 성급하게 뛰어내리더니 곧장 사불과 악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바로 학 영감이었다.
악귀는 학 영감을 쏘아보면 서 물었다.
"학 영감, 자네의 태호방이 우리를 이렇게 푸대접할 수가 있나? 그래 자넨 사불님과 악귀님께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걸 다 까먹었단 말인가?"
학 영감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꾸했다.
"저희들이 두 분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저희 태호방은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한데다가 태반이 흩어져 버렸습지요. 이런 판에도 사불님께서는 여전히 공물을 바치라고만 하시고 악귀님께선 치성을 드리라고만 하시니 정말 야속하십니다. 두 분께서는 이렇게 각박하게 구실 것이 아니라 의당 저를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불은 대뜸 눈살이 꼿꼿해졌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자네의 태호방은 이곳 항주부에서 제일 가는 무리가 아니던가? 그런 태호방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누가 이 사불과 악귀에게 공물을 바친단 말인가?"
학 영감은 별안간 앙천대소를 했다. 그 소리는 비분에 넘쳐 있었다.
"형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사불님과 악귀 님께서는 저를 도와 태호방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만 해주시면 전 태호방에서 모아 둔 재물을 몽땅 공물로 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 동해 도화도에서 건너온 황약사와 도박에 미친 병묘와 미화란 놈만 없애 주십시오. 그럼 전 두 분의 분부라면 무슨 일이든 따르겠습니다."
병묘는 비로소 사불과 악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원래 두 연놈은 태호방의 도적떼와는 한패 였구나. 그러기에 태호 보선이 아무데나 마음놓고 다니고 태호방과 모든 강호의 인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사불과 악귀는 도적 무리들 속에서는 위풍이 당당하구나. 그런데 학영감이 황약사와 나를 없애 달라는데 사불이 과연 그를 도울까? '
사불이 대답했다.
"학 영감, 걱정 말게. 나와 악귀가 그만한 일도 해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 태호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나? 그 황약사란 놈은 어디 있나? 먼저 그 놈부터 요절낼 테야. 그 다음엔 미화란 놈을 잡아죽이고 마지막으로 그 병묘란 놈을 찾아보자구. 그럼 되겠나?"
학 영감은 아주 마음이 흡족했다. 원래 그의 수하에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와 일흔두 봉의 두령들이 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연달아 죽고, 상하고, 도망치고 하여 네댓밖에 남지 않았다. 이처럼 풍비박산이 난 태호방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게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그런 와중에 사불과 악귀가 도와주겠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태호방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은 죄다 한 아가씨 때문입니다. 황약사란 놈이 우리 태호방을 한사코 쳐 없애려 한 것도 역시 그 아가씨 때문이었지요. 두 분께서 저와 함께 응취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다리시면 그 놈이 꼭 찾아올 것입니다."
사불과 악귀는 말없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은 곧장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응취봉으로 향했다. 배는 기우뚱거리면서 태호 일흔두 봉우리 중에서 제일 높은 응취봉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를 본 병묘는 그들의 뒤를 밟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들이 나를 죽여 버리겠다구?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걸? 네 놈들이 황약사란 사람을 죽이겠다구 장담을 하는데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나로선 아형이 거기에 있다니 그녀를 구해 내는 게 무엇보다도 급선무야.'
오래지 않아 배를 쫓아간 병묘는 응취봉 기슭에 닿았다. 배가 호숫가에 멎자 셋은 일제히 기슭에 내려섰다. 독수리 두 마리도 배에서 날아 내려 학 영감의 뒤를 쫓았다. 병묘는 냉큼 빈 태호 보선에 뛰어올라 몸을 숨기고 셋이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몸뚱이를 낮추게 하고는 독수리 등에 뛰어 올라탔다가 다시 뛰어내리더니 악귀더러 자기처럼 독수리 등에 올라타라고 눈짓했다. 악귀는 호기심이 동해 얼른 올라타고는 좋아라고 웃어댔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대가리를 슬슬 어루만져 주면서 날으라고 했다. 이윽고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독수리 두 마리는 이렇게 번갈아 세 사람을 태우고 응취
봉을 향해 날아올랐다.
셋이 모두 응취봉 꼭대기에 오르자 병모는 몹시 조급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응취봉에 오를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선실로 들어가 배 안의 물건들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보물들을 넣은 궤짝을 들춘다가 그는 비수 두 자루를 발견했다. 그는 대뜸 이 비수들이 보통 비수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는 양손에 비수 한 자루씩을 쥐고 두 손에 동시에 힘을 주어 칼날을 서로 찍어 보았다. '쨍!'하는 야무진 소리가 나면서 비수 날들이 진동했지만 날이 부러지기는커녕 이 하나 빠지지 않았다. 병묘는 과연 훌륭한 비수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병묘는 수중에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지 않은 터라 이 비수 두 자루를 품속에 찌르고 응취봉을 향해 출발했다.
응취봉에 다다른 그는 비수를 번갈아 암벽에 박으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응취봉 꼭대기에서 아형은 돌절구통 앞에 앉아 물고기를 씻고 있었다. 그러나 반나절이나 씻어도 여전히 비린내가 코를 찔러 먹을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학 영감과 사불 그리고 악귀가 아형 앞에 나타났다. 아형은 악귀를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학영감이 자기의 시중을 들게 하려고 악귀를 붙잡아 온 줄로만 생각했다. 이윽고 사불이 나타나자 아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곱게 생긴 아가씬데? 저 죽일 놈의 늙다리가 어디서 이런 고운 처녀를 붙잡아 왔을까? 저 아가씨를 마누라로 삼을 작정인가 보지? '
사불이 아형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가씨가 태호 호심장에 사는 아형 낭잔가?"
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불이 아형의 머리칼과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모두들 아가씨를 선녀같이 아름답다고들 하던데 어찌하여 이처럼 봉두난발이 되고 얼굴도 물고기 껍질처럼 되었지? 아가씨가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구 항주부의 세 공자가 아가씨한테 미쳐 날뛰었다는 게야? 아가씬 누굴 좋아하나? 누구한테 시집갈 생각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 솔직히 털어놔 봐, "
아형은 그녀를 바라보며 심지가 바르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되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치음 공자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낭자가 미화를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두 사람이 성혼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야. 그런데 그 병모란 사람을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어. 그래, 아가씨와 그 사람이 함께 죽게 하겠어. 하지만 아가씨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지. 난 그 사람의 생명의 은인이야. 그 사람이 독에 중독된 걸 내가 구해 주었지."
아형은 사불의 말이 믿기질 않았다. 암만 봐도 이 여인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성싶지 않았다.
사불은 아형이 자기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장력을 써서 돌절구를 들이쳤다. 돌절구는 당장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절구의 물이 쏟아지자 두 마리의 물고기가 땅바닥에서 고통스레 퍼덕였다.
아형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물고기를 집어 옆에 놓인 다른 돌절구에 넣어 주었다.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미소는 누구라도 반하게 만들 것 같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불은 내심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학 영감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당신의 독수리를 시켜 저 년을 쫓아 버리게 해요. 당장요!"
학 영감은 사불의 말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녀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시키는 대로 했다. 학 영감의 명령에 독수리는 무섭게 아형에게로 달려들었다. 아형은 잠깐 사이에 독수리에 쪼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형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태호에 메아리쳤다.
사불과 악귀는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사불은 사(邪)하고 악귀는 악(惡)하다만 사악한 짓을 많이 하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니야."
갑자기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벼랑께로 꺼먼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제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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