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서독 구양봉 6 김용
제31장 사부님의 유언
구양봉은 제갈정이 사자우의 허벅지에서 살을 베어내는 것을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사자우가 나의 사숙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부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저 놈은 사부님을 해쳤고 유운장을 망쳐 먹었으며 우리 유운장의 명성을 더럽혔으니 이런 일을 당하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만약 제갈정이 손을 대지 않았다면 내가 나서서 이 요망스러운 사자우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구양봉은 제갈정이 사자우의 살점을 베어내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후련해졌다.
구양봉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유운장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라고 하셨다. 나는 세 사람을 죽였다. 속문성도 죽었다. 이제 제갈정이 사자우만 죽이면 유운장은 텅 비게 된다. 제갈정은 내가 직접 죽여야지.'
제갈정이 사자우의 멱살을 쥐고 윽박질렀다.
"이 놈, 왜 우리 온 가족을 죽이고 나의 두아마저 죽였느냐?"
사자우의 허벅지에서는 벌건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사자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제갈정은 더욱 무섭게 사자우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죽일 놈아, 우리 집안의 열세 식구를 모두 죽였으니 네 놈을 어떻게 죽였으면 좋겠느냐?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사자우는 역시 입을 봉하고 있었다. 말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아예 입을 다물고 있기로 작심한 터였다.
제갈정이 계속 소리쳤다.
"네 놈이 내 가족을 죽이고 내 옷을 빼앗았으니 네 놈의 가죽을 벗겨도 성이 풀리지 않겠다. 네 놈이 내 아들을 죽이고 나의 팔을 찍어 냈으니 나도 네 놈의 왼손을 잘라 놓아야 직성이 풀리겠다. 또한 네 놈은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두아를 죽였으니 네 놈의 염통을 뽑아 내야 한이 풀리겠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운장의 놈팽이들처럼 성정이 괴팍스럽고 지독한 놈들도 다시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평소에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불여우처럼 간특한 사자우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자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구양봉에게 애걸했다.
"여보게 봉이, 우리 함께 사부님 문하에서 무예를 닦던 일을 생각해서 날 좀 살려 달라고 제갈정에게 말해 주게나. 정말 부탁이네."
"제갈정이 죽이지 않아도 내가 죽일 판인데 무슨 가당찮은 소리냐?"
구양봉이 느릿느릿 대꾸했다.
사자우는 그만 앞이 캄캄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구양봉이 제갈정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당신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라고 당부하셨소. 그러니 사자우를 죽인 다음 나를 찾아오시오. 내 기다리리다."
그는 말을 마친 뒤 휘적휘적 그곳을 떠났다.
백타산장은 많은 졸개들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구양봉은 내내 모용쟁의 일이 염려스러웠다.
모용쟁은 침대에 앉아 무릎을 싸안고서 멍하니 촛불을 마주하고 있었다.
방안에는 크고 작은 빨간 촛불들이 죽 놓여 있었는데, 큰 것은 아이들의 팔뚝만하고 작은 것은 이쑤시개만했다. 초들마다 불이 밝혀져 있어 방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 그린
듯이 앉아 있는 모용쟁의 자태는 한결 신비로웠다.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두 눈이 먼 사람이 온 방안에 촛불을 켜 놓고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무슨 기척을 느끼고 한밤중에 일어나 촛불을 켜 놓은 모양이었다.
구양봉은 어쩐지 모용쟁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앉으며 모용쟁을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왜 자지 않는 거요? 밤중에 일어나 뭘 하오?"
"쉿, 조용히 해요."
모용쟁이 조용히 말을 막았다. 퀭하니 뚫린 그녀의 두 눈에는 신비로운 빛이 어려있었다.
구양봉은 이 여자가 왜 이럴까 하고 방안을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촛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뭘 하는 거요?"
그가 다시 물었다. 모용쟁은 조용히 구양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퀭하게 뚫린 눈만 아니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방불케 하는 미모였다. 모용쟁은 신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용히 해요. 그 사람이 와요!"
"누가? 뭘 하러 온다는 거요?"
모용쟁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두 뺨에 달콤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저를 구해 준 분이에요."
모용쟁의 대답이었다. 구양봉이 자초지종을 캐어묻자 모용쟁은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인즉슨 이러했다. 언젠가 모용쟁은 백타산의 두령 임일천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 호숫가에 던져졌다. 모용쟁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모용쟁은 팔급진보상(八扱珍資箱)에 들어간 몸이었다. 한참 있노라니 웬 사나이가 와서 상자를 메고 가면서 흥얼거렸다. 그 사나이는 얼마
쯤 가다가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야명주와 청동 거울을 번개같이 채 가지고 자취를 감추었다. 행동거지가 어찌나 빨랐던지 모용쟁은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모용쟁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구양봉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무섭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구양봉이 산장을 떠나 속문성과 어우러졌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모용쟁은 구양봉을 찾았으나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모용쟁의 마음은 별안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구양봉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나 아닐까? 혹시 구양봉이 두 눈을 잃은 나를 꺼려서 달아난 거나 아닐까? 모용쟁은 갖가지 생각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모용쟁이 한창 서럽게 울고 있을 때 느닷없이 웬 남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 지금 낭자의 상태를 보니 애당초 낭자를 구해 주지 말았어야 할 걸 구해 됐구만. 하지만 그땐 멀쩡한 아가씨가 상자 속에 갇혀 있으니까 참 불쌍했었지. 아무튼 나는 말이야, 낭자를 구해 주고 한몫 단단히 보았지! 그때 손에 넣은 물건은 기막히게 귀중한 보배들이야. 야명주는 참으로 희귀한 것이구, 또 청동 거울 몇 개는 모두 진한 때 것으로 그 중 하나는 상대의 이름난 장인 신격
(辛 )이란 사람이 손수 만든걸세. 그런 희귀한 보물은 황제에게도 없을 거요. 하여튼 낭자는 복 있는 사람이야. 나 같은 사람도 낭자 덕분에 복을 누렸으니까. 한데 존귀하신 아가씨께서 왜 울고 계신가? 무슨 가슴 쓰린 일이 있는 성싶은데 허물 말고 나한테 말씀해 주시오……."
모용쟁은 앞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자코 있었다. 얼마 후 자기를 임일천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선뜻 큰소리로 말했다.
"저를 구해 주신 분이시군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 인사의 말씀은 그만두시고 왜 울고 있는지 말씀해 보시오."
사나이의 말에 모용쟁은 가슴에 묻혀 있던 설움이 왈칵 터져 올랐다. 그 설움과 안타까움은 구양봉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들을 눈물로 하소연했다.
"어르신. 저는 앞이 보이질 않아요……."
그러자 사나이가 껄껄 웃으면서 다가왔다.
"낭자의 눈을 좀 봅시다."
"하지만 방안이 어두워서 어떻게 보겠어요?"
사나이는 또 한 번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방안이 어두우니까 내가 촛불을 켜야겠군.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시 후 두 손으로 무엇인가 잽싸게 바꿔 쥐는 듯싶더니 무엇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톡톡' '퍽퍽' '찰싹찰싹'하는 이상야릇한 소리가 조화롭게 이어졌다. 모용쟁은 그 소리만 듣고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물었다.
"지금 뭘 하시죠?"
"낭자를 위해 촛불을 켜고 있소. 이제 낭군님이 돌아오면 방안에 불빛이 그득할 것이고, 낭군님 눈에 아가씨는 한결 예쁘게 보일 것이오. 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사나이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모용쟁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실명된 후로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구양봉은 극진하게 보살펴 주기는 해도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늘 밤에 찾아온 이 사나이는 갖은 수단을 다 부려 모용쟁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모용쟁은 실로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웃
을 수 있었다.
사나이는 기묘한 내력으로 초들을 화살처럼 날려 벽이며 탁자며 책꽂이에 세워 놓았다. 사나이가 말했다.
"모용 낭자, 초는 모두 여든한 개요. 구구는 팔십 일인데, 아홉 이라는 숫자는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오. 내가 먼 곳에서 이 한아름 되는 초들을 메고 온 뜻은, 상자 안의 보물들을 넘겨준 낭자의 은공에 보답하고 낭자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요."
모용쟁은 얼굴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구구는 팔십 일이라……. 여든한 개의 초를 순식간에 다 날려 세운 사나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붉은 초를 다 꽂았소. 어떻소?"
"정말 고마워요. 온 방안에 초를 수풀처럼 세웠으니 정말로 아름다울 거예요."
모용쟁이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자 사나이는 빙그레 웃었다.
"아름답고말고요. 그럼 아가씨, 촛불을 켜 볼까요?"
사나이는 빠른 속도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확, 확' 하고 불붙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모용쟁은 하나, 둘, 셋…… 하고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구구는 팔십일, 틀림없이 여든하나의 촛불이었다.
사나이는 숨소리를 죽이고 더는 말이 없었다. 한참 후 모용쟁이 말을 건넸다.
"왜 말씀이 없으신가요?"
귀여운 소녀와 이야기하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던 사나이는 불현듯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낭자, 방안이 얼마나 휘황하고 아름답소! 벽에도 탁자에도, 방안의 기둥이란 기둥마다 붉은 초가 꽂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소. 이 얼마나 아름답소!"
사나이의 신비로운 음성에,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두렵기도 한 모용쟁이 조용히 말했다.
"저를 구해 주셔서 참말 고마워요."
사나이는 빙그레 웃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모용쟁이 다시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시죠?"
사나이는 잠깐 주춤거리다가 대꾸했다.
"아가씨가 혹시 기억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소. 나는 벼슬자리와 는 인연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상관위이라 한다오."
"알겠어요. 상관위란 분이시군요!"
"기억해 주셔서 고맙소. 하지만 낭자와 처음 만났을 땐 나의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지."
모용쟁은 술집에서 상관위를 처음 만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상관위는 몇 년 전 소씨 거렁뱅이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크게 다친 까닭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워낙 풍채가 있던 터라 그냥 겉으로 봐서는 괜찮았지만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상태라 겉늙어 보이고 기백도 사라진 듯 보였었다. 그때 그의 옆에는 상관위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구천인도 있었다. 그들이 별탈없이 그곳을 빠
져 나간 뒤 개방의 무리들은 꽁무니를 빼는 철장방 패거리들을 '녹림의 망나니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었다.
모용쟁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생긋이 웃으며 물었다.
"어르신은 철장방의 두령 상관위란 분이시지요?"
"그렇소."
상관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모용쟁은 한참 후에 다시 말을 건넸다.
"듣자니 철장방은 독한 사람들이라고 하던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 말에 상관위의 얼굴은 금세 어둡게 흐려졌다.
"사내 대장부는 자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감당하는 법이오. 남들이야 뭐라고 지껄이든지 자기의 마음만 결백하면 그만인 줄 아오!"
상관위는 제법 큰소리를 쳤지만 자기의 졸개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니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철장방은 초창기에 호걸다운 씩씩한 사나이들로 이루어졌고 강호 호걸들의 명성에 흙칠을 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방주의 자리에 앉은 후부터는 무예도 전임 방주들에 비하여 떨어졌고 부하들도 마음대로 인명을 해치고 민가를 털곤 하였다. 실로 선배 방주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모용쟁은 상관위가 더 말이 없자 한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방주님, 철장방은……정말 흉악한 무리인가요?"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니 모용쟁은 자연히 구양봉의 일을 근심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슬그머니 나간 구양봉은 아직도 돌아올 줄 모르고 있었다. 무슨 변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그녀의 근심 어린 얼굴을 지켜 상관위가 넌지시 말해 주었다.
"모용 아가씨, 오늘 밤 구양봉은 한바탕 무서운 격투를 할 것이오. 북녘의 유운장 사람들이 구양봉을 불러냈으니 필연코 피를 보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거요."
모용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관위가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구양봉은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니까 그 따위 인간 같지도 않은 몇몇 놈팽이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요. 근심되는 건 아가씨의 신변이오. 그 놈들이 아가씨를 해치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저는 괜찮아요. 불구가 된 몸이라 살고 싶은 생각도 없는걸요, 뭐……."
모용쟁은 임신한 사실을 남에게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글픈 웃음을 지을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모용쟁은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을 지껄이다가 문득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그리고는 무슨 상념에 잠긴 듯이 다소곳해졌다.
구양봉은 모용쟁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스스로 초를 세우고 불을 켜 놓았을 리는 없다. 정말 이 방에 누군가가 왔다 간 것일까?'
구양봉이 자세히 캐물으려는 찰나에 삐걱하는 문소리와 함께 제갈정이 들어왔다. 제갈정은 초췌한 얼굴로 휘청휘청 구양봉의 앞까지 걸어왔다. 온몸은 피로 얼룩져 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덤불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의 몰골을 본 구양봉은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사형, 그 놈을 어떻게 했소?"
제갈정은 구양봉과 모용쟁을 번갈아 보더니 손으로 죽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모용쟁이 들으면 놀랄까봐 그러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묻지 않았다.
모용쟁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 방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 큰 싸움을 치른 협객임에 틀림없었다. 모용쟁은 구양봉의 팔소매를 살짝 끌어당기며 나직이 물었다.
"누구예요? 뭘 하러 왔대요?"
구양봉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갈정은 풀썩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구양 동생, 난 정말 후회막급이네. 사자우란 녀석이 우리 일가 열세 명을 죽였는데, 내가 어찌 그 놈하구 한패가 될 수 있었겠나? 하지만 사부님의 간곡한 당부를 어기고 못된 짓만 했으니 이 놈도 죽어 마땅하지! 날 죽여 주게, 동생…… 흑흑흑……."
제갈정은 눈물을 쏟으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그를 보자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사부 신독행은 법도를 어기고 문호의 명성을 더럽힌 제자들을 없애 버리라는 유언을 했었다. 하지만 사형인 제갈정이 이처럼 눈물범벅이 되어 사죄하는데 어찌 그를 죽여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모용쟁은 구양봉의 착잡한 심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제갈정의 울음 섞인 참회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서 구양봉에게 말했다.
"이봐요, 사형이 저렇게 죄를 비는데 한번 용서해 주세요."
구양봉은 묵묵히 침묵만 지켰다. 얼마 전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만약 속문성의 그 무서운 일격을 맞았더라면 구양봉은 목숨을 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위험한 찰나에 제갈정이 나서서 구양봉을 구출했던 것이다.
구양봉의 반응이 없자 제갈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생, 용서해 주지 못하겠단 말인가?"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부님께서 사형을 죽여 버리라고 유언하신 일이 마음에 걸리오."
구양봉은 짧게 대꾸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유운장 사람들 가운데 제일 간사하고 지독한 놈은 속문성이었다. 한데 그 놈마저 제갈정의 손에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제갈정이란 놈은 사숙 사자우의 생살을 베어 먹을 정도로 심성이 잔혹하고 흉악한 놈이다. 이런 놈을 그냥 두면 반드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야.'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제갈정은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동생, 기어이 날 죽일 작정인가?"
구양봉은 몸을 돌려 외면했다.
모용쟁이 또 몇 마디 거들어 주려고 하는데 제갈정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울부짖었다.
"내가 왜 유운장의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천하에서 제일 요사스러운 마을이 유운장이고, 유운장테서 제일 악독한 놈이 신독행이야. 신독행이 죽었으니 구양봉, 바로 네 놈이 가장 악독한 놈이지. 아무튼 네 놈처럼 음충맞고 지독한 놈은 세상에 없을 거다."
제갈정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다,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
그는 말을 맺기가 무섭게 벽에 걸려 있는 단도를 낚아채 가지고 목을 푹 찔렀다. 순간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제갈정은 시뻘건 피를 뿌리면서 허물어지듯 넘어졌다.
제갈정이 넘어지는 소리에 모용쟁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구양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소적으로 말했다.
"죽었어. 임자의 단도로 스스로 자결했단 말이오."
모용쟁은 그만 숨이 막혔다. 귀를 기울여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녀는 더듬더듬 몸을 움직였다. 문득 손에 제갈정의 이마가 짚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울먹거렸다.
"죽었네요, 죽었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내가 당신의 아이를 가진 줄은 알겠지요? 뱃속의 아이야 피 비린내를 맡을 순 없겠지만 아이에게 영향이 미칠까 무섭군요. 어쩌면 좋아요? 이 아이는 사납고 앙칼진 성품을 타고날 거예요. 어질고 착한 사람이 되기는 다 틀렸다구요!"
그 말에 구양봉이 버럭 성을 냈다.
"뭐? 어질고 착한 사람? 날 봐.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 살았을 때 얻은 것이 뭔가? 내가 어질고 착하니 임자는 사막에서 나를 못살게 굴었소. 또 내가 어질고 착하니 그 놈들이 임자의 눈알을 빼갔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어질고 착하게 구니 그 놈들이 나를 죽이려 들었단 말이오. 난 어질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 승냥이같은 악인이 되어야겠소. 일단 내 아들도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들개
처럼 흉악무도한 놈으로 키울 작정이오. 그래야 천하를 주름잡으면서 뭇사내들을 휘두를 수가 있고 영웅으로 군림할 수 있는 거요. 만약 임자가 나를 위해 아들 놈을 낳아 주면 이름을 구양극(歐陽克)이라 지을 것이고 천하를 손아귀에 쥐게 할 거요. 만약 딸을 낳으면 구양옥(歐湯玉)이라고 부를 거야. 아마 나의 딸년은 둘도 없는 경국지색으로 천하니 사내들을 희롱할 거요……. 한데 임자
는 왜 그토록 못마땅해 하오? 나와 임자는 형수와 시동생 사이로 떳떳이 부부가 될 수는 없었지만 서로 살을 섞은 사이이고 아이까지 낳게 되었소. 그러니 나를 함부로 대할 순 없소. 도대체 뭐가 불만이오!"
구양봉의 목소리는 점점 격해지더니 나중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모용쟁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련님, 그렇게 성낼 건 없잖아요? 저는 도련님의 형님 되는 이와 혼인한 여자예요. 도련님의 형님 되는 구양적과 성례를 갖추고 부부가 되었으니 구양씨 가문의 사람이지요. 그 동안 우리 둘 사이가 좋아졌지만 그냥 저를 형수로 부르지 않았어요? 형수는 분명 형수지요. 막상 당신의 사람이 되었다 해도 세상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부부간으로는 행세할 수 없지 않아요?"
구양봉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형님 얘기만 나오면 언제나 낯이 뜨거워지는 그였다. 만약 형이 수라아와 함께 훌쩍 먼 곳으로 떠나 가버리지만 않았어도 구양봉과 모용쟁은 함께 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모용쟁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워낙 백타산장이 크지 않은데다가 구양씨의 가문은 명망이 높은 집안이라 모용쟁이 구양적과 성혼한 사실을 온 부락이 다 알고 있었다.
구양봉이 민망한 생각이 들어 묵묵히 서 있자 모용쟁이 제갈정의 몸을 흔들면서 탄식했다.
"천하에 유운장같이 무서운 마을이 또 어디 있을까? 사부가 제자들을 서로 죽이게 하고 또 제자가 사부를 죽이다니……."
모용쟁이 한참 넋두리를 하는데 문득 제갈정이 팔을 뻗쳐 한 손 으로는 모용쟁의 멱살을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퍼런 칼을 집어 들었다. 제갈정은 큰소리로 구양봉을 위협했다.
"이 급살맞을 놈아, 너는 이제 끝장이다. 네 놈은 오늘 나의 손에 죽을 거다. 이 악귀 같은 놈아, 네 놈이 날 죽이려고 했지? 하 지만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내가 사부님의 수제자이지 네가 어디 사부님의 수제자냐? 너같이 미욱한 놈은 나의 상대도 되지 않아!"
구양봉은 어찌할 바를 몰라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제갈정이란 놈이 흉측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거짓으로 죽은 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갈정이 다시 큰소리 쳤다.
"구양봉, 이 죽일 놈아! 이 여자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꼴 좋다, 형수와 간통해서 아이를 보다니! 이런 잡종이 어떻게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겠느냐? 지금부터 순순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년의 모가지가 당장 떨어져 나갈 줄 알아라."
제갈정은 모용쟁의 새하얀 목에 칼끝을 바싹 들이댔다. 그녀의 목이 칼끝에 긁혀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여보시오, 대관절 어찌할 셈이오?"
구양봉이 급한 마음으로 소리치자 제갈정은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어찌할 셈이냐구? 이 못난 놈아, 내가 소 잡는 백정이 되든 사람 잡는 백정이 되든 너 따위가 간섭할 게 뭐냐! 이 놈아, 내가 네 앞에 꿇어 앉아도 용서해 주지 않았지? 내 아버님 앞에 단 한번 꿇어앉은 이후로 이 제갈정이 한평생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어 본 일이라곤 없었다. 칼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너 따위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절을 받는단 말이냐? 내가 아니라 네 놈이
나한테 절을 해야 한다. ,이 놈아, 얼른 꿇어앉지 못할까!"
구양봉의 가슴속에서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리석은 자신을 꾸짖었고 제갈정에게 인정을 베푼 모용쟁을 원망하였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러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사형, 당신은 나의 사형이니까 당연히 절을 드려야지요. 절을 몇 번 드릴까요?"
"꿇어앉으면 그만이다."
구양봉은 고분고분 꿇어앉아 제갈정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제갈정을 향해 제법 정성을 보이며 절을 했다.
모용쟁의 가슴은 불로 지지는 듯 아팠다. 모용쟁은 참다못해 소리쳤다.
"구양봉, 바보 같은 짓 그만둬요! 나는 죽어도 아까울 게 없어요. 나 죽는 건 상관 말고 내가 죽은 다음 이 놈을 죽여 버리세요."
"사형, 그 여자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 여잔 좀 정신이 나간 사람이니까요."
"구양봉, 정신이 나간 사람은 당신이에요!"
모용쟁이 악을 썼다.
제갈정은 구양봉을 노려보며 빈정댔다.
"구양봉, 자네는 사부님의 총애를 받던 호남아니까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지."
"사형, 저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사부님도 타계하시고 유운장에 남은 건 우리 둘뿐인데 제가 왜 사형을 죽이겠습니까? 모용쟁을 놓아주십시오. 사형과 저는 훌륭한 한패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닥쳐! 네가 어찌 나하고 한패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 따위 기름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 네 놈은 기어이 과묵한 형제를 죽였고 석 사제를 죽였지.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느냐? 그런데 네 놈이 나라고 해서 곱게 놓아줄 리가 있겠느냐?"
"사형, 저를 꼭 믿어 주셔야 합니다. 저의 형수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제 손에 사형도 죽게 될 텐데요."
"그렇구말구. 네 놈은 나를 죽일 거야. 꼭 죽이고말고. 하지만 나는 네 손에 죽기 전에 이 여자를 죽여 버릴 거다. 네 놈이 사랑하는 여자를 말야!"
그 말에 구양봉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제갈정은 내가 모용쟁을 사랑하는 줄 알고 모용쟁을 방패로 나를 위협하는 것이다. '
구양봉은 태도를 바꿔 제갈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제갈정, 넌 지금 오산하고 있어. 사실 그 여자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냐.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그러고 나면 내가 네 놈을 잡아 가죽을 벗기든지 염통을 빼먹든지 아무튼 지독하게 죽일 테니까. 네 놈도 유운장 출신이니만큼 유운장 사람들의 솜씨를 알겠지!"
제갈정이 코웃음을 쳤다.
"이봐 구양봉, 누굴 속이려 들고 누굴 위협하는 거냐? 네 놈이 이 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어? 이 년은 눈은 멀었어도 몸매 하나는 끝내 주지. 이 년의 목숨을 살리려면 네 놈이 자결하는 길밖에 없어. 대관절 어떻게 죽을 셈이냐? 젠장, 이 약이나 먹지 그래?"
제갈정은 허리춤에서 독약 두어 봉지를 꺼내 구양봉의 발치께로 던졌다.
"네가 죽기만 하면 이 년도 살릴 수 있고 구양씨 가문도 대를 이을 수 있는 거다."
구양봉은 제갈정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는 짐짓 무심한 눈길로 모용쟁을 내려다보았다. 모용쟁은 제갈정의 손에 잡힌 채 담담히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갈정, 넌 지금 오산하고 있다. 너한테 똑똑히 말해 둔다만 그 여자를 죽여 버리면 난 오히려 부담을 덜게 돼. 너도 알겠지만 그 여잔 내 형의 아내이고 내 형수 되는 사람이 아니더냐?"
제갈정이 키들키들 웃었다.
"형수? 정말 그럴듯한 형수로구먼. 형수와 시동생이 배가 맞아 물고 빨고 하니 참 꼴 보기 좋다. 네까짓 놈이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
구양봉은 깊게 한숨을 쉬고 나서 대꾸했다.
"그렇다. 저 여자는 틀림없는 나의 형수다. 하지만 우리 가문의 딱한 사정을 남이 어찌 알겠느냐? 너한테 다시 말해 두지만, 만약 내 형수를 죽이면 나는 기어이 널 죽여 버릴 거다. 네 놈이 도망친다 해도 기어코 쫓아가서 잡아죽일 거다. 사실 나는 앞도 보지 못 하는 맹인의 목숨 같은 것은 초개와 같이 보는 사람이다. 물론 그 여자도 마찬가지다. 까놓고 말해서 그 여지에게 반할 사내가
어디 있겠느냐? 너도 알겠지만, 내가 차지한 백타산은 강호의 호걸들이 선망하는 곳이며 재물과 미인들이 남아돌 지경이다. 그러니 그 여자를 죽여도 아쉬울 건 하나도 없어."
구양봉은 말하다 말고 껄껄 웃더니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나 구양봉은 천하에 으뜸가는 악인이다. 악인에게 걸려들었으니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제갈정은 은근히 가슴이 뛰었다.
'암만해도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저 녀석은 정말 노독물 산독행이 길러 낸 독종 중의 독종이다. 이 계집년은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지만 앞을 못 보는 게 흠이야.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내는 아름다운 여인의 눈에 반한다고 하였거늘, 저 놈도 이젠 이 앞 못 보는 계집이 보기조차 싫을 거야! 정말 그렇다면 내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지 뭐야? 이젠 꼼짝없이 구양봉의 손에 죽게 되
었구나!'
한편 모용쟁은 구양봉의 지독한 말을 진담으로 듣고 성난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고 있었다. 원래 모용쟁은 자기의 아름다운 용모를 자부하고 있었으나 두 눈을 잃은 뒤로는 점점 자격지심에 빠져 남들과 만나는 것조차 꺼리는 터였다. 그런 터에 방금 들은 구양봉의 말은 모용쟁의 가슴에 그대로 못이 되어 박혔다.
그녀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제갈정은 왕방울 같은 눈을 데룩거리면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양봉이 사부에게서 봉황력 경공을 물려받았으므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죽더라도 모용쟁을 끼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구양봉 이 놈아, 이 여자는 맹인일망정 그래도 네 새끼를 밴 몸이 아니냐? 네 놈은 구양씨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제갈정이 허장성세로 큰소리를 치자 구양봉은 더욱 크게 웃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그 여자를 죽이면 우리 구양씨 가문의 사람을 둘이나 죽이는 셈이다. 그런즉 내가 네 놈을 죽일 때는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나는 네 놈에게 독약을 먹이지도 않고 네 놈의 살점을 저며서 구워 먹지도 않을 거다. 나는 네 놈을 돼지처럼 묶어 놓고 달팽이들을 잡아 넣어 하루에 세 번씩 네 놈의 살과 피를 핥아먹게 할 것이다."
구양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사실 사람을 죽이는 데 이보다 지독한 방법은 없었다. 달팽이는 사람의 몸뚱이에 찰싹 달라붙인 살점을 녹여 먹고 빨아먹는다. 그러니 거기에 시달리는 고통이 오죽하겠는가.
제갈정은 더럭 겁이 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만약 구양봉에게 잡혀 달팽이 떼에 시달림을 당한다면 그보다 참혹한 죽음은 없을 것이었다.
모용쟁은 구양봉의 말을 들으면서 그와 함께 지내 온 즐겁던 날들을 돌이켜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꿀같이 달콤한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구양봉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했었다. 이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구양봉이 날 속였다면 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은 제갈정을 대처하는 데만 머리를 쓰다 보니 모용쟁의 서러운 마음은 헤아릴 경황이 없었다. 구양봉은 득의 양양해서 제갈정을 노려보았다.
"이봐, 제갈정,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들 하나쯤은 쉽게 만들 수 있어. 이 서역의 넓은 사막엔 미녀들이 많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그들이 줄을 서서 달려들 거야. 아마 1년만 시간을 주면 아들 서넛 정도는 무우 뽑듯 뽑아 낼 수 있을 거라구."
구양봉은 말을 마치고 뱃심 좋게 껄껄 웃었다.
처음에 모용쟁은 구양봉의 매정한 말들이 모두 제갈정을 얼러 넘기기 위해 꾸며 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쓰리고 분통이 터졌다.
'구양봉이라는 사내는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잔혹한 사람이야. 저런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진짜로 정을 줄 리 만무하지. 나와 함께 지낼 때 날마다 지껄이던 달콤한 말들은 다 거짓말이었어. 하지만, 사람의 가죽을 쓰고 그렇게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사부님의 말씀을 이제야 알겠어. 사부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내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독차지할 생각만 할
뿐이지 여인들의 아픈 사정은 모르는 색마들이라고 했지. 내가 미쳤던 거야. 저런 사람을 믿고 지금껏 살아왔으니……'
모용쟁은 더 이상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구양봉,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지독할 수가 있어요……."
제갈정은 모용쟁을 놓아주려다가 모용쟁이 울음을 터뜨리자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구양봉의 간계에 걸려드는 것이 아닐까? 저 놈은 사부님의 무예와 재능을 몽땅 물려받은만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춘 놈이다. 한데 왜 말재간만 피우고 있을까? 아니야, 이 눈깔이 먼 계집을 보면 알 수 있어. 이렇게 가슴팍을 뜯으며 악을 쓰는 걸로 봐서 저 놈과 보통 사이가 아냐.'
생각이 이쯤 이르자 제갈정은 픽 냉소를 지었다.
"구양봉 이 놈아, 날 죽여라. 네 놈의 한 주먹이면 나는 죽을 거다. 하지만 그땐 네 놈의 아들 놈과 여편네도 끝장인 줄 알아야 해. 어쨌거나 이 제갈정이란 원수를 죽여야 네 맘이 편해지지 않겠느냐?"
구양봉은 일이 꼬이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모용쟁이 제갈정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모용쟁을 나무랐다.
'모용쟁, 당신은 왜 나의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주오? 제갈정 놈에게 하는 말을 당신은 진담으로 들은 거요? 이 답답한 사람아! '
제갈정이 다시 고함을 쳤다.
"구양봉 이 놈아, 그 독약을 먹고 스스로 죽겠느냐, 아니면 내가 네 새끼를 밴 네 여편네를 죽이는 걸 보겠느냐? 양자 택일을 해라!"
구양봉은 장승처럼 선 채 말이 얼었다.
구양봉이 말 한마디 없이 서 있자 모용쟁은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저 남자는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아니야. 저 남자의 가슴속엔 자기 자신밖에 없어. 저 사람은 이 모용쟁을 위해서든 세상의 그 어떤 여인을 위해서든 목숨을 바치는 일은 없을 거야.'
모용쟁이 쓴웃음을 지으며 제갈정을 향해 앙칼지게 말했다.
"이 놈아, 입 닥쳐라! 구양봉이 나를 위해 자결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말아라!"
바로 이때였다.
누군가가 제갈정의 뒤에서 벽력같이 소리쳤다.
"제갈정 이 놈아, 네 놈은 이미 죽을 때가 됐다!"
순간 제갈정의 등판에 강타가 안겨졌다. 제갈정은 숨이 턱 막히며 등골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놈, 여인을 놓아주지 못할까?"
모용쟁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바로 전에도 그녀를 구해 주었던 상관위라는 노인이었다. 그가 지금 제갈정의 뒤에 서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정은 모용쟁에게서 손을 떼려고 들지 않았다.
"재간이 있으면 한껏 부려 봐! 이 제갈정이 만만치는 않을걸?"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인의 무쇠 같은 손바닥이 제갈정의 몸에 다시 한 번 들이박혔다. 엄청나고도 무서운 힘이었다. 제갈정은 가슴이 막혀 찍소리도 못하고 모용쟁의 목을 스르르 풀어놓았다.
구양봉이 급히 달려 나가 모용쟁을 뒤로 빼돌리고 제갈정의 가슴팍에 일격을 가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정은 고목나무 쓰러지듯 보기 좋게 꺼꾸러졌다. 드디어 숨통이 끊어진 것이다.
그제야 구양봉은 상관위를 건너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요……?"
상관위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 모용쟁을 향해 공손히 읍하였다.
"모용 낭자께서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빌겠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말을 남기고 상관위는 어느 결엔지 모습을 감췄다.
제32장 백타산장의 여인들
날이 갈수록 모용쟁의 몸이 무거워지자 구양봉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젠 사부님이 당부한 대로 유운장의 망나니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최후에 제갈정까지 죽여 버렸으니 화근을 깡그리 없애 버린 셈이다. 이제 모용쟁이 무사히 아들만 낳으면 만사 시름을 놓고 합마공을 익힐 수 있다. 그는 무예를 든든히 닦은 다음 화산에 가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참이었다. 왕중양, 단지흥,
홍칠, 그리고 황약사는 모두 천하에 드문 무학 대사들이다. 그자들을 꺼꾸러뜨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부의 유언을 실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구양봉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화산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합마공은 물론이고 한 가지 병장기를 익숙하게 다를 줄 알아야 했다. 그 병장기는 다름 아니라 형님이 다루었던 사두장이었다. 사두장만 능숙하게 다루면 화산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구양봉은 날마다 정실에서 무예를 연마했다. 무예 연마가 끝나면 그는 곧장 모용쟁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나 모용쟁은 구양봉과 말하기를 싫어했다. 바로 구양봉과 제갈정이 혈전을 벌인 그날부터 모용쟁은 아예 구양봉의 말은 믿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구양봉이 아무리 설명하고 달래도 모용쟁은 쓴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오늘도 구양봉이 찾아왔건만 모용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여보, 지나치게 마음을 썩이고 화를 내면 태아에게 해롭다고 임자도 늘 말하더니만, 그렇다면 임자 스스로 제 몸을 돌봐야 하지 않겠소?"
모용쟁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당신에게 이까짓 아이 하나가 뭐 중요한가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아이 서넛쯤 무우 뽑듯 할 수 있다지 않았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오? 임자도 알지만 형님은 자식을 낳을 수 없소. 요행 임자와 나 사이에 살붙이가 생기게 됐으니 이야말로 우리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천금 같은 자식이 아니겠소?"
"미안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 아들이 아닐 거예요. 당신은 혈기왕성하니까 지금도 얼마든지 아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서넛 된다니까 그 여자들에게서 아들을 낳으시지요."
모용쟁이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자 구양봉은 언짢은 기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제갈정을 속여넘기려고 얼렁뚱땅 꾸며댄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이 구양봉을 어떻게 보고 저러는 걸까? 구양봉은 모용쟁의 처사가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다.
구양봉은 장승처럼 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며칠간을 홀로 지내자니 여간 쓸쓸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아득히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에서는 아기별들이 모여 숨바꼭질을 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구양봉의 가슴은 거친 황야처럼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 선과 악,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구양봉은 본디 고리타
분한 선비에 불과했다. 어쩌다 절세의 신공을 몸에 익힌 까닭에 백타산의 주인이 된 것으로, 실로 사람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 모용쟁만 해도 그토록 살갑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살얼음이 낀 듯하지 않는가. 구양봉은 자기 같은 호걸이 한낱 유약한 여인의 경멸과 냉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가 한참을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돌아서니 언제부턴지 백타산장을 관리하는 총관이 구양봉의 뒤에 공손히 서 있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겼는가?"
그가 묻자 총관은 비로소 조용히 아뢰었다.
"주인님께서 저희 백타산장에 오신 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주인님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서역에서 저희 산장의 위세가 더욱 강해 졌음은 말할 것도 없구요. 소인은 주인님을 위해 정성껏 일하고 있사온데, 산장의 자질구레한 일로 주인님을 성가시게 굴지 않으려 하옵니다만 한 가지 일만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물라 주인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사
옵니다."
"그게 무슨 일인데?"
"산장의 옛 주인 임일천은 두 가지 취미가 있었사온데, 하나는 세상의 귀중한 골동품들을 수집하는 것이옵고 다른 하나는 천하의 미녀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옵니다. 임일천은 미녀들을 노리개처럼 깊이 가두어 놓았사온데 아마도 한무제의 '금옥장교(金壓藏嬌)'라 는 고사를 본딴 듯하옵니다. 여쭙기 황송하오나, 주인님께서도 이 골동품들과 미녀들을 한번 보아야 하시지 않겠사옵니까?"
구양봉은 비 맞은 장닭처럼 후줄근해 있던 차였다. 아무리 구슬리고 어루만져도 모용쟁은 독 오른 고추처럼 앙앙불락이었다. 남산처럼 배가 불러 가지고 톡톡 쏘아대기만 하는 모용쟁이 은근히 괘씸하던 터에 미녀와 골동품들이 있다니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내색하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좋아, 가 보자."
총관은 앞에서 초롱을 들고 뜰을 지나 문을 빠져 나갔다. 구양봉이 성큼성큼 총관의 뒤를 따라가노라니 한마당 가득 꽃밭이 펼쳐졌다. 교교한 달빛 아래 꽃송이들은 서로 시샘하듯 살랑살랑 키돋움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호젓하고 아늑한 곳인가! 구양봉은 산장에 머무른 지 수십 일이 되도록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호젓한 곳에 어떤 미녀와 골동품들을 숨겨 두었는지
한시 빨리 보고 싶어졌다.
총관은 구양봉을 이끌고 뛴 대청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은 모두 일곱 개나 되었다. 문에는 모두 주먹만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임일천이 이곳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심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총관은 자물쇠들을 열고 곧장 밀실로 들어가더니 벽을 톡톡 쳤다. 그러자 봉당 한복판이 양쪽으로 드르륵 열리더니 널찍한 땅굴이 나타났다. 구양봉은 총관을 따라 땅굴로 내려
갔다. 한참 땅굴을 지나다가 다시 한걸음 올라가니 홀연 아늑한 뜰이 나타났다. 뜰 둘레에는 단독으로 세운 집들이 들쭉날쭉 서 있는데, 삼층짜리, 이층짜리가 있는가 하면 본채는 땅밑에 묻히고 지붕만 봉긋하게 솟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집들마다 출입문이 없고 무쇠로 만든 창만 빼꼼히 뚫려 있었다. 총관은 구양봉을 이끌고 나지막한 집 옆으로 갔다. 이 집은 창마저 없이 괴상망측한 짐
승의 모양을 새겨 넣은 기왓장들이 달빛을 받아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총관은 공손한 어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이 집 안에는 천하에 다시 없는 열두 가지 진귀한 보물이 있사온데, 옛 주인 임일천이 10년 간이나 공을 들여 걷어들인 것이옵니다. 주인님께서 한번 보시지요."
"어디 한번 보자."
구양봉은 부쩍 호기심이 일었다.
총관은 껑충 몸을 날리더니 용마루에 올라섰다.
"주인님도 올라오시지요?"
구양봉도 살짝 몸을 날려 용마루에 올랐다. 두 사람이 집 안에 내려서자 지붕은 다시 봉해졌다. 바깥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겹지붕이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연신 감탄을 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독특하게 지어진 집으로, 겉보기에는 정사각 모양이었으나 집 안은 큰 종처럼 둥그랬다. 높은 천장에 오색 찬란한 신비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열두 가닥의 밧줄이 치렁치렁 드리워져 있고 그 밧줄마다에는 보물함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주인님, 이 첫번째 보물함에는 당 황제 현종이 쓰던 옥관(玉冠)이 들어 있사옵니다."
총관의 말에 구양봉은 놀라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친 당 현종! 먼저는 매비(梅妃)에게 깊이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후에는 여지( 枝)를 즐겨 먹는 양옥환에게 반하여 끝내 나라를 망쳤지. 오죽하면 말방울 소리 울리면 양귀비 얼굴에 꽃이 핀다네. 뉘라서 알리오, 천리 밖의 여지를 가져오는 사나이의 신고를!, 하는 시구까지 생겨났겠는가?'
구양봉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당 현종의 옥관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허공에 매달린 보물함을 올려다보았다.
"소인이 보물함을 풀어 오겠사오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총관은 껑충 몸을 날려 상자를 풀어 가지고 아래로 내려왔다.
보물함을 열어 보니 한눈에 당 현종의 사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환관은 가늘게 뽑은 금실로 가로 세로 정교하게 잔 것으로 서른 두 개의 옥패가 박혀 있었다. 금실도 귀한 것이지만 오색 찬란한 옥패는 더욱 값진 것들이었다. 당 현종은 이 황관을 쓰고 무더운 여름철이면 시원한 정자에 나앉아 친히 북채를 잡았다고 한다. 현종이 친히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 유명한 악공 이귀(李龜)가 장
단을 맞추었고, 옥 같은 가인들이 노래하였으며, 양옥환이 잠자리 날개 같은 비단옷을 떨쳐 입고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실로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이었다.
총관은 나머지 열한 가지 보물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한옥성 (寒玉星), 금옥편(金玉鞭), 원타명주(讀騷明珠), 벽독수화쌍섬(酸毒水火雙蟾), 운왕선(雲王扇), 현철쟁(玄鐵箏)…… 등 진귀한 보물들이었다. 구양봉은 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임일천이란 놈은 정말 욕심 사납고 오달진 놈이었구나. 이 열 두가지 보물만 해도 천하의 호걸들이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겠어.'
구양봉은 보물들 중에 현철쟁도 있다는 말을 듣고 더욱 흥이 나서 급히 가져와 열어 보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현철쟁은 얼핏 봐선 보통 아쟁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아쟁이로구나. 정말 좋은 거야!"
구양봉이 좋다는 말에 총관은 풍악도 모르는 주제에 덩달아 좋아했다.
"주인님께서는 음률에 능하신 것 같사온데 한번 만져 보시지요."
구양봉은 흥에 겨워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진목공(秦種公)에게 딸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농옥(弄玉)이었지. 그 아가씨가 아쟁을 멋지게 뜯었단다. 부드럽게 탈 때는 찬 줄기 맑은 샘물에 고요히 흐르는 듯하고 급하게 뜯을 때는 도도한 강물이나 천둥 치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농옥은 나중에 소사(蕭史)라는 젊은이의 배필이 되었는데, 소사가 피리를 불고 농옥이 아쟁을 타면 온 나라 사람들이 취할 지경이었단다. 그 후
두 사람은 용과 봉을 타고 멀리 가 버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아쟁은 진대의 것일 게고 어쩌면 농옥이 타던 아쟁일지도 모르겠다."
구양봉은 자리를 고쳐 앉더니 마음을 가라앉힌 뒤 두 손을 아쟁위에 올려 줄을 고르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어느덧 자기의 한없는 울분과 고뇌를 아쟁 줄에 쏟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쟁 소리는 푸른 산이 둘러선 그윽한 호수 위에 쪽배 한 척이 유유히 떠가는 듯싶었다. 노 젓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 오고 온갖 고기 테가 수면에서 재롱을 피우듯 뛰어오른다. 문득 돛폭이 찢어지고 파도가 일면서 먹장구름이 밀려 오고 천둥이 친다. 하늘이 노하고 땅이 아우성치는 듯싶다.
총관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는 두 귀를 막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만약 움직일 수 있었다면 구양봉 앞에 꿇어앉아 더는 아쟁을 뜯지 말아 달라고 애걸했을 것이다. 그는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얼빠진 놈처럼 입을 헤벌리고 서 있었다. 무서운 파도가 연신 자기 머리를 짓부수는 것 같았고 콧구멍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구양봉은 음률에 도취되어 자신은 물론이요, 모용쟁과 백타산장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둥 치는 듯한 아쟁 소리에 속에 묻혀 있던 분노와 저주, 욕정과 살기가 쏟아져 나가니 가슴이 너무나 후련했다.
정 있는 사나이, 알뜰한 남편이란 게 다 무슨 말라빠진 소린가? 아기자기한 사랑은 구린내 나는 선비들이나 할 노릇이다. 사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다면 자질구레한 정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 큰 뜻을 품고 호걸답게 살아야 한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것 없다. 바람이 불면 부평초는 밀려 가지만 아름드리 나무는 끄떡하지 않는 법이다.
코를 싸쥐고 있는 총관의 손가락 사이로 뻘건 코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그는 한 손으로 다른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에는 임일천이 모아 둔 금과 은이 있사옵고 저쪽 집에는 중원과 서역에서 빼앗아 온 귀중한 고서적들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임 장주가 여러 곳에서 사들인 병 장기들이 쌓여 있고, 바로 저쪽 몇 채의 집에 임 장주가 감추어 둔 미인들이 살고 있사옵니다."
"그리로 가 보세."
가까이 가 보니 3층으로 된 자그마한 집이었다. 이 집은 죽통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둘레에 마루가 있고 꼭대기엔 종탑처럼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출입문 위에는 '금옥(金屋)'이라고 쓴 현판이 달려 있었다. 구양봉은 그 현판을 얼핏 보고 한무제의 '금옥장교'라는 고사에서 따온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무제가 어릴 때였다. 태후가 물었다.
"아교(阿嬌)라는 아가씨가 어떠하냐?"
무제는 아교를 흘끔 홈쳐보고 나서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교를 아내로 삼으면 금으로 만든 집에서 살게 하겠소이다."
후에 한무제는 황제가 되더니 과연 아교를 귀비로 책봉했을 뿐만 아니라 금으로 만든 집을 지어 거기서 살게 했는데, 이리하여 '금옥장교'라는 고사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구양봉은 지금 '금옥'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적이 흥분되어 있었다. '금옥장교'라고 했으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갖은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게 아닌가? 구양봉은 여인들을 만나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흐뭇해졌다.
총관의 안내를 받으며 아래층에 들어서니 허리가 절굿공이같이 날씬한 여인네 서넛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들이 총관을 둘러싸고 아첨을 부리자 그는 바삐 구양봉을 내세웠다.
"어서들 인사를 드리라구. 이 어른이 바로 백타산장의 새 주인이시네."
그러자 여인네들은 '장주님' '나으리'소리를 연발하며 부산을 떨었다. 구양봉이 한마디 물었다.
"임자들은 금옥에서 사는 여인들인가?"
"어머나, 장주님두. 저희들은 비천한 종년들인뎁쇼."
얼굴에 덕지덕지 연지를 바른 여인네가 키드득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 집은 삼층으로 되었사온데 각 층마다 미녀 아홉씩이 살고 있사와요. 제일 아래층은 인자루(人字樓)라고 하는데요, 여기에 사는 미녀 아홉은 여염집 딸자식들로 하나같이 꽃처럼 예쁘고 아련한 계집들이죠. 이층은 지자루(地字樓)라고 하는데요, 여기엔 세상 드물게 음란하고 요사스러운 계집 아홉이 살고 있사온데 역시 하나같이 예쁘장하지요. 그리고 삼층은 천자루(天字樓)라고 하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미녀들은 천하의 절색인 서시나 황소군도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답지요. 실로 십호야 보름달도 무색할 지경이죠. 임 장주님은 이 미녀들을 금옥에 숨겨 두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 오곤 했답니다. 임 장주님은 이 미녀들에게 정신이 팔려 반나절씩 멍청하니 바라보곤 했지요."
"시끄럽다! 꽤나 수다스럽군 그래! 어서 주인 어른을 모시고 인자루로 가거라."
총관이 꽥 소리쳤다.
그들 몇몇은 곧 인자루에 들어섰다. 덕지덕지 연지를 바른 아낙네가 구양봉으로 하여금 복판에 서게 했다. 아낙네가 소리를 질렀다.
"불을 켜!"
그러자 삽시에 방안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주위에는 둥그런 방이 꽃잎처럼 설치되어 있고 방마다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차례로 둘러보니 명주(明珠), 혜랑(慧娘), 문군(文君), 수연(秀娟), 향옥(香玉), 사사(思思), 호미(胡媚), 아문(雅文), 용기(龍琪) 등 아홉 여자의 이름이었다. 구양봉이 자세히 살펴본즉 이 방은 귤 쪽처럼 꾸며져 자신은 복판에 있고 미녀들은 둘레에 있었다. 미녀들은 앉아서 끄덕끄덕 졸기도 하고 한 뜸 한 뜸 수
를 놓으면서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여기 계집중 가운데 누가 가장 나으냐?"
구양봉이 묻자 연지투성이인 아낙네가 대답했다.
"여염집 딸자식들이라고 하오나 개중에는 대갓집의 규수도 있고 농가의 외동딸도 있지요. 아홉이 하나같이 귀엽고 예쁘장하오니 주인님께서 한번 보시지요, 뭐."
"그렇다면 어떻게 보지?"
"오죽하면 임 장주님도 일단 여기에 오시면 떠날 줄을 몰랐겠어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옆에 있는 돌기둥을 톡톡 두들겼다.
별안간 구양봉이 서 있는 곳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계집들이 있는 방과 수평이 되는 위치에서 멎었다.
"임 장주님도 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아야 직성이 풀리곤 했지요."
아낙네는 너스레를 떨더니 한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리 와!"
그녀의 명령에 난데없이 열두어 살 먹은 계집애 서넛이 쟁반을 받쳐 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에는 자그마한 술잔 몇 개와 기묘한 모양의 술병이 놓여 있었다. 계집애들이 쟁반을 받쳐 들고 미녀들의 방 앞으로 사뿐사뿐 다가가자 수를 놓던 여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끄덕끄덕 졸던 여인들까지 우르르 창가에 몰려와서 무엇인가 먼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계집애들도 잽싸게 술잔에 무엇인가를 부어 미녀들에게 주었다. 미녀들은 굶주리기라도 한 듯 너도나도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장주님, 이제 볼 만할 겁니다."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입을 싸쥐고 키득거리는데, 어느새 춘정이 동한 미녀들은 침대에 엎드려 신음하기도 하고 두 눈이 벌개서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방안을 맴돌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미녀들은 창 밖으로 손을 흔들면서 애꿎은 계집애들을 부르기도 했다. 실로 발정한 짐승의 행동 그 자체였다. 그녀들에게 미약을 먹인 것이 분명했다.
"대관절 무슨 약인가?"
구양봉의 물음에 아낙네가 대답했다.
"임 장주님의 술이온데 '춘심부동(春心浮動)'이라고 하옵니다. 남녀의 욕정을 자극하는 술이지요."
구양봉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문자 그대로 춘심부동이로구나! 멀쩡하던 계집들이 눈 깜짝할 새에 모두 발정한 짐승처럼 돼 버렸으니.'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살살 웃음을 쳤다.
"임 장주님은 보기만 했사오나 새 장주님께서도 눈요기만 하시지는 않겠지요?"
구양봉은 미녀들을 정복하고 싶은 생각에 피가 끓었다. 하지만 그는 내공이 매우 강한 만큼 욕정을 누르며 말했다.
"됐어, 어서 지자루에나 가 보자!"
"장주님께서는 정말이지 점잖은 어른이시군요. 임 장주님었다면 벌써……."
연지투성이는 실눈이 되어 야릇하게 웃었다.
임 장주는 얼빠진 놈처럼 미녀들의 화용월태를 구경하다가는 욕정이 끓어 별의별 추태를 다 보였던 모양이었다.
둘이 지자루에 이르자 연지투성이는 구양봉을 향해 헤벌쭉 웃어 보였다.
"여기 계집들도 먼저 술대접부터 해야 하는가?"
구양봉이 묻자 연지투성이는 다시 히죽 웃었다.
"아니, 아니에요. 여기 계집들은 본디 활달하고 음탕하거든요. 좌우간 한번 보시면 알 거예요."
연지투성이 아낙네가 한마디 소리치자 대뜸 방안이 밝아졌다. 휙 둘러보니 어느새 창문마다 휘장을 거두어 방이 한결 밝아 보였다.
여기의 방 아홉 칸도 아래층과 똑같은 모양새로 꾸며져 있었는데, 아래층과는 달리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아래층의 여인들과는 성미가 다른 여인들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기에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신녀(神女), 달기(袒己), 미고(媚姑), 포사(褻 ) , 비연 (飛燕)…… 등이었다.
'모두 음탕한 계집들이라고 했지?'
구양봉은 편액들을 둘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보자꾸나."
한 방 앞에 이르자 얼굴이 해맑고 쌍꺼풀진 두 눈에 반짝반짝 영채가 도는 어린 소녀가 맞아 주었다. 얼핏 보니 몸매도 실한 편이 아니다. 저렇게 애호박같이 풋풋한 소녀가 음란한 여자라니, 구양봉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저 여자는 누구지?"
덤덤히 묻는 구양봉의 말에 연지투성이가 살짝 눈을 치떴다.
"아니, 저 아가씨도 몰라요? 저 아가씨가 바로 숱한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워 죽인 남원(南苑)의 명기 청청(靑靑)이에요. 저 아가씬 강남의 으뜸가는 명기래요. 아마 저 아가씨를 쫓아다니다가 죽은 사내가 적게 잡아도 열두 명은 될 거예요."
구양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여리디여린 계집이 그렇게 재주가 많단 말인가? 구양봉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작은 괴물 임 장주와 어떤 사이죠? 임 장주가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다니 이상하군요!"
"내가 바로 장주다."
구양봉의 말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무슨 말씀인가요? 그 양반이 죽었나요?"
"그래, 죽었다."
그 말에 청청은 주루룩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어댔다.
"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거냐?"
구양봉이 이상한 듯 물었다. 청청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양반은 여자라면 오금을 못 쓰는 색골이거든요.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구양봉이 덤덤히 듣고만 있자 청청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그 양반은 천하에 드문 가짜 방망이라는 걸!"
"가짜 방망이라니?"
구양봉이 짐짓 모르는 체하자 청청이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아이고, 바보 같은 양반을 다 보겠네. 이리 좀 오세요, 이리로! ……당신의 물건도 가짜 방망이인지 아닌지 한번 봅시다."
그러자 양옆에 있던 둥실한 얼굴의 여인과 갸름한 얼굴의 여인도 키드득키드득 웃어댔다.
"이 어르신의 물건이 진짜 방망이인지 가짜 방망이인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봐야겠는데?"
둥실한 얼굴의 미녀가 말하자 청청이 입을 삐죽하며 톡 쏘아붙였다.
"그 절구통 같은 몸으로 어떻게 시험을 한다고 큰소리야?"
그러자 갸름한 얼굴의 미녀도 한마디했다.
"새 주인님이 오시니까 찰떡같이 들러붙는 판이로구나!"
여인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입방아를 찧어 댔다.
구양봉이 언제 이런 여자들을 보았겠는가? 모용쟁도 정숙한 여자에 속하여 사내들 앞에서 남녀간의 정사를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구양봉은 가슴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등실하게 생긴 여자가 계속 지껄였다.
"장주님, 이리로 와 보세요."
구양봉은 스적스적 다가갔다.
여자는 구양봉의 팔과 엉덩이를 열심히 주물러 보더니 다른 여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즐겁게 됐네. 이 장주님의 방망이는 이만저만한 방망이가 아니라 홍두깨 방망이야!"
그녀의 말에 계집들은 왁자그르 웃어댔다.
그 중 한 계집이 물었다.
"장주님, 장주님의 성함은요? 언제까지나 장주님, 장주님 하고 어렵게만 부를 수는 없잖겠어요?"
그러자 다른 한 계집이 거들었다.
"장주님은 여자들이 어떻게 부르면 좋으시겠어요? 어떤 사내들은 '요 내 새끼야'하면 좋아하고, 또 어떤 사내들은 '아버님, 아버님' 하면 입을 다물지 못하거든요. 장주님은 어떻게 부르면 좋아 요? 또 어떤 여인들을 좋아하시는지요?"
계집들이 서로 질세라 찧고 까부는데 유독 청청만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구양봉이 넌지시 물었다.
"너는 왜 말이 없느냐?"
그러자 청청이 새초롬해서 대꾸했다.
"제가 꼭 입방아를 찧어야 할 까닭이 있나요?"
구양봉은 청청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이 강남의 명기 청청은 몸매는 작아도 틀림없는 명물이었다. 그녀는 다른 미녀들과는 달리 영특해 보였다.
구양봉이 또 말을 걸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청청이 쌩긋 웃더니 휙 손을 저었다. 떠들던 계집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원형으로 된 대청이라 모두들 구양봉의 몸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청청이 달콤한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새로 오신 주인님이시죠?"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청청이 당돌하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뭘 하던 사람인가요? 강호의 협객인가요, 아니면 길목을 지키는 강도인가요, 아니면 녹림의 호걸인가요?"
"잘 물었다. 내가 바로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 구양봉이다."
구양봉의 솔직한 대답에 청청은 키드득 웃었다.
"저희들을 어떻게 할 셈이죠? 팔아 버릴 건가요, 아니면 남겨 두고 당신이 데리고 놀 건가요? 그렇잖으면 임 장주님처럼 날마다 찾아와 구경만 할 건가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키드득거렸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듯싶었다.
"왜 웃는 거냐?"
구양봉이 책망조로 나무라자 청청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임 장주님이 올 때마다 저희들은 은근히 짜곤 했지요. 애간장을 태워 죽게 하자고요. 저희들끼리 재미를 보면서 놀아 대면 임 장주님은 어쩌지도 못하고 속만 타서 죽어나는 거죠. 안 믿어지세요?"
구양봉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 계집들은 스스로 자기의 미모에 자신을 가지고 음탕한 짓으로 사내를 꼬인다. 하지만 네 년들이 아무리 애교를 부리고 웃음을 팔아도 임일천 같은 악귀를 매일 붙잡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청청이 신이 나서 계속 재잘거렸다.
"그 양반은 매일 찾아왔고, 우린 그분이 올 때마다 기진맥진 오줌을 싸게 만들어 주었지요. 그래도 못 믿겠어요?"
"못 믿겠는걸!"
"주인님은 믿으셔야 해요. 정 못 믿겠으면 한번 시험해 보시죠?"
청청이 웃으며 바짝 다가들었다.
"어떻게 시험한다는 거냐?"
구양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들의 눈은 온통 불이 켜진 듯했고 하나같이 구양봉을 삼켜 버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계집은 사내의 뼈를 갉아먹는 독충이라더니…….'
구양봉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구양봉은 필경 피끓는 쾌남아였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천하의 아름다운 여인은 모두 내 것이 돼야 한다. 진시황도 천하를 통일하고 여섯 나라의 미인들을 아방궁에 실어다 놓고 엿새 동안이나 즐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하루면 족하다. 이 계집들이 정말 재주가 있는지 한번 봐야겠다…….'
구양봉을 안내하던 뚱보 여인이 부추겼다.
"장주님, 저 여인들이 시험해 보라고 조르는데요. 춘궁(春宮)에 가서 시험하시죠?"
"좋다!"
구양봉은 좋다고는 했지만 어디가 춘궁인지도 모르는 터였다 좌우간 한번 시험해 볼 판이었다.
뚱보 아낙네가 미녀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문을 열어 주자 아홉 미녀들은 새장에서 풀려 나온 새떼처럼 구양봉을 스쳐 지나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몇 개의 층계를 계속 내려가자 널따랗고 호젓한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엔 알록달록한 비단요를 깔아 놓은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2, 30명은 족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 둘레는 신기한 무늬가 박힌 옥돌로 되어 있었고 새하얀 이불은
모두 비단 이불이었다. 아홉 미녀는 조용히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아홉 미녀! 그녀들을 보노라니 구양봉의 가슴엔 피가 솟구치고 오금이 저려왔다.
청청은 다른 한 계집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면서 약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우리는 필경 여자들이에요. 사실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어야 진짜 재민데, 한데 임일천이란 녀석은 고자란 말예요. 알겠어요?"
차츰 불빛이 어두워지면서 지하실은 밤안개가 긴 듯 희끄무레해졌다. 그 몽롱한 분위기 속에 발가벗은 미녀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물고 빨고 하면서 뒹구는 모양은 구양봉의 넋을 앗아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청청이 다시 말을 건넨다.
"장주님, 왜 보기만 하고 침대에 오르지 않지요? 당신은 천하에 으뜸가는 악인이라면서요? 당신은 만 가지 악 중에서 무엇이 으뜸인지 아세요?"
"음란함이겠지 ."
구양봉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맞았어요. 하지만 무엇이 음란함인지 아세요?"
"나는 몰라."
청청은 어느새 구양봉의 옆에 다가와서 슬그머니 구양봉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햇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청청이 속살거렸다.
"구양 장주님, 한번 체험해 보셔야죠. 천하의 호걸들이 왜 저마다 군왕이 되려고 하는지 아세요? 군왕이 누리는 향락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왜 누려 보지 못하나요, 네?"
모용쟁은 집 안에 틀어박혀서 해산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절망한 나머지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뱃속에 든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아이마저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죽게 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살인 행위가 아닌가. 그녀는 일단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견뎌 내기로 결심했다. 몇 날을 꼼짝하지 않고 방안에만 붙박혀 있노라니 자꾸만 귓전에
암자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사부나 주지가 경을 읽고 설법할 때는 정신통일을 해야 부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마음이 산란하기만 했다.
불현듯 어디선가 '등기당당……' 하는 아쟁을 뜯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쟁은 흠칫 놀라 옆에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얘야, 이건 아쟁을 타는 소리가 아니냐?"
"아니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시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애두 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니? 분명 누군가 아쟁을 타고 있는데."
모용쟁은 강남의 전통 있고 권세 있는 가문의 딸자식이니만큼 음률에 아주 밝았다. 그녀는 한참 귀를 기울이더니 중얼거렸다.
"지금까진 괜찮구나. 아쟁을 타는 이의 마음에 고통이 있긴 해도 아직은 마음을 고쳐 먹을 수가 있어. 아쟁 소리가 맑고 부드러우니까 말이야."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아쟁 소리는 천군만마가 내달리듯 하더니 강물처럼 흐느끼고 바다처럼 솟구치면서 급박하게 들려 왔다. 아쟁 소리가 불바다 속의 아우성처럼 거칠어지자 모용쟁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 사람은 벌써 마귀에게 홀렸어. 이젠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이야. 한데 아쟁을 타는 사람이 구양봉이 아닐까? 그이만이 이런 곡조를 탈 수 있어. 그이는 천하를 독차지하려고 천하의 호걸들과 자웅을 다투고 있어. 만약 취미로 저런 광란적인 곡조를 들었다면 몰라도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려는 마음에서 저런 곡조를 들었다면 큰일이구나. 지나친 탐욕이야.'
모용쟁은 새삼스럽게 아이의 장래가 근심되었다.
"아이야, 내 아이야, 너는 구양씨 가문에 태어나지만 장래에 닥칠 일은 모르고 있겠지. 아무튼 이 에미는 저 세상에 가서도 너의 행운을 빌겠다."
어느덧 아쟁 소리가 사라지고 사위가 잠잠해졌다.
모용쟁이 시녀에게 물었다.
"얘야, 장주님께서 어디를 가셨는지 알고 있느냐?"
"듣자니 저쪽에는 임 장주가 모아 둔 골동품과 미녀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리로 놀러 가셨나 봐요."
"알겠다. 이젠 네 방으로 가서 쉬거라."
모용쟁도 임 장주에게 잡혀 들어온 미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양봉이 그곳에 갔다면 요망스러운 계집들의 함정에 빠질 게 분명했고 다시는 그녀에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모용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때 구양봉은 운우지정에 빠져 모용쟁의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모름지기 대장부라면 눈앞에 차려진 향락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영웅 호색이라지 않던가. 더구나 이 아홉 계집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영특한가! 귀여운 청청은 구양봉의 발치에 누워 어리광을 부리고 아양을 떨었다. 구양봉이 쾌락에 빠져 자신조차 잊고 있는데 이를 지켜 뚱보 여인이 히죽 웃으며 농
담을 던졌다.
"재미가 어떠세요?"
구양봉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어느새 철두철미한 악인이 되어 있었다. 만악의 근원은 음란함이라는 옛사람들의 말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내가 백타산의 주인이거늘 색을 즐긴다고 뉘 감히 탓할소냐? 이 계집들을 보라, 내 말 한마디면 설설 기지 않는가.'
구양봉은 우쭐한 기분이 되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여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나도 가짜 방망이에 속하느냐?"
계집들은 구양봉을 끌어안으면서 숨이 넘어가게 웃어대더니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구양봉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모두들 자기 방에만 붙박혀 있지 말고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사는 게 어떨까?"
그의 말에 계집들이 이구동성으로 환성을 질렀다.
"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의 허락 없이 아무 짓이나 함부로 했다가는 가차없이 죽을 줄 알아라!"
구양봉이 으름장을 놓자 계집들은 서로를 보며 방글거렸다. 구양봉이 말을 이었다.
"나는 흰색을 제일 좋아해. 울긋불긋한 색깔은 딱 질색이니까 모두 흰옷으로 바꿔 입도록 해라. 그러면 선녀처럼 아름답게 보일 거야."
그 말에 청청이 입을 삐죽거렸다.
"장주님도 보통 양반이 아니시군요. 옷차림까지 장주님 뜻에 따르란 말씀이세요? 좋아요. 정 원하신다면 하라는 대로 하지요, 뭐."
계집들은 저마다 침대에서 내려가 울긋불긋한 비단옷을 보란 듯이 찢어 버리고 히히덕거리면서 옷을 바꿔 입으러 갔다.
홀로 된 구양봉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불쑥 청청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장주님, 옷을 바꿔 입었으니 들어가 보일까요?"
"좋다!"
허락이 떨어지자 교태를 머금은 여인들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구양봉은 하늘에서 백조 테가 내려앉은 듯한 순백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거칠고 음탕하던 계집들이 눈 깜짝할 새에 얌전한 여염집 규수로 환생한 듯싶었다. 청청이 입을 열었다.
"장주님, 우리 아홉은 모두 성심성의껏 장주님을 받들고 따를 것을 약속했어요. 장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저희들은 한평생 다락방에 갇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거예요……."
여인들은 모두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이 총관을 불러 분부했다.
"덕분에 잘 구경했네. 이제부터 이 계집들은 모두 나의 시중을 들게 하게. 나의 환심을 얻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내 눈 밖에 날 경우엔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임을 명심하도록 하게."
총관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렸다.
"그리고 저 계집들이 원한다면 다른 곳에 마땅한 집을 얻어 주게. 내 가끔 가 볼 테니까."
총관은 분부를 받들어 바삐 물러갔다.
제33장 사랑의 위기
구양봉은 백타산장의 장주가 된 후 날로 교만해지고 횡포해졌다. 그리하여 백타산장 사람들은 그의 말에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설설 기면서 순종했고 그를 임일천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구양봉은 예상했던 대로 모용쟁을 찾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모용쟁은 해산 날짜가 임박해 오자 무사히 아이를 낳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도하며 구양봉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구양봉은 이따금 모용쟁의 방으로 찾아오곤 했다. 하루빨리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용쟁에게 소홀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서였다.
"몸은 좀 어떻소?"
"신경 써 줘서 고맙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내 몸은 스스로 돌볼 수 있으니까요."
모용쟁이 마지못해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녀의 냉랭한 대꾸에 구양봉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방안에는 한동안 갑갑한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자존심을 누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해산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요즘 무예를 닦느라고 자주 와 보지 못해 미안하오."
모용쟁은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무예를 닦는다구요? 날 속이려 들지 말아요. 당신이 요즘 어딜 드나드는지, 날이면 날마다 어떻게 세월을 보내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모용쟁의 말에 구양봉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생활이에요? 나야 죽거나 말거나, 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든 말든 그건 당신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가세요. 가서 그 음탐한 계집들과 시간을 보내세요. 괜히 와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구요!"
모용쟁은 설움이 복받쳐 오열을 터뜨렸다.
퀭하니 뚫린 두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구양봉은 차마 그녀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때 그는 모용쟁이야말로 천하에 다시 없는 절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용쟁은 너무도 초라하고 궁상맞아 보였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계집이란 사내의 마음을 맞추어 줄 줄 알아야 해. 사내를 즐겁게 해 줘야 사랑스런 마음이 생기는 거지, 허구한 날 기분만 잡쳐 놓는 이 따위 계집을 좋아할 사내가 어디 있겠어? 내 아이만 배지 않았어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리는 건데…….'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모용쟁이 다시 따지고 들었다.
"그 계집들과 함께 있었죠?"
"그렇소. 그 계집들과 같이 있었소."
구양봉이 울컥하는 기분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내 대장부가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홀로 지낼 수가 있겠소? 임자가 곁을 주지 않으니까 자연히 그 여자들을 찾을밖에. 이 어찌 나만 탓할 일이오?"
구양봉의 뻔뻔스러운 대꾸에 모용쟁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물론 상관이야 없지요. 저도 애초엔 금옥에 갇혀 있던 여자니까 좀 일찌감치 임일천을 죽여 버렸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임일천만 일찌감치 죽여 버렸더라면 아마 저도 그 계집들 속에 있었을 테고 당신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이야 어마어마한 백타산의 주인이니까 어느 년이 감히 말을 듣지 않겠어요? 아무튼 당신은 천하에 가장 여자 복이 있는 사내예요……."
그녀는 끝내 설움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하의 사내들은 다 마찬가지야. 너나없이 계집을 탐내고 재물을 탐하는 법이지. 아마 네 년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이 구양봉이 천하를 휘어잡은 무림의 맹주가 된다 해도 나를 단속하려들거야…….'
그는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눈이 멀게 된 것도 다 제 탓이지. 뭐 잘난 게 있다고 허구한 날 앙탈이야? 내게 웃는 낯으로 대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밤낮 낯짝을 찡그리고 기분만 상하게 굴다니. 빌어먹을!'
구양봉은 픽 냉소를 지었다. 세상에 쌔고 쌘 게 계집이거늘 이처럼 고집스럽고 무뚝뚝한 계집 때문에 속을 썩일 게 뭐란 말인가?
모용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양봉,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요.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사람을 보내 알려 줄 테니까요……."
구양봉은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형수님, 저는 늘 형수님을 근심했고 또 어떻게 보러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쌀쌀하게 대할 건 뭡니까?"
구양봉이 깍듯이 '형수님'이라는 칭호를 쓰자 모용쟁의 가슴은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것은 그가 그녀로부터 완전히 마음이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모용쟁은 마음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했다.
"구양봉, 이젠 더는 말하지 말아 줘요.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를 낳으면 틀림없이 당신에게 보내줄 거예요. 틀림없는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니까요. 하지만 저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처음부터 없었던 걸로 해요. 이젠 더 이상 나를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 앞에서 목숨을 끊어 버릴 테니. 그러면 당신의 혈육도 보존키 어려울 거예요."
그녀의 말에 구양봉은 문득 깨달은 듯이 입을 열었다.
"참, 깜빡 잊었구려. 내가 글쎄 산장에서 아쟁 한 틀을 얻지 않았겠소. 아주 좋은 현철쟁인데, 한번 연주해 드릴 테니 마음을 풀도록 하시오."
"필요없어요. 이미 들었어요. 당신이 타는 아쟁 소리는 살기와 야심으로 차 넘치더군요. 당신이 무슨 이심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야심을 이루기는 불가능할 거예요."
구양봉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좋아. 다시는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을 테니까 맘대로 하라구!"
구양봉은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말할 수 없이 쓰리고 답답해 왔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모용쟁이 이토록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터벅터벅 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이 정실에서 모용쟁을 구해 주었었다. 백타산의 주인 임일천이 모용쟁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정실에 뛰어들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때만 해
도 구양봉은 힘깨나 쓰고 의협심은 강했지만 무예는 볼 게 없었다. 그때 무작정 정실에 뛰어들던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섬뜩해졌다.
'정말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때 만약 임일천이 진짜 노해서 손을 쳤더라면, 또 형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서 황천객이 되고 말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의 구양봉은 더는 한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맹자의 말을 떠올렸다.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맡겨 준 큰일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닦고 뜻을 키우고 힘과 지혜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구양봉은 이제 정에 매이고 의리에 사는 풋내기 서생이 아니었다. 합마공을 더욱 철저히 익혀서 화산에 가서 황약사, 단지흥, 홍칠, 왕중양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몸이었다.
구양봉은 언젠가 종남산에 있는 중양궁 뒤에서 왕중양과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가 싸우는 광경을 엿보던 일이 생각났다. 쌍방이 어우러져 죽어라 싸우는데, 과연 천하에 으뜸가는 호걸 남아들의 치열한 대결이었다. 그때 구양봉은 얼마나 가슴을 조였고 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가!
구양봉은 두 가지 재주를 익혀야 했다. 바로 철쟁과 사두장이었다. 철쟁을 타면서 내력주신공(內力奏神功)을 익히면 합마공을 음악으로 화하게 할 수 있고 따라서 무형의 힘으로 상대방을 꺼꾸러뜨릴 수 있다. 또 한사두장을 다루면서 봉황력 경공을 익히면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산벼랑도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재주만 익혀 두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화산에서의 싸움에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천하에 구양봉의 명성을 떨치고 말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구양봉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징을 울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잇달아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외쳤다.
"도적 놈이 도망간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도적을 잡으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구양봉이 흠칫 놀라 가만히 동정을 살피니 웬 사람이 획 몸을 날려 지붕을 넘는다. 당세에 드문 경공을 쓰는 것으로 보아 무예가 출중한 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은 내심 놀라서 가볍게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올라섰다.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그 그림자가 슬금슬금 모용쟁의 거실 쪽으로 가고 있지 않는가!
구양봉은 모용쟁과 다시 말다툼하기도 싫었고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구양봉과 살을 섞은 사이였고 명색이 그의 형수인데다, 더구나 구양씨 가문의 천금 같은 후손을 잉태하고 있는 여인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이런 상황에서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멀찌감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사나이는 모용쟁의 방 밖에서 어슬렁대는 듯싶더니 어느 틈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꽤나 날쌘 놈이었다. 구양봉은 혹시라도 모용쟁에게 화가 미치면 큰일이다 싶어 그녀에 대한 감정 따윈 까마득히 잊고 훌쩍 몸을 날려 뜰에 내려섰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었다. 벌써 모용쟁의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구양봉은 방을 끼고 돌아 창 밑으로 다가갔다. 창으
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양봉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나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구양봉은 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방금 전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큰소리 친 그가 아닌가? 구양봉은 난감하고도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이때였다. 방안에서 모용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싶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모용쟁이 묻는 말이었다. 모용쟁 자신도 상대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더욱 의심이 들었다. 사나이가 자기의 이름을 대는 것 같았으나 소리가 하도 낮아서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모용쟁이 말하자 사나이는 또 뭐라고 대꾸했다.
구양봉에게는 역시 들리지 않았다. 구양봉은 불끈 화가 치밀었다
'제기랄! 그래, 내가 못 듣게 할 셈이냐? 어림도 없지. 나는 천하에 없는 신공을 익힌 어른이다!'
구양봉은 마침내 합마신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서 천리 밖에 떠도는 신기를 몸에 끌어들여 정신을 집중하니 멀리서 종잇장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놈인 것 같았다.
"방주님께서는 저더러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십시다. 방주님께서는 또 아가씨의 몸이 불편하니까 잘 모시고 오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방주님의 병환이 그렇게까지 위급한가요?"
떨리는 음성으로 모용쟁이 물었다.
"괜히 아가씨에게 말씀드렸군요. 하지만 방내(幇內)의 대사를 다 배치했으니까 근심 없이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겁니다."
모용쟁은 한식경이나 말이 없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찾아가서 방주님의 임종을 지켜야 사람 된 도리이지만 저의 몸이 무거워서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찾아뵙지 못하는 저의 안타까움을 전해 주세요."
구양봉은 너무나 의아했다. 이 젊은 사내가 야밤에 모용쟁을 데리고 누구를 보러 가려는 것일까? '방주님, 방주님' 하는데 대관절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사내의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방주님께서는 임종을 앞두고 아가씨만 보고 싶다고 하시니 어떡하겠습니까? 아가씨, 저희들의 낯을 봐서라도 한 번만 움직여 주십시오."
사내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싶었다.
"좋아요. 같이 가 보지요."
모용쟁은 결심한 듯 조용히 말했다. 사내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서둘러 문을 열고 나섰다. 모용쟁은 그의 뒤를 따르며 시녀에게 일렀다.
"장주님께 내가 떠났다고 전해 주렴. 그리고 이 달 보름날에 강녀묘(姜女廟)에 아이를 데리러 오시라고 해. 사람을 시켜 아이를 보낼 테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장 문을 나섰다.
젊은이와 모용쟁은 뜰 밖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구양봉은 불쑥 길을 막아 서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 방주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며칠이고 집 안에만 붙박혀 지내던 모용쟁이 저렇게 선뜻 따라나서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두 사람을 뒤쫓기 시작했다.
마을 밖에 있는 수림 속에는 검은 옷을 입은 대여섯 명의 사나이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사내가 모용쟁을 데리고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죽 둘러싸고 환성을 질렀다. 사내들은 말을 끌어다 모용쟁을 앉히고 자리를 떴다. 훤칠한 키에 비수처럼 번뜩이는 눈매로 보아 분명 강호의 호걸들이었다. 게다가 모용쟁이 탄 말은 물론이요, 사내들이 탄 말도 다리가 미끈한 준마들
이었다. 그들은 채찍으로 말을 재촉하여 쏜살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구양봉은 바삐 경공을 써서 바짝 뒤쫓아갔다.
두어 마장 달렸을까? 그들은 검푸른 솔밭 앞에 멈춰 서더니 말에서 내렸다. 젊은 사내가 모용쟁을 부축해 내리자 모두들 말고삐를 놓고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구양봉도 획 몸을 날려 수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누구얏? 거기 서라!"
난데없는 소리에 구양봉이 흠칫 놀라는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세찬 바람이 일었다. 구양봉을 겨누고 몰아붙인 장력이 빗나간 것이었다. 솔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구양봉은 일장을 후려 치면서 홱 돌아서는 동시에 강하게 다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휘익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구양봉의 무서운 장력이 상대의 가슴에 닿았다. 놈은 '어이쿠! '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놈은 아름드
리나무 앞에 서 있었는데 손을 내밀고 있는 품이 계속 덤벼 볼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은 버티고 서 있기만 할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구양봉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구양봉은 웃음을 참으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갔다. 몇 군데 비밀 보초막을 돌아가니 옛 절이 나타났다. 찌그러진 방앗간처럼 누추한 절 주위에는 쑥대가 일렁이고 묘비와 무덤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구양봉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큰 향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웬 초췌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종이 가까운 듯한 남자의 둘레에 몇몇 사내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까 보았던 젊은 사내가 모용쟁과 함께 향로 앞으로 다가가서 여쭈었다.
"방주님께 아룁니다. 부하 구천인이 모용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모용쟁은 조용히 서 있다가 젊은 사내의 말이 끝나자 조심조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향로를 만지더니 엉거주춤 꿇어앉아 향로 옆에 있는 사람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뭐라고 말씀해 보세요."
비스듬히 누워 있던 늙은이는 가쁜 숨을 내쉬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도리대로 말하면 아가씨는 진작 나를 알았어야 해. 내가 첫번째로 아가씨를 구해 줬을 땐 나를 알아볼 리 없었고, 두 번째로 구해 줬을 땐 아쉽게도 앞을 보지 못했지……. 모용 낭자, 잘…… 잘…… 지내시오……."
모용쟁은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투를 틀어 올린 노인의 머리엔 골비녀가 엉성하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노인의 쭈글쭈글한 이마며 눈, 볼, 콧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저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앞으로 어르신을 다시 만나면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이고 얼굴을 어루만져 보아도 알 거예요."
노인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를 불러 온 건 다름아니라 아가씨의 몸이 근심스러웠기 때문이오. 나는 곧 죽을 사람인데 언제 다시 만나겠소?"
모용쟁은 온갖 시련을 겪어 본 터라 죽음에 대해서도 별반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노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르신뿐만 아니라 저도 죽을 거예요. 하지만 얼마 후 우린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노인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모용 낭자, 그게 무슨 농담이시오? 나야 천수를 다 누린 늙은이고 또 몸에 병까지 들었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만…… 아가씨야 새파랗게 젊은데 죽긴 왜 죽는단 말이오?"
그는 말하는 동안 연신 기침을 해대더니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왈칵 피를 토했다. 모용쟁이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안타까워하자 노인이 쓸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아무러면 어떤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데려올 땐 어르신을 돌보아 드리라고 데려온 것 아니겠어요? 불편한 데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돌봐 드릴게요."
모용쟁이 안타깝게 말하자 노인은 더욱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철장방도 무려 방주가 열 번이나 바뀌었구만. 역대의 방주들 모두가 쟁쟁한 무림의 호걸들이였지. 하지만 이 상관위 대에 와서는 원수도 갚지 못하고 뜻도 펴지 못하고 남들의 업신여김만 당했구려. 실로 원통하기 짝이 없소."
"어르신은 당당한 영웅이세요. 의롭고 착한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 줬으니까요."
모용쟁은 노인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노인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구양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 죽어 가는 늙은이와 앞 못 보는 여인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
모용쟁은 구양봉을 대할 때의 쌀쌀한 태도와는 달리 죽어 가는 늙은이를 붙잡고 극진하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치 명랑하고 영리했던 사막에서의 모용쟁으로 되돌아간 듯싶었다. 구양봉은 생각했다.
'저 다 죽어 가는 늙은이는 철장방의 방주 상관위가 아닌가? 상관위가 모용쟁을 구해 줬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고 구해 준 건가? 그저 모용쟁이 들어 있는 보물함을 훔쳐 가지고 가다가 우연히 그녀가 들어 있음을 알고 놓아주었을 뿐이지. 그만한 일은 지나가던 농부도 할 수 있어. 그 따위 은혜 같지 않은 은혜를 입고 울고불고 할 게 뭐 있어?'
구양봉은 모용쟁이 하는 언행들이 못마땅했다. 제갈정을 죽인 후로 모용쟁은 한 번도 그를 웃는 얼굴로 대한 적이 없었다. 모용쟁은 구양봉과 마주치기만 하면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하며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 죽어 가는 늙은이와 눈물을 짜 가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끓었다.
'상관위 이 놈아, 다 죽어 가는 주제에 새파랗게 젊은 계집과 무슨 개수작이냐? 네 놈이 스스로 죽지 않는다 해도 이 구양봉이 죽여 버릴 테다!'
모용쟁은 구양봉이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상관위의 얼굴을 자꾸만 어루만졌다. 상관위의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려는 듯했다. 상관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용쟁에게 당부했다.
"모용 낭자, 이 늙은 것이 보기에 아가씨는 백타산장에서 마음만 썩이고 있는 것 같구먼. 거기서 지내기가 어려우면 여기 철장방 사람들한테로 오시오. 우리 철장방이 차지하고 있는 오지봉 기슭에 가서 지내면 설사 구양봉이란 녀석이 찾아와도 별일 없을 거요. 당연히 우리 사람들이 나가서 물리쳐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하시겠소?"
모용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더니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구양봉은 분해서 입 언저리를 푸들푸들 떨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찢어 죽일 상관위 놈아, 네 놈과 모용쟁이 무슨 사이길래 나를 해치고 그 계집을 철장방으로 데려간다는 거냐? 네 놈과 모용쟁은 만나면서 스쳐 버린 사이지만 나와 모용쟁은 살을 섞고 백년을 기약한 사이다. 네 놈이 모용쟁을 꾀어 데려가기 만 하는 날엔 네 놈들 철장방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을 테다! '
상관위는 더욱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누구를 찾는 것 같았다. 깡마른 몸매의 젊은 사내가 한 걸음 나서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방의 요인들이 다 모였사온데 누구와 말씀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상관위는 부축해 달라는 눈짓을 했다. 젊은 사내가 부축해 일으키자 상관위는 향로 옆에 서서 한동안 숨을 돌리고는 엄격한 시선으로 빙 둘러선 무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마침내 상관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철장방이 일어선 후 이 오지봉 기슭에서는 신기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소. 하지만 이 상관위의 대에 와서 그만 강호에 악명을 남기게 되었소. 여기 모인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철장방의 명성을 더럽혔는지는 일을 저지른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 거요. 구태여 추궁하지는 않겠소. 애오라지 이 방주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우리 철장방이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무림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기
를 바랄 뿐이오."
모두들 꿇어앉아 숨을 죽이고 방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문득 상관위가 품속에서 거무스름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얼핏 보니 사람에게서 잘라 낸 팔 같았다. 바로 철장방 방주의 신물(信物)인 철장(鐵掌 ; 무쇠손)이었다.
좌중은 철장을 보기가 무섭게 일시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상관위는 철장을 든 채 후들후들 떨면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 잘 들어 주시오. 본인은 철장방의 최고 신표인 이 철장을 다음 대의 방주에게 물려주고자 하오. 다음 대의 방주로는 수상표(水上飄) 구천인을 세우고자 하오."
좌중은 흠칫 놀랐다. 실로 예상 밖이었다. 군천인을 포함하여 이 자리에 모인 열아홉 명은 모두 철장방에서 난다 긴다 하는 호걸들이었다. 그 중 세 사람은 상관위의 사숙뻘 되는 늙은이들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상관위와 함께 무예를 배운 사형제들이었다. 유독 구천인 만이 제자뻘 되는 애송이인데 철장방의 신표를 구천인에게 물려준다고 선포하자 모두들 깜짝 놀라면서 반대의 뜻을 비쳤
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성큼 나섰다.
"잠깐만, 상관위 어른, 혹시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오?"
"사숙 어른, 대를 물리는 막중한 일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상관위의 말에 늙은이는 버럭 성을 냈다.
"나보고 사숙이라고 부를 염치나 있나? 우리 철장방은 자네 대에 와서 기가 꺾였네. 지난번 술집에서 소씨 거렁뱅이 녀석이 거들먹거릴 때도 자네는 꼼짝 못하고 괄시만 받았었지. 한데 오늘은 방주 자리를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녀석에게 물려주겠다고 하니 어찌 정선이 제대로 박혔다고 볼 수 있겠나? 이 사람아, 대관절 철장방의 위신을 어떻게 세우며 어떻게 강호에 발붙이라는 겐
가?"
상관위는 노인을 민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숙 어른, 그래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구천인을 방주로 내세운단 말씀이시오?"
"그렇잖고! 저 젊은이가 철장방에 가담한 지 고작 몇 해인가? 이제 스무 살도 안 되는 풋내기가 철장방의 방주가 되다니! 실로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네. 경력은 그만두고라도 무예만 해도 무어 볼 게 있단 말인가?"
상관위는 숨이 가빠졌다. 그는 한참 숨을 몰아쉬고 나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들도 사숙과 똑같은 생각이시오?"
"그렇소이다. 구천인은 저희들의 방주가 될 수 없소이다."
열일곱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구천인 만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상관위가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천인, 자네는 왜 말이 없는가?"
"사부님께서 큰 사숙님을 비롯하여 여러 사숙님들과 말씀하시는데 제자가 어찌 끼여들 수 있겠습니까?"
구천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발끈 성을 냈다.
"뭣이? 네 놈이 입을 봉하고 있는 건 우리를 시답지 않게 보고 방주가 되려는 속셈이 아니냐?"
이 광경을 가만히 훔쳐보고 있던 구양봉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철장방 방주 상관위는 강호에 이름을 날린 일류 호걸이다. 한데 새로운 방주를 세우는 일에서는 어찌 이다지 어리석은 태도를 보이는 걸까? 아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숭이가 어찌 방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얘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에 어느 술집에서 구천인이 상관위를 구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 일로 해서 구천인은 철장방 사람이 되었고 그동안 구천인의 무공이 대단해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위가 좌중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사코 자기를 구해 준 애숭이 제자를 방주 자리에 앉히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관위가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모용쟁이 얼른 부축했다.
상관위가 인상을 잔뜩 지푸리혀 물었다.
"사숙 어른, 구천인의 무예가 약하기 때문에 모두들 불복한다 그 말씀이시겠지요?"
"그렇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상관위는 모용쟁에게 청을 했다.
"모용 낭자, 날 좀 부축해서 저리로 가 주오."
모용쟁도 강호 바닥의 생리를 아는지라 이런 사나이들의 말다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마디 험한 말이 오가다가 여차하면 칼부림이 나고 두서넛씩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사였던 것이다.
모용쟁은 상관위를 부축했다. 몸이 무거워 운신하기 어려운데다가 상관위마저 비틀거려서 두 사랑은 간신히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사람들은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하느라고 상관위를 돌볼 경황이 없었다. 모용쟁은 내심 화가 나서 속으로 구천인을 욕했다.
'저 구천인이라는 녀석도 믿을 놈이 못 돼. 사부님이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는데 어째 부축해 드릴 생각조차 않는 게야? 저런 자세로 방주 노릇을 한다구?'
상관위는 자라를 잡고 앉자 철장을 들어 향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철장방의 호걸들이오. 철장방의 호걸이라면 칼부림으로 승부를 내는 법은 없소. 단지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세상과 대결할 뿐이오. 당신들은 구천인이 방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누가 자격이 있소? 지금부터 모두들 저 무쇠 향로에 손바닥을 찍어 보시오. 깊게 자국을 낸 자만이 방주가 될 자격이 있소."
사람들은 모두 고개들을 끄덕이며,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내가 방주가 되지 못한다 해도 저 구천인이 될 리는 만무해. 엊그제 입문한 놈이 장력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 여기 모인 어른들은 장력만 수십 년을 연마했는데 저 따위 애숭이가 상대나 돼?'
사람들은 차례로 걸어 나가 향로에 손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맨 먼저 나선 것은 상관위의 사제였다. 그는 상관위에게 가볍게 읍을 하고 한마디 던졌다.
"사형, 이 아우는 사형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어 왔소. 하지만 이번의 처사만은 타당치 않은 줄로 아오. 늘그막에 노망을 부리는 것 같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팍!' 하고 향로에 손바닥을 찍었다.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과연 20년 연마한 장력다웠다.
밖에서 훔쳐보던 구양봉도 감탄했다.
'과연 철장이로군!'
나머지 열여섯 명도 뒤질세라 성큼성큼 걸어 나가서 향로에 손바닥 자국을 내자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어느새 향로는 채찍 벼락을 맞은 말 엉덩이처럼 온통 손자국투성이였다. 어떤 것은 어렴풋하고 어떤 것은 선명한데 그 중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역시 상관위와 말다툼하던 수염이 허연 늙은이의 것이었다. 그가 찍은 낙인은 술 두어 잔은 족히 부을 수 있을 만큼 깊어 보였다.
상관위는 시종 일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구천인 차례가 되자 조용히 분부했다.
"자네도 나가 보게."
구천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는 상관위에게 허리 굽혀 예를 올렸다.
"사부님, 이 제자는 경력도 미숙하고 나이도 어리니 그만둘까 하옵니다."
그 말에 상관위는 눈을 감은 채 픽 웃더니 낮은 음성으로 꾸짖었다.
"구천인, 이 놈아, 방금 네 놈은 나를 부축해 주지 않고 모용 아가씨만 고생하게 했지. 네 놈이 방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겠느냐? 아무튼 우리 철장방이 강호에서 세도를 잡으려면 그래도 네 놈같이 약삭빠른 놈이 방주가 돼야 해. 한데 싫다고? 정 방주가 되기 싫다면 어차피 형제들 손에 죽는 수 밖에 얼어. 네 놈은 철장방의 복이 아니면 화가 될 물건이니까."
구양봉은 상관위의 말을 듣고 고소를 머금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뱀처럼 지독하고 흉측한 놈이라고 욕하고 있지만 천하의 무림 호걸들이란 모두 그런 거야. 저 상관위라는 놈도 보라지. 남들 앞에서는 세상 없이 인자한 체하지만 제 무리들속에서는 제자도 사정없이 죽여 버리거든. 천하의 인심은 다 그런 거야.'
구천인은 흠칫 놀랐으나 잠자코 있었다. 상관위가 계속 몰아세웠다.
"천인, 오늘 넌 방주가 되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다."
구천인은 바짝바짝 가슴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는 살기등등해서 서 있는 사나이들과 운명해 가는 사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사부님 분부대로 이 제자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좌중은 애당초 구천인을 눈에 차지 않아 했다. 그들은 향로에 찍힌 손자국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면서 구천인을 두고 코웃음을 쳤다.
'너 같은 하룻강아지가 어림도 없지!'
구천인은 남이야 비웃든 말든 향로로 다가서서 두 손을 쫙 폈다. 그는 몇 번인가 기합을 넣는 태도를 취하더니 벼락같이 향로를 내리쳤다. '쿵!' 하는 무서운 소리가 났다.
좌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세나 동작은 그럴듯하군 그래. 하지만 너 따위 애숭이가 손자국을 냈을 리가 만무해. 그저 향로의 먼지나 털었겠지.'
구천인은 장법을 보이고 나서 조용히 한쪽으로 물러갔다. 잔뜩 울상을 한 얼굴이었다. 좌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상관위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방주 어른, 한번 잘 보시오. 아마도 이 늙은 것의 손자국이 제일 깊을 거외다……."
노인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스적스적 향로 옆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달빛에 향로를 비추어 보던 노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건, 이건……"
노인의 기색을 본 좌중은 이상한 생각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 역시 모두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들쭉날쭉 어지럽게 찍힌 손자국 위에 손자국 두 개가 깊숙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조할 때 낸 자국같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좌중은 그만 벙어리가 된 듯했다. 무예로 자웅을 가린다고 했으니 방주의 자리는 필경 구천인의 것이었다.
'이 젊은 녀석이 언제 어디서 이런 신묘한 장법을 익혀 뒀을까?'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상관위 옆에 서 있는 구천인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그들은 금세 등골이 서늘해졌다. 직접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이 한 쌍의 손자국을 스무 살도 안 되는 소년이 찍어 놓은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상관위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이 없었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입을 열었다.
"구천인, 자네가 이토록 셀 줄은 몰랐네. 이 늙은 것도 탄복하는 바이네, 하지만 내공만으로는 부족하이. 경공도 뛰어나야 하지. 내공과 경공이야말로 귀신도 곡할 철장방의 두 가지 신묘한 재주라네."
구천인은 말없이 좌중의 앞에 나섰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두 손을 펴서 주물거리는 듯 싶더니 여남은 개의 동전을 만들어 허공으로 휙 날려 보냈다. 좌중은 뭐가 뭔지 몰라 허공만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동전이 후두둑 쏟아져 내려 땅에 박혔다. 구천인이 가느다란 명주실로 동전들을 이어 놓자 명주실은 땅 위에 가볍게 드리워졌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져서 바라보는 가운데 구천
인은 사부에게 깍듯이 읍을 하고 나서 살짝 명주실을 타고 잔걸음을 놓았다. 그러기를 잠시, 홀연 사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희뿌연한 실뭉치만 뭉게뭉게 구름처럼 떠돌았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고 있는데 자취를 감추었던 구천인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좌중 앞에 나타나 서 있었다.
상관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는 구천인의 재능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천인이 대관절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하고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동전위에 드리운 가느다란 명주실을'타고 달리는 것이 철장방의 경공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구천인이 한쪽으로 물러서자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동전은 그대로 박혀 있고 명주실도 그대로 걸려 있었다. 다시 땅바닥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발자국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눈을 밟아도 자국이 없고 벼랑을 날아 넘어도 소리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공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제34장 타오르는 촛불
사람들은 구천인이 기묘한 재주를 피우는 것을 얼빠진 사람들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난다 긴다 하던 상관위보다도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이런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편 구양봉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껏해야 17, 8세밖에 안 된 놈이 저 정도 실력이니 몇 해만 지나면 필연코 무림의 기인이 될 것이었다. 만약 구천인과 무예를 겨룬다면 자기도 쉽게 꺼꾸러뜨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상관위는 모용쟁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용쟁은 미소 띤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상관위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음입밀법 (傳音入密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용쟁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상관위가 마침내 좌중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구천인을 방주로 세우는 데 다른 의견은 없소?"
좌중이 잠잠하자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자네가 기어이 구천인한테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겠나? 자네는 방주니까 방내의 대사를 당연히 자네가 결정해야지."
철장방의 사람들은 이 늙은이를 무척 존경하고 있는 터라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더는 딴말이 없었다. 이에 상관위가 정중히 선포했다.
"철장방의 제12대 방주 상관위는 방주 자리를 제자 구천인에게 물려주노라. 특히 철장 신표를 구천인 방주에게 물려주니 철장방을 잘 다스려 강호의 막강한 세력이 되게 하며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하기를 바란다!"
상관위는 말을 마치고 철장을 정중히 구천인에게 넘겨주었다. 구천인은 철장을 받아 들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다.
"이 구천인이 철장방 방주의 자리를 물려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이 구천인은 철장방의 대업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며 철장방을 훌륭히 꾸려 천하 무적의 대오로 만들 것입니다!"
구천인의 맹세를 듣고 좌중은 한시름을 놓았다.
'제 입으로 맹세했으니 제아무리 간교한 놈일지라도 철장방에 불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지. 만약 구천인이 철장방을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면 오히려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신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 철장방을 흥성하게 만들지도 몰라.'
좌중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위는 일이 끝나자 숨을 가쁘게 쉬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구천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해라. 더는 저 사람들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구천인은 내심 난처했지만 새 방주로서 위엄을 갖춰 철장을 쳐들고 엄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모두들 물러가도록 하시오."
좌중이 물러가자 상관위와 모용쟁, 구천인 셋이 남았다. 상관위는 구천인을 보고 턱짓으로 절 안에 들어가자고 했다.
법당으로 들어가자 모용쟁은 상관위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구천인은 그 옆에 지켜 섰고 모용쟁은 상관위의 옆에 꿇어앉았다.
법당 안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상관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모용쟁을 보았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구천인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사부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어서 하세요."
"초, 초를……."
상관위는 발음조차 안 되는 듯 입술을 떨며 가까스로 말했다.
모용쟁은 가슴이 아팠다.
'임종이 가까워오는데 초는 찾아 뭐에 쓰려는 걸까?'
휑하니 뚫린 천장으로 별빛이 스며들어 법당 안은 촛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구천인이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모용 아가씨, 저의 사부님께서는 여든한 개의 초를 갖춰 놓았어요. 어떻게 켜야 할지, 모용 아가씨가 아신다니까 저한테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이 흩어진 후 구양봉은 모용쟁 등 세 사람이 절 안에 들어갈 줄 미리 짐작하고 한걸음 앞서 법당에 들어와 삼청신상(三淸神像)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속을 비우고 짚과 흙으로 빚은 삼청신상은 몸을 가리기엔 너무 작아서 그 뒷면을 뜯어내고 그 안에 들어서 있던 참이었다. 구양봉의 귀에 세 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다.
구천인이 여든한 개의 초를 꺼내 놓았다.
"모용 아가씨,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제가 사부님을 위해 초를 꽂지요."
"좋아요."
구천인이 잽싸게 왼손으로 초를 집어 모용쟁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모용쟁은 초의 크기를 손으로 가늠해 보더니 지시하기 시작했다.
"왼쪽 벽에, 높이는 석 자!"
구천인의 손이 번쩍 하자 초는 화살처럼 벽에 날아가 꽂혔다. 그는 다시 초 한 개를 모용쟁에게 쥐여 주었다.
"이번에는 젯상에!"
구천인이 초를 되받아 쥐는 즉시 휙 던지자 초는 젯상 위에 날아가 세워졌다. 구천인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고 모용쟁의 말은 더욱 빨라졌다.
"오른쪽 벽에! 눈앞에! 몸 뒤에! 천장에! 석상의 정수리에! ……"
구천인의 귀신같은 손놀림과 함께 휘익휙 초들이 연달아 날려가 여기저기 꽂혔다. 모용쟁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세어 보니 틀림없는 여든한 개였다. 구천인이 또 물었다.
"모용 아가씨, 이젠 뭘 할까요?"
"몽땅 불을 밝히세요."
촛불을 켜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멋들어지게 촛불을 켜려면 경공을 써야 했다. 구천인은 새처럼 가볍게 몸을 날렸다. 촛불 당기는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순식간에 법당 안이 온통 대낮처럼 밝아졌다. 여든한 개의 초는 하나같이 진붉은 색깔로, 겉에는 복(福), 녹(祿), 정(禎), 상(祥)과 같은 글자들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촛불 켜기가 끝나자 구천인은 다시 상관위 옆에 꿇어앉았다.
"사부님, 사부님, 눈을 떠 보십시오."
상관위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촛불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 거미줄이 드리워진 법당 안은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상하좌우 가득히 꽂힌 초가 녹아 내리며 기세 좋게 타오르는 모양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러한 광경이 앞 못 보는 여인과 임종을 앞둔 늙은이 앞에서 벌어졌으니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모용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다.
'상관위는 왜 구천인에게 촛불을 켜게 한 걸까? 십중팔구는 나의 방에 촛불을 켰을 때처럼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자고 한 노릇일 거야. 하지만 그때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구양봉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셋이 모여 앉아 서로 위로하고 걱정하는 말들을 주고받을 줄 알았는데 촛불만 켜 놓고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
모용쟁이 다가가 싸늘한 상관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상관위는 모용쟁의 부드럽고 향긋한 손길을 느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상관위는 철장방에 들어와 잔뼈가 굵었다. 그러니 한평생 철장방에 몸을 담고 살아온 셈이다. 장가를 들고 가정을 꾸려 본 적이 없는 그는 젊은 시절보다 늘그막에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기생집이나 술집에 드나들면서 돈
을 물쓰듯 했고, 고운 계집들을 안고 밤새껏 술을 마시고 색을 즐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늙으니 모든 것이 귀찮고 쓸쓸한 생각만 들었다.
본시 상관위는 여자에 관한 한 냉담했다. 청루에서 기생들과 놀 때는 돈도 잘 쓰고 술김에 큰소리도 잘 쳤지만, 일단 술이 깨면 모든 언약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실로 그는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일이 없었다. 백타산장에서 벌어졌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그는 임일천의 보물이나 빼앗아 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보물함을 열어 보니 난데없이 모용쟁이 웅크리고 있지 않겠는가
. 상관위는 몹시 놀랐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아름다운 소녀의 향긋한 체취는 상관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번쩍이는 금은 보화에 에워싸인 모용쟁의 모습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평생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술집이나 기생집에서도 제대로 정을 줘 본 적이 없는 상관위였으나 모용쟁의 미모에는 넋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어리석은
생각에 빠졌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모용쟁을 놓아준 뒤 보물함만 메고 길을 재촉했다.
그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도무지 모용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맑고 귀여운 자태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늙은 것이 새파란 아가씨에게 반하다니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꾸짖기도 했지만 모용쟁에게 쏠리는 마음은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용쟁의 거실에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는 일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상관위는 모용쟁을 곱게 앉혀 놓고 온 방안에 촛불을 밝히던 그 아름다운 정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모용쟁은 얼마나 밝게 웃었던가? 그 얼굴은 정녕 비 개인 뒤에 떠오른 태양처럼 상관위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바로 그때 상관위의 머리 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죽을 때도 모용쟁을 옆에 앉히고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자. 그렇게만 되면 이 한평생도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에는 바로 이런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삼청신상 안에 숨어 있는 구양봉의 얼굴은 삼청신의 태평스러운 얼굴과는 달리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이란 서로 정이 통해야 이처럼 촛불을 켜 놓고 마음속의 말을 나눌 수 있는 법이다. 아무튼 이 늙어빠진 녀석은 천하에 없는 괴짜야! 외간 여자와 함께 앉아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다니,
대체 무슨 수작이지? 모용쟁도 미친년이지. 이 구양봉 같은 호남아를 마다하고 다 죽어 가는 늙은이에게 엎어질 건 뭐란 말인가?'
상관위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불빛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용쟁이 옆에 있으니 흐뭇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모용쟁을 보며 말했다.
"모용 낭자, 나는 또 여든한 개의 붉은 촛불을 켜 놓았소.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르겠구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앉은 모용쟁의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
"붉을 촛불을 즐기신다면 언제든지 켜 놓으면 되잖아요."
"나는 아가씨가 임신한 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그 애가 크면 데리고 다니면서 무예를 가르쳐 줄 생각까지 했었소. 구양봉은 북강 유운장의 노독물 신독행의 제자요. 구양봉은 비록 무예는 출중하지만 사람이 흉악하고 잔인하오. 당신의 아이가 구양봉을 따라 다니면 기필코 나쁜 버릇만 배우게 될 거요. 하지만 나도 세상을 떠날 사람이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구려."
그 말에 모용쟁은 가슴이 뭉클했다. 정암에서 도망쳐 나온 뒤 오늘까지 그 누가 이 불행한 여자의 아픔을 알아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던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관위는 그녀를 걱정하고 아이의 장래까지 염려해 주는 게 아닌가. 모용쟁은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상관 방주님, 정말 고마워요."
구양봉은 화가 났다.
'모용쟁, 임자는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저주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만 있더니, 다 죽어 가는 송장 같은 늙은이 앞에선 왜 그렇게 살갑게 구는 거요? 이 구양봉에게도 그만큼만 부드럽게 대해 줬으면 우리 둘 사이가 오늘 이 지경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구양봉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상관위를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관위가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나의 이 제자는 비록 젊기는 해도 사람이 총명해서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과 식견이 있다오. 낭자도 이 젊은이를 따라 오지봉에 가서 철장방 사람들과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려."
모용쟁은 잠자코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 방주님, 병이 이렇게 중한데 제 걱정은 마세요."
"모용 낭자, 몸을 아끼시오. 그리고 꼭 오지봉에 가 주길 바라
상관위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거듭 당부했다. 모용쟁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묵묵히 꿇어앉아 있던 구천인이 땅바닥을 세 번 두드리고는 일어서더니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누님, 사부님의 분부대로 저를 따라 백타산장을 떠납시다."
모용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방에서 나을 때 시녀에게 남긴 말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어차피 그녀는 산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이달 보름께에 강녀묘에서 아이를 넘겨주겠노라는 말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백타산장과는 철저히 인연을 끊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모용쟁의 가슴은 텅 빈 들판처럼 썰렁한 느낌이었다. 모용쟁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도 일이 좀 있으니까 이달 보름께에 일처리를 하고 함께 갑시다."
상관위는 거의 숨이 넘어가는 듯싶었다. 구천인과 함께 오지봉에 가겠다는 모용쟁의 대답을 듣고 상관위는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흥분한 나머지 숨이 막혀 또 왈칵 피를 토했다. 옷자락은 온통 피로 얼룩졌다.
구천인은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다가 상관위가 피를 점점 심하게 토하자 기침을 멎게 하려고 가슴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상관위는 구천인의 손을 밀어내면서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낭자, 나는 이제 마음놓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소. 나의 두 가지 소원을 다 풀었으니……"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더욱 무섭게 기침을 하더니 왈칵 피를 토했다. 피는 봉당에까지 튀었다.
구양봉은 점점 참을 수가 없어졌다.
'배가 남산만 해서 당장 몸을 풀어야 할 년이 외간 남자들과 한 패가 되어 놀아나다니 정말 정신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무엇보다 저 상관위란 두상이 괘씸하기 짝이 없군. 모용쟁이 백타산장에서 살든 어디서 살든 네 놈이 주제넘게 무슨 상관이야? 또한 모용쟁이 철장방에 얹혀 살아야 할 이유가 뭐지? 남의 젯상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웬 돼먹지 못한 참견이냐?'
구양봉이 너무나 분하여 자기도 모르게 발을 구르는 바람에 삼청신상이 와지끈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얼결에 구양봉은 주르르 미끄러져 모용쟁 앞에 내려섰다.
구양봉을 보자 상관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거 야단났군. 저 놈이 달려드는 날엔 철장방의 사나이 네댓쯤은 간단히 해치울 텐데. 사숙들도 다 멀리 가 버리고 여기엔 구천인밖에 없으니 큰일이구나!'
그러나 구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구양봉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쟁은 무엇인가 우당탕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나자 두 눈을 껌벅거리다가 물었다.
"상관 방주님, 무슨 일인가요?"
상관위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용쟁은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구양봉의 내공이나 외공이 워낙 수준급이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쟁은 뭔가 짚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방주님, 혹시 그이가……."
구천인은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용 아가씨, 구양 장주가 와서 지금 바로 아가씨 옆에 서 계십니다!"
모용쟁은 흠칫 놀라는 듯싶었으나 이내 침착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상관위 쪽으로 향했다. 구양봉과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부릅뜬 눈으로 상관위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구천인 역시 한옆에 버티고 선 채 말이 없었다. 서로 맞붙으면 구천인 쪽에서 욕을 볼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의연했다.
세 사람은 한식경이나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상관위 어른, 이젠 볼장을 다 본 양반이 마음은 죽지 않아서 남의 여편네와 무슨 더러운 수작이오? 남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
상관위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구천인이 나섰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구양봉이 몇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구천인은 움직이지 않고 버렸다.
구양봉이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의 주먹이 암만 대단하다 해도 내 보기에 자네는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아."
그는 갑자기 왼쪽으로 몸을 돌려 오른손으로 힘있게 일 장을 내갈겼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장(丈) 밖에 있는 벽에서 하얗게 먼지가 일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벽에 깊숙이 파인 손바닥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는 무쇠 향로에 손바닥 자국을 냈지? 하지만 나라면 손바닥 모양의 구멍을 냈을 거야. 믿을 수 있겠는가?"
구양봉이 으름장을 놓자 구천인은 한참 동안 멀거니 바라보다가 피씩 웃었다.
"물론 믿지요."
두 사나이는 서로 약을 올리면서 티격태격 말씨름을 했다. 구양봉은 시끄럽다는 듯이 문득 허리를 굽히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몸을 솟구치자 바람이 일고 옷자락이 날렸다. 구양봉은 들판에 낮게 뜬 수리개처럼 법당을 날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꽂혀 있는 초들을 거두었다. 손에는 물론이고 손가락 사이며 겨드랑이에도 초들이 잔뜩 끼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구양봉은 '후―' 하고 법당이 들썩하게 숨을 내쉬더니 초들을 어지러이 날려 보냈다.
구천인은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널린 초들을 줄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에 네댓 개씩 불을 붙여서는 사부의 앞뒤에 다시 세워 놓았다.
구양봉은 발끈 화가 나서 두 손을 뒤로 끌어 당겼다가 확 펴며 앞으로 내밀었다. 초를 줍던 구천인은 그대로 떼밀려 맞은편 벽에 쿵 하고 머리를 찧었다.
"구천인, 이 놈! 다시 초를 주우면 이번엔 죽여 버리겠다!"
구양봉이 도끼눈을 하고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구천인은 빌기는 고사하고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다시금 초를 줄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소리쳤다.
"내가 네 놈의 목을 비틀어 죽이면 철장방 방주 노릇도 다하는 게 아니냐? 네 놈의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무림의 대가가 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아무튼 지금 죽는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구천인은 여전히 초만 주울 뿐 반응이 없었다.
구양봉은 징글맞게 코웃음을 치더니 엉거주춤 자세를 취했다. 그는 구천인을 겨누고 두 손을 지그시 뒤로 끌어 가면서 기를 넣어 사정없이 발산하려 했다. 이때였다. 모용쟁이 구천인의 앞을 막아서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초가 너무 많으니 내가 도와드리죠."
그녀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초를 줍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난감해졌다. 그는 이미 손바닥을 세워 기를 넣은 상태라 발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 합마공이란 것은 평생의 내력을 가다듬었다가 번개같이 내뿜어야 하는데 만약 그 힘을 발산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난 두꺼비 격으로 제 몸을 상하기 십상인 것이다. 구양봉은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옆으로 돌려 오른쪽 벽을 향해 발산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과 천장이 와르르 무
너져 내렸다. 모용쟁과 구천인은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구양봉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데 구천인과 모용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초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이른 넷에다 상관위 옆에 있는 것까지 더하면 틀림없는 여든한 개였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용쟁의 눈동자 없는 눈에 맑은 이슬이 반짝였다.
구양봉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는 불현듯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불끈 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구양봉은 두 손을 와락 뒤로 끌었다가 손바닥을 세우며 죽어라 내쳤다. '쿵' 소리와 함께 상관위는 옆에 있던 젯상, 석상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부님!"
깜짝 놀란 구천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으나 상관위는 이미 벽돌과 기왓장에 깔린 후였다. 구천인은 두 손으로 미친 듯이 벽돌을 파헤쳤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구천인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다.
벽돌과 기왓장을 헤치고 상관위를 들어 내 보니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온몸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부님, 사부님……."
구천인은 상관위를 안고 목메어 불러 댔으나 상관위는 대답이 없었다. 구천인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쏟아져 양볼을 적셨다.
모용쟁이 엎어질 듯 다가와 쭈그리고 앉더니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상관위를 찾았다. 구천인이 모용쟁의 떨리는 손을 잡아 상관위의 얼굴에 얹어 주었다. 그제야 모용쟁은 상관위의 피 묻은 얼굴을 매만지며 울먹거렸다.
"돌아가셨는가요? 구 방주님, 이 어른이 도대체 어떻게 되셨나요? 살아 계시나요, 아니면 돌아가셨나요?"
구천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연자실 서 있었다. 한 번 밀어내친 것이 벽이 무너졌고 다시 한 번 내지른 것이 상관위의 죽음을 초래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자위했다.
'어차피 서너 시간 후엔 저절로 숨통이 끊어질 판이었는걸, 뭐. 내가 일부러 죽이려던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모용쟁과 구천인은 생각이 달랐다. 특히 모용쟁은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구양봉은 이제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구나. 유운장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잘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철장방 방주 상관위야 무슨 원수진 일이 있는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야. 저토록 잔악한 사내를 멍청하게 사랑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구천인은 묵묵히 구양봉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무예가 구양봉보다 셌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합마공을 당해 낼 재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어설프게 덤벼 봤자 공연한 죽음만 자초할 뿐이다.
하지만 구천인 성격에 그냥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만약 기백이 없는 사내였더라면 상관위의 호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구천인이 한걸음 다가섰다.
"구양봉, 내 당신의 솜씨를 한번 맛보겠소. 어디 나도 한번 죽여 보시오!"
구양봉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자식 같으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가 바로 그짝이구나. 왕중양, 황약사나 홍칠 같은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네깟 놈 정도는 쥐새끼 죽이듯 할 수 있어.'
아무튼 이 젊은 놈도 재주가 보통은 아니므로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속이 편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천인 이 놈아, 정 원한다면 내 맛을 보여 주마. 단단히 각오해라!"
구양봉이 소리치자 구천인이 경멸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욕하실 때 나는 반신반의했었소. 하지만 천하에 다시없이 비열한 놈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소! 당신 같은 악인은 백 번 죽어 마땅하오!"
"그래? 그럼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겨뤄 보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천인이 재빨리 일 장을 안겼다.
"간다―!"
구양봉은 진작부터 구천인의 솜씨를 만만치 않게 보아 오던 터라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구양봉이 봉황력 경공으로 슬쩍 몸을 날리자 구천인이 발산한 장은 그대로 빗나가고 말았다. 구천인이 잠깐 기가 죽어 주춤하는 틈을 타 구양봉의 손이 쑥 날아 들어오더니 구천인의 잔등을 틀어쥐었다.
구천인은 그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줄곧 입을 봉하고 있던 모용쟁이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구양봉, 당신이 그 젊은이를 죽이는 날에는 나도 이 자리에서 죽는 줄 아세요!"
모용쟁의 말에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모용쟁의 성격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구천인이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아가씨, 제가 돌보아 드릴 경황이 없으니 먼저 가 보십시오. 나는 이 구양봉과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구양봉이 차갑게 웃었다.
'이 놈이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까 네 연놈들은 태연하게 초를 주우면서 이 구양봉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지. 이 놈아,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 신독행의 제자다. 감히 뉘라고 깔보는 거냐? 모용쟁이 공연히 성깔을 부리는 건 하는 수 없지만 네 놈까지 무슨 가당찮은 수작이냐!'
구양봉은 모용쟁을 흘끔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끊어진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이 단검은 바로 모용쟁이 사막에서 구양봉을 위협하던 것으로 제갈정의 손에 칼날이 절반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그 단검을 보자 구양봉의 뇌리엔 모용쟁과 함께 지내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구양봉은 서글픈 회한을 느끼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좋다, 저 놈이 가고 싶은 데로 가게 내버려두자. 저 놈을 죽이고 공연히 모용쟁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다. 그래도 저 계집은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아닌가.'
구양봉은 거칠게 구천인을 밀쳐 냈다.
"좋다. 내 형수님의 얼굴을 봐서 오늘은 봐주겠다.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땐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구천인은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이때였다. 모용쟁이 느닷없이 땅바닥에 쓰러지며 구양봉을 불렀다.
"구양봉……."
놀란 구양봉이 모용쟁에게로 뛰어갔다. 모용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구양봉, 아마도 아이를 낳으려나 봐요. 아이를……."
모용쟁의 얼굴에는 은은한 노을과 같은 홍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되는 기쁨에 싸여 방금의 노여움은 간 곳 없이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다만 무사히 해산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구천인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다친 건 아닙니까?"
구천인의 말에 구양봉이 호통쳤다.
"닥쳐! 이 여자에게 상처를 입힌 건 내가 아니라 네 놈이야. 네 놈이 알기나 해? .난 아들을 보게 됐단 말이야, 아들을!"
구양봉은 기쁨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내가 경황이 없을 때 썩 사라지란 말이야.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그러나 구천인은 계속 주춤거리며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난 떠날 수 없소.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모용 아가씨를 돌봐야하오. 당신이나 떠나가시오."
구양봉은 그만 기가 막혔다. 그러나 티격태격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버럭 역정을 냈다.
"내 아들을 보는데 네 놈이 여기서 뭘 한단 말이냐?"
"아니, 당신은 말끝마다 모용 아가씨를 형수님, 형수님 하던데 형수 되는 여자가 낳을 아이가 어떻게 당신의 아들이란 말이오? 아무튼 당신은 더없이 간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니까 내 기어이 이 자리를 지켜야겠소."
"이 미친 놈아, 내가 아무러면 내 자식을 죽이겠느냐?"
"당신의 명성이 그렇게 더러운데 내가 어찌 당신을 믿겠소? 사실 당신은 모든 친지들을 죽였지요? 세상에 식구끼리 물고 뜯고 죽이는 게 유운장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게 당신 아니오? 이젠 유운장 사람의 씨도 말라 버리고 당신 혼자만 남았으니 당신이 으뜸가는 악종이 아니고 뭐겠소?"
"이 놈, 죽는 게 무섭지 않느냐?"
"잘못 보셨소. 철장방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허, 제나 사내답군 그래. 반드시 죽여 버리지 않으면 큰일날 인물이군!"
구양봉은 냅다 그를 밀쳐 냈다. 구천인은 폭풍에 휩쓸린 통나무처럼 맥없이 나뒹굴었다. 그러나 구천인은 다시 일어나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당장 몸을 풀 판인데 저 놈이.한정 없이 집적거리니 야단이구나, 저 놈을 죽여 버리는 도리밖엔 없겠다.'
구양봉은 달려드는 구천인의 두 어깨를 잡아 양손에 한껏 내력을 넣었다. 구천인의 오장육부를 박살내려는 심산이었다.
구천인은 악을 쓰며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깨뼈가 우드득 부서지는 것 같고 목구멍에선 비린내가 치밀어 그는 울컥 토하고 싶어졌다. 그는 낮을 찡그리고 간신히 아픔을 참으며 생각했다.
'이젠 죽었구나. 이 놈을 이길 재간이 없구나. 내가 죽으면 철장방 놈들이 좋아할 거야. 아마 내가 죽으면 사숙들이 술상을 차려 놓고 경축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나를 깔보고 미워하던 늙다리들인가? 아니, 나는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구양봉은 마치 구천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빈정거렸다.
"세상에는 애당초 자기 일은 뒷전에 놓고 남의 일만 돌봐 주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 인간은 두 종류가 있을 뿐이지.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악인이구, 다른 하나는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악인이야.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악인은 말이야, 스스로도 자기가 악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아. 하지만 틀림없는 악인이지. 그저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악인일 뿐이지. 네가 바로 그런 간사한
악인이란 말야. 이 놈, 네가 바로 새로 올라앉은 철장방의 방주지. 하지만 이제 너는 죽고 그 방주 자리엔 다른 사내가 앉게 될 거다. 네 놈은 이제 볼장 다 봤어. 네 놈의 그 위대한 포부도, 뛰어난 재주와 무예도 죄다 땅속에 묻히게 됐단 말이다. 이 놈아, 그래도 죽는 게 무섭지 않단 말이냐?"
구천인은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입을 벌렸다 하면 그 즉시 피를 토할 것이고, 피를 토하면 여지없이 죽게 될 판이었다. 구천인은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서글퍼졌다. 구원을 청하듯 모용쟁을 건너다보니 그녀는 진통을 겪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단.
구양봉은 여전히 구천인의 양 어깨를 무섭게 조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어깨뼈가 부서질 판이었다. 구천인은 끝내 참아 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이쿠! 이걸 좀 놓아주시오! 내 할말이 있소."
그는 발버둥을 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당장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모용쟁이 구양봉을 불렀다.
"이봐요, 어서 내 손을 잡아 줘요, 내 손을요……."
그러나 구양봉은 구천인과 어우러져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구천인이 적수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요절내 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필시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었다. 구양봉은 손아귀에 한층 더 힘을 넣었다.
이때였다. 자지러지는 듯한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가 법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두 사내의 얽혔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제35장 피못에서 낳은 아이
갓난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를 듣고 번쩍 정신이 든 구양봉은 구천인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몸을 풀었군, 몸을 풀었어……."
모용쟁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고 기진맥진해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아이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새겨 두려는 것만 같았다.
구양봉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조용히 말했다.
"애를 이리 줘요, 나 좀 봅시다."
구양봉은 사내아이일지 계집아이일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고추가 달린 사내애라면 좋겠는데……. 계집애라도 괜찮아. 어쨌든 이 구양봉에게도 혈육이 생긴 거야…….'
구양봉은 모용쟁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쟁은 한참 망설이더니 구양봉에게 아이를 건네주었다.
"조심해서 안으세요. 그리고 찬찬히 보세요. 당신의……."
그녀는 지친 듯 말을 맺지 못했다.
구양봉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모용쟁이 고마웠다. 그는 아이를 받아 안으며 수선을 떨었다.
"좋소, 내가 안아 보겠소. 당신은 좀 쉬어야겠어. 푹 쉬어야 해……."
구양봉은 아이를 받아 안기가 바쁘게 사타구니에 손부터 넣었다. 자그마한 고추가 만져졌다.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이……, 여보, 구양씨 가문이 드디어 대를 잇게 되었소. 대를 잇게 됐단 말이오!"
구양봉은 미친 듯이 환성을 질렀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다가는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미친 듯이 기뻐했다.
모용쟁도 미소를 짓고 물었다.
"구양극이 옳은가요?"
구양봉은 아이를 높이 들어올리면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구양극일세, 구양극! 내 아들 구양극이란 말요!"
모용쟁도 기뻤다. 그녀는 '구양극, 구양극……'하고 나지막하게 되뇌었다. 아들을 낳은 기쁨에 부드러운 마음을 되찾은 듯싶었다.
어린 생명의 탄생으로 하여 피를 보는 무지막지한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구양봉은 아이를 안고 법당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구천인에게 한마디 던졌다.
"여보게 구천인, 여기 있지 말고 어서 가 보게나. 난 아이를 돌봐야겠어. 이 구양봉이도 아들을 보게 됐단 말이야!"
구양봉이 기쁨에 들떠 자기를 놓아주겠다고 하자 구천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를 놓아줘도 후일 꼭 복수할 거요."
구양봉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건 기쁨에 방금의 포악스러움은 간 곳 없이 사라졌다. 그는 웃으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여보게 구천인, 아무 때든 찾고 싶을 때 찾아오도록 하게. 하지만 지금은 짬이 없으니까 어서 가게나!"
구천인은 두 손을 맞잡고 모용쟁에게 읍을 했다.
"모용 누님, 저는 가 보겠습니다."
모용쟁은 구천인을 만류하지 않았으며, 그와 함께 철장방에 가기로 했던 일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가시겠어요?"
그녀는 건성으로 한마디 건넸는데, 그렇게 무표정할 수가 없었다.
구천인은 모용쟁의 무관심한 태도에 내심 놀랐다. 아무래도 사부가 이 여자에게 공연히 마음을 쓴 것 같았다. 무사히 아이를 보게 되자 두 부부가 서로 싸우던 일은 까맣게 잊고 금세 좋아 보였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사부가 공연히 끼여들어 큰 욕을 보지 않았는가?
'저 여자더러 철장방에 와서 살라고 했지? 정작 당사자는 꿈도 꾸고 있지 않는데 말이야. 철장방에 오든 말든 이젠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
구천인은 내심 괘씸한 생각으로 작별을 고했다.
"모용 아가씨, 저는 가 보겠습니다. 아마 다시는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님의 유체는 화장한 다음 역대 방주들의 무덤 옆에 모실 것입니다."
구천인의 표정 역시 담담했다. 마치 모용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서로 모르는 사이인 듯한 태도였다.
모용쟁은 사리가 밝고 총명한 여자로 대뜸 구천인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구 방주님, 노방주 상관위 어르신의 당부를 잊지 않고 그날이 되면 저를 데리러 와 주시겠죠?"
모용쟁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겠지요. 구양봉 선생이 잘 돌봐 드릴 텐데요."
구천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용쟁은 조용히 웃음을 떠올렸다. 그 웃음이 어찌나 쓸쓸하고 서글퍼 보이는지 구양봉과 구천인은 모두 놀랐다. 모용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관위 방주야말로 한 여인을 진실로써 대해 주었지요. 세상에 그런 사내가 몇이나 있을까요? 하기야 사람이 너무 진실돼도 바보 취급 받는 세상이니까. 구 방주님은 앞날이 구만리 같고 당장에는 이 사람을 당해 낼 수도 없으니 빨리 여기를 떠나세요. 여기에 있다가는 맞아 죽기 십상이니까요."
모용쟁이 이렇게 말하자 구천인은 곧장 자리를 뜨기도 뭣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잇달아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도 요란하게 들려 왔다.
구양봉은 여전히 아들을 본 기쁨에만 잠겨 있었다. 그는 자기 품에 안긴 갓난애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생각했다.
'인생이란 태어났다가는 죽고'갔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거야. 이젠 아들을 보았으니 이 구양봉이 죽어도 대를 이을 수 있다. 나와 형님은 모두 강호의 호걸이다. 한데 형님은 자기의 사부와 함께 어디로 가 버렸을까? 아마 내가 아들을 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형님은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한 기분이 들 거야.'
구양봉은 이 백타산장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형님을 생각했다. 그는 형님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고 아이를 보이고 싶었다.
이때 밖에 있던 사나이들이 절에 들어와 세 사람 앞에 쭉 늘어섰다. 모두 철장방의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로 가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구천인의 얼굴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구천인은 사조(師祖)와 사숙들이 온 것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사조, 사숙 어른, 이렇게 되돌아와 주셔서 참 잘됐습니다."
"방주를 혼자 남기고 간 일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꺼림칙해서 되돌아왔소."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거만하게 대꾸했다.
구천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나를 헐뜯고 아니꼽게 보던 사람들이 왜 이토록 선심을 베풀까? 급히 되돌아온 것을 보아서는 무슨 꿍꿍이가 있어.'
하지만 구천인은 내색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구양봉은 알몸뚱이로 있는 갓난애가 불쌍해서 자기의 옷을 벗어 서투른 솜씨로 둥실둥실 싸서 안았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풀썩 꿇어앉더니 무릎걸음으로 모용쟁 앞으로 다가갔다.
"큰일을 치렀소. 이제 우리 구양씨도 대를 잇게 됐구려. 그리고 이 애 이름은 구양극, 당연히 구양극이오. 좀 보시오. 당신을 닳기도 하고 나를 닮기도 했소……."
그는 좋아서 연신 웃어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용쟁은 아들을 낳은 기쁨, 어머니가 된 기쁨에 한껏 잠겨 조용히 웃고 있었다.
철장방의 사나이들은 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먼 여인이 흙덩이와 깨진 돌이 나뒹구는 다 무너져 가는 법당 안에 앉아 어떻게 저토록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모용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구양극, 구양극, 구양극이고말고요……."
모용쟁의 기쁨은 샘솟듯 했고 아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차고 넘쳤다. 아이를 낳기 전에 구양봉은 모용쟁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구양극이라 부르고 딸을 낳으면 구양옥이라 부르자고 했었다. 그때 구양봉은 얼마나 우쭐해서 신나게 큰소리를 쳤던가? 만약 아들 구양극이라면 그 애는 반드시 천하를 지배하는 무림의 영웅호걸이 될 것이요, 딸 구양옥이라면 천하의 사내들이 우러러보는 미
인이 될 것이라고.
구양봉은 모용쟁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면서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양극아, 구양극, 너는 우리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다. 너는 이 시각부터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이다. 너의 일생은 부귀와 영화로 차 넘칠 것이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구천인은 수염이 허연 늙은이에게 공손히 음하며 말했다.
"필 사조님, 우린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그러자 늙은이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징글맞게 웃었다.
"우리는 돌아가겠지만 자네는 돌아갈 수 없을 걸세."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구천인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늙은이는 필성직(畢芦直)이라고 부르는데 철장방에서는 자기밖에 없노라고 거들먹거리는 자였다. 그는 평소에 나이와 자격을 내세워 상관위마저 얕잡아 보았다. 그런데 구천인이 방주가 되었으니,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필성직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필성직이 차디찬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구천인 이 사람아, 철장방 방주는 12대를 이어 왔지만 모두가 명성이 대단하고 쟁쟁한 호걸들이었어! 한데 상관위가 자네 같은 애숭이 녀석을 방주의 자리에 올려 놓을 줄 뉘 알았겠나? 실로 천하의 호걸들이 코웃음을 칠 일이지. 이 자리에 여러 사숙, 사조님들이 다 계시니까 철장을 고분고분 내놓고 썩 꺼져 버리게. 이제부터 자네는 우리 철장방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구천인은 서두르지 않고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숙과 사조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구천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모두 작당을 하여 그를 죽여 버리려고 달려온 것 같았다. 맨 먼저 향로에다 손자국을 찍던 늙은 사숙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천인은 한마디 넌지시 물었다.
"요 사숙님, 아마 사숙님도 제가 방주의 자리를 내놓기를 바라시겠지요?"
이 늙은 사숙의 이름은 요약성(蓼若星)인데 세상을 뜬 구천인의 사부 상관위와 막역한 친구간이었다. 그는 비록 몇몇 사내들과 함께 구천인을 죽이러 왔지만 이는 필경 반역인지라 마음 한구석이 찔려 잠자코 서 있었던 것이다. 구천인이 묻자 요약성은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구천인, 방주의 자리를 필 사숙에게 양도하면 좋지 않겠나?"
요약성은 물론 함께 온 자들의 눈이 무서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구천인은 자기가 유일하게 믿던 사숙의 입에서까지 그런 말이 나오자 절망감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애달프고 서글프게 들렸다. 구천인은 사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하면서 꾸짖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손윗사람들이니 말씀드리기도 거북하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말은 해야겠소. 철장방 방주의 자리는 사부님께서 임종을 앞두고 나에게 물려준 거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왜 사부님 생전에 말씀드리지 못했소? 오늘 사부님께서 임종하여 유체도 식기 전에 방주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나를 협박하다니, 그래 철장방의 역대 호걸들이 이 정도로밖엔 처신할 수 없
단 말이오? 실로 유감 천만이외다!"
필성직이 코웃음을 쳤다.
"너의 사부 상관위도 내가 양보한 덕분에 방주 노릇을 해 본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었어. 한데 상관위는 철장방을 망쳐 먹고도 직성이 안 풀려서 너 같은 애숭이를 방주 자리에 올려 놓았단 말야.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구 어떻게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느냐? 방주 노릇 한다는 게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
"그렇다면 왜 사부님 앞에서는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소?"
"죽는 사람은 어쨌든 불쌍한 법이야. 잘했든 못했든 상관위도 철장방 방주로 10여 년이나 있지 않았는가? 당장 숨이 떨어질 사람을 놓고 왈가왈부할 여지가 있었는가 말이다."
필성직이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알겠소이다. 이 구천인이 철장을 내놓고 철장방을 떠나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 아니오?"
그 말에 늙은이는 양옆에 늘어선 일행을 둘러보며 음흉한 웃음을 던졌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그럼 어쩔 셈이오?"
"너에게 두 갈래 길을 제시하마. 하나는 네 스스로 힘줄을 끊고 폐인이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 허물어진 법당에서 맞아 죽는 길이다. 여기서 죽으면 우리는 너의 시체를 산에 가져다가 역대방주님들의 옆에 묻어 주고 철장방의 제13대 방주로 제사를 지내 주마."
구천인은 갑자기 박장 대소를 하며 허리춤에서 철장을 꺼내 들고 물었다.
"그러니까 방주 자리를 정식으로 넘겨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구말구. 자네는 철장방의 제13대 방주일세. 상판위가 자네에게 자리를 물려준 건 그 양반의 특별한 마음이겠고, 자네가 자리를 나에게 내놓는 건 전체 철장방 사람들의 염원이란 말일세. 자네는 방주 노릇도 해 보았고 기분도 내 보았으니 별로 원은 없을 거야."
구천인은 슬프고 원통한 기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어이 구천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설사 철장을 내놓는다 해도 스스로 폐인이 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국이었다.
구천인은 풀썩 꿇어앉아 사부의 시체에 머리를 조아린 뒤 하늘을 우러러 오열을 터뜨렸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사부님, 사부님, 저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 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는 한참을 울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사조, 사숙님들, 목을 늘이고 칼을 받겠사오니 먼저 사부님의 유체나 매장할 여유를 주십시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귀찮다는 듯이 딴전을 피우는데 요약성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사숙 어른, 소인의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 방주의 유체를 먼저 화장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필성직은 눈알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는 어차피 철장방 전임 방주의 시체를 그냥 방치해 둘 수도 없는 일인데다 그 시체 앞에서 구천인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인이 슬그머니 법당에서 나가려 하자 어느새 사숙들이 눈치를 채고 앞을 막았다. 그들이 말 한마디 없이 구천인을 노려보고 있는데 필성직이 너털웃음을 치면서 물었다.
"방주는 어디를 가려고 그러는가?"
"사부님 유체를 화장하려면 땔나무를 주워 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사내들이 일제히 박장 대소했다.
"그만한 일에 방주 어른을 고생시킬 거야 없지. 자, 뭣들 하는가?"
필성직이 한마디 던지자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가 분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물어진 벽에 서 있는 기둥을 와지끈 뽑아 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마를 대로 마른 나무라 불이 잘 붙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나무를 철장으로 하나하나 패어 높이 쌓은 뒤 그 위에 상관위의 시체를 올려 놓았다.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요약성이 느닷없이 구천인에게 다가섰다.
"누가 사형의 유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구인천의 머리에 한 가지 꾀가 번개같이 스쳤다.
'사부님께서는 늘 나를 보고 지모가 있는 놈이라고 칭찬하셨지. 오늘같이 위험천만인 때에 슬쩍 꾀를 부려 저 놈들을 골탕먹여 줘야겠다.'
구천인은 대뜸 눈물이 글썽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 사숙님께서 잘 보셨습니다. 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부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한데 저 구양봉이란 놈이 사부님과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저 지경으로 만들었답니다. 저 놈의 합마공에 의해 벽이 무너지면서 실로 개죽음을 당한 셈이지요."
요약성은 본디 성미가 급한 사람으로 구천인의 말을 듣자 뿌드득 이를 갈았다.
"구양봉? 구양봉이 어떤 놈이기에 우리 철장방을 업신여긴다더냐?"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구양봉 앞으로 몰려갔다. 젊은 사람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몰려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못하던 그들은 시어미 역정에 개 옆구리 차는 격으로 구양봉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들었다. 그들은 구양봉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늙은 사숙이 피씩 웃으며 내뱉었다.
"제길헐, 구양봉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우리 방주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우리 방주님을 업신여기는 건 우리 철장방을 업신여기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원수는 갚아야 한다!"
구양봉은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철장방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모용쟁의 앞에 꿇어앉아 아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용쟁도 아기를 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구양봉이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검은 옷 차림의 철장방 사내들 10여 명이 그를 둘러싼 뒤였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봐요, 저리들 비키시오. 그림자 때문에 아이를 볼 수가 없군. 자, 좀 저리로……."
그는 즐거운 낯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구양봉은 사나이들이 비켜서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아이만 들여다보았다.
필성직은 그러한 구양봉을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구양봉이란 놈은 잔악하고 우악스럽기로 이름이 났다지? 그리고 유운장의 신독행한테서 배운 합마신공과 경공에도 당할 자가 없다고 들었다. 저놈은 제 사숙과 사형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사숙의 살점을 베어 먹은 놈이 아닌가?'
사실 사람의 고기를 먹은 것은 제갈정이었다. 그리고 유운장 사람들도 모두 구양봉의 손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떡은 떼고 말은 보탠다고, 구양봉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덤 태기까지 쓰게 되었다.
철장방 사람들은 속으로 별렀다.
'이 구양봉이란 놈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니만큼 힘을 모아 혼을 내 줘야 한다. 잘됐어,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들에게 잡혔으니.'
요약성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꾸짖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이 우리 사형을 죽였으니 지금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구양봉은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여전히 기쁨에 잠겨 헤어날 줄을 몰랐다.
'내가 그 계집들과 놀 때도 지금처럼 즐겁지는 않았어. 정말 여태껏 자식을 본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 줄은 몰랐어. 자식을 본다는 것은 한 인간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이젠 내 아들 구양극을 보았으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원이 없다.'
아이는 어느새 엄마인 모용쟁의 품에서 달게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 살포시 감은 눈, 잠이 들어서도 연신 오물거리는 앵두 같은 입술은 얼마나 귀여운가? 또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용쟁의 얼굴은 얼마나 유순하고 부드러운가? 모자간의 사랑, 바로 이를 두고 천륜지락이라 하는가 보다. 이젠 아들을 보았으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그만 해야지. 집에 들어앉아 아들 재롱이나 보자꾸나. 아들 놈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고 모용쟁과 즐겁게 음
률을 따지고 옛 시나 논하면서 살자. 그게 사람 사는 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구양봉은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이 되어 철장방 사람들을 향해 간곡히 말했다.
"이보쇼들, 나를 건드리지 말고 어서 당신네 볼일이나 보시오. 방금 당신네 전 방주 상관위를 실수로 죽이긴 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소. 하지만 그 양반은 다 죽어 가는 사람이었으니 내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지금쯤은 죽었을 거요."
너무나 솔직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철장방 패거리들은 구양봉의 말에 더욱 화가 솟구쳤다.
'우리 방주님이 죽든지 말든지 네 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네 놈이 우리 방주님을 죽인 건 철장방을 업신여긴 거고 철장방에 사람이 없다고 깔보고 한 짓이다. 우리 철장방 방주가 네 놈한테 죽었다는 말이 퍼지면 우리 철장방 사람들이 어찌 얼굴을 쳐들고 다닐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네 놈을 죽이지 않고는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구양봉네를 에워싸고 공격할 태세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양봉이 전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모두들 난감한 기색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놈아, 내 장을 받아라!"
구양봉은 아기를 들여다보는 데만 정신이 팔려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요약성의 드센 일장에 앞으로 콱 꺼꾸러졌다. 그는 무심결에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의 다리를 누르고 말았다. 곤히 잠들어 있던 아기가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한 주먹에 구양봉을 쓰러눕힌 일이 스스로도 놀라워서 멍하니 구양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왈칵 피를 토하면서 배가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구양봉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극아, 극아, 내 아들 극아, 이 애비가 너를 다치게 했구나.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구말구……."
그는 아기에게 빌듯이 중얼거렸다. 모자 앞에 꿇어앉은 그의 모습은 마치 죄인과도 같은 태도였다.
모용쟁은 아기를 얼르면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태어날 때 아침 노을 피어났고
첫 걸음마 할 때는 무지개 걸렸다오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둥둥 내 아가야.
구양봉은 부드럽고 달콤한 모용쟁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자기에게 일 장을 안긴 요약성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젠 가 보시지요. 당신의 한 주먹에 죽을 사람도 아니고 또 당신과 티격태격할 겨를도 없으니까."
성미가 칼날 같고 걸핏하면 사람을 치던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참아 낼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약성은 속으로 우쭐한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구양봉이 무예가 뛰어난 자라고 하더니만 정작 만나 보니 그저 그렇구나. 당하고도 가만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무서운 모양이야. 사형을 생각해서라도 저 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야겠어.'
요약성은 다시 앞으로 성큼 나서며 두 손바닥으로 구양봉의 양 어깨를 겨냥했다. 구양봉이 슬그머니 기를 모으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방장에 양 어깨가 여지없이 부서졌을 것이다. 지켜 보고 있던 필성직이 요약성을 흘겨보며 비웃었다.
"여보게, 자네는 상관위 어른하고 자별한 사이가 아니었나? 상관위를 위해 복수한다는 사람이 왜 그 따위로 손을 써?"
요약성은 얼굴이 벌개져서 구양봉에게 다시 덮쳐 들었다.
"이 놈,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벼락같이 두 장을 동시에 내질렀다.
구양봉은 끝까지 싸우고 싶지 않았으나 요약성이 거푸 공격해 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구양봉은 두 손에 기를 모으며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요약성의 두 장이 어깨에 닿는 순간 구양봉은 맞받아 내질렀다. 무서운 힘이었다. 요약성은 허공에 날려 저만치 나가 뒹굴었다.
필성직과 일행이 우르르 달려갔을 때 요약성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의 가슴은 푹 꺼져 내려갔고 눈, 코, 귀, 입 등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철장밖 패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구양봉이 또 눈 깜짝할 새에 사람 하나를 죽인 것이다.
한참 만에야 필성직이 불쑥 나서면서 꾸짖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은 하루 사이에 우리 철장방 사람을 둘이나 죽였구나. 오늘 우리 철장방 형제들은 네 놈을 기어이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구양봉은 난감해졌다. 오늘만큼은 정말 싸움에 말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철장방 사나이들이 구양봉의 마음을 몰라주고 독 오른 장닭처럼 끊임없이 집적거리는 데는 버터 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악한 사람으로 살기는 쉽지만 어진 사람으로 살기는 어려운 세상인 것 같았다.
구양봉이 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발 집적거리지 말아주시오. 나와 형수님은 아이를 데리고 곱게 물러가겠소."
필성직이 픽 웃으며 빈정거렸다.
"구양 장주, 사람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죽이고서 곱게 물러가겠다구? 꿈도 야무지시구만!"
"그럼 어쩔 셈이오? 기어이 나를 죽여야 성이 풀리겠소?"
구양봉의 말에 필성직이 앙천대소했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여전히 구양봉을 에워싸고 틈을 노렸으나 구양봉의 신공에 겁을 먹고 감히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구천인과 모용쟁은 한쪽에 비켜선 채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 보고 있었다.
구양봉과 사내들이 한창 맞서서 서로 틈을 노리고 있는데 불현듯 삼장이 한꺼번에 구양봉에게 날아왔다. 하나는 구양봉의 왼팔을, 다른 하나는 그의 종아리를, 마지막 하나는 그의 어깨를 들이쳤다. 구양봉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망할 놈들, 내가 아무리 봐주려 해도 끝까지 물러가지 않는구나. 내가 저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저 놈들이 나를 죽일 판이야. 내가 아무리 마음을 착하게 먹으려 해도 너희 같은 놈들은 살려 둘 수 없다. 내 아들 구양극을 위해서도 나는 쉽게 죽을 수가 없어. 내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어야 네 놈들 직성이 풀리겠단 말이냐? 어림도 없는 수작 말아라!'
구양봉은 천둥같이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아들 때문에 고함도 지를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고함소리만으로도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함소리 대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때 한 놈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놈의 가슴팍에 일 장을 안겼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가슴은 한 뼘이나 꺼져 들어갔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필성직은 평생 동안 피를 보는 싸움을 무수히 겪었지만 구양봉과 같이 드센 사나이는 보지 못했다. 필성직은 부드득 이를 갈더니 소리를 질렀다.
"육합철장진 (六合鐵掌陣)을 펼치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놈들은 즉시 셋씩 짝을 지어 구양봉을 둘러쌌다. 그들은 한 조씩 번갈아 구양봉의 몸에 장을 안기면서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이쪽을 상대하면 저쪽에서 들이치고 저쪽을 맞받아치면 이쪽에서 장이 날아왔다. 구양봉은 빗발처럼 날아드는 장에 맞아 옷이 찢기고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웃옷은 아이에게 덮어 준 터라 이젠 적삼마저도 갈기갈기 찢겨 상반신이
드러났고 하반신도 겨우 앞을 가릴 정도였다. 거의 알몸뚱이가 된 구양봉의 두 눈에서는 불기둥이 일어나는 듯싶었다. 그는 돌연 무섭게 소리쳤다.
"빨리 물러가지 못할까? 이제라도 물러가면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지만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이 놈아, 허튼소리 작작 해라. 철장방의 육합대진(六合大陣)은 천하의 명장도 막아내기 어려운 거야. 그러니 네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필성직의 호통에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모용쟁을 돌아보았다. 모용쟁은 이쪽의 싸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자기가 또 사람을 죽여서 모용쟁이 화를 내고 있는게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저 놈들이 날 잡아죽이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데 낸들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소? 그저 내 아들만 잘 길러 주면 나를 미워해도 좋아. 임자 맘대로 하라구.'
필성직은 구양봉의 눈길이 자기의 뒤쪽에 쏠리자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이를 안고 조용히 앉아 있는 모용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왜 저 년을 이용할 생각을 못했지?'
필성직은 모용쟁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모용쟁은 눈은 멀었지만 그만큼 귀는 더 밝았다. '씽―' 바람이 일자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오른팔로 아이를 그러안고 왼손으로 막아 쳤다. 팔꿈치를 이용한 아주 멋들어진 동작이었다. 모용쟁의 머리채를 낚아채려던 필성직은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필성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 못 보는 계집의 솜씨가 얼마나 민첩한가? 필성직은 재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툭 털더니 소리 없이 머리를 향해 장을 겨누었다. 소리를 듣지 못한 모용쟁은 덮어놓고 한 손을 머리 위로 휘둘러 필성직의 장을 맞받아 쳤다. 하지만 필성직의 다른 한 장이 모용쟁의 가슴에 닿았다. 모용쟁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구양봉!"
한창 싸움에 열중해 있던 구양봉은 뜻하지 않은 모용쟁의 부르짖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모용쟁이 떠밀려 날아가고 있었다. 필성직이 다시 승냥이처럼 모용쟁에게 덮치려 하자 구양봉은 다급히 벽력 같은 고함을 쳤다.
"이 놈아!"
그의 고함 소리는 온 법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바람에 아기가 놀라 자지러지게 울어 댔다.
구양봉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자기를 둘러선 놈들을 물리치고 모용쟁이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필성직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모용쟁을 노리고 있었다. 필성직은 아픔에 신음하는 모용쟁의 얼굴을 쏘아보며 잠깐 망설였다.
'이 눈먼 계집은 죽여도 아깝지 않은데 이 밸밸 우는 애새끼는 어떻게 한다?'
바로 이때였다. 구양봉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이 돌연 필성직의 앞을 막아 섰다. 구양봉은 다짜고짜 전신의 기력을 다해 필성직을 떼밀었다. 필성직은 맥없이 곤두박질치며 저만치 날려 가 벽에 쿵 박혔다. 구양봉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잽싸게 달려가 필성직의 멱살을 거머쥐고 가슴팍에 수십 차례 된 주먹을 안겼다. 필성직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지고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필성직은 결국 한 덩어리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구양봉의 가슴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부글부글 피가 들끓었다.
'사람은 선량해야 하고 너그러워야 한다구? 내가 선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양보해도 저 놈들은 날 죽이려고 했어. 이젠 앞뒤를 생각할 것 없다. 몽땅 죽여 버려야 해!'
구양봉은 홱 돌아서서 철장방의 사내들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눈에서는 활활 불이 일었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늘 칼부림을 하면서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자들인지라 두셋쯤 피투성이가 되거나 죽는 것쯤 예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구양봉이 식은 죽 먹기로 연달아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도망칠 구멍만 찾고 있었다.
구양봉이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공연히 이 어른이 손대게 하지 말고 스스로들 자결해라!"
사내들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더니 생각을 고쳐 먹었다.
'네 놈이 아무리 날고 뛴다 해도 우리의 육합진은 당해 내지 못 할 거다! '
그들은 제각기 도망을 치다가는 다 죽을지도 모르니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재수가 좋으면 구양봉을 일거에 요절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열다섯 사나이들은 육합진을 치고 다시 굶주린 짐승처럼 구양봉을 에워쌌다.
구양봉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적들을 노려보았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뜨거운 불똥이 튀었다.
구양봉이 돌아서면 놈들도 원을 그리며 돌고, 구양봉이 성큼 나서면 놈들은 주춤 물러섰으며 구양봉이 움직이지 않으면 놈들도 까딱하지 않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전혀 틈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애타게 구양봉을 불러 대는 모용쟁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 왔다.
'상처가 얼마나 아프면 나를 부를까? 방금 몸을 푼 사람이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큰일이구나…….'
구양봉은 철장방 사내들이 裂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망할 놈들, 오늘 기어이 네 놈들을 죽여 버리고 내 아들을 위해, 모용쟁을 위해 복수하고야 말테다!'
구양봉은 마치 철창에 갇힌 야수처럼 사내들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자기들의 철장 대진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구양봉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저 놈은 아까 요약성이 내지른 장력에 어깨를 되게 맞았지. 중상을 입었을 거야. 그건 그만두고라도 우리가 계속 에워싸고 돌면 지쳐서도 쓰러지고 말 거다.'
구양봉의 가슴은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듯했다. 날이 밝으려는지 닭 울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만약 여기가 백타산장이라면 아들을 안고 어르면서 모용쟁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모용쟁도 맺혔던 응어리를 풀고 다시 구양봉에게 마음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놈들이 지금 구양봉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주린 이리 떼처럼 둘러싸고 있지 않는가? 이 짐승 같은 놈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지 않고는 모용쟁과 함께 여기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구양봉, 구양봉……."
모용쟁은 계속해서 구양봉을 찾았다.
의식을 잃어 가는지 목소리는 점점 가냘프게 들렸다.
구양봉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으나 섣불리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놈들 중에서 서넛이 갈라져 나가 모용쟁 쪽을 덮친다면 모자는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다.
모용쟁은 까무러칠 듯 말 듯하면서 구양봉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대관절 어디 있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는가? 또 백타산장의 그 계집들에게로 가 버린 거나 아닐까……."
구양봉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쳤다.
"이 놈들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당장 물러들 가거라. 물러가지 않는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까!"
철장방 사내들은 격노한 구양봉을 훔쳐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상처를 입고도 저렇게 용맹한데 만약 후일 다시 만나면 우린 꼼짝없이 죽게 될 거다. 저 놈이 상처를 입고 기진맥진했을 때 죽여 버리지 않으면 큰 화근을 남겨 두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한 사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저마다 손바닥을 치켜 세우며 호시탐탐 구양봉의 허점을 노렸다. 기어이 구양봉을 꺼꾸러뜨릴 심산이었다.
제36장 영원한 사랑
날이 뿌옇게 밝아 왔다.
구양봉의 두 눈은 충혈되었고 두 손은 피로 얼룩졌다. 그는 철장방 사내들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사내들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다. 자네들이 바라는 대로 해 주지."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일장을 갈겼다. '쿵!'소리와 함께 앞에 섰던 세 사나이가 저만치 밀려 나가 고꾸라졌다. 한 놈이 벽에 박혔다가 떨어지면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네 놈을 죽여 버릴 테다!"
그는 비척거리며 달려들려 했으나 그 자리에서 꺼꾸러져 죽고 말았다. 다른 한 놈은 땅에 넘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났는데 가슴이 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을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지옥에 가서라도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맥없이 중얼거리더니 스스로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 피가 터지면서 그의 몸은 보기 좋게 뒤로 넘어갔다.
세 번째 놈은 구양봉의 장에 맞아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사형과 사숙들을 쳐다보며 발광하듯 소리쳤다.
"저 놈을 죽여 줘요. 저 놈을 죽여 주지 않으면 난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점점 속이 탔다. 모용쟁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밑에 깔린 아이까지 둘 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아이가 깔려 죽었다면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 이르자 구양봉은 무서운 비통과 분노를 씹어 삼키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네 놈들이야말로 천하에 드문 악인들이다. 네 놈들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이 사무치는 분노를 풀 길이 없을 것이다! '
그는 모용쟁과 아들이 죽었다고 단정짓고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울부짖음은 마치 산속의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고 큰 호수에서 용이 우는 것 같았다. 그 울부짖음에 놈들은 그만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봉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구양봉은 자기를 에워싼 사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무시무시한 눈매로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열두 놈이었다. 열두 놈은 모두 내력을 운행시켜 가면서 열두 쌍의 손을 담벽처럼 세우고 있었다. 서로 내력을 겨루는 본격적인 싸움이었다. 한 놈씩 달려든다면 쉽사리 거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열두 놈이 뭉쳐서 동시에 내력을 내뿜는다면 제아무리 구양봉이라
해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구양봉이 꺼꾸러질 판이었다.
구양봉도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두 손으로 앞에 선 자를 밀치면서 내력을 뿜었다. 놈은 왈칵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놈들이 등을 받쳐 주면서 한 동아리가 되어 내력을 운행시켜 구양봉의 내력을 막아냈다.
내력의 겨룸이란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 있는 기력으로 하는 것인만큼 여섯 사람의 기력이 모이니 자연 엄청난 힘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를 가까스로 막아내면서 속으로 '여기서 죽겠구나'하고 탄식했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철장방 놈팽이들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원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은 다시 군음을 다잡아 죽을 힘을 다해 여섯 놈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섯 놈 중에서 두 놈이 참아 내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놈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빨리 죽여 버려야 해!"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다른 여섯은 속이 조마조마했다.
'혼자의 내력으로 범 같은 여섯 사내들의 뭉쳐진 내력을 당해 내다니!'
그들은 합세하여 구양봉을 쓰러뜨릴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 예닐곱이 구양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여 자기들까지 가세한다면 그 얘기가 뭇호걸들의 귀에 들어갈 겅우 철장방의 큰 망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여섯 사내의 내력이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구양봉의 내력은 더욱 커지는 것만 같았다. 손에 땀을 쥐며 지켜 철장방 패거리들 중 한 늙은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지금 어느 때라고 뻗대고 서 있기만 하는 거냐? 빨리 손을 쓰지 못할까!"
그제야 여섯 사내는 제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뻗대고 서 있다가는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맥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서로 바라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 놈, 우리 장을 받아랏!"
여섯 놈이 동시에 구양봉의 등허리를 번개같이 내쳤다. 구양봉은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다 썼고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60년 공력도 다 써 버린 상태였다. 구양봉은 '나는 이젠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합마공으로 저 놈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더라면 지금 이 지경에 처하지는 많았을 텐데……. 철장방의 놈들은 천하에 없이 비열하고 졸렬한 놈들이다. 내력을 겨루다가 감쪽같이 손을 쓰다니! ……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저 놈들의 손에 곱게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네 놈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무려 열둘이나 달려들어 한 사람을 죽이
려 하다니 그런 망신스런 일이 어디 있느냐?'
여섯 쌍의 거무칙칙한 손바닥이 다시 구양봉의 등판에 겨누어졌다.
"손을 멈춰라!"
이때 웬 사나이의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법당 안을 울렸다.
"철장방 사람들이 이게 무슨 짓인가? 여럿이 한 사람을 치다니?"
그 사나이는 훌쩍 날아오더니 동에 번쩍 서에 뻔적 하면서 여섯 사내를 몽땅 물리쳤다. 바로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이었다.
철장방의 한 사내가 말을 건넸다.
"구천인, 우리 말을 들어 보게. 자네가 우리 철장방의 원수인 저 구양봉 놈을 죽여 버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네를 방주로 추대할 걸세."
구천인이 정색하고 꾸짖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선배들인 데 어쩌면 이 지경으로 후안무치할 수 있소? 열들이 하나를 에워싸고 싸웠으니 철장방의 명성은 말 그대로 일락천장이 된 셈이오! 실로 강호의 영웅들이 비웃을 일이오!"
"허이 참,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공연한 근심이 아닌가? 방주로 추대할 테니 어서 손이나 쓰라구."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구천인, 우린 모두 철장방 사람들일세. 필 사숙은 죽었고 우리들 중 방주가 되고픈 사람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자네가 우리를 도와만 준다면 틀림없이 방주로 추대할 걸세. 사내 대장부는 꼭 약속을 지키는 법이니까."
구천인은 슬그머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구양봉과 철장방 패들을 번갈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이때 느닷없이 한 여인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여인은 키드득 웃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봐, 저 사내는 왜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할까? 우리도 저 사내들과 한 집안 사람인가 뭐? 정말 우스워 죽겠네, 호호호……"
맞장구를 치는 다른 여인의 소리도 들려 왔다.
"그래도 여기에 우리 집안 사람이 있네요. 저봐요, 구양 장주님을요. 몹시 지친 것 같으니 우리 함께 도와줍시다!"
여인들이 주절대는 소리를 듣고 철장방의 사내가 소리쳤다.
"누구얏? 냉큼 나오지 못할까?"
"이 참, 우리더러 나오라네? 같이 나갈까?"
한 여인의 말에 다른 여인이 대답했다.
"나가고말고.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저 사내들은 우리를 볼 수 없잖아!"
이때 또 한 여인이 캐들캐들 웃으며 쑥덕거렸다.
"너는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이지만 이 애는 장주님께 꼭 보여야 해. 장주님을 못 보면 빌빌 우는 애니깐."
그 바람에 왁자그르 웃음이 터졌다. 왈가닥스러운 여자들의 경망스러운 웃음 소리였다. 아마 여남은 명은 족히 될 듯싶었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구양봉을 죽이려고 했는데 난데없는 여인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저 여인들이 떠들고 다니는 날에는 철장방의 큰 수치가 아닌가?
철장방의 사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누구얏? 어서 나오지 못할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한 명의 여인들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대체 웬 여인들일까? 철장방 사내들은 강호에서 몇십 년 간을 떠돌아다니면서도 한번에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생김새는 조금씩 달라도 모두 그림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늘씬한 몸매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들은 미끄러지듯 걸어와 사내들 앞에 섰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거위털 같은 횐 치마를 입었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들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모란꽃을 방불케 했다. 어떤 여인은 교태를 머금었고 어떤 여인은 살짝 볼우물을 만들며 추파를 던지는 듯싶고 또 어떤 여인은 공연히 키득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녀들을 보자 속으로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이 여인들은 모두 무공을 갖추고 있었다. 그네들은 밤에 사내를 다루는 재주도 재주지만 무공에도 막힘이 없었으므로 한다 하는 사내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청루의 기녀였거나 떠돌아다니는 여인들이었는데, 보고 겪은 것이 많다 보니 남성들의 세계도 손금 보듯 했다. 그녀들의 두목은 허청청이라는 자그마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철장방 사내들은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한 여인들을 보고 은근히 코웃음을 쳤다.
'흥, 한 떼의 용사들이 들이닥치는가 했더니 치마를 두른 계집년들이구나. 계집년들이 야 사내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몸을 파는 재주가 있을지는 몰라도 주먹질에야 무슨 재주가 있을라구. 저 애호박처럼 애리애리한 계집들이 무슨 싸움을 한다고 그래? 좌우간 구양봉이란 놈을 잡아죽이고 나서 저 년들까지 말끔히 잡아 족쳐야지.'
사내들 중 하나가 으름장을 놓았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썩 꺼져 버려. 여기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청청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철장방사내들은 청청의 요염한 자태에 현기증 나는 유혹을 느꼈다. 한 사내가 시치미를 뚝 떼며 소리쳤다.
"네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여길 나가라!"
그러자 청청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 드릴까요? 나는 강남의 명기 허청청이에요. 강남의 이름난 술집이나 기생집에서는 내 명성이 쩌르르해서 사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죠. 어떤 사내들이 찾아왔는지 알아요?"
철장방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자 청청이 말을 이었다.
"참 둔하시네요. 이름난 왕공 귀족이 아니면 큰 장사치와 강호의 호걸들이었죠. 그 어른들이 찾아오면 내가 뭘 부탁하는지 아세요?"
철장방 사내들은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 눈만 껌뻑거렸다. 허청청이 깔깔 웃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른들이 오면 우선 맘껏 놀게 하지요. 그러고 나면 자연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마련이지요……."
사내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청청이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속살거렸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다 말하지요, 뭐. 그 양반들은 자리를 뜰 때마다 무예 한 가지씩을 가르쳐 줬거든요."
허청청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손을 쭉 뻗쳐 사나이의 등허리를 움켜쥐었다. 사나이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혈은 그녀의 향긋한 손에 잡히고 말았다.
"장주님, 이 놈을 어떻게 할까요?"
허청청이 묻자 그녀의 솜씨를 잘 알고 있는 구양봉이 대답했다.
"죽여라!"
허청청이 내력을 발하니 철장방 사나이는 두 눈을 흡뜬 채 피를 왈칵왈칵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임일천에게 잡혀 들어와 백타산의 '금옥'에 갇힌 뒤 날마다 할 일이 없는 터라 무예를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녀들은 매일 틈만 나면 새장 같은 다락방에서 무예를 닦았는데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다. 언제든 반드시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늘 구양 장주가 밤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자 하녀 가노에게 물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데, 드디어 그 동안 닦아 온 무예를 써먹게 된 셈이다.
가노는 구양봉이 부인을 쫓아갔다고 했다. 여인들은 모용쟁이 구양봉의 형수인 줄만 알았지 둘 사이의 말 못할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남자가 여자를 쫓아갔다니 무슨 구경거리나 있을까 하여 희희낙락 찾아 나섰던 것이다.
여인들이 나타나 곤경에 빠진 구양봉을 구하자 구천인은 구양봉의 편을 들기로 작심했다.
"저 놈들이 당신네 장주의 형수와 아기를 죽였는데 죽여 버리지 않고 가만 놓아둘 참이오?"
구천인의 말을 듣고 철장방 패거리들은 분해서 펄펄 뛰었다. 그들은 구천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반역자 운운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에 구천인도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너희들은 뭐냐? 네 놈들은 한 동아리가 돼서 날 죽이려고 날뛰지 않았느냐? 내 오늘 네 놈들과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범같이 달려나가 세 사숙과 맞붙었다.
청청은 측은한 눈길로 구양봉을 보면서 물었다.
"장주님 , 괜찮으신지요?"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몽땅 죽여 버려! 죽여 버려!"
여인들의 마음이란 더 지독한 법이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오랫동안 백타산장에 갇혀 있던 터라 팔다리가 근질근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여인들은 좋은 기회를 만난 듯이 제법 폼을 잡으며 사내들에게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칼이 번쩍이고 장이 번개같이 오갔다. 여인들의 자그마한 주먹에 맞은 사내들이 '어이쿠, 어이쿠'연신 비명을 질러 댔다.
한쪽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사내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구양봉을 대적하던 여섯 명의 사내들 중 한 명이라도 죽는 날이면 육합전이 흐트러져 더는 구양봉의 신공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다급해진 그들은 얼른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면서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녀들은 강호의 사나이들과의 싸움은 처음이고 또 그녀들 중에서 피를 보는 혈전을 겪어 본 것은 청청과 뚱보 여인 둘 뿐이었다. 두 여인은 대장이라도 된 듯이 "쳐라, 죽여라!"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여인들을 지휘했다. 여인들은 사내들에게 악착스럽게 달려들어 주먹을 안기면서도 키득키득 웃으면서 까불어댔
다. 여인들이 허점을 보여 뒤로 몰릴 때면 허청청과 뚱보 여인이 번개같이 뛰쳐나가 달려드는 사내들을 물리치곤 했다. 싸움은 도무지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한쪽에 물러서서 싸움을 구경하던 구천인은 혼자 생각을 굴렸다.
'철장방 쪽에서 저 극악스러운 여인들을 당해 낼 성싶지가 않군. 저 사숙이나 사숙조란 작자들이 나를 못살게 굴었으니 점잔 뺄 것 없이 이 기회에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자. 그러면 내가 철장방 방주가 되는 일에 감히 막아 나설 자가 어디 있겠는가.'
구천인은 결단을 내리자 벼락같이 손을 써서 한 사내의 등판에 늘씬하도록 강타를 안겼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왈칵 피를 토하더니 구천인을 돌아보며 간신히 내뱉었다.
"구천인, 이, 이 놈아…… 참 지독하구나……."
사내는 말을 맺지 못하고 고목나무 쓰러지듯 뒤로 벌렁 자빠졌다.
청청은 구천인이 장승 같은 사내를 일 장에 쓰러눕히는 것을 보고 좋아서 깡충 뛰었다.
"호호, 참 멋들어지네요!"
청청이 구천인을 보고 방긋 웃었다. 순간 구천인은 청청의 아리따운 미모에 넋을 뺏기고 말았다.
이제 여인들과 대결하는 자들은 넷밖에 남지 않았다. 네 놈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세가 기운 것을 깨닫고 물러서려 했으나 여인들이 호락호락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시퍼런 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내리치고 내지르는 데는 누구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구천인은 꺽다리 사내를 때려눕히고 나서 또 번개같이 달려들어 다른 한 사내의 어깨에 드세게 일 장을 안겼다. 한창 허청청과 맞붙어 싸우고 있던 그 사내는 난데없이 날아오는 구천인의 장에 맞아 푹 고꾸라졌다. 설상가상으로 한 여인이 그자의 옆구리에 깊숙이 검을 박았다.
이젠 세 놈만이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흘끔 흘끔 쳐다보면서 도망칠 틈을 노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청청이 외쳤다.
"너희 세 놈은 스스로 자기를 결박하고 투항해라. 차차 장주님의 기분이 돌아서면 자비심을 베풀어서 놓아 주실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세 사나이는 고함을 지르면서 일시에 청청에게 덮쳐들었다.
한꺼번에 덮쳐들면 그녀가 비켜서리라는 계산하에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날렵한 청청은 틈을 주지 않고 검을 살짝 들이댔다. 덮쳐 들던 한 놈이 뱃가죽이 찢겨져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덮쳐 들던 다른 두 놈은 얼결에 방향을 바꿔 한 놈은 구천인 앞으로 밀려갔고 다른 한 놈은 여인들 속으로 들어갔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청청이 놀라서 소리쳤다.
"좋다, 네가 사람을 죽였단 말이지?"
청청이 매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릿발 같은 검이 춤을 추는 듯싶었다.
구천인도 가볍게 몸을 날리면서 틈을 노렸다. 그의 경공을 일컬어 수상표(水上飄)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수면을 차고 솟구치는 물새와 같이 날렵했다. 구천인은 틈을 노려 번개같이 장을 내질렀다. 놈이 일 장을 얻어맞고 비틀대는데 어느새 시퍼런 검이 번쩍하더니 머리통을 수박 쪼개듯 쪼갰다. 뜨겁고 비릿한 피가 사방에 뿜어졌다. 한 여인이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더니 검을 떨어뜨
리고 얼굴을 싸쥐었다.
구천인이 다시 주먹을 날려 다른 한 놈을 꺼꾸러뜨리자 청청이 사납게 검을 내질러 그 놈의 몸뚱이에 맞구멍을 뚫었다.
여인들과 싸우던 자들은 이제 다 꺼꾸러졌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구양봉이 여섯 놈을 상대로 내력을 겨루고 있었다.
구양봉의 얼굴에서는 굵직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고 머리에서는 솥뚜껑을 열어젖힌 듯 김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주선 여섯 명의 사내들도 땀투성이가 되어 씩씩거리고 있었다. 놈들은 한쪽에서 싸우던 패거리가 다 죽고 자기들 뒤에 여자들이 몰려오자 형세가 기울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구양봉이 놓아줄 리 만무했으므로 죽기살기로 버티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허청청이 구양봉에게 말을 건넸다.
"장주님, 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 놈들하고 내력을 겨를 게 뭐 있나요? 그 내력은 남겨 두었다가 우리 여인들하고 놀 때나 쓰세요."
구양봉은 허청청에게 눈을 흘겼다. 청청은 무안을 당하자 혀를 쏙 내밀었다. 평소에 구양봉이 무섭게 다루었으므로 그녀들은 구양봉의 말이라면 설설 기었다.
여인들은 바삐 달려가 모용쟁을 부축해 앉힌다, 아기를 안는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모용쟁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아이만은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다.
청청은 구양봉이 모용쟁과 아이를 걱정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되돌아가 알려 주었다.
"장주님, 안심하체요. 애기 엄마는 상처를 입었을 뿐이고 애기는 아무 일 없어요."
구양봉은 될 듯이 기뻤다. 아들과 모용쟁이 비참하게 죽은 줄만 알았는데 둘 다 살아 있다니 세상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기운이 솟구치며 온몸에 힘이 뻗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내 손에 한번 죽어 봐라!"
그는 큰소리로 외치며 어깨에 힘을 넣어 사내들을 떼밀었다. 사내들은 저만치 벌렁 나가자빠졌다.
사실 구양봉도 어지간히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 모용쟁과 아이가 살아 있다는 말에 불끈 힘이 솟아 여섯 사내를 거뜬히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들은 벽에 머리를 찧었지만 구양봉의 기력이 약한 상태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허청청을 보고 재촉했다.
"어서, 어서 아이를 보자꾸나."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백타산장의 사람들도 구양봉과 모용쟁의 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백타산장에서는 구양봉과 모용쟁은 시동생과 형수 사이이며 모용쟁의 남편은 구양적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구양봉이 아이를 그토록 귀여워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끌끌 羨다. 저렇게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며
여자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녀들은 이 아이가 구양봉의 친아들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이 아기를 얼싸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극아, 극아, 너는 우리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고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이다. 앞으로 너는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너를 당할 자는 세상에 없을 거다!"
허청청이 구양봉에게 물었다.
"장주님, 철장방의 놈들을 어떻게 처치할까요?"
여섯 명의 철장방 사내들은 땅에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중 상처를 입은 두어 놈은 멀뚱멀뚱 구양봉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놈들은 죽여도 아깝지 않으니까 모조리 죽여 버려라!"
구양봉이 한마디 내뱉자 청청은 여인들을 데리고 놈들에게 덮쳐 들었다. 여인들은 칼과 검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눈깜짝할 새에 놈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로세로 쓰러졌다. 그 중 둘이 뻗치고 일어나 여인들에게 달려 들었으나 다시 꺼꾸러졌다. 두 놈은 죽어 가면서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
"구양봉, 이 천하에 없는 독종아! 암캐 같은 계집들이 우글거리는 백타산장에서 맘껏 잘살거라, 이제 천벌을 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구양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들을 안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얘야, 사나이가 되려면 이 애비 같은 사나이가 돼야 한다. 남의 군소리를 듣거나 강호의 의리를 지키는 따위는 헌신짝처럼 던지고 자기의 주관대로 살아야 해! '
구양봉은 침울한 기색으로 아이를 안고 모용쟁에게로 다가갔다. 모용쟁은 오른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있었다. 얼굴은 핏기라고는 없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을 풀고 제대로 뒷수습을 못한 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더군다나 억센 사내의 주먹에 가슴팍을 맞았으니 죽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 모용쟁을 처음 만나서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양봉은 그만 설움을 참지 못하고 모용쟁을 흔들었다.
"형수님! 형수님……."
하지만 모용쟁은 여전히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구양봉이 모용쟁의 콧구멍에 손을 대 보니 다행히도 숨은 멎지 않았다. 구양봉은 철장방 놈들이 새삼스럽게 미워졌다.
'망할 놈의 자식들, 네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다!'
구양봉은 천천히 일어나 철장방 사내들에게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반병신이 된 놈들을 둘러보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두 다리가 부러진 사내가 일어나 앉으며 욕을 퍼부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은 우리 철장방의 기둥 같은 사내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렸다. 나는 저승에 가서라도 네 놈을 잡아 갈갈이 찢어 죽일 테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주먹으로 자기의 머리를 쳐서 자결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그를 떠나 다른 놈들 앞으로 다가갔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죽음을 초개같이 안다니까 시원히 죽여 주도록 하마!"
그는 한 팔에 아이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을 펴서 앉아 있는 사내들의 면상에 차례로 장력을 발산했다. 사내들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나동그라졌다.
무너진 법당 안에는 구양봉 가족과 백타산장의 열 명 여인들, 그리고 구천인만이 남게 되었다. 구양봉은 구천인을 뚫어지게 쏘아 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왜 나를 도왔는가!"
구천인이 쌀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을 도운 게 아니라 내 스스로를 도운 것이오. 나 자신을 구한 거란 말이오."
구양봉이 빙긋 웃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철장방의 신임 방주가 밉지 않았다. 이 놈팽이들이 살아서 돌아갔더라면 구천인은 방주가 되기는커녕 목숨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양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구천인, 자네가 보다시피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들 열여덟이 이 구양봉의 손에 죽었네. 만약 복수할 마음이 있다면 아마도 오늘 밤이 제일 좋을 것 같으니 한번 손을 써 보라구."
구천인은 휑뎅그렁한 법당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시체를 둘러보며 몸서리쳤다. 평소에 검술을 익히고 장법을 연마하던 때와는 판판 달랐다. 구천인은 내색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구양봉 어른, 아직 당신을 죽일 때가 아닌가 하오. 그건 그렇고, 방주님께서 모용 아가씨를 잘 보살펴 드리라고 당부하셨건만 제가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방주님의 부탁을 저버린 셈이라 하겠소. 당신에게도 신세를 졌소. 이 철장방 사나이들은 비록 나의 선배들이라고는 하지만 이 신임 방주의 명을 거역하고 반역을 꾀했으니 주살을 당하여 마땅하고 하나도 아까울 게 없소."
구양봉은 구천인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풀렸으나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구천인도 더는 말하지 않고 장작더미로 가더니 상관위의 유체에 삼배를 하였다.
"사부님, 사숙과 사숙조님들은 모두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 말 그대로 자업자득이지요. 장차 철장방도 중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천인은 말을 마치고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구천인은 상관위의 유체를 깨끗이 태운 뒤 골회 몇 개를 주워 들고 죽은 사내들 중 한 사람의 옷자락을 찢어 내어 골회를 싸 들고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 버렸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용쟁을 내려다보노라니 그래도 제일 사랑했던 여인은 다름 아닌 모용쟁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비록 그녀의 눈이 멀었을망정 자기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모용쟁의 머리카락은 식은땀에 젖어 촉촉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몸뚱이와 살결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졌다. 사막에 있을 때 모용쟁은 구양봉을 묶어 놓고 모래 벼락을 안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그의 품에 안겼고 사막의 네 .호걸의 청을 거절해 버렸다. 그때 황막한 사막에는 모용쟁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낭만의 사막은 과거 속으로
흘러가 버리고, 구양봉의 무릎 위에는 인사불성이 된 모용쟁이 초췌한 얼굴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구양봉은 아이를 청청에게 안겨 주고 모용쟁의 두 어깨를 애타게 잡아 흔들었다.
"정신 좀 차리구려 모용쟁, 눈을 좀 떠 봐요……."
구양봉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더니 모용쟁을 안아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두 다리를 가지런히 펴놓았다. 그는 두 손을 모용쟁의 어깨 위에 얹고 손바닥으로 어깨에 있는 정대혈(莽大穴)을 지그시 누르면서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내력을 넣어 주면서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임자의 말대로 하겠소. 정말이오. 착한 사람이 되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겠소. 어쨌든 그 놈들은 나는 물론이고 임자나 극이를 죽일 수는 없었어. 내가 있는데 그 놈들이 감히 범접이나 할 수 있었겠소?"
구양봉은 모용쟁을 살려내려고 자기의 모든 내력을 모용쟁의 몸에 불어넣었다. 철장방 패거리들과 밤새도록 악전고투하다 보니 별로 내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자기를 돌볼 계제가 아니었다. 사실 기진맥진해서 내력이 약하기에 망정이지, 평소 정력이 왕성할 때의 내력을 불어 넣었다면 오히려 모용쟁이 견뎌 차지를 못했을 것이다.
한식경이나 지나서 모용쟁이 가냘프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는 무엇을 찾는지 이리저리 앞을 더듬더니 애타게 소리쳤다.
"아기는? 아기는요? 내 아기는요?"
구양봉이 눈짓하자 청청이 아이를 안고 왔다.
모용쟁은 여인의 향내를 맡더니 화들짝 놀랐다.
"이 여잔 누구예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급히 구양봉을 찾았다.
구양봉이 얼른 두 손을 잡아 주었다.
"여기 있소."
그러자 모용쟁이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아기를 다른 여인에게 맡겨서는 안 돼요. 저의 몸종이 아니면 당신이 꼭 데리고 있어야 해요. 알겠나요?"
"알았소. 그렇게 하겠소."
구양봉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은 그녀의 푹 꺼진 두 눈을 보노라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모용쟁이 눈을 잃게 된 것도 다 내 탓이야. 모용쟁은 천하에 드문 미인이었는데,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야.'
구양봉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모용쟁을 덥석 끌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
모용쟁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긴 왜 울어요? 진심으로 우는 건가요, 네?"
구양봉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결도 옛날의 윤기가 돌던 그 머리가 아니었다. 구양봉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임자의 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소. 이 구양봉이 보기 싫어서 떠나려는 거지.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하겠소?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안 되겠소? 아이와 함께 백타산장에서 살구려. 내 절대로 방해하지 않고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리다. 임자는 극이를 데리고 뜰에서 하루 종일 놀구, 난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만족하겠소. 철장방에는 절대로 가지 마오. 그 놈들은 나쁜 놈들이니까. 그 놈
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오. 알아듣겠소?"
모용쟁은 구양봉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저는 사막에 있을 때부터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요? 아무튼 저는 철장방에는 가지 않을 거예요. 이봐요, 이렇게 맥도 못 추는데 어딜 가겠어요?"
그녀는 잠간 망설이는 기색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줘야 해요……."
"들어주고말고. 말만 하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소."
구양봉이 큰소리를 치자 모용쟁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극이에게 그 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절대 알려서는 안 돼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애를 조카라고만 불러 줘요. 알겠어요?"
구양봉은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왜 내가 그 애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 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단 말이오? 그 앤 내 친아들이고 임자가 또 그렇게 고생해서 낳았는데, 왜 이 모든 것을 숨겨야 한단 말이오?"
모용쟁은 풀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입가에 한 가닥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애에게 다 알려 준다면, 그 애가 당신 형님과 백면라살 사이의 일이나 저와 당신 사이의 일을 어떻게 보겠어요?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을 거예요.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 말에 구양봉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아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오늘부터 그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가 아니라, 극이를 지켜 주고 극이를 훌륭하게 키워 내야 할 커다란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구양봉은 모용쟁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다짐했다.
"마음놓으시오. 내 평생 그 말을 극이에게 하지 않으리다."
허물어진 벽 사이로 훤한 빛이 들어왔다. 먼지들이 서늘한 아침 바람에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상관위의 시체를 태운 자리에서는 그을음내가 고약하게 풍기고 법당 안 여기저기는 온통 핏자국으로 실로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구양봉의 품에 안긴 모용쟁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손을 만져 보니 역시 얼음장처럼 싸늘해지고 있었다. 구양봉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모용쟁같이 착한 여자를 이렇게 죽게 하다니! 정녕 착한 이는 명이 짧단 말인가요? 만약 하늘이 굽어살펴 모용쟁이 살 수만 있다면 이 구양봉은 다시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구양봉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모용쟁은 점잠 숨이 잦아 갔다.
구양봉은 홱 고개를 돌려 어지러이 널려 있는 철장방 사내들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네깟 놈들 목숨은 백이고 천이고 내 사랑하는 한 여인의 목숨에 비길 수 없어.'
구양봉은 모용쟁을 안고 밖으로 나가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우리 집으로! 나는 기어코 합마신공과 봉황력 경공을 연마해서 5년 후에 화산에 갈 거요. 거기서 왕중양, 단지흥, 황약사, 그리고 홍칠 같은 놈들과 자웅을 겨룰 거요. 그때 가면 천하 무공의 제일인자가 이 구양봉이라는 것이 판명날 것이오!"
청청과 아홉 여인은 벌써부터 밖으로 나와 백타산장의 장주 구양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청은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 구양극을 안고 얼르면서 생각했다.
'저 모용쟁이란 여자는 허구한 날 사흘 굶은 시에미 상을 해 가지고 바락바락 역정만 내더니 아들 하나는 잘도 낳아 놓았군. 뽀얗고 토실토실한 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네? 세상에 별 신기한 일도 다 있지. 호호…… 아무튼 모용쟁이 죽었으니 우리 지자루의 여인들은 살판이 났어. 저 구양봉처럼 시원시원한 호남아는 그리 흔치 않거든. 이젠 톡톡히 재미볼 일만 남았구나.'
구양봉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마치 청청 일행이 보이지도 않는 듯 모용쟁을 안고 성큼성큼 지나쳐 갔다. 그것은 언젠가 신혼의 밤을 즐기려고 모용쟁을 안고 백타산 위의 석굴로 들어가던 모습과 흡사했다.
―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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