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화산논검2부 동사 황약사 1 김용

一字師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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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화산논검2부 동사 황약사 1 김용

 

                                           图片来源 | 【华山论剑西凤酒·澳洲金地红酒带您领略"壹号之美"】观乾..

 

제1장 한 여인의 죽음

집채 같은 파도에 뒤척이는 돛대

복숭아나무 그늘 밑에 웃음꽃 피네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내 사랑과 더불어 바다에서 살으리

바람 자고 새날이 밝으면

푸르른 바다가 우리를 반기리니

퉁소를 불며 통쾌히 놀아 보세!

이는 대송(大宋)의 유명한 시인인 엽몽득(葉夢得)의 시 〈점강순, 을묘년에 소흥의 아름다운 정자에서 노닐며〉이다. 이 시에는 대송 당시 한 기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기인은 황약사(黃藥師)라고 부르는데 문장과 무예가 모두 뛰어나 만약 벼슬길에 올랐으면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위인이었으나 벼슬길을 외면하고 황막한 섬에 외롭게 숨어 살고 있었다. 성미가 도고하고도 괴팍스러운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동사(東邪)', 즉 동해의 사악한 사나이라 불렀다. 위의 시에는 바로 이 동사 황약사와 그의 아내 풍아형(馮阿衡)과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임안(臨安)은 대송의 도읍지라 인가가 많고 물자가 풍부하여 무척 번화한 곳이다. 대로 양쪽에는 저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여기저기에서 싸구려를 불러대며 북새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흥청거리면서 오가는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갖가지 물건들에서 대송의 천자(天子)가 사는 도읍지다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길 저쪽에서 훤칠한 키의 한 서생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상투를 틀어 옥비녀를 꽃은 서생의 얼굴은 말 그대로 관옥 같고 풍채는 한 집단의 두목 같다. 서생은 연한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좌우 양쪽에는 옥환이 매달려 있고 한 손에는 옥소(玉蕭)가 쥐여져 있다. 상등 옥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소는 반들반들 윤기가 돌아 유난히 돋보인다.

그는 바로 무예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강호의 호걸 황약사였다.

황약사가 늘정늘정 걸어오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것 봐요, 옥녀가 나오네요!"

황약사는 고개를 들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길 복판에는 울긋불긋한 꽃무늬가 새겨진 예쁘장한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곱게 단장한 한 처녀가 막 걸어 나오는 참이었다. 달덩이같이 복성스러운 얼굴에 유난히 윤기가 도는 머리를 한 그녀는 진주알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가마를 둘러선 길손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길손들은 혹시 그녀가 자기를 보지 않나 해

서 공연히 가슴을 두근거렸다.

옥녀는 '결우헌(結雨軒)'이라고 하는 꽃배〔花船〕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 꽃배는 이름난 기생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황약사는 딱히 할 일도 없는지라 결우헌 안으로 휘적휘적 따라 들어갔다.

응접실 안은 한창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길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여러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서른 살 남짓한 뚱보 여인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뚱보 여인은 마주앉은 사내를 건너다보며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뚱보 여인과 마주앉은 사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해골같이 창백한 얼굴은 텁수룩하고 엄청나게 긴 머리칼에 거의 덮여 있다시피 했는데 음침하게 껌벅거리는 눈만 아니라면 틀림없이 앉아 있는 송장이었다. 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의 옆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 입은 귀공자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한복판에 앉아 있던 뚱보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옥녀가 저의 결우헌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렀군요. 열 살에 들어와 열두 살에 손님을 맞기 시작했으니까 지금까지 옥녀가 섬긴 대감님과 공자님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을 거예요. 저의 결우헌의 명성이 이만한 것도 순전히 옥녀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옥녀가 좋은 배필을 만나 시집을 가고파 하니 저로서도 붙잡아 둘 수만은 없군요.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 가운데 어느 분

이든지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돈만 내세요. 그러면 누구라도 옥녀를 데려다가 아내나 소실로 삼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옥녀의 소원이랍니다. "

뚱보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황약사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망할 놈의 기생어미 같으니! 옥녀를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는 돈 있는 장사치나 귀공자에게 팔아먹으려는 수작 아닌가! '

옥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길다란 손가락만 애꿎게 매만지고 있었다. 그 무심한 표정으로 봐서는 그녀가 속으로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팽팽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한결 이목을 끌었다. 기생집에서 뭇사내들의 시달림을 받아 온 여인치고는 너무나 청초하고 탄력 있는 몸매였다.

희멀건하게 생긴 웬 왕갓집 도령이 턱을 쳐들며 말했다.

"좋소, 내가 은 3천 냥에 옥녀를 데려가겠소! "

그러자 장사치로 보이는 절구통처럼 뚱뚱한 사내가 썩 나서며 외쳤다.

"4천 냥!"

그는 축 늘어진 매부리코만 보아도 여자라 하면 오금을 못쓰는 색마 같았다.

귀공자와 장사치가 입을 열자 좌중은 너도나도 질세라 외쳐 대기 시작했다.

"7천 냥이오! "

"8천 냥이오!"

눈 깜짝할 사이에 옥녀의 몸값은 9천 냥으로 뛰어올랐다. 9천냥이면 대궐 같은 기와집 한 채는 너끈히 살 만한 돈이었다. 기생집에서 밀려나는 계집을 사는 데는 그 반값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옥녀는 워낙 이름난 기생인지라 눈독을 들이고 달려드는 자가 너무 많았다.

문어귀에 서 있던 사내들은 황약사도 옥녀를 욕심내고 찾아온 손님인 줄 알고 점잖게 읍을 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황약사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내주는 자리에 앉아 사내들의 하는 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좌중이 서로 값을 올리면서 티격태격하는 중에 누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열 말을 내리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바로 산발을 한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눈을 감은 채 좌중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기생어미가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무엇을 열 말 내시겠다는 거죠 ?"

진주 열 말이오!"

사나이는 나직이 대꾸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하인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상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보물이었다. 두 하인은 상자를 내려놓더니 탁자 위에 까만 비단을 펴고 나서 뚜껑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자를 여는 순간 좌중의 눈이 모두 휘둥그래졌다. 상자 가득 넘치는 오색 찬란한 진주로 온 방안은 금세 무지개가 걸린 듯하였다.

이어서 두 하인은 펼쳐 놓은 비단 위에 진주를 쏟아 골고루 펴놓았다. 좌중들은 하나같이 금붙이나 보석을 가려내는 데는 귀신 같은 사람들로 한눈에 보통 진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주는 조개의 살 속에서 오랜 세월을 통해 자라나는 것인데, 근래에는 진주를 따는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따내는 바람에 완전히 여문 진주는 매우 귀했다. 그런데 이 사나이가 가져온 진주는 한 알 한 알 완벽하게 여문 것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좌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서로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생어미는 한 무더기 번쩍이는 진주를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험상궂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아니, 이 열 말이나 되는 진주로…… 정말, 정말 옥녀하고 바꾸겠다는 말씀이시우……?"

기생어미의 놀라 되묻는 말에 사나이는 집이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이 미녀를 차지하는데 진주 열 말 정도야 아까울 것 없지."

그의 통쾌한 대답에 좌중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내질렀다.

좌중은 험상궂은 사내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예쁜 계집이라 해도 구슬을 열 말이나 주고 데려가다니 쓸개 빠진 짓이 아닌가. 그 중에서 100여 알만 골라 진주목걸이 두어 개만 만들어도 만 냥은 족히 받을 텐데, 만 냥이면 옥녀 같은 계집을 사고도 남을 것이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옥녀에게로 걸어가 읍을 했다.

"아가씨, 나와 함께 갑시다."

옥녀 역시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사나이는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한 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황약사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솜씨가 보통 민첩한 게 아닌데 ? 무예가 뛰어난 놈임에 틀림없어. 한데 저 놈이 왜 옥녀를 사갈까? 데려다가 여종으로 부릴 셈인가, 아니면 아내로 삼을 셈인가?'

기생어미는 험상궂은 사나이를 급히 뒤따라 가면서 물었다.

"존함이라도 알려 주시지요, 네?"

"소인이라고 하네."

사내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소인(巢人)이란 깊은 산속의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巢)와 조(舊)가 한자로 음이 같으므로 좌중은 그 사나이를 조씨로 간주했다.

옥녀를 데리고 마차에 오른 소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성밖으로 빠져 나갔다.

어정어정 뒤따라 나오던 황약사는 급히 떠나가는 마차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주 열 말이나 주고 옥녀를 사가는 그가 암만해도 수상했다.

그는 마차의 뒤를 따라 성밖으로 나왔다.

마차는 질풍같이 달려 저물녘에야 한 호숫가에 다다랐다. 호젓한 호숫가는 은은한 달빛에 싸여 한결 아름다웠다. 마차 위에서 세 그림자가 차례로 내렸다. 소인과 마차를 몬 소년, 그리고 옥녀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세 사람은 서둘러 불을 지펴 놓고 그 주위를 깨끗이 치웠다. 일을 마치자 소년과 옥녀는 한쪽에 물러가서 각기 두 손을 합장하고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이때였다. 소인이 마차에서 사람 하나를 번쩍 안아 내렸다. 다름아닌 옥녀였다. 한쪽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있는 여자는 옥녀처럼 곱상스럽게 생긴 아가씨였지만 사실은 옥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인은 옥녀를 땅에 내려놓고 부축해 앉히며 말했다.

"옥녀,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팔려 다니니 어떻게 살겠소?"

그 말에 옥녀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뭇사내들의 싱거운 평판과 얼빠진 흥정에 놀아나다가 끝내는 사람 같지도 않은 험상궂은 장발의 사내에게 팔려 오다니 이런 사나운 팔자가 어디 있나 싶었다.

소인은 두 손으로 옥녀의 머릿수건을 벗기고 비녀를 뽑아 들더니 휙 던져 버렸다.

"이런 걸 비녀라구! 내일 멋진 것으로 하나 사주지."

비녀는 쌩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니 호수로 풍덩 떨어졌다.

소인은 이번에는 두 손으로 옥녀의 귀걸이를 떼어 내더니 휙 하고 호수에 던져 버렸다. 잠깐 사이에 옥녀의 머리에 있던 장신구들이 모조리 없어졌다.

'이 사내는 대단한 부잔가 봐, 나의 장신구들이 초라하게 보이니까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려고 떼어 던지는 모양인데…… 하지만 10년이나 아글타글 벌어서 갖춘 것들을 주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저렇게 버려 버리다니…….'

옥녀는 속으로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단 한마디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소인은 또 손을 확 뻗쳐 들었다. 가죽만을 씌워 놓은 것 같은 손가락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소인은 손가락을 이용해서 옥녀의 윤기 도는 머리칼을 등뒤로 벗어 넘기기 시작했다.

소인이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매일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 주겠어. 좋겠지?"

옥녀는 사나이의 얼음장같이 차디찬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런 손으로 매일 머리를 빗겨 주겠다니 실로 소름이 끼칠 일이었다. 하지만 옥녀는 감히 싫다는 말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인은 게슴츠레한 눈을 껌벅거리다가 옥녀의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玉桃穴)에 손을 대더니 불현듯 힘을 주었다. 옥녀는 눈앞이 가물가물해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조용히 쓰러지고 말았다.

소인은 옥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옥녀의 길다란 속옷 자락이 그녀의 몸뚱이에 깔려 벗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소인은 옥녀의 속옷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손톱으로 쭉 내리그었다. 속옷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알몸이 달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소인은 한동안 옥녀의 나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며 어깨며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옥녀의 몸뚱어리는 백옥같이 희고 부드러웠다. 또한 여러 해나 기생집에서 시달림을 당한 여자로서는 그 젖가슴이 너무도 풍만하고 팽팽했다. 소인은 옥녀의 두 젖가슴을 움켜쥐고 마구 주무르면서 히죽거렸다.

"어허, 이 년의 젖무덤이 이토록 탐스러우니 내 내력을 기르기에 제격인걸!"

소인의 앙상하고 차디찬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옥녀의 몸뚱어리는 움찔움찔 떨곤 했다.

이 광경을 멀리서 훔쳐보고 있던 황약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톡톡히 혼찌검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옥녀가 '결우헌'이란 기생집에서 맞은 손님들 가운데는 저 소인이란 놈보다 훨씬 더 난폭한 색광들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저 놈은 진주를 열 말이나 주고 옥녀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참말로 윤이 찰찰 흐르는 머리로군!"

소인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옥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이번에는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고 탐욕스럽게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눈동자인가! 이 눈동자에 넋을 잃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 으흐흐……"

황약사는 잠자코 소인이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문득 소인이 손을 내리고 옥녀 앞에 마주앉더니 옥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는 한식경이나 까딱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품이 아마도 무슨 공력을 닦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소인은 옥녀의 두 손을 끌어다가 자기의 무릎 위에 울려 놓더니 두 손바닥을 쫙 펴서 옥녀의 통통한 젖가슴에 갖다 댔다.

'저 놈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황약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옥녀에게 내력을 불어넣으려 한다면 가슴이 아닌 어깨를 잡아야 할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옥녀는 응석을 부리듯이 가늘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신음 소리는 마치 남녀간에 운우지정을 나눌 때의 소리 같았다. 옥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침내 사위가 쥐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황약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저 죽일 놈이 가련한 여자의 몸에서 음력을 뽑아 들여 자기의 내력을 기르고 있잖아? 지금 저 놈이 행하고 있는 괴상망측한 사공(邪功)은 강호에서 실전(失傳)된 지 오래인데 어디서 저 비결을 얻었을까?'

소인이 하는 짓이 무엇인가를 뒤늦게 깨달은 황약사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속으로 별렀다.

'남의 몸을 망치고 자기의 힘을 기르려 하다니. 저런 패덕자를 살려 두면 세상에 좋은 일이 없을 테니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좋겠군.'

이때였다. 황약사가 막 뛰어나가려는 참인데 소인이 옥녀에게서 손을 떼고 제법 점잖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난 아가씨를 사왔지만 하룻밤이면 족해. 내일 아침엔 금은을 한 꾸러미 주어서 아가씨가 가고픈 데로 보내 주겠어."

소인은 과연 금은 한 꾸러미를 가져다가 옥녀의 옆에 놓았다.

원래 옥녀는 장사치들 속에 끼여 있던 젊은 귀공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었다. 한데 경매가 시작되자 난데없이 진귀한 진주를 말로 들이대는 이 험상궂은 사내가 나타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험상궂은 사내를 따라오며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날이 밝으면 놓아준다는 소인의 말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풀썩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옥녀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자기가 벌거벗은 알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인은 옥녀의 뒤에 옮겨 앉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옥녀, 단정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그려 보거라."

옥녀는 소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다. 바로 은 3천 냥을 내고 옥녀를 데려가겠다고 맨 처음 소리치던 귀공자였다. 옥녀는 그 귀공자와 함께 '결우헌'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마음껏 즐기던 일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소인은 옥녀의 등줄기로부터 거센 음력이 괴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화냥년 같으니라구. 기생집에서 뭇사내들과 재미를 단단히 본 모양이군.'

그는 속으로 연신 쾌재를 불렀다.

황약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구름 속에서 용이 노닐 듯이 공중운용삼현(空中雲龍三現)으로 번쩍 몸을 솟구쳤다가 소인의 앞에 내려섰다.

소인은 그냥 태연하게 앉아 있는데 호숫가에 앉아 있던 옥녀 비슷한 여인과 마차몰이 소년이 화들짝 놀라 "사불 악귀(邪佛惡鬼)!" 하고 소리치면서 일시에 좌우로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이 두 젊은이를 얼마든지 꺼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옥녀를 구해 내는 일이 급한지라 도화도의 경공보법(輕功步法)으로 살살 피해 가며 곧장 소인에게로 다가갔다.

자칭 사불, 악귀라고 하는 두 젊은 남녀도 만만치는 않았다. 사불이라고 하는 여인은 재빠르게 황약사를 쫓아와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 왔다. 악귀라고 하는 소년 역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황약사의 행동을 방해했다.

두 남녀가 어찌나 극성스럽게 달려드는지 황약사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깐 놈들이 이 어른을 막아서겠다는 게냐?'

황약사는 찰거머리처럼 달려드는 사불과 악귀를 낙영장법(落英掌法)으로 연거푸 갈겨 놓았다. 두 사람은 황약사의 드센 장법을 당해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때였다. 옥녀 쪽에서 애처로운 신음 소리가 연신 들려 왔다.

예기치 않은 사내의 출현에 급급해진 소인이 두 손에 내력을 넣어 더욱 세게 음력을 뽑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옥녀는 별 감각을 못 느꼈으나 소인이 급히 내력을 쓰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며 전신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오장육부가 빠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더럭 겁이 난 옥녀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옥녀는 기진맥진해서 더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멍청히 소인을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에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또다시 한 발 한 발 다가드는 사불과 악귀를 노려 보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짜 맛을 보여 주지 않으면 물러설 놈들이 아니군. 이 두 놈부터 죽여 없애야 옥녀를 구할 수 있겠다.'

순간 황약사의 손이 번쩍 허공을 내지르면서 '탁!' 소리를 냈다. 식지에 감췄던 엄지손가락을 튕긴 것이다. 한 가닥 무서운 바람이 사불의 두 눈을 후려갈겼다.

"악!"

사불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싸쥐고 뒷걸음질을 치더니 더는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약사는 사불을 놓아두고 악귀라고 하는 소년에게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는 조용히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도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물러서거라!"

"내가 겨우 몇 해를 살았다구 죽겠어요?"

소년은 히죽 웃어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더니 한쪽으로 비켜섰다.

황약사가 소인에게로 다가섰다. 소인은 이제 왼손은 내려놓고 오른손만 옥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소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쌀쌀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황약사는 매섭게 노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도 옥녀와 몰래 정을 통하던 양반인가 보군! 하지만 한걸음 늦었어. 내가 먹고 남은 찌꺼기밖에 없으니까."

소인은 음흉한 표정으로 비양거리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황약사는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 옥녀를 살펴보았다. 옥녀는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약사는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옥녀, 옥녀!"

옥녀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약사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소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 놈이 죽였지?"

소인이 흐물흐물 웃으며 대답했다.

"죽이다니? 난 조금도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어. 하지만 날 따르는 계집들은 모두 죽여주기를 바라니 낸들 어쩌겠나? 사실 이 어른이 손을 대기도 전에 계집들 모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야……."

문득 소인은 장발을 날리며 후닥닥 몸을 일으키더니 독수리 발톱같은 두 손을 사납게 펼쳐 들었다.

"싱거운 자식, 남의 일에 웬 참견이냐?"

소인은 짐짓 으름장을 놓으면서 슬그머니 도망칠 틈을 노렸다. 그는 황약사를 보자마자 대번에 그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사불, 악귀와 싸울 때 황약사의 날렵한 장법이나 보법으로 미루어 보아 천하에 드문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황약사는 그가 도망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엄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 세상에 남을 해치면서 공력을 연마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네 놈 같은 흡혈귀는 죽여버려야 하겠다!"

소인은 말없이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불현듯 두 손으로 원을 그리며 황약사를 잡아채려 했다. 음산한 바람이 황약사의 얼굴에 사납게 몰아쳤다. 무림 세계에서 산전 수전을 다 겪은 황약사였으나 가슴이 섬뜩했다. 소인의 쇠갈퀴 같은 두 손은 다시 황약사의 정수리를 향해 뻗쳐 오는 듯 싶더니 돌연 한 손은 가슴팍으로, 한 손은 명치끝으로 날아들었다. 황약사는 소인의 악귀 같은 장법

에 맨주먹으로 맞서다가는 욕을 보기가 십상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번개같이 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는 허리춤에서 재빨리 옥소를 뽑아 들고는 옥소로 소인의 갈퀴 같은 손에 있는 소부(少府), 신문 (神門) 두 대혈을 가리켰다.

황약사가 옥소를 뽑아 들고 달려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소인은 주춤 물러서는 눈치더니 손을 빙글빙글 돌려 장법을 바꾸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소인의 갈퀴 같은 손이 황약사의 얼굴을 쥐어뜯으려 했다. 황약사는 다급히 몸을 피하면서 옥소로 소인의 팔에 있는 천천(天泉), 곡택(曲澤) 두 혈을 가리켰다. 소인은 슬쩍 몸을 피하면서 부드득 이를 갈았다.

'천하에 난다 긴다 하는 녹림의 호걸들도 나의 갈퀴 같은 손이 두 번만 뻗치면 독수리에게 채인 병아리 신세가 되기 마련인데 이 백면서생 같은 놈은 도무지 거머쥘 수가 없구나. 이 놈의 무공이 이토록 정묘하니 나 혼자 힘으로는 당할 재간이 없겠다. '

"여봐라!"

소인은 당장 사불과 악귀를 불렀다.

황약사가 튕긴 손가락에 장님이 되는 줄로만 알았던 사불은 다행히도 시력은 잃지 않았다. 황약사와 소인이 밀고 당기며 무섭게 싸우는 광경을 지켜 보던 사불은 황약사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놈의 자식, 내가 잽싸게 피하지만 않았어도 아마 저 놈의 손가락에 맞아 앞 못 보는 병신이 될 뻔했지 뭐야?'

사불은 소인의 부름에 대뜸 소리질렀다.

"사불―!"

"악귀―!"

소년도 화답했다.

사불과 악귀는 다시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금세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소인은 황약사의 얼굴을 노리고 연신 갈퀴 같은 손을 뻗쳤고 사불은 날쌘 보법으로 달려들어 황약사의 뒤통수와 어깨를 후려치곤 했으며 소년은 얄궂게도 황약사의 사타구니를 겨누고 주먹을 날렸다.

황약사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고약한 놈들, 끝까지 이 어른의 부아를 돋을 셈이냐?'

하지만 세 놈 다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섣부르게 덤볐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소인의 갈퀴 같은 손에 일단 잡히기만 하면 웬만한 사내는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 손은 사람의 손이라기보다 마귀의 손에 가까웠다.

황약사는 옥소를 허리춤에 지르고 경공으로 세 사람 사이를 슬슬 안개처럼 떠다니면서 두 손으로 치고 박고 갈겼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안개를 타고 경쾌하게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 참 멋진데!"

사불은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황약사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소년도 뒤질세라 황약사의 다리에 장과 주먹을 안겼다. 차돌같이 여문 소년의 주먹은 황약사의 혈을 향해 내질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놈들!"

황약사는 무섭게 고함을 지르면서 두 손을 연신 번개같이 움직였다.

10여 합 어우러졌을까? 돌연 황약사의 왼손이 산불의 어깨에 닿는가 싶더니 사불이 휘청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황약사는 그 틈을 타서 성큼 뛰어나가며 다시 한 번 사불의 어깨를 후려쳤다. 힘을 반도 쓰지 않았는데 사불의 몸이 붕 떠서 호수에 내리꽂혔다. 사불이 물에 빠지자 악귀라는 소년은 소인과 황약사는 제쳐놓고 천방지축호숫가로 달려가더니 풍덩 물 속에 뛰어들었다.

소인은 황약사의 기세에 더욱더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옥녀가 근심스러워진 황약사는 소인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손을 소인의 양쪽 옆구리에 넣으면서 번쩍 들어 메다꽂으려고 했다. 그 눈치를 채고 소인은 황약사의 어깨를 움켜잡고 힘껏 비틀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기둥처럼 버티고 서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만약 보통 사람이 그처럼 억센 손아귀에 잡혔다면 꼼짝달싹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소인은 징글맞게 웃으면서 급급히 내력을 운행시켜 전신의 음독 (陰毒)을 두 손에 몰아붙였다. 황약사는 어깨로부터 섬뜩한 냉기가 온몸에 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놈이 내력으로 나를 굴복시킬 작정이구나!'

황약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이 놈, 손을 떼지 못할까? 이런다고 네 놈이 나를 이겨낼 성싶으냐?"

황약사가 고함을 지르자 소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약사의 내력이 이 정도로 뛰어난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인은 바락바락 악을 썼다.

"기어이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소인은 황약사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손아귀에 전신의 내력을 모았다. 소인의 깡마른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했다.

황약사는 모아 쥐었던 손가락을 소인의 머리에 대고 차례로 튕겼다.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획, 획, 맵짠 바람이 일었다. 소인은 갑자기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황약사를 뿌리치고 황망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황약사가 주위를 둘러보니 호수는 고요히 누워 있고 방금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불과 악귀도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성큼성큼 옥녀에게로 다가갔다. 옥녀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었다. 황약사는 다급히 옥녀를 흔들어 깨웠다.

"옥녀, 옥녀!"

한참 만에야 옥녀는 눈을 뜨더니 황약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설 공자, 설 공자님이시군요!"

그녀는 황약사의 품에 와락 안겨 들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황약사는 무어라고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라 그저 옥녀를 부축해 앉힐 뿐이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옥녀의 얼굴을 본 황약사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덩이처럼 둥실하던 얼굴은 어느새 살이 쏙 빠져서 덜 익은 바가지처럼 잔뜩 쪼그라들었는가 하면 눈썹도 빠지고 흑진주와 같이 아름답던 눈동자도 깊은 안개 속에 잠긴 듯 흐리멍텅해 보이는 게 아닌가.

황약사는 말문이 막힌 채 형용할 수 없는 비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옥녀는 자기의 얼굴이 추하게 변한 줄도 모르고 히죽히죽 웃으며 황약사에게 애교를 떨었다.

"설 공자님, 설 공자님. 공자님이 3천 냥을 내겠다길래 저는 그때 그만하면 충분할 줄 알았어요. 한데 진주를 말로 퍼주려는 작자가 나타날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그 놈이 아니라 공자님께만 시집을 갔더라면 이 지경으로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공자님, 나의 공자님……,"

옥녀는 사랑하는 이나 만난 듯이 황약사를 꼭 끌어안고 응석을 부리면서 끝없이 속살거렸다. 소인에게 잡혀 시달림을 받던 끝에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이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될 듯이 기뻤던 것이다. 옥녀는 더욱 힘을 주어 황약사를 끌어안으면서 볼을 비볐다.

황약사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찬연한 아침 햇살 속에서 한 어여쁜 아가씨가 점차 늙은 할망구로 변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여간 쓰린 게 아니었다.

옥녀는 여전히 한 팔을 황약사의 목에 감고 칭얼거렸다.

"참 이상야릇한 사람도 다 있죠? 글쎄 저를 못살게 굴면서도 금은을 한 보따리나 주지 않겠어요? 진짜로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황약사가 묵묵히 앉아 있자 옥녀는 짐짓 곱게 눈을 흘기면서 투정했다.

"왜 멍청히 보기만 해요? 어서 보따리를 풀어 보자구요!"

그녀는 부산을 떨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단.

"어머나!"

옥녀는 너무나 놀라 멍청히 입을 벌린 채 보따리 속의 금은을 바라보았다. 족히 천 냥은 될 것 같았다. 옥녀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이……. 이렇게나 많이……."

황약사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새하얀 늙은이로 변했다고 말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시각각 파파 늙은이로 변해 가고 있는 옥녀를 쳐다보고 있기도 괴로워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외면하였다.

황약사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별안간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더니 웬 공자가 나타났다. 공자는 말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다짜고짜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옥녀, 여기에 있었구려. 그래도 저 백마가 잘 뛴 덕분에 요행 옥녀를 쫓아왔구만."

옥녀는 공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누구시죠? 난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젊은 공자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옥녀의 추한 얼굴을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할말을 잊은 듯했다.

옥녀는 여전히 황약사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공자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대관절 누구시죠? 어서 가던 길이나 가세요. 괜히 저와 설 공자님의 밀회를 방해하지 말고요."

정작 눈앞에 서 있는 사내가 바로 그토록 사모하던 설 공자라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설 공자는 너무나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채로 물끄러미 옥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새까맣던 머리는 어느덧 서리가 앉은 것처럼 하얗고 얼굴은 호두알처럼 열기설기 주름이 잡혀 있었다. 두 팔로 황약사의 목을 끌어안고 살갑게 속살거리며 아양을 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설 공자는 일순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녀는 옥녀임에 틀림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설 공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가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옥녀는 황약사를 끌어안고 히죽거렸다.

"설 공자님, 호호……. 저 놈이 뛰는 걸 좀 봐요. 아마도 우리 둘이 좋아하는 걸 보니까 괜히 제 쪽에서 무안을 탔나 보죠? 호호호……."

황약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자코 앉아 있었다.

"저 놈이 무안해서 도망치는 꼴이 너무 우습잖아요?"

그녀는 키득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설 공자님, 왜 이렇게 점잖아졌죠? 전처럼 절 좀 안아 주세요. 새삼스럽게 수줍음을 타시나아?"

옥녀는 말을 마치고 깔깔 웃어댔다.

황약사는 실없이 재잘거리는 옥녀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새파랗게 젊던 아가씨가 하룻밤 사이에 늙은 할망구로 변하다니 실로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케 하였다. 황약사는 하는 수 없이 치근거리는 옥녀를 안고 속으로 악마 같은 소인을 저주했다.

'일단 내 손에 잡히는 날에는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다!'

황약사는 옥녀를 보고 말했다.

"옥녀 아가씨, 나와 함께 갑시다!"

그 말에 옥녀는 짐짓 새침해서 앵돌아졌다. 그녀는 황약사를 흘겨보며 투정하듯 말했다.

"아니, 옥녀 아가씨라니요? 결우헌에서 만날 때는 무어라고 불렀죠? 그때처럼 불러 줘요."

황약사는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설 공자가 그녀를 어떻게 불렀는지 그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황약사는 옥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불러 보았다.

"소옥이……."

그의 부름에 옥녀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뭐? 소옥? 너무 천박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동안 날 뭐라고 불렀는지 그새 다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아무래도 너무 흥분한 탓인가 보오. 뭐라고 불렀더라……?"

황약사는 능청을 떨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며 옥녀의 애칭을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옥아, 옥아라고 했잖아요. 어쩌면 저의 애칭을 다 잊어먹는단 말인가요? 정말 섭섭해요……."

옥녀는 잔뜩 볼이 부어서 푸념을 늘어놓더니 혹혹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실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옥녀와 설 공자가 서로 눈이 맞아서 밤낮 안고 뒹굴며 희희낙락 주고받던 말들을 귀신이 아닌 이상 황약사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무튼 황약사는 몰골이 형편없이 된 여인을 보고 '옥아'라고 부르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약사가 묵묵히 서 있자 옥녀는 발끈 화를 냈다.

"아니, 이젠 날 보기가 역겹다는 건가요? 왜 말이 없어요?"

황약사는 측은한 눈길로 옥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기절초풍할 듯 놀라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사내가 바로 설 공자였노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불러 보았다.

"옥아."

그제야 옥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금 황약사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저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요……."

황약사는 하는 수 없이 옥녀를 끌어안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황약사는 남들이 웃든지 말든지 옥녀를 껴안고 읍내로 들어가기로 작심했다.

길 가던 행인들은 모두 이상야릇한 눈길로 황약사와 옥녀를 훔쳐 보았다. 한쪽은 준수하게 생긴 쾌남아이고 다른 한쪽은 늙은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격에 맞지 않게 울긋불긋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는데 젊은이의 모친인 것 같다. 한데 音은이가 젊은이의 목에 매달려서 무슨 말인가를 끝없이 지껄이며 헤실헤실 웃는 모습은 암만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는 눈치였다.

옥녀를 데리고 거리에 나선 황약사는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한참을 궁리한 끝에 그녀를 도화도에 데리고 가서 만년을 거기서 지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옥녀는 길을 걷는 동안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대체로 설 공자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정을 통하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제법 발그스름하게 홍조가 어렸고 두 눈은 가늘게 물결치고 있었다. 그녀가 흥에 겨워 지껄이거나 말거나 황약사는 그녀를 부축한 채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두 사람은 한 주막에 다다랐다. 황약사는 옥녀의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주막집 주인에게 급히 방을 요구했다.

주막 주인은 황약사의 몸에 달라붙어 키들키들 웃고 있는 옥녀를 보더니 참 세상에 해괴망측한 모자간도 다 있다고 속으로 웃으면서 물었다.

"이분은 아마 손님의……."

주막집 주인은 돌연 등허리에 강한 타격을 받으면서 숨이 턱 막혀 말끝을 맺지 못했다. 주막집 주인이 쓸데없이 농담을 하지 못하게 황약사가 슬그머니 손을 쓴 것이다. 주인은 그만 혼쭐이 나서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술상을 차려 들여오자 황약사는 옥녀와 함께 방안에서 술을 마셨다.

옥녀는 황약사를 쳐다보며 그칠 줄 모르고 히죽거렸다. 황약사가 잠자코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자 옥녀가 바싹 다가앉으며 속살거렸다.

"설 공자님, 오늘부터 이 옥이는 공자님의 사람이에요. 자, 어서 합환주나 한잔 드시지요."

둘이 술잔을 들려는 찰나였다. 문득 밥상 위로 하얀 머리카락 한 올이 날려 떨어졌다. 옥녀는 밥상 위에 떨어진 하얀 머리카락을 찬찬히 보더니 흠칫 놀랐다.

"아니, 이게 뭔가요?"

옥녀는 후닥닥 일어나 벽에 걸어 놓은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아악!"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쓰러진 옥녀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한참 만에야 옥녀는 부스스 깨어났다. 그녀는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몸을 일으키며 황약사를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당신은 설 공자가 아니에요. 설 공자는, 설 공자는 어디 있나요?"

황약사가 덤덤히 대꾸했다.

"임자를 보더니 훌쩍 가버리더구만……."

옥녀는 말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문득 입 안에 무엇인가 깔깔하게 씹히는 것을 느끼고 손가락을 집어 넣어 끄집어냈다. 꺼멓게 삭은 이 서너 대가 묻어 나왔다. 옥녀는 벌레 먹은 콩알 같은 이를 보면서 처절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하루 사이에 파파 할머니가 되어 차돌처럼 반짝이던 흰 이마저 새까맣게 삭아 떨어지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다. 그 젊음, 그 아름다움이

도대체 어디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옥녀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황약사를 멍청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절을 올린 뒤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공자님께 폐를 끼쳤군요. 공자님의 은공은 내세에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고리에 빗장을 지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옥녀가 죽은 후에라도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하겠어요."

옥녀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허리에 감았던 비단띠를 풀어 대들보에 매달고 올가미를 지어 조용히 목을 걸었다.

황약사는 옥녀를 말리려고 하지 않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비운 그는 무심코 손아귀에 불끈 힘을 주었다. 빈 술잔이 맥없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제2장 살인마를 찾아서

황약사는 옥녀의 시체를 이불로 둘둘 말아 가지고 성밖에다 묻고 비석을 세웠다. 그는 옥소로 비석에다 '옥녀의 묘'라고 쓰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옥녀야, 이렇게 억울하게 죽다니 가엾기 짝이 없구나. 내 기어코 소인이란 놈을 찾아내어 너의 서러운 한을 반드시 풀어 주고야 말겠다. 부디 고이고이 잠들기를 바란다.'

황약사는 옥녀의 무덤 앞에서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라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그는 건강부(建康府)를 떠나 태호(太湖)에 가서 자연이나 즐겨 볼까 하다가 결국엔 생각을 달리했다. 소인이란 놈이 여자의 음력을 뽑아 들여 내력을 연마하려는 이상 이 근처에서 옥녀와 같은 사냥물을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름답고 젊은 여자라면 무슨 방법으로든 손에 넣어 내력을 연마하는데

이용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는 악귀 같은 놈인 것이다. 그러한 놈의 횡포를 그냥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황약사는 다시 건강부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크고 작은 술집에 드나들면서 한가한 술꾼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며칠간이나 소인의 종적을 추적해 보았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잡아내지 못했다. 황약사의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어느 날 저물녘이었다. 황약사는 역시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섰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교태를 부리며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머나, 멋진 도련님 한 분이 들어오시네?"

그녀는 황약사가 들어서자 방긋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황약사가 술과 안주를 청하자 그녀는 한 손에는 술잔과 젓가락 따위가 놓인 소반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술단지를 들고 바삐 건너왔다. 그녀는 잽싸게 술상을 차리면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공자님의 안색을 보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하지만 두어 잔 들다 보면 다 잊혀질 거예요."

그녀는 살갑게 술을 권하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황약사는 넌지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마냥 웃는 얼굴로 술꾼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야들야들한 몸매며 진주처럼 빛나는 눈매가 뭇사내들의 간장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약사는 시선을 돌려 술꾼들을 둘러보았다. 여느 술집과는 달리 늙은이는 한 사람도 없고 전부 패기 만만한 젊은 사람들 뿐이었다. 아마도 이 아가씨에게 반해서 매일마다 찾아오는 젊

은이들인 것 같았다.

갑자기 밖에서 건장한 사나이 서넛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술상하나를 차지하고 빙 둘러앉았다. 그 중의 한 사내가 급히 주인을 불렀다.

"술을 가져와, 술을!"

"예, 갑니다!"

아가씨가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그들에게 달려갔다.

어느새 술상이 차려지고 네 사나이는 술잔을 쭉쭉 들이키면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술을 바닥낸 그들은 한꺼번에 술을 세 단지나 청했다. 아가씨는 곧 술을 날라 왔다. 한 사내가 진흙으로 봉한 단지 뚜껑을 열고는 술잔에 술을 붓다 말고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이봐!"

그는 기가 막힌 듯 다시 한 번 술단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재차 소리쳤다.

"주인 어디 있어? 냉큼 와 보지 못할까!"

아가씨가 잔걸음으로 다가와 한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사내가 버럭 성을 냈다.

"이게 뭔가? 술단지에 죽은 사람의 해골이 들어 있지 않나, 엉?"

아가씨는 술단지를 들여다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말대로 술단지 안에는 새하얀 뼈가 동동 떠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아가씨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집에서는 술단지들을 움 속에 깊이 쌓아 두고 타인은 얼씬하지 못하게 하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아가씨는 난색을 거두며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본래의 태도로 돌아가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를 어쩌지요? 아마도 고깃덩어리를 집어 넣은 줄 모르고 술을 담아 놓은 것 같군요. 원 참, 술 빗는 남정네들이 잠깐 헛눈을 팔았던가 봐요. 제가 얼른 바꿔 올게요."

그녀는 간드러진 웃음으로 능청을 떨며 술단지를 받쳐들고 물러갔다.

그제야 사나이는 어느 정도 노기가 풀리는지 제자리에 앉으며 소리를 쳤다.

"여보게들, 오늘은 모두 취하도록 마셔 보자구!"

사나이는 다시 옆에 있는 술단지 뚜껑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연거푸 석 잔씩 마신 다음 이야기를 하자구!"

그는 뜯어낸 뚜껑을 옆으로 획 던지고는 양손으로 단지를 감싸쥐었다.

"으악!"

술을 따르려던 그는 다시 질겁해서 소리쳤다.

이번에는 싹뚝 잘린 사람의 손이 단지 안에 등등 떠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 주춤 물러앉았다.

번갈아 단지 속을 확인한 세 사내는 잔뜩 화가 나서 주인을 불러댔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아가씨도 술단지를 들여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지 뚜껑을 뜯어냈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 술집 주인은 분명 나쁜 놈이야!"

그는 남은 술단지 뚜껑을 마저 와락 열어젖혔다. 역시 하얀 뼈들이 둥둥 떠있었다.

"이것 보라구! 사람을 죽이구 흔적을 감추기 위해 몸뚱어리를 모두 토막내어 술단지 안에 처넣은 거야!"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이 요망스러운 계집년아, 바른 대로 말해! 네 년들은 언제부터 재물을 노리고 사람을 죽여 왔느냐?"

아가씨는 너무 기가 막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 소리에 부엌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기웃기웃 술단지를 들여다보더니 하나같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술단지 뚜껑을 열던 사내가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는지 무섭게 다 그쳐 댔다.

"이 년아,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무슨 연고로 사람을 죽이고 토막을 내서 감추어 두었느냐?"

아가씨는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며 사시나무 떨듯 떨 뿐이었다.

황약사가 보다못해 천천히 일어나며 사나이를 향해 말했다.

"이보시오, 술단지 안에 사람의 뼈가 있다니 내 보기에도 이상한 일이오만, 이 집 주인과는 상관없는 일 같소. 만일 이 집 주인이 그런 짓을 했다면 사람의 뼈가 환히 보이는 술단지를 내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황약사의 말에 사내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 그중 한 사내가 쌀쌀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가 이 술단지에 뼈다귀를 넣었다고 보시오?"

황약사는 웃는 얼굴로 아가씨를 향해 점잖게 읍을 하고 말했다.

"아가씨, 아마도 누군가 이 집 술창고에 들어가 술단지에 뼈를 넣은 것 같군요. 우리와 함께 그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소?"

아가씨는 황약사의 따뜻한 태도에 마음이 푸근해 짐을 느끼며 선뜻 응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당장 술 창고로 향했다.

술을 저장하는 움은 좨나 널찍했다. 술통이며 술단지가 양쪽 벽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아악―!"

촛불을 켜고 이리저리 비추어 보던 아가씨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맞은편 벽에 죽은 송장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송장은 살이 썩고 문드러져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들 슬금슬금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한 여인의 시체였다. 하얗게 센 백발이 듬성듬성 빠져 땅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황약사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옥소로 죽은 여인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러자 죽은 여인의 입에서 썩은 이빨이 후둑후둑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틀림없는 소인의 짓이다.'

황약사가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이 여인이 죽은 지 얼마나 될까?"

아가씨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전들 어찌 알겠어요. 사흘 전에도 술을 가지러 내려온 사람이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거든요."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소인이 이 부근에 숨어 다니면서 공력을 연마하기 위해 무고한 대인들을 죽이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이 악귀 같은 놈을 찾아내어 죽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딜 가서 소인을 찾는단 말인가.

어둠이 깃들자 황약사는 조용히 방문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늘엔 쟁반 같은 달이 걸려 있는데 사위는 쥐 죽은듯이 고요했다.

황약사는 무작정 소인을 기다리고 있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소인이 꼭 이 술집에 다시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올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시체를 토막내어 술단지에 넣을 까닭이 있겠는가? 사람의 뼈가 둥둥 떠있는 술단지를 보면 손님들이 혼비백산해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소인은 이 술집에서 마음놓고 여인들을 다를 수 있을 것이었다. 생

각이 이쯤 이른 황약사는 소인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작심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음산한 바람이 이는 듯싶었다. 황약사는 어둠 속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두억시니 같은 새하얀 그림자가 흔들흔들 다가오고 있었다.

황약사는 슬쩍 몸을 피해서 집 뒤에 숨었다.

하얀 그림자는 문앞에 오더니 거리낌없이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짝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문을 밀쳐 보던 그림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놈은 한 손을 뻗쳐 끌날같이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달각달각 문을 후비기 시작했다. 잠깐사이에 문짝에는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놈은 그 구멍으로 손을 넣어 빗장을 빼고 와락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듯이 소란스럽더니 곧 잠잠해졌다.

황약사가 슬며시 창가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놈은 머리에 썼던 횐 보자기와 몸에 걸쳤던 흰 비단폭을 벗어 던졌는데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소인은 음흉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호령했다.

"다들 일어나지 못할까?"

방구석에 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던 노부부와 딸로 보이는 곱게 생긴 처녀가 소인의 호령에 못 이겨 주춤주춤 일어났다. 처녀는 술집에서 일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소인은 징글맞게 웃어대면서 물었다.

"다들 움 속에 있는 시체를 보았겠지?"

세 식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인은 짐짓 점잔을 빼며 천천히 말했다.

"두 어르신을 놀라게 해서 죄송하오. 오늘은 사람을 해치려고 온게 아니라 이 집 따님을 아내로 삼으려고 왔소. 따님이 하도 귀엽게 생겨서 말이오."

노부부는 소인의 험상궂은 몰골을 보고 자기들을 죽이지나 않을까 해서 가슴을 조이고 있던 터라 뜻밖에도 소인이 청혼을 하자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바깥 노인이 소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손님께선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인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내 이름이 뭐든지 노인장하구 무슨 상관이 있소?"

노부부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늦게야 겨우 딸 하나를 낳아서 금지옥엽같이 귀하게 길러 온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출신도 알 수 없는 이 흉측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에게 귀한 딸을 선뜻 내줄 수 있겠는가. 바깥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천만, 천만 부당한 말씀이오!"

소인은 낄낄 소리내어 웃더니 등에 지고 있던 큰 자루를 내려 밥상 위에 주르르 쏟아 놓았다. 순간 온 방안이 찬연한 빛으로 가득찼다.

소인은 점잖게 뒷짐을 지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주 열 말인데 어지간한 성곽하고도 맞바꿀 수 있을 거요. 두 노인장께 드리는 것이니 기꺼이 받아 주시오."

세상의 장사치들이란 돈과 재물에는 오금을 쓰지 못하는 법이다. 노부부는 밥상 위에 수북히 쌓인 진주를 보더니 입이 함박만해져서 다물 줄을 몰랐다.

노부부가 주춤주춤 망설이고 있는데 불현듯 옆에 있던 딸이 악을 쓰며 소리를 쳤다.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간대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해요! 이따위 진주는 도로 가져가요!"

소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봐, 아까도 말했지만 이만한 구슬이면 멋들어진 성곽하고도 맞바꿀 수 있어. 진귀한 진주를 열 말이나 퍼주고서까지 임자를 데려가려는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겠나? 이제 나하구 살아 보면 알게 될거야. 결코 후회하진 않을 거라구. 하하하……."

술집 딸은 소인의 흉물스러운 얼굴을 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쳤지만 마음을 다잡고 구슬리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손님, 저에게 청혼할 생각이라면 정정당당히 밝은 대낮에 찾아와야지 이렇게 밤중에 뛰어들면 어떡합니까? 점잖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자 소인은 히죽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과연 총명한 아가씨구려. 내겐 바로 임자같이 총명한 계집이 필요해!"

그리고는 노부부를 향해 위협조로 말했다.

"이봐, 당신네 따님을 아내로 삼을 작정인데 대관절 줄 건가, 안 줄 건가?"

노부부는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하며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소인은 갈퀴 같은 손으로 진주 한줌을 쥐고 주르르 흘러뜨리며 이죽거렸다.

"이건 자그마치 진주가 열 말이야. 당신들이 고맙게 받아도 좋구 한사코 받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나는 댁의 따님을 데리고 갈 테니까."

처녀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죠? 이런 무례한 일이 어디 있어요?"

"난 소인이라는 사람이야. 난 말이야, 이 세상의 이름난 미녀들만 데리고 놀거든. 아가씨도 내 눈에 들었으니 복이 터진 줄이나 알라구."

처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썩 물러가요! 물러가란 말이야! 난 죽어도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썩 꺼져 버려!"

"아가씨는 나를 따라가야 할거야. 아니, 오히려 데려가 주십사하고 빌게 될걸? 흐흐……."

소인은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성큼 나서면서 노부부의 몸에 번개같이 손가락을 연달아 세 번 튕겼다.

"어이쿠!"

소녀의 부모는 대추혈(大椎穴)과 미려혈(尾閻穴)에 뜻밖의 강타를 받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썩 물러앉았다.

"아버님, 어머님!"

처녀가 부모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소인이 천천히 말했다.

"이봐 아가씨, 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부모님도 살려 주고 이 보석도 몽땅 주고 갈 것이야. 그렇게 되면 늘그막에 술집을 하느라 고생할 까닭이 없지. 이것이면 얼마든지 놀고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어쩌겠나? 날 따라갈 텐가, 말 텐가?"

처녀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를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 다급히 소리쳤다.

"따라가겠어요, 따라가겠다구요!"

그제야 소인은 다시 노부부의 혈도에 톡톡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늙은이는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눈을 크게 뜨고 딸자식을 쳐다보았다. 악귀 같은 소인과 겨룬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곱게 기른 외동딸을 두 눈 번히 뜨고 뺏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두 늙은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처녀가 부모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난 저 사람을 따라가겠어요. 나를 잘 보살펴 줄 사람 같으니 근심하지 마세요."

처녀가 좋은 말로 위로하니 두 音은이는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이 사내가 험상궂게는 생겼지만 진주를 열 말이나 내놓는 것으로 보아 딸자식을 데려다가 호강을 시켜 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이 슬그머니 재촉했다.

"빨리 가자구. 앞으로 가끔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 테니까."

처녀는 부모에게 차분히 절을 올리고는 눈물을 감추며 소인을 따라 문을 나섰다.

딸자식이 떠나간 후 노부부는 한참이나 말없이 마주앉아 있었다. 밥상 위에 수북히 쌓여 뻔적거리는 진주 더미를 보노라니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듯 얼떨떨하기만 했다.

잠시 후 제정신이 든 두 늙은이는 딸자식의 앞일이 근심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인은 문을 나서자 처녀의 혈도를 튕겨 까무러치게 한 후 가볍게 걸머지고 나는 듯이 성밖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쯤 달려 성밖의 평평한 언덕 위에 오른 소인은 처녀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소인은 다시 처녀를 안고 언덕배기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처녀를 내려놓고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임자는 새색시인 셈이야. 오늘은 첫날밤이니까 실컷 놀아 보자구."

그는 처녀 앞에 털썩 마주앉았다.

처녀는 놀란 눈으로 소인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기왕 여기까지 온 바에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겠다. 저 놈에게 살갑게 굴면 며칠 후에 놓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렇게 생각한 처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리며 소인의 앞에 다가앉았다. 소인은 묵묵히 앉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처녀가 한마디 슬쩍 물었다.

"아마도 조(曹)씨라고 하셨지요?"

소인은 처녀를 흘끔 건너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처녀는 소인의 길다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이런…… 머리가 너무 자란데다가 너무 지저분하군요. 제가 깨끗이 감겨 주고 벗겨 드리겠어요. 그러면 한결 영준하게 보일 거예요."

소인은 스스로 자기의 생김새를 잘 알고 있었다. 해골같이 창백한데다 너무도 험상궂게 생겨서 거리에 나서면 모두들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영준하게 생겼다니 실로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 아닌가?

'여우 같은 계집년 같으니라구! '

소인은 픽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소름 끼치는 듯한 웃음에 처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연히 실수를 저질러 이 악마 같은 사내의 노여움을 사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처녀는 소인의 몸에 기대어 한층 더 아양을 떨면서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소인은 돌부처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처녀는 자기의 품에 두 손을 넣고 봉긋한 젖가슴을 주무르면서 짐짓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신음 소리를 냈다. 실로 음탕한 계집년의 수작이었다.

마침내 소인은 탐욕스러운 눈길로 처녀를 쏘아보더니 와락 그녀의 가슴을 헤쳤다. 처녀가 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여지껏 시집을 갈 생각이라곤 못했었어요. 저의 집에 찾아 오는 술손님들을 보면 하나같이 무지막지한 놈팽이들뿐이었거든요. 그런 놈팽이들한테 시집갈 생각을 하면 막 진저리가 쳐지지 뭐예요?"

그녀는 호호 소리내어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시집가는 날에는 반드시 꽃가마를 타고 싶었어요. 일단 혼례식을 올리고 나면 밤이고 낮이고 낭군님만 따라다니겠어요. 그렇게 해줄 수 있겠지요, 네?"

처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소인은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되었다. 정말 천하의 계집들이란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었다. 며칠 전에 잡아 왔던 계집은 손도 대기 전에 질질 똥오줌을 내갈기면서 까무러치지 않았던가. 한데 오늘 밤에 잡아 온 이 계집은 칭칭 감겨 들며 별의별 아양을 다 떨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소인은 착착 감겨 들며 살갑게 구는 처녀에게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처녀가 계속 소곤거렸다.

"이봐요,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무슨 일인데?"

소인이 심드렁하게 묻자 처녀는 씽긋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바로 어제 있은 일이에요. 저의 주막에 몇몇 사내들이 와서 술을 마셨는데 글쎄 술단지 안에서 사람의 뼈가 나오질 않았겠어요? 정말 기절초풍할 일이 아니고 뭐예요? 하도 이상해서 술단지들을 저장하는 움 속에 들어가 봤더니, 세상에, 여인의 시체가 번듯하게 앉아 있는 거예요. 어찌나 놀랐는지 모두 혼비백산해서 쩔쩔맸지요, 뭐."

소인이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여자는 바로 내가 죽인 거야."

처녀는 흠칫 놀라 소인을 쳐다보았다. 소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순간 처녀는 너무나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악마에게 잡혀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처녀는 그러한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금 소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저는 피곤해서 한잠 푹 자야겠어요. 저를 안고 좀 재워 주지 않을래요?"

처녀는 짐짓 나른하게 교태를 부리며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소인은 자기의 무릎 위에 누워 어린아이처럼 쌕쌕 숨을 내쉬는 사랑스런 처녀의 모습을 취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아, 얼마나 아름답고 총명한 계집인가!'

차녀음공( 女陰功)을 연마하는 데는 아름답고 총명한 계집일수록 효험이 큰 법이다. 아무튼 소인도 사내인지라 무릎 위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자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연정에 이끌려 마음이 산란해지면 공력을 잘 연마할 수 없는 법이었다. 사실 소인에게 잡혀 온 많은 여인들은 대체로 울며 불며 그가 범접하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

다. 그런데 이 계집은 여느 계집들과는 달리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나긋나긋 교태를 부리더니 무릎 위에 누워 천진스레 잠까지 자는 게 아닌가. 정녕 소인을 진짜 남편으로 섬기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려는 듯싶었다.

소인은 한참 동안 처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족두리에 꽂힌 비녀를 뽑아 머리를 흘러내리게 했다. 교교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한결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인이 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너를 데리고 가서 온통 황금과 진주로 장식한 침대 위에서 자도록 해주겠다. 그러니 나하고 벗삼아 맘껏 향락을 누리자꾸나."

그 말에 소인의 무릎 위에 누워 자는 체하던 처녀가 얼른 눈을 뜨며 물었다.

"어머, 좋아라! 분명히 저도 데리고 간다고 했죠?"

소인은 묵묵히 웃어 보였다. 처녀의 드러난 젖가슴이 교교한 달빛에 더욱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듯이 팽팽한 탄력 있는 가슴이었다. 소인은 슬그머니 군침을 삼켰다. 얼마나 탐스럽고 사랑스런 계집인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년은 상상도 못할 거야. 사실 난 땅 한 마지기 집 한 칸도 없이 호숫가의 나무 위에서 외롭게 사는 사람이야.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잡아 날것으로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호숫가에 짐승처럼 엎드려 찝찌레한 호숫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지. 아마 너같이 호강만 하던 계집은 사흘도 배겨 내지 못할걸?'

소인은 생각에 잠겨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훔쳐보던 처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살며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소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속일 거야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난 공력을 연마하는데 쓰려고 아가씨를 데려온 거야. 한데 문제는 내가 공력을 연마하고 나면 아가씨는 자연히 죽게 된다는 것이지."

처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짐작대로 그는 보통 악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소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납게 호령했다.

"이 년, 옷을 벗거라!"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제아무리 야무지고 대담한 처녀라 해도 간이 콩알만해져서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옷을 벗을 생각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소인은 회심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 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공연히 늑장부릴 필요가 없어. 또 난데없이 웬 불청객이 뛰어들면 골치 아파질 테니 얼른 공력을 연마하고 죽여 없애는 게 속 편하지.'

그는 와락 처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세요? 제, 제발……."

처녀는 몇 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더는 어쩌지 못하고 소인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소인은 알몸뚱이가 된 처녀를 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백옥같이 흰 살결에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무덤을 보노라니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이 솟구쳤다. 소인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아깝군, 아까워……. 너 같은 얼굴이면 돈과 권세가 있는 집안에 시집가서 한평생 영화를 누리고 살 수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손에 걸려들어 생죽음을 당하게 되다니 팔자 한번 사납구나……."

소인은 진정 처녀의 신세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으나 얼른 마음을 돌려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겁에 질린 나머지 거의 반주검이 된 처녀는 소인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소인은 처녀를 똑바로 앉힌 뒤 두 손을 쫙 펴들었다. 그러나 그는 처녀의 젖가슴에 손을 대려다 말고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손가락을 모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뭉클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 오자 소인은 빠른 손놀림으

로 젖가슴을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숨이 턱에 차서 굶주린 승냥이처럼 야릇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욕정이 발동하여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인은 신경질적으로 젖가슴을 홱 비틀더니 미친 듯이 음력을 뽑아 들이기 시작했다.

음공을 연마하는 데는 계집들의 음력이 크면 클수록 효험이 좋았다. 때문에 소인은 능청스럽게 처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봐 아가씨, 아까처럼 나한테 살갑게 굴고 애교를 떨어 봐. 그러면 나두 마음을 고쳐 먹구 아가씨를 잘 대해 줄게. 날이 밝으면 우리 호젓한 산속에 들어가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며 보자구. 난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갖고 있는 사람이야. 나와 살게 되면 임자는 안주인이 되어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을 거라구."

그러나 소인이 아무리 구슬리고 얼러도 처녀는 서리 맞은 풀처럼 맥을 추지 못했다.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음공을 연마한다는 말에 완전히 절망하여 맥을 놓아 버린 것이다. 소인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음력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소인은 잔뜩 화가 나서 속으로 씹어 뱉었다.

'여우 같은 년,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소인은 힘껏 내력을 운행시켜 처녀의 몸에서 최대한 음력을 빨아 들이려 했다.

이때였다. '쏴―'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웬 사나이의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이 놈, 소인! 네 놈이 하는 짓거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너 같은 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내 오늘 기어코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테다!"

소인이 놀라 돌아보니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황약사였다. 소인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네 놈은 뭣 땜에 내 뒤를 밟아 다니며 방해를 하는 거냐?"

"가련한 여자들을 데려다가 비참하게 죽이는 그 짓을 두고 보란 말이냐?"

소인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섣불리 일어나 손을 쓰다가는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이 악귀 같은 놈아, 어디 한번 맛을 보아라!"

황약사는 손을 치켜 들어 장을 내갈기려 했다.

"잠깐!"

소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소인은 갈퀴 같은 손으로 처녀의 목을 움켜쥔 채 으름장을 놓았다.

"나한테 손을 대기만 하면 이 계집은 죽는 줄 알아라!"

황약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계집이 죽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디 마음대로 한번 해보시지 ."

소인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처녀가 쿨쩍쿨쩍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하나 없이 못난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사셨는데 오늘 이렇게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절 용서하세요. 그리고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순간 황약사의 가슴속에는 연민의 감정이 싹터 올랐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소인이 한마디 던졌다.

"일찌감치 오기를 잘했어. 미처 이 년의 음력을 다 빨아내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집에 데려가서 사나흘 보살펴 주면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자, 나도 이 계집애를 놓아줄 테니 자네도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교활한 자식, 네 놈의 그 빌어먹을 차녀음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느냐? 오늘에야 요행 네 놈을 붙잡았는데 어찌 순순히 놓아보낼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는 생각을 감추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처녀애를 놓아주기만 하면 나도 잠깐 자리를 비키겠다. 그런 후에 한번 겨뤄 보자!"

"아니야, 자네가 먼저 자리를 비켜야 이 년을 놓아주겠어."

황약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구렁이같이 흉물스러운 놈이 일단 황약사가 물러서기만 하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독사는 살려 두면 다시 물리기 마련이다. 황약사는 냉정하게 웃으면서 잘라 말했다.

"일단 여자부터 놓아주어 라. 그럼 나도 어김없이 물러설 테니까."

"내가 손을 떼기 바쁘게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리치면 이 소인이 억울하게 죽는 거 아니야!"

황약사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이 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냐? 나는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사람이다. 황 노사(老邪) 또는 황 노괴(老怪) 하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 처녀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 보라구. 하지만 일단 죽이기만 하는 날에는 네 놈의 등뼈에 부골독침(腐骨毒針) 세 개를 박아 넣을 거야. 그러면 죽지도 못하고 한평생 보통 고생이 아니지."

황약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소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중원 땅에서 황 약사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칭 황 노괴라 할 정도라면 분명 성깔이 사납고 괴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소인은 한참 망설이다가 처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좋아, 처녀를 놓아주지."

그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두어 걸음 비켜섰다.

황약사는 옆에 있는 옷을 집어 알몸동이로 앉아 있는 처녀에게 던졌다. 처녀는 훌쩍거리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애잔한 빛을 담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황약사는 어쩐지 멋쩍어져서 거칠게 소리쳤다.

"뭘 하구 있나, 빨리 가지 못하구!"

처녀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리더니 황약사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는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며 내닫기 시작했다.

소인은 엎어질 듯 뛰어가는 처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면서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그는 한 번도 잡아 왔던 여자를 살려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저 처녀가 살아 돌아갔으니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은 뻔한 이치이고 앞으로는 처녀를 잡아다가 공력을 연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소인은 황약사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지난번에는 실수로 부상을 당했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놈을 꺼꾸러뜨리고야 말 테다. 사불과 악귀가 없어서 한구석이 빈 것 같지만 죽을 힘을 다하면 제아무리 날고 뛰는 놈이라 해도 별수 없을걸?'

황약사는 소인의 앞으로 스적스적 다가섰다.

"어디 시작해 볼까?"

"좋다!"

소인이 쾌히 대답했다.

황약사는 불현듯 활짝 핀 복숭아꽃처럼 '도화작작(桃花灼灼)'이란 장법으로 소인의 가슴을 살같이 내질렀다. 소인도 만만치 않았다. 소인은 도포를 벗어 놓듯 '탈포양위(脫袍讓位)'라는 장법으로 두 손을 확 펴서 슬쩍 밀며 물러섰다. 황약사는 다시 달려들며 재치 있게 복숭아꽃을 따듯 소인의 얼굴을 향해 '교힐도화(巧擴桃花)'라는 장법으로 소인의 얼굴을 뜯으려 했다. 소인은 살짝 얼굴을

피하며 물러섰다.

황약사는 연거푸 세 번이나 재주를 부렸지만 소인을 거꾸러뜨릴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오른손을 슬그머니 걷어들이면서 중지를 엄지손가락에 단단히 걸었다. 도화도의 절묘한 무공인 '탄지신공 (彈指神功)'으로 일격에 소인을 거꾸러뜨릴 심산이었다.

소인은 황약사의 탄지신공의 위력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바삐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잠깐!"

소인이 눈을 부릅뜨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황약사, 우리 둘 다 사내 대장부요, 강호의 호걸들이 아닌가? 저잣거리의 아낙네들처럼 물고 뜯으며 싸우지 말고 장력을 겨루어 보세. 과연 누구의 내력이 센가 겨뤄 보잔 말일세."

"장력? 좋도록 하지!"

황약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인은 황약사를 흘겨보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미련한 놈! 내 장법은 수많은 처녀들의 음력으로 연마한 것이야. 황소 같은 장사도 내 장이 닿기만 하면 벼락맞은 놈처럼 나자빠지게 돼 있는데 나와 장력을 겨루겠다구? 흐흐흐…….'

마침내 두 사내는 담벽처럼 마주앉아 손과 손을 맞대고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소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놈은 지금 온몸에 내력이 넘치는 상태라 내가 음독을 몰아붙여도 소용이 없을 거야. 저 놈이 아득바득 내력을 쓰다가 기진맥진했을 때 일시에 음독을 불어넣는 게 좋겠어. 그러면 십중팔구는 나동그라지게 될거야.'

소인은 이렇듯 음흉한 생각을 굴리며 황약사와 장을 맞대고 있었다. 소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전신의 힘을 다 썼지만 음독만은 불어넣지 않았다.

'네깐 놈이 나와 내력을 겨루겠다고?'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오분력도(五分力道)'로 지그시 내력을 운행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황약사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지고 이마에 송골송골 진땀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소인 역시 땀이 비 오듯 했다.

소인이 안간힘을 쓰면서 말했다.

"이젠 그만 날 좀 놓아주게 나!"

"꿈같은 소리 작작 하시지?"

황약사는 매몰차게 냉소를 던지면서 전신의 내력을 운행시켰다. 일단 맞붙은 바에야 이 악마 같은 소인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물러선단 말인가.

소인은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되었다. 소인은 슬그머니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젠 됐다. 이 놈, 죽어 봐라.'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지금껏 참고 있던 음력을 일시에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갑자기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소인이 차녀음공을 연마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줄은 몰랐다. 황약사는 사지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음력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금만 힘을 늦추면 소인의 음력이 몸에 퍼져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소인이 한층 더 음력을 발하며 말했다.

"황약사, 이젠 꼼짝못하고 죽게 됐지? 이 어른의 차녀음공은 세상에 당할 자가 없어."

황약사가 쌀쌀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 꽤나 큰소리를 치는군 그래. 하지만 결국 죽는 쪽은 네 놈일걸?"

두 사내는 무섭게 얼굴을 찡그리고 필사적으로 대결했다. 소인의 얼굴은 나뭇잎처럼 새파랗게 질렸고 황약사의 얼굴은 외꽃처럼 노랗게 질렸다.

사실은 황약사도 도화도에서 무서운 내공을 연마했었다. 이 내공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순식간에 적을 물리쳐서 감쪽같이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소인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어 너무 힘을 쓴 바람에 그 기묘한 내력을 펼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여간 속이 타지 않았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너나할것없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돌연 황약사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손으로 내력을 뿜어냈다. 산까지도 밀어붙일 듯한 무서운 내력이었다. 소인은 맥없이 떠밀려 저만치로 나뒹굴었다.

황약사가 후유, 한숨을 몰아쉬는데 소인이 부스스 털고 일어나 앉더니 황약사를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아무튼 이 소인은 탄복하는 바요!"

"그럼 깨끗이 죽여 주지!"

황약사가 벌떡 일어나 일장에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자 소인도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깐!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손을 대지 말아주게!"

"물론 그 편이 좋겠지."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날리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소인의 험상궂은 얼굴에도 애절한 빛이 감돌았다. 소인은 돌연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부르짖었다.

"황약사, 이 나쁜 놈! 황천에 가서라도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테다……."

그는 말을 마치자 품속에서 독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과 코, 입 등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더니 썩은 나무등걸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황약사는 소인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악덕은 악으로 보답을 받았으되 선행은 무엇으로 보답을 받을까?"

그는 곧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림자 둘이 어물어물 다가오더니 소인의 시체 옆에 와서 멈춰 섰다. 두 그림자는 시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냉큼 들쳐 업고 허위허위 떠나갔다.

 

 

 

 

제3장 천하 절색을 만나다

황양사는 지나는 길에 책방에 들러 잠시 심심파적으로 야담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염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야담가는 대송의 명장 양재흥(楊再興)이 소상하(小商河)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담가는 말끝마다 송나라에 는 나라에 충성하는 충신과 명장들이 많노라고 떠벌렸다.

황약사는 공연히 입맛이 썼다. 충신, 명장이 그렇게 많다면 나라의 절반 땅을 금나라 사람들에게 뻐앗겼겠는가?

황약사는 야담가와 논쟁을 하다 말고 밖으로 나오다가 운남 대리의 고승 일속(-俗) 대사를 떠올렸다. 처음 만나던 날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아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둑을 두었었다. 일속 대사는 음률, 서화,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바둑에도 명수였다.

황약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입안의 번화한 거리를 구경삼아 돌아다녔다. 흔들흔들 걸음을 옮기다가 그는 문득 그날 밤 일속 대사가 하던 말을 떠올리고 픽 웃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었다.

"두 눈썹 언저리에 회색빛이 감도는 것을 보니 멀지 않아 아름다운 처녀와 연분을 맺게 .될 것 같소이다."

일속은 대리에 있는 천룡사(天龍寺)의 스님이다. 출가하기 전, 그는 본디 대리의 황족인 단씨(段E)네 가문의 사람이었다. 단씨네 일족은 문벌도 높거니와 그 자손들 중에는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인재들이 많았다. 일속은 훌륭한 가문에서 자란데다가 산속에 깊이 들어가 도를 닦은 만큼 선견지명이 있는 스님이었다.

황약사는 성미가 괴벽하고 도고한 사람이라 세상에는 여자가 수천수만이 있다 해도 자기의 눈에 드는 여자는 없노라고 단정짓고 있는 터였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영웅과 미녀는 하늘이 낳은 것이요, 영웅이 되기도 어렵거니와 미녀를 찾기란 더욱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어떤 사람이 영웅이냐? 하늘이 준 총기와 지혜로 삼도육략(三韜六略)을 깨치고 천하를 다스릴 만한 식견과 수완

이 있으며 또 비범한 기공을 익힌 자만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초패왕 항우(項羽)는 힘도 장사요, 무예도 출중했지만 슬기가 부족했으니 영웅이라 할 수 없고, 당나라의 명기 설도(薛濤)는 선기시(璿璣詩)를 즉석에서 지어낸다고 세상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대신 자색이 뛰어나지 못했다.

황약사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건들건들 거리를 거닐다가 장신구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서는 옛 서화며 질그릇, 부채, 도자기인형 등 진귀한 골동품들과 금은으로 된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다.

황약사가 심심풀이로 진열된 것들을 돌아보는데 한쪽의 비어 있는 진열대 앞에 두 사내가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키가 훤칠한 늙은이이고 하나는 피둥피둥 살진 중년 사내였다. 둘 다 비단옷 차림에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부자들임에 틀림없었다. 늙은이가 뚱보를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자넨 언제 왔나? 한 발 늦었구만!"

"글쎄 말입니다. 오늘 와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요. 나 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세상에 이런 맹랑한 일이 다 있습니다."

뚱보는 손을 마주 비비면서 투덜거렸다.

황약사는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발동해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뚱보가 계속 투덜댔다.

"손님은 오늘 꼭 사지 않아도 별문제 없으시겠죠? 다음달 보름께 일찌감치 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살 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큰일났구만요. 글쎄 내일이면 딸년이 시집갈 판인데 그 물건이 없으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떼를 쓰니……."

"따님이 시집을 간다구요?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늙은이가 읍을 하며 수선을 떨었다. 뚱보는 여전히 울상으로 투덜거렸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

두 사내는 가게 주인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대관절 아형(阿衡)은 누가 사간 거요?"

콧등에 안경을 건 가게 주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낸들 어떻게 알겠수? 아무튼 여느 부잣집 하인 같아 보입디다. 가게문을 열기 바쁘게 들어서더니 물건을 사들고 훌쩍 가버렸거든요."

"허 참, 일이 난감하게 됐군!"

뚱보가 한숨을 쉬자 늙은이도 혀를 끌끌 찼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약사는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아형이란 대관절 뭐지? 얼마나 귀중한 물건이기에 시집가는 처녀가 꼭 가지고 가야 하는 거야? 아마도 옥으로 만든 패물이 아니면 노리개 등속이겠지.'

문득 가게 주인이 길 쪽을 가리키며 급히 소리쳤다.

"저기 봐요. 아침에 아형을 사간 사람이 지나가네요!"

"뭐야?"

뚱보와 늙은이는 바삐 가게를 빠져 나가 허둥지둥 그 사람 뒤를 쫓아갔다.

'미친 녀석들 같으니라구! '

황약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임안이란 도읍에 저런 쓸개 빠진 부자들이 많기 때문에 금은붙이나 골동품값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기분을 잡친 듯 옥소로 손바닥을 탁 치며 자리를 떴다.

황약사는 장신구 가게에서 나오는 길로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다락방에 올라가니 구석에 있는 탁자에 세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둘은 바로 장신구 가게에서 만났던 뚱보와 늙은이였고 다른 하나는 하관이 뾰족하고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낮선 사내였다. 세 사내는 서로에게 술을 권하며 점잔을 빼고 있었다.

늙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 참, 어떤 양반이 아형을 사 가지고 갔는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구만. 아무튼 일이 잘됐네. 그 아형을 이 유 형에게 양도하게나."

얼굴이 가무잡잡한 청지기가 주춤 물러앉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 무슨 말씀이시오? 어림도 없는 말씀입니다. 석 달 전부터 단단히 예약해 놨던 건데, 오늘도 한 발만 늦었더라면 웬 계집한테 뺏길 뻔한 건 겨우 손에 넣었는걸요. 그런 걸 양도해 달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늙은이가 딱한 표정으로 간청했다.

"그 아형은 말일세, 자네 주인 양반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걸세. 하지만 이 유 형은 당장 내일 시집갈 따님에게 줄 것이라네. 남의 사정도 좀 봐줘야지!"

청지기는 내심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방금 사람을 보내 아형을 손에 넣었노라고 주인 어른께 알렸는데요. 듣고 보니 저도 아형을 양보해 드리고 싶지만 돌아가서 주인어른께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무튼 융통성 있게 처리해 주시오!"

뚱보는 웃음을 띄우면서 품속에서 은 한 덩이를 꺼내 놓았다. 좋이 50냥은 될 듯싶었다.

황약사는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가 적이 놀랐다. 을 50냥이나 내놓는 것을 보아 아형이란 보통 진귀한 보물이 아닌 것 같았다. 청지기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는 눈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노형의 체면을 봐서 주인 어른한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아형을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청지기는 당장 품속에서 물건을 꺼내 놓았다. 뚱보와 늙은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황약사는 슬쩍 건너다보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형이란 굉장한 보물인 줄 알았더니 실은 자그마한 비단주머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황약사는 그것이 비단주머니가 아니라 비단주머니처럼 만든 꽃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간 비단폭 위에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탐스럽게 돋혀 있었는데 열 여섯 개의 꽃잎이 여간 청초해 보이지 않았다. 가만 눈여겨보니 그것은 여간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비단꽃이라고 해도 은 50냥이나 퍼주고 사가는 뚱보의 마음을 알 수가 없

었다.

뚱보와 늙은이는 꽃송이를 조심스레 뒤집어 보면서 끌끌 혀를 찼다.

"참 묘하고 멋지게 만들었군. 정말 보통솜씨가 아니야!"

두 사내는 또다시 아형을 자세히 뜯어보더니 그 용처를 모르겠다는 듯이 일제히 청지기를 쳐다보았다.

"좀 설명해 주시게. 이 꽃송이의 용처를 말이오."

청지기가 사뭇 신비한 기색을 띠며 말문을 열었다.

"한번 잘 보십시오. 얼핏 보아선 활짝 핀 목련꽃 같지만 사실은 꽃이 아니랍니다……."

"뭐요? 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뚱보와 늙은이는 동시에 눈을 치떴다.

청지기는 흐물흐물 능청스럽게 웃더니 "하나, 둘, 셋, ……." 하고 중얼거리면서 꽃잎을 차례로 벌려 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꽃송이 밑에서 한 미인의 수심 어린 얼굴이 홀연히 나타났다. 삼단 같은 머리에 서글픈 눈동자, 살며시 아미를 찡그린 품이 분명 상사일념에 잠긴 미인의 모습이었다. 여인의 모습 밑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는데 황약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아형이란 물건을 훔쳐보면 볼수록 바짝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역시 옥에도 티가 있다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꽃을 보자면 그림을 볼 수 없고 또 그림을 보자면 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뚱보와 늙은이도 황약사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청지기에게 물었다.

"물론 그림은 좋지만 이렇게 뜯어 놓으니까 꽃을 볼 수 없잖나? 참 아쉬운 일이오."

"나 원 참, 공연한 걱정들을 하시는군요. 꽃도 보고 미인도 볼 수 있기에 아형이지. 허허……."

청지기는 또 흐물흐물 능청맞게 웃으면서 가볍게 아형을 들어 툭 쳤다. 순간 탁자 위에는 한송이 목련꽃이 다시 피어났다.

그제야 뚱보와 늙은이는 탄성을 지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재치 있게 만들었군 그래……."

뚱보는 와락 아형을 움켜쥐고는 청지기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꽃 속에 숨은 미인! 황약사는 이 정교한 노리개를 만든 사람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노리개는 분명 여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황약사는 미인의 그림 밑에 적힌 시구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절묘하게 만든 노리개이니 그 시구에도 오묘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었다.

황약사는 세 사내가 다락방에서 내려가자 슬렁슬렁 뒤를 밟기로 작정했다. 그는 뚱보의 뒤를 쫓았다. 뚱보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도 굉장한 부잣집인 것 같았다.

황약사는 획 몸을 날려 석 장이나 되는 나무 위에 올라섰다가 다시 한 번 몸을 솟구쳐 높다란 이층집 지붕 위에 올라섰다.

뚱보가 층계 밑에 서서 다락방에 대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복(福)아, 복아! 이 애비가 뭘 가져왔는가 보려무나."

그가 소리치자 웬 계집아이가 다락방 창문으로 총채며 꽃병 따위를 마구 내던지며 칭얼거렸다.

"몰라요, 몰라! 빨리 아형을 사다 줘요. 아형이 없으면 난 누구한테도 시집가지 않을 거예요!"

"복아, 이 애비가 아형을 사왔어!"

뚱보가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다락방에 있던 딸이 활짝 웃음을 떠올렸다.

"아니,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지요?"

유 뚱보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락방으로 올라가더니 아형을 딸에게 안겨 주었다.

"봐라, 이게 아형이 아니고 뭐냐?"

계집은 아형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이게 뭔가요? 어디서 굴러다니던 비단꽃, 가짜 꽃을 가지고 와서 아형이라니요? 이따위를 가지고 나를 얼러 넘기시려구요? 말도 안 돼요."

"나 원 참, 그럼 좀 보아라……."

뚱보는 청지기가 하던 대로 꽃잎을 한 잎 두 잎 펼쳐 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인의 얼굴이 나타나자 처녀는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황약사는 지붕 위의 기왓장을 들어내고 서까래를 뜯어낸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방안에 살짝 내려섰다.

뚱보와 그의 딸은 느닷없이 나타난 황약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댁은 누구시오?"

뚱보가 버럭 화를 내자 활약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좀 긴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남의 집에 함부로 뛰어드는 법이 어디 있소?"

"당신은 이 서울 장안에서도 유명한 상인이 아니시오? 물건을 거래할 일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왔소."

뚱보는 울그락푸르락 화를 내던 얼굴에 함빡 웃음을 담으면서 한 걸음 다가섰다.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지금 따님께서 들고 있는 물건입니다."

"뭐요?"

뚱보는 불에 덴 사람처럼 한걸음 물러섰다.

"미안하지만 그 아형을 저한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황약사가 실실 웃으며 청을 하자뚱보는 기가 막힌 듯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딸이 바락 성깔을 부리며 소리쳤다.

"아니, 별 염치 없는 사람을 다 보겠네? 아버지가 겨우 사온 것이고 내일 시집갈 때 쓸 것인데 어떻게 팔아 넘기라는 거예요? 당치도 않은 소리 마세요!"

황약사는 거두절미하고 품속에서 싯누런 금덩이 세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뚱보는 금덩이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그의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악을 썼다.

"그 따위 금덩이는 썩 가져가요. 어쨌든 팔지 않을 거니까요."

황약사는 잠자코 있다가 품속에서 묵직한 금덩이 하나를 더 꺼내 놓았다. 모두 합하면 7백 냥은 실히 될 것 같았다.

뚱보는 뜻하지 않은 횡재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딸을 향해 말했다.

"얘야, 이 금덩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살 수 있단다. 내 아형보다 더 좋은 걸 사줄 테니까 그 아형을 이분께 파는 게 어떻겠니……?"

"더 좋은 거 뭘 사줄 건데요? 약속을 꼭 지키시는 거죠?"

딸도 싯누런 금덩이를 보자 은근히 욕심이 나서 짐짓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녀는 두말없이 황약사의 손에 아형을 넘겨주었다.

황약사는 아형을 받아 들기가 무섭게 청지기가 하던 대로 꽃잎을 한 잎 두 잎 펼쳐 놓았다. 그러자 역시 절세미인의 얼굴이 뚜렷이 나타났다. 여인은 두 손에 책을 펼쳐 들고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듯싶었다. 한 송이 꽃과도 같이 아름답고 갸름한 얼굴에 매끄럽고 쏙 빠진 몸매가 천상 선녀 같았다. 여인의 밑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서시 (西施)는 사수에서 미역을 감고

옥환(玉環)은 궁궐에서 연지 곤지 찍네

왕장(王薔)의 아경 소리 애간장 태우는데

소군(昭君)이 떠나가네, 고국 산천 등지고서.

황약사가 보기에 그림도 좋지만 시 또한 멋들어 졌다.

짧디짧은 시구에 세상의 경탄을 자아냈던 네 명의 전세 가인, 그 여인들의 삶의 과정을 얼마나 절묘하게 표현했는가! 황약사는 시를 지은 이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필치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황약사는 말없이 홱 돌아서더니 터벅터벅 층계를 내려가 객점으로 향했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갔다. 보름날 황약사는 품속에 아형을 감추고 일찌감치 골동품 가게로 찾아갔다. 한참이나 기다려서야 문이 열렸다. 황약사가 들어서자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뭘 사시려는지요?"

황약사는 건성으로 눈인사를 하고는 진열대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동쪽에 놓인 진열대가 비어 있었다. 약삭빠른 가게 주인은 얼른 눈치를 채고 살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아형을 찾으시나 보군요?"

황약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가게 주인이 말했다.

"너무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좀 있으면 웬 계집애가 물건을 가지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약사는 알겠다는 듯 빙긋이 웃어 보였다.

한참 기다리고 있노라니 주인 말대로 여남은 살 죄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큼직한 두 눈이 여간 또렷해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자기를 지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게 주인 앞으로 조심조심 다가가더니 진열대 위에 통통한 손을 올려 놓았다. 가게 주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깜찍한 것 같으니. 오늘도 아형을 갖고 왔겠지?"

그러자 소녀는 손을 펴든 채 수줍게 웃어 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좋아, 그럼 먼저 값을 치러 주지."

가게 주인은 너털웃음을 치면서 계집애의 통통한 손바닥에 계란만한 은덩이를 슬쩍 놓았다.

"자, 이젠 아형을 보여 줘야지?"

황약사는 한쪽에 비켜서서 슬며시 건너다보고 있었다.

계집애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조심조심 꺼냈다. 가게 주인은 이 소녀가 번번이 희한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므로 두 눈을 크게 Em고 지켜 보았다.

소녀가 보따리를 풀어놓자 그 안에서 네모 반듯한 물건이 나왔다.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데 복판에 파랗고 노란 줄이 두어 줄 있었다. 찬찬히 보니 가장자리는 새하얀 은테를 둘렀고 그 속은 수정과 마노, 진주 등속으로 풍경화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 수정으로 만든 골동품은 네 면이 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고 슬쩍 들었다 놓으면 번번이 풍경이 변하곤 했다. 실로 만화경 같은

진귀한 세공품이었다.

가게 주인이 입이 함박만해서 손뼉을 쳤다.

"과연 멋진 물건이군! 한데 이걸 뭐라구 하지?"

소녀가 방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주인님 말씀에 의하면 산수백도(山水百圖)라고 해요."

소녀와 주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게 안에는 어느새 대여섯 명의 손님이 더 들어섰다. 그 속에는 유 뚱보와 꺽다리 늙은이도 끼여 있었다. 모두들 산수백포를 보려고 야단이더니 마침내 흥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 뚱보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파시오. 은 백 장을 내놓겠소!"

"난 1백50냥을 내겠소!"

늙은이가 소리쳤다. 그러자 어느새 끼여든 청지기가 값을 올렸다.

"난 2백 냥이오!"

값은 3백에서 3백50냥, 4백 냥까지 올라가더니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황약사는 옆에 서서 조용히 웃고 있는 계집애를 보고 넌지시 물었다.

"얘야, 저렇게 자그마한 노리개를 어떻게 4백 냥이나 받는다는 게냐?"

계집애는 살짝 눈을 치뜨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은 7백 냥을 받지 못하면 천천히 팔아도 좋으니 가게에 맡겨 두라고 분부했어요."

원래 이 아형이라고 하는 희한한 물건들은 동쪽 진열대에 있는 흰 소반 위에 놓고 팔게 되어 있었는데 이 놈의 물건이 워낙 진귀한 세공품이다 보니 진열해 놓기 바쁘게 팔리곤 했다. 매달 보름께면 숱한 장사치들이 몰려와 기다리다가는 티격태격 경매를 붙이고 부리나케 들고 가는 판이었으니 동쪽 진열대가 늘 비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젠 값을 더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 산수백도는 자연 4백 냥을 부른 사람이 가져가게 될 판이었다. 그는 바로 지난달에 비단꽃을 사갔던 뚱보였다. 아무리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세공품이라 해도 4백 냥이나 주고 사 간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이 계집애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얘야, 이 산수백도를 은 4백 냥에 팔겠느냐?"

계집애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께선요, 7백 냥 밑으로는 팔 수가 없으니까 이 집에 맡겨 천천히 팔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뚱보는 산수백도를 두 손에 쥔 채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산수백도와 둘러선 사람들을 번갈아 보더니 펄쩍 뛰면서 화를 냈다.

"7백 냥을 낼 만한 양반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서 보시오!"

좌중이 잠자코 있자 뚱보는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소! 내가 7백 냥을 내고 사 가겠소!"

뚱보는 묵직한 은덩이를 진열대 위에 내놓고 산수백도를 옆구리에 끼고 나가려고 했다.

황약사가 비로소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황약사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가게 주인과 손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니, 이처럼 진귀한 보물을 7백 냥에 파신다니 혹시 농담이 아니신지요?"

좌중의 시선이 황약사에게로 몰렸다. 누군가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물었다.

"그렇다면 이 산수백도가 얼마에 팔릴 수 있다는 말씀이오?"

"적어도 천 냥은 갈 것이_2_!"

좌중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산수백도를 재치 있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천 냥이나 값을 매긴단 말인가.

좌중은 기가 막히다는 듯 황약사를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뚱보는 느닷없는 황약사의 출현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와 감히 경쟁할 엄두조차 못 내고 속으로 욕만 퍼부어 댔다.

황약사가 소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천 냥이면 어떻겠느냐?"

계집애는 황약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씽긋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은 이번에 천 냥이나 낼 양반이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황약사는 히죽이 웃으면서 은표(銀票) 두 장을 내놓은 뒤 산수백도를 쥐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못박인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소녀도 가게를 나왔다. 묵직한 은덩이를 품속에 감춘 소녀는 얼굴 가득 함빡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황약사가 조용히 소녀의 앞을 막아 서며 말했다.

"얘야, 너희 주인님을 좀 만나 봬야 하겠는데 날 좀 데려다 주겠니?"

소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종알거렸다.

"안 돼요. 저희 주인님은 만나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한 번만 말씀드려 주거라. 황약사라는 사람이 만나 뵙자고 한다구 말이야."

황약사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점잖게 부탁하자 소녀는 입을 싸 쥐고 키득거렸다.

"황약사라, 이름만 들어 봐도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의원님 같네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은 아무 병도 없는 걸요, 뭐."

소녀는 쌀쌀맞게 대꾸한뒤 황약사를 남겨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소녀는 큰길에 들어서자 가마를 불렀다. 소녀가 탄 가마는 나는 듯이 달려 임안성 남대문에서 멈춰 섰다. 가마에서 내린 소녀는 값을 치른 뒤 다시 마차로 바꾸어 타고 성밖으로 질풍같이 달려갔다.

황약사는 널따란 소맷자락을 휘휘 날리며 마차의 뒤를 쫓아갔다.

마차는 호숫가에 있는 호전한 나루터에 와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소녀는 나루터에 가서 뱃사공을 불렀다. 그녀는 배를 타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갔다.

황약사도 배를 타고 뒤를 쫓았다. 두 배가 연달아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에 닿았다.

섬에 오른 황약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소녀의 뒤를 밟았다. 버드나무숲을 지나 대숲을 돌아가 보니 울타리를 알뜰하게 둘러친 아담한 초가 한 채가 나타났다.

황약사는 삽짝 밖에 서서 점잖게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가 만나 뵙고저 찾아왔소이다!"

연신 세 번이나 소리친 뒤에야 아까 보았던 소녀가 집에서 나오면서 눈을 흘겼다.

"아니, 끝내 뒤쫓아왔네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 여기까지 찾아올 건 뭐예요!"

"미안하다. 아형을 만든 걸 보니 하도 솜씨가 좋은 분인 것 같아 꼭 만나 보고 싶구나."

"아무렴요, 솜씨가 좋구말구요. 주인님의 귀신 같은 솜씨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깐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은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데 어떡하겠어요?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소녀는 쌀쌀맞게 대꾸한 뒤 삽짝문을 걸어 닫고 되돌아 들어갔다.

황약사는 조그만 계집애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어정어정 호숫가의 버드나무 밑에 가서 무료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온종일 밥 한술 뜨지 못한 터라 나무창 열 개를 만들었다.

"열 마리면 족해. 그 이상은 먹을 수가 없으니까."

황약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나무창 하나를 쏜살같이 호수에 던졌다. 나무창이 물 속에 박히는 순간 수면 위로 팔뚝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떠올라왔다. 황약사의 손이 연달아 움직일 때마다 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불현듯 누군가가 손뼉을 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멋져라! 손님처럼 고기를 잡으면 그물도 필요 없겠네요. 저한테도 좀 가르쳐 주세요, 네?"

황약사가 돌아다보니 바로 눈이 큰 계집애였다. 소녀는 손뼉을 치다 말고 새침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고기들을 무슨 수로 건져 내겠어요? 아유, 아까워라……."

황약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했다

"왜 방법이 없겠나?"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삭은 나뭇가지를 주워 호수에 던지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나뭇가지 위에 올라탔다. 그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로 날렵하게 물 위에 뜬 고기를 낚아 올렸다.

곧 기슭에 올라온 황약사는 물고기를 주섬주섬 가려 놓으면서 계집애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봐라, 물고기를 건져 오는 수가 얼마든지 있지!"

계집애가 또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제발 저한테도 가르쳐 줘요. 저희 주인님이 생선국을 잡숫고 싶어할 때마다 이런 방법으로 잡으면 얼마나 재밌겠어요?"

황약사는 빙그레 웃어 보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나 허기가 져서 계집애와 시시덕거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황약사는 불을 지피려고 삭정이를 긁어 모았다. 그러자 계집애가 손을 홰홰 저으며 막아섰다.

"안 돼요, 불을 지펴서는 안 돼요!"

황약사가 어이가 없어 까닭을 묻자 계집애가 말했다.

"저희 주인님은 연기를 쏘이면 대나무들이 죽는다고 함부로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해요. 참 깔끔한 분이거든요!"

황약사는 기가 막혔다. 불을 지필 수가 없다면 날생선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심술궂은 계집애는 재미있다는 듯 키들키들 웃어댔다. 그제야 황약사는 계집애의 고약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흥, 요 놈의 쬐끄만 계집애가 이 어른을 곯려 줄 셈이로구나. 그래 불이 없다고 이 황약사가 날생선을 먹을까?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

황약사는 물고기들을 하나하나 꼬챙이에 째어 휘청하니 처진 나뭇가지에 달아매고 마주앉았다. 그는 두 손을 쫙 펴서 물고기에 갖다 대었다.

계집애는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뿌지직뿌지직 소리가 나면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노랗게 구워졌고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계집애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황약사는 노랗게 구워 낸 물고기를 게걸스럽게 발라 먹고 나서 같은 방법으로 연달아 다섯 마리나 구워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그는 입을 닦아 내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계집애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황약사는 피식 웃고는 해묵은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내공을 가다듬은 뒤 어느덧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늘어지게 잤을까? 문득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듯한 여인의 음성에 번쩍 눈을 떴다.

"공자님은 무슨 연고로 여기에 오셨고 또 누구를 찾고 계시는지요?"

황약사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한 여인이 서 있었는데 낮에 만난 계집은 분명 아니었다. 황약사는 혹시 낮에 찾아갔던 초가집 주인의 따님이 아닐까 하여 바삐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점잖게 읍을 했다.

"소저를 놀라게 했다면 용서하시오. 저는 저 초가집 주인님을 만나 뵙고저 찾아온 도화도의 황약사란 사람이올시다. 아무쪼록 만나 뵙잔다구 전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여인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조용히 물었다.

"아니, 초가집 주인을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저에게 알려 줄 수는 없사온지요?"

"말씀을 드리지요. 저 임안성에 골동품 가게가 한 집 있는데 제가 그 집에서 두 가지 신기한 물건을 샀답니다. 가게 주인은 물론이고, 모두들 그 물건을 일컬어 아형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아형은 저 초가집 주인 어른이 만들어 낸 것 같은데, 그토록 절묘한 아형을 만들어 낸 분과 금기서화(琴棋書畵)며 천하의 기묘한 손재간에 대해 담론하고 싶어서입니다."

여인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지껏 공자님은 누가 아형인 줄을 모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황약사는 비로소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크게 놀랐다. 일찍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달걀빛 같이 희고 반듯한 이마에 반달형의 눈썹,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눈, 붉고 야무진 입매, 가늘고 긴 목을 타고 흐르는 듯한 아담한 어깨, 실버들같이 가녀린 몸매……. 달빛에 부드럽게 싸여 있는 그녀의 자태는 황약사의 혼백을 빼앗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제4장 색에 반한 사내들

황약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호젓한 호숫가에서 절세의 가인을 만날 줄이야! 그러나 황약사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부탁했다.

"어서 댁에 돌아가서 주인님을 만나 뵙잔다구 한마디 여쭈어 주시오, "

"대관절 무슨 일인데요?"

여인이 미소를 떠올리며 묻자 황약사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여인 앞에 불쑥 내밀었다. 바로 한 송이 비단꽃이었다.

"이 꽃을 좀 보시오. 얼마나 절묘하게 만들었소? 이 비단꽃을 만든 댁의 주인님을 꼭 만나 보고 싶소."

여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살짝 비단꽃을 집어 코끝에 가져다 대더니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향기가 없네요."

황약사는 속으로 개탄했다.

'참 용모가 아깝구나. 하늘의 선녀같이 아리따운 여자가 왜 저리도 무식할까? 이처럼 기묘한 비단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딴 소리인가? '

여인은 황약사의 눈치를 알아차린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꽃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우아해야 하는데 어떤 꽃은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길이 없으나 어떤 꽃은 길가에 피어 있어도 오히려 꺾어 가지 않는답니다. 그러므로 우아한 것을 최고로 친답니다. 둘째로는 믿음이 있는 꽃이어야 합니다. 우담화(雲花)처럼 한밤중에 갑자기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더라도 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고이고이 지키는 열녀처럼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꽃은 아무데서나 사철 피는 것이 있는데 그 줏대 없는 천박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지요. 셋째로 꽃이란 향기로워야 합니다. 좋은 꽃의 향기는 맑고 부드러운 법이라 그 향이 너무 자극적이어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지요. 그런데 이 꽃은 우아한 멋은 있으나 믿음이 부족하고 더욱이 향기가 전혀 없습니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호수를 향해 들고 있던 꽃을 힘껏 던져 버렸다.

황약사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리쳤다.

"아니, 남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산 꽃을 함부로 버리다니! 저 꽃은 천하없이 진귀한 꽃이오! 저 꽃 속엔 그림도 있고 시도 있는데 모두 다 걸작들이지. 어디서 다시 저런 보배를 구경이나 하겠다고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시오!"

그의 말에 여인은 가벼운 미소로 되물었다.

"저것을 얼마에 사셨는데요? 아마도 이만한 은전이면 본전이 되고도 남을 거예요."

그녀는 묵직한 주머니를 황약사의 발치에 던졌다.

황약사는 그만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지? 겉보기와는 영 다른 여자로구나. 남의 값진 물건을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호수에 처넣고도 오히려 제 쪽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나 원, 살다보니 별일을 다 당하는구나.'

그러나 여인은 그의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면서 실실 약올리듯 말했다.

"공자님에게 또 뭐가 있나요? 어디 구경 좀 해요."

황약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홧김에 품속에 있던 산수백도마저 꺼내 보였다.

"천하의 산이나 물은 본디 움직이는 법이오. 산이 돌고 물이 흐느끼는 고로 우리가 비로소 천지의 영기를 느낄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이 산수백도야말로 신령스럽고 영묘한 자연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 준다고 하겠소. 실로 댁의 주인 어른은 재기가 뛰어난 양반이오!"

"얼마나 훌륭한가 한번 좀 보죠."

여인은 여전히 미소 떤 얼굴로 하얀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황약사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어수룩하게도 여인의 손에 산수백도마저 넘겨주고 말았다. 여인은 산수백도를 대강 훑어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황 공자님, 이게 무슨 산수백도입니까?"

그녀는 거리낌없이 은으로 된 테를 뜯어 버리고 양면의 수정을 들어 보였다.

"보세요, 절묘하긴 뭐가 절묘하죠? 꽃가지며 모래알 따위를 넣고 얼렁뚱땅 눈속임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잖아요."

여인은 말을 마치자 수정을 기울여 수정 틈에 넣은 꽃가지며 모래알 등을 주르르 쏟아 버렸다.

황약사는 기가 막혀 멍하니 쳐다볼 뿐 말이 안 나왔다. 세상에 저렇듯 제멋대로인 여자가 다 있다니!

여인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참 딱하시군요. 아까운 돈을 퍼주고 이따위 물건을 사오다니요? 아무튼 눈이 멀어도 이만저만 멀지 않았군요. 제가 드린 이 돈을 가져다 쓰시고 다시는 남한테 속지 마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홱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황약사가 급히 막아 섰다.

"이런 경우 없는 짓이 어딨소? 남의 귀중한 물건들을 함부로 망가뜨려 놓고 어디로 가는 거요?"

여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대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 드리지 않았나요?"

"하하, 사람을 잘못 보셨군! 이 황약사는 금전 따위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오! 아무튼 아가씨가 남의 물건을 못쓰게 만들었으니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겠소."

여인은 잠시 잠자코 서 있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긴 머리칼이 미풍에 나부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내음이 살랑살랑 전해왔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난초나 사향보다도 그윽하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황약사는 여인의 향기에 취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여인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초가집 주인은 뭣 땜에 찾아오셨죠? 아예 만나 보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면 제 말을 믿어 주세요."

황약사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여인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가슴은 허전하고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천하의 아름답다는 여인들을 두루 만나 보았지만 방금의 저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선녀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뒷모습만 보아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황약사는 순간 일속 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일속 스님이 말씀하신 여자가 바로 저 여자가 아닐까?'

하지만 황약사는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동해 도화도의 당당한 방주로서 잠시 스치듯 만난 여자에게 반해서 오금을 쓰지 못하다니 될 말인가! 그는 밤도 깊고 하니 한잠자고 내일 아침에나 주인을 만나 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황약사는 들뜬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나무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말뚝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느덧 뿌옇게 날이 밝아 왔다. 황약사는 세수를 하기 위해 호숫가로 나갔다. 그가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아 물 한 움큼을 떠서 얼굴을 적시려는 참이었다. 맞은편 갈대숲 너머로 7, 5척쯤 되는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져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배들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뱃머리에 나와 섰던 한 사내가 이쪽에 대고 고함을 쳤다.

"섬사람들은 잘 듣거라. 우리 주인 어른께서 아형을 만나 보려 하시니 얼른 아형한테 알려 주길 바라노라!"

선두에 선 배는 자그마한 .거룻배인데 갈대숲 언저리에 잠깐 멈춰서더니 웬 사나이가 뱃머리에 올라섰다. 얼굴은 온통 구레나룻으로 덮이고 입은 귀밑까지 째졌는데 축 늘어진 매부리코만 보아도 호색한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매부리코가 제법 점잖게 두 손을 맞잡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호룡왕(湖龍王) 필소해(畢帶海)가 찾아와 만나 뵙기를 청하오!"

황약사는 점점 더 호기심이 동했다. 이 호수에서 호룡왕으로 자처하는 자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아형의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황약사가 다시 바라보니 화려하게 꾸민 꽃배 한 척이 배들 속에서 빠져 나와 앞으로 나섰다. 뱃머리에는 무려 열여섯명의 예쁘장한 소녀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봉긋하게 트레머리를 하고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선실에서 귀엽게 생긴

공자가 걸어 나왔다. 공자는 뱃머리에 나와 서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치음(痴吟) 공자가 만나 뵙고저 찾아왔으니 아형은 나와서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을 들어 보시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가집 삽짝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 아형이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섬사람들도 몰려 나와 황약사 옆에 서서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갈대숲 언저리에서 치음 공자네 꽃배를 제치고 커다란 배 한 척이 또 들어섰다. 꽃배와는 달리 배 전체가 한 송이의 커다란 꽃을 방불케 했는데 그 향기가 호숫가에까지 진동했다. 아마도 선실에 천하의 이름난 화초들을 싣고 온 모양이었다. 뱃머리에는 역시 미목이 수려한 공자가 서 있었다.

"어허, 미화(迷花) 공자로군!"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혀를 찼다.

황약사는 어느 정도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두 배에 나누어 탄 두 공자는 다시 말해 하나는 음률에 미친 치음 공자요 하나는 화초에 미친 미화 공자인 것이다.

'한데 저 두 놈이 뱃머리를 맞대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황약사가 이런 생각을 굴리며 건너다보니 치음 공자 쪽에서 미화공자 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게 미화 공자, 오늘 열엿샛날이 아닌가? 열닷샛날에는 달이 둥글어지고 열엿샛날부터는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이거늘 하필이면 하루 늦게 올 건 뭔가?"

미화 공자가 넉살좋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보게 치음이, 달이 둥글면 소리가 맑아지고 달이 이지러지면 음도 흐려지는 법이거늘, 자넨 음률에 밝다는 사람이 왜 오늘 왔는가?"

"미화, 미화라……. 말 그대로 화초에 미친 양반이겠는데 왜 천하의 기화이초에는 관심이 없고 아형만을 찾아오는 건가?"

치음 공자가 실실 웃으며 빈정거리자 미화 공자도 슬쩍 웃으며 받아넘겼다.

"여보게 치음이, 요즘엔 한나라의 명인 채문희(蒙文姬)가 지은 〈호가십팔박〉을 익히느라고 꼬박 두 달 동안이나 집안에 붙박여 있었다지? 하지만 참새가 황새 걸음하면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야!"

그 말에 치음 공자가 입귀를 일그러뜨리며 성을 냈다.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인가?"

"천만에, 어찌 임자를 허투루 볼 수가 있겠나?"

미화 공자가 너스레를 떨자 치음 공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겨보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듣자니 천하에 다시없는 진귀한 화초를 구해 왔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꽃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상히 생각해서 하늘이 한 떨기 꽃송이를 내려 보낸 것 같네. 아마 자네도 보면 찬탄을 금치 못할걸?"

치음 공자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화 공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도박쟁이가 웬일로 오지 않지?"

치음 공자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대꾸했다.

"오늘은 아마도 자네와 나의 겨룸이 되겠군."

두 사람이 한창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초가집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골동품 가게에서 만난 그 소녀였다. 그녀는 시원스러운 눈동자에 활기를 띠고 섬사람들 앞으로 냉큼 나서면서 꽃배 쪽에 대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지난번에 오셨을 땐 저희 주인님에게 〈대아(大雅)〉라는 곡을 들려주셨지요? 그런데 그 곡은 너무 길고 지루해서 막 졸음이 올 지경이더군요. 오늘은 좀 짧은 것으로 들려주세요!"

치음 공자는 픽 쓴웃음을 지었다.

'흥, 너 같은 종년이 어찌 〈대아〉의 우아함을 알 수가 있겠느냐? 이제 〈호가십팔박〉을 연주해도 네 년한테는 역시 소 귀에 경 읽기가 될거다. 하지만 아형이 들으라고 연주하는 것이니까 네깐 년은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소녀는 이번에는 미화 공자 쪽에 대고 소리쳤다.

"미화 공자님, 지난번에 가져온 '십팔수재(十八秀才)'라는 꽃이 기억나세요? 한데 저희 주인님이 보시더니 별로 희한한 꽃이 아니래요. 오늘 갖고 온 꽃은 어떤 꽃이지요?"

미화 공자는 뱃전에 나서며 대꾸했다.

"약속대로 천하에 다시 볼 수 없는 기화이초를 가져왔으니 이제 곧 주인님께 보여 드릴 수 있을 게다."

"알겠어요. 그런데 두 분 공자님은 오셨는데 내기를 좋아하는 공자님은 보이지 않네요?"

"아마도 임안성 투전놀이에서 본전마저 뜯기고 나니 이리로 올 흥이 안 났던 게지."

미화 공자가 빈정대듯 말하자 치음 공자도 맞장구를 쳤다.

"암, 그렇고말고. 설사 여기에 온들 제깐 놈이 우리를 당할 수가 있을라구? 자칫하면 아형에게 쫓겨나기가 십상이지!"

두 공자는 동시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계집애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두 공자님께서 먼 길을 오셔서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신 만큼 그냥 돌아가게 할 수는 없군요."

그러자 두 공자가 히죽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어느 공자의 것을 먼저 볼까요?"

소녀의 물음에 두 공자는 자기의 것을 먼저 보이겠노라고 옥신각신했다. 두 사내는 조금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한참이나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더니 각자의 뱃머리에 마주서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두 사내는 성난 수탉처럼 화닥닥 튀어올라 허공에서 맞붙었다. 번개 같은 장이 몇 번 오가더니 두 사람은 각자의 뱃머리로 돌아갔다. 같은 장면이 한 차례 더 반복됐다.

황약사는 두 사람의 무공에 은근히 탄복했다. 후닥닥후닥닥 두번 솟구쳐 올라 맞붙어 도합 여섯 장이 오갔는데 장력으로 말하면 미화 쪽이 드센 편이요, 장법으로 말하면 치음 쪽이 날쌘 편이었다.

미화 공자가 읍을 하며 정중히 말했다.

"임자의 장법이 귀신 같구려."

"임자는 내력이 장사 같구려."

치음 공자 역시 빙긋이 웃으며 답례했다.

두 공자의 행동거지를 지켜 보고 있던 계집애가 재촉했다.

"아니, 무슨 의논이 그리 길어요? 아무 쪽에서나 빨리 하란 말예요. 나 원, 명 짧은 사람은 숨 끊어지겠네!"

두 공자는 서로 순서를 양보하더니 결국엔 미화 공자 쪽에서 먼저 꽃을 가져다가 아형에게 보이기로 했다.

미화 공자는 마치 큰일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판의 널빤지 하나를 밀어내더니 그 밑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서 받쳐들었다.

"참 희귀한 꽃이로군!"

호숫가에서 구경하던 섬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다.

꽃은 가지나 잎사귀가 좀 성글어 보이긴 했으나 이를 데 없이 소담하고 청초했다. 꽃송이들은 운치가 있고 가지는 정이 있으며 줄기는 기세가 있고 뿌리는 든든했다. 말 그대로 운(韻), 정(情), 세(勢), 근(根)을 다 갖추었으니 실로 진귀한 꽃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 꽃은 향기 또한 신비로웠다.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데, 아무튼 콧구멍으로 들이 마시면 정신이 상쾌

해졌고 입으로 들이 마시면 삼복염천에 심산벽곡의 약수 한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온몸이 시원해졌다. 꽃가지는 더더욱 아름답고 싱싱했다. 꽃 빛깔은 연한 자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졌는데 얼핏 보면 목련꽃이나 월계화, 장미꽃 같기도 하였으나 찬찬히 보면 셋 중의 어느 꽃과도 달랐다.

미화 공자는 화분을 받쳐든 채 배 위에서 살짝 뛰어내렸다. 그는 계집애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화분을 넘겨주었다.

"미안하지만 이 화분을 아형에게 가져다 보여 주렴."

소녀는 화분을 받아 안으면서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자님, 이건 '오십수재(五十秀才)'라는 꽃이 아닌가요?"

소녀의 물음에 미화 공자는 눈을 치떴다.

"오십수재? 네가 어떻게 오십수재를 알지?"

"가만 세어 보니 크고 작은 꽃송이가 도합 오십 송이더군요. 그러니 오십수재일 수밖에 없지요, 뭐."

"정말 딱하구나! 이 귀한 꽃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미화 공자는 한심하다는 눈길로 소녀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소녀가 바짝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꽃이에요?"

"이것은 '삼신(三信) '이란 꽃이다."

"이렇게 이쁜 꽃을 삼신이라고 이름짓다니요? 삼신이라, 세 사람이 믿는다는 뜻인가요? 세상에, 무슨 이런 꽃이름이 다 있담?"

미화 공자는 그만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잔말 말구 어서 가져다 보이기나 해! 아무튼 천하에서 제일 가는 꽃이니까."

한식경쯤 지났을까. 집으로 들어갔던 소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미화 공자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화분을 들고 총총히 호숫가로 내려왔다. 소녀는 화분을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호숫물을 떠서 꽃잎과 줄기들을 씻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화 공자에게 꽃을 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타부타 말이 없이 호숫물을 떠서 꽃을 씻기만 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처녀애의 거동을 지켜 보았다.

황약사도 소녀의 하는 양을 지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형은 미화 공자가 가져온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미화 공자의 얼굴은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훌쩍 몸을 솟구쳐 호숫가에 내려서더니 화분을 낚아채어 가지고 다시 껑충 몸을 솟구쳐 배에 올라섰다.

"돌아가자!"

미화 공자는 몹시 화가 나서 부하들을 다그쳐 급히 그곳을 떠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치음 공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녀를 보고 점잖게 읍을 하며 부탁했다.

"아가씨, 수고스럽지만 아가씨의 주인님께 한마디 전해 주시오. 이 치음이 〈호가십팔박〉을 연주할 터이니 들어 보시라고요."

소녀는 다시 피식 웃음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삽짝문과 방문이 꽁꽁 닫혀 있는 초가집은 따스한 햇빛에 조는 듯이 보였다.

치음 공자는 껑충 배 위에 뛰어올라 죽 늘어선 열 여섯 명의 아가씨들 사이를 나는 듯이 오가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기도 하고 악기를 바로잡아 주는 등 순식간에 준비를 끝냈다. 그는 뱃머리에 우뚝 서서 마음을 가다듬는 듯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손가락 툭 튕겼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배 위가 쥐죽은듯 잠잠해지더니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닌게아니라 절통하고 비장한 〈호가십팔박〉이었다. 곡조는 점점 처량해졌고 그 곡조에 도취된 섬사람들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철썩 치며 한탄하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황약사도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호가십팔박〉은 부드러우면서도 애상적인 강남의 곡조와는 판판 달랐다. 천군만마가 내닫고 창과 칼이 어우러지는 소리,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 〈호가십팔박〉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막한 사막에 서 있는 듯싶었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소녀가 다시 나왔다. 그녀는 사립문을 열고 한들한들 꽃배 앞으로 걸어왔다.

치음 공자는 촉촉히 젖은 두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소녀가 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까지 상심할 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채문희란 여자는 평생에 세 번 시집을 갔지요. 첫 남편 위중도(衛仲道)와는 부부간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러다가 흉노들에게 잡혀가 흉노인의 아내가 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흉노인들 속에서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살았다는 건 다 꾸며 낸 얘기지요, 뭐. 그렇게 싫었으면 어떻게 아들을 둘이나

낳아 줬겠어요? 사실은 그쪽에 가서 호강을 한 셈이지요. 후에 누군가 채문희를 흉노 부락에서 빼내 온 다음에 조조가 나서서 동사(臺視)라는 벼슬아치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래요. 동사가 흉노 부락에 사신으로 갔다가 채문희를 보고 서로 눈이 맞아 남모르게 탈출한 것이지요. 그러니 채문희란 여자가 평생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앉으면서 호강을 한 것 외에 뭐가 더

있어요? 아무튼 저희 주인님 말씀은요, 공연히 채문회의 아비 되는 채염을 대신해서 통곡할 까닭은 없다는 거예요. 호호……."

치음 공자는 소녀 앞에서 민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하기는 그 말이 옳군. 채염도 평생 자손을 많이 두고 희희낙락하며 살았거늘 내가 공연히 채문희를 위해 눈물 콧물 흘리며 애간장을 태울 까닭은 없지. 아가씨네 주인장의 말씀을 들어 보니 〈호가십팔박〉이란 것도 다 쓸개 빠진 연놈들이 하릴없이 뚱땅거리는 곡조에 지나지 않구만."

치음 공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잡시 후 왈칵 피를 토하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놀란 하인들이 좌우에서 황망히 그를 부축해 세웠다.

치음 공자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옛날,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 백아(伯牙)도 그 소리를 잘 알아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지음(知音)이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하는데, 나 치음 공자도 지음이 없는 이 세상에서 구태여 호가든 공후든 탈 재미가 없구나! 이젠 돌아가서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리라!"

그는 다시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옆에 늘어선 아가씨들의 손에서 악기들을 빼앗아 닥치는 대로 줄을 끊고 짓밟아 뭉개서 호수에 처넣었다. 그리고 나서 초가집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하고, 이 계집 저 계집 얼싸안고 희희낙락거리며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섬사람들도 삼삼오오 흩어져 돌아가자 황약사는 초가집 울타리로 가서 삽짝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다 말고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려 보았다. 이것은 분명 예삿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삽짝문의 참대 가지들을 일일이 튕겨 보았다. 맑고 둥글고 부드러운 소리가 차례로 울려 나왔는데 그 소리들은 다름아닌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였다.

황약사는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돌아간 치음 공자의 〈호가십팔박〉도 이 삽짝문이 내는 소리에 비하면 헌 수레 굴러가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황약사는 바짝 호기심이 동해서 삽짝문을 거문고 삼아 다루어 보았다. 그는 〈시경 (詩經) · 정풍(鄭鳳) · 풍우(風雨)〉라는 곡조를 튕겼다. 이 곡조는 그리던 님과 상봉하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황약사의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너무나 알맞은 곡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조금 전의 그 소녀조차 나와 주지 않았다. 황약사는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인이 전혀 상대를 해주지 않는데 무턱대고 뛰어들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문득 집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느닷없이 들려 왔다. 마치 정다운 님과 속삭이는 듯한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 그것은 분명 〈학명(鶴嗚)〉이라는 곡조였다. 그 거문고 소리는 창공을 유유히 나는 학의 울음 소리마냥 속세를 벗어난 청고하고도 부드러운 소리였다. 누가 이렇듯 거문고를 타는 것일까? 황약사가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거문고 소리가 가뭇없이 끊겼다. 황약사는 문밖에서 잠시

머뭇대다가 크게 소리쳤다.

"동해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주인장을 만나 뵙고저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삐걱 열렸다. 소녀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생글생글 웃더니 쪼르르 달려 나와 삽짝문을 열며 비켜섰다. 방긋 웃어 보이는 품이 들어와도 좋다는 눈치였다.

"주인님께서 공자님의 지성에 감복하셨는지 저더러 모셔 들이라는 분부십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황약사는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열어젖힌 방문 안쪽에는 꽃비단과 색실로 만든 봉황새가 매달려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향긋한 분내가 감돌았고 거문고 한 틀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계집애의 침실인 것 같았다. 황약사가 방 안을 두루 살펴보는데 어느새 따라 들어온 계집애가 안방으로 통하는 문에 드리운 오색 휘장을 슬쩍 젖히면서 재촉했다.

"공자님, 저희 주인 아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자, 드시지요."

황약사가 점잖게 안방에 들어서니 웬 아리따운 여인이 조용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바로 어젯밤 호숫가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멀리서 찾아오신 공자님을 어젯밤 소홀히 대했군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여인이 미소 띤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 쪽에서……."

황약사는 얼른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이 여인의 아버님을 꼭 만나 보아야겠는데…….'

황약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주인장은 어디 계시는지요? 미안하지만 이 집 주인장을 좀 만나 뵙게 해주시오."

그의 말에 여인이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자 소녀도 입을 싸쥐고 키득거렸다. 황약사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여인이 오른손으로 곱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이 집 주인이고 이름은 아형이라 합니다."

황약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 소저가 바로 아형이고 아형이란 바로 이 눈앞에 있는 절세의 미인이란 말인가?'

황약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한편 멀지 않아 아름다운 처녀와 연분을 맺게 될 것이라던 일속 대사의 말이 떠올라 새삼스럽게 아형을 건너다보았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아형이 빙긋이 웃으며 등의자를 내주었다. 황약사가 앉자 그녀가 물었다.

"공자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임안성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낭자가 만든 두 가지 물건을 본 바가 있소. 하도 정교하게 만들었는지라 낭자의 뛰어난 솜씨에 탄복하여 체면불구하고 찾아오게 된 것이오."

아형은 살짝 볼우물을 만들며 웃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실은 저희는 아녀자로서 밭갈이나 고기를 잡는 일은 하기가 어려우니 하잘것없는 노리개나 만들어 품팔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아형이 이렇듯 겸손하게 나오자 아무리 말주변이 좋은 황약사라도 무어라 말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형이 소녀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오게 하였다. 차를 가져오자 방안 가득 맑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황약사가 기분이 상쾌해져서 앉아 있는데 아형이 조용히 차를 권했다.

"이 태호에서 나는 연꽃차랍니다. 드셔 보시지요."

황약사는 한 모금 마시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만히 들어 보니 역시 음률에 밝은 사람이 가락이 맞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사람은 궁상(宮商)조로 삽짝문을 두드리면서 제법 소리까지 먹였다.

망망한 태호에 용선 (龍船)은 떠다니고

사나이 일성호가에 태호도 벌벌 떠네.

문득 소리가 멎더니 내력이 넘치는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려 왔다.

"태호 호룡왕 필소해가 아형 소저를 찾아왔소이다!"

그 소리에 황약사는 치음과 미화가 나타나기 전에 보았던 그 배의 주인임을 알았다. 지금껏 어디서 지켜 보다가 직접 찾아 들어온 모양이었다.

계집애가 볼이 부어 투덜대며 아형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 참, 남은 곁눈으로도 보지 않는데 자꾸만 찾아와 성가시게 구네요……."

아형은 황약사에게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황 공자님, 죄송하지만 내실에 들어가셔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 호룡왕을 돌려보낸 뒤에 다시 공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뭐."

안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새하얀 이불이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다. 침대 위에 반쯤 걷혀 있는 휘장도 역시 하얀 색깔이었다. 아름다운 처녀의 것치고는 침구들이 너무나 수수해 보였다.

황약사는 침대 옆에 놓인 두툼한 고서들을 발견하고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무심히 보풀이 인 고서를 펼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육서(六書) 중의 하나인 《(상서(脚書)》였다. 황약사는 《상서》와 같이 내용이 깊은 고서를 태호 기슭에 사는 젊은 여인의 침실에서 보게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객실에 들어온 호룡왕 필소해가 아형에게 작듯이 인사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은 아형 소저에게 특별히 인사를 하러 온 거요. 일전에 세 번이나 아형 소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었소. 이 호룡왕도 목석이 아닌 이상 그 은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 그런즉 오늘은 아형 소저를 나의 용군부인(龍君夫人)으로 삼을까 하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그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기다리던 네 사내가 저마다 묵직한 예물함을 들고 들어와 탁자에 나란히 놓고 물러섰다.

"자, 함을 열거라!"

필소해가 큰소리로 호기롭게 분부하자 한 사내가 성큼 나서서 예물함 뚜껑을 열어젖혔다. 순간 오색찬연한 기운이 온 방안에 넘쳐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함 속에는 반짝이는 진주가 가득했다. 필소해는 진주와 아형을 번갈아 보면서 히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고로 아름다운 여자는 진귀한 구슬을 선물로 주고 맞아 온다 하여 인마를 풀어 이 태호 바닥을 석 달이나 뒤져서야 이만큼 모을 수가 있었소. 이 열 말 되는 진주를 이 호룡왕의 성의로 알고 기쁘게 받아 주면 좋겠소."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두 번째 예물함을 열게 했다. 그 속에는 족자 세 폭이 들어 있었는데, 필소해는 부하들에게 족자를 펼쳐 들게 하고는 느릿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그림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백룡도(百龍圖)〉라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백룡도〉가 오도자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오. 또 이 〈백룡도〉말로 이 호룡왕 필소해를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백 마리의 용이 너울너울 창공을 나는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오! 그런데 이 용들을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눈이 없소. 그 까닭은 용을 그리는 데 있어서 눈까

지 그리면 영영 하늘로 올라가 버리므로 용의 눈은 그리지 않는다고 하오, 아무튼 이 〈백룡도〉는 천하의 진품임에 틀림이 없소. 만약 소저가 쾌히 나의 용군부인이 돼주기만 한다면 이 귀중한 〈백룡도〉를 그대에게 드리려는 바요. 허허……."

아형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필소해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나머지 두 예물함마저 열 것을 분부했다. 예물함을 열어젖히자 한쪽에는 가는 금줄로 정교하게 틀어 만든 초롱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뿔이 돋힌 작은 용이 금봉황새를 칭칭 감고 있는 모양의 노리개였다. 금봉황새가 제아무리 퍼덕거린들 용의 억센 발톱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다른 한쪽 예물함에는 고서 두 권이 담겨져 있었다.

필소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반용희봉(蟠龍戱鳳)〉이란 작품은 임안성에 있는 유명한 옥공인 최호가 정성들여 만든 것이라오. 그 옥공은 전문 황가의 장식품을 만드는 사람이지. 이제 아형 소저가 내게로 시집오면 용과 봉이 손을 잡고 우리 태호방〈太湖 〉을 거느리는 격이 되지 않겠소? 그래서 특별히 최호라는 옥장이를 찾아가 부탁한 것이오. 그리고 이 두 권의 고서는 해동의 주 부자〈夫子〉네 것이오……."

그가 흥이 나서 지껄이는데 돌연 아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반짝 치켜 들며 되물었다.

"아니, 주 부자네는 이 책들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어떻게 손에 넣었나요?"

필소해가 흉물스럽게 웃으면서 큰소리를 쳤다.

"그 양반이 열 길 땅 밑에 감춰 뒀다 해도 나는 얼마든지 그걸 빼내 올 수 있거든!"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귀중한 고서를 얻게 됐지요?"

아형이 사뭇 심각하게 묻자 필소해는 한결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방법이야 간단하지요. 슬쩍 그 영감태기의 손자 놈을 잡아다가 우리 태호방 배 안에다 사흘간 처박아 두었지요. 그랬더니 그 고약한 영감태기가 고서는 가져오지 않고 사람을 띄워 금붙이며 음식 따위들을 잔뜩 보내 오더군. 그래서 이따위 금붙이는 욕심나지 않으니까 당장 그 고서 두 권만 가져오면 손자 놈을 돌려보내겠다고 했지요. 한데 이 놈의 지독한 영감태기가 고서만은 죽어도 내놓

지 못하겠다고 뻗대는 게 아니겠소? 하는 수 없이 그 영감태기의 두 아들 녀석과 그 여편네들까지 몽땅 잡아왔지. 결국 그 영감태기는 이튿날로 책을 보내 올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던 거요."

내실에 숨어 있던 황약사는 당장 뛰쳐나가 한 주먹에 필소해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썼다가 필소해를 놓치는 날에는 오히려 태호 일대의 백성들이 애꿎게 화를 입기 쉽상이었다. 황약사는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놈의 자식, 조만간에 네 놈을 요절내고야 말 테다.'

객실에서 아형이 조용히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필 방주님, 악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요? 제가 세 번이나 도와드렸건만 방주님은 되레 착한 일은 하지 않고 무고한 태호의 백성들만 해치고 있군요. 정말 유감 천만이에요.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착하신 주 부자 어른을 욕보인단 말씀에요?"

"글쎄 그 영감태기가 한사코 고서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는 걸 낸들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우격다짐으로라도 빼앗아 와야지. 흐흐……."

아형은 한마디 매섭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러자 필소해가 치근덕거리며 다가들었다

"아형 소저, 이젠 날 따라가기로 작심했겠지? 저 호숫가에는 꽃배들이 하얗게 덮여 대기하고 있소. 이제 소저만 배에 오르면 이 필소해가 친히 키를 잡고 태호방으로 모셔 갈 것이오!"

"필 방주님, 시집을 가든 안 가든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요?"

아형이 냉정하게 말했다. 필소해는 가슴이 철렁했다.

'매정한 계집 같으니라구! 그러니까 네 년은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 거 아니냐? 저 년을 억지로 잡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자니 필경 태호방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고, 이를 어쩐다?'

필소해가 난색을 짓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아형이 다시 따지고 들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필소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씩씩거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형을 잡아가고 싶었으나 아녀자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무섭거니와,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태호 바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필소해가, 그래 일개 아녀자 하나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단 말인가? '

필소해는 스스로 자신을 꾸짖으면서 아형에게는 제법 점잖게 말했다.

"아형 소저, 소저의 일생이 걸린 문제니 소저 맘대로 하구려.

아형이 미소를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니 정말 고맙군요. 이 예물함 네 개는 이렇게 하지요. 우선 이 진주 열 말은 도로 가져가세요. 남녀간에 서로 뜻이 맞고 안 맞고가 중요하지 이건 금전으로 여자의 몸을 사려는 것밖에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형의 말에 필소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장 진주함을 밖으로 내가게 했다. 부하가 예물함 하나를 부랴부랴 들고 나갔다.

아형이 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오도자가 그린 〈백룡도〉는 정말 멋진 작품이군요. 백 마리의 용이 창공을 나는 장면이니까 태호 용왕이신 필 방주님의 소장품으로는 실로 안성맞춤이네요. 이 〈백룡도〉는 모름지기 필 방주님을 보우하사 태호방을 번창하게 할 터인즉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는 보물인가 합니다."

시중을 듣던 부하가 썩 나서며 말참견을 하려고 하는데 필소해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부하는 찍소리도 못하고 예물함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반용희봉〉이라, 용이 봉황과 어울려 노닌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방주님을 용에 비길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같은 촌여자를 봉황에 비김은 당치도 않은 말씀이지요. 이 아형은 그저 태호에 조용히 숨어 사는 민녀(民女)에 불과하니까요."

급기야 필소해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이 선물도 받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도로 가져가 주세요. 하필이면 저 같은 무식한 촌여자에게 이러실 건 뭡니까?"

"그럼 이 고서 두 권도 싫다는 말인가?"

필소해는 입귀를 실룩거리며 재차 물었다. 아형은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필소해는 펄쩍 뛰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럼 이 필소해가 정성들여 가져온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고 물리칠 셈인가?"

"그래요."

아형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필소해는 급기야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 호룡왕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로구나!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잡아가야겠어. 내가 못 그럴 것 같은가?"

"아무렴요. 이 태호 바닥에서야 필 방주님의 호령 한마디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데 저 같은 촌여자야 힘이 있나요?"

"얘들아, 이 년을 당장 끌어내라!"

필소해가 격노하여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범 같은 사내 넷이 아형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필소해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떠벌렸다.

"이 어른이 곱게 모셔 가려 할 때 순순히 따랐으면 좋았을 걸 왜 돼먹지 못하게 앙탈을 부리는 거냐? 이 태호 바닥엔 이 어른에게 시집오고 싶어서 몸살을 앓는 미녀들이 쌔고 쌨어. 그런데 네 년이 굴러오는 복덩이를 걷어차 버리겠다는 거냐?"

필소해가 휙 손짓을 하자 부하들은 아형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였다. 삽짝문 밖에서 흥겨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흠칫 놀라는데 아형이 담담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끝내 또 왔구나."

그 말에 대답이나 하듯이 밖에서 웬 사내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정체 모를 사내는 잠시 웃음을 멈추더니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아형, 아형이, 정말 미안해. 워낙 그 두 미친 녀석들과 여기서 만나기로 약조했었는데 그만 임안성에서 뜻밖의 일에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이제야 왔소……."

아형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찰랑거렸다. 마치 장난이 심한 아이들을 보고 있는 듯한 너그럽고 아량 깊은 표정이었다.

정체 모를 사내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형, 아형, 내 정든 사람아, 왜 얄밉게 웃기만 하는 거냐? 네가 뭇사내들 애간장이 타게 웃을 때마다 옛사람이 지은 노래가 떠오른다."

그는 이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 웃으면 집안이 기울고

두 번 웃으면 서울 장안의 사내들 오금을 못쓰고

세 번 웃으면 황제도 오줌을 싸네.

필소해네 패들은 일제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얼떨떨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유독 아형만은 양볼에 살짝 볼우물을 만들면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아마도 밖에 있는 사내와는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누군가 문밖에서 집안을 힐끔 훔쳐보고 지나가는 듯한 기척이 껴졌다. 필소해가 멍하니 서 있다가 흠칫 놀라 고함을 쳤다.

"이 놈! 네눈박이 고양이 사안묘(四眼猫)로구나! 이리로 썩 나서지 못할까?"

밖에 있는 사내는 집안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끌끌 혀를 차더니 빈정거렸다.

"이 태호 바닥에는 꼴보기 사나운 놈들이 셋이 있지. 한 녀석은 겨릅대같이 빼빼 여윈 주제에 밤낮 노랫가락만 흥얼거리고 있는가 하면, 또 한 놈은 치마 두른 계집년들처럼 꽃송이만 안고 돌아다니고, 세 번째 놈은 더욱 역겨운 게 미꾸라지같이 뺀질거리며 스스로 호룡왕이라고 자칭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세상 사람들을 웃기는 일인가!"

"아니, 저 방자한 자식을 잡아들이지 못할까?"

필소해가 흥분해서 펄펄 뛰자 밖에 있던 사내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 있나? 내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소."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는 안하무인격으로 필소해네 패거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형 앞으로 다가가며 거리낌없이 말했다.

"아형, 오늘도 그 두 미친 자식들이 왔었겠지?"

아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벙긋 웃으며 또 물었다.

"아마도 아형이 쫓아냈겠지?"

아형이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얼굴에는 분명 반가워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사내는 집안이 들썩하게 웃어젖히더니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러구 있나? 아예 저 미꾸라지마저 쫓아내 버리잖구."

황약사는 문틈으로 슬며시 내다보고 은근히 놀랐다. 방금 들어 온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듬직하게 일어선 콧마루, 너부죽하게 큰 입, 떡 벌어진 어깨, 어느 한 구석 흠잡을 데 없는 호남아였다. 그는 마냥 사람 좋게 껄껄 웃어대고 있었는데 필소해나 치음 공자, 미화 공자와는 판판 달라 보였다.

그가 들어서자 필소해는 주눅이 들어서 중얼거렸다.

"병묘, 이 사람아, 왜 남의 좋은 일에 뛰어들어 방해만 놓는 건가?"

병묘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서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필소해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면서 곯려주었다.

"요 미꾸라지 같은 사람아, 사내가 왜 이렇게 좀스럽게 생겨 먹었나? 애호박같이 작은 머리통에 뱁새눈이라, 실로 태호방엔 사람이 없나 보군. 임자 같은 못난이를 방주로 추대한 걸 보면 말야."

필소해는 화가 상투 밑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병묘와 맞붙었다가는 오히려 욕을 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필소해는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병묘를 향해 한마디 씹어뱉었다.

"이거 경우 없이 이럴 게 아니라 내기나 해보는 게 어떤가?"

"내기? 아니, 이 미꾸라지가 오늘 어떻게 된 거 아냐? 감히 이 어른하고 내기를 다 하겠다니? 거 참,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군!"

병묘는 기가 막힌 듯 필소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집안이 떠나가도록 웃어댔다.

그가 웃음을 멈추자 필소해가 제법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세 번에 걸쳐서 내기를 하는데, 만약 내가 지면 내 쪽에서 이 자리를 피해 줄 것이고 자네가 지면 자네 쪽에서 냉큼 이 자리를 떠나는 걸세."

"좋았어! 좋도록 하지."

병묘는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정식으로 달려들었다.

마침내 두 사나이는 길다란 탁자를 앞에 놓고 마주앉았다. 둘 다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각기 두 팔을 탁자 위에 점잖게 올려 놓았다. 필소해가 자못 심각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이 태호에서 나는 농어 한 마리를 놓고 알아맞히기를 하자구."

어느새 그의 부하가 팔뚝만한 농어 한 마리를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았다. 물고기가 여전히 꼬리를 치며 펄떡거리자 부하가 손가락으로 아가미 부위를 톡 튕겼다. 물고기는 금세 얌전하게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필소해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안묘, 첫번째 내기는 이 농어를 놓고 알아맞히기를 하는 걸세……."

"아니, 이 태호에서 나는 농어를 가지고 무슨 알아맞히기를 한단 말인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 농어는 길다란 가시들이 양쪽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데 양쪽의 가시들이 단수(單數)인가 쌍수( 數)인가를 알아맞혀 보라는 걸세."

병묘는 황당한 표정으로 멍청하니 필소해를 쳐다보았다. 도박꾼인 그는 그동안 세상의 별의별 내기를 다 해보았지만 오늘 같은 엉뚱한 내기는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놈팽이 같으니라구. 물고기의 가시가 단수로 박혔는지 쌍수로 박혔는지 귀신이나 알 노릇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병묘가 난색을 짓고 앉아 있자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아형이 조용히 귀띔을 해 주었다.

"쌍수라고 해요."

병묘는 영리하고 총명한 아형이 귀띔해 주는지라 덮어놓고 소리쳤다.

"쌍수!"

필소해가 히죽이 웃더니 소리쳤다.

"여봐라!"

그러자 한 사내가 시퍼런 비수를 꼬나들고 다가와 잽싸게 물고기의 배를 확 갈라 놓았다. 두어 차례 번뜩번뜩 칼이 오가니 금세 앙상한 뼈만 두 줄 가지런히 남았다. 사내는 새하얀 가시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고는 공손히 아뢰었다.

"한쪽은 쉰다섯 가치이구 한쪽은 쉰여섯 가치 이옵니다."

아형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새까만 눈을 반짝이며 성큼 나섰다.

아니, 그 많은 가시들을 대강 훑어보고 쌍수인지 단수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판가름은 제삼자가 해야지요."

병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게 좋겠어."

아형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탁자에서 붉은 색 실을 고른 다음 왼손에는 물고기 뼈를 들고 오른손에는 실을 들었다. 그녀는 실끝을 어깨에 감은 다음 입에 물고는 길게 잡아 늘였다. 실은 빠른 속도로 물고기 대가리로부터 시작하여 한 쌍씩의 가시들 사이를 째고 지나갔는데 그 빨간 실 사이에 물고기 가시가 한 개라도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자세히 살

펴보니 빨간선 위에 놓인 가시가 한 개도 없었으며, 물고기 가시는 모두 쌍으로 되어 있었다. 두 개의 물고기 자시를 한데 놓고 세어 보니 꼭 짝이 맞는 것이었다.

필소해는 이 도박에서 졌음을 인정하고 탄식했다.

병묘는 몹시 기뻤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필가, 이 미꾸라지야. 나하고 내기할 때마다 번번이 지는데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어때?"

"사안묘, 너무 성급하게 굴 것 없잖아? 아직은 누가 이겼다고 말하긴 어려워."

필소해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각자의 발가락이 몇 개인지를 서로가 알아맞히기로 했다. 태호 사람들은 모두 뱃사람들이라 발바닥이 넓었다. 그래서 세찬 풍파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데 호룡왕 필소해는 신을 신고 왔으니 발가락을 볼 수가 없었다.

병묘가 잠시 생각하다가 소리쳤다.

"네 발가락은 아홉 개다. 아니, 열 개, 열한 개다!"

그가 필소해의 낯색을 살펴 가며 연거푸 세 번을 짚어 말하자, 필소해는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일어나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자 병묘는 물론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소해의 발가락은 아홉 개도 아니고 열 개도 아니었으며 열한 개는커녕 워낙 발가락이 없었던 것이다. 병묘가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너 이 놈, 발에 왜 발가락이 없느냐?"

병묘는 믿기지 않는 듯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잠자기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필소해는 다섯 발가락이 한데 붙어 있었는데 발가락 뼈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발가락 사이를 벌릴 수 없을 뿐이었던 것이다.

"필 미꾸라지, 난 네가 미꾸라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마리의 오리였구나!"

병묘는 계속해서 웃어대며 간신히 말했다.

그러나 필소해는 웃지도 않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어머니 뱃속에서 나을 때부터 발가락이 없었어. 사안묘, 자넨 이 내기에서 진 거네!"

그러자 병묘는 즉시 웃음을 거두며 대꾸했다.

"내가 졌다구? 천만에!"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필 미꾸라지, 옳지, 이제부턴 필 오리라고 불러야겠군. 어디 말해 보게. 나의 발가락은 모두 몇 개라고 생각하나?"

필소해는 병묘의 발을 태연히 들여다보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자네의 왼쪽 발가락과 오른쪽 발가락을 모두 합하면 열 개가 되겠군."

"똑똑히 보았나?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왜 후회해?"

병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왼발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발을 필소해의 코앞에 바짝 들이대고 손가락으로 발가락사이에 낀 진흙을 후벼 냈다.

"봐라, 이게 어디 다섯 발가락이냐? 아니지 않아?"

그는 또 두 손으로 두 발의 새끼발가락을 뚝 끊어 버렸다. 그는 이맛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필소해를 향해 다시 물었다.

"말해 봐. 이게 다섯 발가락이냐? 만일 그래도 다섯 발가락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 더 끊어 버리지."

필소해는 한동안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두 번째 내기는 그대로 비긴 셈이 된 것이다.

세 번째 내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열두 개의 침으로 조개 속의 진수를 명중시키는 내기였다. 필소해는 가볍게 손을 놀려 열 두개의 조개를 벽을 향해 던졌다. 조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벽에 들어가 박혔다.

병묘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도대체 벽에 박힌 조개 속의 진주를 무슨 수로 명중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필소해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먼저 해보지. 그러고 나면 내가 할 테니까."

"그러지."

필소해는 사양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병묘가 강한 대력을 갖고 있는데다가 경공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그마한 암기를 사용하는 무예는 잘 모르리라는 계산하에 세 번째 내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손에 다섯 개의 침을 들고 있었는데 오른손의 엄지 끝과 식지로 그 침끝을 쥐고 엄지의 아랫부분과 장지, 무명지, 새끼손가락으로 침대를 잘 눌러 쥔 다음 손

을 날려 침을 뿌렸다. 왼손으로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침 다섯 개를 동시에 날려 보냈다. 마지막으로 이빨로 물고 있던 침 두 개를 뱉어 냈는데 그 침 두 개도 벽을 향해 날아갔다. 이리하여 조개의 조가비 틈을 비집고 열두 개의 침이 모두 조가비 속에 들어박혔다. 하지만 그 침이 조가비 속에 있는 진주들을 명중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필소해는 부하들을 시켜 벽에 박혀 있던 조개들을 빼오게 했다. 그는 조개 한 개를 집어 그 껍데기를 열어젖히고는 침에 뚫린 진주 한 알을 꺼내 들었다. 나머지들도 하나하나 열어젖혀 보니 열두 개의 침이 몽땅 진주에 박혀 있었다.

필소해는 의기양양해서 아형에게 말했다.

"아형 낭자, 이 구슬은 진짜 진주라오. 이만하면 아형과 배필이 될 수 있겠지?"

그리고는 마리를 돌려 병모에게 말했다.

"사안묘, 이젠 자네 차렐세."

그는 다시 벽에다가 열두 개의 진주조개를 박아 넣었다. 병묘는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이번 내기는 자신이 없었다. 그가 순순히 승복할까 어쩔까를 망설이며 아형의 얼굴을 쳐다 보는데 느닷없는 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따위 잔재주를 가지고 뭐하는 짓들인가?"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발을 젖히며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제5장 용과 범의 울부짖음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서 낯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가 동해 도화도 도주 황 약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형과 계집애뿐이었다.

필소해가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 집에 웬 사내가……?"

아형이 집안에 사내를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묘도 황약사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틀 동안 오지 않은 새에 어디에서 이런 사람을 데려온 거지? 보아하니 진짜 선비처럼 얌전한 작자로군. 나는 이따위 서캐나 훑을 놈들은 딱 질색이야.'

병묘는 글귀나 따지는 선비들을 싫어하는데 다가 황약사 역시 치음 공자나 미화 공자와 마찬가지로 아형에게 청혼하러 온 것으로 여겨져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필소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흉중에 백만 신병(神兵)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성루 위에 앉아서 성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태연히 거문고를 탔었다고 했지 않은가. 우리네 아형 낭자도 보통은 아냐. 배포 유하게 방안에 장정을 숨겨 두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공자의 생김새는 치음과 미화보다는 한결 낫군."

필소해는 암만해도 재미있다는 듯 앙천대소를 했다.

이때였다. 황약사가 손가락을 가볍게 놀리자 암기(暗器) 한 알이 바람을 타고 필소해의 얼굴로 날아갔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암기는 필소해의 입술을 명중하였고 필소해는 더는 떠들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약사는 탁자에서 주운 자그마한 진주조개 부스러기 두 개를 날려 보냈던 것인데, 한 개는 필소해의 윗입술을 뚫고 잇몸에 들어박혀 피가 철철 흘러내렸고 다른 한 개는 아

랫입술을 뚫고 들어가 혓바닥에 박혔다.

황약사가 욕설을 퍼부었다.

"필소해, 듣자니 태호의 풍파가 10년이 되도록 가라앉을 줄 모르고 백성들이 네 놈 때문에 고생이 막심하다고 하는구나. 오늘 네놈이 날 만난 걸 보니 운이 다한 모양이다!"

필소해는 황약사를 잘못 보았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황약사가 아무 내력도 없는 줄 알고 함부로 떠들었던 것인데, 그런 황약사가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 자그마한 조개껍질 부스러기로 자기 입을 피투성이로 만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아직도 방금 황약사가 쓴 법수가 무림에 널리 소문난 '탄지신공(彈指神功) '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필소해는 황약사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입술에 박힌 조개껍질 조각을 뽑아 내면서 고함을 쳤다.

"네 놈이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이 그까짓 잔재주를 가지고 자랑하려 드는 걸 보니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이지 뭐냐!"

그는 이번엔 탁자에서 열둘 개의 침을 집어 들고는 말을 이었다.

"조개 속에 진주가 생기는 건 아주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부스러뜨려 못쓰게 만들다니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황약사는 침 열두 개를 손에 들고 벽을 등지고 창문께로 걸어갔다. 필소해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황약사가 오른손을 뒤로 흔들자 물에서 고기가 뛰노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열두 개의 침이 한꺼번에 벽에 붙어 있는 조개 쪽으로 날아갔다.

그 열두 개의 침들은 어찌나 빠른 속도로 날아갔는지 누구 하나 똑똑히 보아 낸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휘둥그래진 눈으로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다시 탁자 앞으로 와 서며 말했다.

"필소해, 이제 졌다는 걸 인정하겠느냐?"

필소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젊은 선비가 공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암기를 던지는 저런 재주는 내가 10년을 배워도 배워 낼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던진 침들이 정말로 몽땅 조개 속의 진주에 명중했을까? 이건 알 수 없는 일이다. '

그는 황약사에게 물었다.

"침들이 과연 진주를 명중했는지 알 수 없지 않나?"

"꺼내어 보여 주면 될 거 아냐?"

황약사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긴 팔소매를 휙 휘저었다. 그러자 팔소매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이 벽을 휩쓸면서 조개를 하나하나 따내서는 탁자 위에 쏟아 놓았다.

황약사는 곧 소매를 거두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훌륭한 진주조개를 깨어 부스러뜨리고 진주를 빼내기는 정말 아까워."

이 진주조개는 물 속에서 여러 해 자란 것으로서 껍질이 단단히 맞물려 있어 보통 사람은 칼을 가지고도 잘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태호 부근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진주조개를 많이 보아 왔고 그것을 깨어 부수는 것도 다반사로 보았기 때문에 별로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형은 황약사가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내심 놀랐다. 저런 영웅 호걸이 진주 따위를 아까워 하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황약사는 조개 한 개를 집어 들고는 햇빛에 비추어 보는 듯싶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뻥!'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진주조개는 마치 지각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 천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조가비 사이로 불그스레한 조가비 살이 보였고 물이 슬슬 흘러 나오고 있었다. 껍질은 점점 크게 벌어져 급기야는 속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황약사가 던진 침은 정확히 조개 속의 진주에 박혀 있었다. 필소해와 병묘는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조개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황약사가 던진 침들은 조갯살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진주만을 명중시켰던 것이다.

황약사는 같은 방법으로 열두 개의 조개 속에서 진주를 하나하나 꺼낸 뒤에 계집애를 향해 말했다.

"명주실을 가져오거라."

황약사는 가져온 명주실로 그 열두 개의 진주를 째었다. 곧 전문가만이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진주 목걸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는 진주를 다 꿴 뒤 그것을 계집애에게 건네주었다.

"명주실이 네 것이니 이 진주 목걸이도 네 것이다."

계집애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공자님처럼 재주 있는 사람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요. 공자님의 손재간은 어쩌면 우리 주인 아가씨와 흡사하지요? 두 분은 아마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선녀들인가 봐요."

계집애의 말에 아형은 대번에 얼굴이 붉어졌고 황약사도 쑥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감히 서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태연한 척 딴청을 부렸다.

황약사와 아형에게 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필소해가 부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 난 가겠다. 한데 공자는 누구지? 이렇게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나?"

"난 동해 도화도 사람으로 황약사라 부르오."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필소해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황약사, 황약사라……."

그는 마치 이 이름을 영원히 새겨 두려고나 하는 듯이 거듭 되뇌이다가 아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곳을 떠났다.

병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그는 황약사를 유심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자는 말주변이 좀 있을 뿐이지 재주가 그리 대단한 건 아냐. 어쨌든 아형의 태도를 보면 이 친구한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그는 생각할수록 은근히 약이 올랐다.

'아형은 도대체 이 놈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 것일까?'

그러나 그와는 달리 황약사는 병묘에게 대단한 호감을 느꼈다.

그는 중원에 와서 무림의 인물들을 여럿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병묘처럼 성미가 시원시원한 사나이는 흔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병묘에게 공손히 읍하면서 말했다.

"노형은 태호의 영웅이오. 노형의 모든 점이 실로 호걸다워 나는 아주 탄복하는 바요."

아형이 황약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동해에 계신다는데 그 도화도란 곳은 아주 훌륭한 고장이겠지요?"

"동해 도화도는 한번 가볼 만한 곳이지요."

황약사는 그녀의 질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도화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고장인가를 한바탕 자랑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병묘가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도화도가 그렇게 좋은 고장이라면 무엇 때문에 태호에 왔소?

그의 물음에 황약사는 무어라 대답할지 말문이 막혔다.

워낙 병묘는 치음 공자, 미화 공자와 더불어 태호의 삼공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두 사람과는 달리 아형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병묘와 아형은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아형이 병묘에 대해 각별한 친절을 보이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아형을 동기간처럼 대하며 진심으로 아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도모하려 하지는 않았

다.

아형이 병묘를 향해 말했다.

"황 공자께서 이곳에 오신 것은 저의 재주를 구경하기 위해서랍니다. 제가 보기에 황 공자님은 재주도 출중하고 성품도 시원시원하시니 두 분께서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병모는 아형의 말에 은근히 시샘이 났다. 아형은 여간해서 누구에게든 선뜻 마음을 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녀가 황약사를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각별했고 입을 열 때마다 칭찬이 끊이질 않으니 병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형이 나더러 저 사람과 가까이 지내라고 하면 가까이 지내는 수밖에 없지.'

병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황약사를 향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황약사의 손을 맞잡자 내력을 발산하여 황약사를 골탕 먹이려 했다. 솥뚜껑같이 두툼한 병묘의 손에 비해 황약사의 손은 너무나 빈약했다. 그는 속으로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 같은 손이라니! 이런 손으로 뭘 하겠다구…….'

그러나 그가 있는 한껏 힘을 넣었지만 어쩐 일인지 황약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겉보기에 그처럼 보드랍고 연약한 황약사의 손은 아무리 틀어쥐려고 해도 틀어쥘 수가 없었다. 병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더욱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웃는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힘도 들이지 않고 손을 빼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호심장(湖心莊)에서 무슨 큰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황약사 일행은 동시에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호숫가를 따라 늘씬한 모양의 쪽배들이 빽빽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누군가가 배 위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호심장의 놈들은 모두 듣거라. 너희들은 나 태호방 방주에게 죄를 지었다.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한 시간 이내로 모두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이 호심장은 우리 태호방의 것이니까!"

갈팡질팡하는 어부들을 보고 아형이 서글프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나 때문이에요. 나란 사람은 어딜 가든지 우환거리예요. 언제나 남들한테 불행을 가져다 주지요……."

아형은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

황약사는 부아가 치밀었다.

'나쁜 놈 같으니! 이 황약사가 이런 일을 보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감히 뉘 앞이라고 함부로 행패를 부리겠다는 거야?'

병묘는 벌써 참지 못하고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망할 놈의 자식! 네 놈의 태호방이 다 뭐냐? 어디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내가 가만 보고만 있을 성싶으냐?"

그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날려 배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가보니 배들은 몇백 척이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다가 배들마다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둘씩이나 버티고 서 있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배 위에는 빼빼 마른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이 사나이가 바로 태호방의 삼두교(三頭蛟)라는 자였다. 이자는 성미가 불 같은 인간으로 호수에서 물고기라도 잡게 되면 익힐 새도 없이 날것으로 먹어 치울 정도였다. 이자는 용두(龍頭)의 맏이가 굴욕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다짜고짜로 태호방의 모든 인마를 총동원하여 호심장으로 배를 몰아왔던 것이다.

"태호가 이처럼 큰 곳이고 우리 태호방은 이곳 몇백 리 안팎에서 감히 건드리는 자가 없었는데 조그만 계집년이 감히 우리와 맞서려고 해? 그 년의 기염을 꺾어 놓지 않고서야 우리 태호방 사람들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태호방은 워낙 호심장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마땅히 그럴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황약사에게 모욕을 당하자 그걸 핑계삼아 모든 호심장 사람들을 쫓아내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들은 들이박치기가 무섭게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부터 닥치는 대로 찔러 물 속에 처박았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을 때는 이미 아이들의 모습은 찾

아 볼 수조차 없었다.

병묘는 아이들을 끊은 부모들의 곡성을 듣고는 분을 억누르지 못해 소리쳤다.

"이 악종들아! 어린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내 오늘 네 놈들을 모조리 쳐죽이고야 말겠다!"

그는 다짜고짜 가까이에 있는 배 위로 뛰어올랐다. 배에 있던 놈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병묘는 즉각 놈의 면상을 후려 갈기고는 번쩍 들어 물 속에 처박아버렸다. 선미에서 삿대를 쥐고 있던 놈이 당황하여 삿대를 휘둘러 그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허리께로 날아드는 삿대를 낚아챈 병묘는 삿대 끝으로 놈을 공중에 들어올렸다가는 역시 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이를 지켜 보던 태호방 놈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렸다. 병묘는 다시 가볍게 몸을 솟구쳐 몇 척의 배를 건너뛰어 상두교가 타고 있는 배 위에 내려섰다.

그는 번개같이 삼두교의 부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삼두교의 부하는 그의 한주먹에 비명을 지르면서 물 속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몇 놈이 놀라서 한꺼번에 덤벼들었지만 누구 하나 병묘의 주먹을 당해내질 못했다.

얼마 안 가서 배에는 병묘와 삼두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병묘가 놈에게 물었다.

"네 놈이 이 호심장 어린애들을 죽였느냐?"

삼두교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태호방을 건드리거나 모욕하는 놈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작정이다!"

놈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 개의 송곳 끝으로 병묘를 찌르려 했다.

물 싸움에서 사용하는 병 장기들은 대체로 송곳이거나 짧은 비수와 단검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몸을 놀리기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가까이에 서 있고 배가 흔들거리기 때문에 이런 짧은 병장기가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놈은 곧장 송곳을 내질렀다. 한 번은 빗나갔으나 거푸 세 번이나 내지르는 바람에 송곳 끝은 병묘의 가슴에 있는 사혈(死穴) 가까이까지 들어왔다.

병묘는 화가 치밀었으나 손이 상할까 봐 송곳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삼두교의 잔악성을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태호방엔 호한이 한 놈도 없구나. 모두 거북이처럼 대가리를 내밀지 못한단 말이야. 내가 지금 적수공권(赤手空拳)인데 네 놈이 나와 삼백 합만 싸워 견뎌 낸다면 내가 너희네 태호방에 복종하마!"

삼두교는 그 말에 부아가 치밀어 들고 있던 송곳을 뱃머리로 내던졌다. 그는 병묘를 향해 정식으로 결투를 청했다.

"이 놈아! 모두들 네 놈이 도박 미치광이라고들 하더라마는 내가 오늘 네 놈과 머리를 내놓고 도박을 걸 테다!"

삼두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의 삿대를 쥐고 있는 자에게 호령했다.

"뱃머리를 갖다 대라. 내가 맨주먹으로 저 놈과 승부를 가릴 테다!"

두 배가 맞닿자 삼두교와 병묘는 각기 뱃머리에 서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병묘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무서운 바람이 일었다. 삼두교는 한걸음 한걸음 물러서면서도 호시탐탐 병묘의 팔에 있는 혈도를 가격하려 했다. 삼두교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무학에는 그 법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병묘처럼 다만 신력(神力)에만 의지하여 주먹을 휘둘러 대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이 놈의 주먹은 실로 무섭구나. 저 주먹에 얻어맞는 날에는 뼈를 추리기도 어렵겠어. 송곳창을 쓰지 않고는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데? '

삼두교는 뒤로 물러나면서 뒷발길로 삿대를 잡고 있던 놈을 차서 물 속에 떨어뜨리고는 소리쳤다.

"사안묘, 잠깐만 쉬자. 내가 너와 다시 삼백 합을 싸우마!"

그의 말에 병묘는 삼두교의 배로 나는 듯이 옮겨 와 뱃머리에 서서 호령했다.

"삼두교 이 놈아, 핏값은 피로 갚아야 해. 네 놈은 오늘 끝장난 줄 알아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주먹을 휘두르며 삼두교에게로 달려 들었다.

병묘가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놈은 소리를 지르면서 발을 굴렀다. 그 순간 배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배가 박살나는 바람에 병묘가 내지른 주먹은 삼두교의 면상을 긁어 놓는 정도로 그쳤다. 병묘의 주먹이 얼굴을 스쳤을 뿐인데도 놈은 비명을 지르면서 물 속으로 냅다 뛰어들더니 종적없이 사라졌다.

호숫가에 서서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아형과 황약사 일행은 삼두교가 병묘의 주먹에 맞아 물 속에 빠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순간 병묘가 서 있던 배에 물이 차면서 그 역시 호수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태호방 놈들은 병묘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는 일제히 배를 몰아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놈들은 병묘가 빠져 나갈 틈이 없게 각자의 뱃머리들을 바싹 맞대었다.

기슭에 서 있던 아형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이를 어쩌지? 오라버니가 위험해요……."

애타하는 아형의 모습을 보고 황약사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내가 병묘를 구해 낼 테니!"

황약사는 수영에 서툴렀으나 곧장 몸을 날려 한 작은 배에 뛰어 내렸다. 그는 배에 발이 닿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겨 배 위에 있던 놈 하나를 꺼꾸러뜨렸다. 놈은 대번에 두개골이 으깨어져 비명을 지르면서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병묘를 둘러싸고 있던 몇몇 태호방 놈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이번에는 황약사를 에워쌌다. 놈들은 손에 들고 있는 삿대를 휘둘러 황약사를 물 속에 떨어뜨리려고 했다. 황약사는 가볍게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올랐다. 태호방 놈들은 일제히 來리를 지르면서 삿대들을 치켜 들었다. 황약사가 공중에서 팔소매를 내젓자 삿대들이 바람에 밀려 한데 얽혔다.

태호방 놈들은 황약사가 부린 술법에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이때였다. 출렁거리는 물소리가 나더니 배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머리가 물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그들은 삼두교와 병묘로, 두사람은 한데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황약사는 삿대 한 개를 빼앗아 쥐고 10여 명의 태호방 놈들을 두들겨 물 속으로 떨어뜨렸다. 태호방 놈들은 황약사의 실력이 이토록 대단한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아우성을 치며 저마다 배를 몰아 도망가려

했다.

황약사는 한 척의 배 위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태호방 놈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병묘와 삼두교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태호방 놈들은 안 되겠는지 일제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호심장의 어민들 쪽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호심장의 어민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들은 삿대와 노를 틀어쥐고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자기들의 아들딸과 가족들을 보호해 나섰다. 아형과 계집애도 격분한 나머지 어민들을 도와 싸움에 참여했다. 하지만 태호방 놈들은 악착스레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어민들을 때려눕혔다. 놈들이 마을

사람 몇몇을 죽이게 되자 여인들의 비명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아야!"

갑자기 아형이 놀라 소리쳤다.

한 놈이 달려들어 계집애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나무기둥에 짓찧어 대고 있었다. 계집애의 머리에서는 붉은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호방 놈이 칼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계집년들을 다 죽여 버려라!"

놈은 칼을 휘둘러 아형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나 '악!'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칼을 든 놈의 상판이 일그러지더니 그의 입이며 코며 눈에서 선지피를 콸콸 쏟았다. 배 위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을 지켜 보던 황약사가 태호방 놈이 아형을 죽이려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들고 있던 삿대 하나를 잽싸게 집어 던졌던 것이다.

황약사는 배를 타고 그 부근을 몇 바퀴나 돌았으나 병묘와 삼두교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는 아형이 잘못될까 봐 몸을 솟구쳐 언덕으로 날아 내렸다. 호숫가의 풍경은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호심장 사람들은 놈들에게 거의 맞아죽어 겨우 두셋 되는 사나이가 남아서 태호방 놈들과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질펀한 핏자국과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

을 둘러보았다. 끝쪽에서 덜덜 떨고 있던 여인들과 어린애들이 집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태호방 놈들이 징그러운 웃음을 날리며 도망치는 여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놈들은 여인들을 잡아다가 노리개로 삼을 작정이었다.

이때였다. 태호방 두 놈이 좌우 양쪽에서 아형을 붙잡고 호수 쪽으로 끌고 나왔다. 황약사는 놈들을 노려보며 호령했다.

"당장 그 팔을 놓지 못할까!"

두 놈은 자기들의 앞을 막고 있는 사람이 황약사임을 알아보고 움찔했다. 그러나 곧 자기들이 아형을 놓아줄 경우 목숨을 보전치못하리라는 생각에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길을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을 죽여 버릴 테다!"

황약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황약사가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순간 놈들은 잽싸게 아형을 황약사 쪽으로 밀어붙였다. 아형의 몸으로 황약사의 손을 막아내려는 심산이었다. 아형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온몸의 대력을 모아 뒤로 버텼다. 여차하면 황약사의 손에 분골쇄신이 될 판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아형이 힘을 쓰자 두 놈은 여지없이 한옆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황약사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달려들어

두 놈들의 머리에 각각 장을 날렸다. 놈들은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두개골이 부서져 죽어 버렸다. 황약사는 갑자기 손을 들어 아형의 아혈(啞穴)을 가리키고는 다른 한 손으로 아형의 손을 잡고서 하늘을 우러러 길게 고함을 질렀다.

천지를 들었다 놓을 듯한 고함 소리에 태호방 놈들은 질겁을 하여 싸우던 것을 멈추고 멍청히 서 있었다.

황약사는 땅에서 자잘한 자갈 한 움큼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이 놈들! 당장 이곳에서 물러가지 않는다면 네 놈들은 몽땅 이 호심도의 물귀신이 되는 줄로 알아라!"

이때였다. 한 무리의 태호방 놈들이 한 여인을 붙잡고 한창 못된 짓을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황약사의 경고 따윈 들리지도 않는 듯 여자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젖가슴을 주무르며 희희낙락 정신이 없었다. 한 놈이 여자의 속곳을 벗기고 막 일을 치르려는 순간이었다. 이를 목격한 황약사가 크게 노하여 들고 있던 자갈 한 알을 휙 날려 보냈다. 자갈이 놈의 뒤통수에 날아가 박히자 놈은 찍

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푹 꺼꾸러졌다. 황약사는 연거푸 자갈을 날려 태호방 놈들을 닥치는 대로 꺼꾸러뜨렸다.

황약사의 재주에 대경실색한 태호방 놈들은 앞을 다투어 배에 뛰어오르거나 물로 뛰어들어 일제히 줄행랑을 놓았다.

황약사가 아형을 부축하여 집 처마 밑의 돌 위에 앉혔다.

아형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이……."

황약사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잠잠해진 호숫가에 느닷없는 사람의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삼두교와 병묘로, 둘 다 몹시 기진맥진해 있었는데, 병모가 삼두교를 잡아 끌고 오는 중이었다.

황약사와 아형이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이를 발견한 호심장의 어민들도 일제히 몰려들었다. 어민들은 분을 이기지 못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칼로 삼두교를 찍어 죽이려 들었다.

병묘가 큰소리로 말렸다.

"모두들 가만 있으시오!"

그의 명령에 사람들은 멈칫 물러섰다.

그 삼두교란 놈은 한참 후에야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고는 병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도박꾼. 이번 도박에선 확실히 내가 졌어."

그는 말을 마치고는 아직도 기는 살아서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병묘를 쏘아보았다. 병묘가 그의 시선을 맞받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만일 호심장 사람이라면 남들이 널 마음대로 죽이려 들 경우 순순히 당하고만 있겠느냐?"

삼두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순 없지."

"네 놈이 그렇다면 호심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죽음을 달가워할 사랑은 없는 법이니까. 이 길로 돌아가서 호룡왕 필소해한테 전해라. 만일 또다시 호심장에 와서 소란을 피운다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삼두교는 자신이 꼭 죽으리라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뜻밖에도 자기를 놓아주겠다는 병묘의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쳐다보았다. 놈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몹시 감동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돌아가서 꼭 맏형 님한테 전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태호방이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운다면 이 손가락처럼 될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칼을 집어 들어 자기 손가락 한 개를 가차없이 잘라 냈다.

삼두교마저 떠나가자 호숫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이때까지도 아형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나무 밑에는 계집애가 잠을 자는 듯이 누워 있었는데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아형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은 않고 천천히 머리를 들어 호심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내 보기에 태호방 놈들은 보통 흉악한 놈들이 아니오. 그러니 낭자는 잠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좋겠소."

아형이 황약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어둠이 깃들었다. 멀리 어부들이 지핀 화톳불이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세 사람은 선실에 들어가 앉았다. 아형은 선실의 창가에 앉아 멀어지는 호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약사, 병묘, 아형은 모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구음진경》을 쟁탈하기 위해 5년 후 중원 무림의 여러 고수들과 결투를 벌이기로 약속한 몸이다. 그런데 벌써 두 달이란 시간이 헛되이 흘러갔구나. 남들이 애써 무예를 연마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중원의 태호를 유람하면서 이렇듯 세월만 보내고 있다니……. 이렇게 보내다가는 앞으로 화산에 가서 천하의 으뜸가는 고수들을 어떻게 당해 낸단 말인가?

황약사는 문득 쓸쓸한 마음이 되어 품속에서 옥소를 꺼내 들었다.

그가 옥소를 불기 시작하자 아형도 놀랐거니와 견식이 넓은 병묘조차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황약사의 옥소 소리는 마치 용과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 묘한 격정을 담고 있었다.

아형은 물살이 일렁이는 태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공자는 정말 천하에 드문 재주를 갖고 있구나. 옥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줄만 알았지 이런 굉음을 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어. 이분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야.

아형과 병묘는 황약사가 부는 이 곡이 그가 지은 〈벽해조생곡(碧海潮生曲)〉임을 알 리가 없었다.

옥소 소리가 간헐적으로 멈출 때마다 멀리서 퉁소 가락이 들려왔다. 그 퉁소 소리는 높아졌다가는 낮아지고 낮아졌다가는 높아지면서 장단을 맞춰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멀리서 파도를 헤치고 배 한 척이 다가왔다.

그것은 매우 큰 배였는데, 뱃머리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야윈 얼굴을 한 그 노인은 엄숙한 기색으로 황약사네가 탄 작은 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가 옥소를 불었는고?"

황약사가 배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제가 불었소이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자네가 오늘 호심도에서 사단을 일으킨 장본인인가?"

"할 일이 없다 보니 쓸데없는 일에 관여한 듯싶습니다."

황약사의 대답에 노인이 꾸짖는 투로 말했다.

"자네가 쓸데없는 일에 상관한다는 게 결국 나의 태호를 건드렸구만 그래?"

황약사는 말없이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옥소로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병묘는 뱃머리에 앉은 채 노인을 올려다보다가 옆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안면 있는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입에 난 상처를 천으로 싸매고 있었는데 바로 황약사에게 혼이 나서 달아난 태호방 방주 필소해였던 것이다. 병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필 미꾸라지, 아니, 필 오리, 꼴 참 보기 좋구나!"

필소해는 자기들의 수가 많고 또 늙은이가 뒷심이 되어 준다고 생각하여 성을 발칵 내었다.

"닥쳐라!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그는 큰소리를 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순간 병묘는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황약사에게 당부했다.

"황 공자, 아형을 잘 돌봐 주시오. 나는 저 놈과 결판을 내야겠소!"

그는 곧 필소해를 향해 소리쳤다.

"필소해, 이 미꾸라지야! 그 배에서 기다려라. 네 놈과 삼백 합만 싸워 보겠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큰 배로 뛰어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곧장 맞붙었다.

병묘와 필소해가 싸우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 보던 노인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뱃머리 쪽으로 걸어 나와 황약사에게 물었다.

"공자는 성함을 어떻게 부르오?"

"저는 동해 도화도의 도주 황약사라 합니다."

"공자의 옥소 부는 솜씨는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시킬 만하오. 하지만 공자가 이곳 태호에 온 건 큰 실수라 하겠소."

"왜 그렇지요?"

황약사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태호의 둘레는 천리나 되고 호수 안에 마흔여덟 개의 섬이 있으며 기슭에는 일흔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건 다 우리 태호방의 땅이오. 임자가 우리 태호방과 맞서려 한다면 극히 위험천만한 일이지."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은 강남에 와 본 적은 없어도 옛사람이 태호를 읊은 시구를 들은 적이 있소이다."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큰소리로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두 사람이 죽기살기로 싸우고 한쪽에서는 황약사가 소리 높이 시를 읊는 광경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노인은 황약사가 시를 읊는 것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그가 시를 다 읊자 다시 물었다.

"이 배에는 또 누가 타고 있소?"

"이 배에는 아형 낭자가 타고 있소이다."

황약사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노인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소리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노인은 실컷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아형을 좀 나오라고 하게.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보려네. 이 태호방 방주가 반할 만한 인물인지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황약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아형이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뱃머리에 섰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아형입니다."

이 노인은 태호방의 총타주(總舵主)로서 밖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는 터라 아형 같은 미인은 생전 처음이었다. 노인은 아형의 아름다움에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노인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형 낭자, 듣자니까 그대가 우리 태호방에 여러 번이나 양책(良策)을 내놓아 우리 태호방을 위험에서 건져 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태호방과 내왕을 하려 하지 않소?"

아형이 대답했다.

"필 방주께서 저에게 태호방에 가서 용군의 아내가 될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은 제 뜻과는 맞지 않는 일이므로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을 뿐입니다."

노인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태호방엔 인재들이 얼마든지 있고 일흔두 봉우리마다 주인이 따로 있지. 필소해도 태호의 방주이기는 하지만 태호방 중의 최고 인물은 아니야, 낭자가 그한테 시집가려 하지 않은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낭잔 결국 태호방 사람한테 시집오게 될 것이야."

아형이 무어라 대꾸하려는데 노인은 뱃머리에서 훌쩍 뛰어내려 뱃전에 드리운 닻의 갈고리 끝에 가볍게 올라섰다. 닻의 갈고리 끝은 화살의 살촉처럼 날카로운 데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끝에 서서 웃음을 띄우며 아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형에게 각별한 친절을 보이며 그녀의 미모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하군. 이렇게 출중한 미인은 본 적이 없어."

황약사는 유심히 노인을 살펴보았다. 노인의 두 손은 손톱이 유난히 길고 새까맸는데 꼭 독수리발 같은 현상이었다. 황약사는 그가 독장(毒掌) 공을 닦았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노인에 대해 경계심을 가진 황약사는 아형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길까 봐 아형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노인인 다시 아형에게 말했다. '

"태호방은 세력이 대단해. 차지하고 있는 지역도 그 둘레가 수천리에 달하고 호수 안의 봉우리만 해도 일흔두 개가 있단 말이야. 태호방의 두령들은 제왕들 못지 않게 부유해. 임자가 태호방에 시집오면 손해날 게 하나도 없어."

"노인장은 절 호룡왕 필소해한테 시집가게 하려는 모양이신데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에요."

아형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형의 단호한 말에 노인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낭자더러 그 사람한테 시집가랬나? 그한테 시집가지 않아도 돼……."

아형은 노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나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하필 왜 필소핸가? 내가 있는데 말야. 낭잔 나한테 시집오면 돼."

아형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돌연 황약사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호수에는 삽시에 험한 파도가 일었다.

"왜 웃는 건가?"

노인이 불쾌한 듯 물었다.

"주제 파악을 하시오. 수염이 하얗게 세고 빼빼 마른 노인네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그 대머리에 매발톱 같은 손만 봐도 정이 떨어지겠소. 당신한테 이 여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오? 아형의 할애비뻘 되는 사람이 손녀뻘 되는 처녀한테 장가들려 하다니 누군들 제정신이라고 하겠소?"

황약사는 여전히 요란하게 웃어댔다.

노인은 황약사가 웃거나 말거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황약사가 웃음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팽조(彭祖)는 8백 살까지 살았는데 그가 내 나이 때에는 어린 애나 마찬가지가 아니었겠나? 내가 장가든다고 해서 이빨이 다시 나거나 흰머리가 검은 머리로 되지야 않겠지만 젊은것을 품에 안게 되면 마음이 젊어질 것이니 사는 재미가 오죽하겠나?"

황약사는 괴물 같은 영감태기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지껄여댔다.

"자네가 중원을 돌아다녔다면 나의 명성이야 알고 있겠지? 난 태호방의 구두신취(丸頭神鳶) 학 영감이야. 내 손에 죽게 되었다고 원망일랑 말게!"

늙은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독수리처럼 날쌔게 날아들며 갈고리 같은 손으로 황약사의 머리를 잡아채려 했다.

황약사는 침착하게 옥소를 꺼내 들더니 노인의 손에 있는 통리(通里), 신문(神門) 두 대혈을 겨누었다.

학 영감은 기겁하여 손을 거둬 들였다. 학 영감은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다시 법수를 바꾸어 두 장을 동시에 내밀었다.

황약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는 몸을 피하면서 옥소로 학 영감의 손을 겨누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났지만 늙은이는 아무데도 상한 데가 없었다.

학 영감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또다시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큰 배 위에서는 아직도 병묘와 필소해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병묘는 주먹을 번개같이 놀려 필소해를 계속 밀어붙였다. 하지만 필소해는 병묘의 불 같은 성미를 익히 아는지라 칼을 천천히 놀리면서 자그마한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큰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태호에 있는 일흔두 개 봉우리의 사람들로서 모두 다 태호방의 수령들이었다. 그중 세 놈이 배에서 뛰어내렸는데 틈을 보아 황

약사를 죽이려는 수작이었다. 놈들은 황약사와 늙은이의 싸움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갑자기 배의 갑판을 뚫고 검이 불쑥 솟아올랐다. 황약사는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훌쩍 몸을 날려 칼끝을 발로 걷어차 끊어 버렸다. 끊어진 칼끝은 곧장 학 영감 쪽으로 날아갔다. 학 영감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칼끝에 어깨를 찔렸다. 그러자 학 영감은 기세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아 황약사가 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서있자 학 영감도 덮쳐 들다가는 주춤 서 버렸다. 학 영감이 진공을 멈추고 발로 갑판을 힘껏 구르자 배는 두 사람의 힘을 받아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아형이 급히 소리쳤다.

"황 공자님!"

황약사가 놀라서 바라보니 아형은 굼실거리는 물살에 밀려가고 있었다. 황약사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아형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물결 속에 잠겨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는 다만 아형의 머리장식품만을 거머쥐었을 뿐 끝내 아형을 찾아내지 못했다.

황약사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워낙 지혜와 모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이런 일을 당하자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쓰라린 마음으로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황약사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형을 죽게 한 태호방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태호의 물결 위에 한 척의 큰 배가 태호방의 소굴인 응취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 위에는 황약사 한 사람이 키를 잡고 있었다. 그는 호숫가에 당도하여 기슭에 올라 잠깐 쉬었다. 숨을 돌린 다음 태호방의 소굴에 찾아 들어가서 아형의 복수를 할 참이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말소리로 보아 세 사람인 듯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둘째 동생, 보아하니 일을 서둘러야겠네. 난 좀 있다가 일흔두 봉우리를 찾아가겠어. 태호방 놈들을 붙잡는 족족 죽여 버릴 셈이야. 이 세상에 나쁜 놈들이 적어지면 그만큼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게 되는 것이 아니겠나?"

"맏형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그 늙은 놈에 비하면 우리들의 무예는 기술이 부족해서 놈의 마수에 걸려들기라도 하는 날에는……."

"셋째 동생 말이 옳아. 전번에 우리 삼형제가 백성들을 위해 놈과 싸웠지만 놈이 갈고리 같은 손으로 틀어잡는 법수를 펴는 데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지. 그자한테 어깨를 뜯긴 상처가 지금도 낫지 않고 있어.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

그들 세 사람은 마을 숲 속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 약사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중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주 무섭게 생겼으나 왼쪽에 앉은 사람은 아주 얌전하게 생겼고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가죽옷을 입고 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늙다리한테 어깨를 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맏형이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린 종래로 태호방 놈들한테 머리를 숙인 적이 없지만 둘째 동생이 상했으니 좀 기다리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둘째 동생의 상처가 깊어져서 죽는 길밖에 없어. 그러니 내일이라도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태호방 놈들과 사생결단을 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독약을 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해."

이때였다. 태호에서 기슭으로 배 한 척이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쪽배는 바람결에 밀려 이쪽으로 나는 듯이 오더니 기슭에 와 멈추었다. 한 사람이 배에서 뛰어내려 세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달려온 사람은 땅딸보였다. 그는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장주(莊主)님, 큰일났습니다. 큰일났어요!"

맏형이라는 사람이 땅딸보의 당황한 기색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오늘 태호에서 큰 싸움이 있었답니다. 태호방의 일흔두 개 봉우리의 우두머리들이 몽땅 달려들어 한 선비를 상대로 싸웠는데 태호방의 그 늙은 두목과 선비는 싸움에서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답니다. 또한 태호의 삼공자 중의 한 사람인 병묘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와 싸우다가 당해 내지 못하고 놈들에게 잡혀 갔답니다."

맏형이 란 사람이 물었다.

"그 선비가 어떤 사람이라더냐? 학 영감과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했을 정도라면 놀라운 무공을 지닌 사람이구나."

땅딸보는 황약사가 태호에 와서 아형을 만난 일과 또 치음, 미화 두 공자가 아형을 만나려 한 일, 필소해가 아형한테 청혼하다 거절당한 일, 또 태호방 놈들이 창피를 당한 끝에 사단을 일으킨 일 등을 마치 제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땅딸보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말없이 묵묵히 있었다. 이윽고 맏형이란 사람이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그 선비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고 싶구나. 정말 보통 대단한 사람 같지가 않아."

"내가 듣자니 그 사람은 동해 도화도의 사람이라고 자칭하는데 이름은 황 약사라고 한답니다."

땅딸보의 말에 셋째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린 정말 복이 없군요. 그런 기인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 좋을텐데."

맏형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둘째 동생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이틀만 더 지나면 둘째 동생의 상처가 더욱 악화될 거다. 그때 가서는 우리 삼형제가 아무리 결사적으로 싸운다 해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 '

그는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셋째야, 당장 응취봉으로 쳐들어갈 것이니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모두 병장기를 들고 나서라고 전해라."

맏형 육승룡(憧乘龍)은 이어서 둘째 동생에게 말했다.

"둘째야, 너도 배를 타고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 삼형제가 가서 사생결단을 해보자꾸나."

그의 어조에는 쓸쓸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이번 싸움에 이길 확률은 거의 희박하여 삼형제가 몽땅 비명에 죽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을 엿들은 황 약사는 이 세 사람이 태호방 놈들과 철천지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형을 위해 복수하고 병묘도 구해 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큰일을 해내자면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이 사람들과 합심해서 싸운다면 유리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황약사는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로 걸어 나갔다.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가 인사를 드리오!"

삼형제는 일제히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맏형 육승룡은 이 사람이 태호방의 총타주인 학 영감을 대적해 낸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듣자니 태호에서 선생과 학 영감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황약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방금 태호에서 왔는데 온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장주께서 저로 하여금 옷을 말리고 밥술이나 먹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육승룡은 황망히 황약사를 향해 읍하고는 그를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곧 술상이 차려지고 상좌에는 황약사가 앉고 육승룡과 둘째 곡영소(曲靈零), 셋째 무천웅(武天雄)도 각각 자리잡고 앉았다.

술도 어지간히 마시고 음식도 얼마간 축이 났을 때 육승룡이 입을 열었다.

"황 도주님, 저는 태호방과 원한이 맺힌 지 오래인데 이번엔 그 놈들과 결사전을 치를 생각입니다. 더군다나 저의 둘째 동생이 영감태기한테 할퀴었는데 해독약이 없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우리 삼형제는 이번 싸움에 목숨을 걸기로 했습니다."

황약사가 오만한 기색으로 말했다.

"난 태호의 일흔두 봉우리를 다니면서 태호방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몽땅 죽여 버릴 셈이야. 자네들 삼형제는 손까지 쓸 필요는 없고 나를 안내나 해주면 되네."

세 사람은 모두 반신반의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곡영소가 그 말을 제일 믿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무예를 지녔다 해도 혼자서는 학 영감 하나도 대적하기도 힘든 판국에 무예의 고수들인 일흔두 개 봉우리의 우두머리들을 어떻게 다 죽여 버린다는 거야?'

곡영소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황약사는 그가 피해를 입게 된 원인을 차근차근 해석해 주었다.

"놈이 자네를 틀어잡을 때 아홉 가지 술법 중 세 번째 술법을 썼을 걸세. 그것은 '독수리가 들판 위를 맴돈다'는 술법인데 놈은 이 술법으로 자네의 면상을 노렸고 자네는 '산악을 곧게 밀어붙이는' 술법을 썼을 테지. 그런데 자네가 장을 내보낼 때 왼손이 뒤에 있고 오른손이 앞에 있었을 게 아닌가. 그것도 활쏘기 자세의 걸음을 걸으면서 말이야. 그러니 자네의 어깨가 표적이 되어 놈한테

틀어 잡혔던 게야……."

황약사의 말에 세 사람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는 마치 그들 세 사람의 싸움을 친히 지켜 보기라도 한 듯이 구체적인 동작까지 예로 들어가며 설명을 하는 터에 세 사람은 아연실색했다.

말을 마친 뒤 황약사는 갑자기 곡영소 앞으로 가더니 손을 내밀어 장지를 엄지 위에 얹고는 몇 번 탁탁 튕겼다. 곡영소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굳어졌다. 황약사는 곡영소의 저고리를 헤쳐 보았다. 어깨에는 고약이 발라져 있었다. 황약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혈갈(血場), 전칠(田七), 몰약(沒藥), 응담, 초화(草花), 이 오미 (五味)에다가 지혈 약물을 좀 섞어서 약을 만들었는데 그건 처방이 틀린 거네. 정말 한심하군……."

그 약은 육승룡이 처방한 것인데 둘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할까 봐 제 마음대로 약종을 배합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황약사가 그것을 어찌 낱낱이 알 수 있단 말인가.

황약사는 그들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 고약을 뜯어 버렸다. 그러자 곡영소의 어깨에는 시꺼먼 발톱 자국이 드러났다. 발톱 자리가 깊은 곳은 뼈까지 드러나 있었다. 황약사는 그것을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자기의 '구화옥노환(丸花玉露丸)'을 꺼내어 복용시킨 다음 남은 두 형제에게 말했다.

"내가 이 친구를 치료하는 동안 자네들끼리 마시게."

황약사는 그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곡영소를 데리고 뜰로 나갔다.

황약사는 곡영소를 뜰에 있는 돌탁자 위에 눕혔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곡영소의 몸에 있는 대혈을 가리키고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안마하기 시작했다. 곡영소는 가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부르르 떨다가 황약사의 내력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육승룡과 무천웅은 한옆에서 그것을 지켜 보았다. 그들은 사람을 치료하려면 내력이 많이 소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약사의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지만 행동 하나하나에는 따뜻한 인정이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조용히 지켜 보고 있는데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몸엔 독만 배어 있는 게 아니라 기침을 하고 가래가 돋는 증세까지 있구만. 내가 이번에 그 증세까지 한꺼번에 고쳐 줄테니 어떤가 보게 ."

육승룡과 무천웅은 깜짝 놀랐다. 내력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인데 곡영소의 속병까지도 대번에 알아맞히고 고칠 수 있다고 하니 당세의 신의(神醫)가 아닐 수 없었다.

황약사는 장을 통해 끊임없이 곡영소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이 내력은 소음심 (少辯心)을 거쳐 맥극천(脈極泉), 청영 (靑靈), 소해(少海)에 이르고. 계속하여 통리, 신문에 이르다가 드디어 소부(少府)를 거쳐 소충(少沖)에 이르렀다. 드디어 곡영소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시꺼먼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비로소 손을 떼면서 말했다.

"자네의 상처는 이제 다 나았네,"

그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황약사는 집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육승룡과 무천웅이 황망히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는 잠깐 사이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떠나가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일 아침에 배를 준비해 놓게. 일흔두 개의 봉우리로 갈 수 있도록……."

 

[출처] 화산논검 - 동사 황약사 1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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