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 총괄 및 비평 5-1
제5장 총괄 및 비평
1. 의미의 연원과 해석의 목표
앞서 머리말에서 본서는 《홍루몽》의 의의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해석자는 어떻게 자신의 이해를 얻어냈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지는 세 장의 논의에서는 《홍루몽》이 생산되고부터 수용되기까지의 정황 즉 작자, 텍스트, 독자와 해석 사이의 관계를 추적해 보았다. 이를 토대로 이제 두 가지 관점에서 본서의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를 논의해 보자.
1. 《홍루몽》 해석자의 해석 목표는 무엇인가?
2. 해석자들이 자신들의 해석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채용한 방법과 수단은 무엇인가? 해석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 문제를 논의해 보자. 이상 각 장에서 논의한 바를 통해 우리는 홍학의 각 학파의 범주를 관통하는 해석의 목표가 작자의 의미(author’s meaning) 즉 《홍루몽》 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제2장에서는 작자의 신분 및 그 의도가 해석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21세기의 색은파도 여전히 이러하다. 2002년 왕이안(王以安)은 《세설홍루(細說紅樓)》에서 “《석두기》는 대만기(臺灣記)라고 할 수 있다.”고 칭송했다. 왕이안의 이 주장에 동의하는 독자는 아마 그다지 많지 않겠지만, 왕이안은 똑같이 자신이 “작자의 원래 의도를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텍스트 연구의 측면에서 ‘작자의 본래 의도’ 역시 해석자가 대단히 관심을 가지는 과제이다. 제3장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신홍학이 나타나기 전에는 120회 《홍루몽》이 대단히 한정적인 해석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스가 신홍학을 제창하던 시기에 《홍루몽》 뒤쪽 40회는 연구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신홍학 연구자들이 앞쪽 80회를 읽고 얻어 낸 ‘작자의 본래 의도’를 뒤쪽 40회에서도 관통되도록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핑보를 예로 들어 보자. 그의 저작은 수시로 “《홍루몽》의 속작을 쓴 사람은 이 점(가보옥이 출가한 일을 가리킴)에서 전혀 조설근의 원래 의도를 몰랐다.”라거나 “그렇다면 고악이 이 점(향릉이 하금계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것을 가리킴)에 대해 대단히 부주의해서 조설근의 원래 의도를 뒤집어 버렸다.”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구졔깡은 위핑보가 “고악이 조설근의 원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여러 차례 통렬하게 공격했다.”고 했다. 이런 논리적 단언은 틀리지 않다. 또 하나의 좋은 예는 위잉스이다. 위잉스는 근대 《홍루몽》 연구의 발전 과정을 검토한 후 이렇게 지적했다. 즉 이왕의 연구자들은 모두 역사 자료에 의지하여 주변 문제가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텍스트의 ‘유기성’과 ‘내재 구조’를 강조하면서 《홍루몽》 연구의 방향이 외부에서 내부로 수렴되기를 바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위잉스의 ‘내재 연구’가 여타 연구자들의 ‘주변 연구’와 확연히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연구 방향상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위잉스가 말하는 ‘유기성’과 ‘내재 구조’의 최종 귀착점은 여전히 ‘작자의 본래 의도’이기 때문이다. 즉 “작자의 본래 의도는 대체로 작품 자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10여 년 후에 일어난 판본 연구의 목표 역시 “작자의 최후 완성본[定本]”, 다시 말해서 “작자의 최종 의도”를 구현한 판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홍루몽》적 전체 텍스트(80회 판본 또는 120회 판본에 대한 것이다. 개별 텍스트 문제에서 가령 진가경의 죽음이랄지 방관(芳官)의 개명(改名), 제67회의 우열 문제 등도 예외 없이 작자의 의도 또는 작자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보건대 근대 《홍루몽》 연구에서 텍스트 문제는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작자 관념과의 연계를 끊을 수 없다.
‘특수 독자’의 연구 분야에서 ‘작자의 본래 의도’ 역시 지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제4장에서 지적했듯이 지연재 비평이 연구자들에게 중시 받은 원인은 비평가와 작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신홍학 연구자들 가운데 저우루창과 위핑보는 모두 지연재 비평을 무척 중시했다. 예를 들어서 저우루창은 이렇게 진술했다.
하지만 이 지연재라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이 책의 실제 사건과 내막을 이처럼 분명히 알고 조설근의 뜻과 문체를 이처럼 정밀하고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석두기》에 대해 그는 작자의 대변인으로서 밑바닥의 비밀을 모두 드러내내니, 그의 중요성은 조설근 본인과 거의 등호를 그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로 보건대 지연재는 “조설근의 뜻과 문체를 이해”했기 때문에 저우루창에게 중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우루창이 제기한 ‘상운설’은 비평가를 조설근의 아내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가 보기에 비평가는 작자의 ‘대변인’으로서 자격이 있었다. 위핑보의 경우는 일찍이 1922년의 지연재 비평 연구에서 이미 그 비평 문장이 ‘작자의 의도’에 근접해 있는지 여부를 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비평가의 평론 대상이 일부 속작까지 포함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했다.
(속작의) 작자는 조설근과 아주 가까웠거나 또는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각 측면에서 조설근의 뜻을 헤아렸다. 그가 보충한 것이 모두 원작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아서[不離其宗]’ 100여 년 뒤의 우리가 혼자서 함부로 추측하는 것보다 일은 수월하면서도 두 배의 효과를 거두었다.
지금 우리는 지연재 비평이 결코 ‘속작’을 평론하는 것이 아니라서 위핑보의 진술이 완전히 쓸 데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이 말을 통해서 그가 ‘조설근의 의도’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에 이르러 위핑보는 다시 지연재 비평에 대해 논했는데, 그가 제기한 문제는 “지연재 비평과 작자의 의도 사이에 여전히 약간의 거리가 있는가?”였다. 1953년에 위핑보는 또 《지연재 홍루몽 집평(輯評)》을 편찬하면서 〈인언(引言)〉에서 보여준 그의 관심은 여전히 “이 비평이 작자의 뜻을 100% 대표하는가?”였다. 1922년에서 1953년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위핑보의 관심은 줄곧 지연재 비평과 ‘작자의 본래 의도’ 사이의 관계에 있었다. 그 외에 지연재 비평에 의지해서 건립된 갖가지 ‘전기설’들도 모두 결국은 작자가 ‘사실을 쓰려’ 했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하려 했으며, ‘허구적 진술(pseudo-statement)’과 관련된 비평은 오히려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작자의 본래 의도’를 얘기하는 것은 근대의 《홍루몽》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향은 서양의 전통적 해석학의 지향과 비슷한 데가 있다. 전통적인 해석학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는 두 가지 사상을 이끈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와 딜타이(Dilthey: 1833~1911)는 모두 작자의 본래 의도를 해석의 목표로 여겼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 원고(Hermeneutics: The Handwritten Manuscripts)》에서 심리 해석(psychological interpretation)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해석자로 하여금 작자가 원래 의도한 심리 상태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딜타이는 〈해석학의 흥기(Die Entstehung der Hermeneutik)〉에서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을 계승하여, “해석 활동의 최후 목표는 작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딜타이의 주장은 또 허쉬(E. D. Hirsch: 1928~ )에게 계승되었다. 허쉬는 ‘(작자의) 심리적 재건(psychological reconstruction)’을 주장했다.
해석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기 안에서 작자의 ‘논리’와 태도, 문화적 사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세계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 검증 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울지라도 궁극적인 검증 원칙은 매우 단순하다. 즉 진술한 주체에 대해 상상적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The interpreter’s primary task is to reproduce in himself the author’s “logic”, his attitudes, his cultural givens, in short, his world. Even though the process of verification is highly complex and difficult, the ultimate verificative principle is very simple――the imaginative reconstruction of the speaking subject.
많은 《홍루몽》 연구자들이 ‘(작자의) 심리적 재건’을 명확히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실제로 그 작업에 종사했다. (본서의 제2장, 제3장, 제4장을 참조할 것.) 이 점은 이미 명확하기 때문에, 이제 남은 문제는 허쉬가 말한 ‘검증 과정(the process of verification)’이다. 바꿔 말하자면 해석 방법의 문제는 또한 이 장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이기도 하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해석 방법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면서 아울러 각 장에서 미처 논의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적으로 검토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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