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임꺽정 양반편6
홍명희
임꺽정 3: 양반편 | 홍명희 - 모바일교보문고
제 6장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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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불교를 숭상하던 풍습이 뒤에 남아서 국초 적에는 사대부 명색들도 불도를 좋아하였다. 초상이 나면 중들을 청하여 빈소에서 경을 읽히었는데, 이것이 이름이 법석이니 중과 속인이 뒤섞이어서 짝없이 수선을 따는 까닭에 수선 떠는 것을 법석 벌인다고 말하게까지 되었고 집에서 법석을 벌일 뿐 아니라 식재라고 절에 가서 재를 부치는데, 칠일부터 사십구일까지 일곱 번 식재에 일칠일 첫재와 사십구일 끝재가 가장 굉장하여 친척과 친구들까지 포목을 지워가지고 나가서 중에게 시주하였고, 또 기제날은 승재라고 중을 맞아다가 한밥을 먹인 뒤에 염불로 흔령을 인도하는데 중의 인도가 아니면 혼령이 운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제주부터 승재에 정성을 들이었다. 이 외에도 시주와 불공이 많아서 민간의 재물이 절로 흘러들어가더니 성종대왕 시절에 대간이 그 폐단을 논계하여 유교 숭상하던 대왕이 민간의 불사를 일체로 금하고 대왕께 어머님 되는 인수대비가 노산군 부인 송씨의 출가하였던 정업원에 새로 불상을 조성하였을 때 어느 유생이 짐짓 그 불상을 태워버린 까닭에 대비는 화가 충천하게 섰으나 대왕은 그 유생을 죄주지 아니하였었다. 성종대왕 이후로 재상의 집이나 선비의 집에서는 법석도 못 벌이고 식재도 못 부치고 승재도 못 올리고 다른 불공도 드러내놓고 못하였었는데, 이때 대왕대비가 후생 길을 닦으려는 의사로 부처를 위하기 시작하여 정업원 터에 새로 인수궁을 이룩하고 자주 거동하여 친히 불공을 올리게 되니 민간에서 금법을 지킬 까닭이 없어 재팔 소리, 목탁 소리가 도처에 낭자하게 되며 죽치어 들어앉았던 중들이 다시 한세월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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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가 인수궁에서 무차대회를 건설하려고 명승을 팔도에 구하니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는 청허당 휴정 이란 젊은 중이 공부가 놀라웠고, 안성 칠현산 칠장사에는 병해라는 늙은 중이 도술이 놀라워서 각각 유명하였으나 두 중은 모두 서울 오지 아니하고 춘천 청평산 문수사에 있는 보우란 중이 강원감사 정만종의 천거로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보우는 신수 좋고 언변 좋고 무차대회에 익숙하여 대회를 한 번 치르고 곧 대비의 눈에 들었다. 보우는 금강산에서 병해대사를 해치려던 중이니, 그때 곧 경산으로 오지 못하고 전에 있던 안변 황룡사로 나와 있다가 계림군이 황룡사 토굴에서 잡지어 나갈 때 석왕사로 옮기고 얼마 뒤에 또다시 춘천 문수사로 옳기어 몇 해 동안 눌러 있었던 것이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설법에 반하여 처음에는 인수궁에 거처하게 하고 나와서 보다가 나중에 경복궁 안으로 불러들이어 특별히 거처할 처소를 정하여 주었다. 어느 날 대왕대비가 난정과 및 여러 궁인을 데리고 보우의 처고에 와서 설법을 듣는데, 보우는 비단 보료 위에 비단방석을 곁깔고 앉아서 앞에 앉은 대비를 바라보고 "대왕대비의 존귀하신 몸이라도 부처님께 바치신 바에는 불가의 심법을 아셔야 합니다. 불가에서는 사민평등에 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같이 설법을 듣는 자리에 앉았는 사람과 섰는 사람이 달라서는 설법 듣는 보람이 없습니다. " 하고 손을 들어서 대비 뒤에 둘러선 난정과 여러 궁인들을 가리키니 대비가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며 "거기들 앉아라. 이 자리에서는 나나 너희들이나 다같이 대사의 제자이니 어려워들 말고 앉아라. " 하고 말씀하여 여러 사람이 둘러앉은 뒤에 보우는 미타경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장엄한 것을 말하여 들리었다. 대비가 "우리가 무슨 공덕을 쌓아야 극락을 가게 될까요? 나는 나이 벌써 오십이 가까웠으니 속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 " 하고 보우를 치어다보니 보우가 "환희불이 육신성불하는 비밀법문이 있으니 이것이 극락 가는 데 가장 속한 길이올시다. " 하고 한번 허허 웃었다, 이후로 대왕대비는 보우에게서 그 법문 전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난정과 여러 궁인들이 감히 참예하지 못하였다. 보우는 저의 말이 득도하였다고 하나 대왕대비부터 득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여 그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윤춘년이 문후하러 들어왔을 때 "득도한 사람은 어디가 예사 사람과 다르냐? “ 하고 하문하였다. 윤춘년은 다소 공부가 있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하는 사람이라, 대비의 하문을 받고 "황송하오나 먼저 하순하시는 뜻을 알고자 합니다. " 하고 대비의 말씀으로 보우가 자칭 득도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고 "득도한 사람이라고 밥 안 먹고 잠 안 자는 것은 아니옵지만, 물욕 없는 것이 예사 사람과 다르외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너 같은 공부 있는 사람은 알는지 모르나 나는 득도한 지 아니 한 지를 분간할 수가 없더라. " "신인들 용이히 안다고야 할 수 있사오리까만 몇 마디 수작해 보면 짐작은 할 수 있을 듯하외다. " "내가 알고 싶으니 너 한번 보우선사와 수작해 보아라. " 하고 대비는 춘년의 대답도 듣지 아니하고 곧 궁인을 보내어 보우를 청하였다. 보우가 들어와서 대비께 향하여 합장배례를 드리고 "소승을 부르셨습니까? ” 하고 말하니 대비가 앉은 건너편 방석을 보우에게 권하였다, 보우가 앉은 뒤에 대비는 "혼자 심심하시지? “ 하고 묻고 나서 춘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나의 친족인데 유식하다고 칭찬받는 사람이니 데리고 이야기해 보시오. " 하고 말씀하여 보우가 밤간 몸을 일으켜 춘년을 향하여 합장하고 다시 앉으니 "대사의 공부 놀라우신 것은 말씀을 듣자웠소. " 하고 춘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부가 놀라운 것이 아닌 줄을 아시겠지요? ” 하고 보우의 말이 윗손을 치는데 춘년이 슬그머니 화가 나서 대번에 기세를 꺾어보려고 "누가 문자만을 공부라 하겠소. 황매산의 절구질도 공부이지요. " 하고 말하였더니 보우가 빙그레 웃고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웃는 것이 역시 윗손치는 거동으로 보이었다. 춘년이 보우와 수작하는 동안에 말이 유교와 불교의 다른 점에 미치었더니 보우는 도도한 변설로 서서히 차별하여 말하는 중에 "공자, 맹자의 유교가 정자, 주자의 유교와 다른 것을 구별할 줄 아실 터이지요? “ ”정자, 주자의 유교는 불교와 같은 점이 많은 것을 아실 터이지요? “ "공자가 부처님 출세하신 것을 알고 서방에서 큰 성인이 나셨다고 말씀하셨으니 성인 값이 있습니다. " 이와 같은 말로 춘년의 말문을 막아서 나중에 춘년이 "대사의 공부가 참말로 놀라우시오. " 하고 칭찬하여 보우보다 대왕대비가 대단히 좋아하였다. 보우가 처소로 나간 뒤에 대비가 "득도한 중이지? ”하고 춘년에게 물으니 춘년은 "득도는 모르겠소이다만 유식한 것은 의심없소이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이때 경복궁 안에 도깨비 장난이 심하였다. 밤저녁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사람은 없는데 나무신을 신은 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궁인들이 옷상자에 불이 나는 것들 허둥지둥 끄고 보니 불탄 자욱이 없이 아무렇지 않은 일도 있고, 무수리가 빨랫가지를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찾으려니 바람이 분 일도 없었는데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걸치어 있는 일도 있고, 나이 어린 궁인이 도깨비를 탓하여 욕설하다가 난데없는 흙덩이가 입으로 튀어들어온 일까지 밌었다. 도깨비 장난이 사정전 귀가 제일 심하여 밤만 되면 아무리 장력 있는 궁인이라도 사정전 뒤에는 갈 생각을 먹지 못하였다. 대비가 이것을 보우에게 말씀한즉 보우의 말이 백신이 수호하는 궁궐 안에 이매망량이 장난하다니 무엄한 일이라고 하고 며칠 밤을 두고 사정전 뒤로부터 도깨비 장난한다는 곳을 빼지 않고 돌아다니며 호령질하더니 그 장산이 일시에 지식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보우가 득도한 중인 것은 대왕대비가 믿을 뿐 아니라 여러 궁속들까지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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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믿는 품이 감나무에 배가 열린다 하여도 의심하지 않고, 보우의 말을 좇는 품이 소금섬을 물로 끌라 하여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듣모 한동안 침체한 불법을 진작하려고 하여 선종, 교종의 구별을 세우고 양종 선과를 설시하기로 작정하였다. 대왕대비가 왕을 데리고 정전에 전좌하고 영의정 심연원과 좌의정 상진과 및 우의정 윤원형을 함께 불러들이어 양종 구별할 일과 선과 보일 일을 문의하니 심연원은 "선종, 교종의 구별은 전에도 있던 일이올시다. " 하고 간단하게 말씀을 아뢰고 상진은 "계행 있는 중은 선과에 잘 응시하지 않을 듯하외다. " 하고 말씀하다가 대비가 "선과에 응시하면 계행이 깨어지나? 나는 계행 있는 중을 많이 뽑게 할 작정이니 대신의 말이 맞나 나의 말이 맞나 두고 봅시다. " 하고 미안한 기미가 있게 말씀하여 "노신의 소견에는 중에게 과거가 당치 않은 일이옵기에 한마디 말씀을 아뢰온 것이올시다. " 하고 순순하게 말씀을 아뢰고 윤형원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우상은 의견이 어떠한고? “ 대비의 하문에 "신은 별 소견이 없습니다. " 하고 한마디 대답을 아뢰을 뿐이었다. 대왕대비가 대신들의 이론이 없는 것을 보고 곧 다시 보우와 의논하고 광주 봉은사를 선종대찰로 정하고 양주 봉선사를 교종대찰로 정한 뒤에 양종 선과를 설시할 터이니 정하여주는 각도 사찰에서 초시를 보고 서을 와서 회시를 보게 하되 이름 있는 중으로 선과에 빠지는 자가 없게 하라고 팔도 사찰에 영을 내리었다. 양사 옥당이 함께 나서서 국가에서 이교를 숭봉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육조 백관들이 나서서 정론으로 보우의 죄를 말하고 또 관학 유생들이 나서서 상소로 보우를 죽이자고까지 청하였으나, 대비의 맘은 움직일 까닭이 없었다. 이때 대왕대비는 눈 안에도 보우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맘 안에도 보우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 보우 한 사람의 한마디 말이 대비에게는 천 사람 만 사람의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더 힘지던 것이다. 유상들의 보우 죽이자는 상소를 보고 대왕대비가 "맨망스러운 자식들 같으니, 공부는 아니하고 상소질은 무어냐? 그까짓 것들은 공부시켜 놓아도 소용이 없으니 다 내쫓차버려라. " 하고 화가 꼭뒤까지 나서 유학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게 되어도 안위시키지 아니하였고, 한동안 지나서 화가 조금 풀린 뒤에야 조관 부형 된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 자제를 관으로 보내게 하였다. 양사 옥당이 꾸준히 다투는 중에 각처에서 선과 초시를 마친 중들이 회시를 보려고 서울로 모여들었다. 선과 회시의 과목은 강경과 제술이요, 시관은 허야당 보우대선사이었다, 문과 회시제도와 방사한 제도로 선과 회시를 보이어 선과에 급제 몇 사람과 교과에 급제 몇 사람을 각각 뽑은 뒤에 선과 급제는 선사라 칭하고 교과 급제는 대사라 칭하게 하였는데, 이때 선과의 장원급제는 청허랑 휴정선사이고 교과의 장원급제는 송운당 유정대사이었으니 송운당은 청허당의 제자인데 선생 , 제자가 다같이 명승이었다. 이때 선과의 득인한 것은 선종, 교종의 두 장원만 가지고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으니 선종의 장원급제 청허당 휴정은 곧 임진왜란에 일국도대사 팔오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로 승병을 통솔한 서산대사이고, 교종의 장원급제 송운당 유정은 곧 임진왜란 후에 사신으로 일본 가서 난중에 잡혀간 남녀 인구 삼천여 명을 찾아내온 사명당이다. 청허당과 송운당이 뒷날에 장한 중이 된 것은 가치하고 그때 벌써 이름이 높아서 선과의 두 장원이 모두 비범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승속간 적지 아니하였다. 당시 문신 중에 가장 총명한 체하던 윤춘년은 선과 창방하던 날까지 "인재를 뽑는 것은 경권 보는 것과 달라서 인물을 감별하는 안식이 있어야 할 터인데 보우가 그 안식이 있을까? ” 하고 의심하언 사람이 두 장원을 보고는 맘이 절로 꺾이든지 이 사람 저 사람을 대하여 여러 번 "보우 화상의 인물 감식이 제법입디다그려. " 하고 보우의 시관 노릇 잘한 것을 칭찬하였다. 윤춘년은 청허당과 계분을 맺어서 이조판서로 조명하느라고 문에 잡객을 들이지 아니할 때, 청허당이 오면 반드시 맞아들이어 경도하는 벗과 같이 대접하였다. 대왕대비는 선과의 득인한 것을 문무과 득인한 것보다 일층 더 좋아하여 장원 이하 급제들을 나라에서 대접하되 무과의 선달은 고사하고 문과의 급제로도 바라지 못할 만큼 모든 절차를 융숭하게 하였다. 대왕대비가 보우를 보고 급제들의 신래 불릴 것과 유가 돌릴 것을 의논하니 보우가 대번에 "신래는 고만두고 유가나 돌려보십시다. " 하고 말하였다. "신래도 불리는 것이 좋지 않소? 대사가 궐내에서 불리시구려. " "점잖은 중들을 갖다가 웃음바탕 만들 것이 있습니까? 고만두시지요. " "까까중들을 눈에 왕방을 퉁방을 그리고 이리위 저리위 하고 끌고 다니면 구경스럽겠네. " 하고 대비가 한번 깔깔 웃은 뒤에 다띠 말씀을 이어 "그래, 신래는 대사가 좋아 아니하니 고만두기로 하고 유가나 잘 돌려봅시다. 유가는 어떤 절차가 좋겠소? 문과 급제들과 같이 하라 하리까? “ 하고 의향을 물으니 보우는 "유가도 문무과와는 좀 달리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조대왕 때 흔히 행하시던 전경법이란 것을 참작해서 새로 절차를 정하십시다. " 하고 말하였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좇아서 새로 절차를 마련하여 유가 돌리게 하였는데 전경법을 참작하니만큼 절차가 서로 근사하였다. 앞줄에는 수많은 기잡이와 일산잡이를 쌍쌍이 세우고 그 뒤에 부처 태운 벌린 연을 뜨게 하는데, 연의 앞줄에는 조라치들이 삼현육각을 잡히며 가고 연의 좌우에는 중들이 판에 받친 향로를 받들고 가게 하고 뒷줄에는 조그만 상좌중을 큰 북 실은 수레에 태워서 따라가게 하고 장원 이하 급차들은 갖은 안장을 지운 사복 말들을 타고 좌우편 중들의 앞을 서게 하였다. 유가 돌러 나갈 때에 대왕대비는 왕대비와 왕과 왕비 외에 보우와 및 여러 궁인을 데리고 광화문 문두에 나와 앉아서 떠나보내는데, 등등 북소리가 나면서 조라치의 풍류 소리가 나고 한동안 뒤에 또 등등 북소리가 나면서 중들의 송주 소리가 나서 둥둥 소리가 나는 대로 조라치의 풍류 소리와 중들의 송주 소리가 번갈아 들리었다. 유가돌이가 늦은 아침때 육조 앞을 떠나서 거리를 돌다가 태평관에서 점심 먹고 다시 거리를 돌기 시작하여 재를 지우고 육조 앞으로 돌아와서 대왕대비와 보우가 다시 광화문두에 나와 앉은 뒤에 각기 흩어졌는데, 이 날 쉬는 곳의 장막은 전설사에서 등대하고 태평관의 점심은 예빈시에서 공궤하고 어둔 뒤의 횃불은 사재감에서 대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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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가 대왕대비를 끼고 한바탕 뒤설레를 치는 바람에 불교가 왕성하여 팔도 사찰이 일신하게 되었다. 이때 시골 있는 선비들은 옥하사담이 많았는데 이황과 같이 간정한 사람은 당초에 서울 소식을 귀 막고 듣지 아니하려고 할 뿐이었지만, 조식은 몸이 시골에 물러와서 있을지언정 맘으로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라 제자들을 데리고 앉았다가 말이 나랏일에 미치어 "원형 하나도 과하거니 보우까지는 심치 아니하냐. 국가는 장차 어찌 되며 생령은 장차 어찌 되랴. " 하고 주먹으로 자리를 눌러 팔을 세우며 눈물 흘릴 때가 있었다.어느 날 달 밝은 밤에 조식이 혼자 칼을 안고 앞마루에 앉아서 슬피 노래를 부르는데 이때 마침 "남명 선생이 계시오? “ 하고 문 밖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남녕은 조식의 아호이다. 남명이 칼을 놓고 일어서서 옷을 가다듬는 중에 그 사람은 벌써 마당 안에 들어섰다. 남명이 달빛 아래 걸어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형중이 아닌가? 이거 웬일인가? ” 하고 뜰 아래로 쫓아내려와서 맞아올린 사람은 곧 이지함이다. 득 사람이 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웬일인가? “ ”웬일이라니? 자네가 보도 싶어 찾아왔네. " "토정이 갑갑하든 것일세그려. " 하고 남명이 껄껄 웃었다. 이지함은 자기의 사는 집을 담집으로 치고 그 지붕을 평평하게 하여 정자를 삼고 지내는 까닭으로 별호까지 토정으로 행세하는 터이라 "이 몸이 갑갑한들 어찌하나. "하고 토정은 별호를 빙자하여 집 말을 몸으로 대답하고 나서 역시 허허 웃었다. "자네가 내게로 바로 오는 길인가? “ "아니 보은을 들렀었네. " "보은을 들렀어? 건숙이 잘 있든가? ” 하고 남명이 묻는 사람은 보은 종곡에 사는 처사 성운이요, "자경이도 나와서 며칠 동안 잘 놀다 왔네. " 하고 토정이 말하는 사람은 현감으로 있던 성제원이니 성처사와 성현감은 모두 인품이 높아서 남명과도 서로 닌한 터이다. "자네 말을 들으니 거문고 안은 건숙이와 술잔 잡은 자경이가 곧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이 자네 말을 많이 하였었네. " "속리산에 들어갔든가?“ "나 혼자 한 번 문장대에 올라갔었네. " "요전에 나와 같이 갔을 때도 자네 혼자 올라가더니 또 올라갔단 말인가? 자네의 섭위 잘하는 것도 못들 버릇이니. " "쓸 버릇, 못쓸 버릇 가르는 법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지금 내가 시장하니 밥 좀 지어 내오라게. " 하고 말하는 토정의 얼굴에는 시장한 모양이 보이었다. "내가 불민해서 미처 묻지 못하였네. " "물어 무어하나, 내가 말하는데. " "그리할까7 " 하고 남명이 한번 웃고 곧 하인을 불러서 밥을 지어 내오라고 안에 통기하였다. "좀 눕게.” 하고 밤명이 방에서 목침을 집어다가 권하니 "눕도록 피곤하지는 아니하니 걱정 말게. " 하고 토정은 눕지 아니하였다. "서을 있을 때 소위 선과 창방이란 것을 구경하였나? “ "점잖은 사람이 누가 그걸 구경한단 말인가. " "보우는 문교를 그르치니 국사는 말이 아니지. " 하고 남명이 한숨을 쉬니 "보우가 국정까지 그르친다네. 대왕대비의 하이는 일이 모두 보우의 주장인 줄을 모르나. 보우 앞에는 원형이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데. " "신돈이가 또 하나 났군. " "신돈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 십여 년 전에 한번 이장곤 이판서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이판서 말이 신돈 같은 중놈이 장차 나온다고 하고, 어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자기가 선생같이 믿는 사람이 앞일을 능히 짐작하여 말하더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네그려. " "미리 알았으나 미리 몰랐으나 그런 원숭이 나기는 일반이라면 미리 아는 것이 소용 있나7" "하여튼지 말이 맞는 것이 신통하지. " "지금 조정에는 이존오 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 하고 남명이 개탄함을 마지 아니하는데 토정은 "양사 옥당과 육조 백관과 관학 유생이 모루가 다 이존오시지. " 하고 허허 웃고 "우리는 구전성명이나 하지 별수 있나. 나도 조카 자식들을 데리고 시골 가서 숨어 살 작정일세. " "언제는 우리가 세상에 나섰는가? ” 하고 남명은 토정을 바라보며 입맛 쓴 웃음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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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이 석반을 마친 뒤다. 밤이 들수록 달빛은 더욱 밝아 대낮 같으나 바람이 조금 선선하였다. "선선하거든 방으로 들어 가세. " "달이 아까우니 잘 때나 들어가지. " "길에 지쳤을 터인데 곤하지 아니한가? “ "자경이와 같이 보름씩 잠 안 자고는 배기지 못하지만 설마 길에 좀 지쳤다고 곤하겠나. " 하고 토정이 말하는 것은 성현감의 일이니, 성현감이 어느 중을 데리고 잠 안 자기를 내기하여, 그 중은 열사흘 만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성현감은 보름을 채우고도 평일과 별로 다름이 없이 기거한 일이 있어서 그 정력의 절등한 것을 친구들 사이에서 칭도하는 터이였다. "자경이는 별사람이야. " 하고 남명이 토정의 말 뒤를 이으니 토정은 별사람이란 말이 자기 뜻에 맞는 듯이 "참 그러해, 별사람이야. 내가 연전에 자경이와 같이 뉘 집에 갔다가 광대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광대가 소리를 시작해서 단가 한 곡조 다하기도 전에 자경이가 그 광대를 돌려보내자고 주인더러 말하데그려. 우리야 까닭을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왜 돌려 보내라느냐고 묻지 않았겠나. 자경이 말이 이 소리가 상고 있는 사람인 것 같으니 소리 시키지 말고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데그려. 나중에 알아본즉 그 광대의 어미가 먼 곳에 있었는데 그날 밤에 통부가 왔더라네. 자경이가 성음을 살괼 줄 아는 것이 확실하지. " 하고 한동안 앉았다가 "별사람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 " 하고 다른 이야기를 거내었다. "내가 둘쨋번 제주를 갈 때에 중 동행을 만났었는데 그 중이 별 사람이야. 문식도 유여하거니와 의약복서와 천문지리를 모르는 것이 없데그려. 그 중이 지승 살았으면 나이 근 칠십 했을 것일세. 그 중이 상좌 같기도 하고 상좌 같지 않기도 한 아이놈 하나를 데리었었는데 그 아이놈 역시 별사람이야. 한라산 올라갈 때 저의 선생을 등에 업고서 올라가는데 홀몸으로 가는 사람보다 더 빨리 올라가데. 저희의 말을 들으니까 백두산에도 그놈이 선생을 업고 올라았더라네. " 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날명이 "장사일세그려. " 하고 말하여 토정은 그 말을 따라서 "장사이고말고. 엄장도 예사 사람보다 크지만 무쇠로 만든 것 같은 두 팔뚝이 천 근의 힘이 들어 보이데. " 하고 "그런데 그놈에게는 양반이 비각이야. 양반이라면 당초에 만나 보기를 싫어하고 말말끝에 양반의 말이 나기만 하면 함부로 욕설을 하는데 선생 되는 중이 항상 타일러 못하게 하드군. " 하고 말을 달리 돌리었다. "불학무식한 상것들의 자식이 그렇기가 쉽지. " "백정의 자식이래. 내가 아까 이야기하려다가 미처 못했지만 그놈이 이장곤 이판서의 처족이란 말을 들은 법해. 이판서를 만나면 한번 물어본다는 것이, 이것을 물어보려고 일부러 찾아갈 까닭은 없어 이내 못 물어보았어. " "그렇기가 쉽지. 이판서의 부인이 함경도 백정의 딸이라니까. " "이판서는 작고한 지 오래지만 그 부인은 아직 살아 있겠지? “ "아니, 이판서의 부인이 작년 가을에 죽었다지. 요전에 이판서 집 이웃에 사는 일가 사람이 문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은 일이 있네. " "백정의 딸 봉단이로서 일품명부가 되었던 유명한 부인이 작고했네그려. 인물이 잘났었더라는걸. " "인물이 낫기에 천인의 딸로 정경부인까지 바쳤겠지. 치가범절도 무던했었더라네. " 하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이판서 부인의 말을 가지고 수작하던 끝에 남명이 "곤하지는 않더라도 고만 방에 들어가 눕지. " 하고 칼과 목침을 거두니 "아무리나 하세. " 하고 토정이 몸을 일으켰다. 주인과 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으로 들어간 뒤에는 빈 마루에 달빛만 가득하였다.
7
토정이 남명에게서 묵는 동안에 보우가 역적으로 몰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명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거처하는 놈이 역적질을 하려고 했다면, 만분 위태한 일이 있었을 터인데 첫째 대전께서 무사나 하신지? “ 하고 왕의 몸에 변고나 있지 아니할까 하고 걱정하니 토정은 "보우가 시역을 꾀하였다면 대왕대비께서 미리 모르셨을리 없을 것인즉 다른 변고면 모르되 그런 변고는 당저에 없을 것일세.” 하고 왕의 몸이 무사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진적한 서울 소식을 몰라서 궁금히 생각하기는 남명이나 토정이 다름이 없었다. 대체 보우의 역모하였다는 초문이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니나 일이 소문과는 같지 아니하였다. 처사별과 같이 한구석에 숨어 있는 조남명과 상서별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이토정의 이야기는 그만두고 제원을 침범한 요기로운 별괴 같은 보우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할 터이다. 조관과 선비들은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모두 보우믈 미워할 따라 보우를 큰 죄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보우의 뒤에 있는 대왕대비를 꺼리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판에 함경도 어사 왕희걸이 장계를 올리어 보우가 전에 지은 죄상을 적발하였다. 보우가 안변 황룡사에 있을 때에 계림군의 하인 무응송이란 자와 부동하여 계림군글 토굴에 숨겨주고, 수색하는 전령이 급한 것을 알고는 화가 저의 몸에까지 미칠까 겁을 내서 저 혼자 슬그머니 석왕사로 옮기었는데, 석왕사로 옮긴 뒤에도 무응송이가 내왕한 일이 있었고, 또 보우가 계림군을 위하여 산골에서 남몰래 여러 번 성재를 올린 일이 있었다. 재 올릴 때에 쌀을 꾸어준 중이 지금까지 석왕사에 있쓰니 언제든지 불러 물어볼 수가 있다. 그런즉 보우는 역적으로 몰린 계림군의 여당이라 곧 역률로 다스려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정원에서 왕어사의 장계를 받아 마친 뒤에 왕희걸의 장계로 보면 보우의 죄상이 자못 중대하니 우선 전옥에 내리어 가두고 핵실하여 보자고 왕께 청하였으나 대왕대비는 왕을 시켜 "이것은 보우를 해코자 하는 자의 조작부언이 분명하니 고만두어라. " 하고 전교를 내리게 하였다. 양사에서 이것을 알고 나서서 논계하고 대신이 이것을 가지고 청대하여 다같이 보우를 치죄하자고 주장하였더니 대왕대비가 왕을 보고 "근래 조정에 일이 없으니까 별일을 다 가지고 떠드는구나. 양사의 젊은 것들은 모르지만 대신들이 그렇게 경거망동할 수야 있느냐? 그까짓 일에 청대란 다 무어냐? 가만들 내버려 두어라. 하다가 하기 싫으면 고만두겠지. " 하고 화를 내면서 하교한 까닭에 왕은 불윤이라는 간단한 말로 방패를 삼아 양사와 대신의 여러 말을 막아 버리었다. 왕어사의 장계 뒤에 판서 송세형이 혼자서 서계를 올리어서 보우를 죄주자고 청하였는데, 그 서계의 대지는 "보우가 국가의 권세를 잡고 교앙방자하여 무식한 인민들이 군부와 같이 존숭하는데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개탄할 일이외다. 보우가 불측한 맘을 품으면 곧 큰 화를 국가에 미치고 말 것인즉 지금 처치하여야 합니다. 보우의 위인이 족히 불측한 맘을 가질 것은 이러이러한 거동만 보아도 알 수 있삽네다. " 하고 아래에 보우의 패악한 거동을 나열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세형의 서계도 불윤이라는 비답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보우는 역모를 죄한 일은 없었지만, 왕어사의 장계와 송판서의 서계가 난뒤로 "보우가 역적질을 하려고 하였다. " 보우가 역모하다가 미리 발각되었는데 대왕대비가 용서하였다. " "보우가 지금도 역모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건만 조신들이 대왕대비를 꺼려어 말을 못한다. " 하고 선비들의 입에서 사실과 틀리는 소문이 일시는 널리 퍼지었었다. 보우가 교앙방자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여간 사림은 눈에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여 처음 보는 사람에게라도 "소승 문안드립니다. " 하고 인사사는 법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남의 정성스러운 첫인사를 고개만 끄덕거리며 앉아 받고, 재상들에게는 고사하고 대왕대비께까지라도 저의 말을 "보우가" 또는 "내가" 하고 말하지 신승이라 소승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궁인과 액정 소속에게 몰밀어서 하게할 뿐 아니라 대왕대비가 해라하는 사람에게는 거지반 하게나 반말을 쓰는 까닭에 난정이와 같은 일품 부인은 흔히 반말짓거리로 대답하였다. 보우가 처음에는 산인으로 자처를 높이 하여 대왕대비가 혹시 국사를 가지고 의논하면 "그것은 보우의 알 바가 아녑니다. " 하고 웃어버리던 사람이 불과 일 년이 못 지나서 "함경감사는 아무가 좋습니다. " "아무개는 사람이 변변하다니까 목부사가 과하지 않겠습니다. " 하고 대왕대비께 말씀하면 대왕대비가 원형이나 춘년에게 하교하여 보우의 말대로 수령 방백을 내는 일까지는 없지 아니하였다. 보우의 고향 임피에 보우의 사촌형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사촌형수가 사람이 그악하여 보우가 임피 절에 있을 때에 사촌의 집에 가서 찬밥 한술을 잘 얻어먹지 못하였었다. 그 사촌이 보우의 놀랍게 출세한 소식을 듣고 안해를 보고 말하였더니 그 안해가 “사람이란 것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중 아재가 그렇게 귀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소. " 하고 그 다음에는 곧 남편더러 서울을 가보라고 권하였다. "서울 가면 만날 수가 있을까? ” “아무리 귀인이기로 사촌이야 아니 보겠소. " "그건 그렇겠지만 서울갈 길양식은 어디 있나?” "개똥이네 집에 가서 꾸지도 못한단 말이오? 개똥이 아버지더러 말하고 꾸어달래 보구려. " "그래 볼까. " 하고 내외 공론한 끝에 길양식을 꾸러 갔었다. 개똥이 아버지는 보우의 어릴 때 동무라 그 사촌이 만나러 간단 말을 듣고 양식을 대어 주고 동행하기로 작정하여 두 사람이 같이 서울을 올라와서 보우를 만나보려고 애즐 썼으나, 궐내에 거처하는 보우를 만나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다. 두어 달 동안 헛근사를 모으던 끝에 보우가 인수궁에 나가는 것을 미리 알고 동대문 밖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보우의 행차가 예사때 거동이나 다름없어서 촌사람들로 덤비기가 어려웠으나, 두 사람은 악증을 부리듯 이 행차 중간으로 뛰어들어가며 "보우. " "보우. " 하고 소리를 질렀다. 보우를 따라오는 액정 소속들이 게 "잡인을 치워라. " 하고 호령하며 보우를 호위하고 나오는 금위군사들이 두 사람을 덜미 집어 몰아내쳤다.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귀히 되면 사촌형도 몰라보나. " 하고 엉엉 우는 것을 몰아내치던 군사가 보고 액정 소속에게 말하고 그 액정 소속이 보우에게 말다였더니 보우가 눈살을 잠깐 찌푸리며 "사촌형 이래? “ 하고 혼잣말하듯이 말하고 "그 사람을 인수궁으로 데려오라게. 내가 이따 좀 불러보겠네. " 하고 말을 일렀다. 임피 사람들이 보우를 만나보게 되어서 인수궁 문 밖에서 반 나절을 넘어 기다리었다. 나중에 두 사람이 함께 보우의 앞으로 불려들어가며 치어다보니 보우가 큰 대청 난중간에 무엇을 놓고 높이 앉았는데, 머리에는 비단건을 쓰고 몸에는 수놓은 장삼을 입고 손에는 보패로 만든 염주를 가졌는데 그 위풍이 으리으리하였다. 두 사람은 뜰 위에도 올라서지 못하고 뜰 아래에서 무춤무춤하다가 "뜰 위에 올라서라고 하게. " 하고 보우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며 뜰 위에 서서 말을 받는 사람이 올라서라소 권한 뒤에 기어올라가듯이 올라가서 손길을 맞잡고 섰다. 보우가 눈을 지그시 뜨며 그 사촌을 내려다보며 "모발이 벌써 반백이 되었군. " 하고 말하니 그 사촌이 어리등절하고 대답을 못하는 것이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라 보우가 다시 "늙었단 말이야. " 하고 뜻을 풀어 말한즉 그 사촌이 그제야 "늙고말고. 밤에 새끼눈을 잘못 보는 지가 오래요. " 하고 대답하는데 이번에는 보우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고 "새끼눈이라니? “ 하고 괴이쩍게 여기니 그 사촌이 "꼬는 새끼 말이오. " 하고 두 손바닥을 맞비비어 새끼 꼬는 시늉을 내었다. 보우가 이것을 보고 빙그레 웃고 그 다음에 개똥아버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누구야? ” 하고 물으니 그 사촌이 입게 익은 대로 개똥아버지의 자를 불러서 "원보요. " 하고 대답하였다. "원보라니? “ "오, 원보래서 모르겠구먼. 애명으로 되살이오. " "응, 어려서 마마할 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인가? " "그렇소이다. " 하고 개똥아버지가 대답하는데, 보우의 사촌에게 대답을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것같이 얼른 대답하였다. "어렸을 때 냇물에서 탐방구질을 잘하였지.” 하고 보우가 옛일을 말하니 개똥아버지는 "정신도 좋으십니다. " 하고 대답하며 싱글싱글 좋아하였다. "어, 반가운 사람을 다 만나는군. " "반가워하실 줄까지 알고 보이러 왔소이다. " "내가 오늘 환궁하기가 급해서 긴 이야기를 다 못하니 한 번 대궐 안으로 찾아오라구. " "대궐 안에를 들어갈 수가 있어야 합지요. " "경복궁 대궐 서편게 영추문이란 큰 문이 있어. 내일 아침때 그 문 밖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사람을 내보내지. " “그렇게 하겠소이다. " "그러면 내일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고만들 나가라구. " 하고 개똥아버지가 몸을 굽실하고 나서 보우의 사촌을 돌아보고 그 사촌은 보우를 치어다보며 ”나도 내일 같이 만나겠소? “ 하고 물어 보우가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본 취에야 안심한 듯이 "나가겠소. " 하고 인사하고 개똥아버지와 같이 밖으로 나갔다. 그 이튿날 시골 사람들이 이른 식전부터 영추문 밖에 와서 빙빙 돌아다니는데 해가 점심때가 기울어도 부르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가?" "왜 아니 고파. 창자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네. " "아마 기다리라고 하고 잊은 모양이지? ” "글쎄. " "어떻게 하면 좋은가? “ "인제는 다시 못 만나는 게지. 두어 달소수 품을 삭여 가지고 간신히 얼굴 한번 얻어보고 말다니, 기막히는 일일세. " 하고 두 사람이 구두덜저릴 때에 큰문 안에서 송기떡빛 군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나와서 "임피서 온 사람들이오? ” 하고 물어서 두 사람이 일시에 “녜.” 하고 대답하였다. "나를 따라 들어오시오. " 하고 돌아서 들어가는데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를 어떻게 돌아 들어가는지 정신없이 돌아서 한 곳에를 오니 영창이 열리었는데, 보우의 앉았는 것이 보이었다. 그 송기떡 군복이 영창 앞에 가까이 가서 "손님들을 데려왔습니다. " 하고 말한 뒤에 보우가 무어라고 말하는 모양이 보이더니, 다른 영창문 하나가 열리며 쪽진 머리 정순리에 조그만 쇳조각을 붙인 여인 하나가 내다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두 사람이 무서워 무서워하면서 들어가니 아랫목인지 딴방인지 모를 만큼 먼 곳에 앉았는 보우가 거기들 앉으라고 말하고 나서 한번 여인을 돌아보았다. 여인이 어디로 들어갔다 오더니 음식상이 나왔다. 두 사람은 생외에 처음 보는 음식이라 먹는지마는지 하고 앉았는 것을 보우가 바라보고 싸가지고 가라고 피딱지를 몇 장씩 나눠 주게 하였다.
10
보우의 사촌이 무슨 말을 할까말까 하는 모양으로 입술을 움직 거릴 때 보우가 "살기들이 어떠한고? “ 하고 물은즉 그 사촌이 예비한 말을 늘어놓듯이 "살기가 점점 억척이오. 자기 농토로 산달밭 한 또야기도 없는 사람이 잘 살기를 바랄 수 있소. 그중메 낫살을 먹고 보니 일세도 전만 못하고 요즈막은 양식을 꾸지 않고 보리때를 대어 본 적이 없소. 딸년은 두서넛 되지마는 쓸 자식이라고는 지금 열 살 먹은 놈 하나뿐이오. 낫살 먹은 것이 구부렁거리며 남의 품앗이를 다니자면 한심한 생각이 날 때가 많소. 그래도 자기 농토나 있으면 걱정이 없겠소만 앉은뱅이 천리 갈 생각이지, 생각이 소용 있소. 이원보는 팔자가 좋아서 아들 삼형제 틈에 벌써 손자가 다섯이고 살년만 아니면 자기 농토의 소출이 여러 식구의 양식은 될 만하오. " 하고 말하는데 원보가 "이 사람아, 양식이 될 수가 있나? 나의 지내는 형편이 자네보다는 좀 낫겠지만 남의 양식을 안꾸어먹을 수가 있나. " 하고 보우 사촌의 말을 막고 보우를 바라보며 "근근히 여러 식구 호구를 해가자니 밤낮 고생이올시다. " 하고 하소연하듯이 말하였다. 보우가 잠자코 앉아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서 "시골 사람들 사는 것이 잘살고 못살고 다 그렇지. " 하고 말하여 그 사촌이 "서울 안목으로 보면 잘산다고 해야 오죽지 않지요.” 하고 뒤를 받았더니 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연명도 잘 못한다는 주제에 무슨 말이야. " 하고 나무라듯이 말한 뒤에 앞뒷동이 없이 "그 계집을 그저 데리고 살지? “ 하고 묻고서 그 사촌의 대답 없는 것을 보고 "계집을 잘못 얻으면 집안이 안 되는 법이야. " 하고 혼잣말하듯이 말하였다. 이때 대왕대비가 온다고 연통이 나왔다. "대비마마께서 납십니다. " 하고 한 사람이 나온 뒤에 "소연을 탑셨습니다. " 하고 또 한 아람이 나오고 "소연이 떴습니다. " 하고 또다시 한 사람이 나왔다. "대비가 나오시면 여기들 있지 못할 것이니 고만들 나가라구.” 하고 보우가 두 사람에게 말을 이르고 옆에 있는 궁인 하나를 돌아보더니 그 여인이 옆방으로 들어가서 보퉁이 둘을 가지고 나오는데 부피가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 보우가 먼저 작은 보퉁이를 그 사쏜에게 주며 "그 계집이 그악만 하지 살림을 살 줄 모르니까 은금보화를 산같이 쌓아주어도 잘살지 못할 것이야. 내가 지금 이것을 주는 것은 아무개의 사촌이니 육촌이니 하는 것이 남에게 과한 창피나 보지 말란 말이야. " 하고 그 다음에 큰 보퉁이를 원보에게 주며 “어려서 알던 사람이라 약간 물건을 정표로 주는 것이니 가지고가게. " 하고 각각 이른 뒤에 "인제 어서들 나가라구. " 하고 일변 재촉하며 일변 지접도 할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이 보우에게 하직을 하는지 마는지 하고 총총히 송기떡 군복의 뒤를 따라나오다가 장독교도 아니고 사인교도 아닌 것이 보우의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돌아보고 "저것이 대왕대비 타신 소연이란 것이군. " 하고 속으로들 짐작하였다. 주 사람이 주인한 곳에 나와서 보퉁이 들을 펴놓고 보니 물건 하나 피륙 한 필이 민간에서 보던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눈이 휘둘리고 혀가 나왔으나 보우의 사촌은 보퉁이의 부피가 작은 까닭으로 원보와 같이 맘이 흐뭇하지는 못하였다.
11
왕대비와 왕비도 맘대로 쓰지 못하는 내탕고 재물을 보우가 저의 사사 재물콰 같이 쓰고 싶은 대로 함부로 쓰니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건마는, 대왕대비가 보우의 하는 일은 사사이 모두 신통히만 보는 까닭으로 꾸지람 한 마디가 없었다. 이런 것은 궁중, 조정의 권세를 한손에 쥐고 흔들던 윤원형으로도 감히 바라저 못할 일이었다. 윤원형은 제 손에 있는 권세를 찢어 나눠 갈까 하여 젊은 왕비 심씨의 본곁을 다소 염려하였으나, 심연원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맘을 놓은 뒤에는 다른 염려가 없거니 태평으로 믿고 지내던 중에 의외 중놈 하나가 궐내에 들어오며 권세가 뿌리로부터 흔들리게 되니 원형은 보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형이 보우를 내쫓으려고 맘을 먹고 있었으나, 대왕대비의 눈치를 잘 살피는 난정시가 "보우를 건드리지 마시오. 섣불리 건드리다가 대비마마께 미움만 받으시리다. " 하고 눌러서 원형은 백관 정론에도 참섭하지 아니하고 또 대신 면대에도 참예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보우의 말을 가지고 떠들 때마다 대왕대비는 원형을 불러서 "그것들이 떠드는 것을 왜 가만히 보고 있는가? 못 떠들게 못하는가?“ 하고 책망하여 한번은 원형이가 "신의 힘으로 조정 공론은 좌우할 수 없습니다. " 하고 말씀을 내어 받았더니 대비가 얼굴빛을 변하며 "조정 공론? 나는 우의정 대감 말씀 한마디에 조정 공론이 도는 줄로 알았더니 잘못 알았군. " 하고 미안한 처분을 내린 일까지 있었다. 어느 때 윤원형이 저의 집 행랑채를 번와하려고 와서의 기와를 서너 울 가져오라고 차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이 말썽이 되느라고 그때 와서별제가 원형의 집 차지를 보고 "대감께서 기와를 보내라시면 필적이 있는가? ” 하고 물었더니 그 차지가 "우리가 와서 말하면 고만이지 필적은 무슨 필적이오? “ 하고 뇌까리었다. 별제는 똑똑한 체하느라고 필적을 가져오라거지 차지는 기를 부리느라고 필적을 가져을 수 없다거니 한동안 말다툼이 있은 뒤에 그 차지가 돌아와서 "별제가 가스러져서 와서 기와는 나라 기와이지 우의정댁 기와가 아니라고 호령을 통통히 합디다. " 하고 별제를 먹어 말하였더니 원형은 화를 내어 "그 따위 호령을 가만히 받고 있었더란 말이냐? 못생긴 것이다. " 하고 차지를 꾸짖어 물리치고 곧 도차지를 불러서 "건장한 하인을 한 백 명 뽑아서 와서에 보내 기와를 가져오게 해라. 별제가 만일 무슨 말을 하거든 집으로 끌고 오게 해라. " 하고 분부하여 범 같은 하인들이 와서에 몰려와서 한바탕 야료를 하고 기와를 가져왔다, 그 별제는 정만종의 친족이니 예방비장이 되어 정만종을 따라갔을 때 보주와 친분을 맺었던 덕으로 와서 별제를 얻어 한 사람이라, 윤원형 집 하인에게 기와를 빼앗기고 분하여 전후 사연을 보우에게 하소연하였다. 대왕대비가 보우의 말을 듣고 곧 원형을 불러서 "와서 기와가 맘대로 갖다 쓸 것도 아니고 갖다 쓰더라도 별제에게 말하고 조용조용히 갖다 쓸 것이지 하인들을 보내서 야료를 하다니 남의 이목에 해괴할 것은 생각지 못하는가?” 하고 꾸중하여 원형은 "황송하오이다. " 하고 다시 두말 못하고 물러나왔으나 집에 와서는 화를 못이겨 펄펄 뛰었다. 이때까지 원형은 유지가 소용 있으면 장흥고에서 갖다 쓰고, 밀이 소용이 있으면 의영고에서 갖다 쓰고, 의성고에 있는 장, 기름과 사옹원에 있는 분원사기를 맘대로 갖다 프고, 그 외에도 나라 물건을 제 집 것같이 쓰고 지내도 말이 없단 터에 기와 서너 울을 갖다 썼다고 대왕대비께 꾸중까지 들었으니 제딴은 속이 여간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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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 난정이 예궐하였다가 나와서 조용히 원형을 보고 "일전에 대비마마께 꾸중 들으신 일이 있나요? “ 하고 물으니 원형이 꾸웅 들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든지 "꾸중은 무슨 꾸중. " 하고 고개를 외로 치고 한동안 있다가 불쾌한 언성으로 "마마가 무슨 말씀 하시든가요? ” 하고 물은즉 이번에는 난정이가 “ "아니오. " 하고 고개를 외로 쳤다. "그러면 꾸중인지 책망인지 들었다는 것은 어디서 난 말이야?" "입이 뾰족한 오상궁 아시지요? 그 오상궁이 말합디다. " "무어라고? ” "대감이 와서 기와를 함부로 갖다 쓴 까닭으로 일전에 대비마마께 꾸중까지 들으셨다고 합디다. " "그 말뿐이야? “ "그 날 대비마마께서 스님에게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대감을 불러서 꾸중하시는 것이 스님이 무슨 말씀을 여쭌 모양 같다고 말합디다. " "나도 그런 줄 짐작했소. 와서별제 정가란 손이 정만종의 친족이라니까 보우에게 연줄이 있을 것이지, 대체 기와 서너 울 갖다 쓴 것이 말썽 될 것이 무어요? 우습지도 않지. " "그래 무어라고 꾸중하십디까?” "글쎄, 꾸중은 무슨 꾸중이야. 그까지 일에 꾸중을 들을 까닭이있나. " "말씀이라도 좋지 않게 하셨기에 꾸중하셨다고 말들 하지요. " "조용조용히 갖다 쓰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더군. " "무슨 다른 말씀 하시던 끝이면 모르지만 그만 말씀이라도 일부러 불러서 하셨다면 꾸중이나 진배 있습니까. " "그렇기에 사람이 창피하지. 남더러 말도 할 수 없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있든가. " 하고 원형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앉았다가 한두 번 쓴입맛을 다시고 "중놈을 어떻게든지 처치하여야지. " 하고 중얼거리듯이 말하니 난정은 깜짝 놀라는 것같이 "아이구, 큰일날 말씀을 다 하시오. " 하고 조금 동안을 떼어서 "대감이 궁중 형편을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아예 그런 말씀은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 하고 나무라듯이 말하는데 원형이 "모르기는 무얼 몰라. "하고 혀를 끌끌 찼다. "대감이 심정이 그렇게 상하실 것 무어 있소. " "똥덩이나 빠뜨리면 망신이지. " 하고 원형이 동에 닿지 않는 말을 하여 난정이 "그거 무슨 말씀이오? “ 하고 물은즉 원형이 대답이 없었다. "글쎄,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 "똥덩이가 무엇이에요? “ 하고 다그쳐 물으니 원형이 한번 싱긋 웃고 난정의 귀에 입을 대고 무어라고 소곤소곤 말하였다. 난정이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나서 해끗 웃으며 "인정? ” 하고 물은즉 원형은 "인성이라니까. " 하고 다시 말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원형이 난정의 귀에 소곤거린 말은 옛날 인성대군의 이야기니 예종대왕이 열한두 살 적에 왕비 한씨가 대군을 낳았는데 대왕의 나이 너무 어린 까닭으로 다른 말이 없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성의 이름이 똥 분자라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똥덩이라면 인성으로 짐작하던 것이다. 난정이 한참 잠자코 있다가 흘저에 한번 해해 웃고 "촌집 질요강에 똥덩이가 떴드냐? “ "대궐 안 놋요강에 똥덩이가 떴다. " 하고 가락을 떼어 옮기고 나서 "상스러운 노래도 까닭이 있구려. " 하고 또다시 해해 웃었다. "노래가 하고 싶거든 그저 하지. " "누가 노래하고 싶답디까? ” "정경부인의 노래는 더 듣기 좋소. " “대감도 딱하십니다. ” 하고 내외간에 실없은 말이 오고갈 때에 시녀 하나가 영창 밖에서 "마님. " 하고 난정을 부르더니 "궐내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 하고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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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궁의 무수리가 오상궁의 편지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 편지 사연이 이러하였다. "제번하옵고 아까 퇴궐하오신 뒤에 궁중에 적지 않사온 사단이 발생하와 자전께옵서는 전에 없이 대단 화를 내시옵서 뵈옵기 하도 답답하기로 넌짓 통기하오니 시급히 입시하시옴을 바라오며 통기받지 않으신 양으로 입시하시려면 말름 꾸실 거리 미리 생각하오실 줄 믿삽니다. 즉시 뵈을 줄 믿삽고 총총 두어 자 그치옵니다. " 원형이 난정의 편지 읽는 소리를 듣고 나서 "대체 적지 않은 사단이란 것이 무슨 사단일까? 무수리를 좀 불러 물어보구려. " 하고 말하니 난정이 "무수리 같은 것이 무얼 아나요. " 하고 대답하면서도 혹시 알까 하고 무수리를 가까이 오라고 불러서 영창으로 내다보며 말을 물었다. "오늘 저녁때 궐내에 무슨 일이 있었나? “ "잘 모르겠습니다. " 난정이 그것 보라는 듯이 한번 원형을 돌아보고 다시 무수리를 내다보며 "오상궁 마마님도 아무 말씀 없으시든가? ” 하고 채치어 물으니 그 무수리는 들은 말이 있는데 옮겨 좋을는지 몰라서 주저하는 모양으로 한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나중에 "별로 들은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녁때 대궐 안에는 대비 마마께서 상감마마를 때리셨단 말이 있어요. " 하고 대답하였다. 난정이가 미처 무어라고 말하기 전에 잠자코 앉았던 원형이 "무어 어째?" 하고 말참예하니 무수리가 황망히 "아니에요. 저희들 사이에 종작없이 지껄이는 말이니까 아마 참 말이 아니 겠습지요. " 하고 먼저 대답한 것을 까뭉개려고 하는 것이, 자발없이 말 옮긴 것을 뉘우치는 모양이었다. 난정이 뭇으며 무수리를 보고 "자네는 먼저 들어가게. " 하고 말한 뒤에 "오상궁 마마님께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고 나는 궐문 닫히기 전에 예궐하겠습니다고 답장은 아니합니다고 말씀하게. " 하고 전갈하는 말을 일러서 그 무수리를 돌려보냈다. 난정이 고부에서 올라온 수시를 목판에 담아서 젊은 감찰을 이어 가지고 궐내에 들어왔다. 난정이 대비 침전에 들어가기 전에 오상궁을 만나서 "사단이 무슨 사단이오? “ 하고 물으니 오상궁이 가만가만히 그 사단을 아야기하여 들리었다. "아까 저녁때 마마께서 스님에게 갑신 동안에 상감마마께서 들어오시지 않았겠소. 문안 때도 아닌데 어째 들어옵셨습디다. 마마께서 스님에게 갑셨다고 우리가 말씀을 사뢰니까 상감마마께서는 한숨을 지입시면서 청에서 오락가락하옵시더니 나중에 우리를 봅시고 내가 들어왔다고 가서 여쭈어라 하십디다. 그래서 김상궁과 박상궁이 가서 마마를 뫼셔왔지요. 처음에는 모자분이 다 평상시와 같이 말씀즐 하시더니 상감마마께서 우리를 돌아봅시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디다. 그 뒤에 상감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합시는지 말소리가 나직나직해서 밖에 있는 우리들은 잘 들을 수가 없었지만, 중이니 절이니 열성조에 없는 일이니 합시는 말씀이 스님의 말씀 같습디다. 나중에 찰싹 하고 뺨을 치는 소리가 나며 마마의 화나신 말씀 소리가 들립디다. 네가 오늘 임금 노릇 하는 것이 뉘 덕인 줄 아느냐? 나와 우리 오빠들의 덕이 아니냐? 네가 어째서 내 뜻을 거스르느냐? 하고 말씀 소리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찰싹 소리가 들립디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상감마마께서 나갑시는데 용안에 눈물 자국이 가득합디다. 마마께서는 상금 화가 풀립시지 않타서 우리들이 앞에서 부쩌지를 할 수 없소. " 난정이 오상궁의 일장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나중에 "지금 어느 상궁이 마마를 뫼시고 있소? ” 하고 물으니 오상궁이 뽀족한 입을 더 뽀족하게 내밀며 "지금 말씀하니까 그러시오. 우리가 앞에 얼씬만 하면 나가라고 야단을 합시니까 뫼시고 있을 수가 있소. 혼자 누우셨니. " 하고 공연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저녁 수라는 어떻게 하셨소?" "진어 하시지 않았지요. " "섣불리 침전에 들어섰다가 꾸중이나 듣지 아니할까요? 만일 꾸중을 들으면 상궁마마를 탓할 터이오. " "얼마든지 탓하시오. 그렇지만 정경부인은 우리들과 달라서 꾸중 들으실 리 없지요. " "잘못하다가는 다시 궁중에 발을 들여놓지 폿하게 될 것이니까 조심조심 하지요. " 하고 난정이 오상궁과 몇 마디 수작한 뒤에 혼자서 대비 침전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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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가 머리를 동이고 벽을 안고 누웠다가 밀장지 열리는 기척을 알고서 돌아눕지는 아니하고 "누구냐? “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정이 걸음을 사뿐사뿐 걸어 대비의 발치에가 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난정이올시다. " 하오 고하니 대비가 돌아누우며 "어째 또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 "어째서 또 들어왔느냐니까? “ "말씀 사뢰기 황송합니다만. " 하고 난정이 잠깐 말을 그치고 방글거리다가 "내외 말다툼을 했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왜 말다툼은? ” "저녁때 수시가 생겨서 안으로 들여보냈삽기에 두서너 개 맛보았삽더니 마마께 드리기 전에 먹었다고 지각없다고 야단을 치와요. 그 생각 못한 것이 불민한 일인 줄은 알지요만 하인들 소시에 그만 일을 가지고 야단치는 것이 조금 야속도 하려니와 첫째 창피하와 가만히 있기 어렵삽기에, 임금의 잡수실 읍식을 신하가 먼저 맛보라는 말이 옛글에도 있지 아니하냐고 좀 억짓말을 했삽더니 대번에 주둥이만 깠느냐고, 사람을 닭의 새끼같이 말합니다. 그제는 창피도 어디 가고 골이 나와 견딜 수가 있어야 합지요. 그래서 한바탕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 수시를 내일 드리게 하라고 말하옵는 것을 기어이 어기어 보려고 오밤중이라도 갖다 드리고 나온다고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 하고 난정이 갖은 요신과 갖은 간특을 다 부리며 말하여 대비가 난정의 말에 끌리어서 한번 빙그레 웃고 "그래 그 수시는 어디 두었느냐?“ 하고 물었다. 난정이 대비를 부축하여 일어 앉게 한 뒤에 "수시를 들여오리까7" 하고 물어서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니 난정이 곧 밖으로 나가서 저의 손으로 목판째 들고 들어와서 대비 앞에 놓았다. 대비가 한 개를 손바닥에 놓고 윗부리를 제기고 속을 입으로 빨라들인 뒤에 껍질 남은 것을 목판 구석에 놓으며 "이것이 어디 소산이냐7" 하고 물으니 난정이 "전라도 고부 소산이랍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고부가 장흥서 머냐, 가까우냐? ” "장흥서 대단히 먼가 보아요. " "고향에서는 먹어보지 못했겠구나? “ "못 먹어보았습니다. " "임피서는 가까운가? ” “장흥서보다는 퍽 가까을 줄 압니다. " 하고 난정이 대답하보 나서 대비의 눈치를 살피어 가며 "스님은 혹 자시어 보았을는지 모릅지요. 스님에게 몇 개 보내렵니까? ” 하고 물으니 대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더라도 급할 것 있느냐. 목판을 저리 치워라. " 하고 말하였다. "인제 곧 물러나가야 하겠습니다. " "이왕 들어왔으면 그렇게 급히 나갈 것이 무엇 있니? “ "말씀 아뢰기 황송합니다만, 공연히 말다뿜하다가 저녁밥을 아니 먹었더니 조금 시장합니다. " "너도 저녁밥을 안 먹었니? 내가 아직까지 저녁 수라를 받지 않았다. " "어째서 이렇게 늦도록 진어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공연히 그랬다. " "그러면 진어합시고 나서 대궁을 물려주시면 황감하겠습니다. " "상궁이란 것들은 어디 가서 자빠져 있노. 좀 불러다오. " 하고 대비가 말하여 난덩이 나와서 상궁들을 부르니 오상궁이 난정을 보고 "나는 탓을 받을 줄 알고 속으로 걱정했습니다. " 하고 웃고 "어쩌면 그렇게 수단이 용하시오. " 하고 칭찬하였다. 오상궁 이하 여러 상궁들이 난정의 뒤를 따라 대비 침전에 들어오니 대비가 "너희들은 무슨 큰일이 나도 모르고 있겠다. 가끔 와서 들여다 보지도 못하느냐? ” 하고 무정지객으로 나무란 뒤에 저녁 수라를 들이라고 하여 대비가 수라상을 받았을 때, 궁중이 갑자기 술렁거리어서 무슨 일이 있는가 알아보라고 대비가 오상궁을 내보냈더니 오상궁이 즉시 도로 뛰어들어오며 "큰일났습니다. " 하고 소리를 질러서 대비의 손에 들었던 수저는 저절로 자리 위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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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경복궁 안예 화재가 나서 사정전으로부터 남편은 몰수히 탔는데, 백관의 조회를 받는 근정전이 타고, 근정전 앞에 있는 근정문이 타고, 근정문 남편에 있는 홍례문이 타고, 근정전 좌우에 있는 융문루와 융무루가 모두 타서 침전인 강녕전이 광화문 밖에서 들여다보이게 되었다. 불이 났을 때에 알기는 곧 알았으나 북악에서 내려부는 바람아 불의 형새를 돋아서 걷잡을 사이도 없이 삽시간에 이리저리로 옮겨붙었다. 불이 가까운 곳에서는 와글와글하고 불이 먼 곳에서는 술렁술렁하다가 시각내에 가까운 곳 먼 곳 할 것 없이 온 궁중이 물끓듯하였다. 대왕대비는 여러 상궁돌의 부축으로 침전 밖에 나서사 불타는 것을 바라보는데 불길이 안으로 서리어 연기만 무럭무럭 날 때에 "거진 잡히는 게다. " 하고 옆에 사람을 돌아보다가 불머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며 불똥이 사방으로 튈 때는 "저걸 어떻게 하나?“ 하고 하늘만 우러러보았다. 대전에서는 내관이 들어오고, 왕대비전에서는 궁인이 오고, 왕비전에서도 궁인이 오고, 빈이 진둥한둥하며 오고, 공주와 부마가 창황하게 들어오고, 그 외에도 문안 오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경동되셨습니까? ” "대단히 놀랍시지는 않으셨습니까? “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문안을 드리는 중에 쉬 하는 소리가 나며 왕이 몸소 문안을 들어오는데 왕의 뒤에 윤원형이 따랐었다, 대비가 원형을 보고 수어 수작한 뒤에 "이 침전은 무사할까?“ 하고 물으니 원형이 "강녕전까지는 염려 없을 줄 압니다. 풍세를 보아도 불이 북편으로 올 리 없을 뿐 아니오라 내금위 군사를 풀어서 사정전 뒤에 진을 치다시피 하고 불을 막습니다. " 하고 대답을 아뢰고 "야기가 좋지 않사오니 침전에 듭시지요. " 하고 말씀을 여쭈어서 대비는 왕을 데리고 침전 안으로 들어가고 여러 퉁인들은 그대로 밖에 섰는데, 오상궁이 윤원형의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난정이 찾는 줄을 짐작하고 "정경부인을 찾으십니까? ” 하고 물으니 원형이 "그렇소. " 하고 대답하고 곧 "어디 있소?" 하고 물었다. "고대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디를 가셨을까? “ 하고 오상궁이 휘휘 돌아보다가 "급한 볼일이 계셔 가신 거로군. " 하고 혼잣말하니 원형 큰 뒤보러 간 줄로 짐작하고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때 근정전이 한참 타는 중이라 청기와 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오상궁은 난정을 찾아보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생각은 곧 잊어버리고 "저것이 청기와 튀는 소리라지. 상기와보다 소리가 더 무섭구려. " 하고 옆에 있는 다른 궁인과 지껄이기를 시작하였다. "여기까치 대낮같이 환하니 사정전 근처는 말할 것이 없겠지. " "여보, 궁중은 고사하고 온 서울이 대낮 같을 것이오. " "아우성 소리는 어디서 나오? ” "불 끄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지요. " "큰 난리가 쳐들어온 것 같구려. " "난리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이보다 더 소란할라구. " "오늘 밤은 잠자기 틀렸지? “ ”서울 안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잠들 자지 못할 거요. " 하고 눈으로는 불구경들 하면서 입으로만 지껄이는데 왕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오상궁의 뽀족한 입부터 꼭 다물게 되었다. 왕이 나간 뒤에 왕대비가 함께 와서 대비를 뫼시고 섰다가 젊은 왕비가 대비 앞에 놓인 수라상을 가리키며 말이 없이 왕비를 돌아보니 왕대비가 앞으로 나서서 "수라상을 치우랍시지요. " 하고 말씀하려 대비는 "혼이 나갔네그려. 대전이 이때까지 앉았다 나갔는데도 수라상 치울 생각을 못했구나. " 하고 곧 상궁들을 불러서 수라상을 치우라고 말하다가 저녁밥 아니 먹었다던 난정을 생각하고 "우의정댁 정경부인은 어디 가셨느냐? “ 하고 물어서 상궁들이 "모르겠습니다. " 하고 대답하니 "좀 찾아보아라. " 하고 말하여 오상궁 외의 몇 앙궁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대강대강 찾아보았으나, 난정은 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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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는 난정이 간 곳 없단 말을 듣고 “어디를 갔겠느냐? 너희들이 잘 찾아보지 않은 것이지. " 하고 상궁들을 나무랐다. 난정이 대비에게 긴한 것을 평소에 속으로 시새워하는 김상궁이 "화재 피해서 나갔는가 보오. " 하고 느런히 섰는 박상궁에게 말하는 것을 대비가 귓결에 듣고 "피하기는 무얼 피한단 말이냐? 여기 있다가 타 무엇할까 보아서? 소견없는 소리 작작 해라. " 하고 김상궁을 꾸짖었다. 타 무엇한단 말은 타죽는다는 말을 구기로 피한 것이다. "겁많은 사람이면 알 수 있습니까? ” "너희와 같이 못생긴 사람이 아니란다. " "나가시지 않았으면 어디 계셔야 합지요. " "종작없는 소리 지껄이지 알고 나가서 잘 찾아보아라. " 하고 대비가 말하여 김상궁이 난정을 찾아나갈 때에 오상궁을 돌아보고 “먼저 어디어디로 찾아다니셨소? ” 하고 물어서 오상궁이 "자미당에도 가보고, 양심당에도 가보고, 경회루로 불구경 나가셨나 하고 누 앞에 가서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디다. " 하고 말하니 김상궁기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김상궁이 두어 곳에 가서 물어본 뒤에 보우의 거처하는 곳에 와서 보니 섬돌 위에 눈에 익은 난정의 신이 놓여 있는데 방의 아래 윗간 영창문은 모두 닫히어 있었다. 방 밖은 밤 아닌 세상이나 방안에는 작은 촛불도 없고 방 밖은 소란한 세상이나 방안에는 가는 말 소리도 없었다. 김상궁이 고양이 컬음으로 소리없이 섬돌 위에 올라가서 방 안 동정을 엿보려다가 그림자가 영창에 비칠 것을 겁내어서 다시 슬금슬금 기어내려오는데, 김상궁은 몸집이 있는 사람이라 높은 섬돌을 내려을 때는 올라갈 때와 달라서 하마터면 굼벵이 구르듯이 굴러떨어질 뻔하였다. 김상궁이 뚱뚱한 몸을 흔들며 부지런히 걸음을 걸어 대비 침전에 돌아와서 "스님 방에 기십디다. " 하고 대비께 고하였다. "그 방에서 무엇하더냐? “ "그 방에 또 누가 있더냐7" 하고 대비가 연하여 묻다가 김상궁이 대답이 없이 싱글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내가 부른다고 말했느냐? ” 하고 말을 물으니 김상궁은 "말씀하기 어려워 그대로 왔습니다. " 하고 짧은 목을 펴 움츠려들이면서도 여전히 싱글거리었다. "일껀 부르러 간 사람이 부르치도 않고 왔단 말이냐? “ 하고 대비는 김상궁에게 화를 내고 다른 상궁들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가서 곧 오라고 불러라. " 하고 말하여 오상궁이 간다고 나섰다. 난정이 오상궁의 뒤를 따라 대비 앞에 와서 "부르셔 계십니까? ” 하고 살금살금 대비의 눈치를 살펴보니 대비는 눈썹이 일어서고 콧방울이 벌렁벌렁하였다. 대비가 아무 말이 없이 한동안 지난 뒤에 "그 방에서 무엇했느냐? “ 하고 물으니 난정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아까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문안을 들어옵는데 스님은 현형도 아니하옵기에 무얼 하옵는가 보고 오려고 스님에게를 갔었습니다. 스님은 그때까지 화재 난 것도 몰랐었븐지 궁중이 왜 소란하냐고 묻습디다. 큰 화재가 나서 상금 잡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였삽더니 스님은 그러냐고 한마디 말씀하옵고는 옛날 어느 큰 장사의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장사가 지각없는 아들들을 죄어 집 밖으로 데려 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옵고, 일체중생이 모두 불집 속에서 사는 격이라고 길게 설접하옵디다. 마마께 여쭙고 가지 않은 까닭으로 곧 일어서려 하온 것이 스님의 이야기와 설법이 재미가 나서 한동안 앉았었습니다. " 하고 언변 좋게 말하는데 대비는 네 말 듣기 싫다는 듯이 눈을 감고 앉았다가 눈을 지그시 뜨고 "그래, 재미있는 설법을 너 혼자 들었느냐? “ 하고 난정의 얼굴을 바라보니 난정은 "왜 혼자는이요? 스님의 이중꾼 두 사람과 같이 들었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난정의 대답과 달라서 보우의 시중드는 궁인들은 화재 났다는 통에 밖으로 뛰어나오고 방에 없었던 것이다. 대비가 흘저에 "내가 머리가 아파서 좀 조용히 누워 있고 싶으니 너희들은 다른 방에 가 있거라. " 하고 말하여 왕대비와 왕비와 난정과 여러 상궁들이 모두 대비 침전에서 물러나을 때에 대비는 다리를 주무르라고 오상궁 한 사람을 머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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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궁이 난정을 부르러 갔을 때 난정은 불 없는 방 속에서 한동안 부스럭거리고 나왔었다. 난정이 오상궁의 수상히 여길 것을 염려하여 정답게 오상궁의 손을 잡고 깜작거리는 눈과 살랑거리는 머리로 남에게 말 말라는 뜻을 알리었더니 오낭궁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까지 끄덕이었었다. 그러나 대비가 오상궁 한 사람을 침전에 머물러 둘 때, 난정은 남모르게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오상궁이 한번 뽀족한 입을 잘못 놀리기만 하면 십여 년 궐내 출입이 일조에 막히게 될지 모르는 판이라 난정은 만사에 경이 없이 바작바작 속을 태우고 있었다. 오상궁이 침전 안데서 늘어지게 한 동안을 있다가 나와서, 난정을 보고 눈짓하며 자기 처소로 들어가니 난정이 오상궁의 뒤를 따라들어가서 두 사람은 조용히 귓속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마께서 꼬치꼬치 캐어물으십디다. " "꼬치꼬치 어떻게? “ "방에 불이 키었드냐 꺼졌드냐? 스님이 앉았드냐 누웠드냐? 미주알고주알 다 캐어물으시는데 거짓 말큼하느라고 아주 혼이 났소. " "내 뒤를 싸주셨소? ” "뒤를 싸드리지 않을라면 애초에 거짓 말씀을 할 까닭이 있나요. " "고맙소. 진정으로 고맙소. " "그런 말씀은 고만두고 말이나 외착나지 않게 하시오. " "무어라고 말씀하셨소? “ "방에 불은 키어 있고 스님은 좌장을 짚고 앉아 있고 웃간 미닫이 한쪽이 열리어 있는데 섬돌에 올라설 때에 스님니 먼저 보고 어째 왔느냐고 묻더라고 말씀했소. 그런데 김상궁이 부르러 갔던 것을 아셨소? ” "몰라요. " "김상궁이 나보다 먼저 갔었소. " "김상궁이 알았으면 탈이 났구려. " "혹시 마마께서 물읍시거든 김상궁이 와서 아무 말도 없이 들여다보다가 갔다고만 말씀하시오. 그 뚱뚱이가 거짓말을 일쑤 해서 마마께 흔히 꾸중을 듣는 터이니까 두리 두 사람의 말만 맞으면 대비께서는 김상궁의 말을 거짓말로 아시게 될 것이오. " "고마운 말씀 이루 다 할 수 없소, 결초보은이라도 하리다. " "별말씀을 다 하시오. " "우리들이 오래 같이 앉았다가 김상궁에게 들키기나 하면 재미 적지 않겠소. "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들키어도 관계 없지요. " 하고 오상궁이 병어 입 모양으로 입불을 모으고 호호 웃으니 "여보. " 하고 난정이 손가락으로 오상궁와 입술을 건드리고 곧 손바닥으로 저의 입을 막았다. "인제 나는 나가겠소. " 하고 난정이 오상궁의 처소에서 나와서 밖에서 서성거릴 때에 대비가 침전으로 불러들이었다. 난정이 오상궁과 짬짬잇속이 있건만도 침전에 들어갈 때는 오히려 서먹서먹한 모양이더니 얼마 뒤에 침전에서 나을 때는 희색이 만면하였다. 난정은 아양스러운 거짓말로 대비의 의심을 풀었던 것이다. 난정은 소란한 하룻밤을 궐내에서 새우고 이튿날 식전에 여러 궁인들과 같이 다니며 불탄 자리를 구경하고 저의 집으로 나왔는데 옷을 갈아입으며 곧 퇴침을 베고 누우니 전날 밤의 경겁하고 심려하고 피로한 일이 쏘두 꿈속과 같았다. 난정은 아침도 아니 먹고 대낮을 밤중삼아 늘어지게 잠을 잤다. 보우가 어디서 왔는지 옆에 와서 누우려고 하는데 원형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중에 "중놈이, 개 같은 중놈이. " 하고 호령하는 원형의 목소리가 들리며 원형이 칼을 들고 들어서서 보우의 목을 찍으려고 하였다. 보우가 두 손으로 목을 끼어안고 쩔쩔맬 즈음에 난데없는 불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불이야, 불이야! "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꿈에도 불이 났나. " 하고 웃는 소리에 난정이 눈을 뜨고 살펴보니 원형이 저의 머리 맡에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오셨세요? “ 하고 난정이 일어 앉아서 시녀를 불러 양치물을 가져오라 하여 양치를 하고 난 뒤에 "어떻게 곤한지. " 하초 혼잣말하니 "곤한 중에 또 불 끄느라고 애쓴 모양이지. " 하고 원형이 웃었다. "어느 때 궐내에서 나오셨세요? ” "나는 나온 지 얼마 아니 되었소. " "화재 출처는 사실하여 보았나요? “ "사실해 보아야 알 수가 없어. 모두들 말이 도깨비불이라고 하드군. " "요전에 궐내에 도깨비 장난이 심했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 "도깨비불이고 보면 보우는 탈이지. “ "왜요? ” "도깨비 장난을 금지하는 놈이 도깨비불을 나게는 못하든가.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그놈을 궐내에서 떨어내고 말 터이야. " 하고 원형은 입을 악물었다.
18
경복궁의 큰 화재가 난 뒤에 왕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뫼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되었다. 이어하던 이튿날 왕이 삼정승을 탑전에 불러들여서 경복궁 중수할 일을 의논하는데 왕이 먼저 입을 열어 "내가 나이가 젊고 덕이 없는 탓으로 조종조 백여 년간 전하여 오는 궁궐을 일조에 태반 불에 태우고 황송한 맘에 침식이 실로 불안한 고로 하루바삐 중수하려 하니 경들은 어찌 생각하오? “ 하고 정승들의 의견을 물으니 윤원형이 앞으로 나서서 "지금이라도 곧 중수도감을 앉히고 역사 준비에 착수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합네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영상, 좌상도 의견이 우상과 같소? ” 하고 왕이 심연원과 상진을 차례로 돌아보고 다시 윤원형을 바라 보며 "그리하자면 도감당상은 사람을 골라야 하지 않겠소? 궁궐 중수가 국가의 작은 일이 아니니 적당한 사람을 맡기지 아니하면 인민의 원망을 사기가 첩경 쉽지 않소?“ 하고 말한 뒤에 눈을 옮겨서 심연원을 바라보는 것이 영상이 맡았으면 좋겠다 하는 눈치라 원형이 선뜻 "제조는 다른 사람들을 택용합시더라도 도제조는 영상 한 사람이 족할 줄로 압네다. " 하고 아뢰니 왕은 맘에 합당히 여기는 얼굴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심연원이 적이 앞으로 나서며 "인민의 곤궁이 심한 때에 공정이 호대한 국가 역사를 감히 맡는다 하옵는 것이 노신의 힘에 버거운 일인 줄을 아오나 신의 선조 청성백 덕부가 궁궐 창건하을 때 힘쓴 것을 생각하옵더라도 사양하을 길이 없사오니 노신이 마땅히 심력을 다하오리다. " 하고 말씀을 아뢰니 왕은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었다. 경복궁 중수 의논이 끝난 뒤에 심연원과 상진은 빈청으로 물러나가고 원형이 홀로 탑전에 남아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소? ” 하고 왕이 물은 뒤에 원형이 탑전에 가직이 나가 서서 "전하께서는 보우를 어떻게 합시렵니까? “ 하고 왕을 치어다보니 "어떻게 하다니? " 하고 왕은 미간을 깊이 찌푸리었다. "보우가 보 창덕궁 안에 와서 거처하도록 가만둡시렵니까? ” 하고 원형이 말씀하니 왕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이때 보우는 아직 경복궁에 떨어져 있고 창덕궁으로 옮겨오지 아니하였었다. "이번에 절로 내보내도록 합시지요. " "어떻게? “ "자전에 품하옵고 내보내십시오. " 왕은 대답이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화재를 귀화라고 떠드는데 보우가 귀신 부리는 술법이 있어 짐짓 화재를 내었다는 말씀은 신부터 의심이 없지 않사오나 보우 같은 요승이 궐내에 들어온 까닭으로 전에 없는 재변이 났다는 말씀은 만구일담으로 같사오니 이 말씀을 가지고 알아들으십도록 품하오면 자전께옵서도 별로 다른 말씀이 없으실 줄 압네다. " "내가 말씀을 여쭈떠 보았으나 어디 들으셔야지. " "신이 전하를 뫼시고 자전에 들어가서 한번 품하여 보올까 생각합네다. " "한번 그렇게 해볼까. " 하고 왕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왕이 앞을 서고 원형이 그 뒤를 따라 대비전에 들어오니 대비는 마침 조용히 일없이 앉았었다. 원형이 먼저 입을 열어 왕에게 말씀한 것을 되거푸 말씀하고 왕이 뒤를 이어 보우을 절로 보내자고 말하여 다른 말은 끝마치기도 전에 대비는 "다 알았어, 고만두어. " 하고 화증을 내었다. 왕이 한동안 무료하게 앉았다가 뭔형이나 또 말씀을 해보았으면 생각하고 넌지시 원형을 돌아보니 원형은 고개를 폭 숙이고 있었다. 왕이 한번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고 일어서려고 할 때에 대비가 곱지 않은 목소리로 "내일 좌추간 결단해서 말할 것이니 그리들 알고 나가. " 하고 말하였다.
19
그날 저녁때 대비가 보우를 불러보려고 궁인 하나를 경복궁에 보내게 되었다. 원형은 대비가 보우 불러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대비의 심부름 가는 사람을 알아보고 있다가 경복궁에 가는 궁인을 공조 뒤에 있는 별채집으로 불러서 진주 보패를 주고 여러 가지 말을 일머 보내었다. 그 궁인이 보우의 처소로 갔을 때, 보우는 젊은 궁녀 두서넛을 앞에 앉히고 불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는데, 대비의 보낸 궁인이 방 안에 들어선 뒤에 이야기를 중지하였다. "마마께옵서 하실 말씀이 겝시다고 석후에 동관 대궐로 오시라십디다. " 하고 궁인이 온 뜻을 말하니 보우는 간단히 "가지. " 하고 대답하고 한동간 있다가 그 궁인을 바라보며 "내가 가 있을 처소를 정하였는가? “ 하고 물었다. 그 궁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다가 보우에게 긴히 보이려는 사람같이 다정스럽게 "스님. " 하고 부르고 보우 앞에 와서 앉으며 말하였다. "스님 이따가 마마 보입고 말씀을 잘하세요. 내가 듣조운 말씀이 있세요. " "무슨 말씀?" "이번에 귀화로 화재 난 것은 스님의 탓이라고 스님을 궐내에서 내보냅신답디다. " "어째 내 탓이어? ” "스님이 도깨비를 시켰다고요. "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 "아까 대전께서 들어옵셔서 모자분이 그렇게 공론하시든데요. "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대왕대비가 나 내보낼 공론을 한단 말이 그나마 허무맹랑한 말을 곧이듣고 그게 무슨 소리야. " 하고 보우가 성이 나서 눈귀가 샐룩하여졌다. 그 궁인은 "나는 스님께 귀띔하느라고 말씀한 것이니 마마께 들은 체 마세요. " 하고 당부하니 "공론했으면 먼저 무슨 말이 있겠지. 들은 체할 까닭이 있나. “ 하고 보우는 당부를 받고 "인정에 그럴 수가 있나. " 하고 혼잣말하였다. 그 궁인이 창덕궁에 돌아와서 대비 앞에 나가서 경복궁 갔다온 것을 말씀하니 대비는 "무어하느라고 이때까지 있었느냐? ” 하고 늦게 온 것을 미타하게 말하고 나서 말을 물었다. "석후에 곧 온다더냐? “ ”녜.“ "무엇하고 있더냐?” "젊은 것들하고 같이 있습디다. " "젊은 것들이라니? 궁녀들 말이냐? 궁녀들과 무엇하더냐? “ "말씀 사룁기 황송합니다만 젊은 것들을 좌우편 팔에 끼고 앉았다가 마마 전갈이라고 말씀한 뒤에야 겨우 팔을 빼고 무슨 전갈 하고 묻습디다. 아무리 스님이시라도 너무 기탄이 없으십디다. " "너도 같이 앉아 허영수하느라고 늦었구나. " "아니올시다. " "아니란 건 다 무어냐. 만수받이하고 있지 않았으면 왜 이렇게 늦었느냐? “ 하고 대비는 화가 나서 억탈로 그 궁인을 꾸짖었다. 대개 그 궁인의 말전주는 원형의 진주 보패가 시킨 것이다. 석후에 보우가 동관 대궐에 와서 대왕대비께 보입는데 대비는 대비대로 화가 났고 보우는 보우대로 성이 난 까닭에 오고가는 말이 처음부터 거칠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 "부르지 못할 사람을 불렀소? “ "화재 몽넉을 씌우려고 부르셨습니까? ” "쓰면 쓰는 게지 누가 세우겠소. " "내가 도깨비의 영수인 줄 아십니까? “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안단 말이오?" "내가 내 입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였단 말씀입니까? ” "도깨비를 장난 못 치게 하는 사람이 영수가 아니면 괴수인 게지. “ "기막힌 소리를 다 듣겠습니다그려. " 하고 보우가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니 대비는 "웃기는 왜 웃소. " 하고 화난 눈초리로 보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대왕대비 존전에는 웃는 것도 죄입니까. 그러나 보우는 귀천을 가리지 않는 여래의 제자입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 "알뜰한 여래의 제자이오. 여래 제자다운 행실이 있어야지 여래 제자로 대접을 받지요.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에 하도 간청하시기에 궐내에 와서 있었더니 나중에는 별말씀을 다 듣습니다. " "간청한 것이 잘못인 줄을 인제 알았소. " "그러시면 소승은 절로 가겠습니다. " 하고 보우가 분한 기색으로 일어서 나가다가 돌아서서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 하고 나간 뒤에 한동안 있다가 대비는 왕을 불러들이었다.
20
왕이 대왕대비 침전에를 다녀온 뒤에 불시로 윤원형을 패초하여 편전에서 인견하고 자전 하교 내에 보우를 궐내에서 내보내라셨다고 말씀하고 "내일이라도 내어보내자면 어떻게 내보내리까? 어디든지 저의 맘대로 가게 하리까? 또는 갈 곳을 정하여 주리까? “ 하고 원형의 의견을 물으니 원형은 보우를 원악도에라도 보내고 싶어하는 터이라 선뜻 입을 열어 "자전 하교를 받자오신 바에는 아무쪼록 멀리 보내시는 것이 좋지 않사오리까? 멀리 보내시려면 갈 곳을 정하여 주시는 것이 타당하올 줄로 생각합니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궐내에서 내보내기만 하면 고만이지 하필 멀리 보낼 것이야 무어 있소. " "서울 근처에서 돌아다니다가 또다시 궐내에 들어오게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두번째 내보내기는 이번보다 더 어렵지 않사오리까. " "글쎄, 그것도 그렇지만 만일 멀리 내쫓으면 자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치 모르겠소. " "내보내라신 하교가 계시면 고만입지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 "글쎄. " "안변 황룡산으로 보내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 "글쎄. " "안변이 너무 멀 것 같으면 춘천 청평산으로 돌려보냅시지요. " 하고 원형은 조금이라도 멀리 보내려고 주장하였으나, 왕이 글쎄 글쎄 하고 끝끝내 질정하여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 보우를 궐내에서 내보내는데 보내는 곳은 안변도 아니요, 춘천도 아니요, 서을 가까운 광주였다. 왕은 대왕대비의 의향을 몰라서 멀리 보내자고 말하지 아니하였거니와 원형은 어찌하여 전날 밤 주장을 굽히게 되었던가. 원형이 궐내에서 저의 집에 나와서 난정을 보고 보우 내쫓을 것을 말하였더니 난정이 은근히 보우의 일을 염려하면서 "마마께서 다시 없이 위하시던 스님을 어찌 생각하고 내쫓게 하시는지 이허는 잘 모르겠으나, 섣불리 멀리 쫓자고 말씀하다가는 마마께 미움을 받으시리다. 대감은 굿구경하고 떡 얻어 잡수시오. " 하고 원형을 위하는 것으로 말하여 원형이 그 말을 유리하게 듣고 이튿날 보우를 멀리 보내자고 주장하지 아니하뎠던 것이다. 대비가 보우의 의향을 물어보고 보낼 절을 정하라 하여 마침내 보우는 선종 대찰인 광주 봉은사의 주지가 되어 궐내에서 나오게 되었다. 보우가 봉은사에 와서 있게 된 뒤에도 비단 의복과 비단 자리는 궐내에서 지내던 때와 다름이 없었고, 남자 상좌는 곰살궂기가 여자만 같지 못하다고 어여쁜 양가 처자를 뽑아다가 상좌를 만들어 주야 없이 옆에 두었었다. 보우는 산중 제왕으로 경복궁을 생각하지 아니하나, 대비는 보우를 내보낸 뒤로 일심귀의 하던 불도를 갑자기 버린 것같이 서운하고 심심하여 한두 달 뒤부터는 봉은사에 거동할 생각까지 없지 아니하였다. 어느 때 대비가 심심한 것을 못이겨 하는데 대비의 눈치를 잘 아는 난정이가 옆에 모시고 있다가 "이때쯤 스님은 무엇을 할까요? 마마의 후세를 위하여 불전에 축원을 드릴는지 모릅지요. " 하고 대비의 말을 자아내었다. "그럴 정성이 있을까? “ "그러먼요. 마마께 은혜 입은 것을 잊으면 자기도 성불 못할 것입니다. " "들으니까 봉은사가 뚝섬 건너라는구나. 한번 가볼까. " "아무리 가까워도 마마께서는 기동합시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도 떠들고 나서려니와 첫째 대전에서 잘 좇지 않으실 듯 하외 다. " "내가 뿌리치고 가면 가는 게지. " "그리합시느니보다는 스님을 인수궁으로 불러올립시고 나가 봅시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 "글쎄. " 하고 대비는 마음이 솔깃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뒤에 대비는 궁녀 하나를 공은사로 불공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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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가 불공 갔다 온 뒤로 보우의 서울길이 터지고 보우가 서울 올라다닌 뒤로 대왕대비의 인수궁 거동이 잦아졌다. 보우가 올라와서는 인수궁에서만 유련하지 아니하고 대내에까지 들어왔건마는, 대왕대비가 보우를 연 속에 담아 가지고 다닌 까닭에 연멧군이 조금 무겁게 생각하고 눈치로 알았을 뿐이지 수문장들까지도 보우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경복궁 중수가 이태 만에 끝이 나서 대왕대비가 북궐 안에서 재를 올리느라고 보우를 불러 들인 뒤로 보우는 다시 터놓고 궐내에 들어와서 거처까지 하게 되었는데, 한 달에 절반쯤 봉은사에 나가서 있는 것이 전날과 다를 뿐이었다. 왕이 한번 조용히 원형을 보고 보우의 일을 말씀하며 "경의 말이 맞았소. 멀리 내쫓아 버리지 못한 것이 후회요. " 하고 탄식하니 원형이 "아직은 두고 보셔야지 어찌할 수 없습니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원형은 난정의 말을 곧이듣고 굳세게 주장하지 못한 것을 속으로 뉘우치나, 대비가 보우를 전보다도 더 믿는 줄 아는 까닭에 보우 건드릴 생각을 염두에도 올치지 못하였다. 대왕대비가 후세 공덕을 위하여 연년이 사월 파일에 무차대회를 건설하는데, 언제든지 보우가 주장하나 처소는 해마다 변하였으니 양주 봉선사와 광주 봉은사와 장단 화장사와 양주 회암사가 모두 당시의 재를 올리던 처소이다. 사월이 되면 보우는 먼저 정한 절에 가서 앉고 대비는 뒤에서 나라 곡식과 궐내 재물을 실어 보내고 지워 보내서 재를 굉장하게 올리던 것이다. 경복궁 역사가 낙성되던 이듬해에는 대비가 보우와 의논하고 재를 예년보다도 더 굉장히 올리기로 하고 처소는 양주 회암사로 정하였다. 회암사는 서역 지공존자가 지형을 와서 보고 천축국 아란타사와 같다고 칭찬한 곳이니 동방 명승인 보제존자의 도량이다. 보제존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 뒤를 마쳐 거룩한 절이 제도가 굉걸하였다. 중앙에 보광전 다섯 간이 있고 그 뒤에 설법전 다섯 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사리전 두 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삼간 패청 한 채가 있고, 그 동서편에 동방장, 서방장이 각각 세 채가 있고, 동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삼 간이 있고, 또 서방장 서편에는 장경각 삼 간이 있고, 그외에 불전과 종루와 승방과 객실아 즐비하게 연하여 간수가 도합 이백예순두 간이었다. 이와 같이 큰 절이 연구세심하여 퇴락한 곳이 많았었는데 성종대왕 때에 정희대비가 수군복국의 승지라고 나라 재물을 들여 일신하게 중수한 까닭에 이때는 절이 퇴락한 곳이 없이 성하여 시골 구석 작은 절에 있던 중들은 으리으리하여 발을 들여 놓기가 어려웠다. 보우가 무차대회를 건설하기 전에 금년 회암사의 대회는 예년보다 더 굉장할 터이미 많이 와서 참관하라고 각도 대찰에 기별한 까닭에 사월 초생이 되며 각도 각 사찰 중들이 회암사로 모여들었다. 중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던지 회암사 여러 주방에서 한 끼에 삶아내는 쌀이 수백 두씩 되었다. 파일재 올리는 날에는 중들 외에도 구경 온 속인들이 많아서 회암사 일대에 사람바다가 생기었다. 재를 올린 끝에 도우가 일장 설법하게 되었다. 설법할 처소는 큰 대청 앞에 넓은 마당이 있었으니 대청 북편에 주홍칠한 상이 놓였는데, 상 위에는 비단 방석을 깔아놓았고 상 앞 대청 위에는 새 기직을 깔아놓았고 대청 아래 마당에는 새 멍석을 깔아놓았다. 각도 중들이 마당에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하여 멍석이 어지간히 찬 뒤에 지위 있는 중들니 대청에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하였다. 대청 기직자리가 별로 남지 아니하였을 때는 마당 멍석자리에는 앉을 곳이 없어서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 뒤에 보우가 상좌에게 부축을 받고 나와서 주홍상 위 비단 방석에 올라앉았다. 보우는 대왕대비가 하사한 궁수 놓은 비단 가사를 어깨에 엇메고 난정이가 바친 제주 무회목 좌장을 손에 들었었다. 보우가 여러 중들을 눈 아래로 내려보면서 한번 큰기침하고 설법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멍석자리 뒤로 늙은 중 하나가 들어서려는 것을 그곳에 섰던 중이 자리 없다고 막았더니 그 늙은 중 뒤에 따라오던 상투 바람의 속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자리 없다는 게 다 무어냐. 너희들의 자리를 내어라. " 하고 악던 중과 그 옆에 섰던 중들을 어린아이같이 안아내고 그 늙은 중을 부축하여 들이었다. 이리하자니 좌중이 조금 소란하였다. 보우가 이것을 내려다보고 훤화를 금지하라고 말할 때에 그 늙은 중이 대청 위를 바라보며 "보우야! "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목소리가 쟁쟁하기 쇳소리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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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야 소리 한마디에 휘둥그래진 눈쓸이 바라다보고 돌아다보고 또 치어다보는 중에 늙은 객승이 보우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내려오라는 군호와 같이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우가 곤두박질을 치듯이 주홍상에서 뛰어내려오며 진둥한둥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 늙은 객승이 보우의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한번 허허 웃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니 보우는 달음질로 그 뒤를 쫓아나갔다. 처음에 놀랐던 여러 중들이 나중에는 궁금한 생각이 나서 쫓아나가 보려고 한즉 상투바람의 속인이 두 팔을 벌리고 길을 막았다. 앞에 섰던 중 몇 사람이 굳이 나가려고 하는데 그 속인이 "성가신 것들 다 보겠다. " 하고 소리지르며 장난하듯이 슬쩍슬쩍 뒤로 떠다미니 그 중들이 짚으로 만즌 사람같이 허무하게 나가자빠지는데 그 뒤에 섰다가 장기튀김을 당한 중들도 적지 아니하였다. 다른 시골에서 온 객승 들은 이것을 보고 나갈 생의를 하지 못하였으나, 회암사 중들은 뿔뿔이 다른 길로 돌아서 나갔다. 회암사 중들이 밖에 나와서 보니 그 괴상한 늙은 중은 지팡이를 짚고 섰고, 허야당 대선사 보우화상은 앞에 꿇어엎드렸었다. 그 늙은 중은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몸에 먹장삼을 입었는데, 먹장삼 위에 오채가 뻗치고 굴갓 뒤에 후광이 둘린 것같이 보였다. 회암사 중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본 까닭으로 말소리는 듣지 못하나마 모양으로 늙은 중이 꾸짖고 보우가 사죄 하는 것은 짐작들 하였다. 나중에 그 늙은 중이 짚고 폈던 지팡이를 들어서 보우의 등을 두세 번 때리고 나서 상투 바람의 속인을 손짓하여 가지고 나는 것같이 동구길로 내려갔다. 보우는 넋잃은 사람같이 우두커니 엎드려 있는데 여러 중들이 슬몃슬몃 와서 좌우에 둘러섰다. 그중에 한 중이 "스님, 고만 들어가시지요. " 하고 보우를 붙들어 일으키려고 하니 보우는 여러 중들을 치어다보면서도 "목침 없앤 것이 죄인 줄을 알았소이다. " 하고 헛소리하며 잘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스님, 정신 차리십시오. " "그 노장은 벌써 갔습니다. " "스님, 여기가 맨땅입니다. " 하고 여러 중들이 이 사람 한마디, 저 사람 한마디 지껄이는 중에 보우가 정신을 차리고 좌우를 돌아보는데 모양이 흡사 곤히 잠들었던 사람이 갑자기 깨어난 것와 같았다. 얼마 뒤예 보우가 일어 앉아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여러 중들의 부축으로 방장에 들어왔다. 보우가 냉수 한 그릇 가져오라 하여 한숨에 들이켠 뒤에 좌우에 있는 중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지금 오셨던 분이 육신보살이신 줄을 몰랐겠지? “ 하고 물으니 여러 중들이 "보살이 임범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 "내괴, 몸 위에 오채가 뻗치고 머리 뒤에 후광이 둘렸습디다. " "그런 줄 진작 알았더면 우리도 배례나 드릴 것을 몰랐습니다. " "그러면 그렇지. 승속간 사람으로는 스님보고 아무개야 부를 사람이 없을 터입지요. " 하고 지껄일 때 그중에 젊은 중 하나가 "목침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보우가 눈살을 찌푸리고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목침은? 내가 전생에 선비로 태어났을 때 남의 목침 하나를 훔친 일이 있었다. 그 죄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생에는 성불하기 어렵다고 보살께서 말씀하시더라. " 하고 거짓말을 지껄이었는데 여러 중들은 모두 곧이듣고 "녜, 그렇습니까?“ 하고 다시들 놀랐다. 이때 방장 밖 뜰 아래에 서 있던 여러 중들 틈에서 한 중이 앞으로 나서며 "스님께 말씀 한마디 여쭈어 둘 것이 있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보우가 "무슨 말?" 하고 고개를 밖으로 돌리었다가 "아까 오셨던 노장스님이 안성 칠장사에 계신 병해스님이 아니십니까?” 하고 묻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이었다. 한동안 뒤에 보우가 고개를 들고 "그래 어째?" 하고 한번 큰기침하였다. "스님이 육신보살이라고 합시니까 여주어 보입는 말씀이올시다. " "병해스님이 곧 육신보살이신 줄을 아직 모르는구나. " 하고 보우는 혼자 아는 체하며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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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중과 상투 바람 속인은 달음질하다시피 재게 걸어서 회암사 동구 밖을 나선 뒤에 늙은 중이 먼저 걸음을 늦추며 "인제 천천히 가세. " 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 속인은 잠깐 발을 멈추고 "아무리나 하십시다. 그러나 이게 무슨 싱거운 일인가요. " 하고 두덜거리었다. "그렇기에 자네는 올 것이 없다고 했지. " "나는 보우의 모가지를 돌려앉히고 올 줄 알았지요. " "그자가 아직도 십 년 운수가 남아 있는 것을 억지로 어떻게 하나? “ "그러면 애당초에 고만두지요. " "한번 버릇 가르치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 "버릇쯤 가르치려고 팔십 노인이 일부러 회암사 걸음을 한단 말씀이오. " "내가 오지 아니하면 그만큼이라도 버릇을 가르칠 수 있나. " "선생님도 우스운 말씀 다하시오. 나 혼자 와서 주먹질 한번에 실컷 버릇을 가르치고 갈 수 있지요. " "자네 주먹이 무섭기는 하지만... " "하지만 어떻단 말씀입니까, 십 년 운수가 있어 안된단 말씀입니까? 내가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보우의 대가리를 바시어 놓고오리까? 주먹 아래에 운수가 다 무엇이에요. " "옛말에 하늘을 거슬리는 자는 망한다네. 자네는 그 맘이 탈이니. " "탈도 무섭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점점 더 탈이지. " "탈이고 무어고 생각난 김에 회암사에 한번 다시 갔다오리다. 우선 이대로 가기가 생각할수록 싱겁습니다. " "이 사람아, 어디를 간다고 그러나. 자네가 주먹질을 하면 일이 조용치 못할 것 아닌가. 그러고 보우의 대가리를 바시니 자네가 시원할 것이 무엇인가. " "그야 그렇지요. " "그러니 그대로 가세. " "아무리나 하십시다. " 하고 상투 속인이 늙은 중의 뒤를 따라오면서 “보우가 늙지 않았습디다그려. 십여 년 전보다 신수가 더 끼끗해진 것 같습디다. " 하고 달리 보우의 말을 꺼내었다. "그자가 아직 늙을 나이 못 되었지. " "쉬남은 살 되었을걸요. " "그러니까 아직 한참때지. " "선생님을 용하게 대번 알아봅디다. " ”처음은 몰라보았겠지. " "몰라보고야 그렇게 곤두박질해 내 려올라구요. " "몰라보더라도 내가 내려오라면 내려왔지 제가 앙탈할 수 없지 그려.“ "선생님이 보우야 부르시기만 했지, 내려오라고 언제 말이나 하셨습니까? ” "말로 아니해도 저는 알았기에 내려온 것 아닌가. " "그래 보우가 선생님을 몰라보았을까요? " "아니 나중에는 알았겠지. 금강산 수미암에서 맡긴 목침을 도루 내라고 한바탕 야단을 쳤으니까. " "나는 몰라보는갑디다. 얼굴이 금강산 갔을 때쯤과 딴판이 되었으니까 알아보기 어려을 터이지요. " 하고 상투 속인은 일변 말하며 일변 바람에 날리는 수염을 아래로 걷어 내리었다. 그 사람은 수염이 좋았다. 구레나룻과 윗수염도 숱이 많거니와 아랫수염이 채가 길었다. 검은 눈썹 아래에 큰 눈이 박히고 넓은 얼굴 복판에 우뚝한 코가 솟아서 어느 모로 보든지 장부다운 중에 시커먼 좋은 수염이 장부의 위풍을 돋아보이었다. 이 수염 임자가 양주 임꺽정이다. 그 늙은 중을 함흥 양주팔이로 알아볼 사람이 없고, 또 동소문 안 갖바치로 알아볼 사람이 드물다 하더라도 출가한 이후에 만나본 사람들이 병해대사로 알아보기는 쉽지마는 꺽정이는 떠꺼머리가 상투 된 것보다도 수염이 얼굴을 딴판으로 변하여 십여 년 전쯤 만난 사람들은 선뜻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며 양주읍내 길로 내려오는 중에 길에서 나귀 탄 양반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 양반은 읍내 편에서 회암사로 가는 모양인데, 견마 잡은 아이가 길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묻는 것이 처음길에 길을 묻는 것 같았다. 중, 속인 두 사람 동행이 길을 한옆으로 피하여 나귀 탄 일행이 지나가려고 팔 때 늙은 중이 홀저에 "양반들은 길에서 친한 사람을 만나도 모른 체하는 법인가?"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을 돌아보며 허허 웃으니 나귀 탄 양반이 유심히 한번 바라보다가 "이것이 누구요? “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귀 등에서 뛰어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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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이 한걸음에 대사에게로 쫓아오더니 손목을 덥석 잡으며 또다시 "이게 누구요? “ 하고 말한 뒤에 곧 "선생 만나기는 의외요. " 하고 말하는데 반가워하는 모양이 얼굴에 드러났다. 대사 역시 반가워하며 "오래간만에 보입소. " 하고 말하니 그 양반이 "오래간만 여부가 있나요. 거의 서로 잊을 지경인데요. " 하고 말하면서 대사 뒤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이애, 네가 꺽정이 아니냐? ” 하고 소리를 질렀다. 꺽정이가 한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오래 못 뵈었습니다. " 하고 인사하니 그 양반이 인사 대답은 아니하고 꺽정이의 어깨를 치며 "나를 보고 모른 체하고 섰단 말이냐. " 하고 정답게 책망하였다. "왜 모른 체는이요. 선생님하고 인사하시니까 인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 "기다리는 것 다 무어냐, 반가운 맘이 있다면 잠시인들 기다린단 말이냐. " "십년여 판에 만나는데 용하게 알아보시오. " "내가 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냐. 십 년은 고사하고 백 년을 못 만났기로 설마 몰라보랴. " "십여 년 못 만나다가 만나는 사람들은 흔히 몰라봅디다. "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김덕순이가 꺽정이를 몰라볼 리야 있느냐. 그렇지만 그 동안에 어쩌면 저렇게 흥악한 털보가 되었느냐? “ "털보요. " 하고 꺽정이싸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으니 덕순이가 "수염은 좋다마는 네가 거만스러워 보여 못쓰겠다. "하고 말하며 역시 허허 웃고 "너는 수염까지 특출이구나. 너의 부조에는 저런 좋은 수염이 없지. " 하고 꺽정이하고 말하는데 대사가 가로 나서서 "그건 잘 모르시고 하는 말이로. 저 수염이 부조에 있는 수염이지요. 저 사람의 어른만 수염지 귀하지 저 사람의 조부도 수염이 좋았고, 저 사람의 진외종 되는 이도 수염이 좋았지요. 그리고 저 사람의 육대조는 수염이 여간 좋지 않았든갑디다. 최윤덕, 최정승이 그 손에서 길릴 때에 수염아빠라고 불렀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 하고 꺽정이의 수염 내력을 캐어 말하고 "이건 수염 가진 당자도 나만큼 모를 것이오. " 하고 빙그레 웃었다. 덕순이가 대사를 향하여 "어디 가 좀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 하고 말한 뒤에 사방을 돌아보다가 "저기 가서 좀 앉읍시다. " 하고 길가에서 멀지 아니한 잔디 깔린 번전을 가리켰다. "대체 지금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요? ” 하고 꺽정이가 물으니 "아따, 저기 가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 " 하고 덕순띠가 말하여 대사와 꺽정이는 덕순이와 같이 번전 위로 올라오고 덕순의 데리고 온 아이는 번전 아래에서 나귀에 풀을 뜯기 었다. 세 사람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덕순이가 대사를 보고 말하였다. "그 동안 정암 부인이 돌아가셨지쵸. 상제에게는 진즉 조장으로 물었지요만, 통가자제로 전에 보입던 처지에 궤 연에를 한번 다녀가야 나겠고 또 미원 구석에 오래 들어앉았으니까 갑갑증이 나서 겸두겸두 나선 길이오. " 하고 꺽정이를 가리키며 "저 군이 만나보고 싶어서 용인서 양주로 즉행을 하였소. 그런데 저 군은 보고 잘 알은 체도 아니하는구려. " 하고 허허 웃으니 꺽정이가 "나를 찾아보러 왔다는 양반이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 하고 물었다. "오늘 양주읍에 들어오는 길로 아이를 너의 집에 보내 보았었다.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어디 갔느냐고 하니까 모른다고 하고 언제 오느냐고 하니까 내일이나 올는지 모른다고 하더란다. 찾아 갈 데도 없고 우두머니 객주에 들어앉았기가 갑갑하던 판에 들으니까 보우가 회암사에서 큰재를 올린다기에 재 구경 절 구경은 차치하고 유영한 보우의 낯바대기를 한번 구경하려고 회암사를 가는 길이다. 여기서 너를 만나기는 뜻밖이야. 선생 만난 것은 의외 여부가 없고. " "우리 집에 가서 기다리시면 좋았지요. " "김덕순이가 의조카 꺽정이는 찾아왔을망정 양반이 백정의 집에 가서 앉았을 것이냐. 내 말에 속이 상하겠지? “ "그렇게 말씀하는 양반은 밉지가 않으니까 속이 상하지 아니하오. ” "양반 미워하는 마음이 줄었으면 그 동안 좀 지각이 난 것이구나. " 하고 덕순이는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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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정이가 덕순의 조롱하는 말을 듣고 "사십각 사람더러 지각이란 말이 당하오. " 하고 웃으니 "네가 주제넘게 사십각이 다 무어냐? “ "서른다섯이면 사십각이지 무어요. " "벌써 서른다섯이야? ” 하고 덕순이가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참말 서른다섯이구나. 네가 사십각 소리를 하게 되니 내가 늙지 않을 수 있는가. " 하고 웃었다. "올에 쉰 몇이신가요? “ 하고 대사가 말을 물으니 덕순이는 늙었다고 자칭하던 먼저 말에 웃음이 남아서 아직 빙글빙글하면서 "내 나이를 잊으셨단 말씀이오? ” 하고 한번 대사를 바라보고 "계해생 쉰셋이오. " 하고 나이를 말하였다. "대부인은 지금 대단 연만하셨지요? 근력이 강건하신가요? “ "올해 일흔일곱이신데 황송한 말씀으로 우리 백씨보다 근력이 좋으시지요. " "선영감께서 생존하셨으면 올에 일흔 몇이신가요? ” "자친보다 삼 년 아래시니까 일흔넷 되셨지요. " "가만히 기시오. 일흔넷이 임인생 아니오? 그러면 선영감께서 조정암과 동값리시든가요? “ 하고 묻는 대사의 말에 덕순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는 듯이 "이판서장 내외분이 돌아가셨을 때 선생은 창녕을 가셨습디까? “ 하고 물으니 대사는 고개를 가로 흔들어 못 갔다는 뜻을 보이었다. "이판서장은 칠십여 세에 하세하셨지만 그 부인은 겨우 환진갑 지내고 돌바갔습디다그려. " "환진갑 다 지냈으니 수한이 부족하달 것 없지요. " "어째 두 번 초상에 다 창녕을 못 가셨던가요? ” "가보면 무어하오. " 덕순이가 꺽정이를 바라보며 "그 누님 초상 때 갔었던가?“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고개를 외치며 "나는 재작년까지 돌아간 줄도 모르고 있었소. " 하고 말하였다. "왜 통부가 없었던가7" "양반댁에서 백정의 집에 통부할 리 있소. " 꺽정의 말 뒤에 대사가 "저 사람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두 번 다 통부가 없습디다. " 하고 말하여 덕순이가 "선생 계신 데를 몰랐던 것이지, 알고서야 그럴 리가 있겠소. " 하고 말하였더니 꺽정이가 ”같은 양반이라고 두던하는 모양이오. 모르긴 왜 모른단 말이오?“ 하고 성내는 기색을 보이었다. "아따, 저 사람 보게. 내가 통부를 돗하게 했나, 왜 내게다 성을내나. " "내가 왜 당신에게다 성을 내겠소. 이판서의 아들이 좀 괘씸할 뿐이지. " "네가 척형하고 틀렸구나. " "척형은 다 무어요. 양반놈이 백정하고 척분을 차리겠소. " "아직도 양반 노래가 남았구나. 자각이 좀 덜 났군. " 하고 덕순이가 웃으니 꺽정이가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망녕나기 전에는 지각이 안 날는지 모르지요. " 하고 딱시 웃었다. 잠깐 동안 세 사람이 다같이 말이 없이 앉았던 끝에 꺽정이가 덕순을 보고 "그 동안 장가를 드셨소? “ 하고 물으니 덕순이는 말하기 전에 먼저 웃으면서 "참말 지각이 없구나. 육십객 늙은이더러 장가들었느냐고 묻다니. " 하고 꺽정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그 동안 장가 들었느냐?” 하고 되물었다. "나 장가 든 것슬 모르시오? “ "내가 알 수 있느냐. " "내가 장가를 들고 와서 몇 번을 만났소. " "옳지. 백두산 사슴에게 장가 간 것 말이구나. 그래 그 동안 사슴을 데려왔느냐? ” 하고 덕순이가 웃는데 사슴이란 말에 대사도 빙그레 웃으면서 "사슴이라고 욕하시는 말이 당자의 귀에 들어가면 봉변하시리다. " 하고 말하니 덕순이가 "뿔로 뜨나요, 발로 차나요?“ 하고 더욱 웃었다. 세 사람이 서로 웃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해가 석양 때가 지나서 마을집이 저녁 연기에 잠기었다. 꺽정이가 "고만들 일어서십시다. " 하고 먼저 일어서며 "인제 회암은 가실 것 없지요? ” 하고 덕순이를 돌아보니 덕순이는 "암만. "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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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정이가 덕순을 보고 "나는 먼저 갈 터이니 선생님하고 같이 뒤에 오시오. " 말하고 한 걸음 앞서 간 뒤에 대사가 앞을 서고 덕순이가 중간에 서고 아이가 나귀 끌고 뒤에 서서 노량으로 걸어서 양주읍내를 들어왔다. 꺽정이 집에 다 왔을 때 아이들이 문간에 섰다가 한 아이가 먼저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아주머니, 아버지가 갓 쓴 손님하고 같이 왔다. " 하고 소리를 치니 먼저 들어간 아이보다 키가 작아 소이는 아이가 절름절름 걸어들어가며 "손님하고 같이 왔다. " 하고 먼저 아이의 말끝만 따서 소리를 질렀다. 대사가 덕순을 돌아보며 "먼저 들어간 아이는 꺽정이의 아들이고 뒤에 들어가는 절름발이는 꺽정이의 아우요.“ 하고 그 아이들이 누구인 것을 가르쳐 주니 덕순이는 "꺽정이가 어느 틈에 그런 큰 아들을 두었단 말이오. " 하고 꺽정이 큰 아들 있는 것을 놀래었다. "그 아이 어머니가 백두산에서 나가지고 왔다오. " "그래 지금 몇 살인가요? ” "열서너너덧 살 되었을 터이지요. " "그러면 꺽정이의 장모 되는 사람도 여기 와서 있나요?" "그는 백두산에서 자처해 죽었다오. " "어째 자처를 했을까요? “ "그는 죽어서 남편과 같이 묻힐 생각으로 딸 모자만 내보내려고 하고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오기가 싫어 다같이 나가자고 하여 모녀가 실랑이하며 몇 해를 지냈는데 자기가 살아 있으면 딸의 신세를 그르칠 줄로 생각하고 마침내 자처했는갑디다. " "집심 있는 여편네요그려. " "그 여편네가 홀어머니 된 뒤로 남편의 무덤에 하루 한 번 아니 간 날이 없었다오. 물론 중병이 나 드러눕게 되면 못 갔겠지요만.'' "그 여편네는 생시의 소원대로 그 남편과 같이 묻히었겠구려. " "그 여편네가 죽기 며칠 전에 자기 손으로 그 남편 무덤의 옆을 따고 광중을 만들더라오. 그 아들딸은 이것을 보았지만 당신 말씀 같이 사슴들이니까 저의 어머니를 말리기는 고사하고 조력을 해주었더라오. 그 광중이 다 되던 날 저녁에 먼저 그 딸에게 어미 생각 말고 남편 찾아가서 잘 살라고 말한 뒤에 그 아들더러 어미가 없더라도 누이와 매부를 의탁해서 잘 살라고 말하고 이튿날 아들과 딸이 사냥 나간 틈에 그 광중에 들어가 누워서 칼로 목줄을 끊고 죽었더라오. 그래 육칠 년 전에 천왕동이 남매가 어린아이를 번갈아 업고 여기를 찾아왔더라오. " "천왕동이가 꺽정이... " 하고 덕순이 말할 때에 꺽정네가 안으로부터 나와서 "어서들 들어오시지요. " 하고 재촉하였다. 꺽정이 뒤에 꺽정이 누이 섭섭이가 나오는데 꺽정이 아들이 고모의 손을 잡고 다시 나오고, 또 그 뒤에 덕순이의 낯모르는 여인 하나가 나왔다. 덕순이는 속으로 '저것이 꺽정이의 안해로구나. ' 하고 생각하며 유심히 그 얼굴을 바라보니 얼굴이 곱고 눈에 생기가 있러서 나이 삼십이 넘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여인이 꺽정이 옆에 쫓아와 붙어서서 "저이가 자꾸 나를 보오. " 하고 덕순이를 가리키는 것을 꺽정이가 "왜 나왔어. 어서 들어가. " 하고 소리를 지르니 그 여인은 아무 소리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꺽정이가 덕순을 바라보며 "저것이 나의 안해 명색이오. " 하고 말하니 덕순이는 고개을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꺽정이가 일꾼을 불러서 나귀와 견마잡이 아이를 맡기고 대사와 덕순이를 아랫방으로 맞아들이었다. 손과 주인이 아랫방
에 들어앉은 뒤에 꺽정이가 아들을 불러 덕순을 보이는데 아이가 잘하고 난 뒤에 덕순이가 "네 이름이 무어냐?” 하고 물으니 “백손이오. " 하고 대답하고 "백손이? 이름이 좋다." 하고 말하니 "당신이 이름을 질 줄 아오?" 하고 묻는 것이 조금도 아이들의 고분고분한 맛이 없었다. "그 아비의 자식이다." 하고 덕순이가 웃었더니 백손이가 "누구더러 아비니 자식이니 하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 덕순에게 덤빌 것같이 하는 것을 꺽정이가 꾸짖어 밖으로 내보냈다. 덕순이가 꺽정이의 아버지 돌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꺽정이를 보고 "너의 아버지는 어디를 가셨느냐?" 하고 물으니 "아니, 집에 계세요." 하고 꺽정이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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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는 몇 해 전에 풍병을 앓고 반신불수가 되어서 방달 출입을 못 하는 터이라 밖에서 손님이 왔다고 떠들썩하니까 "이애들아, 나 좀 보아라." "누가 왔느냐?" "백손아, 네 아비 좀 불러라." 하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꺽정이가 아랫방에서 듣고 "저게 우리 아버지 목소리요." 하고 덕순에게 말하였다. "음성이 다른 사람 같으니 웬일이냐?" "연전에 한번 풍증으로 몹시 앓고는 어음이 전과 같이 분명치 못해요. 그러고 한편 팔다리를 통 쓰지 못하는 까닭에 혼자서는 누웠다 앉지도 못하고 앉았다 눕지도 못해요." "사람이 꼭 옆에 붙어 있어 시중을 들어야 하겠네그려." "그 방에 누가 잘 붙어 있나요. 내가 많이 시중을 들지요." "전에 사람 하나를 얻었었지?" "그는 벌써 죽고 소생 하나만 남았지요." "절름거리는 아이?" "네, 병신이라 불쌍해요." 백손이가 불려 들어가서 손님을 보고 나온 뒤에 절름발이는 아랫방 봉당에 와 앉아서 방안에서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꺽정이가 침을 뱉느라고 되창문을 열었다가 이것을 보고 "너 어째 거기 와 앉았느냐? 이리 들어오너라." 하고 말하니 절름발이는 맘에 만족하여 싱글거리며 들어왔다. 절름발이가 덕순의 턱 밑에 와서 꼬꾸라지듯이 절하고 난 뒤에 덕순이가 "네 이름이 무엇이니?" 하고 말을 물으니 절름발이가 입귀를 실룩거리며 "팔삭동이." 하고 말끝 없는 말로 대답하였다. "팔삭동이?" 하고 덕순이가 빙그레 웃으니 옆에 있던 꺽정이가 "여덟 달 만에 낳았다고 별명으로 부르던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어요." 하고 이름이 좋지 못한 것을 대신 변명하듯이 말하였다. 이때 조그만 계집아이가 문을 바시시 열고 들어와서 대사에게 절하고 나서 꺽정의 앉은 옆에 붙어 서려는 것을 꺽정이가 "절 한번 더 해야지." 하고 말하니 다시 한두 걸음 앞으로 나서서 덕순에게 절하였다. 그 계집아이가 나이는 불과 칠팔 세밖에 아니 되고 미목은 분명하였다. 덕순이가 누구냐고 묻기 전에 꺽정이가 "선생님의 손녀요." 하고 말하여 덕순이가 한번 대사를 돌아보고 나서 "이리 온." 하고 계집아이에게 손을 내민즉 고개를 숙이고 오지 아니하다가 "이리 와서 앉아라." 하고 자기의 무릎 아래를 가리키니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와서 앉았다. 대사가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어디를 갔었더냐?" 하고 물으니 "나물 뜯으러 갔었세요." 하고 똑똑하게 대답하고 "네가 나물을 아니?" "무슨 나물을 뜯었느냐?" 하고 대가가 연거푸 물으매 "여러 가지예요." 하고 말수 적게 대답하였다. "네가 뜯은 나물 이름을 한번 섬겨 보아라." 하고 덕순이가 돌아보는데 계집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어서 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어른이 말씀하는데 대답을 해야지. 무엇무엇 뜯었느냐?" "냉이." "또?" "대나물." "또?" "별금다지." 하고 계집아이가 말하기를 어려워하여 간신히 한 가지씩 대답하는 것을 보고 대사는 "에, 잘 뜯었다." 하고 계집아이를 한번 칭찬가고 더 묻지 아니하였다. "이애 어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니 웬일이야?" 하고 덕순이가 꺽정이를 바라보니 "벌써 갈 데로 갔세요." 하고 꺽정이가 대답하여 "갈 데로 가다니?" 하고 말하며 덕순이가 대사를 돌아본즉 대사가 다시 한번 계집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것이 아비 없는 자식이오." 하고 말하였다. "언제 참척을 보셨단 말이오?" "벌써 한 오륙 년 되었는가 보오." "십여 년 동안에 인사의 변천이 적지 않구려."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세상에 십 년이 어디인가요." 하고 말하는 중에 돌이가 또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 들리어서 대사가 꺽정이를 보고 "자네 아버지를 좀 가보고 오세." 하고 말하니 덕순이가 "나도 같이 가지." 하고 말하여 세 사람이 다같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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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는 덕순을 보고 반겨하여 어음이 분명치 못한 말로 여러 가지 말을 지껄이었다. 병신이 되어서 운신을 맘대로 못한다고 신세를 하소연하고, 관푸주를 남에게 넘기어서 여러 식구 살기가 극난이라고 집 형편을 궁설하고, 또 꺽정이가 왁달박달한 사람이지만 병든 아비에게 곰살궂게 한다고 아들을 칭찬하였다. 한동안 지난 뒤에 꺽정이가 "아버지 고만 누우시오." 하고 말한즉 돌이는 고개를 외치고 그 뒤에 대사가 "인제 우리는 아랫방으로 가겠네." 하고 말한즉 돌이는 "잠깐만 더 앉아 계시오." 하고 붙들었다. "왜 그러나?" "백손이를 저 생원님께 보이려고." "벌써 보셨네." 돌이가 대사의 말을 듣고 나서 덕순을 바라보며 "손자놈을 보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덕순이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잘생겼지요?" "그 아비의 아들이니 어련하겠나." "그놈이 참말로 여간 행내기가 아닙니다." 하고 돌이가 손자를 칭찬한 끝에 "백두산에서 나온 뒤에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가 죽이고 아즉까지 그놈이 외톨입니다." 하고 백손의 동생 없는 것을 말하고 "그놈의 이름은 저의 외조모가 무슨 동이라고 지었다는 것을 백두산에서 낳아 온 손자라고 백손이라고 고쳐 지었습니다." 하고 백손의 이름 지은 것을 말하여 덕순이가 "이름이 좋아. 꺽정이란 이름으로는 비겨 말할 수도 없네." 하고 꺽정이를 돌아보며 웃으니 돌이는 "꺽정이야 그 애의 외조모가 별명 쇰직하게 지은 것이니 어디 이름이랄 수가 있습니까?" 하고 웃으며 좋아하였다. 덕순이가 꺽정이와 대사의 뒤를 따라서 병인의 방으로부터 안마루로 나오다가 섭섭이를 보고 과부 된 인사를 말하는 중에 꺽정이는 운총이를 찾느라고 둘러보다가 "백손 어머니가 어디 갔나요?" 하고 그 누이에게 물으니 "나도 몰라." 하고 섭섭이가 대답하고 나서 "백손 어머니, 백손 어머니!" 하고 소리를 질러 불렀다. 운총이는 밖에 쫓아나갔다가 꺽정이에게 꾸지람을 받고 들어와서 뒤꼍 굴뚝 옆에 숨어 앉았다가 섭섭이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왜 불러?" 하고 맞소리를 지르는 것을 꺽정이가 마루 뒷문을 열고 내다보며 "왜 거기 가 있니? 이리로 들어오너라." 하고 말한즉 운총이는 당장에 웃으면서 그 뒷문으로 들어왔다.꺽정이가 덕순을 가리키며 “우리 아저씨야. 절 한번 해보지” 하고 웃으니, 운총이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허리만 굽신하였다. 대사가 “요새도 바느질을 배우나?”하고 웃으며 물은즉 운총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섭섭이가 “애를 삭여야지요. 홈질가기 같은 것도 한 땀쯤 호다가 싫증이 나면 바늘로 쑤석쑤석하고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삐뚤삐뚤 못쓰게 해놓는걸요.”하고 웃으며 흉을 본즉 운총이는 입술을 비쭉비쭉하였다. 꺽정이가 웃으며 “흉보지 말고 가만주시오.”하고 두둔하듯이 말하니 운총이는 꺽정이 옆으로 가까이 가서 서며 “형님이 사람이 망했어.”하고 말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같이 웃는데 운총이도 웃었다. 운총이는 사람이 끔찍히 총명하여 배워 못하는 일이 없건마는 길들지 아니한 생마와 같아서 애를 삭일 줄 모르는 까닭에 바느질만은 비각 중에 큰 비각이라 버선 구멍 하나를 잘 막아 신지 못하였다. 덕순이가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길에 “너의 안해는 체면이니 염량이니를 모르는 알짬 사람이구나. 네가 안해를 잘 얻었다.” 하고 꺽정이를 돌아보니 꺽정이가 웃으며 “전에는 참말로 사슴이나 다름이 없더니 지금은 좀 사람의 물이 든 모양이오.” 하고 말하였다. “안해는 잘 얻었다만 살림이 낭패겠구나.” “누님이 있으니까 그까지 살림은 걱정이 없지요.”하고 꺽정이가 말하는 중에 젊은 사람 하나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꺽정이는 곧 그 사람에게 “너 어디를 갔다오느냐?”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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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 사람이 “잠깐 밖에 나갔었소.” 하고 꺽정이의 묻는 말을 대답한 뒤에 “선생님, 또 오셨소?”하고 대사에게 인사하니 대사는 인사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덕순을 돌아보며 “저 사람이 주인의 처남 되는 천왕동인데 발이 재기가 참말로 사슴이오.”하고 웃었다. 세 사람이 아랫방으로 들어갈 때 천왕동이는 곧 안마루로 올라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역시 아랫방으로 내려와서 펄썩 주저앉으며 “배는 고픈테 밥을 주어야지.” 하고 볼멘 소리를 하였다. 꺽정이가 “손님께 인사 여쭈어라.”하고 말한즉 들은 체 아니하므로 꺽정이가 “이애, 인사 여쭈라니까, 어서 일어나서 절해라.”하고 꾸지람 기미가 있게 말하니 천왕동이는 “손님 때문데 밥 못 먹소.”하고 두덜거리며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대사가 “왜 손님 때문에 못 먹어?”하고 웃으며 물으니 천왕동이가 대사에게까지 “배고파서 말하기도 싫소.”하고 찜부럭내듯이 말하였다. “손님이 밥을 주지 말랬다고 하던가?” “누가 아오. 애기 어머니가 나더러 손님이 먹거든 먹으랍디다.” “애기 어미가 사람이 고약하군.”하고 대사가 웃었다. 애기 어머니는 섭섭이의 말이니 애기가 그 딸의 이름이다. 천왕동이가 대사의 웃는 것을 보고 “남이 배고프다는데 선생님은 왜 웃소?”하고 시비가락으로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나이 삼십이 넘은 것이 세 살 먹은 어린아이 같구나.”하고 웃으며 꾸짖었다. “수염이 대자 오치라도 먹어야 산답디다.” “그 따위 말은 잘 배웠네.” “배우기는 무얼 배워요. 내가 알았지.” “배고파서 말하기 싫다던 자식이 말대답은 입싸게 하는구나.” “참말로 배고파 죽겠소.” “이애, 조금만 참아라. 손님이 저녁을 잡수실 때 너도 같이 먹게할 터이니.”하고 꺽정이가 어린아이 달래듯이 말하니 천왕동이가 맘에 좋아서 웃으며 “애기 어머니는 나중에 먹으라고 사살하더니 매부 형님이 다르시오.”하고 말한 뒤에 덕순을 바라보며 “손님, 나 절하오.”하고 먼저 말하고야 일어나서 한번 거북살스럽게 절하였다. 덕순과 대사가 겸상하고 꺽정이와 천왕동이가 겸상하여 같이 저녁밥을 먹을 때 대사가 천왕동이의 밥사발이 밑이 보이어 가는 것을 보고 “밥 좀 더 받게. 나는 한 그릇 다 못 먹네.” 하고 밥을 덜어 주니 천왕동이는 “그걸 다 못 잡수시오?” 하고 받고 덕순이가 “나도 다 못 먹어. 내 밥도 받으려나.” 하고 밥을 덜어 주니 천왕동이는 “왜들 그렇게 잡수시오?” 하고 또 받았다. 꺽정이가 “참말 배가 고팠던 것이구나.” 하고 말하니 천왕동이는 “내가 언제 거짓말합디까? 오늘 공연히 구경 갔다가 정작 구경도 못하고 배만 고팠소.” 하고 말하였다. “무슨 구경?” “회얌이라든가 회암이라든가 그 절에서 무엇을 한다기에 구경을 갔었소.” “그래, 구경을 잘 했니?” “배만 고팠다니까 그러오. 처음에 가니까 사람만 많지 무슨 구경이 있습디까, 머리 깍은 중놈들이...” 하고 말하다가 대사를 보고 한번 웃고 말을 고치어 “중들이 나무아미타불하는 것뿐입디다. 그래서 절 뒷산에를 올라가서 실컷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절에 내려와 들으니까 내가 산에 올라간 동안에 보살이 왔다 갔다는데 보살이란 것은 사람이 좀처럼 구경 못하는 겁이랍디다.”“그래, 보살을 누가 보아다더냐?”“물 얻어먹으러 절에를 들어갔더니 중들이 서로 지껄입디다. 서울서 온 유명한 중이 보살에게 혼이 났다고.”“그래 보살이 어떻게 생겼더라고 말하더냐?”“그 보살은 늙은 중 모양이고, 보살이 데리고 온 제자는 상투한 사람 모양인데 그 얼굴들에서 붉고 푸르고 한 빛이 뻗치어 나오더랍디다.”하고 천왕동이가 지껄이는데, 꺽정이는 대사를 돌아보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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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을 치운 뒤에 덕순이가 대사를 돌아보며 보우는 전고에 드문 요승이라고 말하고 “그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까요? 선생님은 짐작이 없지 않으실 터이지?”하고 물으니 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이 없었다. 덕순이가 얼마동안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래, 그자가 제 명에 죽겠소?”하고 다시 물으니, 대사가 말이 없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능지처참을 당하겠소?”“글쎄요.”“말을 좀 분명히 하시구려”“그까짓 것은 분명히 알아 무엇하시오.”하고 대사가 말을 자르려고 하는데 꺽정이가 “중놈으로 그만큼 호강하면 이 다음에 제 명에 못 죽어도 좋지요.”하고 말하니 대사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보우 다음날 혹독한 형장 아래에 맞아죽을 것을 미리 안다면 지금 호강이 맘에 좋을 것 없으리.”하고 말하였다. 보우의 이야기 끝에 경복궁 화재 이야기와 중수 역사 이야기가 나서 역사 때에 부역 갔었던 천왕동이가 새로 지은 전각이 훌륭한 것을 말하고 “그런 집을 차지하고 한번 살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살아보고 죽어도 죽어서...”하고 말끝을 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니 천왕동이는 아직도 말수를 많이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와 같이 말하다가 막히는 때가 종종 있었다. 꺽정이가 이것을 보고 “죽어서 한이 없겠습니다.”하고 말끝을 대신 채워 준즉 천왕동이는 “옳지,한이 없어.”하고 손뼉을 치고 조금 있다가 “한이란 말을 아는데 생각이 잘 나지 아니하였소.”하고 머리 뒤를 긁적긁적하였다. 덕순인가 대사를 돌아보며 “이번 궁궐 역사에 국재도 많이 소비되었으려니와 민력이 여간 들지 아니하였으리다.”하고 말하는데 대사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천왕동이가 “국재는 무어고 민력을 무어요?”하고 물었다. 덕순이가 “이번 대궐 역사에 나라 재물도 많이 없어지고 백성의 힘도 많이 들었으리란 말일세.”하고 먼저 대사에게 한 말을 쉽게 풀어 말하니 천왕동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알기 좋은 쉬운 말을 두고 알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이 맹자왈 공자왈 하고 맹꽁이 노래를 잘 안다는 자랑일까요.”하고 유식한 사람의 문자말을 타박 주어 말하였다. “내가 자네에게 봉변일세.”“아니오. 내 말이 손님더러만 한 말이 아니오.”“그것은 말 아니해도 잘 알았네. 그러나 자네 있는 데서 어려운 문자를 쓰다가는 참말 큰 봉변하겠네.”하고 덕순이가 웃으니 “왕후장상이 영유종호아 이런 말 말인가요?”하고 천왕동이가 역시 웃었다. 꺽정이가 “나도 모르는 어려운 문자를 네가 어디서 배웠느냐?”하고 웃은즉 천왕동이가 “형님은 별수 있소?”하고 또 웃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아느냐?”“그걸 모를까요. 임금 노릇 대장 노릇 대신 노릇 하는 사람들이 어디 씨가 따로 있겠느냐? 하는 말이라오. 선생님, 내가 바로 알았지요?”하고 천왕동이가 꺽정이를 보고 말하다가 끝에 와서 대사를 옮겨 바라보니 대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꺽정이는 “어디서 좋은 말을 줏어 배웠구나.”하고 허허 웃었다. 덕순이가 그제야 빼았기었던 말 계제를 다시 찾아가지고 대사와 문답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이번 길에 중수한 경복궁을 구경하셨겠구려.”“육조 앞을 지나지 아니하였소.”“나는 이번 회로에 서울을 들리어 구경하고 갈 생각이오.”“오십 년 안에 쑥밭될 데다가 물역을 쳐들인 것이 구경거리가 될까요.”“쑥밭이 되다니? 대궐이 쑥밭이 되면 나라는 망하는 것 아니오?”하고 덕순이는 놀라는 빛이 얼굴에 나타나는데 대사는 덕순의 얼굴을 보면서 “경복궁이 쑥밭된다고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소만 큰 난리는 면치 못할 터이지요.”하고 심상하게 말하였다. 꺽정이가 귀가 뜨이는 것같이 “큰 난리가 나요? 아따 난리가 나서 세상이 한번 뒤집어 엎이면 좋겠소.”하고 껄껄 웃으니 대사가 “세상이 자네 소원대로 뒤집힐는지 모를 일이야.”하고 곧 덕순을 돌아보며 “저 사람의 소원하는 세상이 당신네 양반에게는 못쓸 세상인 줄을 아시오?”하고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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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순이가 한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한번 한숨을 쉬고 “난리는 나고 말 것 같소.”하고 대사를 돌아본즉 대사는 말이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꺽정이가 웃으며 “지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혹 따로 짐작이 있어 하시는 말씀인가요?”하고 물었다. 덕순이가 머리를 돌려 꺽정이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내야 네나 한가지로 무슨 별난 짐작이 있을까만, 얼마 전에 짐작 있는 사람에게서 큰 난리가 나리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선생 말씀이 또 마찬가지로구나.”“짐작 있는 사람이라니 술수하는 사람인가요?”“그래.”“술수꾼의 말은 말이 맞는 날까지도 미심스러우니까요.”하고 꺽정이는 한번 대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우리 선생님도 술수를 짐작하는 것만은 갸륵할 것이 없지요.”하고 웃었다. 덕순이가 대사에게 “남사고란 술객을 혹 만나보신 일이 있나요?”하고 물으니 대사가 “그 아이가 본래는 지술하는 사람이지요.”하고 말한 뒤에 “연전에 김런이의 연줄로 내게 와서 두서너 달 있다 간 일이 있지요.”하고 덕순의 묻는 말을 대답하였다. “선생이 가르친 사람이요그려?”“내게서 망단법을 조금 배워 갔지요. 그 아이가 사람은 총명하지만 심지가 튼튼치 못해요.”하고 대사의 말하는 어취가 자기의 아는 재주를 다 가르치지 아니하였다는 것 같았다.“그 아이가 미원을 갔습디까?”“서울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미원을 왔습디다.”“그래 난리 난다고 말합디까?”“그 사람의 말이 남산잠두에 올라서 서울을 내려다보니 서울 안에 살기가 가득한 중에 사직골에 왕기가 보이더라고 하고, 북악 아래에 좋은 한 줄기가 있는데 이 기운이 필경 나라 흥망에까지 관계가 있으리라고 합디다.”“그것이 그 아이의 아직 미숙한 곳이오. 그러니까 염병을 난리라고도 말하지요.”“염병을 난리라는 것은 무슨 말이오?”“그 아이가 강릉서 편지를 했는데, 처음에 강릉에 돌아와서 보니까 곧 난리가 날 것 같아서 강릉 사람들을 많이 양양, 간성 등지로 피란을 시켰더니 그 해 강릉에 난리는 없고 염병이 심해서 사람이 상했다고 했습디다.”“반은 안 셈이구려.”“아주 맹랑한 축은 아니지요.”“그래, 북악 아래의 좋은 기운이 있다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요?”“건청동에 인물 하나가 났습니다.”“그 인물이 장래 국가의 동량주석이 될 터인가요?”“다음날 큰 난리에 나라를 구하는데 그 인물의 힘이 많으리다.”“그 인물이 난 지 몇 해나 되었나요?”“지금 열 살이 넘었거나 말거나 한 아이리다.”“그 아이의 성명을 아시겠소? 내가 이번 서울길에 한번 찾아가 보고 싶소.”“건천동 동네 아이들이 군사 장난할 때에 대장질하는 이가 성가진 아이를 찾으면 대번에 알 수 있으리다.”하고 대사가 말을 마치자, 꺽정이가 곧 “선생님, 김륜이는 지금 어디있습니까?”하고 물어서 “김륜이 저의 고향에 가서 아들 낳고 손자 낳고 잘 살지.”하고 대사가 한번 웃고 나서 다시 “김륜이가 자네에게서 혼이 나고 내게로 온 것을 내가 또 조만히 말했더니 서울 가근방에서 살지 아니하면 말썽이 없다고 그 이듬해에 광주 살림을 걷어가지고 강원도 고향으로 들어갔네.”하고 말하였다. 덕순이가 뒤를 달아서 “김륜의 사주같이 맞는 사주가 별로 없습디다.”말하고, 그 안해가 살았을 때 김륜에게서 보아온 사주 사연 중에 “촛불은 희미한데 붉은 깃발 무삼 일고.”한 구를 외면서 “이런 것은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귀신같이 안 것이야.”하고 칭찬하는데 늙은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이때 마침 창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니 천왕동이가 얼른 창문을 열고 내다보며 “누구야?”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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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동이가 “애기 어머니요.”하고 꺽정이를 돌아보니 꺽정이가 “무얼 그래?”하고 내다보다가 섭섭이가 손짓을 하여 불렀던지 곧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에 꺽정이가 밖에서 “이애, 이것 좀 봐라.”하고 말하여 천왕동이가 상 하나를 받아 들여놓은 뒤에 꺽정이가 동이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 상에는 느티잎 시루떡과 묵은 실과 외에 미나리나물 무김치 등속이 벌여놓였고, 그 동이에는 막걸리가 가득하였다. 꺽정이가 상을 들어 덕순의 앞에다 놓으며 “나는 미처 말을 못했는데 누님이 잡수시게 하라고 차려놓았습디다.”하고 누이를 생색내에 말하니 덕순이가 막걸리 동이를 가리키며 “저 술이 나더러 다 먹으란 것인가.”하고 웃었다. “술은 또 있소. 얼마든지 잡수시오.”“저 술을 누가 다 먹는단 말이냐.”“그까짓 술 한 동이 얼마 되오. 반가운 손님이 오시고 또 좋은 소식을 들었으니까 오늘 밤에는 나 혼자도 두어 동이 먹겠소.”“무슨 좋은 소식?”“난리 난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소.”“에라, 좋은 소식이고 언짢은 소식이고 술이나 먹자.”하고 덕순이가 술사발을 손에 들 때, 천왕동이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형님은 손님과 술 잡수시오. 나는 선생님하고 떡 먹을 터이오.”하고 시루떡에 손을 대었다. 그 이튿날 덕순이가 떠나려고 꺽정이를 보고 “오늘 가겠다.”하고 말한즉 꺽정이는 “그렇게 급히 가실 것 무어 있소.”하고 붙들고 대사는 “이왕 갑갑해서 나서신 길이니 나하고 같이 칠장사로 갑시다. 내야 이번에 작별하면 영결이 될 것 아니오?”하고 끌었다. 덕순이는 대사의 말을 좇아 칠장사로 가고 싶은 맘이 있으나, 자기 어머니에게 말한 돌아간 기한이 있어서 주저하는 기색이 있었다. 대사가 이것을 알고 “오늘 천왕동이에게 편지를 주어 댁에를 갔다오게 하고 내일쯤 동행해서 떠납시다.”하고 말하여 덕순이가 꺽정이를 보고 의논하니 꺽정이가 “그거 어렵지 않지요. 편지만 써놓으시오.”하고 천왕동이 미원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늦은 아침 뒤에 천왕동이가 덕순의 편지를 가지고 양주읍을 떠나서 양근 미원에 가서 덕순의 백씨 덕수의 답장을 맡아가지고 해가 높다랗게 있을 때 양주읍으로 돌아왔다. 하룻길이 넘는 길을 반 나절쯤에 도다녀온 것을 덕순이가 신통하게 생각하여 “날아갔다 왔네그려.”하고 칭찬한즉 천왕동이는 “처음길이라 물어서 가느라고 속상했소. 그러고 편지 답장도 여러 번 재촉을 해서 맡아가지고 왔소.”하고 길이 지체된 것을 말하였다. 덕수가 덕순이이게 답장한 편지에 어머니 근력이 강건하고 집안에도 별고가 없으니더 돌아다니고 싶거든 생각대로 하라는 말이 있고 대사와 꺽정이에게 안부하라는 말까지 있었다. “인제 되었소. 내일 나하고 같이 떠납시다.”하고 대사가 덕순을 보고 말하는데 “두 분이 같이 이삼 일 더 묵어서 떠나시오.”하고 꺽정이는 덕순과 대사를 함께 만류하였다. 덕순이와 대사가 꺽정의 만류를 못이겨서 하루를 더 묵었건만 꺽정이가 하루쯤만 더 묵어가라고 말하니 덕
순이가 “그럴 것이 없이 네가 우리와 같이 서울까지 가자꾸나.”하고 말하여 꺽정이를 끌고 나서게 되었다. 덕순이와 대사가 꺽정이 집 식구 여러 사람을 면면히 작별하고 꺽정이와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덕순의 나귀는 아이가 빈 나귀로 끌고 뒤에 따랐었다. 길에서 그 아이가 뒤보느라고 뒤떨어지더니 너무 오래 따라오지 아니하여 앞섰던 세 사람이 어느 산모롱이 잔디밭에 앉아서 이야기들 하면서 아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앞길이 갑자기 요란하여지며 기구 있는 행차 하나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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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배 하인들이 “에라”하며 지나가고, 사인교꾼이 “쉬”하고 어깨를 갈아가며 사인교를 메고 지나가고, 후배 하인들이 떠들썩하고 지나가는데 괴상스럽게 요강망태를 걸머진 하인이 나귀를 타고 거들거리며 맨 뒤에 지나간다. 덕순이가 행차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인의 탄 나귀를 가리키며 “저 오려백복이 내것 아니라구?”하고 말하자 꺽정이가 “아이놈이 저 뒤에 따라오는구먼이오.”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나귀 뒤에 조금 떨어져서 풀기 없이 따라오는 아이가 곧 덕순의 데리고 오는 아이이다. “아이놈이 못생겨서 나귀를 빼앗긴 모양이군.”“저놈들이 아이라고 만만히 보고 장난친 모양이오.”하고 꺽정이가 곧 일어서서 나귀 탄 자에게로 쫓아가더니 오고가는 말이 두세 마디를 넘어가지 못하여 꺽정이가 눈을 부라리며 그 자를 나귀 등에서 끌어내렸다. 그자가 길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등에 걸머진 망태 속의 놋요강이 돌부리에 부닥쳐 소리가 났다. 후배 서 가던 하인들이 모두 뒤로 돌쳐서서 전후좌우로 꺽정이를 둘러쌌다. 꺽정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장난하듯이 휘두르더니 아이쿠 어머니 하고 눈퉁이를 싸쥐고 쩔쩔매는 사람도 있고 나자빠져서 아이구 아이구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앞서 나간 사인교가 멈추며 전배들이 구원 오려고 돌쳐설 때에 사인교 옆장에서 마주보이는 길가 언덕 위에 늙은 중 하나가 나타나서 사인교를 향하여 “보우야.” 하고 부르니 사인교 안에서 어서 가자 재촉하는지 사인교꾼이 방망이를 어깨에 다시 얹으며 사인교가 살같이 앞서 나갔다. 전배 하인들이 이것을 보고 어이없어 하다가 몇 사람은 그대로 사인교 뒤를 쫓아가고 몇 사람은 다친 사람에게 와서 대강 만져주어 데리고 가는데, 요강망태를 걸머진 하인은 동그라질 때 발목을 접질린 모양인지 한편 발을 잘못 디디어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덕순이가 아이를 보고 빼앗긴 것을 나무라니 그 아이는 “교군 오는데 길을 얼른 비키지 않았다고 야단들을 치고 교군이 지나온 뒤에 망태기를 걸머진 사람이 빈 나귀 내나 타자고 빼앗아 타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하고 발명하였다. 덕순이가 “누가 얼른 비키지 말라더냐.”하고 발명하는 아이를 잘 용서하지 않는 것을 꺽정이가 “그놈들이 괴악하지 이 애가 무슨 죄가 있소.”아이를 두둔하여 주고 “선생님은 왜 저기 가 따로 서셨소?”하고 먼저 앉았던 자리에서 여남은 간이 착실히 되는 대사의 섰는 곳을 가리키니 덕순이가 “나도 모르지. 천하장사의 행패하는 것을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빠져서 동행이 내빼인 것도 몰랐어.” 하고 웃었다. 꺽정이가 덕순이와 같이 대사에게로 와서 “선생님, 왜 혼자 여기 와 계시오?” 하고 물으니 대사가 적이 웃으면서 “보우를 쫓아버리느라고.”하고 대답하여 “보우라니요?”“웬 보우요?” 하고 꺽정이와 덕순이가 다같이 괴이쩍게 여기었다. “방금 간 것이 보우의 일행이오.” “보우란 자가 사인교를 타고 다니나요?” 하고 덕순이 묻는 말에 “무어는 못 타고 다닐까요.” 하고 꺽정이가 대사 대신 대답하고 “무어는 못 타고 다닐까요.” 하고 대사보고 말하니 대사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 뒤로는 나귀와 아이를 앞에 세우고 세 사람이 같이 걸어오는데, 이야기에 길이 더디어서 나귀가 길가의 풀을 뜯을 때가 많았다. 거의 다 저녁때가 되어 동소문턱을 들어서서 세 사람이 지난날 자취를 가리키며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박석고개를 넘어 배오개로 내려왔다. 배오개장 근처에 덕순의 집 옛날 청지기로 포실하게 사는 사람 있어서 잠시 주인을 정할 만한 까닭에 덕순이가 일행을 끌고 그 사람의 잡을 찾아왔다. 그 사람이 덕순을 보고 “서방님, 오래간만이올시다.”하고 반갑게 인사하는데 덕순이가 “일행이 좀 많아서 폐가 되겠네.”하고 말하니 그 사람이 웃으면서 “서방님, 별 염려를 다 하십니다.” 하고 정한 방을 치우고 맞아들이는데 꺽정이를 보고 아이와 같이 딴 방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을 덕순이가 “아닐세. 그 사람과 저 대사는 나하고 한 방을 쓰게 하여 주게.” 하고 주인의 말을 가로막고 세 사람이 한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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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순이가 서울 오던 이튿날은 처남과 친척들을 찾아다니고 다음날에 대사의 말하던 건천동 아이를 찾아보러 나서는데, 대사는 신기가 좋지 못하다고 주인집에 누워 있고 꺽정이만 같이 나섰다. 배오개에서 큰길로 황토마루께를 와서 육조 앞을 지나 중수한 경복궁을 겉으로 구경하고 동십자각 천변으로 나와서 북쪽을 향하고 올라왔다. 집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건성대고 찾아오는 까닭으로 장원서 다리를 건너 삼청동을 들어선 뒤로는 길에 나선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건천동을 거의 다 와서 길가에 섰는 아이 하나가 대갈통이 크고 얼굴이 거무스름한 것을 보고 덕순이가 그 아이에게로 가까이 가서 “네 성이 무어냐? 이가 아니냐?” 하고 물으니 그 아이가 “남의 성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하고 유난스럽게 곤댓짓하였다. “그래, 네 성이 이가면 네가 습진장난 좋아하느냐?” “남의 좋아하는 장난까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열 네 살입니다.”대사의 말이 아이 나이 열 살이 넘을까 말까 하다는데, 열 네 살이라면 나이가 조금 많은 것 같았다. “너의 아버지는 선비시냐?” “반찬가가 보시지요.” 대사의 말이 아이가 양반의 집 아들이라는데, 장사치의 아들이라면 문벌이 너무 틀리는 것 같았다. 덕순이가 의심이 나니까 꺽정이를 돌아본즉 꺽정이가 “어떠한 아이인지 어디 알겠소? 다시 한번 선생님과 같이 오십시다.”하고 말하여 덕순이도 “글쎄.” 하고 주저하는 중에 몸이 날씬한 아이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길 저편에서 내려오며 “용돌아, 대장님 나오셨다. 어서 오너라.”하고 소리지르니 이편에 섰던 반찬장수의 아들이 한달음에 뛰어갔다. “동네 아이들 틈에서 대장질하는 아이라면 그 아이가 빈틈없이 우리가 보려는 아이이다.” 하고 덕순이가 곧 꺽정이와 같이 건천동 지경이 들어서서 멀리 오지 아니하여 덕순이가 발을 멈추고 “저기 아이들이 습진 장난하는 게다.” 하고 넓은 마당 터에 여러 아이가 모여 섰는 것을 가리키니 꺽정이가 “우리 이쯤 서서 구경합시다.”하고 말하여 덕순이와 꺽정이는 길가에 서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한동안 한데 몰려 섰다가 떼떼이 나뉘어 사방으로 둘러섰다. 어느 떼 아이들은 일제히 나무 활을 메었고 , 어느 떼 아이들은 모조리 막대기를 들었다. 여러 떼가 둘러선 한중간에 발판같은 것을 놓고 높이 올라선 대장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 손에 든 것만은 작으나마 참말 환도 같았다. 종이로 만든 수기를 각각 손에 든 아이들이 발판 장대 앞에 구부슴하고 섰는 것이 청령하는 모양 같더니 수기 든 군들이 각 떼로 흩어지며 떼가 줄로 풀리었다 줄이 떼로 뭉치었다 하고, 장대를 향하여 몇 줄로 겹치었다 장대를 중간에 두고 사방으로 갈리었다 하는데 하는 것이 제대로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 같았다. 덕순이와 꺽정이가 한동안 이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리 가서 대장아이에게 말을 좀 물어보자.” 하고 덕순이가 먼저 나서니 :그리합시다.“ 하고 꺽정이도 따라 나섰다. 아이들의 습진이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두 사람이 그진명색을 뚫고 들어서려고 하였더니 :진을 범한 자는 군법에 죽여 마땅하니 활로 쏘아라.” 하고 호령소리가 나고 뒤미처 아우성 소리가 나며 뽕나무 활 대가지 활에 싸리 살을 먹여 든 아이들이 한 떼로 몰려나왔다. 덕순이가 손을 저어 쏘지 말라는 뜻을 보이었으나, 활 꾼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일제히 활을 그대었다. 덕순이가 아직 전날 용맹이 남아 있어서 얼른 뛰어 피하였기 망정이지 그렇지 못하였다면 싸리 살 개를 좋이 맞을 뻔하였다. “쫓아가며 쏘아라. 그 눈알을 쏘아 맞혀라.” 하고 호령하는 소리가 들리며 활 꾼 아이들이 쫓아 나오면서 활을 쏘았다. 꺽정이가 어디서 막대 한 개를 집어 들고 와서 덕순을 가리고 서서 날아오는 살을 받아 떨어뜨리는데, 그 막대를 번개같이 활 꾼 아이들 사이로 분주히 왔다갔다하다가 이것을 보고 대장아이에게로 뛰어들어가더니 조금 뒤에 곧 도로 나와서 수기를 두르며 “진을 범한 죄는 비록 중하나 용기와 재주를 대장께서 아시고 특별히 용서하라신다.”하고 큰소리로 외치었다. 살이 그치며 활 꾼 들이 뒤로 물러갔다. 꺽정이와 덕순은 서로 돌아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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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진이 풀리어 여러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반찬장수의 아들이 두 사람의 섰던 근처에 와서 도는 것을 꺽정이가 “용돌아.” 하고 부르니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며 즉시 가까이 왔다. “너희가 무섭구나.” 하고 꺽정이가 허허 웃으니 “멋모르고 혼났지요.” 하고 용돌이도 히히 웃었다. “우리가 너희 대장을 만나보고 싶으니 네가 가서 이리 좀 데리고 오너라.” “보고 싶으시거든 저리들 가보시오. 인제는 관계찮소.” “그러면 네가 앞장을 서라.”“그건 그리하시오.” 꺽정이와 덕순이가 용돌이를 앞세우고 대장아이에게로 오니 그 아이는 습진할 때 올라서던 발판 위에 걸터앉아서 다른 아이 두서넛을 데리고 군법 쓰려던 것을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그치고 일어섰다. 그 얼굴에 가로 찢어진 눈 하나를 제치고는 예사 아이보다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없었다. 용돌의 얼굴은 우악스럽고 무식스러울 뿐이요, 그 아이와 같이 영발한 기운이 없지마는 언뜻 보기에는 용돌이가 더 사내다워 보이었다. “나를 왜 보자고 하셨습니까?” 하고 그 아이가 먼저 말을 묻고 나서는데 말은 깍듯하나 태도가 당돌하였다. 덕순이가 아이를 한번 공동시켜 볼 생각으로 “네가 아이들을 몰아가지고 못쓸 장난을 하기에 말을 일러 주려고 보자고 했다.” 하고 말한즉 그 아이는 대번에 “그런 말은 일러 주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너 같은 조그만 아이가 무얼 잘 알꼬.”“조그만 아이기로 밤낮 책망 듣는 일을 모를까요.” “그러면 네가 역적으로 몰릴 것을 아느냐?” “역적이오? 그것은 처음 듣는 말씀이오.” “그것 보아라. 네가 습진 장난하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것이니 이후로 조심해라.” “어째서 역적으로 몰립니까?” “가만 있거라. 병정무기.” 하고 덕순이가 다섯 손가락을 다 꼽았다 펴고 나서 말하였다. “지금부터 사십 년 전 일이다. 그때 남촌 아이들이 남산에 올라가서 습진 장난을 하다가 역적으로 몰린 일이 있었다. 습진 장난이란 마구 못할 장난이니라.” “그것이 참 말씀이오? 참 말씀이면 그때 아이들이 역적질할 생각으로 장난을 했던 것이지요.” “입에 젖내나는 아이들이 이때 저 때가 어디 있니. 그때 아이들도 너희나 마찬가지 장난이지.” “그래도 당초에 역적질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역적으로 모나요? 몬다고 어디 역적이 되나요?” “네가 아직 나이 어려서 세상을 모른다.” 그 아이는 덕순의 말이 곧이 들리지 아니하는 듯이 연해 고개를 흔드는데 꺽정이가 앞으로 나서서 “대체 네 성명이 무어냐?” 하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의관 아니한 사람에게 해라를 받는 것이 창피한 모양으로 “성명은 알아 무어할라오? 역적으로 고변할라오?” 하고 뒤받아 대답하였다. “어른이 말 묻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버릇이 어디 있니?” 하고 꺽정이가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네가 양반의 자식이로구나?” 하고 물은즉 그 아이가 “그렇소,양반이오.”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고 “그래 내 성명을 알고 싶소? 성은 덕수이가고 이름은 순신이, 이순신이오.” 하고 거추장스럽게 성명을 말하였다. 꺽정이가 어이없어 하는 모양으로 순신을 보며 “잘 알았다.”하고 혼잣말로 “양반의 새끼 고양이 새끼라고 앙칼지다.” 하고 돌아섰다. 덕순이가 순신을 보고 “너 올에 몇 살이냐?” 하고 물어서 순신이가 “열한 살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열한 살로는 대단히 웃자랐다. 열 너덧 살 되었대도 곧이듣겠다.” 하고 순신의 등을 툭툭 치면서 “네가 이 다음 큰 인물이 되려거든 장난보다 공부를 힘써 해라.” 하고 곧 꺽정이에게로 가까이 가서 “우리 고만 가자.”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잠깐 가만히 계시오.” 하고 다시 돌아서서 순신의 팔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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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이 꺽정의 앞으로 끌려가면서 “왜 이리 하오?” 하고 그 얼굴을 치어다보니 큰 눈방울이 구르고 숱 많은 윗수염이 꺼치렇게 일어섰다. “너 같은 어린애는 어린애라고 가만둘 수가 없다.” 하고 덥석 뒤꼭지를 잡아서 번쩍 치어드니 순신이 대롱대롱 매어달리게 되었다.옆에 있는 아이들이 저의 대장의 당하는 것을 보고 잠깐 동안은 우두망찰들 하고 있었으나 한 아이가 눈짓하기 시작하자 여러 아이들이 돌려가며 눈짓하고 일시에 와 하고 꺽정이에게로 달려들어 한편 다리에 대여섯씩 매어달려서 주저앉히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갓난아이가 아름드리 쇠기둥을 흔드는 것 같아서 꺽정이는 끄떡도 아니하였다. 마소가 파리 붙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어 다리를 드놓듯이 꺽정이가 이편 저편 다리를 번 갈아서 들었다 놓으니 아이들이 와르르 와르르 나자빠졌다. 덕순이가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꺽정이를 나무라는데 꺽정이는 들은 체 만 체하고 손에 든 순신을 보면서 “말대답 불공스럽게 한 것이 잘못한 일인 줄 알고 빌면 모를까, 그렇지 아니하면 너를 태기치고 갈 터이다.” 하고 어르고 곧 “빌 터이냐?” 하고 물어야 순신이는 대답이 없었다. “빌겠다든지 못 빌겠다든지 얼른 말라.” 하고 꺽정이가 다그치니 순신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꺽정의 아래 턱을 바라보다가 “수염이 좋소.” 하고 하하 웃었다. 꺽정이가 곧 순신을 태기칠 것같이 둘러메다가 사뿐 땅에 내려놓으며 바로 덕순을 돌아보고 “고만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 가자.” 하고 덕순이가 꺽정이와 같이 돌아설 때 꺽정이는 순신의 말을 흉내내듯이 수염이 좋소”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밉지가 않거니” 하고 허허 너털웃음을 웃었다. 덕순이와 꺽정이가 사주인에 돌아왔을 때 대사는 눕지 않고 앉아 있다가 “신기가 좀 어떠시오?” 덕순이 묻는 말에 “신기야 좋지요”대답하고 빙그레 웃었다. “아까는 신기가 좋지 못하시다더니?”, “낫살 먹은 탓으로 몸을 꿈질거리기 싫은 때가 가끔 가다 있어요”, “우리와 같이 가기 싫어서 거짓 핑계하셨구려”, “늙은 것이 몸을 재게 움직이지 못해서 싸리살이나마 맞으면 낭패 아닌가요”, “번히 알고 계시며 미리 일어주지도 안 하신단 말이오?”, “아따 책망은 고만두시고 대관절 아이가 보시기에 어떻습디까?”, “아닌게 아니라 영특합니다. 우리 같은 범안으로 보기에도 장래 큰그릇 될 것 같습디다”하고 덕순이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한번 웃고 “저 수염수새에 눈딱지를 부릅뜨고 뒤꼭지를 잡아 치어들고 서서 태기친다고 얼렀으니 어지간한 아이가 아니면 초풍을 하였을 것인데 태연하게 수염이 좋소 하고 말하는 태도라니 여간 담대한 아이가 아닙니다”하고 입에 침이 없이 어린 이순신을 칭찬하는데 꺽정이가 “선생님?”하고 대사를 부르더니 말하기 전에 쓴입맛부터 다시고 “난리는 까맣습디다. 고 조그만 애가 다 자라서 난리를 친다면 우리는 늙어 죽을 것 아니오. 난리가 난대도 이 세상을 뒤집어놓지 않으면 신통치 못한데 그나마 난리도 구경 못할 모양이니 선생님 말씀이 맞는다면 나는 낙심이오”하고 말하니 대사는 “난리를 저렇게 고대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야”하고 한번 빙그레 웃고 “큰 난리는 아직 멀지만 작은 난리는 눈앞에 있네. 조금 참으면 볼 터이니 염려 말고 기다리게”하고 말하여 “큰 난리 전에 작은 난리가 있어요? 작은 난리나마 있다니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하고 꺽정이는 웃으며 말하고 “난리가 난단 말씀이오? 난리가 난다면 어디서 나겠소?”하고 덕순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데 이때 마침 영창문 밖에서 한두 번 기침소리가 나더니 늙은 주인이 영창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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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자리에 앉으면서 덕순을 보고 “무슨 이야기들 하시는데 불쑥 들어와서 불안스럽습니다”하고 말하니 덕순이가 “아닐세, 관계찮아”하고 흔연히 말하고 다시 대사를 향하여 “그래 난리가 어디서 날 듯하오?”하고 먼저 묻던 말을 되거푸 물었다. 대사가 고개를 한옆으로 기울이며 “글쎄요”하고 대답을 밝히 아니하여 덕순이가 또 재우쳐 물으려고 할 즈음에 주인이 “언제 난리가 난답니까?”하고 물으니 덕순이는 “이 대사 말씀이 난리가 수이 나리라고 해서 난리가 나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는 말일세”하고 대답하였다. “난리? 난리 나야지요”, “자네도 난리를 기다리는 사람인가?”, “난리를 기다리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습니까만 세상 되어가는 꼬락서니가 난리는 한번 나야지요”, “꼬락서니가 어떻단 말인가?”, “어떻다니요? 사대문으로 날마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것이 각 고을 봉물짐이니 이런 망한 세상이 또 어데 있겠습니까. 선영감, 조대헌 영감 여러분이 조정에 계실 때는 시골 봉물짐을 일년 열두달 가야 하나 구경할 수 없었지요. 대체 세상은 남곤, 심정이가 망해 놓았으니까요”하고 천연스럽지 못하도록 길게 한숨을 쉬고 주인은 다시 뒤를 이어 “지금은 어디 남곤, 심정이 때만이나 합니까? 중놈이 대궐 안에 들어가서 꼭뒤를 올리는 세상이니까요”하고 말하다가 대사 있는 자리에 중놈이란 말이 이면에 거리끼는 것을 깨닫고 뒤를 꾸미려는 것같이 “보우 같은 중은 말하자면 중도 아니고 속한도 아니지요”하고 대사를 바라보니 대사는 조는 사람같이 눈을 감고 앉았었다. 주인은 눈을 옮기어 덕순을 바라보며 “난리가 꼭 날 줄만 알면 어느 시골로 이사를 가야겠습니다”하고 말하니 덕순이가 “그건 어째서?”하고 물었다. “난리가 나면 서울서 날 것 아닙니까?”, “글쎄, 모르지”, “난리는 아무래도 서울서 나기가 쉬웁지요”하고 주인이 말하는데 꺽정이가 “서울서 난리가 나기로 시골로 이사할 것이 무어 있소. 다 살은 노인네가 난리에 죽을까 보아 겁나시오”하고 버릇없이 빈정거리니 주인은 재미 적어 하면서 “이 늙은 사람이야 난리가 나건 말건 상관이 없지만 자식 손자가 있으니까 젊은 분네들과 달라서 자연 걱정이 되지 안된단 말이오”하고 꺽정의 말을 대답한 뒤에 덕순을 바라보며 “서방님”하고 부르더니 “생원님이라 하자면서도 전에 부르던 서방님이 입에 익어서”하고 한번 웃고 “내일 모레 봉은사에 구경이 좋다고 구경 나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일 생원님이 가신다면 나도 뫼시고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시렵니까?”하고 덕순의 뜻을 물었다. “무슨 구경인가?”, “대비께서 보우를 시켜 재를 올린답니다”, “희암사의 무차대회는 벌써 끝났다는데 또 무슨 재가 있나?”, “대왕대비께서는 재니 불공이니로 성사를 삼는 양반이니까요. 말인즉 회암사 부차대회에 육신보살이 강림하셨다라나요. 그래서 불불이 또 큰 재를 올린답니다. 보우가 대왕대비를 속여서 나라 재물을 먹으려고 멀쩡한 거짓말을 지어냈는지도 모르지요”하고 주인이 말하는데 옆에 앉았던 꺽정이는 줄곧 눈을 감고 있는 대사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는 내일쯤 떠날 터이니까 구경갈 수가 없겠네”, “왜 그렇게 가세요. 오래간만에 서울 오셨으니 한동안 묵어 가시지요”, “서울이 재미없네”, “그러며 보은사 재 구경은 나도 파의올시다”하고 주인은 흥심없이 말하고 한동안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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