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대하소설 / 임꺽정 양반편5 - 홍명희

一字師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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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임꺽정 양반편5

- 홍명희

 

임꺽정 3: 양반편 | 홍명희 - 모바일교보문고

제 5장 권세

1

천도가 무심치 아니하여 보복이 영절스러울 것 같으면 윤원형은 백번 천번 급살을 맞아도 가하건마는, 천도가 나름이 있는지 보복이 원형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원형은 일국의 권세를 한손에 잡고 맘대로 휘둘렀다. 원형의 형 원로는 처음 살육이 난 뒤에 곧 풀리어 돌아와서 돈령도정 벼슬까지 지내었는데 공신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어서 "소위 공신이란 것들이 도적놈들이다. 남이 죽을동살동 모르고 만들어놓은 일에 공을 앗아다가 일등이니 이등이니 떠벌리고 나섰으니 이것이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 하고 노발대발한 일까지 있었다. 원로의 말이 원형의 귀에 들어 간 뒤 원형이 원로를 보고 "여보 형님, 말조심하시오. " 하고 말하였더니 원로가 눈썹이 쌍그래지며 "무슨 말을 조심하란 말이야? “ 하고 뇌까리었다. "공신이 이러니저러니 말한답디다그려. 국가의 공신을 함부로 말해 되겠소. " ”갸륵한 공신들을 누가 무어라고 말해? “ "그렇게 빈정대실 것도 아니오. " "영감이 작위가 높아지더니 형의 버릇까지 가르치려는가? ” "형님도 딱하오. " “딱하다는 건 무어야? 공신이 흔한 세상에는 윤기도 없나? 형보고 딱하다니 고현 인사로군. " 하고 원로가 뛰는 바람에 원형은 오만상을 찡그리었다. 원형과 같이 국사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을 오래 종이품으로 두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윤인경 이하 대신들이 대비께 품하여 특지로 원형의 직품을 돋아주었다. 며칠 동안 원형의 집에는 치하하는 손이 그칠 사이가 없었는데, 그의 형 원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더니 어느 날 밤에 와서 원형을 보고 "천은이 감축하다. " 하고 해라로 인사하니 원형이 "형제간이라고 직품을 보지 말란 법이 없으니 남 보는 데서는 해라하지 마시오. 내게 창피하다느니보다 형님에게 창피하오. " 하고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었다. "대감께 잘못했소. " 하고 원로는 당장에 말을 고치고 "여보 대감, 대감 소리가 듣기에 어떻소? 좋소? 언짢소?" 하고 비위에 거슬려 나오는 웃음을 웃으며 원형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원형이 얼굴을 들고 천정을 치어다보며 "언짢을 것 없지요. " 하고 대답하였다. "좋지? 좋으면 대감 우애 덕분에 나도 대감 좀 바쳐 봅시다. " "계제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되나요. " "쉽게 안 되어? ” 하고 원로가 뇌고 나서 도로 해라로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오늘날 너의 참판이니 판서이니 하는 것은 다 어디서 나왔느냐? 내가 없었더면 지금쯤 윤임이 손에 목숨이 달아났을 것 아니냐? 형도 형 나름이지, 네가 어째 나를 푸대접하게 되니? 일분 사람의 맘이 있거든 생각 좀 해보아라. " 하고 소지를 높여 말하니 원형이는 "형님 약주 취했구려. 하인이 듣더라도 창피하오. 가만가만히나 말하시오. " 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냐, 나는 창피도 모른다. 너희들의 오늘날 공명이 대체 뉘 공로냐? 너는 다 알지, 뉘 공로냐? 말 좀 해보아라. " "형님 공로가 많지요. " "공로가 많은 줄 아는 네가 나를 푸대접한단 말이냐? “ "푸대접이 무슨 푸대접이오? ” "이기, 정순붕 따위를 대신을 시키고 임백령, 허자 따위를 좋은 벼슬을 시키면서 나는 돈령도정으로 썩힐 작정하는 것이 푸대접 아니고 무엇이냐? “ "그 말씀은 대비전에 여쭐 말씀이고 내게 하실 말씀이 아니오. " "옳다. 대비전에 여쭐 말씀이다. 그러나 대비전에서도 전과 달라서 내 말을 네 말만큼 알아주시지 않더라. 이렇게 대비전 맘을 돌린 것은 뉘 짓이냐? ” "그걸 내가 아오. " 분이 상투 끝까지 오른 원로는 "이놈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 하고 원형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게 무슨 행실이오 "형더러 행실? 잘 배웠다. " 하고 원로가 체면까지도 돌보지 않고 원형의 상투를 감투 껴서 훔켜잡고 앞으로 끄숙이었다. 형제가 일어서서 두발놀이를 시작하였다. 원로는 원형의 뺨을 치고 원형을 몇 번 걷어차기까지 하였으나, 원형은 그중에 형 대접한답시고 계집아이 싸우듯이 원로의 팔을 꼬집고 원로의 얼굴을 할퀴었다.

 

2

원형이 원로를 미워하는 맘이 뿌리 깊이 박히어서 서로 대면하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원로가 이 눈치를 알고는 짓궂이 하루돌이로 원형을 찾아왔다. 원형이 한번 하인들을 불러서 "누가 찾아오든지 내 말 듣기 전에 들이지 마라. 큰댁 영감이 오시더라도 거래하고 들어오시게 해라. " 하고 일러 둔 까닭에, 어느 날 하인들이 상전의 분부대로 원로의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거래하려고 하였다. "무슨 일이냐? " "대감마님 분부에 누가 오시든지 거래하라셨습니다. " "너희가 눈이 멀었느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 "아니올시다. " "아니라니? 내가 이 집에 손님이냐? " "아니올시다.“ "괘씸한 것들 같으니.” 하고 원로는 상전과 하인을 휩쓸어 꾸짖고 앞 막아선 하인을 밀치고 들어와서 곱지 않은 눈으로 원형을 보며 "대감 말 좀 물어보세. 형이 아우의 집에 와서도 거래해야만 들어오는 법인가? “ 하고 곧 뒤를 이어서 "내가 요전에도 대감더러 한 말이지만 나도 대감을 바치고 싶으니 남행판서 한 자리를 벌어내게. 내가 대감에게 자주 오는 것이 나로는 근사를 모으는 셈인데 대감댁 하인이 서슬이 푸르러서 근사모으러 다니기도 비편할 모양이니 지금 아주 단단히 청 해 두네. 그것도 오래는 기다릴 수 없네. 대감이 하려고만 들면 오늘 내일로도 될 수 있을 줄 알지만 아주 넉넉히 한 달만 참고 기다림세. " 하고 말하는데 비위 파는 것도 같고 유세 부리는 것도 같았다. "사람이 성가시게 왜 그러시오. " "대감이 못해 주겠단 말인가? “ "남행판서고 백의정승이고 대비전 처분을 물으시오. " "속담에 중이 제 머리 깎느냐는 말이 있지. 대비전 처분을 대감이 물어주게나. 나는 대감만 믿네. " 며칠 뒤에 원형이 대왕대비께 문후할 때 원로를 꺾어 말씀하되 "신이 정경이 된 뒤로 형은 남행판서가 못 되어서 원망이 대단하오이다. 신을 원망하는 것은 오히려 모를 일이오나 어느 동기는 동기가 아니냐 마냐 하고 함부로 마마를 원망하오니 실로 딱 한 일이외다. 그리 말라고 신이 말씀하온즉 너는 대비의 긴목이라 말이 다르다고 조롱하듯 말하옵니다. 마마께서 한번 불러 이르시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 하고 그럴싸하게 말씀하여 대비는 "이르기는 무어를 이른단 말이야. 내버려 두지. 원망도 하다 지치면 아니하겠지. " 하고 화를 내었다. 그 뒤에도 원형이 대비를 뵈을 때마다 번번이 원로의 말로 대비의 화를 돋아서 대비까지 원로를 미워하게 되었다. 원형이 종질 되는 병조좌랑 윤춘년을 시켜서 원로를 몰아 상소하게 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지는 아래와 같았다. "대왕대비께옵서 여희 같다는 악명을 쓰시게 된 것은 윤임이 일을 얽었다느니보다 원로가 말을 만들었다 하올 것이 원로가 인종께 이롭지 못한 말과 해로운 짓을 하되 언언사사에 내지라고 자탁하였사온즉 윤임이 인종의 지친으로 내지라는 말 듣고 의심 없기가 어려웠을 것 아니오니까? 원로가 신에게 이르는 말이 오늘날 공신이란 것이 오래 갈 줄 아느냐? 대비만세 후에 변복이 되지 않을 줄 아느냐? 하고 횡설수설하는 것이 모두 신자의 도리로는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원로가 국사를 그르치고 종사를 위태케 할 위인인 것든 아는 사람이 신 한 사람 뿐이 아니올 것이나, 원로의 흥한 심사를 잘 아는 사람은 신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외다. 대체로 말씀하오면 윤임은 천하의 역적이요, 원로는 인종의 역적이외다. 신은 원로를 버릴망정 전하를 마저 버리지 못하와 원로의 죄상을 들어 말씀하오니 전하는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 대왕대비가 춘년의 강소를 대신에게 보인 뒤에 대신의 말을 좇아서 원로를 파직하고 양사 의론을 좇아서 원로를 원찬하였다가 다시 사약을 내리었다. 원로가 죽은 뒤에 상소 이허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춘년이가 당숙을 죽인 것이 아니라 원형이가 친형을 죽이었다. "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상소 문구를 들은 사람 중에는 "원로가 인종의 역적이면 원형이는 무엇인가? 원로와 원형이가 처음부터 갈렸던가? “ 하고 공론하는 사람도 있었다.

 

3

원형은 본래 삼사 형제라 원로 외에 원량이란 형이 있고, 또 도손이란 서제가 있었다. 원량은 위인이 영발치 못하여 아우들의 지실받이로 늙은 까닭에 원형에게 형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도손이는 형제의 셈 밖이었다. 원로의 초상을 치를 때, 원로의 아들 백원이가 모든 절차를 융숭히 하려고 하였더니 인형이 이것을 알고 백원을 불러다가 "국가 죄인의 초상이라 그리 못하는 법이다. " 하고 금하였다. 백원이 원량을 보고 "큰아버지, 다른 것은 어쨌든지 상여나 구정 겹줄을 쓰게 해주시오. 남의 이목도 있지 않습니까? 마주잡이는 너무 초라합니다. 작은아버지를 보고 말씀 좀 하세요. " 하고 청한즉 원량은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내 말을 듣나. 말해 소용없어," 하고 방색하다가 "그래도 한번 말씀해 보세요. " 하고 백원이 우기는 바람에 "아무리나 한번 해보지. " 하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원량이 원형을 와서 보고 "여보 대감, 상여만은 조금 좋게 쓰도록 하세그려. 남의 이목이 있지 아니한사? 이 세상에서 마지막길 떠나는 동기를 마주잡이로 거들거들 내보내면 첫째 대감에게 창피하지 않겠나. " 하고 간곡히 말하였더니 원형이 증을 내며 "죄인으로 죽은 것은 생각지 못하오? 지각 없기가 백원이나 다름없구려. " 하고 우박을 주어서 원량이는 다시 두말을 못하였다. 처음 배소에서 운구하여 오던 날 원형이는 잠깐 상가때 와서 보고 다시 오지 아니하더니 발인날 식전에 온다는 선통이 왔었다. 원형의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발인 시각이 한없이 늦어졌다. 하인들이 몇몇번 왔다갔다 한 뒤에 원형이 와서 견전에 참예하게 되었는데 영결 종천의 축문이 끝이 나며 상준 이하 비복들까지 일제히 곡소리를 내어 애고지고 하는 판에 원형이 몇 마디 어이어이 하다가 슬그머니 그치고 "곡들 그치 래라. " 하고 말하였다. 원형의 말 한마디에 상주까지 곡을 그치어서 곡소리가 소낙비 쏟아지다 그치듯이 뚝 그치게 되니 진정으로 곡하던 사람들은 고사하고 체면으로 곡하던 사람까지도 어이없어 하였다. "벌써 늦었다, 어서 떠나거라. " 하고 원형이 재촉하여 마주잡이 상여는 장지로 떠나갔다. 도손이는 나이는 젊으나 선천부족으로 시름시름 앓던 터이라 수상하지 못하였는데, 원형이 이것을 보고 "너 어째 산하에까지 가지 않느냐? 나는 국사에 몸이 매여서 잠시 서울을 떠나지 못하지만 너야 아무것도 않고 노는 사람이 어째 산하에까지 가지 않느냐? 젊은 아이들이 몸 좀 아프다고 형님 장사를 가보지 않는단 말이냐? 그럴 도리가 어디 있을꼬? 큰형님이나 백원이는 일의 두서를 차리지 못할 것이니 네가 가서 장사를 보고 오너라.“ 하고 이른 뒤에 곧 도손이를 말을 태워 상행을 뒤쫓아 보내었다. 그날 저녁때 원형이 예궐하였다가 나오는 길에 도손의 집을 들러서 계수를 보고 "그 아이가 병을 자세하고 산하까지 아니 가는 것을 내가 쫓아 보내다시피 하였소. 갔다 온 뒤에 혹시 병이 더치더라도 원망은 마시오.” 하고 허허 웃으니 도손의 안해는 "천만에. " 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도손의 안해는 세동이 알맞아서 맨드리에 태가 나고 가죽이 얇고 빛이 희어서 얼굴이 돋보이는 중에 너글너글하고도 어여쁘게 보이는 두 눈이 사람 끄는 힘을 가졌었다. 원형은 "그 아이가 요사이 뉘 약을 먹소?“ "약도 별로 먹지 않습니다. " "약을 먹어야지. " "약에 녹용이 들어서 이루 먹기 어렵다고 하와요. " "내 아우가 되어 가지고 용이 없어서 약을 못 먹는단 말이오? 지금 집에 있는 것만 해도 저는 먹고 남을 게니 먹는 대로 갖다 먹으라고 하시오. " 하고 원형이가 말거리가 궁하여서 잠깐 말이 없이 두이번거리다가 옆으로 제쳐놓은 바느질감을 가리키며 "무슨 바느질 하셨소? 침모를 두시구려. 사람이 마땅한 것이 없거든 내게서 하나 데려가시오. " 하고 원형이 그 계수의 얼굴을 치어다보니 그 어여쁜 눈이 말 대신으로 고맙다는 뜻을 말하였다. 원형이 수숙의 체모를 보아서 뜰에 서서 말하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4

도손이는 산하에까지 휘달려가서 몸이 삐친 끝에 하관 시간이 밤중인 까닭으로 산상에서 야기를 쏘이고 병이 갑자기 더치었다. 두통신열은 고사하고 제 일로 해소가 심하여서 산하에서 지내게 된 초우제에도 참예하지 못하였다. 도손이가 서을 온 뒤로 몸져 누워 앓게 되었는데, 의약 구호가 부족한 것은 아니오되 병은 조금도 감세가 없었다. 도손이가 본래 심약한 사람이 가래에 선혈이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는 병이 고황에 들어서 할 수 없거니 생각하여 죽을 것을 자기하고 약도 정성스럽게 먹지 아니하였다. 병은 중병이건마는 구미를 젖히지 아니하여 먹을 것을 갖가지로 다 찾는데, 어느 날은 평상시에 좋아가는 저육을 먹겠다고 도야지의 업진 하나를 거의 다 먹다시피 하더니 이것이 체하여 마침내 젊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도손이가 앓는 중에 원형이는 자주자주 와서 보는데, 석후에 와서 밤 늦도록 있을 때가 많았었다. 원형의 첩 난정이가 원형을 대하여 "대감이 갑자기 우애가 놀라워지셨습니다그려. " 하고 기롱으로 말을 한즉 "도손의 병은 내가 더치어 준 셈이라 무안하지 아니한가. " 하고 발명같이 말하다가 "그래, 대감이 무안풀이로 자주 가십니까? “ 하고 가시로 찌르듯이 묻는 말에 원형이는 "그것도 있지.” 하고 모호히 대답하고 말을 달리 돌리었었다. 도손이 죽어 초종이 지나고 졸곡이 지난 뒤에 원형이가 원량을 보고 도손의 집 일을 의논하였다. "도손의 안해를 어떻게 할까요? “ "어떻게 하다니? ” "젊은 부녀를 혼자 살림하라고 내버려 둘 수가 있어요? " "그러면 어떻게 하나? “ "이 동리에 집이 한 채 있으니 그 집으로 이사를 시키고 돌보아줄까 하오. " "그러면 더 말할 것이 없지. " 하고 원량이는 원형의 뜻을 동기간의 우애로 알고 자기가 받는 것 같이 좋아하였다. 원형이가 도손의 안해를 가까이 이사시키고 일동일정을 돌보아 주는데, 돌보아 주는 것이 너무 과할 뿐 아니라 수숙간에 혐의 없이 구는 것이 집안 이목에까지 거슬리었다. 난정이가 이것을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어느 날 밤 조용히 원형이를 대하였을 때 "세상에 계집이 씨가 졌소? 대감의 행세가 무슨 행세요? 하고 토죄하니 원형이는 "종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 하고 도리어 화를 내었다. "내가 종이 없세요? “ "그러면? ” "내가 종이 없더라도 대감같이 종없지는 않을걸요. " "발칙한 것이로구나. " "인제는 별소리를 다하는구려. " "그리하다가는 뒤가 좋지 못할 게니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아. " "자식새끼 낳아 가며 몇몇 해를 살다가 인제 쫓겨나는가 보오그려. " "그예 무슨 일을 내바고 화를 돋우는 세음인가? “ "대감이 지금 내게 화내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전후 사정을 대비전에 품하여 볼 터이오. " 하고 난정이가 대비를 내세우니 원형이는 갑자기 풀이 꺾이면서 "당치 않은 소리를 말아. " 하고 난정이의 눈치를 보았다. 난정이는 장흥 관비의 딸로 원형의 첩이 되어 들어온 뒤 근 이십 년 동안에 원형의 일을 도와준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사람이 영리하여 대왕대비의 총애를 받는 까닭으로 원형이도 함부로 대접하기 어려운 터이었다. "대감, 나를 샘바른 계집으로만 알지 마시오. 내가 이런 말씀 저런 말씀 하는 것도 모두 대감을 위해서 하는 말씀이오. " "그건 나도 알아. " "그걸 아시면 왜 화를 내시오?” "화를 내게 말하는 것이 잘못이지. " "화를 내는 것이 잘못이지. " 하고 난정이가 흉내를 내듯이 말하고 상긋 웃으니 원형이 "입도 싸다. " 하고 난정의 등을 툭 치고 빙그레 웃었다. "대감 조처할 도리를 생각하시오. 하인들이 창피하오. " "그래 그래 잘 알았다. 잘 알았어. 내가 조처할 게니 걱정 마라.“ "대감 믿습니다. 말이 왜자하게 나기 전에 조처하십시

오. " 그 뒤에 며칠 지나지 아니하여 퀀형이는 도손의 안해를 문밖 암자로 내보내어 승이 되게 하였다.

 

5

원형의 안해 김씨는 원형에게 소박을 받아서 명색만 내외이지 사실로 남과 같이 지내었다. 원형이는 난정의 집에서 거처하고 김씨에게 오지 아니하였다. 김씨가 정실이지마는 원형의 식사 한 때와 옷 뒤 하나를 아랑곳하지 못하므로 정실이 정실 같지 아니하고 김씨의 집이 큰집이지마는 원형이가 지차이니 제사를 받들 까닭이 없고 원형이가 사랑을 쓰지 아니하니 손님을 대접할 까닭이 없으므로 큰집이 큰집 같지 아니하였다. 난정이가 원형의 집안 일권을 손에 잡고 휘두르나 그러나 나라에서 내리는 정부인이니 정경부인이니 하는 부인 직첩은 김씨에게도 내리고 난정이가 안에섯님으로 마마님 소리밖에 듣지 못하니 이것이 난정의 맘에 부족하였다. 난정이 골이 날 때는 "제가 무슨 턱에 정경부인인고. " 하고 김씨를 귀넘어로 욕하며 혀도 차고 "마마님인지 호구별성인지 염병에 가마귀 소리같이 듣기 싫다.“ 하고 저의 심정을 쏟아놓으며 눈물도 지었다. 김씨의 좌우에도 사람이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을 전하여 주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여 김씨는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분이 복받치었다. 그러나 자기의 신세를 돌보아서 줄곧 참고 지내는데, 어느 날 난정이가 자기를 이년 저년 하며 욕설하더란 말을 듣고 김씨는 눈에서 피가 날 듯이 분하였다. 욕설도 유만부동이지 이년 저년 종년 대접은 너무 심하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점점 더하는 것이다. " 김씨는 분김에 쫓아가서 야단치려고 맘을 먹었다. 김씨가 난정의 집에 와서 보교 밖에 나오면서 곧 마루에 섰던 난정이에게 손가락질하며 "이년아, 네년이 누구더러 이년 저년 했니? 이년아, 아무리 기광을 부려도 네년은 관비의 딸년이고 첩년이지야. 나는 봉치 받고 초례 지낸 양반의 정실이다. 네년이 누구더러 이년 저년 했단 말이냐? 여우 같은 년, 오장 없는 사내만 홀리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느냐? 괘씸한 년 같으니. " 하고 입귀에 게밥을 지며 야단쳤다. 난정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 한마디 못하다가 김씨가 돌아간 뒤에 친상의 통부 받은 사람같이 곡성을 내어놓았다. 원형이가 사랑에서 손과 이야기바는 중에 이것을 듣고 "웬 곡성이냐? 알아보아라. " 하고 분부하여 난정이의 곡성인 것을 알고 안으로 들어와서 "별안간에 웬일이냐? ” "집안에 까닥없는 곡성이 사위스러우니 울지 말고 말을 해. " 하고 일러서 난정이가 눈물을 거두고 나서 말하였다. "봉치 받고 초례 지낸 양반의 정실이 관비의 딸년 첩년에게 와서 무단히 야료를 하니까 야속해서 원통해서 분해서 소리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 원형이가 전후 사정을 들어서 안 뒤에 곧 하인들을 데리고 김씨에게 와서 안대청 들보가 울리도록 한바탕 호령질하고 김씨의 방에 있는 납채함과 혼인롱을 빼앗아 갔다. 김씨는 분한 끝에 자처하려고까지 하였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리어서 죽지는 못하였으나, 이내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김씨가 병중에 식혜 생각이 나서 병구원하는 늙은 할미더러 말하였더니 그 할미가 생각이 없이 "대감 잡수시는 식혜 한 그릇만 가져오너라. " 하고 아이종에게 말을 일러서 아이종이 식혜를 가지러 난정의 집에 왔었다. 난정이 이것을 알고 "아무리 원수라도 앓는 것은 불쌍하다. " 하고 말라며 식혜를 큰 항아리째 갖다가 저의 손으로 조그만 항아리에 나눠 담고 봉지를 봉하여 아이종을 주었다. 김씨가 속이 타던 끝에 식혜가 시원하다고 맛도 모르고 한 그릇을 다 먹더니 한 시각이 못 지나서 타던 속이 짜개지고 찢어지는 것 같다고 하며 자반 뒤집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기진역진하여 말도 못하고 간신히 손으로 가슴을 가리킬 뿐이었다. 김씨가 죽은 뒤에 손발 끝이 검푸르고 아래웃니에 검은 피가 엉키어서 누가 보든지 병에 죽은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의 친정어머니 강씨가 이것을 와서 보고 식혜 내력을 물어 안 뒤에 항아리에 남은 식혜 속에 은가락지를 넣어보니 은빛이 당장에 시커멓게 변하였다.

 

6

강씨가 자기 집에 돌아가서 조용씨 아들을 보고 식혜에 은빛이 변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형조에 정장할 것을 의논하니 그 아들이 "지금 형조는 윤가의 집 사가 형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 형조에 잘못 정장하다가는 도리어 욕보기가 쉬우니 생각 마십시다. " 하고 그 어머니를 말리었다. "죽은 사람이 불쌍하지 아니하냐? “ "누가 불쌍하지 않답니까. " "그러면 원수를 갚아 주어야지. " "지금은 윤가의 세력이 충천한 까닭에 할 수 없지만 저도 휘짝 넘어박힐 날이 있을 것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십시다. " 하고 그 아들이 말하여 강씨는 김씨의 수상한 죽음을 탄하고 나서지 아니하였다. 원형이 상처한 뒤에 속현하지 아니하고 난정을 부인으로 올리었다. 이때 난정의 친정 오라비 정담은 장흥서 관노를 다니었는데 관노 오라비 있는 것이 정경부인의 수치라 원형이 장흥부사에게 기별하여 노적의 이름을 없이하고 서울로 이사시키었다. 정담은 지각 있는 사람이라 원형과 난정이가 장래 화패 받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원형의 집에 왕래를 끊으니 난정이 한번 와서 보고 야속하다고 사설하고 또 오괴하다고 백망하였다. 난정이 다녀간 뒤에 정담은 자기 집 앞마당에 꼬불꼬불하게 담을 쳐서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게 만들어놓고 들어앉으니 이것은 사인교나 보교 탄 사람을 오지 못하게 막는 뜻이라 난정이 이것을 알고 "남매간이라고 남만도 못하다. " 하고 골을 내었다. 난정의 골이 저절로 풀린 뒤에 어느 날 원형을 보고 "우리 오빠가 아람은 괴상하지만 나로는 모른다 할 길이 없으니 내 낯을 보아서 택호나 부르게 초사 하나 시켜주시오. " 하고 청하니 원형이 머리를 흔들며 "초사는 어려을 것이 없지만 일껀 돌보아주어도 제가 싫다고 내빼는 것을 나는 알은 체하기 싫소. 제가 아쉬우면 오겠지. 제가 오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 하고 청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정담은 원형에게 오지 않을 뿐이 아니라 난정도 모르게 슬그머니 원추로 이사 내려가서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난정이 친동기에게 의절을 당한 뒤에 자기의 몸에 죄악이 있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저으기 선심이 나서 문간에 오는 중이나 동냥아치를 후히 대접하여 보내게 하고, 또 용왕에게 발원반다고 춘추에 한 번씩 섬쌀로 밥을 지어 강물에 풀게 하였다. 난정이 정경부인을 바치던 이듬해 구월에 대왕대비가 상국연으로 내연을 배설하고 공신들의 부인을 달러들이는데 전에 없이 과부 된 사람까지 불러 참예하게 하였다. 대왕대비는 이 때 춘추가 사십이 훨씬 넘었으나 본래 기부가 좋은 까닭으로 왕대비보다 오히려 젊어 보이는 터인데, 이날은 몸을 특별히 치장한 까닭으로 일층 더 젊어 보이었다. 잔치가 벌어져서 중간이 지난 때에 대왕대비가 국화잎을 따서 넣은 국화주를 서너 잔 마시고 술 뒤의 풍치가 소조하지 않아서 국화를 많이 꺾어오라 하여 손수 한 가지를 뽑아 머리에 꽂고 공신들의 부인을 돌아보며 꽃을 꽃으라고 권하니 여러 부인들은 차례를 다투어 꽃가지를 뽑는데 홀로 임백령의 두인이 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대왕대비가 이것을 보고 "공신의 집안은 국가와 한집 같은 터이라 내가 지금 여러 부인들을 한집안 사람같이 보는 까닭에 나도 미망인의 몸이지만 먼저 머리에 꽃을 꽂았으니 부인도 한 가지를 꽂아 보라. " 하고 말씀하나 임백령의 부인은 "황송합니다. " 하고 대답하고 여전히 꽃가지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난정이 자리에 일어나서 임백령 부인의 앞으로 나가더니 "부인이 미망인의 몸으로 꽃을 꽂지 않으시는 것은 예에 합당하나 부인이 신자의 몸으로 대왕대비의 명을 어기는 것은 예에 합당치 못하니 부인으로는 꽂기도 어렵고 아니 꽂기도 어려우신 터이라 제가 외람히 대비의 명을 봉행하기 위하여 한 가지 꽃아 드립니다. " 하고 임백령 부인의 머리에 꽃가지를 꽂아주었다. 임백령 부인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현연히 나타났지만, 꽂은 꽃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여 공신 부인들에 꽃 안 꽂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니 대왕대비가 대단히 기뻐하여 난정의 재치를 칭찬하였다. 다른 부인들믄 칭찬받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여 "평지돌출로 정경부인 바치는 사람이라 다르구려.“ "그러 고말고요. " 하고 서로 속살거리었다.

 

7

내연이 파하여 다른 부인들이 물러나갈 때에 난정은 뒤에 떨어져서 대비를 침전에까지 모시고 왔었다. 대비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난정이도 물러나가려고 한즉 대비가 "별로 볼일 없거든 이야기나 더 하다가 나가거라. " 하고 붙들었다. 대비가 임백령 부인의 엄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숭선의 부인은 사나이 같드구나. “ (숭선은 임백령의 군호이다. ) 하고 말씀하니 난정이 "그렇기에 팔자가 거세서 과부가 되었습지요. " 하고 자발없이 대답하고 나서 대비 존전에 과부란 말이 거침 있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덮으려고 "숭선군씨 살았을 때 그 부인을 어머니같이 무서워했더랍니다.” 하고 고쳐 말하였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옥매향이를 들여앉히게 가만두었더란 말이냐? “ "그 부인이 첫아이 낳고는 내소박을 했더랍니다. " "그것은 어째서? ” "아이 낳기가 양반 부인의 두번 못 당할 욕이라고 남편을 가까이하지 않았답니다. " "별사람이다. " "괴상스러운 사람입지요. 신 같은 것은 천골이라서 그러하온지 다 큰 자식들이 있건만도 지금 하나쯤 더 낳고 싶은 맘이 없지 않습니다. " 하고 난정이가 해해 웃으니 대비도 빙그레 웃으면서 "너도 그저 몸하느냐? “ 하고 묻고 "나는 성가시어 못 견디겠다. " 하고 말씀하는데 마침 어린 왕이 문안을 들어왔다. "오늘 곤하시지요? ” "대단치 아니하다. " "지금 무엇이 성가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 "아니다. " 자리에 일어섰는 난정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을 왕이 치어다보며 "왜 웃느냐? ” 하고 묻는 것을 대비가 가로막고 "아니라니까 그러는구나. 그러고 저 사람도 전과 달라서 일품명부니까 해라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여 자전 말씀에 복종을 잘하는 왕이 난정을 바라보고 "잘못했소. " 하고 말씀하니 난정은 옷깃을 고쳐 여미고 머리를 구부슴하며 "황감하오이다. " 하고 대답하였다. 난정이 궐내에서 나올 때에 대비가 상급으로 내린 남치마차를 가지고 나와서 원형을 보이며 임백령 부인에게 꽃 꽂아 주고 상급 받은 것을 이야기하고 "상급뿐인 줄 아시오. 대비마마께서 오늘은 특별히 좋아하셔서 대전께 해라 말라고까지 말씀하셨소. " 하고 상글상글 웃으니 원형이 난정의 얼굴을 향하여 손가락을 까댁이며 "그것이 다 내 덕인 줄이나 알아. " 하고 웃었다. "덕으로 알고 모르고가 어디 있세요. " "덕은 덕으로 알아야지. " "대비마마의 덕은 무엇으로 갚으실라오 ? ” "무엇으로 갚아, 충심으로 같지. " "여보시오. 대비마마께서 아직도 아이낳이하시 겠습디다. " "그건 무슨 동에 닿치 못한 소리야? " “글쎄 말이에요. " 난정이는 저 흔자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사람이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행신하기가 거북합디다그려. " 하고 말하니 원형이는 저의 의사로 난정이 정경부인이 된 뒤에 행신이 어렵다는 말로 듣고 "정경부인으로 모든 데 수빠지지 않기도 쉽지 않겠지만 여편네는 사나이처럼 셈이 많지 않으니까 오히려도 좋지. 사나이는 벼슬한 계제 한 계제에 셈이 다 각각이야. 대신이 좋은 줄들 알지만 대신 노릇같이 귀찮은 일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니.” 하고 높은 벼슬에 셈이 많은 것을 길게 말하였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비이니 빈이니 하는 귀인들이 여염가 부녀보다 거북한 일이 많다는 말이에요.“ "그거야 물론 그렇겠지. " "첫째 양반부터 거북한 것이니까요.” "관비가 생각나는가? " "방수에 꺼리는 말을 마시오. " "왜 방수는?" “내가 관비가 되면 대감은 어떻게 되오? ” "쓸데없는 소리 다 한다. " "그렇기에 그런 소리 마시란 말이에요.“ "내가 조금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설마하고 원형이는 앞일을 생각하다가 그치고 "술이나 한잔 먹을까? ” 하고 난정이를 돌아보았다.

 

8

원형이 난정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 중에 난정의 소생딸 아가년이 저녁 문안하러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년이가 얼굴 바탕은 어미를 닮아서 밉상이 아니나 한 눈은 크고 한 눈은 작아서 짝눈이 보기 흉하였다. 원형이 술김에 "저것이 눈만 아니면 좋은 사위를 얻어 줄 수 있지만 눈이 저러니. " 하고 한구석에 섰는 아가년을 가리키며 실없이 말하니 아가년은 얼굴을 붉히며 눈을 아래로 깔고 난정은 "사지 병신이면 좋은 사위 안 얻어 줄 터이오?" 하고 성을 내었다. "서출 짝눈이를 누가 잘 데려가려고 하나. " "서출이 무어요? 내 딸이 서녀란 말이오? “ "골낼 일도 많다. 혼자 낳은 딸인가. " 난정이가 원형의 말은 대꾸하지 아니하고 아가년을 바라보며 "네 방으로 가거라. " 하고 포달스럽게 말하여 아가년이가 원형에게 절하고 돌아서는데 크고 작은 눈에 다같이 눈물이 맺히었다. "실없은 말에 골낼 것이 무어야. " "실없은 말도 대중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 애가 눈이 남만 못해서 분해 죽으려고 하는데 세워놓고 그게 무슨 말이오. " "잘못했소. 실없은 말이지. 사실로야 내 딸이 사지 병신인즐 사위를 못 얻을까. " "그러고저러고 그 애 혼인을 어디로든지 속히 완정합시다. " "통혼 들어온 데도 많으니까 낭재를 간선해서 정하지. " 원형이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그 서출 자녀를 통적하여 적실 소생과 같이 하라고 대비가 전교를 내린 일까지 있었으나, 적서를 가르는 관습이 흉악하던 때라 적자를 가지고 난정의 소생 아가년과 혼인하자 할 사람이 적을 일이지만 세력 좋은 원형과 사돈할 욕심으로 통혼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중에는 누대 봉사에 맏며느리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다. "남의 집 지차 며느리로는 주지 마시오. " ”지차는 어떤가? “ "맏동서에게 쪼들려 지내지요. " "지차도 지차 나름이지. 우리 형수들에게 쪼들린 일이 있나? 자기 일을 생각해 보지. 좋은 사윗감만 고르면 고만이지. " 아가년이는 저의 방에 돌아와서 종작없이 울다가 나중에 "자기가 낳지 내가 낳나. " 하고 주작없는 말로 구, 야비를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이튿날 식전에 아가년이가 저의 방애서 경대를 버티어 놓고 얼굴에 분을 바르다가 경대 속의 짝눈이 전날 밤 아비의 말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여 새삼스럽게 눈물을 흘리는데, 그때 마침 원형의 아들 두리손이 난정에게 아침 문안하고 나가는 길에 "누이 일어났나? ” 하고 방문을 열었다. "왜 꼭두식전에 울고 앉았어요? “ 아가년이 대답이 없이 손으로 눈을 가리다가 "오빠, 잠깐 들어오우. " 하고 말하여 두리손이 방으로 들어온 뒤에 아가년이 부모까지 짝눈을 흥보시 분해 살 수 없다고 사정하니 두리손이 "그렇지, 구렁이를 구렁이래 맛인가. 아버지 말이 잘못이지. " 하고 허허 웃었다. 아가년이는 뺨 맞고 하소연하다가 볼기 맞은 셈이라 입술을 악물고 돌아앉았다. 아가년이가 머리를 싸고 드러누워서 죽네 사네 하니 난정이가 처음에는 "지각없이 굴지 마라, 너의 아버지가 약주가 취하셔서 실없은 말씀 하셨거든 무엇이 그리 야속해서 죽네 사네 한단 말이냐. " 하고 아가년을 나무라다가 두리손과 말다툼하였다는 아이종의 말을 듣고 "그놈이 볼기가 가렵든가 종아리가 가렵든가 어디 보자. " 하고 두리손을 별렀다. 두리손은 원형이 외입하여 낳아 온 자식이라 난정이 사랑하는 맘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날 저녁때 원형이 안에 들어와서 난정의 참소를 받고 곧 두리손을 불러들이어서 앞에 세워놓고 "네가 아가년이를 어떻게 했기에 아가년이가 죽네 사네 하냐? 조금이라도 기일 것 같으면 다리뼈를 분질러놓을 테니 바른 대로 말해라. " 하고 어르니 두리손은 눈이 휘등그래졌다. "별말 한 일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짝눈이라고 흉보시더라고 사정하기에 아버지 말씀이 잘못이라고 위로조로 말했을 뿐입니다. " "무엇이 어째? “ 하고 훤형이 옆에 놓였던 여의를 들어 두리손을 내리쳐서 두리손은 해골이 깨어져 당장에 즉사하였다. 원형이 본래 죽일 맘이 있던 것이 아니지만 손에 살이 있던지 죽여놓고는 "그까짓 놈 죽어 싸다. " 하고 그날 밤으로 하인을 시켜 두리손의 시체를 강물에 갖다 띄우게 하였다.

 

9

명률 조문에 비추어 보면 부모, 조부모가 자손을 죽인 죄는 예사 살인과 달라서 형벌이 중하지는 아니하나, 역시 인명에 관한 죄인 이상에 아무리 경하게 치죄한다 하더라도 장일백은 의당향사일 것이고, 또 재상은 소민과 달라서 함부로 치죄하지 못한다 하더라초 법관이 논죄하여 해당한 견전을 물을 일이지마는, 원형 두리손을 죽이고 법관에게 논죄를 당한 일이 없었다. 법관이 원형의 죄를 몰랐다느니보다도 원형을 논죄할 법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도 여차 일이다. 원형의 하인이 외방에 나서 살인하는 일이 있어도 시친이 하인의 기세에 눌리어서 관하지 못하고, 수령이 원형의 세력을 겁내서 살옥을 일으키지 못하는 판이며, 또 살인과 같은 죽을 죄를 지은 범이라도 원형의 집에 들어가 있게만 되면 군교 , 포교가 당초에 잡을 생각을 먹지 못하는 판이니, 원형이 저의 손으로 처 자식을 죽인 것쯤은 죄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원형은 형을 해치고 자식을 죽이고도 뉘우치는 맘이 없을 만큼 위인이 한독할 뿐 아니라 갖은 악덕이 구비하여 갖은 악을 다하였는데, 그중에 심하고 심치 않은 것을 갈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하려면 가장 심한 것이 탐심이었다. 이끗에는 친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조카에게서 남녀 노비 백여 명을 빼앗고, 동리 친구에게서 전가 보물을 빼앗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연년이 일어나는 큰 옥사에 번번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얽어놓고서 뇌물의 다과로 형벌의 경중을 달리하고, 또 각 고을 수령으로부터 각진 무직과 각도 방백에까지 뇌물을 받고 올리고 옮기고 하여 원형의 집문간에는 뇌물짐이 그칠 날이 없었다. 어느 때 북도의 변지한 사람이 전동 백여 개를 한씸에 묶어 바치었는데, 원형이 전동이란 물목을 보고 "미친 것이로군. 내가 한량인가? 전동은 무엇에 쓰노. " 하고 긴치 않게 생각하여 그 짐을 풀어보지도 아니하고 광 속에 들이뜨려 두게 하였다. 얼마 뒤에 그 사람이 벼슬이 갈리어 서울로 올라와서 원형에게 문후하러 온 길에 "향자의 전동은 감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원형이 긴치 많게 여기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전동은 그렇게 많이 보내서 무엇에 쓰나? ” 하고 신신치 않게 대답하였다. "전동 속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 "아니. " "대감께서 전동을 받으셨단 말씀 한마디가 없으시기에 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 "속에 무엇이 들었나? ” "녜, 지금 좀 갖다가 보시지요. " 원형은 하인을 불러서 그 전동을 내오라고 분부하였다. 하인이 광속에 들어가서 이 짐 저 짐 속에서 간신히 찾아내온뒤에 짐을 푸르고 전동 뚜껑을 뽑으라 하고 보니 전동 속에서 초피 한 장이 나왔다. 전동 하나에 초피 한 장씩 초피가 백여 장인데 초피나마 여간 힘들여서는 구하기 어려운 극상등 초피이었다. 원형이 맘에 흐뭇하여 싱글벙글하면서 "그걸 누가 알았나? 자네에게 미안했네. " 하고 사과하듯이 말하고 "자네 이번에 어디로 옮겼어?“ 하고 이직된 것을 물었다. "위원이올시다. " "자네가 위원 같은 데를 갈 수 있나? 어디 의주로 옮겨보세. " "황송하오이다. " 그때 의주부윤이 벼슬자리가 위태한 것을 탐지하고 원형에게 뇌물을 바치었는데, 그 뇌물은 백미 삼백 석에 백미 실은 배까지 바치는 것이었다. 원형이 이미 초피 백여 장에 허락한 일이 있으나, 백미 삼백 석을 받고 모른다 할 염의가 없어서 초피를 의주부윤으로 보낼 때에 백미는 좋은 내직으로 부르게 하였다.

 

10

충주 부자에 고비란 사람이 있었으니 위인이 다랍게 인색하여 자린고비로 유명하였었다. 고비의 큰아들 고치는 그 아비와 딴판 달라서 잘 먹고 잘 입고 기생 외입까지 할 줄 알아서 고비가 죽는 날까지 개미 금탑 모으듯 모아놓은 재물이 차차로 줄어들었다. 한있는 재물은 줄어들고 한없는 씀씀이는 늘어나가서 장자 칭호를 듣던 고치가 겨우 견딘다는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거지 다 되었다는 소문까지 나게 되었다. 고비의 모아놓은 재물이 워낙 엄청나게 많아서 거지 되었다고 소문났을 때도 고치의 집안 식구 먹을 것은 넉넉히 끼쳐 있었다, 그러나 재물이 빠진 뒤로 남들이 사람을 넘보아서 친하게 상종하던 친구들까지 예사로 고치를 앉혀놓고 고비의 행사를 흉보았다. "저 사람의 집에 지금도 썩은 조기가 남아 있을걸. 전에 조석 반찬으로 매달고 치어다보던 조기가 어디 갔을라구. " 하고 한 사람이 고치를 가리키면서 웃으면 "이 사람, 자네 선장이 쥘부채를 한 쪽씩 펴서 부치다가 전주 자린꼽짝이를 만나서 부채는 펴서 쥐고 고개만 흔드는 법을 배웠다니 참말인가7" 하고 다른 사람이 웃으면서 고치에게 말을 붙이다가 고치가 "미친 사람들. " 하고 꼴을 내며 일어서면 "고만두게 . " "잘못했네 . "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함께 고치를 붙들어 앉히고 얼마 아니 있 다가는 또다시 슬금슬금 조롱하였다. 고치가 친구들에게 조롱받는 것이 속상할 뿐 아니라 저의 아비 생전에 부자인 체도 못하던 김개의 집에서 세간이 늘어서 부자로 기광을 부리는 것이 눈꼴이 사나워서 구사한다고 핑계하고 서을 와서 유경하고 집에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충주 부자 김개의 아들이 초사하려고 연줄을 얻어서 원형에게 청질하였더니 원형이 "김개라면 팔도에 이름난 부자인데 그 아들이 빈 청질로 초사하려는 것은 잘못 생각이지. " 하고 말하여 김개의 아들이 이 말을 듣고 누에고치 이백 석을 뇌물로 바치었다. 이때 원형이 겸이조판서로 있어 이조일을 총찰하던 때라 어느 날 각릉 참봉의 궐난 자리를 보충하게 되어 좌랑이 붓을 들고 원형 앞에 앉아서 원형의 부르는 이름을 받아쓰게 되었는데 너댓 사람의 이름을 적은 뒤에 좌랑이 “양주 현릉이올시다. " 하고 기다리다가 원형이 너무 오래 끄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고 쳐다본즉, 원형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원형이 전날 밤에 새로 들어온 약방 기생 하나를 불러다가 수청들이고 밤잠을 잘 자지 못한 까닭에 몸이 노곤하였던 것이다. "현릉이올시다. 누구로 내시렵니까?” 하고 좌랑이 조금 소리를 크게 한즉 원형이 여전히 졸면서 "현릉?“ 하고 능 이름을 한번 받아 옮기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녜.“ 하고 좌랑이 대답하고 다시 한동안 기다이다가 "누구입니까? " 하고 목소리를 크게 하여 물은즉 원형이가 "고치, 고치.” 하고 엉절거리듯이 말하였다. "고치에요?“ "응. " "어디 고치입니까?" "유신현.” 하고 원형은 고개를 끄드럭거리었다. 고치가 다년 유경하던 끝에 영문 모를 참봉 초사를 얻어 하고 원형에게 문후하러 왔다. 원형은 참봉쯤이 와서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라, 고치가 육칠 차 허행한 뒤에 원형의 집사람 한둘을 술잔 대접하고야 원형의 얼굴을 얻어보게 되었다. "성명이 고치라지?" "고향이 어디? 유신현이야? “ "김개라는 부자와 한고향이겠군? ”원형이 김개의 아들을 초사시킨다는 것이 잠결에 사람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뇌물로 온 고치를 불러서 사람 고치가 움 안에서 떡을 받게 된 터이라 원형이 발설은 아니하였으나 속으로 고치가 운수 뻗친 놈이다 생각하여 "꿈 잘 꾸었네. 가서 능 수호나 각근히 하게. " 하고 고치를 현릉으로 보내었다.

 

11

원형이 벼슬장사에 날도적까지 겸하여 불과 오륙 년간에 긁어모은 재물이 벌써 일국의 으뜸 될 만하였다. 서을 안에 있는 큰 집이 열여섯 채요, 팔도에 널려 있는 전답이 만여 두락이요, 드난하고 거행하는 종이 백여 명 외에 나가 살며 몸세 바치는 종이 사오백 명이요, 시골 각처에 나눠놓은 소가 칠팔백 필이요, 집안에 쟁여 있는 상목이 팔구천 동이요, 다락과 벽장에 능라주단과 금은보옥이 쌓여 있건마는 원형은 오히려도 부족하여 북경 사신 편에 중국비단을 사들이고 동래 왜관에서 왜국은을 사올렸다. 원형의 외람하고 방자한 것이 한이 없어 조석 식사를 궁중과 같이 수라라 이름하여 수랏간에 사나이 숙수를 두고 궁중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타락죽을 아이들까지 배불리 먹이고 임금이 거동할 때 소연을 대연으로 바꾸듯이 출입할 때 중문간까지 소여를 타고 나와서 사인교나 평교자를 바꾸어 타고 임금이 신하의 조의를 받듯이 식전에는 대청에 놓인 주홍교의에 나앉아서 하인들의 문안을 받되 요란한 긴 대답소리 속에 이백여 명이 한결같이 진퇴하게 하고 또 하인들도 궁중과 비슷하게 소임을 따라서 명칭을 달리하여 사환하는 계집하인을 시녀라 하고 일 맡은 계집하인을 감찰이라 하고, 사환하는 나내하인을 사약이라 하고, 일 맡은 사내하인을 차지라 하였다. 도차지는 고사하고 차지쯤만 되어도 외방에 나가서 수령까지 눈에 두지 않고 마음대로 기세를 부릴 수 있었다. 어느 때 용인 땅에 나눠 먹이던 소 삼십여 필에 이십오륙 필이 우역에 축이 나서 도차지가 차지 하나를 내보내게 되었는데, 그 차지아 용인서 어느 동네의 큰 집을 치우고 앉아서 소 먹이던 농군들을 불러다 놓고 소들을 물어놓으라고 땅방울같이 얼렀다. 그중의 똑똑한 농군 하나가 여러 사람의 앞으로 나서서 "우리들이 잘못 먹여서 죽은 것 같으면 물어놓아도 원통치 않지만 우역에 죽은 것은 물어놓을 수 없습니다. " 하고 말마디를 하다가 골이 난 차지에게 사재로 얻어맞아서 얼굴에까지 생채기가 나게 되었다. 조정암 집 산지기 한 사람이 원형의 소를 농우로 먹이다가 죽이고 불려와서 여러 농군들 틈에 섞여 있다가 차지의 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서서 "저도 양반댁 산지기를 거행합니다만 양반의 댁 일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잘못 먹여서 죽었더라도 용서하실 터인데 우역에 죽은 소를 물어놓으라실 수가 있습니까. " 하고 말하는 중에 차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려보고 있다가 "이 자식, 양반의 댁 묘리를 잘 아는구나. 경칠 자식 같으니. " 하고 데리고 온 사람들을 시켜서 그 산지기를 여러 차례 끄들렸다. "용인놈들이 천하 괴악한 놈들이다. 내가 부처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사흘 안으로 부정지속이라도 팔아서 물어놓아라, 없는 놈들은 족징을 시킬 테다. " 하고 호령하여 농군들을 돌려보내고 말한 대로 사흘 안에 이십오륙 필 소를 모두 물리는데 밭뙈기라도 있는 사람은 당자에게 물리고, 물 것이 없는 사람은 일가에게 물리고, 일가도 없는 사람은 동리에 물리었다. 이때 조정암 집에서 원형의 하인이 행착한다는 말을 듣고 징치하라고 용인현령에게 기별하였더니 현령이 그 차지를 잡아오지는 못하고 보자고 말하여 관가로 불러들이었다. "우역에 죽은 소를 물린 것이 참말인가? “ "그건 왜 물으시오. " "먹이던 농군이 잘못해서 죽인 것도 아니고 우역에 죽은 것을 물리는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아니한가? ” "이번 우역에 용인 일읍 소가 다 죽었나요? 다른 사람은 죽이지 않는데 죽인 것만도 잘못 먹인 죄이리까 물려 싸지요. " "그러나 그건 너무 심한걸. " “심하고 안 심하고 간에 우리 대감댁 일에 원님이 무슨 참견이오. " "원이란 것이 백성의 억울한 것을 보살필 직책이 있으니까 일부러 불러서 말하는 것이야.” "그 직책을 다른 데다 쓰시오. " "대감이 물리라고까지 분부하셨을 리는 만무한 일인즉 정녕코 중간 작폐이지. " 하고 원이 차지 대답에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니 차지는 냉소하면서 "여보시오, 원님은 우리 댁 대감이 조선 일국을 전제하시는 줄 모르시오. 공연히 그러지 마시오. 나는 오늘 할 터이니까 곧 나가겠소. 더 물으실 말씀 없지요. " 하고 그 차지가 돌아서 나가는데, 용인현령은 관속 보기 부끄러울만큼 무료하였다.

 

12

원형의 차지가 축난 소를 채워놓을 뿐 아니라 용인현령까지 망신 주고 의기양양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서빙고 나루에 당도하니 마침 나룻배가 사람과 마소를 실을 만큼 싣고 빨랫줄 두어 길이쯤 떠서 나간 때다. "사공아. " "사공아, 배를 돌려라. " "배를 도로 대지 못하느냐7" 사공이 노질하던 손을 쉬고 "한 배만 기다리시오. " 하고 맞소리를 치니 "사공놈 머리가 둘이냐? 잔소리 말고 배를 도루 대어라. " 하고 호기 부리는 것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행악 잘하 잘하는 양반의 행차같이 보이었다. 사공이 "제기 사공질도 못 해먹어. 비위가 아니꼬워 살 수가 있나. " 하고 중얼거리면서 뱃머리를 돌리었다. 이때 영남 양반 한 분이 고물편에 타고 있었는데, 이 양반이 노질하는 사공에게 말을 물었다. "저 호기 있는 양반이 성씨가 누구인 것을 사공이 짐작하는가? “ "양반이 무슨 양반이에요. 양반의 집 하인이랍니다. " "양반의 집 하인? ”하고 영남 양반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나타났다. "윤 무슨 군 집 하인이랍니다. 그 집 개새끼도 지금은 양반보다 무서우니 까요. " "응, 윤원형의 하인이로군. " "며칠 전에 시골 내려갔었는데 가까운 시골을 갔다 오는구먼요.“ 배가 사장에 닿으며 그 차지가 사공을 보고 "배를 돌리라면 빨리 돌릴 것이지, 기다려라 말아라 잔소리가 무어냐? ” 하고 개 꾸짖듯 꾸짖고 나서 배에 오르더니 고물 근처에 물기가 적은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을 비키고 와서 영남 양반에게 가까이 서 있었다. 배가 강물 한중간을 지나 건너온 때에 섰던 차지가 다리가 아프든지 영남 양반의 옆에 와서 앉으려고 "자리 좀 비키시오. " 하고 그 양반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귀가 먹었나, 저리 좀 비키오. " 하고 떠다밀려고 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니? “ "무어요? ” "내 옆에는 너의 앉을 자리가 없다. " 하고 호령기 있게 말하며 차지를 치어다보는데, 그 양반의 기상이 심상한 사람과 같지 아니하였다. 차지가 떠다밀지는 못하고 "별 사람도 다 보겠다. " 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배가 이편 나루터에 닿아 사람과 짐승이 모두 배에서 내린 뒤에 영남 양반이 데리고 오던 하인을 돌아보며 "저기 저 사람을 이리 좀 데려오너라. " 하고 그 차지를 가리켰다. 차지가 속으로 '우스운 꼴을 다 보는 게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 양반 앞에 와서 섰다. "네가 윤원형의 집 하인이라지? “ "그건 물어서 무어할 테요. " ”이놈, 남의 집 하인놈이 양반을 몰라보느냐? 너 같은 놈은 버릇을 좀 알려야 한다. " 하고 곧 옆에 섰는 하인을 보고 "이놈을 끄들러라. " 하고 호령하여 무식한 시골 하인이 차지의 뒤통수를 쳐서 갓 탕건망건을 한꺼번에 벗기고 상투를 잡고 회술레를 시켰다. 뱃사공과 나루터에 사는 사람들이 속으로 시원히 여기면서도 "물계 모르는 시골 양반이 범의 아가리에 손 집어넣네. " "저 양반이 뒤탈을 안 당할 리 만무하지. " 하고 서로 수군거리었다 영남 양반이 그 차지를 꿇어엎어 놓고 "나는 영남 사는 조판관이다. 너의 상전에게 하인 버릇 잘 가르치라고 내 말로 말해라. " 하고 이른 뒤에 나귀를 타고 하인에계 견마 들리고 문안으로 들어 갔다. 그 차지가 부서진 갓에 찢어진 망건을 쓰고 진흙 묻은 옷을 입고 원형의 앞에 와서 "서빙고 나루터에서 시골 양반에게 욕을 잔상히 보았소이다. 대감댁 하인이라고 소인을 욕보이는 것이 거심은 괘씸하오나 양반 명색을 어떻게 할 수 없사와서 욕을 당하고 왔소이다. " 하고 하소연하니 원형이 "내 집 차지를 욕보인 양반놈이 누구란 말이냐? “ 하고 화를 내다가 "영남 사는 조판관이라고 하옵디다. " 하고 차지의 말하는 것을 듣고는 "조식이로구나. 네가 잘못 걸렸다. 아무 소리 마라. 그자는 나도 꺼리는 터이다. " 하고 하인에게 분풀이해 줄 수 없는 것을 말하였다.

 

13

조식은 이름 높은 큰 선비라 나라에서 은일로 불러서 단성현감을 제수하였더니, 권세 있는 윤원형이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리는 때에 사환에 종사할 맘이 없어 조식은 곧 상소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조식의 사직 상소에 시폐까지 말하였는데 그중에 "자전은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 천재를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 갈래 인심을 어찌 다 수습하시렵니까? 나라일이 그릇되고 백성이 병들게 되는 것이 근원이 어디 있는 것을 밝히 살펴서 맹렬하게 고치지 아니하면 나라가 장차 어찌될지 모듭니다. 흰 복색과 슬픈 노래가 늘어 가는 것도 심상한 징조가 아닌 줄로 생각합니다. " 하고 위태위태한 말까지 베풀어 놓았었다. 이때 왕은 나이 십팔구 세라 신하들의 말을 들을 짐작이 있었다. 왕이 조식의 상소를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여 좌우에 입시하였던 신하들을 돌아보며 "과부란 말이 홀한 말이 아닌가? “ 하고 물으니 원형이 갚으로 내달아서 "홀한 말일 뿐입니까? 여항 부녀에게도 조금 대접하여 말하려면 과댁이라고 하지 과부라고 아니합니다. " 하고 대답을 아뢰었다. "그러면 조식의 말이 자전께 욕이로군? ” “그렇습지요. 조식을 치죄하여 마땅합니다. " 하고 원형이 말씀을 품할 때에 차지의 하소연하던 것을 돌이켜 생 각하였다. 원형과 같이 입시사였던 다른 대신이 임금께 괴하는 언사에 이와 같은 전례가 있는 것을 인증하고 "조식이 국가의 고위한 것을 극진히 말씀하려고 고인의 투를 본받은 것이외다.“ 하고 풀어 말씀을 아뢰었더니 원형이 얼굴에 불쾌한 빛을 나타내며 "고인의 말에른 잘못이 없으란 법이 있소? ” 하고 말다툼을 시작하려고 하여 "그것도 그렇지요. " 하고 그 대신은 다시 말을 못하였다. "조식의 말이 과하달 뿐이지 치죄할 일은 아니야. 작은 언사의 잘못을 죄로 돌리는 것은 국가의 선비 대접하는 법이 아니지? “ 하고 왕이 원형을 돌아보니 원형은 "하교가 지당합니다. " 하고 말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판관이 서울 와서 묵는 동안에 호반 남치근의 조카 남언경의 집에 주인하였는데, 주인과 손이 서로 대하여 앉았을 때에 화담주인 서경덕의 이야기가 많이 났었다. 조판관은 서처사와 친분이 있던 터이고 남언경은 서처사에게 수업한 사람인 까닭이었다. 이때 서처사는 죽은 지 벌써 육칠 년이라 조판관이 한번 그 무덤에나 다녀온다고 언경과 같이 송도를 가기로 언약 하였는데, 송도실을 떠날 때는 언경 외에 동행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당대 이인 이지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렴의 아우 정작이었다. 이지함은 조판관과 교분이 두터운 터이고 정작은 조판관의 선성을 듣고 흠앙하는 터이라 두 사람이 각각 조판관이 서을 온 것을 알고 선후하여 만나보러 왔다가 송도 간다는 말을 듣고 서처사와 상종이 있던 이지함은 두말없이 동행한다고 나서고 서처사를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정작이는 여러 선생의 뒤를 따라서 송도를 구경하고 온다고 좇아나서게 된 것이다,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연소한 정작이도 공부가 숙성하여 경사자집에 능통하므로 네 사람의 이야기는 대개 학문편 이야기가 많았으나 간간히 다른 이야기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지함은 죽으러 나가는 윤결을 작별한 뒤에 단양 땅에 가서 돌아다니었다고 도담귀담 상중하 삼선암 경치를 이야기하고, 정작이는 그 백씨가 부친 삼상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자기가 미리 죽을 것을 알고 사세가까지 지었다고 그 백씨가 예사 사람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였다.

 

14

조판관이 송도 다녀온 뒤의 일이다. 윤원형이 사람을 시켜서 한 번 찾아오면 좋을 뜻을 말하였더니 조판관이 "나같이 산야에서 생장한 사람은 권문세가에 투족 할 수 없소. " 하고 거절하여 그 사람을 돌려보내고 남언경을 대하여 "제가 찾아와도 내가 볼지말지한데 나더러 찾아오차니, 방자한 일일세.“ 하고 돌탄하는 중에 이지함이 찾아와서 조판관은 "형중이 오나. " 하고 반겨 맞아들이었다. "지금 문에 나가는 사람이 누구인가?” "권문의 심부름꾼이라네. " "권문이라니, 윤원형의? “ "그래, 나를 부르러 온 모양이야. " "창피 보았네그려. " "서울올 때 그만 욕은 볼 줄 알았네. 그러나 이번에 두 번 째 소조를 당하네 " "한번 쁜? ” "서빙고 나루에서 윤씨집 하인에게 봉변하였어. " "호랑이 같은 하인에게 시골 선비가 봉변하기 쉽지. " "그놈을 나루터에서 회술레를 시켜 보냈네. 무슨 뒷말이 있을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아무 말도 없어. " "뒷말은 어쨌든지, 그 하인놈이 회술레를 당한 것부터 자네에게 압기가 되었던 것일세.“ 이러한 수작을 하던 끝에 이지함이 "오늘 일기도 좋고 하니 무계동으로 소창이나 나가세. " 하고 말하여 조판관은 남언경과 같이 이지항을 따라 소창하러 나갔었다. 이때 부마도위에 여성위 송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지위가 괴상하여 한만히 사대부와 교유하지 못하나 사람이 원래 유아한 까닭에 밤으로는 항상 선비을 좋아하여 평소에 경앙하는 조판관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맘이 간절하지만, 자기가 선뜻 찾아가기도 어렵고 또 억지로 맞아오기도 어려워서 주저하고 있던 터에 마침 무계동 소창 나간 소문을 듣고 갑자기 연수를 차려가지고 장의문 밖에 나가서 송림 속에 포진하고 조판관의 돌아들어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소창 나간 일행은 소창할 대로 소창하느라고 돌 위의 이끼를 쓸고, 술도 마시며, 냇물에 발을 담그고 한담도 하여 여러 시각을 보내었다. 이 동안에 여성위는 연통꾼으로 길가에 세워놓았던 하인을 여러 번 송림 속으로 불러들이어서 번번이 "그저 오시지 않느냐? “ 하고 묻고 나중에는 다른 길로 돌아들어갔는가 의심하여 먼 빛으로 가보고 오라고 하인을 보내기까지 하였는데 그 하인이 "냇가에서 발들을 씻으십디다. " 하고 회보한 까닭에 다시 한동안 맘을 놓고 기다리었다. 해가 설핏하여진 때에 길에 세워둔 하인이 두 걸음을 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와서 "인제 들어오십니다. " 하고 보하였다. 여성위가 벗어놓고 풀어놓았던 의관을 다시 정제하며 데리고 나온 청지기를 향하여 "네가 한 걸음 먼저 나가서 내가 술 한잔을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말씀해라. " 하고 일러서 그 청지기가 문안을 향하고 오는 일행 앞에 나아가 공손히 문안을 드리고 "어느 나으리께서 조판관 나으리십니까? “ 하고 물은 뒤에 조판관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문안을 드리고 "여성위 대감께서 술 한잔 잡수시게 하려고 송림 속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십니다. 대감께서도 뒤에 곧 마중을 나오실 터입니다. " 하고 말하니 조판관이 "여성위 대감이? ” 하고 다지어 묻는 것같이 말하고 곧 뒤를 이어서 "어른을 길에서 장맞이하는 법이 없는걸. " 하고 말한 뒤에 소매를 떨치고 가는데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여성위가 송림 밖에 나왔을 때, 그 청지기가 한 말과 들은 말을 일일이 옮기고 나서 "그 양반 성미가 괴상스러운 모양이올시다. " 하고 말하니 여성위는 "내가 좀 덜 생각했다. " 하고 서운한 모양으로 조판관 일행의 뒷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원형이 조판관의 찾아오지 않는 것을 분하게 생각하던 차에 이 이야기를 듣고 "흉악하게도 고연 사람이다. " 하고 용인 갔던 차지를 보고 "네가 조판관같이도 고연 사람에게 걸려서 회술레만 당한 것도 다행이다. " 하고 웃으니 그 차지가 나와서 다른 차지를 보고 "우리 댁 대감의 권세로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 있데그려. " 하고 뒷공론같이 말하였다.

 

15

사람의 아첨하는 버릇은 아무리 성세에라도 아주 없지 않겠지마는 말세일수록 더 심한 법이라, 윤원형이 당국하였을 때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더니만큼 사람의 아첨하는 버릇이 심하였다 대개 말세란 말은 몇백년, 몇천 년을 두고 쓰는 것이니까 그때가 꼭 말세인 것은 아니겠지만, 아첨을 가지고 말세를 징험하여 틀림이 없다면 그배를 곧 말세라고 하여 좋을 만큼 아첨꾼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때에 상진 이란 정승이 있었는데 관후장자로 이름난 사람이라 간특한 아첨을 좋아하지 아니하건마는, 어느 때 여러 아첨꾼들이 대령하고 있는 자리에서 방귀를 한번 내놓았더니 그중의 약 빠른 자 하나가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고 "대감께서는 예사 사람과 다르셔서 방귀에 향취가 있습니다. " 하고 첨하는 것을 상정승이 "내가 궁노루인가? 방귀에 향내가 나게, 에 이 사람, 실없은 말마소. " 하고 나무라서 첨하던 자를 낯뜨겁게 한 일이 있었다. 상정승과 같이 실상 무력한 재상에게도 이와 같이 첨꾼들이 있었으니 일국의 권세를 손 속에 쥐락펴락하던 윤원형이 첨꾼들 속에 파묻히어 지낸 것은 두번 말할 것조차 없는 일이다. 원형의 문하에 출입하는 첨꾼들이, 원형이 조판관에 대하여 괘씸히 생각하는 것을 알고 조판관을 갖가지로 헐뜯어 말하였다. "조식이가 빈 이름은 있지마는 실재가 아닙니다. " "조식이가 사직을 잘 했지요. 단성 같은 작은 고을에 가서라도 불치 소리는 면치 못하였을 것이니까요. " "조식이는 당나귀 턱밑에 다는 방울인지 허리띠에 방울을 달랑 달랑 차고 다닌답니다. " "조식이를 이황이와 같이 치지마는 이황이는 사람이나 온자하지요.“ 여러 자들이 되숭대숭 지껄일 때 그중에 어기뚱한 자는 조판관을 추어 가면서 원형의 비위를 맞추었다. "조식이는 높은 선비올시다. 그렇지만 대감 아니시면 조식의 높은 것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한 광무가 아니면 엄자릉의 절조를 이루어 주지 못하고 엄자릉이 아니면 한 광무의 도량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격입니다. " 첨꾼들의 달콤한 말에 원형은 괘씸히 여기던 생각이 사라져서 조판관이 시골로 내려갈 때 "역마 태워 보내는 것이 국가의 은일 대접하는 법이올시다. " 하고 뒤에 품하기까지 하였었다. 이기가 죽던 해에 원형이 대배하여 우의정이 되며 상진이 좌의정이 되고 젊은 왕비의 조부 되는 심연원이 영의정이 되었었다. 아이 왕은 자고로 없는 법이라 어린 왕이 즉위하던 해에 심연원의 손녀를 왕비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원형이 처음에는 심연원을 꺼리는 맘이 없지 않았었으니 이것은 저의 손에 있는 권세를 나누어 갈까 의심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심정승은 조심 많은 사람이라서 대왕대비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뿐 아니라 원형의 말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심 많은 영의정과 심지가 너그러운 좌의정이 방자한 우의정에게 휘둘려 지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대왕대비가 불도를 좋아하여 궁중의 불사가 그치지 아니하매, 영의정 심연원과 좌의정 상진이 참고 참던 끝에 대신 체모로 말 한마디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느 날 삼정승이 빈청에 모여 앉았을 때 심정승이 먼저 입을 열어서 "근래 궁중의 불사가 너무 굉장하지 않습디까? ” 하고 원형을 돌아보는데 상정승이 "불사를 너무 굉장히는 마십시사고 두리 세 사람이 함께 자전에 품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디다. " 하고 역시 원형을 돌아본즉 원형이 심정승과 상정승을 반반씩 갈라서 바라보면서 "대감 두 분이나 함께 품해 보시지요. 소생은 참예 않겠소이다. " 하고 말한 뒤에 한동안 있다가 "어지간하거든 잠자코들 계시지요. " 하고 말하여 상정승은 "대감이 싫다는데 우리 둘이만은...“ 하고 끝없는 말로 대답하고 심정승은 쓴입맛만 다시었다. 그러나 두 정승이 다 원형의 말에 끌려서 잠자코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임꺽정 양반편 5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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