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임꺽정 의형제편 곽오주2
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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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역이 앞으로 나가고 그 뒤에 청석진이 생기고 청석진에 첨사가 있다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대흥산성 중군이 나와 앉았던 것은 모두 후세 일이지만, 탈미골에 금도군영이 설치되었던 것은 오가가 청석골 자리를 잡기 전 일이다. 탈미골에는 일시 도적이 둔치고 있어서 행인이 통히 내왕하지 못한 까닭에 군영이 설치되고 금도군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와 있게 된 것이었다. 탈미골 강가는 젊은 사람이라 도적질 나선 것이 오가보다 뒤진 까닭에 청석골 같은 거침새 없는 좋은 자리를 오가에게 먼저 빼앗기었을 뿐 아니라, 강가의 아비가 탈미골에 둔치고 있던 적당 한 사람으로 적당이 흩어질 때 갈려울로 들어와서 파묻혀 사는 중에 낳은 아들이라 그 늙은 아비의 지난 자취에 마음이 끌리어서 탈미골에서 도적질하게 되었었다. 강가가 사람이 표독하고 민첩하여 도적으로 나선 지 불과 수년에 십 년 구닥다리 청석골 오가와 이름이 아울러 높았으나, 군영이 턱밑에 있어서 일에 방해가 적지 아니한 까닭에 실상 벌잇속은 오가를 따르지 못하였다. 송도 군관이 댓가지 도적에게 봉변한 데 불집이 나서 송도 군관들은 오가를 잡으려고 하고 탈미골 군관들은 강가를 잡으려고 하는데, 정작 불난 자리 청석골에는 송도 군관들이 나오는 번수는 잦으나 건성으로 휘돌아다니다가 들어갈 뿐 이지만, 불똥이 튀어온 탈미골에는 군관들의 기찰이 전보다 버쩍 심하여 강가의 여간 벌이는 내통하여 주는 군사 입 씻기기에 다 들어갔다. 어느날 강가가 벌이하려고 큰 고개 근처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군사들이 개 싸다니듯 하여 군사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정작 벌이는 하지도 못하고 다 저녁때 빈손으로 갈려울 집에 돌아와서 그 늙은 아비를 보고 자리 옮길 것을 의논하니, 그 아비 말이 조선 공사 사흘이라고 며칠만 지나면 기찰이 눅어질 터이니 기다려보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며칠 지난 뒤 그 아비의 말이 뒤쪽으로 맞았다. 해주감영에서 수단 있는 군관이 감사의 분부를 물어가지고 새로 왔는데 감사의 분부가 서슬이 푸르렀다. 강가란 도적을 그예 잡아서 감영으로 올리되 만일 잡지 못하면 전부터 있는 군관이나 새로 온 군관이나 일체로 중책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군관들이 머리를 모으고 공론을 하는 말이 새어나와서 강가의 귀에 들어왔다. 강가가 밖에 나와서 소문을 듣고 집에 돌아오니 "군영 동정이 어떻더냐, 차차 눅어지는 모양이더냐? " 하고 그 아비가 물었다. "눅어지는 게 다 무어요? 잘못하면 우리 집은 고사하고 우리 동네가 쑥밭이 될 모양이오. " “어째서? ” "해주 감영에서 새루 군관이 왔는데 그예 날 잡아야지 잡지 못 하면 큰 탈을 당한다구 그전 있던 군관과 쑥덕공론하더라우. 아무 래두 얼른 자리를 옮기는 것이 우물고누 첫수일까 보우. " "그러면 집안 식구까지 다 옳겨야 할 모양이니 갑자기 어디루 가나? " "탐나는 자리자 가까이 한 군데 있는데 먼저 차지하구 있는 놈을 집어치워야 해요. " "청석골 말이냐? 청석골 오가의 집이 두석산 속에 있다지만 누가 길을 알아야지. " "두석산 동편 날가지 속이랍디다. 연전에 매부가 사냥 갔다 들어가 보구 와서 이야기 아니합디까. " "그랬던가. 내가 정신이 사나우니까 들었어두 잊었지. 이애 그 사람을 집어치울 생각 말구 같이 있자구 그 사람하구 의논해 보면 어떻겠니? “ "면분두 없이 지내던 터에 같이 있자고 의논하면 되겠소. 그러구 내가 가서 그 늙은 것의 수하 노릇을 한단 말이오? 집어치우는 것이 제일이지. " "집어치우기가 어디 용이한가. " "오가 하나만 같으면 우리 남매만 가두 넉넉하지만 댓가지 도적이라구 떠드는 놈이 혹시 오가하구 함께 있으면 단단히 차리는 것이 좋으니까 외사촌 형제까지 다 데리구 가볼까 생각하우. " "가자면 낮에 가야지 밤에 가면 길두 모르는데 헛고생한다. " "새벽에 사냥 가는 체하구 가지요. 산속에 들어선 뒤에야 대낮 이면 상관 있소. " "오가가 어디 나가지 말란 법이 있나? " "오가가 나갔으면 더 좋지요. 식구버텀 요정내구 기다리구 있다가 들어오는 걸 해내지요. " 강가 부자의 공론이 끝난 뒤에 강가는 곧 매부와 외사촌들을 찾아보러 나갔다.
이튿날 새벽에 사냥꾼 복색한 젊은 사람 넷이 갈려울서 두석산 편으로 내려오는데 활을 팔에 걸고 전동을 어깨에 엇메고 앞에 오는 사람은 강가의 매부요, 허리에 환도를 차고 손에 창을 가지고 중간에 오는 사람은 강가요, 뒤에 오는 두 아람은 강가의 외종들 이니 창들만 들었었다. 네 사람이 금교역말 못미쳐서 큰길을 건너소로로 내려오다가 두석산 뒤를 돌아 동편 날가지 속에 들어설 때해는 벌써 한낮이 다 되었었다. 이때 오가의 집에서는 오가의 마누라가 몸살로 앓아서 안방에 누워 있고 오가와 유복이는 안방에 있다가 마침 오주가 놀러와서 아랫방으로 내려가고 유복이의 안해는 부리는 계집아이를 데리 고 마루에서 술을 거르고 있었다. 한눈파는 버릇이 있는 계집아이가 술 거르는 시중을 들다가 흘저에 깜짝 놀라며 "아이구, 저기 사람 좀 보세요! "하고 마루에서 마주보이는 산 위를 가리켰다. 유복이의 안해가 손에 체를 쥔 채 계집아이 손가락 가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산 위에 자람이 섰는데 하나도 아니요 여럿이다. 체를 내던지다시피 놓고 일어서서 발에 신을 꿰며 말며 아랫방으로 쫓아 내려와서 사람들이 앞산 위에 나섰다고 말하였다. 오가는 "사람이야? “ 하고 먼저 일어나 나오고 유복이는 오주를 향하여 "잠깐 혼자 앉아 있거라. " 하고 그 뒤를 따라 나왔다. " 사람이 셋이지? " "셋 같지 않소. 넷인가 보우. " "손에 무엇들을 든 사람이 셋 아니야? " "사냥꾼들인가 보우. " "요즈막 송도 군관이 자주 나오더니 냄새를 맡구 밟아 들어온겔세. ” "수상하우. " "큰일났네. " "어떻게 할라우? " "도망질치지 별수 있나. " 오가와 유복이가 마루에 서서 서로 수작하며 바라보는 중에 산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섰다. "저것 보게, 이리 내려오네. 참말 넷일세. 넷뿐이로군. " "앞선 놈은 활 가졌소. " "이번 오는 것들을 쫓아버리든지 죽여버리든지 하구 서서히 도망질할 준비를 차렸으면 좋겠는데 우리 둘이 될 수 있을까? " "오주더러 집에 좀 있으라구 하구 우리 둘이 나갑시다. " "이 사람아, 어디를 나가잔 말인가. 활 가진 놈까지 있는데 나갔다간 봉패하네. 대문 닫구 집안에 들어앉아서 막아낼 도리를 생각 하세. “ "그럼 오주는 보냅시다. " "자네 맘대루 하게. " 유복이는 아랫방으로 내려가고 오가는 안방에 들어와 보니 앓아 누웠던 사람이 어느 틈에 일어나고 수양딸과 계집아이가 그 옆에 붙어 앉았는데 세 얼굴이 다같이 새파랗게 질리었었다. "미리 질겁들 내지 말구 정신 차려. 범에게 물려가두 정신을 차려야 사는 법이야. " 오가가 꾸지람하듯 큰소리로 말하니 "어떻게 하기로 작정했소. " 오가의 마누라가 입안 소리로 말을 물으며 섰는 오가를 치어다 보았다. "바깥은 내다볼 생각두 말구 방안에들 가만히 앉았어. " "가만히 앉았다가 죽으란 말이오? ” "방안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밖에 있는 사람은 사나? " "그러니 얼른 함께들 도망하는 게 좋지 않소. " "지금 도망하다가는 멀리가두 못하구 화살 맞아 꺼꾸러지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소? " "가만히 방안에들 앉았어, 잔소리 말구. " 오가가 벽장에서 칼을 꺼내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 유복이가 방 문을 열었다. "오주 갔나? " "아니 간다우. " "왜? " "이런 일이 있는 줄 알면 일부러라두 올 텐데 가는 게 다 무어냐구 머리를 내흔들구 내가 저더러 가란다구 곧 시비를 할라구 하는 구려. “ "오주까지 있으면 되었네. 네 놈쯤은 당할 수 있겠지. " "당해 내기루 말하면 나 혼자두 염려 없소. " "만사가 튼튼한 것이 좋지 않은가. " 오가는 다시 안식구들을 돌아보며 "바깥은 내다볼 생각두 말구 가만히들 있어. " 하고 말을 이르고 유복이와 같이 나왔다. 오가는 대문을 닫아 걸러 문간으로 나가고 유복이는 아랫방으로 내려와서 오주와 같이 봉당에 걸터앉았다. "쫓아나가 보지 않구 대문 닫구 들어앉았을 모양이오? " 오주가 두덜거리는 것을 "늙은이 하는 대루 두구 보자. " 유복이가 타이른 뒤에 "너는 맨주먹으루 있을 테냐? 짜른 환도 하나를 내다 줄께 손에 들라느냐? " 하고 유복이가 묻고 "나는 맨주먹두 좋소. 잘 쓰지두 못하는 환도 손에 들면 거추장만스럽소. 고만두우. " 하고 오주가 대답할 때 오가가 와서 말끝만 듣고 "무얼 고만두란 말인가? " 하고 역시 걸터앉으며 손에 들었던 칼을 옆에 놓았다. "형님이 환도 하나 주랴구 묻기에 고만두랬소. " "왜? " "이것이 있으니까. " 오주가 주먹을 불끈 쥐어서 오가의 눈앞에 내밀었다. "철퇴 같은 주먹으루 강정 같은 대가리를 아싹아싹 부시려나? 그렇지만 맨주먹으루 연장을 당하겠나. 무엇이든지 손에 들어야 하고 오가가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더니 재 치는 넉가래와 나무 패는 도끼와 다 타 모지라진 부지깽이를 주워들고 와서 오주의 발 앞에 벌여놓으며 "환도는 고만두더라두 이 중에서 하나 골라잡아 보게나. " 하고 웃으니 "예 여보. " 하고 오주는 아랫입술을 빼물고 "장난할 경황이 있으니 무던하우. " 하고 유복이는 빙글거리었다. 기왓장 깨어지는 소리가 나며 안채 지붕에 화살 한 개가 떨어졌다. "이크 선진이 왔군. " 오가가 봉당에 놓인 칼을 집어들었다. 한동안 지난 뒤에 담 밖에서 사람의 발짝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대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었다. 오가가 유복이와 오주를 돌아보며 "내가 먼저 말을 좀 물어보구 올 것이니 잠깐들 기다리게." 하고 곧 대문간으로 나왔다. 환도 차고 창 든 사람 하나와 창만 든 사람 하나는 바로 대문 앞에 있고, 활 든 사람 하나와 창 든 사람 하나는 망보는 것같이 멀찍이 떨어져 있다. 오가가 문틈으로 내다 보며 "남의 집에 와서 문을 박차는 놈들이 누구냐? " 하고 소리지르니 환도 찬 사람이 "네가 오가냐? 잔말 말구 대문 열어라. " 하고 맞소리 질렀다. "너눔들이 대체 어디서 왔느냐? " "어디서 온 걸 알아야 문을 열 테냐? 탈미골서 왔다. " "탈미골 ? " "내가 탈미골 강서방이다. 너두 내 선성은 들어 뫼셨겠지. " 오가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이런 좋은 자리를 너 같은 놈 주어 두는 것이 아까워서 자리를 차지하러왔다. 네가 고분고분히 집을 내놓구 다른 데루 간다면 너까지두 죽이지 않겠다만. " 하고 창자루 끝으로 대문짝을 꽝 치고 "우리가 이 대문을 깨치구 들어가게 되는 때는 네 집의 개새끼 하나두 살려두지 않을 테니 알아 해라! " 강가가 통통이 호령하였다. "조런 발칙한 놈이 있나! 요놈아,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 나는 놈이 무엇이 어째! 조놈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 " 오가는 입가에 게밥을 지으면서 하늘이 얕다고 뛰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유복이와 오주에게 분통 터지는 사연뜰 대강 말하였다. 유복이와 오주가 대문 열고 쫓아나가자고 말들 하는 것을 오가는 "아니." 하고 머리를 가로 흔든 뒤 먼저 유복이를 향하여 "활 가진 놈만 조처하면 뒤는 걱정이 없으니 자네가 담에 사다 리를 기대 놓구 올라서서 표창으루 활 가진 놈을 해내겠나? " 하고 물으니 "활 가진 놈이 가까이만 오면 어려을 것 없지요." 유복이는 선뜻 대답하고 다음에 오주를 향하여 "자네는 마당 한중간에 서서 두루두루 살펴보다가 앞뒷담 넘어 오는 놈이 있거든 주먹으로 때려누이겠나? "하고 물으니 "당신은 어떻게 할라우? " 오주는 오가더러 되물었다. "나는 칼을 들구 대문 뒤에 가서 붙어서 있다가 문을 깨뜨리구 들어오는 놈을 쳐죽일 작정일세. " 오가의 말에 "아무리나 합시다. " 오주가 대답하여 약속이 정하여졌다.
오가의 집 대문간 바른편에는 아랫방이 있고 왼편에는 광이 있다. 유복이는 사다리 놓여 있는 곳에서 가까운 광 옆담에 사다리를 기대 놓고 올라서서 담 밖을 내다보고, 오주는 유복이의 표창질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담 넘어오는 놈은 살필 생각 아니하고 유복이를 바라보고 있고, 오가는 대문 뒤에 서서 대문짝에 발길질하는 놈들을 꾸짖고 있을 때 강가가 아랫방 옆담을 넘어들어왔다. 마당에 섰는 오주가 가로막을 사이도 없이 강가는 칼을 들고 쏜살같이 대문간으로 들어갔다. 오가의 칼과 강가의 칼이 대번 서로 어우러졌다. 그러나 대문간이 자리가 좁아서 두 칼이 다 잘 놀지 못하였다. 오가는 한편 벽에 등을 대고 슬금슬금 옆걸음을 쳐서 마당 편으로 나오는데, 강가는 이리 띄고 저리 뛰고 하며 오가와 뒤쪽으로 대문 뒤로 더 들어갔다. 강가가 대문 뒤에까지 들어가서는 옆으로 서서 한 손으로 칼을 내두르며 다른 손으로 대문 빗장을 더듬었다. 오가가 이것을 보고야 강가가 훼방을 받으면서 빗장을 빼고 고리까지 벗기려고 할 때 오가의 칼에 바른편 허벅지를 찔리었다. 강가가 독살이 나서 돌쳐서며 곧 오가의 아랫배를 향하고 칼을 내질렀다. 그 기세가 매서워서 오가는 일변 칼로 막으며 일변 뒤로 뛰어나가니 강가가 이를 악물고 쫓아나오며 연거푸 내질렀다. 오가가 강가의 칼을 피하느라고 쩔쩔매면서 마당까지 쫓겨나와서 몸을 옆으로 비키어 광을 뒤에 지고 칼을 휘휘 둘렀다. 강가의 칼이 점점 오가를 핍박하여 오가의 몸에 진땀이 나게 되었을 때 두 도적이 싸우는 것을 보고 섰던 오주가 아랫방 앞으로 달려가서 도끼를 들고 슬금슬금 강가의 뒤로 걸어왔다. 도끼잡이가 뒤에 오는 것을 강가가 짐작하고 번개같이 몸을 빼어 다시 대문간으로 뛰어가서 고리를 벗기는데 고리가 뻑뻑하든지 얼른 벗겨지지 아니하여 배목 박힌 문짝을 발길로 내지르며 벗기어서 대문을 열자마자, 이놈 소리가 나며 무거운 도끼가 뒤통수에 떨어졌다. 대가리 하나가 두 쪽에 빠개지니 강가가 죽기 싫은들 할 수 있으랴. 한번 고꾸라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인제 대문이 열리었으니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옴직하건만 의외에 대문 안에 발 들여 놓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 동안에 오가도 오고 유복이도 왔다. ”세 놈은 어데루 갔을까? “ 오가가 먼저 입을 열고 ”“괴수가 죽었으니까 도망들 한 게요. ” 유복이가 오가의 뒤를 잇고 “나가 봅시다. ” 오주가 또 유복이의 뒤를 이어서 차례로 한 마디씩 말한 뒤에 오주 다음에 오가, 오가 다음에 유복이로 세 사람이 줄로 서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아랫방 모퉁이 담 옆에 세 사람이 몰려가 있는데 한 사람은 눈을 부둥키고 주저앉았고 두 사람은 각각 손목들을 주무르며 서 있었다. 여기 세 사람이 대문 밖에 나서는 것을 보고 섰던 사람들은 앞서 달아나고 앉았던 사람은 뒤에 달아났다. 뒤의 한 사람은 얼마 못 가서 오가의 칼에 꺼구러지고 앞의 두 사람은 유복이와 오주에게 쫓겼다. 유복이가 얼마 쫓아가다가 “너희 두 놈은 살아가거라. ” 하고 걸음을 멈추고 오주는 “저 두 놈도 살려보내지 맙시다. ” 하고 더 쫓아가려고 하는 것을 유복이가 붙들고“그까짓놈들 내빼게 내버려두자. ” 하고 곧 오주와 같이 돌아섰다. 유복이가 표창 세 개를 던져서 활 가진 사람은 한편 눈을 멀리고 창 가진 사람들은 손목만 상해 놓았는데, 눈먼 사람은 칼 맞아 꺼꾸러졌고 손목 상한 사람들은 살아 내뺀 것이었다. 유복이가 오주와 오가에게 이야기하며 들어와서 셋이 벗어붙이고 일을 하여 두 송장을 한 구덩이에 끌어 묻고 대문간의 피 자취까지 없이 한 뒤에 오가는 안식구들을 데리고 작은 잔치 준비를 차리었다. 이날 저녁때부터 오가의 집 안방에 술판이 벌어졌는데 벽에는 환도 한 자루와 활 한 채가 걸려 있고 마루 구석에는 창세 자루가서 있었다.
강가 처남 매부 두 사람은 이 세상을 영결하고 강가의 외사촌 두 사람은 오금아 살려라 하는 격으로 장달음을 쳐서 오가의 집에서 멀리 나왔으나, 길을 몰라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두석산 속에서 해를 거의 다 보내고 무진 애를 쓴 끝에 간신히 산속에서 나오게 되었다. 날은 어둡고 길은 험하고 배는 고프니 업친데 덥친 셈이라 죽을 고생 다하고 한밤중이 지난 뒤에 갈여울로 돌아왔다. "형님, 바루 집으루 갑시다. " "그럼 집으루 가지 어디루 가. " "고모부 아저씨 집에 들어가지 말잔 말이오. " "네나 내나 이야기할 기운이나 있어야지 들러 가지. " "그렇기에 말이오. " "지금쯤 다 자겠지? " 형제가 다같이 드문드문 풀기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동네 안으로 들어오는데 동네 개가 컹컹 짓더니 들러 가지 말자고 공론하던 강가의 집 삽작 밖에 여편네들이 나와 섰다. 하나는 강가의 안해요, 또 하나는 강가의 누이다. 그 누이가 먼저 "누구야? “ 하고 앞으로 내닫고 강가의 안해가 "어째 형제분만 오시오? " 하고 뒤쫓아 나왔다. 형제가 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강가의 누이가 "우선 집으로 들어가지. " 하고 말하여 형제는 잠깐 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두 여편네와 같이 들어왔다. 강가의 늙은 아비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아들과 사위는 돌아오지 않고 돌아온 처조카 형제는 죽을 상이 다 된 것을 보고 말도 묻지 않고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우리를 어디 좀 눕게 해주우. " 그 형이 내종사촌 누이에게 청하여 형제가 같이 사랑방으로 나오는데 강가의 누이와 강가의 안해가 이야기나 들을까 하고 뒤를 따라나왔다. 사랑방은 곧 머슴방이라 머슴아이가 아랫목에 누워 자는 것을 강가의 누이가 끄들어 일으키고 외사촌 형제를 눕게 하였다. 형제가 각기 냉수를 달래서 한 그릇씩 들이켜고 자리에 쓰러지려고 할 때 늙은 강가가 쫓아나왔다. 방에 들버와서 펄썩 주저앉으며 곧 딸과 며느리를 향하여 나가라고 손짓하니 딸이 아비의 의사를 알려고 "왜 그러세요? " 하고 물었다. "너희들은 안방에 가 있거라. " 늙은 강가가 소리를 꽥 질러서 딸과 며느리가 방에서 나간 뒤에 비로소 처조카 형제를 바라보며 말을 물었다. "대관절 죽었니 살았니? " "죽었기에 오지 아니했지. " 대답을 기다리고 처조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 좀 해라. 남매가 다 죽었니? " 하고 물으니 형제가 다같이 말은 없이 고개들을 끄덕이었다. 늙은 강가는 한동안 넋 잃은 사람같이 앉아 있다가 방고래가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일어서서 비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동트기 전에 강가의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불이야, 불이야! "바고 소리를 지르며 불 잡으러 모여들었을 때, 불길은 벌써 안팎채를 휩싸고 용솟음쳐서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까닭에 걸낫 같은 연장은 쓰지 못하고 멀리서 물들만 끼어얹었다. 물길이 가깝고 또 바람이 잔 덕으로 불이 이웃에 번지지는 못하였으나 강가의 집은 안팎채가 통히 다 타고 말았다. 강가의 집에서 살아나온 사 람은 머슴아이 하나뿐이라 동네 사람들이 불 잡은 뒤에 그 아이를 둘러싸고 이 사람 한마디 저 사람 한마디 말들을 물어서 강가가 매부와 외사촌 형제를 데리고 새벽 사냥 나간 이야기와 외사촌 형제만 밤중에 돌아왔는데 강가의 아비가 아들과 사위는 죽었느냐고 다져 묻고 낙심하던 이야기를 들었고, 또 안채에 불이 붙어서 한 참 활활 탈 때 늙은 강가가 딸과 며느리를 불 속에 떠다박지르고 미친 사람같이 뛰어다닌 것과 강가의 외사촌 형제가 죽은 사람같이 곤히 자다가 그대로 타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냥 갔다가 어째서 죽었을까? ”"큰 짐생에게 물려죽은 게지. " "급살을 맞았는지 누가 아나. " "강첨지가 실성해서 집에 불을 지른 게군. " "타죽을 작정으로 불을 놓은 게지. " "아무리 눈이 뒤집혔기루 어떻게 딸이나 며느리를 불 속에 떠다박지를까? " 동네 사람들이 지껄이며 흩어져가기 시작할 때 강가의 외가식구들이 뒤늦게 알고 근두박질하여 쫓아왔다. 강가의 외가는 성이 변가니 갈려울의 대성이라 일가는 많으나 강가 외삼촌대까지 사오대 독자로 내려와서 강근
지친은 없고 죽은 사람 형데 중에 형만은 아들 둘이 있으나 아직 다 어리고, 아우는 통히 소생이 없는 까닭에 집에 남아 있는 형제의 식구가 두 여편네와 두 어린애 뿐이었다. 두 여편네는 사내들이 예사 사냥질하 러 간 줄로만 여기고 해 질 무렵부터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해가 져 땅거미가 되고 땅거미가 지나 밤이 된 때 골집 사나 운 큰동서가 "나는 잘라네. 자네도 고만 기다리고 가서 자게. " 하고 볼멘 소리로 말하는데 작은동서가 새촘하고 있으니 다시 " 무슨 놈의 사냥을 밤중까지 하겠나. 벌써들 왔지. 노루 마리나 잡아가지고 아랫말 와서 술들 먹는 게지. " 하고 얼굴을 휘번덕거리며 말하였다. "그럴까요? 그러기나 하면 좋겠어요. " "좋기는 무에 좋은가. 사람이 기다리느라고 눈시 빠지는 건 생 각 않고 배가 맹꽁이같이 되도록 처먹고 있는 꼴을 생각해 보게. " "우리는 어디 술이나 먹어요? " "아랫말 아재에게 쥐어지내는 위인들이니까 술 먹는 사람이나 술 안 먹는 사람이나 다같이 붙잡힌 게지. " "다른 일이나 없을까요? " "무슨 다른 일? 호랑이에게 깨물려들 갔을까. " "아랫말 좀 안가 보실라오? " "턱찌끼 얻어먹으러. “ "참말 왔나 가보잔 말이지요. " "자네나 가보고 오게. " "캄캄한데 나 혼자 어떻게 가요. " "그럼, 이 밤중에 애들을 치켜업고 가잔 말인가? 나는 못 가겠네. ”이때 젖먹이 어린아이가 울었다. "자네도 고만두게. 있다들 오거든 한바탕 해낼 생각이나 하게. 사람이 너무 고와도 못써." 큰 동서는 작은 동서를 가르치듯이 말하고 곧 우는 아이를 끼고 눕고 작은동서는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다가 말없이 일어나서 딴채에 있는 자기 방으로 내려왔다. 전날 밤에 사내가 자기를 보고 "내일 새벽에는 우리 형제가 아랫말 형님 남매하구 같이 사냥을 나갈 텐데. " 하고 말을 하다가 갑자기 "고만두어라. "하고 말을 끊었다. 자기가 "무어요? " 하고 물은즉 "애를 좀 태워주려다가 불쌍해서 고만두어. " 하고 실없은 장난으로 자기의 말을 막아서 다시 채쳐 묻지 못하고 고만둔 일이 있었다. 사내가 '나갈 텐데' 하고 그 끝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던가 채쳐 묻지 못한 것이 못내 분하였다. 약한 여편네가 끝없이 나오는 염려스러운 생각을 억제하지 못하고 골치를 앓기 시작하여 옷 입은 채 자리에 쓰러져서 앓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닌 또양으로 밤을 지낸 끝에 "여보게, 신뱃골댁. " 큰 동서의 부르는 소리를 귓결에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보니 큰동서가 마당에 나와 서 있었다. "아랫말에 불이 났네, 내가 가보고 올테니 자네 안방에 좀 을라와 있게. " 전 같으면 선뜻 녜 하고 대답할 것인데 어째 혼자 남아 있기가 마음에 싫어서 작은 동서는 "형님, 나도 가볼 테요. " 하고 마당으로 쫓아나왔다. "어린것들만 내버려두고 같이 가잔 말인가? " "형님, 집에기시오. " "자네 같은 약한 사람은 불 잡는 데 가루거치기만 해. 잔말 말고 집에 있게. " "싫어요. " 큰 동서가 골이 나서 방으로 쭈르르 들어갔다. 작은동서는 아랫말에도 내려가지 않고 또 아랫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큰 동서가 듣거라 하고 꾸짖는 뒷말을 귀 밖으로 들으면서 마당에서 서성거리었다. 멀리 보이던 환한 불빛이 없어진 뒤 일가집 젊은 사람 하나가 숨이 턱에 닿게 뛰어와서 남편 형제가 고모부 집에서 자다가 불에 타죽은 사연을 말하여 주었다. 큰동서가 이 말을 듣고 "애구, 그게 무슨 소리야? " "애구, 이걸 어떻게 하나! " 하고 곧 아랫말로 뛰어내려오는데 작은 동서는 정신없이 그 뒤를 따라서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쫓아왔다. 큰동서는 여러 사람들 있는데 와서 펄썩 땅에 주저앉아서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애구지구. " 하고 통곡하는데 작은 동서는 쓰러지는 몸을 가누려고 애를 쓰다가 쓰러지며 곧 기함하여 화재 뒤치다꺼리를 지휘하던 동네 소임이 남아 있던 여편네들을 시켜서 기함한 사람을 구호하게 하였다. 추운 새벽 찬 땅에 쓰러진 기질 약한 여편네가 잘 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러 여편네들이 의논하고 가까운 집으로 들어다가 따뜻한 방에 눕힌 뒤에 손발도 주무르고 백비탕도 입에 흘려넣었다. "사람이 워낙 약하게 생겼어. " "살이 이렇게 희고 보드라우니 약하지 않겠소. " "조개 속에 게같이 생겼다는 것이 이런 사람 말인 거야. " "사내들은 약한 여편네를 좋아한다네. " "사내 나름이겠지. 설마 세상 사내가 다 약한 여편네만 좋아할라구. " "아래윗말 사내 코빼기치구는 신뱃골댁을 칭찬 않는 사람이 없든걸. " "칭찬을 하면 여간들 하나. 입에 침이 없이 하지. " "한 사내 사랑이 제일이지, 열 사내 칭찬이 소용 있소. " "남의 일이라도 가엾고 불쌍하오. " "혼자 되어서 불쌍하단 말이지? 얼마나 혼자 살라구 기껏해야 삼 년이지. " "이 댁네 나이 올에 스물 몇인가요? “ "스물댓 되었을 게요. " "스물댓이 무어요? 스물 일곱인가 여덟이오. " "그렇게 나이를 먹었나? ” "그런데 이때까지 애 하나를 못 났어? “ "애를 두어 번 지웠지. 우선 작년에도 애 지운 끝에 죽네 사네하지 않았어. " "참 그랬든가? ” "여편네가 사내를 너무 밝히면 애를 잘 못 낳는답디다. " "별소리가 다 많소. " "이 집 주인도 남부럽지 않게 내외 의초가 좋지만 돌 지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생기니 어떻게 해. " "약한 사람은 애도 잘 못 나요. " "팔자에 탠 자식이면 약하다고 못 낳겠소. " 종작없는 여편네들이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동안에 기함하였던 사람이 막힌 기운이 트이어서 감았던 눈을 뜨게 되고 다시 한동안 지난 뒤에는 완구히 생기가 돌아서 일어 앉게까지 되었다. 일어 앉으며 곧 다시 불탄 자리로 나가려고 하는 것을 능청스러운 여편네 하나가 "거기는 다시 가서 무엇할라우? 시체들은 벌써 다 찾아내서 옮겨갔는데 바로 집으로나 가보오. " 하고 거짓말로 속이어서 얼마 뒤에 윗말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인정 있는 여편네 두어 사람이 붙들어주며 데리고 왔다. 집에 와서 보니 그 동안에 큰동서는 먼저 와서 동네 사내들 있는 앞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넋두리하며 울고 있었다. 작은동서가 안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더니 큰동서는 "아이구 이 사람아, 그 망한 놈의 늙은이가 일부러 불을 놓았다네. 아이구, 그놈의 늙은이가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나. 죽을라면 제나 죽지 왜 남을 태죽이나. 아이구 이 사람, 우리가 인제 어떻게 사나. 저까진 어린것들 있어야 귀찮기나 하지. 아이구 아이구.“ 하고 두 다리를 문지르며 통곡하는데 작은동서는 남이 괴상히 보도록 눈물 한 방을 아니 내고 입술만 깨물고 서 있었다. 그 얼굴빛이 곧 다시 기색될 사람 같이 보이어서 같이 온 여편네들이 "아랫방에 가서 좀 눕시다. " 하고 붙들고 안방 문밖을 나서자 "아이. “ 하고 상을 찡그리며 곧 입으로 피를 토하는데 봉당 바닥이 벌겋게 되도록 토하였다. 작은 변가의 안해가 몸져 누워 있는 동안에 동네 공의로 여러 송장을 한날 파묻는데 변가 형제의 장사만은 일가의 덕으로 그중에 가장 장사같이 지내었다. 장삿날 두 동서의 친정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신뱃골 작은동서의 친정에서는 그 어머니 되는 이가 아들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그의 동기는 손 아래 사내동생 하나뿐이라 모자 온 것이 곧 전식구가 온 것이었다. 장삿날까지 온사흘 동안 곡기를 끊었던 작은 변가의 안해가 그 어머니의 강권으로 미음을 몇 모금씩 마시기 시작하여 기운을 조금조금 차리게 되었으나, 그 뒤로는 자리에 떨어지는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그 어머니가 딸이 불쌍해서 얼른 가지 못하고 삼사 일 묵는 동안에 벌써 그 동서의 토심과 구박이 조금씩 보이었다. 그 어머니는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집으로 같이 가자고 말하나 그 딸은 남편의 상청을 버리고 가기가 싫어서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 어머니가 떠나기 작정한 날 새벽에 모녀가 다 일찍 잠이 깨서 어머니는 같이 가자고 다시 타이르고 딸은 안 간다고 여전히 고집 세우는 중에 동네가 홀저에 요란스러워졌다.
이날 첫새벽에 탈미골 군영에 있는 금도 군사들이 갈려울을 들이쳤다. 강가의 집이 폭망하여 식구 하나 남지 않은 것을 알고도 강가의 결찌와 동류를 잡는다고 집뒤짐을 시작하여 산수털벙거지가 아래윗말에 흩어졌다. 아우성 소리, 호령소리, 아이가 놀라서 우는 소리, 개가 자지러져 가며 짖는 소리,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 도깨그릇이 깨어지는 소리, 모든 소란스러운 소리가 새벽 동네에 가득하였다, 변가 집 아랫방에 누워 이야기하던 모녀는 다같이 벌떡 일어 앉았다. "어머니, 난이가 났는가 보오. " "무슨 난리가 소문도 없이 날라구. " "여름에 전라도에 난리가 났다더니 그 난린 게지. " "그 난리는 벌써 평정되었단다. " "그럼, 이게 무슨 야단일까? “ "글쎄 모르겠다. 내가 잠깐 밖에 나가 보고 오마. "하고 그 어머니가 일어서서 치마를 몸에 두르니 "나가지 마오, 어머니. " 하고 딸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삽작 밖에까지만 나가 보보 올 테니 이거 놓아라. "하고 어머니가 치맛자락을 흔들 때 마침 안방문을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었다. "동서가 밖에 나오는가 보오. 고만두고 앉으시오. " 하고 딸이 말하여 어머니는 도로 앉았다. 바삐 끄는 신발 소리가 삽작문 편으로 나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아이구머니! " 큰동서의 놀라는 소리가 들리고 뒤미처 "이년, 게 섰거라! " 어떤 사내의 호령 소리가 들리었다. "아무 죄없는 과부들만 사는 집이올시다. " "이년, 도둑놈의 기집년이 죄가 없어! " "죽은 사내가 도둑놈이라도 과부 된 기집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더구나 사내가 살아서 도둑질한 일이 없습니다. " "도둑놈 강가의 사촌인 줄 다 알았다. 이년, 잔말 마라. " 큰동서가 징징 우는 소리로 무어라고 하소연하더니 부서너 차례 뺨 치는 소리가 나고서는 하소연이 들어가고
우는 소리만 남아 들리 었다. "어머니! " 하고 딸이 발발 떨면서 어머니의 손을 쥐니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나는 구녁이 있단다. 너무 겁내지 마라. " 하고 딸의 손을 맞쥐었다. 두서너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양이더니 그중에 하나가 저벅저벅 아랫방을 향하고 와러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이때까지 곤히 잠든 아이까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너희가 다 누구냐! 이리들 나오너라. " 산수털벙거지의 호령이 떨어지자, 어머니가 선뜻 일어서서 딸을 가리키며 "이 딸자식이 지금 앓아 죽게 되어서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 하고 사정하여 보았다.
이때 날이 이미 환하게 밝아서 방안에 있는 얼굴들이 방 밖에서도 보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았던 딸이 그 어머니 말끝에 고개를 들고 밖을 바라보는데 해쓱한 얼굴이 소복에 얼빠져 보이기도 하고 더 돋보이기도 하였다. 겁을 먹고 떠는 양이 흡사 배꽃 한 가지가 몹쓸 비바람에 부대껴 떠는 것과 같아서 누가 보든지 애처로운 생각이 날 만하였다. 그 군사가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 어머니를 향하여 말을 묻기 시작하였다. "네 딸이 작은 변가의 계집이냐? “ "그렇습니다. " "저 아이놈은 누구냐? ” "자식 이올시다. " "너의 모자가 다 이 집에서 같이 사느냐? “ "아니올시다. 딸이 죽는다고 해서 병구원 왔습니다. " "너의 집은 어디냐? ” "신뱃골이올시다. " "남편의 성이 무어냐? “ "조가올시다. " 마당에 섰던 군사 하나가 동무 군사의 지체하는 덧을 보고 "이 사람 무어하나? 얼른 잡아 내세우게. " 하고 재촉하니 아랫방 앞에 섰던 군사가 "지금 앓아 죽을 지경이라네. " 하고 마당편을 돌아다보았다. "앙탈일세. 어서 끌어내게. " "얼굴에 병색이 좀 있어. " "이 사람 인정 쓸라나. 어디 좀 보세. " 하고 그 군사가 큰 변가의 계집을 묶어 앉히고 우르르 쫓아와서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아, 이거 웬일이오?” 하고 신뱃골 마누라를 보고 물었다.
그 금도 군사는 해주 감영에서 도적 잘 잡기로 이름이 나서 군관이 새로 올 때 데리고 온 사람인데 신뱃골 마누라의 친정 외사촌동생의 남편이다. 그 안해의 안부를 전하여 주려고 전위하여 신뱃골을 찾아나와 본 일이 있는 까닭에 마누라를 알아보고 먼저 알은 체한 것이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요! " 마누라는 지옥에서 부처나 만난 듯이 반겨하였다. 마누라가 딸을 돌아다보며 "저 어른이 네게 아저씨뻘 되는 어른이시다. 해주 아주머니 말을 너 전에 들었지?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시다. " 하고 가르쳐 주어서 딸이 일어서려는 듯이 몸을 움직이니 그 어머니가 "네가 어떻게 일어서려고 그러니. 이 담에나 아저씨께 뵈입지. " 하고 딸에게 말하고 곧 그 군사를 향하여 자기 딸이 병으로 운신을 잘 못한다고 하소연하였다. "병 있는 사람이 왜 일어 앉았소? " "지금 억지로 끄들어 일으켰어요." "무슨 병인가요? “ "피를 자꾸 토한답니다. " "그거 안되었군. 그래서 얼굴이 저렇게 핼쓱하구먼요. " 하고 그 군사는 고개를 길게 내밀고 젊은 과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자네하구 어떻게 얼큼하게 되는 모양일세그려. " 하고 동무 군사가 어깨를 치니 그 군사가 돌아다보며 "우리 마누라의 조카 뻘이 되는가베." 하고 말하였다. "도둑놈의 외사촌 안해가 무슨 큰 죄 있나. 인정 쓸라거든 쓰구가. ”"대관절 병이 있어 운신을 못한다니 할 수 있나. " 그 군사는 고개를 돌이켜서 마누라를 보고 "앓는 사람은 이불 씌워서 눕혀놓구 방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기시오.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들리면 탈이오. " 하고 방문까지 닫아주었다.
군사들이 안방에 올라가서 세간 나부랑이를 들뒤지고 나와서 묶어 앉힌 큰 변가의 과부를 끌고 가는 동안아랫방에서는 기침 한번 아니하고 쥐죽은듯이 있었다. 군사들이 나간 것을 안 뒤에 마누라가 안방에 가서 우는 아이들을 아랫방으로 날라 내려다가 큰 아이는 말로 달래고 작은아이는 안아서 달래었다. 군사들은 아랫말 군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에 어느 집 앞에 와서 앞선 군사가 발을 멈추고 그 집을 가리키며 뒤에 오는 군사를 돌아보고 눈을 끔적이었다. 그 집이 겉으로 보기에도 포실하게 사는 집 같았다. 끌고 오던 변가의 과부는 삽작 밖에 앉혀놓고 두 군사가 함께 삽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집 주인은 동네 풍파에 겁이 나서 온집안 식구를 한방에 모아놓고 숨들도 크게 쉬지 못하게 하는 중인데 뜻밖에 군사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주인이 누구냐? “ 하고 소리를 지르니 주인이 초풍하여 벌떡 일어섰다. "네가 주인이냐? ” “녜. ” "네 성이 무어냐?“ "강가올시다. " "네가 아랫말 강가의 일가로구나. " "아니올시다. 강가라두 그 강가와 일가는 아니올시다. " "이놈아, 같은 강가루 일가가 아니면 무어냐! " 하고 군사들은 그 주인을 끌어내서 방망이찜질로 초다듬이하여 놓고 그 집에 분탕질을 놓은 뒤에 그 주인을 아랫말 군관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처음에 군관 앞에까지 잡혀온 사람은 오륙십 명이나 되었으나 그중에서 탈미촐 군영에까지 잡혀가게 된 사람은 십여 명밖에 안 되었는데, 그 사랑들은 대개 강가와 무슨 친척 관계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강가와 친분이 자별하던 사람이었다. 갈려울이 거의 패동이 되고 갈려울 사람이 두서넛 귀양 가게 된 뒤에 강가의 동티가 끌이 났다. 큰 변가의 과부는 군영까지 잡혀 갔었는데 사내더면 쩍어도 몇 달 갇혀 있을 것을 계집사람인 덕을 보아서 십여 일 만께 무사히 돌아왔다. 그 동안 작은동서 모녀가 집안을 그나마 잘 수습하고 어린아이들도 알뜰히 거두어 주었건만 고맙단 말 한마디 없고 사돈마누라가 자기까지 빼놓아 주지 않았다고 원망을 내늘았다. 큰동서가 갈려울서 살기 싫다고 작은동서에게 의논 한마디 없이 파산하리로 작정하고 자기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갈터이니 작은동서도 가서 친정살이를 하든지 또는 후살이를 가든지 마믐음대로 하라고 하여 작은 변가의 과부는 하는 수 없이 그 어머니를 따라 신뱃골로 가게되었다.
풍경이 있으면 맑은 소리 울려나고 궁노루가 있으면 향냄새가 풍기는 법이라 얼굴 고운 젊은 과부가 있고 소문이 안 날 리 없다. 변가의 집 작은 과부가 그 어머니를 따라서 친정에 온 뒤에 신뱃골에 얌전한 과부 있다는 소문이 가근방에 높이 났다. 그 동네 머슴 사는 노총각들이 제각기 침을 삼키는 중에 약빠른 사람은 그 흘어머니 마누라 듣기 좋도록 말까지 들여보내 보았으나 그 어머니부터 신신한 대답이 없었다. 평산읍내 어떤 늙은 양간이 손이 없어서 첩을 구하단던 중에 소문을 듣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서 넌지시 선까지 보아 가고 뒤미처 또 사람을 놓아서 그 어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말을 붙이는데, 딸만주면 온집안 먹고 살 것이 염려 없다고 하는 까닭에 그 그 어머니가 마음이 솔깃하여 비로소 딸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어머니가 이리저리 물어야 딸은 한마이 대답이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슬그머니 증이 나서 "싫다든지 좋다든지 말을 해라. 어미가 하치않으냐. 왜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니? “ 하고 나무라서 말하니 딸은 "무어라고 말하란 말이에요? ” 하고 고개를 드는데 두 눈에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하였다. 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가여져서 더 말을 묻지 못하고 마침내 평산 양반에게서 온 말을 거절해 보내게 되었다. 이 뒤에 불과 며칠 안 지나서 또 한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는데, 이것은 금교역말 큰 송방 젊은 주인이 후취로 달라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아주 마음에 합당하나 전날과 같이 딸의 눈물이나 자아내고 말게 될까 겁이 나서 조용히 딸을 데리고 앉아서 여러 가지 말로 달래보았다. 말말 하다가 통흔 들어온 것까지 말하고 "너같이 나이 젊은 것이 게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는 것이 왜 청승스럽게 과부로 몸을 마치려느냐. 내 생각 같아서는 좋은 자리 놓치지 말고 몸을 굳히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요전에 말 있던 평산 혼처로 말하면 문벌이 양반이고 형세가 굶지 않는 것은 좋으나 큰 마누라가 있고 영감이 나이 늙은 것이 좋지 않았지만 이번 금교역말 혼처로 말하면 내 맘에는 흠이 없이 좋은 것 같은데 네 맘에는 어떠냐? 네가 그리 가기만 하면 나도 늙게 고생 아니하고 네 동생도 성취를 잘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네게 달린 일이니 잘 생각해 보아라. " 하고 입이 닳도록 말하니 딸은 잠자코 듣다가 "삼 년이나 나도록 가만두어 주셔요. " 하고 빌듯이 말하였다. "삼 년 후에 그런 좋은 자리가 또 있을지 누가 아니? “ "삼 년 난 뒤에는 내가 어머니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니 그 동안에는 당초에 말을 내지 마셔요. " 딸의 고집을 어머니가 이기지 못하여 송방 젊은 주인의 통혼도 거절하게 되었다. 혼인 거절한 말이 밖에 나간 뒤에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비웃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신뱃골 젊은 과부의 소문이 점점 더 널리 퍼졌다.
곽오주의 젊은 주인 개래동 정첨지의 외아들은 신수는 멀끔하게 생겼으나 계집, 술, 노름에 아비의 모아놓은 천량을 보람없이 없애는 위인이라 신뱃골 젊은 과부 얼굴 이쁘다는 소문을 듣고 욕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들음들음이 자기 같은 사람의 작은 마누라로는 잘 올 것 같지 않아서 동여올 생각을 먹었다. 정윌도 보름이 가까웠을 때다. 정첨지의 아들이 자기의 집에 윷판을 벌리고 동네 젊은 사람을 모아서 윷을 노는 중에 실없은 젊은 사람 하나가 곽오주를 놀리느라고 "여게 오주, 자네는 총각으루 늙을라나? 신뱃골 이쁜 과부에게 장가가지 않을라나. 자네가 간다면 내가 중신재 줌세. " 하고 웃음의 소리 한 것이 고동이 되어서 저녁때 윷꾼이 흩어질 즈음에 정첨지의 아들이 장난꾼 너덧을 붙들어 가지고 신뱃골 과부를 동이러 가자고 꼬이었다. 장난꾼에게는 노름 밑천을 주마 하고 오주에게는 술 한번 싫도록 먹여 주마 하여 허락들을 얻었다. 승교바탕을 가지고 가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거추장스럽다오 그만 두고 싸서 업어을 작정으로 튼튼한 흩이불 한 채만 준비하였다. 이른 저녁 먹은 뒤에 정첨지의 아들이 아비에게는 동네로 윷놀러 간다고 거짓말하고 오주까지 다섯 사람을 데리고 개래동을 나섰다. 청석골을 지나고 금교역말을 지나서 사십 리나 되는 길을 와서 보니 밤이 벌써 이윽하였다. 과부의 집이 어디 있는 것은 정첨지의 아들이 미리 다 알고 있는 까닭에 그 집 근처에 가서 집안 동정을 살핀 뒤에 화적떼와 같이 뛰어들어갔다. 달빛이 있어서 대번에 소복한 젊은 과부를 붙들었다. 괴부집 세 식구가 변변히 소리도 지를 사이 없이 오주가 과부를 흩이불에 싸서 들쳐업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질을 쳤다.
과부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혼이 나가서 소리도 별로 못 지르다가 딸을 업어가는 놈들이 삽작 밖을 나간 뒤부터 쫓아나오며 우는 소리로 악을 쓰고 아들아이도 어머니 뒤를 따라나오며 목을 놓고 엉엉 울었다, 동네 머슴방에서 윷놀던 젊은 군들이 아닌 밤중에 여편네 악쓰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한달음에 뛰어들 왔다. 난뎃놈 대여섯이 동네 와서 과부 업어간 것을 알도 십여 명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쫓아가서 도로 빼앗아 온다고 장담들 하고 곧 떼를 지어 뒤쫓아갔다.
업혀가는 과부가 흩이불에 싸여서 손발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는데다 업고 가는 오주가 황소같이 센 사람이라 과부가 죽을힘을 다 들여서 몸을 드놓아도 조금도 끄떡이 없었다. 그러나 뒤에 쫓아오는 패가 있는 줄을 안 뒤에코 뒤쫓는 패와 같이 장달음을 치지 못하여서 금교역말 가는 큰길까지 채 다 가지 못하고 붙들리게 되었다. 오주가 업었던 과부를 내려서 정첨지 아들에게 맡기고 쫓아오는 패를 가로막고 나섰다. 쫓아오는 패가 와하고 오주에게 달려드니 오주가 손닿는 대로 집어쳤다. 십여 명 사람에 힘꼴 쓰는 장정도 없지 않았지만 오주 하나를 당할 잡이가 없었다. 오주의 손에 걸리는 대로 넘어지고 자빠져서 빙판 위에 즐비하게 쓰러졌다. 오주가 땀을 씻으며 돌아설 때 정첨지의 아들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오주 하나만 같이 왔어도 넉넉할 뻔했네. " 하고 고마워하는 눈치로 말하니 오주는 픽 웃으며 "좀 치웁드니 땀이 나서 좋소. " 하고 곧 다시 과부를 들쳐업었다.
먼데 닭이 연해 울고 산속 달이 다 넘어갈 때 과부 업어오는 군들이 빙고산 옆을 돌아나왔다. 개래동은 산 앞에 있는 동네라 동네까지 일 마장이 채 못 되었다. "인제 다 왔네. " 하고 한 사람이 입을 떼니 "치워 죽겠네. 어서 가세. " 하고 또 한 사람이 운을 달았다. 정첨지의 아들이 "나는 한걸음 앞서 가야겠네. 자네들 뒤에 차차 오게. " 하고 먼저 가려고 벌음을 재게 놓으니 어서 가자던 사람이 "왜 먼저 갈라나? 같이 가세. " 하고 역시 빨리 걸었다. "나는 우리 아주머니 집에 가서 선통을 좀 해야겠네. " "왜 자네 고모님 집으루 들어갈라나? “ "그럼 바루 집으루 들어가면 야단나네. " "바가지 긁을까봐 무서운 걸세그려. " "쨍쨍거리는 여편네는 방망이찜질두 할 수 있지만 극성 떠는 늙은이는 어떻게 알 수가 없어. " "자네 집 고불이가 여간 사람이 아니니까. " "여간 사람이 아닌 덕에 사람이 못 살겠네. " "자네 고모님 집에 갖다 숨겨둔다구 며칠이나 숨기겠나. 숫제 바루 들어가서 사정을 토파하게. " "아니야, 늙은이 성정은 내가 잘 아니까 바루 끌구 못 들어가네. ” 며칠 뜸을 들이는 동안 아주머니 집에 맡겨둘 작정일세. " "자네 집 고불이가 자네 말은 잘 듣는다데그려. " "말을 듣두룩 삶자면 집안 망할 자식이란 욕을 골백번 들어야하네. " "나는 우리 아버지가 노름 밑천만 잘 대주면 그런 말은 약과루 알구 듣겠네. "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느라고 걸음이 줄었네. 자네두 뒤에 오는 사람들하구 같이 우리 아주머니 집 앞으루 오게. 나는 먼저 가네. " 하고 정첨지의 아들은 다리에 자개바람이 날 만큼 빨리 걸어 먼저 가고 그 사람은 다른 일행과 같이 뒤떨어졌다.
정첨지의 아들은 어미 없이 자란 자식이다, 정첨지의 마누라가 노산으로 해산하고 산후더침으로 죽은 까닭에 흘로 되어서 오라비에게 와서 얹혀 있던 정첨지의 누이가 핏덩이 조카를 받아서 지성을 다하여 길러놓았었다. 정첨지의 아들도 고모의 은공츨 잊지 못하여 하지만, 그 늙은 고모는 조카를 친아들같이 사랑하여 조카의 말이라면 소금섬을 물로라도 끄는 터이었다. 늙은 고모가 조카의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나서 조카의 간청하는 사연을 듣고 부지런히 자던 자리를 치우는 중에 뒤떨어진 일행이 들어왔다. 정첨지의 아들이 오주의 등에서 과부를 받아서 방에 들여 놓는데 손을 놓으며 곧 툭 쓰러지는 것이 괴상하여 급히 흩이불을 벗기고 보니 다 죽은 사람이다. 얼굴빛이 새파랗고 수족이 얼음 같고 실낱같은 숨이 있는듯 만듯하였다. "흩이불루 너무 꼭 싸서 숨이 막힌 겔세. " "잠시 기절한 것이니까 곧 펴나겠지. " "우리는 들어앉을 데두 없는데 고만가세. " 하고 같이 갔다 온 장난꾼들이 그대로 흩어져 가려고 할 때 정첨지 아들이 밖에 나와서 "치운데 술이나 한 사발씩 먹구 헤어졌으면 좋을걸 안되었네. "하고 빈인사하니 "아닌게아니라 어한 좀 했으면 좋겠네. " 하고 이 사람 한마디 "나는 우선 배가 고파 못견디겠네. " 하고 저 사람 한마디 귀따갑게 지껄였다.
정첨지 아들이 곽오주를 돌아보며 "여게, 자네가 내 대신 저 사람들 데리두 집에 가서 슬그머니 술을 퍼내다 먹게. " "내가 어떻게 슬그머니 퍼다 먹어. " "술독 있는 데 알지 않나? “ "그러지 말구 우리와 같이 가서 술을 내다 주구 다시 오지. " 오주의 말에 여러 사람이 뒤쫓아서 "여게, 그래 보세. " "자네는 곧 일어서게그려. " "기절한 사람 가만히 두면 절루 펴나네. 염려 말게. " "자네 고모님이 어련히 잘 보아주시겠나. " 중구난방으로 조르는 바람에 정첨지 아들은 기절한 과부를 그 고모에게 부탁하고 곧 여러 사람을 몰고 자기 집으로 왔다. 여러 사람을 머슴방에 들여앉히고 정첨지 아들이 안에 들어가서 안해를 깨웠다. "인제 왔소? 지금이 어느 때요? ” "샐 때 다 되었어. 고만 일어나게. " “아랫목 자리 내주리까? ” "잔소리 말구 어서 일어나. " "일어나고 싶으면 어련히 일어날까. 별 성화가 다 많아. " 안해의 말씨가 곱지 않아지니 "윷놀구 인제 왔어. 춥기두 하구 시장두 하니 술 한잔 따뜻하게 데워 주게. 여보게 좀 일어나게. " 사내가 너스레를 놓았다. 그 안해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불씨 묻은 화로에 뜬숯을 얹어서 피워놓고 술을 뜨러 가려고 할 때 사내가 "여게. " 하고 불렀다. "왜 그러오? “ "술을 얼마나 데우려구 묻두 않구 뜨러 가나? ” "아까 한잔 달라지 않았소? “ "이왕 여남은 주발 걸러 주게. " "그건 다 무어 할라오? ” "밖에 같이 온 사람이 있어.“ "노름꾼들을 끌고 온 게구려. " "당치 않은 소리 말아. " "처음에는 혼자 먹을듯이 한잔만 달라더니 꼭두새벽에 술타령들 할 작정이오. 잠도 안 자고 무슨 지랄들이람. " 안해의 버릇없는 말에 사내는 곧 한바랑 야단 벼락을 내리고 싶었으나 꿀꺽 참고 "지금 내가 자네하구 아귀다툼할 경황이 없네. 어서 빨리 술이나 갖다 걸러주게. " 하고 재촉하였다. 안해가 술을 걸러놓기가 무섭게 머슴방으로 들어 나르고 나중에 술 떠먹을 그릇과 술안주를 들고 나가서 오주를 불러 주고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곧 다시 고모의 집으로 가려다가 한 순만 같이 먹고 가자는 여러 사람의 권에 못이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한 순이 두 순이 되고 두순이 또 세 순이 되었다. 정첨지의 아들은 술동이 둘이 밑이 드러나기까지 여러 사람과 같이 먹고 그대로 곯아 떨어져서 이튿날 해가 높이 뜨도록 정신 모르고 잠을 잤다. 정첨지의 아들이 눈을 뜨고 기지개 켤 때 오주가 밖에서 들어왔다. "늦었나? " "아침 먹구서 동네 한바탕 돌구 왔어. " "우리 아주머니 집에 가보았나? “ "가보았지. " "어떻게 되었던가? ” "살았어. " "일어 앉았던가? “ "아니. " "가만히 누워 있든가? ” "몸부림을 해서 붙들구 날치더군. " "아이구, 내가 얼른 가보아야겠네. " 하고 정첨지의 아들은 벌떡 일어나서 건정건정 소세하고 아침밥은 먹지 못하겠다고 아니 먹고 고모 집으로 뛰어갔다.
먼동이 틀 때 과부는 정신이 돌았었다. 정신이 돌은 뒤부터 울고불고 몸부림을 쳐서 늙은 할머니가 붙들고 달래느라고 죽을 고생 다하였다. 정첨지의 아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그 고모는 들어오지 말라고 손짓하고 곧 밖으로 쫓아나왔다. "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우? “ "인제 간신히 좀 진정되었다. 아직 덧들이지 말고 가만두어라. " "누차 덧들여요? ” "네가 가까이 가면 가만있겠니? 아까 오주가 방문만 열고 들여다보는 데도 더 죽으려고 날뛰더라. " "무어 좀 먹이셨소? “ ”무얼 먹어. 새벽에 더운물은 정신 모르고 받아먹었지만 그 뒤엔 물 한 모금 안 먹었다. 아침에 미음을 좀 권했더니 미음 그룻 든 손을 떠다밀어서 이것 좀 보아라. " 하고 그 고모는 저고리 앞섶과 치마 앞폭의 젖은 흔적을 들어 보이었다. "그래두 무얼 좀 먹여야지요. " "먹지 않는 걸 어떻게 억지로 먹이니. 하루 이틀 지나 결이 삭으면 자연 먹는다. " "내가 좀 권해 보리까? “ "당치 않은 소리 하지도 마라. 네가 권해 먹을 게냐. " "어디 좀 권해 보지요. " ”아서라, 몸부림만 받는다. " "몸부림 받아두 좋지요. 설마 약한 여편네 하나 못 당하리까. " 정첨지의 아들이 그예 그 고모에게 미음을 달래서 미음 그릇을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쓰고 누웠던 과부가 방문 여닫는 소리에 이불을 젖히고 흘끗 바라보더니 대번에 입술을 악물고 도끼눈을 뜨는데 그눈에 독살이 가득하였다. 정첨지의 아들이 미음 그릇을 손에 든 채 한동안 서서 내려다보다가 "미음 좀 자시오. 나중에 대판 시비를 하더라두 우선 먹구 기운을 차려야 하지 않소. 자, 미음 좀 자시오. " 하고 미음 그릇을 과부 옆에 가까이 놓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동정을 보았다. 몸부림을 하거나 적어도 미음 그릇을 밀쳐버릴 듯한 과부가 두 눈을 스르르 감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 눈귀에 흘러내리는 눈물만 없으면 곱게 잠든 사람과 흡사하였다. "미음이 다 식겠소. " 한동안 있다가 "한 모금 마시시오. " 다시 한동안 있다가 "일어 앉혀주리까? “ 정첨지의 아들이 말을 마치자 벽을 안고 누웠던 과부가 홀저에 앞으로 돌아누우며 손을 내밀어 미음 그릇을 잡아당기었다. 정첨지의 아들이 좋아서 "옳지, 옳지. "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과부는 고개만 들고 미음 한 그릇을 다 마시었다.
정첨지의 아들이 가까이 들어앉아서 이불 밖에 내놓은 손을 잡으려고 하니 과부는 얼른 그 손을 끌어들이며 곧 이불을 얼굴까지 뒤어썼다. 정첨지의 아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더 가까이 들어앉아서 이불 위로 과부의 몸을 어루만지니 과부는 몸을 한 줌만큼 오그리고 벌벌 떠는데 무거운 솜이불이 떨리도록 떨었다. 정첨지의 아들이 허허 웃고 일어나서 빈 그릇을 들고 밖에 나가서 고모를 보이니 고모가 "그 미음을 다 먹었니? 수단이 참말 용하다. " 하고 조카의 등을 뚜덕뚜덕하였다. 이날은 과부가 종일 누워 있었으나 주는 미음을 검다 쓰다 말없이 잘 받아먹었고 이튿날은 과부가 아침에 일어앉아서 자기 손으로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정첨지의 아들이 급한 마음에 과부가 더 소성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날 밤으로 신방을 차려달라고 고모를 졸랐다. 그 고모가 자기 방을 신방으로 내주려고 방안에 있는 물건을 대강 윗간으로 치우는데 무거운 다듬잇돌을 들고 좁은 지겟문으로 나가다가 허리에 담이 들어서 한동안 쩔쩔매었다. 늙은 할머니가 쩔쩔매는 것을 과부는 차마 가만히 보고 앉았을 수 없다는 듯 슬며시 일어나서 흥두깨도 들어주고 방망이도 집어주었다.
이날은 대보름날이라 저녁에 정첨지의 아들이 동네 사람들과 같이 달마중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로 고모의 집에 와서 아주 삽작까지 닫아걸고 들어왔다. 과부는 오도마니 앉아 있는데 고모는 누워서 앓는 소리 하다가 조카를 보고 일어나서 잘들 자라고 인사하고 곧 윗간으로 내려갔다. 정첨지의 아들이 깔아놓은 자리 위에 앉아서 과부를 바라보니 어여쁘기 짝이 없었다.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걷잡지 못하여 "오늘은 옷을 벗겨 주어야지. " 하고 과부에게 달려드니 과부는 죽어가는 소리로 "먼저 가 누워요. " 하고 뒤로 떠다밀었다. "그러지. " 하고 정첨지의 아들이 자리 위에 와서 번듯이 자빠지는 동안 과부는 살그머니 치마 뒤에서 방망이 한 짝을 꺼내 쥐고 눈결에 누운 사람 머리맡으로 가며 곧 앞이마를 내리쳤다. "아이쿠머니! " 벌떡 일어앉은 정첨지 아들은 잠간 동안 정신이 아뜩하였다. 어깨바디 등줄기가 뜨끔뜨끔하고 뒤통수가 화끈하였다.
정첨지 아들이 부지중에 "이년, 사람 죽인다! " 큰소리를 지르코 곧 누가 잡아 일으키는 것같이 일어섰다. 과부가 방망이를 두 손으로 잡고 소경 매질하듯 함부로 치려 대드는 것을 정첨지의 아들이 발길로 냅다 차서 방문 앞에 가서 궁등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아래윗방 사이에 있는 지겟문이 왈칵 열리며 늙은 고모가 조카 앞에 와서 섰다. "이게 웬일이냐? 이마에 피 좀 봐라. 아이구 이게 웬 일야. “ 가슴을 부등켜 안고 주저 앉았는 과부 옆에 방망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조년이 방자이로 때렸구나. 조런 박살할 년. 남의 귀한 조카를 죽일라고. "하고 과부를 꾸짖고 곧 "이애, 얼마나 다쳤나 어디 보자. 고개 좀 숙여라. " 하고 조카의 손을 잡아당기었다. "아이구 이것 봐, 아주 으스러졌구나. 요년 어디 보자. 네 대가리는 마구 쫓아놓고 말 테니, 이애 피나 좀 씻어주마. " 하고 고모가 조카의 손을 놓은 뒤 솜조각을 갖다가 조카 얼굴에 흐른 피를 씻어주는데 과부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고만두시오. 저년 붙잡게. " "제가 내빼면 어디 가겠니? ” "당장 분풀이하기가 급해요. " "누가 보더라도 너무 흉칙하니 대강이라도 씻어주마. " 그 고모가 솜조각으로 피 씻어주는 것을 정첨지의 아들은 "고만 고만. “ 하고 재촉하다가 부리나케 방 밖에 나와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곧 삽작 밖으로 쫓아나왔다. 달빛이 대낮 같아서 땅에 기어가는 개미도 눈에 보일 만하였다. 과부가 천방지축하고 내빼는 것을 멀찍이 바라보고 달음질쳐서 그 뒤를 쫓아갔다. 예사 말소리가 들릴만큼 동안이 가카워졌다. ”이년, 네가 가면 어디루 갈 테냐, 이년. " 꾸짖는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있는 동네 사잇길에서 젊은 사람들이 웃고 지껄이며 몰려나왔다. 정첨지 아들이 그 앞을 피해 가려고 논틀밭틀로 겅정겅정 뛰어가는데 짓궂은 젊은 사람 하나가 쫓아와서 붙들었다. 그 사람은 신뱃골 같이 갔던 장난꾼의 한 사람이다. "누군가 했더니 자델세그려. 지금 자네가 이년 이년 하며 쫓아 가는 여편네가 신뱃골인가? 어쩌다가 놓치구 야단인가. " "저거 멀리 내빼네. 어서 놓게. " "신뱃골까지 안 가구 붙잡을 걸 왜 이렇게 야단인가. " "내 손 좀 놓게. " "자네 이마에 생채기가 났으니 웬일인가? “ "할아버지 할께 제발 좀 놓게. " "이 사람이 실성했나. " 그 사람이 웃는 동안에 정첨지의 아들은 붙든 손을 뿌리치고 두주먹을 쥐고 다시 과부 뒤를 쫓아갔다. 동네 어귀에까지 쫓아 나와서 과부를 거의 붙잡게 되었을 때 과부는 길 옆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잠간 굽어보고 곧 우물로 뛰어들어갔다. 그 우물은 동네 사람이 깊은 우물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정첨지 아들이 근두박질하여 우물에 와서 전을 짚고 밑을 내려다보니 한 길이 넘는 우물 속이 침침은 하나 과부가 머리를 우물 벽에 기대고 주저앉았는데 물이 입에 찰랑찰랑하는 것이 분명히 보이었다. 정첨지 아들이 어찌 할 줄 모르고 공연히 사방을 돌아보는 중에 이리 향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보고 "사람이 우물에 빠졌네! " 하고 고성을 쳤다. 길에서 만난 젊은 사람들이 반이나 넘어 뒤따라오던 중레 정첨지 아들의 고성 치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뛰어들 왔다. 그러나 급기야 와서는 여러 사람이 다 찬물에 들어가기 싫어서 "동아줄이 있어야지. " "홰두 있었으면 좋겠네. " "오주같이 힘센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 제일 좋겠네. " 하고 떠들기만 할 때 오주가 마침 멀리서 어슬렁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오라고 여러 사람이 소리를 쳤가. 오주가 뛰어와서 과부가 우물에 빠진 것을 알고 우물가에 가서 한번 내려다보더니 위아랫도리를 훌떡 벗고 과부 머리 없는 편에 가서 우물전에 걸터앉아서 팔을 뒤로 짚으며 곧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여러 사람이 우물가에 삥 둘러서서 우물 속을 굽어볼 때 윗도리만 물 밖에 나온 오주가 과부를 가슴에 끌어안고 위를 치어다보며 "동아줄을 하나 내려보내 줘야겠소. "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첨지의 아들이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와서 붙들고 말하여 그 사람이 가서 동아줄을 가져와서 한 끝은 정첨지의 아들이 손에 쥐고 다른 끝은 우물 속으로 내려보냈다. 잡아당기라고 오주는 소리치는데 정첨지의 아들이 혼자 끌어올릴 수가 없어서 여러 사람에게 고력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어차 어차! " 하고 여러 사람이 동아줄을 잡아당기는 중에 동아줄을 잡은 오주의 북두갈구리 같은 손이 우물전을 옳겨 잡게 되자, 오주의 몸이 불끈 위로 솟는데 한편 겨드랑이 밑에 과부를 끼워들었었다, 정첨지의 아들이 과부를 받아서 우물 앞 편편한 곳에 갖다가 눕혀놓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코 밑에 손을 대보고 하는 동안에 오주는 우물 밖에 나와서 벗어놓은 옷을 주워 입은 뒤 정첨지 아들을 와서 보고 "어떻게 할 작정이오? “ 하고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들어가야지. " "그럼, 어서 업구들어가지. " "자네가 또 좀 업구 가세. " "물독에 빠진 생쥐 같은 것을 누구더러 업으래? 자기가 업지. " "옷 버릴까봐 그러나. 새 옷 한 벌 해줌세. " "설빔옷이 다 드러웠는데 새 옷 해준다니 업어다 줄까. " 사지가 늘어진 과부를 오주가 업고 오는데 정첨지 아들과 젊은 사람 하나가 양옆에 붙어오며 부축하였다. 다른 젊은 사람들은 뒤따라오다가 많이 중간에서 흩어져 가고 더러는 정첨지 누이집에 와서 과부가 소생하는 것까지 보고 돌아갔다.
정첨지 아들의 과부 동여온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겨서 이튿날 식전에 서로 만나는 사람들이 인사 제치고 이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정첨지와 정첨지 며느리 귀에 소문이 안 들어갈 리 없었다. 이튿날 아침때다. 정첨지의 아들이 고모의 집에서 고모와 같이 아침밥을 먹는 중에 별안간 방문이 열리며 그 안해의 독난 얼굴이 방문 밖에 나타났다. 정첨지 아들도 그 고모나 못지않게 놀랐으나 과부를 윗방에 뉘어 두어서 안해 눈앞에 뜨이지 않은 것을 다행하게 여기었다. "왜 왔나? “ "과부가 얼마나 이쁜가 보러왔소. " "과부가 어디 있어? ” "생청으로 잡아떼면 제일인가. " 내외간에 말이 오고가기 시작할 때 늙은 정첨지가 지팡이를 드던지며 삽작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오신다! " 하고 고모가 놀라 일어서니 "야단났구려. " 하고 조카도 따라 일어섰다. 정첨지가 봉당에 올라설 때 방에 있는 숙질이 밖으로 마주 나왔다. 정첨지는 얼굴에 핏대가 서고 입가에 살이 실룩거리었다. 늙은이가 가쁜 숨을 돌리는 동안 아들을 잡아먹을 것같이 노려보다가 입을 벌리며 곧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야단을 쳤다. "이 자식, 집만을 망치더라두 조신하게 망쳐라. 너 죽구 나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이 자식, 네가 기집이 없느냐? 남의 집 과부를 갖다가 무엇할 테냐. 벼락 맞아 뒤어지구 싶으냐? 이놈, 네가 남의 집 과부를 빼다가 작은 기집으로 데리구 살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틀렸다 이놈! “ 정첨지가 지팡이로 봉당 바닥을 두들기다가 지당이가 부러지니 손에 쥔 지팡이 동강으로 아들을 두들겼다. 그 고모가 가로막고 나서서 "꾸중을 하시더라도 방에 들어가 하시오. 동네 사람들 부끄럽소. ” 하고 삽작 안과 늘 밖에 웅긋중긋 와서 섰는 이웃 사람들을 가리켰다. "부끄러운 것 잘 안다. 너는 나이를 헛 처먹었어. 낫살 먹은 것이 저거하고 부동해서 집안 망할 짓을 한단 말이냐? 그건 부끄럽지 않으냐. 네 방엔 들어가기두 싫다. 과부 어디 있니? 이리 데려 내오너라! " 정첨지가 호되게 야단치는 바람에 그 누이는 두말 못하고 윗방에 들어가서 과부를 붙들고 나왔다. 정첨지가 며느리를 돌아보며 "네가 여기 있어 무어 하니. 저 여편네 데리구 집으루 가자. " 말하고 곧 며느리와 과부를 앞세우고 나서는데, 과부가 걸음을 걷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구경하던 동네 여편네 두엇을 불러서 부축시켜 데리고 갔다.
과부가 정첨지 집에 와서 몸져 눕는 길로 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정첨지는 며느리 시켜 구호를 극진히 하게 하고 과부 누운 아랫방에 여편네 한 둘은 밤낮 떠나지 않도록 하고 사내는 누구든지 범접 못하게 하였다. 정첨지의 며느리가 정첨지보고 "앞으로 과부를 어떻게 하실랍니까? " 하고 의향을 물으니 정첨지는 자기 마음에 작정한 대로 "병만 낫거든 곧 저의 집으루 보내줄 테다. "하고 말하였다, 정첨지 아들이 이 말을 전청으로 듣고 몸이 달아서 구변 있는 동네 늙은이 하나를 중간에 놓고 아비 의향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정첨지 아들의 청을 받은 늙은씨가 정첨지 집에 와서 겉으로는 그저 놀러온 체하고 정첨지와 같이 담화하는 끝에 과부 말을 끄집어냈다. "그 과부가 병이 났다더니 대단치나 않은가? “ "웬걸, 대단해. 아직까지두 인사정신을 모른다네. " "병이 나은 뒤에 또 풍파가 없을까? ” "저의 집으루 보내버리면 고만이지 무슨 풍파가 있어. " "업어온 과부를 돌려보내는 법이 어디 있나? 자뻬 며느리 안 삼을라거든 내나 주게. 내 며느리 삼아보세. " "이 사람이 뉘 지기를 떠보는 셈인가? “ "실 없은 소릴세, 골내지 말게. 그렇지만 과부를 업어왔다 도추 보내면 그 집에 재앙이 있다데. 빈말이라두 좋을 것 없지 않은가? ” "그런 말이 어디 있나. 나는 듣지 못했네. " "그런 말이 있어. 자네가 못 들었지. 다른 사람을 내주더라두 도루 보내진 말게. " "내 딸인가, 내 맘대루 내주게. " "그러구 과부를 업어오거나 동여오는 것이 흔한 일 아닌가. 큰 변고처럼 여길 것 무어 있나. " "누가 큰 변고라든가? " "자네가 큰 변고처럼 집안에서 야단을 친다며? " "자식이 집안 망할 짓을 하면 누가 야단 안 치겠나. " "집안 망할 짓까지는 과한 말일세. 젊은 사람들의 일시 장난이지. “ "장난이 다 무언가. 제 기집이 새파랗게 젊은데 왜 남의 집 과부를 업어오나. " "여보게, 우리들 젊었을 때는 그만 장난 아니했나. 우리 늙은 사람들이 젊은 축에게 너무 까다롭게 굴 것 아니니. " "이 사람, 남의 집 외아들이 제 명에 죽지 못하는 것을 보구 싶은가. 에이 사람. " 하고 정첨지가 증을 벌컥 내서 그 늙은이는 다시 말 못하고 얼마 동안 무료하게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 늙은이가 정첨지 집에서 나가는 길에 정첨지 아들이 곽오주와 같이 고샅길에 나와 섰다가 보고 쫓아들 왔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 "자네 귀에 좋은 소식 들려주려다가 공연히 내 코만 떼구 가네. " 정첨지 아들이 대번에 오만상을 찡그렸다. 오주가 "좋은 소식이 무슨 소식이오? “ 하고 늙은이보고 물으니 "자네가 찬물 속에 들어가서 인명을 구한 상급으루 자네 주인이 이쁜 안해 하나 구해 준다는 소식이 있네.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닌가. " 하고 늙은이는 껄껄 웃었다. 오주가 "예끼" 하고 늙은이에게 삿대질하고서 어서 가자고 젊은 주인의 손을 끌었다. 정첨지 아들이 오주와 같이 오는 길에 그 과부를 도로 보낼 바엔 차라리 오주를 내주어 보고 싶은 맘이 생겼다.
과부를 가까이 두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생각과 과부가 밉살스러워서 욕보이고 싶은 생각과 귓속에 남아 있는 늙은이의 실없은 말이 한테 얼기설기한 중에 이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여보게 오 주, 과부를 자네 줄 테니 어떤가? “ "나더러 데리구 살란 말이지. " "그래. " "안해가 있으면 살림할 집이 있어야지. " "그건 염려 말게. " "집이나 살림 제구는내가 다 주선해 줌세. " "그러면 좋지. 싫을 것 무어 있어. 그렇지만 주인 영감이 나를 줄라구? ” "영감쟁이가 내 생각엔 자네는 줄 것 같애. 하여간 지금 가서 말을 비쳐보세. " 정첨지의 아들이 집에 와서 아비를 보고 과부를 오주 내주자는 의취로 말을 비쳤다. 정첨지는 과부를 돌려보내면 집에 재앙 있단 말을 꼭 곧이 들은 것은 아니나, 마음에 꺼림칙하여 하던 터이라 곧 오주를 불러 세워놓고 "과부가 병 나은 뒤에는 너를 내줄 테니 네가 도루 업어다 주거나 차지를 하거나 맘대루 해라. " 하고 말하여 오주는 선뜻 "녜. " 하고 대답하였다. 일시 위중하던 과부의 병이 며칠 뒤에 대세는 돌렸으나 정신기가 나서부터 죽기를 기 쓰고 약이나 미음을 받아먹지 아니하였다. 과부가 자몽하여 자는 것같이 누워 있을 때 정첨지 며느리가 미음을 가지고 와서 가만가만 몸을 흔드니 과부는 눈을 잠깐 떠보고 곧 도로 감았다. "여보, 미음 좀 마시오. " "그렇게 안 먹으면 병이 낫지 않소. " "우리 시아버지 말씀이 임자가 병이 나으면 곧 집으로 보내주신다는데 얼른 병이 나아야 집에를 가지 않소. 집에를 가고 싶기 않소. 왜 아니 먹소. " 과부가 눈을 다시 뜨고 정첨지 며느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 미음을 달래서 마시었다.
과부의 병이 나날이 나아갔다. 대세를 돌린 지 사오 일 만에 머리를 들고 일어나서 소세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첨지 며느리를 붙들고 집에 가게 하여 달라고 졸랐다. "신뱃골이 여기서 삼십 리라도 사십 리나 된다는데 지금 걸어가려면 갈 수 있겠소? 조금 소복된 뒤에 보내주신다니 아무 소리 말고 보내주실 때까지 기다리오. " 과부가 이 말을 믿고 잠자코 다시 수일 지나는 동안 날마다 방안에서 서성거리며 다리에 힘을 올리었다. "인제는 사십 리 아니라 팔십 리라도 걸어갈 것 같으니 내일쯤 집에 가도록 해주시오. " "내가 이따 말씀해 보리다. " 정첨지 며느리가 과부의 청하는 뜻을 정첨지에게 말하여 허락을 받았다. 과부가 내일은 자기 집에 가게 될 줄 믿고 초저녁부터 밤 가기를 졸이고 앉았을 때 밤에 와서 같이 자는 동네 여편네가 빙글빙글 웃으며 들어와서 "잠동무도 고만이요그려. " 하고 말하니 과부는 자기가 내일 가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거니 짐작하고 "글쎄, 섭섭하오. " 하고 인사치레로 대답하였다.
그 여편네가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할 즈음에 정첨지의 며느리가 와서 정첨지의 말을 전하였다.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이 데리고 갈 사람을 한 사람 부탁해 놓았으니 그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라는 말이었다. "그 사람이 같은 여편넨가요? “ "모르겠소. 가보면 아실 테지. " 정첨지가 부탁했으면 그만이지 자기더러 가서 만나보랄 것이 무엇인가. 의심이 더럭 나나 지낸 곡경 보다 무슨 더 큰 곡경이 앞에 있으랴 생각하고 과부는 여러 말 않고 곧 "하라시는 대로 하지요.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지금 나하구 같이 갑시다. " 앉아 있던 동네 여편네가 일어서니 과부는 정첨지 며느리에게 곧 다녀오리다 인사하고 동네 여편네의 뒤를 따라나섰다. 정첨지 집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 있는 오두막집이다, 집안은 괴괴하고 방안의 불빛은 희미하였다. 동네 여편네가 과부를 데리고 와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말하였다. 방안에 사람도 없고 물건도 없었다. 아랫목 편에 놓인 헌 이불 한 채와 벽에 걸린 등잔거리 곧만 없으면 알뜰한 빈방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웬일이오? ” "오겠지요. " "다른 데서 온단 말이오? “ "있을 줄 알았더니 어디 잠간 나간 게요. " "밖에서 기다립시다. " "치운데 어떻게 밖에 서서 기다리나요? 나두 들어갈 테니 들어 갑시다. " 이 방에 들어가는데 무슨 곡절이 붙은 줄은 과부가 확실히 짐작하였으나 하회를 두고 볼 작정으로 그 여편네와 같이 방안에 들어왔다. 정첨지 아들놈이 무슨 흉계를 꾸며서 자기를 함정에 몰아넣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그 아비는 모르지만 그 계집까지 한통이 될 리 있을까, 그 계집은 속아서 모르는가, 이런 생각이 과부의 머릿속에 떠올라서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앉았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쇠도둑놈 같은 사내가 방안에 들어섰다. 동네 여편네가 그 사내를 보고 "곽도령이 어느 틈에 곽서방이 되었어? “ 하고 웃으니 그 사내는 "오늘 아무렇게나 끌어올렸소. " 하고 역시 웃었다. 그 여편네가 과부를 보고 "이 사람이 같이 가실 사람이오. " 말하고 곧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과부가 여편네보다 앞질러 나가려고 하는 것을 그 사내가 덥석 끌어안아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과부는 소리개에 채인 병아리밭이 꼼짝 못하고 발발 떨었다.
오주가 과부를 방 한중간에 앉히고 자기는 등으로 방문을 가로 막고 앉았다. 오주는 숫기 좋은 사람이건만 평생 처음으로 젊은 여편네와 단둘이 한방에 들어앉으니 어째 겸연쩍은 생각이 나서 꿀 먹은 벙어리같이 앉아 있고, 과부는 숨만 쌔근쌔근하고 돌로 새긴 사람같이 앉아 있었다. 오주가 처음 상투 올리는 날 행세로 빌어 쓴 망건이 머리에 테를 메운 것 같아서 훌떡 벗어버리고 머리 뒤를 긁적긁적하였다. 오주가 우선 과부와 성명이나 통하려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말은 하게를 안 쓰고 끝없는 반말을 썼다. 오주는 총각 대접으로 하게하는 사람들에게 일쑤 반말질하여 반말을 잘하는 터이었다. "나는 성은 곽가구 이름은 오주구 나이는 스물다섯이구 고향은 강령인데 정첨지 집에서 머슴을 살아. 임자는 성은 무어구 이름은 무어구 나이는 얼마여? “ 말을 한마디 한마디 줍듯이 말하며 오주가 연해 과부의 얼굴을 바라보니, 묻는 말에 대답은 고사하고 하는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주인이 나더러 임자하구 같이 살라는데 내 맘엔 좋지만 임자 감에 어떤지, 임자가 나하구 같이 살기 싫다면 나두 굳이 같이 살자지 않을 테니 싫거든 싫다구 말해. " 오주가 과부의 말을 들으려고 한동안 기다리었다. "나는 아직두 총각이구 임자는 젊은 과부니까 같이 살기 싫을 것 없겠지. 또 같이 살다가두 언제든지 싫다기만 하면 내가 두말 않구 갈라설 테니 그때 임자가 신뱃골 가서 도루 과부 노릇하면 고만 아니여. " 오주가 또다시 한동안 기다리었으나 과부는 입을 겹겹이 봉한 사람같이 말 한마디 아니하였다. 오주가 선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혼잣말하듯 "고만 자보까. " 하고 일어나 아랫목에 가서 흩이불 쪽을 펼치었다. 그림같이 앉았던 과부가 번개같이 일어나서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려다가 한 발도 채 내미디기 전에 오주 손에 붙잡혔다, 오주가 한 손으로 열린 방문을 닫은 뒤에 "누구를 또 찬물에 들어가게 할라구. " 하고 껄껄 웃으면서 과부를 어린아이같이 번쩍 안아 들고 아랫목 자리로 왔다. 과부는 손이 있어도 손을 놀리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발을 놀리지 못하고 등신이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남자는 잠이 들며 곧 코를 고는데 여자는 눈만 감고 있었지 잠이 들지 아니하였다. 무서움과 슬픔과 분함이 모두 작이 넘었다. 남자 잠자는 틈에 방문 열고 도망할 생각이 들지 못할 뿐 아니라 손끝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닭을 여러 홰 울린 뒤에 잠 같지도 않게 잠이 잠깐 들었다가 꿈같지도 않게 꿈을 하나 꾸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험악한 산길을 걸어가는데 뜻밖에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소리가 어디서 나나 하고 둘레둘레 돌아보니 커다란 굴 속에 갓난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굴 속으로 쫓아들어가서 그 아이를 안고 보니 이때까지 사람의 아이던 것이 곰의 새끼로 변하였다. 깜짝 놀라서 내던 지고 한번 살펴보니 여전히 사람의 아이라 다시 안아보려고 할 즈음에 난데없는 시커먼 곰 한 마리가 와서 아이를 빼앗아 안고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곰이 무서워서 얼른 나가지 못하고 굴속에 서 있는 중에 굴 안이 털썩 무너져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여자가 잠이 깨었는데도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뜨고 보니 꿈에 보던 곰의 다리와 같은 남자의 팔이 가슴 위에 와서 얹혀 있었다. 그 팔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아서 들어 내려놓지 않고 몸을 비키어 이불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팔이 움직이는 바람에 팔 임자가 잠이 깨어서 이불 밖에 나간 몸을 그 팔로 끌어들였다. 날이 새며 남자는 곧 일어나고 여자는 머리를 싸고 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이날부터 사흘 되는 날까지는 여자가 먹도 않고 줄곧 누워 있었고, 나흘 되는 날부터는 오주가 주인의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우격다짐으로 먹여서 할 수 없이 조금조금 먹고 잠간잠간 일어앉기 시작하였고, 십여 일 지난 뒤에는 부엌에 내려가서 둘이 먹을 밥을 짓게 까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여자를 비웃어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연분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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