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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밑골 노름꾼 한치봉이란 자가 저의 첩을 가지고 미인계를 써서 천량 있은
집 왈짜자식을 올가미 씌구고 노름 밑천을 뺏기 시작한 것이 남소문안패란 도적
패의 생기던 시초이었다. 남소문안패가 처음에는 한치봉이의 동류 사오 명에 불
과하였으나, 하나 늘고 둘 늘고 연해 늘어서 한치봉이 당대에 도록에 성명 오른
부하가 사오십 명 좋이 되었었는데 태반은 양반의 집 종들이었고 이외에 매파,
뚜쟁이와 상쟁이, 점쟁이와 무당, 판수와 태수, 돌파리, 보살할미 등속을 부하와
다름없이 부리어서 한치봉이는 남북촌 대가의 밥끓고 죽 끓는 것을 눈으로 보듯
이 알고 지내었었다. 한치봉이의 뇌물이 몇 손을 거치면 지엄한 궐내에까지 들
어가고 또 한치봉이의 청이 몇 다리를 건너면 당로한 재상에까지 미쳐서 연산
당년에는 후궁 희첩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중종 초년에는 반정공신의 힘을 일쑤
보았었다. 조광조 이하 일대 명현들이 조정에 등용되며 한치봉이가 시세의 이롭
지 못함을 진즉 깨닫고 부하들을 조심하도록 단속하였건만, 철없는 아이 서넛이
이전 세월만 여기고 도적질을 좀 크게 하다가 포교 손에 때어가 죽게 되어서 한
치봉이는 부하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길을 뚫어보았으나 뇌물이 손을 잘 거치지
못하고 청이 다리를 잘 건너지 못하여 헛수고만 한 일이 있었다. 이 까닭에 남
곤, 심정, 홍경주의 무리가 명현들을 모함하여 기묘사화를 일으킬 때 한치봉이는
뒤에서 숨은 힘을 가지고 그 무리를 도와주었었다. 우선 남곤이가 김덕순, 박연
중의 해를 받을까 겁을 내서 밤중에 잠자리를 이리저리 옮길 때 한치봉의 친한
계집이 남곤에게 수청을 많이 들었고 한치봉이의 신임하는 부하가 남곤의 좌우
를 별로 떠나지 아니하였었다. 기묘년을 지난 뒤에 한치봉이는 늙어서 들어앉고
그의 아들 백량이가 아비 대신으로 도중 일을 알음하다가 이내 아비의 지정을
물려가지게 되었는데 용심처사가 아비보다 관후하여 부하의 인심을 얻고 또 아
비의 수단을 배운것이 있어서 윤원형의 첩 난정이의 단골 무당이며 왕대비의 스
승 보우의 상좌중들을 친하여 두고 난정과 보우의 세력을 빌려 쓰는 까닭에 포
교들이 한백량이의 용모파기까지 다 짐작하면서 잡을 생의를 내지 못하였다. 남
소문안패의 괴수 한 첨지란 곧 한백량이니 한첨지가 남소문 안에서 일평생을 태
평으로 지내고 지금은 나이 육십여 세라 그 아비의 만년과 같이 도중 대무한 일
외에는 모두 그 아들 한온이에게 쓸어맡기고 젊은 첩들을 데리고 우스개로 소일
하였다. 한첨지의 아들이 윤과 온이 형제인데 맏아들 윤이는 지랄쟁이 병신이고
둘째아들 온이는 기골 든든하고 성미 팔팔한 것이 그 할아비를 많이 닮아서 한
치봉이 대부터 내려오는 늙은 부하가 온이의 행동거지를 보고 “어쩌면 저렇게
할아버님을 잘 담쑤었노.” 하고 감탄할 때가 많았다. 한온이는 나이 불과 이십
사오 세밖에 안된 젊은 사람이건만 대대 꼽사등으로 첩을 두셋씩 두고 그리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부조에 없이 기생방 오입이 심하였다. 오입쟁이에도 패가 있어
서 기생방에서 다른 패와 마주치면 틀개를 놓고 서로 치고 달코 하던 세월이라
한온이는 기생방에서 남을 많이 치는 대신 남에게 가끔 얻어맞기도 하였다.
꺽정이가 노밤이와 졸개를 데리고 한텀지의 큰집을 찾아와서 문간에서 연통하
였더니 서사일을 보는 사람이 쫓아나와서 맞아들이는데 사랑방에 한첨지 부자가
다 없었다. 꺽정이가 서사를 보고 “주인 부자분 다 어디 가셨소?” 하고 물으
니 “녜, 곧 기별하겠습니다.” 서사가 대답하고 사람을 보내서 첩의 집에 가 있
는 한첨지를 청하여 왔다.
한 첨지가 사랑 중문에 들어올 때 좌우 부액한 사람이 쉿소리 질러서 방과 마
루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뜰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꺽정이도 마루 끝에 나셨는
데 한첨지가 치어다보고 “오늘 아침에 까치가 유난히 짖더니 귀한 손님이 오셨
소 그려.” 하고 너스레 좋게 웃으면서 마루 위로 올라왔다. 꺽정이가 한첨지와
같이 방에 들어와서 좌젖ㅇ하고 한훤 수작을 하는 중에 한온이가 머리를 싸매고
안에서 나왔다. 한온이는 첩의 집에서 누워 앓다가 꺽정이 왔단 말을 듣고 일어
나서 큰집으로 오는데 혼자 뒷 골목길로 와서 안으로 돌아나온 것이었다. 꺽정
이가 한온이의 절 인사를 받고 나서 “머리를 어째 싸맸나?” 하고 물으니 한온
이는 상글상글 웃으면서 “기생방에서 드잽이를 놓다가 앞이마를 좀 다쳤습니
다.” 하고 대답하는데 한첨지가 눈살을 찌푸리고 “이 자식아, 남에게 얻어맞은
게 자랑이냐?” 하고 나무랐다. “누가 자랑했습니까?” “자랑 아니면 낯바대
기 뻔뻔하게 기생방 치다가 얻어맞았다구 말씀한단 말이냐?” “기생방 치다가
얻어맞은 걸 기일 건 무어 있습니까?” “기생방 출입한 것을 아비나 손님 앞에
서 드러내놓구 말하는 게 무엄한 일인 줄 모르느냐!” “기생방에 가는 게 무엄
하다면 모를까 기생방에 간 걸 갔다구 바루 말씀하는 거야 무엄하다구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너는 하우불이의 자식이야.” 한첨지 부자간에 오고가는 말
을 꺽정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듣다가 한첨지를 돌아보고 “말인즉 자제 말이 옳
소.” 하고 웃었다. “옳긴 무에 옳단 말이오? 설혹이 옳다구 치더래두 자식으루
아비 말대답하는 법이 어디 있소. 자식은 아예 응석으루 기를 게 아닙디다.” 한
온이가 아비의 잔소리를 가로막으려고 얼른 꺽정이를 보고 “이천서 언제 떠나
셨습니까?” 하고 말을 물었다. “그끄저께 떠났네.” “그끄저께 떠나셨으면 바
루 서울루 오셨습니까?” “영평 도덕여울을 들러왔네.” “더덕여울을 들러오
셨어요? 옳지, 애꾸놈을 보러 가셨습니다그려. 그래 그놈을 보셨습니까?” “봤
네.” “그놈을 어떻게 처치하셨습니까?” “하인삼아서 여기 데리구 왔네.” “
어디 있습니까?” “밖에 있겠지.” “그놈을 좀 불러보겠습니다.” 한온이가 마
루문을 열고 건넌방 편을 바라보며 “거기 누구 있나?” 하고 사람을 불러서 “
청석골 대장께서 데리구 오신 사람을 좀 들어오라구 부르게.” 하고 말을 일렀
디./ 얼마 뒤에 마당에 신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한온이가 윗간 방문을 열고
서 내다보더니 곧 몸을 돌쳐서 아랫간에 앉은 꺽정이를 바라보며 “그놈은 애꾸
눈이라는데 두 눈이 멀쩡하니 사람이 틀리는가 봅니다.” 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밖을 향하고 “게 들어온 것이 누구냐?” 하고 소리쳐 물으니 “소인이올시다.
” ㅎ고 대답하는 것이 졸개의 목소리이였다. “노밤이는 어디 갔느냐?” “밖
에 있습니다.” “들어오라구 불러라.” 졸개가 다시 나가서 노밤이와 같이 들어
온 뒤에 꺽정이가 분부하여 한첨지 부자에게 각각 문안들을 드리게 하였다. 한
온이가 노밤이를 내다보며 “저 꼴에 임아무라구 행세했단 말인가?” 하고 웃으
니 “봐하니 남의 꼴을 웃을 경황두 없으실 것 같습니다.” 하고 노밤이가 말대
꾸하여 한온이는 골이 나서 방문을 탁 소리나게 닫았다.
꺽정이가 노밤이를 앞으로 불러서 말대꾸 함부로 하는 것을 꾸짖은 뒤에 밖에
나가 있으라고 졸개와 같이 내보내고 나서 한온이더러 “그놈이 무어라구 지껄
이든가?” 하고 물었ㄷ. 꺽정이는 한첨지와 수작하느라고 노밤이가 한온이에게
대꾸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병신이 급살한다드니 그눔이 장히
어뚜ㅂ지 않은 놈입니다.” “그눔이 미친 눔같이 시룽시룽하데.” “그따위 놈
을 왜 서울까지 데리구 오셨습니까?” “하인 노릇이라두 하겠다구 따라나서기
에 그대루 데리구 왔네.” “하인으루 내세워두 번때가 있어야지요. 보름보기 병
신 하인을 무엇에 씁니까. 병신두 병신이려니와 얼굴에 전판 겁기가 낀 것이 불
길해 보입니다.” “글쎄.” 꺽정이가 가볍게 한온이의 말을 대답한 뒤 한첨지를
돌아보며 “내가 이번엔 한동안 서울에 있다 갈 테요. 폐를 많이 끼치겠소.” 하
고 말하니 한첨지는 선뜻 “폐가 무슨 폐란 말씀이오? 조석 공궤쯤은 해드릴 힘
이 넉넉하니 염려 마시우.” 하고 대답하였다. “물건두 팔아 줄 게 있소.” “
무슨 물건이오?” “평양 봉물 나머지를 가지구 왔소.” “물목을 가지셨거든
좀 보여주시오.” “물목이 짐 속에 들었을 테니 차차 보시우.” “값진 물건이
많이 있을 테지요?” “거지반 다 값진 물건이오. 서림이가 겉가량 잡는데 상목
삼천동인가 사천 동 값어치가 된다ㅜ 합디다.” “아이구 굉장하구려. 그렇지만
물건값이란 작자 만나기에 달렸으니까 겉가량 가지구야 알 수 있소.” “두구두
구 작자를 구해서 잘 팔아보시우.” “그건 다시 부탁하실 것두 없소.” 한첨지
가 아들을 보고 “이 사랑을 쓰시게 해두 좋지만 사랑이 번라할 때가 많으니 어
느 집 한 채를 치워서 조용히 기시게 해드리는 게 좋겠지.” 하고 꺽정이의 거
처할 처소를 의논하였다. 한첨지의 집은 큰집이란 것이 간수로 이십여 간 밖에
안되고 그외에는 십여 간 오륙 간씩되는 작은 집이 수십 채 큰집 좌우에 늘어
있는데 그것은 대개 양대 첩의 집들과 부하의 살림집들이었다. “옆집을 치워서
기시게 하구 조석을 큰집에서 공궤하두룩 하지요.” “옆집이라니 어느 집 말이
냐?” “지금 제가 쓰는 집 말입니다.” “그거 좋겠다. 그 집 안방에 기시게 하
구 바깥방을 네가 써라.” “바깥방은 데리구 오신 하인들을 주어야지요.” “그
럼 너는 다른 집으루 옮길라느냐?” “건너방이 있으니까 건너방 쓰지요.” “
네가 가까이 뫼시구 있으면 여러 가지루 배울 것두 많구 좋겠다.” 아비 말끝에
한온이가 꺽정이를 보고 “참말루 칼 쓰는 법을 좀 가르쳐 주실랍니까?”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어려울 거 없지.” 하고 대답하였다. “칼을 얼마 동안 배우
면 잘 쓰게 됩니까?” “칼을 잘 쓰자면 한이 없네. 예사 검객 소리를 들을 만
큼 쓰재두 몇 해 동안 애를 써야 할 겔세.” “아이구 그거 어디 배우겠습니까.
” “법수만 대강 배우자면 한두 달에두 배울 수 있네.” “그럼 법수만 좀 가
르쳐 주십시오.” “그러게.” 누가 어느 틈에 일렀던지 안에서 주안상이 한 상
나오는데 안주를 떡벌어지게 차린 품이 예사 잔칫상만 못지 아니하였다. 꺽정이
가 한첨지와 대작하여 술을 네댓 잔 마신 뒤에 앞에 돌아온 술잔을 한온이에게
내어주며 “자네두 한잔 먹게.” 하고 권하니 한온이가 “저는 술을 못 먹습니
다.” 하고 술잔을 받지 아니하였다. “아버지 앞이라 어려워서 안 먹나?” “본
래 접구두 못합니다.” 한텀지가 꺽정이를 보고 “저 자식이 술을 먹을 줄 알면
행여나 아비 앞이라구 안 먹겠소?”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한첨지와 한온이를
반반씩 갈라보면서 “사내 대장부가 술을 못 먹다니 될 말인가. 칼버덤두 술을
먼저 내게 배우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한첨지의 주량이 꺽정이를 당하지 못하여 꺽정이가 아직 술 먹은 것도 같지
않을 때 한첨지는 벌써 거나하게 취하였다. “내가 소시적엔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며 술을 먹어두 끄떡없던 사람인데 되지 못한 낫살을 먹은 뒤루 술이 조금만
과하면 술에 감겨서 배기질 못하우.” “우리게 오두령은 나이 육십 줄이건만
지금두 가끔 젊은 사람들하구 술타령으루 밤새임을 하우.” “그자가 계양산 괴
수의 심부름으루 우리게 다닐 때 나이 이십 남짓했었을까. 그런데 벌써 오십이
넘었단 말이지.” “장인의 심부름으루 서울을 자주 왔었다구 오두령두 말합디
다.” “그때 우리는 계양산 졸개 개도치루만 알았었소.” “개도치가 오두령의
이름이오?” “같이 기시면서 이때것 이룸두 모르셨소?” “자기가 말 안 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소.” “그러면 그자의 행적두 모르시겠구려.” “무
슨 행적이오?” “그자가 계양산 괴수의 딸 원씨 여편네와 해로한다지요. 그 원
씨 여편네가 내 숙모 되었던 사람이오. 나버덤 나이 적은 삼촌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삼촌이 이십 안에 돌아가서 숙모가 청춘과부로 친정에 가 있는 것을 개도치
가 달구 도망했다구 했는지 그 속은 모르지요. 그때 우리 아버지는 죽은 삼촌의
뒤를 이어주려구 양자할 아이를 물색하던 둥인데 계양산 기별을 듣구 화를 내기
시작하더니 얼마 동안은 매일같이 화를 내서 집안 사람들이 모두 들들 볶였었
소.” “과부는 임자가 없으니까 설혹 꾀어냈대두 행적이 나쁠 건 없소.” “그
렇지요. 나는 그때두 숙모 일이 잘됐다구 말했었소.” 한첨지가 옛날 이야기를
하는 끝에 꺽정이더러 “이장곤 이찬성하구 어떻게 되시지 않소?” 하고 물었
다. “이찬성 부인이 우리 아버지하구 이성사촌이오.” “그러면 이찬성이 이성
오촌 고모부가 되니까 그 자제들하고 육촌이시구려.” “촌수를 따진다면 그렇
게 되겠지요.” “상종이 없으시오?” “없소.” “이찬성의 유모의 아들 삭ㄱ불
이란 사람을 아시우?” “그 사람을 보진 못했지만 말은 많이 들었소. 우리 부
모의 혼인중매두 그 사람이 하구 우리 선생님의 소실 중매두 그 사람이 했답디
다.” “외조 되시는 분은 양주서 푸주하구 선생님 되시는 분은 동소문 안에서
갖일하셨지요?” “그렇소.” “외조는 우리 아버지 수하에 있던 이구 선생님의
소실은 우리 아버지하구 같이 살던 이요.” “그럼 삭불이란 사람이 그 여편네
를 빼돌렸더란 말이오?” “아니오. 그 사람이 그 여편네를 빼돌렸더란 말이오?
” “아니오.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께 신임을 받던 사람인데 그런 짓을 할 리
가 있소. 우리 아버지가 노래에 첩이 맣아서 귀찮다구 하나만 남겨두구 그 나머
지는 다 내보냈었는데 그이두 내보낸 사람이오.”
한첨지의 옛날 이야기에 술판이 식어서 꺽정이가 한첨지더러 술을 그만두자고
말하여 한온이가 사람을 불러서 주안상을 치우게 하였다.
꺽정이가 거처할 처소로 작정된 작은집 안방은 한온이가 사랑으로 쓰는 방이
라 방 치장이 재상의 사랑과 같아서 병풍 방장이 둘러칭고 보료 방석이 들이깔
리고 놋요강, 놋타구 등속이 늘어놓였었다. 한온이가 문서궤, 세간궤 궤 몇 개반
건넌방으로 옮겨가고 그 나머지 방 치장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꺽정이
에게 내어주었다.
한첨지 부자가 꺽정이를 칙사 대접하듯 하는데 당세 호걸을 공경하는 뜻도 잇
으려니와 일등 물주를 후대하는 뜻이 없지 않았으니 남소문 안에서 청석골 재물
을 팔아서 이를 나누는 까닭이었다.
꺽정이가 졸개는 서울 구경을 대강 시켜 광복산으로 돌려보내고 노밤이만 수
하에 머물러 두었는데 노밤이는 주인집의 부리는 사람들과 바깥방을 같이 썼다.
노밤이가 언죽번죽 이야기를 잘하고 익살맞게 우스운 소리를 잘하고 더욱이 천
하만사를 무불통지로 잘알아서 여러 사람이 보름보기라고 웃지 못하고 시골뜨기
라고 깐보지 못하여 거연히 바깥방에서 영위 노릇을 하게쯤 되어서 여러 사람의
출물로 식전에 팥죽집과 저녁에 모주집을 하루도 빼지 않고 다니었다. 꺽정이의
심부름은 노밤이 아니라ㅗ 할 사람이 많아서 노밤이가 조석 문안 외에 별로 꺽
정이 앞에 들어오지 아니하여 어느 날 아침 꺽정이가 노밤이의 문안릉 받고 나
서 “낮에는 너를 꼴두 볼 수 없으니 날마다 낮잠 자느냐?” ㅏ고 꾸짖듯이 물
으니 노밤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제가 낮잠속이 술명합니다. 봄에는 노곤해
서 낮잠 자구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낮잠 자구 가을에는 볕이 따거워서 납잠 자
구 겨울에는 밖이 추워서 낮잠 잡니다. 이렇게 사시사철 잘 자는 낮잠으루 서울
온 뒤는 아직 한번 자지 못했습니다.” 하고 길게 늘어놓아서 대답하였다.
“지껄이기 입아귀두 안 아프냐? 그래 낮잠을 안 자면 무어하느냐?” “구경
하러 돌아다녔습니다.” “무슨 구경이냐?” “서울 안을 돌아다녔으니 서울 구
경입지요.” “서울 구경이 좋드냐?” “겉구경만 하구 속구경을 못 해서 아직
은 좋은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겉구경이란 게 다 무어냐. 별눔의 소리를
다 듣겠다.” “술집 앞에 달린 용수만 보구서야 서울 술맛이 단지 쓴지 알 수
있습니까. 또 기생집 앞에 매인 말만 보구서야 서울 기생 낯바대기가 이쁜지 미
운지 알 수 있습니까. 제 말이 거짓말 아닙지요.” “수다스럽게 지껄이지 말구
고만 나가거라.” 노밤이는 각골하인 본새로 녜 소리를 길게 하고 밖으로 나갔
다. 한온이의 부리는 사람들이 노밤이를 둘러싸고 “대장 존전에서 말대답을 막
농판으루 하네그려.” “청석골 대장이 성미가 무섭다다니 거짓말이군.” “우리
집 젊은이는 말할 것두 없구 사람 좋은 영감이라두 우리가 그런 말대답을 하면
당장 초죽음을 시킬걸.” 하고 이 사람 한마디 저 사람 한마디 지껄이는데 노밤
이가 틀을 짓고 “자네네들이 아직 문리가 안 났네. 내게 강미를 바치구 글을
배우게. 남의 부하 노릇두 좀 편히 하려면 대장이구 괴수구 길을 잘들여놔야 하
네.” 하고 말하였다. “대장을 어떻게 길들인담.” “무서운 호랭이 새끼두 길
들일 수 있는데 사람의 자식을 길들이지 못한단 말인가?” “길들이는 묘득이
있거든 우리들 좀 가르쳐 주게.” “묘득이란 말루 가르치기 어려운 것이야. 나
하는 것을 보구들 매두게.” “우리 집 젊은이를 한번 길들여 보겠나?” “어렵
지 않지. 이거 마찬가지야.” 하고 노밤이가 손바닥을 여러 사람 앞에 내밀고 한
두 번 뒤집어 보이었다.
한온이가 낮에는 도중 일을 보느라구 큰집 사랑에 많이 가 있고 또 밤에는 첩
재미를 보느라고 첩들의 집으로 돌아다니고 꺽정이 있는 집 건넌방은 명색 자기
방으로 쓴다고만 하였지 밤에 와서 자는 일이 통히 없을 뿐 아니라 낮에 와서
앉는 일도 별로 없었다. 밤낮 비어두는 방에 화롯불을 담았다 파냈다 하고 촛불
을 켰다 껐다 하고 이부자르를 깔았다 개었다 하는 것이 공연한 군일 같아서 상
노아이는 성가시게 생각하여 노밤이더러 “건넌방을 아주 폐방하두룩 해보겠소?
” 하고 물으니 노밤이는 상노아이의 얼굴이 반반한 데 욕심이 없지 아니하나
여러 사람과 섞여 자는 까닭에 욕심을 풀지 못하는 터이라 “폐방하두룩 하느니
우리 둘이 써볼라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더러 쓰랍디까?” “우
리가 쓰면 쓴느 게지.” “청석골 대장께서 말씀하시면 혹시 쓰게 될까 그 외엔
누가 말하든지 어림없소.” “너의 주인양반의 허락은 나중 받을 셈 잡구 우리
둘이 오늘밤부터 건넌방에 들어가서 자자.” “들키면 경칠라구요.” “밤중 지
난 뒤 들어가 자구 어뜩새벽에 일어나 나오면 들킬 까닭이 없지 않으냐?” “누
가 그 따위 구차스러운 짓을 한단 말이오? 나는 싫소.” “싫거든 고만둬라. 나
혼자 들어가 잘 테다.”
이날 밤부터 안방의 꺽정이가 취침한 뒤에는 노밤이가 슬그머니 건넌방에 들
어와서 한혼이의 이부자리를 깔고 덮고 자다가 새벽녘이면 바깥방으로 나가서
개잠을 잤다. 며칠 지난 뒤 어느 날 아침에 한온이가 건넌방에 와서 무슨 문서
를 꺼내려고 하다가 문서궤위에 이 한 마리가 기는 것을 보고 다시 살펴본즉 기
는 놈 외에 엎드린 놈도 있는데 마릿수가 하나둘이 아니라 한온이는 이도 잡지
않고 궤도 열지 않고 큰소리로 상노아이를 불렀다. 상노아이가 밖에서 들어오자
한온이가 곧 궤 위를 가리키며 “이리 와서 이거 좀 봐라. 이게 무어냐?” 하고
소리질렀다. “이올시다.” “누가 이를 몰라서 묻느냐? 이놈아, 이 이가 대체
어디서 퍼진게냐?”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너 외에 또 이 방에 드나드
는 사람이 누구냐?”
상노아이는 여짓 노밤이를 대려다가 영이 되거든 대려고 아무소리 아니하였
다. “이가 궤 위에까지 올라왔으니 다른 데 없을 리가 있나.” 하고 한온이가
가만히 보료를 들여다보더니 “이거 봐라. 여기 전판 이로구나.” 하고 벌떡 일
어섰다. 왕니 가랑니가 보료 바닥에서 슬슬 기고 또보료 가장자리에 주줄이 맺
혔었다. 한온이가 온몸이 군실거리며 눈앞에 해끔해끔한 것이 모두 이로 보였다.
“누가 이를 갖다 방에다 뿌렸단 말이냐! 이게 대체 웬일이냐!” 하고 한온이는
옷자락을 떠느라고 한참 정신이 없었다. 건넌방 이소동에 꺽정이는 안방에서 내
다보고 노밤이와 다른 아랫사람들은 바깥방에서 들어왔다. 노밤이가 한온이를
보고 “사람 없는 빈방에서 사는 이는 복니올시다. 죽이지 말구 가만둡시오.”
하고 말하는 것을 한온이가 볼멘소리로 “복니란 게 다 무어야?” 하고 핀잔 주
듯 말하니 노밤이는 다시 상노아이를 보고 “복니를 죽이라시거든 잡아서 나를
다구. 내가 취종하겠다.” 하고 말하였다.
노밤이의 이를 취종한다는 말이 하고 두스워서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한온이
까지 싱긋 웃었다. 노밤이가 여러 사람의 웃는 것을 보고 뒤변덕스럽게 곤댓짓
을 하며 한온이를 보고 “이에 복니가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저는 복니 서 되
서 흡 가진 사람하구 같이 자본 일이 있습니다.” 말하고 이야기하라기를 바라
는 모양으로 한참 있다가 제풀에 다시 “이야기하께 들어봅시오.” 하고 이야기
하기 시작하였다.
“제가 십여 년 전에 황해도 재령 제홍원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다른 행인 두
엇하구 같이 잤습니다. 그때 제 옆에서 자던 사람이 새벽 일찍 남버덤 먼저 일
어나서 봇짐에서 솔 하나 되 하나를 끄내더니 바지 저구리를 벗어놓구 이를 솔
루 쓸어모아서 되르 되는데 이가 서 되가 넘겠지요. 끔찍끔찍합디다. 그 사람이
이를 되어 보구 나서 서 되 서 홉 이가 밤새 두 홉 가량이나 축났다구 혼자 중
얼거리다가 저를 돌아보구 내 이가 임자의 새 옷 냄새를 맡구서 많이 옮아간 것
같으니 미안하지만 옷을 좀 보게 벗어주시우 하구 말합디다. 저는 몸이 한참 군
질군질해서 옷을 벗어보구 싶은 판이라 두말 않구 얼른 벗어주었습니다. 제 옷
에서 쓸어 낸 이가 한 옴큼 착실히 됩디다. 거지 도회청에 가서 누데기옷들을
벗겨놓구 이를 잡히드래두 하루에는 그만큼 많이 모으기 어려울 겝니다. 나중에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본즉 그 사람이 어디 손으루 갔다가 오래 비어두었던 방에
서 그 이를 올렸는데 복니라구 잡아죽이지 말라구 일러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대
루 내버려 두었더니 과연 그 이를 올린 뒤루 우환이 없구 재난이 없구 집안 형
세가 불일 듯했답니다.”
노밤이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다시 한온이를 보고 “복니를 몸에 올려두시지
않구 잡아 없애실 테면 저를 줍시오. 제가 얼마 동안 이 건느방에 들어와서 자
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한온이가 노밤이의 말은 대답 않고 상노아이에게 문서
궤, 세간궤, 보료, 이부자리 등속은 다른 데로 치우라고 이르고 나서 “이는 떨
어 버리든지 죽여 없애든지 맘대루 해라.” 하고 일렸다. 한온이가 상노아이에게
이르는 말이 노밤이에게 반 허락하여 주는 폭이라 노밤이는 곧 “복니를 제게
내주시니 황감합니다.” 하고 허리를 두세 번이나 굽실굽실하였다. 이날 밤부터
노밤이가 드러내놓고 건넌방에 들어와서 자게 되었는데 상노아이더러 “인제는
너두 같이 들어가 자자.” 하고 말하니 상노아이가 “나는 복니 싫소.” 하고 도
리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싫다면 복니라두 잡아 없애마.” “그 이가 대체 노
서방 몸에서 퍼진 것 아니오?” “내가 이꾸러긴 줄 아느냐? 거기는 내 이두 있
구 네 이두 있구 또 다른 사람의 이두 있다. 새벽마다 불 켜놓구 앉아서 잡아모
은 것이다.” “이를 잡아서 옷속에 넣었다가 밤에 건넌방에 들어가서 퍼쳐놨
소?” “왜 남의 이까지 내 옷에 넣는단 말이냐? 종이 봉지에 모았다가 새벽에
건넌방에서 나올 때 이봉지를 보료 위에두 떨어좋구 또 궤 위에두 떨어놨지.”
“별 궁흉스러운 짓을 다 하는구려.” “어른더러 궁흉스러운 짓이라니 버릇없
는 고연 놈이로구나.”
노밤이가 상노아이를 데리고 건넌방이 들어와 자게 된 지 수일후에 한온이가
노밤이를 보고 웃음의 말로 “복니를 많이 올렸나?” 하고 물으니 노밤이는 천
연덕스럽게 “제가 복이 없는지 이가 차차루 없어져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한온이가 이마 다친 거이 다 나은 뒤에 꺽정이에게 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온이는 성질이 물건이고 일이고 무엇에든지 물리기를 잘하고 싫증을 쉬이 내
는 대신 처음에 탐도 잘 내고 재미도 쉬이 붙여서 물건이면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하고 일이면 당장에 끝을 낼 것같이 서두는 사람이라 한동안 열일 스
무일을 다젖히고 칼에만 골똘하여졌다. 치고 찌르는 여러 가지 법을 배우고 익
히는데 한온이가 꺽정이를 어렵게 알아서 가르쳐 내라 마라 무랍없이 하진 못하
건만 그래도 많이 꺽정이를 성가시게 하였다. 어느 날 밤에 한온이가 그 아버지
에게 붙들려서 도중 일을 여러 가지 결처하고 스무날께 달이 놓이 올라온 뒤에
꺽정이 처소에 와서 보니 안방 건넌방에 모두 불이 꺼졌었다. 한온이가 그대로
나가려다 말고 안방 머리맡 창 앞에 와서 “선생님, 벌써 취침하셨습니까?” 하
고 소리하여 보았다. 칼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꺽정이를 서냉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방안의 꺽ㄱ정이가 막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어째 이렇게 늦
게 왔나?” “달이 밝은데 어느 새 주무십니까?” “일없이 오래 앉았기 심심해
서 일찍 누웠네.” “약주 좀 잡수시렵니까?” “아까 밤참을 먹었는데 또 무슨
술을 먹어?” “밤참 잡숴올 때 제가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별말을 다하
네. 좀 들어오려나?” “선생님께서 곤하시지 않거든 낮에 가르쳐 주신 남의 칼
막는 법을 좀 익히게 해줍시오.” “우선 들어와서 불이나 켜놓게.” “덧문을
안 거셨습니까?” “안 걸었네.”
한온이가 방에 들어와서 화로에 묻힌 숯불덩이를 파내 가지고 촛불을 붙여놓
는 동안에 꺽정이는 일어나서 허리띠 대님을 다시매었다.
“달이 밝다니 마당에 나가서 한바탕 뛰어볼까.” “주무시다가 찬 데 나가셔
서 감기 드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나이 사십에 아직 감기 고뿔이란 건 모르
네.” “그럼 마당에 나가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게, 나가세.”
한온이가 꺽정이의 뒤를 따라서 방 밖에 나오며 곧 마루구석에서 나무로 칼
모양 만든 것을 두 자루 찾아 내오는데 꺽정이가 보고 “그거 하나는 날 주구
자네는 방에 들어가서 내 환두를 가지구 나오게. 내가 그걸루 환두를 막아 보여
줌세.” 하고 말하였다.
날이 서리 같은 환도를 빼어든 한온이가 목도를 든 꺽정이와 달 아래 마주섰
다. “자네 재주껏 쳐보게.” “칼날이 혹시 몸에 스치기라두 하면 어떻게 합니
까?” “그런 사정 두지 말구 나는 죽일 것같이 치게.”
한온이가 내리치고 후려치고 치다 못하여 찔러 보고 찌르다 못하여 다시 쳐서
치고 찌르는 법을 배운 대로 다ㅏ였건만 칼이 한번도 꺽정이 몸에 범접하지 못
하였다. “이제 막는 묘득을 대강 짐작하겠나? 자, 내가 치께 자네 막아보려나.
”
꺽정이가 목도를 치어들어 세로 치고 비껴들어 가로 치고 하는데 세로 내려올
듯 가로 나오고 가로 나올 듯 세로 내려와서 한온이가 더러 막아내기도 하였지
만 많이 얻어맞았다. 꺽정이가 아무쪼록 힘들이지 않고 살짝살짝 건드리듯 치건
마는 한온이는 얻어맞을 때마다 입이 딱딱 벌려지고 아이쿠 호리가 저절로 입에
서 나왔다.
건넌방에서 자던 노밤이와 상노아이가 어느 틈에 일어나 나와서 댓돌 위에 서
서 구경들 하였다. 꺽정이의 목도를 받지 못하고 얻어맞을 때 구격ㅇ하는 노밤
이가 여러 번 아이구 소리를 질러서 한온이는 자기 흉내를 니는 줄로 생각하고
꺽정이더러 “선생님, 저자 좀 보십시오. 흉내를 자꾸 냅니다.” 하고 고자질투
로 말하니 꺽정이가 댓돌 위를 향하고서 청천벽력 같은 큰소리로 “이눔아 네가
뉘 숭내를 내느나!” 하고 호령을 내놓았다. 아무 죄도 없는 상노아이는 노밤이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을까 겁내는 것같이 얼른 뒤로 들어서는데 노밤이 당자는
댓돌 아래로 내려오며 “저의들은 숭내낸 일 없습니다.” 하고 발명하였다. “아
이구 소리는 숭내가 아니구 무어냐!” “아니올시다. 주인양반께서 자꾸 얻어맞
는 게 보기에 딱해서 아이구 소리가 절루 나왔나 봅니다.” “무엇이 어째, 이놈
아 네가 좀 얻어맞구 싶으냐!” “저더러 좀 받아보란 말씀입니까. 저야 설마 주
인양반같이 얻어맞기만 할라구요.” “저눔이 사람인가 무언가.”
한온이가 꺽정이를 보고 “저자가 칼쓸 줄을 압니까?” 하고 물어서 꺽정이는
노밤이를 꾸짖다 말고 한온이를 돌아보며 “저깐 눔이 무슨 칼쓸 줄을 알겠나.
” 하고 대답하였다. “저와 어떻습니까?” “그건 모르겠네.” “제가 한번 데
리구 시험해 볼까요?” “그래 보게나. 자네가 만일 창피 볼 지경이면 내가 거
들어 줌세.”
꺽정이가 노밤이더러 마루에 있는 목도를 가지고 오라고 이르고 자기의 가졌
던 목도는 한온이를 주었다. 한온이와 노밤이는 목도를 들고 마주 서고 꺽정이
는 환도를 집에 꽂아서 한손에 뒤고 한혼이 곁에 가까이 섰다. 꺽정이 입에서
자 소리가 한범 떨어지며 한온이와 노밤이의 목도가 서로 오울렸다. 노밤이의
칼쓰는 법이 맹랑치 않아서 서투른 한온이보다 훨싼 낫건마는 한온이 옆에 섰는
꺽정이가 노밤이 몸에 빈구석이 나는 것을 노려보며 더깨니 다리니 칠 곳을 뚱
겨주어서 노밤이가 한온이보다 훨씬 더 많이 얻어맞았다.
이 뒤에 한온이가 수차 노밤이와 같이 칼쓰는 법을 익히는데 꺽정이가 보지
않을때는 노밤이가 흉물을 피워서 일부러 많이 지는 까닭에 한온이는 노밤이를
호락호락한 적수로 생각하여 꺽정이에게 배우는 것을 노밤이 데리고 익히게 되
었다.
노밤이가 한온이와 친근하여진 뒤 바깥방 여러 사람들 틈에서 더욱 코가 우뚝
하여졌다.
한온이가 칼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보름 되었을 때 성천 기생 소월향이가 서
울 와서 이름이 났었다. 한온이는 수월향이 집에 다니느라고 칼 배우던 것을 잊
어버릴 뿐 아니라 꺽정이 처소에 오는 것까지 번수가 드물어졌다. “자네 요새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꺽정이가 물으면 한온이는 “도중에 일이 좀 있습니다.
” 대답하고 “밤저녁에는 더디 가는 데가 있지?” 하고 꺽정이가 넘겨짚어 물
으면 한온이는 “여새 웬일인지 저녁때만 되면 신열이 나서 초저녁부터 자리 보
전합니다.” 핑계로 대답하였다. 얼마 동안 밤에는 현형도 아니하던 아니하던 한
온이가 어느 날 밤에 왔는데 꺽정이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 눈치를
보이었다.
꺽정이가 한온이의 눈치를 보고 “자네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물으니 한
온이가 입으로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면서도 눈치로는 여전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지 할 말이 있거든 어려워 말구 하게. 혹시 내가 와서
묵는데 비편한 일이 생겼나?”
꺽정이가 의심쩍어 하는 말에 한온이는 펄쩍 뛰다시피 하며 “천만의 말씀이
올시다.” 대답하고 한참 있다가 상글상글 웃으면서 "선생님, 전에 더러 기생방
에 가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건 왜 묻냐?“ ”글쎄,혹 가보신 일이 있
나 말씀이올시다.“ ”기생들 데리구 놀기는 했지만 기생방에 가본 일은 없네.“
”선생님이 소시때 서울 기셨다며 기생방에두 한번 못 가보셨단 말씀입니가?“
”자네 알다시피 내가 천인 대접받던 사람으루서 무슨 주제에 기생방 출입을 했
겠나.“ ”기생방에 한번 가보실랍니까? 가신다면 제가 뫼시구 가겠습니다.“ ”
한 나이라두 젊을 때 같으면 혹하구 가겠네만 지금 나이 사십에 기생 오입이 당
한가.“ ”나이 오십,육십 된 건달두 수두룩합니다.“ ”나이 많은 건 고만두구
래두 내가 지금 상제 몸일세.아무리 상제 노릇은 옳게 안 하지만 기생방에는 갈
염의가 없네.“ ”상제님 복색을 안하셨기에 저는 단상하신 줄루 알았습니다.“
”내 복색은 말할 것이 없네.집에 있을 때는 혹시 두건두 쓰구 베중단두 입지만
밖에 나올 때는 진사립에 남철릭으루 관원 복색을 차리기두 허구 벙거지에 군복
으루 군사 복색을 차리기두 하구 기외에두 갖은 복색을 다 차리네.“ ”하여튼
지 선생님께서 색에는 범염하신가 봅니다.“ ”기생방에 안 가면 색에 범연한
가?“ ”만약 색을 좋아하시면 첩두 두시구 오입두 하실 것 아닙니까.“ ”이때
까지는 그런 데 유의할 처지두 못 되구 겨를두 없었지만 앞으루야 누가 아나.“
”우선 요새만 하더래두 긴긴 밤에 혼자 주무시기 고적하지 않습니까?“ ”고적
하니 어더ㅎ게 하나?“ ”자는 나이 젊은 탓인지 몰라두 무슨 변통이든지 하지
선생님처럼 여러 날 혼자 자진 못하겠습니다.“ ”자네가 나 위해서 무슨 변통
을 해줄 맘이 있나?“ ”꾸중만 안 하신다면 논다니구 들어앉은 게구 얌전한 걸
루 얼마든지 끌어다 드리지요.“ ”자네 덕에 내가 기집복이 터지는가베.“ ”기
집 보는 눈두 다 각각인데 선생님은 어떤 기집을 좋아하십니까?“ ”기집이란
허리 아래는 무비일색이라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선생님하구는 기집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여보게,지금 서울 기생 중에 옛날 송도 황진이나 성주 성산
월이나 평양 옥매향이 같은 절등한 미인이 혹시 있나?“ ”성천 기생 소월향이
가 근래 이름이 높습니다. 옛날 명기에 대면 어떨는지 모르지만 당세 인물루는
절등하다구 할 만합니다.“ ”한번 불러다가 데리구 놀 수 없을까?“ ”소월향
이를 불러다가 놀게까지 되자면 한번 틀개를 단단히 놔야 할 판입니다. 그러지
않아두 선생님께 청을 해볼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한온이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말씀할게 들어 주시렵니까?“ 다지기부터 하고 꺽
정이의 기색을 살피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오시든 때 저 머리 싸맨
것 보셨지요? 제가 기생방에 다니다가 그런 소조를 전에두 수차 당했지만 지난
번같이 분한 꼴을 본 일은 처음입니다. 전에는 대개 저의 패의 실수로 시비가
났었구 또 서루 치는 판에 다른 패 사람두 깨어지구 터지구 해서 피장파장이나
되었지만 지난번에는 저의 패만 난장개가 되두룩 얻어 맞았는데 그나마 시비두
저편 패 사람이 일부러 실수해 가지구 낸 시빕니다..그나 그뿐인가요. 그날 밤에
부서진 기생의 방안 세간을 제가 하루 새루 해보냈더니 기생년이 받지 않구 돌
려보냇습디다. 그때 기생년이 세간 영거해 간 사람을 불러들여서 방안의 새 세
간을 보이면서 노인정 활량패에서 이렇게 먼저 해보내서 받았으니까 두벌씩 받
을 염의가 없다구 하구 받지 않더랍니다. 제 꼴이 무슨 골이 됐습니까. 화가 어
떻게 나든지 깨진 앞이마가 아픈 것두 잊어버리구 그 세간 한 벌을 모두 제 손
으루 깨두들겨 부셔버렸습니다. 그러구 홧병을 겸해서 며칠 동안 앓아 누웠다가
선생님께서 오시던 날 비로소 기동을 하기 시작햇습니다. 그날 밤 일은 이야기
하기두 창피하지요만 선생님께서 심심풀이루 들으시겠다면 이야기를 한번 자초
지종 다하겠습니다. 장찻골다리 이편에 장악원 시사하는 소흥이란 기생이 있는
데 풍류 잘하구 소리 잘하기루 지금 서울 안에서 첫째 꼽는 기생입니다. 제가
그날 밤에 사람 오륙 명 데리구 놀러 나섰다가 소흥이게를 갔었습니다. 마침 밤
이 조용해서 기생을 데리구 허튼수작을 하는 중에 노인정 활량패들이 우 몰려들
어옵디다. 전에두 더러 마주친 일이 있어서 안면들은 대개 짐작하는 터이지요.
노인정 활량패에는 무장대가의 자질두 더러 끼여서 세력 있구 재물 있구 힘꼴
쓰는 장사까지 있는,서울 안 기생방을 주름잡구 돌아다니는왈짜패인 가닭에 저
의는 이런 패하구 시비를 내지 않으려구 처음부터 조심들 했습니다. 기생방에서
다른 패 사람하구 같이 합석할 때는 일언일동을 맘대루 하는 법이 없이 반
드시 말을 먼저 좌중에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기생방 격식입니다. 저편 사람들
은 기생에게 말두 붙이구 앉았던 자리두 옮기구 번찔 말을 돌리는데 이편 사람
은 가만히 앉은 대루 앉아서 말두 별루 돌리지 않았습니다. 저편에서 처음부터
트집잡구 싶어 애쓰는 눈치가 보였지만 워낙 이편에 실수가 없으니까 무슨 트집
을 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리가 무사했으나 제가 이런 자리에오래 앉았
기 재미없어서 같이 간 사람들을 데리구 차차 일어서려구 하는 중에 저편 사람
이 발론해서 토막돌림으루 시조 하나씩을 부르게 됐습니다. 저편 이편에서 두서
넛이 점잖은 시조들을 부르구 난 끝에 제가 세사금삼척을 불렀습니다. 초장을
시작할 때 저편 사람들이 벌써 서루 눈짓하고 웃습디다. 이건 다른 가닭이 아니
지요. 종장에 가서 동각의 설중매 디리고 완월자취라구 부르기만 하면 시조루
트집잡잔 생각이지요. 저두 다 아느 장단입니다. 누가 그렇게 부르나요. ‘설중
에 다리고’를 ‘설중매 피었으니’루 고쳐 불렀습니다. 저편에서 헛다리를 짚
었지요. 제 다음에 저편의 젊은 놈 하나가 부를 차례가 되었는데 기탄없이 ‘옥
으로 함을 파고’를 내놓습디다. 이런 드러운 시조를 부르는 건 좌중에 있는 다
른 사람 얼굴에 침을 뱉는 것버덤두 똥을 칠하는 셈입니다. 하두 괘씸해서 제가
시비를 걸어가지구 구경 소조를 당했습니다. 선생님, 생각 좀 해보십시오. 일이
분하지 않습니까?“ ”옥으로 함을 파는게 어째 드러운가?“ ”선생님, 시조를
모르십니다그려. ‘옥으로 함을 파고 너와 나와 너놓은 뒤 금거북 자물쇠를 어
쓱비쓱 잠겨놓고 창천이 우리 뜻 받아 열쇠 없이 ’라는 시조가 잇습니다. 그
사의가 드럽지 않습니가?“ ”사의가 좋은데 왜 드럽다나?“ ”그런 시조는 점
잖게 노는 자리에서 부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시조 이야기는 고만두구 저의 남
은 이야기나 마저 들어 주십시오.“ 한온이가 정작 청할 말은 하지 않고 또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여 노인정 한량패에게 분풀이하기 전에는 다시 놀러다니지
않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달포 동안 기생방에 발을 끊었다고 이야기하고 소월향
의 인물 칭찬이 하도 굉장하기에 작정한 마음을 깨뜨리고 소월향에게를 가보았
다고 이야기하였다. 한온이가 저녁때마다 신열이 나서 앓았다고 전에 거짓말한
것을 엄적하려고 칠팔 일동안 매일 놀러간 것을 바로 말하지 않고 흡사 한두 번
보러 간 것처럼 말하였다. "대체 내게 청할 일은 무엇인가. 소월향이게를 같이
놀러가잔 말인가?”꺽정이가 한온이의 긴 이야기를 중간에 가로막았다. “선생
님께서 가신다면 뫼시구 가다뿐입니까.”“자네가 내개 청하고 싶다는 일이 무
어냐 말일세.”“말씀하기 황송하지만 노인정패에게 분풀이를 한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분풀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저의가 당한 것처럼 한번 망
신을 시키면 속이 시원하겟습니다.”“이 사람 나를 기생방 매질꾼으로 내세우
고 싶단 말인가.”“천만의 말씀입니다.”“그럼 노인정에 가서 풍파를 내잔 말
이야?”“노인정에 가서는 사정의 기둥뿌리를 솟쳐놔두 분풀이가 못됩니다.”“
그러나 기생방에 가서 애질하잔 말이 아닌가?”“선생님께서 매질해 줍시사구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노인정패에 장사 하나가 있는데 그 장사 하나만 꿈찍 못하
게 해주시면 그 나머지는 저희들이 능준히 해낼 수 있습니다.”“장사라니 힘이
얼마나 세든가?”“제 눈으로 본 것은 소흥이 집에 큰 청동화루가 하나 있는데
숯불이 가득 담긴 화루전더구니를 한손으로 쥐구 쳐들어서 이리저리 옮겨놓습니
다.”“그게 그리 장한가?”“선생님께서는 그런 힘을 우습게 보실는지 모르지
만 저의 보기에는 그것두 엄청납니다. 제 사람 육칠 명이 다들 힘꼴 쓰는 장정
이건만 꼼짝들 못하구 그놈 한 놈에게 얻어맞다시피 햇습니다.”“기생방에 가
서 힘자랑하는 것이 좀 창피한 일이지만 자네 처음 청이니 한번 들어줌세.”“
인제는 제가 분을 풀게 됐습니다. 벌써부터 선생님께 한번 청하구 싶은 것을 어
려워서 못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소월향이 집에를 갔다가 노인정패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못 들어가고 왓습니다. 소월향이 집 문앞에서 들어설 때 치가
곧 떨립니다.”“그럼 지금 다시 그년의 집으로 가려나?”“지금 늦어서 그 패
들이 그저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구 이왕 분풀이를 해주실 바엔 꼭 소흥이 집
에 가서 해주셧으면 좋겠습니다.”“그건 자네 맘대루 하게.” “그럼 그 패들이
소흥이 집으로 몰리는 때를 염탐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무리나 하게.” 한
온이가 꺽정이에게 분풀이해 주마는 허락을 받고 마음이 흐뭇하여 다시 한동안
앉아서 갖은 우스운 이야기를 다 하는데 그 이야긴즉 대개 다 기생방 이야기였
다.
이삼 일 지난 뒤다. 날이 아침부터 끄물거리다가 낮에 눈이 시작되어 기왓골
이 형적 없이 묻히도록 쏟아지고 저녁때 끔하여졌으나 아주 그치지 아니하고 오
다 말다 밤이 된 뒤에 눈이 개고 달이 밝아서 눈 위의 야경과 달 아래 설경이
희한하게 좋았다. 이런 좋은 밤에 꺽정이는 혼자 짬짬하게 앉았다가 의관을 벗
고 팔베개하고 누웠을 때 한온이가 와서 “선생님, 노인정패가 지금 소흥이 집
에 모였답니다.” 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벗었던 의관을 다시 입는데 한온이의
말을 좇아서 임선달로 행세하려고 출신한 사람의 복색을 차리었다. 꺽정이가 한
온이를 앞세우고 방문 밖에 나설 때 마당 눈 위에 옹긋쫑긋 섰던 십여 명 사람
이 각기 앞으로 나와서 꺽정이게 인사를 하였다. 한온이가 기생방에 데리고 다
니느라고 다년간 골라 모은 젊은 사람들이라 모두 미끈미끈하게 생긴 것이 물고
뽑은 것 같았다. 꺽정이가 한온이를 보고 “저 사람들두 다 데리구 갈 텐가?”
하고 물으니 한온이는 꺽정이의 묻는 뜻은 생각해 볼 사이도 없이 “사람을 모
두 불러모으느라구 한참 걸렸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러 사람을 데리구
가서 편쌈하려나?” “사람이 많아야 기세가 좋습지요.” “여보게, 성군작당해
가지고 갈 것 없네. 자네하구 나하구 단둘이 가세.” “이왕 불러모았으니 같이
데리구 가는 게 좋습니다.” “그저 내 말대루 저 사람들은 고만두게.” 한온이
는 꺽정이 말에 누려서 다시 두말 못하는데 여러 사람들중의 한 사람이 꺽정이
를 치어다보며 “저희야 가니 무엇하겠습니까. 가나 안 가나 마찬가집지요. 그렇
지만 저희중의 몇 사람두 전날 가서 몰골 숭한 일을 당했으니 오늘 밤에 뫼시구
가서 기광 좀 부리게 해줍시오.” 하고 솜씨 있는 말로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꺽정이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한두 번 그덕이고 곧 한온이를 돌아보며
“저 사람들이 가고자 하면 같이 가긴 가더래두 기집의 집에 들어갈 때는 함께
우 몰려 들어가지 말구 우리 둘이만 먼저 들어가서 저편의 하는 골을 좀 보세.
” 하고 말하니 한온이는 “밖에서들 기다리다가 부르거든 들어오라구 합지요.
” 하고 꺽정이에게 대답한 다음에 여러 사람들더러 “자네들 다 들었지. 자네
들은 장찻골다리 천변에서 서성거리다가 나중 들어오두룩 하게.” 하고 일렀다.
한온이가 꺽정이와 같이 십여 명 한 패를 끌고 남소문 안에서 영풍교 아래로 나
와서 새다리 수표교로 천변을 끼고 올라왔다. 장통교에 와서 여러 사람은 뒤에
떨어뜨리고 단 둘이 남쪽 큰길ㄹ로 조금 나오다가 다시 동쪽 실골목으로 꺾여
들어왔다. 이 골목 막다른 집이 소흥이의 집이다. 소흥이의 집 평대문
이 열리어 있는데 노랫소리, 장고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리었다. 한온이가 꺽정
이의 앞을 서 들어와서 마루에 올라서며 큰기침하고 방에 들어오며 “펴안하우
무사한가.” 인사하는데 꺽정이는 벙어리같이 아무 말 않고 한온이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방 한중간에 촛대와 큰 청동화로가 놓이고 화룻가로 한량 오류명이
둘러앉고 그중 의표 선명한 젊은 한량 옆에 주인 기생 소흥이가 장고를 앞에 놓
고 앉았는데 좁은 아랫간에는 발 들여놓을 틈도 변변히 없었다. 좌석을 사양하
는 사람이 없어서 한온이는 꺽정이와 같이 장지 밖 윗간에 자리잡고 앉았다. 소
흥이가 앉은 자리에서 한팔 짚고 인사하는데 ‘안녕하시오’라든지 ‘어서 옵시
오’라든지 으레 하는 인사말도 한마디 없이 머리만 가땍까땍하고 말았다. 한온
이가 좌중에 인사를 청하여 인사수작이 끝난 뒤에 “재미있는 좌석에 불청객이
자래해서 천만 미안하나 우리두 설월 좋은 밤에 흥이 바이없지 아니하여 놀러왔
으니 동락합시다.” 하고 거탈수작을 한번 던져본즉 내색이 좋지 않은 한량들이
빈말로라도 “좋소.” 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소흥이 옆에 가까이 앉은 나
이 젊은 한량이 큰소리로 “여보게 소흥이,장구 고만 치우게.” 하고 말하니 그
말은 곧 한온이더러 ‘너희하구는 같이 놀지 않겠다.’대답하는 셈이다. 한온이
가 시비를 차리려고 다리를 도사리고 앉는 중에 젊은 한량과 엇비숫 마주 앉은
허위대 큰 사람이 젊은 한량을 보고“새루 들어온 오입쟁이들이 치우신 모양이
니 우리 화루를 내드립시다.” 하고 말한 뒤 한손으로 큰 화로를 번쩍 들어서
한온이와 꺽정이 사이에 내놓았다. 한온이가 믿는 구석이 있는 까닭에 힘자랑하
는 것을 보고도 기운이 죽지 아니하여 그 사람을 똑바로 보면서 “이분 힘꼴이
나 쓰는구려.” 하고 비아냥스럽게 말하였다. “말이라면 다하는 겐 줄 아네.”
“말이란 사람 봐가며 하는 게거든.,”“무엇이 어째!” 그 사람이 주먹을 부르
쥐고 벌떡 일어서는데 살기가 갑자기 방안에 떠돌았다. 다른 한량들은 동무 따
라서 일어서고 기생은 덩달아서 일어서고 한온이는 엉겹결에 일어서고 꺽정이
하나만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화젖가락으로 화롯불을 쑤시고 있었다. 여러 사람
의 눈이 꺽정이게로 몰리었다. 꺽정이가 화젓가락을 방바닥에 빼농으며 곧 두
손으로 화롯전을 잡더니 양쪽에서 안으로 오그리는데 그 유착한 청동화로를 해
박쪼가리같이 오그려놓았다. 노인정 한량들은 전에 한번 혼뜨검 내놓은 오입쟁
이가 털보 하나를 데리고 단둘이 들어올 때 털보가 벌써 눈에 거치적거리고 털
보의 인물이 영특하고 털보의 기색이 태연한 것을 살펴볼수록 점점 마음이 실찍
하여져서 선뜻 선손을 걸지 못하던 차에 털보가 청동화로 오그려놓는 것을 보고
혀들을 홰홰 내둘렀다. 젊은 한량이 허위대 큰 사람에게 “자네두 저렇게 오그
릴 수 있겠나?” 하는 뜻을 눈으로 물으니 그 사람은 고개를 바로 끄덕이지도
않고 가로 흔들지도 않고 한 옆으로 비틀어 꽂았다. 여러 한량들이 서로 보고
눈짓하는 중에 젊은 한량이 턱으로 밖을 가리키니 허위대 큰 사람 외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었다. 방안에 떠돌던 살기가 우습게 사라졌다. "신입구출이라니 먼
저 온 우리는 먼저 갑시다." 한량 하나가 말을 내고 "좋소." 한량 두서넛이 대답
할 때 이때까지 앉아 있던 꺽정이가 일어서서 아랫간을 내려다보며 "내 말 듣기
전에 못 갈 테니 게들 앉아라." 하고 따라지게 해라로 내붙였다. 꺽정이 말 한마
디에 다른 한량들은 모두 찔끔하여 말대꾸를 못하는데 허위대 큰 사람만이 "뉘
게다 함부로 해라야!" 하고 제법 뇌까렸다. "오, 네가 힘꼴이나 쓰는 모양이니 힘
좀 어디 보자." 하고 꺽정이가 아랫간으로 올라오는데 그 사람이 슬그머니 주먹
을 쥐고 있다가 면상을 노리고 내갈겼다. 딩딩한 주먹에 면상을 얻어맞으면 아
무리 천하 장사라도 콧잔등이 으스러지거나 눈두덩이 터지거나 할 것인데 눈이
맑고 손이 잰 꺽정이가 자기의 얼굴을 얼른 뒤로 젖히며 그 사람의 팔목을 덥석
잡고 또 한손으로 올려훑으니 그 사람의 입에서 아이구 소리가 연해 나왔다. "하
잘것없는 놈이구나." 꺽정이가 손을 노으니 그 사람의 팔목에서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다. 한번 올려훑은 데 가죽이 벗겨지고 살이 밀리었던 것이다. 꺽정이의
손에도 피가 묻어서 그 사람의 웃옷자락으로 손을 썩썩 씻은 뒤에 여러 한량들
을 둘러보며 "내가 앉으라는데 너희들이 종내 앉지 않구 섰을 테냐!" 하고 소리
를 질렀다. 여러 한량들은 자기네 몸에 손찌검이 돌아올까 겁을 내서 벌벌 떨며
주저앉고 기생은 저의 몸에 손댈 리 없을줄 번히 알건만 공연히 무서워서 쪼그
리고 앉아 발발 떨었다. 꺽정이가 한온이더러 “인제 길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
오라게.” 하고 말하여 한온이가 나가서 같이 온 사람들을 데리고 들
어온 뒤에 아래윗간에 앉을 좌석들을 정돈하였다. 꺽정이와 한온이는 주인 기생
소홍이를 데리고 아랫목에 느럭느럭 앉고 노인정 한량들은 방문 맞은편에서 장
지 앞까지 비좁게 앉히고 윗간에는 십여 명 사람이 겹겹이 둘러앉았다. 꺽정이
가 한온이를 가리키고 한량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 패가 너희들에게 당한 것처
럼 너희들을 죄다 성하게 보내지 않을 것이로되 점잖지 못해서 손찌검은 안하겠
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사과들을 해라. 그래야 놔보낼 테다.” 말하고 나서 “
사과할 테냐, 안할 테냐! 말들 해라.” 하고 뒤를 눌렀다. 여러 한량이 서로 돌아
보며 “사과하세.” “사과를 무어라구 하나?” “아무렇게나 하지.” 하고 가만
가만들 지껄이고 나서 각각 한온이에게 사과를 하는데 “전번 일은 우리가 잘못
했나 보우.” 말하는 사람도 있고 “용서하우.” 말하는 사람도 있는 중에 허위
대 큰 사람은 머리만 숙이고 젊은 한량은 입술만 달싹달싹하였다. 젊은 한량이
교기 부리는 것을 꺽정이가 눈꼴사납게 본 터이라 짐짓 곤욕을 보이려고 “사내
자식이 사과를 하기 싫으면 안하구 할 테면 남이 알아듣게 똑똑히 할 것이지 입
술만 달싹거린단 말이냐! 대체 너 같은 자식은 아직 대가리에 피두 안 마른 것
이 기생방 출입이 다 무어냐. 봐하니 밥술 먹는 집 자식 같구나. 네 아비 할아비
모아놓은 천량 작작 없애라.” 하고 여지없이 낮잡아서 꾸짖고 “똑똑히 요전번
에 잘못했습니다 하구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가리를 찢어놀 테다.” 하고
얼러대니 얼굴이 새빨개진 젊은 한량이 입술을 악물고 있다가 한참 만에 나직하
나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꺽정이 시키는대로 사과하였다. 그 젊은 한량은
시임 우변포도대장 이몽린의 막내아들로 노인정 한량패 중의 출물꾼 노릇하는
사람이뇨, 허위대 큰 사람은 상가 성을 가진 안변 사람으로 이포장 남병사 적에
한두 번 승안한 것을 연줄삼아 이포장 집에 와서 문객 노릇하는 사람인데 이포
장의 아들이 상가를 데리고 기생방에 다닌 지 수년 동안에 참혹하게 망신을 당
하기가 이날 밤이 처음이었다. 노인정 한량들이 사과를 다한 뒤에 “너희들 인
제 고만 가거라.” 소리를 듣고 소홍이 집에서 몰려나와서 길에 가면서 여럿이
씩둑깍둑 지껄이었다. “별놈의 망신 다 해보네.” “기생방에 와서 사과란 무어
야? 별꼴을 다 보지.” “여보게 방구, 자네 팔목이 얼마나 아픈가. 세상에 기막
힌 놈의 힘두 다 많지. 어쩌면 한번 잡아훑는데 팔목이 그 모양이 되나.” 상가
를 뽕으로 세기고 뽕을 방구로 옮겨서 방구가 상가의 별명이 된 것이었다. “팔
목 원수를 어떻게든지 갚아야겠는데 무슨 도리가 없겠나 생각들 좀 해보우.”
“그 털보놈이 대체 왠놈일까?” “남소문 안 젊은 오입쟁이 녀석이 어디 가서
데려온 게지. 우리에게 앙갚음하려구.” “남소문 안 젊은 오입쟁이 녀석이 수상
한 놈의 자식이라든데 그 털보두 역시 수상한 놈이 아닐까?” “포도청에서 도
둑놈이라구 잡아다가 치도곤으로 패주어 내보냈으면 좋겠네.” “그랬으면 방구
의 팔목이 당장에 나을 테지.” “여보게 장래 대장, 자네가 춘부영감께 말씀을
잘 여쭤서 해볼 수 없겠나?” 장래 대장이란 이포장 아들의 별명이다. “무어라
구 말씀을 여쭙나? 기생방에서 망신했단 말이 들쳐나면 아버지와 형님네게 잔소
리나 듣게 되지. 아버지는 노인이시라 잔소리하실 연세나 되셨지만 형님네 잔소
리란 사람이 머리가 실 지경일세. 밤에 놀러다니지 말구 무경을 읽어라, 손이 뜨
면 못쓰니 깍지를 놀리지 마라, 글씨를 배워라, 관방을 익혀라 잔소리가 한이 없
네.” “자네 백중씨가 무슨 염체에 그런 소리를 한다든가. 기생방에 놀러 다니
지 않은 지가 며칠이나 되었다구.” “그렇기에 말이지. 기생방 출입을 고만둘
생각이 나다가두 형님네 잔소리에 도루 들어가네. 그러나 잔소리를 듣구 집에
들어앉았더면 오늘 밤 같은 망신은 안했겠지.” “오입쟁이가 기생방에서 남을
망신주기두 예사구 남에게 망신당하기두 예사지, 그까짓걸 가지구 속썩일 거 무
어 있나.” “암 그렇구말구. 오입장에서 한번 망신한 게 무슨 대산가. 헌갓쓰구
똥누기지. 여보게 방구, 그렇지 않은가?” “망신이라두 오늘밤에 내가 당한 망
신은 죽을 망신일세.” “망신이면 망신이지 죽을 망신 살 망신이 어디 있나.”
“여보게, 장래 대장, 속썩이지 말구 다른 데루 놀러가세.” “아니 나는 고만
집으루 갈라네.” “집에 가서 촛불하구 눈쌈할라나? 우리 소월향이 집으루 가
서 새판으루 놀아보세.” “얼ㅎ지, 소월향이게루 가세. 장래 대장이 소월향이를
좋아하지그려.” 여럿이 소월향이게 놀러가기로 의논이 된 뒤에 한량 하나가 상
씨 성 가진 사람을 보고 “장래 대장이 가는데 방구가 안가지 못할 텐데 어디
그 팔목 가지구 술 마시러 갈 수 있겠나.” 하고 말하니 그
사람이 “팔목은 걱정이 아니라두 피묻은 옷을 어떻게 하나.” 하고 대답하였
다. 다른 한량 하나가 그 사람 앞으로 나서며 “내 옷이 자네게 얼추 맞을 테니
나하구 웃옷을 바꿔입세.” 말하고 곧 웃옷을 벗어주었다. “피묻은 옷을 누가
입든지 마찬가지 아니야?” “아따 남의 걱정까지 하지 말구서 날 벗어주게.”
그 한량이 피묻은 웃옷을 돌돌 말아서 옆에 끼면서 “요렇게 하면 됐단 말이야.
” 하고 자기의 의사스러운 것을 자랑하듯이 혼자 웃었다. “그걸 내가 옆에 끼
구 가지.” “고만두게. 이건 내가 집에까지 가지구 가서 빨아 고쳐다 줌세.”
“나는 객지에 있는 사람이니까 후의를 싫단 말 안하구 받을 테여.” “자네 팔
목을 정한 수건으로 다시 잘 동이세.” “나는 콧수건밖에 없는데.” “내가 인
심쓰는 김에 수건 하나까지 마저 인심 씀세.” 그 한량이 새 명주손수건으로 그
사람의 상한 팔목을 다시 동여준 뒤에 여럿이 함께 소월향의 집으로 몰려갔다.
꺽정이가 노인정 한량들을 한온이에게 사과시키고 놓아보낸 뒤에 한온이더러 “
우리두 차차 가보세.” 하고 말한즉 한온이가 “남의 자리를 뺏어가지구 바루
일어서면 재미있습니까? 여기서 한참 놀다 가시지요.” 대답하고 나서 곧 데리
고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네네 몇 사람이 핑 집에 가서 술상을 차려달래서
아이놈들 이어 가지구 오게. 술 못 먹는 사람두 먹을 것이 있어야 할 테니 만두
빚어논 것이 있거든 있는 대루 다 삶아달라게. 그러구 서사더러 사랑 다락에 있
는 청동화루에 그중 크구 좋은 것을 한 개 골라 달래서 가지구 오게.” 하고 말
을 일렀다. 십여 명 사람이 잠시 동안 너미룩내미룩하더니 나중에 네댓이 같이
갔다온다고 일어서들 나갔다. 술상을 차려 오러 간 동안에 한온이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지껄이고 기생은 꺽정이에게 맡겨서 꺽정이가 기생을 옆에 가
까이 앉히고 수작하게 되었다. “자네 이름이 소홍이라지?” “네, 그렇습니다.
” “나는 임선달이란 사람일세.” “녜, 그렇습니까!” “자네가 소리두 잘하고
풍류두 잘한다데그려.” “공연한 말씀 맙시오.” “내가 서울 있는 동안 종종
놀러와두 좋겠나?” 소홍이가 그 말은 대답 않고 “시굴댁이 어디십니까?” 하
고 물었다. “나는 먼 시굴 사람일세.” “보입기엔 서울 양반 같으신데요.” “
서울 양반이라면 내가 듣기 좋아할 줄 아나?” “아니 참말 서울 양반 같으세
요.” “무엇이 서울 양반 같은가?” “사투리 없는 말씀을 듣든지 제도 맞는
의복을 보든지 다 서울 양반 같으십니다.” “의복은 얻어 입구 말은 배웠네.”
“그러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후에 놀러올 때 시굴 쌍놈이라구 푸대접이나
하지 말게.” “천만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자네는 어디 사람인가?” “제
고향은 송도올시다.” “송도야? 진이 난 곳일세그려.” “제가 아이 적에 소리
를 그에게 배웠습니다.” “자네가 당대 명기라더니 연원이 있네그려.” “선생
은 명기지요만 제야 무슨 명깁니까.” “자네 나이 몇인가?” “나이 몇 살이나
되어 보입니까?” “글쎄, 몰라서 묻지 않나.” “눈어림으로 말씀을 해보십시
오.” “스무남은 되었을까.” “스물다섯이올시다. 나이 많습지요?” “날 같은
사십객 사람하구 놀기 꼭 좋은 나일세.” 한온이가 여러 사람과 지껄이다가 말
고 소홍이를 돌아보며 “여보게 소홍이, 저 어른이 우리 선생님이신데 소시적부
터 오입 안하시기루 유명한 어른이니 자네 수단으루 한번 오입길을 터 드려보
게.” 하고 말한 뒤에 다시 소홍이 귀에 입을 대고 몇마디 소곤소곤 말하니 소
홍이가 “그런 소리 누가 듣구 싶다오? 저리 가시우.” 하고 몸으로 한온이를
떠밀었다. “무슨 소릴 하기에 골이 났나?” 꺽정이가 소홍이더러 묻는데 소홍
이는 대답을 아니하고 한온이가 웃으면서 “선생님 힘 좋으신 것이 팔뿐이 아니
라구 말해 주었더니 공연히 쌀쌀그럽게 굽니다.” 하고 대답하여 “실없은 사람.
” 하고 꺽정이도 역시 웃었다. 꺽정이가 술상 오는 동안이 지루한 줄을 모르고
앉았는 중에 남소문 안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데 화로와 술병 같은 것은 자
기네가 들고 술상과 밤참 목판은 아이들 시켜서 이어 가지고 왔다. 소홍이가
처음에 꺽정이를 흉악한 귀신만 여겨서 옆에 가까이 가는 것도 마음에 끔찍스러
워하다가 서로 수작도 해보고 다시 인물도 살펴보는 중에 사내다운 사내로 생각
이 들기 시작하며 친할 마음까지 나서 나중에는 꺽정이가 손을 만지는 것도 싫
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아이들이 간 뒤에도 한식경이 좋이 지나서 겨우 일어서
게들 되었는데 소홍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몰밀어서 “안녕히 갑시오.” 하
고 인사한 뒤 특별히 한온이에게 와서 “자주 놀러오세요.” 하고 다정스럽게
당부하니 한온이가 짓궂게 소홍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네가 나더러
자주 오랄 때가 다 있으니 별일일세. 아마두 나를 조방꾼이 노릇 시키구 싶은
게지. 아따 그러게. 내가 선생님 뫼시구 자주 옴세.” 하고 깔깔 웃었다. 여러 사
람들이 한온이를 따라서 웃는 중에 꺽정이도 역시 빙그레 웃으면서 소홍이를 보
고 “우리 또 만나세.” 하고 인사하였다. 밤이 깊으니 달은 더 밝은 것 같고
눈이 쌓여서 밤은 차지 아니하였다. 한온이와 꺽정이가 느런히 서서 장통교와
수표교 사이 천변을 내려올 때 뒤에 오던 여러 사람이 “오늘 밤 같은 좋은 밤
엔 자지 말구 돌아다녔으면 좋겠네.” “우리 단골 술집에 가서 밤새두룩 술타
령해 볼까.” “누가 마대?” 하고 지껄이는 것을 듣고 한온이도 집에 들어갈
마음이 적어져서 꺽정이보고 “선생님, 이와 나서신 길에 소월향이 집에까지 가
보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지금 너무 늦지 않았나?” “늦으면 대삽니다.”
“기생 자는 걸 가서 깨운단 말인가?” “저 혼자 자거나 제 서방하구 자는 건
깨워두 좋지요.” “소월향이 집이 예서 멀지 않은가?” “혜민골이라 가는 길
에 그리 돌아갈 수두 있습니다.” “그리 가긴 가더래두 자거든 깨울 건 없네.”
“소월향이 집 안방 뒤들창이 행길루 났으니까 자는지 안 자는지 밖에서 알 수
있지요.” 한온이가 뒤에 오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월향이 집으루 가세.” 하
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여출일구로 “좋습니다.” 하고 대답들 하였다. 혜민골
소월향이 집에 뒤들창으로 불빛이 보이고 방안에서 여러 사내의 목소리가 나는
데 목소리들을 가만히 들어보니 갈데없이 노인정 한량패라 한온이가 펄펄 뛰다
시피 하고 집 앞으로 돌아와서 지쳐놓은 일각문을 기세좋게 열어붙였다. “평안
하우 무사한가?” 방문을 열고 “신입구출합시다.” 방안에 들어서는데 꺽정이
만 한온이의 뒤를 이어서 들어서고 여러 사람들은 방 밖에 둘러섰다. 노인정 한
량들이 꺽정이를 한번 치어다보고는 곧 부지런히 벗어놓은 옷들을 주워 입고 도
망하듯이 몰려나갔다. 노인정 한량패의 노는 자리를 하룻밤에 두번째 뺏고 한온
이는 한없이 좋아서 꺽정이가 고만 일어서자고 말하여도 “조금만 더 놀다 가시
지요.” 하고 잘 일어서지 아니하다가 소월향이가 잠에 부대껴 못 견디어할 때
비로소 일어섰다. 남소문 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온이가 소홍이와 소월향의
우열을 물어서 꺽정이가 소월향의 약한 것을 타박하고 소홍이의 투덕투덕한 것
을 칭찬하였더니 뒤에 오는 여러 사람들이 듣고 “임선달님이 소홍이게 반하셨
네.” “소홍이두 맘에 있어 하는 모양이데.” “소홍이년이 코 큰 사내를 고르
거든.” 이런 소리들을 지껄이며 낄낄거렸다. 한온이가 꺽정이의 힘을 빌려서
노인정 한량패에게 톡톡이 분풀이한 뒤 사오 일이 지나갔다. 이 동안에 꺽정이
는 소홍이의 투덕투덕한 모양이 마음에 잊히지 아니하여 다시 놀러갈 생각이 없
지 아니한 터에 하루 아침 한온이가 와서 식전 인사를 마치고 “어젯밤에 소홍
이에게 놀러갔다 왔지요.” 하고 공연히 웃으니 꺽정이가 “왜 웃나?” 하고 웃
는 까닭을 물었다. “소홍이에게 무안을 당했습니다.” “무슨 무안을 당했어?”
“선생님을 안 뫼시구 왔다구 거짓말쟁이라구요.” “그런 무안은 당해 싸지.”
“선생님까지 저렇게 말씀하시네.” “나를 따구 갔으니 내가 그렇게 말 안하겠
나?” “선생님, 오늘 밤에 같이 가십시다.” “봐서 같이 가세.” “봐서가 아
니라 꼭 가셔야 해요. 만일 안 가시면 제가 소홍이게 무안버덤두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건 또 어째서?” “제가 꼭 뫼시구 온다고 말하구 왔습니다.” “
내 말두 안 들어보구 그런 말 한 사람은 망신을 당해두 좋아.” “선생님 안 가
실 말씀입니까?” “자네가 미리 허락하구 온 게 미워서 안 가겠네.” “선생님
이 제자의 수구를 몰라주시니 야속합니다.” “무슨 수군가?” “오늘 밤에 가
보시면 아실 겝니다.” “어쨌든지 가잔 말일세그려.” “제 청을 한번 또 들어
주시는 셈 잡구 가십시다.” 이날 밤에 꺽정이와 한온이가 아이놈 하나를 앞세
우고 소홍이 집에를 놀러왔다. 한번 보면 초면이요, 두번 보면 구면이라 안면도
익숙하려니와 대접도 다정하였다. 소홍이가 멀리 앉아서는 추파를 보내고 가까
이 앉아서는 아양을 부리는데 그것이 모두 꺽정이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
다. 한온이가 방을 가리키며 “전날 밤과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서 꺽정이가
“무에 어떻단 말인가?” 하고 무심히 본 것을 다시 살펴보니 밤에 병풍과 보료
도 전날 밤에 없던 것 같거니와 소홍이의 의복과 단장도 전날보다 몇 배 더 고
운 듯하였다. “소홍이가 선생님 맞으려구 정성을 이렇게 피우는데 저의 수구두
적지 않습니다.” 하고 웃으니 꺽정이는 빙그레 할 뿐이요 소홍이는 곱게 눈을
흘겼다. “여보게, 눈 흘기지 말게. 신정은 여구하구 구정은 여신해야
쓰는 법일세.” “신정은 무어구 구정은 무어요, 지각 좀 차리시오.” “이 사
람이 이러다가 욕하지 않겠나.” “말이 빠져서 이가 헛나갔으니 용서하시오.”
“자네가 어느새 선생님 세를 믿나? 아직 좀 일네.” “예, 여보시오.” “한다
할수록.” “술상이나 내오리까?” “내가 술 못 먹는 줄을 자네가 아직 모르네
그려.” “술을 못 잡숫거든 안주나 잡숩시오.” 소홍이가 사람을 불러서 술상을
들이라고 이르더니 계집아이 하나가 뻔찔 날라들이는데 안주가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꺽정이가 혼자 먹다시피 하는 술이라 많이 먹지 아니하여 술상이 오래
가지 아니하였다. 상을 물려낸 뒤 한동안 지나서 한온이만 아이놈을 데리고 돌
아가고 꺽정이는 소홍이 집에 머물러 자게 되었다. 이 뒤로 소홍이가 장학원에
서 찾는 날 탈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는 대개 꺽정이가 놀러오는 날이요,
왈짜들이 오는 밤 문을 닫고 받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는 대개 꺽정이가
자러 오는 밤이었다. 소홍이는 사내를 놀리는 수단이 좋고 꺽정이는 계집을 거
느리는 힘이 좋아서 둘의 사이가 찰떡과 같고 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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