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제 5장
1
금교역말 어물전 주인 부자는 청석골 도중과 거의 한속같이 지내는 터인데 젊
은 주인이 주색이 과하여 삼십 미만 젊은 나이에 요사하였다. 손자는 유치의 것
이 두엇 있으나 장남한 자식을 앞세운 늙은 주인의 정경이 가련하기 짝이 없었
다. 청석골 도중에서 통부를 받은 뒤 초종 부비의 한몫을 보태도록 부의를 후히
보내고 망인과 친구이던 황천왕동이가 꺽정이와 몇 여러 두령의 몸을 받아서
조상을 하러 나갔었다. 늙은 주인이 황천왕동이를 보고 일을 좀 보아달라고 간
청하여 황천왕동이가 인정에 차마 못한단 말을 못하고 들어와서 꺽정이에게 말
하고 다시 나가려고 하였더니, 서림이가 꺽정이보고 말하기를 일 보아주고 있는
것은 잠시 다녀오는 것과 달라서 자연히 안면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터
이라 재미없다고 하여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옳게 듣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
다. “그 늙은이는 올 줄루 믿구 기다릴 텐데 어떻게 합니까?” “어째 내말두
들어보지 않구 다시 오겠다구 말했느냐?” “여쭤보구 다시 오마구 말은 했지만
그래두 오기를 기다릴걸요.” “서종사같이 초종 치는 절차나 잘 알면 외려두
모르지만 네가 가서 무얼 하겠느냐? 두말 말구 고만둬라.” “그럼 제 대신 서
종사라두 보내주시지요.” “서종사는 네 대신 초상집에 다니는 사람이냐? 지각
없는 소리하지 마라.” 황천왕동이가 꺽정이에게 꾸지람을 듣고 다시 더 말을
못할때 꺽정이 옆에 앉아 있던 이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그 늙은이가 일을
봐달라지 않더라두 우리가 구애만 없으면 하나 가서 봐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요.” 하고 말하여 은근히 황천왕동이의 말을 거들어 주니 꺽정이가 이봉학이를
돌아보며 “가서 일 봐주는 게 좋지 않다구 누가 못 가게 하나?” 하고 증을 내
서 말하였다. “서종사 말이 안면 짐작하는 사람을 만날까봐 재미가 적다구 그
러니 금교 일판에서 통히 안면 모를 사람이 가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누구야?” “탑고개에두 별루 나가 보지 않은 김두령 같은 사람이야 금
교서 누가 알겠습니까?” “도중 회계는 누구더러 보라구?” “요새는 일용이
그리 많지두 않은데 한두령더러 혼자서 치부까지 다 하라시지요.” “죽은 사람
산 사람 다 친치 못한 산이더러 가랄 맛이 무언가?”“도중을 대표해서 가는데
친치 못하면 어떻습니까?” 꺽정이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않고 있다가 황천왕동
이더러 “네가 가서 산이를 데리구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황천왕동이는 어물
전 늙은 주인에게 실신될 것을 속으로 짜게 여기는 중이라 꺽정이의 말이 떨어
지기가 무섭게 곧 나가서 김산이를 불러가지고 왔다. “향일 부의 보낸 금교 초
상집에서 천왕동이더러 와서 일을 보아 달라구 청하더란다. 천왕동이는 근방에
안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 많이 모이는 상가게 보내는 게 부질없으니 네
가 가서 일을 좀 보아주구 오너라.” 꺽정이가 김산이더러 말을 이르니 김산이
는 선뜻 “녜.” 대답하고 나서 “입관 성복 다했을 텐데 가서 무슨 일을 봐줍
니까?” 하고 갈 것 없다는 의사를 비치었다. “장사를 순장으루 지내는데 장지
는 멀구 일은 뒤죽박죽 잘 안된다구 와서 봐달라데.” 하고 황천왕동이가 말한
뒤 “가서 봐줄 만한 일이 없거든 도루 들어오려무나.” 하고 꺽정이가 다시 일
러서 김산이는 금교 초상집에를 나가게 되었다. 황천왕동이가 금교 다녀온 이튿
날, 다시 김산이를 데리고 나와서 어물전 늙은 주인을 보고 “나는 도중에 다른
일이 있어서 단 하루라두 난데 나와 있을 수가 없소. 여기 같이 온 김두령이 우
리 도중을 대표해서 나왔으니 그리 아시우.” 하고 말하니 늙은이는 시원치 않
게 “녜.” 하고 대답하였다. 어물전 늙은 주인은 삼십 후에 아들을 낳아서 후사
를 잇게 되고 가세가 늘어서 불빈하게 된 것이 다 부모 산소의 발음이라고 믿는
사람이라 지가설에 반하여 지관들을 데리고 답산도 많이 하였었다. 어느 때 산
안이 높은 지관 하나를 만나서 같이 답산하러 나간 길에 평산 남면 마산리에 지
관의 말로 장군격고출동형이란 대지가 비어 있는 것을 찾아낸 뒤, 반계곡경으로
그 산을 사서 자기내외의 신후지지로 정하여 두었었다. 그 마누라가 먼저 죽어
서 갖다 묻을 그옆에 자기 묻힐 광중까지 작광을 하여 두었고 마누라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조그만 날가지에 한 장 붙일 만한 자리가 있어서 유념성으로
치표를 하여 두었었는데, 그 치표한 자리에 이번에 죽은 아들을 갖다 묻으려고
작정하고 모든 준비를 차리는 중이었다. 그 늙은이가 이십 안팎 적에 어물을 가
지고 등짐장사를 다니다가 밑천을 모은 뒤에 금교서 장가를 들고 눌러앉아서 어
물로 전을 내기 시작하고 내처 한편으로 어물을 파는 까닭에 남들이 전부터 불
러내려온 대로 어물전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곡식, 포목, 재목 여러 가지를 무
역
하여 파는 금교 장터의 제일 큰 장사라 초상에 와서 일보아 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늙은이가 황천왕동이더러 와서 일을 보아달라고 청한 것은
장지까지 근백리 길에 사람이 한번 갔다오자면 적어도 이틀씩 걸리는 까닭에 황
천왕동이의 빠른 걸음을 빌려 써보려고 생각하였던 것인데, 김산이는 친치도 못
할뿐더러 기치도 않아서 여짓 고만두고 도로 가라고 말하고 싶으나 황해감사는
등지고 살아도 청석골패는 등지고 살 수 없는 처지에 그 패에서 무등호의로 내
보내 준 사람을 가거라 말아라 할 수가 없어서 늙은이는 김산이를 보고 “이런
사람의 집의 궂은일을 봐주러 나오셨다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소.” 하고 외면
치레로 인사하고 또 황천왕동이가 들어갈 때 “여러분께서 너무 근념들 해주셔
서 황감합니다구 면면이 말씀 좀 해주시우.” 하고 이면을 차려서 인사 부탁까
지 하였다. 일한다고 공연히 분주만 떠는 사람도 많고 일 시킨답시고 떠드는 것
으로 한몫 보는 사람도 많은데 김산이는 입을 봉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앉았
을 맛도 없고 또 나온 본의도 아니어서 주인 늙은이더러 물어보아서 보아줄 일
이 별로 없으면 도로 들어가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늙은이가 물으러 오는 사
람을 붙들고 신세 한탄하며 질금질금 울랴, 일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며 일 잘못
한다고 잔소리하야, 잠시도 가만히 안 있어서 김산이는 말할 틈을 타지 못하여
그대로 앉아 있는 중에 저녁이 되어서 두루거리 밥상이 안에서 나왔다. 밥상에
둘러앉는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는 김산이를 바라보고 “저
손님두 이리 오시지요.” 하고 청하여 김산이가 여러 사람 틈에 가서 끼여 앉았
을 때, 늙은이가 방 앞에 와서 들여다보더니 “왜 거기 가 앉으셨소? 이리 나오
시우.” 하고 불러내었다. “저녁 진지를 지관하구 겸상해 내온다니 지관 있는
방으루 가십시다.” 하고 늙은이가 앞서 가는데 김산이는 뒤따라가면서 “가만
히 보니 내가 봐드릴 만한 일이 없는 것 같구려.” 하고 말하였다. “무슨 일이
든지 봐주시겠소?” “일만 있으면 봐드리다뿐이오.” “모레가 참파토할 날인
까닭에 지관을 내일 산으루 보낼텐데 지관하구 같이 가서 산역을 시켜주셨으면
좋겠소” “아무리나 하라는 대루 하리다.” 김산이가 지관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또 마산리 장지에를 같이 왔다. 오던 날은 산 맡아보는 사람 집에서 자고
이튿날 일꾼들을 데리고 산상에 올라와서 산역을 시키는데, 구경 온 동네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자네 나를 모르겠나?” 하고 김산이
의 팔을 사람이 무안스럽도록 자지러지게 놀라고 너무 놀란데 창피한 마음이 들
어서 놀랄 때와는 딴판으로 곧 율기를 하고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
키는 구 척이요, 얼굴은 둥글넓적한데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는 얼굴의 주인이
내란 듯이 앉을 자리를 넓게 잡고 위로 우뚝 솟기까지 하였다. 그 유난히 큰 코
를 김산이가 물끄러미 보다가 “자네가 춘동히 아닌가?” 하고 물으니 김산이의
얼굴만 빤히 보고 섰던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나는 자네
가 죽은 줄 알았더니 죽지 않구 살아 있네그려.” 김산이의 말을 춘동이란 사
람은 입내내듯이 “나는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하고 말하였다. “죽지 않으
면 서루 만나는 겔세. 우리가 대체 얼마 만에 만나나. 이십 년이나 거진 되지 않
았나?” “한 이십 년 되었을걸. 가만 있게. 내가 고모부 아저씨 돌아가시던 해
에 파주 자네집에를 갔었구 그 뒤루 못 갔으니까 올에 꼭 열아홉 해 만인가베.
” “자네 올에 서른 몇인가?” “여덟일세.” “나버덤 삼 년이나 위든가?”
“그럼, 자네가 콧물 흘릴 때 나는 어른이었었네.”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말게.
” “내가 열아홉에 첫장가 들구 고모부 아저씨 상청에를 다니러 갔었는데 그때
자네가 나를 이서방 어른이라구 부르지 않았나. 내가 거짓말인가?” “상투 꼬
부랑이니까 이서방이라군 불렀었겠지. 옳지, 참말 그때 자네 상투가 컸었지? 그
래 우리가 상투치레 코치레 당나귀 무엇치레 하구 놀려주었거니.” “예 이 사
람!” “우리 어디 가서 좀 앉아 이야기하세.” “어디 가서 앉을 게 아니라 우
리 집으루 내려가세.” “자네 집이 어딘가?”“이 아래 마산리여.” “내가 지
금 여기 산역을 봐주는 중인데 언제 마산리까지 갔다 오나. 저기 어디 잔디밭에
좀 가 앉아서 이야기하세.” 김산이가 이춘동이와 손을 맞잡고 금정 놓은 자리
에서 멀찍이 나와서 잔디밭에 다리들을 뻗고 앉았다. 두 사람이 의외에 만난 것
을 반갑다고 새삼스럽게 서로 말한 뒤에 이춘동이가 먼저 “금교역말 어물장사
가 부자라지?” 하고 물어서 김산이는 자세히 모르는 말로 “꽤 견디는 모양이
데.”하고 대답하였다. “청석골 턱밑에서 부자 소리 듣구 살자면 임꺽정이에게
공
을 많이 바쳐야 할걸.” 이춘동이가 심사 꿰어진 어투로 말하는 것을 김산이는
듣고 한참 있다가 “더러 뜯기겠지.” 가볍게 흘려서 대답하고 말을 달리 돌리
려고 “자네 언제부터 여기 와서 사나?” 하고 이춘동이더러 물었다. “작년에
왔네.” “그 전에는 어디서 살다가?” “해주땅에서 살다가 이리 들어왔네.”
“농사하나?” “대장쟁이 노릇하네.” “자네가 대장일을 배웠어?” “늦깍이
루 배웠네.” “그래 벌이가 좋은가?” “건지가 많아야 국물이 나지. 이런 산골
동네의 대장간 일이 변변한가. 그저 낫자루 도끼자루나 벼려 주는 게지.” “자
네 집 식구는 몇인가?” “식구는 많지 않아. 어머니 우리 내외 딸자식 하나. 원
식구는 넷이구 그외에 일꾼이 서넛 있네.” “자네 어머니가 그저 살아 기신가?
”“그럼 아직두 사실랑이 멀었네.” “연세가 올에 어떻게 되셨나?” “올이
환갑인데 새달 스무엿샛날이 환갑날일세.” “일꾼을 서넛이나 두었을 젠 대장
간 일이 꽤 많은 모양일세그려.” “농사두 좀 시키네.” “그래 의식 걱정은 없
나?” “양식을 남의 집에 꾸러 다니진 않네.” “고마운 일일세.” “산역 마치
구 내려올 때 우리 집으루 와서 사는 꼴을 보게.” “오늘 저녁때는 상행이 올
테니까 자네 집에 가게 될는지 모르겠네.” “상행이 오더라두 자네가 상젠가?
못 나올 것 무어 있나. 저녁밥은 우리 집에 와서 먹게.” “내일 여기 장사 지내
는 것까지 보구 자네 집에 가서 일이일간 묵어가겠네.” “일이일이구 일이삭이
구 내가 놔보내구 싶을 때 놔보낼 테니까 아주 그리 알구 있게.” “내가 팔자
가 사나우니까 아주 자네에게 봉양을 받으러 올는지두 모르지.”“어른에게 욕
하지 않나. 버릇없는 놈이구나.” 하고 이춘동이가 김산이의 어깨를 치며 허허허
웃었다. 이 춘동이가 김산이더러 어물전에서 서사나 차인 노릇을 하느냐,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느냐 묻는 것을 김산이가 어물어물 대답하니, 이춘동이는 자기를
외대한다고 골을 펄쩍 내었다. “이 사람 골내지 말게. 내 일신상 일은 나중 조
용히 만나서 다이야기 함세.” “내가 자네 뒤를 다 알구 있네.” “다 알면 왜
묻나?” “자네 말을 들어보려구 물었네.” “이 사람이 뉘 등을 치는 셈인가?
” “자네가 적성 가서 아전 다니구 아전 내 놓은 뒤 마전 달골 가서 살지 않았
나?” “내 말을 자네가 뉘게서 들었나?” “듣지 않구두 아는 수가 있지그려.
” “이보하나?” “자네 짐작이 용해. 내게 이보해 주는 청의동자두 있구 내
분부를 거행하는 황건역사두 있네. 조심하게.” 이춘동이의 골은 바로 풀리고 김
산이의 마음은 조금 떨떠름 하여 졌다. 이춘동이가 김산이의 내색이 달라진 얼
굴을 들여다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왜 웃나?” “내가 신장을 부린다니까
겁이 나는 모양일세그려.” “자네가 신장을 부리기루 내가 겁날 까닭이 있나?
” “아까 내가 자네 팔을 잡을때 왜 그렇게 질겁을 했나?” “뜻밖에 팔을 붙
잡으니까 잠깐 놀랐지 질겁은 무슨 질겁이야.” “실없은 소린 고만두구 내가
올 여름에 십오륙 년 만에 서울을 갔었네. 서울서 내려오는 길에 자네가 그저
고향에서 사나 하구 자네 집 살던 동네를 찾아들어갔더니 아는 얼굴이 어디 하
나나 있든가. 그래서 한참 공연히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더러 물어보다가
도루 나오는데 동네 앞에 큰 오래나무 있지? 그 오래나무는 그저 있데. 그 나무
아래서 얼굴이 눈에 익어보이는 늙은이를 하나 만났네. 그 늙은이가 자네 집 이
웃에 살던 최생원이데. 최생원이 자네가 적성으로 이사간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왕 맘이 내킨김이기에 적성까지 갔었네. 적성가서......” 이춘동이가 한참 이야
기를 하는데 김산이는 누가 잡아 일으키는 것 같이 벌떡 일어섰다. “이야기 듣
다 말구 왜 일어나나?” “그런 이야기는 나중 둘이 조용히 만나서 하세.” “
그럼 나는 먼저 내려가겠네.” 하고 이춘동이도 따라 일어섰다. 김산이가 우두머
니 서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이춘동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산역하는데 와서 일을
보았다. 해질 무렵에 상행이 들어와서 전을 지낸다. 상두꾼 술을 먹인다, 한참
수선한 중에 이춘동이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부르러 와서 김산이는 가까스로 틈
을 타서 주상하는 늙은이에게 의외에 옛친구를 만나서 그 사람의 집으로 저녁밥
먹으로 간다고 말하고 이춘동이를 따라왔다. 이춘동이의 집은 산밑에 있는데 집
이 커서 어림에 한 이십 간 되는 것 같았다. 바깥방은 치지 말고 안으로만 방이
셋인데, 그 중의 제일 작은 아랫방도 간반이 이간같이 널찍하였다. 이춘동이의
어머니는 환갑 늙은이가 칠십이 넘어 보이도록 나이보다 더 늙었고, 이춘동이의
안해란 안핸지 첩인지 춘동이보다 근 이십 년 아래 될 듯 젊어 보이었다. 김산
이가 이춘동이의 끄는 대로 먼저 춘동이 어머니 거처하는 건넌방
에 들어가서 잠시 동안 앉았다가 건넌방에서 나오는 길에 춘동이 내외 쓴다는
안방을 들여다보고 나중에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얼마 아니 있다가 저녁밥을 내
와서 주인 손 두사람이 겸상하여 먹는데 닭을 몇마리나 잡았는지 국에도 닭고기
요, 지지미에도 닭고기요, 구운 고기도 닭이요, 볶은 고기도 앍이었다. 반주 먹고
밥 먹고 다 먹은 밥상을 내보낸 뒤 이춘동이가 김산이더러 “인제 자네 이야기
를 좀 듣세.” 하고 말하였다. “재미두 없는 이야기를 듣기가 그리 바쁜가?”
“대체 자네가 지금 어디 있나. 금교역말 있나?” “나 있는데를 몰라서 궁금하
가? 황해도 선화당에 있네.” “정당하게 묻는데 실없은 말루 대답하는 것이 그
게 친구 대접인가.” “이야기를 하자면 순서 차려 해야겠네. 우선 자네가 나를
찾아다니던 이야기부터 마저 하게. 그래 적성 가서 어떻게 했나?” “적성 가선
마전으로 이사간 것을 알구 또 마전 가선 기집년과 총각놈을 죽여놓구 도망한
것을 알았네.” “그럼 내가 그 연놈 죽이던 날 밤 일부터 이야기함세.” 하고
김산이는 곧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김산이가 자기 데리고 살던 계집의 행실이
원래 부정하던 것과 그날 저녁때 젊은 과객이 와서 자자고 청하는데 계집의 눈
치가 달라서 일부러 과객을 재우고 소상집에 밤새임하러 가는 체하고 숨어서 엿
본 것과 계집이 정을 돋우다 못하여 나중에 막 달라붙는 것을 그 과객이 끝끝내
받자하지 않은 것과 과객을 죽이려던 칼에 옆집 총각놈이 죽게 된 것을 죽 내려
이야기하고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그 과객과 같이 밤길을 걷는 중에 그
과객이 청석골 두령 황천왕동인 줄을 알게 된 것과 황천왕동이를 따라서 청석골
을 왔더니 임꺽정이가 백부에게 검술을 배운 사람인 까닭으로 백부를 생각하고
특별히 후대하여 대번 두령을 시켜 준 것과 이번에 도중을 대표하여 어물전 초
상에 일 보아주러 온 것을 다 까놓고 이야기하였다. 이춘동이가 김산이의 이야
기를 듣고 난 뒤 “자네를 내가 수상스럽게 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청석골 대당일
세그려.” 하고 싱그레 웃었다. 이때 일꾼 하나가 와서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며
아랫말 간다고 말하는 것을 이춘동이가 좀 있다 가라고 이르고 그 일꾼의 발꿈
치도 미처 돌아서기 전에 김산이더러 “임꺽정이 사람이 대체 어떤가. 같이 지
낼 만한가?” 하고 물었다. 김산이는 얼굴빛을 변하고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그
일꾼이 바깥방으로 나가는 듯 신발 소리가 멀어진 뒤 이춘동이를 보고 “나는
자네를 아이 적 친구루 믿구서 못할 말 없이 다 했더니 믿은 보람이 없네.” 하
고 책망을 하였다. “일꾼은 자네를 밀고할 사람들이 아니니 안심하게.” “일꾼
이 밀고할까 봐 겁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닐세. 자네가 친구의 비밀한 이야기를
누설시키는 것이 섭섭하단 말이지.” “자네가 우리 집에서 역적모의를 하더라
두 밖에 누설될 리는 만무하지. 내가 목벨 다짐함세. 임꺽정이 이야기를 나두 듣
긴 많이 들었네만 도청도설을 준신할 수 있나. 자네가 친히 겪어본 걸 좀 이야
기하게.” “그보다두 자네 소경력을 먼저 좀 듣세.” 이춘동이는 김산이 백모의
친정 조카니 본래 양주 어둔리 사람이다. 춘동이 열아홉 살때 장가든 색시가 입
이 싸서 시어머니 말대답을 네뚜리로 하고 주책이 없어서 동네로 돌아다미녀 말
질을 일쑤 잘하여 시어머니와 갈등이 나고 동네 여편네들과 무릎맞춤이 자주 났
었다. 춘동이가 처음에 그저 구박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소박하여 친정으로 쫓으
러 든즉 죽는다고 독살을 부리더니 참말 어느 날 춘동이 모자 집에 없는 틈에
보꾹에 목을 매고 죽어 버렸다. 색시 친정 쪽의 친오라비, 사촌오라비 여러 종형
제가 사람들이 모두 불량하여 춘동이 모자를 저의 누이 죽인 원수라고 때려죽인
다고 서드는 통에 춘동이 어머니가 외아들 춘동이 몸에 무슨 일이 있을까 겁이
나서 맞아죽어도 좋다고 배짱 부리는 춘동이를 달래어 데리고 어둔리서 도망하
듯 서울로 올라왔었다. 서울서 남의 집 행랑살이를 하는 중에 춘동이가 못된 동
무들을 사귀어서 술을 배우고 노름을 배우고 또 도적질을 배워서 어머니의 속을
무척 썩어 주었다. 춘동이의 친한 동무가 난전을 벌였는데 물건을 팔아서 동무
일을 도와주기 겸 장사한다고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고 난전 물건을 가지
고 시골로 내려다니다가 한번 평산서 해주로 나가는 길에 우연히 운달산패의 연
줄을 얻어서 바로 입당하고 서울 어머니를 운달산으로 데려 내려왔었다. 춘동이
가 여력도 세거니와 사람이 기걸하여 괴수 박연중의 눈에 들어서 괴수의 버금가
는 수령 노릇까지 하였는데, 운달산패가 관군에게 소탕을 당하여 풍비박산 흩어
질 때 춘동이는 박연중이와 같이 해주따에 가서 숨어 살다가 마산리로 이사온
지 이때 불과 일 년 남짓 되었었다. 이춘동이가 열아홉 살 이후 소
경력을 다 이야기하고 김산이와 ㅅ서로 보고 웃는데, 두 사람의 웃음이 다같이
서글픈 웃음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김산이가 상행 묵는 집으로 다시 올때, 이춘
동이는 아랬말 간다던 일꾼을 불러서 관솔불을 들리고 자기도 같이 나와소 그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진시초가 지나야 해가 뜨는 시월 그믐새 하관시가 사시초라, 시각을 대기가
바쁘지마는 광중은 전날 낮에 만들어놓고 다른 준비는 전날 밤에 다 해놓은 까
닭에 일이 몰리지않고 제 시각에 하관하게 되었다. 오시가 지나기 전에 평토가
끝이 나서 반우가 떠나갈 때 김산이는 어물전 늙은이를 보고 “나는 친구에게
붙들려서 이삼일 후에난 가겠으니 우리게서들 기다리지 않두룩 기별 좀 해주시
우.” 하고 부탁하였다.
이춘동이가 일부러 데리러 산으로 올라온 것을 김산이는 이왕 보아주던 일이
니 봉분 짓는 것까지 마저 보고 간다고 춘동이를 먼저 내려보내고 한낮이 지나
기까지 산에 있다가 춘동이 집으로 내려왔다. 춘동이는 대장간에 나가서 집에
없고 춘동이 어머니가 아랫방 문을 열어주며 들어앉으라고 권하는데, 김산이가
춘동이의 대장일 하는 꼴을 구경하러 간다고 동네 밖에 있는 대장간을 찾아 나
왔다. 게따지 같은 대장간 속에 맨 뒤에는 일꾼하나가 풀무 위에 올라서서 풀무
질을 하고 모루 뒤에는 춘동이가 왼손에 집게 들고 바른손에 마치 들고 불속에
들여다보고 앉았고 춘동이 앞에는 일꾸들이 메들을 거꾸로 세우고 쇠 위에 팔들
을 걸치고 섰고 대장간 앞에는 동네 사람 서넛이 쪼그리고들 앉았는데, 둘은 고
누를 두고 하나는 옆에서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에 춘동이가 불속에서
발갛게 단 쇠를 집게로 집어내서 모루 위에 놓고 마치질을 하는데 마치질 한번
에 메질 한번씩 쌍메가 번갈아 들었다. 마치질소리와 메질 소리가 고저장단이
서로 맞았다. 한동안 지나서 마치질이 그치고 메질하는 일꾼들이 다시 쉬게 되
었을때, 그중의 하나가 대장간 뒤 둑에 올라섰는 김산이를 보고 춘동이더러 말
하여 춘동이가 돌아다보면서 “어째 여기를 나왔나? 우리 집으루 들어가게. 나
두 곧 들어감세.” 하고 말하였다. “어서 일이나 하게. 나는 여기서 구경하겠네.
” “네일 발매 간다구 낫하구 도끼들을 벼려 달래소 끌려나왔는데 자네 내려오
기 전에 다 해치운다는 것이 그렇게 못 됐네.” “자네 어머니께 말씀 듣구 왔
네.” “어머니하구 이야기나 하지 왜 나왔나?” “자네 일하는 구경 하려구.”
“그럼 구경하게. 인제 도끼 둘, 낫 하나 남았는데 곧 다 되겠네.” 김산이가 둑
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쇠를 불리고 이기고 담그는것을 구경하는 중에 대장일이
끝이 나서 춘동이가 마치, 집게 다놓고 일서서는데, 고누 구경하던 사람이 맨 나
중에 벼려 내놓은 낫을 들고 보며 “이렇게 건정으루 벼려서는 며칠 못 쓰구 도
루 무돼지겠네.” 하구 두덜거리니 이춘동이는 “여게 이 사람, 이번을 용서하
게. 이담 번에 맘먹구 잘 벼려 줌세.” 하고 너스레를 놓았다. 이춘동이가 일꾼
들더러 “뒤에 너희들이 다 치우구 들어오너라.” 하고 말을 이르고 둑 위로 올
라왔다. 김산이가 이춘동이와 같이 동네로 들어오는 길에 “자네가 일꾼들더러
해라를 하니 무어 되는 사람들인가?” 하고 물을니 이춘동이는 웃으면서 “왜
일꾼들더러 해라 못하나?” 하고 되물은 뒤 “전에 앞에 두구 부리던 아이들일
세.” 하고 말하여 전날 밤 일꾼 듣는데 꺽정이 말을 펼펴놓고 묻던 것이 비로
소 해혹이 되어서 김산이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었다. 이춘동이가 김산이와 같
이 집에 와서 김산이는 먼저 아랫방에 들여 앉히고 자기는 질자배기에 물을 떠
다가 아랫방 앞에서 세수를 할 때 춘동이 어머니가 위채에서 내려와서 “저녁을
기다리자면 시장들 하지 않으까.” 하고 물으니 이춘동이가 물 묻는 얼굴을 들
고 그 어머니를 치어다 보며 “시장하다면 무어 먹을 걸 주실라우?” 하고 되물
었다. “애기 어미가 술을 걸러놨단다.” “지금 속이 출출한데 한 사발 먹었으
면 좋겠소. 안주두 많이 놔서 내려보내시우.” 춘동이 어머니는 위채로 도로 올
라가고 이춘동이는 얼굴에 수건질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 뒤에 춘동이
안해가 알방구리 위에 납작소반을 얹어서 들고 내려왔는데 소반에는 대접에 담
은 편육과 보시기에 떠놓은 장물과 술 먹을 사발과 편육을 집을 젓가락이 늘어
놓였고 방구리에 담긴 것은 탁배기였다. 이춘동이가 소반과 방구리를 받아서 방
에 들여놓으며 “고기를 좀 많이 놓지 요게 무어야!”하고 안주를 투정하니 며
느리 뒤를 따라온 춘동이 어머니가 “아주 많이 저며서 한 목판 담아놨다. 나중
에 더 갖다 먹어라.” 하고 아들더러 말한 뒤 김산이를 보고 “김서방, 우리 아
들하구 개고기 누가 많이 먹나 내기해 보게.” 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목판에
담아놨다는 고기를 아주 이리 가져오게.” 하고 이춘동이가 그 안해에게 말을
일러서 다시 가져온 고기는 쪽 목판일망정 그리 적지 아니한데 수북하게 담기었
었다.
개고기 편육 한 대접 한 목판을 안주로 놓고 술들을 먹는데, 이춘동이가 한입
에 고기를 두서너 점씩 넣고 몇 번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는 것을 김산이는
구경하득 바라보다가 “인제 알구 보니 자네가 사람이 아니라 개호줄세그려.”
하고 웃으니 이춘동이가 입에 든 고기를 삼키고 나서 “어른더러 욕하면 오래
산단다. 어서 욕해라.” 대꾸하고 마주 웃었다. “자네가 전에두 개를 잘 먹었든
가?” “내가 전에는 개비린내가 싫어서 복날 개장국두 입에 대지 않았었는데
참말 개호주 한 분과 십여년 같이 지내는 동안에 식성이 변했네.” “박연중이
란 이가 개고기를 잘 먹나?” “잘 먹는니마니, 지금 환진갑 다 지난 늙은이건
만두 우리버덤 곱절 많이 먹네.” “그가 젊어서 장사 소리 들은 이라데그려.”
“지금 늙은이라두 우리루는 못 당하네.” “기운 쓰는 걸 더러 봤나?” “보다
뿐이야.” “우리 대장은 천하장사라지만 장사 체두 하지 않네. 내가 같이 지낸
뒤루 칠팔 삭 동안에 기운 쓰는 걸 한번 두 보지 못했네.” “이야기는 많이 들
었겠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는 더러 들었지.” “서울 남대문을 뛰어넘은 일
이 있다든가?” “그런 이야긴 듣지 못했네.” “경상두 조령인가 어디서 모듬
발을 한번 굴러서 바위 위에 발자국이 났단 말이 있는데 그런 이야긴 들었나?”
“그런 이야기두 못 듣구.” “그래 세상놈들 떠드는 소릴 곧이듣는 사람이 실
없는 사람이야.” “말이란 갈수록 보태는 것이니까 세상에 떠도는 말은 에누리
속으루 들어야겠지.” “보태는 곤 밑절마다 있지만 멀쩡한 터무니두 없는 말은
어떡허구.”
이춘동이 말끝에 김산이는 노밤이의 터무니없는 거짓말 잘하는것이 생각나고
노밤이가 본래 운달산 사람이란 것이 생각나서 “자네 노뱀이를 아나?” 하고
물었다. “노뱀이가 무어야?” “사람이지 무어야. 그 애꾸가 운달산에 오래 있
었다네그려.” “그놈을 자네가 어디서 봤나?” “지금 우리게 와 있네.” “그
놈이 천하 흉물일세.” “거짓말이 난당이데.” “거짓말뿐이 아니야.” 이때 일
꾼들이 대장간에서 들어와서 연장을 아랫방에 들여놓았다. 이춘동이가 일꾼들을
보고 “애꾸눈이 뱀이란 노이 지금 청석골 가서 있단다.” 하고 말하니 일꾼 중
의 하나가 웃으면서 “그럼 청석골 대장이 삼씨 오쟁이를 지겠구먼요.” 하고
대답하였다. 김산이는 일꾼의 말이 귀에 거치나 잠자코 있다가 일꾼들이 바깥방
으로 나간 뒤에 이춘동이를 보고 “청석골 대장이 삼씨 오쟁이를 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탄하였다. “그게 까닭이 있는 말일세. 뱀이란 놈이 운달산
에 있을때 박대장의 셋째 첩이 여름밤에 문 열어놓구 자는데 뛰어들어간 일이
있었다네.” “그놈을 그래서 떨어 내쫓았나?” “일이 발각나기 전에 그놈이
핑계를 만들어 가지구 산 아래 내려가서 그대루 고만 뺑소니를 쳤네. 그렇지 않
았으면 그때 목 달아났지.” “그놈이 우리 대장의 성명을 가지구 철원, 영평 등
지를 돌아다니며 가진 더러운 직을 다하다가 우리 대장에게 잡혀서 항복하고 따
라왔다네.” “그놈이 임꺽정이루 행세했단 말이야? 임꺽정이 망신 많이 시켰겠
네.” “가짜 임장사가 한참은 성풍했구 지금두 더러 있다네. 내가 임 아무개다
하면 얼뜬 세상놈들이 고만 질겁을 하니까 그 맛에 그런놈이 자꾸 생기는가 부
데. 나를 청석곡루 인도해 준 친구 황천왕동이가 올 칠월에 이천땅에서 서울을
올라오다가 양주 축석령 고개에서 좀도적 하나를 만났는데 그놈이 시뻘겋게 녹
슨 칼 한 자루를 들고 나서서 나는 양주 장사 임아무다 하구 호통을 하더라지.
그 친구가 자살궂은 장난을 곧잘 하는 사람이라 그놈을 놀리려구 임장사 성화는
높이 들었지만 처음 보입소 하구 인사를 걸었더니 갓, 망건, 웃옷을 벗어놓구 그
러구 주머니를 떼어놓구 가거라 하더라네. 양주 임장사는 당세의 호걸남자라더
니 보행 행인의 주머니를 발르러 드는 것이 다라운 좀도적 같구려 하니까 그놈
이 구변좋게 범이 배가 고프면 가재두 뒤지는 일이 있느니라 하구 말하더러네.
그 친구가 나중에 자기가 누구란 것을 말하구 그놈을 단단히 제독 주었다구 이
야기하데.”
“임꺽정이가 가짜는 많은 모양이야. 내가 들은 이야기 중에두 서울 구리개
약국하는 어떤 늙은이가 새벽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까 허위대 큰 사내 하나가
문앞에 쓰러져서 거의 다 죽개 되었더래. 그래 그 늙은이는 약국에서 자던 사람
들을 깨위 가자구 그 사내를 들어 들여다가 구호해 주었더니 그 사내는 대엿새
동안 곡기를 못해서 하마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주었다구 백번 천번 치사하구 갔
는데, 나중 알구 보니 그 사내가 임꺽정이더라네. 그런 일이 참말 있었다면 그
임꺽정이두 정녕 가짜겠지.” “가짜구 여부가 있나. 우리 대장이 서울 가서 굶
을 리두 없구 대엿새 곡기 못해서 길가에 쓰러질 리두 없으니까.” “구리개 이
야기에 또 한가지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네. 어느 해 겨울밤에 눈이 많이 와서
서울거리가 눈으루 덮엿는데 파루 치기 전 거리에 사람 자취가 아직 없을 때 순
라 군사들이 종각 앞에서 눈 위에 큰 발자국 둘이 나란히 박힌 것을 보구 그
발자국의 오구간 곳을 살펴봐두 근처에는 다시 없어서 차츰차츰 멀리 나오며 찾
아본즉 광통교 위에 나란히 박히구 구리개 어귀에 또 나란히 박혔더라네. 그 발
자국을 가지구 보면 종각 앞에서 한번 뛰어서 광통교에를 오구, 광통교에서 또
한번 뛰어서 구리개 어귀에를 온 것이 분명하나 날개 돋친 사람이 아닌 담에야
그렇게 멀리 뛸 수가 없으니까 다들 도깨비 장난으루 알았더니 나중에 알구 본
즉 그것이 도깨비 장난이 아니구 임꺽정이 장난이더라네그려.” “그건 허풍선
이의 허풍일세.” “세상에 떠도는 임꺽정이 이야기란 대개 다 허풍이지. 그것만
허풍이 아닐거야.”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김산이가 이춘동이를
청석골로 끌어들여갈 생각이 나서 이춘동이의 의사를 떠보려고 “내가 자네에게
물어볼 말이 한마디 있는데 자네 진정을 기이지 말구 대답해 주게.” 하구 허두
를 놓고 “자네가 지금 지내는 것이 운달산에서 지내던 때와 어떤가. 나은가?”
하고 물으니 이춘동이는 이야기하느라고 잘 먹지 못한 오력을 내려는 것같이 부
지런히 고기를 집어먹다가 한참만에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운달사버덤 낫지
못하단 말인가?” 하고 다져 물어서 이춘동이가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본뒤에 김
산이는 정중하게 말하려고 앉음까지 고쳐 앉고 "그럼 내가 자네를 우리 도중에
천거하겠네." 하고 말하니 이춘동이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왜 싫은가?" "내가
싫은 것보다두 우리 어머니가 대기 실세. 자네가지금 내게 권하는 말을 어머니
가 들으시면 자네를 당장 배송내러 드실 걸세." "그럼 운달산선 어떻게 지내셨
을까." 내게 끌려서 그럭저럭 그대루 지내셨지만 노상 끝탕이셨네. 그래서 여기
와서 살게 된 뒤루 비로소 밤에 발을 뻗구 주무신다구 하시네. 김산이는 다시
더 말을 못하고 무료하여졌다. "내가 임씨의 선성르 하두 높이 들어서 언제든지
한번 만나보구 싶던 차인데 자네가 같이 있다니 겸두겸두해서 한번 놀러감세." "
이번에 나하구 같이 가세." "우리 어머니 환갑 때 자네 안 올라나?" 오겠지. 그
때 와서 같이 가세." "이번이는 왜 못갈 일이 있나?" "환갑잔치 차릴 준비를 차
차 좀 해야겟네." "아직두 장근 한 달이나 남았는데 지금부터 준비 안 하기루 낭
패되겠나. 나두 이번에는 도중에 말을 안 하구 와서 한만히 오래 묵을 수가 없
으니 내일 곧 같이 가세." "우리 어머니 환갑 때 와서는 오래 묵어갈 텐가? 그런
다면 내가 내일 같이 가겠네." 김산이가 이춘동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이
춘동이와 같이 떠나서 청석골로 돌아오는데 길에서 참참이 술집에 들어가서 늑
장을 부린 까닭에 이틀 만에도 다 저녁때 들어왔다. 김산이가 자기 거처하는 처
소에 이춘동이를 들여앉힌 뒤 꺽정이 사랑에를 와서 보니 꺽정이는 없고 박유복
이 ,배돌석이,서림이 세 사람이 어슥어슥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를 하였다.
“마산리서 며칠 되겠다더니 속히 왔구려.” 서림이의 말은 어물전 기별을 들은
말이고 “웬 사람 하나하구 같이 왔다지?” 배돌석이의 말은 파수꾼 보고를 받
은 말이고 “마산리가 대체 몇 린데 이렇게 일찍 들어왔나?” 박유복이의 말은
당일에 온 줄로 아느 말이었다. 김산이가 어제 떠나서 노량으로 이틀에 온 것을
말하고 같이 온 사람은 백부의 처조카요, 아이 적 동무요, 또 윤달산패의 버금두
령이었던 것을 이야기하니 “그 사람을 여긴 어째 데리구 왔소?” 하고 서림이
가 물어서 “우리 대장을 한번 만나보입구 싶어하기에 데리구 왔소.” 하고 대
답하였다. “대장께 말씀을 여쭤보구 이 다음에 왔더면 좋을 걸 그랬소.” “여
쭤보지 않구 데리구 왔다구 대장께서 꾸중하실까요?” “꾸중하실지 칭찬하실지
그야 내가 알 수 있소. 내 생각에 이 다음 데리구 왔더면 좋을 뻔했단 말이지.”
“그 사람을 입당을 시켜보려구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
입당하라구 권해 봤소?” “권하진 않았지만 말은 비쳐봤지요.” “그래 그 사
람이 대장을 한번 만나보인 뒤에 입당할 의사루 말합디까?” “아니오. 그 사람
은 곧 입당할 생각두 없지 않은데 그 어머니 대문에 자저하는 모양입니다.” “
어머니 때문에 자저하다니?” “그 어머니는 아들이 지금같이 양민 노릇하구 사
는 걸 대단히 좋게 여기는갑디다.” “김두령이 그 어머니의 말을 들어봤소?”
“아니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더러 너의 어머니가
전에는 양민 노릇을 하지 말래서 운달산패에 들어갔었느냐구 물어보시지.” “
대장께 여쭙구 차차 권해 볼 작정인데 내가 힘써 권하면 대개 입당할 겁니다.”
“사람이 대관절 미덥기나 하우?” “사람이 미덥지 못하면 내가 여기를 데리구
올 리가 있나요.사람만은 의심없지요.”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
고쳐 되는 것인데 수십년 만에 만난 아이 적 동무를 어떻게 의심없이 믿우시우.
” 서림이가 처음부터 이춘동이 데리고 온 것을 불긴하게 말하는데 김산이는 속
이 상한 끝이라 부지중 불괘스러운 말소리로 “ 그 사람이 조금이라두 의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내 목을 서종사께 바치겠소.” 하고 말하니 서림이가 김산이의
얼굴을 뻔히 바라보다가 “우리네는 매사에 조심을 해야 할 처진 까닭에 아무리
아이 적 동무라두 속을 선뜻 줄 수가 없단 말이지,김두령 친구가 미덥지 못한
사람이란 말이 아니오.” 하고 타이르듯 말하였다. 두사람의 수작을 듣고 있던
배돌석이와 박유복이가 다같이 서종사의 말이 옳다고 서림의 편을 들어서 김산
이는 자기의 무세한 것을 생각하고 김 한숨을 지었다. 밗유복이가 위로하는 말
로 “대장 형님이 자네 온 줄 아시니까 곧 오실 걸세. 오시거든 말씀을 잘 여쭙
게. 설마 같이 온 사람을 푸대접해서 자네 낯이 깍이게 하시겠나.” 하고 말하여
김산이가 박유복이더러 “대장께서 안으서에게 가셨나요?” 하고 물을 때 밖에
서 위 위 소리가 났다. 꺽정이가 산불출이,곽능통이 두 시위를 데리고 들어오다
가 뜰아래 내려서는 김산이를 보고 “마산리서 친구 하나를 만나다더니 그 친구
하구 같이 왔느냐?” 하고 묻는 것을 김산이는 그저 예 대답하고 방에 들어와서
절하고 문안한 뒤 이춘동이 데리고 온 사연을 중언부언 말하고 이춘동이의 사람
과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서림이와 같이 꽤가다로운 말을 하
면 이춘동이를 대접하여 보낼 일이 여간 난처하지 아니한데 꺽정이는 순편하게
“입당은 나중 봐가며 권할 작정하구 우선 대접이나 잘하두룩 해라.” 하고 말
하므로 김산이는 한 근심이 덜리는 것 같았다. “지금 곧 만나보실랍니까?” “
아무라나, 가서 데리구 오려무나.” 꺽정이가 김산이의 취품하는 말을 허락하자,
곧 서림이가 출반좌하고 “김두령 낯을 봐서 만나보시더라두 내일 조사 끝에 잠
깐 만나보시지요.” 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서림이를 돌아보며 “왜?” 하고 까
닭을 물었다. “운달산이 평양 봉물 동티루 망했으니까 운달산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게 대해서 좋은 의사를 먹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온 사람이 대장을
보이러 왔다구 하지만 속에 무슨 딴맘을 먹구 왔는지 누가 압니까. 그 사람이
김두령하구 과질간이구 또 아이 적 친한 동무라구 하지만 수십 년 서루 격조한
동안에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인심이란 못 믿을 것입니다.”
“노밤이두 운달산에서 온 놈이 아니오?” “그놈은 운달산에서 쫓겨난 놈일뿐
더러 그 따위 무명 소졸과 수령 노릇하던 사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
그래 내일 만나라니 온 사람의 속내를 하룻밤 동안에 자세히 알아볼 도리가 있
소?” “아주 안 만나보시면 김두령의 낯이 깍이니까 내일 잠깐 만나보시는 게
좋겠단 말씀입니다.” 서림이의 말끝에 김산이가 꺽정이를 바라보며 “이춘동이
가 만일 악의를 품구 온 사람이라면 저는 데리구 온 죄루 죽어 마땅할 텐데 낯
깍이는 게 다 무엇입니끼. 그러나 이툰동이의 악의 없는 건 제가 목벨 다짐을
하겠습니다.” 하고 부프게 말하는 것을 꺽정이는 대답도 않고 서림이더러 “이
왕 만나볼 바엔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찬가진데 이러니저러니 긴말 할 것 업소.
지금 데려다가 만나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이때 산불출이가 방 윗간 문을 열
고 들여다보면서 “박두령댁에서 진지 여쭈러 사람이 왔습니다. 오두령께서 시
장하시다구 얼른 오시랍니다.” 하고 고하여 박유복이가 일어서는데 “저두 가
서 저녁 먹구 오겠습니다..” 하고 서림이도 따라 일어섰다. “이춘동이란 사람
이 오거든 보구들 가지.” 꺽정이의 말에 일어선 두 사람이 가지를 못하구 주저
주저하는데 김산이가 꺽정이를 보고 “그 사람두 아주 저녁을 먹여 가지구 석후
에 데리구 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럼 이따 여럿
이 모일 때쯤 데리구 오너라.” 하고 꺽정이가 말하였다.
김산이가 자기 처소에 돌아왔을 때, 이춘동이는 방에 혼자 들어 앉았기 심심
하든지 마당에 나와서 거닐다가 김산이 오는 것을 보고 몇 걸음 마주 나오며 “
나를 혼자 앉혀놓구 어디 가서 그렇게 오래 있다 오나.” 하고 책망을 내놓았다.
“대장 뫼시구 이야기 좀 하다가 늦었네.” “어째 자네 대장하구 같이 오지 않
구 혼자 왔나?” “대장께 같이 오시잔 말씀을 안했는걸.” “내가 온 사연은
말했겠지?” “그야 말씀했지.” “먼데 친구가 전위해 찾아온 줄 알구 나와 보
지 않는단 말인가. 그게 어디 친구 대접인가?” “그런 게 아니야.” “무에 그
런 게 아니라 말인가?” “사람이 여럿이니까 소견 없는 소리 하는 사람두 혹
있지만 우리 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닐세.” “나 때문에 무슨 말썽이 있었나?”
“아니, 말썽이 무슨 말썽이야. 저녁밥을 먹구 이따 가세.”
김산이는 서림이 치의와 이춘동이 책망 사이에 끼여서 안팎꼽사 노릇을 하였
다. 김산이가 이춘동이 모르게 넌지시 식사 공궤하는 졸개 내외를 시켜서 도중
숙설청의 맑은술을 반주할 만큼 가져오게 하구 또 한온이 집의 솜씨 좋은 찬을
몇 가지 얻어오게 하여 제법 모양 있는 겸상으로 이춘동이와 같이 저녁밥을 먹
는 중에 꺽정이가 자기 저녁상의 좋은 찬을 물려보내서 상이 좁아 곁상까지 벌
리게 되었었다. 김산이가 행역 끝에 포식하고 식곤중이 나서 이춘동이더러 잠시
누웠다가 여러 두렁이 다 모일 때쯤 가자고 말하고 누워서 잠이 소르르 들었는
데 옆에 누운 이춘동이가 흔들어 깨웠다. “밖에 누가 왔네.” “고 동안 잠이
들었든가.” 하고 김산이가 방문을 열어젖힌즉 초롱불을 든 졸개 하나가 방문
앞으로 들어서며 대장께서 손님을 뫼시구 얼른 오시란다고 전갈하였다. 김산이
가 이춘동이를 재촉하여 벗어놓았던 의관들을 함께 차린 뒤 그 졸개를 앞세우고
꺽정이 사랑에를 왔다. 꺽정이가 이춘동이를 맞아들이느라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아래윗간에 열좌하였던 여러 두령들도 모두 따라 일어섰다. 서림이,박유복이,배
돌석이 세 사람 이외 다른 두령이 김산이를 보고 잘 다녀왔느냐 인사를 하는 동
안에 꺽정이는 방문 맞은편 첫자리에 앉았던 박유복이를 이봉학이 옆으로 올라
앉게 하고 그 자리에 이춘동이를 청하여 앉히었다. 아랫간에는 꺽정이와 이봉학
이와 박유복이가 느런히 앉고 박유복이 앞에 모걱어서 이춘동이와 서림이가 어
개를 견주고 앉고 윗간에는 배돌석이,길막봉이,김산이 세 사람과 황천동이,곽오
주,한온이 세 사람이 두 줄로 마주들 대하고 앉았다. 이렇게 좌정한 뒤 꺽정이로
부터 시작하여 아래윗간 여러 두령이 김산이만 빼놓고 면면이 이춘동이와 초면
인사들을 하는 중에 이춘동이가 한온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울 남
소문 안 한첨지 영감의 자제 아니시우?” 하고 물어서 “녜,그렇소.” 하고 완온
이가 대답하였다. “우리는 구면인데 나를 몰라보겠소?” “전에 보였는지 의사
무사한데요.” “제가 서울 있을 때 동무 반연으루 댁에도 더러 놀러갔었소.”
“녜,그러셨든가요?” “별명으루 암맹콩이란 사람은 잘 아시겠구려.” “알다뿐
이오? 그 사람이 내 유모의 큰 아들이오.” “그래서 그 사람이 난전을 벌릴 떼
댁 첨지 영감이 밑천을 대주셨습딘다.” “옳지, 인제 알겠소. 댁이 맹꽁이 난전
에 있던 이서방이구려.” “그렇소. 내가 서울 있을 때 제일 사이 좋게 지낸 동
무가 맹꽁이었소.” “연못골 맹공이집에서 우리가 만난 생각이 나우.” “그때
댁은 초립동인데 까불까불하더니.” “예, 여보, 점잖은 사람더러 그게 무슨 소
리요?” “지금은 점잖지만 그때야 어디 점잖았소.” “하여튼 반갑소. 나는 당
초에 못 알아보겠는데 용하게 나를 알아보셨소.” “성씨 듣구 어림두 났었지만
전에 본 얼굴 모습이 과히 변하지 않았소. 그런데 소복을 했으니 웬일이오?”
“우리 아버지 거상을 입었소.” “첨지 영감 거상이란 말이지. 언제 돌아가셨
소?” “상주님을 그대루 보여서 쓰겠소. 새루 궂긴 인사하구 보입시다.” 하고
이춘동이가 한온이에게 절을 하려고 일어서는데 옆에 앉은 서림이가 절할 자리
를 비켜주지 않고 “서루 실없는 수작까지 하다가 새삼스럽게 조문이 무어요?
그러구 여기가 조문할 자리도 아니니 제례하시우.” 하고 말하니 이춘동이는 한
온이더러 “영감 상청을 뫼셨겠지요?” 하고 물은 다음에 “그럼 내일 상청에
다니러 가겠소.” 말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춘동이가 암맹꽁이란 동무의 별
명을 말할 때, 황천동이가 혼자 입속으로 “암맹꽁이.” 하고 뇌더니 마침내 한
온이를 보고 “맹꽁이면 맹꽁이지 어째 암맹꽁인가? 그 사람이 몸집은 똥똥하구
상판은 기집 같던가.” 하고 자기 의사껏 해석을 붙여서 물었다. “그 사람의 성
이 안가야. 별명에다가 성을 붙이면 안맹꽁인데 암맹꽁이라구들 불렀다네.” “
자네 집은 가까이 다니는 사람을 내가 꽤 많이 봤는데 암맹꽁이는 어째 못 봤을
까. 어디 다른 데 가서 사나?” “죽은 지가 벌써 십여 년일쎄. 난전 쳐갈 때 잡
혀가서 어떻게 몹시 맞았던지 골병이 들어 가지구 나와서 얼마 못 살구 죽었네.
” 한온이의 말끝을 이춘동이가 달아서 “그때 나두 평산 행보를 안 하구 서울
있었더면 맹꽁이하구 같이 들려가서 졸경칠 뻔하었소.” 하고 말하며 황천왕동
이가 이춘동이를 돌아보고 “그때 벌써 운달산에를 다녔었소?” 하고 물으니 이
춘동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고 “그때 나는 난전 물건 가지구 시굴루 도부를 자
녔었소. 평산 행보를 전후 너덧 번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운달산 박대장과 교분
있는 사람을 친해서 맹꽁이 죽은 뒤 그 사람 반연으루 운달산에를 들어갔었소.
”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이 처음 입당할 때 운달산....” 황천
왕동이 말하는 중간에 꺽정이가 “여보 이서방?” 하고 불러서 이춘동이는 꺽정
이에게로 고개를 돌이키었다. “연중이 노인은 지금 어디 가 사우?” “얼른 말
하자면 운달산에서 해주땅으루 내려앉은 셈이오. 운달산 남쪽에 대궐고개가 있
구 서남쪽으루 떨어져서 마장고개가 있는데 두 고개 중간에다가 전에 없던 새
동네 하나를 만들었소. 그 동네 십여 호가 거진 다 전날 부하들이오. 나두 거기
서 좀 살다가 마산리루 이사왔소.” “그 동네에 관속 침책이 없소?” “구실
잘 바치구 관속이 나오면 술밥 대접 잘하니까 다른 침책 별루 없지요.” “박연
중이 성명를 드러내놓구 사우?” “아니오. 성명만은 숨기구 사우.” “그래 그
가 지금은 무얼 하우?” “농사 때 감농하구 일 없을 때 어린아이들 업어주구
아주 훌륭한 촌영감이 되었소.” “그가 자녀가 몇이나 뒤우?” “아들 셋, 딸
둘 오남매요.” “"열대여섯 해 전에 내가 운달산에 가서 그를 만나봤는데 그때
는 딸인가 아들인가 돌쟁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게 지금 열일곱 살 먹은
큰딸이겠소. 오남매가 모두 만득이지만 지금 데리구 사는 젊은 첩에게서 낳은
남매는 더구나 아직 유치의 것들이오.” “그가 나이 올에 예순대여섯 됐지?”
“올에 예순아홉이오. 칠십 노인이지만 근력이 어떻게 좋은지 사십객 우리만 못
지않소.” 꺽정이가 박연중의 소식을 물어본 뒤 다시 “평산.재령.해주 관군들이
합세해 가지구 들이칠 때 어떻게 미리 알구 도망들 했소.” 하고 운달산 소탕당
할 때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내 처남아이가 그때 재령서 통인을 다녔는데 그
애가 뒷길루 기별해 주어서 우리가 몰사죽엄할 것을 면했소. 졸개 삼십여명은
사방으루 헤처 보내구 나하구 박대장하구는 집안 식구를 데리구 재령 사자목이
란데 가서 숨어 있다가 바람 잔 뒤에 나왔소. 그때 이야기가 이왕 나왔으니 말
이지만 세상에 그런 법두 있소? 일은 당신네가 저지루구 벼락은 우리가 맞친단
말이오?” “내게는 매원하지 마우. 나두 평양 봉물에 벼락맞은 사람이오. 그 매
원받을 사람을 내가 가르쳐 줄께 내 속까지 시원하두룩 한번 실컨 매원할 테요?
” 하고 꺽정이가 껄껄 웃으니 “매원 부탁을 받기는 내가 사십평생 처음인데.
” 하고 이춘동이도 따라 웃었다. 서림이가 매원받을 사람이 나라는 듯이 나서
서 “참말 당신네들은 우리를 여간 원망하지 않았을 테지요?” 하고 말하니 “
원망일뿐이오. 곧 절치부심을 했지.” “다른 사람은 몰라두 박연중이란 이는 절
치부심두 할 것이오.” “이 다음에 혹시 만나면 칼부림받을까 봐 겁이 나시는
모양이구려. 그러나 그가 그런 걸 속에 치부하는 졸장부가 아니니 안심하시구.”
이와 같이 이춘동이가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들과 담화하는 중에 어느덧 밤이
들었다. 꺽정이가 미리 일러두었는지 훌륭한 주안상 둘이 나와서 아래윗간에서
각각 한 상씩 받아가지고 술들을 먹는데, 윗간에서는 우리와 같이 한잔 먹자고
이춘동이를 끌어가고 아랫간에서는 순배 빼지 말라고 이춘동이를 불러오도록 스
스럼들이 없어졌다. 무간한 대접을 받은 이춘동이 당자보다도 김산이가 더 좋아
하였다.
이날 밤 꺽정이 사랑에서 흩어져 나올 때 한온이가 이춘동이와 김산이를 보고
내일 아침밥들을 자기 집에 와서 먹으라고 말한 까닭에, 이튿날 식전에 김산이
는 잔입으로 도회청에 나가서 조사를 치르고 오는 길로 방문 밖에 서서 “한두
령이 곧 오라네. 가세.” 하고 방안의 이춘동이를 불러내었다. 이춘동이가 의관
을 차리고 나와서 김산이와 같이 뜰 아래 내려설 때 어떤 사람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오며 “지금이사 오신 줄 알구 뵈러 오는데 어딜 가십니까? 부리나께 오길
잘했구먼요.” 라고 떠벌거리고 이춘동이 앞에 와서 허리를 한번 굽실하였다. 이
춘동이는 그 사람이 누군지 언뜻 생각나지 않아서 김산이를 돌아보고 “누군가
” 하고 묻는데 “밤이를 몰라보십니까?” 하고 그 사람이 저의 이를을 말하였
다. 다시 보니 애꾸는이 유표한 노밤이었다. “반가워서 하시는 말씀이라두 그런
방수 꺼리는 말씀은 아예 맙시오.” “너 같은 놈이 급살맞어 죽지 않은 걸 보
면 천도가 무심한 거야.” “듣기 싫어하면 더 하실 줄까지 뻔히 알며 자발없이
방수 꺼린단 말씀을 했지, 지금 앞으루 한 오십 년 더 살아봐서 세상이 길래 신
신치 않으면 급살이라두 맞아죽을랍니다.” 김산이가 나서서 “예끼 미친놈 저
리 가거라!” 하고 노밤이를 꾸짖고 “미친 놈 데리고 실없는 소리 고만하구 어
서 가세.” 하고 이춘동이를 재촉하였다. “여러 사람이 미쳤다구 놀리면 성한
놈두 미친단 말이 괴이치않은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나만 보면 미친 놈이니
실성한 놈이니 놀리는 까닭에 내 맘에두 내가 성하지 않지 생각이 드는 때가 있
습니다.” 하고 노밤이는 시벌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나오다가 고샅길갈림
에서 “틈 있는 대루 또 뵈러 옵지요.” 이춘동이가 큰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도
록 소리질러 인사하고 휘적휘적 다른 데로 가버리었다.
한온이의 집은 큰집이 한 채요, 작은집이 두 챈데, 형 내외와 서모와 자기 본처
는 큰집에 몰아 있게 하고 작은집 둘은 큰첩 작은 첩을 각각 갈라 들이었었다.
본처는 수발만 맡고 식사와 침석은 첩들이 받느는 까닭에 한온이가 밤에는 많이
작은첩의 집 안방에 가서 있고 낮에는 항상 큰첩의 집에 왔을 때, 한온이는 큰
집에 삭망을 지내러 가오 없어서 주인 없는 건넌방에 들어들 앉았는 중에 한온
아가 와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김산이는 앉아 있고 이춘동이는 일어섰다. 한
온이가 이춘동이를 보고 “밤새 평안하우?”하고 인사한 뒤 주인 자리에 가서
앉으려고 할 즈음에 이춘동이가 넙신 절을 하여 한온이는 잠시 당황하여 하다가
팔을 집어서 절을 맞았다. 이춘동아가 꿇어 앉아서 “상사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하고 새삼스럽게 조상 인사를 하여 “자네두 꽤 쑥일세.” 하고 김
산이가 조롱하니 “서루 아는 처지에 애경간 인사는 분명히 해야 하는 법이니.
” 하고 이춘동이는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투로 대꾸하였다. 이춘동이가
한온이더러 “상청에를 아주 다녀나옵시다.” 하고 청하는 것을 “궤연은 큰집
에 뫼셨으니 아침 먹구 나중에 가서 다닙시다.” 하고 한온이가 밀막았다.
이춘동이가 손님으로 대접하여 외상하여 주고 김산이는 한온이가 자기와 겸상
하여 아침들을 다 먹고 상을 막 치우고 앉았을 때, 서림이가 와서 네사람이 앉
아 아야기를 하게 되었다. 서림이가 이춘동이와 수작을 하는데 그 수작이 유심
하고 들으면 모두 지기 떠보는 것 같아서 김산이는 불쾌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우리 아침 얻어먹었으나 고만 가세.” 하고 이춘동이를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이야기나 좀더 하다가 같이 일어섭시다.” 서림이가 붙들뿐더러 이춘동이 당
자까지 “여기 있다가 주인하구 같이 가서 상청에를 다녀야겠네.” 하고 일어나
려 들지 아니하여 김산이는 다시 더 가잔 말을 못하였다. 서림이가 영웅 논란을
꺼내고 당세 영웅을 이춘동이에게 물으니 이춘동인는 처음에 “우리 같은 무식
한 놈이 영웅을 알 수 있소?” 하고 겸사한 뒤 다시 생각하고 “여기 임대장 같
은 이가 당세 영웅 아니겠소?” 하고 되물었다. “우리 대장은 아직 말말구 다
른 영웅부터 쳐보시우.” “다른 영웅은 난 모르겠소.” “공연한 말씀 마시우.
” “아니오, 참말이오.” “박연중이를 어째 치지않소? 나더러 당세 영웅을 치
라면 그를 첫손가락에 꼽겠는데.” “한번 만나보지두 못하구 그가 영웅인지 아
닌지 어찌아시우?” “만나보지 못하구 말만 들어두 그건 알 수 있지요. 기묘년
에 남곤 남정승이 박연중이란 아름을 들으면 벌벌 떨었답니다. 일인지하요, 만인
지상인 일국 정승이 갑을 낸 사람이면 그게 무서운 인물 아니겠소. 또 그가 을
사년에 사를 받구두 이내 세상에 나서지 않았답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세상에
나와서 펄펄 뛰구 돌아다녔을 것인데 산중에 들어 앉아서 사십여년 동안 자행자
지하구 지냈으니 그게 여간 동뜬 인물루 될일이오? 그보다두 대당의 괴수 노릇
하던 사람이 아무 뒤탈 없이 발을 씻구 나와서 여생을 안온하게 보내니 그런 희
안한 인물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소, 그래서 나는 그를 당세의 재일 영웅으
루 아우.”
서림이가 박연중이를 당세의 영웅으로 안다는 것은 말짱한 입에 발린 말이고
그 입에 발린 말은 분명히 이춘동이의 속을 뽑아보려는 것이라, 김산이가 서림
이 말하는 중간에 면박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서림이의 말이 끝나
기가 무섭게 곧 “박연중이가 서종사를 원수루 치부하고 절치부심하더라두 지금
말을 들으면 술 사주구 떡 사주겠소?” 하고 비꼬아서 말하니 “어젯밤에 실없
이 한 말을 가지구 나를 오금을 박는 모양이오.” 하고 서림이가 좋지 않은 내
색을 보이었다. “내가 서종사를 오금박을 주제나 되면 제법이게요. 그렇지만 지
금 하신 말씀은 잘 곧이가 들리지 않소.” “무엇이 곧이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 “박연중이가 운달산에서 나가 사는 것을 희한한 인물의 일루 말씀하니 그럴
것 같으면 서종사는 왜 여기서 나가서 안온하게 지낼 생각을 한 하시우?” “내
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찌 아우?” “그런 생각을 안 하시기에 안
나가시는 것 아니오.” 김산이가 서림이와 말을 다투러 대들 때, 꺽정이가 의논
할 일이 있다고 서림이를 부르러 보내서 서림이는 가소롭게 여기는 웃음을 김산
이 얼굴에 던지고 큰기침까지 하고 일어섰다. 서림이가 간 뒤에 김산이가 이춘
동이를 보고 “우리 중에 표리부동한 사람이 꼭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지금 왔
다 간 사람일세. 고 사람하구 말할 때는 조심하게.” 하고 당부하니 한온이가 서
림이 흉을 씻어 덮듯이 “지모는 비상한 사람이야.” 하고 말하였다. “지모가
비상하니까 교사두 비상하거든.” “하여튼 그 사람이 미덥지는 못하지.” “여
간 미덥지 못하가만 해? 그런 사람 믿었다간 큰코 깨네.” “자네두 곽두령의
본을 뜨네그려.” 한온이 말끝에 이춘동이가 “곽두령의 본이라니?” 하고 물어
서 김산이가 한온의 말은 접어놓고 “곽두령이 사람은 좀 무식스럽지만 우리 중
의 제일 직장일세.그래서 서종사하구 아주 앙숙이지. 대장께 눌리지 않으면 날마
다 싸울 걸세. 날마다가 무어야? 하루 열두 번 싸우지.” 하고 이춘동이의 말을
대답한 뒤 다시 서림이의 소행을 들추어서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방 밖에 누가
기침소리를 내어서 김산이는 이야기를 그치고 한온아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신불출이가 와서 한온이와 김산이를 보고 꺽정이의 전갈로 여러 두령들이 모여
서 한담하는 중이니 손님을 뫼시고 오라고 하여 한온이와 김산이는 곧 전갈 온
신불출이와 같이 가려고 하는데, 이춘동이가 한첨지 궤연에 다닐것을 잊지 않고
또 말하여 신불출이를 먼저 보내고 김산이까지 상주와 조객의 뒤를 따라서 궤연
있는 한온이 큰집에를 왔다. 곡 몇 마디와 재배 한번으로 이춘동이가 조례를 마
치고 나온 뒤 김산이가 이춘동이더러 “오두령을 아주 잠깐 찾아보구 가세.”
하고 말하니 이춘동이는 두 말 않고 동의한 뒤 “오두령 집이 대장 사랑에 가는
길인가?”하고 물었다. “오두령은 살림을 안 하구 박두령 집에 같이 있는데 박
두령집이 바루 이 집 옆집일세.” “청석골 주인이 어째 자기 집이 없나?” “
올 가을에 상배한 뒤 살림을 거뒈치우구 박두령에게 가서 얹혀 있네. 박두령의
아낙이 그의 수양딸이지.” “오두령 나이 올해 몇인가?” “올에 쉰셋이라네.”
“그럼 가서 절하구 뵈여야겠네그려.” 김산이 대답하기 전에 한온이가 “여기
는 무존장아문이니까 절 안 해두 좋소.” 하고 웃으니 “나이 대접 않는 데가
어디 있단 말이오?” 하고 이춘동이는 고개를 외쳤다. “당신이 대체 절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려. 나는 절 받기를 좋아하니 조석으로 내게 와서 문안하우.”
“버르쟁이없는 소리 말게. 내가 오두령에게가서 절한다는 것이 자네 같은 젊은
사람들 보라는 본보기야.” “실없는 말 한마디를 했더니 막 기어오르네.” “기
어오르다니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자네 나이 대접를 할 줄 모르거든 오늘부터
배워서 나이 많은 어른에게 그런 버릇없는 말 다시 하지 말게.” “떡국 많이
먹은 게 무에 그리 장해서 자세야?” “자네는 단당히 버릇을 배워야 사람이 되
겠네.” “우리 아버지께 못 배운 버릇을 아마 자네게 배우는 가베.” “나는 자
네더러 자네라지만 자네야 나더러 자네랄 수가 있나. 나이 있는데.” “자네 눈
에는 내가 곧 어린애같이 보이나?” “대체 자네가 나하구 벗할 나이 되나 못
되나. 나일 어디 따져보세.”“나이는 차차 따지구 얼른 오두령한테 가서 절이나
하구 오게.” “왜 자네는 안 갈 텔가?” “나는 먼저 대장께루 갈라네.” “같
이 가지 무슨 소리야?” “그럼 나는 여기 있을 테니 얼른 가서 다녀오게.” “
자네가 오두령하구는 못볼 사인가?” “나까지 따라가서 무어하나. 자네들 둘이
만 잠깐 갔다오게.” 한온이와 이춘동의 수작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앉아서
웃기만 하던 김산이가 이춘동을 보고 “가기 싫다는 사람은 고만두구 우리만 갔
다오세.” 말하고 먼저 일어났다. 이춘동이가 김산이를 따라가서 오가를 인사하
고 도로 올 때 “오씨가 쉰셋이랬지? 어디 오십 넘은 늙은이 같은가. 우리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지 않데. ”“상배하기 전까지는 흰털 하나 없었는데 지금은
수염이 희끗희끗해서 늙은이 같지.”“지금두 박두령보다 되려 젊어 보이데. 박
두령은 거의 반백이데그려.” “박두령은 조백이지.” “오씨가 이름은 무언가?
” “오두령의 이름은 오래 같이 지낸 박두령두 몰랐었는데 연전에 한두령의 아
버지 한첨지가 대장을 가르쳐 드려서 다들 알게 되었다데.” “그래 무어야?”
“개도치라네.” “개도치 . 꺽정이 이름들은 다 훌륭하지 못한걸.” 하고 서로
지껄이며 한온이 집 앞에 와서 한온이를 불러내서 다시 셋이 같이 꺽정이의 사
랑으로 왔다. 이춘동이가 꺽정이게서 점심때 술대접을 받고 여러 두령들과 같이
담화하는 중에 해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할 때,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들을 돌아보며 내일은 일찍 떠나겠다고 말을 하고 그 다
음에 특히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들을 돌아보며 내일은 일찍 떠나겠다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특히 꺽정이를 보고 평생에 한번 만나보기를 원하다가 이번에
와서 원을 이루고 가노란 뜻을 말하는데, 꺽정이가 말을 다 못하게 가로막고 “
오늘까지는 산이게서 묵구 내일부터는 내게 와서 며칠 동안 묵다가 가우.” 하
고 만류하였다. “산이게서나 뉘게서나 이 산 안에서 묵으면 다 대장댁에서 묵
는셈인데 따루 내게 와서 묵으라시나 그게 웬 말씀이우?” “소뿔두 각각이라
우. 내일부터는 내가 동향 친구를 대접해야겠소.” “어젯밤 오늘 낮 술대접에
동향 친구가 맘이 흐뭇했소.” “어제 오늘 술잔 낸 건 내 동무의 친구 대접이
지 내 친구 대접은 아니오.” “관곡하신 뜻은 감사하나 집에서 곧 올 줄 알구
기다릴 테니까 내일 가야겠소.” “못 가우. 내가 놔보내지 않겠소.” “집에 가
서 볼일이 있으니 이번은 놔주시우. 이 담에 다시 와서 동향 친구 대접을 실컨
받으리다.” “볼일 있는 사람이 오긴 왜 왔소?” “핑계가 아니오. 산이는 알지
만 우리 어머니 환갑이 이 달인데 미비한 것이 많아서 가봐야겠소
.” “환갑잔치의 미비한 것은 내가 준비해 줄 테니 염려 마우.” “아니오. 내
가 집에를 가서 준비할 일이 많소.” “환갑날이 어느 날이오?” “스무엿샛날
이오.” “이십여 일을 두구 준비할 일이 무어요? 내가 심사 틀리면 환갑날두
못 가게 붙들어 둘 테니 공연히 여러 말 마우.” 꺽정이 말에 눌려서 이춘동이
는 간단 말을 더 세우지 못하였다.
이춘동이가 꺽정이에게 붙들려서 묵는 중에 여러 두령과 서로 너나들이들까지
하게 되고, 또 청석골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게 되었다. 이춘동이가 황천왕
동이를 앞세우고 뒷산 너머 곽오주의 집을 구경하러 가는데 김산이더러도 가자
고 하는 것을 김산이는 이춘동이 없는 틈에 입당시킬 의논을 하려고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김산이가 꺽정이를 보러 왔을 때, 말썽쟁이 서림이가 꺽정이 옆에
앉아 있어서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춘동이더러 입당하라구 둬ㄴ해
보오리까?” 하고 꺽정이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꺽정이가 김산이의 말을 “그래
봐라.” 하고 간단하게 대답한 뒤 서림이를 돌아보며 “서종사 보기엔 춘동이
사람이 어떱디까?” 하고 물으니 처음에 공연히 의심하던 서림이도 “사람이 너
무 고지식한 것이 병통이나 솔직한 것만은 가취할 점인 것 같습디다.” 하고 대
답하는 것이 이제는 의심할 나위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날 밤 여러 두령이 꺽정
이 사람에 모여서 이야기들 하는 중에 박연중이의 처신하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서림이가 명철보신 이라고 칭찬하다가 꺽정이가 후기 없는 늙은이의
일이라고 타박하는 바람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고 우물쭈물 자기의 말을 거두
어치웠다. 박연중이 이야기 끝에 꺽정이가 이춘동이를 보고 “자네가 연중이 노
인의 부하 노릇만 하구 내 부하 노릇은 안 할라나? 내 부하 노릇두 좀 해보게.
” 하고 입당을 권하니 이춘동이는 웃으면서 “나는 팔자가 남의 부하 노릇만
할 사람인가?” 하고 실없는 말을 한마디 한 뒤 곧 정중한 말로 “내가 소시적
에 어머니 말을 안 들어서 어머니 속을 무척 썩여 드렸소.그래 서울서 평산으루
뫼셔올 때 이후는 말을 잘 듣겠다구 어머니 앞에서 맹세를 했었소. 박대장하구
같이 살지 않고 마산리루 따루 이사온 것두 어머니 말을 순종한 게요. 아까 저
녁때 산이가 나더러 이번에 입당하구 가라구 조르는데 내가 어머니 허럭을 받은
뒤에 다시 와서 입당하마구 대답했소. 지금 대장게두 그 밖에 더 대답할 말씀이
없소.” 하고 입당 바로 못할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이춘동이가 다른 두령들과는
맞히게를 하되 꺽정이에게만은 기꺽하여 반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오를 하였
다. 여러 두령이 떠받드는 사람을 하게하기가 거북도 하가니와 그보다도 꺽정이
의 기안에 눌려서 하게가 잘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춘동이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꺽정이는 잠자코 있고 대신 여러 두령들이 제가끔 말 한마디씩 하였다. “
비싸게 굴지 말게.” 황천왕동이의 조소와 “자네가 아직 어머니 젖꼭지를 못
떨어진 어린앨세그려.” 한온이의 농은 말할 것 없고 “효잘세. 가만 두게.” 배
돌석이의 빈정대는 말과 “입당하기가 싫거든 바루 싫달 게지 구차스럽게 무슨
핑계람.” 길막봉이의 게먹은 말을 대꾸 안 하던 이춘동이가 “그년의 늙은이
처치하기 어렵거든 랄 불러가게. 도리깨루 대갱이를 바시어 줄께.” 곽오주의 무
식스러운 말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든지 “천생 도리깨 도둑놈의 말본새
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서림이가 정당한 말을 자기 입에서 들으란 듯이 먼저
“여게 내 말좀 듣게.” 하고 허두를 내놓고 “자고로 부인네가 지아비 죽은 뒤
에 아들을 좇으란 법은 있지만 사내자식이 아비 죽은 뒤에 어미를 좇으란 법은
없는데, 지금 자네는 매사에 어머니 말을 좇는다니 이건 옛날 성인들의 마련해
놓은 법과 뒤쪽일세.” 하고 교훈하듯 말하였다. 서림이 말한 뒤 이봉학까지 마
저 “자당이 운달산에는 가서 기시구 청석골은 못 와 기시겠다구 하실 리가 없
을 테지.” 한마디 차례에 빠지지 않고 박유복이와 김산이 두 사람만 말이 없었
다. 박유복이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앉았고 김산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돌아보았다. 김산이의 웃는 속은 이춘동이 입당하기를 제일 바라는
사람이 입당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걱이려니와,
박유복이 속은 좌중의 제일 눈치 빠른 서림이도 짐작 못하여 “박두령 어디 불
편하시우?” 하고 물으니 박유복이는 천천히 고개를 치어들고 풀기 없는 말로
“나는 춘동이 어머니 파는 것이 부럽소.” 하고 말하는 것이 이춘동이 사정 이
야기에 감촉되어서 자기의 죽은 어머니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담화가
그치어서 방안이 조용하였다. 이춘동이는 자기 까닭으로 자리가 버성겨지는 것
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좌중을 한번 돌아본 뒤 꺽정이를 향하고 앉아서 “산이가
나를 끄는 것은 아이 적 동무의 정분이지만 여러분 친구들루 말하면 초면 만난
처지에 나 같은 하치않은 사람을 사생동고할 만한 사람으루 쳐주니 내 뼛속까지
사무친 감사한 맘을 말루 이루 다할 수가 없소. 내가 가서 어떻게든지 어머니의
허럭을 받아가지구 오리다. 내가 정히 조르면 어머니 맘에 싫더라
두 허락하실 줄 아우.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어머니가 종시 허락을 안 해서 다
시 못 오게 되면 나는 죽음으루 여러분 친구께 사과하겠소.” 하고 말하는데 결
심한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꺽정이가 이것을 보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맘을
먹을 것 같으면 먼저 입당하구 가서 나중 허락을 받두룩 하게.” 하고 말하니
“그건 어머니를 속이는 게니까 그렇겐 못하겠소.” 하고 이춘동이는 왼고개를
쳤다. “그래 다시 온다면 언제쯤 오겠나?” “어머니 환갑이나 지내구 오겠소.
” 꺽정이가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인 뒤 “환갑 때 산이를 오라구 청했다지? 나
는 좀 청하지 않나?” 하고 말하며 웃었다. “실없는 말씀이지. 그런 한만한 길
을 하실 리 있소.” “나더러는 오지 말란 말일세그려.” “그때 만일 오시면 박
대장하구 두 분이 만나실 수는 있지.” “연중이 노인이 온다구 했나?” “지난
날 초생 뵈러 갔을 때 오신다구 말씀합디다.” “경사술 얻어먹구 오래 못 만난
사람 만나구 겸두겸두 가겠네. 산이하구 같이 갈 테니 그리 알구 기다리게.” “
아머니 하락만 얻으면 나는 그때 아주 마산리 살림 명색을 거둬치우구 식구 데
리구 따라오겠소.” “살림을 그렇게 쉽사리 거둬칠울 수가 있을까?” “집하구
밭뙈기는 동네 사람에게 맡겨두었다가 나중에 팔아오지요.” “그건 자네 요량
해 할 일일세.” “내가 여기 온 지가 벌써 나흘이오. 내일은 가게 해주시우.”
“그러게. 내일은 가게.” 이날 밤 밤참으로 술들을 먹을 때 여러 두령들이 작별
술이라고 자꾸 권하여 이춘동이는 양에 지나는 술을 먹었건만, 이튼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조반 요기하고 바로 떠나는데 꺽정이가 환갑네 물품을 부조하고 그 물
품을 지워가라고 졸개 하나까지 주었다.
김덕룡이란 문무 겸전한 사람이 새로 황해감사로 내려온다는 기별이 청석골에
들어온 것은 이춘동이가 와서 있을 때요, 신계현령 이흠례가 봉산군수로 승탁되
어서 편도 부임한다는 소식을 청석골서 들은 것은 이춘동이가 돌아간 뒤 한 보
름 가까이 되었을 때다. 꺽정이가 봉산군수 갈린 소식을 듣던 날 불시에 여러
두령을 모아놓고 “신계현령 이흠례가 봉산군수루 승탁이 되었다니 그눔을 가만
둘 수가 없는데 어떻게 처치하면 좋을까.” 하고 이흠례 처치할 의논을 시작하
였다. 서림이가 꺽정이 말의 뒤를 받아서 “이흠례가 재간이 좀 있다구 조정에
서 특별히 승탁시킨 모양이구먼요. 그자가 신계 구석에 있어두 성가시었는데 봉
산에 나와 앉으면 봉산 이서 왕래에 여간 성가시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처치해
야지요.” 하고 말할 뿐이고 다른 두령들은 잠자코 있는데, 중대한 회의라고 빠
지지 않고 참례한 오가가 꺽정이를 보고 “이흠례는 윤지숙이와두 달라서 워낙
가만놔둘 수 없는 놈이오. 그놈 손에 잡혀 죽은 여러 두목들의 원수두 갚아 주
는 것이 좋지않소. 그러니 그놈은 잡아서 죽이두룩 합시다. 그놈을 죽이면 우리
의 위엄두 서구 우리의 후환두 없을 것이오.” 하고 말한 끝에 “자네들 생각엔
내 말이 어떤가.” 하고 여러 두령을 돌아보니 다들 좋다고 그 말에 찬동하였다.
이흠례를 잡아 죽이기로 의론이 일치한 뒤 “잡아 죽이자면 어떻게 해야 좋겠
소?” 하고 꺽정이가 서림이에게 물으니 “글쎄올시다.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 하고 서림이는 대답하였다. 서림이의 생각한단 말에 비위가 거슬린 곽오주가
별안간 큰소리로 “여보 대장 형님?” 하고 꺽정이를 부르고 “기급할 생각 다
고만두고 우리가 다 쏟아져가서 봉산군수놈두죽이구 봉산읍내도 도륙냅시다.”
하고 말한 뒤 오가의 본을 떠서 “내 말이 어떻소?” 하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꺽정이가 곽오주에게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 꾸짖고 다시 서림이를 돌아보며
“별루 좋은 꾀가 없다면 내가 단신으루 봉산 가서 찔러죽이구 오겠소.” 하고
말하니 “자객질은 위험합니다.” 하고 서림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위험
해? 무얼 내가 대낮에 삼문으루 들어가서 동헌에서 찔러 죽이구 무사히 돌아올
테니 두구 보우.” “대장께서 하시면 될 수야 있겠습지요. 그렇지만 아무래두
위험합니다. 그보다 나은 계책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실
것 있습니까.” “계책이 얼마든지 있으면 있는 대루 다 말을 하우.” “두령 몇
분이 건장한 졸개를 십여 명이구 수십 명이구 데리구 나가서 신계서 봉산으루
나오는 길에 목을 잡구 매복하구 있다가 도임행차를 엄습하는 것두 한 계책이
되지 않습니까?” “그 계책두 좋겠지만 그 동안 벌써 도임했으면 소용없지 않
소.” “그러면 또 수가 있지요. 조만간 감영에 연명은 안 가지 못할 테니까 봉
산서 해주 가는 역로에서 해낼 수 있지 않습니까. 어좌어우간 황두령을 봉산 한
번 보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황천왕동이더러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봉산을 가서 이흠례가 아직 도임 안 해거든 도임한다는
기일을 자세히 알아가지구 오구 벌써 도임했거든 해주 연명 갈 때 날짜를 미리
아는 대루 빨리 기별해 달라구 단단히 부탁하구 오너라.” 하고 이르고 이흠례
처치할 계획은 황천왕동이 갔다온 뒤 다시 의론하기로 작정하였다. 황천왕동이
가 봉산 처가에를 다녀오는데 펼쳐놓고 다니지 못하는 처지라 남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려구 중로에서 지체하여 땅거미 지난 뒤 들어가고 단잠을 못 자고 첫닭울
이에 떠나온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황천왕동이가 떠나가던 이튼
날 한낮좀 기운 때 되돌아왔다. “새 군수가 그 동안 도임했습디다. 엊그제 도임
해서 내일부터 공사를 시작한답디다. 그러구 감영에 이달 그믐께 갈 모양인갑디
다. 장인이 호장을 해보려구 책방에 긴한 길을 얻어서 청을 들여보냈더니 책방
말이 원님이 감영에 갔다오신 뒤에 육방에 변동이 생길 테니 아직 기다리라구
하더랍니다. 그래서 연명에 언제 가나 알아본즉 그믐 전에 갈 모양인데 골 일을
대강 보살피구 간다니까 자연 그믐께 되리라구 합디다. 연명 갈 날짜 정일하는
걸 알거든 곧 기별해 달라니까 기별할 사람이 없다구 나더러 또 왔다가랍디다.
” 황천왕동이의 회보를 들은 뒤 꺽정이가 이흠례를 연명하러 갈 때 잡으려고
생각하고 서림이를 불러서 잡을 준비를 의논하는데, 서림이가 무두무미에 “이
춘동이 어머니 환갑에 참말 가실랍니까?” 하고 물어서 꺽정이는 괴이쩍게 여기
며 “그건 왜 묻소?” 하고 되물었다. “마산리서는 재령 . 해주길이 가까울 테
니 환갑에 가실 때 아주 사람을 십여 명 다리구 가셔서 거기서 이흠례 가는 것
을 알아봐 가지구 목을 지키러 내보내시면 일이 편할 것 같습니다.“ ”
거기가서 여러 날 묵새길 수야 있소. 더구나 여럿이 가서.“ ”이촌동이두 인제
는 우리 액내 사람인데 그 사람의 집에 가서 며칠 못 묵으실 것 있습니까. 그러
구 며칠 될 까닭두 없습니다. 이달이 적어서 스무아흐레자 그믐이니 스무엿새날
환갑 보신 뒤 과 즉 이틀만 더 묵으시면 그믐이 아닙니까.“ ”이흠려가 스무엿
새 전에 갈는지 누가 아우?“ ”그믐께 간다니까 말씀입니다. 봉산서 어느 날
발정하는 것과 봉산서 해주를 이틀 갈 셈 잡구 첫날 어디 중화 어디 숙소하구
또 다음날 어디 중화하는 건 황두령이 미리미리 알아와야 준비에 실수가 없을
겝니다.“ ”어디 그렇게 작정하구 준비를 해봅시다.“ 이와 같이 꺽정이가 서림
이를 데리고 대강 의론을 먼저 정하고 밤에 여러 두령 모였을 때 의론 정한 것
을 이야기하였다. 이봉학이가 꺽정이더러 ”그럼 갈 사람 수효와 목 지킬 자리
두 대개 다 작정하셨습니까?“ 하고 물어서 ”아니.“ 하고 꺽정이는 고개를 가
로 흔들었다. ”갈 사람이나 가서 지킬 자리는 임시해서 작정해두 낭패가 없겠
지만 미리 대강 작정해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공롱해서 작정해 보
세.“ 하고 꺽정이가 곧 여러 두령을 돌아보며 ”봉산.해주 사이를 전에 내왕해
본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으니 여러 두령은 서로들 바라만 보고 대답이 없었
다. 다른 두령은 모르되 황천왕동이는 봉산서 장교 다닐 때 해주 감영에를 내왕
하였을 터인데, 대답 안 하는 것이 괴상하였다. ”천왕동이는 그 길을 다녀봤겠
지?“ ”몇번 다녀봤지만 유의 않구 휙휙 지나다녀서 고개티 이름 하나두 변변
히 모릅니다.“ 꺽정이가 자리는 나중 실지를 가보고 잡는다고 뒤로 미루고 갈
사람을 작정하려고 ”마산리 가구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하고 물으니
자리를 물을 때와는 딴판으로 여러 두령이 너도 나도 다 간다고 대답하고 오직
박유복이.서림이 둘만 간단 말을 않고 잠자코 있었다. ”박두령은 남의 어머니
환갑 지내는 것두 부러워서 가실 생각이 없으시우?“ ”대장 형님께서 가자시면
가지만 부득이 가구 싶을 거야 무어있소.“ 서림이와 박유복이 사이에 이런 수
작이 있고 ”여기를 통히 비다시피 하구 모두 다 갈 까닭두 없구 또 유복이는
겨울을 잡아들며부터 내처 감기가 떠나지 않으니까 남아 있는게 좋겠지만, 서종
사는 가서 일을 의론하더라도 꼭 같이 가야 하우.“ ”대장께서 가자시면 가지
요.“ 이봉학이와 서림이 사이에 이런 수작이 있은 뒤 꺽정이가 박유복이.곽오
주.한온이 셋이 오가와 같이 남아 있으라고 말하니, 셋 중의 곽오주는 간다고 고
집을 세우다가 이춘동이의 어린 딸이 울기 잘한다는 김산이의 말을 듣고 고만
수그러졌다. 서림이가 꺽정이를 따라서 마산리를 가기로 작정하던 다음날이다.무
시때요, 추운 날이라 탑고개로 순 돌러 나온 두령이 잠깐 다녀서 들어가고 행인
도 없어서 탑고개 주막이 쓸쓸할 때 어떤 노파 하나가 골 어귀 쪽에서 바람을
안고 올라오는데, 나이에 눌리고 또 추위에 눌려서 허리가 착 꼬부라져서 손에
짚은 짧은 지팡이가 버티지 않으면 곧 고갯길에 이마받이를 할 것 같았다. 그
노파가 꼬부랑꼬부랑하고 주막 앞에를 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서서 허리를 좀 펴
고 후유 하고 숨을 돌리고 목 안에서 갈라져 나오는 기침 소리로 사람 온 기척
을 내었다. 방문 닫힌 주막방은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였다. 노파가 눈으로 사람
을 찾느라고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방문 앞 토마루에 올라와서 언 입의 어줍은 말
로 “방에 아무도 없소?” 하고 말하며 이때까지 겨드랑 밑에 끼고 있던 왼손으
로 닫힌 방문을 잡아당기니 방문은 열리지 아니하나 방안에서 “그게 누구요?”
하고 묻는 사내 목소리가 났다. “여보 방문 좀 여우.” 하고 노파가 한옆으로
비켜서서 방문 열기를 한참 기다린 뒤에야 주막쟁이가 비로소 방문을 부스스 열
고 앉아서 내다보았다. “어디서 오신 할머니요?” “추워 죽겠소. 좀 들어갑시
다.” 주막쟁이가 손남은 없고 날은 추워서 계집과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판이라 노파의 들어오는 것이 반갑지 아니하여 못 들어오게 말막는 핑계로 “방
에는 앓는 사람이 있는걸요.” 마치 염병하는 사람이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제
말이 제 귀에 방자같이 들려서 눈살을 찌푸렸다. “앓는 사람이 있더라두 잠깐
몬 좀 녹여갑시다.” 주막쟁이가 하릴없이 문길을 틔우고 비켜앉았다. 주막쟁이
계집은 서방의 거짓말이 무방하든지 벽을 향하고 돌아누워서 일어나지 아니하였
다. 노파가 방에 들어오며 바로 화로 옆에 와 앉아서 불돌로 물러놓은 잎나무
불을 헤치고 쪼이면서 “앓는 사람이 무슨 병이오?” 하고 물으니 주막쟁이는
대답을 않고 골난 사람같이 뿌루퉁하고 있었다. 노파가 주막쟁이의 눈치를 살피
다가 “늙은 사람이 하마터면 길에서 강시날 뻔했소. 불을 좀 쪼입시다.”
하고 사정하듯 말하는 것이 눌러놓은 불 파헤치는 것을 주막쟁이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어서 쪼이고 갈 데루 가시우.”“나 갈 데가 이
근방인데 길을 모르니 좀 가르쳐 주우.”“어디를 가실 텐데 길을 모르신단 말
이오?”“이 근방에 유명한 적굴이 있지 않소.”“그건 왜 물으시우? 적굴에를
가실 테요?”“적굴을 찾아가는 길이오. 적굴이 예서 가깝소?”“적굴이 산속에
있는 줄만 알지 예서 가까운지 먼지 그건 모르우.”“청석골 어귀에 있는 양짓
말이라든가 그 동네서 말들이 이 주막에 와서 물으면 잘 알리라구 합디다. 모른
단 말 말구 길을 좀 가르쳐 주우.”“어떤 미친 놈들이 그런 말을 합디까? 도둑
놈이 아닌 바에 적굴을 잘 알 까닭이 있소.”“적굴 사람들이 육장 여기 와서
산다는데 모른단 말이 될 말이오.”“대체 적굴 같은 무서운 데를 왜 갈라구 그
러시우?”“적굴에 서가 성 가진 대장이 있지요?”“대장 성이 임가란 말은 귀
에 젖게 들었어두 서가란 말은 못 들었소.”“아니 임꺽정이하구 같이 있는 대
장들 중에 서림이란 사람이 있지 않소?”“서림이? 있는지두 모르지요. 그래 서
림이란 사람을 보러 가시우?”“그렇소. 서림이란 사람이 내 사위요.”“녜, 그
러시우. 그런데 그까지 도둑놈 사위를 왜 찾아가시우?”“도둑놈 소리를 듣더라
두 사위야 어디 가우. 더구나 딸이 와서 같이 있는데.”“그래 할머니는 딸 보러
가시는구려?”“그렇소. 인제 내 근지를 알았으니 길이나 잘 지도해 주우.”“그
러면 이 아래 동네에 들어가서 손서방집을 찾아가시우. 거기가서 말씀하면 따님
을 만나보게 되리다.”“내 딸이 거기 와 있소?”“거기 있구 없구 만나게 해달
라구 가서 말씀해 보구려.” 청석골 도중 대소사를 모르는 것 없이 잘 아는 주
막쟁이가 서림이에게 은혜를 졌다는 손가를 찍어대서 서림이의 장모란 노파를
배송내었다.
서림이의 장모가 탑고개 주막에서 탑고개 동네로 내려오는데 엎드러지면 코
닿을 데를 열나절 만에 내려와서 찾기 힘들 것 없는 손서방집을 두 번 세 번 물
어서 찾아왔다. 이때 큰 손가의 안해는 봉당에서 저녁밥 밑둘 콩을 고르다가 낯
모르는 늙은 여편네가 꼬부랑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혼잣말로 “웬 할머니
시여.”하고 말하였다. “이 집 주인댁이오?”“녜. 어디서 오셨나요?”“양지서
왔소.”“양짓말이오?”“경기도 양지골이오.”“용인 양지 하는 데요? 아이구
멀리서 오셨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서림이의 장모가 봉당 끝에 와 걸터앉아
서 바로 자기의 근본을 이야기하고 딸과 사위를 만나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큰 손가의 안해는 남편이 증왕에 은혜를 받은 까닭으로 서림이를 감지덕지 하는
사람이라, 그 장모를 친절하게 대접하여 방에 누워 있는 남편을 밖으로 불러내
고 방안에 들여앉힌 뒤 화로를 갖다가 앞에 놓아주고 불까지 헤쳐 주며 쪼이라
고 권하였다. “내 딸이 여기 가까이 있소?”“산에 기시지요.”“산이란 데가
예서 머우?”“십리길이라도 평지길 이십리 맞잡이라구들 합디다.”“그럼 내가
지금 곧 그리 가야겠는데, 길 가르쳐 줄 사람을 하나 얻어 주시겠소?”“가만히
계세요. 우리 시동생더러 말해 보겠세요.” 큰 손가의 안해가 서림이의 장모를
방에 앉혀 두고 밖에 나와서 옆집을 향하고 “여보게 여보게?”하고 소리치니
그 동서가 녜 하고 대답하였다. 형과 한집에 같이 살던 작은 손가가 그 동안 옆
집을 사서 따로 살림을 났던 것이다. “아재 집에 기신가?”“집에 없세요.”“
마을 가셨겠지?”“권생원네 사랑에 갔겠지요. 왜 그러세요?”“자네 얼른 가서
집에 손님 오셨다구 곧 오시라구 하게.”“어디서 오신 손님이에요?”“양지 사
시는 서종사 장모시래.” 큰 손가의 안해가 다시 방에 들어와서 서림이 장모더
러 자기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냐, 딸과 외손주가 보고 싶으면 봄새 날 따
뜻할 때 오지 왜 이런 추운 때 왔느냐, 양지서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 걸렸느
냐, 여러 가지 말을 묻고 자기 남편이 광주분원 살인옥사에 애매하게 걸린 것을
그때 형방 서종사가 힘을 써주어서 놓여나온 까닭에 서종사는 자기 집의 은이이
라고 이야기하는 중에 작은 손가의 안해가 와서 그 남편을 곧 오라고 불렀다고
말하고, 그 뒤에 얼마 아니 있다가 작은 손가가 와서 서림이 장모에게 절하고
인사하였다. “양지서 어느 날 떠나셨습니까?”“집에서 떠난 지는 한 달이 넘
었소.”“그럼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입니까?”“서울서 묵다가 왔소.”“서울서
는 어느 날 떠나셨나요?”“서울서 떠난 지가 오늘 벌써 엿샌가 보우.”“엿새
나 오셨세요?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습니까?”“미륵당이란 데서 잤소.”“미륵
당이서 주무셨으면 여기를 일찍 오셨을 텐데 어디서 지체하셨습니까?”“미륵당
이서 아침 먹고 나선 뒤 양짓말이란 데 와서 잠깐 지체하고 줄곧 온 게 인제 왔
소. 늙은 사람이 어디 걸음을 잘 걷소.”“점심은 어떻게 하셨습니까?”“점심
못 먹었소.”“아이구 노인네가 시장하시겠습니다.”작은 손가가 그 형수를 돌아
보며 “무어 요기하시게 드릴 게 없을까요?”하고 물으니 “점심때 형님 안 자
신 조당수가 있는데 그거나 데워서 드릴까.”하고 큰 손가의 안해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요기는 안 해도 좋으니 나를 딸에게로 곧 좀 데려다 주시우.”
“오늘 못 가십니다. 길은 여기서 양짓말 가는 폭밖에 안 되지만 가기는 미륵당
이 두어 번 가기보다두 더 어렵습니다. 내일 내가 들어가서 교군으루 뫼셔가두
룩 말씀하리다.”“내가 딸 보고 싶은 맘이 일시가 급하우. 어렵지만 지금 좀 갔
다오시우.”하고 서림이의 장모가 염치없이 조를 때 작은 손가의 안해가 그 남
편더러 “여기서 교군을 얻어 드리면 좋지 않소?”하고 말하니 작은 손가는 고
개를 끄덕이었다.
서림이의 장모가 탑고개에서 승교바탕을 타고 산에 들어왔을 때 날은 벌써 어
두워서 불들이 키어 있었다.서림이의 안해가 어머니 왔단 연통을 듣고 버선발로
쫓아나와서 “아이구 어머니 웬일이오?”하고 우는 소리 하며 달려들어서 어머
니를 붙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그 어머니는 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였다.
딸은 울렁거리는 놀란 가슴이 적이 가라앉으며 곧 반가움에 겨워 눈물이 쏟아지
고 어머니는 반가움보다도 눈물이 앞을 서서 모녀가 손을 맞잡고 앉아서 울었
다. 어머니는 징징거릴 뿐이지만 딸은 목을 놓았다.
서림이는 저녁밥을 먹고 꺽정이 사랑에 가서 있다가 장모를 배행하여 온 작은
손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안해가 울음을 그치고 한옆으로 비켜
앉은 뒤 장모에게 절하고 장모 옆에와 앉아서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치운 때
이렇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숨 좀 돌려가지고 차차 이야기함세.”하고
장모는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서림이의 아들딸 남매가 이때까지 어느 구석에
있다가 앞으로 나와서 저의 외조모에게 절들 하였다. “이때껏 어디들 가 있다
가 인제 와 뵙는달 말이냐?”서림이의 나무라는 말을 “어머니하구 맞붙들구 우
시느라구 어디 우리 절을 받으실 새나 있어요.”하고 그 아들이 말대답하는데
서림이의 장모가 자기 앞을 가리키며 “이리 가까이들 좀 오너라.”하고 불러서
남매를 다 앞에 앉히고 “이것들 좀 봐. 아주 몰라보게들 컸구나.”하고 머리들
을 쓰다듬어 주었다. “수남이 너 올에 몇 살이야?”“열다섯 살이오.”“그럼
복례는 열한 살인가?”“녜.”“외할미 얼굴을 알아보겠니?”“그러먼요.”“나
는 너를 몰라보겠다.”“할머니는 눈이 어두우시니까 못 알아보시지요.”“아이
구 고년 소명두 하다.”“수남아, 너 글을 배우느냐?”“아버지한테 배우는데 밤
낮 바쁘다구 새루 가르쳐 주진 않구 뒷글만 읽으란답니다.”“이 자식, 아버지
말씀을 뉘서 그렇게 헐하게 한다든?”서림이의 장모가 외손자 남매를 데리고 지
껄이는 동안에 서림이는 그 안해에게 “이런 치운 날 팔십 노인이 점심두 굶구
오셨다는데 진지를 얼른 해 드려야지. 그러구 손서방하구 교군꾼들도 저녁을 먹
이게해.”하고 말을 일렀다. 서림이의 안해가 밖에 나가서 부리는 졸개 계집더러
밥을 뼈없게 지어라, 국을 고기 많이 넣고 끓여라, 이렇게 이르기만 하고 도로
들어와서 앉았다. “어머니 시장하시겠세요.”“배는 고픈 줄 모르겠다만 따뜻한
물 한 모금 먹었으면 좋겠다.”마침 화로에 얹어놓은 숭늉이 있어서 복례가 갖
다가 외조모를 주었다. 복례가 일어설 때 수남이도 일어나서 윗간으로 내려갔다.
서림이의 장모가 더운 숭늉을 먹은 뒤에 서림이를 보고 “내가 이번 오기는 딸
보다도 자네를 보러 왔네.”하고 온 곡절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내 자식이 칠월 초생에 누이를 한번 찾아보고 오겠다고 나가더니 석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우리 고부가 노심초사를 하고 지내는 중에 시월
보름께 낯모르는 사람 하나가 찾아와서 자식이 서울 좌포청에 잡혀 갇혀서 기막
힌 고초를 겪는다고 소식을 전해 주데. 야경벌이란 무슨 벌인지, 야경벌이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다가 잡혀 갇혔다고 하데. 그 소릴 듣고 어디 집에 가만히 앉았
을 수 있든가. 그래 며느리만 집에 두고 나는 곧 서울로 올라왔었네. 서울을 오
니 무슨 별수가 있나. 날마다 좌포청에 앞에 가서 지키고 서서 관원들 드나들
때 자식을 내놔달라고 비두발괄도 해보고 자식의 얼굴이나마 한번 보게 해달라
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네. 그러나 소용 있어. 지청구만 받았지. 지청구뿐인가. 뺨
도 여러 번 얻어맞고 발길에도 여러 번 걷어채였네. 내가 그 욕을 보면서도 혹
시를 바라고 이십여 일 동안 한결같이 포청 앞에 가서 살았네. 포도군사 하나가
나를 불쌍하게 보았던지 빈말이라도 고맙게 해주데그려. 그 군사에게 간 속의
안부를 더러 얻어듣는데 물을 때마다 몸은 성하다고 말하더니 육칠 일 전에 비
로소 몸이 성치 못한 것을 이때껏 속여 왔다고 말을 하데. 병이 말이 아니라네.
간 속에서 병이 말 아니면 죽는 사람 아니겠나. 내가 다른 자식이 있나, 저 하나
믿고 살다가 팔십지년에 그 몹쓸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자네를 찾아보고 의
논하면 혹시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하고 허위단심하고 왔네.”장모가 질금질금하
며 목멘 소리로 말하는 것을 서림이는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진작 내게루 오셨
더면 좋았지요.”하고 장모의 늦게 온 것을 탓하였다. “자네가 전같이 관변에를
다녔으면 벌써 쫓아왔지.”“그런 일 주선할 힘은 전보다두 지금이 나은걸요.”
“그런 걸 누가 알았나. 그러면 곧 나오도록 좀 주선해 주게. 지금이라도 데려내
다가 치료만 시키면 염려 없겠지.”“그걸 주선하자면 내가 서울을 가야 할 텐
데 여기 일이 있어서 이달 안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자네가 주선할 힘이 없
으면 할 수 없지만 주선할 힘까지 있다면서 다른 일이 상치된다고 안 간단 말인
가?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디 있나.”“내 일 같으면 백일이라두 제치구 가지요만,
도중 일이구 일두 큰일인데 그걸 어떻게 합니까?”“도중 일이란 대체 무언가?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일입니다.”“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일에 자네 하
나가 빠지기로 큰 낭패 되겠나?”“사람은 아무리 여럿이라두 정작 일을 꾸밀
사람이 빠지면 일은 낭패지요.”“여기 일은 좀 중지해 두구 내 일을 먼저 봐주
게.”“여기 일이 중지할 일이 못 돼요.”“그래 내 일은 못 봐주겠단 말인가?”
“새달 초생에는 꼭 서울을 가겠습니다. 새달 초생이라두 보름 안짝 아닙니까.”
“지금 하루 사이에도 생사가 어찌 될지 모르는데 보름이 다 무언가? 이왕 갈
테면 내일 곧 가도록 해보게.”“그렇기에 진작 오셨다면 상치되는 일두 없구
좋았단 말씀이에요.”“여보게, 우리 모자를 좀 살려주게. 우리 모자가 죽는 걸
자네가 구해 주지 않는대서야 어디 인정인가?”장모가 땅파기로 조르는 것도 답
답한데 말참례할 틈을 못 타서 애를 쓰던 안해가 “우리 어머니가 진작 와서 말
하지 않았다고 심사가 틀려서 우리 동생이 죽건 말건 내버려둘 작정이오?”하고
당치 않은 사설을 내놓아서 서림이가 속이 상하여 “소견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해는 더욱 입이 싸게 “당신이 도중 일을 내
세우니 지금 도중에 무슨 일이 있소? 환갑잔치 먹으러 가는 게 도중의 큰일이
오? 설혹 우리들 모르는 큰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틈을 낼라면 차치고 포
치고 하는 수단으로 그만 틈을 못 내겠소.”하고 사설을 퍼부어서 서림이가 곧
야단을 한바탕 치고 싶은 것을 장모의 낯을 보아서 억지로 참고 “장모께서 좀
일찍 오셨다면 좋을 뻔했단 말이지 그걸루 심사틀릴 까닭이야 있나. 남의 맘에
없는 소릴 해두 분수가 있지 여기 일이 한번 작정만 되면 좀처럼 요개가 없는데
여럿이 공론해 작정한 일을 지금 어떻게 하란 말인가?”하고 온언순사로 안해를
타일렀다.
“대장께 말씀하면 사폐를 봐주시겠지요. 내가 가서 사정해 보리까?”“창피
한 소리 하지 마라. 말을 하면 내가 하지.”서림이 말끌에 그 장모가 “자네 혼
자 가서 말해 보고 안 되거는 내외 같이 가서 사정해 보고 그래도 안 되거는 이
늙은 것이 가서 석고대죄를 드리고 청해보세.”하고 말하니 서림이는 혀끝으로
쩟소리를 한번 내고 “내가 이따 가서 되두룩 말해 볼 테니 그 이야기는 고만하
구 다른 이야기나 하십시다.”하고 대답하였다. “지금 곧 가서 말할 순 없나?”
“진지 잡숫는 거나 보구 가겠습니다.”“밥먹기 전에 나는 좀 누워야겠으니 그
동안에 갔다오게.”“그러면 진지 잡술 때 못 와 보일는지 모릅니다.”“집에서
떠날 때는 입맛이 제쳐져서 밥을 못 먹었지만 지금은 악에 받쳐서 밥도 잘 먹
네. 자네가 옆에서 권하지 않아도 많이 먹을 테니 어서 가서 되도록 말하고 오
게.”서림이가 다시 꺽정이 사랑에 와서 꺽정이와 및 여러 두령에게 장모의 사
정을 세세히 이야기한 뒤 꺽정이를 보고 “색책으루라두 잠깐 서울을 갔다와야
겠습니다.”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불쾌스러운 언성으로 “마산리는 못 가겠단
말이오?”하고 물었다. “스무닷새날 뫼시구 같이 떠나두룩 스무나흗날 오밤중
에라두 대어오겠습니다.”“내일이 스무하루요. 이틀 가구 이틀 올 날짜밖에 안
되는데 서울 가서 무슨 볼일을 보겠소.”“밤 도와 가구 밤 도와 올 작정하면
서울 가서 하룻밤 이틀 낮은 볼일 볼 수 있습니다.”“가는 건 맘대루 하우. 그
러나 오기는 스무나흗날 꼭 와야 하우.”“말씀 여쭈긴 황송하나 얼룩이를 좀
주시겠습니까?”얼룩이란 꺽정이의 사랑하는 말인데 꺽정이는 근지않고 선뜻 “
그리하우.”하고 허락하였다.
서림이가 이튿날 꼭두새벽 조사 전에 떠난다고 미리 꺽정이에게 하직하고 또
여러 두령과 작별하고 걱정이 사랑에서 나올 때 한온이가 자기도 일찍 집으로
간다고 같이 나오며 “서울 가면 뉘게 가 묵으시겠소?”하고 물어서 “치선이
짐선달네 집으루 가겠소.”하고 서림이가 대답하였다. 김치선이는 서울 남대문
밖에서 객주하는 사람이니 청석골패와 연락을 맺은지는 오래나 특별한 관계는
없던 것이 한온이가 서울 있지 못하고 도망한 뒤에 관계가 갑자기 깊어졌었다.
청석골서 장물 보내서 팔아오고 사람 가서 거접할 서울 주인집을 문안 문밖 두
군데 새로 정하였는데, 문안 주인은 한온이 집의 서사로 있던 최서방이요, 문밖
주인은 곧 김선달이었다. 한온이가 서림이더러 “최서방 집이 김선달 객주보다
조용할 테니 그리 가시구려.”하고 권하는데 서림이는 한온이의 권하는 뜻을 지
레짐작하고 “최서방에게 혹 편지하실 일이 있소?”“글쎄요.”“김선달이 윤원
형 내외에게 긴한 길이 있는 줄 아는 까닭으루 아주 그 사람의 객주에 가 앉아
서 심부름을 시켜 볼까 생각하우. 최서방에게 갈 편지가 긴급한 것이면 내가 갖
다 전할 테니 오늘 밤에 내게루 보내시우.”“아까 말씀 들으니까 서울을 왔소
갔소 하실 모양인데 최서방을 찾아보실 겨를이 있겠소? 고만두시우.” 이런 수
작들을 하며 같이 걸어오는 동안에 벌써 서림이의 집 앞을 다 왔다. “더 이야
기 하실 일이 있으면 잠깐 우리 집으루 들어가십시다.”“이야기할 일두 없구
바루 가겠소. 평안히 다녀오시우.”“편지는 가서 써보내시우. 서울 가서 아무리
바쁘기루 편지 한장 전할 틈이야 없겠소.”“그럼 편지할 것두 없소. 최서방을
만일 찾아보시게 되거든 지난달 그믐 안으루 추심해 보낸다던 셈을 어찌 이때껏
보내지 않느냐구 물어보시구, 추심이 못됐으면 못됐다구 기별이라두 해줄 겐데
아무 기별이 없으니 대단 궁금하다구 말을 좀 전해 주시우.”“녜, 그러리다. 그
러구 소월향이에게 안부두 전하라구 말하리까?”한온이가 소월향이와 친하게 지
낸 것은 청석골 두령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작히 고맙겠소.”“셈 추심한
것루 소월향이 몸값을 치러 주구 곧 청석골루 치송하라면 어떻겠소?”“이때껏
몰랐더니 서종사 선심이 무던하구려.”한온이와 서림이는 한바탕 서로 웃고 흩
어졌다.
이튿날 첫새벽에 서림이가 꺽정지의 얼룩말을 자견하여 타고 서울길을 떠났
다. 이 얼룩말은 꺽정이가 전 봉산군수 윤지숙이게서 뺏어온 것인데, 걸음을 잘
하여 겨울 짧은 해에도 일백이삼십 리 가기는 무난하였다. 서림이가 첫날 혜음
령에서 혜음령패의 괴수를 만나서 그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때 좀 지나서
남대문밖 김치선이 객주에를 들어와서 뒤채의 조용한 방을 치우고 들어앉은 뒤,
주인 김선달과 포청에 갇힌 처남 빼내올 도리를 의논하였다. “좀스러운 야경벌
이하다가 잡혔으면 포청에서 두 달씩이나 가뒤둘 까닭이 있나요? 벌써 형조루
넘겨서 결말을 지었겠지. 오래 가둬 두는 내막을 먼저 알아봐아겠소.”“그래 나
두 그렇게 생각하우. 그런데 그걸 오늘 곧 알아볼 수가 있겠소?”“그렇게 빨리
알아보기는 좀 어려운걸요.”“내가 이번 길이 대단 총망해서 내일 아니면 모레
는 도루 갈 텐데 오늘 내일 양일간에 일이 포서만이라두 잡히는 걸 보구 갔으면
좋겠소.”“주선을 잘해서 일이 속히 되더라두 열흘이나 보름은 걸릴 텐데 이틀
동안에 어떻게 하겠소. 그건 안될 말씀이오.”“영부사나 정경부인의 허락만 맡
아놓으면 고만이니 이틀 동안에 그게 될 수 없겠소?”“영부사나 정경부인 귀에
말이 속히 들어가두룩 하자면 중비를 많이 써야 하구 영부사나 정경부인 입에서
허락이 당장 떨어지두룩 하자면 뇌물을 많이 바쳐야 하우.”“뇌물 중비 엄불려
서 대개 얼마 가량이나 들겠소?”“다다익선이지만 적어두 두자 상묵 이삼십 동
들 걸요.”“얼마가 들든지 드는 대루 김선달이 먼저 쓰구 나중 회계를 닦읍시
다.”“이십 동 잡구 절반은 내가 남의 것이라두 끌어댈 테니 절반은 달리 구처
해 보시우.”“나두 변통을 해보겠지만 김선달이 힘을 더 써주시우.”서림이가
한온이 부탁보다도 상목 변통할 일이 긴급하여 김선달과 대강 의논을 마친 뒤
곧 최서방을 찾아보러 문안으로 들어왔다.
서림이는 최서방의 집이 전날 한온이의 큰집 사랑 뒤 납작한 초가로 알고 찾
아가 본즉 뜻밖에 그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다. 들어 있는 사람의 말이 최
서방은 이달 초생에 수표교 천변으로 이사갔다고 하고 이사간 집 좌향을 캐어물
어서 대강 짐작한 뒤 다시 수표교 천변으로 찾아오면서 ‘옳지, 이자가 저의 주
인에게 보낼 셈을 보내지 않구 그걸루 이사를 한 게다. 사람이 영리하다더니 영
리한 값을 하는 게다.’하고 서림이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최서방의 새 집은 훌
륭한 와가이었다. 서림이가 문밖에서 주인을 찾으니 최서방이 동저고리 바람으
로 나오는데 명주 바지저고리가 거상에 벗어져 보이었다. “이 집을 어떻게 찾
으셨소? 그전 집으루 가셨습디까?”“그랬소.”“어서 들어오시우.”최서방이 큰
방을 두고 큰방머리 조그만 방으로 서림이를 인도하며 “저 방은 되지 못한 걸
어질더분하게 벌여놔서.”하고 큰방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발명하듯 말하
였다.
최서방이 서림이와 같이 방에 들어왔다가 점심을 이르고 온다고 도로 나가려
고 하는 것을 서림이가 점심을 먹고 왔으니 고만두고 앉으라고 붙들어 앉히었
다. “언제 이사를 했소?”“인제 한 열흘밖에 안됐소.”“집이 훌륭하구려.”“
주인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이 저이 모일 처소가 억다구 추렴들을 내서 이 집을
사놓구 나더러 들랍디다. 이런 좋은 집에 든 것도 막비 주인의 덕이오.”“남소
문 안에 집이 여러 채라니 그 중에서 한 채 골라서 써두 좋지 않소?”“주인집
은 모두 속공됐지요.”“속공이 안된 집두 여러 채란 말을 들었는데.”“나중에
사출이 나서 죄다 속공되구 말았소. 생각하면 기가 막히우.”“내가 이번에 어디
가는 길에 서울을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한두령이 부탁하는 말이 있습디다.”“
추심하라신 셈 말씀이겠지요? 추심이 도무지 잘 안돼서 지금 속을 썩이는 중이
오.”“추심이 못 됐으면 못 됐다구 기별이라두 해달라구 합디다.”“추심이 당
초에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벌써 기별이라두 했겠지만 될 듯한 데가 많으니까 얼
른 수합해서 보내 드릴라구만 생각하구 기별두 못했소. 지금두 저 방에서 문서
조각을 벌여놓구 앉았었소.”“더러는 추심됐소?”“추심된 것두 있지요.”“그
럼 두자 상목 열 동만 나를 줄 수 있겠소? 주인의 빚 추심한 걸루 안 되면 나중
도중 셈으루 에꿔두 좋소.”“주인의 수표를 가지구 오셨소?”“수표는 안 가지
구 왔지만 염려 말구 내주우.”“염려야 무슨 염려요. 그렇지만 셈이란 건 그렇
지가 않아서 말씀이오,”“상목 열 동은 내가 받은 수표를 해주리다.”“언제씀
쓰시겠소?”“오늘 쓰게 해줄 수 있겠소?”“오늘이오? 그건 좀 어렵겠는데 내
일 쓰시우.”“내일 식전에 쓰게 되겠소?”“오늘 밤에 주워 모아서 내일 식전
쓰시게 해보지요.”“나는 광주땅에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곧 갈 텐데 상목은
내일 식전 와서 가져가두룩 일러두구 가겠소. 오는 사람이 엄외장의 상목 맡은
것을 내달라구 하거든 의심 말구 내주시우. 그러구 수표는 지금 써놓구 갈 테니
지필을 좀 빌려주우.”“광주땅에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렇게 총총히 가실라
구 하시우?”“그 일은 나중 회로에 와서 이야기하리다.”“언제쯤 회정하시겠
소?”“이삼 일 후에 다시 오리다.”서림이는 최서방이 종시 못 미더워 보이어
서 자기의 행지를 이와 같이 기이고 이야기하였다. 최서방이 술 한잔 먹고 가라
고 붙드는 것을 서림이는 이삼 일 후에 와서 찾아 먹을 테니 아직 맡아두라고
실없은 말로 거절하고 최서방 집에서 바로 일어서 나왔다.
최서방이 천변에 나와 섰는데 광주땅에 간다고 말한 사람이 곧장 장통교 편으
로 올라올 수 없어서 서림이는 큰길로 휘돌아서 남대문 밖을 나가려고 수표교를
건너와서 베전병문을 향하고 나오는 중에, 대님 한 짝이 풀어져서 얼굴 가리었
던 모선을 접어서 소매에 넣고 풀어진 대님짝을 고쳐 맬 때 의복이 남루한 사람
하나가 앞에 와서 “언제 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하였다. 잘 아는 사람도 아닌
데 길에서 아는 체하는 것이 반갑지 아니하여 서림이가 인사 대답을 어물어물하
였더니 그 사람이 눈치를 알고 “저는 전에 남소문 안 사랑에서 심부름하던 사
람입니다.”하고 말한 다음데 “저의 젊은 주인이 안녕하십니까?”하고 한온이
의 안부를 물었다. 서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고하우.”하고 대답한 뒤 그제
는 인사성으로 “지금은 어데서 사우?”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손을 들어서 가
로 뚫린 사이 골목 안에 있는 움집을 가리키며 “저기 저 움퍼리가 제 집입니
다.”하고 대답하였다. “지내는 형편이 어려운 모양이구려.”“형편 여부가 없
습니다.”“최서방에겐 다니지 않소?”“최서방이오? 그놈은 말두 맙시오.”“최
서방하구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그놈하구 사이 좋을 까닭이 없지요. 주
인집에서 낙향한 뒤 그 놈의 행사를 보면 이 천기간에 용납할 수 없는 놈입니
다. 어디루 뫼시구 가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조용한 안침술집이 이
근처에 없소?”“왜 없어요? 골목 안에 조용한 집이 하나 있습니다.”“그럼, 그
리 가서 술 먹으며 이야기를 들읍시다.”“자, 그럼 가시지요.”하고 그 사람이
앞을 서서 인도하였다. 그 사람의 움집을 지나서 얼마 더 골목 안으로 들어오다
가 어떤 조그만 집의 지쳐놓은 일각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문간 흙바닥에는 트
레방석들이 놓이고 문간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청포 조각이 걸리었었다. 그
사람이 그중 정한 트레방석을 골라서 서림이를 앉힌 뒤 안을 향하고 “안주를
잘해서 술 한상 내보내시우.”하고 소리치고 서림이 앞에 와서 비슷 마주 앉았
다. 서림이가 최가의 행사를 알고 싶은 마음에 “내게 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
요? 정녕 최서방 이야기겠지.”하고 먼저 말을 자아내었다. “최가놈의 죄상을
제가 다 이야기할 테니 가서 젊은 주인께 이야길 좀 해주시오.”“이야기해야
할 일이면 하지 말래두 하지.”“그놈이 첨지 영감 손에서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전 은혜 꼬물두 생각 않구 주인집을 인제는 더 볼 것이 없다구 막보구서 가지
루 해를 붙입니다. 그런 천하게 죽일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무슨 해를 어떻
게 붙인단 말이오?”“주인집에서 남 준 빚을 그놈이 다 받아먹구 주인이 맡겨
두구간 집이구 세간이구 그놈이 다 팔아먹었습니다.”“빚은 추심해서 주인에게
루 보낼 계구 집들은 다 속공됐다는데 최서방이 무얼 팔아먹었단 말이오?”“그
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데 있던 집은 말 말구 남소문 안에 있던 집만 말
하더래두 속공된 건 다섯 채뿐이구 속공 안된건 삼곱절 열댓 채나 되었습니다.
그 집들을 그놈이 팔아먹는 통에 집 없는 거지가 여럿 났습니다. 저두 남소문
안 주인집에 들어있다가 집이 팔려서 쫓겨난 놈이올시다. 그러구 세간두 미리
돌려놓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도깨그릇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죄다 그
놈의 아가리루 들어갔습니다.”“집하구 세간하구 팔았으면 빚 추심한 것하구
함께 주인에게루 보내겠지.”“그놈두 말은 보낸다지만 보내긴 무얼 보내요? 좋
은 집 사들구 기생 외입하고 포교 대접하구 흥청망청 쓰는 놈이 꿈에나 보내겠
습니다.”“그 사람의 새 집은 그 전 남소문 안 사람들이 모일 처소가 없어서
추렴내서 사주었다며?”“그놈이 그런 말을 합디까? 터무니없는 멀쩡한 거짓말
입니다.”“그런 줄 몰랐더니 꽤 맹랑한 사람이구려.”“그놈이 기생을 상관해두
하필 젊은 주인하구 좋게 지내던 소월향이란 년을 상관해 가지구 지금 죽자살자
한답니다. 거러구......”이때 술상이 안에서 나와서 그 사람의 말은 잠시 중단되
었다.
서림이가 그 사람의 부어놓은 첫잔을 먼저 먹고 다음 잔을 부어서 그 사람을
준 뒤 한 차례 두 차례 술잔을 연방 돌리는 중에 “성이나 서루 알구 지내야지.
성이 무어요?”하고 비로소 그 사람의 성을 물어보았다.“제 성은 권가 올시다.
”“권서방이야? 내 성은 아우?”“녜, 압니다.”“내가 가서 주인하구 이야기할
때 권서방이라구 말하면 주인이 알겠소?”“사랑에 있던 권가라구 말씀해두 아
시겠지만 제 이름이 개미치니 개미치라구 말씀합시오.”“최서방이 주인의 대리
잘 보는 걸 들은 대루 가서 이야기하리다.”서림이의 뒤하는 말을 권가가 듣고
잠자코 있어서 서림이는 다시 “주인의 팔라는 집을 잘 팔구 주인의 받으라는
빚을 잘 받은 것두 무던하지만 그보다두 주인의 사랑하던 기생을 주인 대신 사
랑한다니 대리를 그렇게 잘 보기가 어디 쉽소?”하고 자기 말에 주를 달고 웃었
다. “그런 이야기두 가서 하시는 게 좋지만 꼭 가서 이야기를 해주셔야만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그건 또 무슨 이야기요?”“좌포청에서 젊은 주인을
찾을 때 구산하러 나갔단 말을 곧이 듣구 포교들이 남소문 안 사랑에 와서 지키
구 있었지요. 그때 최가놈이 포교들을 친했던 모양이에요. 지금 포교들과 상종이
썩 잦습니다. 내 눈으루 보진 못했지만 포교 네 놈하구 오형제 의를 모았단 말
까지 있습니다. 하여튼지 그놈이 두길보기하는 건 의심없는 사실입니다. 젊은 주
인이 그놈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볼는지 모르니까 이건 꼭 가서 이야기합시오.
”“그거 참말 맹랑한 사람이오.”“죽일 놈이지요. 흩벌루 죽일 놈두 아니에요.
천참만육할 놈이지요.” “죽을 놈 소리 들어서 싸우.” 큰 구리주전자에 하나
가득히 내온 술이 어느 사이 다 없어져서 권가가 주전자 뚜껑을 누르고 따른 마
지막 잔이 반잔 될까말까 하였다. “반잔두 못 됩니다. 그대루 잡수시지요.” “
한 순배 더 내오라지.” “저는 더 못 먹겠습니다.” “술이 길지 못하구려.”
“어디 먹을 줄 압니까?” “그럼 이거나 마저 자시구 일어납시다.” “아니 잡
수십시요.” “사양 말구 어서 자시우.” 잔이 곯은 마지막 잔을 권가를 먹인 뒤
에 서림이가 몸에 지니고 나왔던 잔용 쓸 것으로 술값을 치러 주고 술집에서 나
와서 권가를 작별하고 남대문 밖 객주로 나왔다. 김선달이 어디 나가고 없어서
서림이가 혼자 방에 드러누워서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한온이의 말을 듣고 최가
에게 가서 주인하였더면 무슨 봉변을 하였을지 모르고, 또 자기가 사람이 데면
데면하여 최가에게 행지를 알렸더면 다른 지장이 생길는지 모르는 것을 주인도
안 하고 행지도 안 알린 것이 못내 다행하였다. 서림이가 천정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중에 밖에서 김선달의 목소리가 나더니 바로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셨습니까?” “그랬소.”하고 서림이가 일어 앉으니 김선달은 방에 들
어와서 마주 앉으며 “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를 가서 보구 이야기했지요.”하
고 말하였다. “그래 이야기가 어떻게 됐소?” “손동지 말이 그런 일은 정경부
인께루 말을 들여보내면 제일 속한데 이십 동쯤은 안에 바쳐야 하구 그외에 댓
동 더 있어야 자기하구 시녀들하구 노놔 쓴다구 스물 닷 동을 주어야 일을 해보
겠다구 합디다. 그래 여러 가지루 사정해서 우사는 떼구 이십 동만 주기루 했소.
손동지가 사람은 좋지만 속이 좀 컴컴하니까 이십 동을 가지구 정경부인하구 반
분할는지두 모르지요.” “인제 이십 동만 구처하면 일은 됐구려. 이십 동을 김
선달이 다 구처해 주겠소?” “처음에두 말씀했지만 나는 동대서 취해두 십여
동밖에 더 끌어 댈 수 없는걸요.” “내가 오늘 문안에 들어가서 한 군데 열 동
을 말해놓구 왔는데 꼭 될는진 모르나 내일 식전에 찾으러 보내 보게 사람 하나
를 얻어주우.” “집의 심부름꾼들을 보내시구려.” “상목을 준다는 사람이 혹
시 내 뒤를 파볼는지두 모르니까 누가 보내는지 모를 사람을 보냈으면 좋겠소.
” “만일 상목 뒤를 밟으면 누가 가든지 매한가지 아니오.” “그렇기에 상목
을 찾거든 그걸 이리 가져오지 말구 바루 영부사댁 도차지 방으루 가져가랍시
다. 한 번에 열 동씩 두 번 견줄러 보낸다구 적바림해 주어 보내면 되지 않겠소.
” 김선달은 서림이가 일을 귀신같이 잘 요량하는 줄 아는 까닭에 “어련히 잘
생각하셨겠소?”하고 딴말을 더 하지 아니하였다.
김선달이 상목을 변통하여 본다고 다시 나가더니 저녁 먹을 때까지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서림이는 저녁 먹은 뒤 바로 자고 싶은 것을 자지 않고 김선달 오
기를 기다리었다. 서림이 눈에 잠이 가득하였을 때, 방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얼
굴에 끼쳐서 잠이 달아났다. 김선달이 방으로 들어왔다. “안 주무시구 앉으셨구
려.” “어딜 갔다 이렇게 늦었소? 문안엘 들어갔습디까?” “문안에두 들어갔
었지만 문안에선 벌써 나왔구 피마병문께 사는 사람을 하나 보러 갔다가 어디
나간 것을 기다려서 보구 오느라구 늦었소.” “저녁은 어떻게 했소?” “지금
와서 한술 떠먹었소.” “수구를 너무 시켜 미안하우.” “별말씀을 다하시는구
려.” “그래 상목은 어떻게 변통이 됐소?” “문안에 보낼 사람은 어떻게 했소,
얻어놨소?” “내가 나갈 때 집의 심부름꾼더러 신실한 사람을 하나 얻으라구
일러두구 나갔는데 와서 말씀 안합디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람을 아주
두엇 얻으라구 할 걸 공연히 하나만 얻으랬나 보우.” “상목 져나를 지게꾼을
보낼라구 생각하우?” “그럼 의관한 사람을 보내실 작정이오?” “대가집 하인
으루 속을 만한 사람을 보내는 게 좋겠소. 상목은 삯군 대서 지우구 그 사람더
러 영거만 해가지구 가라면 되지 않소. 그러구 삯군 삯 줄 건 미리 그 사람 주
어 보내구.” “어떤 사람을 얻어놨나 어디 물어봅시다.”하고 김선달이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여보게 박서방 좀 부르라게.”하고 소리치니 안에서 “
녜.”하고 대답하는 것은 김선달의 작은마누라인 듯 젊은 여편네의 목소리였다.
김선달이 방문을 도로 닫고 앉은 뒤, 한동안 지나서 방문 밖에 신발 소리가 나
고 신발 소리 그치며 헛기침 소리가 났다. 김선달이 방문 쪽을 향하고 “박서방
인가?”하고 물으니 방문 밖에서 “녜.”하고 심부름꾼 박서방이 대답하였다. “
내일 문안에 보낼 사람 어떻게 했나?” “말해 놨습니다.” “누구를 말해 놨
나?” “걸방으로 걸머질 짐인 줄 알구 지게 말은 이르지 않았는걸요.” “지게
구 걸방이구 다 소용없으니 옷갓하구 오라구 하게.” “내일 식전에 오거든 다
시 가서 옷갓하구 오라구 이르지요.” “내일 식전 일찍 오라구 했나?” “바라
칠 때 오라구 했습니다.” “바라 칠 때 오면 다시 갔다오라구 해두 늦지 않겠
네. 고만 나가 게.” 박서방의 밖으로 나가는 신발 소리가 난 뒤에 김선달이 서
림이를 보고 “상목 찾을 곳은 내일 식전에 그 사람을 보구 이르실라우.”하고
물었다. 서림이는 고개를 외치며 “나는 그 사람을 볼 것두 없소. 박서방더러 일
러 보내랍시다.”하고 대답한 다음에 “수표교에서 남쪽 천변으루 장찻골다리를
향하구 올라오자면 불과 여남은 집 지나와서 바깥 종부담울 새루 쌓은 집이 있
는데, 그 집 주인의 성이 최가니 그 주인 최서방을 찾아보구 묻거든 바루 영부
사댁에서 왔다구 말하구 그외의 묻는 발은 모두 모른다구 대답하라시우.”하고
말하였다. “나는 손동지에게 전갈할 말두 일러야 할 테구 또 삵군들 삵 줄 것
두 주어야 할 테니까 내가 보구 똑똑히 이르겠소.” 서림이가 하품을 하며 고개
를 끄덕이었다. 김선달이 이것을 보고 “곤하시거든 주무시우. 나두 일찍 들어가
자겠소.”하고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간 뒤 서림이는 곧 잘 자리를 보았다. 하룻
밤 지나니 동지달 스무사흗날이다. 서림이가 잠은 새벽에 깨었으나 일찍 일어나
서 볼일이 없고 또 몸 운김으로 따뜻하여진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어서 그대
로 누워 있었다.
‘내일은 오밤중이라두 청석골을 들어가야 할 텐데 말이 걸음은 잘하지만 이
백 리가 넘는 길을 당일에 들이대자면 말보다두 사람이 죽을 지경일 테니 오늘
다 저녁때라두 떠나서 가는 대루 가다가 자야겠다. 청석골 가선 하루두 쉬지 못
하구 바루 미산리를 가야 할 테지. 이런 제기, 다른 복은 막히구 길복만 터졌나.
올 때 임진강 등빙에 감수할 뻔했는데 어제부터 일기가 풀려서 얼음이 더 굳었
을 린 없지. 등빙을 또 어떻게 한담.’ 서림이생각에 임진강 갓 언 얼음에 또다
시 등빙할 일이 곧 저승만 하였다.
서림이가 머리를 방문 편으로 두었는데, 문틈으로 들어오는 새벽 바람이 얼굴
에 서리를 끼어얹는 것 같아서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고 누웠는 중에 자는지만
지 하게 개잠이 들었다. 자기가 얼음 구멍에 빠져 죽은 것을 건져내 놓았다고
하는데, 자기의 시체란 것이 놓인 곳은 예전 광주서 살던 집 안방이고 시체 옆
에 둘러앉은 것은 모두 일면부지 모를 사람들뿐이라 처자는 다 어디 가서 있나
살펴본즉 방 한구석에 안해는 딸의 머리를 빗기고 앉았고 아들은 따로 돌아앉
아서 훌쩍훌쩍 우는 모양이었다. 철없는 딸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결발한 뒤 이
십여 년 동안 고운 정 미운 정 정이 깊이 든 안해가 눈에 눈물 한 방울이 없었
다. 미거한 아들만도 못하였다. 청석골 있을 때 어느 날 밤 내외가 베개 위에서
자식 남매의 전정을 이야기하는 중에 “나는 설혹 잡혀 죽게 되더래두 그대는
남매를 데리구 도망해 나가서 구명도생을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이 나면 나
는 따라 죽지 혼자 도망 안 해요.” “자식들은 어떡허구?” “저희들 명 길면
살겠지요.” “그건 생각이 부족한 소리야.” “싫어요 싫어요. 나 혼자 살긴 싫
어요.” 이렇게 열녀 노릇 할 것을 자기하던 사람이 화복하고 단정하고 남편의
시체란 것은 본체만체하고 앉았으니 일변 괘씸도 하고 일변 한심도 하였다. 훌
저에 꺽정이가 어디서 완서 아들을 발상시킨다고 밖으로 끌고 나가는데 고만두
라고 말을 하려 한즉, 혀가 얼어굳어서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무진 애를 쓴 끝
에 외마디 소리를 한번 지르고 자기 소리에 놀라서 정신이 번쩍 났다. 서림이가
얼굴을 이불 밖에 내놓고 보니 동향인 방문이 가득 비친 햇빛이 눈이 부시었다.
“이크, 너무 늦었구나.”하고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놓고 이불을 개킨 뒤에
세숫물을 달라고 소리치니 김선달이 세수대야는 계집아이를 들리고 비누합은 자
기가 가지고 나왔다. “이부자리가 얇아서 밤에 치웠지요?” 김선달의 밤잔 인
사에 서림이는 “치운 줄두 모르구 잘 잤소.”하고 대답한 뒤 “새벽에 깨었다
가 이불 속 따뜻한 맛에 개잠이 들었었소.”하고 늦잠 잔 것을 발명하여 말하였
다. “일두 없는데 일찍 일어나 무엇하시우? 더 늦두룩 주무셔두 좋지.” “대체
지금 때가 어떻게 됐소? 아침때가 지났소?” “다들 아침 먹구 우리 둘만 남은
모양이오.” “문안 간 사람은 새벽 갔소?” “그 사람이 오기를 워낙 좀 늦게
오구 다시 가서 의관하구 오느라구 지체하구 간 지가 그리 오래지 않소. 지금쯤
갔을 게요.” “어제 변통해 놓으신 상목은 찾아왔소?” “내가 다시 가서 아주
아퀴를 짓구 찾아올 텐데 일어나시는 걸보구 가려구 아직 못 갔소.” “얼른 찾
아다가 낮 전에 마저 다 보냈으면 좋겠소.” “그럼, 나는 곧 아침을 먹구 나가
겠소.”하고 김선달은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서림이가 아침밥 먹고 밥상을 물릴
때, 심부름꾼 박서방이 들어 와서 “문안에 갔던 사람이 나왔는데 상목은 안 줘
서 못 찾았답니다.”하고 말하여 그 사람을 불러서 보고 “대체 무어라구 말하
구 안 줍디까?”하고 물어보았다. “최서방이란 사람이 잘 보지 않은 것을 그예
보자구 해서 보구 엄외장의 맡겨 둔 상목을 영부사댁에서 찾으러 왔다구 말하니
까 그 사람 말이 아직 입수가 못됐으니 내일 아침에 한번 다시 오라구 합디다.
그래서 한을 하루 물려두 좋을까 여쭤 보구 온다구 말하구 바루 나왔습니다.”
“여기 주인이 오면 무슨 말이 있을 테니 밖에 가서 좀 기다리우.” 그 사람이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퍽 많이 보이더니 급기 방문 앞에 와서 서는 것을
본즉 불과 셋이었다. 그러나 셋은 고사하고 단 하나라도 서림이 주제로는 때려
눕히고 도망할 가망이 없었다. 서림이는 움치고 뛸 수가 없이 되었다. 포교들이
잡으러 왔으면 으레 제잡담하고 몸에 손을 댈 터인데, 솔개 병아리 차듯 차지
않고 고양이 쥐 놀리듯 하려는지 서로 돌아보며 눈짓 콧짓 다하더니 그중의 하
나가 서림이를 보고 능글능글하게 웃으면서 “임자 성명이 무어요?”하고 말을
붙이었다. 서림이는 놀라움과 겁이 작이 차고 고비가 넘어서 뒤쪽으로 악이 나
고 담대하여졌다. “엄가요.” “오, 엄외장이란다지? 엄외장, 포청에 일이 있으
니 우리하구 좀 같이 갑시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은 가면 알지 어서
일어나오.” “무슨 일인지 모르구선 못 가겠소.”하고 서림이가 한번 뻑써 보았
다. “못 가!”하고 그 포교는 당장 팔을 걷어붙이는데 다른 포교 하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우리는 엄외장이 청석골 대적 서림이란 말을 듣구 잡으러 왔으
니까 우리하구 같이 가서 서림이 아닌 것만 변명하구려.”하고 언죽번죽 말하였
다. 포교들이 상목 찾으러 간 사람을 뒤밟아 온 것만 보아도 치의가 대번 최가
에게로 가는데, 본성명까지 알고 잡으러 온 것을 보면 최가가 밀고한
것이 의심없었다. 서림이가 속으로 왼새끼를 꼬면서도 겉으로는 아닌보살하고
“서림이라니 어떤 죽일 놈이 나를 서림이라구 모함했단 말이오?”하고 펄펄 뛰
었다. “고발한 사람이 위조고발했으면 반좌율을 켤텐데 무슨 걱정이오? 어서
빨리 갑시다.” “가지요.” 서림이가 가기 싫다고 안 가지 못할 판이라 말은 간
다고 하였지만 가는 곳이 죽을 고니 마음엔 가고 싶을 까닭이 없었다. 목숨을
도망할 생각이 골똘하나 몸을 빼칠 꾀는 삭막하여 서림이의 마음이 초조하였다.
첫째 동안이 좀 있어야 꾀를 내기도 하고 쓰기도 할 터인데, 그럴 동안이 없어
탈이라 서림이가 뭉그적뭉그적 문지방 앞으로 나와 앉아서 “여러분께 청할 말
씀이 한 가지 있는데 들어들 주시겠소?”하고 포교들을 돌아보니 “무슨 청이
오?”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던 포교가 물었다. “여기 객주 주인에게 셈을 밝힐
일이 있는데 지금 주인이 어디 잠깐 나갔으니 넉넉잡구 한식경만 여러분 참아
주실 수 없겠소? 그 동안은 여러분이 이 방에 들어와서 나하구 같이 앉았읍시
다. 그러구 또 그저들 앉았기 심심하다면 내가 술을 한턱 내리다.” 서림이의 말
끝이 마자마자, 팔을 걷어붙이던 포교가 서림이 앞으로 바짝 대들며 “술을
한턱 낸다? 그럼 신발차두 후히 주겠구나? 이놈아, 네가 우리를 시굴 사령 부스
레기루 아느냐?”하고 바로 서림이의 팔을 잡아 앞으로 낚아서 서림이는 문지방
너머로 고꾸라지듯 끌려나왔다. 처음부터 입 한번 떼지 않은 포교가 뒤에 들고
섰던 줄을 제꺽 내쳤다. 포교 셋이 함께 대들어서 서림이를 묶는데 걸려 가지고
가려고 아랫도리만 내놓고 윗도리는 꼼짝 못하게 묶었다. 서림이는 입술이 악물
리고 얼굴빛이 질리었다. 서림이가 포교들에게 끄리고 밀려서 중문간으로 나오
니 다른 포교 들이 문을 지키고 있는데, 상목 찾으러 갔던 사람을 뒷결박지워서
한옆에 앉히었다. 안에서 나오는 포교 중의 하나가 밖에 있는 포교들더러 “저
놈두 우리가 끌구 갈 테니 지네들은 여기 있다가 주인놈을 잡아가지구 오게.”
하고 말한 뒤 결박지워 놓은 사람에게 가서 갓을 툭 쳐서 벗겨버리고 상투를 잡
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 사람은 엉엉 울며 안 가려고 앙탈하다가 포교에게 뺨을
여러 차례 얻어맞았다. 서림이를 나와 잡은 포교들은 좌포청 소속이라 서림이
가 파자교 좌포청으로 끌려왔다. 늦은 아침때쯤 잡혀온 사람을 점심때 훨씬 지
난 뒤에 비로소 부장청에 끌어내다가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첫 문초를 포교
들끼리 받지 않고 부장 앞에서 받는 것부터 대사죄인으로 잡도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림이가 죽을 고를 어떻게 모면할까 곰곰 생각하여 보았으나 슬기
구멍이 막혔는지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당하는 대로 당할 수밖
에 없는데, 만일 서림이라고 자복하면 능지처참이 가려라 어디까지든지 자복은
않고 배기려고 마음을 먹었다. 설혹 서림이로 판명이 되어서 군기시다리까지 끌
려가게 될지라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살 수가 있겠지, 설마
죽으랴 하는 생각이 마음속 한구석에 붙어 있어서 낙심은 되지 아니하나 다만
악형 받을 것이 겁날 뿐이었다. 서림이가 포교들의 잡아 꿇리는 대로 부장청
계하에 꿇어앉아서 대장을 치어다보니 중간에는 포도부장 한 사람이 화로를 끼
고 앉았고 옆에는 서원인 듯 지필을 앞에 놓고 앉았다. 부장이 굽어보며 “묻는
말을 바루 대지 않으면 당장에 초죽음을 시켜놓을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첫
마디에 으름장을 놓는데, 서림이가 목소리는 나직하나 분명한 말로 “아는 일이
면 다 이실직고하옵지 일호라두 기망할 길이 있소이까.” 하고 대답하였다. “네
성이 무어냐?” “엄가올시다.” “성이 무엇이야?” “엄할 엄자 엄가올시다.”
“초죽음을 하구 싶어서 성부터 외대느냐?” “엄가 아닌 걸 엄가랄 리 있소이
까.” “네 아비는 서가구 너는 엄가냐? 이놈, 죽일 놈 같으니!” 부장이 서림이
를 호령한 뒤 서림이 옆에 섰는 포교들더러 “그놈을 다듬어 가지구 만져야겠
다. 한바탕 톡톡히 내려라!” 하고 말을 이르더니 포교들 중의 가장 세차 보이는
사람 두엇이 방망이들을 뽑아들고 사다듬이를 시작하였다. 서림이가 몇 번 아이
구 소리를 지른 끝에 “바루 댈 테요. 고만 고만.” 하고 항복하여 방망이질이
시작된 뒤 얼마 안 되어서 그치었다. 부장이 다시 성명을 묻는데 이번에는 바로
“네 성명이 서림이지?” 하고 물었다. “어떤 놈이 저를 서림이라고 밀고했는
지 그놈이 아마 저하구 불공대천지수가 있나 봅니다.” “그래 네가 서림이가
아니란 말이냐?” “제가 서림이루 몰려서 죽을 제 죽더라두 본성명은 아니올시
다.” 부장이 다시 포교들더러 “그놈이 설맞아서 바루대지 않는다. 이번엔 아주
반쯤 쳐죽여놔라!” 하고 분부하여 먼저 방망이질하던 포교들이 견디어
보라고 땅땅 벼르고 달려들때, 서림이가 포교들에게 “대상에 사뢸 말씀이 한마
디 있으니 잠깐만 참아 주시우.” 하고 애걸한뒤 곧 부장을 치어다보며 “저의
이종형이 서울 있으니 이종형을 불러서 제 근본을 물어 보십시오. 영부사댁 도
차지 손동지가 제 이종형이올시다.” 하고 말하니 부장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나타났다. 서림이가 와서 묵던 객주의 안팎 사람들은 모두 엄오위장으로 알고
객주 주인이나 잡히면 물어볼 텐데, 주인은 몸을 피하여 아직 잡지 못하고 그뒤
에는 밀고한 최가밖에 서림이의 얼굴을 알만한 사람이 없어서 서림이 입에서 직
토를 받으려고 서두르던 판에 제 붙이가 서울 안에 있단 말이 귀에 뜨이기도 하
거니와 그보다도 윤영부사댁 도차지의 이종되는 사람을 대적으로 잘못알고 잡았
으면 잡아온 포교들과 문초받는 부장은 말할 여지 없고 대장까지도 추고쯤을 당
하게 될는지 모르므로 부장이 뒤가 나서 서원과 수군수군 공론한뒤 서림이를 내
려다보며“네 이름은 무어야?”하고 물었다.“외자이름은 개올시다.”“엄개야?
오냐, 내 말루 네 이종이 영부사댁 도차지라니 그 사람에게 물어봐서 이종이 아
니라기만 하면 너는 죽구 남지 못할 테니 그리 알구 있거라.” 하구 뒤를 누르
고 즉시 포교들더러 끌어내다 두라고 일러서 서림이는 처음에 와서 있던 굴속
같은 컴컴한 방으로 다시 꺼들려 나왔다. 서림이가 임시처변으로 거짓말을 하여
당장 방망이질은 면하였으나 거짓말한뒤가 걱정이었다. 일이 풀리고 더 옭히는
것이 손동지 말 한마디에 달렸는데, 손동지가 엄오위장을 알 까닭이 없고 설혹
김선달에게 말을 들었더라도 이종 아닌 사람을 이종이라고 말할리가 없다. 김선
달이 들면 손동지더러 외착나지않게 말하라고 시킬수도 있겟지만 포청안에 잡혀
앉은 사람이 김선달에게 통기할 재주가 무슨재주냐, 이리저리 궁리했자 모두 괴
목에 방울 다는 궁리라 서림이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짓말이 탄로나서
혹독한 단련을 받을때 바로 불지 않으면 악형에 죽을것이고 바로불면 망나니 칼
에 죽을것인즉 일된 품은 죽었지 별수가 없는데 서림이 마음에 가득 찬것은 살
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서림이 앉은 방은 말하자니 방이지 굴이라느 게 마땅하
였다. 뒤와 좌우는 전벽이요,오직 앞으로 널문 하나가 있는데 널문 밖은 포교들
이 죄인을 닦달하는 헛청이라 햇빛이 들어올데가 없고 바닥은 흙이었다. 서림이
가 손발이 시린것은 고사하고 몸이 아래서 굳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손을 놀리
지 못하여 비빌 수도 없었다. 뒷결박을 잔뜩 지워놓은 까닭에 손은 꼼짝 못하고
겨우 일어서서 발만 동동거리었다. 서림이가 마침내 널문에 와서 몸을 기대고
팔꿈치로 문짝을 쳤다. 네댓 번이나 친 뒤에 비로소 밖에서 “이놈아, 가만 있지
못하구 무슨 지랄이냐!” 하고 꾸짖는 소리가 낫다. “목이 말라 죽겠습니다. 더
운물 한 모금 먹여 줍시오.” 속에서부터 떨려나오는 말소리가 서림이 자기 귀
에도 가련하게 들리었다. 그러나 밖엣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무어야?”
하고 채쳐 물어서 “물 한 모금 줍시오.” 하고 서림이는 소리를 가지껏 질러보
았다. 얼마 동안 지난 뒤에 널문이 열리며 포교 하나가 한손에 물바가지를 들고
서서 “이리 나서라.” 하고 바가지를 입에 대어 주는데 물은 더운물이 아니요
얼음이 버적버적하는 찬물이었다. 서림이가 한 모금 간신히 마시고 “아이구, 이
가 서립니다.” 하고 고개를 치어들었다. “고만 먹을테냐?” “더울물을 한 모
금 주실 수 없습니까?” “더운물은 없다. 고만 도루 들어가거라.” “할 말씀이
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제 사정을 말씀할 게 있습니다.” “사정이
구 활쏘는 데구 다 고만두구 어서 들어가거라.” 하고 그 포교는 굴속으로 들이
쫓으려고 하는데 헛청 안침에 있는 방에서 나이 많은 포교 하나가 내다보며 “
여보게, 무슨 할 말이 있다거든 이리 끌구 오게.” 하고 말하여 서림이는 포교들
들어앉았는 방 앞으로 끌려왔다. “네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어?” 하고 나이
많은 포교가 물어서 “네.” 하고 서림이가 여공불급하게 대답하였다. “할 말이
무어냐?” “제가 워낙 몸이 튼튼치 못한 위인인데 만일 저쪽 흙바닥 방에서 밤
을 지내게 되면 영락없이 얼어죽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주십시오.” “오냐. 포
청에서두 너를 얼려 죽이진 않을 테니 염려 마라!” “그러구 또 여쭤볼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말이야?” “정말 서림이가 잡히면 저는 곧 놓이겠
습지요?” “도리를 말해라. 어디 들어보자.”“그 도리는 대장 앞에 들어가서
말씀을 할 테니 대장을 좀 뵈입게 해주십시오.” “대장께서는 벌써 퇴청하셔서
댁으루 나가셨구 지금 종사관 한 분이 청에 기시니 종사관을 뵈입구 말씀을 할
테냐?” “대장을 뵈입게 해주십시오.” “네가 대장 앞에
가서 발괄하면 무슨 좋은 수나 생길줄 아는 모양이구나. 오냐, 대장댁에 가는 사
람이 있으면 네 말을 춤해 보라구 하마. 무슨 처분이 내리면 알려 줄 테니 아직
저 방에 들어가 있거라.” 서림이 여에 섰던 포교가 서림이를 끌어다가 다시
굴속 같은 방에 집어넣고 널문을 닫았다. 서림이를 문초받던 포도부장이 포교
하나를 데리고 손동지를 보러 갔는데, 윤영부사댁 도차지 보기 어렵기가 조정
재상만 못지 아니하여 바로 들어가서 보지 못하고 밖에 있는 하인에게 거래를
시키었다. 처음에는 그저 덮어놓고 잠깐 뵙자고 하였더니 바쁜 일이 있어 뵙지
못하겠다고 하고, 나중에는 포도청 공사로 왔다고 그예 보자고 하였더니 영부사
댁 일이 포도청 공사보다 더 소중하여 바쁜 일을 놓아두고 볼 수 없으니 갔다가
이 다음에 오라고 하였다. 그 부장은 일껀 갔다가 그대로 오기 창피아혀 엄개란
사람이 이종이냐 아니냐 물어보가고 할 마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막중 공사를
중간에 하인 놓고 물어보기 중난하여 고만두었다. 손동지가 포도부장을 보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다. 포청에서 잡으려고 한다는 김치선이를 자기가 숨겨
주었는데, 포도부장이 정녕코 치선이의 종적을 알고 내달라고 말하러 온 줄로
지레 짐작하였던 것이다. 그 부장이 사람은 보지 못하고 창피만 보고 포청에 돌
아와서 종사관에게 사실을 고한즉 종사관이 한참 생각하다가 “영부사 대감께
가서 뵈입구 도차지를 잠깐만 보내줍소사구 말씀을 여쭤보는 수밖에 없네.” 하
고 말하였다. “영부사 대감을 지금 가 뵈입구 오실랍니까?” “내일 대장께 여
쭤보구 가겠네.” “서림이루 알구 잡아온 놈을 밤에 어디서 재우라면 좋겠습니
까” “북간에 넣어 두라지.” “그놈이 만일 영부사댁 도차지의 이종이면 뒤에
말썽이 날 듯한데 간에 넣지 말구 당번 포교들더러 데리구 자라면 어떻겠습니
까?” “그래두 좋겠지만 포교들더러 잡도리를 허수힌 하지 말라구 단단히 신칙
하게.” “밤에두 번갈아 가며 하나씩 자지 말구 지키라구 이르겠습니다.” 그
부장이 친히 포교들 있는 데 나와서 포교들에게 신칙할 말부터 먼저 일러놓고
포교 하나를 시켜서 서림이를 데려내다가 뒷결박을 풀고 방에 들여앉히게 하였
다. 서림이가 손발도 비비고 더운물도 얻어먹은 뒤 대장을 보입게 하여 달고고
청한 나이 많은 포교를 보고 “아까 말씀한 것 대장께 취품해 보셨습니까?” 하
고 물으니 그 포교가 눈을 지릅뜨고 보면서 대답이 없었다. 그포교는 서림이의
말을 실답지 않게 듣고 건정으로 대답하였던 까닭에 대장에게 품할 생각을 염두
에도 두지 아니하였었다. “내 말씀을 우습게 들으셨는지 모르나 흰소리가 아니
라 내가 들면 서림이는 고사하구 꺽정이두 잡을 수 있습니다.” “정말이냐?”
“내 말이 거짓말 아닌건 사흥 안에 아실수 있지요.” “꺽정이를 사흘 안에 잡
을수 있단 말이지?” “오늘부터 준비를 차려야지 오늘 넘으면 날짜가 불급이
돼서 소용없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가 대장꼐 여쭙구 준비
를 차리겠다.” “그건 안됩니다. 내가 대장을 뵈옵기 전엔 말씀을 할 수 없습니
다.” “그건 안됩니다.내가 대장을 뵈옵기 전에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나이
많은 포교가 옆에 앉은 젊은 포교 하나를 돌아보며 “드물에두 아기 설는디 누
가 아나. 자네 가거든 말씀을 여쭤보게.” 하고 말하니 젊은 포교는 고개를 끄덕
하였다. 이때 사령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그 젊은 포교를 나오라고
손짓하니 그 젊은 포교가 다른 포교들더러 “나는 바루 가우.” 하고 밖으로 나
갔다. 그 젊은 포교는 포도대장댁 대령 포교인데 대장의 심부름으로 포청에를
왔던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서 방에 등잔불을 켜놓은 뒤 포교들이 각기 자기네 집에서 가져온
저녁밥을 먹고 대궁을 모아서 서림이를 주었다. 서림이가 대궁밥이 먹기 아니꼬
우나 주린 창자를 달래느라고 한술 떠먹는 중에 먼저 왔던 젊은 포교가 다시 와
서 서림이를 가리키며 “저자를 데리러 왔소.”하고 나이 많은 포교더러 말하였
다. “부장께 말씀했나?” “벌써 어저께 말씀했소.” “그저께 갔겠네그려. 배
행은 몇이나 가라든가?” “나까지 서넛이 같이 가랍디다.” “묶어서?” “아
니 그대루.” 서림이는 데리러 왔다는 말을 듣고 곧 숟가락을 놓고 가자기를 기
다리고 있다가 포교 셋의 옹위를 받고 포청 밖으로 나왔다.
좌변 포도대장 김순고의 집은 잿골 초입이라 파자교에서 돈화문을 바라보고
올라오다가 대궐 앞에서 왼편으로 꺾이어 관상감 재를 넘어와서 계산골 다음 북
쪽으로 뚫린 골목을 들어서니 고만이었다. 서림이가 포도대장을 뵈워지라고 청
할 때는 보지 못할까 은근히 근심까지 되더니 대장집에 불려오게 되어 포청문
밖을 나서며부터 포도대장을 보고 싶은 생각이 천리만리 달아났다. 꺽정이의 반
의 반만한 힘만 있어도 포교 서너 놈 한 주먹에 때려눕히고 들고 뛸 수 있을 것
을 생각하니 꺽정이의 힘이 새삼스럽게 부러웠다. 하늘 끝 닿은 데까지 훨훨 가
고 싶은 생각도 나고 밤새도록 거리로 바장이고 싶은 생각도 나서 자꾸만 갔으
면 좋겠는데, 고만 다 와서 솟을대문 앞에 걸음을 멈출 때 포교 하나가 “아이
추워.”하고 몸을 흔드는데 서림이는 추운 줄도 모르면서 몸을 옹송그리었다.
서림이가 대령 포교들 있는 사관청에 와서 한구석에 죽쳐 앉은 뒤 벌써 한식
경이 좋이 지났다. 그 동안에 대령 포교가 들어갔다 나오고 또 포청 포교가 들
어갔다 나왔건만 나와서는 아무 소리들이 없었다. 포교들이 서로 이야기도 별로
아니하여 이편은 조용한데, 건너편은 하인청인 듯 여럿의 지껄이는 소리가 떠들
썩하였다. “까게 어디 보세. 오팔팔 따라질세그려.” “이 사람은 노름 못할 사
람이야. 팔팔 서시에 대지 않구 뽑아서 따라지를 만들었다네.” “서시면 대는
법이지.” “팔자 하나만 더 뽑았더면 순이 아닌가, 이 사람아.” “욕심은 경치
게 많으이.” 지껄이는 것이 엿방망이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엿방망이판에서 지
껄이는 말소리를 서림이가 무심히 듣다가 무뜩 생각하니, 자기가 포도대장을 보
는 것이 흡사 한 장 더 뽑는 셈인데 더 뽑아서 따라지나 만들지 아니할까. 아니
다. 자기는 이왕 잡은 것이 따라지니까 뽑아서 더 못 되면 무대밖에 더 될까. 겁
날 것이 없었다. 별안간 방울 소리가 떨렁떨렁 요란스럽게 나서 소리나는 곳을
치어다보니 천장 한구석에 설렁줄이 매어 있었다. 대령 포교 하나가 부리나케
들어가더니 곧 도로 나와서 동무 포교들더러 다 일어나라고 뒤설레를 쳤다. “
잡아들이라시든가?” 동무 포교 하나가 말을 물으니 “그럼 뫼셔들이라구 하실
줄 알았나?” 그 포교는 엇나가는 대답을 하였다. 말을 묻던 포교가 서림이에게
와서 제잡담하고 상투를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포교들이 서림이를 상투 잡고 등 밀고 사랑 앞에 들어와서 댓돌 아래 꿇려 엎
치고 잡아 대령했다고 소리친 뒤 “일으켜 세워라!” 포교들에게 분부가 내리고
서림이가 두 손길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고 섰더니 “얼굴을 치어들어라!” 서림
이에게 분부가 내리었다. 불후리로 촛불을 가리어서 포도대장 앉은 자리가 마루
끝에 달린 등롱불이 비치는 댓돌 아래보다 별로 더 밝을 것이 없었다. 침침한
속에서 내다보건만 포도대장 눈에 영채가 도는 것 같았다. “네 성명이 무엇이
냐?”하고 포도대장이 묻는데, 서림이는 서슴지도 않고 “엄개하구 했소이다.”
하고 대답하니 포도대장은 “엄개라구 했다?”하고 한번 뇌고 나서 “네가 꺽정
이와 서림이를 잡아바칠 수가 있다구 했다지?”하고 물었다. “녜, 그럴 수가 있
을 줄루 믿습니다.” “어떻게 잡아바칠 텐고?” “아뢰옵긴 황송하오나 좌우를
물리시구 비밀히 물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포도대장이 포교들더러 “너희들
저놈의 몸을 뒤져봤느냐? 안 뒤져봤거든 뒤져봐라.”하고 분부하여 포교들이 달
려들어서 소매 속, 허리춤, 바짓가랑이, 심지어 사타구니까지 만져보고 주물러본
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아뢰니 한참만에 포도대장이 다시 포교들더러 “
너희들은 잠깐 밖에 나가 있거라.”하고 분부하였다. 포교들이 밖으로 나갈 동안
에 마루에 나섰던 청지기, 상노 들도 수청방으로 들어갔다. 서림이가 한번 공손
히 굽히고 나서 “소인이 다른 무엇이 아니옵구 곧 서림이올시다.”하고 아뢰고
포도대장의 얼굴을 치어다보니 포도대장 눈의 영채가 더 나는 듯하며 “이놈,
네가 내 앞에 와서 비로소 성명을 바루 대는 게 무슨 뜻이냐, 농락이냐?”하고
호령이 내리었다. “소인이 포청에 잡혀온 뒤 인제 더 살지 못하구 죽을 것을
생각하온즉 자연 회심이 되와 반나절 동안 굴속 같은 방에서 일생 지은 죄를 가
지가지 후회하옵는 중에, 소인이 죽기 전에 꺽정이를 잡아서 나라에 바칠 생각
이 났소이다. 처음 생각이 나올 때는 소인이 죽을 바엔 꺽정이까지 끌구 같이
죽으려는 속담의 물귀신 심사두 없지 않았솝구, 또 꺽정이를 잡아바치구 소인은
사받아서 살아나가려는 요행을 바라는 욕심두 없지 않았사오나, 나중에 결심까
지 하옵기는 꺽정이 같은 나라와 백성의 큰 화근을 없애구 죽사오면 이 세상에
서 옳은 사람 노릇은 못하였을지라두 지하에 가서 그른 귀신 되기는 면하올 듯
생각이 들어서 맘을 여러 번 도슬러 먹었소이다. 포청에서 문초를 받을 때 본성
명을 대옵구 소회를 말씀하옵구 꺽정이 잡을 계책까지 다 아뢰올 것이오나, 서
울 안에 있는 한온이 여당 중의 좌우포청 군사들과 여형약제하게 지내는 것들이
포청 소식을 알아내서 뻔찔 기별하옵는 까닭에 포청에서 일이 미처 결정두 나기
전에 한온이와 꺽정이의 귀에 말이 들어갈 염려가 불무하와 소인이 구차하나 거
짓말루 문초를 늦추옵구 영감마님 앞에 와서 당돌히 원정을 아뢰오니 하정을 통
촉하옵시기 바라옵네다.” 서림이의 말이 빈 구석이 없어서 거짓말 듣는 데 집
이 난 포도대장 뒤에도 그럴싸하게 들릴 만하였다. “꺽정이는 지금 대체 어디
있느냐?” “내일 밤까지는 청석골 있을 것이옵구 모레 아침에는 다른 데루 갈
것이외다.” “다른 데란 어디냐?” “평산 남면 마산리에 사옵는 대장쟁이 이
춘동이 집에 가서 여러 놈이 모이옵네다.” “무슨 짓을 하려구 거기 모이느냐?
” “글피 스무엿샛날 이춘동이 집에 모여서 의논하온 뒤 재령이나 해주땅에 나
가서 숨어 있솝다가 신임 봉산군수 이 흠자 례자분이 해주루 연명 가실 때 그
행차를 엄습하올 것이외다. 봉산 안전께서 신계현령으로 깁신 동안 청석골 두목
댓 놈 잡아 죽이신 일이 있솝는데 승탁되신 이번 기회에 전날 원수를 갚으면 위
명이 날 뿐 아니라 후환이 없다구 봉산 안전을 살해하려구 벼르옵네다.” “너
두 평산으루 갈 걸 못 가구 잡혔느냐?” “녜, 소인두 스무엿샛날 오라는 약속
을 받았소이다.” “꺽정이를 잡아 바칠 계책이 있다니 말해 봐라.” “조정에서
봉산군수나 평산부사나 또는 금교찰방에게 비밀히 령을 내립셔서 스무엿샛날 마
산리를 들이치게 하옵시면 대개 잡힐 듯하외다. 만일 소인이 가서 내외향응하오
면 실수 없이 꼭 잡겠습지요만, 조정에서 소인을 믿구 보냅실 리가 없사온 줄
아옵네다. 이번에 혹 일이 실수되어서 꺽정이를 잡지 못하구 놓치옵더라두 잡을
소임을 소인에게 맡기시면 꺽정이 칠형제패를 내년 일 년 안으루 다 잡아바치겠
소이다.” “꺽정이 칠형제패란 무엇이니?” “꺽정이와 의형제를 맺은 놈이 모
두 일굽이온데 일굽 놈 중의 꺽정이까지 너덧은 무예가 출중들 하외다.” “그
일굽 놈이 이번에 다 마산리에 모이느냐?” “몇 놈 안 빠지구 다 모일 것이올
시다.” “너는 그 의형제 틈에 끼지 않았느냐?” “소인이 적굴에
서 구구히 목숨을 부지하올망정 백정의 자식과 형이니 아우니 하옵긴 맘에 부끄
럽사와 꺽정이가 같이 결의하자구 조르옵는 걸 굳이 싫다구 했솝더니, 꺽정이
말이 우리와 같이 결의 않는 것은 종시 딴맘을 두는 것이라구 죽인다구 서둘러
서 소인이 어진혼이 빠졌었소이다. 만일 그때 결의에 참례하였솝던들 오늘날 꺽
정이를 잡아 바칠 생각이 났을는지 마치 모를 일이외다.” “꺽정이가 제 도당
두 많이 죽이느냐?” “죽이다뿐이오니까. 지난 구월달 장수원에 모였을 때두
한 자리에서 둘을 죽인 일이 있소이다.” “장수원에선 어째 모였더냐?” “전
옥에 잡혀 갇힌 꺽정이의 기집 셋이 처교되기 쉽겠단 소식을 꺽정이가 이천서
듣솝구 구월 초닷샛날 장수원에 와서 여럿을 모아가지구 그날 밤에 오간수 구녕
으루 문안에 들어와서 전옥을 깨치구 기집들을 꺼내가려구 획책하옵는 것을 도
당 중의 두 놈이 못될 일이라구 말리옵다가 참혹하게들 죽었소이다. 그날 밤은
파옥 계획을 중지하게 되옵솝구 그 이튿날은 이천서 급한 기별이 와서 이천으루
몰려가서 있는 동안에 전옥의 기집들이 형조 전복사루 넘어가서 관비들 박히게
되리란 소식을 듣솝구 파옥 계획을 파의하였었소이다.” “전옥을 타파하구 관
장을 살해하구 너희놈들은 못할 일이 없구나.” 처음 호령 한마디 외에는 온언
순사로 말을 묻던 대장이 언성을 높이었다.
서림이는 꺽정이를 잡아 바친다고 거짓말하고 살아나갈 가망이 적어서 정말로
잠아 바칠 마음을 먹었었다. 꺽정이를 잡아 바치면 자기는 죄만 면할 뿐 아니라
전정이 있으려니 생각하였다. 일의 고동을 손에 쥐인 포도대장이 말을 순리로
묻는 것부터 일이 자기의 소료대로 되어가는 것이라고 속으로 좋아하던 중에,
포도대장이 꺽정이의 죄를 자리에게 들씌울 심산인지 너희들이라고 하고 토죄하
는 데 가슴이 좀 뜨끔하였다. 죄란 되는 죄다 꺽정이 하나에게만 밀어붙이고 발
명할 수도 있지만, 섣불리 발명하다가 포도대장의 비위를 거스를까 저어하여 그
저 인과자책하듯 “백번 죽어 마땅하외다.”하고 포도대장의 토죄를 순하게 받
았다. “너이 같은 흉악한 도둑놈들을 못 잡는 건 하릴없지만 잡은 건 살려 둘
수 없다.” “먼저두 말씀을 아뢰었지만 꺽정이를 잡아가지구 같이 죽기가 소인
의 소원이온즉 영감마님께서 깊이 통촉합셔서 꺽정이를 마산리서 잡으오면 며칠
동안이옵고, 만일 놓치구 잡지 못하면 일년 동안만 소인의 목숨을 살려줍시기
바라옵네다.” “꺽정이 잠복한 곳을 네가 밀고해서 잡두룩 한다면 너는 그 공
으루 살 욕심이지, 이놈 같이 죽기가 소원이라니 입에 말린 가짓말 마라!” “어
느 존전이라구 감히 거짓말씀을 아뢰오리까. 소인이 살 욕심 없다구는 아뢰옵지
못하오나 꺽정이를 잡아 바치구 같이 죽사오면 진정 죽사와두 한은 없겠소이다.
” 포도대장이 수청방을 향하고 “이리 오너라!”하고 소리쳐서 청지기 하나가
수청방에서 나온 뒤 “포교들 불러라.”하고 분부하였다. 그 청지기가 도로 수청
방에 들어가서 설렁을 치더니 얼마 안 되어서 포교들이 몰려들어왔다. “그놈을
간에 갖다 가둬 둬라!” 포도대장의 분부 끝에 포교 하나가 분명한 체하고 “북
간에 갖다 가두랍시오?”하고 취품하다가 “북간이란 다 무어냐? 너희들 눈에는
그놈이 북간에 가둘 죄인으루 보이느냐?” 포도대장께 꾸중을 들었다. “박부장
나리가 간에 넣지 말라구 해서 댁에 올 때가지 북간에두 넣지 않았었소이다.”
“가선 남간에 집어넣어라.” 남간에 집어넣으라는 것은 곧 대사죄수로 패 채우
는 것이라 서림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림이가 포교대장에게 발괄이나
한마디 더 하여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포교들이 꼭뒤잡이로 내끄는
데 그대로 끌려나갔다.
이튿날 아침에 좌변 포도대장 김순고가 예궐하여 도적 잡는 일로 탑전정탈을
받자올 일이 있다고 폐현을 청하였더니, 상후가 마침 미감으로 미령하여 승전색
이 포장의 말을 물어들이란 어명을 받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내시라도 어명을
받은 사람이라 김순고가 승전색에게 절을 한 뒤 “해서대적 임꺽정이의 도당 서
림이란 자가 엄개하고 변성명하고 숭례문 밖에 와서 있는 것을 탐지하옵고 체포
하여다가 죄상을 대개 추문하온즉, 지난 구월 초오일에는 장수원에서 모여서 전
옥서를 타파하려고 이러이러하게 획책하였다고 말하옵고 오는 이십육일에는 평
산 남면 마산리에 모여서 신임 봉산군수 이흠례를 살해하려고 준비할 터인데 대
개 이러이러한 까닭이라고 말하오니, 그 말을 다 준신할 수는 없사오나 부장 하
나, 군관 하나를 속히 역마 주어 보내서 봉산군수 이흠례와 금교찰방 강려로 더
불어 상의하여 비밀히 근포하도록 함이 어떠하올지. 또 이번에 만일 꺽정이를
잡지 못하고 놓치면 서림이가 내년 안으로 잡아 바치겠다고 하오나 반복하는 자
의 말을 신청할 것이 못 되오니 서림이를 어찌 처치하올지.” 이런 사의로 위에
아뢰어 달라고 말하였다. 그 승전색이 합문안으로 들어갔다가 한동안 지난 뒤
다시 나오는데, 서림이는 아직 그대로 두고 보고 그외는 아뢴 사의대로 하란 전
교가 포장에게 내리고, 또 뒤미처 다른 승전색이 나오는데 선전관 정수익이에게
부장 두엇을 데리고 가라고 하되 말들을 주어서 급히 가게 하라시는 전교가 정
원에 내리었다.
이때 오위부장들 중의 충좌전위에 매인 연청령은 용맹이 무쌍하고 호분우위에
매인 이의식은 무예가 출중하여 부장청에서 이름들이 높았던 까닭으로 이 두 사
람이 뽑히어서 정수익과 같이 가게 되었다.
선전관 정수익이 전교와 표신과 마패를 받자온 후 궐내에서 물러나오며 즉시
부장 연천령, 이의식 두 사람을 데리고 황해도 길을 떠나는데, 동짓달 추운 밤에
밤새도록 갈 길이라 휘항에 털토수에 술병까지 어한제구를 단단히들 차리었다.
청석골 도둑놈들이 평산 마산리에 가서 모인다는 것이 스무엿샛날이라니 앞으로
이틀 동안에 봉산읍 사백이십 리 길을 가서 기병하여 가지고 다시 마산리까지
소불하 수백 리 될 길을 가야 할 터인데, 거기다가 금교서 찰방을 보고 가자면
지체가 될 것이고 또 봉산 가서 기병하자면 동안이 걸릴 것인즉 날짜가 촉박 여
부 없어서 밤길을 가도 빨리 가야 할 판이었다.
선전관 일행이 떠나는 날 반나절 해로 파주까지 달려와서 저녁밥들을 먹고 파
주서부터 밤길을 시작하였다. 참마다 홰를 갈려 들리고 역마다 말을 갈아타고
홰꾼과 역졸들은 옷이 박착이라도 땀을 뻘뻘 흘리는데 거해부대 같은 말탄 양반
들은 추워서 덜덜 떨었다. 역에 올 때마다 번번이 술로 어한들 하고, 그리하고도
간간이 길가집을 깨워 일으키고 방에 들어앉아서 몸들을 녹이었다. 이튿날 아침
해 돋을 때 금교역말을 당도하였다. 정수익이 우선 객주를 잡고 들어앉아서 전
교 받들고 온 사연을 찰방 강려에게 통기하였더니, 얼마 동안 지나서 관사로 들
어오라고 마중 하인들이 나왔다. 정수익이 부장들과 같이 마중나온 하인들을 따
라서 찰방 관사에 들어와 보니 마당에 향상을 차려놓고 향상 앞에 강려가 모대
하고 서 있었다. 정수익이 향상 옆에 와서 선 뒤, 강려는 분향하고 북향 재배하
고 꿇어앉아서 정수익이 내주는 전교를 공손히 받아서 받들어 읽었다. 그 전교
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선전관 정수익은 부장 연천령, 이의식을 데리고 황해도에
가서 봉산군수 이흠례와 금교찰방 강려와 상의하여 평산 남면 마산리에 모인다
는 도적들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강려가 전교를 정수익에게 도로 주고 일어나서
“인제 방으루들 들어가십시다.”하고 어명을 몸에 받은 정수익을 향하여 팔을
치어들고 먼저 올라가기를 청하였다. 방에 들어와서도 정수익이를 상좌에 앉히
고 좌정들 한 뒤, 초면 인사들을 마치고 강려는 바로 밖에 나가 편복을 갈아입
고 다시 들어와 앉아서 정수익을 보고 “그 치운 밤에 밤길들을 어떻게 오셨단
말씀이오? 장사들이시우.”하고 위로 말을 하였다. “오늘 봉산을 가자면 또 밤
길을 해야 하지 않겠소? 여기서 봉산이 몇 리요?” “이백십 리요.” “그럼 얼
른 객주에 나가서 아침 시켜 먹구 떠나야겠소.”“아침은 시켰으니 염려 마시구
일이나 의논하십시다. 내 생각엔 도둑놈들이 내일 마산리서 모인다면 당일에 흩
어질 리는 없으니까 모레 마산리를 들이칠 작정하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소.
” “어떻게 준비한단 말이오?” “나는 수하에 군사가 없는 사람이라 평산 가
서 부사하구 의논해서 기병해 가지구 평산 북면 어수동으루 나갈 테니 여러분은
봉산 가셔서 군수하구 같이 군사를 조발해 가지구 모레 새벽까지 어수동 와서
합세하두룩 해보시우.” “어수동서 마산리가 가깝소?” “봉산서 평산읍에까지
왔다가 다시 마산리를 나가자면 길을 곱걷게 되우.” “그럼, 내일 어수동서 만
나두룩 해보는 게 좋지 않소.” “군사 조발하는 데 동안이 얼마나 걸릴 줄 알
구 그러시우. 그나 그 뿐이오? 여러분이 연일 삐친 끝에 접전을 어떻게 하실 테
요. 오늘이구 내일이구 하룻밤은 실컨 주무셔야 하우.” “아무리나, 그럼 모레
루 정일하구 준비합시다.” 정수익이 강려와 의논을 작정한 뒤, 금교서 아침밥을
먹고 부장 두 사람과 같이 봉산으로 떠나왔다.
봉산 이백십 리를 곧 해지기 전에 갈 것같이 말들을 빨리 몰리었다. 우봉 땅
들어와서 흥의 역마 갈아타고 평산땅 잡아들며 김암 역마 갈아타고 평산읍내 언
뜻 지나 보산 역말 들어오니 해는 한낮이 이미 지났고 금교서 온 이수는 팔십
리밖에 안되었다. 얌전하게 춥던 날씨가 보산서 중화할 때부터 갑자기 변하여
풍세가 사나왔다. 사나운 바람을 안고 가게 되어서 말 모는 역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탄 양반들도 숨이 턱턱 막히었다. 총수령을 넘어와서 안성 역마를 갈아
타고 서흥읍내를 들어올 때는 벌써 길이 잘 보이지 않도록 어둔 빛이 짙었다.
동짓달 짧은 해에 일백사십 리를 온 것도 무던히 많이 왔건만, 앞으로 남은 칠
십 리를 밤길로 마저 가야 할 일이 태산 같아서 선전관과 부장들은 더 빨리 오
지 못한 것을 못내 괴탄하였다.
바람이 조금 자는 듯하다가 다시 일기 시작하여 밤에는 풍세가 저녁때보다도
더 사나워졌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불구하고 한 시각이라도 바삐 가야
할 길이라 정수익이 저녁밥을 재촉하여 먹고 또 밤길을 나섰다. 홰가 바람에 부
지할 것 같지 않으나 수가 많으면 혹시 나올까 하고 말 한 마리 앞에 홰 세 자
루씩, 도합 홰꾼 아홉을 데리고 나섰는데, 불과 몇 마정 안에 홰 아홉이 다 꺼져
서 홰꾼들을 대도 세우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서관대로 길이 좋아서 희미
한 별빛으로 갈 수는 있지마는, 말을 채쳐 몰지 못하고 예사로 걸리었다. 서흥
용천 역말과 봉산 검수 역말서 역마를 두 번 갈아타고 닭 운 뒤에 봉산읍내를
들어왔다. 정수익이 역졸들 시켜 삼문을 두들겨서 자는 군수를 깨워 가지고 전
교를 받게 한 뒤, 이십칠일 미명에 평산 군사와 어수동에서 합세하기로 약속 정
하고 온 것을 말하고 밤중에 좀 야경스러우나 곧 기병할 준비를 차려서 평명에
행진하도록 하라고 독촉하니, 군수의 말이 기병할 것은 염려 말고 밤길에 삐친
끝에 잠들이나 한숨 자라고 하고 관가 안의 방 하나를 치워 주어서 정수익은 부
장 두 사람과 같이 두둑한 요 깔고 푹신한 이불 덮고 동여가도 모르도록 잠 한
숨 곤하게 자고 해가 뜬 뒤에 일어들 났다.
봉산이 꺽정이패의 자구 출입하는 길목인 까닭에 봉산군수 이흠례는 적환 방
비를 급선무로 알아서 도임한 후 그 동안 한 일이 무기 보수와 군총 조련이라
기병하기 힘들 것이 없었다. 이백여 명 군사를 불각시로 취군하여 무기를 일제
히 나누어 주어서 삼문 밖에 결진을 시켜놓고 이백여 명의 이틀 먹을 군량으로
쌀 두 섬과 조 석 섬을 먼저 실려 보내는데, 군량지기에게 중화참과 숙소참을
일러주어서 앞서가며 미리 준비하여 놓게 하였다. 선전관이 이것을 알고 부장들
과 서로 돌아보며 군수의 처사가 엽렵한 것을 칭찬하고 곧 군수와 같이 행군을
하는데, 연천령과 이의식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선진이 되어 앞서 떠나고 이흠례
와 정수익은 대부대를 통솔하고 후진으로 뒤에 떠났다. 용천역말 와서 중화하고
안성역말 와서 숙소하는데 안성 사람은 군사들에게 방을 뺏기고 하룻밤을 한둔
들 하다시피 하였다. 첫닭울이에 떠날 작정으로 한밤중부터 밥을 짓게 하여 군
사들을 밤참 쇰직한 조반을 먹인 뒤에 선진, 후진이 일시에 다 떠났다.
전날 종일 흐리던 날이 밤중은 하여 눈이 오기 시작하였는데 산과 들이 허옇
게 보이도록 쌓이고도 아직 그치지 아니하였다. 눈을 맞으며 행군하여 동이 트
기 시작할 때 어수동을 대어오니 밥짓는 연기, 화톳불 연기가 인가가 잘 보이
지 않도록 자욱하였다. 평산 부사 장효범이 금교찰방 강려와 같이 삼백 명 군사
를 거느리고 먼저 나와 있었다. 봉산군이 안성서 경야할 때 당보수 서너 명을
밤 도와 먼저 보내서 봉산서 오는 군총 수효를 알린 까닭에 오백여 명 먹일 밥
을 지어놓아서 요기하고 온 봉산군들도 시레기 토장국을 부어주는 밥 한 바가지
씩 제각기 다 받아먹었다.
눈이 어느 결에 그치고 아침 해가 구름에 싸여서 올라왔다. 사람들 부르는 소
리, 꾸짖는 소리, 떠드는 소리 야단스럽게 나고 취군하는 징소리, 나발 소리 요
란히 난 뒤 삼엄이 끝이 나서 오백여 명 군사가 선봉대, 중군, 후군 세 때로 차
례차례 떠나 남면길로 내려가는데, 기치는 정제하고 창검은 삼엄하였다
반응형
'千里眼---名作評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화적편 14 (2) | 2024.01.16 |
---|---|
임꺽정 화적편 13 (2) | 2024.01.15 |
임꺽정 화적편 11 (4) | 2024.01.13 |
임꺽정 화적편 9 (2) | 2024.01.11 |
임꺽정 화적편 8 (2) | 2024.0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