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熱河日記』의 흔적 남아있는 ‘열하’
연경(燕京·북경)이 아닌 열하(熱河)에서의 황제 만수절에 참가한 일은 장성 너머의 변방을 경험하지 못했던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여행 경험이었습니다. 사신들의 연행견문 소회를 담은 기록들이 많이 전하지만, 유독 주목받는 연행록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습니다. 연암은 며칠간의 열하 일정이었지만, 청의 황제가 변방의 요지인 열하에 틀어 앉아 주변 민족들을 통할하는 정책들의 요체를 살피며 천하의 정세를 간파했습니다. <연행록>이라 하지 않고 <열하일기>라 칭한 끼닭도 그런 연유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강희제의 열하 건설, 건륭제 때 완성
승덕(承德)이라고 부르는 열하(熱河)는 우리에게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어 유명한 도시입니다. 강희제 제위 시 변방에 불과했던 막북지역 열하에 황제의 행궁을 짓고, 사냥과 피서를 명목 삼아 수개월 이상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옹정제때 체계를 갖추었고, 건륭제에 이르러 황가별장이자 이궁(離宮)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열하의 중심가에 세워진 강희대제(康熙大帝)의 동상이 위용을 자랑하듯 열하는 강희제와의 인연이 많습니다. 그래선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공연 장르인 ‘실경산수(實景山水) 공연’의 주제도 역시 ‘강희제’입니다. ‘정성왕조강희대전(鼎盛王朝康熙大典)’이라는 이름의 대형실경산수(大型實景山水) 공연이 그것입니다.
공연은 ‘청초기 이민족으로서 강희제는 역대의 중화문명과 학술을 계승하여 청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를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열하의 피서산장을 계획하고 주변 변방 국가들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그려온 강희제의 일대기가 중심입니다.
특히 티벳의 성승을 열하로 모시는 장면이 장엄하게 펼쳐지기도 하는데요, 연암 일행이 황제의 명에 따라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에서 티벳 성승인 반선 6세를 만나는 장면과 겹쳐서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열하에 갈 기회가 있다면 이러한 공연을 통해 과거의 행적을 추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연암 일행이 반선 6세를 만나는 장면은 조선 사신단의 열하 행적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는 대목입니다. 혹여 <열하일기>를 탐독하는 독자께서는 주목해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연암이 티벳 성승을 만나던 일이나 티벳불교, 즉 황교에 대한 담론은 <찰십륜포(札什倫布)>, <황교문답(黃敎問答)>, <반선시말(班禪始末)> 등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연암이 머물던 태학, 복원되다
청 조정은 조선 사절단의 숙소를 태학(太學), 즉 문묘(文廟)로 배정합니다. 문묘는 조선 사행단이 도착하기 한해 전(1779년)에 완공된 공자(孔子)의 사당이자 학부(學府)였습니다.
연암은 열하에서 약 6일간 머물게 됩니다. 관소인 문묘를 ‘베이스캠프’ 삼아, 피서산장에서 열리는 황제의 만수절 연회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과일가게 인근의 객주에 들러 호기롭게 술을 마시기도 하는 등 연암의 기행은 다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암이 문묘의 숙소와 명륜당 일대에서 중국의 지식인 곡정 왕민호 등과 나눈 필담(筆談)이야말로 <열하일기> 저작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으니, 열하에서의 6일은 태학(문묘)에서의 행적이 가장 중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연암이 열하에서 경험한 필담과 유람, 사유에 대한 기록들은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행재잡록(行在雜錄)>, <경개록(傾蓋錄)>, <망양록(忘羊錄)>, <곡정필담(鵠汀筆談)>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열하 문묘는 한때 예술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2005년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2012년 새롭게 복원되었습니다.
연암이 왕민호, 기풍액 등과 함께 명륜당 창 너머의 달을 구경하며 지구 자전(自轉)을 얘기 했던 장소, 그리고 악기, 음악 등 다양한 주제로 쉼 없는 필담을 이어가느라 ‘양고기 식어 가는 줄도 모르던 현장’은 이제 전혀 다른 느낌의 건축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실물도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의 현장에 서서 GPS 좌표점과 사진기록 하나 남겨 두는 것으로서 아쉬움을 대신할 뿐입니다. 연암이 열하의 문묘에서 거처한 관소의 GPS좌표는 N 40’̊59’03.5″ E 117’̊55’17.7″입니다.
‘계획도시, 열하’를 간파한 조선 사신들
피서산장은 황제가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 새북(塞北:북쪽 변방)지역에 조성한 이궁(離宮)이자 여름별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 황제들은 년 중 절반 이상을 이곳에 머물며 정무(政務)를 보았습니다. 청초기 몽고 등 이민족의 침략을 대비하고 포용하는 정치적 목적이 부여된 계획도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청은 피서산장을 건설할 때 이미 열하의 지리적 환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90년 열하에 왔던 유득공은 강희제가 피서산장을 조성하여 변방을 방비하고자 했던 방책을 꿰뚫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전에 다녀간 연암의 <열하일기>를 통하여 열하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테고, 그 역시 열하를 와보고 직접 확인했를 것입니다.
“가만히 형세를 살펴보니, 산과 물이 두루 둘러있고 들은 넓고 샘물은 빠르게 흐르며 풍토와 기후가 높고 시원하다. 북으로는 몽고를 누르고, 우로는 회회를 끌어당기며, 좌로는 요녕 심양에 통하고, 남으로는 천하를 통제한다. 이는 강희제가 고심한 것인데, ‘피서산장’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숨긴 것이다.”
– 유득공, <열하기행시주>(熱河 條) –
변방을 안정시키는 힘, 포용(包容)
포용, 혹은 문화적 융합은 이민족을 청의 테두리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청의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몽고의 부족 왕과 청 황실이 혼인으로서 동맹을 맺는다거나 멀리 서번의 라마승을 열하로 초치하여 스승의 예로 대하고 사원을 지어 그들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은 이야말로 소수민족을 정신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길이자 군사적 완력보다 더 강력하게 변방을 안정시키는 힘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피서산장을 중심으로 산장 밖에 현재 외팔묘(外八廟)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건륭 70세 만수절 축하를 위해 열하에 왔던 반선 6세는 찰십륜포(札什倫布:大僧이 사는 곳을 뜻하는 티벳어), 즉 수미복수묘에 있었습니다. 조선 사신이 만났다던 바로 그 성승(聖僧)입니다. 지금도 수미복수묘는 연암이 보았던 황금지붕과 황금룡, 화려한 전각들이 남아 있어서 옛사람들의 기록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연행노정,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전통시대 국가 간의 교류는 사행(使行)이라는 정치·외교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도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문화예술인, 상공인들이 수행하듯, 과거 사행단 역시 정관(正官) 외에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직함으로 동행한 지식인, 그리고 상인, 하예(下隸:부리는 아랫사람을 말함) 등 다양한 이들이 연행노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연행, 혹은 사행을 통해 세계인식의 기회를 얻었으며, 자아의 재발견과 각성(覺性)이 실학적 면모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조선말 개화의 기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행은 세계를 인식하는 창(窓)이었으며, 연행노정(燕行路程)은 동아시아 문화가 교류하고 소통하는 ‘동아시아 문화로드’이자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연행기록의 구체적인 내용과 기록자의 사유(思惟)에 대해서는 꼼꼼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지면 사정상 현장답사를 통해 수집된 기록사진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며 부족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내어 주신 <중국학@센터>와 편집진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연행노정 답사기록이 전통시대 동아시아 인문교류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흔적 남아있는 ‘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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