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여류작가 빙심冰心

一字師 2023. 8. 1.
반응형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여류작가 빙심冰心

 

                                                                                        图片来源 | 冰心

 

창작에서 『신청년新靑年』의 문학 주장을 계승하고 선양하여 발전시켰는데, 앞장서서 제창한 신문학을 추진시켜 전진하게 한 첫 번째의 단체가 문학연구회이다.

 

빙심冰心(1900년-1999년)은 본명이 사완영謝婉瑩이고, 복건성福建省 장락長樂 사람으로, 1900년 10월 5일에 복주福州에서 애국정신과 유신사상을 갖춘 해군 군관 가정에서 출생했다.

 

연태烟台에서 빙심은 공부를 시작하여 가숙家塾에서 기초학습을 하는 기간에 이미 중국 고전문학의 명저를 접촉했는데, 7 살에 『삼국연의三國演義』,『수호전水滸傳』등을 읽었다.

 

그와 동시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설부총서說部叢書”까지 읽었다. 그 중에는 바로 영국의 저명한 작가 질갱사迭更斯의 『괴육여생환塊肉余生還』 등의 19 C 현실주의를 비판한 작품이 있었는데, 『괴육여생환』을 읽을 때, 가련한 대위大衛가 그의 가게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달아나서 그의 이모 집으로 가는 여정 중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대목에서 빙심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가 간식으로 준 빵을 손에 들고, 한 입 한 입 입에 넣으며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깨달았다.

 

신해혁명辛亥革命 뒤에, 빙심은 부친을 따라 복주로 와서 양교楊橋 골목 어귀에 있는 대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은 조부의 대가족이 살고 있는 방안의 기둥에 많은 대련이 붙어 있는데, 빙심의 백부가 쓴 것이었다.

 

그 집은 원래 황화강黃花崗 72 열사烈士의 한 사람인 임각민林覺民의 주택인데, 임씨가 죽은 뒤에 임씨네는 연루될 것이 두려워서 집을 팔아버리고 고향으로 피했다. 그 저택을 구입한 사람이 바로 빙심의 조부 사란은謝鑾恩 선생이었다.

 

이곳에서 빙심은 1912년 복주여자사범학교 예과豫科에 합격하여 들어갔는데, 사씨 집안에서 제일 먼저 정식으로 학당에서 공부하는 여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1913년에 부친 사보장謝葆璋이 북경 국민당 정부의 해군부 군학단장軍學團長으로 부임하게 되자, 빙심은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에서 철사자鐵獅子 골목에 있는 전자항剪子巷에 살다가, 이듬해에 패만여중貝灣女中에 들어갔다. 1918년에 협화여대協和여대 이예과理豫科에 들어가 죽음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의사가 되기를 열망했는데, “오사五四”운동의 폭발과 문화운동이 흥기하자, 빙심은 곧 자신의 운명과 민족의 진흥振興을 함께 긴밀하게 연계시켰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해 시대의 조류에 뛰어들었는데, 대학학생회 문서文書에 선출되어 북경여학계연합회北京女學界聯合會의 선전계에서 활동했다.

 

애국학생운동으로 격동하면서, 그녀는 1919년 8월의 『신보晨報』에 첫 번째의 산문 『21일에 법정 심판을 받은 감상』과 『두 개의 가정』이라는 소설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후자에 빙심은 처음 필명을 사용했다. 작품이 직접적으로 사회문제에 연관되었기 때문에, 빠르게 영향을 미쳤다. 빙심은 오사운동의 천둥소리는 그녀를 “진震”이라는 글자로 창작을 하게 만들었다.

 

그 뒤에 창작한 『사인독유췌斯人獨惟悴』,『거국去國』,『추풍추우수살인秋風秋雨愁煞人』등의 “문제소설”에는 봉건가정이 인성人性을 박해한 것을 부각시켜 반영하고, 신세계의 양대인兩代人의 격렬한 충돌 및 군벌의 혼전混戰이 인민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에 직면했다.

 

당시 협화여자대학이 연경대학燕京大學에 합병되자, 빙심은 청년학생의 신분으로 당시에 이름이 난 문학연구회에 가입했다.

 

그녀는 “인생을 위한다”는 기치아래 끊임없이 창작 작품을 냈는데, 평론계가 중시하는 소설 『초인超人』을 발표하고, 사회의 문단에 반향을 일으킨 소시小詩 ⌜번성繁星⌟과⌜춘수春水⌟는 이로부터 신시新詩 초기의 “소시小詩” 창작의 조류를 촉진하게 했다.

 

1923년에 빙심은 특출나게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위이사리威爾斯利 여자대학의 장학금을 취득했다. 유학을 떠날 즈음에 연속해서 『기소독자寄小讀者』라고 총괄한 이름으로 산문을 발표하여 중국아동문학의 기반을 닦아 놓았는데, 20 살에 두각을 나타낸 빙심은 이미 중국 문단에서 명성이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빙심은 일생동안 창작을 그치지 않았는데, 모성애, 동심童心과 대자연을 한껏 찬미하고, 동시에 사회의 불평등 현상과 서로 다른 계층의 생활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순정純情과 심오한 필치로 넌지시 드러내고 오묘하게 풍자하여 반영했다.

 

대표적인 소설로는 1931년에 쓴 『분分』과 1933년에 창작한『동아고랑冬兒姑娘』이 있고, 우수한 산문 작품으로는 1931년에 발표한 『남귀南歸---헌급모친적재천지영獻給母親的在天之靈』등이 있다.

 

1932년에 북신서국北新書局에서 출판한『빙심전집冰心全集』은 빙신의 소설, 산문과 시가詩歌를 각각 한 권씩으로 묶어서 만든 것인데, 이것은 중국현대문학에서 처음으로 나온 작가의 전집이다.

 

곽말약郭沫若

1892년 11월 16일에 사천성四川省 낙산현樂山縣 사만진沙灣鎭에서 출생한 곽말약은 본명이 곽개정郭開貞인데,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 문학가, 고고학자, 사상가, 혁명활동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곽말약은 1978년 6월 12일에 북경에서 86 살로 세상을 떠났다.

 

유년시절에는 가숙에서 공부하다가, 1906년 가정고등학당嘉定高等學堂에서 공부하여 민주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1914년 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에 태과이泰戈爾, 가덕歌德, 사사비아莎士比亞, 혜특만惠特曼 등 외국 작가의 작품을 접촉했다.

 

1918년 봄에 쓴『목양애화牧羊哀話』는 그의 첫 번째의 소설이다. 1918년 초여름에 쓴 『죽음의 유혹』은 그가 처음으로 쓴 신시新詩이다.

 

1919년 오사운동五四運動이 폭발하자, 그는 일본 복강福岡에서 구국단체 하사夏社를 조직에 앞장서서 제창하여, 신문화운동에 투신하여 『봉황날판鳳凰涅磐』,『지구地球는 나의 어머니』,『노중매爐中煤』 등의 시를 썼다.

 

1921년 6월에 그는 성방오成仿吾와 욱달부郁達夫 등과 창조사創造社를 조직하고 『창조계간創造季刊』을 편집했다.

 

1923년에 그는 일본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창조주보創造週報』와『창조일創造日』을 계속 편집했다.

 

1924년-1927년 사이에 그는 역사극 『왕소군王昭君』,『섭영聶瑩』과『탁문군卓文君』을 창작했다. 1928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여, 1930년에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고, “좌익좌익”동경지부東京支部에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의 이사를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굴원屈原』을 대표로 하는 역사극 6 편을 창작했다.

 

그는 또 『십비판서十批判書』와 『청동시대靑銅時代』 등의 사론史論(고대 역사책의 본기本紀·열전列傳 뒤에 기록된 역사 평론)과 대량의 잡문, 수필, 시가詩歌 등을 썼다.

 

신문학운동에 종사한 그 시기의 곽말약의 대표 시 작품집 『여신女神』은 중국 전통시가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사운동五四運動”의 시대정신을 충분히 반영하고 중국문학사에서 일대 시풍을 연 당대當代에 가장 우수한 혁명낭만주의 시 작품이다.

 

1923년에 그는 계통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무산계급문학을 제창했다. 1926년에는 북벌에 참가하여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다.

 

1927년에 장개석이 당黨을 정리하자, 그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남창南昌 봉기에 참가했다.

 

1928년 2월에 국민당정부로부터 지명수배를 당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곽말약은 중국고대사회의 연구에 몰두했는데, 『중국고대사회연구』와『갑골문연구』등의 중요한 저작을 저술했다.

 

1937년에 항일전쟁抗日戰爭이 시작되자 귀국하여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삼청第三廳 청장廳長을 담임하다가, 문화공작위원회 주임을 맡아 진보적 문화인사와 단결하여 항일구국운동에 종사했다. 1946년부터는 민주운동의 선두에 서서 국민당 정치구政治區 문화계의 혁명 기치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에, 곽말약은 중화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主席에 당선되어,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중국과학원 원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을 역임했는데, 중국공산당 제 9, 10, 11 차 중앙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는『중국사고中國史稿』와『갑골문합집胛骨文合集』의 편집을 주관하고, 작품 전부를 『곽말약전집』38 권에 편성했다.

 

중국문학 노신魯迅

노신魯迅(1881년-1936년)의 원래 이름은 주수인周樹人, 자는 예재豫才이다. “노신”은 그가 1918년에 『신청년新靑年』에 원고를 실으면서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신은 ⌜자조自嘲⌟라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그 중에 “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뭇 사람의 눈 찌푸린 손가락질에, 머리 숙여 달게 받아들여 아이들을 위한 소 노릇을 하리라)라는 두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일생을 진실하게 묘사한 것이다.

 

노신은 일생 동안 800여만 자에 달하는 저술과 번역을 했는데, 그의 『납함吶喊』,『방황彷徨』,『야초野草』,『조화석습朝花夕拾』등의 수많은 작품은 여러 번 출판되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등의 지구상에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었다.

 

『노신전집魯迅全集』은 그가 중국의 인민과 세계 각국의 국민에게 남긴 보배와 같이 귀한 정신적 재부財富이다.

 

1918년에 노신은 잡지 『신청년』에 그의 첫 번째의 백화소설白話小說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현대백화소설이고, 또 중국소설의 발전이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음을 상징했다.

 

이 소설은 노신이 어린 시절부터의 모든 인생 체험의 고통과 중화민족이 겪고 있는 현대의 운명의 고통스런 사색을 응집해 놓은 것이다.

 

그는 “광인狂人”의 입을 통해서 몇 천 년 동안 중국의 봉건전제 역사가 국민을 기만하고 억압한 잔혹한 역사를 호되게 비난하고, 침체되고 낙후된 중국 사회를 향해 “여태껏 이래야만 옳은 것인가?”라고 준엄하게 질문하고, “아이를 구하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노신의 『광인일기』는 전통적인 봉건전제문화를 토벌한 한 편의 격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중국에 현대 신문화를 중건하자고 외친 선언서인 것이다.

 

그것은 모욕을 당하고 손해를 입은 중화민족의 처절한 음성이 전 세계를 향해 중화민족이 다시 새로이 굴기하려는 의지와 신념을 선포한 것이다.

 

『광인일기』가 나온 뒤에, 노신은 한 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달아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나중에 『눌함』과 『방황』의 두 단편소설집에 편입시켜서, 1923년과 1926년에 출판했다.

 

노신의 소설 작품은 수량은 많지 않으나, 의의意義는 오히려 대단히 중대하다. 중국의 소설은 노신 때에 와서야 중국 사회의 가장 저층의 광대한 소재 영역에 시선을 집중하여 하층 인민의 일상생활의 정황과 정신 상황을 묘사했다.

 

노신은 『남강북조집南腔北調集·나는 어떻게 소설을 썼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료를 고를 때, 비정상적인 사회 현상에서 불행하게 지낸는 사람들 중에서 많이 취했는데, 그 병고病苦를 밝혀내서 치료하고 구원하려는 의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인생을 표현하고, 인생을 개량하는 창작 목적은 그로 하여금 공을기孔乙己, 화로전華老栓, 단사수자單四嫂子, 아Q我Q, 진사성陳士成, 상림수祥林嫂, 애고愛姑 등의 가장 보통적인 사람이 가장 일반적으로 겪는 비극의 운명을 주로 묘사했다.

 

이런 사람이 사회의 가장 저층에서 생활하고 가장 주위 사람의의 동정과 연민,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진실함과 사랑의 마음이 결여된 당시의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오히려 모욕과 차별대우를 하고 냉담하고 냉혹하게 대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란 말인가? 이런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합리적인 상호 관계란 말인가?

 

우리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이 없는 데서 생활하여 심하게 고통스런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피차간에 진실한 동정도 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류의 비극적인 운명을 얻은 것에 대해 냉담하게 방관하며 심지어는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또 자기보다 더욱 약소한 사람을 우롱하는 것으로 자기의 압박과 모욕당하여 쌓인 원망과 분노로 울적했던 심사를 털어 버리는 것이다.

 

『공을기』에는 악의를 가지고 공을기를 조롱하는 천박한 손님이 있고; 『아Q정전我Q正傳』에는 다른 사람이 아Q를 우롱하면, 아Q는 곧 자기보다 더욱 약소한 어린 비구니를 조롱하고;『축복』에서는, 노진魯鎭의 촌민은 상림수祥林嫂의 비극을 흥미로운 고사로 생각하고 즐기고, ...... 이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한 것은 정말로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인 것이고, 왜곡된 인생이다!

 

노신은 그들의 태도에 대해 “그 불행을 애도하고, 그 싸우지 않음에 분노한 것이다.” 노신은 그들을 사랑하나, 그들이 깨닫기를 희망하고, 그들이 자립自立, 자주自主, 자강自强하여 허리를 똑바로 펴고 자기의 행복한 미래를 쟁취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사회 저층의 인물 형상 외에, 노신은 또 막 깨달음을 얻은 지식인의 형상까지 역조했다. 그런 지식인은 진보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는데, 사회를 양호하게 개선하여 타인과 자기 자신을 대하는데 진실한 감정과 진정한 사랑이 있기를 염원했지만, 당시의 사회는 그들을 용인하지 않았다.

 

『광인일기』에서“광인狂人”은 사람이 사람에게 잔혹하게 대하는 현상을 저주하고, 사람마다 모두가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지 말고, 진정한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주위 사람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겨 반드시 제거하려 한다.

 

사회의 좋은 점을 회복하기 위해 희생한 그를 차를 마시는 손님들은 “미쳤다”고 말하는데, 화로전이 자기 아들의 병에 그의 피를 사용한 작품은『약葯』이다.

 

작품 『고독자孤獨者』는, 위연수魏連殳는 중국 사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인데, 사회에서 도리어 박해를 받은 그는 더 이상 중국 사회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빌붙으려고 한다. ​​

 

『술집에서』라는 작품에 나오는 여위보呂緯甫와 『방황』에 나오는 자군子君과 연생涓生은 모두 사회와 자신을 위해 분투하며 추구했으나, 침체하고 낙후한 중국 사회에서 비극을 겪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노신이 이런 지식인을 동정한 것은 바로 중국 사회를 동정하고 중화민족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것인데, 당시 사회에서는 오직 이런 지식인만이 사회의 진보를 위해 발버둥치고 분투했기 때문이다.

 

노신의 사상과 예술적인 창조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의 단편소설, 산문, 산문시, 역사소설, 잡문 등의 각종 유형의 창작은 모두 자신이 전부 새로이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그를 20 C의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가이자, 세계적인 문학가의 대가가 되게 했다. 그의 생애는 중화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고 분투한 일생이었는데, 그는 자기의 붓을 사회 정의에 견지하여 강권强權에 반항하고 청년을 보호하여 신생新生의 역량을 배양하였다.

 

전기前期에, 그는 열정을 가지고 청년 학생의 정의 투쟁을 지지하고, 정부가 학생운동과 “삼일팔三一八”의 참혹한 사건의 죄악 행위를 진압한 것을 폭로하여 『유화진劉和珍 군을 기념하며』등의 일련의 인심을 뒤흔드는 문장을 썼다.

 

후기後期에 그는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 사람과 진보 청년에 대해 피비린내 나게 진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좌익 작가연맹과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망각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등의 일련의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바른 기풍의 문장을 썼다.

 

“노신의 대단히 강직하여, 그는 조금도 비굴하게 남에게 아첨하는 근성이 없는데, 이것은 식민 통치하는 반식민지 인민의 가장 보배와 같이 귀한 성격이다”(모택동毛澤東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

 

1936년 10월 19일에 노신은 상해 대륙신촌大陸新村 거처에서 향년 55 살로 세상을 떠났다. 수천수만의 일반인이 자발적으로 와서 참배했는데, 그의 영구 위에는 깃발이 덮여 있고, 그 위에 “민족혼民族魂”이라고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신문학운동의 발전

1921년 7월 1일에 중국에서 세계 역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 대사건이 발생했는데, 중국 공산당의 탄생이었다.

 

공산당의 성립으로 새로운 혁명의 형세가 추진되었는데, 신문학운동이 1922년 이후로 하나의 신국면으로 나타났다. 모순茅盾은 『중국신문학대계소설일집中國新文學大系小說一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우리는 1917년-1921년의 5 년 동안을 회고해보면, 그때의 창작계가 적막했던 것 같다. 작가가 많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발표한 기관機關도 그 수가 매우 적었는데, ..... 1922년부터 전국적인 평범한 문학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黨은 성립 초기에 당시의 문예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당의 이론 간행물 『신청년新靑年』계간季刊 제 1 기(1923년 6월)에 『신선언新宣言』을 발표하여, 당시의 혁명 형세와 사회사상을 분석했다:

 

“무산계급無産階級이 중국의 사회사상의 정확한 궤도를 전력을 다해 지도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 엄격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철학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일절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그것은 또 자산계급의 문예사상을 “왕왕 퇴폐파頹廢派의 경향이 있다”고 비평하고, 혁명적 작품을 수집하고 발표하여 혁명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를 주장했다.

 

조기 공산당에 속하는 등중하鄧中夏, 운대영惲代英, 소초녀蕭楚女, 구추백瞿秋白, 심택민沈澤民, 장광자張光慈 등은 혁명 임무의 요구와 문학 운동의 형세에 근거하여, 1923년-1924년을 통해 『신청년』 계간季刊, 『중국청년』, 『각오覺悟』(『민국일보民國日報』부간副干) 등에 글을 발표하고, 초보적인 맑스주의 문예사상을 선전했다.

 

조기 공산당 사람의 문장은 무산계급이 문학에 대한 요구를 상세히 논술했다. 등중하는 『문학과 사회개조』에서 “문학을 연구하는데, 사회를 잊지 말고 사회 개조는 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문예가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더 이상 도道를 밝히고 교敎를 돕는 노예문학을 하지 말 것이고, 풍화설월風花雪月(고전 문학의 묘사 대상인 바람·꽃·눈·달 넥 가지의 자연 경물)로 타락문학墮落文學을 하지 말며, 불평과 넋두리를 하는 운이 좋은 개인의 문학을 하지 말고, 사회를 위한 문학을 해야 하고, 사회 개조를 위한 문학을 해야 한다!”

 

그의 요구는 비록 봉건주의 문학에 반대한 것인데, 또 자산계급의 개인주의 문학을 반대하는 일종의 다른 신문학이었다.

 

심택민沈澤民은 문학과 민중의 관계로 요구를 제기했다:

 

“문학하는 사람은 민중의 혀(舌)에 불과한 사람으로, 민중의 의식을 종합한 사람이므로, 그는 민첩한 공감으로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욕구, 고통과 염원을 꿰뚫어서 힘 있게 그들을 대신하여 과장되게 묘사해내야 한다.”

 

“그들에게 잠재해 있는 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어서, 그들의 산만한 의지를 통일하고 응집시켜야 한다. 혁명 문학가는 진실한 민중의 정서를 가지고 생활을 조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운대영惲代英은 『팔고八股』에서, 신문학은 반드시 “국민의 정신을 격발하여 그들이 민족 독립과 민주혁명의 운동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라고 제기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신문학에 당을 영도하는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의 혁명 투쟁 위해 한 것이다.

 

심택민은 『우리는 어떠한 문예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글에서 “우리가 수요로 하는 혁명 문학”이라는 전투 구호로 요구를 명확하게 제기했다.

 

백화시운동白話詩運動

『신청년新靑年』은 백화시를 창도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1917년 2월과 6월에 그것은 차례로 호적胡適이 『백화시팔수白話詩八首』와 『백화사사수白話詞四首』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간행한 백화시인데, 1918년에 단지 이것만 유일하게 백화시로 게재되었다.

 

백화시의 창작을 추진하기 위해서, 『신청년』의 편집자들은 그 해에 거의 모두 백화시를 썼다.

 

어떤 때는 한 가지 제목을 나누어서 짓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4 권卷을 1 기期에 호적과 심윤묵沈尹默은 『비둘기』와 『인력차부人力車夫』를 제목으로 하는 백화시를 게재했는데, 4 권을 3 기에 심윤묵, 호적, 진독수陳獨秀와 유반농劉半農도 『제석除夕』이라는 제목으로 백화시를 게재했다.

 

이것은 백화시에 대한 그들의 농후한 흥취를 표현했을 뿐만이 아니고, 백화로서 사물의 묘사와 서정抒情 등의 허다한 장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밖에 『신청년』에 1 년 동안 백화시와 관련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신청년』의 적극적인 제창提倡이 있었기에, 백화시는 사회에서 영향이 점차 확대되었다.

 

1919년에 『신조新潮』『성기평론星期評論』『소년중국少年中國』및『신보부간晨報副刊』등에서 백화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자못 명성과 위세가 있는 백화시 운동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백화시의 또 다른 특징은 구시舊詩의 율격을 타파하여 새로운 시가詩歌 양식을 창건한 것이다.

 

진정으로 문학혁명군의 큰 깃발을 높이 든 사람은 당시 급진민주파의 대표 진독수陳獨秀이다. 그는 『신청년』 제 2 권 제 6 호의 『문학혁명론』 이라는 글 중에서 명확하게 “삼대주의三大主義”를 제기하여 반봉건문학의 구호를 우렁차게 외쳤다:

 

지나친 수식과 아부하는 귀족문학을 뒤엎고, 평이한 서정적인 국민문학 건설하자;

진부한 겉치레의 고전문학 뒤엎고, 신선하고 진실한 사실문학을 건설하자;

케케묵고 난해한 산림山林문학 뒤엎고, 명료한 통속적인 사회문학 건설하자.

 

『신청년』에서 문학 혁명의 주장을 제기하자, 전현동錢玄同, 유반농劉半農 등의 호응을 얻었다. 전현동은 간행물 편집자에게 쓴 일련의 공개 서신에서 맹렬하게 구문학을 비난하고 언어와 문자에 백화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여 “언문일치言文一致”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유반농은 『나의문학개량관』 등의 글을 발표했는데, 백화와 문언文言이 점차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구문체에 대한 미신迷信을 타파하기를 주장하고, 음운학 각도에서 구운舊韻을 신운新韻으로 만들어서 신식의 구두점과 부호 등을 사용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의했다. 이런 문자는 문학혁명의 전개를 부채질하여 촉진하게 만들었다.

 

조기의 백화시 창작 중에서, 호적胡適은 매우 영향을 끼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백화시를 1915년에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는 미국 유학 중에 있었다.

 

백화로 시를 쓰는 것은 중국시의 전총에 위반되었기 때문에, 일부 중국 유학생들에게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백화는 소설을 쓸 수 있으므로 시 역시 백화로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는 앞으로는 더욱 문언시사文言詩詞를 쓰지 않고 오직 백화시만 짓겠다고 결심했다. 1917년에 이르러, 그는 암암리에 어렵게 수십 수를 지어서 일부를 골라서 간행물에 발표하고, 편집하여 시집을 만들어, 『상시집嘗試集』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 후로 또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여, 1920년 3월에 정식으로 출판했다.

 

유반농(1891년-1934년)은 백화시를 짓는 것에 대해 유익한 탐색을 많이 했다. 그는 1917년에 『나의 문학 개량관』과 『시와 소설 정신의 혁신』 등의 글에서 강력하게 시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스스로 배양하고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시체詩體를 증가시키기를 제기했다.

 

자기주장의 실현을 위해, 그는 많은 백화시白話詩를 썼는데, 시의 체재體裁에서 스타일을 새롭게 일신시켜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1918년부터 그는 유운시有韻詩, 무운시無韻詩, 산문시散文詩와 민가체시民歌體詩를 발표하여 신시단新詩壇의 창작에 활기를 띠게 했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