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五四 시기 창조사創造社 저항 작가 욱달부郁達夫
창조사創造社는 “오사五四” 시기에 출현하여 중대한 영향을 준 문학단체이다. 그것은 1921년 7월에 정식으로 성립하여, 그 간행물 계간季刊 『창조創造』는 공개적으로 1922년 5월에 독자에게 선보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창조사의 주요 성원들은 “오사”를 겪은 뒤에 연속해서 각종 창작을 발표했다. 곽말약郭沫若의 첫 시집 『여신女神』 중에 있는 적지 않은 작품이 이미 당시의 신문의 특별란에 발표되었다.
욱달부郁達夫와 성방오成仿吾도 모두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고, 그들은 이를 기반으로 창조사를 조성組成했는데, 목적은 이 추진을 빌미로 당시의 신문학운동을 진일보하게 전개하려 했다.
욱달부(1896년-1945년)는 창조사의 중요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오사운동과 1927년의 대혁명과 항일전쟁 등 몇 개의 중요한 역사 단계를 경험했는데, 창작 활동 시기는 주로 1921년-1935년 사이였다.
그의 일생은 모순으로 충만하여, 한편으로는 “오사”이래로 보통의 진보적인 소자산계급 지식인이 모두 반제反帝와 반봉건적인 애국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시대적인 촉진 아래 혁명을 요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또 무산계급의 혁명 사업에는 투신할 용기가 없는 소자산계급의 지식인이었다.
특히 혁명이 저조한 형편이거나 심상치 않게 첨예할 때는, 그는 곧 뒤로 물러나 은둔하여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떠났다.
『침륜沉淪』은 욱달부의 젊은 시절의 대표작이다. 그것은 1921년 5월에 완성되어, 놀랄만한 자료를 골라 대담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당시의 문단을 진동하게 했다.
그 소설은 일본에 유학간 학생이 이민족이어서 압박과 사회적인 냉대를 받아 조성된 정신상의 극도의 고통을 묘사했다. 이런 차별대우를 받는 고통과 약한 나라의 인민으로서의 자괴감으로 주인공의 고민과 복잡한 심리 상태를 구성했다.
작가가 자본주의 몰락기의 영향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인물의 사상과 행위는 건강하지 못한 색채를 띠었다. 마지막에 그는 정신상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은 자살의 길을 가고 만다.
바다에 투신하기 전에 고국의 하늘에 떠있는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는 자기의 고통과 소망을 울부짖었다.
창조사創造社 장자평張資平
장자평張資平(1893년-1947년)은 창조사의 이른 시기의 중요한 성원成員이다. 1911년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뽑혀서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문학 방면에 흥취를 가지고 있던 그는, 1919년에 재학 시절에 장편소설 『충적기화석冲積期化石』을 쓰기 시작했다. 1922년에 졸업하여 귀국한 그는 무창武昌의 한 대학에서 지질학을 가르쳤으나, 그의 중요한 활동은 문학 창작이었다.
그는 『창조계간創造季刊』 창간호에 첫 번째의 단편 『그녀는 낙담하여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다』를 발표했는데, 일본을 여행하던 화교華僑 한 사람이 일본여인이 낳은 딸 추아秋兒와 조우遭遇한 것을 묘사하였다.
마음이 선량하고 순박한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생활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악한 세력이 그녀를 겁탈하여 억지로 매음을 시켰다. 그녀는 화교 학생인 악인을 열렬하게 사랑했는데, 마지막에는 결국 기만을 당하고 실망한다.
초기 창작인 이 소설에서 작가는 현실주의의 경향과 인도주의 사상을 표현했다. 그의 단편과 장편의 수량은 꽤 많은데, 그 중에서 지식인의 고통과 몸부림을 묘사한 것이 적지 않은데, 상당히 사회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어린 오누이』 중에는 프랑스로 유학한 교수가 생활이 극도로 빈곤하자, 둘째 아이의 출생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몹시 애를 썼다. 이런 류를 소위 “신변소설”이라고 하는데, 비록 객관적인 수법으로 묘사했지만, 주관적인 정감이 수시로 나타났다.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정진탁鄭振鐸
정진탁鄭振鐸(1898년-1958년)의 젊은 시절의 공헌은 주로 문학 활동을 조직하여 일을 한 것에 있다. 그는 문예 간행물을 편집하고, 이론에 비평을 쓰고 적지 않은 외국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설조雪朝』집集 속에는 신시新詩와 『산중잡기山中雜記』를 수록한 산문 외에, 단편소설집『가정家庭의 고사故事』의 작품까지 들어있다.
꾸밈이 없는 문자로 된『가정의 고사』집集에는 『자서自序』로『흘러가버릴 중국의 구가정舊家庭의 그림자』일조一組가 있고, 『오노다五老爹』는 기식자寄食者의 죽음을 다루고, 의탁자의 일생을 쓴 『왕유王楡』, 탕아의 방랑을 얘기한 『구숙九叔』, 버림받은 여인의 초췌함을 쓴『삼년三年』 등이 있다.
『묘猫』,『풍파風波』,『책의 행운』에서는 지식인의 습관과 정취情趣를 표현했다.
작가 노언과 정진탁의 창작은 문학연구회 안에 있는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로 30 년대까지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연구회의 여러 작가의 창작 중에서 가장 현실주의의 특색이 있는 것은 엽소균葉紹鈞(성도聖陶)의 작품이다.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노언魯彦
노언魯彦(왕형王衡, 1901년-1944년)의 처음 작품은 『유자柚子』집 안에 들어 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문장을 썼을 때, 나의 나이는 아직 젊었는데, 그래서 때대로 특별이 열정적으로 저주와 조소로 크게 울부짖곤 했다”(주注:『나의 창작에 관하여』).
예를 들면 『구狗』, 『가을비의 하소연』같은 작품이 적지 않은데, 기실 사람들의 이기심, 우매함과 무감각한 심리를 수필 형식으로 쓴 산문이다. 『유자』는 유자柚子와 같은 인품을 가진 사람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것인데, 봉건군벌이 거칠게 살인하는 죄상을 규탄하였다.
단편 『허시부지우파許是不至于罷』중에, 작가는 해학적인 필치로 갑부 왕아우王阿虞의 심리의 명암과 그 교활한 처세 철학을 나타내서 착취자의 허虛를 드러내보였다. 추악한 영혼을 가진 그는 농민을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각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 단편에서 노언은 작품의 예술적 특색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황금黃金』집集 안에 들어있는 몇몇 소설에서, 작가는 더욱 고의적으로 냉엄하게 인물의 생활을 각화刻畵하는 방법으로 현실주의를 더 표현하였다.
『황금黃金』편 안에 있는 여사백백如史伯伯은 중산계층 가정이 갑자기 영락해진 뒤에 주위 사람들에게 신랄하게 조소와 냉대를 당하고, 비참함에 내내 빠져있는 인물의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여사백백에게 동정을 가지고는 있으나, 가혹한 생활의 객관적인 규율로 그로 하여금 그저 작품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꿈속에서 “희망과 즐거움”을 얻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냉혹한 현실에 대조시킨 이 원만한 꿈은 그 자체가 주인공 자신의 심각한 사상적인 약점임을 풍자한 것이다.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 주자청朱自淸
주자청朱自淸(1898년-1948년)은 본명이 자화自華, 호는 추실秋實인데, 나중에 자청으로 개명하고, 자는 패현佩弦으로 현대現代의 저명한 작가이다.
본적은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이고, 강소성江蘇省 동해東海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조부와 부친을 따라 양주揚州에서 거주했다.
유년 시절에 사숙에서 공부하여 중국전통문화의 훈도薰陶를 받았다. 1912년에 고등소학高等小學에 들어가, 1916년에 중학中學을 졸업한 뒤에 북경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1919년 2월에 쓴 『수파睡罷, 소소적인小小的人』은 그의 신시新詩 처녀작이다. 그는 오사운동의 참가자로, 오사五四 물결의 영향을 받아 문학의 길을 간 사람이다.
모택동은 주자청의 기개를 찬양한 적이 있는데, 그를“일신에 중병이 들었어도 굶어죽더라도 미국을 받아들이지 않는 ‘구제량救濟粮’이다”라고 말했다.
1920년에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에,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의 중학교에서 가르치며 적극적으로 신문학운동에 참가했다.
조기문학연구회早期文學硏究會의 회원인 그는 1922년에는 유평백兪平伯 등과 월간『시詩』를 창건했는데, 신시의 탄생 시기에서 가자 이른 시 간행물이다.
1923년에 장편시 『훼멸毁滅』을 발표했는데, 이때 우수한 산문『장성등영리적진회하槳聲燈影里的秦淮河』 도 창작했다.
1925년 8월에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교편을 잡고, 중국고전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창작은 주로 산문을 위주로 했다.
1927년에 쓴 『배영背影』과『하당월색荷塘月色』은 모두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훙륭한 작품이다.
1931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유럽을 두루 돌아보고 귀국한 뒤에 『구유잡기歐游雜記』를 썼다.
1932년에 청화대학淸華大學 중문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 1937년에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따라 남쪽에 있는 곤명昆明으로 옮겨가서, 서남연대西南然大의 교수를 맡고, 『송시宋詩』와『문사연구文辭硏究』등의 과목을 강의했다. 이 기간에 산문 『어문영語文影』을 창작했다. 1946년에 곤명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청화대학의 중문과 학과장을 담임했다.
주자청에게는 모두 190만 자자에 달하는 27 종의 저작이 있는데, 시가, 산문, 문예비평, 학술연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53년에 개명서점開明書店에서 『주자청문집』4 권으로 출판했다.
1988년에 강소성 교육출판사에서 주자청의 저작을 또 전면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여 6 책冊으로 된 『주자청전집』을 출판했다.
주자청은 비록 “오사”운동 뒤에 신시新詩 창작을 시작했으나, 1923년에 발표한 『장성등영리적진회하槳聲燈影里的秦淮河』에는 그가 산문 창작 방면에 재능이 뚜렷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산문 창작에 진력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8년에 출판된 산문집 『배영』은 당시에 주자청에게 산문 작가로 훌륭한 명성을 가지게 했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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