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해방구解放區의 연극 『백모녀白毛女』

一字師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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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구解放區의 연극 『백모녀白毛女』

 

                                                                             图片来源 | 白毛女-电影海报

 

주양周揚은 이런 지적을 한 적이 있다.

 

“문예좌담회 이후에 해방구解放區에서 문예의 면모와 문예종사자의 면모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인민의 문예이다.”

 

“‘오사五四’이래로 노신魯迅을 우두머리로 하는 모든 진보적인 혁명의 문예종사자는 문예와 현실을 결합시켜 널리 군중과도 결합하여서 탐색과 노력에 많이 고심했다. 해방구에서, ......선구자들의 이상이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지금은 시작이지만, 위대한 시작인 것이다.”

 

(1) 『백모녀白毛女』

『백모녀白毛女』는 성공한 대형 가극歌劇인데, 전투적인 사상 내용과 완벽한 예술 형식이 서로 통일된 작품이다. 그것은 중국 신가극의 성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백모녀』는 진찰기晋察冀 변구邊區에서 유행한 신전기新傳奇 “백모선고白毛仙姑”를 창작한 것이다. 그것은 광범하게 군중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와 인민군중이 가공加工과 윤색을 거쳐서 자신의 아름다운 이상을 주입하였다.

 

해방구의 문예종사자는 깊숙이 생활에 침투한 모택동毛澤東의 『강화講話』에 의거하여 이 신전기를 발굴하고, 또 그것을 소설, 극본, 보고문학 등을 각기 다른 소재로 작품을 썼다.

 

나중에 연안노예延安魯藝가 취재取材하여 하경지賀敬之, 정안丁顔이 대형 가극歌劇 『백모녀』를 집체창작集體創作으로 집필하고, 마가馬可 등​이 작곡했다.

 

하경지는 1924년에 산동山東에서 출생하고, 1939년에 항일구망抗日救亡 활동에 투신하여, 1940년에는 노신예술문학원에 들어가 학습했다. 조기 창작으로는 『향촌지가鄕村之歌』 시집이 있는데, 항전抗戰 시기에 출현한 시인이다.

 

『백모녀』의 탄생은 첫째는 모택동이 문예방침을 정확하게 지도했기 때문이고, E 직접 당의 힘 있는 지지와 도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그것은 일찍부터 비교적 민중에게 두터운 지지를 받았는데, 소재가 인민군중의 민간전설에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이 고사는 천만 농민이 그들이 구사회舊社會와 구제도舊制度에 반대하고 신사회와 신제도를 옹호하는 열정을 주조鑄造한 것이다.

 

이 가극은 당시의 혁명 투쟁을 밀접하게 결합하여 강력한 정치적 경향성과 선명한 시대적 특색을 지녔다.

 

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 (5) 소설 창작의 신성취新成就

항전抗戰 초기에 보고문학報告文學과 시가詩歌는 중요한 문학 양식이 되는 동시에, 많은 작가가 소설 창작을 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모순茅盾, 장천익張天翼, 파금巴金, 노사老舍와 정령丁玲 외에 사정沙汀과 애무艾蕪 두 사람의 작가가 더 있다.

 

항일전쟁 시기에, 사정은 비교적 국민당 통치구統治區의 농촌생활을 진실하게 확대하여 반영하는 성과를 거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04년에 사천四川에서 출생한 그는 1931년부터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문단에 들어온 뒤로 당黨의 교육과 노신魯迅의 계시啓示를 받아 견실한 창작의 길을 걸었다.​​

 

사정은 처음에는 단편소설을 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장편소설도 창작했다. 소설의 뚜렷한 특징은 농촌생활의 묘사를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지고 농민의 고난과 민족 멸망의 위기를 통해서 묘사하여, 냉정하게 국민당 반동 통치의 부패한 본질을 폭로했는데, 예리하고 선명한 필봉으로 빈틈없이 구성하여 세밀하게 그려내서 사천 지방의 색채가 농후했다.

 

그가 항전 전에 발표한 것으로는 『법률 밖의 항로』,『토병土餠』,『고난苦難』등으 세 편의 단편소설과 약간의 작품이 분산되어 있다.

 

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 (4) 항전抗戰 전후의 연극

항전의 문예전선에서, 연극은 보고문학과 시가와 마찬가지로 선전 교육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항전 초기에는 허다한 진보적인 연극 종사자들이 전방으로 달려왔는데, 그들은 자신이 투쟁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절하고도 힘 있게 전후방의 군민軍民을 격려했다.

 

당시는 자주 현지에서 인재를 조달하여 편폭이 작은 작품을 집체集體 창작했는데, 민족해방투쟁 중에서 감격적이고 눈물겨운 인물과 사적事迹을 보도하고 찬양했다.

 

이때 전후로 출현한 규모가 큰 항전 현실을 반영한 극본은 그 수가 적지 않다. 그 중에서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것으로는 하연夏衍, 우령于伶과 송지적宋之的의 작품이 있다.

 

1900년 절강성浙江省에서 출생한 하연은 중국 현대연극운동 조직자이고 영도자 중의 한 사람이고, 우수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몰락한 소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친히 농촌의 파산 비극을 경험하기도 하고, 돈 있는 사람에게 업신여김과 조소를 겪을 대로 겪었기 때문에, 구사회제도에 대한 불만과 반항은 소년시절에 마음속에 깊게 뿌리내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사운동 이후에, 그는 절강성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간행물을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한 그는 그 곳에서 노동자운동을 실제로 하는 일에 참가했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뒤에 쫓겨나서 귀국하여,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얼마 뒤에, “좌련左聯”에 참가하여 좌익 연극운동에 투신했다. 항일전쟁 기간에, 그는 우수한 각본을 적지 아니 써서 비교적 큰 공헌을 했다.

 

우령于伶은 항전 시기에 상해에서 진보적인 연극운동의 조직자 중의 한 사람이고, 우수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1907년에 강소성에서 출생한 그는 1931년에 “좌련”에 참가했다. 항전 승리를 전후로 길고 짧은 40여 편의 각본을 썼는데, 민주혁명 시기의 전투적인 생활 현실의 단편을 상실한 국토의 격앙된 비가悲歌로 하여, 비탄에 빠진 대중이 자아를 희생하여 인민군중의 의지와 감정이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울부짖어서 인민의 해방과 혁명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국민당 반동파의 어두운 통치 아래, 연출의 조건이 대단히 어려운데도, 작자가 시종 신념을 견지한 것은 연극예술 작업은 당의 혁명사업의 조직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작자는 줄곧 연극이라는 이 문예의 무기를 붙잡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적을 폭로하고 적에게 타격을 가하며 인민군중의 부단하게 증가되어 가는 민족의식을 반영하고, 인민이 단결하고 분발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기를 호소했다. 그의 조기 대표작으로는 『회성回聲』과『부시浮尸』의 두 작품이 있다.

 

송지적宋之的(1914년-1956년)은 빈농 출신의 극작가이다. 그는 구일팔사변九一八事變이 일어나자, 혁명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좌익극작가연맹 활동에 참가했다. 그는 연극 사업에 투신을 시작하여 20년 동안 줄곧 문예전선에서 선두에 섰다.

 

항전抗戰 전에,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두 번째에 출옥하여 태원太原에 가서 공농홍군工農紅軍(중국의 제2차 국공國公 내전 당시 주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군대의 호칭)의 동정東征을 위하여, 그는 반동파의 문화고압정책文化高壓政策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죄인가』를 창작하고 화극話劇을 연출하고, 보고문학報告文學으로 저명한 문학 작품 『1936년의 태원太原의 봄』을 썼다.

 

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 (3) 시가 창작의 새로운 성취

항전抗戰이 폭발한 뒤에, 시가는 보고문학報告文學 외에 대단히 활약한 문학 양식이다. ​​

 

『칠월七月』잡지는 무한武漢을 물론이고, 중경에서도 허다한 저명한 시인의 중요한 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칠월』에는 모두 39 명의 시인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대다수가 문단의 신인인데, 또 점점 현대 문학사에서 매우 영향을 준 칠월시파七月詩派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무한에 이르러 빼앗겨서 중지하게 되자, 시가 낭송 운동이 대단히 유행하게 되었다.

 

1938년 여름에 연안延安에서 또 가두街頭 시 운동이 전개되었다. 항전시가抗戰詩歌의 주류는 전쟁 전에 중국 시가가 시가의 대중화를 선도한 기초에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모순茅盾은 이런 지적을 한 바 있다.

 

“만약 ‘오사五四’시기의 백화시白話詩가 구체시舊體詩에 대한 해방 운동이라면, 항전 시기의 시가운동은 백화시의 재해방再解放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 해방운동은 장단점이 있지만, 그 가장 중요한 항목은 바로 대중화의 방향을 꽉 잡았다는 것이다.”

 

항전 시기에 이르자, 좌익시인 애청艾靑은 더 많은 우수한 시를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구성이 참신하고 착상이 깊고 원대하여 신시新詩 창작에 대한 독자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애청은 1910년 절강성浙江省 금화金華에서 출생했다. 1928년에 항주서호예술대학杭州西湖藝術大學의 회화과繪畵科에 입학했다.

 

익년翌年에 프랑스에 가서 일하면서 회화예술을 전공하고, 동시에 진보적인 철학, 문예서적에 대해 농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3 학년이 되었을 때, 정신적으로는 자유스러우나 물질적으로 빈곤한 해외 생활은 그에게 착취하는 통치 아래에서의 구세계舊世界의 흑암을 더욱 목도하게 만들어서, 한 반식민지국가의 인민으로서 침략 세력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1932년 귀국한 애청은 의연하고 결연하게 지주계급의 가정을 등지고, 좌익미술가연맹에 참가했다. 같은 해 7월에 정부를 전복시켰다는 죄명으로 국민당 반동파에게 체포되었다.

 

애청은 옥중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어서 문예文藝의 방법을 써서 ⌜대언하大堰河⌟를 대표로 하는 조기早期 서정시가를 잇따라 창작했다. 3년이 넘는 철창생활은 시인에게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과 광명을 갈망하는 혁명의 의지와 열정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2) 항전抗戰을 견지하고 진보적인 문학을 창작하다

“좌련左聯”은 1931년 11월에 『중국무산계급혁명문학의 신임무』의 결의에서 보고하기를, 문학의 제재題材, 방법과 형식 등의 문제를 명확하게 논술하고, 또 “공농병工農兵 즉 노동자와 농민과 군인의 통신원 운동을 결합시켜 전개하는데 크게 선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보고하기를, 문학이 세계의 진보문학계에서 채취한 일종의 새로운 문학 양식이 이때부터 중국 문단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1936년에 하연夏衍이 쓴 『포신공包身工』은 처음으로 나온 전업작가專業作家의 손으로부터 나온 우수한 보고문학報告文學 작품이다.

 

그것은 제재題材를 선택하고 표현 방법과 예술 형식 등의 방면에서 보고문학의 수립에 양호한 본보기를 수립했다.

 

작가의 입장이 선명해서 판단력이 강하고, 인물이 많고 사건이 잡다한 재료 중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를 풀어내어, 풍부한 예술적인 전형화典型化를 통해서 개괄하여, 그것을 한 방면에 많은 내용을 편폭으로 압축하여 깊이 있게 현실의 진실에 반영했는데,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잘 결합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

 

작품은 “노시봉蘆柴棒”을 통해 일본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서 인성을 완전히 상실한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는 포신공包身工을 대표로 삼아,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약탈하고 착취하는 잔혹한 죄상을 강력하게 폭로했다.

 

그것은 각종 사회관계의 묘사를 통해 독자를 포신공이 생활하고 일하는 장소로 끌어들여서, 보기만 해도 “빛이 없고, 열이 없으며, 온정이 없는, 희망이 없고 .... 법률도 없고, 인도人道마저 없는 인간 지옥을 보고 몸서리치게 만든다.

 

작자는 생동하는 언어로 형상화하여, 국민당 반동파와 제국주의를 서로 결탁하여 야만성을 가진 도살장을 설치하여 남김없이 폭로하고, 또 상징적인 수법으로 죽은 것 같이 고요한 캄캄한 밤이지만, 여명黎明이 오는 것은 결국은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작품 전체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진실과 선명한 혁명의 경향으로 발전시켜서, 독자의 제국주의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인민에게 싸워서 민족의 자유해방을 쟁취하도록 분발하게 했다.

 

항전이 폭발하기 직전에 『포신공』처럼 널리 독자의 주의를 이끈 것으로는 송지적송지적의 『1936년 봄 태원太原에서』등의 우수한 보고문학 작품이 더 있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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