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구解放區의 시가詩歌 장편서사시 ⌜왕귀王貴와 이향향李香香⌟
⌜왕귀王貴와 이향향李香香⌟은 처음 1946년 9월 연안延安의 『해방일보解放日報』의 칼럼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예전의 신시新詩를 타파하고 생활면을 관찰하여 반영하여, 노동 인민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고 역사의 전진을 추진한 거대한 역량을 생동적으로 표현했다.
장시長詩 ⌜왕귀와 이향향⌟의 출현은 혁명문예에서 여러 방면에 계시 작용을 했다. 현대시의 가사에서 그의 사상과 예술적인 찬란한 빛은 경시하지 못할 의의를 가지고 있다.
륙정일陸定一은 『독료일수시讀了一首詩』란 제목으로 그것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길을 여는 선봉 역할을 했다.
“풍부한 민간 어휘를 사용하여 내용과 형식이 다 좋은 시를 창작했다......혁명 문예에 만약에 자기 민족의 형식, 즉 노동하는 인민이 즐겨 듣고 보는 형식을 배우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수많은 인민의 두뇌 속에서 구문예舊文藝의 영향을 타도하고 숙청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매번 그러한 승리는 신민주주의 문예운동이 봉건적 매판買辦의 반동적인 문예운동으로부터의 승리를 표시한 것이다. 새로운 문화는 구문화의 보루를 하나하나씩 탈취하는 것이다.”
곽말약郭沫若도 이 장편시를 “문예의 해방”을 위한 우렁찬 신호라고 높이 칭찬했다.
해방구解放區의 소설과 보고문학報告文學 ③: 주립파周立波의 『폭풍취우暴風驟雨』
주립파周立波(1908년-1979년)의 장편소설 『폭풍취우暴風驟雨』는 1948년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해방구解放區 문학 창작의 중요한 수확이고, 주립파는 소설 창작으로 모택동 문예사상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작가이다.
작가는 1934년 좌련左聯에 참가하여 편집 업무에 종사했다. 그 후 약간의 문예 논문을 쓰고, 소련과 러시아 소설을 많이 번역했다.
이것은 당시의 독자 및 그 자신의 창작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항전抗戰이 일어난 뒤에, 그는 항일抗日 근거지에 가서 창작에 착수했는데, 중요한 보고문학인 『진찰기변구인상기晋察冀邊區印象記』와 약간의 단편소설이 있다.
1939년부터 그는 연안노신문예대학延安魯迅文藝大學의 교수를 맡았는데, 이 기간의 생활에 대해 작자는 나중에 두 가지 추억을 이렇게 얘기했다.
“이 예술대학은 성城에서 십리 떨어진 교아구橋兒溝라는 시골에 있습니다. 교수 기숙사는 동굴집(窯洞)에서 멀지 않은 농민의 장원場院이 있는 곳으로, 우리와 농민은 이웃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노사불상왕래老死不相往來(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다.『노자老子·팔십장八十章』에 나오는 ‘영국상망領國相望, 계견지성상문鷄犬之聲相聞, 민지노사불상왕래民至老死不相往來’라는 말에서 유래함)했습니다. 꼬박 4 년 동안이나, 나는 농민이 있는 동굴집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습니다.”
“『강화講話』의 계시啓示를 받고, 좌담회 이후에 문예 영도領導의 정확한 안배도 있어서, 나는 점차로 현실에 접촉하면서 군중을 이탈하려는 나의 경향도 점점 약간의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15 년을 지내면서 부대에도 가보고 농촌도 가보고, 또 공장에도 가봤습니다. 군중 사이에서 있던 날들이 많아지면서, 나의 글에도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1946년에 주립파가 동북해방구로 들어오자, 당에서는 간부를 시골로 보내는 토지개혁 업무에 참가시켰는데,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 격렬한 계급투쟁에 뛰어들었다.
장편소설 『폭풍취우暴風驟雨』는 바로 작가가 모택동의 교도敎導를 따라 깊이 있게 실제적인 투쟁을 거친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한 것이다. 세상에 나온 그 작품은 작가 자신의 창작의 길이 참신한 단계로 진입했다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모택동의 문예사상이 승리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폭풍취우』는 웅장한 기백으로 제 3차 국내혁명전쟁 시기에 광대한 해방구 농촌지구에서 천지가 개벽할 만한 토지개혁의 큰 변혁을 표현했다.
해방구解放區의 소설과 보고문학報告文學 ②: 정령丁玲의 창작
정령丁玲(1904년-1986년)은 현대와 당대當代의 여류작가로, 본명은 장빙지蔣冰之이고, 필명은 빈지彬芷, 총훤叢喧, 호남성胡南省 임풍臨灃 사람이다.
장사長沙 등지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오사五四”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에 공산당이 창건한 상해대학 중문과에서 공부했다.
1927년에 소설 『사비莎菲 여사의 일기』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열렬한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1930년에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여 좌련左聯의 기관간행물 『북투北鬪』의 편집장 및 좌련당단左聯黨團 서기書記를 맡았다.
이 시기에 그녀가 창작한 『수水』와 『모친母親』등의 작품은 좌익혁명문학의 실적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1933년에 국민당 특수 요원에게 납치되었다가, 나중에 남경을 벗어나 중국공산당의 중앙소재지 섬북陝北 보안현保安縣으로 갔다.
섬북에서 서북전지西北戰地 복무단服務團 단장과 『해방일보』의 문예부간주편文藝副刊主編 등의 직분을 맡고, 『일과미출당적창탄一顆未出膛的槍彈』,『야夜』,『내가 하촌霞村에 있을 때』『병원에 있을 때』등의 해방구解放區 문학의 우수한 작품을 잇달아 창작했다.
1948년에 장편소설 『태양이 상간동桑干洞을 비추다』를 창작하여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1951년에 스탈린문학 상금을 받았다.
신중국新中國이 성립된 뒤에, 정령은 문예계의 영도하는 여러 중요한 직무를 맡고, 또 바쁜 업무 가운데서 틈을 내어 소설, 산문과 평론을 대량으로 발표했다.
1955년과 1957년에 착오로 “정령과 진기하陳企霞는 반당反黨 소집단小集團”이고 “정령과 풍설봉馮雪峰은 우파右派 반당집단反黨集團”의 중요 멤버로 다스려졌는데, 1958년에 또 “재비판再批判”을 받고, 개조改造하기 위해 북경대학의 황무지 노동에 보내졌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심한 박해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9년에 잘못된 판결을 시정 받아 문단으로 다시 돌아와,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 등의 직분을 맡고, 여러 차례 유럽과 미국 등을 방문했다.
일생 동안 풍부한 저작을 낸 정령은 일부 작품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 전해져서 광범하게 영향을 주었다.
해방구解放區의 소설과 보고문학報告文學 ①: 조수리趙樹理의 창작
새로운 인민의 문예창작에서 조수리趙樹理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대중의 풍격을 구비한 인민예술가이다.
조수리(1906년-1970년)는 본명이 조수례趙樹禮, 심수현沁水縣 위지촌尉遲村 사람이다. 현대의 저명한 소설 작가로 빈곤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문련상무위원, 중국작가협회 이사, 중국곡예협회 주석을 역임했는데, 『곡예曲藝』와『인민문학』의 편집위원과 중국공산당8차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 1, 2, 3차 대표를 지냈다.
조수리는 중국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그는 혁명문예의 통속화와 대중화 작업에 힘쓰며, 많은 농촌의 사회생활을 묘사하여 널리 대중에게 환영 받는 소설을 썼다.
예를 들면 『소이흑결혼小二黑結婚』,『이유재판화李有才板話』,『이가장李家庄의 변천變遷』『복귀福貴』등이 있다.
전국이 해방된 뒤에, 계속해서 농촌생활을 묘사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문단에서 활약했다.
단편소설 『단련단련鍛煉鍛煉』, 장편소설『영천동靈泉洞』(상편) 및『실간가심영복實干家瀋永福』, 장편소설 『삼리만三里灣』 등은 모두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여 차마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하였다.
10년의 대참사 중에 조수리는 심신이 모두 심한 손상을 입었는데, 1970년 9월 23일에 억울함을 꾹 참아오다가 64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수리는 중국의 농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고 인민을 열렬히 사랑하는 드믄 걸출한 작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중국 농촌이 겪은 수십 년 동안의 거대한 변혁을 진실하게 재현하고, 게다가 독특한 민족 형태와 민족 풍격을 지닌 중국의 우수한 민족문예의 전통을 드높이고, 혁명문예의 대중화를 촉진시켜 풍부한 성과를 내는데 공헌했다.
해방구解放區의 연극: (2) 화극話劇의 새로운 수확
모택동毛澤東이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발표한 뒤에, 화극話劇 창작의 면모도 똑같이 새롭게 달라졌다.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시선을 먼 곳에 두라』,『동지여, 당신은 잘못된 길을 갔다!』,『홍기가紅旗歌』 등이 있다.
일찍이 1942년 가을에 변구문예활동邊區文藝活動이 전개되었는데, 이미 기본적으로 예전에 한때 대형 가극을 갈망했던 것을 바로잡고, 맹목적으로 외국 연극의 기교를 숭배하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적으로 기울었다.
같은 해 연말에 호단비胡丹沸가 집필하여 집체창작한 단막극 『시선을 먼 곳에 두라』는 화극 창작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우수 작품 중의 하나이다.
『동지여, 당신은 잘못된 길을 갔다!』는 요중명姚仲明과 진파아陳波兒가 공동 편찬으로 1944년에 탈고하여, 1945년에 항대抗大(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서 연출한 것인데, 예술성이 비교적 강하고 교육적인 의의도 비교적 깊은 각본이다.
그것은 항전抗戰 초기에 당내黨內에 통일전선문제에서 모택동이 대표가 되는 노선을 정확히 반영하고, 우경노선右傾노선의 극렬한 투쟁과 계급투항주의階級投降主義의 실질 및 그 위해성危害性에 대해, 강력하게 들추어내고 비판을 가하고, 또 당의 정확한 노선의 승리를 찬양했다.
또 다른 우수 극작인 『홍기가紅旗歌』는 유창랑劉滄浪과 노매魯煤 등이 집체창작한 결과인데, 전국해방全國解放이 일어나기 전에 작자는 모택동 문예사상의 지도 아래 노동자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귀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것은 한 방직공장의 홍기紅旗 경쟁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여공女工 마분저馬芬姐가 낙후落後에서 선진先進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공업의 관리 방면에서 노동자가 얼마나 중대한 문제를 차지하고 있는 지를 표현하였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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