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낙타상자駱駝祥子와 다산 작가 노사老舍
노사老舍(1899년-1966년)는 만주족으로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부지런히 창작을 다산多産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서경춘舒慶春, 자는 사여舍予이고 북경성北京城의 빈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사는 그가 소설 『노장老張의 철학』에서 사용한 필명이다. 그의 필명은 혈청絜靑, 혈여絜予, 비아非我, 홍래鴻來 등이 더 있다. 중국의 현대소설가이고, 극작가이자 저명한 작가로 초등학교 교장, 중학교 교사와 대학교수를 지낸 바 있다.
1918년에 노사는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여름에 런던대학 동방東方 단과대학에 중국어 교수를 지내면서 문학 창작도 했다.
1926년에 첫 번째 장편소설 『노장老張의 철학』을 『소설월보小說月報』17 권권에 연재할 때, 서명을 “서경춘”으로 했다. 그러나 제 8 호號부터 연재에 서명을 “노사”로 바꾸고, 줄곧 소설 전부에 사용했다. 이것은 노사문학 창작 역정의 발단을 상징하고 있다.
이어서 또 『조여왈趙予曰』과『이마二馬』를 발표하여, 그의 현대문학사에서의 지위가 다져졌다.
1929년에 노사는 싱가폴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싱가폴에서 중편소설 『소파小坡의 생일』을 창작했는데, 이것은 아동문학 작품으로 싱가폴에서 사는 화교 소년과 압박을 받는 각 민족이 노역奴役의 강권에 반대하는 고사를 묘사한 것인데, 단결하여 분투하고 국가를 강성하게 하여 인민을 구하려는 사상의 경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1930년-1936년 사이에, 노사는 차례로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의 제로대학齊魯대학과 청도산동대학靑島山東大學에서 가르쳤다.
그 기간에, 그는 제 1 차 국내 혁명전쟁이 실패하고 나서 일본제국주의가 함부로 침략하여 국민당의 반동파와 매국賣國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장편소설 『대명호大明湖』를 창작하여 제남의 인민 및 침략의 고통을 입고 있는 모든 조국의 인민의 분개를 토로했다.
이 소설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공산당 사람의 형상을 묘사했다. 그로부터 4 년 뒤에, 그는 장편소설 『묘성기猫城記』,『이혼離婚』과『우천사전牛天賜傳』을 차례로 창작했다.
또 『흑백리黑白李』와 『미신微神』등을 포괄한 15 부部의 단편소설 안에 있는 단편소설집 『간집赶集』 및 유머시문집 『노사유머시문집』을 출판했다.
1936년에 노사는 직장을 사직하고 저작에 전념했다. 청도에서 일하고 생활한 그 시기는 그의 일생에서 창작이 가장 왕성한 시기 중의 하나였다. 그는 중단편소설 17 편篇을 엮어서 단편집 『영해집영海集』과『합조집蛤藻集』에 수록하였다.
『선민選民』(나중에『문박사文博士』로 제목을 바꿈),『나의 이 일생』,『노우파차老牛破車』와 중국 현대문학사의 장편걸작 『낙타상자駱駝祥子』를 창작했다.
노사는 『낙타상자』라는 창작 작품에 독특한 풍격의 예술적 성취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작품을 구성하면서 엄밀하고 단순하게, 상자祥子가 희망을 가지고 발버둥 치다가, 환멸에 빠지는 줄거리를 그의 모든 동작을 통해서 필봉을 하층사회의 각종 외딴 곳을 펼쳐서 각종 다른 성격의 인물 형상을 묘사해내어, 한 폭의 복잡한 사회 경관을 뒤섞어 놓았다.
상자의 성격은 바로 주위에 있는 인물과 각종 관계를 맺는 중에 충분히 힘 있게 표현되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서술 필법을 활발한 풍격과 정련된 언어를 대량으로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이런 필법은 한편으로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정교하고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작가는 자신이 상자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여 그로부터 자신이 암흑사회에 대한 분노와 항의를 토로하여 작품에서 더욱 큰 예술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1937년에 “칠칠七七” 노구교盧溝橋(금金나라 때에 세워진 북경시의 서남쪽에 있는 영정하永定河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사변事變이 발발하자, 노사는 처자를 버려두고 혼자 무한武漢으로 가서 문예계의 거센 항일抗日 흐름에 투신했다.
1938년에 성립된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에서 노사는 총무부주임을 맡았다. 그 뒤에 또 중경重慶에 가서 “문협文協”에서 힘들게 7년이라는 시간을 견지하며 항일전쟁이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견뎠다.
노사는 열정을 가득 품고 인내심을 가지고 치밀하게 맡은 일을 하여 각 방면의 문예가와 단결하여 공동으로 항전抗戰하는 문예활동을 추진했다. 또 붓을 무기 삼아 여러 문예 형식의 창작을 진행했다.
장편시 ⌜검북편劍北篇⌟은 대고체大鼓體(대고大鼓는 설창 문예의 하나로, 고鼓(북)·판板(박자판)·삼현三弦(삼현금) 등의 반주에 맞춰 운문으로 된 이야기를 연기와 노래로 풀어 나가며, 간혹 대사를 끼워 넣는데, 유행 지역이 비교적 광범위함)로 쓴 것이고, ⌜왕가진王家鎭⌟과⌜충렬도忠烈圖⌟는 경극京劇 형식으로 쓰고, ⌜잔무殘霧⌟,⌜귀거래혜歸去來兮⌟,⌜면자문제面子問題⌟는 화극話劇 형식으로 창작한 것이다.
차례로 단편집 『화차집火車集』,『빈혈집貧血集』과 장편집『화장火葬』을 출판하고, 장편 거작 『사세동당四世同堂』의 『투생偸生』과『황혹惶惑』 2 부部를 완성하고, 동시에 많은 잡문雜文, 산문, 시가詩歌까지 썼다.
항전抗戰에서 승리한 뒤에 1946년에 노사와 조우曹禹는 중국 국민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 활동을 다. 미국에서 여러 번 공개 강연을 했는데, 대양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중국 인민과 중국 문화를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발휘했다.
또 여기서 『사세동당』의 제 3 부『기황饑荒』과 다른 장편소설『고서예인鼓書藝人』을 창작했다. 미국 친구가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데 협조했다. 『사세동당』은 노사가 완성한 규모가 가장 광대한 작품으로 대략 1백만 자에 달한다.
북평의 “소양권小羊圈”이라는 골목 안의 각종 인물, 특히 기씨祁氏 집안의 조손祖孫 4 대代를 중심으로 하여 마두 뒤얽혀 복잡하게 줄거리를 묘사하여 피점령 지구의 힘겹고 비참한 인민의 경험과 아울러 그들의 환상이 파멸된 뒤에 마침내 깨닫고 항전항전을 견지하는 과정을 표현하였다.
일본 침략자의 잔인함과 매국노의 뻔뻔함을 폭로하고, 또 선량하고 유약한 지식인의 고민과 하층 시민의 완강하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심을 써냈다. 노사의 강렬한 애국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정신은 중화민족 전체의 항전抗戰에 웅대한 기념비를 남겨주었다.
1949년 10월에 조국으로 돌아온 노사는 화극話劇 『방진주方珍珠』를 창작했다. 1051년에 또 인민정부가 보통의 시민을 위해 한 일을 『용수구龍須溝』라는 작품으로 창작하여 찬양했다.
이 극을 공연한 뒤에 노사는 북경시정부가 수여하는 “인민예술가”의 영예스런 칭호를 획득했다. 그 뒤에 그는 또 가극歌劇 『소멸세균消滅細菌』,『대가평리大家評理』와 화극話劇 『생일生日』,『춘화추실春華秋實』을 창작했다.
건국 뒤에 정치에 열정이 대단히 고조된 노사는 차례로 중국민간문예연구회의 부이사장副理事長, 북경시문련北京市文聯 주석主席, 화북행정위원회華北行政委員會 위원, 전국문련주석단全國文聯主席團 구성원,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북경시제일이계인대北京市第一二届人大 대표, 전국인민대표대회제일이삼계주석단全國人民代表大會第一二三届主席團 구성원, 전국정협삼계회의全國政協三届會議 상무위원常務委員 등의 직책을 담임했다.
1950년에서 1955년 사이에 노사는 대량의 화극話劇, 경극京劇, 아동극을 창작했다. 그중에서 화극 『차관茶館』은 노사의 화극예술을 최고봉으로 밀어서 중국의 연극예술의 전당에서 눈부신 보배가 되었다.
1961년에서 1962년까지 노사는 자전체소설 『정홍기하正紅旗下』를 저술했는데, 아쉽게도 미완성인 채로 외부의 핍박을 받아 붓을 중단했다.
문혁 중에 많은 선배 애국문예가와 마찬가지로, 노사는 악독한 공격과 박해를 당하고, 1966년에 그는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게 되자, 억울하지만 꾹 참고 있다가 북경의 태평호太平湖에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향년 67 살이었다.
파금巴金
파금巴金(1904년 11월 25일-2005년 10월 17일)은 본명이 이요당李堯棠, 자는 패감芾甘, 필명은 패간佩竿, 여일余一, 왕문혜王文慧 등이고, 본적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이고,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관리 가정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는 집안에 선생을 모시고 공부했다. 오사운동五四運動으로부터 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조류를 받아들였다.1920년-1923년까지 성도成都의 외국어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는데, 진보적인 간행물 『반월半月』의 업무에 참가하고, “균사均士”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반봉건주의 활동을 했다.
1922년에 『시사일보·문학순간文學旬刊』에 『학대받는 사람의 곡성』등의 신시新詩를 발표했다.
1923년에 상해로 갔다가, 얼마 뒤에 남경동남대학부중南京東南大學附中에서 공부하고, 1925년에 졸업하고 나서, 때때로 논문과 번역문을 발표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했다.
1927년에 프랑스로 간 그는 이듬해에 파리에서 중단편소설 『멸망滅亡』을 완성하고, 1929년에 『소설월보小說月報』에 발표하여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1928년 겨울에 귀국하여, 수 년 동안에 많은 저작을 썼다. 주요한 작품으로는 『죽어버린 태양』,『신생新生』,『사정砂丁』,『맹아萌芽』와 유명한 “애정삼부곡愛情三部曲”으로 유명한 『무霧』,『우雨』.『전電』이 있다.
1931년에 『시보時報』에 저명한 장편소설 “격류삼부곡激流三部曲”중의 하나인 『가家』를 연재했는데, 작가의 대표작이고,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1934년에 북경의 『문학계간文學季刊』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가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에 귀국하여 상해에서 문화생활출판사의 편집을 총괄하는 일을 맡아 “문학총간文學叢刊”, “문화생활총간”, “문학소총간文學小叢刊”을 출판했다.
1936년에 근이靳以와 『문계월간文季月刊』을 창립하고, 그 해에 노신 등과 차례로 『중국문예공작자선언中國文藝工作者宣言』과 『문예계의 동인同人은 단결하여 외침을 막고 언론의 자유를 선포한다』를 연명聯名으로 발표했다.
항일전쟁 기간에 상해, 광주廣州, 계림桂林, 중경重慶 등지를 전전하며 주간週刊『날함呐喊』(나중에 『봉화烽火』로 개칭함)의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고, 매 회마다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의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의 이사理事를 담임했다.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장편소설『춘春』과 『추秋』를 출판하여, “격류삼부곡”을 완성했다.
1940년-1945년 사이에 “항적삼부곡抗敵三部曲”『화火』를 저작하였다. 항전抗戰 후기에 중편소설 『게원憩園』과 『제사병실第四病室』을 창작했다.
1946년에 장편소설 『한야寒夜』를 완성했다. 단편소설『신神』과『귀鬼』로 이름을 날렸다. 항전이 승리한 뒤에 번역 작업을 하고 편집과 출판에 종사했다.
1949년에 제1차 전국문대회全國文代會에 나가 문련상위文聯常委에 당선되었다. 1950년에 상해시 문련文聯 부주석을 담임하였다.
두 번이나 조선朝鮮 전선前線을 방문하고, 두 권의 통신집通迅集 『영웅들 사이에서 생활하며』와『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을 엮었다.
1960년에 중국문련中國文聯 부주석副主席과 중국작협부주석中國作協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문혁文革” 중에 잔혹한 박해를 받기도 했다.
1978년부터 홍콩 『대공보大公報』에 산문『수상록隨想錄』을 연재했다. 그의 제의로, 1985년에 중국현대문학관이 건립되었다.
그의 저작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1982년-1985년 사이에 이탈리아의 단정但丁(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년-1321년)) 국제영예장國際榮譽獎, 프랑스 명예훈장, 홍콩 중문대학中文大學 명예문학박사, 미국 문학예술연구원 명예 아카데미 회원(학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들에게 해당 학계에서 주는 높은 명예 칭호)를 연속적으로 획득하고, 중국작가협회 주석과, 전국문련 부주석을 담임했다.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
약칭 “좌련左聯”이라고 하는, 1928년-1929년 사이에 혁명문학의 논쟁은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전파하여 혁명작가의 사상적 이론의 수준을 높였다.
중국좌익작가연맹은 성립대회를 1930년 3월 2일에 열었다. 국민당정부는 즉각 성립된 “좌련”을 진압하여 없애려고 좌련 조직의 금지를 명하고, 좌련의 구성원에게 지명수배를 내리고, 각종 법령 조례를 반포하고, 서점을 봉쇄하고 간행물과 서적을 조사하여 금지시키고, 원고를 검열하고, 구류하여 고문하고, 비밀리에 혁명문예 종사자를 살육하는 등등의 박해를 가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좌련오열사左聯五烈士”라고 부르는 이위삼李偉森(이구실李求實, 좌익문화종사자, 좌련의 구성원이 아님), 유석柔石, 호야빈胡也頻, 은부殷夫, 풍갱馮鏗은 바로 1931년 2월 7일에 상해용화국민당 경비사령부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그러나 좌련은 여전히 완강하게 전투하여 상해총맹上海總盟 외에 차례로 북평좌련北平左聯(북방좌련이라고도 부름), 동경분맹東京分盟, 천진지부 및 보정소조保定小組, 광주소조, 남경소조, 무한소조 등의 지구 조직을 건립했다.
좌련의 참가 구성원도 문화종사자에 국한하여, 교사, 학생, 직원, 노동자에까지 확대하여 연맹의 구성원은 총 수백 명에 달하였다.
좌련이 차례로 창설한 기관간행물로는 『맹아월간萌芽月刊』,『탁황자拓荒者』(이간二刊으로 묶어서 함),『파이저산巴爾底山』,『세계문화』,『전초前哨』(제 2 기에 『문학도보文學導報』로 개명함),『북두北斗』,『십자가두十字街頭』,『문학』,『문예군중』,『문학월보』,『문학신지文學新地』등등이 있다.
그리고 비밀리에 『비서처소식秘書處消息』과 『문학생활』까지 발행했다. 동시에 『시사신보時事新報』의 특별페이지 『청광靑光』에 『매주문학每週文學』을 실었다.
그밖에 외국간행물로는 『문예신문文藝新聞』이 있다. 북평좌련 기관의 간행물로는 『문학잡지文學雜志』와 『문예월보文藝月報』등이 있다.
동경분맹에서는 『동류東流』,『신시가新詩歌』,『잡문雜文』(나중에 『질문質文』으로 개명함)을 운영했다.
좌련연맹 구성원이 개인의 명의로 편집한 간행물로는 엽자葉紫와 진기하陳企霞의『무명문예無名文藝』, 『문예文藝』는 주문周文과 유단劉丹, 장계동莊啓東과 진군치陳君治의『춘광春光』, 『중화일보中華日報』의 특별페이지 『동향動向』은 섭감노聶紺弩가 하고, 노신魯迅이 했다가 나중에 황원黃源이 한 『역문譯文』이 있고, 『태백太白』은 진망도陳望道, 정군평鄭君平, 즉 정백기鄭伯奇의 『신소설新小說』등등이 있다. 좌련을 영도한 중국시가회의 간행물은 『신시가新詩歌』이다.
좌련에서는 스스로가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실천하도록 지도했는데, 노신魯迅, 구추백瞿秋白, 풍설봉馮雪峰 등은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선전하는데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좌련은 시작할 때부터 이론비평 업무를 중시하여, 그 구성원은 맑스주의 이론을 무기로 하여, “신월파新月派”, “민족주의 문예운동”, “자유인自由人”, “제삼종인第三種人”및“논어파論語派”등의 자산계급의 문예 관점에 대해 비평을 진행했다.
국민당 당국의 반동문예정책에 대해 비판과 투쟁을 진행했다. 그들은 문예의 대중화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여, 차례로 『대중문예』,『탁황자拓荒者』,『문학도보』,『북두』,『문학』,『문학월보』와 아울러 기타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열렬하게 토론을 전개하여 명성과 위세가 있는 문예대중화운동을 형성했다.
좌련을 영도하는 좌익문예운동은 창작 방면에서 거대한 성과를 취득했다. 혁명작가는 좌련의 간행물과 기타의 진보적인 간행물에 대량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노신의 『고사신편故事新篇』과 아울러 그와 요추백의 잡문, 모순茅盾의 『자야子夜』,『임가포자林家鋪子』,『춘잠春蠶』, 장광자蔣光慈의 『포효료咆哮了의 토지』, 정령丁玲, 장천익張天翼과 엽자葉紫 등의 소설, 전한田漢, 홍심洪深, 하연夏衍 등의 희곡, 중국시가회의 여러 시인의 시가를 모두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새롭게 개발하여 좌익문예의 실적을 뚜렷하게 보여주어 광범하게 영향을 주었다.
좌련은 배양하여 사정沙汀, 애무艾蕪, 엽자葉紫, 주문周文, 장목량蔣牧良, 애청艾靑, 포풍蒲風, 섭감노聶甘弩, 서무용徐懋庸 등의 많은 문학 신인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문단에 생기발랄한 작품을 많이 내놓으며 30 년대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창작 방면의 거대한 성과로는 많은 새로운 사회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제재題材와 주제가 출현한 것이다. 혁명자는 백색白色 공포 아래에서 매우 용감하게 투쟁하여,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 맹렬한 반항을 묘사한 내용이 허다했다.
많은 작가들이 농촌생활과 투쟁의 제재를 창작 시야에 담아 진실하고 생동하게 빈곤한 농촌의 파탄된 모습을 예술적인 화폭으로 그려낸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농민의 각성과 투쟁을 뚜렷하게 확대시켜 반영하였다.
그밖에, 30년대의 출렁이고 불안한 도시 생활도 문학 작품 중에 진실하고 집중적으로 반영하게 되었다. 모든 작품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시대의 색채를 체현해 내었다.
당시는 중국공산당 내에 좌경左傾 노선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좌련左聯은 업무 중에는 교조주의敎條主義와 종파주의宗派主義의 잘못된 경향이 있었다. 창작을 반영하면서 적지 않은 작품에 비교적 농후한 소자산계급의 의식이 섞여 있었다.
일부 작품에는 공식화公式化와 개념화의 약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노신은 적절하게 딱 들어맞는 비평을 한 적이 있다. 1936년 봄에 항일抗日로 멸망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구하려는 운동에 적응하려는 새로운 형세를 위해서, 좌련은 스스로 해산하였다.
좌련은 국민당정부의 잔혹한 압박 아래에서 6 년이 넘게 완강하게 전투하여 국민당 당국의 문화의 “위초圍剿”(포위하여 토벌함)를 분쇄하고, 힘 있게 중앙소구中央蘇區가 벌이는 군사상의 반위초反圍剿 투쟁에 협력했다.
좌련은 완강한 혁명문화대군 한 부대를 양성하여, 항일전쟁 시기, 해방전쟁 시기와 심지어 건국 이후의 인민문예사업에 대비할 핵심 인재를 준비했다. 좌련은 인민대중의 혁명문예 건설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해냈다.
모순茅盾(1896년-1981년)의 본명은 덕홍德鴻, 자는 안빙雁冰이고, 절강성浙江省 동향현桐鄕縣 오진烏鎭이다.
국내외에서 숭고한 명성과 명망을 누린 그는 중국 현대진보문화의 선구자이자, 위대한 혁명문학가와 중국공산당에서 가장 이르게 당원이 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노신, 곽말약과 함께 중국의 혁명문예와 문화운동을 위해 기반을 다졌다. 기나긴 60여년의 문학활동 중에서, 부지런하게 창작을 견지하고, 용감하게 적에 대적하며 시종 해이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인민을 찬송하고 혁명을 노래하고 구중국의 암흑 세력을 편달하여 중국인민의 해방을 쟁취하고 공산주의의 위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거대한 정력을 바쳐서 탁월한 업적을 수립했다.
무산계급문학無産階級文學
무산계급 문학운동의 사단社團이 앞장서서 제창되기 시작한 것은, 주로 후기後期의 창조사創造社와 새로 성립한 태양사太陽社이다.
전자는 문예성 간행물 『창조월간』이고, 새로 창건된 이론성 간행물 위주의 『문화비판』이 주된 진지陣地였는데, 구성원으로는 곽말약郭沫若, 성방오成仿吾, 이초리李初梨, 풍내초馮乃超, 팽강彭康 등이고; 후자는 장광자蔣光慈, 맹초孟超 등이 조직하여, 『태양월간太陽月刊』을 창건하여 간행했다.
그밖에 창조사와 같은 전선戰線에 있으면서 혁명문학을 제창한 『아문월간我們月刊』과 『홍황洪荒』 등이 있다.
1928년 초에 『창조월간』에 성방오의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에 이르다』가 발표되고, 『문화비판』에는 풍내초의 『예술과 사회생활』, 이초리의 『어떻게 혁명문학을 건설하나?』를 발표하고, 『태양월간』에는 장광자의 『혁명문학에 관하여』등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다른 방면에서 무산계급문학의 기본적인 요구를 찬술하고, 또 서로 호응하여 운동의 위엄과 기세를 조성했다.
이어서, 곽말약이 『탁자卓子의 무도舞蹈』를 발표하고, 다른 작가들도 계속해서 글을 발표하여 무산계급문학을 선도하는 논쟁에 참가했다.
신월사新月社 : 문일다聞一多
대다수의 성원이 영국과 미국 유학생으로, 1926년 4월에 『신보시표晨報詩표』를 창간했다.
창작 방면의 주된 인물은 문일다聞一多와 서지마徐志摩이다. 후기 활동은 1928년에 『신월新月』 월간을 창간하면서 시작했다.
문일다(1899년-1946년)는 서방 시가詩歌의 영향을 깊이 받은 애국주의로 이름난 시인인데, 동시에 시가 방면의 이론비평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의 율격』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신시新詩가 “음악적인 미美(음절音節)과 회화적인 미(사조詞藻), 건축의 미(절의 균형과 구句의 균제均齊의 잡힘)”을 마땅히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시의 무운無韻”과 “자연스런 음절”의 의견에 대해 비평하였다.
그는 외국의 자산계급 교수 한 사람이 한 말을 인용했다:
“시인이 그들은 진정으로 율격을 속박하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기꺼이 족쇄를 차고 춤을 추는데”, 동시에 표현하기를, “아마도 패기가 있는 작가일수록 족쇄를 차고 춤을 출수록 더욱 통쾌하게 더 잘 출 수 있자”라고 말했다.
그의 시가 이론은 약간의 합리적인 요소가 있어, 예를 들면 “신시新詩의 격식은 체體를 재단하는 것과 같다” 등이나, 그러나 예술적인 관점은 도리어 형식주의적이고, 사상의 기반에는 농후한 유심주의唯心主義(예를 들면 자연과 예술적 관계를 전도顚倒하여,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했다. “유희본능설遊戱本能說”로 예술의 기원을 해석하는 등)가 있다.
이런 시가이론은 작가가 서구자산계급의 탐미파의 영향을 깊이 받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가이론은 과다하게 형식과 기교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고 있지만, 완전히 리듬과 운율을 중요시하지 않아, 신시가 지나치게 산문화되는 시풍으로 볼 때는, 오히려 약간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고 하겠다. 시의 율격의 주장에 관해서는 시인은 창작에 실험과 실천한 바 있다.
문일다의 시가 창작은 『홍촉紅燭』과 『사수死水』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두 시집은 1923년과 1928년에 차례로 출판되었다. 『홍촉』 안에 있는 작품은 고국을 떠나 지은『고안편孤雁篇』과 『홍두편紅豆편』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는 거의 1920년에서 1922년 초까지 시인인 청화대학에서 공부한 기간에 지은 작품이다.
이런 초기 시가에서 문일다가 청년시기에 이미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군벌이 혼전混戰하는 국면에 대해 무한히 증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캄캄한 현실이 바로 짙게 낀 안개에 휩싸인 아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 줄기 큰 강과 같고, “진眞이 없고, 미美가 없이, 선善도 없는데, 더구나 그곳에서 광명을 찾을 것인가!”(『서안西岸』).
그러므로 시인은 1922년에 뱃속 가득히 애국의 열정을 품고 서방문화의 환상을 추구하여 미국으로 미술을 공부하러 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그는 절실하게 중국인민이 그곳에서 받고 있는 멸시와 모욕을 체험했다. 그는 1923년에 집안 식구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썼다:
‘저는 나라가 있는 국민으로, 오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제가 어찌 그들과 같은 미국사람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을 무기로 살인하는 그들을 광명정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우리 국민을 천시하는 것을 한 마디 말로는 다 못할 정도입니다.’
그는 이런 분개한 마음을 시로 쓴 ⌜고안孤雁⌟,⌜태양음太陽吟⌟, ⌜억국憶菊⌟ 등의 시편은 시인이 외국에서 애국과 향수에 대해 쓴 이름난 시이다.
다른 또 하나의 시집 『사수死水』에는 모두 28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인이 1925년에 귀국한 뒤에 쓴 것으로 수량은 『홍촉紅燭』보다 적으나, 독자에게 준 영향은 아주 크다.
이것은 시집 『사수』 안에 들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정야靜夜』, 『발현發現』,『사수』등은, 그것들이 현실생활의 인식과 제재題材 보급의 방면이든, 또 시인의 사상적 심도나 예술적 표현 능력이든 모두 『홍촉』안에 있는 작품보다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건대, 애국주의의 열정은 마치 한 줄기의 붉은 선을 그은 것처럼 이 두 권의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세 가지가 내용에 스며있는데, 첫째는 제국주의에 대한 미움; 둘째는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중화민족의 열애와 그리움; 셋째는 당시 국내 군벌의 혼전과 도탄에 빠진 인민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느낀 실망과 우려였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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