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항전문예운동抗戰文藝運動의 발흥勃興

一字師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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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抗戰 전기前期의 문예운동 항전문예운동抗戰文藝運動의 발흥勃興

 

                                                 图片来源 | 扔掉历史书!老传单里看最真实的"五四"青年|画事

 

(1) 항전문예운동抗戰文藝運動의 발흥勃興

항전문예운동의 흥기興起는 민족의 해방투쟁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고, 또 당이 항일 문예 통일전선을 광범하게 형성하여 영도한 것과 떼어놓을 수 없고,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간칭簡称 “문협文協”)이 성립된 이후에 조직하여 영도한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적에게 상해와 남경 등지가 함락되자, 1938년 초에 많은 진보적인 문예작가가 분분하게 무한武漢으로 모여들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신 형세 아래, 주은래周恩來는 무한에서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副副長을 담임했다.

 

곽말약郭沫若은 항적抗敵이 폭발한 뒤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이때 상해에서 무한에 와서 정치부 제삼청第三廳의 조직을 기획하고 준비하여 항전의 문화선전 업무를 책임졌다.

 

당의 영도와 지지 아래, “문협”은 그해 3월 27일에 한구漢口에서 성립되었다. 대회가 성립되어 선언을 거쳐 전국작가통신망과 통속문예공작위원회를 기획하고 조성하는 등의 제의를 통해서 곽말약, 모순茅循, 파금巴金, 노사老舍, 하연夏衍, 정진봉鄭振鋒 등 45 명의 이사理事를 선출하고, 주은래는 명예이사가 되었다.

 

“문협”은 시작하자마자 그 성질性質과 임무를 『발기취지發起趣旨』에서 명백하게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문예의 항전 업무가 중대한 것을 느끼고, 사방에 흩어져 있는 문예종사자가 모여서 단결하여 공동으로 민족해방의 위업에 참가가 필요합니다. ..... 단결하여서, 전선에서 싸우는 전사처럼 그들의 창槍과 똑같이 우리는 붓으로 민중에게 발동을 걸어서 조국을 지미고 침략한 도적을 쳐부수어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민족의 운명과 앞으로의 문예의 운명을 위해 우리의 문예전사가 최대로 역량을 발휘하여 중화민족의 문예의 위대한 광명을 전 세계와 전 인류에게 비출 것입니다......’

 

항전문예운동 중에 『칠월七月』에 대한 얘기가 당연히 나온다. 항전이 폭발한 뒤에 호풍胡風 등은 곧 상해에서 『칠월』주간週刊을 편집하여, 즉시 무한武漢으로 옮겨서. 1937년 10월 16일에 다시 『칠월』을 격주간으로 창립했다.

 

1939년 7월에 전쟁 때문에 또 중경重慶에서 『칠월』월간으로 바꿔서 계속 출판했다. 『칠월』은 “반동인잡지半同人雜志”인데, 이 시기의 중요한 간행물이기도 했다.

 

애청艾靑, 전간田間, 구동평丘東平, 조백曹白, 아농阿壟(S·M) 등의 작가는 간행물의 중요한 기고자로, 그들은 항일전쟁 기간에 자신의 붓을 휘둘러서 중요한 성과를 냈다. 특히 시가詩歌에서는 『칠월』이 가장 활약이 뛰어났다.

 

시 문단의 신인 신풍新風

30 년대의 시 문단은 현실주의 창작 원칙을 견지하면서 항일반제抗日反帝의 대중화가 된 시가는 1932년 9월에 상해에 중국시가회를 성립했다.

 

그것은 좌련左聯의 영도 하에 일부 진보적인 시인으로 조성된 군중 단체인데, 발기인으로는 목목천穆木天, 포풍蒲風, 임균任鈞, 양소楊騷 등이 있다.

 

나중에 북평北平, 광주廣州, 일본 동경 등지에서 잇달아 분회分會와 간행물을 출판했는데, 많은 시인이 단결하였다.

 

당시 성과가 비교적 큰 사람은 포풍이다. 그는 1911년에 광동성廣東省 매현梅縣에서 출생하고, 1943년에 환남皖南에서 병사했다.

 

그는 신시가新詩歌의 적극적인 제창자이자 실천자이고, 다산多産한 작가이기도 한데, 『망망야茫茫夜』,『생활生活』,『강철의 노래』,『6월의 유화流火』,『요람가요람가』등의 시집을 출판하고, 항전抗戰 이후에는 『가련한 벌레』와 『항전삼부곡抗戰三部曲』 등을 창작했다.

 

포풍 시가의 초대 특징은 시종 현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시가의 문학적 주장을 따르며 창작을 했다. 그의 시의 내용은 주로 두 가지 방면이다.

 

첫째, 관료 지주의 잔혹한 압박과 삭탈 아래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농민을 묘사하여 저항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9.18”이후의 전국 인민이 항일抗日한 애국주의의 뜨거운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30년대의 시 문단에서 장극가臧克家는 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시인이다. 1905년에 출생한 그는 첫 시집 『낙인烙印』을 1933년에 출판했다.

 

시인 문일다聞一多는 『낙인』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극가克家는 작품 ⌜생활生活⌟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되는대로 즐겨서는 안 되고, 이것은 생활이다.’이것은 그의 전집全集에 하나의 안어案語(편집인 혹은 글쓴이가 문장에 붙이는 부연 설명)가 아닌데, 극가의 시는 바로 이렇기.... 때문이다. 극가의 시는 단어 하나에도 최고도의 진정한 생활이 없는 것이 없다는 데 의의가 있다.”

 

모순茅盾도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금의 청년 시인 중에서 『낙인』의 작가가 아마도 가장 우수한 시인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듬해 시인은 또 시집 『죄악의 검은손』을 출판하여 큰 충격을 주었는데, 신흥新興의 좌익혁명시가에 대한 지지로 시 문단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국무산계급혁명문학과 전구前驅의 혈血

1931년 2월 7일에 국민당반동파國民黨反動派가 상해 용화龍華에서 비밀리에 24 명의 혁명가를 살해했는데, 그 중에 이위삼李偉森, 유석柔石, 호야빈胡也頻, 은부殷夫, 풍갱馮鏗 등의 5 명의 좌익 구성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서 홍영비洪靈菲, 응수인應修人, 반막화潘漠華 등의 혁명작가도 잇달아 살해당했다. 그들은 선혈로 중국무산계급혁명문학의 역사적인 첫 페이지를 장식했는데, “영원히 적의 비열한 흉폭함을 현시하고 우리의 부단한 투쟁을 계시한 것이다.”

 

이위삼 열사는 주로 혁명의 실제적인 업무에 종사했는데, 그가 쓴 것은 대부분 문화사상투쟁의 논문과 잡문이다. 다른 열사들은 일찍부터 문예를 애호하여 문예작품을 써왔는데, 혁명에 참가한 뒤로는 개인적인 취미와 혁명투쟁을 결합하여 붓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은 모두 문예작품을 세상에 발표하여 정도는 다르나 적극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은부는 일명 백망白莽이고, 1909년 생으로 절강성浙江省 상산현象山縣 사람이다. 원래의 성씨는 서徐씨, 본명은 백정柏庭이다.

 

⌜꿈속의 용화龍華⌟,⌜봄날의 가두街頭⌟,⌜도시의 황혼⌟ 등의 시 중에서, 그는 빈부가 대립하고 있는 상해 사회에 대한 분노를 폭로하여, 혁명의 승리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다.

 

겨우 29 살로 희생된 유석은 본명이 조평복趙平復이고, 1902년에 절강성 녕해현寧海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1923년에 창작을 시작했다.

 

1930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좌련左聯을 구체적으로 영도하는 업무에 참가했는데, 집행위원, 상무위원常務委員, 편집부주임 등의 직무를 담임하고, 또 좌련의 대표 자격으로 전국소비에트구역대표회의에 참가했다.

 

호야빈은 1903년에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성내城內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에 금포金鋪의 도제徒弟를 했다. 1924년에 창작을 시작했다.

 

1930년에 좌련에 참가하고, 집행위원과 공농병통신위원회工農兵通訊委員會 주석 등의 직무를 맡고, 그 해에 중국공산당에 참가했다.

 

호야빈의 예술 재능은 다방면인데, 생산량도 매우 많다. 그는 시가詩歌, 극본, 소설을 썼는데, 그의 주된 성과는 소설에 있다.

 

단편소설로는 『성도聖徒』,『활주자活珠子』,『어디로 가나』,『목장牧場에서』,『세 사람의 통일되지 않는 인물』 등이 있다.

 

장편소설로는 『모스크바에 가다』,『광명은 우리의 앞에 있다』가 있고, 시가로는 『야빈시선也頻詩選』, 극본으로는『귀鬼와 인심人心』과『다른 사람의 행복』등이 있다.

 

조기早期 무산계급無産階級의 혁명문학

조기의 무산계급無産階級의 혁명문학 중에서 장광자蔣光慈는 주의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이다.

 

장광자의 본명은 장광적蔣光赤이고, 또 장협승蔣俠僧이라고도 하는데, 1901년 생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사운동五四運動 때, 그는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상해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그 후에 소련蘇聯에 학습하러 파견되었다가, 1922년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향했다.

 

소련 유학 시절에 창작을 시작하여, 1924년에 귀국한 뒤에 더욱 창작에 노력하였다. 1927년에 “4월 12일 정변”이후에 장광자는 전행촌錢杏邨과 당의 영도 하에 태양사太陽社를 조직하고 『태양월간』,『시대문예』,『신류월보新流月報』,『척황자拓荒者』등을 차례로 간행하여 혁명문학을 고취했다.

 

동시에 그는 또 소아문학蘇俄문학의 소개와 번역하는 일에도 종사했다. 1930년에 그는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여, 영도領導하는 업무를 담임했다. 1931년 8월에 병으로 상해에서 30 살의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1920년-1927년 사이는 장광자의 창작 제 1 시기이다. 이 기간에 그는 시집 『신몽新夢』과『애중국哀中國』을 출판하고, 또 소설 『소년표박자少年漂泊者』,『압록강상鴨綠江狀』,『단고당短褲黨』등을 창작했다.

 

“시대의 충실한 아들”이자 “폭풍우를 노래하는 사람”의 자세로 일약 문단을 차지하고, 중국무산계급문학의 탐색과 건립에 아주 귀한 공헌을 했다.

 

중국 연극에 영향을 끼친 조우曹禺

조우曹禺(1910년-1996년)는 본적이 호북성湖北省 잠강潛江이고, 천진天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만가보萬家寶, 자는 소석小石인데, 청화淸華에서 공부할 때 “소보패아小寶貝兒”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조우”는 그가 1926년에 소설을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한 필명(그의 성씨 “만萬”의 번체자繁體字가 “초자두草字頭”와 “우禺”자로 되어 있는데, 초자두와 “조曹”의 독음讀音이므로 “조우曹禺”가 즉 “만萬”이 됨)이다.

 

조우는 “문명희文明戱(화극話劇인데, 20세기 초에 상해 일대에서 시작한 대사를 위조로 공연하는 신식 연극)의 관중이고, 애미극愛美劇의 아마추어 배우이며, 좌익극의 영향을 자주 받는 극작가이다(손경승孫慶升: 『조우론曹禺論』, 북경대학출판사, 1986년).

 

이 말은 대체로 조우의 연극인생을 개괄하고 있다. 조우는 본성本姓인 만萬의 번체繁體 “만萬”을 뜯으면 곧 초우草禺가 되는데, 초草 글자는 취하지 않고 조曹를 취하여 조우曹禺라는 이름을 취했다.

 

조우를 문명희 관중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은 모친(계모)의 품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조우의 계모가 연극을 좋아하여, 그는 어려서부터 계모와 경극, 지방극과 문명희를 많이 관람했다.

 

조우는 애미극의 아마추어 배우이지만, 그가 아마추어 배우의 역사歷史가 된 것은, 즉 과거에 “애미극”이 출현하기 전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1915년에 조우가 다섯 살 때부터 사촌형 유기를 가정교사로 삼아 시와 경전을 배웠는데, 정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1920년에 사숙 학습을 마치고, 천진天津의 “한영역학관漢英譯學館”이라는 은호銀號(규모가 비교적 큰 개인이 경영하는 금융기관의 명칭)에 들어가서 세익스피어 등 외국작가의 작품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애미극”으로 여기는 운동이 출현한 것은 1921년 이후이다.

 

1922년에 남개중학南開中學에 2 학년으로 들어가서, 근이斳以(장방서章方叙)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1923년에 신문학 작품 중에서, 특히 노신魯迅의 『눌함吶喊』과 곽말약郭沫若의 ⌜여신女神⌟에 열중했는데, 그는 당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신⌟은 오히려 그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925년에 15 살이 된 조우는 정식으로 냠개중학문학회와 남개신극단南開新劇團(이것은 일찍이 중국의 화극계話劇界에 있던 극단 중의 하나로, 남개학교의 창시자 엄범손嚴范孫과 장백령張伯苓이 1909년에 창건하여, 주은래周恩來는 그 중에서 활약하던 사람이다)에 가입하여 활동하여 그의 연극 인생을 시작하였다.

 

1926년에 천진 『용보庸報』의 부간副刊『현배玄背』에 소설 『오늘 밤은 어디에서 술이 깨나?』를 연재하며 필명 “조우曹禺”를 사용했다.

 

나중에 계속해서 『남개주간南開週刊』과 『국문주보國聞週報』 등의 신문에 시가, 잡문 및 모파상의 번역소설 등 여러 편을 발표했다.

 

그 시 작품 ⌜4 월 말, 나는 한 아름다운 행인行人을 배웅했다⌟과 ⌜남풍곡南風曲⌟은 곽말약의 ⌜여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1927년에 그는 정서림丁西林, 전한田漢과 역복생易卜生의 극작의 무대연습에 참가했다.

 

1934년 이후의 일이지만 조우는 좌익연극운동의 영향을 준 작가로 1928년에 조우는 연극『남개쌍주南開双周』의 편집을 맡은 후에 곧 『뇌우雷雨』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두 차례의 의학대학 시험 응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에, 조우는 특출한 성적으로 남개중학을 졸업하고, 무시험으로 남개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갔지만, 그는 정치경제학 커리큘럼에 흥미가 없어서, 1930년 여름방학에 특별히 북경으로 가서 청화대학淸華大學에 등록하였다.

 

9월에 조우는 여덟 명의 동창과 함께 청화대학에 전입하여 서양문학과 2 학년으로 들어가 서방문학 특히 연극문학을 광범하게 섭렵하고, 때때로 파금巴金, 근이斳以와​ 경극을 보러 갔다.

 

연말에는 전종서錢鐘書 등과 함께 『청화주간淸華週刊』을 편집했다.

 

1933년에 23 살이 된 조우는 장장 5 년을 구상한 극본 『뇌우』와 졸업논문 『논역복생論易卜生』을 쓰기 시작했다. 조우는 청화대학의 유미고시留美考試에 참가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졸업 뒤에 보정명덕중학保定明德中學에 영어 교사에 임명되었다. 연말에 병이 나서 북경으로 돌아왔다가, 완쾌된 뒤에 청화대대학원에서 연극을 연구했다.

 

1934년 1월에 정진탁鄭振鐸이 주편主編을 맡고, 파금과 근이가 편집하는 『문학계간文學季刊』을 창간하고, 파금은 근이가 있는 곳에서 『뇌우』를 보고난 뒤에 즉각 발표하라고 주장하여, 7월에 『뇌우』를 『문학계간』제 1 권卷 제 3 기期에 발표했다.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으나 일본의 중국유학생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1935년에 동경제국상과대학의 중국학생 형진탁邢振鐸이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유학생극단의 중화화극동호회中華話劇同好會가 4월 27일에 동경東京 신전일교神田一橋 강당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곽말약이 보고서 즉각 『조우曹禺의 뇌우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서 크게 칭찬을 했다.

 

8월 17일에 천진시립사범학교 고송극단孤松劇團이 중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연(제 3 번째의 공연이기도 함)하여, 즉각 파문을 일으켜 저명한 경파京波 극작가 겸 평론가인 유서위劉西渭(이건오李健吾)는『뇌우』에 관해 “나오자마자 사람을 감동시키는 연극이고, 위대한 성질을 구비한 장편 연극이다”라고 논평했다.

 

1934년 9월에 초청에 응해서 천진으로 가 하북여자사범학교에서 교수에 임명되었다. 1936년 5월에 파금 등이 격려하고 재촉하여 『일출日出』창작을 시작하여, 낮에는 여자사범대에서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창작에 몰두하여, 6월-9월 사이에 『문계월간문계월간』제 1-4기에 연재했다.

 

1936년에 조우는 2 부 작품 『일출』을 아직 쓰지 않았을 때, 『뇌우』 즉 『조우연극집』(제 1종種)을 파금이 주관하는 상해문화생활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로 인해 『일출』은 파금의 기대는 물론이고, 널리 문단의 주시를 받았다. 『일출』을 발표한 뒤에 소건蕭乾이 주관하는 천진의 『대공보大公報·문예文藝』의 특별란에 초대되어 당시의 문단의 각종 유파의 거의 모든 대가大家, 모순茅盾, 파금, 엽성도葉聖陶, 심종문沈從文, 근이斳以, 이광전李廣田, 주광잠朱光潛, 양강楊剛, 황매荒煤와 연경대학燕京大學 서양문학과 주임으로 “중국통中國通”인 사적극謝迪克 등을 포함하여 두 차례나 집단 토론을 했는데,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의 극본이 전체 평론계를 이처럼 신속하게 군중을 동원한 것은 중국의 화극사話劇史 내지는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도 처음이었다.

 

1936년 8월에 응국립희극학교應國立戱劇學校 교장 여상원余上沅의 초대로 남경으로 가서 교수를 맡아 “극작劇作”, “서양연극”과 “현대연극과 연극비평” 등의 과목을 강의했다.

 

11월에 남경南京에서 화극話劇 『도금鍍金』을 연출했다. 1937년 4월에서 8월까지 『원야原野』를 근이斳以가 편집을 주관하는 『문총文叢』제 1 권 제 2-5기에 연재했다.

 

1938년 초에 연극학교가 중경重慶으로 옮겼다. 10월에 송지적宋之的과 합작으로 『전민총동원全民總動員』을 개편改編했다. 원극原劇은 송지적, 진황매陳荒煤, 나봉羅熢, 서군舒群이 집체창작集體創作한 『총동원總動員』인데, 공연한 그 달에 중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1939년 봄에 학교를 강안江安으로 옮겼다. 여름 방학에 『태변蛻變』을 창작했다. 늦여름에 곤명昆明에 가서 『원야』와 『흑자이십팔黑字二十八』즉 『전민총동원』을 연출했다.

 

초겨울에 연극학교 선생과 학생을 인솔하여 중경으로 가서 『태변』을 연출했는데, 이를 관람한 장개석蔣介石이 공연 금지령을 내렸다.

 

1940년 가을에 『북경인北京人』창작을 시작하여 다음 해에 공연했다. 1942년 초에 연극학교 교직을 사직하고, 여름에 중경 당가타唐家沱에 가서 파금의 『가家』를 개편改編했다.

 

1943년 8월에 역사극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을 창작하기 위해 친구와 서북으로 여행 갔다가 중경으로 돌아온 뒤에, 그 여행의 감상을 대후방大後方(중일 전쟁 때 일본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중국의 서남과 서북 지역) 의 민족자본가와 관료자본가의 모순을 표현한 『교橋』를 창작하였다.

 

1946년 노사老舍와 동시에 미국국무원의 초청을 받아 상해를 거쳐 미국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두 차례나 독일의 저명한 극작가 포채희특布菜希特과 회견했다.

 

1947년에 상해로 돌아왔는데, 그 뒤에 상해문화영업공사上海文華營業公司에 들어가 서 각색과 연출을 맡아 영화각본 『염양천艶陽天』을 쓰고 감독도 맡았다.

 

1948년 말에 홍콩에 가서, 1949년 초에 중공지하당中共地下黨의 안배로 연태烟台를 거쳐서 북평北平에 도착했다.

 

199년 7월에 제 1차 문대회文代會에 참가했다. 1950년 중앙연극학원 부원장을 맡고, 1951년에 『조우선집曹禺選集』을 편집하고, 『뇌우』,『일출』,『북경인』을 대량으로 수정했다.

 

그 해에 『극본劇本』과『인민문학』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1952년 6 월에 북경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전적으로 화극을 공연하는 국가 극원)이 성립되자, 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에 한 지식인의 사상을 개조하는 것을 주제로 한 극본 『명랑明朗한 하늘』의 소재를 수집하여, 1954년에 창작을 시작하고, 1956년에 “제1차전국화극관마연출”(관마觀摩는 주로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설의 장점이나 경험을 교류하고 배울 목적으로 보는 것)에서 극본, 감독, 연출에 일등상을 획득했다.

 

1956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60년에 매천梅阡과 합작으로 역사극 『와신상담臥薪嘗膽』(나중에 『담검편膽劍編』으로 개명함)을 창작하면서, 또 극중에서 약간의 사료史料 문제를 심종문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는데, 심종문은 전국시기戰國時期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각 방면의 사회적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한 장문의 회신을 보내주었고, 나중에는 이 연출에 수정에 대한 의견도 제기해주었다.

 

1962년 8월에 북대하北戴河(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島市 서남쪽에 있는 휴양지)에서 여름휴가 기간에 『왕소군王昭君』의 창작을 개시했다. 문혁기간에 규투糾鬪되어 북경인예극단北京人藝劇團의 기숙사 접수처 일을 하였다.

 

1973년에 국무원총리 주은래主恩來가 친히 관심을 가져 주어서 북경화극단에서 일하도록 배치되었다.

 

1975년에 제4차 인대人大(인민대표회의 약칭)에 참가하였다. 1978년에 북경화극단이 “북경인민예술극원”으로 원래의 명칭을 회복하자, 다시 원장을 맡았다. 그해 8월에 『왕소군』을 창작하기 위해 신강新疆으로 가서 초고를 완성하여, 『인민문학』제 11 기期에 실었다. 1996년 12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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