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의 허구적 구상인 "대관원(大觀園)" 위치에 대한 여러가지 논쟁
(一) 홍루몽의 대관원은 어디 있는가?
홍루몽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대관원(大觀園)의 모델이 된 건물의 소재지가 어디인지에 대하여도 학설이 많이 나뉘고 있다. 크게 나누면 북경이라는 설과 남경(또는 그 주변)이라는 설이 있고, 북경이라는 설에는 공왕부(恭王府)라는 설이 대표적이고 남경이라는 설에는 수원(隨園)이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어차피 소설속의 건물에 대하여 소재지를 추정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는 있지만, 남쪽이라는 설의 주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설속의 자연풍광은 절대 북경이 아니라 남경이라는 것이다.
(1) 임대옥이 사는 대관원내의 집인 소상관(瀟湘館)에는 대나무를 심었는데, 대나무는 북방에서는 자라기 힘들고 남방에 자라는 것이다. 즉, 북경에 티비연속극을 찍기 위해 대관원을 지었지만, 주위에 심은 대나무는 얼마가지 못해서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2) 홍루몽에는 겨울에 눈이 일척두께로 내린 상태에서 가보옥이 묘옥에게 백설홍매를 얻으러 용취암으로 가는 얘기가 실려 있는데, 정월에 매화가 눈속에 가득피는 것은 남경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북경에서는 근본적으로 정월에 매화가 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 가원춘의 성친장면에서 원소절에 대관원에서 배를 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북경에서는 원소절에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고, 남경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경은 원소절에도 곤명호, 북해등이 모두 얼음이 얼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제2회에 가우촌과 냉자흥의 대화 장면에는 "작년에 내가 금릉지역에 갔는데, 유적을 유람하고 싶어서 석두성으로 들어갔다가, 오래된 저택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거리 동쪽이 영국부(寧國府)이고, 거리 서쪽이 영국부(榮國府)였다"는 말이 나온다.
셋째, 홍루몽의 책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홍루몽에는 책이름으로 홍루몽, 석두기, 정한록, 풍월보감 외에 "금릉십이채"라는 것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남경의 열두 여자들 얘기라는 것이므로 대관원이 금릉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원목(袁牧)은 자가 자재(子才)인데, 강녕현령(강녕은 남경)을 지냈다. 그리고,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남경에 집을 샀는데, 원래 조설근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조씨의 집은 몰수된 후 수혁덕(隨赫德)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 집은 수원(隨園)으로 불리웠는데, 이후 원목이 사들였다는 것이다. 원목은 "수원시화"에서 "대관원이라는 것은 바로 나의 수원을 말한다"고 적어두었다.
원래, 조설근의 집안이 남경에 거주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설근의 할아버지는 조인(曹寅)인데, 조인의 어머니가 바로 강희황제의 유모(乳母)였다. 이런 인연으로 강희황제는 조인과 그의 후손들에게 평생 잘 대해주었고, 유모를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희황제는 조인에게 강녕직조라는 상당히 돈이 많이 생기는 직위를 주고, 그 직위를 아들에게 세습까지 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강희황제가 6번의 남순중 4번이나 조인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二) 홍루몽의 허구적 구상인 "대관원(大觀園)" 위치에 대한 여러가지 논쟁
대관원(大觀園)의 모델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작자의 상상 속에서 나온 허구(虛構)인지, 만약 실재했었더라면 어디에 대관원이 있었는가라는 대관원의 위치에 대한 논쟁(論爭)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위키백과 자료에 의하면 대관원(중국어 간체자: 大观园, 정체자: 大觀園, 병음: Dàguānyuán)은 중국의 청나라 건륭 연간 조설근의 장편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에 등장한 가공의 중국 정원이다. 배경은 난징(소설 속은 당시의 금릉, 金陵)의 귀공자인 가보옥(賈宝玉)의 집이다.
소설에서는 황제의 귀비가 된 보옥의 친누이 가원춘(賈元春) 친정나들이를 맞이하여 막대한 재화를 쏟아 부어 대관원(大觀園)을 조성하면서 주요 스토리가 전개된다.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연못이 있고,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정원이 있으며, 대관원(大觀園) 내의 건물 하나하나가 고급주택의 규모를 가질 만큼 광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결국 공사비와 유지비는 가씨 집안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어 몰락의 원인이 된다. 친정나들이 후에 원춘의 뜻에 의해 임대옥(林黛玉), 설보채(薛寶釵) 등 가씨 집안의 소녀들과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이 정원 내에 살게 된다.
원래 건물의 모델은 쑤저우(蘇州)의 졸정원(拙政園)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지며,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에는 실제로 대관원(大觀園)을 재현한 건축물이 있어서, 홍루몽 팬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주요건물
소상관(瀟湘館): 임대옥(林黛玉) 주거
추상재(秋爽斎): 가탐춘(賈探春) 주거
요풍헌(蓼風軒): 가석춘(賈惜春) 주거
자능주(紫菱洲): 가영춘(賈迎春) 주거
이홍원(怡紅院): 가보옥(賈宝玉) 주거
대관루(大観樓): 정문에서 직선으로 위치한 큰 누각
상하이 대관원
상하이 서남부의 외곽에서 주자자오와 저우장 중간 칭푸에 위치한다. 건축 면적은 8,000평방미터이며, 이홍원, 소상관, 형천원, 추상재, 요풍헌, 우향사, 난향오, 도향촌, 적취정, 호설정, 석방, 심방정 등 20여개의 풍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대관원의 동남쪽으로는 북송 양식의 7층탑, 높이 47.6m의 청운탑이 눈에 두드러진다. 테마 공원으로 상하이 민족 문화촌과 같이 운영되며, 입장료는 각각 다르게 받는다.
베이징 대관원
베이징 서남쪽 서남쪽 호성하(護城河) 부근에 위치한다. 면적은 12.5만 평방미터로 고대 정원 건축을 집대성 한 곳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지어져, 대부분의 홍루몽과 관련된 영화 촬영, TV 드라마 등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호적(胡適)은 1921년 발표한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에서, 원매(袁枚)가 그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홍루몽 속의 대관원(大觀園)은 그의 수원(隨園)이라고 말했는데, 수원(隨園)의 역사를 고증해보니 원매의 설은 믿을만하다고 말하였다. 또한 호적은 1928년 ‘홍루몽의 새로운 자료를 고증하다(考據紅樓夢的新材料)’라는 글에서, 조설근이 소설을 쓴 곳은 북경이지만, 그가 마음속에서 쓰려고 했던 곳은 금릉(金陵: 오늘날 남경)이었으며, 금릉은 사실(事實)적인 소재였고, 북경은 단지 문학적인 배경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유평백(兪平伯)은 1952년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에서 작자의 생평에 근거하고 소설 속의 서술을 참고하여 홍루몽의 배경이 북경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평백은 홍루몽이 기록한 일은 응당 북경에서의 일이며, 소설 속에 강남의 풍광이 가미된 것은 작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과 상상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1954년 ‘독홍루몽수필(讀紅樓夢隨筆)’에서, 홍루몽에는 “기억, 이상, 현실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기억으로 말하자면, 북경이 될 수도 있고 남경이 될 수도 있다...이상(理想)으로 말하자면 허구적인 묘사이므로 북경도 아니고 남경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로 말하자면 조설근 집안이 북경으로 이주해 온 후에도 상당 기간 번영의 시기를 보낸 만큼 그들의 저택에 작은 정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대관원의 모형이 되었다. 따라서 대관원의 모형은 당연히 북경의 서성(西城)에 있어야 마땅하다. 어쨌든 대관원(大觀園)은 사실상 하나의 그림자이며 작자는 이 조그만 그림자의 기억을 몇 배로 확대하여 천상에나 있을 법한 인간의 낙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주여창(周汝昌)은 대관원(大觀園)의 위치는 자금성(紫禁城) 서북쪽의 한 곳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53년 ‘홍루몽신증(紅樓夢新證)’에서 공왕부설(恭王府說)을 제기하면서, 조설근의 옛 주택은 현재의 북경사범대학의 여생원(女生院) 자리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조가(曹家)--화신부(和珅府)--경왕부(慶王府)--공왕부(恭王府)--보인대학(輔仁大學)--북경사대(北京師大) 일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강(趙岡)은 1963년 ‘홍루몽고증습유(紅樓夢考證拾遺)’에서 공왕부설을 반대하면서 강녕직조서설(江寧織造署說)을 주장하였다. 강희가 남순(南巡)할 때 수차례 조인(曹寅)의 직조서(織造署)를 행궁(行宮)으로 사용하였는데, 소설 중의 대관원(大觀園)의 규모가 이와 맞먹는 규모이며, 소설에 나오는 진보옥(甄寶玉)의 진가(甄家)가 남경에 있는데, 바로 이야기의 진정한 지점이 남경에 있고, 북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조취인(曹聚仁)은 1964년 대관원의 윤곽을 논하는 글에서 조가의 선조가 소주(蘇州)에서 직조(織造)를 지냈는데, 이 직조부가 졸정원(拙政園)에 있었기 때문에 대관원(大觀園)이 바로 소주의 졸정원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홍루몽이 처음에 고소(姑蘇: 오늘날의 소주 지역)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황보방(黃葆芳)은 1971년, 대관원은 허구이며, 조설근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정원건축가였다고 말했다. 또한 원유관(袁維冠)은 1978년에 대관원(大觀園)의 설계는 작자가 꿈꾼 한 폭의 구상도일 뿐이며, 조설근은 왕공대신(王公大臣), 고적(古迹), 공원, 누각, 정자, 다리 등 모든 건축 요소들을 빌어 상상 속의 정원을 훌륭하게 건축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관원(大觀園)에 대한 논쟁은 홍학사(紅學史)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여 초기에는 대관원(大觀園)의 실재 모형(模型)을 찾는 데 주력하였으나 뒤로 갈수록 대관원의 허구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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