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중국고대소설예술기법 8 극불성법極不省法

一字師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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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소설예술기법 8 극불성법極不省法

 
 

극불성법極不省法

【정의】

  ‘극불성법’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작품 전체의 구성에 있어서 결코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진성탄金聖嘆의 「독제오재자서법讀第五才子書法」 가운데 하나이다.

  극불성법極不省法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쑹쟝이 죄 짓는 것을 그리려다 먼저 초문대招文袋[1] 속의 금을 묘사하고, 또 [그보다] 앞서 옌포시閻婆惜가 장싼張三과 일을 벌인 것을 묘사하며, 또 [그보다] 앞서 쑹쟝이 옌포시에게 장가든 것을 묘사하고, 또 [그보다] 앞서 쑹쟝이 관재棺材를 희사한 것을 그리는 것 등과 같은 것이다. 무릇 이 모든 것들은 주요한 이야기正文가 아니다.[2]

  有極不省法, 如要寫宋江犯罪, 却先寫招文袋金子, 却又先寫閻婆惜與張三有事, 却又先寫宋江討閻婆惜, 却又先寫宋江捨棺材等。凡有若干文字, 都非正文是也。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극성법極省法’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혹자는 회화의 예를 들어 ‘극불성법’이 일종의 ‘발묵潑墨’[3]이라면 ‘극성법’은 ‘석묵惜墨’[4]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리청(오대-북송 초에 활동했던 중국산수화의 대가)은 먹을 금과 같이 아껴 썼고, 왕샤王冾는 먹을 듬뿍 써서 그림을 그렸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석묵’과 ‘발묵’ 네 글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육법[5]과 삼품[6]을 절반쯤 안다고 여길 수 있다.李成惜墨如金, 王冾潑墨成畵. 夫學者必念惜墨潑墨四字, 于六法三品, 思過半矣.“(둥치창董其昌,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7])

곧 ‘석묵’은 ‘의미는 복잡하지만 문장은 간결한 것意繁文簡’이고, ‘발묵’은 ‘되는 대로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양자는 외견상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없다. 곧 문장을 지을 때는 경제적으로 붓을 놀려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거칠 것 없이 되는 대로 붓을 놀려 다채로운 인간 세상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실례】

   《수호전》 제19회와 제20회는 쑹쟝宋江이 옌포시閻婆惜를 죽이고,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쑹쟝이 관재棺材를 희사하고, 이에 대한 답례로 옌포시를 맞아들이고, 옌포시가 장싼과 사통을 하고, 류탕劉唐이 편지를 전하고, 쑹쟝이 초문대를 두고 나가고, 옌포시가 초문대를 감추어두고, 급기야 쑹쟝이 옌포시를 죽이게 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진성탄金聖嘆은  《수호전》을 평점하면서 문장을 ‘주요한 이야기正文’와 ‘곁가지 이야기旁文’로 나누었다. 이에 따르면 「독제오재자서법」에서 말했듯이 쑹쟝이 ‘죄 짓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곁가지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모든 사건들이 다 얽히고 설켜 하나의 인과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쑹쟝은  《수호전》의 중심 인물로, ‘충’과 ‘효’, ‘인’, ‘의’의 화신이다. 그가 옌포시를 죽이는 사건은 비록 하나의 범죄 행위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들은 모두 그의 ‘인의’를 표현해 내고 있다. 곧 쑹쟝이 관재를 희사한 것은 ‘인’을 보여주는 것이고, 류탕이 황금을 가져왔을 때 이를 되돌려 보낸 것은 그에게 탐욕스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앞서 차오가이晁蓋를 풀어주는 등의 행위는 모두 ‘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불륜을 저지르는 옌포시와 장싼 등의 인물 형상들은 반대로 쑹쟝의 의로움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예문】

  어느 날 아침이었다. 옌 씨閻씨 노파가 사례하려고 쑹쟝宋江을 찾아갔다가 그의 사처에 아낙네가 없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왕 씨 할멈에게 물었다.

  “쑹 압사宋押司 나리 사처에는 부인네가 보이지 않던데 본래 부인이 없으신가요?”

  “나도 쑹 압사의 집이 쑹 가촌宋家村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부인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소. 그 분이 이 현에서 압사 구실을 하지만 언제나 과객 모양으로 혼자 지냅니다.……”

  ……

  옌씨 노파가 말했다.

  “우리 딸애는 인물도 괜찮고, 또 노래도 제법 잘 부르지요. …… 일전에 내가 쑹 압사에게 치사하러 갔었는데 그 분께 부인이 보이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하는 부탁이니 쑹 압사에게 한번 말씀해 주시오. 그 분이 혹시 색시를 구하신다면 나는 우리 포시婆惜를 보내 드릴랍니다. 일전에는 이녁이 잘 말씀해 주어서 내가 쑹 압사 나리의 구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혹시 그 분과 인척간이 되어서 서로 내왕이 있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왕 씨 할멈은 이 말을 듣고 이튿날로 쑹쟝을 찾아가서 이 일을 일일이 다 이야기해 주었다. 쑹쟝은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그 할미의 온갖 덕담과 권유에 못 이겨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그래서 바로 현청 서쪽 골목 안에 있는 이층집을 얻어 가구며 집기들을 마련하고 옌포시 모녀를 데려다 살게 했다.……

  하루는 쑹쟝이 부당하게도 보조 서리 장원위안張文遠을 데리고 옌포시의 집으로 가서 술을 먹게 되었다. 이 장원위안이라는 위인은 쑹쟝과 한 방에서 같이 일하는 압사로 그의 별명은 ‘샤오장싼小張三’이었다. 미목이 청수하고 이가 희고 입술이 붉은 이 사람은 언제나 술집과 기생방으로만 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우는 위인이었다. 그는 멋도 부릴 줄 아는데다 또 여러 가지 악기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편 주색 바탕이 창기인 포시는 장싼을 보자 첫눈에 마음이 쏠려서 반하게 되었다. 장싼은 포시가 추파를 던지다가 쑹쟝이 소피를 보러 나간 틈을 타 자기에게 농을 걸어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는 것을 알았다. 속담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나무가 움직이지 않고 삿대질을 하지 않으면 물이 흐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색에 밝은 장싼이 그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연이어 건네는 계집의 추파에 은근한 정을 엿본 장싼은 그 다음부터 쑹쟝이 없는 눈치만 알면 곧 그 집으로 찾아가서 쑹쟝을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그때마다 사내를 눌러 앉히고 차를 권하면서 수작을 주고받던 중에 포시는 끝내 일을 치고 말았다.

  ……

  여기서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린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쑹쟝이 관가에서 나와 현청 맞은편에 있는 찻집으로 가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한 건장한 사내가 머리에는 흰 범양 전립을 쓰고 몸에는 검푸른 비단 저고리를 입고 아랫도리에는 행전을 치고 발에는 여덟 날짜리 미투리를 신고 허리에는 요도를 차고 등에는 큰 보따리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걸어오더니 연신 머리를 기웃거리며 현청을 바라보는 품이 퍽 수상해 보였다. 이에 쑹쟝은 얼른 찻집에서 나와 그 자의 뒤를 쫓았다. 한 2,30보 따라 가나마나 했는데 문득 그 사나이는 돌아서서 쑹쟝을 쳐다보더니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두 사람은 그 집 이층으로 올라가서 조용한 방에 들어가 앉았다. 사나이는 박도를 세워놓고 보따리를 벗어서 상 밑에 밀어 넣더니 곧 엎드려 절을 한다. 쑹쟝은 황망히 답례하면서 물었다.

  “미안하지만 댁의 성함이 무엇이오?”

  “은인께서는 이 동생을 잊으셨습니까?”

  “누구시온지, 낯은 익어 보이는데 얼른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저는 일전에 차오 보정晁保正 댁에서 존안을 뵈었고 또 덕택에 목숨을 건진 츠파구이赤髮鬼 류탕劉唐이올시다.”

  ……

  류탕이 말했다.

  “차오 두령게서는 나리에게 백배 치사한다고 말씀을 여쭈라고 하십디다. 목숨을 건져 주신 덕분에 지금은 량산보梁山泊의 첫째 두령으로 계시지요. 우 학구吳學究가 군사로 있고 궁쑨성公孫勝은 그와 함께 병권을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린충林冲이 힘을 써서 왕룬王倫을 죽였기 때문이올시다.……그런데 형님의 큰 은헤를 갚을 길이 없어 이번에 이 류탕을 보내어 편지 한 통과 황금 백 냥을 압사 나리께 드리고 또 주 도두朱都頭께도 사례하게끔 하였습니다.”

  류탕은 보따리 속에서 편지를 꺼내 쑹쟝에게 주었다. 편지를 다 읽은 쑹쟝은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초문대를 꺼내는데, 류탕은 보따리를 풀고 금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쑹쟝은 그 중에서 금 한 덩이만 그 편지로 싸서 초문대招文袋 속에 넣고 옷자락을 내리면서 말했다.

  “아우님은 이 금을 도로 싸 넣으시오.”

  그러고는 곧 심부름꾼을 불러서 술을 가져오게 하고 또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한 쟁반 가져오게 하였다. 그 밖에 몇 가지 채소와 과일들도 가져오게 한 뒤 심부름꾼더러 술을 따라 류탕에게 권하게 하였다.( 《수호전》 제19회)

  한편 쑹쟝이 문 밖으로 나가는 기척을 들은 포시는 곧 일어나면서 입속말로 종알거렸다.

  “그 녀석이 성가시게 구는 통에 밤새도록 잠만 밑졌네. 그 뻔뻔스런 녀석이 내가 저한테 아양을 떨어주기를 바라지만 어림도 없어. 내가 장싼이와 죽자살자 하는 판인데 제 따위를 거들떠보기나 할라고. 너 같은 건 내 집 문전에 얼씬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는 이부자리를 다시 펴고 저고리와 치마를 벗고 가슴을 드러내며 속옷까지 벗었다. 그런데 마침 침상 앞에 놓여 있는 등불이 밝아서 침상 난간에 걸려 있는 자주색 비단 띠가 눈에 띄었다.

  ……

  그가 띠를 집어 드니 초문대와 장도가 함께 들리는데 꽤 묵직한지라 초문대를 끌러서 상 위에다 거꾸로 털었다. 마침 떨어지는 것은 금덩이와 편지였다. 포시가 주어서 등불에 비쳐보니 누런 황금 한 덩이었다.

  “하늘이 나더러 장싼이와 같이 뭘 사먹으라고 주는가 보구나. 그렇지 않아도 장싼이가 요즘 여위어서 뭘 좀 사 먹이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구나.”

  포시가 입이 벌어져서 금을 놓고 이번에는 편지를 펴서 등불에 비춰 보았다. 거기에는 차오가이晁蓋의 이름과 여러 가지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포시는 말했다.

  “아유! 이것 봐라. 나는 이제까지 두레박이 우물에 빠지는 줄로만 알았더니 우물이 두레박에 빠지는 수도 있구나. 내가 워낙 장싼이하고 같이 살고 싶어도 네놈이 있어 꺼리었는데, 이제는 네 놈이 내 손에 걸려들었지. 알고 보니 네 놈이 량산보의 도적들과 내통이 있어서 그 놈들이 너에게 금을 백 냥씩이나 보냈구나. 그렇지 덤빌 것 없이 두고두고 네 놈을 곯려 줄 테다.”

  ……

  바로 이때 갑자기 아래에서 삐걱하고 문 여는 소리가 나자 이어 노파의 묻는 소리가 들렸다.

  ……

  포시는 쑹쟝이 올라오는 기척을 듣자 황급히 띠며 장도며 초문대를 둘둘 뭉쳐서 이불 속에 감추고는 곧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코를 골며 자는 척했다. 쑹쟝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침상 난간을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 간 쑹쟝은 간밤에 일었던 화를 눌러가며 여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전날의 낯을 보아서도 그 초문대를 돌려 줘.”

  ……

  “내가 치우기는 치웠지만 당신한테 돌려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관가 사람을 시켜서 나를 잡아다가 도적으로 몰구려.”

  “내가 언제 임자더러 도적질했다고 했나?”

  “그럼 내가 도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

  그 말을 들은 쑹쟝은 더욱 당황해 했다.

  “내가 언제 임자한테 섭섭하게 군 적이 있었나. 얼른 내놔. 나는 일보러 가야겠어.”

  ……

  “남이 들을까 겁이 나면 애당초 그런 짓을 하지 말 것이지. 편지는 내가 단단히 간수해 둘 테요. 정 찾으려거든 내가 해달라는 대로 세 가지만 들어줘요.”

  ……

  “그렇다면 량산보의 차오가이가 당신한테 보낸 황금 백 냥을 다 나에게 줘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범한 천하에 다시 없는 큰 죄도 고발하지 않기로 하고 초문대 속의 편지도 돌려주겠어요.”

  “처음 두 가지는 다 들어 줄 수 있소. 그러나 금 백 냥은 나에게 보내오기는 왔어도 내가 받지 않고 도로 돌려보냈어. 만약 그 금이 지금 나한테 있다면 두 말 없이 두 손으로 바쳐 올리겠어.”

  ……

  “그럼 내일 아침에 공청에 가서도 금을 안 받았노라고 할 만해요?”

  ……

  “도대체 내놓을 테냐, 안 내놓을 테냐?”

  “아무리 을러대도 나는 못 내놓겠어요.”

  “정말 안 줄 테냐?”

  “못 주겠어요. 다른 것은 백번 용서해도 이것만은 못 돌려주겠어요. 돌려주더라도 윈청鄆城 현성에 가서 돌려 줄 테요.”

  이렇게 되자 쑹쟝은 와락 달려들어 포시가 덮고 있는 이불을 잡아챘다. 그 물건들이 다 여인의 옆에 있었는데, 포시는 이불이야 벗겨지건 말건 두 손으로 그 물건만 가슴에다 걷어 안는다. 쑹쟝이 이불을 잡아채고 보니 허리띠의 한끝이 계집의 가슴 아래에 드리워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쑹쟝은 와락 달려들어 빼앗는데, 포시는 좀처럼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쑹쟝은 침상 머리에서 버럭버럭 기를 쓰며 빼앗고 포시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을 썼다. 쑹쟝이 확 나꿔채자 띠에 달려 있던 장도가 자리 위에 털썩 떨어진다. 쑹쟝은 그 장도를 제꺽 집어들었다. 포시는 쑹쟝이 손에 칼을 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흑삼랑黑三郞이 사람을 죽여요.”

  그 소리가 외려 쑹쟝에게는 귀뜸이 되었다. 가뜩이나 치밀어오른 격분을 참을 길 없던 차에 포시가 두 번째 소리를 지르려 하자 쑹쟝은 왼손으로 계집을 누르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목을 겨누고 쿡 찔렀다. 피가 솟구쳐 흐르는데 계집은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이다. 채 죽지 않은 것 같아서 쑹쟝이 재차 칼질을 하니 계집의 머리가 베개에서 툭 떨어졌다.

  쑹쟝은 일순의 분김에 옌포시를 죽이고는 황급히 초문대를 집어 들고 그 속에서 편지를 꺼내 꺼져 가는 등잔불에 태워버린 다음 띠를 매고 곧 아래로 내려갔다.( 《수호전》 제20회)


[1] 공문서를 담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

[2]  《수호전》, 19~20회. 이 모든 단계들은 옌포시閻婆惜가 쑹쟝의 초문대에서 문서를 발견하고 쑹쟝을 협박하자 쑹쟝이 어쩔 수 없이 옌포시를 죽이는 결정적인 장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3] ‘발묵潑墨’은 수묵화의 용묵법用墨法으로, 필筆이나 준법을 쓰지 않고 먹을 붓거나 뿌려가면서 형태를 그리는 방법이다.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 전하는 바로는 당唐의 왕샤王冾가 흰 종이에 먹을 뿌리고 발로 차고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 형상을 따라 바위, 구름, 물을 그렸는데, 마음먹은 대로 손을 놀려 구름과 노을, 비바람을 그려내니 신이 기교를 부린 듯 아름답고, 엎드려 보아도 먹이 얼룩진 자국이 없었다 한다.

      명대明代의 리르화李日華는  《죽란화잉竹雅畵媵》에서 “발묵은 먹을 오묘하게 사용해서 붓의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하고, 마치 먹을 뿌린 것처럼 그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청대淸代의 선쭝쳰沈宗騫은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에서 “먹은 발묵, 산색은 발취潑翠, 풀색은 발록潑綠이라 하니, 발潑의 쓰임새는 그림 속의 기운氣韻을 피워내는 것이라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했다. 번지는 효과를 이용하여 우연의 미를 얻을 수 있으므로 주로 일격을 나타낸 문인화가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먹물이 풍부하고 기세가 가득한 모든 것을 다 ‘발묵’이라 불렀다. 현대에도 채색을 위주로 한 붓놀림이 호방한 화법을 ‘발채潑彩’라고 부른다. (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4] 먹을 금처럼 아껴가며 쓰는 것을 말한다.

[5] ‘육법’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 중 여섯 원칙, 즉 셰허謝赫의 육법, 기운생동氣韻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를 말한다.

[6] 중국 회화비평 기준의 하나로, 당대唐代의 장화이관張懷瓘(8세기 전반기 활동)은  《화단畵斷》에서 처음으로 신, 묘, 능품神, 妙, 能品이라는 회화비평 기준을 제시하였다. ‘신품’이란 그림의 기예와 공력이 탁월하고 절묘하여 형사形似와 신운神韻이 겸비된 것이고, ‘묘품’이란 의취와 구상이 절묘하여 표현에서 마땅함을 얻는 것이다. ‘능품’이란 형사를 얻어 법칙을 잃지 않는 것이다. 원대元代의 샤원옌夏文彦의  《도회보감圖繪寶鑒》에서는 삼품에 관해 “신품은 하늘이 이루어 주는 것이며, 묘품은 의취가 넘쳐서 되는 것이고, 능품은 형사를 얻는 것”이라 하였다. 이 삼품 외의 평가 기준으로 ‘일품逸品’이 있는데, 이것은 당말唐末의 비평가 주징쉬안朱景玄(9세기 전반기 활동)이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 서문에서 덧붙인 것이다. 그는 “장화이관은  《화단》에서 신묘, 능 3품으로 그 등급을 정하고 다시 이를 상중하 셋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격格 외에 상법常法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일품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그 우열을 표시한다”고 하였다.(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7]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은 명明나라 때의 문인 화가 둥치창董其昌이 쓴 필록筆錄을 후대後代에 와서 편찬編纂한 책으로 전 4권이다. 서화를 수록하여, 작품의 비평을 주로 하고 작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으며, 북화의 타도와 남화의 진흥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의 명성과 함께 널리 알려져 명나라 말기 이후의 중국 화단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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