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연원 2
2) 소설 평점 형식의 원류
통속소설 평점이 명대 만력 연간에 싹을 틔워 명말청초에 흥성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평점 형식이 소설 영역에까지 확장된 것인데, 고대의 문학 평점 형식은 중국의 전통적인 학술 방법을 기초로 삼고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소설 평점이 형식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의 요소에 기인한다. 그것은 곧 주석과 역사서의 체례와 문학의 선평(選評)이다.
비평의 대상인 작품과 하나로 연결된 평점 방식은 전적에 대한 주석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국 고대에 가장 먼저 주석을 한 전적은 유가의 경전, 곧 《역경》, 《서경》, 《시경》, 《춘추》, 《예》, 《악》이다. ‘경’은 중국 고대에 매우 높은 지위에 놓여 있었기에 이른바 “[경이라고 하는 것은] 항구적인 지극한 도이고, 불멸의 위대한 가르침이다(恒久之至道, 不刊之鴻敎也).”[류셰(劉勰), 《문심조룡》 <종경(宗經)>] 그러므로 중국 고대의 주석은 경을 주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경학 역시 고대에 가장 빛나는 학문이 되었으며, 계통적인 방법과 술어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대 구옌우(顧炎武)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유가 선비들이 경전을 해석한 책을 일러 혹은 전(傳)이라 하고, 혹은 전(箋)이라 하며, 혹은 해(解)라고도 하고, 혹은 학(學)이라고도 하나, 지금은 모두 주(注)라 통칭한다.……후대의 유가 선비들이 따지고 풀이한 책의 이름을 정의(正義)라 하였으나, 지금은 통칭해서 소(疏)라 일컫는다.(先儒釋經之書, 或曰傳, 或曰箋, 或曰解, 或曰學, 今通謂之注.……其後儒辨釋之書, 名曰正義, 今通謂之疏.)”[구옌우, 《일지록(日知錄)》 18권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그러나 사실상 명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구(章句)’, ‘음의(音義)’, ‘교(校)’, ‘증(證)’, ‘정(訂)’, ‘전(詮)’, ‘고(詁)’, ‘훈(訓)’ 등이 있다.
경에 대한 주석은 서한 시기에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한서》 <예문지>의 기록에 의하면, 서한 시기 경에 대한 주석은 이미 일정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유가의 전적들이 점차 국가의 법정 경전으로 자리잡아 감에 따라, 한편으로는 ‘경’의 영역이 끊임없이 확대되었고, 동시에 경에 대한 주석 역시 전통적인 현학(顯學)[1]이 되었다. 수천 년 간 이어온 중국 고대의 역사에서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실린 경학 관련 저작만 해도 1천 7백 여 종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미처 수록되지 않았거나 없어진 저작 및 《사고전서》 이후에 나온 경학 관련 저작들은 포함되지 않았다.[2] 이른바 ‘경에 대한 주석’은 경전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이다. 하지만 경전의 단어에 대한 해석에 그치지 않고, 단어의 뜻, 구절의 뜻을 포괄하고, 의리(義理)를 드러내고 있으며, 텍스트의 주지(主旨)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춘추》 삼전(三傳)에도 이미 드러나 있는데, 이를테면 《좌전》의 경우 역사적 사실의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고, 《공양전》과 《곡량전》의 경우는 미언대의를 탐구하는 데 그 뜻을 두고 있다. 이것은 후대의 경에 대한 주석의 연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모시》에는 이런 체례가 이미 기본적으로 완비되어 있다. 마오헝(毛亨)의 《시》 전(傳)에는 단어에 대한 해석과 구절에 대한 해석, 그리고 이를 통해 시가의 주지(主旨)를 천명하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해석 중에는 견강부회한 점이 많이 있으나, 해석 방법과 체례는 이미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한 이후에는 조정이 제창하고 이끄는 데 따라 경전의 주석도 왕성하게 발전했다. 주석의 범위는 확대되어, ‘육경’ 이외에도 《논어》와 《맹자》, 《초사》, 《국어》, 《전국책》 등의 주석본이 앞뒤로 나타났다. 경전을 주석하는 가운데 파벌끼리의 논쟁 역시 경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고문파의 경전 주석은 명물훈고(名物訓詁)를 중시해 언어 문자를 해석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기를 바탕으로 의리를 분석해 후대 주석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금문파의 경전 주석은 ‘미언대의’를 추구해 경전의 해석을 빌어 그 정치 사상과 철학 이론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경전 주석의 이념과 방식 역시 후대에 중시되었다.
위진 이래로는 경전 주석을 기초로 발전해온 전적의 주석이 신속하게 진전되어, 경전 주석 이외에도 자(子), 사(史), 집(集)이라고 하는 삼대 부문의 전적이 모두 주석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페이쑹즈(裵松之)의 《삼국지》 주석과 리다오위안(酈道元)의 《수경(水經)》 주석, 리산(李善) 등의 《문선》 주석 등은 모두 당대와 후대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전 주석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철학 유파를 이룬 이들도 없지 않았으니, 위진 시기 노장(老莊)에 근거해 유가로 들어가 현리(玄理)를 천명하고 현학(玄學)을 형성한 뒤로 초당(初唐)에는 경전을 의심하는 기풍을 연 것에서 비롯되어 송대에 이르면 경을 의심하고 경전을 개작하는 데로 발전해 직접 경전의 문장에서 의리를 추구하는 ‘성리학’을 형성했다. 그리고는 캉유웨이(康有爲)가 《맹자미(孟子微)》와 《중용주(中庸注)》를 짓고 유가의 경전을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착수해 변법유신을 선양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의 평점 형식에 대한 주석의 영향은 주로 체례(體例)에 있었으며, 특히 주석의 문장과 본문이 하나로 일체가 된 것은 후대 소설평점의 직접적인 근원이 되었다. 이 형식의 가장 이른 근원은 경전에 대한 주석이다. ‘경전과 주석이 일체가 되는’ 형식은 텍스트에 평점이 덧붙여지는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테면 한대 자오치(趙岐)가 주석한 《맹자》는 매 장의 말미에서 그 요지를 개괄하였다. 서한 이후에는 경학가들마다 전주(傳注)를 경문(經文) 아래 덧붙였는데, 어떤 이는 전주를 전체 경문의 뒤에 붙였고, 어떤 이는 전주를 각각의 편과 각각의 장 뒤에 붙였다. 그리고 정쉬안(鄭玄)의 《모시전(毛詩箋)》과 《예기주(禮記注)》는 아예 전주와 경문을 구절마다 덧붙여놓았다. 이렇게 경에 주를 덧붙이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독자의 열독과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주문(注文)과 본문의 일체는 점차 후대의 주석의 체례상의 정해진 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소설평점 중의 협비와 방비와 평주 등은 곧 이에 근거한 것이다.
역사 저작의 체례가 소설평점에 대해 주었던 영향 역시 매우 크다. 이러한 영향은 주로 사학 저작의 ‘논찬(論讚)’에서 온 것이다. ‘논찬’은 역사 저작의 독특한 평론 방식으로 역사학자가 역사적인 현상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직접 평술하는 것으로, 중국의 고대사학사에서는 이미 일상적인 형식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방식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좌전》이다. 《좌전》은 《춘추좌씨전》의 약칭으로, 형식적으로는 《춘추경》의 전(傳)이다. 이것은 《춘추》를 벼리로 삼고 널리 역사적인 사실을 채집하여 편정(編訂)을 가한 편년체 역사 저작이다. 《좌전》에서는 작자가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기록했을 뿐 아니라 옛사람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기록하되, 일반적으로 “군자왈(君子曰)”이라 칭했다. 쓰마쳰의 《사기》는 이런 형식이 분명하게 발전한 것인데, 《사기》의 매 편의 말미에는 모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평어가 있어, 매 편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작자의 생각을 펼쳐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점차 정해진 체제가 되었다. 이를테면 반구(班固)가 지은 《한서》는 《사기》의 체례를 본떠 매 편의 말미에는 “찬왈(贊曰)”이라는 것이 덧붙여졌다. 판예(范曄)가 지은 《후한서》에는 “찬왈”말고도 “논왈(論曰)”이라는 것이 더해졌는데, “찬왈”은 변문으로 쓰고, “논왈”은 산문으로 썼다. 천서우(陳壽)의 《삼국지》 역시 그러한데, “평왈”은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로, 이후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이러한 체례를 답습했다. 여기서 지적할 만한 사실은 한말 쉰웨(荀悅)가 지은 《전한기(前漢記)》이다. 이 책은 작자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반구의 《한서》를 축약해 서술한 것으로, “문장은 간략하나 사실은 상세하다(詞約事詳)”는 칭찬을 받았다. 전서(全書) 20만 자 가운데 직접 “쉰웨 왈(荀悅曰)”이라 서명이 된 30여 칙(則)의 작자의 평론이 있는데, 글자 수는 1만 여 자에 달하며 역사적 사실과 역사 인물에 대한 작자의 인식이 드러나고 있어 후대에 대한 영향이 자못 컸다. 판예는 그 “논변이 대부분 아름답다(論辯多美)”고 평했다[《후한서》 <쉰웨 전(荀悅傳)>]. 류즈지(劉知幾)는 그가 “의리”를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말했다[《사통》 <논찬(論讚)>]. 당 태종은 그의 “의론이 깊고 넓어, 통치의 요체와 군신간의 의리를 다했다.(議論深博, 極爲治之體, 盡君臣之義.)”[《구당서》 《리다량 전(李大亮傳)>] 이것으로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좌전》 이래로 형성되어 온 이러한 역사 저작의 전통은 중국의 고대 사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좌전》과 《한기(漢記)》 등 편년체 사서의 사론은 사건을 논하는 데 편중했고, 《사기》와 《한서》 등 기전체 사서의 사론은 사람을 논하는 데 치중했다. 동시에 이런 전통은 또 중국 고대의 사론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고대 사학 중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3]
중국 고대의 역사 저작의 체례가 갖고 있는 이러한 전통은 후대 문학평점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서(史書) 가운데 문학가의 전기에 대한 편말의 논찬은 자못 가치 있는 문학평론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사기》의 취위안(屈原), 쟈이(賈誼), 쓰마샹루(司馬相如) 등에 대한 평론은 중국문학비평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뛰어난 논의인데, 선웨(沈約)의 《송서》 <셰링윈 전(謝靈運傳)>의 편말 평론과 마찬가지로 모두 문학사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비평 문장이다. 소설평점으로 말하자면, 역사 저작의 편말 논찬은 사실을 논한 것이든, 사람을 논한 것이든, 모두 소설평점의 회말총평(回末總評)의 직접적인 연원으로, 특히 역사연의소설의 평점에서 이러한 영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명 만력 연간의 역사소설 평점에는 여전히 ‘논왈(論曰)’이라는 형식이 직접적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테면 완취안러우(萬卷樓) 본 《삼국지통속연의》에는 ‘논왈’이라 제(題)하였고, 《정파주첩전통속연의(征播奏捷傳通俗演義)》에는 ‘쉬안전쯔 논왈(玄眞子論曰)’이라 제하였고,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에는 ‘단론(斷論)’이라 제하는 등 모두 역사 저작의 체례의 흔적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 아울러 역사 저작의 논찬이 사실의 이치를 논평한 사고의 갈피 역시 소설평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차이위안팡(蔡元放)의 《동주열국지》 평점에서는 “다만 그 사리의 옳고 그름을 평한 것일 따름(只是評其事理之是否)”이라고 말했다.
소설평점의 형식은 당연하게도 평점이라는 비평 형태의 내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 고대에 문학 선평의 원류는 그 유래가 깊고 멀지만, 평론과 텍스트가 하나로 된 것을 말하자면, 《모시(毛詩)》와 동한 왕이(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가 그 발단을 열었으며, 특히 《모시》와 《초사장구》 중의 매 편마다의 소서(小序)는 모두 후대 문학 선평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모시》의 소서가 대부분 경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以經立義)[4] 흔적이라고 말한다면, 문학비평과는 서로 많은 차이가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초사장구》의 소서가 순수한 문학비평이 된다. 이를테면, <구가 서(九歌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가》라는 것은 취위안이 지은 것이다. 옛날 초나라 난잉이라는 마을은 위안 수와 샹 수의 사이에 있으면서 그 풍속이 귀신을 믿고 제사드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노래와 음악을 짓고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춤으로써 여러 신들을 즐겁게 했다. 취위안이 귀양을 가 그 지역을 떠돌 때 가슴속에는 쓰라린 우울이 가득차고 근심 걱정으로 꽉 막혔는데, 밖으로 나아가 속인들이 제사 드리는 예와 가무의 음악을 보니, 그 말이 비루하기에, 《구가》의 곡을 지어 위로는 신을 섬기는 공경함을 베풀고, 아래로는 자신의 맺인 원망을 드러내 보여 거기에 풍간의 뜻을 기탁하였다(《九歌》者, 屈原之所作也. 昔楚國南郢之邑, 沅湘之間, 其俗信鬼而好祠, 其祠必作歌樂, 鼓舞以樂諸神. 屈原放逐, 竄伏其域, 懷懮苦毒, 愁思沸鬱, 出見俗人祭祀之禮, 歌舞之樂, 其詞鄙陋, 因爲作《九歌》之曲. 上陳事神之敬, 下見己之冤結, 託之以諷諫).
이런 언급은 의심할 바 없이 극히 높은 문학비평 가치를 갖고 있는데, 직접적으로 당 이후 시가 평점의 선구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 평점은 남송대에 시작되었는데, 특히 고문 평점은 체제나 기능상 후대의 문학 평점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였다. 뤼쭈쳰(呂祖謙)의 《고문관건(古文關鍵)》과 러우팡(樓肪)의 《숭문고결(崇文古訣)》, 전더슈(眞德秀)의 《문장정종(文章正宗)》, 셰팡더(謝枋得)의 《문장궤범(文章軌範)》, 류천웡(劉辰翁)의 《반마이동평(班馬異同評)》 등은 모두 일정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송 이래로 평점은 줄곧 시문 영역에서 비교적 큰 발전을 이루었다. 명 중엽 이후에는 이러한 풍조가 다시 불이 붙어 탕순즈(唐順之)와 마오쿤(茅坤)은 당송팔대가에 대해 평점했고, 양선(楊愼)은 《풍(風)》, 《아(雅)》에 대해 선평(選評)했으며, 중싱(鍾惺)과 탄위안춘(譚元春)은 《고시귀(古詩歸)》와 《당시귀(唐詩歸)》를 편찬했다. 이와 동시에 평점 역시 점차 소설 희곡 등 통속문학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소설’의 평점으로 명 중엽 이전의 문학평점사에서 언급할 만한 것은 양대(梁代) 샤오치(蕭綺)가 ‘기록(錄)’한 진 왕쟈(王嘉)의 《습유기(拾遺記)》와 류천웡이 평점한 류이칭(劉義慶)의 《세설신어》이다. 《습유기》는 지괴소설로 샤오치의 <서>에 의하면, 그가 수집해서 엮고 바로잡아 이루었다고 했다. 전서는 모두 10권으로 매 권에는 약간의 신화 전설이 포함되어 있다. 부분적인 본문 뒤에는 샤오치가 일단의 언론을 더해 ‘기록해 말하다(錄曰)’라고 제(題)하였다. 다만 내용은 번잡해 문학 비평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평론성의 문장을 ‘소설’의 텍스트에 덧붙인 것이다. 류천웡의 《세설신어》 평점은 이미 문학비평의 함의를 분명하게 띠고 있는데, 비록 소량의 미비이기는 하지만, 두 세 마디의 평설(評說) 중에는 이미 인물의 정신 상태나 언어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 실제로 고대 소설평점의 비조라 할 만하다.
[1] 【옮긴이 주】세상에 이름 높은 학문이나 학파. 또는 유명한 학자.
[2] 참고로 둥훙리(董洪利)의 《고적의 해석(古籍的闡釋)》(遼寧敎育出版社, 1995)을 볼 것.
[3] 참고로 장즈저(張志哲)의 《중국사적개론(中國史籍槪論)》, 쟝쑤고적출판사(江蘇古籍出版社, 1988)을 볼 것.
[4] 【옮긴이 주】원문의 ‘以經立義’는 ‘依經立義’라고 하는 게 맞다. 의미는 경전을 빌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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