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명인 비하인드 스토리] 공자 편-제2회: 공자의 학당
(사진설명: 공자의 화상)
제2회 공자의 학당
종일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학당에서는 가끔 우아한 현악기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공구를 공자라 부르거나 부자(夫子)라 부르며 스승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스승의 존엄을 제창했지만 스승임을 뽐내지 않았고 사제관계는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공자는 자신이 정리한 <시삼백>을 학당의 교재로 삼았다. 하루는 공자가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시삼백>은 일언폐지(一言蔽之), 즉 말 한 마디에 깊은 뜻을 담느니라. 그래서 ‘사무사(思無邪)’고 말한다.”
안연(顔淵)이 물었다.
“스승님, ‘사무사’를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시삼백>은 음란하지 않다. 그러기에 <시삼백>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소양이 향상될 것이다.”
“시의 영향력이 그렇게 큽니까?”
“시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키우고 관찰력을 향상시키며 풍자 수법도 배우게 하느니라. 또 시에 나오는 이치로 부모를 공경하고 군주를 섬기며 새나 꽃에 대한 지식도 배울 수 있으니 시의 역할이 크지 않느냐?”
제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시의 역할이 아주 큽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소리 높여 시를 읊었다.
살찌고 건장한(有駜有駜) 저 네 필의 누런 말이 달려 간다네(駜彼乘黃).
밤낮으로 공관에 있으니(夙夜在公) 공관 일에 밝고 밝다네(在公明明)…
수업이 끝난 후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능력 있는 관리로 키울 것이다. 너희들은 첫째, 지식과 기능을 갖춘 사람이 되고, 둘째, 윤리도덕을 지키는 덕행을 갖춘 사람이 되며, 셋째, 어진 정치의 사상과 신앙을 가지고 사심이 없이 충성심을 갖춘 사람이 되고, 넷째, 벼슬을 하려는 정치적 이성(理性)을 가지고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자로가 공자의 말을 받았다.
“한 관리가 스승님을 천지목탁(天之木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제자들이 무슨 벼슬 걱정을 하겠습니까?”
공자가 미소를 지었으며 되물었다.
“천지목탁이란 무엇이냐?”
자로가 대답했다.
“정부는 법령을 발표할 때 목탁(木鐸)을 흔들어 대중을 모이게 하는데요 스승님은 천하를 바로잡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빛의 사절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천하목탁이라면 어찌 가까운 사람만 등용하고 나의 제자만 등용하겠느냐? 나는 오직 도의와 준칙에 따라 일을 할 뿐 관계의 멀고 가까움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자로가 또 물었다.
“스승님은 삼 천의 제자를 두고 있는데 제자들 모두가 스승님께 벼슬을 달라고 하면 큰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스승님의 인품이 어떻냐고 묻는 말에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공자가 웃었다.
“너의 스승은 열심히 사느라 끼니를 잊고(發憤忘食) 즐거움에 빠져 근심을 잊으며(樂以忘憂) 나이 드는 줄 모르는 사람(不知老之將止)이라고 왜 말하지 못하느냐?”
이번에는 번지(樊遲)가 끼어들었다.
“스승님, 저는 벼슬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농학(農學)을 좋아합니다. 농사하는 것을 배워주실 수 있습니까?”
공자가 웃음기를 걷어 들이며 말했다.
“농사하는 것을 나에게 묻지 말아라. 농부가 나보다 나을 터니.”
“그럼 채소재배는 가르치실 수 있습니까?”
“나에게 채소재배를 묻지 말아라. 채농이 나보다 나을 터니.”
번지가 어색한 기색을 띠자 공자가 의미심장하게 계속 말했다.
“설마 너의 꿈이 농부가 되는 거냐? 나의 제자라면 더 큰 꿈을 가져야 하느니라. 예를 들어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어진 정치의 시행 이런 책임들은 모두 너희들이 감당해야 하느니라. 너희들이 자신의 정치능력으로 예의와 인의, 성실을 중시하며 백성들이 즐겁게 농사를 할 수 있게 한다 해도 너는 몸소 농사를 짓겠느냐?”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학문(文)과 실천(行), 충실(忠), 신의(信)를 잘 배워서 장래에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겠습니다. 절대 스승님께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번지의 말에 공자는 만족했다.
“군자는 도를 근심하고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 법(君子謀道不謀食). 벼슬하는 것을 배웠는데 먹을 거리가 없겠느냐?”
공자가 번지에게 ‘학문을 하다가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하는(學而優則仕)’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자로가 달려왔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나라 군주가 제(齊) 나라로 도주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는 노(魯) 나라의 권력이 벌써‘삼환(三桓)’의 수중에 장악된 것을 알고 있었으나 오늘날 노나라 소공(昭公)이 꼭두각시 군주도 못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공자는 한숨을 쉬었다.
“아, 과연 내분이 일어났구나, 노나라에 곧 대란이 일어날 터이니 우리도 제나라로 피난 가야겠다!”
삼환은 계손씨(季孫氏)와 숙손씨(叔孫氏), 맹손씨(孟孫氏)등 세 명의 노나라 경대부(卿大夫)를 말한다. 과거 노나라 환공(桓公)에게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환공의 뒤를 이어 장공(庄公)이 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은 경대부가 되었다. 바로 그 세 아들의 자손이 점점 3대 가문으로 발전해서 노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들이 모두 환공의 자손이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삼환’이라 부르게 되었고 공자가 내분이 일어났다고 말한 것은 ‘삼환’의 선조가 모두 소공의 선조인 장공과 친 형제였기 때문이다.
제나라 경공(景公)은 공자가 노나라의 난을 피해 제나라에 와서 몇 개 월 동안 승상(丞相)인 고소자(高昭子)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자를 궁으로 불러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
이 여덟 글자의 의미는 바로 군주는 군주 잡고 신하는 신하 다우며 부친은 부친 답고 아들은 아들 다우면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군신, 부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 된다는 의미였다.
공자의 말에 제 경공이 무릎을 쳤다.
“맞는 말이오! 군주가 군주 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 답지 않으며 부친이 부친 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 답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식량이 있다 해도 나와는 무관할 것이니 말이요.”
경공은 이어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재물을 잘 관리하면 됩니다.”
공자의 대답에 경공은 공자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경공은 상대부(上大夫) 안영(安嬰)에게 말했다.
“니계전(尼溪田)을 공자에게 주고 그를 제나라에서 벼슬을 시킬까 하오.”
안영이 반대했다.
“유학자들은 언제나 언변이 좋고 매끄러운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공자는 산 사람을 섬기듯 죽은 사람을 섬길 것(事死如事生)을 주장하면서 장례를 후하게 치러야 한다고 선동하는데 우리의 풍속습관이 그렇게 바뀐다면 많은 민폐를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악(禮樂)이 무너지는 지금 그는 오히려 주(周) 나라의 예악 회복과 불필요한 예절을 주장하고 있는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경공은 안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더는 공자를 중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자는 경공이 자신을 쌀쌀하게 대하기 시작하고 제나라 대부(大夫)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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