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6
7) 청 후기의 소설평점
도광 연간 이후, 소설평점은 점차 미성(尾聲)으로 진입했다. 이 백년 간의 소설평점은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해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평점의 여파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특히 《요재지이》, 《홍루몽》과 《유림외사》가 대량의 문인 평점가를 끌어들여, 소설평점, 특히 문인 평점이 여전히 흥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략 19세기 말에 중국과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면서,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소설가와 소설이론가들 역시 평점이라는 옛날 형식을 대량으로 채용해 그들의 정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감개를 표현해냈다. “옛날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이러한 현상은 청말에 한 차례 붐이 일었으며, 새롭게 신문과 잡지가 생겨남에 따라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소설평점은 이렇게 붐이 일면서 또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 하에서 그 역사적인 사명을 다했던 것이다.
이른바 ‘전통적인 소설평점’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하나는 소설평점의 대상이 사상적 함의와 예술 형식상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소설 작품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나온 ‘신소설’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점의 내용과 비평적 생각의 갈피가 여전히 리줘우(李卓吾)나 진성탄(金聖嘆) 등을 위주로 하는 평점의 전통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류의 평점은 전통적인 소설평점의 여파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전통적인 소설평점은 평점 대상에서 그 이전과 명확한 변화를 보인다. 명대 ‘사대기서’는 이미 평점의 중심적 위치에서 벗어났고, 청대의 세 명저 소설인 《홍루몽》과 《요재지이》, 《유림외사》가 평점가들의 광범위한 주목을 끌었다. 그 가운데 《훙루몽》에 대한 평점이 특히 열기를 띠었다. 도광 연간에 어떤 이가 낸 통계에 의하면 당시 《홍루몽》 평본이 이미 “수십 가가 넘을 정도”였다.[<먀오푸쉬안 평 《석두기》 자기(妙復軒評《石頭記》自記)> 부록 장둥핑(張東屛) <타이핑셴런에게 보내는 편지(致太平閑人書)>] 이렇게 많은 《홍루몽》 평본 가운데 왕시롄(王希廉), 장신즈(張新之), 야오셰(姚燮) 3가의 평점이 가장 영향력이 컸고, 가장 널리 유포되었다. 평점의 특색으로 말하자면, 천치타이(陳其泰)의 초평본(抄評本) 퉁화펑거(桐花鳳閣) 평 《홍루몽》과 몽골족 평점가인 카쓰부(哈斯寶)의 몽골어 평본 《신역홍루몽(新譯紅樓夢)》 역시 자못 사상적으로 심도 있고 이론적 가치가 있었다.
《유림외사》는 와평본 이후에 이 시기에도 평점의 정점에 이르렀다. 함풍(咸豊), 동치(同治) 연간의 황샤오톈(黃小田) 평본, 동치 13년의 《치성탕 증정 유림외사(齊省堂增訂儒林外史)》는 모두 소설평점사에서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광서 연간의 톈무산챠오(天目山樵) 장원후(張文虎)는 《유림외사》에 대한 일단의 감상과 비평을 결집한 일련의 연구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들은 평점이라는 수단으로 《유림외사》를 대대적으로 전파했다.
《요재지이》는 가장 이르게는 건륭 연간의 왕스전(王士禎) 평점과 가경 13년(1818년)의 펑전롼(馮鎭鸞) 평점이 있었지만, 진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왕스전 평점은 이 시기의 《요재지이》 평본에 수록되었고, 펑전롼의 평점은 광서 17년(1891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와 그 이후에 가장 널리 유포되었던 《요재지이》 평본은 각각 도광 3년(1823년)과 도광 22년(1842년)에 나온 허서우치(何守奇) 평본과 단밍룬(但明倫) 평본으로 특히 후자의 영향이 더욱 컸다. 이 시기의 전통적인 소설평점은 바로 이상의 세 가지 명작이 그 평점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밖에도 이 시기에 주의할 만한 것은 원룽(文龍)이 광서 5년(1879년)과 6년, 7년 세 차례에 걸쳐 비(批)한 《금병매》 평본이다. 이것은 비록 초평본(抄評本)으로, 짜이쯔탕(在玆堂) 간본 《제일기서금병매》의 책 위에 손으로 쓴 것이지만, 그 가운데 포함된 이론과 사상이 매우 풍부하고, ‘문인들 자신의 감상용(文人自賞)’이라는 소설평점의 역사 전통을 체현하고 있기도 하다. 광서 연간에 간행된 《야수폭언(野叟曝言)》 평본과 《청루몽(靑樓夢)》 평본, 《화월흔(花月痕)》 평본과 청말의 고본(藁本)인 《형창청완(螢窓淸玩)》 평점 등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가치 있는 소설평점본들이다.
우리가 상술한 소설평본을 전통적인 소설평점의 여파라 부르는 까닭은 그 평점 대상이 일치한다는 점 외에도 더욱 중요하게는 이들 소설평점본이 비평의 주지(主旨)와 의취(意趣)뿐 아니라 시평(時評)의 기능, 비평의 시각에서 볼 때 모두 전통적인 소설평점과 일맥상통하는 특색을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비평의 시각에 있어서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이왕의 소설평점의 전통을 계승해, 여전히 인물 품평이나 장법 결구 등이 평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왕시롄(王希廉)이 평점한 《홍루몽》은 “복수재덕(福壽才德)을 벼리로 삼아 《홍루몽》의 인물들을 품평했다. ”복과 수, 그리고 재와 덕 네 글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완벽하게 이루기가 가장 어려운 것인데, 닝궈푸(寧國府)와 룽궈푸(榮國府) 두 집안에서 쟈 모(賈母) 한 사람만이……이 네 글자를 겸전했다고 할 수 있다.(福壽才德四字, 人生最難完全. 寧, 榮二府, 只有賈母一人……可稱四字兼全.)“ 그는 이것을 준칙으로 삼아 여러 인물 형상을 평하고 판단했다[도광 12년 솽칭관(雙淸館) 간본 《신평수상홍루몽전전(新編繡像紅樓夢全傳)》]
장법과 결구에 대한 비평 역시 이들 소설평점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왕시롄(王希廉)은 《홍루몽》 120회를 “20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보았고,” “빈주(賓主)”, “명암”, “정반”, “허실”, “진가(眞假)” 등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작품의 장법과 결구를 분석했다. 또 이를테면 쩌우타오(鄒弢)가 평론한 《화월흔(花月痕)》에서는 “한필도 있고, 반필도 있고, 복필도 있고, 은필도 있어, 순접으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有閑筆, 有反筆, 有伏筆, 有隱筆, 無一筆順接)”[《청루몽(靑樓夢)》 제13회 평어, 광서 14년 원쿠이탕(文魁堂) 간본]고 하였다. 그 평어 역시 모두 전통적인 평점 술어를 채용했다. 인물 품평과 장법 결구는 고대 소설평점의 기본적인 함의로 이미 그 자신의 독특한 술어와 품평 방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이러한 평점 전통을 계승해 《홍루몽》 등 소설평점 가운데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비평의 주지와 의취에 있어서는 이 시기 소설평점의 전통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윗글에서 말한 바대로, 중국의 고대 소설평점은 문인들 자신의 감상(文人自賞)을 위한 열독 감상평과 소설의 상업적 전파를 촉진하는 데 그 취지가 있는 서상들의 평점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명말청초에는 양자가 하나로 융합되어 소설평점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청 중엽 이래의 소설평점은 문인들의 의취(意趣)를 표현하는 전통을 받아들여 편벽한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전통은 이 시기의 소설평점 중에서도 발전해 문인적인 성격의 평점이 소설평점의 주류가 되게 했다. 이것은 또 두 가지 표현 방식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작품의 주지(主旨)에 대한 탐구가 여전히 평점가가 극히 흥미를 느끼는 과제였으며, 개인의 정감과 사상에 근거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함의를 천명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장신즈(張新之)는 《홍루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두기》는 성리를 부연해놓은 책으로, 《대학》을 조상으로 삼고, 《중용》을 마루로 삼았다.(《石頭記》乃演性理之書, 祖《大學》而宗《中庸》.)” “이 책의 대의는 《대학》과 《중용》을 드러내 밝히고, 《주역》으로써 성쇠를 풀어내며, 《시경》의 <국풍>으로 정절과 음탕함을 바로잡고, 《춘추》로써 포폄을 보여주며, 《예경》과 《악기》가 그 가운데 녹아든 것이다.(是書大意闡發《學》、《庸》, 以《周易》演消長, 以《國風》正貞淫, 以《春秋》示予奪, 《禮經》、《樂記》融會其中.)” 곧 그 평점의 주체성이 극히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오히려 《홍루몽》과는 기본적으로 상관이 없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입론의 근거로 삼은 장신즈 평점은 편폭은 방대하지만, 대부분이 견강부회한 황당한 이야기이다. 상대적으로 천치타이(陳其泰)가 작품을 파악한 것은 비교적 사실에 부합한다. 천치타이는 《홍루몽》을 《이소(離騷)》, 《사기(史記)》와 견주어 논하면서 “<국풍>은 호색이나 음탕하지 않고, <소아>는 원망하되 분노하지 않으며, <이소>의 경우는 양자를 겸했다 할 수 있으니, <이소>를 계승한 것은 《홍루몽》뿐일까 하노라(<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悱而不怒, 若<離騷>者, 可謂兼之, 繼<離騷>者, 其惟《紅樓夢》乎.)”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소>, 《사기》는 모두 발분해서 지은 책으로 《홍루몽》 역시 그러한데, “나는 작자가 어떤 분노와 억울함으로 인한 쓰라린 마음이 있어 이렇듯 비분으로 가득 찬 책을 써냈는지 모르겠다. 대저 어찌 보통의 아녀자의 감정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겠는가?(吾不知作者有何感憤抑鬱之苦心, 乃有此悲憤淋漓之一書也. 夫豈可以尋常兒女子之情視之也哉.)”라고 하였다. 이것은 《유림외사》 평점과 《서유기》 평점 등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정감과 주지에 대한 분석을 평점의 첫 번째 임무로 보아,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의미를 체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설평점의 개체적인 자기 감상적인 성격이 명확하게 증강된 것으로 표현된다. 자기 감상적 성격의 소설평점은 리줘우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평점이 고대 소설평점사에서 연면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 최고조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소설평점의 자기 감상적 성격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표현된다. 첫째, 소설평점이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과 탐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왕시롄은 “내가 《홍루몽》을 애호해서 그것을 읽고, 읽으면서 비(批)한 것이니, 진정 나도 어찌 할 수 없어 그리한 것이다(余之于《紅樓夢》愛之讀之, 讀之批之, 固有情不自禁者也.)”[왕시롄, <《홍루몽》비서(《紅樓夢》批序)>, 《신평수상홍루몽전전(新評繡像紅樓夢全傳)》, 도광(道光) 12年 솽칭관(雙淸館) 간본(刊本)]라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소설평점을 무엇보다 개인의 소일거리와 감정의 요구로 보았다. 이를테면 원룽(文龍)은 《금병매》 제67회 회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부기했다. “첩이 밤새 기침을 하여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일찍 일어나 향을 피웠다. 구름은 짙어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무께서 병이 나서 아침 업무를 하지 않아 관사로 되돌아오니 아침 7시 즈음. 사람들은 아직 모두 편히 자고 있다. 이 책[《금병매》]을 다 보고 앞쪽의 비평을 꼼꼼히 살피니 되는 대로 쓰지는 않은 것이 도리어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었다. 은거하는 고고한 선비처럼 사는 내 뜻을 이루었으니 이 비평을 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姬人夜嗽, 使我不得安眠. 早起行香, 雲濃雨細. 道台因病, 停止衙參. 回署辰初, 諸人均尙高臥. 看完此本, 細數前批, 不作人云亦云, 却是有點心思, 使我志遂買山, 正可以以此作消閒也)” 둘째, 바로 그들이 소설평점을 개인의 소일거리로 여겼기 때문에,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공개적으로 출판된 평본 이외에도 미 간행된 평점 고본이 갈수록 많아졌다. 도광 연간 “수십 가가 넘을 정도”였던 《홍루몽》 평본 중 대부분은 자기 감상용 고본(藁本)이었고, 기타 《금병매》에는 원룽의 평점 고본이 있었고, 《유림외사》에는 황샤오톈(黃小田) 평점 고본 등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대량으로 출현한 것은 소설평점이 바야흐로 문인들의 자기 감상의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셋째, 소설평점이 자기 감상용으로 쓰였기에, 그 평점은 공리적인 목적으로 단번에 씌어진 게 아니라 반복해서 연구하며 독서하는 가운데 간간이 비점을 한 것이었다. 평점자는 항상 온힘을 기울여, 심지어 반평생의 공력을 들여가며 평점하는 가운데 오랜 기간 동안 정서적 만족을 얻었다. 장신즈(張新之)는 《홍루몽》 평점에 30년의 시간을 들였고, 천치타이(陳其泰)가 비점한 《홍루몽》 역시 17, 8세에 시작해 45세에 끝냈으니 모두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원룽이 《금병매》를 평점한 것 역시 3년의 시간을 들여 끊임없이 비개(批改)한 것이다. 그리고 톈무산챠오(天目山樵)는 평소 《유림외사》를 즐겨 읽어 60여 세에 비점을 시작한 뒤 10여 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장구한 비점은 이 시기 소설평점의 중요한 현상으로 소설평점이 갖고 있는 자기 감상적인 특성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중국 고대 소설평점은 리줘우(李卓吾)가 만력 20년(1592년)에 《수호전》을 비점한 것으로 시작해서 이 시기에 이르러 이미 300여 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는데, 이렇게 변천해 오는 과정은 복잡다단했고, 평점의 풍격 역시 풍부하고 다양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소설평점이 리줘우의 자기 감상적인 성격의 문인 평점에서 시작해 이 시기에 이르러 다시 자기 감상적인 문인 평점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소설 비평의 새로운 면모를 열었다면, 후자는 소설평점을 종결지어, 하나의 윤회 과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윤회는 그 시작으로 말하자면 통속소설의 지위를 제고하고 소설평점의 효용성을 열었다 할 수 있고, 그 종결로 말하자면 소설평점이 이미 형성된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독서 지도(導讀)적인 성격이 상호 결합된 평점의 틀과 배치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평점은 대체로 19세기말에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평점은 이미 기본적으로 사라졌고, 이를 대신해 일종의 ‘변체’라 부를 수 있는 소설평점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변체’는 결국 20세기 초에 소설평점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른바 소설평점의 ‘변체’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이들 평점은 평점이외의 형태, 곧 총평이나 미비, 협비 등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평점의 함의나 비평 술어는 대부분 전통적인 소설평점의 고유한 특성을 포기했고, 특히 소설평점 중에 정치 개량 사상을 대량으로 표출하고 있어, 소설평점은 내용적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둘째, 이들 소설평점은 대부분 새로 생긴 간행물에 출현했는데, 연재의 형식으로 소설과 함께 간행되었다. 이를테면, 《신소설》이나 《수상소설(繡像小說)》, 《월월소설(月月小說)》 등에 모두 대량의 소설 평본이 간행되었다. 셋째, 이들 소설평점은 주로 ‘신소설’을 평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들 ‘신소설’은 또 주로 당시의 정치 생활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소설평점은 크게 사회를 개량하고 민중을 각성하는 도구 역할을 했고, 소설평점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장법과 결구를 평하고 판단하고, 예술적인 특성을 분석하는 등의 함의는 통상적으로 결여되었다.
청말 소설평점의 이러한 ‘변체’는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유형을 포괄한다. 하나는 ‘신소설’의 제창자가 평점이라는 전통 형식을 운용해 자기가 새로 지은 소설에 평을 한 것이다. 이런 유형의 평점자로 주요한 인물은 량치차오(梁啓超), 우졘런(吳趼人), 리보위안(李伯元), 류어(劉鶚)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평점의 형식으로 구 소설에 대해 새로운 이론적 비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옌난상성(燕南尙生)의 《신평수호전》이 대표적이다.
자기가 새로 지은 소설에 비(批)를 한 것 가운데 주요한 것으로는 량치차오의 《신중국미래기(新中國未來記)》, 류어의 《노잔유기(老殘遊記)》, 우졘런의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양진연의(兩晋演義)》, 리보위안의 《문명소사(文明小史)》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량치차오의 《신중국미래기》가 가장 특색이 있다. 이 책은 량치차오의 미완성 작품으로 사상이 방대하면서도 번잡하고, 형식이 혼란스러운 데다 정치적인 설교로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그 평점 역시 정치 설교의 구성 부분으로 평점이 응당 갖추어야 할 사상과 예술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전혀 도외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제4회에서 주인공은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유람하며 열강들이 당시 중국을 참외 자르듯 나누어 먹은(瓜分) 고통스런 현실에 비감해 하는 내용을 서술하면서 회말총평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을 참외 자르듯 나누어 먹은 참혹한 현실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이를 걱정하는 이는 적다. 사람들의 정리는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에 가려 미구에 닥칠 위기는 알지 못하고 유유자적할 따름이다. 이 편에서는 뤼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서술함으로써 그를 빌어 하나의 모델로 삼아 국민들을 위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글이다.(瓜分之慘酷, 言之者多, 而眞憂之者少. 人情蔽于所不見, 燕雀處堂, 自以爲樂也. 此篇述旅順苦况, 借作影子, 爲國民當頭一棒, 是煞有關系之文.)”
《신중국미래기》의 평점은 대부분 그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평점으로 말하자면 이미 그것이 갖추고 있어야 할 본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량치차오는 ‘소설계 혁명’을 주창한 기수(旗手)로 소설사에서 그 공은 무시할 수 없지만, 성공적인 소설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설의 예술적 특성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고, 그의 설교 류의 평점 역시 사리 분별이나 따지는 정도였다. 오히려 류어나 우졘런 등과 같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평한 것 가운데에는 일정한 이론적 가치가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우졘런은 《양진연의》의 제1회 평어 중에 역사소설에 대한 일단의 평술을 하고 있다.
“소설을 짓기도 어렵지만, 역사소설을 짓기는 더 어렵고, 역사소설을 짓되 역사의 진실한 모습을 잃지 않기는 더더욱 어려우며, 역사소설을 짓되 그 진실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게 하는 것은 특히나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을 서술한 곳에 간혹 앞뒤로 약간 어긋나는 것은 붓 가는 필세를 따르다 보면 부득이한 것이다. 혹은 약간 견강부회를 해 윤색하는 것 역시 부득이한 것이다. 나중에 그 내용을 따라가며 미비를 가해 그것을 지적하고, 어떻게든 대략적이나마 흥미를 빌어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한 것을 다시 지적함으로써 미혹되지 않게 해야 한다.(作小說難, 作歷史小說尤難, 作歷史小說而欲不失歷史之眞相尤難, 作歷史小說不失其眞相而欲有趣味, 尤難之又難.其叙事處或稍有先後參差者, 取順筆勢, 不得已也.或略加附會, 以爲点染, 亦不得已也.他日當于逐處加以眉批指出之, 庶可略借趣味以佐閱者, 复指出之, 使不爲所惑也.)”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역사소설의 창작과 그 관념, 술어는 이미 전통적인 소설평점과 그 취향이 크게 다르며, 근대적인 문학사상의 특질을 체현하고 있다.
광서 34년(1908년)에는 옌난상성(燕南尙生)의 《신평수호전》이 간행되었다. 이 책의 표지 윗 부분에는 작은 글자로 “조국 제일 정치소설(祖國第一政治小說)”이라 쓰여져 있어, 그 평점의 주지(主旨)를 밝혀 놓았다.
“《수호전》에는 과연 취할 만한 것이 없는가? 평등권과 자유는 유럽에서 핀 꽃이 아니라 세계가 다투어 서로 취한 것인가? 루쏘나 몽테스키외, 나폴레옹, 워싱턴, 크롬웰, 사이고 다카모리, 황쭝시, 자쓰팅은 국내외의 대 정치가와 사상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스나이안(施耐庵)이라는 자는 스승도 없고, 의지할 바도 없이, 홀로 여러 성인과 현인, 호걸들에 앞서 절묘한 정치학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할 것이다. 통속 소설을 지어 과연 취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인가?(《水滸傳》果无可取乎? 平權自由非歐洲方綻之花, 世界競相采取者乎? 盧梭、孟德斯鳩、拿破侖、華盛頓、克林威爾、西鄕隆盛、黃宗羲、査嗣庭, 非海內外之大政治家思想家乎?而施耐庵者, 无師承、无依賴, 獨能發絶妙政治學于諸賢圣豪杰之先. 恐人之不易知也, 撰爲通俗之小說, 而謂果无可取乎?)”
이것으로 옌난상성은 《수호전》이 “조국 제일의 소설이고, 스나이안이라는 자는 세계 소설가의 비조”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가 서술한 것을 보면, 《수호전》은 “사회소설”이고, “정치소설”이며, “군사소설”, “윤리소설”, “모험소설”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공덕의 시초를 강론하고, 헌정의 남상을 논한 것이다.(講公德之權與也, 談憲政之濫觴也.)”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 옌난상성의 《수호전》에 대한 이른바 “신평”에는 정치적인 설교의 색채가 충만해 있고, 그의 《수호전》에 대한 “명명(命名)과 석의(釋義)”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는데, 이를테면 [작중 인물인] 스진(史進)에 대한 해석이 그러하다. “[그의 성인] 스(史)는 《사기(史記)》의 ‘사(史)이고, 진(進)은 진화의 진이다.(史是史記的史, 進是進化的進)”, “크게 개혁을 행하여, 헌정국가를 만들어냈으니, 중국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문명으로 나아간 것이다.(大行改革, 鑄成一個憲政國家, 中國的歷史, 自然就進于文明了.)” 《신평수호전》 중에서 보이는 “석의(釋義)”는 모두 이런 식으로 임의로 갖다 붙이고 견강부회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소설평점을 개인의 정견을 드러내 보이고 정치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사상은 당시에는 일정한 대표성을 띠고 있었기에, 《신평수호전》은 그 당시에는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혹은 이것이 소설평점사에서 최후의 명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소설평점은 300여 년을 거친 뒤 이 시기에 이르러 끝내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 되었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소설평점이 쇠미한 데는 평점 내부의 원인도 있지만, 외부의 영향도 있다. 내부의 요인으로 보자면, 청말 소설평점의 거칠고 비루한 것은 소설평점이 점차 독자를 잃어가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신문 소설의 “여백을 채우는(補白)” 성격을 띤 이른바 ‘평점’이라고 하는 것은 소설평점이 있으나 마나 한 ‘역할’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외부적인 원인으로 보자면, 청말 이래 소설이 점차 전통의 ‘변방’ 문체에서 점차 문학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한편, 소설 연구 방식 역시 전통적인 틀을 벗어났다. “본보의 논설은 전적으로 소설의 범위에 속하며, 요지는 중국의 설부(說部)를 위한 새로운 경계를 열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문학상의 소설의 가치와 사회적으로 소설의 세력, 그리고 동서 각국의 소설학 진화의 역사와 소설가의 공덕과 중국 소설계 혁명의 필요와 그 방법 등을 논하고 있다.(本報論說, 專屬于小說之范圍, 大指欲爲中國說部創一新境界, 如論文學上小說之价値, 社會上小說之勢力, 東西各國小說學進化之歷史及小說家之功德, 中國小說界革命之必要及其方法等.)” 개별 텍스트에만 전념하는 비평 방식으로서의 평점은 이미 ‘소설’의 전 방위적인 연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소설계 혁명’이 사회적으로 이끌어낸 진동은 새로운 비평 형식을 절박하게 요구했다. 이에 신문에 부수되는 형식으로 공생한 ‘논문(論文)’과 ‘총화(叢話)’ 등과 같은 형식이 점차 소설 비평의 중심 무대를 차지하였기에, 소설평점의 ‘양위’는 이미 필연적인 추세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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