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마의4 조휴가 패배한 석정石亭전투를 삼국연의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조휴가 패배한 석정石亭전투를 삼국연의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图片来源 | 石亭之战:真的是周鲂断发赚曹休吗?贾逵是否有说周鲂投降是诈? 글: 정정(丁丁) 삼국시대에 석정전투는 기실 아주 유명한 전투이다. 그리고 아주 멋진 전투이다. 당시 오(吳)나라의 총사령관인 육손은 주항, 전종, 주연등 저명한 장수를 이끌고 위나라의 조휴가 총사령관으로 가목, 주령, 왕릉이 이끄는 십만대군을 물리치고, 1만여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았다. 위나라의 총사령관인 조휴는 최종적으로 화병으로 죽었다. 당시, 육손이 만일 과감하게 주항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조위정권의 수도를 바로 취하고, 조위정권을 와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휘황하고 멋지며 보기 좋은 전투가 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확실히 이해가 되지 .. 千里眼---名作評論 2023. 5. 20. 유비의 시대, 법정의 시대 서성의 삼국지 강의 유비의 시대, 법정의 시대 이우재 나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곧잘 10년씩 끊어서 본다. 그러면 시대의 흐름이 더 잘 보인다. 이렇게 보았을 때 210년대의 10년은 유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적벽전(208)이 일어나기 전 유비는 유표 밑에서 신야에 주둔하며 군사 5천 밖에 없었지만 적벽전 이후 형주 사군을 얻고, 황충과 위연과 마량과 마속을 얻고, 211년 익주(사천성)로 들어가 214년 성도를 점령한다. 유비야말로 적벽전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중으로 들어온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까지 점령하여 진령 이남의 사천을 온전하게 지배하며 한중왕을 선포한다. 그 결과 221년 황제에 오르니 이 10년은 정말 유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 반면 같은 시기의 .. 千里眼---名作評論 2023. 1. 31. 조조와 사마의의 첫대면 서성의 삼국지 강의 조조와 사마의의 첫대면 이우재 아래의 3분 짜리 동영상은 드라마의 일부인데 이를 본 사람 가운데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염려되어 몇 자 적어본다. 드라마를 혹애하는 사람조차 아마 모르지 않았을까… 싶다. 사마의(사마중달)는 한나라 때 태위(국방부장관)를 배출한 명문 집안 출인. 조조(47세)가 사마의를 처음 부른 것은 관도전이 일어난 다음해인 201년이었다. 사마의(23세)는 칭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젊은 사마의로서는 조조가 대단치 않아 보였던 것 같다. 영상의 장면은, 208년 적벽전 바로 전에 조조(54세)가 두 번째 사마의(30세)를 불러 만났을 때로, 이때가 첫대면이었다. 조조가 사람을 보내면서 불러서 오지 않으면 죽이라고 했으므로 사마의는 나가지 않을 수.. 千里眼---名作評論 2023. 1. 29. 사마의가 궁금하다 서성의 삼국지 강의 사마의가 궁금하다 이우재 1 나는 사마의가 싫었다. 그의 뛰어난 책략이, 자로 잰 듯한 빈틈없는 작전이, 용서를 모르는 가혹함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냉정하고 정확했다. 그는 기다릴 줄 알았고, 일어날 때를 알았고, 공격할 때를 알았지만, 인정이 없고 용서를 몰랐다. 기계와 같았다. 영민하고 출중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출세 기계’와 같았다. 그것이 그동안의 나의 인상이었다. 소설이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한 맞수로 내세워서가 아니라, 그는 확실히 공업에서는 탁월했다. 삼국은 결국 그의 손자 사마염이 서진을 세우고 통일하지 않았는가. 그 토대는 십년 동안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일으킨 고평릉 쿠테타 덕분이 아니겠는가. 그 이전에 조조와 조비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린 덕분.. 硏究篇---綜合文學 2023. 1. 28. 이전 1 다음 💲 추천 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