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휴가 패배한 석정石亭전투를 삼국연의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글: 정정(丁丁)
삼국시대에 석정전투는 기실 아주 유명한 전투이다. 그리고 아주 멋진 전투이다. 당시 오(吳)나라의 총사령관인 육손은 주항, 전종, 주연등 저명한 장수를 이끌고 위나라의 조휴가 총사령관으로 가목, 주령, 왕릉이 이끄는 십만대군을 물리치고, 1만여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았다. 위나라의 총사령관인 조휴는 최종적으로 화병으로 죽었다. 당시, 육손이 만일 과감하게 주항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조위정권의 수도를 바로 취하고, 조위정권을 와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휘황하고 멋지며 보기 좋은 전투가 <삼국연의>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그뿐아니라, 동오와 조위간에 발생한 강릉전투에 대하여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전쟁을 잘 묘사하는 것이 장점인 <삼국연의>에서 왜 석정전투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삼국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작자가 석정전투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주요한 원인은 작자가 이릉지전의 참열(慘烈)함을 돋보이게 하고, 유비가 이릉지전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영광스러운 패배라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손오정권의 주요 장수가 모두 이릉지전에서 희생시켰다. 그래서 나중의 이릉전투에서 계속 써나갈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릉지전에서 희생된 손오의 많은 장수들은 석정전투의 진실한 역사에서 핵심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이릉지전에서, 작자는 촉한을 편들었기 때문에 최소한 5개 방면에서 고쳐 썼다:
첫째, 동오대장 감녕은 <삼국연의>에서 이릉지전에서 촉국의 만장(蠻將, 오랑캐출신 장수) 사마가(沙摩柯)에게 사살되었다고 적었으나, 진실한 감녕은 기실 이릉지전전에 병사했다. <삼국지>에서 감녕은 220년에 병사하는데, 이릉지전은 221년에 발발한다.
둘째, 손오의 주연, 반장등 저명한 장수는 <삼국지>의 이릉지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전사하지 않았다. 이릉전투이후의 강릉전투에서 주연은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위측의 조진, 하후상, 장합등 고급장수들이 이끄는 대군과 6개월이상 혼자서 막아낸다. 조위대군은 결국 어렵다는 것을 알고 물러난다. 이렇게 하여 화하에 명성을 떨친다. 관우가 일으킨 강릉전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리고 주연은 스스로를 보전하였으니 관우보다 더 뛰어난 것같다. 다만 <삼국연의>에서 주연, 반장은 모두 전사한다. 이렇게 해버리니, 이어지는 동오와 조위간에 발생한 강릉전투를 써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핵심인물인 주연을 이미 이릉전투에서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관우가 화하에 명성을 떨치는 이릉지전을 일으켰다는 것만 알지 동오와 조위간에도 참열한 강릉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게 만들었다. 그 이후의 석정전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석정전투에서 주연은 여전히 동오의 핵심장수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셋째, 촉한정권의 대장 부사인과 미방이 손오에 투항한 것은 <삼국지>의 사실이다. 다만 나중에 그들은 촉한으로 도망쳐 돌아가지도 않았고, 마충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두 사람은 손오에 투항한 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자 마충을 죽이고 촉한으로 도망쳐 돌아갔으나 유비가 처형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두 명의 대장인 범강과 당달도 마찬가지로 촉한정권으로 도망쳐 돌아가지 않았다.
넷째, 동오의 총사령관은 철군하고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하거나 심지어 촉한정권을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진실한 역사는 육손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한 것이다: 하나는 손유연맹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오는 단독으로 존재해나갈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조위가 자신이 아직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해올까 겁을 냈다. 어쨌든 이릉지전은 비록 손오의 대승으로 끝나지만 손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연의>의 작자는 제갈량의 재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육손은 제갈량이 파놓은 팔진도에 빠져 방향을 잃어서 공격할 수 없었다고 완전히 헛소리를 적어 놓았다.
다섯째, 쌍방군대는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은 출동시킬 수가 없었다. <삼국연의>에서 유비는 70만대군, 동오는 20만대군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실제로 과장이 너무 심한 것이다. 당시 촉한의 전체 인구가 백만가량인데, 노인고 어린아이를 빼고 나머지를 다 합쳐야 70만이 되지 않는다. 동오는 한번도 그렇게 많은 군대를 내보낸 적이 없었다. 설사 적벽대전이라고 하더라도 3만에 불과했다. <삼국지>에는 유비가 10만을 출병시키고, 동오는 약 6만을 출병시켰다고 적었는데, 비교적 신뢰도가 높다.
그래서, <삼국연의>에서 왜 동오의 활동이 아주 평범한지, 심지어 강릉전투와 석정전투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작자가 유비르 끌어올리기 위하여 동오의 많은 저명한 장수를 이릉전투에서 희생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발생하는 강릉전투, 석정전투등 저명한 전투에 핵심지휘관들은 바로 이들 소설이 희생시킨 장수들이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무리 <삼국연의>라고 신화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석정 전투(石亭 戰鬪) 혹 협석 전투(夾石 戰鬪)는 228년 삼국시대 때 위나라와 오나라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 과정
당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을 막은 데 성공한 위나라의 사마의는 양주 도독 조휴로부터 오나라 양주 파양 태수 주방이 위나라를 돕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사마의는 위나라 황제 명제에게 소식을 알리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다. 명제는 일단 조휴에게 명해 오나라를 치게 하고 사마의를 시켜 조휴를 돕게 하고, 가규에게는 만총, 호질 등 4군을 지휘하여 동관으로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나라의 함정이었는데 조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심양을 향해 진격한다. 한편 오나라에서는 주방이 조휴를 유인하는 사이, 손권이 육손에게 황월을 주고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주환, 전종이 좌우독이 되어 각기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휴를 맞아 공격했다. 조휴는 자신이 속았음을 알고 군사를 물리려고 했다가, 속은 것이 부끄럽고 또 자신의 병력이 많고 정예하므로 오나라 군대와 교전했다.
조휴가 패퇴하여, 오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를 협석까지 추격하여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수레 1만 대와 조휴 군대의 기계를 대부분 빼앗았다. 왕릉이 목숨을 바쳐 힘껏 포위망을 뚫었으므로 조휴 군대는 궁지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조예의 명령으로 동관으로 진격한 가규는 동관에 적의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오나라 군대는 조휴가 진격하는 환현 쪽에 집결했으며 조휴는 이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조휴를 응원하는 꼴로 진군했다가 조휴가 졌다는 소식을 듣고 신속히 진군하여 의병으로 오나라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고 조휴는 퇴각하여 석정까지 물러났다.
결과 및 영향
조휴의 소식은 사마의에게 전해져 사마의 역시 철군을 하고 이는 촉나라에도 전해져 제갈량이 다시 제2차 북벌을 일으킨다.
이 싸움의 패배로 조휴는 악창이 나 죽었고, 가규도 급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후 위나라의 양주 방면 전선은 만총이 전장군 ·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어 담당했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석정 전투
삼국지연의에서는 주 교전처가 환성 - 협석이 아닌, 석정으로 되어 있다. 또, 서성이 참전하여 활약하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지 조휴
조휴는 예주 패국 초현 출신으로 자는 문열(文烈)이다. 조휴는 위나라 조조의 조카이다. 전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조휴의 가족들은 흩어져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0여 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홀로 한 명의 객과 함께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이후 조휴는 노모를 모시고 오군으로 갔다.
조조
조조가 거병하자 조휴는 이름을 바꾸고 형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조조를 만났다. 자신을 찾아온 조휴를 만난 조조가 말했다. 조조 “이 아이(조휴)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로다.” 조조는 조휴를 자신의 아들 조비와 함께 머물게 하며 아들같이 대했다.
호표기
조휴는 호표기를 이끌고 많은 정벌을 수행했다.
호표기란?
조조의 친위 기병으로 정예 중 정예 조순, 조조, 조휴, 조진 등이 지휘관을 지냈다.
한중 공방전
218년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는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조조는 조홍을 보내 오란과 맞서게 했는데 조휴를 기도위로 임명해 조홍의 참군으로 참전하게 했다. 장비와 마초가 오란을 지원해 조홍군의 배후를 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군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조휴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한다면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오히려 과장하는 모습을 보이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오란을 공격해야 합니다. 오란을 격파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은 조휴의 말을 받아들여 오란을 공격했고 격파했다. 조휴의 말대로 장비와 마초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조휴는 참군으로 참여했지만 장수처럼 활약했고, 조조는 이후 한중에서 철수한 후 조휴를 중령군으로 임명했다.
조비
220년 조조가 세상을 떠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조휴는 여군장군에 임명되고 동양정후에 봉해졌다. 하후돈이 세상을 떠나자 조휴는 진남장군 가절로 임명되었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역양에 주둔하게 하자 조휴가 가서 그를 격파했다. 조휴는 따로 군사를 보내 강 건너 무호에 있는 적의 둔영 수천 가를 불태웠다. 이 공을 인정받아 정동장군, 양주자사로 승진했고 안양향후로 봉해졌다.
조비의 총애
조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휴는 큰 슬픔에 빠졌다. 조비는 시중을 보내 조휴가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게 하였지만 조휴는 여전히 힘들어 했다. 조휴는 초로 돌아가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고 싶다고 청했고, 조비는 이를 받아들여 고향으로 가서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조휴가 장사를 치르고 돌아오자 조휴를 총애한 조비는 친히 만나 그를 위로했다.
222년 조비가 손권을 공격할 때 조휴는 장료, 장패 등과 함께 동구로 나아가 오나라군을 공격했다. 조인은 유수를 공격했고 조진, 하후상, 장함, 서황은 남군을 공격했다.
손권은 주환을 보내 조인을 상대하게 했고 여범, 전종, 서성에게 조휴, 장료, 장패를 상대하게 했습니다. 제갈근, 반장, 양찬을 보내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을 상대하게 했다.
11월 큰 바람이 불어 여범과 수천 명의 병사들이 익사하고 말았다. 조휴 등은 폭풍으로 약해진 오라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남은 오나라군은 장강 남쪽으로 건너 하제군과 합류했다. 하제의 군대는 매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무장하고 있었는데 조휴 등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조휴는 장패를 보내 서릉을 습격하게 해서 공을 세웠지만, 서성의 군대를 공격해서 승리하지 못했고, 윤로에게 전종을 공격하게 했지만 윤로는 패배하고 전자했다. 223년 조인의 패배로 위나라의 오나라 공격은 중단되었다.
조예
226년 조비가 세상을 떠나고 조예가 뒤를 이었다. 조휴는 조진, 사마의와 함께 조예를 보좌했다. 오나라의 장수 심덕이 환현에 주둔하자 조휴는 그를 격파하고 수급을 베었고 한종, 적단 등의 항복을 받다. 식읍이 늘고 대사마로 승진했다.
석정 전투
228년 조예는 두 갈래 길로 군대를 보내 오라라를 공격하게 했다. 사마의는 한수로, 조휴는 10만 병사를 이끌고 심양으로 진격했다.
조휴는 주방이 거짓으로 투항한 것을 믿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육손, 전종, 주환이 조휴를 공격하자 자신이 주방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된 조휴는 퇴각하려다가 군사수가 많은 것을 깨닫고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싸움이 불리해지자 퇴각하여 석정에 머물렀다.
조휴가 패배할 것을 예상한 가규의 도움과 죽을 각오를 하고 활약한 왕릉의 활약으로 조휴는 퇴각할 수 있었다. 밤중에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버리고 온 군수 물자가 매우 많았고 1만의 병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가규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가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휴는 가규가 자신을 구원해 주었지만 오히려 늦게 온 것을 원망했다. 가규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고, 가규도 돌아와 상소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가규가 옳은 것을 알았지만 중책을 맡은 조휴의 입장을 생각하여 두 명 모두에게 잘못을 묻지 않았다.
죽음
조휴는 석정 전투 패배에 대해 조예에게 글을 올려 사죄했다. 조예는 오히려 조휴를 위로하고 예우와 포상을 늘렸다. 조휴는 패배의 분함과 부끄럼움으로 등에 악성 종기가 생겨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예는 조휴의 시호를 장후로 했고 조휴의 아들 조조(曹肇)가 뒤를 이었다. 조조의 자는 장사(長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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