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동성구(東城區) 숭문문외대가(崇文門外大街) 자기구(磁器口)에 "조설근고거기념관(曹雪芹古居記念館)"이 개관
글: 북청천천부간(北靑天天週刊)
최근 동성구(東城區) 숭문문외대가(崇文門外大街) 자기구(磁器口)에 "조설근고거기념관(曹雪芹古居記念館)"이 개관했다. 조설근의 베이징에서의 거처에 관한 전설은 비교적 많다. 그중 경서(북경서쪽)의 거처에 관한 견해만 10여곳에 이른다. 예를 들어, 해전정백기(海澱正白旗), 법해사(法海寺), 문두촌(門頭村), 북신장(北辛莊), 사왕부(四王府), 북구촌(北溝村), 와불사(臥佛寺), 동욕(峂峪), 백가탄(白家疃), 석경산오리타(石景山五里垞), 자선사(慈善寺), 쌍천사(雙泉寺), 사초지(謝草池), 복수령(福壽嶺)등.
정백기(正白旗)에서 책을 쓰고, 사후에 지장구(地藏溝)에 묻히다.
정백기는 서산(西山) 동쪽언덕의 향산(香山) 자락 아래에 있다. 즉 국가식물원 북원(北園)내에 있으며, 청나라때 서산 건예영(健銳營) 좌익사기(左翼四旗)중 하나이다.
국가식물원 남문으로 들어가서 나무그늘이 있는 도로를 따라가면 얼마 걷지 않아 조설근기념관에 도착한다. 이곳은 전설에 따르면, 조설근의 집안이 몰락한 후, 먼저 성안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서산 정백기의 거주지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석두기(石頭記, 즉 홍루몽)>을 창작하고, 죽은 후에는 이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지장구에 묻혔다고 한다.
기념관의 사람은 이렇게 소개한다. 일찌기 1960년대, 홍학가(紅學家) 주여창(周汝昌), 오세창(吳世昌), 오은유(吳恩裕)등이 향산 일대를 탐방했다고 한다. 현지노인도 조설근은 건륭20년(1755년)이전에 사왕부(四王府) 서쪽의 정백기에 거주했고, 문앞에는 큰 홰나무(槐樹)가 있었다고 한다. 일찌기 향산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홍루몽>의 인물, 이야기를 가지고 단현(單弦), 연화락(蓮花落), 자제서(子弟書), 타항가(打夯歌), 팔각고자(八角鼓子)등 민간예술작품을 만들어 공연하고 노래했다.
1971년 4월, 정백기39호에 거주하던 서성훈(舒成勛)은 집을 수리하다가, 서이방(西里房)의 서쪽 벽에서 시문묵적(詩文墨迹)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원부근빈이례상교천하유(遠富近貧以禮相交天下有), 소친만우인재절의세간다(疏親慢友因財絶義世間多)"(부자를 멀리하고 가난뱅이를 가까이하며 예로 사귀는 경우도 천하에 있다. 친척을 멀리하고 친구에 소홀히하며 재물때문에 의를 끊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는 제벽시(題壁詩, 벽에 쓴 시)가 발견된다. 전설에서 언급된 시문과 아주 비슷하여, 사학계, 홍학계, 문물계의 주목을 끈다. 고증을 거쳐, 어떤 사람은 이곳이 조설근이 말년에 거주하면서 <홍루몽>을 쓴 곳이라고 하였다. 또 상당히 많은 사람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제벽시의 출처를 고증한 후 모두 고서에서 찾아서 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고거설'을 부정한다. 그후 40여년간 '고거설'에 대한 논쟁을 끊이지 않았고,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1983년 4월, 정백기 39호의 옛부지에 조설근기념관(원래는 '조설근고거'로 하려고 했다)을 건립하고, 조설근의 전설과 관련한 물품과 <홍루몽>에서 묘사한 실물복제품등을 전시한다. 이렇게 하여 '홍학'애호가들이 찾아보는 장소가 된다.
지금, 조설근기념관의 문앞에는 확실히 세 그루의 홰나무가 있다. 그중 동쪽의 "왜발괴(歪脖槐)"는 아주 특이하여, 조설근의 집문앞에 있다는 고괴(古槐)와 비슷하다.
기념관내를 참관한 후, 나는 서북으로 걸어갔고,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역시 전설중에 조설근이 서산에서 살았다는 곳중 하나인 북구촌으로 갔다.
북구촌에 살면서, 자주 앵도구(櫻桃溝)로 놀러갔다.
도보로 20여분을 걸어가면 와불사의 서쪽에 있는 북구촌 옛부지가 있다. 이곳을 '옛부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마을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은 식물원의 매원(梅園)과 서산실험임장(西山實驗林場) 와불사분장(臥佛寺分場) 소재지이다.
홍학가 주여창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일찌기 와불사 부근의 북구촌에 살았다. 1963년에 출판한 <조설근>과 <홍루몽고증>은 모두 경서의 거주지를 와불사 서남쪽의 북구촌으로 비정한다: "조설근 당시의 고거부근에는 상당한 면적의 대나무밭이 있어서, 이것이 아주 좋은 단서가 되었다."
필자는 일찌기 북구촌에 거주한 적이 있는 서(徐)씨성의 노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설근이 이곳에 잠시 거주했다는 소문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조설근은 매일 책을 쓰고, 시를 짓는데, 항상 술을 마셨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겨온 후, 그의 집안사정은 아주 빈한했고, 그래서 술값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외상을 했다. 그는 글을 잘 썼을 뿐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다.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화와 부채에 그리는 그림이었다. 어떤 때는 마을 술집주인을 불러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게 한 후 부채그림 몇 개를 그려주면서, 그걸 은자로 바꾸라고 해서, 술값을 대신 냈다. 그래서 향산일대에는 조설근이 술을 좋아했다는 말을 할 때면 "매화전래부주가(賣畵錢來付酒家)"(그림을 팔아 얻은 돈을 술집에 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북구촌의 서북쪽은 앵도구이다. 고적(古迹)이 아주 많다. 수원지(水源地)의 원보석(元寶石)과 석상송(石上松)은 두 곳의 멋진 광경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설근이 북구촌에 거주할 때, 자주 앵도구로 고적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는 '석중송'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홍루몽>의 가보옥(賈寶玉)과 임대옥(林黛玉)의 '목석인연(木石姻緣)"의 사랑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북구촌의 동쪽에는 고찰 와룡사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연간에 건설되었다는 유리패방(琉璃牌坊)은 바로 <홍루몽> 제5회 "가보옥신유태허경, 경환선곡연홍루몽"의 원형이라고 한다. 와불사의 행궁원, 장경루, 사라수등도 모두 <홍루몽>에 상응한 묘사가 있다. 그러므로, 와불사는 일부 '홍학'연구자들이 <홍루몽>의 배경지로 여겨지고 있다.
북구촌은 산골짜기의 양쪽에 집들이 흩어져 있고, 촌민들은 대부분 서(徐)씨, 강(姜)씨이다. 1993년이후 북경식물원을 확장하면서, 촌민들은 이주해야 했고, 마을은 사라진다. 지금은 이미 종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문두촌에 잠시 거주하며, 술집주인과 가까운 친구가 되다.
문두촌은 향산의 남록(南麓)에 있다. 경서에서 아주 유명한 촌락이다. 명나라때 <장안객화(長安客話)>에는 "벽운사에서 옛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서 약 십리정도 가면 문두촌이 있다. 이곳이 서산으로 들어가는 문입구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청나라때 <일하구문고(日下舊聞考)>에도 "문두촌은 지금의 정의원(靜宜園) 동남 2리쯤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마을은 이미 사라졌지만, 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다.
국가식물원에서 문두촌까지는 시내버스가 직접 가는데, 20분이 걸리지 않아 문두촌정류장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려 동쪽으로 백여미터를 가서 좌회전하면, 오동나무가 심어진 큰 길이 나온다. 북쪽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문두촌이다.
1961년 북경시문화국에서 조설근의 서산거처와 장지를 조사할 때, 일찌기 하나의 단서를 얻는다. 조설근이 한때 북신장에 거주했다는 것이다. 홍학가 오은유 선생은 탐방중에 문두촌의 노인에게 조설근이 문두촌에 거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조설근서산족적고략(曹雪芹西山足迹考略)>에는 십여곳의 조설근이 서산일대에서 살았을 것같은 곳을 열거하고 있다. 문두촌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문두촌은 서산 건예영의 우익영방에 인접해 있다. 기영관병과 가족들이 자주 물건을 사러 오는 곳이다. 조설근은 문두촌, 북신장, 예왕분(禮王墳) 일대를 비교적 잘 알았고, 자주 오갔다. 민간에는 일찌기 그가 문두촌에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두촌 부근을 근 1시간동안 다녔는데, 옛 마을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문두촌로(門頭村路)'라는 도로리음으로 고촌락의 소재지를 개략 확정할 수 있을 것같다.
80여세의 대대로 문두촌에서 살아온 조(曹)씨성의 사람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조설근은 문두촌에서 잠깐 잠깐 약 3개월여를 머물렀다. 그와 함께 우익종학(右翼宗學)에 근무하는 동료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곳은 경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주 조용하다. 조설근은 마을 주변의 많은 고적을 찾아다녔고, 마을 남쪽의 예왕분 일대를 그는 여러번 찾아갔었다. 건륭연간에 문두촌에는 "행화춘주관(杏花春酒館)"이 있었는데, 주인의 성은 양(楊)씨로 산서(山西) 사람이었다. 그가 파는 술은 자신이 담근 진양(陳釀)으로 향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조설근도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이 술집의 주인 양씨는 몇년간 사숙(私塾)에서 글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글자를 좀 알고, 고서를 보기를 좋아했으며, 글씨도 잘 썼다. 금방 조설근과 친한 친구가 되고, 조설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술집을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쓴 책의 원고를 양씨에게 보여주었고, 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된다.
기억 속의 문두촌은 아주 큰 촌락이다. 주도로는 동서방향이고, 양쪽에 상점이 많았으며, 일찌기 삼의묘(三義廟), 오성암(五聖庵), 진무묘(眞武廟), 철관제묘(鐵關帝廟), 조가묘(曹家廟)등이 있었다. 그리고 채소밭과 과수원도 있었다. 20세기 60,70년대에는 사계청공사(四季靑公社) 문두촌대대(門頭村大隊)가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과 밭이 모두 사라졌다.
법해사에 출가했다가, 환속한 후 '홍루몽'을 썼다.
문두촌의 서쪽 멀지 않은 만안산(萬安山)에는 법해사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설근이 출가해서 좌선하던 곳이다.
북경 서산에는 두 개의 법해사가 있는데, 하나는 석경산 모식구(模式口)에 있고, 다른 하나는 해전 향산남록에 있다.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가 있는데 수리가 떨어져 있어서 위치한 방위에 따라 모식구법해사를 '남법해사'로 부르고, 향산법해사를 '북법해사'로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조설근은 가산몰수당한 후, 가족을 따라 강녕(江寧,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겨온다. 몇년후에 세속을 떠나 북법해사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그리고 절안의 노승을 스승으로 모신다. 노승은 조설근의 신세내력을 잘알고 있을 뿐아니라, 그에게 살아갈 방향을 가르쳐준다. 1년후 조설근은 참선의 이치를 깨닫고, 환속한다. 그리고 <석두기>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피열십재(披閱十載), 증산오차(增刪五次)"(10년간 살펴보면서, 추가하고 뺀 것이 5번이다)를 거쳐 마침내 완성한다. 비록 이 설은 사적에 보이지 않지만, 법해사에 전설적인 색채를 덧붙여, 홍학가들이 이 곳을 주목하게 된다.
1964년 10월, 노사(老舍) 선생이 경서 문두촌에서 생활체험할 때, 법해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리고 칠률 한수를 짓는다. 그중 제3구는 바로 "금옥홍루종시몽(金玉紅樓終是夢)"라고 되어 있고, 뒤에 주석을 달아놓았다: "동네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조설근이 부근 북법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1991년 9월 11일, 나이 73세의 저명한 홍학가 주여창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산에 올라 북법해사를 고찰한다. 그리고 조설근을 추모하며 <만안산방고찰>을 남긴다.
법해사를 찾아갔을 때, 다행히 그 절의 친구의 가이드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이 절의 역사와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알려주었는데 그중에 조설근이 출가한 이야기가 있는데, 전설적인 색채였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법해사는 원나라때 홍교사(弘敎寺)의 부지에 청나라 순치연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민국시대에는 이미 파괴되었고, 나중에 전쟁으로 불에 탄다. 그래도 여전히 일부 건물은 남아 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점점 황폐화되었다. 마지막에는 겨우 산문(山門) 하나, 몇 개의 석비와 기둥, 기초와 부분적인 벽, 난석과 고목만 남았다. 2016년이 되어 재건된다. 전설에 따르면 조설근은 이 절의 남쪽에 있는 선방에서 매일 좌선했고, 아주 경건했다고 한다.
사원을 돌아보면서 1시간여 머물렀다. 전체 배치가 바뀌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많은 것이 새로 지은 건축물이고, 고적은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것은 수확이 컸다.
복수령(福壽嶺)에 살면서, 고찰선림을 찾아갔다.
북수령은 경서 석경산의 중부에 있다. 즉 언덕의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북경시석경산지구지명지>에 따르면, "복수령의 원래 이름은 소서령(掃鼠嶺, 소서는 松鼠, 즉 다람쥐를 가리킴)이었다. 1930년(실제로는 1923년)을 전후하여, 미국인이 북경에 동인의원(同仁醫院)을 연다. 동시에 이곳에 요양원을 만든다. 그리고 소서령을 복수령으로 개명했다." 기실 '복수령'이라는 명칭은 명나라때부터 있었고, 복수선사(福壽禪師)와 관련이 있다.
489번 시내버스를 타고 복수령정류장에 내리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마을은 일찌감치 철거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20분간 살펴보았는데, 시내버스정류장에 '복수령'이라고 적혀 있고, '복수령남로'라는 도로간판이 세워져 있어서 개략 '복수령'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었다. 공사현장으로 가봤더니 파란색 바탕에 흰색글자로 잘 보이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1호선복수령역(一號線福壽嶺站)" 한 건축노동자에게 물어본 후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지하철 1호선의 복수령역이고 내년에 완공될 것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설근은 옹정6년(1728년), 강녕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먼저 북경성내에 살았다. 지금의 자기구 십자로구 동북쪽의 원래 산시구(蒜市口)라고 부르는 오래된 집이다. 나중에 서교(西郊)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남전창(藍靛廠) 상남기(鑲藍旗) 서남쪽의 두개의 작은 영방(營房, 군대숙사)에 거주했다고 한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영의 방은 너무 작고, 시끄러우며 하루종일 사람들이 오갔기 때문에 조용히 책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장소를 찾았다. 반년후, 부친의 친구 소개로 화기영(火器營)에서 향산 건예영으로 옮겨간다. 나중에 친구의 소개로 여름에 서산 아래의 복수령에서 3개월여간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조설근은 복수령촌의 북쪽 산자락 아래에 있는 한 집에 잠시 거주하면서, 매일 글을 읽고, 책을 썼다. 날씨가 좋을 때면, 부근의 법해사, 승은사(承恩寺), 팔대처(八大處)를 찾아가서 적지 않은 고승들과 사귀었다. 구월이 가까워오면서 날씨가 쌀쌀해지자 다시 향산 건예영으로 돌아간다.
1935년, 작가 단목홍량(端木蕻良, 원명 曹漢文)의 동생이자 저명한 교육가인 장백잠(張伯岑)의 득의제자인 조한기(曹漢奇)는 척추결핵을 앓아, 복수령 동인의원에서 요양했다. 단목홍량오 이곳으로 찾아온 적이 있고, 복수령일대에서 조설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여러 해후 장편소설 <조설근>을 창작하는데, 책에 나오는 장면은 바로 복수령에서 조설근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사초지에 은거하면서 '홍루몽'을 썼다.
조설근이 죽은 후, 친구인 내무부 한군기 사람인 장의천(張宜泉)은 <상근계거사(傷芹溪居士)>라는 시를 짓는다. 거기에는 "사초지변효로향(謝草池邊曉露香), 회인불견루성행(懷人不見淚成行)"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연구자들은 시에 나오는 '사초지'가 조설근 고거의 소재지의 지명이라고 보았다. 즉, '사초지'를 찾으면 그것은 바로 조설근의 고거를 찾은 셈이라는 것이다. 다만 '사초지'가 어디에 있는지, 홍학계에는 여러 설이 난무한다.
주여창은 <문채풍류조설근>에서 '황엽촌(黃葉村)' 외에 조설근은 또 다른 거주지 '사초지'가 있었다고 보았다. "사초지, 고사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곳이 있다"라고 적었다. "만일 평파산(平坡山)에 가면, 장의천이 조설근을 추도한 시에서 말하는 '사초지'가 있다." 그는 조설근의 북경성을 떠난 후, '건예영일대"에서 "취미산(翠微山)"의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비경"까지의 사이에 초가집을 짓고 거처했다고 보았다. '사초지는 이곳의 마지막 거주지이고, 장의천 한 사람만이 방문한 적이 있어서 추모했다.'고 보았다.
주여창은 '사초지'의 취치에 대하여 개략적인 범위를 표시했다. 즉 지금의 석경산 팔대처부근이다. 이를 가지고 연구자들은 깊이있는 연구를 통하여 '사초지'라는 지명이 원나라때 문헌에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원 태정원년(1324년) 진사, 한림편수, 대도완평(지금의 북경)사람 송경(宋褧)이 <평파방사초지작(平坡訪謝草池作)> 2수가 있다.
이를 통해 분석해보면, "사초지"는 석경산 팔대처 일대에 있다. 조설근이 병사한 후, 장의천은 조설근 고거로 갔고, 오랫동안 사초지에 머물면서 <제근계거사>시를 짓는다:
애장필묵령풍류(愛將筆墨逞風流)
여결서교별양유(廬結西郊別樣幽)
문외산천공회화(門外山川供繪畵)
당전화조입음구(堂前花鳥入吟謳)
갱조미선청련총(羹調未羨靑蓮寵)
원소난망입본수(苑召難忘立本羞)
차문고래수득사(借問古來誰得似)
야심잉피백운류(野心應被白雲留)
시에 나오는 경치가 바로 사초지의 풍광일 것이다.
석경산 지도를 여러 시간 찾아보았지만, '사초지'라는 지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팔대처 부근에서 반나절을 찾아다녔는데도 '사초지'에 관한 정보는 얻어낼 수가 ㅇ벗었다. 단 한 노인은 이런 말을 했다. '사초지'는 쌍천사라고.
시내버스를 타고 흑석두(黑石頭)정류장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후 3킬로정도를 걸어가서 만선교(萬善橋) 서쪽의 쌍천사를 찾았다. 이곳은 새로 지은 사원이다. 그러나 1시간여를 돌아다녔지만, 조설근과 관련한 유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노인에게 '사초지'를 물어보니, 그는 아마도 이 부근일텐데, 지금은 이미 사라졌다고 말했다.
오리타에 칩거하면서 '저서황엽촌(著書黃葉村)'하다.
오리타는 석경산구 서북부, 모식구, 삼가점(三家店), 마욕(麻峪)에서 모두 5리 되는 곳에 있다. 마을에는 소청산(小靑山, 속칭 垞子)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건륭15년(1750년)부터 23년(1758년)까지 황엽촌에 거주했다고 한다. 즉, 석경산 오리타 융은사(隆恩寺) 기민(旗民)촌락이다. 오늘날의 해전 백가탄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고증한 사람은 돈민(敦敏)의 <서교동인유조겸유소조(西郊同人遊眺兼有所弔)>의 시에 "추색소인상고돈(秋色召入上古墩)"의 '고돈'은 향산 정백기의 조루(碉樓)가 아니라는 것이다. "야수어항문농적(野水漁航聞弄笛)"의 '야수어항'도 정백기 주변의 환경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오리타의 주변환경을 현지탐사하고 분석한 후, 돈민의 <서교동인유조겸유소조>에 나오는 "청경일성황엽촌(靑磬一聲黃葉村)" 및 돈성(敦誠, 돈민의 동생)의 <기회조설근(寄懷曹雪芹)>의 시에 나오는 "불여저서황엽촌(不如著書黃葉村)"의 환경은 오리타부근의 융은사촌과 아주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엽촌'이 '융은사촌'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초지'는 조설근이 미자막으로 세상을 떠나 살던 곳이라는 주장은 주여창 선생이 제기했고, 장소는 서산일대이다. 다만 어떤 학자는 이 '사초지'를 남조 사령운(謝靈運)의 싯구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에서 나온 것ㅇ라고 보고, '사초지'가 조설근의 서산 서거장소가 아니라고 본다. 또 다른 오랫동안 북경연가순물사적연구자는 연구축적과 고증경험을 통해 돈민, 돈성, 장의천의 시문이 가리키는 내용을 잘 알아서, 조설근의 서산 거주지를 융은사(황엽촌)이라고 본다. 그후에 쌍천사촌(사초지)로 옮겨갔다고 본다. 그리고 쌍천사촌 사초지고거는 일생의 마지막 몇년을 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리타로 가는 시내버스 몇개 노선이 있다. 필자의 집 근처에는 932번이 있다. 그래서 1시간여를 타고, 오리타에 도착했다. 다만 반시간여를 돌아다녔지만, 오리타촌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한 노인에게 물어보니, 마을은 이미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부근에 '경서오리타민속진열관'이 있으니 거기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네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길을 따라 십여분을 걸어나니, '경서오리타민속진열관'이 나왔다. 나무그늘아레에 몇몇 노인들이 앉아 있어서, 걸어가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노인에 따르면, 이 진열관은 왕가대원(王家大院)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며, 원래의 문패는 오리타 후가서후통(後街西胡同) 5호였다고 한다. 나는 노인에게 이곳에 조설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멀지 않은 곳의 쌍천사 일대에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후 나는 '경사오리타민속진열관'을 참관하면서, 경서의 민속문화를 알아보았다.
백가탄에 거주하면서 마지막 5년을 보내다.
백가탄은 해전구 서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향산 건예영 정백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어떤 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조설근이 향산에 거주하는 동안, 자주 산의 샛길을 통해 정백기에서 백가탄으로 친구를 찾아왔다고 한다. <조설근생평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설근 건륭23년(1758년) 봄, 백가탄으로 이사하다. 건륭28년(1763년) 제적 사망하다. 건륭24년에서 25년(1759-1760)에 남경으로 1년간 간 것을 제외하고, 백가탄에서 5년을 꼬박 생활했다. 이 5년의 기간은 조설근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5년이다. 비록 이 5년동안 조설근의 생활은 가장 궁박했지만, 그는 정력을 완전히 <홍루몽>의 수정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조설근의 친구이자 종실시인인 돈민은 <병호무재기성>에 확실하게 기록해 놓았다. 건륭23년봄, 조설근이 백가탄으로 이사했다고. 그리고 원래의 주석이 있다: "봄에 근포(芹圃, 조설근의 호)가 집으로 찾아와서 얘기했다. 백가탄으로 이사할 것이라고." 이 글을 쓴 후, 돈민은 조설근에게 서화감정을 부탁하기 위해 두번 백가탄으로 간다. 마침 조설근은 집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돈민이 조설근의 백가탄 새 집의 상황도 말하고 있다.
홍학가 오은유는 여러번 백가탄을 탐방했고, <조설근총고(曹雪芹叢考)>에 많이 기록해 놓았다. 그는 조설근이 산앞의 앵도구에서 북상하여 삼주향(三柱香)을 거쳐 산뒤의 백가탄으로 와서, 이현친왕사(怡賢親王祠) 서쪽에 '토옥(土屋)4칸'을 지어 생명의 마지막 5년을 지냈다고 추단했다.
차를 몰아 백가탄에 도착해서 마을에 들어선 후 이곳에 적지 않은 '홍루문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조설근조각상, 조설근길, 그리고 조설근광장, 문화벽에는 조설근의 백가탄에서의 활동궤적을 소개하는 글도 있었다.
마을에서 몇몇 촌민에게 물어보니, 모두 조설근이 이곳에서 살았었다고 말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서로 말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마을 서쪽에 작은 돌다리가 있는데, 다리 끝에 세칸짜리 평방이 있고 그것이 바로 조설근이 살던 곳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조설근이 마을의 오도묘에서 살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설근이 마을의 이현친왕사 서쪽의 토옥에 살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촌민은 마을에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있어 <조설근과 백가탄>이라는 책을 냈으니 찾아보라고 말했다. 아마 조설근과 백가탄의 인연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촌민이 가르쳐주는 방향을 따라 나는 다시 마을에서 반시간여를 탐방했다. 새로운 인문경관외에 네 개의 큰 돌맹이로 만든 작은 돌다리가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설근의 마지막 5년을 바로 이 돌다리 옆의 작은 평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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