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홍학연구의 유파 구홍학 평점파와 색은파 위주 주도적 지위와 관점

一字師 2023. 5. 19.
반응형

홍학연구의 유파 구홍학 평점파와 색은파 위주 주도적 지위와 관점

 

 

홍학紅學이란 단어는 가장 먼저 청대淸代의 이방李放팔기화록주八旗畵錄注에 보였는데, “광서光緖 연간 초에 경조사대부京朝士大夫들이 특히 홍루몽紅樓夢읽기를 좋아하여, 그때부터 서로 홍학을 자랑하며 뽐냈다라고 했다.

 

그때로부터 홍학은 곧 전문적으로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키게 되었다. 200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홍루몽에 관한 연구는 계속 파고들어서 작가의 생애와 가세家世와 작품의 사회적 인식 가치, 예술적 심미審美 가치, 예술 창작의 경험, 홍루몽의 판본版本, 흩어져 없어진 판본 탐구, 지연재평점脂硯齋評点(약칭 지평脂評) 등의 여러 방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평점파評点派

홍학은 시간적으로 구홍학舊紅學과 신홍학新紅學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구홍학은 평점파評点派, 색은파索隱派, 고증파考證派 등의 유파를 위주로 한다. 20 세기의 20년대 초에 호적胡適 선생이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을 발표했는데, 홍학 연구를 주로 작가의 가세와 경력 내지는 판본의 원류源流에 힘을 투입하여,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고, 자기 집안의 일을 쓴 것이라고 확증確證했다.

 

홍학 연구자 호적 선생 - 바이두

고증파의 관점은 점차 평점파와 색은파가 대신하여 홍학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취득했는데, 사람들은 호적 이후의 홍학을 신홍학이라고 불렀다, 가치가 있다고 할 만한 것은, 저명한 학자 왕국유王國維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에서 처음으로 서방철학의 미학사상美學思想을 운용해서, 홍루몽에 대해 계통적으로 전면적인 연구를 진행했는데, 완전히 구홍학과는 다른 신홍학의 범주에 속했다.

 

그밖에, 홍학은 발전하여 계열 별로 분파를 형성했는데, 비교적 중요한 것으로는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조학曹學, 홍루몽40의 본래의 면모의 일저佚著와 전80의 원고原稿와 후40회속서續書의 차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탐일학探佚學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지연재脂硯齋는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을까? 대체로 평점評点의 방식으로 홍루몽에 대해 각종 견해를 발표하는 홍학 연구를 모두 평점파評點派라고 부른다. 그 평점 방식에는 3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정문正文에 비평을 부착하고 권점圈點을 찍은 것인데, 최초에 평점 방식을 사용한 사람은 지연재脂硯齋, 기홀수畸笏叟 등이 그 예인데, 그들은 원작原作 참여자의 신분으로, 80작품에 전면全面적이고, 계통系統적으로 깊이 있게 평점評點을 진행했다. 그 평점은 회전비回前批, 회후비回後批, 미비眉批, 행간측비行間側批, 쌍행협비雙行夾批 등이 있는데, 지극히 높은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밖에, 영향이 비교적 큰 것으로는 왕설향王雪香이 평점한 신평수상홍루몽전전新評綉像紅樓夢全傳, 장신지張新之가 평점한 묘복헌평석두기妙復軒評石頭記, 왕설향과 요섭姚燮이 함께 평점한 증평보상전도금옥연增評補像全圖金玉緣등이 있다.

 

둘째로는 홍루몽을 평해서 전문저작을 쓴 것으로, 건륭乾隆 후기後期에 생겨났는데, 주춘周春열홍루몽필기閱紅樓夢筆記, 이지도인二知道人이 쓴 홍루몽설몽紅樓夢說夢, 해암거사解盦居士가 쓴 오석헌석두기집평悟石軒石頭記集評등이 그 예이다.

 

세 번째는 홍루몽에 나오는 시가詩歌를 평한 것인데, 예를 들면 갑술본甲戌本의 범례凡例 뒤에 있는 浮生着甚苦奔忙.....”부생착심고분망(덧없이 고생스럽게 뛰어다니다)라는 칠률시七律詩를 가 있다. 평점의 대상은 대부분 작품에 있는 인물, 고사故事의 줄거리, 인물의 언어, 경물景物 묘사, 중요한 실마리, 예술적인 구성, 묘사 장법章法(문장을 구성하는 방법), 작자의 입의立意(생각을 정하다) 등의 방면이다.

 

의의意義를 말하자면, 그 중에는 훌륭하고 핵심을 찌르는 말이 많이 있는데, 작품에 내장되어 있는 사상에 대해 심층深層적으로 심미審美적인 경지에 깊이 들어가 찾아낸 것이다.

 

부족한 점으로는, 평점자 중에는 좋은 평점자와 좋지 않은 평점자가 섞여 있는데, 일부 평점자의 사상은 지나치게 진부하고 견식이 천박하거나 심미적 접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평이 요점에 이르지 못해서, 심지어 소설의 원래의 의도까지도 왜곡했다.

 

색은파索隱派

색은파의 대표 인물은 채원배蔡元培이다.

 

그 특징을 들면, 홍루몽중에 있는 편어片語를 들어, 인명人名, 물건物件, 경치, 사건 혹은 세부 내용 등을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나 사건과 연계해서 이를 억지로 대조對照해서, 홍루몽에 쓴 진내용眞內容”, “진고사眞故事를 규명하고 색출索出했다.

 

주요 관점으로는 왕몽완王夢阮과 심병암沈甁庵홍루몽색은紅樓夢色隱에서 홍루몽은 순치황제順治皇帝와 동악비董卾妃 즉 소완小宛 간의 애정고사라는 의견을 제기하고, 보옥寶玉의 원형原型은 즉 순치황제이고, 명주明珠씨 집안일을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홍루몽에 쓴 것은 강희황제康熙皇帝 때의 대학사大學士 명주明珠의 집안일인데, 그 중에서 가보옥賈寶玉이 바로 명주의 아들로 시인으로 이름난 납란성덕納蘭性德이라고 했고, 그밖의 것으로는 화왕신和王申의 집안일을 말한 것이라는 등등의 견해를 냈다.

 

대표작으로는 왕몽완과 심병암의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 채원배蔡元培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및 등광언鄧狂彦홍루몽석진紅樓夢釋眞등이 있다. 구홍학이 신홍학을 향해 이행한 상징으로는 호적胡適 선생이 탄생시킨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을 들 수 있다.

 

홍루몽에 나오는 명언

일모일양一模一樣(모양이 완전히 같다/닮았다)

 

[명언이 나오는 홍루몽紅樓夢본문]

寶玉回到自己房中,告訴了寶釵,說是:“常提的甄寶玉,我想一見不能,今日倒先見了他父親了.我還聽得說寶玉也不日要到京了,要來拜望我老爺呢.又人人說和我一模一樣,我只不信.” (第一百一十四回)

 

[해석문]

보옥寶玉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채寶釵에게 말했다.

 

내가 늘 말하던 진보옥甄寶玉을 내가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는데, 오늘 오히려 그의 부친을 먼저 뵈었어. 듣자하니 그 보옥이도 곧 우리 아버님을 뵈려고 경성에 온다고 해. 사람들마다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전혀 믿을 수가 없어.” (114)

 

[명언고사]

가부賈府와 대대로 알고 지내는 금릉성金陵省 체인원體仁院 총재總裁 진응가甄應嘉가 가부를 예방하려고 왔다. 그는 보옥을 보자마자 놀라며 손벽을 치며 신기하다고 말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대감 댁에 입에 옥을 물고 태어난 아드님이 있는데, 이름이 보옥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놈과 이름이 똑같아서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름이 같은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어서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서 보니까 얼굴도 같은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까지도 똑같으니 정말로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손님이 떠난 뒤에 보옥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채寶釵에게 말했다.

 

내가 늘 말하던 진보옥甄寶玉을 내가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는데, 오늘 오히려 그의 부친을 먼저 뵈었어. 듣자하니 그 보옥이도 곧 우리 아버님을 뵈려고 경성에 온다고 해. 사람들마다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전혀 믿을 수가 없어. 만약 나중에 그가 우리 집에 오게 되면, 너희도 가서 나하고 정말 닮았나 안 닮았나 잘 살펴봐.”

 

그 말을 들은 보채는 에이, 당신은 어째서 점점 정신 나간 말을 하세요. 어떤 남자가 당신과 똑같이 말하는지, 우리에게 살펴보라고까지 말하는 거예요!”

 

보옥은 자기가 실언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홍루몽이야기

홍루몽紅樓夢삽화사揷畵史

 

속담에 牧丹還需綠葉扶목단환수녹엽부(모란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녹색 잎이 받쳐주어야 한다, 즉 무엇이든 혼자 힘으로만은 할 수 없다의 뜻)이라고 했는데, 좋은 문학작품에 좋은 그림이 어울린다면, 바로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으로 경전經典이 더욱 경전다워진다. 홍루몽은 바로 이렇게 적지 않은 그림이 묘회描繪되어 있는 작품인 것이다.

 

홍루몽의 삽화揷畵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연간에 시작하여, 건륭 56년에서 57(1791-1792) 사이에 차례로 출간된 활자본 홍루몽정갑본程甲本과 정을본程乙本에 흑백黑白의 원시적인 목각木刻 삽화 24 폭을 끼워 넣었는데, 당시는 각공刻工(문자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조잡했다.

 

뒤이어서 출현한 형석산민荊石山民홍루몽산투紅樓夢散套에도 삽화가 넣어져 있는데, 그 도면은 주로 정본程本을 본떴지만, 약간의 발전이 있다. 조금 뒤에 출판된 몇 종의 평점본評點本에도 유사한 삽화를 많이 넣었는데, 그 중에서 청나라 도광道光 12(1832)에 출현한 개기改琦가 그린 홍루몽도영紅樓夢圖咏4 48 폭의 흑백도黑白圖에는 홍루紅樓의 인물 55 명의 그림이 있다.

 

이밖에, 또 개기는 유사類似홍루몽에 인물화를 여러 폭 제작했는데, 채색비단에 그린 홍루의 인물화가 특히 진귀하다. 조기早期에 목각에 섬세하게 그린 화상삽화畵像揷畵 외에, 얼마 뒤에 출현한 석인본石印本 홍루몽도 삽화가 배치되어 있다. 예를 들면 광서光緖 8(1882)에 인쇄된 왕지王墀증각홍루몽도영增刻紅樓夢圖咏에는 홍루의 인물 120 폭이 들어 있다.

 

석인石印(석판인쇄)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홍루몽의 삽화도 단순한 인물을 섬세하게 그리는 데서 발전하여 전통장회소설傳統章回小說 삽화의 방법 정절삽화情節揷畵를 계승했다. 가장 이른 홍루몽 정절삽화는 대체로 4 가지의 체계로 나눌 수 있는데, 증평보도석두기增評補圖石頭記, 증평보상전도금옥연增評補像全圖金玉緣, 증평회도대관쇄록增評繪圖大觀瑣錄, 수상전도금옥연綉像全圖金玉緣으로 대표하여 나눈다.

 

그 중에서 광서 10(1884)에 상해동문서국上海同文書局에서 석인한 증평보상전도금옥연은 권수卷首에 수상綉像 120 폭이 있고, 매 회마다 회앞에 또 다른 회목화回目畵 2 폭이 있다. 광서 연간에 상해광백송재上海廣百宋齋가 연인鉛印(활판인쇄)증평보도석두기增評補圖石頭記에 삽화가 가장 많은데, 모두 240 폭이나 된다.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개기改琦와 동시대의 화가 왕척재王惕齋가 그린 수회手繪 홍루몽분본채화粉本彩畵 12 폭인데, 이 그림들은 아름답고 세밀하게 정제하여 대단히 치밀하게 안배했다. 청나라 가경嘉慶 연간에 태어난 그림의 대가 손온孫溫은 채색화를 대형大型의 견본絹本(서화書畵를 그리는 데 쓰는 비단)에 전본全本 홍루몽화책畵冊 24 230 폭을 그렸는데, 그 제도製圖의 구상構想에 빈틈이 없이 줄거리가 연관連貫되어 있고, 필법筆法이 섬세하고, 채색이 화려하고, 인물의 형상形象이 대단히 생동生動하다. 왕척재와 손온의 홍루몽회화繪畵 작품은 모두 흔하지 않은 채색화의 정품精品이다.

 

연화年畵(설날에 실내에 붙이는 그림) 역시 홍루회화紅樓繪畵 작품의 중요한 제재題材인데, 홍루몽연화는 일찍이 청나라 가경嘉慶과 도광道光 연간에 출현했다. 도광 연간에 천진天津 양류청楊柳靑홍루몽목각연화木刻年畵를 대량으로 간행했다. 그밖에 도화오桃花嵨, 양가부楊家埠 및 사천성四川省 면죽綿竹 등지에서도 약간의 홍루몽목각연화를 인쇄했다.

 

신중국新中國이 성립된 뒤, 홍루몽의 열독閱讀과 연구를 중시하게 됨에 따라 홍루몽에 삽화하는 일은 더욱 많이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상해삼민도서출판공사上海三民圖書出版公司에서는 유명한 문학가들과 화가들을 조직하여 홍루몽 계열系列의 연환화連環畵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런 연환화는 나중에 또 상해인민미술출판사에서 거듭 간행했다. 당시의 저명한 화가 진소매陳少梅도 부채()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와 홍루인물을 그렸다. 유명한 화가 정십발程十發 선생도 홍루몽을 위해 삽화를 제작했다.

 

1980년 이래로 홍루몽의 삽화 작업은 더욱 장족長足의 진전을 이루었다.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는 많은 홍학전문가紅學專門家가 교정한 홍루몽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유단택劉旦宅 선생이 삽화 제작을 맡아서 했고, 외교출판사外交出版社가 출판한 3 권의 영역본英譯本 홍루몽즉 대돈방戴敦邦 선생이 전문적으로 삽화를 제작했는데, 이와 동시에 상해인민미술출판사는 또 인물화 전문가를 조직하여 다시금 모두 16 으로 된 홍루몽연환화連環畵 한 세트를 제작했다.

 

근래에 들어 홍루화紅樓畵의 수량은 비록 감소하기는 했어도, 그 열기가 감퇴한 것은 아닌데, 게다가 화풍畵風도 날로 더욱 정교해지고 아름다운데, 화가와 작품명을 예를 들어 본다.

 

왕건王健홍루몽군방도紅樓夢群芳圖

동가옥董可玉홍루백미도紅樓百美圖

이상李湘홍루몽인물전도紅樓夢人物全圖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

진성평陳星平홍루몽화권紅樓夢畵卷

조성위趙成偉홍루인물紅樓人物

왕미방王美芳과 조국경趙國經십이금채十二金釵

원생중袁生中대옥黛玉, 보채寶釵보금심매寶琴尋梅

장혜빈張惠斌대옥령향黛玉怜香

이명李鳴석춘작화惜春作畵

풍기용馮其庸홍루금채紅樓金釵

백백화白伯驊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

조설풍曹雪楓이 그린 왕희봉王熙鳳

초군패崔君沛홍루몽인물紅樓夢人物

엽웅葉雄홍루몽인물화보紅樓夢人物畵譜

위세요韋世堯십이채도十二釵圖

하준조何俊朝보옥화십이금채寶玉和十二金釵등등이 있다.

 

특히 홍루몽인물화책紅樓夢人物畵冊을 그린 황세붕黃世鵬3년의 시간을 들여 길이가 70m나 되는 홍루몽인물군방도紅樓夢人物群芳圖를 제작했는데, 홍루인물을 120 명이나 그렸다.

 

 

홍루몽 지은이 조설근

200년 동안에 이 위대한 문학작품 홍루몽은 대대로 화가들에게 무궁무진하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했는데, 그들이 창작해낸 정교하게 아름다운 홍루화紅樓畵는 오히려 홍루몽에게 가장 생동적인 해독解讀과 설명을 제공해주었다. 오직 홍루몽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스스로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할 지라도 홍루화紅樓畵를 그리는 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홍루몽에 나오는 명언

삼생석상三生石上(전생前生의 인연因緣이 있다)

 

[명언이 나오는 홍루몽紅樓夢본문]

那甄寶玉素來也知賈寶玉的爲人,今日一見,果然不差,‘只是可與我共學,不可與你適道.他旣和我同名同貌,也是三生石上的舊精魂了.旣我略知了些道理,怎麽不知他講講.但是初見,尙不知他的心與我同不同,只好緩緩的來.’(第一百一十五回)

 

[해석문]

진보옥甄寶玉도 본래부터 가보옥의 사람됨에 대해 들어왔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과연 듣던 바와 별 차이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다만 나와 함께 공부는 할 수 있겠지만, 저 사람과 함께 도를 구할 수는 없겠다. 그가 나와 같은 이름인데다가, 생김새도 같으니, 삼생석三生石 상에 있는 정령인가 보다. 내가 약간이나마 도리道理를 깨우쳤으니, 어찌 그에게 얘기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초면인지라, 그의 마음이 나와 같은지를 아직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기회를 보기로 하자.’ (115)

 

[명언고사]

가보옥賈寶玉은 진보옥甄寶玉을 보고나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가환가환과 가란가란도 같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오래전부터 존함은 많이 들었지만,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오늘에야 만났는데, 정말로 적선謫仙(인간 세계에 쫒겨 내려온 선인仙人)과 같은 인물이십니다라며 극도로 칭찬했다.

 

진보옥甄寶玉도 본래부터 가보옥의 사람됨에 대해 들어왔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과연 듣던 바와 별 차이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다만 나와 함께 공부는 할 수 있겠지만, 저 사람과 함께 도를 구할 수는 없겠다. 그가 나와 같은 이름인데다가, 생김새도 같으니, 삼생석三生石 상에 있는 정령인가 보다. 내가 약간이나마 도리道理를 깨우쳤으니, 어찌 그에게 얘기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초면인지라, 그의 마음이 나와 같은지를 아직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기회를 보기로 하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곧 이렇게 말했다.

 

세형世兄(대대로 교분이 있는 사람끼리의 상대방 아이들에 대한 호칭)의 재명才名(재학才學으로 얻은 명예)은 저는 오래전부터 들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세형은 수만 명의 사람 중에서 뽑힌 가장 깨끗하고 제일 우아한 사람입니다만, 저는 너무나 평범하고 포부도 없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 황송하게도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니, 보옥이라는 두 글자를 더럽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가보옥은 그 말을 듣자 겸손하게 말했다.

 

세형의 넘치는 칭찬을 들으니 실제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대단히 못나고 우매한 존재라서 그저 잡석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감히 세형의 고상하고 깨끗한 품격에 비할 수 있으며, 보옥이란 두 글자로 불릴 수가 있겠습니까!”

 

홍루몽이야기

조설근曹雪芹 집안 백년 흥망성쇠의 궤적軌迹

 

소설홍루몽紅樓夢의 작자 조설근曹雪芹(1724-`764)은 이름이 점, 호는 설근雪芹, 근포芹圃, 근계芹溪, 몽완夢阮이다.

 

그의 조상은 명나라 말 전에는 지금의 요녕성遙寧省 철령鐵岭 서남쪽 교외 요보대신하촌腰堡大汛河村 일대에 살았다. 노이합적奴爾哈赤의 후금後金 군대가 영토를 닿는 대로 집어삼킬 때, 조설근의 원조遠祖(고조高祖 이전의 먼 조상) 조석원曹錫遠이 후금의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다이곤多爾袞의 가노家奴가 되었는데, 정백기正白旗 포의布衣(포의는 즉 만주어의 가노家奴인데 포의아합布衣阿哈의 준말)에 속했다.

 

왕조는 나라를 건립한 뒤, “내무부內務府를 설립하여 황제의 재산財産, 음식飮食 등 각종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과 여러 가지 물품을 책임지게 했는데, 조가曹家는 내무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조석원의 아들 조진언曹振彦은 군공軍功을 세워, 관직이 양절도전운염사사염법도兩浙都轉運鹽使司鹽法道까지 이르렀다. 조진언의 아들 조새曹璽와 조새의 맏아들 조인曹寅으로부터 조인의 맏아들 조옹曹顒과 조카 조부曹頫3 대의 4 사람이 강녕직조江寧織造 직을 승계했다.

 

직조의 직무는 주로 황제를 위해 제조制造를 관리하고, 궁정용품의 구매를 담당했는데, 그러나 이외에도 황제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까지도 담임했다. 조인은 늘 강희황제에게 남방南方 각 방면의 정황을 비밀 상소로 올렸는데, 정치, 경제, 문화, 사상, 치안, 민정民情 등등이 포함되었다.

 

조씨 집안이 몇 대 째 이 직무를 담당한 것은 그들과 황제 간에 일종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표명한다. 조새의 아내 손씨는 강희康熙의 보모保姆, 강희황제가 남순南巡할 때 강녕직조부江寧織造府 안에서 손씨를 접견한 적이 있는데, 황제는 그녀를 오가노인吾家老人”(우리집 어른)이라고 불렀다.

 

조설근의 조부 조인은 어렸을 때 강희의 글동무를 했고, 그 후에 어전시위御前侍衛를 담임했다. 조인은 강희에게 상소를 올릴 때 자칭 신계포의하천臣系布衣下賤이라고 했는데, 조씨 집안이 지닌 일종의 특수한 지위를 말해주고 있다. 황제에게는 노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반사람에게는 즉 지극히 혁혁한 높은 관료官僚, 최고통치층에 속한 성원成員인 것이다.

 

옹정황제雍正皇帝가 제위를 계승한 뒤에, 조씨네는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옹정 5(1727) 말과 6(1728) 초에 조씨 집안은 직조織造에서 일하는 하급관리의 역참 강탈과 공금의 부채 등의 죄로 가산을 차압하라는 교지를 받아, 조씨 집안은 가호加號”(죄인에게 칼을 씌워 대중에게 보이다)를 당하고, 조인의 미망인과 손아랫사람 등 가족이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반환해준 재물에 의지하여 숭문문崇文門 밖에 있는 작은 가옥에서 생활했는데, 조설근 집안은 이때부터 쇠락했다.

 

가족이 이러한 변천을 겪은 조설근은 이 때문에 귀족가문의 각종 암흑暗黑과 심각한 죄악을 절실하게 체험했는데, 이것은 그가 홍루몽을 창작하는데 주요한 생활 기초가 되었다.

 

훌륭한 문학적 교양을 구비한 조인은 장서藏書가 대단히 풍부하여, 당시 장서가藏書家이자 각서가刻書家로 이름났다. 시사詩詞를 잘 짓고, 또 희곡戱曲도 잘 지었는데, 련정시초楝亭詩抄, 련정사초楝亭詞抄, 련정문초楝亭文抄등의 저작이 있다.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전당시全唐詩패문운부佩文韻府의 판각版閣을 주관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저명한 시인들과 작가, 예를 들면 시윤장施閏章, 진유숭陳維崧, 우동尤侗, 주이존朱彛尊, 홍이洪異 등과 교제했다. 가정에 이러한 문화적인 전통은 틀림없이 조설근에게 어려서부터 좋은 문화적 교양과 예술적 훈도薰陶를 받게 했을 것이다. 그가 홍루몽에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비범한 예술적 자질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큰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듯이조가가 최후에 몰락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조씨 집안은 강희황제에게 총애를 받아서, 한때 혁혁하고 의기양양하게 번영했지만, 조씨네는 또 강희의 4 번의 남순南巡 때문에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어, 옹정이 등극한 뒤에 철저하게 적자를 계산하면서 치명상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씨 집안은 지극히 번성했을 때에 철저한 몰락의 화근이 이미 매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

 

조인은 그 당시에 이런 엄중한 국면에 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번영에서 바야흐로 위험한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인은 평소에 樹倒猢猻散수도호손산(나무가 넘어지면 원숭이들은 흩어진다)라고 불경에 있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정말로 강희康熙라는 큰 나무가 세상을 떠나자, 조설근의 집안은 그에 따라서 몰락하고 말았다.

 

조설근의 선조 조석원曹錫遠은 원래 명대明代에 료양遼陽에 주둔한 군관軍官으로, 노이합적奴爾哈赤이 료양을 공격하여 함락했을 때, 포로가 되었다.

 

조진언曹振彦은 처음에는 동양성佟養性의 부하였다가, 동양성이 죽은 뒤에 또 다이곤多爾袞의 수하가 되어 정백기正白旗에 속하게 되었다. 나중에 문관文官 직을 담임하기 시작했다. 정백기가 내무부內務府에 통합되어, 조씨 집안은 황실皇室에 접근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바로 첫 번째로 조씨 집안에 다가온 좋은 기회가 였다.

 

두 번째로 조씨 집안에 온 좋은 기회는, 조새曹璽의 아내 손씨가 강희康熙의 유모乳母로 선정된 것이다. 조씨 집안의 며느리 손씨가 강희의 유모였기 때문에 조새, 조인曹寅 부자父子는 강희의 측근이 될 수 있었고, 강희는 즉위한 뒤에 조새를 강녕직조江寧織造로 선발하여 임용했다.

 

세 번째로 조씨 집안의 좋은 기회가 온 것은, 강녕직조로 있던 조새가 죽은 뒤에 조인曹寅이 계속해서 그 직분을 맡은 일이다. 만약에 조인이 이어서 강녕직조를 담임하지 않았더라면, 조씨 집안의 출세와 영달은 그렇게 빠르게 벼락출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희황제는 남순南巡할 때 4 번이나 강녕직조부江寧織造府에 주필駐蹕(임금이 행행行幸하는 도중에 머무르거나 숙박하다)했는데, 조인은 어가를 맞는 큰 행사를 4 번이나 맡아, 이때가 조씨 집안이 지극히 왕성하게 번창한 시기였다. 그러나 또한 조씨 집안은 이때부터 거액의 적자를 짊어지게 되었고 그 후 붕괴하게 되는 운명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강희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옹정황제雍正皇帝가 즉위했다. 옹정 5년 연말에 역참안驛站案의 소요騷擾로 직조織造의 휴공안虧空案이 야기해서, 조씨 집안은 6년 초에 가산을 차압당하고, 북경北京으로 소환되어 조씨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소설 홍루몽紅樓夢을 창작한 조설근曹雪芹은 조모祖母를 따라 북경의 숭문문崇文門 밖 산시蒜市 어귀에 거주했다가, 나중에는 서쪽 교외의 서산西山 황엽촌黃葉村에서생활하며 작품홍루몽을 창작했다. 그러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조설근은 건륭乾隆 27년 임오년壬午年 섣달 그믐날에 세상을 떠났다.

 

소설 홍루몽속에는 조씨 집안의 역사를 은연중 내포한 두 단락이 있다:

 

첫째 단락은 제 13회에서 진가경秦可卿이 봉저鳳姐(왕희봉王熙鳳)의 꿈에 나타난 장면이다.

 

你如何連兩句俗語也不曉得,常言月滿則虧,水滿則溢’;又道是登高必跌重’.如今我們家赫赫揚揚,已將百載,一日倘或樂極悲生,若應了那句樹倒猢猻散的俗語,豈不虛称了一世的詩書舊族了!” (13)

(아주머니는 어찌하여 세상에 흔한 속담 몇 마디도 모르신단 말예요? ‘달도 차면 기울고, 물도 차면 넘친다라는 말이 있고,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떨어질 때 더욱 아프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 우리 집안이 혁혁하게 세상에 이름이 난 지가 이미 백년이 되어가는데, 어느 날인가 만약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슬픈 날이 오게 된다라는 말처럼 되거나, 혹은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도 다 흩어지고 만다라는 속담처럼 되면 어쩌실래요? 그야말로 지나간 한 때를 풍미하던 명문가문이었다는 게 다 헛된 말이 되고 말지 않겠어요!)

 

천명天命 6년에 조석원曹錫遠, 조진언曹振彦이 후금後金에 귀순한 때로부터 옹정 6년에 몰락하기까지의 기간은 모두 108년 동안이다. 만약 순치順治 원년에서 조씨 집안의 쇠락까지를 계산하면 85년이 된다. 조설근은 조부 조인인 자주 하던 말 樹倒猢猻散수도호손산을 작품 첫부분에 표현했다.

 

두 번째로 조씨 집안의 역사를 은연중에 보여 준 것은 제 7회에서 하인 초대焦大 영감이 술주정하는 장면이다.

 

尤氏嘆道:“你難道不知這焦大的?連老爺都不理他的,你珍大哥哥也不理他.只因他從小兒跟着太爺們出過三四回兵,從死人堆里把太爺背了出來,得了命,自己挨着餓却偸了東西來給主子吃.....” (7)

(우씨가 탄식하며 말했다. “설마 저 초대 영감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버님조차도 그 영감을 뭐라고 하지 못하고, 가진 나리도 그를 상대하지 않는 걸. 저 영감은 어려서부터 증조부님들을 따라서 서너 번이나 전쟁에 나갔는데, 시체 더미 속에서 증조부를 등에 업고 빠져 나와서 목숨을 구해드렸대. 자기 자신은 굶으면서도 먹을 것을 훔쳐서 주인에게 드렸다고 해. .....”)

 

조씨 집안의 조상은 본래 무관武官 직에 있으면서 군공軍功을 세워 집안을 일으켰다. 그래서 술에 취해서 욕하는 초대를 통해서 조씨 집안의 예전의 역사를 은연중에 보여준 것이다. [출처]|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