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窓---名文雅趣

오뒷세우스의 연인들

一字師 2024. 3. 21.
반응형

오뒷세우스의 연인들

 

커뮤니티 > 사상노트/고전 다시보기 > [안재원 노트] 오뒷세우스의 연인들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

www.aporia.co.kr

 

글쓴이 : 아포리아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부교수)

 

1. 방황하는 아무개! 다름 아닌 오뒷세우스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아무개”라는 이름은 오뒷세우스가 자신을 폴뤼페모스에게 “아무도 아닌 자”를 뜻하는 “우데이스(oudeis)”로 부르는 데에서 따왔다. 사실, <오뒷세이아> 작품에서 그는 그야말로 “별 것 아닌 존재”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그려진다. 오뒷세우스는 <오뒷세이아>의 시작부터 아무개로 등장한다. 여신 칼립소에게 오뒷세우스는 함께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그저 그런 한마디로 잉여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칼립소의 오귀기아를 떠나 망망대해를 떠도는 오뒷세우스, 바다라는 자연의 힘 앞에서 던져진 오뒷세우스, 그는 그야말로 별 것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 저리 쓸려 다닐 수 밖에 없는, 파도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존재가 바로 오뒷세우스였다. 이런 의미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연의 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HOMO)’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던 셈이다.

 

오뒷세우스는 원래“미움 받는 자”를 뜻한다. 사실, 자연이 인간을 그리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을 듯싶다. 어찌되었든, 오뒷세우스가 아무개로 행세해야 하는 사정은 고향 이타카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바라던 고향 땅에 도착했건만, 일단 그를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물론, 정말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르고스(Argos, 17권 292행)라는 개가 유일하게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이 개마저 없었다면 참으로 허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오뒷세우스는! 아들도, 부인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기에. 아닌 게 아니라, 20년 동안 밖으로 떠돌다 온 사람을 단박에 알아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고향으로, 또한 아무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집으로 오뒷세우스가 굳이 숱한 고난을 뚫고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가 돌아가야만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귀향길에서 오뒷세우스를 가장 괴롭힌 존재는 자연의 힘으로 표상되는 포세이돈 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힘으로 괴롭히는 방해자보다도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막는 더 치명적인 내적인 유혹자가 있었는데,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 유혹자가 바로 세이렌 여신이다. 이 여신에 대한 노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다. 세이렌은 <오뒷세이아> 제12권, 154행-207행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세이렌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남자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소개된다. 오뒷세우스가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사건을, 호메로스는 그가 겪는 여러 모험 가운데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자 가장 치명적인 유혹으로 묘사한다. 다음은 세이렌이 오뒷세우스 일행을 유혹하는 노래다.

 

자, 이리 오세요, 명성이 자자한 오뒷세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의

위대한 영광이여! 이곳에 배를 세우고 우리 두 자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우리를 지나 간 남자들은 아직 아무도 없지요.

일단 우리의 노래에 흠뻑 빠질 것이고, 많은 사실들을 배우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우리는 넓은 트로이야에서 아르고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이 신들의 뜻에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을 잘 알고 있고,

풍성한 먹거리를 주는 땅 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정통하지요.

(제12권 184-191행)

 

세이렌이 오뒷세우스를 유혹하는 대목이다. 직접 화법으로 말을 건네는 유일한 장면이다. 외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유혹적이지 않는 노래로 들릴 수도 있다. 물론 나의 번역 탓일 것이다. 분명, 목소리의 달콤함에 유혹의 힘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조금 뜯어 보어야 하는 단어가 멜리게륀(meligeryn)이다. “달콤한 목소리” 정도로 옮길 수 있다. 옮김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원래 단어는 “달콤함”을 뜻하는 형용사 멜리(meli)와 “이야기”를 뜻하는 명사 게뤼스(gerys)가 합쳐진 복합어인데, 게뤼스(gerys)는 동사 gerio에서 파생되었다. 어원적으로는 라틴어 garrio와 연결된다. garrio는 “재잘대다, 수다 떨다, 이야기를 엮다”를 뜻한다.

 

여기에서 세이렌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달콤함의 정체가 해명된다 하겠다. 물론, 세이렌의 목소리 자체가 감미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달콤한 것은 이야기 자체일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이어지는 구문이다.“일단 우리의 노래에 흠뻑 빠질 것이고, 많은 사실들을 배우고 나서/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all ho ge terpsamenos neitai kai pleiona eidos).” 인용에서 “흠뻑 빠진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terpsamenos이다. 그런데, 그리스어 terpo는 우리 말에 “물릴 정도로 먹고 마시다”, 혹은 “실컷 즐긴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뭔가를 취하다”에 해당하는 동사이다.

 

물론 소리 자체에 실컷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뒷세우스와 그의 일행이 소리 자체의 달콤함에 빠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많은 사실들을 배우고 나서” 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노래를 통해서 “많은 사실들을 배워서 알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나는 물리적인 감미로움 만으로는 오뒷세우스를 유혹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육체적인 쾌락과 관련해서 오뒷세우스만큼 달콤함을 맛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신과 같은 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칼립소와의 동거를 거부하고, 오뒷세우스가 달랑 뗏목 하나에 의지해서 고향으로 향하게 된 것도 실은 물리적인 쾌락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무엇 때문이었기에. 따라서 오뒷세우스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무엇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신적인 무엇이 함께 요청된다. 아마도 그 정신적인 무엇이“이야기”이다. 요컨대, 오뒷세우스는 칼립소가 제안하는 신(神)적인 조건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즉 칼립소가 늙지도 않으며, 불사의 삶을 누리면서 원하는 모든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제안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말이다.

 

3. 학자들은 대체로 그 거절의 이유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nostalgia) 때문이라 해명한다. 그러나 이 해명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칼립소의 제안이 신적인 것임에도 뭔가 2% 부족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앞에서 인용한 세이렌과의 조우다. 칼립소도 세이렌에 못지 않은 미녀이고 아니 더 매혹적이다. 그런데, 심지어 칼립소의 달콤한 제안마저 거부했던 오뒷세우스가 세이렌을 만나서는 몸부림을 친다. 단순하게 감각적인 즐거움이었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칼립소에게는 없는 뭔가를 세이렌이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단순하게 감각적인 쾌락이었다면, 오뒷세우스는 이미 나름 단련과 훈련을 겪은 사내이기에 그것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오뒷세우스와 나우시카의 만남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오뒷세우스가 먼저 나서서 나우시카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미리 선을 그어버린다. 어찌 보면,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막음에 있어서 나우시카가 칼립소나 세이렌보다도 강력한 존재일 수도 있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이어지는 해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남에서는 <오뒷세이야>의 지은이가 직접 개입해서 이들의 인연을 사전에 막아 버린다. 나우시카가 오뒷세우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아예 처음부터 시인은 그를 거의 성인 군자로 설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막는 힘의 세기와 관련해서 인간인 나우시카가 여신들인 세이렌이나 칼립소보다 더 강력한 이유는 실은 공통 경험에 기초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이야기”의 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자. 이와 관련해서 오뒷세우스는 칼립소와의 10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 둘 만의 독특한 혹은 고유한 공통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둘 만이 공유하는 그런 고유한 이야기가 작품에 언급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런데, 인간인 나우시카와의 만남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연인들만의 고유 공통 경험을 가질 수 있는 인연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오뒷세이아>를 노래한 가객은 아예 처음부터 인연의 실 줄을 잘라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세이렌과의 조우다. 단순한 세이렌이 유혹하는 무기가 육체적인 쾌락이었다면, 오뒷세우스가 얼마든지 잘 견디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오뒷세우스는 몸부림을 친다. 따라서 세이렌이 칼립소 보다 더 강력한 유혹의 무기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유혹의 무기는 무엇일까?

 

4. 한마디로, 칼립소에게는 없지만 세이렌에게만 있는 무기가“이야기”의 힘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이렌은 이렇게 유혹한다. “우리는 넓은 트로이야에서 아르고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이 신들의 뜻에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을 잘 알고 있고, /풍성한 먹거리를 주는 땅 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정통하지요.”(<오뒷세이아> 제12권 189-191행) 오뒷세우스를, 아니 인간을 유혹하는 진짜 강력한 힘이 실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모든 고통들”을 노래한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함 만으로는 인간을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립소의 제안이 거절되었던 이유도 실은, 그녀의 제안에는 달콤함만 있지, 고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에는“공감(Synpatheia)”이 함께 한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세이렌의 유혹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칼립소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사랑하는 오뒷세우스를 고통의 바다로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말렸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그녀는 알고는 있었지만, 오뒷세우스의 고통을 공감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공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경험일 수도 있다. 사실, 이해와 공감은 크게 다르다. 이 대목에서, 칼립소에게는 없지만 세이렌에게 있는 힘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 능력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아마도 오뒷세우스가 몸부림을 치는 이유가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세이렌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의 실체는 무엇일까? 물론, 그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은 밧줄의 힘 덕분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힘이 있다. 그것은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가 오뒷세우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오뒷세우스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대목이 <오뒷세이아>의 말미인 제23권에 나온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조우 장면이 그것이다. 페넬로페는 오뒷세우스가 진짜 오뒷세우스인지를 마지막으로 시험한다. 이를 위해서 그녀는 오뒷세우스를 슬쩍 떠보기 위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침상의 비밀을 이용한다. 다음과 같다.

 

여보, 당신은 정말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려.

누가 내 침상을 다른 데로 옮겼단 말이오? 아무리 솜씨 좋은 자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요. 신이 친히 오신다면 몰라도.

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 쉽게 다른 데로 옮길 수 있으니까요. (중략)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제시하는 침상의 특징이요. (중략)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과 심장이 풀렸으니.

(<오뒷세이야> 제23권, 183행-205행)

 

물론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가기 위해 호메로스가 마지막 반전으로 설정한 장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의 역할은 극적 반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장면은 <오뒷세이아> 작품의 이해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비밀을 담고 있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오뒷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고, 귀향의 길을 선택하게 만든 힘의 비밀이 풀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만이 알고 있는 둘만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물건이 침상이다. 이 침상에 대한 비밀은 오직 둘만이 알고 있다. 그런데, 이를테면, 이런 종류의 사랑에 담긴 비밀은 오뒷세우스와 칼립소 사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또한 오뒷세우스와 세이렌 사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대목에서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사랑이 오뒷세우스가 칼립소의 그것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전자에는 사랑에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고, 후자는 에로스는 있지만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공감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렌의 노래에는 에로스도 있고 사랑도 있고, 공감도 있다. 그래서 치명적이라 하겠다. 하지만, 세이렌의 노래에는 듣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 공감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이기에, 즉 자신의 고유의 경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장치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그 경험을 인증해 줄 어떤 증인이 있어 주어야 한다. 오뒷세우스를 아무도 아닌 아무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로 알아보고 알아주는 어떤 증인이 말이다. 이 어떤 증인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로 호메로스는 페넬로페를 추천한다. 어쩌면 이것이 오뒷세우스가 갖은 고난을 뚫고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을 알아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집이었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잉여 존재가 아닌 자신을 꼭 있어야 할 존재로 알아주는 그 곳이 집이었기에.

 

5. 오뒷세우스가 자신과 전우들과 함께 나눈 사랑이 필리아(philia, 전우애)이고 여신들과 나눈 사랑이 에로스(eros, 성애)라면, 페넬로페와의 사랑은 무엇으로 이름 붙여야 할까? 적어도 그리스어에는 이런 종류의 사랑을 부르는 단어는 없다. 그렇다고 아가페도 아니다. 우리말에 “정(情)”에 제일 가까운 무엇일 텐데, 그렇다고 딱히 정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내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이,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 오뒷세우스 자신과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정체성을 인증해줄 수 있는 겪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녀가 만나 가정을 만들고 사는 행위에는 둘 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담겨 있고, 이 비밀을 공통으로 해서 그 둘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진다는 것, 따라서 그 인연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인연의 날줄과 씨줄을 구성하는 한 쪽 실을 만났을 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를 묶어주는 사랑의 성격은 뭔가 남다르다.

 

이 사랑의 성격은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힘이어서 더욱 그러한데, 이 힘은 물론 에로스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에로스적인 관계만으로는 해명이 어렵다. 사랑하는 이들이 공감하는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경험을 기억으로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는 둘 만이 알고 있는 비밀, 즉 공통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 공통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오뒷세우스와 칼립소의 관계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공통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이것이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유인 셈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무엇,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그 증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서양 역사에서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사랑은 단순하게 혈통 계승을 위한 성교 행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체적 탐닉도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것 관계이고, 이 관계에서 만들어진 공통의 기억과 이를 공유하는 이야기로 엮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헬레네의 가정 파괴 사건을 보라. 연애는 있었지만, 파리스의 사랑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호메로스가 헬레네를 단순하게 바람난 애인으로 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에서는 남녀 관계를, 특히 부부 관계를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을 발견해주도록 만드는 장치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 대목에서 호메로스의 전략이 아주 세련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적어도, 오뒷세우스에게 사랑은 정체성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이는 여신들이 아니었고, 페넬로페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부부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더욱 강력한 끈으로 묶고, 또한 부부 관계를 정체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 보게 해주는 새로운 인식이 서양 문학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인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 혹은 가정이라는 생활 공간의 발견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오뒷세이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는 달리, 호메로스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더 큰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베르길리우스의 경우, 일상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중요한 인간 관계들의 뿌리를 부자지간의 관계(pietas)에 두고 있지만, 호메로스는 부부 관계에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어쩌면 호메로스의 부부관계도 전사 사회의 필리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적어도 부부 관계가 에로스를 바탕으로 하는 한에서는, 그 관계만큼 평등함을 요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사 사회의 덕목인 필리아가 실은 평등에 기초한 덕목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트로이 목마가 필리아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오를 유지해야 하고, 진지를 사수해야 할 때, 그러니까 어떤 한 사람이 뛰어남(eris)보다는 조직이 강조되는 최초의 전술이 엿보이는 사건이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다. 중요한 것은 목마에 들어간 그리스 군인들에게 중요한 덕목은 이제 용맹이 아니라 인내다. 목마 안에서 참지 못하고 날뛰면, 목마 안에 들어간 군인 전체가 발각되어서 몰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의 탁월함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조직 전체를 위해서는 용맹보다는 인내가 강조된다. 이런 인내와 관련해서 요청되는 덕목이 필리아다. 곧 전우애이다. 나만 잘라서는 안 된다. 동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전우애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가장 요구되는 중요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평등함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팔랑스(phalanx)”라고 알려진 그리스의 군대 조직을 사례로 제시하고자 한다.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서야 하고, 팔랑스 조직에서는 전체의 조직을 따르기 위해서는 평등함이 필수적이다. 누구 하나 못나서도 안되고, 잘나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 앞에서는 개인의 탁월한 용맹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찌되었든, 그런데, 이런 종류의 작전을 생각해 낸 사람이 실은 오뒷세우스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아마도,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팔랑스의 기원이 실은 트로이 목마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도, 실은 가정이란 공간은, 다시 말해서 부부 관계야말로 한 사람의 탁월함에 의해서 유지되는 조직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오뒷세우스가 나우시카에게 “한마음(homophrosyne)”을 강조하는 것도 여기서 해명이 될 듯하다. 오뒷세우스의 말이다.

 

신들께서 당신이 마음으로 바라는 바를 다 베풀어주시길

남편과 집(oikos)을, 한마음(homophrosyne)도 함께 있도록 해주시길

그 좋은 것,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훌륭한 것은 더 없을 터이니,

남편과 아내 둘이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집을 지킬 때면

적들에게는 큰 괴로움이고 친구들에게는 즐거움이 됩니다.

그 때 그 명성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이 누리는 법입니다.

(제6권 180-185)

 

인용은, 호메로스가 적어도 <오뒷세이아>를 지은이가 부부의 “한마음”을 모든 관계의 기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적어도 <오뒷세우스>의 작가에게는 소위 인간 관계 일반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부부 관계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관계를 규정하는 사랑을 토대로 다른 관계들을 규정하는 윤리-덕목들도 파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적어도 서양 고대 그리스 사회는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금 보충하자면, 전사 사회의 덕목인 필리아는 명예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일리아스>다. 그러나 <오뒷세이아>를 지은이는 명예가 아니라 “실질”을 중시한다. 이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명예는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고 누린다”는 언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적어도 그리스의 인간 관계의 가장 밑바탕에는, 적어도 일상 생활의 기본 바탕에는, 평등을 강조하는 부부간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위계를 강조하는 로마의 관계 규정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서 발견되기에. 물론 오뒷세우스가 부자(父子)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호메로스가 부자 관계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일리아스> 제24권에서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에게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뒷세이아>에서도 마찬가지다.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의 관계를 단적으로 그 사례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자 관계는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처럼 치열하지도 근본적이지도 않다. 단적으로 오뒷세우스가 부부(夫婦) 관계보다 부자 관계를 우선했다면, 그는 제일 먼저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찾아 갔어야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적어도 <오뒷세이아>에서 기본적인 덕목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라 하겠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부터 평화로운 일상으로의 회복을 위해서 적어도 호메로스는 소위 부부 사이의 사랑을 더욱 중요한 덕목으로 놓은 것 같다. 이쯤 되면, 이런 사랑을 이름 붙이는 명칭이 있을 법도 한데, 그것을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이런 부부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기 사용한 단어가 어쩌면 한마음(homophrosyne)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오뒷세이아>는 이런 남녀 간의 에로스를 바탕으로 하지만, 이 에로스에는 둘 만이 알고 있는 공통의 기억과 이 기억을 담고 있는 부부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중요한 점은, 그리스 역사에서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를 공유하려는 욕구가 표출되는 시기인 서정시의 시대가 바로 뒤따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종류의 내밀한 감성과 기억을 공유하려는 욕망에 토대를 둔 노래들이 서정시이기에. 그런데, 전쟁이 아닌 사랑을 주제로 하는, 그런데 그런 사랑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로 노래를 불러주는 유혹자가 여신 세이렌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오뒷세우스의 연인들

 

커뮤니티 > 사상노트/고전 다시보기 > [안재원 노트] 오뒷세우스의 연인들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

www.aporia.co.kr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