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窓---名文雅趣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여러 가지 설(說)

一字師 2024. 3. 25.
반응형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여러 가지 설(說)

好事多磨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재물이든 진급이든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다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서 뜻밖의 난관에 부닥친다. 이럴 때 우리는 좋은 일만 있다가 가끔씩 나쁜 일이 끼어든다는 뜻으로 호사다마라고 말하는 것이다.

 

호사다마란 말의 핵심은 장애를 뜻하는 마(魔)에 있다. 마는 마라(mara)라는 산스크리스트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장애한다’ 또는 ‘죽인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것’ ‘좋은 일을 못하게 하는 것’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마 또는 마구니 마군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마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가장 중요한 마는 바로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를 구성하고 있는 몸뚱이다.

 

실존해 있음으로서 모든 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즐거움 괴로움 탐심을 이루는 번뇌마이다. 세 번째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사마(死魔), 네 번째는 하늘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천자마(天子魔)다. 부처님도 성불하기 전 마군의 총사령관 파순이 이끄는 12군단으로 이루어진 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모든 마를 물리쳐 절대무심의 평온한 마음을 얻기 위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경지다.

 

호사다마의 사회적 어원은 닥쳐온 액운에 대한 자기위안에 대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잘나갈 때 잘하라는 말속에 깃든 의미처럼 매사에 조심하라는 경책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일에 장애가 있다는 말은 결국 모든 일에는 장애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활교훈적인 측면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불교에서 마는 수행에 있어서 갖가지 장애요소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장애요소를 수행자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깨뜨리고 가야할 대상으로 놓는다. 마는 수행을 방해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 〔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이 따른다는 것을 비유한 말〕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일컬으며, 즉,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고, 방해하는 일이 많다는 뜻으로, '호사다방(好事多妨)'이라고도 한다. 그런 홍진(紅塵) 세상에 즐거운 일들도 있지만 영원히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옥에도 티가 있고, 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미중부족美中不足 호사다마)'라고 했다.

 

이야기는 중국 청(淸)나라 때 조설근(曹雪芹)이 쓴 홍루몽(紅樓夢)에서 유래했으며, 또한 중국 금(金)나라 때,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의 '참으로 이른바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다.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좋은 일에는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항상 경계하라는 뜻이다.

 

비슷한 성어로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있으며, '좋은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호몽부장(好夢不長)이라는 말도 있다. 참으로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인데, 원래 좋은 일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런지?

 

같은 '호사다마'의 마를, 우리나라에서는 마귀 마(魔)로, 중국에서는 갈 마(磨)를 쓴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의 기준은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냥 좋아하고 미워하지는 않는다. 좋은 이유가 있고 미운 이유가 있지만, 다만 판단의 기준은 자기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 경전(經典)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좋아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매우 좋은 말이지만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성립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모두 같지 않아서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게 보기도하지만, 그것을 시샘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도 항상 있게 마련이다. 옛날부터 좋은 일에는 꼭 마 가 낀다고 사람들이 느껴 왔기 때문에 이 말을 자주 써 왔는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호사다마'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고사성어와 사자성어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고사성어란 말 그대로 옛 성현들의 말이나 책 또는 어떤 일화에서 생겨난 말을 이르는 것이고, 사자성어는 특별한 유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쓰던 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고사성어라 해서 반드시 4자일 이유는 없다. 예를 들면, 흔히 쓰는 말 중에서, 나이 칠십을 고희(古希)라고 하는데 이 말도 고사성어이다.

 

'고희'는 중국 당(唐)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 마지막 구절에 인생칠십고래회(人生七十古來稀;예로부터 70살은 드물다)에서 유래되어 지금도 칠십을 '고희'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말 70살이 드물었겠지만, 요즘은 평균 수명이 80세(남자79.3,여자85.4)가 넘으니 현실과는 맞지 않지만, 그래도 아무 상관없이 '고희'라는 말을 한다. '호사다마'반대말로 '화(禍)가 오히려 복(福)이 된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있다. 화는 복으로 복도 화로 될 수 있다는 것처럼, 인생이 파도와 같다는 말같이 겸손하게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좋은 일에는 흔히 탈이 끼어들기 쉽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좋은 일에는 흔히 탈이 끼어들기 쉽다는 말이다. 출전은 비파기(琵琶記).

 

비파기는 42척으로 이루어진 장편 희곡으로 중국 남부에서 유행하던 남희(南戱)의 중흥지조(中興之祖)라 할 수 있는 걸작이다. 작자는 원(元)나라 말엽부터 명(明)나라 초엽에 걸쳐 생존하였던 고명(高明)이다. 이 비파기에 誰知好事多魔起風波(호사다마라, 풍파가 일어날 것을 누가 알겠는가)에서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비파기의 내용은 이렇다. “ 채옹(蔡邕)은 조오랑(趙五娘)과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주위사람들의 권유에 못이겨 노부모를 처에게 맡기고 이웃 노인 장태공(張太公)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난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채옹은 어명과 권세에 눌려 상국 우승유(牛僧儒)의 사위가 된다. 한편 조오랑은 남편의 귀가만을 고대하며 힘겨움에도 늙은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한다. 그러나 흉년이 겹쳐 생활이 곤궁해지자 조오랑은 의복을 팔아 얻은 곡식을 시부모에게 드리고 자신은 쌀겨로 연명한다.

 

몰래 숨어서 혼자 좋은 음식을 먹는 줄로만 알고 있던 시모는 쌀겨를 먹고있는 며느리를 보고 한탄이 극하여 기절하여 죽는다. 시부도 역시 얼마 안가서 병사한다. 한편 부귀영화를 누리던 채옹은 고향의 부모와 처를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하려 하나 사기꾼에게 걸려 돈만 편취당하고 고향과의 소식은 영영 두절되고 만다. 머리카락을 잘라 시부모 장례비용으로 충당하려던 조오랑은 장태공의 도움으로 장사를 치르게 된다.

 

시부모 무덤의 봉분을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나르던 조오랑은 산신의 도움을 받아 봉분을 완성한다. 이후 조오랑은 장태공의 권유로 남편을 찾아 서울로 떠난다. 비파로 행효(行孝)의 곡을 타며 걸식으로 신산(辛酸)을 맞보면서 천리길을 헤쳐 서울에 도착한 조오랑은 다행히 남편을 만났고 우상국의 딸과 함께 환향하니 황제도 정려(旌閭)의 표창을 내렸다.”

 

1788년 3월 10일. 이노춘의 처분과 관련하여 임금이 김종수(金鍾秀)를 불러 이르기를 “ 내가 오늘 경을 볼 낯이 없다. 속담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더니 오늘의 일이 어찌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내가 경들을 대하는 도리가 혹 미진해서 그런 것인가. 이는 성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경들이 근년 이래로 사의(邪議)를 강력히 배격한 말이 근거가 있었다. 오늘날 진신(縉紳) 중에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드는 자가 적은데, 경들의 일이 그래도 나라 편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내가 경들에게 위임하여 성공을 바란 이유가 일찍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영상이 아뢴 바는 실로 천만 뜻밖이니 어찌된 일인가. 대개 우상이 대배(大拜)된 뒤로 외면으로 볼 것 같으면 윤득부의 일이 다른 사람의 일과 자못 같은 듯하지만 더욱 그렇지 않음이 있다. 윤득부는 당초의 행위가 우상을 아낀 데 불과하였고, 뒤에 비록 어떤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족히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노춘에 이르러서는 내가 지금까지 통탄하고 있다. 청천백일 원로방지(靑天白日圓쫮方趾) 등의 문자가 어찌 좋지 않은 어구(語句)이겠는가마는 흉적의 입을 한 번 거친 뒤로는 기휘(忌諱)하는 말이 되어 선조(先朝)에 있어서는 장주(章奏) 사이에 감히 이 8자를 쓰지 못했다. 적(賊) 김하재(金夏材)의 소에 있는 시(時) 자의 뜻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시(時) 자는 좋은 글자이다. 시군(時君)의 시도 있고 시중(時中)의 시도 있으니 시의 뜻이 크다. 그런데 시 자를 배척한다면 이는 시대와 배치되는 것이니, 시대와 배치되는 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춘이 하적의 시의(時議)의 시자를 답습해 쓴 것이 불측(不測)하다고 이를 만하였으되, 어리석어서 그렇다고 여겨 깊이 꾸짖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섬으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율적이 또 나왔다. 그때 어찌 노춘에게 가율(加律)하여 일세(一世)를 징계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노여움을 옮기는 데 가까운 듯하기 때문에 참고 견디었던 것인데, 또 오늘의 일을 보게 되었다. …” 하였다.

 

이노춘(李魯春 1752 - ?) 본관은 덕수(德水). 택당 이식(李植)의 후손으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이 일로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3년 만에 풀려나서 대사성, 대사간, 예조참판등을 지냈다. <세종신문4732005/06/27>

반응형

댓글

💲 추천 글